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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제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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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편제
2.1. 천호제2.2. 케식(keshig)2.3. 바토르2.4. 탐마(tamma)2.5. 케리크2.6. 카라우나스(Qaraunas)2.7. 기타
3. 병참(兵站)
3.1. 병참선3.2. 식량3.3. 무기3.4. 목초지3.5. 말
4. 전략과 전술
4.1. 작전회의4.2. 군영 설치4.3. 초원 전술4.4. 공성 전술4.5. 군율
5. 원나라군(元軍)6. 몽골의 적대국7. 몽골군의 만행

1. 개요

몽골 제국의 군대. 13세기 세계 최강의 군대였다.

몽골이 당시 세계 최강의 군대가 된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지정학적으로는 내륙 초원 지대라서 농사는 불리했으나 대신 축산이 활발했으며, 넓고 넓은 초원지대에서 유일한 이동수단인 은 필수였다. 당연히 넓은 초원을 무리없이 횡단하려면 말을 무조건 소지하고 늘려야 했다. 몽골 초원에서 자란 말들은 특유의 제5의 보법을 배우게 되었는데 이는 말 스스로의 체력 소비를 줄이면서 기수에게 부담도 줄여서 말에 탄 채로도 잘 수 있도록 한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몽골 초원은 여름에는 매우 덥고 겨울에는 매우 추운 최악의 환경이라서 말들은 이 환경에 적응하다보니 다른 말보다 투박하게 생겼으나[1] 그 덕에 고비사막이나 러시아의 추운 환경에서도 끄떡없었다. 이 말 덕에 몽골 제국은 엄청난 기동력을 통해 빠르게 진격하면서 적국을 놀라게 했다.

두 번째 이유는 양질의 철광석이었다. 칭기즈 칸이 몽골 부족을 전부 통일하고, 요동까지 정복하면서 몽골과 요동에서 나오는 양질의 철의 대량 채굴을 바탕으로 갑옷을 입은 중기병을 적극 양성했다. 당시 중기병들은 가히 탱크에 맞먹는 위력을 지녔기에 몽골 제국군의 전력 강화에 큰 이바지를 했다.

세 번째 이유는 신호체계이다. 전장에서 효시라는 수단으로 쪽지를 아군측에 보내거나 부대를 진격하게 하면서 몽골 제국군은 효율적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혼전중에는 북이나 징을 동원해 군부대에게 신호를 주며 빠른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몽골군에게도 취약한 부문이 있었는데 바로 공성전 해상전이었고, 해상전은 공성전과 달리 멸망 직전까지 매우 약했다. 단, 공성전은 칭기즈 칸이 몽골 제부족들을 통일하던 당시에는 성을 공략하는 경험도 부족했거니와 공성무기 제조 기술력도 부족해 공성전은 젬병 수준이었다. 그러나 당시 중국 북부를 지배하던 금나라를 침공하면서 얻은 중국인 기술자들을 대거 등용한 뒤 이를 통해 공성무기 지식을 얻게 된 것과 함께, 이후 대호라즘 및 대금 전쟁, 러시아 정벌 등 여러 공성전을 경험하면서 몽골 제국군은 엄청난 경험을 쌓게 되었고, 공성전은 더이상 취약점이 아니게 되었다. 특히 호라즘까지 정벌한 이후로는 과학기술이 높았던 무슬림들을 대우해서 회회포라는 강력한 투석 공성무기를 얻게 되면서 승승장구했다.

해상전은 원래 내륙에 위치한 국가이다보니 수군을 양성할 필요가 없었고, 이후 호라즘과 러시아 정벌을 할때도 해전이 아닌 지상전만 펼쳤기 때문에 수군을 양성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아직도 살아남았던 남송을 침공하려면 수군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면서 수군 양성을 하기 위해 항복한 한족이나 금나라 출신 인물들 중 수군 장수를 적극적으로 기용했고, 이는 어느 정도 통하면서 남송을 멸망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일본 원정을 보듯 고려군의 수군 장수들이 태풍의 징조를 감지하고 보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군에 대한 불신과 바다에 대한 지식 부재로 뼈아픈 실패를 맞이한 것만 봐도 몽골 제국군의 수군은 그 명성에 비해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마지막으로는 부족 통일 전쟁이라는 난세 속에서 칭기즈 칸 아래에 있던 제베와 수부타이 등 명장의 존재도 무시할 수 없다.

