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8 15:26:08

우고 차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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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볼리바르 공화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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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C802><colcolor=#000>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공화국 제64대 대통령
우고 차베스
Hugo Chávez
파일:Hugo_Rafael_Chávez_Frías.jpg
본명 우고 라파엘 차베스 프리아스
Hugo Rafael Chávez Frías
출생 1954년 7월 28일
베네수엘라 바리나스 주 사바네타
사망 2013년 3월 5일 (향년 58세)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묘소 카라카스 군사 박물관
재임기간 제64대 대통령
1999년 2월 2일 ~ 2013년 3월 5일[1]
학력 카라카스 군사학교 ( 졸업)
병역 베네수엘라 육군 공수부대 대령 전역
사상 차베스주의, 21세기 사회주의
최종 당적
종교 가톨릭
신체 173cm, 86kg
배우자 난시 콜메나베스
마리사벨 로드리게스
서명
파일:우고 차베스 서명.svg

1. 개요2. 일생
2.1. 대통령 이전2.2. 대통령 임기
3. 건강 문제
3.1. 암 투병3.2. 취임식 논란
4. 사망5. 거침없는 반미 외교
5.1. 카다피, 김정일 옹호 및 추모
6. 평가와 정책
6.1. 언론탄압6.2. 경제정책의 실효성
6.2.1. 2015년 석유가 폭락 이후 평가
6.3. 민주주의의 후퇴와 정치적 양극화 심화6.4. 국제인권단체와의 갈등6.5. 삼권분립의 약화6.6. 비밀경찰6.7. 부정선거(?)6.8. 미션 볼리바르6.9. 옹호6.10. 한국의 차베스 열풍과 평가
7. 일화
7.1. '입 닥쳐' 사건
8. 관련 서적

[clearfix]

1. 개요

베네수엘라의 제64대 대통령이자 독재자.

1999년 2월 2일부터 2013년 3월 5일까지 14년 31일간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을 역임했다.

2. 일생

2.1. 대통령 이전

바리나스 주 사바네타에서 태어났다. 학창시절에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수를 꿈꾸던 야빠소년이였으나 마침 육군에 야구선수 양성 프로그램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야구선수가 되려고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는데 거기서 진로를 바꿔 직업군인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야구선수가 되는데 실패했지만 야빠인건 틀림없어서 육군 장교로 재직하고 있을때 아마추어 야구대회에 참여했고, 대통령 재임시에 야구 대표팀에 대대적인 지원을 보냈다.[2] 2005년 월드시리즈에서도 시카고 화이트 삭스(당시 화이트 삭스 감독이 베네수엘라 출신의 아지 기옌)가 우승에 성공하자 엄청 좋아하기도 했다.

육군 장교가 된 이후에 시몬 볼리바르에 매력을 느껴 볼리바르 대학 정치학과에 재직하기도 했으며, 때마침 형인 아단 차베스가 좌파 성향이었다는 점도 한 몫하여 이 때부터 좌파사상에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 이후에 베네수엘라의 빈부격차와 군 내부의 부패 문제를 보고 여러 좌파 지식인과의 만나면서 "볼리바르-200"이라는 정치군인 단체를 만들고 '볼리바르 사상'을 정립했다. 그 후의 차베스는 군사학교에서 강사로 재직하면서 당시 정부에 대한 비판[3]과 정열적인 강의법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콜롬비아 국경지대로 전출되면서 민군협력증진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1988년에 승진하여 대통령궁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의 보좌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빨간물(?)이 좀 들긴 했어도 딱히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다거나하는 조짐은 없었다. 한편 이 시기에 페레스 前 대통령이 경제가 계속 하향세를 타서 여당인 민주행동당이 불리했던 상황에도 그 전에 대통령에 재직했던 경험(1974~1979년)과 뛰어난 선거전략,[4] 상대야당인 기독사회당의 자중지란까지 겹치며 과반 득표로 재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는 경제를 살린다는 명분하에 IMF의 구제금융을 받아들였고 이 구제금융 조건으로 교통비와 석유값을 보조하는 정책이 전면적으로 중단되어 순식간에 물가가 2배가 오르자 물가폭등에 항의하는 빈민층들이 대대적으로 들고 일어나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최소 수백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졌다(일명 카라카소[5]).

그 이후에도 실정이 이어지면서 차베스는 페레스 정권을 뒤엎을 결심을 하게 되고 3년 뒤인 1992년 페레스 정권[6]의 지지가 크게 떨어지는 상황에서 페레스 대통령과 그 측근들의 부패혐의를 내세워 현역 중령으로 10% 정도의 군 병력을 장악해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페레스 충성파 군인들에 의해 진압되어 실패했다. 하지만 쿠데타가 진압되어 투항하는 조건으로 방송연설을 할 기회를 얻어 자신의 동료들을 처벌하지 말라며 “지금은 목표를 이루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이룰 것이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라는 내용의 연설을 해 베네수엘라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이후에 2년간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라파엘 칼데라 정권 때 들어서 사면되었다. 라파엘 칼데라는 출신성분(?)이 보수파이긴 했어도 재선 당시에는 일부 좌파 정파의 지지를 받던 상태였기에 사면이 가능했다. 더군다나 라파엘 칼데라 입장에선 페레스 前 대통령의 부패혐의도 입증되긴 했으니 굳이 차베스를 감옥에 더 가둬놓을 이유가 없긴 했다. 물론 라파엘 칼데라가 IMF 구제금융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시하면서 갈라섰지만...

차베스의 쿠데타는 베네수엘라 정치 체제를 뒤흔들어놓았다. 베네수엘라는 사실 오랜 정치 안정을 누리고 있었다. 빈발하던 쿠데타와 정치적 불안으로 인해 체결된 "푼토 피호 협정" 이후 1958년부터 양당체제 하의 정권교대가 계속되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차베스의 쿠데타 기도 당시 푼토 피호 협정은 34년째 되는 해였다.

2.2. 대통령 임기

여하튼 간에 방송 연설로 유명인이 된 차베스는 옥중에서도 1993년 대통령 선거에서 기권운동을 주장하여 라파엘 칼데라의 득표율보다 높은 기권율 40%를 기록하는데 공헌했고, 1994년 라파엘 칼데라의 사면으로 출소한 후 본격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는 정치권에 투신한 뒤에도 한동안 선거에 회의적인 입장이었으나 1997년 들어 생각이 바뀌어 적극적으로 선거에 참여하는 방향으로 틀고 군소정치조직에 불과했던 "볼리바르 혁명 200"을 확대재편하여[7] "제5공화국 운동"이라는 정당을 창당했고 사회주의 운동당, 애국당 등과 좌파연합(애국전선)을 결성, "제3의 길"을 정책노선으로 내걸고[8] 모라토리엄 선언과 사회주의적 정책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이때 뚜렷한 비전과 투박하면서도 열정적인 연설 등으로 탄탄하게 지지기반을 다져나가며 지지율을 끌어올렸다.

1998년 지방선거에서 자신의 아버지[9]를 바리나스 주지사로 당선시켰고 그 이후에 치러진 총선에서 약진했으며(의회 다수는 차지하지는 못했다.)[10] 이어서 치러진 1998년 대통령 선거에서 드디어 56.2%의 득표율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에 당선되었다.[11] 대통령 당선 직후에 미국이 급진적인 공약과 과격한 발언을 이유로 경고성 축하 서한을 보내면서 미국과의 관계는 급속히 삐그덕거리기 시작했다.[12] 차베스는 1999년 2월 2일 베네수엘라 대통령에 취임했다.
개표 완료 후 차베스 소개영상(베네비시온)

대통령이 된 차베스는 정부의 주요 요직에 곧바로 자신의 지지자들과 좌익 연립정당의 인사들을 앉혔다. 볼리바르 혁명 200의 창당인 헤수스 우르다네타는 국가정보국장(DISIP)에, 쿠데타 동료 에르난 그루베르 오드레만은 카라카스 주지사에 임명했다. 이른바 볼리부르게시아(볼리바르+부르주아지)가 정권의 핵심으로 올라섰다.

차베스는 대통령 당선 이전에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 결과 여소야대에 놓이게 되었다. 원래 베네수엘라에선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같은 날에 치르는게 관례였으나 차베스의 약진에 위기를 느낀 의회가 국회의원 선거가 대통령 선거보다 한 달 일찍 치르도록 변경했고 그 결과 베네수엘라 의회는 야당이 다수가 되어 여소야대가 된 것이다. 차베스는 이미 선거운동 시절부터 기존 의회를 해산하고 새 의회를 구성하겠다는 공약을 내놓았으며[13] 제헌의회 전술을 이용해 개헌을 시도했다. 구체적으로는 양원제로 구성되어있던 베네수엘라 의회를 단원제로 개편하고, 직접민주주의적 요소를 강화시키고, 대통령의 임기를 5년에서 6년으로 연장하고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면서[14] 연임을 허용[15]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야권이 장악하고 있던 기존 의회를 대체한 새 제헌의회 선거에서 여당연정이 압승을 거두었고 개헌에 성공한 뒤 기존 의회를 사실상 무력화한 뒤에 치러진 2000년 대선에서 59.8%라는 득표율로 역시 압도적인 득표율로 재선[16](5공화국 헌법상 1선)에 성공했고 동시에 치러진 총선과 지방선거에서도 과반확보에 성공했다. 이미지와는 다르게 1선에서의 지지기반은 빈민이 아니라 중산층이었다.[17]

그러나 차베스는 너무 성급하게 개혁을 시도하려다가 이미 의회에서 여당연정이 과반을 확보하고 있었는데도 공론과정을 생략하는 바람에(특히 49개의 개혁법안을 의회의 동의없이 통과시킨게 결정적인 발단이 되었다.) 연정 내부에서도 이탈자가 속출했고 결국엔 이들 이탈자를 맞아들인 차베스 반대파가 세를 불리게 되면서 연립여당까지 합해 100석을 넘던 여당은 80석대 중반으로 주저앉고 야당진영은 70석대 후반까지 불어났다. 결국 이 시기부터 세가 불어난 반대파의 저항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결국 2001년 하반기부터 반대파의 조직적인 저항이 시작되었고 특히 2002년 우파 정치군인들의 쿠데타 시도로 위기를 맞게 된다.

이 쿠데타는 대다수의 언론과 대기업의 지지를 등에 업었기 때문에 여론지형상에서 반 차베스파가 차베스에게 우위를 보일 것으로 예측되었다. 그러나 쿠데타의 주도세력이 극우세력이라 차베스 반대파 내부의 중도파와 좌파가 배제되었다. 특히 차베스가 내건 49개의 개혁법을 모두 무효화하는건 물론[18] 무엇보다도 의회를 해산하겠다고 밝히면서 주요 야당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게 되었다. 야권에서도 쿠데타 지지여부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져 시간을 보내기만 했다. 더군다나 차베스가 대통령 사퇴서를 냈다는 보도가 나왔지만 차베스 딸의 통화내용을 통해 사실이 아님이 드러나면서[19] 차베스파 정치군인들이 반발하고 빈민 30만명이 차베스를 적극 지지하면서 쿠데타 규탄 시위를 벌였다. 물론 처음에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십명의 사상자가 났지만 결국 진압에 실패하고 또한 장기간의 내전을 우려한 쿠데타 주도세력이 항복하여 결국 쿠데타는 사흘만에 실패로 돌아갔고 차베스는 국정에 복귀했다.

언론에서는 RCTV가 가장 강렬하게 차베스를 반대했다. RCTV는 쿠데타를 적극 옹호했던 방송국이었는데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엔 일방적으로 편파보도를 일삼다가 쿠데타를 진압한 차베스가 복귀하자 그 날 하루동안 뉴스 프로그램을 안보내고 오락프로그램으로 채웠다(...). 그 이후에 2004년 국민투표까지 차베스의 승리로 마무리 지어지면서 결국 2007년 재허가 심사에서 떨어졌고 현재는 일개 케이블 TV 방송국으로 전락했다. 물론 지상파 방송권 박탈에 대한 반발이 없던건 아니었지만 야당이 2005년 총선을 보이콧한지라(...) 당연히 반대 목소리가 힘을 얻을 수 없었다. 이 시기에 연이어 쓴 맛을 본 야권에선 2010년 총선에 적극 참여해서 개헌저지선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때 언론에게 당했던 경험 때문인지 차베스는 쿠데타 진압 이후에 자기편의 목소리를 내어줄 공동체 방송국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하지만 여전히 반대파의 저항은 거셌고 특히 차베스가 급진적인 정책을 펼칠까 우려한[20] 중산층들도 반 차베스파 대열에 적극적으로 가세하기 시작했다. 이 때 벌어진게 2002년 2003년 상반기에 걸쳐서 벌어진 자본 파업과 연이어서 벌어진 석유 파업으로 대기업과 노조(특히 석유노조)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총파업을 벌였던 것이다. 그로 인해 주요 공장들과 쇼핑물, 주요 상점들이 대거 문을 닫고 자본이 대거 유출되어 경제성장률 역시 마이너스 7-8%대(2002-2003년)를 찍는 등 경제상황은 막장에 이르게 되었으나 차베스는 이를 오히려 기회를 삼아 군대를 동원하면서까지 지지기반인 빈민층들에게 주요 생필품을 보급해주고 카라카스 한복판에 민중시장을 개설하며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애를 썼다. 결국 장기간 총파업은 기세가 시들해지며 실패로 끝나갔다. 이 석유파업은 "일반적인 노동자가 아니라 그 동안 기득권을 노렸던 석유관련업 종사자, 간부들의 파업"이라고 평가절하되고는 하지만 만, 이 파업으로 인해 차베스에게 해고된 국영 석유기업 PDVSA 임직원의 수는 18,000명으로 회사 총직원수의 40%에 달했으며 특히 연구개발부서인 Intevep의 인력은 80%가 해고됐는데, 차베스는 이에 더해 이들을 베네수엘라의 석유 관련 업종에 다시는 취업하지 못하도록 보복했고 해고당한 숙련노동자들과 연구개발자들이 먹고 살 길을 찾아 죄다 해외로 빠져나갔다. 그 결과 베네수엘라의 석유 생산량은 2000년대의 석유 호황기에 증가는커녕 정체 내지 후퇴했다. 이웃 국가 콜롬비아가 석유생산량을 두 배 가까이 늘릴 때 핵심 중의 핵심 국가산업인 석유산업의 생산성에 대해 이런 자해행위를 거리낌 없이 행한 덕분에 베네수엘라는 유가가 폭락한 2010년대 경제파탄을 겪게 된다.

