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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가족사3. 청년기4. 초기 정치 생활5. 대통령 재임기
5.1. 1기 (2001.01.20. ~ 2005.01.20.)
6. 결과 - 메울 수 없는 삽질의 구덩이7. 퇴임 이후 행보5.1.1. 집권 초기5.1.2. 테러에는 멀뚱멀뚱5.1.3.
테러와의 전쟁 -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5.1.4. 두 번째 전쟁 -
이라크 전쟁5.1.5. 계속되는 외교적 실수와 반미 기류의 확산5.1.6. 오, 신이시여(Oh God). 재선이라니요!
5.2. 2기 (2005.01.20. ~ 2009.01.20.)[clearfix]
1. 개요
미국의 제43대 대통령 조지 W. 부시의 생애를 정리한 문서.2. 가족사
조지 W. 부시와 그의 부모 |
조지 W. 부시 역시 이러한 이유로 코네티컷주에서 가장 큰 도시인 뉴헤이븐에서 태어났는데, 2살 때 텍사스로 옮겼으므로 조지 W. 부시는 텍사스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스스로 더 강한 편이다. 1948년 W. 부시는 텍사스 주 미들랜즈로 이사해 거기서 자랐고 7학년(우리나라의 중학교 1학년)때 텍사스 휴스턴으로 또다시 이사했다.
한편 아버지 부시는 텍사스 주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부시가 27세일때 현역 상원의원의 인기가 저조한 틈을 타 텍사스 주 상원의원에 출마했지만 큰 표차로 낙선했다.[2] 이때 아버지 부시에게 굴욕을 안겨준 것은 다름아닌 1988년 대선에서 대통령 후보 대 부통령 후보로 맞붙게 된 로이드 벤슨. 그럼에도 아버지 부시는 CIA 국장을 거쳐 레이건 행정부의 부통령으로 당선되며 승승장구하게 된다.
3. 청년기
3.1. 대학생 시절
조지 W. 부시는 중학교를 졸업한 후 매사추세츠주에 위치한 기숙학교인 필립스 아카데미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이때 야구에 본격적인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사실 고등학교때는 야구만 했고 놀기만 했지만 아버지 빽으로 예일 대학교에 입학하는데 성공한다.[3] 1964년 조지 W. 부시는 예일 대학교에 입학해 1968년 역사학 학사를 받았으며, 예일 대학교에서 사교성이 좋아 친구도 많고 술도 많이 먹고 여자랑도 잘노는 전형적인 노는 학생으로 지냈다. 고위층 자제만 들어갈 수 있다는 스컬즈 앤 본즈 협회(Skull and Bones Society)의 회원이기도 했다. 그래도 시험은 꼬박 꼬박 잘 봤는지 학점은 평균으로 나왔다.대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잠시 텍사스주의 주방위군으로 복무했다가, 제대하기 직전인 1973년 가을 하버드 대학교 경영대학원에 입학했다. 이 역시 아버지의 도움으로 입학한 것이라는 의심이 많다. 그는 1975년 MBA 학위를 받고 졸업했으며 MBA 학위를 받은 유일한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이때의 조지 W. 부시의 사생활은 그야말로 개막장이었는데, 영화 더 프레지던트에 잘 묘사되어있다. 허구한 날 술을 먹고 여자를 후리고 다녔으며, 코카인과 헤로인 같은 약에도 손을 댔다. 이 때문에 아버지 부시가 걱정을 넘어 한심하게 생각할 정도였다.[4] 1976년,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한 직후 그는 만취한 상태로 운전을 해 메인주 경찰에게 딱지를 떼여 150달러 벌금을 내고 얼마간 면허 정지를 당한 바 있다. 반면 젭 부시는 얌전하고 착실하게 학업을 쌓아 어릴때부터 아버지 부시의 기대를 받았다.
3.2. 논란의 군생활
공군 장교 시절의 부시 |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에는 킬리언 문건 논란(Killian documents controversy)으로 군 병역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기도 했다. 이 문건의 요지는 조지 W. 부시가 주 방위군 복무 시절 무단으로 근무지를 이탈했는데도 아버지의 도움으로 처벌에서 벗어났다는 것이었다. 다만, 이 문건은 진위가 의심되었고 조작된 것으로 드러나 문제를 제기한 존 케리만 욕을 먹었다. 그러나 이런 논란이 제기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많은 미국인들과 미국 정치인들이 조지 W. 부시의 병역 문제를 "약점"이라고 보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아무튼 정리하자면, 주방위군 공군 조종사로 복무한 것도 당시 베트남 전쟁 파병을 피하기 위한 병역비리라는 의혹을 받는 등 부시의 젊은 시절은 그다지 내세울 게 없다. 주방위군 공군 조종사의 임무라고 해봐야 비행기를 타고 몇몇 지역들을 한 바퀴를 도는 것뿐이었고[5] 이 시기엔 수많은 주방위군 육군 및 공군들도 연방군 예비역으로 소집되어 베트남에서 피를 흘린 걸 보면 아버지 빽으로 참전을 피한 병역비리를 저지른 것으로 억울하게 의심받아도 별로 할 말이 없다.
대조적으로 그의 라이벌이었던 존 케리 상원의원이나 앨 고어 부통령은 모두 착실하게 군 복무를 마친데다, 심지어 존 케리는 무공훈장을 휩쓴 전쟁 영웅이었기에 더욱 욕을 먹었다.
3.3. 결혼과 갱생
조지 W. 부시는 캐서린 리 울프먼(Cathryn Lee Wolfman)이라는 약혼녀를 두었는데 잘 풀리지 않았고 친구로 지내기만 약속하고 파혼했다. 1977년, 조지 W. 부시는 로라 웰치를 바베큐 파티에서 친구의 소개로 만났다. 로라 웰치는 당시 진보 성향이었고 유진 매카시를 지지할 정도로 반전좌파 성향이었지만, 성격이 부시와 잘 맞았던 덕에 로라 웰치와 조지 W. 부시는 금세 사랑에 빠졌다. 3개월만에 두명은 약혼했고 11월에 결혼에도 골인했다.로라 부시와 조지 W. 부시의 결혼은 W. 부시의 인생에 있어 전환점이 되었다. 로라 부시는 남편과 달리 도서관 사서로 일하던 인텔리 여성이었고, 그런만큼 조지 W. 부시의 사생활이 문제가 있음을 남편에게 인지시키고 남편을 강력하게 갱생시켰다. 조지 W. 부시가 결정적으로 변화하게 된 것은 1986년이었다. 1986년 9월 4일 밤, 조지 W. 부시는 술을 잔뜩 마시고 쓰러져 의식을 잃었는데, 이때 조지 W. 부시는 스스로 생명에 위기감을 느끼고 술을 끊어야겠다는 매우 강력한 의지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다행히 그의 곁에는 로라 부시, 목사 빌리 그레이엄, 정치컨설턴트 칼 로브 등이 있었고 그들은 조지 W. 부시가 알코올 중독과 방탕한 사생활에서 벗어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조지 W. 부시는 매일 수킬로미터씩 달리고 재활 치료도 받으며 사생활을 그야말로 뜯어 고쳤다.
목사 빌리 그레이엄은 조지 W. 부시가 갱생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방황하던 부시를 개인적으로 위로해주고 기도해주는 등 개인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조지 W. 부시는 그렇게 거듭난 기독교인(Born-again Christian)이 되었다. 이는 후일 조지 W. 부시의 선거에 아주 유리하게 작용했다. 어렸을때 실수를 했지만 "부르심"을 받고 갱생해 독실한 기독교신자가 되었다는 것이 보수적인 텍사스의 정서에 잘 들어 맞은 것이다.
실제로 1986년 이후 조지 W. 부시는 아주 딴 사람이 되어서, 이라크 전쟁 같은 몇몇 실책과 별개로 개인적인 성품은 아주 도덕적이고 깨끗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빌 클린턴이 겪은 숟한 여자 문제도 없고 입에 술도 안 대서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도덕적인 사람으로 종종 꼽히곤 한다.
4. 초기 정치 생활
4.1. 1978년 하원의원 선거 출마와 칼 로브와의 만남
1978년, 조지 H. 매헌(George H. Mahon) 하원의원이 의정 활동을 내려놓고 다가오는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이때가 다름 아닌 조지 W. 부시의 생일이었고, 부시는 이를 일종의 계기라고 생각해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로 작정한다. 그는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이후 아버지의 석유 사업을 물려받은 것 외에는 아무 커리어도 없었지만 부시라는 가문의 이름만으로 짐 리스(Jim Reese)를 예비선거에서 물리치고 공화당의 텍사스 주 제19번 하원의원 선거구의 후보로 공천을 받는다.그러나 조지 W. 부시의 예상대로 선거가 흘러가지 않았다. 19번 선거구는 민주당이 매우 우세한 선거구였고, 민주당의 후보 켄트 핸스(Kent Hance)는 조지 W. 부시가 아무 경력도 없이 아버지 이름만 믿고 출마했으며 여자와 술, 마약을 후린다며 네거티브를 시전했다.
이 때 조지 W. 부시의 인생에 있던 중요한 변화는 칼 로브와의 만남이다. 칼 로브는 학력이 변변찮은 정치 컨설턴트였는데 리 애트워터와의 친분으로 조지 H. W. 부시와 연이 닿아 그의 첫 선거 컨설팅 상대로 조지 W. 부시를 맞이하게 된다. 조지 W. 부시와 칼 로브는 나이 차이도 4살밖에 안나서 둘은 금세 친구가 되었다. 칼 로브는 네거티브 선거전의 달인이었는데, 이름 빼면 내세울게 아무것도 없었던 조지 W. 부시가 그나마 47%라도 얻어 선전할 수 있었던 것이 칼 로브의 선거 전략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아무튼 칼 로브는 이후 지금까지도 부시와 친하게 지내며 그의 텍사스 주지사 선거와 대통령 선거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4.2. 텍사스 레인저스 구단주
1988년 대선에서 조지 W. 부시와 친했던 두 컨설턴트였던 리 애트워터와 칼 로브는 아버지 부시의 선거 캠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특히 애트워터의 대선 광고는 마이클 두카키스를 침몰시키는데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조지 W. 부시 역시 아버지 부시를 도와 선거 전략을 세우는데 한 역할 했다. 1988년 대선에서 여론조사를 뒤엎고 아버지 부시는 대승리를 거두게 된다.조지 W. 부시는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아 석유 사업을 했는데, 잘 안풀렸고 오일쇼크가 끝나자 좋은 시절도 끝나서 조지 W. 부시의 기름 회사는 큰 재정난을 겪게 된다. 그러나 조지 W. 부시는 역시나 아버지의 도움과 주식 스와프로 위기를 타개했으며, 석유 회사로 번 돈을 모아 1989년 4월 8,900만 달러를 주고 텍사스 레인저스의 지분을 사들여 야구 구단주로 거듭는다. 야빠로 유명한 조지 W. 부시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천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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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저스 구단주 시절의 부시 |
4.3. 텍사스 주지사
텍사스 레인저스 구단주를 지내며 쌓은 건실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그는 1994년 중간선거의 텍사스 주지사로 출마하게 된다. 상대 후보는 앤 리처즈였다. 결코 쉬운 싸움이 아니었는데, 앤 리처즈는 아주 인기 높은 텍사스 주지사였고 지지도가 60%를 넘었다. 더구나, 젭 부시가 플로리다 주지사로 출마한 상태였기에 가족 대물림이라는 비판이 일었다. 이 때문에 조지 H. W. 부시도 아들의 텍사스 주지사 출마를 만류했다. 당선 가능성이 없을 뿐더러 부시 가문의 아들 두명이 동시에 선거에 나오면 한 선거만 집중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막상 선거전이 시작되자, 조지 W. 부시에게 호감을 느낀다는 텍사스인들의 비율이 60%가 넘어가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오랜 기간 텍사스 레인저스의 구단주를 지내며 텍사스 주민들에게 호감을 산데다, 상대 주지사 앤 리처즈의 진보 정책에 불만을 가진 기성 세대들이 조지 W. 부시를 지지한 덕이었다. 이 때문에 1994년 텍사스 주지사 선거는 어느 후보가 당선될 지 알 수 없는 선거였고 선거전은 매우 접전으로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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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W. 부시와 칼 로브 |
뒤이어 조지 W. 부시는 1998년 주지사 선거에서도 압도적으로 재선되며 대권 주자의 자리를 굳혔다. 그는 인기가 많은 주지사였다. 텍사스 주의 흑자 예산을 이용해 역대 최대 규모인 20억 달러의 감세안을 통과시켰고,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써먹어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는 재활 프로그램에 돈을 쏟았다. 또 가정 폭력을 줄이는데에도 예산을 아낌 없이 투자했고 학업 능력이 뒤쳐지는 아이들을 위해 표준 시험 프로그램을 만든 것은 그의 대표적인 치적이었다. 몇가지 논란이 있긴 했지만, 조지 W. 부시의 유능한 행정 능력과 깨끗한 사생활은 그가 대권주자로 거듭나는데 큰 도움을 줬다. 시운도 좀 겹쳤던 것이 이 당시 르윈스키 스캔들이 터지는 바람에 백악관의 도덕성에 대한 국민적인 신뢰감은 급격히 떨어졌다. 더구나, 르윈스키 스캔들로 탄핵을 준비하던 뉴트 깅리치 하원의장이 정작 자기도 불륜을 해 사생아까지 만든 사실이 들통나며 사퇴하고, 공화당 지도부가 줄줄이 섹스 스캔들로 무너지면서[8]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 도덕적으로 문란하다는 비판이 일었다. 반면 조지 W. 부시는 거듭난 기독교인으로서 깨끗한 사생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권주자로 각광받게 된 것이었다.