2. 편제

몽골군의 편제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 원조비사》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 《원조비사》에는 천호제를 비롯하여 중군과 좌•우군의 편성, 케식텐 등에 대한 기록이 존재한다. 《원조비사》에서 보이는 오기나 전반적인 모호함에 비해 이 부분은 매우 세세하게 서술되어 있으며, 현대의 연구도 거의 전적으로 《원조비사》에 의존하고 있다. 아마도 칭기즈 칸이 몽골을 통일하면서 군제를 대대적으로 개혁했기 때문에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함인 듯 하다. 애초에 《원조비사》에서 몽골 통일을 다루는 지면이 90% 이상이다.

2.1. 천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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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반(아르밧) 10명 정도의 병사를 공출 가능한 집단.
자군(자굿) 100명 정도의 병사를 공출 가능한 집단.
밍칸(밍갓) 1,000명 정도의 병사를 공출 가능한 집단.
투멘(투멧) 10,000명 정도의 병사를 공출 가능한 집단.

공식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1206년으로 테무진의 몽골 통일이 막바지 단계에 이르렀을 때였다. 몽골 고원의 부족들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이합집산을 계속해 오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을 필요가 있었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새로운 편제인 천호제였다.

군제는 투멘 단위로 운영되었는데, 일례로 《원조비사》의 기록에 의하면 칭기즈 칸이 몽골 고원을 통일했을 당시 몽골의 병력을 95 밍갓으로 잡고 있다. 즉 당시 몽골이 동원할 수 있었던 총 병력은 이론상으로 95,000명에 상당하다는 것이다. 물론 실제 투멘의 정원이 꽉 차는 일은 드물었고, 북조지아 대학의 티모시 메이 역사학 교수에 의하면 대개 60% 정도의 인원만을 유지했다고 하기 때문에 이 추정에 따른 수정치는 대략 57,000명 가량이다. 당시 몽골 고원의 인구는 100만 명 내외로 추정된다.

1250년 무렵인 제4대 몽케 칸 시절에는 원 본국의 정규군이 90 투멧, 일 칸국이 22 투멧, 킵차크 칸국의 43 투멧을 비롯하여 거의 100만 명에 달하는 대병력이었다. 이들은 제국의 광대한 영토에 넓게 퍼져 있었으며, 동해에서부터 흑해까지 달하는 지역을 지켰다.

십호장은 백호장의 지휘를 받고, 백호장은 천호장의, 천호장은 만호장의 지휘를 받았으며, 마지막으로 만호장은 대칸의 지시를 받았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직속 상관의 명령만을 따르도록 되어 있었다.

10명이 모인 단위인 아르반은 강한 결속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특례를 제외하면 병사는 자신이 소속된 아르반을 옮길 수 없었으며, 전투 중 적에게 사로잡힌 병사는 해당 아르반의 동료들이 구출해야 했다. 연대 책임이 적용되어 탈주자가 나왔을 때는 해당 아르반의 구성원들이 모두 참수당하는 등 공동운명체적인 성격도 있었다.

50명이 모인 집단인 도 있었다. 이는 군대가 움직이던 최소 단위로 추측된다.

많은 튀르크계 유목민족들과 마찬가지로 몽골군도 징병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신체 건강한 15 ~ 70세의 몽골 남성은 모두 군역의 의무를 졌으며, 평시에는 생업에 종사하다가 전시에 소집되어 싸웠다. 물론 징집병이라고해서 이들을 정주민족의 징집병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목축과 수렵 등 유목민족의 일상은 농경민족에 비해 전투기술과 연관된 요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점을 들어 몽골인은 대단했지만 몽골군이 정예병은 아니었다는 주장도 존재하는데, 존 마슨 스미스 주니어(John Masson Smith Jr.)가 대표적이다.

2.2. 케식(kesh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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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의 호위부대를 말한다. 초기에는 수백 명 정도의 인원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수가 늘어나 나중에는 10,000명 단위가 되었다. 이렇게 된 이유에는 정원 자체가 늘어난 것도 있지만 케시크들이 합류할 때 자신의 수행원들을 대동한 것도 있었다.

칸의 막사는 기본적으로 사병들과 약 500m 간격을 두고 세워졌다. 이는 화살의 사정거리의 2배 정도에 해당하는 거리로 아마도 암살을 막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케시크들은 여기에 칸과 함께 주둔했다. 활을 들고 수행하는 코로치와 칼을 들고 수행하는 울두치가 있었으며, 일부는 바토르로 구성되었다.