총파업이 실패로 끝나가기 직전에 야권은 소환투표안을 대안으로 제시하면서 총 유권자 가운데 20%의 서명(254만명)을 얻어 차베스 소환투표를 청구하였고 진통 끝에 1년 뒤인 2004년 8월에 소환투표가 실시되었으나 때마침 베네수엘라가 호황을 누리기 시작했고 결국 선거결과는 2000년 대선에서 나타난 6:4 구도 그대로 나타나면서 결국 야권은 차베스 정권을 뒤엎는데 실패했다. 이 선거에서 반 차베스 표는 2000년 대선 때에 비하면 훨씬 많았지만(252만표-> 357만표). 이게 투표율 상승효과(2000년 대선 56%-> 2004년 국민투표 70%)에 힘입은거라 친 차베스파도 투표율 상승의 효과를 누려서 (357만표->499만표) 2000년 대선 때에 비해 훨씬 많은 표를 얻었다는 것(...).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지방선거에서도 여당 연정은 대승을 거두었다. 결국 연이은 패배에 힘을 잃은 야권은 2005년 총선을 보이콧했고 결과적으로 의회를 여당이 독차지하게 되면서[21] 차베스가 독주하는데 공헌(?)을 하게 되었다. 이후 야권은 자신들의 실책을 인정하고 뼈저리게 반성하게 된다. 반면, 차베스는 덕분에 '민주적으로' 권력을 독점적으로 행사할 좋은 기회를 얻게 된다. 차베스의 21세기 사회주의 정책의 대부분은 이 2005년 총선 다음부터 실행이 된다.

2006년에 여당 연정을 통일사회당이라는 하나의 정당으로 통합시키는데 성공한 뒤에 대선에서도 오일쇼크 시기 이후 최대의 경제호황에 힘입어 74.6%라는 높은 투표율을 기록하고[22] 62.9%라는 득표율(1947년 첫 직선제 대선 이후 최다 득표율)로 3선(5공화국 헌법상 재선)에 성공했다. 이후엔 야당이 2005년 총선을 일방적으로 보이콧해 여당이 의회를 거의 독차지하던 상황이었던 것도 있고, 압도적인 지지율에 자신감을 얻은 차베스는 헌법을 개정해서 연임 제한 규정을 철폐하려 했다. 차베스가 제시한 개헌안에는 선거참여가능 연령 18세에서 16세로 인하, 성차별 철폐와 인종차별 철폐 규정, 근로시간 단축(주당 44시간에서 36시간으로 단축), 여성선출직 확대, 사회보장제도 확충 등을 패키지로 담고 있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평가되었으나 행정부 권한 강화나 대통령 권한 강화 등의 법안이 들어가있어 부결되었다. 그 외에도 개헌안에 쓸데없이 너무 많은 조항을 담았고(그것도 A안과 B안으로 나누어서!) 개헌 국민투표 과정이 여당에 의해 속도전으로 진행되다보니 도저히 일반인들이 개헌안의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는 점도 한 몫했고, 낮은 투표율에 1%의 차이로 실패했기 때문에, 차베스 지지자 측에서 너무 안일하게 대처하여 패배했다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2008년 지방선거 압승과 함께 자신감을 얻은 차베스는 다시 교묘하게 개헌안을 비틀었는데, 드디어 2009년 2월 모든 선출직 공무원의 연임제한 규정 폐지안이 상정되어 국민투표를 통해 연임제한이 철폐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유가하락의 여파로 경기침체가 시작되면서 2010년 총선에서 의회 개헌선 확보에 실패하고 통일사회당의 득표율은 야당연합보다 1%의 득표를 더 얻는데 그쳤으며 공동여당인 베네수엘라 공산당과 합쳐도 득표율 50% 초반 수준으로 부진을 거두었다. 그래도 차베스의 경쟁력은 대단하긴 해서 대선후보 선두주자이긴 했지만...

3. 건강 문제

3.1. 암 투병

이렇게 장기집권의 토대를 마련했음에도 불구하고 골반 (골육종)에 걸려서 그게 다 허사가 되었다.[23] 2011년 6월 중남미에서 비교적 발달된 의술을 가진 쿠바에서 수술을 받기도 했으나 최대 2년의 시한부라는 보도도 나왔다. 수술 이후 다소 건강이 호전되었으나 2012년 2월 같은 부위에 암이 재발하여 또다시 암 수술을 받는다고 한다. 정확한 병세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4월 5일 부활절 미사에서 " 그리스도여, 당신의 가시 면류관을 저에게 주시면 제가 피를 흘리겠나이다, 당신이 십자가를 주시면 당신을 위해 십자가를 지겠나이다, 그러나 아직 나라를 위해 제가 할 일이 있사오니 저에게 생명을 주소서"라는 기도를 한 게 알려지면서 상당히 심각한 거 아니냐는 분석이 많다.

그러나 본인이 암의 완치를 선언하고 다시금 대권 도전을 선언, 2012년 10월 7일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야권 단일후보를 접전 끝에 꺾고 4선 연임에 성공했다. 생각보다 격차는 많이 났지만 그래도 야권이 44%의 득표를 얻었기 때문에 그 전의 세차례의 대선 때에 비하면 선전했다는 평이며, 선거의 여파로 그 동안 막말도 많이 하던 차베스가 슬슬 좀 유연한 방향으로 국정전환한다는 얘기도 나왔고... 그 전에 꼴까닥했지만 아무튼 2019년까지 20년 동안 그때까지 생존한다면 장기집권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그렇지만 암이 재발해 12월 11일 쿠바에서 수술을 받고 회복을 기다렸다. 쿠바로 가기 전 니콜라스 마두로를 부통령으로 임명하고 그를 후계자로 지명하긴 했지만 당장 2013년 1월 10일로 예정된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할 수 있는지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심지어 의식불명 상태라서 생명유지장치로 연명하고 있다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병에서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선거운동을 강행했으니 몸에 무리가 가는게 당연하다(...).

3.2. 취임식 논란

2013년 1월 6일에 나온 소식들에 의하면 니콜라스 마두로 부통령이 1월 10일 국회에서 취임선서를 못할 경우에는 대법원에서 대법관들 앞에서 할 수 있다는 예외조항을 강조했다고 한다. 사실상 차베스가 1월 10일에 취임식을 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라 논란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베네수엘라 헌법에는 국회에서 취임선서를 못할 경우 30일 이내에 재선거를 실시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어 야당에서는 국회의장을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삼고 재선거를 실시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차베스의 반대파들은 대법관들이 쿠바로 가서 병상에서 차베스가 취임선서를 해 대통령직을 유지하려고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결국 1월 8일 베네수엘라 정부는 차베스의 4기 대통령 취임식을 연기한다고 공식 발표했으며, 1월 9일 베네수엘라 대법원도 취임식 연기가 합헌이라고 판결했다. 사실상 차베스가 회생해서 국정에 임하는 건 어려워졌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 일단 무기한 취임식 연기로 권력 이양이나 차베스의 회생에 필요한 시간을 벌기는 했다는 분석이지만 야당이 가만 있을지는 의문. 게다가 차베스가 만약 죽기라도 할 경우 정권의 2, 3인자들인 마두로 부통령과 카베요 국회의장이 권력다툼을 벌일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 제기되어 베네수엘라의 정국은 더욱 혼미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중남미의 좌파정권들을 주도하는 차베스였던지라 베네수엘라의 좌파정권이 무너질 경우에는 다른 중남미 국가들에도 파급효과가 클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일단 국정은 마두로 부통령이 대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두로 부통령이 중남미 국제기구 회의에 참석해서 차베스의 서한을 대독한 점으로 미루어 마두로 부통령으로의 정권 이양이 진행중인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있다. 일각에서는 마두로 부통령이 미국에 밀사를 보내서 관계 개선을 모색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마두로 부통령이 보낸 특사가 미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의 중남미 책임자를 만나서 2005년에 추방당한 미국 마약단속국 요원을 복귀시키는 문제를 협의했다고. 이는 디오스다도 카베요 국회의장을 견제하기 위한 방책이라고 알려졌는데 미국 마약단속국의 블랙리스트에 카베요 국회의장이 올라 있어서 이런 방책을 취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마두로 부통령은 차베스의 상태가 급 호전중이라면서 이런 모든 의혹을 부인했다.

2월 18일, 차베스는 쿠바에서 베네수엘라로 귀국했다. 그러나 귀국하자마자 카라카스의 군 병원에 입원해 그의 상태에 추측이 나돌던 상황. 결국 2월 21일 에르네스토 비예가스 통신정보 장관이 라디오에서 발표한 성명문에서 차베스가 호흡기 계통에 문제가 있으며 건강 추세가 호의적이지 않다고 밝혀 건강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음을 인정했다. 이를 밝힌데 대해서는 차베스의 건강이 좋지 않기는 하지만 죽기 일보직전이라는 추측을 차단하기 위한 조처로 풀이된다.

2월 27일, 미주기구 주재 전 파나마 대사 기예르모 코체스가 차베스의 임종이 멀지 않았거나 이미 사망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베네수엘라 정부는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하며 진화에 나섰지만...

4. 사망

3월 6일 사망속보가 보도되었다. 현지 시간으로 3월 5일[24] 오후 4시 25분에 수도 카라카스의 군 병원에서 현지 나이로 58세를 일기로 사망했으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입술을 움직여 남긴 유언은 " 죽고 싶지 않다. 제발 날 죽게 내버려두지 말아다오"였다고, 하지만 이게 진짜 유언이었는지는 논란이 많다.[25]

장례식은 3월 8일 국장으로 엄수되며 유해는 방부처리되어 수도에 있는 혁명박물관(구 군사박물관)에 영구 전시될 예정이었다. 기사 그러나 정작 차베스는 생전에 유해의 영구 보존을 반대한 것으로 알려져 집권 세력이 정권 유지를 위해 고인의 뜻을 무시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엠버밍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유해를 영구 보존하는 방안은 그냥 배제되었다. 결국 이는 선견지명이 되어버렸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대통령 사망일로부터 30일 안에 다시 선거를 치를 예정이다. 차기 대통령으로는 니콜라스 마두로 부통령과 야권 실세인 엔리케 카프릴레스가 물망에 올랐는데, 4월 14일에 치러진 대선에서 마두로 부통령이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다. 하지만 마두로는 차베스 사망이라는 최고의 호재를 가지고도 야권후보와 고작 1.6%포인트의 득표율 격차를 기록하는데 그쳐 사실상 패배나 다름없는 승리를 거두었다는 평가다. 이는 즉, 나중에 현 집권당이 선거에서 야권에게 밀릴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얘기나 다름없다는 얘기이기 때문에 마두로 입장에서 차베스 정책 상당부분 재검토를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이후에 급속한 물가상승과 저조한 경제성장률, 저가 생필품들의 부족문제와 이로 인한 암시장의 활성화로 경제상황에 어려움이 가중되는 상황이었지만 2013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강제세일 조치를 취해 지방선거에서 승리를 하면서 입지를 탄탄하게 다져놓을 걸로 보였다. 하지만 야권의 시위로 다시 지지율이 하락하고 있었고 시위가 수습된 뒤에 경제통제완화조치를 취했는데 이번에는 생필품의 외부밀수로 인한 소비재 부족 문제 때문에 다시금 골머리를 앓고 있는 중.

정작 본인의 이른 죽음으로 모든 조치가 허사가 된 것을 보면 참으로 인생무상. 결과적으로 영국의 마가렛 대처(1979-1990년 집권)보다야 오래 집권하긴 했지만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1981-1995년 집권)과는 동급으로,[26] 독일의 헬무트 콜(1982년-1998년 집권)보다는 2년 적게 집권한 꼴(...). 하지만 이른 죽음으로 인해 그가 한 짓의 결과가 어떻게 났는지를 보지 않고 저세상으로 도망가 버린 상황이 되어버렸다.

5. 거침없는 반미 외교

나는 매일 더욱 확신하게 되며 내 마음 속에는 한 점의 의심도 없습니다. 이전부터 수많은 지식인들이 말해왔듯이, 우리는 자본주의를 넘어서야 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사회주의를 통해서만이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은 민주주의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하지만 미국이 강요하는 방식의 민주주의는 아닙니다.

특유의 거침없는 말투와 내뱉기를 좋아하는 성격. 특히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미국과 쌓인 감정이 많기 때문에[27] 미국을 도발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28]

미국 남부가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막대한 피해를 입자 "불쌍한 미국을 위해 우리가 지원금 좀 보내줄까?"라며 약올리기도 했고 실제로 지원금을 보냈다(...). 또한 후에 CITGO를 통해 미국 북부 저소득층 가정에 난방용 석유를 지원하기도 했다.

