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06:38:54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파일:이란 대통령 문장.svg
이란 이슬람 공화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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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03a3b><colcolor=#fff>이란 이슬람 공화국 제9-10대 대통령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
محمود احمدی‌نژاد | Mahmoud Ahmadinejad
[1]
파일:220px-Mahmoud_Ahmadinejad_2019_02.jpg
출생 1956년 10월 28일 ([age(1956-10-28)]세)
이란 제국 아라단
재임기간 제9대 대통령
2005년 8월 3일 ~ 2009년 8월 5일
제10대 대통령
2009년 8월 5일 ~ 2013년 8월 3일
신장 157cm
배우자 아잠 파라히
자녀 파테메흐 아마디네자드
알리레자 아마디네자드
메흐디 아마디네자드
소속 파벌
[[원칙파|
원칙파
]]
소속 정당 [[이슬람 기술자협회|
이슬람 기술자협회
]]
서명
파일: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서명.svg
1. 개요2. 상세3. 기타

[clearfix]

1. 개요

이란의 제9~10대 대통령.

트위터 계정

2. 상세

이란에서 대표적인 보수강경파 인물로 알려진 인물로서 1979년 이란 혁명 때 미국 대사관 점거계획에 참여하면서 꽤나 이름을 날렸고 이후 특수부대 사령관으로 일하기도 했다. 1990년대에 아르데빌 시장을 역임하다가 2003년 테헤란 시장에 당선되면서 유능한 시장이라는 평판을 얻었고 임기 중에 시장직을 사퇴하고 대통령 선거에 나섰다. 위험한 모험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2005년 8월 3일 대통령 선거에서 예상을 뒤엎고 결선에 진출했으며 개혁파와 온건보수파가 지지한 후보인 라프산자니 후보와 맞붙어 예측을 완전히 뒤엎고 당선되었는데 이것이 이변이라고 표현될 정도인 건 우선 당초 1차 투표에서 개혁파와 온건보수파 후보를 합해서 60%에 달하는 득표율을 기록했기 때문이었으며 두 번째는 그의 성향이 극우파라서 중도층의 표를 얻기 힘들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란의 직선제 대통령 가운데서는 처음으로 비성직자 출신인 대통령이다. 사실 당대에는 강경파라는 이미지도 있고 테헤란 시장에 재직했을 때 강경보수적인 행보를 보였던 걸로 인해서 우려가 많았지만 테헤란 시장 때 그런대로 일 잘하고 청빈한 정치인으로 알려져서 괜찮은 이미지를 쌓은 덕에 당시 이란 경제 전반적인 문제점인 실업문제와 빈곤문제 해결 등 경제이슈를 들고나오면서 강경파적인 이미지를 불식시키고 농촌지역 주민들과 빈민층의 지지를 얻어 당선되었다. 물론 이는 부분적으로는 하메네이와 상당히 친했기 때문에 개혁파 후보라면 져야 할 장애물이 그에게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단순히 강경파라서 당선된것은 아니라는것은 사실이다.

초기 몇 년간 은 유가가 급상승하면서 나름대로 호황을 경험했고 보조금도 풀어 빈민층들의 지지도 괜찮게 나와 제법 승승장구하는 듯 싶었지만 대침체의 여파로 점차 지지세가 수그러들었고 개혁정책의 후퇴와 언론자유 제한 등의 보수적인 통제정책의 강화로 젊은층들로부터 많은 반감을 샀다.[2] 이 와중에 2009년 6월에 대통령 선거에서 전 총리였던 미르 호세인 무사비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어 재선했지만 당시 부정선거 의혹이 크게 일어나[3]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이란의 학생 한 명이 시위 중에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4]이 때문에 시위의 규모는 더욱 확산되었지만 2010년대에 유가가 회복되던 시기에 알리 하미네이와 관계가 틀어졌고 결국 2012년 총선에서 아마디네자드 세력은 하메네이 지지 세력에 크게 밀렸으며 이어서 서방의 경제재제로 인해 이란 경제가 악화되면서 정부 보조금을 대폭 삭감해 야했다. 이로 인해 물가가 크게 오르고 생계형 범죄와 실업이 급증하는 등 도시 시민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고 시골에서의 지지율조차 급감해 버렸다. 결국 온건한 하산 로하니가 과반득표로 집권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쓸쓸히 은퇴해야 했다.