몽골군의 숙영지에는 경계임무에 사용되는 개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관리하는 것도 케식의 임무 중 하나였다. 정확히는 개들을 돌보는 임무를 맡은 케시크들이 따로 있었다. 사람 한 명당 2마리의 맹견이 할당되었으며, 이렇게 사육되는 개들의 수는 수천 마리에 달했다.

구성원은 몽골의 귀족과 피정복지의 지배 계급이 주를 이루었다. 기본적으로 칸의 막사를 지키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제국의 판도가 넓어지면서부터는 점차 정치적인 영향력을 넓혀갔다. 이들은 군 내부에서의 세력을 넓혔고 통치에도 어느 정도 영향력을 형성했다. 피정복민을 받아들인 것에 대해서는 인질로서의 의도가 강했고, 민족통합정책의 의도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2.3. 바토르

돌격 임무를 맡은 결사대였으며, 최정예 전사들과 죄수들로 구성되었다. 잘못을 범한 병사는 그에 대한 처벌로 바토르에 편성되기도 했다. 이 경우 결사대에서 3 ~ 4회의 전투를 치르고 살아남아야 본래의 부대로 돌아갈 수 있었다.

2.4. 탐마(tamma)

정보를 수집하고, 정복지를 관리하기 위한 소수 정예부대이다. 탐마에 소속된 대원을 탐마치(타마친)라고 하며, 탄마(tanma)라고도 불렀다. 초창기 이들은 몽골족 전체 병력 중에서 차출된 일종의 파견부대였다. 목적은 점령지에서 몽골족의 통치를 유지하거나 가능하면 확장하는 것이었고, 초기에는 대체로 스텝지대와 정주(定住)사회의 경계지대에 주둔했다. 정규군이 아니어서 그때 그때 필요에 따라 편성되었는데, 1250년대 훌레구가 페르시아와 이라크를 치러 갈 때 형인 대칸 몽케가 '탐마' 군대를 내주었다. 페르시아의 역사가이자 일 칸국의 관료였던 주베이니의 서술에 따르면, 이 '탐마' 부대는 활용 가능한 몽골족 병사 10명당 2명을 뽑아 구성한 것이라고 했다.[2] 후기로 갈수록 순수 몽골족으로만 구성되었던 규칙이 약해져 점차 정복지의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었다.

2.5. 케리크

주로 농경민족으로 이루어진 병사들로 방어를 담당하는 보병이었다. 몽골의 판도가 넓어지면서 몽골인만으로는 영토를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없게 되자 피정복민들을 군대에 받아들였다. 튀르크-몽골계의 유목민족들은 경기병 체제의 몽골군에 빠르게 동화될 수 있었으나 한족이나 페르시아인들처럼 그것이 불가능한 경우도 많았다. 이런 인원들은 대부분 케리크가 되었다.

주 구성원은 한족을 비롯한 농경민족이었으며, 슬라브 민족들도 대거 있었다. 초기에는 기병 중심으로 운영되던 몽골군이었으나 점차 보병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후로는 이들에 대한 대접도 좋아졌다. 한족 보병들은 남송과의 전투에서 크게 활약했으며, 이례적으로 고급 지휘관으로까지 승진하는 경우도 있었다.

2.6. 카라우나스(Qaraunas)[3]

페르시아 동부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조직적인 약탈을 일삼던 집단이었다. 그 유명한 마르코 폴로 1272년에 이들과 조우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들 부대는 '탐마'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제2대 오고타이 칸의 치세에 최초로 파견되어 인도와의 국경 지대에 주둔했다. 그들은 몽골의 다양한 부족 출신으로 구성되었고, 사실상 새로 만들어진 인위적인 '부족'이었다.