4.4. 2000년 대통령 선거 출마
2000년 대선을 앞두고 조지 W. 부시는 공화당의 유력한 프론트러너로 올라섰다. 유일한 경쟁자는 존 매케인 상원의원이었다. "매버릭"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중도보수적인 입장과 전쟁영웅이라는 과거 행적이 더해져 만만치 않은 상대가 되었고 실제로 초기 경선에서 조지 W. 부시를 꺾고 몇차례 1위를 차지했다. 다급해진 칼 로브는 존 매케인을 상대로 비열한 네거티브를 시전했다. 그가 입양한 흑인 딸이 사실은 불륜으로 만든 자식이라는 헛소문을 퍼트린 것이다. 심지어 존 매케인이 북베트남에 포로로 잡혀있었던 시절 적군에게 술술 비밀 정보를 불었다며 "송버드 매케인"(Song bird, 노래하는 새)이라는 별명까지 만들었다.[9] 이 여파로 사우스캐롤라이나 경선에서 존 매케인이 조지 W. 부시에게 패배하면서 부시가 추진력을 받았고, 부시는 매케인을 꺾고 2000년 대선의 공화당 후보로 선출된다. 존 매케인은 이때 부시와 칼 로브에게 당했던 기억 때문에 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조지 W. 부시를 원수 취급했으며 2004년과 2008년 대선에서 모두 부시를 비난하는 등 공화당 내 반부시파의 선봉장이 되었다. 부시는 부통령 후보로 와이오밍주의 딕 체니를 지명한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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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어 대 부시 |
I'm not so sure the role of the United States is to go around the world and say this is the way it's got to be. ... but I think one way for us to end up being viewed as the ugly American is for us to go around the world saying, we do it this way, so should you.
저는 미국의 역할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이건 이런 식으로 해야돼" 라고 가르쳐주고 다니는 것인지 의심스럽습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 미국은 이렇게 하니까, 너도 이렇게 해"라고 말하는게 결국은 추레한 미국의 모습을 보여주고 마는게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조지 W. 부시, 2차 토론회에서 고어의 외교 정책을 비판하며.
뒤이은 본선도 힘겨운 싸움이었다. 르윈스키 스캔들의 여파가 꺼진 상황에서 현직
빌 클린턴 대통령의 지지도는 60%를 넘기고 있었고, 토론회에서
조지 W. 부시는
앨 고어에게 탈탈 털리면서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부시에게 도움이 되기도 했다. 토론회에서 고어가 부시보다 아는것도 많고 더 똑똑하다는 사실이 드러났지만 이 때문에 앨 고어가 너무 오만하고 잘난척하는 사람처럼 보이게 된 것이다. 반대로 토론회에서 모르는건 모른다고 털어놓은 조지 W. 부시는 모르는건 많아도 친근감 있고 솔직한 후보처럼 보이게 되었는데, 이는 르윈스키 스캔들로 정부에 도덕성을 바라고 있던 여러 미국인들의 정서에 맞아 떨어졌다. 게다가, 고어가 토론에서 저지른 몇몇 말실수들이 부각되며[11] 정작 여론조사에서는 부시가 1차 토론에서 이겼다는 여론이 더 높게 나왔다.저는 미국의 역할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이건 이런 식으로 해야돼" 라고 가르쳐주고 다니는 것인지 의심스럽습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 미국은 이렇게 하니까, 너도 이렇게 해"라고 말하는게 결국은 추레한 미국의 모습을 보여주고 마는게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조지 W. 부시, 2차 토론회에서 고어의 외교 정책을 비판하며.
더구나 앨 고어는 빌 클린턴의 높은 인기를 이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의 러닝메이트 조 리버만은 1998년 르윈스키 스캔들 당시 소리를 지르며 빌 클린턴의 성추문을 공격한 민주당의 대표 보수파였고 클린턴 지지자들은 리버만이 부통령 후보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매우 분개해했다.[12] 고어는 60%가 넘는 클린턴 대통령의 지지율을 고려하지 않고 클린턴과 자신을 꾸준히 구분지으려 했는데 이 때문에 민주당 강성 지지층이 투표장에 나오지 않았다는 분석이 많다. 결정적으로 제3지대 좌익 후보로 출마한 녹색당의 랄프 네이더는 3%에 달하는 진보 지지자들의 표를 갈라놓아 조지 W. 부시가 우세를 잡았다.
선거 사흘 전, 상술한 1976년의 음주운전 사건이 발각되어 조지 W. 부시에게 위기가 닥치기도 했으나, 조지 W. 부시는 이를 오히려 기회로 삼아 자신이 1986년 이후 빌리 그레이엄과 로라 부시의 도움으로 알코올 중독을 극복했으며 왜 하필 선거 사흘 전에 이런 문제가 터졌겠냐고 앨 고어를 맹공해 지지율을 끌어 올렸다. 그 결과, 조지 W. 부시는 초기 앨 고어의 우세를 뒤집고 대중 득표에서는 0.5% 뒤졌지만 더 많은 주에서 우세를 잡아, 271표의 선거인단을 얻어 당선되었는데 이는 1876년 미국 대통령 선거 이후 가장 적은 선거인단 표차로 당선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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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미 대선의 결과 |
조지 W. 부시를 위해 몇가지 변명을 하자면, 이 선거의 흐름 자체는 부시가 당선되는게 당연한 상황이었다. 유능한 컨설턴트 칼 로브를 앞세운 부시의 선거팀은 주도면밀하게 의제를 잡아 보수층의 투표 열의를 높인 반면, 앨 고어의 선거 캠페인은 그야말로 재난에 가까웠다. 부통령 선정부터 의제 설정까지 하나도 정상인게 없었다. 특히, 플로리다의 히스패닉 커뮤니티가 이전과 달리 50대 50의 비율로 부시에게 표를 많이 준 것이 나타났다. 2000년 4월 일레인 곤살레스라는 쿠바 이민자가 법을 위반해 쿠바로 다시 송환된 것을 두고 고어가 "법은 법이고 불법 이민자는 강제 송환되어야한다"라는 강경한 입장을 내비치며 쿠바인 커뮤니티가 술렁인 것이 그 이유였다. 또한 부시 가문은 전통적으로 히스패닉과 친했기 때문에 히스패닉들이 부시에 많은 표를 줘 플로리다 주의 표심이 부시로 넘어간 것이 없잖아 있다. 고어가 선거전만 잘했었더라도 5%p 내외로 아깝게 진 뉴햄프셔(4인), 네바다(4인), 오하이오(21인), 미주리(11인), 콜로라도(8인), 애리조나(8인), 테네시(11인) 중 어느 한곳은 이겼을 것이고 그렇다면 이런 분쟁이 일어났을 일도 없다. 부시 측에 유리하게 해석하자면 유리한 기회를 놓친 앨 고어의 자업자득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연히 잘 이루어지고 있던 재검표를 엎은 것은 미국 유권자들에게 매우 안좋게 받아들여졌고 현재까지 부시는 부정선거로 당선된 인물이라는 이미지를 쓰게 된다.
어쨌든 조지 W. 부시는 클린턴의 전임이었던 그의 아버지 조지 H. W. 부시에 이어 대통령 자리에 오름으로써 미국 역사 두번째 부자 대통령으로 기록된다.[15] 대통령 당선과 재임 당시 부시의 주요 지지 세력은 미국 공화당의 양대 최대 지지세력인 전미총기협회(NRA)와 전통적인 보수 우익세력인 기독교 우파였다. 헌데 이와 대조적으로 부시 자신은 온정적 보수주의자(Compassionate conservative)임을 자처했다.
5. 대통령 재임기
5.1. 1기 (2001.01.20. ~ 2005.01.20.)
5.1.1. 집권 초기
2001년 1월 20일 대통령 취임식 당일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서 아버지이자 전전임 대통령 조지 H. W. 부시와 함께 |
게다가 주위에 내세운 참모진들 역시 딕 체니, 도널드 럼즈펠드, 콘돌리자 라이스 등 고식하고 틀에 박힌 사고를 하는 걸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물들이었다. 같은 편이라도 콜린 파월[16] 같은 중도파나 자기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아예 바보로 취급해서 왕따 취급했다. 결국 파월은 공화당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2008년 대선에서 버락 오바마 지지 선언을 해서 존 매케인에게 엿을 먹인다.
취임 후 부시는 'ABC(Anything But Clinton) 정책'을 펴며 클린턴 때의 모든 정책을 재검토하면서 중국과의 긴장 관계가 높아지기 시작했고, 유럽에서도 부시의 일방적인 행보에 우려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그 당시까지는 아직 취임한 지 1년도 안 된 터였던 지라 내부에서는 부시의 말실수들에 대한 조롱과 선거 결과에 대한 반발 정도를 빼면 무난한 행보를 걸었다. 2001년 9월 11일의 그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는.