유엔 연설문에서 전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 악마"라고 비난하였으며 그 전날 부시가 연설했다는 점을 이용하여 유황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라는 희대의 드립을...당시 영상을 보면 박수갈채가 엄청났다. 부시는 서둘러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반면 버락 오바마악마가 아니라고 하였다(자신과 방향이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악마라고 할 준비는 되어있는 듯). 이때 책을 주며 우호감을 표시하긴 했으나 나중에 다시 오바마에게 실망하였다고 발언했다.

외교적인 면에서는 이웃 국가 콜롬비아를 자국의 이념 성향에 맞추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지막지하게 비난했다(콜롬비아는 대표적 남미의 친미성향국가이다.). 그는 콜롬비아의 대통령[29]을 "미제의 꼭두각시"라고 멸칭하는 등 수많은 언행을 남겼다. 그러다가 2010년 8월에 산토스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화해했다. 천안함이 북한의 공격으로 침몰하자 전 세계가 북한을 규탄하는 가운데 혼자서 미국의 소행이라고 미국을 비난하는 기행을 벌이기도 했다.

또 자신의 우상이나 다름없는 쿠바의 카스트로는 말할 것도 없고 이란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알리 하메네이, 시리아 바샤르 알아사드, 짐바브웨 로버트 무가베, 벨라루스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리비아 무아마르 카다피, 심지어는 당시 국제적으로 고립된 상태였던 이라크 사담 후세인까지 그야말로 북한을 제외한 전세계 반미 지도자란 지도자는 다 만나고 다니면서 친분을 과시했다.

다만, 차베스의 반미외교는 진정성 없는 그저 레토릭이라는 의견도 있다. 차베스 집권기간중 대미 무역량은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늘어나는 모습까지 보였기 때문. 달리 말하자면 베네수엘라 경제의 대미 의존도는 개선되지 않았고 오히려 심화되었다. 실제로 차베스 이후로도 맥도날드나 코카콜라 같은 미국 기업이 철수하지 않고 멀쩡히 영업하기도 했고...[30]

한편으로는 반미외교를 펼치면서도 중남미 각국에 석유를 지원하며 영향력을 강화하고[31] 특히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와 에콰도르의 라파엘 코레아가 당선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가 죽고나서 "콜롬비아 마르크스주의 게릴라 세력과 협력해 미국 사회에 코카인을 범람시켜라”라고 지시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

5.1. 카다피, 김정일 옹호 및 추모

2011년 리비아 민주화 운동 카다피를 지지하기도 했다.

2011년 10월 20일 카다피가 죽자 이를 슬퍼하며 "카다피는 전 생애 동안 혁명가·순교자·전사로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

북한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고 했다. 김정일 생전에 북한을 방문하려고는 했으나, 일정이 맞지 않아 그만둔 바 있으나, 여러 차례 김정일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2011년 12월 김정일이 죽자 "김정일 동지의 사망에 진심어린 애도를 표시한다”며 “북한 인민이 미래를 번영과 평화로 이끌어갈 능력이 있음을 확신한다"고 했다. # 2006년에 방북하려다가 핵실험 때문에 취소하기도 했다.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도 2014년 3선에 압도적으로 성공했지만 카다피에 대하여 민중 학살이라는 문제가 있다고 까기도 하고 북한과는 외교관계를 맺지 않는 등 독재자를 견제하며 국제 여론도 신경썼다.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도 북한과 수교는 했지만[32] 대놓고 북한하고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이거나 차베스나 에보 모랄레스보단 좌파 및 반서방 성향을 적게 보였으며 자신의 정치 노선에서 어느 정도의 선을 지키는 성향이 있었다. 이는 당시의 에콰도르나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같은 남미의 좌파정권들도 마찬가지였다.

6. 평가와 정책

한 때는 베네수엘라의 구세주이자 미국에 대항하는 지도자로 평가받았으나 그의 사후 미국의 경제제재 + 그의 실정으로 쌓인 문제점들이 폭발하여 베네수엘라가 어지간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내로라하는 취약국가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남미에서는 말 그대로 독보적으로 비참한 국가로 전락한 현재는 포퓰리즘 반면교사를 논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무능한 독재자로 평가받고 있다.[33]

차베스의 독재는 기본적으로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 대중독재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쿠데타로 정계에 등장했다는 점, 그리고 쿠데타 실패에도 불구하고 인기를 끌며 순식간에 선거로 권력을 장악하고 대중독재를 했다는 점에서 스펙트럼과 악행의 수위만 다를 뿐 권력 장악의 과정은 아돌프 히틀러와 매우 유사하다. 실제로 차베스 사망 10년이 지난 현재도 친미 성향의 과이도보다 친 차베스 성향의 마두로가 인기가 더 높은 이유가 있는 것. 기본적으로는 민주 사회에서 국민의 지지를 얻는 정책 기조를 나쁘게 볼 수는 없다. 문제는 그 다수의 지지라는 이름으로 잦은 국민투표를 벌여 헌법을 고치고 대통령직의 권한을 강화하는 등 대중독재 행보를 보였다는 것이다.

베네수엘라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국민소환투표제가 있어 대통령 직접 탄핵도 가능하다. 실현 가능성은 둘째치더라도 말이다. 2004년에 국민소환투표가 이뤄졌으나 부결되었다. 정작 후임자가 그꼴을 볼지도 모른다.

차베스의 경제는 기본적으로 자원을 팔며 복지를 확충하는 데에만 신경을 써 본질적인 국가 경제 체제의 개선은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고, 이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베네수엘라의 경제에 사형 선고를 내리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그가 살아있을 때부터 이러한 포퓰리즘과 반미 정책은 많은 사람들의 우려를 샀으나, 베네수엘라 국민의 지지 끝에 차베스의 연합사회당 정권을 이어갔다. 그리고 차베스 사후 미국의 경제 제재와 셰일가스로 유가가 떨어지며 베네수엘라의 경제는 말 그대로 북한에 비견될 정도의 막장으로 굴러떨어져버렸다.[34] 그래서 차베스는 아돌프 히틀러와는 정반대의 의미로 포퓰리즘과 성숙하지 않은 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여주는 가장 극단적이고 파괴적인 사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차베스가 석유로 얻는 부를 빈자들에게 나눠주느라 자본가들과 대립하여 베네수엘라 개혁에 실패했다는 옹호론도 존재한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정말 '자본가'들이 그 정도로 국가경제를 실패로 밀어넣을 '힘'이 있다면 그들을 어르고 달래 협조를 끌어내야지 대놓고 척을 지는 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정책이다. 더군다나 차베스의 반대 블록은 단순히 자본가뿐만이 아니라 상당수의 중산층이 포함된 광범위한 집단이었다. 거칠게 말하자면 차베스 정권은 국민의 절반을 완전히 적으로 돌려놓고 굴러간 정권이었다는 것이다.

차베스가 자원부국병을 고치기 위해 뽑혔으며 무려 15년에 달하는 4번의 임기[35] 동안 집권했음에도 실패했다는 점, 차베스 사후 그의 뒤를 이은 같은 부류 정치 세력이 차베스와 대동소이한 정책을 펴고 있음에도 베네수엘라 하층민들의 상황이 여전히 막장인 점, 지도자 한 사람의 리더십(이라기보단 사실상 유가)에 좌지우지되는 정책 성과는 결국 국가 구조 자체의 개선에 실패했다는 반증이라는 점, 그리고 그가 쿠데타 시도를 통해 정계에 등장했을뿐만 아니라, 보수파에게 당한 것보다 훨씬 크게 되갚아 주면서 (준)독재자가 된 점 등 그의 집권 후 행보와 국정 운영은 결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베네수엘라라는 국가의 실패는 국가 자체의 고질병 뿐만 아니라, 차베스의 정책과 노선 자체의 근본적 한계[36]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봐야 한다.

베네수엘라의 몰락은 저유가 때문이지 경제정책 때문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세계경제는 많은 부침을 겪기 마련이고, 정부는 이에 대비해야한다.[37] 그는 막대한 무역수지흑자 시기를 지났다. 그것을 밑거름 삼아 산업을 고도화하지도, 자원 의존을 낮추지도 못 하고 꼬꾸라졌음은 무능의 증명밖에 되지 않는다.이것이 차베스가 죽은 이후에 일어났기 때문에 마두로가 아닌 차베스였다면 다른 결과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결과론도신격화 있지만[38] 피해는 모두 국민의 몫이다.

6.1. 언론탄압

의외로 2기 집권 때까지만 해도 언론에 손을 별로 대지 않았지만 3기 집권 때 들어서 차베스는 언론을 심하게 탄압했는데 정부 당국자를 공격하는 보도에 대한 법적 조처를 강화했고 "공중의 불안을 조성"하는 보도는 금지시켰다. 또한 정부를 비판하는 언론, 웹사이트는 송출 중단 내지는 폐쇄하는 등 탄압하였다. 대표적으로 현지에서 가장 오래된 민영화 방송국이자 반 차베스 논조를 유지했던 RCTV의 방송허가권(정확히 말하면 지상파 면허만)를 2007년 갱신해주지 않은 것. 당연히 RCTV는 이날부로 지상파 방송이 종료되고 그 자리는 TVes로 대체되었다. 당시 차베스는 RCTV의 텔레노벨라였던 <라디오 로첼라>에 대해 '자본주의를 부추기는 독성물질'이라 비판했다고 한다.[39]

차베스의 RCTV 탄압에 항의하는 학생 시위대가 많았는데 이들은 이후 인민의지당이라는 정당을 창당한다. 차베스는 인민의지당을 거세게 탄압했지만, 인민의지당의 지지율만 올리는 결말로 끝났다.

차베스가 3기 집권 때부터 언론을 손보기 시작한 것은, 2002년의 쿠데타에서 언론(특히 RCTV)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해당 내용을 설명한 LA타임즈의 기사 RCTV는 사전에 쿠데타에 참가한 군 장성들의 기자회견을 녹화했으며, 교묘한 카메라 엥글로 경찰의 저격[40]에 맞서 응사하는 차베스 시위대를 마치 차베스 시위대가 반 차베스 시위대에게 발포하는 것으로 보이도록 사실을 왜곡하는 등, 쿠데타를 주동했다. 또한 빈민들이 차베스의 복귀를 요구하는 시위 등은 전혀 보도하지 않고 프리티 우먼 등의 영화를 방영하여 민중들의 눈과 귀를 가리려고 시도했다. 이렇게 노력했는데도 쿠데타는 실패했다.

2002년 4월 11일에 일어난 유혈참극으로 20여 명이 사망하고 148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는데,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현실은 달랐음에도 보수 언론들은 차베스의 책임으로만 몰고 갔다. 그러나 차베스 반대파의 가두행진과 총기 발포를 통한 혼란 사태는 반대파 측에서 쿠데타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한 것이었다. 이후 외신기자의 폭로로 총격사건은 차베스 반대파들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사망자 수를 언급하는 기자회견 방송을 미리 녹화하고 있었다.

다른 독재국가였다면 쿠데타 실패 이후 바로 RCTV는 폐쇄되고 경영진은 감옥에 갔을 테지만, 그래도 차베스는 그 방송국이 2007년 지상파 면허 갱신 시점까지 계속 지상파 방송을 하도록 허용했다. 그리고는 뒤끝 작렬하여 지상파 면허 갱신을 불허했고 차베스 옹호자들 입장에선 RCTV의 지상파 면허가 불허된 것은 사주인 마르셀 그라니어의 삽질 탓이 가장 크다. 이에 대해서는 다큐 'The revolution will not be televised'를 참고할 것.

이후에도 베네수엘라의 주요 지상파 방송국에서 차베스 비판은 금기시되었다. <베네비시온>은 원래 차베스를 적극적으로 비난하고 2002년 쿠테타와 2003년 상반기의 석유 파업도 적극적으로 지지하여 친정부 진영의 광고를 거의 받지 않아 2004년 허가권 갱신 문제로 갈등을 빚었지만 대통령 소환투표를 2개월 앞두고 시스네로스 베네비시온 사장이 친구인 지미 카터의 중재하에(...) 미디어 휴전에 합의하여[41] 차베스를 반대하는 기사나 논설을 대폭 줄였다(덕분에 RCTV 폐쇄 이후 RCTV의 광고가 베네비시온에 쏠려서 엄청난 호황을 누렸다.). 유일하게 <글로보 비시온>이라는 방송국은 반 차베스 논조를 유지했으나 사장이 부패혐의로 구속되었다 풀려나는 등 곤란을 겪고 있다.

대신 친 차베스 방송국은 대폭 증가되었는데 차베스가 처음 대통령에 당선될 당시 관영 방송국은 관영 TV방송국은 1곳, 라디오 방송국은 2곳이었으나 2007년에는 관영 TV방송국은 4곳, 라디오 방송국은 7곳으로 크게 늘어났다. 논조는 당연히 친차베스, 집권 여당적인데, 어쩔수 없다는게 함정. 베네수엘라는 2000년대 이후 철저히 친차베스와 반차베스로 양분화되었기 때문에 언론 역시 옹호 아니면 비판이다.

평소에만 이러면 모르겠는데 선거때가 되면 물만난 고기처럼 상대후보를 물어뜯는다. 예를 들어 2012년 치러진 대선때는 상대후보 카프릴레스가 동성애자라느니 조상중에 유대인이 있으니까 유대인의 첩자라느니 시오니즘은 우리의 적이라느니 하는 방송을 국영방송에서 대놓고 틀어준다.

차베스 지지자들은 이게 집권 초기 반 차베스 언론에게 심하게 데였던 영향이 컸다고 실드를 치는데, 언론사가 무슨 말을 하든 정부가 그것에 관여할 권리는 없다. 방송국을 강제로 국유화하거나 지상파 중개 허가권을 갱신하지 않는 등의 조치는 언론의 자유에 대한 치명적인 침해다. 물론 차베스는 RCTV를 국유화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단지 지상파 방송을 하지 못하게만 했을 뿐이지 프리덤 하우스의 발표에 따르면 차베스 정권 아래서 베네수엘라의 국민권리와 시민자유 지수는 매년 지속적으로 악화됐다. 2010년대에는 유신정권 말의 한국과 맞먹을 정도.