13세기의 페르시아 사료(史料)에 따르면 '카라우나스'는 대개 일 칸국의 적대 세력으로 묘사된다. 이는 '카라우나스'에 일 칸국의 경쟁자인 킵차크 칸국의 장군이 지휘하는 병력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찍이 훌레구가 페르시아- 이라크 원정을 단행할 때 대칸 몽케가 '탐마'로서 군대를 뽑아 동생인 훌레구에게 주었는데, 킵차크 칸국에서도 전통에 따라 일부 병력을 지원했다. 훌레구의 정복이 끝난 뒤, 각자의 영토 경계를 놓고 두 칸국끼리 분쟁이 일어났고, 이때문에 킵차크 칸국에서 차출되었다가 살아남았던 이들 병력이 '카라우나스' 부대와 합류해 일 칸국의 배후를 교란했던 것이다. 계속된 전쟁 끝에 일부 '카라우나스'는 결국 일 칸국에 항복했지만, 나머지는 중앙아시아의 차가타이 칸국에 귀순해 계속 일 칸국을 적대시했다.

2.7. 기타

러시아인으로 이루어진 보병 돌격대도 있었는데, 이들은 몽골인 기병보다 우수한 장비를 지급받기도 했다. 대부분은 공성전의 전열에 내세워 화살받이로 썼지만.

케리크 이외에도 많은 피정복민들이 몽골 군대에 편입되었다. 중국측의 기록에는 몽골군에서 순수 몽골인은 소수였으며, 나머지는 전부 피정복민의 군대였다는 내용이 있다. 여진족 거란족은 중장기병으로, 한족과 아랍인 기술자들은 공병부대에 소속되었다. 심지어 근교에서 잉글랜드인 기사가 척후 임무를 보았던 기록도 존재한다.[4]

3. 병참(兵站)

병참이나 전략•전술 등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는 몽골인이 아닌 이방인들의 기록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남송인인 조공(趙珙)이 남긴 《몽달비록》(蒙鞑备录), 팽대아(彭大雅)와 서정(徐霆)의 《흑달사략》(黑韃事略) 등의 중국측 기록을 비롯하여 마르코 폴로(Marco Polo)의 《동방견문록》(Divisament dou Monde), 카르피니(Giovanni da Pian del Carpine)의 《몽골여행기》(Ystoria Mongalorum) 등 유럽인들의 기록에서도 많은 부분을 참고하고 있다. 공통점이라면 대부분 견문록이라는 것인데 외국인의 시각에서 보았기 때문인지 확실히 몽골군이 가진 특징을 그들의 관점에서 자세하게 묘사했다.

3.1. 병참선

강한 군대라도 병참을 유지하지 못하면 전투를 벌일 수 없고, 근거지에서 멀어질수록 병참선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그런 점에서 몽골군의 원정로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예를 들어 바투의 서방 원정군은 근거지인 몽골 고원에서 6,000km 이상 떨어진 곳까지 육로로 이동했다. 과장 좀 보태서 지구 반바퀴 떨어진 곳의 토착민들과 전투를 벌여 승리했는데, 산업혁명 이전의 군대로서는 거의 불가사의 급이다. 13세기 중반의 전선은 한반도에서부터 동부 유럽에 이르렀다. 직선거리로 대략 8,000km에 달하며, 이 정도의 전선이 역사에서 재현되는 것은 이후 19세기 러시아 제국이나 되어야 한다.

기본적으로 필요한 물자를 스스로 자급했으나 원정이 장기화될 경우에는 현지에서 조달하는 비율이 늘어났다. 현지의 자원을 수탈하는 방식은 그야말로 악마 같았다. 피정복민들에게 조공과 식량, 목초지를 요구했고, 이를 거부할 경우 노동력으로 부려먹거나 화살받이용 돌격대에 써먹었다. 전쟁에 들어가는 비용의 상당부분을 피정복민들에게 전가했기 때문에 본대의 전력이 소모되는 것을 최대한 막을 수 있었다.

원정을 계속하면서 병력이 늘어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바투의 원정군은 볼가 불가르와 쿠만족(킵차크)을 학살한 후 그들에게서 약 50,000~ 70,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징발했다. 러시아와 중국 문헌에는 공통적으로 1명의 몽골 병사당 10명의 현지인 포로를 잡아와 부역에 동원했다는 기록이 있다.

현지에서 조달하는 방법 외에 보급로를 통해 물자를 운반하기도 했다. 주요 거점에 식민도시를 건설하고 병참기지로 삼는 한편, 장인과 수공업자들을 이주시켜 보급품을 조달하게 했다. 정주민족 출신 수공업자들의 기술을 인정하고 그들로 하여금 각종 군수품을 생산하도록 했다. 오고타이 시대에 역참이 정비되면서부터는 100리마다 역을 두었다. 물자를 수송할 때는 말과 낙타가 사용되었으며, 이들은 100kg 이상의 짐을 지고 하루에 수십km를 이동하기도 했다.