5.1.2. 테러에는 멀뚱멀뚱
당선 이후로 알 카에다가 미국에 테러를 할 것 같다는 CIA의 보고가 있었으나 씹고 세월을 보내던 중 9.11 테러가 터진다. 이후 한동안 벌어지는 대혼란과 부시의 어리벙벙함은 한도 끝도 없었다. 반정부의 상징 마이클 무어 감독의 《 화씨 911》(원제 "Fahrenheit 9/11", 2004년작)에서 테러공격 보고 직후 부시의 행동에 대해 잘 다루고 있다. 본래 9월 11일 당일 부시는 플로리다의 한 초등학교 수업을 참관하면서 어린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고 있었다. 동화를 한참 읽어주다가 보고를 받았는데, 본래 첫번째 보고(북쪽 타워의 충돌) 때는 보좌관들과 부시 모두 단순한 충돌 사고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다. 두번째 보고, 그러니까 진짜 테러 공격이라는 것을 인지하였을 때의 반응이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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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카드 백악관 비서실장 : 대통령 각하, 미국이 공격받았습니다!(Mr. President, America is under attack!)
조지 W. 부시 : ...(묵묵부답)
이러한 모습을 보이며 계속 동화책을 읽었다!! 이걸
무서운 영화 시리즈 중 하나(무서운 영화4)가 패러디했다. 교육적인 측면에서 보면 아이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올바른 행동이긴 하고 부시도 이런 의도였다고 해명했다. 정확히는 어린이들과 이후 언론을 통해 자신의 행동을 볼 국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다만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일어났어야 할 만큼 심각한 사안이라는 점에선 비판의 여지가 있는 게 맞다. 이 때 부시는 약 7분 정도를 지체했는데, 9.11 테러를 조사하는 청문회에서 이 부분에 대해 매우 강한 비판을 받았다. 게다가 부시는 이후의 언론 브리핑에서 이 당시 상황을 설명하며 '테러라는 보고를 받고서 그 즉시 학교를 떠났다'라고 과장했다가 사실을 지적받으며 논란을 스스로 키웠다.조지 W. 부시 : ...(묵묵부답)
그리고 안전한 박스데일 공군기지로 피신했다. 원래는 백악관으로 가려 했으나 에어 포스 원도 안전하지 않다는 보좌관들의 강력한 만류 때문에 가까운 안전지대로 이동한 것이다. 그나마 이건 나은 편인 것이, 이 상황에서 대통령 일신의 안전을 고려하지 않는 과감한 행동을 주문하는 사람들이 있기도 한데 그런 모습은 영화나 만화에서나 찾으면 되지 현실에서 찾을 수도, 찾아서도 안되는 모습이다. 만약 전쟁이 발발했던거면 과감한 행동으로 수천명을 살릴 수 있겠지만 혹여나 대통령이 사망해버린다면 그 부재 동안 수만명에서 수천만명이 죽을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시 임기 후반에서 9.11 피해자들의 분노에 대해 복수한답시고 테러와의 전쟁을 일으켰지만 정작 중요한 사건 조사에는 인색했다. 조사위원회의 구성도 사건의 중요도에 비하면 미흡했고 구성 비용은 전임인 클린턴의 성추문 조사 위원회에 비해 1/3인 1500만~2000만 달러만 사용했다. 게다가 사전 테러경보를 무시했다는 점에서 비판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했다. 마지막에는 이런 삽질 때문에 9.11이 부시의 계획이라는 음모론이 나왔다.
5.1.3. 테러와의 전쟁 -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테러 직후 미국은 알 카에다와 오사마 빈 라덴이 배후에 있으니 이들을 보호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이들을 내놓으라고 발표. 그러나 이를 탈레반 정권이 거부하자 아프간을 침공한다.[17] 그리고 9.11 테러를 구실로 미국을 애국주의 광풍에 몰아넣는 한편 국민 통제를 위해 인권침해적 요소가 다분한 법률들을 입안했으며 전 세계는 현재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며 전 세계를 '우리 편, 우리 편이 아닌 편' 으로 나누기 시작하며 전 세계가 대 테러 전쟁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이는 이라크 전쟁 1주년 기념 백악관 연설에서 나온 내용으로 정확한 문장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전략)...우리는 우리 삶과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생명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생명의 존엄성, 관용과 자유, 양심의 권리를 지지하는 것의 가치를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와 같은 삶이 지킬 만한 가치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선과 악, 자유와 압제, 생명과 죽음 사이에 중립 지대란, 중립 지대란 없기에 문명과 테러의 싸움에 중립 지대는 없습니다...(후략)"
원문: We do love live, the life given to us and to all. We believe in the values that uphold the dignity of life, tolerance and freedom, and the right of conscience. And we know that this way of life is worth defending. There is no neutral ground-no neutral ground-in the fight between civilization and terror, because there is no neutral ground between good and evil, freedom and slavery, and life and death.
그러나 세계의 반응은 시큰둥. 또한 기존의
CIA와
FBI 등의 정보 분석 체계를 전부 뒤흔들어놓고
국토안보부라는 최종 결정기구를 따로 만들어서 자기가 컨트롤하기 쉽게 만들어두었다. 정보당국 간 협력 실패가 9.11 테러의 주 원인이었기에 국토안보부 자체 창설은 나쁜 결정은 아니었으나 문제는 국토안보부의 과도한 권한 남발에 대한 경계심이 부족했던 데다 부시 정권의 실세들이 자기가 원하는, 듣고 싶어하는 정보만 받기 시작한 것이다.원문: We do love live, the life given to us and to all. We believe in the values that uphold the dignity of life, tolerance and freedom, and the right of conscience. And we know that this way of life is worth defending. There is no neutral ground-no neutral ground-in the fight between civilization and terror, because there is no neutral ground between good and evil, freedom and slavery, and life and death.
당시 관점으로 부시 행정부가 9.11 테러라는 국가 초유의 사태가 일어난 이상 매우 강경한 외교를 구사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도 있다지만 상술했듯 CIA가 그렇게 경고했는데 테러에 대한 일말의 대비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은 까여 마땅하다. 대비만 제대로 했더라면 테러와의 전쟁 더 나아가 테러 자체가 일어나지도 않았을 공산이 크다. 다만 CIA의 경고 무시는 중동 파트만 제외하면 CIA 수뇌부도, 그 전임자인 빌 클린턴도 신경쓰지 않아 부시 하나만의 문제는 아니다.
2021년 8월 15일에 탈레반이 수도 카불을 점령하면서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은 결국 실패로 종결되는 모양새다.
5.1.4. 두 번째 전쟁 - 이라크 전쟁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좀 마무리될 때쯤 갑자기 이라크에 마구 적의를 드러내기 시작. 뭐든지 이라크가... 이라크가... 라면서 핑계(?)를 대기 시작하다가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고 주장하더니만 결국 이라크를 본보기로 공격하려고 이라크 주변에 미군을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조지 부시는 이라크에는 대량살상무기가 없다는 UN사찰단과 IAEA의 조사 결과는 깡그리 무시했다. 조금더 정확히 하자면, 이라크 훗세인 정권은 무기사찰은 이라크의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라면서 계속 거부하다가 결국 국제적인 압력에 굴복해서 사찰단 받아줄 테니 말로 하자는 제의를 받아들였고 대통령궁까지 뒤졌지만 별 거 없었다. 거기에 구형 미사일 하나 나오긴 했는데 미안하다고 하면서 그 자리에서 해체했다. 쳐들어간 것은 엄청난 실책이었다. 게다가 이라크에 파견된 UN 무기사찰단이 대량살상무기 없다고 주장한 것을 씹은 건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지? 대표적으로 UN 무기사찰단장이었고 전 IAEA 사무총장이었던 한스 블릭스는 2차 이라크 전쟁을 불법으로 규정해버렸다. 어떤 이들은 "만약 후세인 정권이 정말로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면 후세인이 극단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의 책임감과 자제력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라고 평했다. 막말로 이라크전 터졌을 때 사담이 대량살상무기 같은 게 있었으면 터트리지 않고 뭐했겠냐는 이야기.
사담 후세인은 《 블랙 호크 다운》 같은 미군의 뻘짓을 다룬 영화(...)를 시청하며 어떻게 하면 미군에게 큰 피해를 줄 것인가를 연구를 시작했고, 결국 이라크전 발발. 전쟁은 예상대로 2달만에 ' 충격과 공포' 를 슬로건으로 한 미군의 압승으로 완료. 그런데...
이라크 상황은 전쟁도 아니고 분쟁도 아니고 내전인 것 같지만 뭔가 아닌 여태까지 누구도 듣도 보도 못한 형태로 전개. 계속해서 늘어가는 자폭 테러와 미군에 대한 공격 속에서 처음부터 전략 자체에 뭔가 문제가 있었다는 여론이 점차 늘어갔다.
훗날 미군 장군들이 이야기한 증언들 속에는 자신들이 처음부터 "이라크 침공에는 수십 만의 병력을 투입할 필요가 있으며 이는 초기 전투가 아니라 이라크 점령 후의 치안 유지를 위해서 필요하다. 또한 항복한 이라크군을 해산시키지 말고 될 수 있으면 그대로 유지시켜 함께 치안 유지에 나섰으면 좋겠다" 라고 무수히 건의했다 한다. 하지만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그런 의견을 개무시하고 소수의 빠르고 잘 무장된 병력으로 다수의 이라크군을 때려부수는데만 전념하고 그 뒤의 수습 과정은 별 고려도 안한 작전 계획을 강요하여 결국 그 넓은 이라크에 수만 명의 전투 병력만 방치된 상태였다. 이 전략은 상당히 평가가 자주 바뀐 것으로 유명하다. 처음에는 일명 바그다드 레이스가 무모한 전략이라고 까였고 성공한 듯 보인 순간에는 희대의 전략가로 칭송받았다. 하지만 이게 '후세인과의 전쟁' 이 아니라 '이라크인과의 전쟁'이 되면서 다시 까이기 시작했다.
결국 넓디넓은 이라크 전토를 수만에 불과한 미군이 요충지만 장악하러 가는 사이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이라크군과 저항세력은 자기 무기를 들고 그대로 사복으로 갈아입고 민간인 속으로 합류해 버린 건 물론 국경이 무너진 틈을 타 지원까지 받아냈다. 저항세력은 한때 그 수가 한때 40만이 넘었을 정도고[19], 이렇게 몇 년에 걸쳐 미군 사상자가 차츰차츰 쌓여 수만명에 이르게 된다.[20]
그러나 부시는 "이라크전 끝났네요"라고 미 해군 항공기에 파일럿 복장으로 탑승하여 항공모함 링컨호 위에 내리는 쇼를 보여주며 종전을 선언했다. 미국 대통령 중에는 형식적인 게 아닌 실제로 전쟁에 참여했던 경력을 가진 대통령들도 있었지만 이런 노골적인 퍼포먼스를 보인 대통령은 유래가 없었다며 비판이 일었다. 그런데 그 종전 선언 당일에도 테러가 나 미군과 이라크인 수십 명이 사망했다.[21]
그 후로도 미군 사상자는 계속 급증했지만, 그럼에도 2004년 대통령 재선 때는 이라크를 지가 평화롭게 만들었다고 망상하면서 올림픽에서 4강에 오른 이라크 축구선수들 사진을 홍보물에 써먹었다. 그리고 이라크 축구선수들은 우린 축구가 없었다면 저항세력으로 들어가 미군을 죽이고 있을지도 모른다며 이런 사실에 경악과 증오를 내비쳤다(...)
게다가 자폭 테러를 벌이는 세력은 그냥 미군만 죽는 게 아니라 미군 한 명 잡으려고 이라크인 수십 명을 같이 폭사시킨다.[22] 이런 공포의 효과로 미군에 협력하거나 주변에서 일하는 거 자체를 두려워하게 되는 상황을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전쟁 빌미였던 대량살상무기는 흔적도 못 찾고 그냥 어물쩡 넘어갔다.