야당 지도자를 향해 '네오 나치'라느니 '양키'라느니 '파시스트'라느니 하면서 딱지 붙이기를 서슴치 않았던 것도 비판점 중 하나. 아마 한 나라의 지도자가 저리 천박한가?! 라는 질문이 들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차베스의 전략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물론 차베스는 메스티소에 바리나스라는 촌구석 출신이었다. 하지만 부모가 둘다 교육자이고,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교양이 원래 없거나 못배운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대중선동적 목적에서 민중들이 즐겨 쓰는 용어나 말투를 차용하여 그들과 동화되고자 한 전략에 기인한 것이다. 차베스는 다른 부분에서 포퓰리스트인 것이 아니라 이런 언사에서 대중인기영합주의자인 것이다.

6.2. 경제정책의 실효성

생활개선 프로젝트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자국과 OPEC 국가의 석유 수출량을 감소하도록 유도하여 유가를 급등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고유가가 끝나고 저유가에 도달하자 차베스의 대다수 개혁안은 저유가로 인한 재정 부족으로 실행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즉, 차베스 집권기에 오히려 석유의존도가 더 심해졌다는 증거다. 조선일보 기사

차베스의 정책으로 인해 외환보유고가 줄어들었으며 자국의 중산층/부유층의 탈출 행렬이 꼬리를 이었다. 게다가 그의 무계획적인 경제 정책으로 인하여 외환보유고가 줄어들어 기업들의 경영이 어려워졌다. # 하지만 이는 단순히 포퓰리즘 정책 때문이라고 보긴 어려운 게 비슷한 정책을 펴고있는 볼리비아와 에콰도르에선 오히려 자국기업의 투자가 활성화되어있고 위 문단에서 볼 수 있듯이 집권 초기에는 거시경제정책을 보수적으로 집행했으며 그 이전에도 부유층-중산층과 차베스파 간의 극심한 대립과 이에 수반한 자본 유출로 경제가 파탄 직전에까지 몰린 적이 있기 때문에 단순히 빈곤층에게 퍼주기 위한 포퓰리즘 정책 때문에 자본이 빠져나간다고 보긴 어렵다. 다만 차베스의 급진적인 언사라든가 기업측에서 행한 석유-자본 파업으로 상당수 기업인들과도 차베스간의 악감정이 깊어지면서 자본 유출이 심해진 것도 사실이긴 하다. 그리고 2003년 외화유출을 막기 위한 외환 통제 정책이 라틴권 특유의 느긋한 업무 환경과(...) 겹치면서 생필품 부문을 제외한 부문은 환전이 빨리 진행이 안되다보니 환율이 비싼 암시장에서 환전을 해야하기 때문에 수입기업들의 경영에 차질이 생긴 것도 맞으며 이 시기에 자본수지 적자를 경상수지 흑자로 메꾸는 기형적 구조가 형성되기도 했다.

이코노미스트의 2013년 3월 5일자 기사에 따르면, 차베스 집권기간중 경제지표는 그리 호의적이지 못하다.

차베스 집권기간 중 베네수엘라의 빈곤율이 급락한 것은 맞지만 석유매장량 세계 1위라는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도 같은 기간 다른 중남미 국가들( 페루 등)의 빈곤율 감소에 비해 그리 눈에 띄는 성과라고는 볼 수 없으며 경제성장률 역시 불안정한데다가 평균 2.7%로 그리 높은 편은 아니다.[42]게다가 인플레이션률은 최고 30%에 육박할 정도로 고공행진을 거듭했다. 물론 이 지표도 긍정적으로 보려면 볼 수 있겠지만 문제는 베네수엘라가 세계 5위권 산유국임에도 이런 성적을 냈다는 점이다.

물론 그 반론 역시 있다. 2001-2003년에 걸쳐 석유-자본 파업이나 석유공사의 파업으로 상당부분 까먹은 걸 감안해야 한다는 점, 빈곤율 감소에서 페루와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국가들과는 상당히 차이가 나며, 대학진학률, 문맹률, 기대수명, 산모-산아 사망률, 등등에서 베네수엘라 역사상 가장 급진적인 발전을 가져왔다는 견해도 있다. 차베스 때 그 이전 20여 년과 비교해 가장 낮은 인플레이션 수치를 보였으며, 베네수엘라가 기본적으로 인플레이션이 높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당연히 석유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베네수엘라가 ALBA 및 이 국가들과의 연대를 위해 쏟아부은 돈들도 감안해야 한다는 주장 역시 있다. 볼리비아와 에콰도르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제정책을 펴고 있는데도 상당히 안정적인 성장을 거두고 있는 걸 보면 무조건 좌파 정책이라서 문제란 이야기는 아니다. -그냥 차베스가 존나 무능한거다.-[43]

하지만 차베스 사후의 인플레이션은 더 심각해졌으며, 차베스가 신봉한 이중환율제가 그에 불을 붙였음은 역시 사실이다. 군인이었던 차베스의 경험 부족으로 인한 국정운영 미숙이나 격렬한 대립도 한 몫했다.

6.2.1. 2015년 석유가 폭락 이후 평가

베네수엘라의 수출의 96%를 차지하고 있던 석유가가 높게는 150달러를 기록하는 등 100달러 선에서 날아다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유가가 30~40달러 선을 밑돌아 생산원가도 나오지 않게 되었다. 수출액의 96%가 날아가버린 셈. 이에 따라 2015년 베네수엘라 경제는 디폴트 선언 위기까지 몰려버렸다. GDP는 -10% 역성장했는데, 물가는 150% 올랐고 일부 기관에서는 200% 올랐다고도 주장한다. 물론 베네수엘라 정부 주장은 70%대 상승이라지만 아무도 이 발표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우고 차베스의 사후 뒤를 이은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은 차베스주의 정책을 지속하였고, 국민은 결국 2015년 총선에서 야권연합에 의석의 2/3를 주는 선택을 하였다. 결과적으로 모든 경제정책은 높은 석유가에 기댄 것이고, 석유가가 낮아지면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2017년 5월에는 마두로 정권에 반대하는 베네수엘라 대국민 시위 현장에서 시위대에 의해 그의 동상이 끌어 내려졌다. #

6.3. 민주주의의 후퇴와 정치적 양극화 심화

친정부 민간조직인 개인 민병대 창설은 사실상 차베스의 사병 창설이라는 반차베스파의 비판도 있다. 덧붙이자면 치안 상태가 개판인 상태에서 민병을 창설한답시고 민간에 총기를 대량으로 풀었기 때문에 베네수엘라의 총기범죄율은 줄어들지도 않았고 결과적으로 정치폭력과 범죄조직들이 대거 판치면서 경제까지 좀먹고 있다. 물론 민병대에서 무기가 유출되었을 개연성은 있지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하는 점은, 2014 GUARIMBA사태나 여러 정치인사들 암살사건을 보면 대부분 여권(친 차베스)정치인이나 지지자가 암살 당했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Robert Serra가 있다. 참고로 최근 야권 인사인 루이스 마누엘 디아스(Luis Manuel Diaz)도 암살당했는데, 조사 결과 그는 원래 갱단과 연관되어 있었고, 이 때문에 반대파 갱단에 의해 암살당했다고 한다.

거기에 위에 언급되던 급진적인 정책과 막가파적인 언행은 야당의 반발을 불렀고 야당이 전면적으로 투표를 보이콧함에 따라[44] 2005년 총선의 투표율은 25% 정도로 매우 낮은 기록을 갱신하였는데 이는 2000년 총선 투표율 56%보다 뚝 떨어진 수치였다. 그리고 2005년 총선 결과 165석의 베네수엘라 국회에는 2010년 총선때까지 야당은 부재상태가 된다.

흥미로운 점은, 휴먼라이츠워치의 미주 담당관인 호세 미구엘 비반코마저도 "야권 지도부가 무슨 생각을 해서 보이콧했는지 모르겠다"며 "이런 상태에서는 국제적인 지지를 야권이 얻을 수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또한 CNE(선거관리위원회)의 발표에 따르면 공식 보이콧에는 정작 후보자중 10%밖에 참가하지 않았다고 발표하면서...어차피 질 게임 확실히 GG를 친 셈이 되어 버리고 만다. 결국 이 덕분에 여당은 21세기 사회주의 정책을 본격적으로 펼칠 기회를 얻는다. 분명 자유민주적 질서에서 야권의 견제가 사라졌기 때문에 이후 차베스 정부의 행보는 독점적 권력 행사인 것은 맞으나, 절차적으로 본다면 문제가 없었고, 무엇보다 야권의 자살골에서 비롯된 결과였다.(그러나 투표 결과에 따른 일당독재 식의 구조에 따라 여권과 차베스의 태도가 권위주의적으로 바뀐점은 불편한 진실이다. 이 부분에서는 완벽한 민주적 질서에 입각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또한 자신의 재선을 위해 국가재정과 공무원을 동원했다는 비판도 받았으며 2010년에는 "베네수엘라가 마약 밀매자들의 천국이 됐다"고 비판한 전 대선후보 오스왈도 아바레스 파즈를 거짓정보 유포혐의로 체포하였다. 군대의 지지가 높으며[45] 군인 출신이기 때문에 자신의 정책 추진에 군을 동원하기도 했다.[46]

프리덤 하우스 세계의 자유 보고서에 따르면[47] 산정 초기 (1972년) 이후 1980년대까지는 정치적 권리 지수와 시민적 자유 지수의 평균이 1.5~2점[48]으로 '자유'로 분류되다가 1998년 2.5점에서 차베스가 취임한 해인 1999년부터 4점으로 악화되었다. 2008~2010년 동안 또 악화되어 정치적 권리(PR)와 시민적 자유(CL) 지수 모두 5점을 기록하더니, 2017년 보고서에서 정치적 권리 지수가 6점이 되면서 '자유롭지 않음'으로 분류되었다. 2005년[49]에는 PR 25점, CL 34점, 총 59점을 기록했으나 2014년[50]에는 PR 14점, CL 24점, 총 38점으로 9년 만에 21점이나 추락했다!

6.4. 국제인권단체와의 갈등

집권 초기 차베스의 정책은 여성 인권 등을 향상시키는 등 국제단체로부터 호평을 받았으나 갈수록 악화되었다. 앰네스티나 휴먼 라이트 와치, 프리덤 하우스 같은 인권단체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 차베스는 이에 굴하지 않고 2008년 휴먼 라이트 와치의 대표를 구금하고 추방하였으며 2010년에는 서방의 지원을 받는 국내인권기구들도 불법화하였다.

또한 베네수엘라 대법원은 외국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는 개인이나 단체는 "반역죄"로 처벌할 수 있도록 했으며[51] 의회는 국제사회의 자금 지원을 받는 단체들이 정치적 권리를 옹호하거나 공인을 감시하는 것을 금지했고 정부 기구를 공격하는 외국인을 초청하는 것도 금지시켰다.

앰네스티의 베네수엘라 인권보고서에서 보이는 베네수엘라의 모습도 화려한데 인권운동가에 대한 미행 및 공격, 정치적 목적의 민간인 체포 및 구금 정도는 기본이다. 베네수엘라 통계에 따르면 2009년 한해동안 약 21,000명의 사람들이 살해당하거나 것으로 추정되고 여기에 경찰의 개입이 있다는 의혹이 있다. -진짜 가지가지한다.- 2011년 1월에서 11월까지 감옥에서 사망한 죄수는 352명에 달하는 것으로 산정되었다.[52]

6.5. 삼권분립의 약화

1999년에 집권하자 마자 기존의회를 해산하겠다는 공약에 따라서(사실 위에서 언급하듯 1998년에 치러진 총선이 대선보다 한달 일찍 치러져서 의회구성이 여소야대가 된 점도 한 몫했다.) 국민투표 가결을 통해 131명으로 구성된 제헌 회의를 성립하였는데 제헌 회의는 "사법부 임시 위원회"를 설치하더니 정부의 타 기관의 문의가 필요없이 판사를 제명할 권력을 승인받았다. 이에 따라 190명의 판사들을 부패 혐의로 기소 및 제명했고 "사법 위기"를 선언하며 기존 국회의 업무를 정지시켰다. 이때 입법부는 활동을 중지하였고 기존 국회의 권한을 빼았고 제헌의회와 충돌하는 양상을 보이자 아예 해산시켜버렸다. 그리고 기존 입법부의 기능은 제헌 회의에서 구성된 7명의 위원들이 전담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0년 대선과 함께 총선을 다시 치렀다.

물론 제헌회의의 가부와 의원 선출은 국민투표를 통했으니 정당성이 있다고 평가할 수 있지만 애초에 삼권분립의 취지는 한 기관의 폭주를 다른 기관이 제어한다는 의미가 있다. 또한 역사상 독재정권이 국민투표를 악용한 사례가 다수 있기 때문에 투표여부 자체가 절대적인 정당성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이후에 헌법 재판관의 정원을 20명에서 32명으로 늘리면서 친차베스 인사를 밀어넣어 사법부를 장악했다. 그리고 2009년에는 반차베스 성향의 여성 판사였던 마리아 아피우니(María Lourdes Afiuni)를 부패 혐의로 체포한 뒤 미결 상태에서 교도소에 수감시켰다. 참고로 그 교도소는 아피우니가 직접 판결을 내린 살인범이나 마약 밀매자가 가득한 카라카스 인근 감옥이었다. 아피우니의 변호사에 따르면 그녀는 교도소에서 강간을 비롯한 온갖 학대를 당한 나머지 임신했다가 낙태했으며 항문, 방광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 체포에 정치적 동기가 있다고 앰네스티 등 국제인권단체에서 지적했고 이후 아피우니는 2011년 가택연금 처분을 받고 교도소를 나왔지만 피고가 불출석한 상태에서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UN 인권사무국에서도 차베스를 비판했다.