여하간 반미, 반이스라엘 주의자로 물의를 빚은 인물이기도 하며 집권 시기에는 핵개발 권리는 이란의 주권이라면서 미국, 이스라엘과 잦은 대립과 마찰을 겪었고 국내적으로도 언론과 사회통제로 개혁파와 잦은 마찰을 빚었다. 서방세계에서 로버트 무가베, 김정일과 더불어 최악의 독재자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근데 무가베나 김정일은 막장 완벽 독재자지만 그는 사정이 많이 다르다.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대통령은 직선제 선출직이지만 그 위에 실권자인 이맘(imam) 호메이니의 후계자인 알리 하메네이(카메네이)가 떡 버티고 있다. 따라서 그는 하메네이의 꼭두각시인 셈(…). 사실 그가 이렇게 깽판을 친 일부러 이란의 최고 수뇌부인 종교 지도자에 대한 비판을 자신이 일부러 맞으려는 몸부림이라는 설이 있다. 한마디로 의도적인 광역 어그로를 끌고 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자신이 실제로는 종교 지도자의 순한 양이라는 것을 인지시키면 자연스럽게 국민들이 이란의 종교지도자들을 비판하겠지만 만약에 자신이 국제적으로 민폐도 끼치고 깽판을 부리면서 마치 자신이 이란의 지도자인양 행세하면 국민들은 그를 욕하는 선에서 끝나며 이때쯤 하메네이가 그에게 자제하라는 소리 한 번 정도 해 주면 국민들은 오오 하메네이 오오... 이러고 종교지도자들의 권력은 더욱 확고해진다. 물론 1기 집권 때는 가능성이 적었는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란이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선거로 뽑는 국가인 만큼 나름대로 인기관리를 해야 하는 처지인 데다 시골에서는 나름대로 지지기반이 있어서 집권한 것이지 단순히 하메네이하고 친해서 집권한 건 아니다. 물론 2기 집권 때는 얄짤없지만 하메네이가 2013년에 치러진 대선에서 마무드 아마네자드의 편이였던 사람들을 갈아치우며 결국은 사실상 정치적인 힘을 잃어버렸다. 결국 반대파인 하산 로하니가 하메네이의 낙점을 받아 신임 대통령으로 취임했고 이후 그는 정치가로서의 생명이 끝장나 버렸다.

2018년에 시위를 선동한 혐의로 체포되어 가택연금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런데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이란 핵협정 파기를 계기로 정치적인 재기를 노리고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실제로 여론조사에서 1위를 기록한 적도 있다. 이를 노려 대통령직 복귀를 시도했지만, 선관위의 퇴짜를 맞으면서 정치적 재기도 실패했다. 그나마 같은 보수파인 후배 정치인 에브라힘 라이시가 선거에서 압승했다.