당연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생산하고 수송한들 거리의 폭력을 극복하지는 못했고, 현지 징발 의존도가 컸다. 덕분에 북중국의 인력을 쓸 수 있었던 남송 전선에서는 투석기 부대만 7만, 인간방패로 노예병 수십만을 앞세울 수 있었지만, 유럽원정에서는 러시아를 넘을때쯤 몽골기병에 더해 흡수한 중앙아시아 기병이 징발된 수준에 불과해 헝가리, 폴란드, 이집트 등에서 반격을 받았다.

3.2. 식량

주식은 쿠루트라고 하는 말젖이었다. 모든 병사는 분말 형태로 된 마유를 지참하고 다녔으며 먹을 때는 물에 풀어 마셨다. 마르코 폴로의 기록에는 4~5kg 정도의 분말을 휴대하고 다니다가 아침 무렵에 500g 정도를 가죽자루에 넣고 물을 부은 다음, 저녁 때 불려 먹었다고 한다. 이렇게 하면 유지가 물에 뜨는데 이것은 걷어내어 버터를 만들고 남아있는 액체를 마셨다고 한다.

종마를 사용하지 않고 거세마와 암말을 선호했는데 수유기에 들어간 암말 2필이 생산하는 마유는 병사 1명이 5개월 동안 먹을 수 있는 분량이었다.(물론 망아지를 굶기지 않을 때의 일이다.) 칭기즈 칸이 호라즘 원정을 떠나기 전 병사들로 하여금 암말을 관리해서 전쟁 기간 동안 말젖을 얻을 수 있게 하라는 구절이 있다. 암말은 병사들의 식량을 제공해 주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나름대로의 준비가 필요했다.

마르코 폴로는 몽골군이 말의 를 먹었다고도 했다. 병사 1명 당 5필 정도의 말을 소유했기 때문에 이들에게서 조금씩 섭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말의 건강을 해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비상시에만 행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더불어 마르코 폴로는 몽골군이 행군 중에는 간소하고 소박하게 식사했으며, 불을 쓰지 않는 음식만으로도 10일을 행군할 수 있었다고 썼다.

가축을 데리고 다니며 먹었다는 기록도 있다. 《몽달비서》에 의하면 몽골인들은 전쟁을 할 때 양떼와 함께 이동했는데, 그 수가 어찌나 많았던지 그들로서도 다 먹을 수 없었다고 한다.

곡식도 먹었다. 존 데 플라노 카르피니[5]는 이들이 겨울철에 기장으로 만든 죽을 먹었다고 했다. 매우 묽어서 죽이라기보다는 국에 가까운 상태였다. 겨울철은 말젖이 나오지 않는 시기로 마유 이외의 다른 식량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커졌을 것이다. 피정복민의 군대를 위한 식량으로서도 곡식은 필요해서, 오고타이 시대에 정비된 역참에는 곡물을 갖추어 놓아야 했다.

행군 중에는 종종 수렵이 행해졌다. 네르제라고 불리는 전통 사냥방식은 포위섬멸전의 모의전 형식을 띄고 있다고도 할 수 있는 형태로 측면에서부터 사냥감을 에워싸 차례로 화살로 쏘아 잡는 방식이다. 이는 유목민족의 전투훈련인 동시에 식량 확보 수단 중 하나였다. 몽골군이 목초지에 거점을 마련한 후에는 주변을 샅샅히 뒤져 먹을 것을 찾아 나섰는데 사냥 역시 중요한 수단 중 하나였다. 이들이 사냥한 짐승은 중앙아시아의 마못을 비롯하여 들개, 늑대, 영양 등 다양했다. 노획물은 국을 끓여서 모든 병사가 나누어 먹고, 일부는 남겨서 보존식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보존식의 대표는 보르츠라는 물건이 있었다. 과장스러운 언급에 의하면 소 1마리의 고기를 말려서 소의 방광에 넣은 물건이었다. 먹을 때는 뜨거운 물에 보르츠를 약간 덜어서 불린 다음 먹었다.