2014년 ISIS가 겨자가스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이 가스가 후세인이 숨겨두었던 대량살상무기가 아니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담 후세인이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쿠르드인들을 상대로 인종학살을 벌이고 남은 것을 바그다드 근처에 파묻은 것이었다. 즉, 이미 만들어진 지 20~30년은 된 것. 무엇보다도 미국은 이라크 점령 기간 동안 이런 구식 대량살상무기를 발견했었다. 문제는 이미 침공 당시로부터 10~20년 전에 만들어진 걸 세상에 공표해봤자 이득도 없고 욕만 먹을 게 확실했기에 그냥 쪽팔려서 알리지 않은 것이다.
5.1.5. 계속되는 외교적 실수와 반미 기류의 확산
한편 정보기관에서 이란을 비롯한 다른 중동 국가들에서 이라크 저항세력에 지원을 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며 그 후 부시는 그 유명한 악의 축 발언으로 이란, 시리아, 북한을 지목, 그리하여 조지 부시와 럼즈펠드의 미군 공격 투어 다음 예정지로 확정. 처음에는 이란, 이라크, 북한이었는데 이라크 침공 이후 이라크는 시리아로 바뀐다. 북한과 이란과 폭풍 갈등이 벌어지며 주변국들에게 "또 전쟁 터지는 거 아니냐"는 공포감을 심어주었다.그러나 난데없이 대표적 반미 독재자였던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가 여기에 겁을 먹고 2004년 대량살상무기의 폐기를 선언하는 바람에 부시는 '역시 내가 옳았어!' 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북한과 이란을 칠 것 같은 분위기가 심각하게 조성되기도 했다. 다만 카다피의 무기폐기는 단순히 겁을 먹었다기보다는 이전에 # 테러와의 전쟁에 동참해 이미지 변화를 꾀하려 한다는 발표를 한 적이 있어 이 일환으로 대량살상무기를 폐기한 것으로도 보인다.
당시 북한은 조지 W.부시의 기조에 대응하기 위해 # 김정일의 군관련 대외활동의 빈도가 늘기도 했고, 방북했던 미 스탠포드대학의 루이스 교수 일행에게 영변 핵시설을 보여주며 군사력을 과시했다.
2010년 11월 9일 출간한 회고록 "결정의 순간들(Decision Points)"에서 2003년 2월 장쩌민 중국 주석에게 북핵 문제를 외교적으로 풀 수 없을 경우 북한을 공습하겠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
결과적으론 더 이상 전쟁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천문학적인 국방 예산을 이라크 전쟁에 소모하고 있는 상황인 데다 미군 전투력의 대부분 역시 여기에 투입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천문학적인 예산으로 구체적인 성과를 냈는지가 불분명해지고 중국이 가파르게 성장하면서 북한을 감싸는 사이에 어떤 수도 쓰지 못하면서 북한을 압박할 외교적인 영향력을 잃은 것도 한 부분을 차지했을 것이다.
5.1.6. 오, 신이시여(Oh God). 재선이라니요!
<nopad> |
2004년 대통령 선거 결과 |
오하이오는 이 선거가 아니더라도 미국 대선의 주요한 캐스팅 보더였다는 상징성도 가지고 있었다( 역대 미국 대통령 문서의 각주 참조). 케리가 비록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넘어갔지만 결국 부시 행정부의 이미지는 실추. 이 부분은 《 심슨 가족》에서 전통적인 공화당 지지자인 번즈의 "아무도 우리가 오하이오에서 뭉치표를 공화당에 넣은 것을 모를 거야"라는 말이나 " 할로윈 데이 스페셜" 에서 44대 대선에서 오바마에게 투표하던 호머 심슨이 자신의 표가 존 매케인으로 투표되었다고 하면서 분쇄기에 빨려 들어가자 "아악!! 이럴 수는 없어!! 여기가 오하이오도 아니고!!(...)"라고 외치는 장면 등을 넣는 등 까이는 소재가 되었다.
5.2. 2기 (2005.01.20. ~ 2009.01.20.)
5.2.1. 카트리나, 서브프라임, 금융위기
게다가 부시가 다음 임기에 일을 제대로 했으면 그나마 좀 나은 평가를 받았겠지만, 결론은 삽질의 연속.재선 직후 벌어진 2005년 여름의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이미지는 대 실추,[23] 2기 중반에 들어서는 의회고 뭐고 사회 전반에서 부시를 까는 분위기가 극심해졌다. " 이게 전부 다 부시 때문이다" 정도? 그리고 99% 맞는 말이었다.
부시를 강력하게 밀어주던 의회도 2006년 미국 중간선거에서 여당인 공화당이 야당인 민주당에게 참패를 당한 것을 계기로 사실상 민주당이 모든 것을 다 좌지우지 하는 상황이 되었다. 상원과 하원 모두 민주당이 장악한 가운데 의회에서 통과된 첫 안건은 이라크전을 말아먹는 럼즈펠드부터 자르는 것이었다. 그 후로 조지 부시가 하는 행동에 일일이 태클을 건 것은 물론 심지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말미암아 벌어지는 금융권의 잇따른 부도를 막기 위해 국가 예산을 풀어야겠다고 했다가 의회가 "안 되는데?"라고 해서 부시가 버로우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2008년 대침체 사태를 방지하지 못했다. 애초에 유가를 유례없이 폭등시켜 유가 100달러 시대를 열어놓고 경제 불황의 시초를 닦아놓았다. 그나마 유가는 중동에서 이슬람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한다는 광신도들이 일으켜대는 분쟁으로 좀 낮아졌지만, 경제불황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게다가 경제가 회복될 때마다 중산층이 무너지는 것도 골칫거리. 현재의 한국에서 보듯이, 후일 다시 위기가 찾아왔을 때 극복할 체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당장 한국의 잠재 성장률은 경제위기가 한 번 찾아올 때마다 1%대씩 날아가고 있다.[24]
5.2.2. 휴가, 휴가, 휴가
역대 미국 대통령, 그리고 이후에 취임하는 미국 대통령 중 그 누구도 깰 수 없을 1020일[25]의 휴가를 혼자서 다 하셨다. 이게 어느 정도 수치냐면 당시 최고령 당선 기록으로 참작의 여지라도 있는 로널드 레이건의 최대 추정 휴가일이 866일인데 거기서 반년 더 휴가를 다녔다는 것이다. 총 비용은 1억 4천만 달러. 도널드 트럼프가 자기 재단에 놀러다니는 돈지랄로 1억 4천만 달러에 4백만 달러 더 쓰기 전까진 대통령 휴가비로 기록된 비용 중 최고였다.6. 결과 - 메울 수 없는 삽질의 구덩이
조지 W. 부시 기념비[26] |
6.1. 미국 일극체제 종언
두번의 전쟁으로 미군의 군사력과 경제, 그리고 지도력은 모조리 악화 일로를 치달았다. 이후 미국의 행보는 예전같은 '슈퍼 파워' 로서의 독주는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병력 부족을 이유로 건강, 연령, 심지어는 범죄 경력조차도 상관 안하고 병력을 무리하게 증강한 탓에 현재 군 내부의 갱단 형성 문제나 병력의 질 저하 문제가 심각해진 상황이며, M1 전차 800여대가 미군 소속인데도 불구하고 수리비가 없어서 방치되었다는 사실이 충격을 더하고 있는 실정. 게다가 서브프라임 사건 이후 한동안 미국 경제는 끝도 없이 계속 악화되었다.[27]물론, 미국이 전쟁에서 이기지 못한다고 해도 군사적으로는 여전히 최강대국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며 이기지 못한다는 말은 압도적인 보급과 화력으로 자국 군인들의 피해를 최소화시키면서 이기는 방식의 전쟁을 하지 못한다는 뜻이다.[28]
다만 미군의 전투력이 크게 줄어든 건 사실이다. 미군 전체의 병력을 놓고 보자면 140만 명 내외로[29] 병력이 결코 적은 것은 아닌데 미 해군과 미 공군의 규모가 크고 보급이나 지원 임무에 봉사하는 병력 등이 많은 까닭에 실제로 전쟁시 일선에서 적과 싸우는 지상 전투 병력은 대략 15~16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이 이라크에 가있는 실정이고 지속되는 자살 공격과 테러에 대한 손실 역시도 대부분 이 얼마 안되는 핵심 전투병력에서 발생하고 있다. 현재 전사자만 4000명을 넘었는데 부상자는 3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자료도 있다. 사실상 전투 병력 5명 중 한 명은 죽거나 다쳤다는 이야기로 보통 심각한 상황이 아닌 셈. 자국 내에서도 심각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이라크 파병 미군의 사망은 미드에서 자주 나오는 소재 중 하나. 오죽하면 멕시코가 미쳐서 미국을 치면 미국이 고전할 것이란 분석이 나올 정도의 상황이였다. (물론 주방위군도 있다.)
그런데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고 점점 악화되어 더 많은 병력과 장비가 필요해진 탓에 사실상 다른 지역에 여력을 쏟을 수가 없는 상태가 된다. 결과적으론 다행이지만 이 때문에 '악의 축'의 나머지 두 나라인 이란, 북한에 미군 방문 투어는 영원히 취소.
거기에 덤으로 전쟁 비용에 국방 예산을 다 날리느라 차세대 무기 개발 계획까지 줄줄이 취소크리를 맞는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H&K XM8 소총, ACSW XM307[* OCSW로 알려져 있는 무기. 25mm 공중폭발유탄 고속발사기관총. 참고로 이게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XM312이라는 OCSW의 부품만 갈아끼우면 .50cal로도 쓸 수 있는 기관총을 만들었는데 결국 둘 다 취소크리... 반면 미국에서 화력 걱정으로 취소된 20mm 공중폭발탄을 현명한 꼼수(?)로 먼저 실용화시킨 한국에서는 '길쭈욱한' 20mm 공중폭발탄이 사용되는 K11을 사라고 미국 옆구리를 찌르고 있다고...
6.2. 추락한 미국의 도덕적 권위
2004년에 이라크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에서 미군 헌병들이 현지인 포로들을 고문한 사건이 CBS <60 Minutes>를 통해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미국의 도덕성이 도전받기 시작했고, 2006년 관타나모 기지의 이라크 포로 문제나 유럽 이곳저곳에 CIA 등이 테러리스트 용의자를 납치, 감금하는 비밀 감옥이 있던 것으로 밝혀져 미국이 인권 국가라는 이미지가 크게 훼손되고 또한 유럽 국가들로부터의 지지도도 하락.프랑스, 스페인 등에서는 미국과 조지 W. 부시 반대 시위가 격렬하게 벌어졌다. 결정적으로 냉전 시절에는 러시아에 대항해 미국과 한 팀이라고 생각을 해오던 유럽 국가들이 정작 미국 혼자의 문제에 피를 흘리며 동참하라고 하는 상황에선 등을 돌리거나 생색내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는 일본도 마찬가지. 한국도 이라크 전쟁에 파병을 했고, 한미 FTA에 대해서는 진전을 보였지만 결과적으로 앞에서 나열한 미국의 동맹국들이 하는 행동에 동참했다고 볼 수 있다. 노무현/평가의 외교 항목 참조. 때문에 전통적으로 우방국이라 생각했던 나라들 중에서는 이제 이스라엘 밖에는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미국 내부의 전통적 보수주의자들한테 대차게 욕 먹은 원인 중 하나. 아프간 전쟁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프랑스를 향해 프렌치 프라이를 프리덤 프라이(...)로 바꿔야 한다면서 자랑스럽게 진상을 부린 공화당 의원이 나오질 않나, 지나친 국수주의 테크로 전통적인 동맹국들, 특히 아시아의 대한민국과 일본을 매우 불쾌하게 만들었다.