3. 기타

  • 아이러니하게도 유대인 혈통이라는 소문이 있다. 자세한 건 알 수 없으나 과거 이란이 아랍권과 다른 것을 강조해서인지 유대인에게 좀 더 관대한 편이었기 때문에 많은 유대인(및 아르메니아인)이 살긴 했다. 그의 반미, 강경보수적인 태도는 이 혈통이 아니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라나.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미국 기자가 만약 당신 딸이 :유대인과 결혼하겠다고 유대인 사위를 데려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묻자 그가 유대인이라는 사실보다는 그의 인품을 확인하겠다는 정상적인 답변을 하기도 했다. 방송용 립서비스 아닐까? 어차피 이란은 이스라엘을 증오하는 것이지 유대인에 대해선 조금 애매한 포지션이다. 호메이니는 "우리는 유대인을 증오하지 않는다. 다만 시오니스트라는, 유대인의 탈을 쓴 가짜 유대인들을 증오한다."고 말한 바가 있으며 아마디네자드도 이란계 유대인 지도자들과 여러번 회동하기도 했고 이란 에도 수만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살고 있다. 다만 아랍국가 지도자로 역시 유대계 혈통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데다 천상 괴짜라 집중적으로 조명받던 무아마르 카다피 살아생전이라 묻혀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양반도 유대인 문제 관련해서 상당한 기행을 저질렀다. 2009년에 유엔에서 홀로코스트는 거짓이라는 연설을 했다가( 기사) 완전히 뒤집어 놓는 사건을 터뜨리기도 했다.
파일:external/www.cedarsrevolution.net/Ahmadinejad-Asad-Tehran-08-02-08-sm.jpg
* 키가 매우 작기로 유명하다. 대략 5피트 2인치(157cm)로, 키가 작기로 유명한 다른 나라 정상들( 니콜라 사르코지 - 166.4cm, 김정일 - 162cm 등)과 비교해도 한참 작다. 위 사진에서 옆에 있는 사람은 키가 190cm에 달한다고 알려진 시리아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이다.
  • 애플 맥북을 사용하며 2017년부터 트위터를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 하지만 본인이 집권할 때 이란에서 트위터 페이스북을 금지시켰다. # 2018년 10월 기준으로 트위터는 여전히 이란 국민들에게 접속이 막혀 있다.[5]
  • 강경파라서 무조건 막나갔던 인물이었던 것처럼 보였지만 아마디네자드도 2009년 시위가 격화되었을때 언론자유 확대 등 자유화 조치를 확대하려고 시도를 했다가 모하마드 알리 자파리 이슬람 혁명 수비대 총사령관에게 비난받으면서 얼굴을 가격당하는 일이 발생했는데 이때 아마디네자드의 얼굴을 가격한 자파리는 이후로도 승승장구했다. 아무리 대통령의 힘이 최고지도자보다 약하다고는 하지만 혁명수비대 총사령관이 대통령을 폭행한 것은 명백한 하극상인데 그럼에도 자파리가 아무런 조치를 받지 않은 것은 이란의 대통령 직위가 생각보다 권력이 많지 않은 자리임을 보여주는 서글픈(?) 현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 페르시아어 로마자화: Mahmūd Ahmadīnežād [2] 단순히 언론자유를 제한시킨 수준을 넘어서 인터넷 속도도 128kbps로 제한시켰다. 한국 기준으로 친다면 ADSL 이전의 인터넷 속도를 체감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그래서 하산 로하니가 집권하기 전에 이란의 인터넷은 속도가 느려터지기로 악명높았다. [3] 사실 아무리 농촌지역에서의 지지율이 높다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당시 젊은 층들의 불만이 상당했던 데다 득표율이 예측치보다 너무 높게 나왔고 그래서 대충 하메네이하고 적당히 쇼부봐서 조작한 것이라는 얘기가 많았다. [4] 이 학생의 이름은 네다 솔탄으로 후에 그녀는 이란 민주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데 언론들이 그녀의 생전 사진이랍시고 엉뚱한 사람의 사진을 올리는 사태가 벌어졌다(나중에 네다 솔탄의 유족들이 그녀의 진짜 생전 사진을 보여주고 BBC를 비롯한 일부 언론들이 정정보도까지 했지만 소용없었다.). 이 사람은 당시 34살의 영어 강사였던 자라 솔타니였는데 우연히 그녀의 사진을 본 이란 정보국은 그녀를 이용해 '네다 솔탄은 살아있으며 그녀의 죽음은 반정부 세력과 서방 측이 조작한 프로파간다였다.'라는 식으로 시민들을 속이려고 했지만 자라 솔타니가 이를 거절하자 이란 정보국은 오히려 그녀를 CIA의 스파이로 몰아 기소했고 결국 그녀는 비행기를 타고 튀르키예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해야 했다(스파이 혐의로 기소된 탓에 출국 금지까지 당했지만 공항 직원을 돈으로 매수하는 기지를 발휘해 간신히 망명에 성공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미국에서 살고 있다. [5] blockediniran.com 에서 체크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