여담으로 몽골인의 식습관은 프랑크인들에게 어지간히도 충격과 공포로 다가왔던 모양이다. 카르피니는 몽골인들이 말의 태반과 , 를 먹는 것을 혐오스럽게 여겼고[6], 이는 다른 유럽인들의 견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매튜 패리스[7]는 몽골인들이 인육과 피를 먹고 살아가는 족속이라며 거의 공황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여담이지만 패리스에 의하면 타타르인들은 괴물이라서 인간의 생피를 마시는데 먹을 피가 없으면 흙탕물을 마셔서 갈증을 달랬다. 카더라

유럽인들의 기록에는 말안장 밑에 고기를 깔아 발효시켜 먹었다는 타타르 스테이크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이것이 훗날 햄버거의 기원이 되었다고 하는데 몽골이나 중국 측의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3.3. 무기

카르피니는 몽골군의 군장에 대해 이렇게 썼다.
"모든 몽골군은 다음과 같은 장비를 소지해야 했다. 좋은 활 2~3개, 화살이 가득 찬 화살통 3개, 도끼, 밧줄, 투구와 흉갑이 그것이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병사는 휘어진 외날검을 썼다."
그러나 이것은 제국이 어느 정도 정비된 13세기 중반의 일이었고, 13세기 초 급격히 팽창해가던 몽골군이 어떤 장비를 썼는가에 대해서는 확실한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 그래도 공통적인 의견은 그들의 주무기가 이었다는 것이다.

몽골군의 주력은 어디까지나 경기병이었고, 그들이 사용했던 무기는 각궁이었다. 짐승의 뿔과 힘줄, 나무 등의 재료를 이어붙여 만든 복합궁으로 살상력이 뛰어난 위력적인 무기였다. 각궁의 최대 사거리는 약 300m 정도였지만 실전에서는 150m 미만에서의 사격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티모시 메이는 몽골군의 기마사격을 카라콜과 비슷한 형태의 것으로 보았는데, 이 전술에서 전열은 적 부대 앞 50m까지 근접하기도 했다.

을 쏠 때 다른 유목민족과 마찬가지로 손에 깍지를 꼈다. 이는 시위에 손을 베지 않기 위한 것으로 활을 당기는 것을 좀 더 수월하게 해 주었다. 유럽의 활과는 달리 다른 아시아 국가들처럼 화살을 활의 오른쪽에 매겼는데 이렇게 할 경우, 명중률이 좋아진다고 한다.

화살은 60개 정도를 휴대했으며, 장인이 만든 것도 있으나 병사 개개인이 스스로 만들기도 했다. 길이는 2피트(60.96cm) 정도로 프랑크인들의 화살보다 길었다. 화살촉은 쇠, 강철 등 금속제 이외에 짐승의 뼈나 뿔로 만들기도 했는데, 이렇게 만든 화살들은 전부 용도가 달랐다. 예를 들어 폭이 좁고 뾰족한 화살은 갑주 관통용이었고, 폭이 넓은 화살은 갑옷을 입지 않은 적에게 치명상을 입히기 위한 것이었다. 촉을 뭉툭하게 만든 살은 생포해야 하는 적을 쏠 때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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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군을 묘사한 삽화. 픽스굿에서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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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군의 군화. *안에 쇳조각을 넣어 발을 보호한다.

금속제 찰갑을 입기도 했으나 대개는 두정갑이나 층상형으로 만든 가죽제 찰갑이 선호되었다. 이는 만들기 쉬웠던 점도 있으나 층상형 갑옷이 화살에 대해 높은 방어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모든 몽골인들이 갑옷을 입은 건 아니어서 후위의 부대원은 펠트로 된 외투만을 걸치기도 했다. 그래도 투구만큼은 금속제를 써서 강철로 만든 후에 동을 입혔다.

많은 피정복민들의 무기를 받아들였다.[8] 그중에서도 가장 괄목할 만한 부분은 공성무기의 발달이다. 13세기 초 몽골군에게는 공성전에 대한 개념이 확실하게 자리잡고 있지 않았으나 13세기 중반 이후 중국으로의 남진이 본격화되면서 공성무기가 크게 발달했다. 투석기와 노포, 높은 누대가 동원되었으며, 특히 남송과의 전쟁에서는 아랍인들이 만든 신형 투석기가 활약했다.