6.6. 비밀경찰

베네수엘라의 정보기관인 DISIP(Dirección Nacional de los Servicios de Inteligencia y Prevención)의 운영과 관련해서 국제인권단체로부터 비판받은 적이 있다. 피의자에 대한 즉결처형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홍수가 일어난 현장에서 절도를 벌이다 발각된 소년을 DISIP 요원이 즉결처형한 사실이 알려져 국제인권단체가 당시 집권자인 차베스에게 진상을 조사하라는 공개서한을 보낸 적이 있다. 물론 차베스는 쌩깠다.

DISIP는 1969년 설립된 기관으로 차베스가 이들을 만든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들을 계속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볼리바르 국가정보원(Servicio Bolivariano de Inteligencia Nacional)으로 조직개편되었다. 이들이 진짜 비밀경찰인지는 평가가 엇갈린다. 유니폼이 별도로 있고 공공장소에서 대놓고 활동하므로 비밀경찰은 아니라는 의견이 있지만 비밀경찰 항목에서도 보듯이 정체가 은밀하지 않다고 비밀경찰이 아닌 게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판사 '마리아 아피우니'의 체포 당시에도 이들이 출동했다고 한다.

6.7. 부정선거(?)

2004년 재신임 투표 당시 차베스는 60%의 지지율로 재신임에 성공한 바 있는데 이 투표결과가 출구조사결과(불신임 60%)와 정반대였기 때문에 조작이라는 의견이 꾸준히 나왔다.[53] 차베스를 반대하던 시민단체에서 그런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라면 흘려들을 수 있겠지만 나중에는 일부 학자들이 아예 통계적 근거를 들면서 부정선거 의혹을 증폭시켰다. 예를 들어 MIT 대학에서 발간하는 통계 학술지 '통계과학(Statistical Science)'에서는 2011년 11월호에서 다수의 논문을 게재하여 2004년 재신임 투표의 부정선거 의혹을 통계학적으로 파헤쳤고 상당부분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통계 과학' 2011년 11월호 보러가기

다만 당시 국민투표에선 국제 선거감시단이 선거 과정을 일일이 모니터링하고 있어서 굳이 부정선거로 국제적으로 망신을 살 필요가 없고 더군다나 그 이전에도 차베스가 웬만한 선거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54] 굳이 귀찮게 부정선거를 시행할 이유도 없다. 사실 이 논란이 커진 이유가 좀 웃긴 게, 당시 국민투표 때 시행되었던 전자개표기의 지문 인식에 오류가 생겼다. 원래 투표는 6시까지였지만 문제 투표기를 수리하거나 교체하는 과정 때문에 자정이 되어서야 겨우 투표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참고로 이러한 투표기기의 문제점은 친 차베스 지역의 투표소든, 반 차베스 지역의 투표소든 가릴 거 없이 일어났다. 그러니까 쉽게 얘기하자면 그냥 음모론(...).

6.8. 미션 볼리바르

차베스 시절에 시행하기 시작한(혹은 복구한) 이러저러한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통틀어서 미션 볼리바르라는 명칭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세부 프로그램 명칭도 위인들 이름을 딴게 많다. 대충 소개하자면 저가에 생필품을 보급하는 할인점 메르칼을 가맹점 형태로 대거 설치했고(미션 메르칼) 이외에도 쿠바로부터 의료지원을 받아서 무료로 빈민층들에게 의료혜택을 베풀어주는 미션 바리오 아덴트로, 돈이 없어서 공부를 하지 못했던 이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교육 프로그램 미션 로빈손과 미션 리바스, 미션 수크레가 있고 토지개혁이나 저가주택공급을 위한 미션 과이카이푸로와 미션 하비타트, 협동조합 개설프로그램 미션 부엘반 카라스 등이 있다. 이러한 복지지원 프로그램들을 시행하면서 빈민층들과 원주민들의 삶의 질과 교육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이는데 성공했으나, 고급인력들이 많아져서 노동시장내의 경쟁이 치열해지고(정확하게는 공식부문), 프로그램의 특성상 비용(특히 메르칼)이 많이 들다보니 중산층과 부유층들에게 욕을 많이 얻어먹고[55] 쿠바와 연계지어져서(실제로 교육 프로그램이나 의료 프로그램의 경우 쿠바에서 인력지원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색깔론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친차베스파에서도 일부 부문은 관료주의로 인해 목표치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난이 나오기도 한다(주로 토지개혁과 저가주택 공급문제).

6.9. 옹호

이런 강압적인 방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기가 많은 것은 이전의 정치인들이 워낙 막장이었던 탓도 있다. 이에 대항해서 차베스가 일으켰고 실패했던 군사 쿠데타에서 정부의 부정부패에 맞서는 투사의 이미지가 생겼다. 하지만 보통은 아무리 이전 정치인이 막장이라도 쿠데타를 주도한 사람이 투사로 칭찬받는 경우는 드문 편이고 오히려 이전 정치인이나 쿠데타를 주도한 쪽이나 그놈이 그놈이라는 양비론이 나오는 편이다.[56]

1기 집권 때 성공했던(?) 2명의 대통령이 실패한 영향도 있는데 페레스 정부의 경우 2기 집권 들어 IMF에게 구제금융을 받는 조건으로 정부보조금을 철폐했다가 물가가 급상승해 최대 300명이 죽고 수천명이 부상당한 카라카스 폭동으로 빈민층의 지지를 잃어버렸고 임기 말의 쿠데타와 부패 적발로 탄핵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라파엘 칼데라의 경우 선거운동에서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이지 않다고 약속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무기력하게 신자유주의 정책을 지속적으로 시행하는 모습을 보이며 지지자들에게 실망감을 주면서 이미지를 다 버리고 말았다.

이 점이 차베스가 옹호받은 근거이다. 방식이 어찌되었든 이전 정부와는 다르게 차베스 정권 하에서 실업자가 줄고 복지정책이 대대적으로 확충되어 빈곤층의 생활이 대대적으로 개선되었고 특히 극빈층이 크게 줄어 80-90년대에 문제되었던 양극화 문제도 어느정도 해소되었기 때문이다.[57] 과거에는 읽기, 쓰기, 셈하기의 무상교육과 같은 어찌 보면 당연한 권리가 이전까지 시행되지 않고 있었던 데다[58] 차베스 집권 이전에는 '빈곤층이 상류층이 될 길은 미녀 대회에서 우승하는 것 뿐'이라는 말까지 있었다.

게다가 빈민 구역에 상수도와 전기 시설도 대거 설치하고 정부 주도로 직거래 슈퍼마켓(메르칼)을 창업시켜서[59] 값싸게 식품이나 생활 필수품을 공급해주며 경우에 따라 일자리도 주고, 더군다나 저가로 그럴듯한 집까지 공급해주기까지 했다. 물가가 오르면 최저임금도 따라서 올려 체감 물가 상승폭도 낮춰주고 교통요금도 낮게 유지하며[60] 거기에 베네수엘라 역사상 처음으로 무상의료[61]까지 해준 점 때문에 빈민층에게 지지도가 장난이 아니라고 한다.[62]

덧붙여서 그 이전까지만 해도 들러리에 불과했던 빈민층을 정치적으로 중요한 세력으로 등극시킨 점도 차베스의 업적이다. 그리고 볼리바르 헌법에선 이전 4공화국 헌법에서 단순하게 명시된 여성의 권리에 대한 조항을 세분화했으며[63] 여성들에게도 동일 노동 동일 임금 원칙을 지키도록 명시하고, 가정주부에게도 연금을 지급하게 하는 등 여성들의 권리를 대대적으로 확충시키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 기존에 있던 지방자치단체[64]와 별개로 "공동체평의회"와 "주민평의회"를 설치하여 직접민주주의적인 요소를 강화시키는데 노력을 했다.

다른 의견으로는, 차베스에 대한 지지자들의 맹목적인 신뢰를 지지 요인으로 꼽기도 한다. 치안 악화는 지방 정부의 권력자들 때문이고[65] 높은 인플레이션은 탐욕스런 외국기업 때문이지 차베스 탓이 아니라는 등.[66] 거기다 야권에서 과거 신자유주의 정책을 시행했던 점이라던가 차베스에 대적한 인물을 찾지 못한다는 점[67]이나 야권 지지층에선 차베스 지지파를 룸펜이나 노예 정도로 폄하하고 여당 지지층에선 야권 지지자를 자본주의의 돼지로 폄하하는 등 계급 갈등(혹은 계급 투쟁)의 요소가 강하기 때문에 유권자의 다수를 차지하는 빈곤층(과 차베스 하에서 혜택을 받은 중하층들)의 지지를 받기 힘들다는 점도 있다.

그리고 결국 베네수엘라는 저유가를 이기지 못하고 폭망했다. 헬게이트가 열린 현 베네수엘라 상황은 위 변호들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가 사망한 직후부터 베네수엘라가 최악의 경제 불황에 직면하면서 베네수엘라 위기의 최종 책임자로 지목받고 있다. 차베스의 반대 블록은 단순히 자본가뿐만이 아니라 상당수의 중산층이 포함된 광범위한 집단이었다. 거칠게 말하자면 차베스 정권은 국민의 절반 이상을 완전히 적으로 돌려놓고 운영된 정권이었다는 것이다. 차베스가 자원부국병을 고치기 위해 뽑혔으며 무려 15년에 달하는 4번의 임기[68] 동안 집권했음에도 실패했다는 점, 차베스 사후 그의 뒤를 이은 정치 세력이 차베스와 대동소이한 정책을 펴고 있음에도 베네수엘라 하층민들의 상황이 여전히 막장인 점, 유가에 의존해 결국 국가 구조 자체의 개선에 실패했다는 반증이라는 점[69], 그리고 그가 쿠데타 시도를 통해 정계에 등장했을뿐만 아니라, 보수파에게 당한 것보다 훨씬 크게 되갚아 주면서 독재자가 된 점 등 그의 집권 후 행보와 국정 운영은 비판을 피할 수 없다.

6.10. 한국의 차베스 열풍과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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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빈민 위주의 포퓰리즘은 이른바 ' 21세기 사회주의'라고 하는 모델로 전 세계적인 인지도를 얻어, 버니 샌더스 # 제레미 코빈 # 을 비롯한 서구 좌파에서 찬사를 받았다. 국내에서는 오마이뉴스 #, 한겨레신문 #, 레디안 # 등 좌파 언론이 다루기도 했으며, 2022년 현재 서울시 교육감인 조희연 # 이나 당시 민주노동당 소속이었던 임승수 # 등 많은 추종자들을 얻었다. 소수나마 차베스의 집권과정과 이후의 연임 개정을 보고 비판하며 독재를 꿈꾼다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오마이뉴스 기사) 당시에는 조지 W 부시 정권의 실정으로 반미 감정이 매우 드높았기 때문에 무시당하는 실정이었다.

미디어 추천도서(경향신문)로 선정된 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베네수엘라 혁명 연구모임, 2006)를 살펴 보면 21세기 사회주의로 향하며 미 제국주의 자본주의에서 민중을 해방시키고 있는 위대한 혁명가의 도전의 역사를 그리고 있다고 한다. 출판사 서평에서 우리 민중들은 이제 노무현 정부가 추진 중인 한미 FTA로 주저앉게 생겼다며 베네수엘라가 너무나 부럽다고 했다. 베네수엘라의 행보를 보고 배우면서 우리도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긴다고 적었다. 리뷰에도 한국이 한미 FTA 등 미국 자본주의의 침략으로 피해를 입고 있다며 차베스와 베네수엘라 민중들의 민주주의를 위한 정책이나 혁명을 우리들도 배워서 미국의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적었다.

경향신문에서는 노무현과 차베스를 동일선상에 놓고 평가하는 칼럼을 쓰기도 했다( 노무현과 차베스(2004)). 개혁 의지는 닮았으나 차베스 정권은 원대한 '비전'을 현실화하며 착착 나아가는 한편 노무현 정권은 지지부진하다고 평했다. 또 차베스 정권을 석유 값의 폭등 덕에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냉소적 관찰도 있으나 찾아온 행운을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포착할 수 있는 능력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며 차베스 정권은 국가의 균형 발전을 생각하는 총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는 반면, 노무현 정권은 집권 2년차임에도 현실적 계획을 제시 또는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고 평했다.

2020년대 들어 한국에서는 '노무현 정신'이 회자되지만 정작 노무현 정부 시절엔 노무현에게 '차베스 정신'을 본받으라면서 차베스와 비교하며 노무현을 깎아내리는 기사가 난립했다. 차베스는 뜨는데 노무현은 왜 추락하나(오마이뉴스, 2006)를 보면 화끈하게 반미를 하는 차베스는 베네수엘라에서 지지율이 떡상하는 반면, 노무현은 이라크 파병을 했고 고집스레 한미 FTA를 추진하며 국민 투표로 결정하자는 의견에 코웃음을 쳤다면서 실망한 지지자들이 등을 돌리며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한미 FTA는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이 손해 본다면서 없애자고 난리 칠 정도로 한국의 신의 한 수로 평가 받고 있다.