때마침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과 미선이 효순이 사건까지 겹치면서 반미 감정이 크게 일어났으며 아프가니스탄 파병식도 대대적으로 열지 못하고 소규모로 열었다. 일본 역시 MD에 참가하라는 일방적인 요구사항에 상당히 불쾌해했다.
심지어 영국에서도 "우리가 왜 미국의 쫄따구 노릇이나 한다는 비웃음을 들어야 하나?" 면서 안 그래도 불편했던 심기가 더 불편해졌다.[30] 애시당초 이때의 상황으로는 영국이 미국을 달갑잖게 보는 분위기도 강했는데 이렇게 나오니... 그나마 아버지는 영국한테서 과거 식민통치 사과라도 받았는데 말이다.[31]
특히 교토 의정서 비준에 대해 "미국 실정에 맞지 않는다!" 면서 보이콧. 국제연합 결의를 무시하고 전횡. 당시 UN 사무총장이었던 코피 아난 전 사무총장은 부시 행정부의 정책에 대해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 라는 말을 남겼다. 사실 미국이 대외적으로 내세우는 정의로운 국가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국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추악한 짓도 저지른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였지만 전임자들이 그래도 국제사회를 어느 정도 의식하고 행동했던 데에 비해 이 사람은 "우리 미국이 짱인데 니들이 감히 우리한테 개기냐? 이제부턴 슈퍼파워 미쿡느님 마음대로 할 테다" 를 대놓고 저질렀다.
심지어 NATO에 동유럽 국가들을 일방적으로 가입시켜버린 처사는 러시아 뿐 아니라[32] 유럽 국가들도 "너네가 사실상 대장인 건 알고 있지만 해도해도 너무하다. 유럽을 무시하기냐?" 하는 반발마저 일었다. 분명히 NATO 세력이 늘어나면 유럽 국가들 자신의 국가 이익에 도움이 되는데도 나온 게 저 반응이다.[33]
결국 이런 꼴을 보다 못한 동맹국들은 미적지근한 태도를 취하게 되고 심지어 공화당의 전통적인 지지자였던 유대인 백만장자 조지 소로스도 "부시는 미국만이 아니라 이스라엘까지, 나아가 전 세계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고 비난하면서 민주당 쪽으로 등을 돌렸다.
당장의 단기적인 미국의 대외 관계를 넘어, 2차대전 이후 냉전기를 거쳐 현대까지 미국이 표방해왔던 팽창주의적 자유주의란 이데올로기란 좀 더 형이상학적이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상술한 당장의 대외 관계 훼손은 귀여울 정도다. 당장 세계 사람들이 '자유의 제국'으로 인식했던 그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고향이라던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에 나서며 온갖 자신들의 선조들이 만들고, 가꾸어오며 세계에 자랑한 상호 견제적 정부 시스템, 법치주의, 기본 공민권을 대테러 정책의 이름 아래 비웃듯이 무시하며 폭압적으로 대외정책을 피는 모습은 대외적으로 미국은 위선자라는 이미지를 확실하게 각인시켰을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소위 미국적 가치의 확산에 대한 중대한 회의, 피로감을 심어 놓았다. 그리고 이렇게 부시 정권이 완전히 망쳐놓은 '자유의 제국'이란 이데올로기적 무기는 10년 후 지금 평가하기에 경제 지표, 대외 관계, 군사력보다 훨씬 더 회복이 안되고 영구적인 데미지를 입은 분야이고, 전 세계적으로 아예 미국식 자유주의 가치관 자체를 부정하며 '지나친 자유로 인해 퇴폐한 서방'에 대비되는 소위 스트롱맨 이미지 정치를 하며 합법적 권위주의적 독재 체계를 설립한 러시아의 푸틴, 헝가리의 오르반, 터키의 에르도안 정권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6.3. 경쟁국의 부상을 방치하다 - 러시아, 중국, 남미
부시: 어이 블라디미르... 내가 네 초상화를 그렸어... 푸틴: 신기하네,[34] 나도 내 자화상을 그리고 있었거든... [35] |
이미 푸틴 정권은 구 소련 시절 같이 산업을 통한 경제 발전이 아닌[36] 자원 수출을 통한 경제 회복에 중점을 두고 있었는데 때마침 이런 호재를 만났던 것이다. 우크라이나가 NATO에 가입하네 마네 하면서 러시아는 지정학적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사실상 이런 고유가 환경을 조성한 것이 러시아의 힘을 길러주는 꼴이 되어 결국 우크라이나 같이 미국 쪽으로 기울던 러시아 주변 국가들이 다시 바로 옆의 러시아와 친해져볼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경제력의 회복도 회복이지만 푸틴은 핵무기 전력의 강화와 MD체제 비난 등으로 계속해서 군사적 파워의 강세를 천명하여 경제, 군사적으로 과거 소련에 걸맞은 위상을 가지려 하고 있다. 이렇게 또다른 슈퍼 파워가 성장하면 결과적으론 미국의 국제사회에 대한 영향력은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푸틴: 방금 조지아를 침공했다. |
남오세티야 전쟁에서 러시아군을 미군에 비교해보면 미군이 압도적인 전력과 효율적인 전술, 교리, 군사적 기량으로 적들을 털어버린 데 비해 여기저기서 미숙하고 부족한 점들을 내보였다. 그러나 미군이 전략 단위의 실책으로 베트남전 시즌 2를 아프가니스탄에서 11년째, 이라크에서 8년 동안 찍은 것에 비해 러시아군은 전쟁도 금방 끝냈고 전략, 정치적 목적도 모두 달성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러시아의 경제 성장을 막겠다고 함부로 손댈 수도 없는 상황이라 미국은 결과적으로 러시아 견제에서 점점 불리해졌... 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미국발 경제위기 때 가장 크게 타격을 입은 국가가 러시아였다. 석유하고 가스 내다 파는 걸로 고유가 시대에 돈을 벌었던 러시아가 국제 경제 위기가 오면서 석유가가 폭락하자 깨갱하고 있는 것.
사실 러시아 관계는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데 아버지 부시 시절에 소련은 무너졌으되 무너졌다고 그들을 너무 자극하지 않는 방침이 아들 부시 시절에 이르러서 망한 러시아 눈치 따위 알게 뭐냐고 막 나간 결과 새로 등극하신 짜르폐하의 역린을 건드려 버린 것이다. 아버지 부시는 우크라이나 등지의 분리주의에 지지하지 않겠다는 발언을 하며 러시아를 자극하지 않았지만 아들 부시는 과거 러시아의 영향력을 받던 동유럽을 일방적으로 나토에 합류시켜 동서 대립의 중심을 독일에서 러시아 코앞으로 밀고 들어와 러시아를 크게 자극했고 우크라이나, 발트 3국[38], 조지아 같은 소련에서 독립해 나간 국가들을 죄다 자기네 편으로 만들려고 했다. 이러니 러시아인들은 열받지 않을 수가 없었고 푸틴은 미국 믿고 까불면 재미 없다고 조지아를 조지고 두들겨 부시는(...) 참교육을 시전했다. 유로마이단 사태에서도 러시아는 크림 반도를 먹어버리면서 오렌지 혁명 때의 무기력한 모습에서 완전히 태도를 전환했다.
부시: 이 짓으로 우리의 관계가 손상될 수 있다.[39] |
결과적으로 미국은 2022년 현재 트럼프, 바이든 행정부에서 중동에의 개입을 줄이고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하면서 부시가 벌여놓고 20년간 이어진 중동에서의 삽질을 거의 끝내고 그동안 크게 성장하게 방치해둔 중국과 러시아 견제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있는 사이에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상당수가 줄줄이 친미 우파정권에서 반미적인 좌파정권으로 바뀌고 말았다. 물론 이건 조지 W. 부시의 탓은 아니고 80-90년대에 미국이 남미에 했던 짓을 이자를 쳐서 받은것에 까깝지만 그렇다 해도 충격과 공포인건 맞다.[42] 지금 이 국가들은 옛날에 비해 미국의 영향력을 덜 받고 있다.[43] 예전 같으면 그레나다, 칠레처럼 군사적 정치적 패권을 이용하였겠지만, 군사력이 중동에 몰려있고 명분도 없어서 아무것도 못하는 중.
2010년대 하반기 들어와서 차베스 사망 이후 베네수엘라의 본격적 경제적 몰락과 연달은 중남미 대국에서 우파 정권이 당선되면서 결과론적으로 해결된 문제 아니냐 할 수 있지만, 당장 2019년 베네수엘라 정치 위기에서 보여준 자칭 친미 진영의 남미 우파 정부들이 보여준 저질스런 연계력, 차라리 전임자들이 똑똑해 보일 정도로 내정간섭을 안하는 것도 아니면서 제대로 된 개입을 하는 것도 아닌 우유부단한 모습을 미국은 보여주었고, 오히려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이 쿠데타를 단숨에 진압하고 권력을 굳히는 계기나 되었다. 결국 범중남미권 반미 좌파 진영의 장기적 형성 자체는 저지 되었다 한들 이게 딱히 중남미 국가간의 미국의 권위와 신뢰 회복을 의미한건 아니다.
그나마 미국 입장에서 다행인 건 라틴아메리카가 고질적인 내부 문제를 고치지 못하고 성장 동력이 약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도 부시가 잘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적이 못해서 벌어진 일이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중국은 여전히 고도 성장을 유지하고 있다.
6.4. 분열된 조국과 법 질서 - 아마겟돈적 정치
10년 전에는 맞았는데.[44][45] |
취임 초부터 부시는 플로리다의 부정선거 의혹으로 말이 많은 상황이었다. 9.11 테러로 잠시 이러한 비난여론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는 있었지만 결국 이라크전으로 인해 미국 내의 여론은 안 좋게 돌아갔고 더군다나 재선에서도 부정선거 의혹이 터진 데다 카트리나 직후의 부적절한 처신은 부시와 공화당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혔다. 덕분에 미국은 버락 오바마, 도널드 트럼프 정권이 들어선 후대까지도 공화당 vs 민주당의 마치 아마게돈을 방불케 하는 난장판 정치 행태가 벌어지고 있다.
위 풍자 사진의 언급대로 '10년 전'을 복원해보자. 빌 클린턴 임기 당시에는 또다른 초강대국이던 소련의 붕괴와 경제적 위협국이던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으로 시작하는 붕괴를 바탕으로 유일강국이 되어 세계를 호령하기 시작했고, 이를 폭발적으로 성장한 경제로 돌려주어 미국민들을 만족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애초에 그가 조지 H.W.부시를 떨구고 대통령이 된 것도 그 유명한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 문구 덕분이었다. 그 막강한 국력을 바탕으로 세계 무대를 미국 중심으로 재편해나갔고 치안 문제도 개선했다.
