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도시 بوشهر 부셰르 | Busheh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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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부셰르주 | |
면적 | 64km² | |
인구 | 323,504명 (2016년) | |
도시권 인구 | 398,581명 (2016년) | |
인구밀도 | 5,055명/km² |
부셰르 구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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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자: Bushehr페르시아어: بوشهر
이란 서남부 부셰르 주의 주도. 쉬라즈에서 서남쪽으로 150km 떨어진 항구도시이다. 인구는 약 40만명이다. 호르무즈 섬, 반다르아바스 등과 함께 과거 이란의 주요 교역항 중 하나였다. 구도심에는 옛 건물들이 다수 남아있고, 남쪽에는 신시가지가 있는데 둘 사이에 부셰르 공항이 위치한다.
근대에 영국 등 서구권 열강들과 활발히 교류한 덕에 부셰르는 이란 근대화의 선두 주자 역할을 하였다. 예를 들어 이란의 첫번째 근대식 인쇄소가 세워져 이란 최초의 잡지가 유통되었고, 전기 역시 매우 일찍부터 도입되었다. 이란의 첫 유선 통신 역시 부셰르에서 인도와 유럽으로 이어졌다. 한편 부셰르에서 동남쪽으로 170km 떨어진 항구 반다르 시라프에는 지진으로 수몰된 고대 도시 시라프가 있는데, 해저 고고학의 대상지 중 하나이다. 서북쪽으로 50km 떨어진 항구 반다르 리그는 현재까지도 아랍인들의 영향력이 남아있는 문화와 건물로 유명하다.
2. 역사
엘람 시기부터 항구가 있었다. 헬레니즘 시기 셀레우코스 왕조 하에서 페르시아의 안티오키아 (Ἀντιόχεια τῆς Περσίδος)로 불렸고, 안티오코스 3세가 동방 원정 후에 머물기도 하였다. 기원전 170년에 파르티아령이 되었고, 그후 사산 제국 시기에 창건자 아르다시르 1세의 이름을 따서 부크트 아르다시르라 명명되었다. 부크트 아르다시르는 사산 제국의 주요 해군 기지였고, 5세기부터는 남부 이란으로 포교하려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의 주요 거점이었다. 세월이 지나며 부크트 아르다시르는 축약되어 현재의 부세르가 되었다.2.1. 부셰르 토후국
1840년의 부셰르 삽화
한편 13-14세기 걸프 아랍인들이 바다를 건너 부셰르 ~ 반다르아바스 일대로 이주하였다. 그중 하왈라 부족은 부셰르에 정착했는데, 1747년 나디르샤가 사망한 후 혼란기를 틈타 그 족장인 셰이크 나스르 알 마드쿠르가 페르시아인 샤반다르 (총독)를 축출하고 도시를 장악하였다. 1751년 1월 그는 독립을 선포하였고 이스마일 3세가 파견한 징세관들을 감금하였다. 그해 9월 나스르는 바레인을 침공했으나 격퇴되었고, 역으로 11월에 셰이크 아살루가 이끄는 바레인 군이 부셰르를 포위하였다. 다만 후자 역시 함락에 실패하고 후퇴하자 나스르는 재차 바레인을 공격해 점령하였다. (1753년)[1] 나스르는 1737년부터 부셰르에서 교역하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1752년 떠나자 1763년 영국 동인도 회사에게 상관 건설 및 해군 주둔을 허가하였다.
한편 남쪽 카타르의 주바라에는 네즈드 출신 우트바 부족이 있었는데, 1782년 바레인에서 그 일원이 분쟁 끝에 살해된 것으로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란의 잔드 왕조는 명목상 복속해 있던 나스르를 도와 2천 병력을 파견하였고, 그들은 주바라를 공격하였으나 격퇴되었다. (1783년 5월) 그후 주바라의 우트바 부족은 쿠웨이트의 친척들까지 합세하여 바레인을 공격해 점령하였다.[2] 바레인을 상실한 후로도 하왈라 부족은 부셰르를 다스렸는데, 영국-페르시아 전쟁 당시 영국군이 도시를 점령하기도 하였다. (1856년 12월) 그후 카자르 왕조의 지배가 회복되었고, 아랍인들은 다시 아라비아 반도로 돌아갔다. 한편 1915년 독일의 영향력을 상쇄하기 위해 파견된 영국군에게 재차 점령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