민주노동당 아예 차베스식 포퓰리즘을 통치 모델로 삼을 정도로 관심을 보였다. 한겨레신문에서도 ‘베네수엘라 국민에게 길을 묻자’를 연재하며 한국이 지향해야 할 롤 모델처럼 다뤘다. 재밌는 점은 '민주화'를 강조하는 언론사들이 '좌파 독재' 차베스가 민주주의를 부수면서 독재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혁명'으로 미화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차베스의 독재를 비판한 언론사들은 주로 우파였다. "문제 삼으면 문제가 되고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처럼 박정희의 독재를 문제 삼던 언론사들이 차베스의 독재를 문제 삼지 않으니 '독재자'가 아닌 '혁명가'처럼 미화됐다. 일례로 한겨레에서는 베네수엘라의 오랜 기득권을 합리적 내부 토론으로 제어할 수 있겠느냐며 이런 상황을 혁파하기 위해 취한 조처는 '서구적 민주주의' 관점에서 비판하기보다 그 나라 상황에 따른 평가를 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런 논리면 박정희는 적화통일의 위협에 맞선 '한국식 민주주의'였다고 합리화할 수 있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6년 KBS 스페셜 '신자유주의를 넘어-차베스의 도전'이 방영되자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먼저 조선일보 "KBS가 차베스를 띄운 이유"라는 칼럼으로 포문을 열었다. 왜 반미 좌파 지도자의 영웅담을 그 나라 국영 TV도 아닌 한국의 공영 방송 KBS에서 주말 황금 시간대에 봐야 하냐고 비판했다. 차베스가 집권 후 제정한 새 헌법을 '개혁'의 청사진으로만 묘사했지만, 그것은 1인 권력 집중 각본의 서막에 불과했고 언론법을 만들어 보도 내용을 정부가 통제했다며 국제언론인협회(IPI)가 그를 언론 탄압 지도자로 지목했다고 비판했다.

조선일보에 차베스 비판 기사가 나가자 KBS 스페셜을 연출한 이강택 KBS PD( 문재인 정부 시절 교통방송(TBS) 사장에 선임)는 PD 저널에 즉각 반박했다. "차베스 다큐 방송해야 하는 이유? 조선일보 같은 신문 있기 때문". 남미의 많은 지성들이 차베스를 비전과 실천력을 겸비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는데 조선일보 기사는 극우의 시각이라며 베네수엘라에서 친미를 외치는 시위대가 생각난다고 조롱했다.[70] 또 국제언론인협회가 차베스를 '언론탄압 지도자'로 지목한 것에는 어처구니가 없다면서 족벌신문과 상업TV는 방종에 가까운 자유를 누리고 있으며 문제는 한낱 언론사주들의 모임에 불과한 국제언론인협회의 편향성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현실은 이강택 PD의 바람과는 달랐다. 3년 후 2009년 EBS 세계테마기행 - 베네수엘라를 보면(33분 30초) 차베스가 TV에서 특정 채널을 폐쇄시키겠다고 말하는 장면이 언급되며 한국인 가이드가 현지인에게 "이 채널이 유일하게 남아있는 야당의 입장을 전하는 채널이 아닌가요?"라고 물을 정도로 서서히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었다. 차베스가 2004년 '정부 비판은 국가에의 음모'란 규정을 넣은 '라디오와 TV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법률'을 제정한 이후 34개 라디오 방송국을 폐쇄했다.

차베스 정권의 탄생으로부터 어느덧 한참이 시간이 흐른 2020년 중앙일보 칼럼 "베네수엘라처럼 포퓰리즘 하더라도 반미는 말아야"를 보면, '21세기 사회주의'는 인류사를 뒤흔든 또 하나의 실험으로 불렸지만 처절한 실패로 끝났다며 베네수엘라는 사실상 국가 파산했고 주요 지표는 모조리 최악이라고 전했다. 포퓰리스트의 미래를 보려면 우고 차베스를 보면 된다면서 석유 하나만 믿고 터무니없는 퍼주기를 밀어붙이고 반미 일변도의 정책을 펼치다 나라를 망조로 이끈 '실패한 독재자'로 규정했다. 차베스에겐 특별한 통치 철학이 없고 철저히 민중의 인기에 의지한다며 '21세기 사회주의'란 그럴 듯한 말로 포장했지만, 실체는 석유 수익을 복지에 퍼주는 '페트로(석유) 포퓰리즘'에 불과했다고 비판했다. 또 미국을 적으로 돌리고 나니 베네수엘라가 살 수 있는 길이 어디에도 없었다며 반미를 하더라도 브라질 룰라 대통령처럼 실용적 반미를 해야 했다고 지적했다.

7. 일화

미국 등 서방 국가들 사이에서 허구한 날 최악의 독재자로 까이긴 해도 그는 분명히 민중 대다수 지지로 합법적인 권력에 오른 인물이다.[71] 베네수엘라에서 그를 욕하는 사람(주로 중산층, 부유층)도 많지만 지지자가 다수를 차지하는건 사실. 그가 얼마나 지지를 받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중남미 대다수 나라들이 그렇듯 베네수엘라도 가톨릭이 대다수인 나라이다. 그래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죽고 '새 교황에 누가 어울릴까?' 하는 조사를 한 적이 있었단다. 그런데 압도적으로 1위에 오른 게 바로 이 차베스였다. 차베스가 자길 교황 후보로 올린 것도 아니고 조사한 곳도 넣지도 않았음에도 사람들이 듣도 보도 못하고 우리나라에 영향도 못 주는 이들보단 차라리 차베스 대통령이 낫다고 알아서들 투표했던 것이다. 현재는 시위대에 의해 동상이 쓰러질 정도로 인기가 급락했지만.

또한 골프에 대하여 " 골프 부르주아 스포츠"라고 발언하였다. 그럼 부르주아 스포츠의 정점인 F1에서 뛰는 크래쉬토 말도나도 스폰서는 왜 하는거지실제로 골프에 반감을 가졌는지는 몰라도 주택용지로 사용될 땅이 골프장으로 낭비된다고 골프장을 대거 압류한 사건이 있긴 하다. 다만 의외로 골프대회 우승자에 대해 코멘트한 일도 있는 걸 보면 골프에 대해 무조건적인 반감까지는 가지지 않은 듯 하며 한편으로는 '모든 스포츠를 존중한다'고 말하였다.

2010년 초 베네수엘라 국영석유회사 단체협약 임금협상 타결 행사장에서 "볼리바르 혁명정부가 3485년까지 베네수엘라를 통치할 필요가 있다"고 발언한 바 있다. 하필 3485년을 언급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평소 언행을 보면 그냥 별생각없이 말한거같긴 하지만 이에 대해 중남미 언론에서는 "당대의 독재자였던 독일의 히틀러도 천년제국 꿈밖에는 꾸지 못했는데 황당하긴 하지만 꿈과 야망에선 차베스 대통령이 한 수 위인 것 같다"고 비꼬았다.

한편 심각한 에너지난으로 물이 매우 부족해지자[72] ' 공산주의 방식으로 3분 만에 샤워를 하라'[73]고 한 바 있으며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을 비난하면서 "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게임기로 어린이들에게 폭력성을 키운다. 이는 폭력적인 인간을 만들어내 나중에 무기를 팔아먹기 위한 전략"이라며 무지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차베스의 괴짜 발언의 대부분은 차베스 자신이 진행하는 "안녕 대통령"이라는 국정홍보(?) 프로그램에서 나왔다. # 사실 이 프로그램이 국정홍보 프로그램치고는 심하게 깨는 게 차베스 자신이 내키는 대로 프로그램의 내용이나 형식이 수시로 변경된다. 물론 유명인을 초청한다거나 일반인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민원해결 및 정책발표도 하지만 문제의 괴짜발언이나 쌩쑈(?), 자신의 가정사나 개인사항, 남미역사 해설같은 것도 간간히 나오기 때문에 차라리 쇼 프로그램에 가까운 면이 강하다. 어쨌든 차베스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카리스마가 넘치고(부정적으로 본다면 성격이 괄괄하고 독선적인) 유머러스한(역시 부정적으로 본다면 막말과 저질발언이나 해대는) 친근한 서민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를 굳히는데 성공했다. 물론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차베스를 까대는 레퍼토리가 대거 양산되기도 했다. 한편, 볼리비아나 에콰도르 같은 데에서도 이 프로그램의 영향을 받아서 유사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다. 참고로 2012년 들어 차베스가 암으로 투병하기 시작하면서 종영.

평소 손수 운전하기를 즐겼는데 어느날 차를 몰고 서행하던 중 자신을 못 알아본 트럭 운전자가 뒤에서 경적을 울리고 갓길로 추월하자 쫓아가 세운 다음 훈계한 적도 있다. 아, 나 대통령 차베습니다 이후 도로에서 벌어지는 과속운전행태를 두고 '도로에서 미친 짓들이 벌어진다'고 개탄했다( #). -서방 국가들은 차베스 때문에 베네수엘라에서 미친 짓들이 벌어진다고 개탄했다.-

두 번에 걸쳐 결혼했는데 둘 다 이혼으로 결혼생활을 끝맺었다. 그래서 50대가 되어서부터는 쭈욱 독신이었다. 그 중 언론인 출신의 두번째 부인은 2002년 성격 차이로 이혼한 후에 재혼을 하면서 조용히 자녀를 키우다가 2007년 국민투표에서 대통령 임기를 6년에서 4년으로 축소해야한다는 발언을 시작으로 차베스와 본격적으로 각을 세우기 시작했고 2008년 지방선거때 야당소속으로 바르퀴시메토 시장에 출마하기도 했으며 딸 양육권을 가지고 다툴 정도로 앙숙.

그리고 한때 야구선수를 꿈꿨던 만큼 열정적인 야구팬으로 유명하며[74] 축구계의 전설인 디에고 마라도나와도 절친이다.

여담으로 리그베다 위키 시절에는 차베스가 독재자라고 등재되는 것이 반달로 간주되던 흑역사가 있다. 이글루스 등지에서 리그베다를 깔 때 주요 레퍼토리로 썼던 사건. 나무위키도 차기 대통령인 마두로와 달리, 차베스를 독재자라고 규정하는 것은 과하다는 평가에 따라 서술되고 있다.

차베스는 공식 석상에서 베네수엘라의 전차 부대 군가 한 곡을 불렀는데, 이 곡은 차베스를 상징하는 정치적인 곡으로 변질됐다. 훗날 이 곡은 그의 장례식에서도 연주됐다. 에먼 군가 한 곡이 차베스를 상징하는 곡으로 변질된 것.

차베스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차베스타라고 하며, 차베스 사후 차베스를 기리는 상품들이 차비스타들 사이에서 유통된적도 있다. 심지어 비가동 피규어(...)도 있다고...

1999년에 바르가스의 비극 당시 자신의 정치 성향때문에 미국의 인도적 지원을 거절했으며 이로 인해 훗날 나비효과로 한 16세 소년을 반(反)치베스로 돌아서게 할 뿐만 아니라 국가가 경제위기와 독재 때문에 붕괴되어가는 정치 위기가 닥치자 야권을 통일시키고 더 나아가 베네수엘라 임시 대통령까지 되게 만든다. #

심령주의에 심취해서 증조할아버지의 영혼과 대화하곤 했다고 전한다. #

텔레그램 커스텀 스티커로 존재한다. #

민주노동당 계열 지식인들은 비슷한 시기에 집권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차베스와 비교하여 비판했다. 정의당의 싱크탱크 격인 정의정책연구소 김병권 소장은 2006년 말 노무현 전 대통령과 차베스를 비교하면서 "차베스는 매번 국민을 신뢰했고 국민에게서 힘을 구했다."면서 "노무현 정권이 국민이 내민 손을 외면했다. 경제는 관료조직과 글로벌화한 재벌기업들에 의존했다"고 평가한 바 있다. #

포스탈 3에서 뜬금없이 최종 보스로 납신다. 그런데 게임 자체가 시리즈에서는 워낙 쓰레기라서 포스탈 시리즈에 우고 차베스가 등장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좀 있다. 포스탈 3만은 러시아 회사에서 외주를 받아 제작했는데 베네수엘라와 러시아가 우호적인 관계임에도 왜 차베스를 까는지는 묻지말자. 북미 취향에 맞추려다보니까 그런가보다 싶지만 포스탈은 원래 그런 게임이다

7.1. '입 닥쳐' 사건

2007년 스페인 및 중남미 등 라틴계 국가들이 모이는 정기 외교 회담인 이베로 아메리카 정상회의(스페인어: Cumbres Iberoamericanas de Jefes de Estado y de Gobierno)에서 벌어진 일. 우고 차베스는 이라크 전쟁을 지지했던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스페인 전 총리가 2002년 베네수엘라 쿠데타 시도에 참여했다고 주장하며 히틀러, 파시스트이자 인간 이하의 존재라고 부르는 등 평소와 다름없이 거침없는 언행(+욕)으로 주목을 받을 뻔했다. 그러나 당시 스페인 총리인 호세 루이스 사파테로가 "저는 그의 정책에 반대하지만[75] 국민이 뽑은 총리이기 때문에 그를 존중합니다"라고 답변했다. 차베스는 이에 불복하여 발언권을 박탈당해 마이크가 꺼져있음에도 계속 회담을 방해하였다. 아스나르는 사파테로의 전임 총리로 정당도 정치 성향도 서로 다른 인사이다. 그러나 사파테로조차 아스나르를 옹호해야 할 정도로 차베스의 발언은 무례했다.

그러자 바로 전부터 주의를 계속 주다가 화가 난 스페인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Por qué no te callas?"("입 닥치지 못해?")란 말을 하자 꿀먹은 벙어리 신세가 되었다.(베네수엘라도 스페인어권 국가다.) 뒤늦게 차베스 대통령은 강하게 항의하고 후안 카를로스 국왕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고 맹비난하며 스페인 정부에 사과를 요구하긴 했지만...