그런데 조지 W.부시는 이른바 ABC(Anything but Clinton)"(클린턴만큼은 안 돼) 기조를 바탕으로 클린턴 정부의 모든 정책을 처음부터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물론 클린턴 정부의 정책 중에서 문제가 있는 것도 있지만, 단순히 전 정권을 전적으로 부정하려는 의미의 행보는 그만한 재검토할 부분과 정책적 비전이 없다면 리스크만 크다. 그리고 그 비전이 없음을 조지 W.부시는 9.11 테러 발생 당시 멀뚱멀뚱한 모습으로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진 뒤 극단적인 애국주의, 안보제일주의를 바탕으로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지만 앞서 말했듯 그에게는 정치적 비전이라고는 없었다. 그리고 이 정책적 비전 없이 클린턴이 기반을 닦아놓은 미국제일주의를 계승해놓고 클린턴 정부는 부정하려고 하면서 정작 그 권리만 극단적으로 취하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극단적인 보수적 지지층을 방패로 내세웠고 빌 클린턴이 깔아놓은 미국 제일주의 외교판을 말 그대로 밥상 엎듯이 엎어버렸다. 세계가 미국에 등을 돌린 것이다. 그렇다고 미국 내부에서 잘 했냐고 하면 당선 과정이라도 깔끔했으면 몰라 초임과 재선 모두 부정선거 의혹이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미국내 경제마저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깔끔하게 날려버렸다. 미국민들은 의지할 수 있는 곳이 없어졌고 각계각층이 먹고 살기 위해 이합집산으로 분열되었다.
그리고 2011년 애리조나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난 원인으로 미국 정치권의 치킨게임식 극단주의 정치판이 일조를 했다는 분석까지 나오고 있으니 부시는 더더욱 할 말이 없는 셈이다.
심지어 자국 내 법질서까지도 망가뜨려 놓았다. 9.11 테러 이후 만들어진 애국법은 미국 내 인권 운동가들에게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권리를 상당히 제약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46] 《 심슨 가족》에서는 이를 바트 심슨의 입을 빌려 이렇게 깠다.
"Constitution? I'm pretty sure the patriot act killed constitution and freedom."
"헌법? 애국법이 헌법이랑 자유를 다 죽여놨지."
게다가 이 시기 부시를 지지하는 안보지상주의자들은 부시가 물러난 뒤 애국법보다 더한
국방수권법이라는 법을 제정해 놓았다. "헌법? 애국법이 헌법이랑 자유를 다 죽여놨지."
6.4.1. 대통령 서명 선언 남용
2010년이 돼서야 서서히 알려지고 있는 내막에 따르면 부시는 임기 중 전통적 권한인 "대통령 서명 문구(Presidential Signing Statements)" 들을 심각하게 오남용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이건 대통령이 의회를 통과한 법안에 서명할 때 그 밑에다가 그냥 "이것은 좋은 법이다" 등의 덕담을 적는 관습을 말하는 것인데, 가끔씩 "법안의 내용 중 헌법에 위배되는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 있으므로 서명은 하되 그 부분은 이행하지 않는다" 라는 뉘앙스의 글귀를 적는 경우가 있다. 만일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하원과 상원에서 2/3 다수결로 대통령을 씹고 강제 통과시킬 수 있는데, 서명은 해주는 대신 저렇게 입장 표명을 해놓으면 법이 있기는 있는데 아무 효력이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행정부가 이행하지 않는 법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게 되는 게 당연하다) 거기다가 이건 거부권을 행사한 게 아니기 때문에 의회가 다시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것이다. 즉 꼼수 중의 개꼼수. 이게 합법적인 행위인지에 대해서는 판례가 없기 때문에 저 옛날 앤드루 잭슨이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등이 아주 아주 가끔씩 이 꼼수를 이용했다. 그런데... 부시는 임기의 처음 4년 동안 이 짓거리를 435번 했다.[47]대통령이 이 권한을 남용하면 의회가 통과시킨 법안을 본인 마음대로 짜깁기할 수 있게 되므로 결과적으로 행정부가 입법부 노릇을 하는 꼴이 된다.[48] 거기다가 당연히 대법원이 결정해야 할 법안의 위헌 여부를 대통령이 판단하고 있으니 곧 사법부의 권한까지 이행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부시의 책상 위로 올라오는 법은 대부분 통과되었고 덩달아 대통령의 권한 자체가 엄청나게 증가했다. 같은 공화당 의원들도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으나 자신들 당 소속 대통령이다 보니 손 쓸 방도가 없었다고 한다.
거기다가 서명선언의 남용은 미래에 오히려 더 문제가 된다. 부시가 대통령이었을 때는 자신의 이념에 따라 법안만 통과시켜 놓고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철저히 무시하면 됐지만 항상 대통령이 공화당이란 법은 없다. 당장 오바마 대통령이라도 그때 통과된 법을 바로 이행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거꾸로 오바마 역시 이런 식으로 서명을 쓸 수 있는데 실례가 바로 막장법인 NDAA을 (부분적으로) 막을 때였다.
6.4.2. 기타 인권, 환경 정책 실패와 위법행위
부시는 저런 권한 남용 말고도 위법 행위도 많이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가장 대표적인 게 바로 리크 게이트인데 조지프 윌슨 전 이라크 대사가 부시의 이라크전을 비난하는 발언들을 하고 다니자 언론에다가 윌슨의 아내 밸러리 플레임이 사실 CIA 요원이라고 폭로하였는데 문제는 이게 위법이라는 것이었다. CIA 요원은 신분상 법에 의해 정체가 밝혀지지 않도록 보호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 정보를 백악관 고위 관료들이 흘렸음은 물론 법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는 대통령도 연루되어있다는 의혹이 나오고 있다.[49]이것 말고도 연방 검사 해임건에서 나온 법적 시비나 전쟁을 벌이면서 일어난 각종 인권 침해와 환경 평가 보고서 조작(!)[50] 뇌물수수 의혹 등 본인과 보좌진들 대부분이 여러가지 위법 행위에 대한 의혹이 있으며 이와 관련한 몇몇 관련 문건들이 조작되거나 삭제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오바마 행정부는 이 시기 삭제된 E메일 2200만 통을 복구하기로 결정했다고 하니 앞으로도 파고들면 더 나올 것으로 보인다.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니미츠급 항공모함 10번함인 조지 H. W. 부시는 진수된 뒤에도 한동안 공사를 받아야 했다. 이유야 당연히 이 사람이 자기 아버지 이름을 딴 항모를 자기 임기 안에 진수시키려고 일정을 앞당겼기 때문이다.
결국 목적 달성을 위해 지나치게 위법을 저지르는 모습을 일반 국민도 아닌 한 국가의 최고 통수권자가 보여주면서 신뢰를 잃게 만들었다. 특히 미국처럼 사소한 법을 어겨도 크게 난리가 되는 나라에서 저런 모습을 보여줬으니 더더욱 까일 수밖에 없다(...)
오죽하면 2000년대의 10년을 Decade from Hell이라고 부를까?[51]
7. 퇴임 이후 행보
2009년 한국에 방문해 잘 대접받고 갔으며, 같은 시기 다른 전직 대통령인 빌 클린턴은 북한을 방문해 억류된 여기자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갔다.2009년 언젠가 캐나다 에드먼턴을 방문하기로 했는데, 캐나다에서 꺼지라는 투의 포스터가 이리저리 붙고 시위를 하자는 포스터도 붙었다. 부시 행정부는 캐나다에 잘해준 편이었지만 캐나다와 미국의 외교 관계와 상황은 여러가지로 조금 미묘했다. 이러한 부분들은 상황이 지나고 두 나라간에 경제와 문화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상대적으로 없어지게 되었다.
2010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월드 시리즈 4차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텍사스 레인저스 경기에서는 아버지와 함께 나와 놀란 라이언에게 시구를 했다.
# 부자가 함께 평화롭게 늙어가는 것을 보면 역시 피는 못 속이는 건지 부자간에 정말 닮아도 너무 닮았다는 식으로 훈훈함이 묻어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아버지는 휴스턴 애스트로스 팬이다. 그래서인지 아들과 달리 레인저스 점퍼 대신 월드시리즈 점퍼를 입고 나왔다. 2011년 5월 23일엔 아드리안 벨트레에게 암살당할 뻔했다.
# A.J. 피어진스키와 대화하는 조지 부시
이렇게 자주 알링턴을 방문하여 텍사스 레인저스를 열성적으로 응원하다보니 레인저스 팬들도 대통령으로서의 위업과 상관 없이 텍사스의 한 어른으로서 지지를 표한다. 주지사 출신이고 구단주까지 했던 사람이니 만큼 린든 B. 존슨 대통령 다음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 2011년에도 텍사스 레인저스가 월드시리즈에 진출하자 시구를 했다. 다만 이번엔 많이 벗어나서 폭투가 되어버렸다.
2013년 1월 21일에 거행된 오바마의 재선 취임식에 부친과 함께 불참했다. 부친이야 고령에 병환으로 인한 요양의 필요성 때문이었다고 하지만, 굳이 오바마의 바로 전임인 자신까지 불참할 필요가 있었을지...? 하지만 12월 넬슨 만델라 추도식에는 모든 전직 대통령 일가가 에어포스 원을 함께 타고 참석했다.
2015년 대선이 1년 앞으로 다가온 시점에서, 동생인 젭 부시가 공화당의 차기 대선주자로 올라섰으며, 공화당에서 어느 주자들보다도 정치적 자산이 많아 유력주자로 거론되었다. 극우로 치닫는 공화당 속에서 중도온건파로 분류되며, 가톨릭 신자이기 때문에 보다 더욱 보수 이미지가 옅다. 주지사 시절에 민주당 편 들어준 적도 많았고, 거기다 젭 부시는 라틴아메리카학을 전공했고, 아내도 히스패닉이며,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므로 민주당 텃밭 지지세력으로 불리는 히스패닉의 표를 잠식해올 수 있다는 강점까지 갖추고 있다. 참고기사:'젭 부시' 중심으로 '부시 패밀리'가 뭉쳤다
만약 2016년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이 출마하게 된다면, 부시 가문과 클린턴 가문이 24년 만에 대선에서 리턴매치를 벌이게 된다. 물론 정치는 생물이고, 1년이라는 시간은 예측 불가능한 변수가 튀어나오기 충분한 시간이다. 그리고 실제로 나왔다.
트럼프와 동생 젭 부시가 경선 기간 중 원수를 져버렸기 때문에 아버지, 동생과 함께 일제히 2016 공화당 전당대회에 불참을 선언했다. 당의 살아있는 전임 대통령이 전당대회에 불참하는 건 굉장히 이례적인 일. "내가 공화당의 마지막 대통령이 될 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라는 말을 하는 등, 단순히 동생으로 인한 개인적인 원한 뿐만 아니라 트럼프의 고립주의 노선이 당에 미칠 영향에 대한 우려가 깊은 것 같다. 물론 조금씩 여러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의견이 나타난다.
최근 자신이 화가로부터 그림 교습을 받고 스스로 그린 정상들 초상화 작품을 가지고 전시회를 열었다고 한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부터 대한민국 17대 이명박 전 대통령 초상화도 부시가 직접 그렸다고 한다.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힐러리 클린턴하고 트럼프에게 투표하지 않았다고 알려져있다.
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오죽 답답했는지, 전직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에 대한 발언을 자제하던 관행을 깨고 조목조목 트럼프의 정책을 비판했다. 조지 W. 부시 연구소 주최 토론회 기조 연설에서 트럼프의 실명을 직접 거론하진 않았지만, "우리는 자유 시장과 국제 무역에 대한 자신감이 약화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면서 "분쟁과 불안정, 빈곤들은 보호주의 아래에서 발생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우리는 고립주의의 복귀를 목도하고 있다"고 트럼프의 보호무역 정책을 정면비판했으며, “우리는 이민자들이 언제나 미국에 가져왔던 역동성을 망각한 채 민족주의가 국수적인 토착주의로 변질되고 있는 것을 보고있다.”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반이민 정책을 질타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다른 나라와 달리 미국의 정체성은 지리나 인종, '피와 땅'(나치 정권 슬로건) 등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면서, “편협함과 백인우월주의는, 어떤 형태이든, 미국적 신념에 반하는 모독.”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편협함이 미국에서 점점 대담해지는 것 같다. 정치가 점점 더 음모이론과 노골적인 날조에 취약해지고 있는 것 같다.”고 개탄하기도 했다. 위에서도 나오지만 부시 정부가 중동에 끼친 악영향은 별개로, 조지 W. 부시 개인은 9.11 테러가 일어난지 일주일도 안돼서 모스크를 찾아가 무슬림들을 옹호할 정도로 개방적인 사람이었다. 이후 2020 인종차별 항의 시위를 지지하며 다시 한 번 트럼프를 거세게 비난했다.