3.4. 목초지

목초지는 식량이나 무기 못지 않을 정도로 중요하게 여겨졌다. 다른 요소가 모두 갖추어져도 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유목민족 사이의 전투에서는 서로의 목초지를 확보하고 빼앗는 것이 중요했다. 농경민족의 농지를 황폐화시키고 그 자리를 목초지로 만드는 일도 있었는데, 이럴 경우 아군의 병참을 확보하면서 상대의 생산력을 저하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원정에 동원되는 병력의 규모는 사용 가능한 목초지의 면적에 비례하는 경향이 있었다. 기동력을 살려 제 힘을 내기 위해서는 많은 말이 필요했는데, 병사 1명이 5 ~ 6필 정도의 말을 소유했다. 이 말들을 먹여 살릴 초지를 찾는 것은 사람이 먹을 식량 못지않게 중요했을 것이다.

적당한 목초지를 찾지 못할 경우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말의 수가 제한되었을 것이다. 이 경우 지휘관들은 병사 1명당 사용하는 말의 수를 줄일 것인가, 아니면 작전에 투입할 인원을 줄일 것인가를 두고 고민했을 가능성이 크다. 서아시아에 도착한 몽골군은 만족할 만한 목초지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그 결과 일 칸국의 기병들은 점차 전형적인 아랍의 중기병처럼 변해갔다. 말 5필 이상을 운용하는 경기병 중심 체제에서 1필이나 2필만을 데리고 근접전을 위주로 하는 돌격병의 비중이 늘어났다고 한다.

3.5.

몽골인들 사이에서 말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식량을 제공해 주고 이동수단이 되며 전장에서는 든든한 아군이었다. 말은 사람에 준하는 대접을 받았다.

몽골의 병사는 2 ~ 3마리에서 6 ~ 7마리까지 말을 소유했고, 전장에서 번갈아 사용함으로써 항상 최고의 상태인 말들을 탈 수 있었다. 숙영지에는 말을 관리하는 부대가 따로 있었다. 이들은 마초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가장 먼저 텐트를 쳤다. 하지만 비상시를 대비해서 모든 병사들은 적어도 2필의 말을 자신의 곁에 두었다.

숙영지 사이의 거리를 벌려 띄엄띄엄 야영에 들어갔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말에게 풀을 먹이기 위한 것이 가장 컸다. 그래야 말을 끌고 다니기 쉬우니까. 정주민들이 먹이던 콩이나 귀리 등의 곡식은 잘 먹이지 않았고 주로 풀을 먹게 했다. 곡식은 몽골에서 귀하기에 말에게 먹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프랑크인들이 힘센 종마를 선호한 것에 비해, 몽골인들은 유순하고 지구력이 좋은 거세마나 말젖이 나오는 암말을 골랐다. 물론 몽골의 말은 기갑이 120~140밖에 안 되는 조랑말인지라 품종이 프랑크인들의 힘센 종마보다 체격적으로 뒤쳐지는 편이었다.

칭기스 칸 대까지 말은 몽골의 주요 수출품이었으나 오고타이 칸은 몽골마를 외부로 반출하는 것을 금했다.

4. 전략과 전술

몽고의 막강한 용병술은 고금을 통틀어 대적할 자가 없다. 그들이 처음 금나라를 정벌할 때 고북구(古北口)로 쳐들어가려 했는데, 거용관(居庸關)에 막강한 병력이 있어 들어가지 못했다. 이에 자형관(紫荊關)으로 나아가 반대로 남구(南口)로 쳐들어가서 거용관을 공격하여 격파하고는 북구(北口)로 나와 다른 군사와 합치니, 금나라가 연도(燕都)를 지키지 못했다.

금나라가 남쪽으로 천도한 뒤에 몽고의 일부 군대가 여러 번 변경(汴京)에 이르렀으나 완안합달(完顔合達)이 군사를 동관(潼關)에 주둔시켜 변경의 중요한 보루로 삼았다. 그러자 몽고는 서하(西夏)를 거쳐 상등(商鄧)으로 가는 길을 빌려 완안합달을 삼봉산(三峯山)으로 유인하여 섬멸하니 금나라가 망했다.