아래 영상에서 직접 보도록 하자. (17초 부터)

우고 차베스 : #!%# !#$$%#@$@!$*&!@#$ *!@$
호세 루이스 사파테로 : exijo. exijo
후안 카를로스 1세 : 너! (¡tú!)[76]
우고 차베스 : (어쩌고 저쩌고)
호세 루이스 사파테로 : exijo. exijo. ese respeco por una razón además.
호세 루이스 사파테로 : 물론이죠. 물론이죠, (por supuesto. por supuesto.)
우고 차베스 : (어쩌고 저쩌고)
후안 카를로스 1세 : 제발 좀 닥칠 수 없겠나? (¿Por que no te callas?)

점잖은 국왕이 왕실에서 쓰는 경어가 아닌 말로 시원하게 " 닥쳐"라고 한 말이 어찌나 인기가 있었는지 아스나르 스페인 총리가 돌아오자 이 인사말로 사용했고 당일에 바로 축구 중계에서 사용되질 않나, 스페인 내에서 "닥쳐" 벨소리가 50만 다운로드를 돌파하고 스페인어권 전국적으로 이 말이 적힌 티셔츠가 유행하게 되었다(결국 차베스를 반대하는 시위대의 구호가 되었다.). 그리고 노래도 있다.

스페인이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주로 중남미에 있는 팀들( 온두라스, 칠레, 파라과이)과 경기를 많이 가졌는데 이때 스페인 팬 중에는 국왕이 차베스에게 한 말을 담은 팻말을 들고 응원하는 사람도 있었다. 베네수엘라인들도 경기를 보러 와서 미묘하게 되었다.

8. 관련 서적

  • 차베스 미국과 맞짱 뜨다 -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의 저자 임승수의 저서.[77] '사회주의'보다는 '반미'에 초점을 맞춘 감이 없지 않다. 사실 많은 진보 계열 사람들이 차베스에 열광하는 것은 21세기 사회주의보다는 반미 때문이기도 하고. 다만 진보 계열이라고 해서 전부 차베스를 긍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오마이뉴스에 게재된 어느 기사는 차베스의 정치를 공화국 붕괴정치로 보며 이를 박정희식 참주정과 비교하며 비판하고 있다. 저자는 민주노동당에서 의정정책실장을 역임한 사람.[78] 그 외에 레디앙에서도 차베스와 박정희의 유사성에 집중하며 차베스를 비판한 바 있다.[79] 사실 베네수엘라 야권 연합내에서도 상당수의 좌파 정파가 소속되어 있기도 하다. 물론 이전 집권당에 소속된 인원이 다수를 차지하긴 하지만 차베스 정권에 참여했다가 2000년대 초반의 49개 개혁법안 강행처리와 2000년대 중반의 여당 대통합 움직임에 반발해 야당에 합류한 인원도 있다. 진보진영에서는 차베스를 우파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80]