2018년에는 부모님인 조지 H. W. 부시와 바버라 부시 여사가 모두 별세했다.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추도 연설을 하던 중 부모님과 백혈병으로 요절한 동생 로빈의 얘기를 하면서 울컥했는지 잠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52]
2019년에는 노무현재단에 노무현 前 대통령 10주기 추도식(5월 23일)에 참여하고 싶다는 연락을 갑작스럽게 해와 오랜만의 한국 방한이 성사됐다. 노무현 대통령 초상화를 직접 그려 전달할 생각이었는데 추도사 제의까지 받은 것이라 한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기쁜 마음으로 협의중"이라며 일정을 조율하고 있다는 입장을 전했다. # 추도식 전에 문재인 대통령과 만날 예정이라고 한다.
추도식 전날인 5월 22일 대한항공 특별기편을 타고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하여 첫 일정으로 이재용 삼성 부회장과 회동하였고 다음날인 23일 오전에 청와대를 방문하여 문재인 대통령과 접견한 뒤 김해 봉하마을로 이동했다. 추도사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을 두고 "동맹과 국익을 우선했다"고 말하며 "한국의 인권에 대한 노 대통령의 비전이 국경을 넘어 북에까지 전달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직접 그린 초상화는 권양숙 여사에게 전달됐다. [전문] 노무현 기리는 부시 추도사 "친절, 따뜻하고 강력한 지도자…영광이다"
추도사를 하고 있는 부시 전 대통령 | 직접 그린 노무현 전 대통령 초상화 |
2021년 1월 20일, 조 바이든 대통령 취임식에 빌 클린턴, 버락 오바마와 함께 전직 대통령 자격으로 참석했는데 도널드 트럼프가 관례를 깨고 앤드루 존슨이 율리시스 S. 그랜트의 1기 임기 취임식에 불참한 이래 152년만에 후임 대통령 취임식에 불참한 상황에서 트럼프가 소속된 공화당의 유일하게 생존해있는 전직 대통령으로서 참석해 의미를 더했다.
2021년 3월에 이민에 관한 책을 출간하였다. #
2020년 대선에서 콘돌리자 라이스 전 국무장관 이름을 적었다고 한다. #
9.11 20주기 추모식에서 "우리 일상에 악의적 힘이 작동하는 것으로 보인다"라면서 "악의적 힘이 모든 견해차를 다툼으로, 모든 다툼을 문화적 충돌로 바꾸고 있다"라고 말했다. #
반트럼프 성향의 리즈 체니 하원 의원과 리사 머카우스키 상원의원을 후원했다. #
2024년 대선에서 특정 후보를 공식 지지할 계획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
[1]
다만,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버몬트와 코네티컷, 뉴저지 등의 주에서는 공화당의 지역 기반이 상당히 건재한 편이었다. 코네티컷이 현재 같은 민주당 텃밭이 된건 2000년대 이후의 일.
[2]
현역 의원이 텍사스 주의 정서에 맞지 않는 진보 정책을 내세워서 인기가 없었고 그래서 아버지 부시가 당선되는게 거의 확실했지만, 하필 민주당 경선에서 젊고 중도적인 로이드 벤슨이 현역 의원을 꺾어서 민주당의 지지율이 회복되었다.
[3]
처음에는 명문
텍사스 대학교/오스틴 캠퍼스에 지원했으나 불합격했다. 반면, 부시 가문의 똑똑한 동생
젭 부시는
텍사스 대학교/오스틴 캠퍼스에 합격했다.
[4]
물론 아버지 부시는 아버지로서 자기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다 해줬다. 아버지 부시가 없었다면 조지 W. 부시는 대통령은 커녕 아직까지도 감옥에 있었을 것이라는게 중론.
[5]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군 조종사의 임무와 업무 강도는 일반인이 상상하는 것 외로 상당하며 게다가 부시가 군 복무를 하던 시절의 항공기는 지금과 같은 안전 장비가 발달하기 전이라 기본적으로 어느정도 목숨을 건 일이었다. 그리고 훈련 과정도 상당히 빡셌으며 비행사 라이센스를 취득하는 건 당시에도 어려운 일이었다. 다만 당시 해, 공군을 막론하고 항공 병과로 복무하던 상당수의 군인들이 월남 상공에서 피를 흘린 걸 생각하면...
[6]
여담으로 같은 선거에서
론 폴이 텍사스 제22구에서 하원의원으로 선출된다.
[7]
동생 젭 부시는 근소한 차이로 밀려 낙선했다.
[8]
공화당은 클린턴 탄핵을 준비했지만 리버럴 성향의 도색지인
허슬러 잡지가 증언을 받아 공화당 고위 인사들의 성 스캔들을 폭로하며 뉴트 깅리치 하원의장을 포함한 여러 공화당 고위 인사들이 의원직을 사퇴하거나 심지어 정계에서 은퇴하게 되었다. 이 여파로 1998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은 참패한다.
[9]
몇년간의 고문을 버티며 힘겨운 포로 생활을 한 매케인에게 아주 모욕적인 별명이고 당시에도 칼 로브가 너무 나갔다는 반응이 많았다.
[10]
존 댄포스,
톰 리지,
조지 퍼타키,
콜린 파월,
프레드 톰슨도 부통령 후보로 고려되었지만 부시는
조지 H. W. 부시 행정부에서 국방장관을 맡은 체니의 경험이 이득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11]
전반적으로 고어의 우세가 두드러졌지만, 고어는 부시의 정책에 공감한다는 말을 남발했고, 텍사스주가 의료 문제에서 미국에서 47등이라고 했는데 이게 거짓으로 드러나며 타격을 입었다.
[12]
이후 리버만은 2006년 중간선거를 앞두고 당을 나가서 무소속으로 상원의원으로 당선되더니, 2008년 대선에는 매케인을 아예 지지하는 행보를 보인다. 현재는
No Labels 운동을 주도하며
조 맨친 같은 민주당 중도파를 2024년 대선에서 무소속 후보로 세우자고 하고 있는데 민주당 지지층들 분위기는 죽을때까지 고춧가루만 뿌린다는 것이다. 민주당 지지자들은 아직도 리버만을 1972년
토머스 이글턴, 1984년
제럴딘 페라로와 더불어 민주당 역사상 최악의 부통령 후보 중 하나로 꼽을정도로 이를 박박 간다.
[13]
이 문제는 후일
스테이시 에이브럼스가 조지아 주지사로 출마해 다시 제기한 바 있는데, 이 여파로 조지아 주를 비롯한 몇개 주에서 흑인 투표율이 급등해 조지아 주가 2020년 대선에서 바이든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14]
그리하여
본인의 아버지가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선거인단에서 370:168로 패배하게 만든
두
명에게 복수에 성공하게 되었다.
[15]
첫 번째는
존 애덤스(2대)와
존 퀸시 애덤스(6대).
[16]
파월은 파나마 전쟁과 걸프전의 주역으로 워낙 인기가 좋아서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될 만한 인물 1순위로 꼽히기도 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전쟁에 대해서는 신중론을 취했기 때문에 부시와 적을 쳤는데, 이전의 평도 겹쳐서 파월의
버락 오바마 지지는 그 의미가 컸다. 여러모로 부시가 건드려서는 안 되었던 인물 중 하나.
[17]
여기까진 그래도 나쁘진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이라크 전쟁 전 그래도 테러의 명백한 배후를 일망타진 한다는 명분이 있었기 때문에 아프간을 침공한 것에 대해 그리 크게 뭐라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18]
쥐들 = 종파간의 상잔
[19]
이게 얼마나 엄청난 규모냐면 탈레반이 기껏해야 5~10만으로 추산된다. 게다가 탈레반은 용병과 무자헤딘이 대다수인데, 이라크 저항세력은 대다수가 전 정규군이었다.
[20]
비교 대상이 좀 그렇지만 중일 전쟁에서 일본군이 한 짓과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넓은 땅에서 상대적으로 소수의 병력이 점(요충지)만 장악하고 면(국토)은 장악하지 못한 것.
[21]
여담으로 이 쇼를 벌일 당시 기류가 좋지 않아서 잘못되면 항모에 내리지도 못하고 바다로 빠질 수도 있었다고 한다. 근데 부시가 빠져 죽으면 러시아하고 전쟁하자던 딕 체니가 대통령된다(...)
[22]
물론 이런 방식에 반대하는 수니파 저항세력도 없지 않았지만, 시아파가 죽는 건 수니파 쪽에서는 별로 나쁘지 않은 데다 워낙 효과적이다 보니...
[23]
물론 자연재해라서 부시는 조금 억울할 수 있지만 대처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해서 당대 미국 사회의 문제가 속속히 드러났다.
[24]
경제성장률은 일종의 복리이기 때문에 1%는 정말 큰 것이며 여파가 오래 남는다.
[25]
자신의 임기인 2,922일중 총 34%에 달하는 수치. 그러니까 사흘에 한번씩 놀았다는거다.(...)
[26]
깃발: 임기 완수
아래의 쓰레기 산더미들: 이라크, 카트리나, 경제, 지출비, 시민자유 [27] 그나마 오바마 행정부의 노력으로 현 트럼프 행정부 때에야 경제가 상당히 호전되었다. [28] 미국의 국방 예산은 전세계 1위(미국)가 2위부터 9위를 전부 합친 것보다 두 배가 많다. [29] 자료가 투명하게 발표되지 않아 정확히 몇 명인지는 알 수 없음. [30] 영국은 그러면서도 은근히 미국과 협력하는 상황은 계속 나타났다. 그러나 당시 공개됐던 영국 영화 러브 액츄얼리에서 다시는 영국을 무시하지 마라며 '미국에게 할 말은 하는 수상'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대중적으로 미국과 협력 관계를 유지하는 토니 블레어 정부를 바라보는 대중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31] 이는 이시기 개봉한 영국 영화 러브 액츄얼리에서도 노골적으로 나온다. 그 때문에 영국 역사상 제일 많은 미국인들이 본토를 점거했던(...) 2차대전 시절에는 영국 주둔 미군들한테 <영국 사람과 이야기할 때 독립전쟁에서 미국이 영국을 이겼다고 주장하지 말 것> 등의 명령이 하달 되기도 했다. [32] 그 이유는 1990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과 조지 H. W. 부시 당시 대통령이 가진 몰타 회담에서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이제 소련과 바르샤바 조약기구도 없어질건데 북대서양 조약 기구가 필요가 있느냐"라는 말을하자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소련(러시아)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국가는[53] 북대서양 조약기구에 가입을 시키지 않겠다"라는 약속을 한 적이 있기에 러시아 입장에서는 배신감이 느껴질수 밖에 없다. [33] 단, 서유럽 입장에선 동유럽 중에서 폴란드 같은 강국 정도를 빼고 허약하지만 대러 강경파인 국가나 우크라이나 같이 지정학적으로 민감한 국가도 받아들이면 문제 발생 소지가 커지는 것도 있다 [34] 영어 'Funny'는 재미있네 하는 뜻도 있지만, "Huh, Funny"이란 식으로 '신기하네, 우연이네'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35] 참수된 용 = NATO
푸틴의 그림 문구: 제국의 역습 [36] 소련 가맹국들이 모두 독립해 나간 '러시아' 단독으로는 산업을 통한 경제 발전이 곤란하기 때문이다... [37] 게다가 이때 푸틴은 대통령이 아닌 총리로 재임하던 시기였다. [38] 다만 다른 구 소련 연방 출신 국가들과는 달리 이들은 러시아와 거리를 두고 싶어하는 경향이 크다. [39] 용 = 중국 [40] 단, 이건 먼로주의(먼로 독트린)을 고려한 서술이다. 비록 라틴아메리카의 남쪽 끝인 칠레, 아르헨티나에도 미국이 내정간섭 또는 개입을 하긴 했지만 콜롬비아, 베네수엘라보다 남쪽 지역은 지리적으로도 미국과 가까운 편이 아니므로 앞마당, 안마당 또는 뒷마당으로 보기 곤란하다. [41] 사실 조치를 취하고 싶어도 못했던게 베네수엘라를 토함해서 대다수 남미 국가가 엄연히 선거를 통해 국가원수를 선출하는 국가였고, 그래서 군사력을 투입해봤자 민주주의의 수호자니 하는 드립이나 못칠 상황이 된데다가 당시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IMF 외환위기로 인한 경제난으로 미국의 대변인으로 여겨졌던 국제통화기금에 대한 악명이 자자했던 상황이었다. 당연히 조치를 취하고 싶어도 못할수밖에 [42] 멕시코도 자칫했으면 좌파정권으로 바뀔 뻔했다. 부시 입장에선 천만 다행으로 미국 본토 멕시코인 표 덕분에 우파가 소수점 차이로 우파가 계속 집권했지만. 만일 멕시코까지 좌파가 집권했으면 미국 정계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 [43] 이들이 미국에 개기는 대표적인 사례로는 코소보 승인, 팔레스타인 승인 문제 등이 있다. [44] 옷의 문구 = 뭉치면 산다 [45] 해당 만평은 부시의 행태로 미국이 분열된 것과 함께 미국의 비만 문제도 함께 풍자했다. [46] 물론 옹호하는 측에서는 국가 안보를 위한 가장 강력하고 안심되는 법률이라는 입장도 있다. 실제로 테러를 겪은 후에 만드는 예방법은 단순히 예방하는 것보다도 그 의미가 크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미국민의 모든 활동을 감시, 도촬하는 것을 허용하는 법임과, 그럼으로 인해 미 헌법에 보장된 자유의 권리를 훼손한다는 것 자체는 엄연한 사실이다. [47] 사실 이 꼼수를 가장 많이 이용한 것은 사실 빌 클린턴이긴 하다. 정확히 말하면 서명하고 글 적어놓는 숫자가 더 많았다는 거지 남용의 논란거리는 더 적었다고 한다. # 더구나 클린턴은 압도적인 공화당 하원과 겨루며 임기를 치른 사람이고, 부시는 공화당이 가득한 하원에서 이런 짓을(...) 레이건은 8년간 250건, 아버지 부시가 무려 4년간 228건(그 가운데 반대는 110여건), 클린턴이 무려 381건을 했으니(반대는 그 가운데 70건) 아들 부시의 8년간 157번은 훨씬 적은 것이나, 그가 건드린 연방법의 개수는 무려 1200개에 달한다(...) # (윗 각주 역시 그 건드린 법의 숫자를 말하는 듯.) [48] 이것과 비슷한 "항목별 거부권법(line-item veto)" 이라는 제도는 이미 클린턴 행정부 시절 위헌 판결이 난 바 있다. [49] 이 사건으로 물러난 물러난 백악관 대변인 스콧 매클래런은 《거짓말 정부》라는 책을 써 부시 정부의 이미지에 타격을 주었다. [50] 지구온난화 문제에서 발 빼려고 벌인 짓 중 하나. 앨 고어는 "불편한 진실" 이라는 자전적 이야기를 다룬 환경운동 영화에서 이 사건을 대차게 깠다. [51] 하필이면 그 이전 빌 클린턴이 이끌던 1990년대가 미국인들 사이에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최고의 황금기로 꼽히는 시기였기에 더욱 비교된다. [52] 로빈이 세상을 떠났을 당시인 1953년 10월 기준 조지 부시는 7살이었고, 로빈 바로 아랫 동생인 젭 부시는 8개월의 아기에 불과했다. 즉 부시 형제들 중 로빈과 몇 년 이상 인생을 같이했고 로빈에 대한 기억을 가진 이는 장남이자 로빈의 오빠인 조지 W. 부시 뿐이다.
아래의 쓰레기 산더미들: 이라크, 카트리나, 경제, 지출비, 시민자유 [27] 그나마 오바마 행정부의 노력으로 현 트럼프 행정부 때에야 경제가 상당히 호전되었다. [28] 미국의 국방 예산은 전세계 1위(미국)가 2위부터 9위를 전부 합친 것보다 두 배가 많다. [29] 자료가 투명하게 발표되지 않아 정확히 몇 명인지는 알 수 없음. [30] 영국은 그러면서도 은근히 미국과 협력하는 상황은 계속 나타났다. 그러나 당시 공개됐던 영국 영화 러브 액츄얼리에서 다시는 영국을 무시하지 마라며 '미국에게 할 말은 하는 수상'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대중적으로 미국과 협력 관계를 유지하는 토니 블레어 정부를 바라보는 대중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31] 이는 이시기 개봉한 영국 영화 러브 액츄얼리에서도 노골적으로 나온다. 그 때문에 영국 역사상 제일 많은 미국인들이 본토를 점거했던(...) 2차대전 시절에는 영국 주둔 미군들한테 <영국 사람과 이야기할 때 독립전쟁에서 미국이 영국을 이겼다고 주장하지 말 것> 등의 명령이 하달 되기도 했다. [32] 그 이유는 1990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과 조지 H. W. 부시 당시 대통령이 가진 몰타 회담에서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이제 소련과 바르샤바 조약기구도 없어질건데 북대서양 조약 기구가 필요가 있느냐"라는 말을하자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소련(러시아)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국가는[53] 북대서양 조약기구에 가입을 시키지 않겠다"라는 약속을 한 적이 있기에 러시아 입장에서는 배신감이 느껴질수 밖에 없다. [33] 단, 서유럽 입장에선 동유럽 중에서 폴란드 같은 강국 정도를 빼고 허약하지만 대러 강경파인 국가나 우크라이나 같이 지정학적으로 민감한 국가도 받아들이면 문제 발생 소지가 커지는 것도 있다 [34] 영어 'Funny'는 재미있네 하는 뜻도 있지만, "Huh, Funny"이란 식으로 '신기하네, 우연이네'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35] 참수된 용 = NATO
푸틴의 그림 문구: 제국의 역습 [36] 소련 가맹국들이 모두 독립해 나간 '러시아' 단독으로는 산업을 통한 경제 발전이 곤란하기 때문이다... [37] 게다가 이때 푸틴은 대통령이 아닌 총리로 재임하던 시기였다. [38] 다만 다른 구 소련 연방 출신 국가들과는 달리 이들은 러시아와 거리를 두고 싶어하는 경향이 크다. [39] 용 = 중국 [40] 단, 이건 먼로주의(먼로 독트린)을 고려한 서술이다. 비록 라틴아메리카의 남쪽 끝인 칠레, 아르헨티나에도 미국이 내정간섭 또는 개입을 하긴 했지만 콜롬비아, 베네수엘라보다 남쪽 지역은 지리적으로도 미국과 가까운 편이 아니므로 앞마당, 안마당 또는 뒷마당으로 보기 곤란하다. [41] 사실 조치를 취하고 싶어도 못했던게 베네수엘라를 토함해서 대다수 남미 국가가 엄연히 선거를 통해 국가원수를 선출하는 국가였고, 그래서 군사력을 투입해봤자 민주주의의 수호자니 하는 드립이나 못칠 상황이 된데다가 당시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IMF 외환위기로 인한 경제난으로 미국의 대변인으로 여겨졌던 국제통화기금에 대한 악명이 자자했던 상황이었다. 당연히 조치를 취하고 싶어도 못할수밖에 [42] 멕시코도 자칫했으면 좌파정권으로 바뀔 뻔했다. 부시 입장에선 천만 다행으로 미국 본토 멕시코인 표 덕분에 우파가 소수점 차이로 우파가 계속 집권했지만. 만일 멕시코까지 좌파가 집권했으면 미국 정계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 [43] 이들이 미국에 개기는 대표적인 사례로는 코소보 승인, 팔레스타인 승인 문제 등이 있다. [44] 옷의 문구 = 뭉치면 산다 [45] 해당 만평은 부시의 행태로 미국이 분열된 것과 함께 미국의 비만 문제도 함께 풍자했다. [46] 물론 옹호하는 측에서는 국가 안보를 위한 가장 강력하고 안심되는 법률이라는 입장도 있다. 실제로 테러를 겪은 후에 만드는 예방법은 단순히 예방하는 것보다도 그 의미가 크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미국민의 모든 활동을 감시, 도촬하는 것을 허용하는 법임과, 그럼으로 인해 미 헌법에 보장된 자유의 권리를 훼손한다는 것 자체는 엄연한 사실이다. [47] 사실 이 꼼수를 가장 많이 이용한 것은 사실 빌 클린턴이긴 하다. 정확히 말하면 서명하고 글 적어놓는 숫자가 더 많았다는 거지 남용의 논란거리는 더 적었다고 한다. # 더구나 클린턴은 압도적인 공화당 하원과 겨루며 임기를 치른 사람이고, 부시는 공화당이 가득한 하원에서 이런 짓을(...) 레이건은 8년간 250건, 아버지 부시가 무려 4년간 228건(그 가운데 반대는 110여건), 클린턴이 무려 381건을 했으니(반대는 그 가운데 70건) 아들 부시의 8년간 157번은 훨씬 적은 것이나, 그가 건드린 연방법의 개수는 무려 1200개에 달한다(...) # (윗 각주 역시 그 건드린 법의 숫자를 말하는 듯.) [48] 이것과 비슷한 "항목별 거부권법(line-item veto)" 이라는 제도는 이미 클린턴 행정부 시절 위헌 판결이 난 바 있다. [49] 이 사건으로 물러난 물러난 백악관 대변인 스콧 매클래런은 《거짓말 정부》라는 책을 써 부시 정부의 이미지에 타격을 주었다. [50] 지구온난화 문제에서 발 빼려고 벌인 짓 중 하나. 앨 고어는 "불편한 진실" 이라는 자전적 이야기를 다룬 환경운동 영화에서 이 사건을 대차게 깠다. [51] 하필이면 그 이전 빌 클린턴이 이끌던 1990년대가 미국인들 사이에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최고의 황금기로 꼽히는 시기였기에 더욱 비교된다. [52] 로빈이 세상을 떠났을 당시인 1953년 10월 기준 조지 부시는 7살이었고, 로빈 바로 아랫 동생인 젭 부시는 8개월의 아기에 불과했다. 즉 부시 형제들 중 로빈과 몇 년 이상 인생을 같이했고 로빈에 대한 기억을 가진 이는 장남이자 로빈의 오빠인 조지 W. 부시 뿐이다.
[53]
현 러시아 국경으로 하면 우크라이나, 핀란드, 벨라루스,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소련 국경으로 하면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루마니아, 리투아니아, 몰도바까지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