[1] 대통령 재임 중 사망. [2] 다만 2009년 WBC를 제외하면 생각보다 성적은 그리 신통치 못했다. 그리고 그 WBC도 준결승에서 당시의 김인식호에게 깔끔하게 개박살나고 미국과 함께 공동 3위에 그쳤다. [3] 이 시기엔 석유값 하락과 외채위기와 함께 베네수엘라의 경제가 크게 후퇴했는데, 당시 베네수엘라 정부는 변변한 대책을 내세우지 못했다. [4] https://www.youtube.com/watch?v=LJYfKxnRDAI 당시 민주행동당 후보와 기독사회당 후보의 선거광고를 비교해보면 딱 봐도 민주행동당 페레스 후보의 광고가 훨씬 더 낫단 걸 알 수 있을 정도(...). [5] 카라카스의 참사. 마라카나수 미네이라수와 조어 원리가 통한다. [6] 1차 오일쇼크에 편승하여 베네수엘라 경제가 크게 성장시키는 성과를 냈고, 1988년 대통령 선거에서 경제위기 상황속에서 재선에 성공했으나 재선 직후 신자유주의 정책을 널리 수용하면서 카라카스 봉기가 일어나고 그 이후에도 빈곤율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국민들의 불만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집권 1기 때의 명성을 전부 까먹고 결국에 부패혐의로 법원에 의해 탄핵되는 수모를 당했다. 1999년에 베네수엘라를 떠났으며 2010년 미국에서 사망. [7] 원래는 이 이름 그대로 정당을 창당하려고 했지만 1997년 5월 베네수엘라 법원에선 볼리바르를 당명으로 사용할수 없게 하도록 판결을 내려 당명으로 쓸 수 없게 했다. [8] 당시 영국 노동당이 정책노선으로 내건 "제3의 길"과는 다르다. 공산주의 자본주의 사이의 중도를 추구한다는 뜻에서 제3의 길이라고 이름 붙인 것. 명칭만 차용하였다. [9] 참고로 차베스의 아버지인 우고 데 로스 레예스 차베스는 교사출신으로 기성정당에 가입하기도 했는데 1970년대에 당시엔 민주행동당 당원이었고 이후 1978년부터 1990년대까지는 사회기독당 당원으로 가입할 정도로 의외로 정치성향이 보수적(?)이긴 했지만 아들이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하면서 아들의 정당인 제5공화국 운동에 참여했고 1998년 지방선거에서 바리나스 주지사 선거에 당선되었다. 참고로 2008년에 주지사 직에서 은퇴했고 그 자리를 우고 차베스의 형인 아단 차베스가 이어서 2016년까지 재임했다. [10] 당시 총선에서 원내 1당은 민주행동당이 차지했고(상원 19석, 하원 62석) 제5공화국 운동은 상원 12석, 하원 46석으로 2당이었다. 연합정당인 사회주의를 위한 운동(2001년에 연정에서 이탈)이나, LCR(2000년 대선에서 야당후보를 지원하면서 연정에서 이탈), 모두를 위한 조국을 합해도 절반을 넘기지 못한다(하원 76/207, 상원 19/54). [11] 1998년 상반기만 해도 차베스가 주요대선 주자로 언급되기는 했으나 유력 대권주자급은 아니었고 오히려 1981년 미스 유니버스 우승자이자 카라카스 산하 차카오 시장(한국으로 치면 구청장) 이레네 사에스(당시 사회기독당 소속)가 차카오 시장 재직당시의 범죄율 하락같은 성과를 내세워 지지율 1위 자리를 차지했지만 정작 사회기독당 소속 대선후보로 지명된 이후에 외교정책이나 경제정책에 대한 대안부재에 대한 우려감으로 지지율이 떨어져 차베스가 "21세기 사회주의" 같은 뚜렷한 비전을 내세우고 살라스 호메르(원래 사회기독당 소속이었으나 탈당 뒤에 베네수엘라 프로젝트라는 가설정당을 창당하고 대선에 출마)도 경제학자 출신인 점을 내세워 지지율이 급속히 올라가면서 순위에서 밀리자 결국 선거를 며칠 앞두고 출마를 포기했다. 다만 이미 투표용지에 이레네 시에즈의 이름이 적혀있는 채로 인쇄되었기 때문에 일단 선거에 참여한걸로 되어있다. 참고로 최종득표율은 2.8%. 이때 사회기독당과 민주행동당은 차베스의 당선을 막기 위해 각자 출마를 포기하고 경제학자 출신인 엔리케 살라스 로메르(무소속) 후보로 단일화했지만 결국 기존 우파-중도파정당연합(엔리케 살라스 로메르) 소속 후보는 40%의 득표율로 대참패(...). 이후 이레네 사에스는 1999년 누에바에스파르타 주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으나 2000년 대선-총선-지선 동시선거에 출마하지 않으면서 정계에서 떠났다. [12] 참고로 차베스는 1996년에 미국에 입국하려고 비자발급을 신청했지만 1992년 쿠데타 시도를 이유로 미국 방문 비자 발급이 거절되었다. 정책 노선 외의 이유로도 미국과 사이가 나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3] 제5공화국 정당이라는 운동은 이를 가리킨다. [14] 이 부분은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의 영향을 부분적으로 받았다. 2007년에 국민투표가 시행되었던 문제의 개헌안도 프랑스 헌법의 영향을 받았다(정작 프랑스에선 2000년에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 임기를 7년에서 5년으로 단축시켰지만). [15] 그 이전 4공화국 시절에도 대통령의 재선은 허용되어 있었지만 연임은 불가능했다. [16]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차베스에 맞선 사람이 1992년 쿠데타 미수사건의 동기인 프란치스코 아리아스였다. 쿠데타에 실패한 뒤 차베스와 같이 깜방에 갇히기도 했지만 출소후에 주지사 선거에 출마하면서 선거에 회의적이었던(나중에 생각이 바뀌었지만) 차베스랑 다른 길을 걸어 야당 대선후보가 되었던 것. 나중에 차베스와 화해해서 베네수엘라 통합사회당에 입당했다. [17] 그 이후에 여러가지 사건들이 겹쳐 중산층들은 그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는데, 특히 차베스가 원유가격의 상승을 위해 여러 반미 지도자들과 회동을 가지기도 했고, 차베스가 여러모로 급진적인 정책을 펼칠까 불안감을 느껴 반 차베스파에게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게 된다. [18] 연정을 이탈했던 좌파/중도좌파 정당들도 이 개혁법은 지지하고 있었다. [19] 이때 차베스는 결사항전을 하려다가 쿠데타군이 수도를 장악했다고 판단하여 조건부 사임을 내걸고 협상을 시도했는데 쿠데타군이 무조건 사임을 요구하면서 협상이 결렬되었고 결국 차베스는 사임 의사를 철회했다. 그런데 베네수엘라 언론사에서 이런걸 전부 쌩깐채 쿠데타군의 의견를 받아적다보니 이런 오보가 나왔던 것이다. 이때 카스트로의 역할이 중요했는데 차베스의 딸이 피델 카스트로에게 전화를 걸어 차베스가 사임 의사가 없음을 밝혔고 카스트로는 외신 기자를 불러서 차베스가 사임 의사가 없음을 밝히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20] 1999년 대통령 취임사에서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과 국가의 보이는 손이 서로 맞잡는 중간지대를 경제정책의 목표로 제시했고 그에 따라 거시경제정책면에서 이전 정부의 장관을 유임했을 정도로 경제정책면에서 그리 급진적이지는 않았다. [21] 야권이 보이콧하면서 보나마나한 선거가 되는 바람에 투표율은 25%대에 그쳤다. 참고로 2010년 총선 투표율은 66.4%. [22] 1988년 대선 이후 최다 투표율. [23] 사족이라면 사족이겠지만 차베스의 아버지는 2024년 91세를 일기로 사망했고 어머니는 아직도 살아계신다. [24] 스탈린과 같은 날에 사망했다. [25] 아무래도 지도자의 최후 치고는 너무 치졸하고 찌질해보여서가 아닌가 싶다. [26] 다만 프랑수아 미테랑은 86년과 93년 총선에서 패배하면서 4년 정도(각가 86-88, 93-95년)를 반쪽짜리 대통령으로 지낸바 있다. [27] 중남미 국가들이 미국계 자본에 휘둘려 경제가 파탄에 이른 경우도 많고 쿠바 등이 러시아 영향권으로 빠지는 것을 염려해 미국 정부가 국가 전복을 뒤에서 도왔던 역사도 있던지라...특히 2002년 있었던 쿠데타 시도가 미국의 음모라고 여기고(쿠데타 몇 일전부터 야권 인사들, 장성들과 미국 대사관 및 CIA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회합을 가졌었다.) 대놓고 악감정을 내비치고 있다. 결국 2000년대에 대부분의 남미국가들에서 친미가 아닌 좌파정권이 집권하였다. 자세한 건 반미 항목의 2, 3번 항목 참조. [28] 조지 W. 부시 베네수엘라를 찾아오면 어떻게 할거냐는 질문에 손을 내저으며 '우!'라고 한 다음에 '고!'라고 말할 것이라 대답했다. 본인의 이름을 십분 살린(?) 대답. [29] 우리베. 열렬한 신자유주의 신봉자에다가 남미내 온건성향인 좌파정권들을 대놓고 욕하지는 못했지만 은근히 고깝게 보기도 했고, 3선 개헌을 시도했으며 후임 산토스 대통령이 온건정책을 펼치고 반군과 협상에 나서자 산토스 대통령을 열심히 비방하면서 타 후보를 지원했다. 물론 산토스 대통령이 재선하긴 했지만 총선에서 상당한 세를 과시하는데 성공했다. 물론 차베스가 복지정책과 석유값 상승으로 인한 호황으로 지지율이 높였듯 우리베도 원자재값 상승으로 상당한 호황을 누렸고, 마약재배하는 반군세력을 상대로 대대적으로 소탕작전을 벌이면서 완전하진 못해도 콜롬비아를 어느정도 안정화하여 지지율은 높았다. [30] 사실 차베스 정권 초기의 경제정책에서도 이러한 점을 찾아볼 수 있는데 취임사에선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과 국가의 보이는 손이 서로 맞잡는 중간지대를 경제정책의 목표로 제시했고 이전 정부 시기의 재무장관을 유임할 정도로 거시경제운용에서 이전 정부 시기의 정책을 거의 그대로 계승하였다. 물론 석유를 국유화하려 하긴 했으나 이것도 냉정히 보면 그냥 90년대 이전 상태로 되돌려놓는거나 마찬가지. 급진적인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건 집권 2기 들어 자본 파업으로 자본이 대거 유출되고 이를 고유가로 메꾸면서부터이다. [31] 이 때문에 같이 남미 지역에서 외교적인 주도권을 쥐려고 노력한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과 대립관계라는 말이 서구언론으로부터 나오기도 했지만 룰라가 차베스의 선거운동을 지원하기도 했고 남미공동시장에 베네수엘라가 가입하는 것에 대해 브라질 국회의 반대에도 지지했으며 차베스도 룰라의 선거운동을 지원하는 등 실제 사이는 상당히 좋았다. 그렇다고 갈등이 아주 없던건 아니었지만. [32] 브라질과 북한은 2001년에 수교를 했다. [33] 우익 포퓰리스트로는 도널드 트럼프, 르펜 부녀, 자이르 보우소나루 등이 악명 높지만 좌익 포퓰리스트에 있어서는 차베스의 인지도가 말 그대로 압도적이다. [34] 니콜라스 마두로가 차베스가 망쳐놓은 국가에서 할 수 있는게 없었을 것이라는 옹호론이 존재하나, 문제는 마두로 역시 차베스가 지목한 후계자에 연합사회당 정권의 일원이라 전반적으로는 차베스와 다를 바가 없다는 혹평을 받는다. 확실한 건 차베스와 마두로 모두 전문가들과 서방권 대중들에게는 무능한 사회주의 독재자의 대명사로 평가가 매우 낮다. [35] 4번째 임기 도중 사망했다. [36] 좌파적 입장에서는 생산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며 석유라는 천연자원에만 의존해 살아가는 사회에 고립된 채로,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 없이 충분한 생산력이 전제되어야만 지속적으로 실현 가능한 개량주의적 분배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것을 말한다. [37] 후임인 마두로도 1년가량의 대비할수있는 시간이 있었다지만 차베스와 같은길을 걸었다. [38] 사우디의 셰일혁명에 대한 무능한 대응으로 유가 폭락, 마두로의 화폐를 풀어서 초인플레이션이 오는 무능한 상황등에 대한 대처 [39] 다만 그 이전에도 선정적인 프로그램을 많이 틀어줘서 교육상 안 좋다고 욕을 많이 먹긴했다(...). 물론 볼 사람은 다 봤겠지만 [40] 당시 수도 카라카스의 시장은 반 차베스 인사였다 [41] 이때 시스네로스 사장과 차베스측이 카터의 중재뒤에 서로 화해하는 조건으로 무언가 거래를 했다는 썰이 있으나(대충 비판보도를 줄이는 대가로 시스네스로 회장이 브라질 룰라 대통령을 만나게 해주도록 도와줬다는게 주 내용) 양측이 서로 이 썰을 부정하고 있고 현재 베네수엘라의 정치 지형상 정권교체가 쉽지 않은 고로 이 당시에 거래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려면 한참 기다려야 될 듯. [42] 2.7%가 현재의 베네수엘라 상황을 생각하면 그나마 나은 성장률이겠지만 2.7% 성장률은 대부분 더이상의 폭발적인 성장이 불가능한 선진국에서나 가능한 지표이다 개발도상국에서 이정도를 찍는건 거의 한국이 마이너스 성장율을 찍었다라고 생각해도 될정도로 심각하게 낮은 성장률이다 그것도 집권기 한해에만 기록한게 아니라 평균치이다... [43] 다만 에콰도르의 경우 국가 규모가 작아(절대적으로 보면 작지는 않지만 남미에서는 작은 편) 라파엘 코레아가 집권한 시기도 상대적으로 늦어서 관심을 덜 받았고, 볼리비아의 경우 남미에서 가장 경제력이 약한지라 자본 유출이 베네수엘라처럼 극심하지 않았다. 지도자들의 실력도 차베스보다 훨씬 나았는데, 에보 모랄레스는 대통령이 되기 이전에 국회의원으로 상당기간 재직한 바 있고, 라파엘 코레아는 미주개발은행에서 일하고 그 이후에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경제학 박사자리를 따낼 정도로 엘리트였다. 차베스는 공부를 안 한 건 아니지만 경제사보다는 남미사에 대한 것이었다. [44] 사실 위에서 언급되듯 지속되는 패배에 힘을 잃자 참패를 당하느니 차라리 선거에 불참하겠다는 기조가 있긴 했다. 당시 여론조사 결과도 야당이 30여석밖에 확보하지 못한다는 예상이 나올 정도로 경제가 호황이기도 했고... [45] 이 부분은 조심히 접근해야 한다. 분명 차베스에 동조적인 젊은 군인 층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나, 고위 장교-장성급- 사이에서는 차베스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난 군인들도 많았고, 그리고 이들에 의해 2002년 쿠데타가 일어났다. [46] 참고로 차베스는 죽을 때까지 군인 신분을 유지했으며 실제로 군인들은 차베스 최대 권력기반 중 하나였다. 이건 베네수엘라의 상황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사실 베네수엘라의 3분의 1 이상의 지역은 군부인사가 장악하고 있다. 사실 차베스가 쿠데타를 일으켰던 것도 부분적으로 군인 월급이 당시의 긴축정책과 인플레로 인해 실질적으로 1/7 수준으로 격감해 도저히 먹고 살기 어려워졌다는 점도 있다. [47] "Country and Territory Ratings and Statuses, 1973-2018 (Excel)" 엑셀파일 참고. [48] 1~7점의 범위를 가지며 숫자가 작을수록 자유로운 것이다. 1~2.5점은 자유, 3~5점은 부분적으로 자유로움, 5.5~7점은 자유롭지 않음. [49] 2004년 지표가 반영되었다. [50] 차베스가 사망한 2013년 지표가 반영되었다. [51] 베네수엘라 2002년 쿠데타 때 야권이 미국과 스페인으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은 정황을 본다면 여권입장에서 왜그렇게 히스테리컬한지 알 수 있다. [52] 참고로 베네수엘라는 사형제 폐지국가다. [53] 다만 출구조사와 실제 선거결과가 다르게 나오는 경우는 상당하며, 당시 출구조사는 민주행동이라는 정당(反 차베스파 야당)에서 시행했기 때문에 표본에 문제가 있을수도 있다.(일단 한국만 봐도 역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출구조사 결과와 실제선거 결과가 다르게 나온 경우는 수두룩하다.) [54] 차베스가 패배한 첫 선거는 2007년 국민투표. [55] 다만 현 야권에서 빈민층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이들 프로그램들을 거의 계승하겠다는 입장이다. [56] 실제로 1961년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역시 1963년 대통령 선거 승리 당시 표차는 불과 1%p 남짓이었다. 기존의 민주당 정권의 분열로 인한 기존 정치세력에 대한 불신과 국가재건최고회의 당시의 정치깡패 척결 등으로 나름 인기를 샀음에도 이 정도였으니, 정말 극도로 예외의 상황이 아니면 쿠데타 세력은 기본적으로 반발을 받을 수 밖에 없다. [57] 다만 정치적 양극화는 더욱 극심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차베스는 과격한 언동과 독단적인 카리스마, 과감한 행동력으로 야당을 압도했지만 동시에 부족한 포용력 때문에 야당과 격하게 대립했고 그러면서도 득표력은 매우 강했기 때문에 이전까지 대립 관계에 있던 정당인 민주행동과 사회기독당을 하나로 뭉치게 만든 것도 모자라서 여타 다양한 세력들(우파에서 좌파(심지어 공산당에서 분리된 정파까지 야권연합에 참여하기도 했다!)에 이르기까지)을 反차베스파의 일원으로 단합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58] 정확하게는 이전 4공화국 시절에도 무상교육이 법에 명시되어 있었고 한때나마 일부 대학에서 무상교육을 실현할 정도에 이르렀지만 오일쇼크가 끝난 이후에 경제위기로 점차 나라가 막장이 되어가면서 제대로 시행이 되지 않았다. [59] 다만 옛 동구권 국가들에서 국영상점 운영하는 것처럼 운영되는 경우도 간간히 있다고 한다(...). 이럴 경우에 줄을 길게 서야하는건 당연지사. [60] 다만 이 때문에 고정적인 월급을 받고 생활하는 중산층에서 차베스에 대한 반감이 극심하다. 복지 정책이 대거 확충되었다지만 이들 중산층 입장에선 상당히 불만족스러운 질인데다가 물가 상승 때문에 실질적으로 중산층에게 돌아오는 혜택은 쥐꼬리만하기 때문. [61] 의사들은 대부분이 쿠바 의사들이다. 베네수엘라 의료진 대다수는 상류층이라(의사가 되려면 엄청난 돈이 들기 때문) 무상의료를 거부했기 때문에 쿠바 의사들을 불러와 따로 월급을 주고 쿠바 측에도 돈을 주며 양측 협조로 무상의료를 시행한다. [62] 2014년 상반기 베네수엘라 시위에서 빈민층의 절대 다수가 시위에 동참하지 않았던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차베스 정부하에서 가장 큰 혜택을 누렸던 계층이 바로 빈민층이기 때문. [63] 다만 이건 제4공화국 헌법이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활성화되기 전에 제정된 것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64] 물론 차베스가 집권한 이후에도 지방선거는 멀쩡하게 잘 시행되고 있다. 다만 3년에 한 번씩 한꺼번에 시행되던 걸 주지사는 별개로 선출하도록 변경되었다는 게 달라진 점. [65] 이는 부패한 관료들을 걸러내는 시스템 구축이 잘 안되었다는 뜻이기도 한데, 새로 온 사람들도 이전 정부 하에 소속된 관료들처럼 돈에 잘 흔들리고 관료주의적인 건 마찬가지이고, 부패로 악명높은 정치 엘리트들의 입지를 대대적으로 악화시키는데 성공했어도 그 하부의 부패한 관료 조직을 몰아낸 것도 아니기 때문에 딱히 부패가 크게 줄어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비록 이를 빈곤 감소와 복지 확충으로 불만을 메꾸고 있지만(기실 70년대 베네수엘라도 부패가 상당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부정부패에 대해 다소 관용적으로 봤던 것과 일맥상통). [66] 얼핏 보면 말도 안되는 얘기인 것 같지만 한두 번 당한 스킬이 아니기 때문에(...) 의외로 잘 먹히는 논리이다. [67] 그나마 2010년대 들어서 미란다 주의 주지사를 지냈던 카프릴레스라는 정치인이 주요 대선 주자로 등장하긴 했다. 득표율 면에서만 선전하고 당선자를 별로 못 내긴 하지만... [68] 4번째 임기 도중 사망했다. [69] 원래 베네수엘라의 경제는 석유에 너무 의존했기 때문에 유가에 따라서 경기가 요동쳤고 디폴트를 한 두번 당해본 게 아니었던 롤러코스터 막장 그 자체였다. [70] 이강택 PD가 문재인 정부 시절 교통방송 사장으로 선임될 때 보수 언론에서 KBS 스페셜을 언급하며 비판하자 진보 언론에서는 색깔론이라고 반격하며 그 시절 미국이 나빴고 빈부격차가 심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고 옹호했다. [71] 1998년 대선에서 56.2%, 2000년 대선에서 59.8% 2006년 대선에서 62.8% 2012년 대선에서 54.5%. 독재는 견제없는 권력을 말하는 것이지, 국민들의 지지와는 상관이 없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이긴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를 표방하는 나라에서 독재라는건 사실 국민들이 만드는 것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집권 초기의 아돌프 히틀러 박정희도 절차적인 정당성은 충분했다. [72] 석유가 넘쳐나는 나라에서 웬 물 부족이냐 싶지만, 차베스가 원체 강경한 발언을 많이 쏟아내다보니까 투자가 많이 부족하고, 수도시설 역시 확충되고 있다고는 해도 그 속도가 더딘데다 빈곤율의 급격한 감소로 물 수요량이 그야말로 폭증하면서(...) 결국엔 물이 부족해지게 된 것. 그리고 베네수엘라가 이 시기에 극심한 가뭄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덕분에 베네수엘라 전력의 상당부분을 책임지는 구리발전소(수력)가 한 때 전력생산을 제대로 못하면서 단전사태도 일어났다. [73] 차베스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지만 공산주의에 우호적이고 베네수엘라 공산당과도 가깝게 지낸다. [74] 라틴 아메리카는 야구가 인기가 많아서 라틴 아메리카 국가 독재자들 대부분이 반미, 친미 상관없이 전부 야구광이다. [75] 아스나르 총리는 중도우파 인민당 출신이지만 사파테로는 중도좌파 성향인 사회주의노동자당 출신이었다. [76] 스페인어에서 ¡TÚ!는 '너'를 뜻하는 대명사로 평어체에 가깝다. 즉 이미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점잖게 주의를 줄 생각이 아니라 '야 너 임마!'라는 식으로 강하게 지적하였던 것. [77] 매우 NL적인 시각에서 써있지만 정작 본인은 NL도 PD도 아니며 애초에 학생운동가 출신이 아니라고 한다. 통합진보당으로 민주노동당이 합당될 때 탈당한 인물이기도 하다. 인터뷰 [78] 그러나 어디까지나 20여년 전 과거형으로 이후 채진원은 공화주의 간판 내걸고 진보=포퓰리즘이라는 등식으로 매도하는 흔한 신흥 우파가 되어버린지 오래. 어쩌면 저 때부터 싹수가 보였을 수도 있다. 민주노동당 출신 경력 내걸고 전향 테크 밟은 유형이 그렇듯. [79] 레디앙은 의외로 반미 성향이 약하다. 심지어 2020년대 들어서는 '규칙(진보 진영의 해석으로 보면 제국주의적 패권 질서)에 기반한 국제 질서가 규칙을 파괴하려는 행위(중국, 러시아 등 반미 진영)'보다 낫다고 '단언'하는, 민주당계보다도 더 막나간 연재를 게재하여 진보 진영을 경악시켰다. [80] 주로 진보 진영 내 '좌파'에서 그의 비사회주의, 비공산주의적 성향을 지적하며 좌파가 아니므로 우파라는 것이 주요 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