몽고가 송나라를 정벌할 때도 먼저 대리(大理)를 멸망시키고, 다음으로 교지(交趾)를 이기고서 서남쪽 오랑캐들을 차례로 항복시킨 뒤에야 비로소 병사들을 송나라로 모이게 했다. 촉(蜀) 전체를 점령하고 양양(襄陽)을 점령하자 임안(臨安)이 패망했다. 10,000리 길을 행군하고 수천 겹의 험로를 돌파하며 병가(兵家)의 많은 금기를 범하고도 승리한 군대는 몽고가 전무후무하다.
성대중, 《 청성잡기》(靑城雜記) #
전략•전술 역시 외국인들이 남긴 기록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원조비사》에는 '끌 전법'에 관한 대목이 나오지만 은유적으로 서술되어 있어서 그게 정확히 무슨 말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4.1. 작전회의

원정 계획은 씨족 집회인 쿠릴타이에서 결정되었다. 1년을 기준으로 볼 때 초봄에 대략적인 계획을 잡고, 5월의 집회에서 모든 족장들이 모여 구체적인 목표를 결정했다. 쿠릴타이가 끝나면 각자의 영지로 돌아가 자신의 부족민들과 세부적인 전략을 짠 뒤, 더위가 가시기 시작하는 8월에 모여 출병했다.

대규모 원정이나 먼 거리를 이동하는 원정은 연 단위로 준비기간을 잡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바투의 유럽 원정은 2년에 걸쳐 준비되었다. 먼저 스파이를 풀어 적의 상태를 살펴보고, 이동경로를 확인하여 곳곳에 우물을 팠다. 또한 원정군이 지나갈 곳에서는 가축을 방목하거나 풀을 벨 수 없었다. 아예 들어가는 것도 안되었다.

4.2. 군영 설치

군영은 적을 감시하기 좋고, 기상현상으로부터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고지대에 지어졌다. 조공의 기록에 따르면 성 안에 주둔하지 않고, 항상 성 밖의 초원에 넓게 퍼져 숙영했다고 한다. 군영 사이의 거리는 매우 넓었는데 이는 말을 방목하기 수월하게 하기 위함이었고, 전염병을 예방하는 효과도 있었다. 말을 관리하는 군영은 따로 있었지만 비상시를 대비해 2필의 말을 항시 곁에 두었다. 초병들은 목패를 교환하는 것으로 인수인계를 했고, 암호는 자신들이 속한 부대의 지휘관의 이름이었다고 한다.

영이 한번 세워진 뒤에도 위치를 옮기곤 했는데 속임수로 적을 교란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때는 군영을 옮기되 처음 세운 위치에 밝힌 불들을 그대로 남기고 조용히 이동했다. 날이 밝은 후에도 끄지 않았다.

행군을 할 때에도 밀집하지 않고 산개한 상태에서 이동했다. 언제나 척후를 보내 적의 매복과 기습을 경계했다. 《원조비사》에는
"설령 1렌의 인원이라도 이동할 때는 척후를 보내 주위를 살펴라"
라는 구절이 있다.

4.3. 초원 전술

몽골군의 야전 전술은 다소 거칠게 비약하면 다음과 같은 요소들로 나눌 수 있다. 척후병을 활용한 정보 수집, 전장 선택권 유지, 산개대형 유지와 소규모 부대의 유기적인 움직임, 이를 바탕으로 한 포위섬멸전, 각종 기만전술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기동력과 지구력이었다.

《원조비사》에는 몽골군의 기본적인 전술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195절에는 군대를 다룰 때
"카르가나[9]처럼 나아가고, 호수처럼 나아가며, 끌처럼 나아가라"
라는 구절이 나온다. 바로 그 유명한 끌 전법에 대한 내용으로 보통 초총행(草叢行), 해진립(海陣立), 착전법(鑿戰法)이라고 한다. 문제는 이게 무슨 소린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애초에 《원조비사》 자체가 현대인의 관점에서 은유적이고 모호한 표현들이 많은데 이 구절도 그 중 하나이다. 대개 초총행과 해진립은 산개전술과 집단전술로, 착전법은 돌격전술로 추측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것도 학자들마다 의견이 제각각이다. 그리고 나름대로의(그러나 확실한 증거는 없는) 근거도 갖추고 있다.

테무진to the칸[10]에서 차키르마우트 전투를 배경으로 묘사한 끌 전법. 중간 부분부터 시작한다.

《흑달사략》에는 기병 전술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대강 이런 내용이다.
먼저 자신들이 유리한 상황에서만 싸우고, 불리할 때는 싸우지 않았다. 빠르게 적의 허실을 파악할 수 있고, 적은 수로 대군을 포위할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선봉대(돌격대)에 의지하는 것이 원칙이나 실제로는 선봉이 나서지 않고, 전원이 일제히 공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항상 산개 대형을 이루어, 보병을 상대할 때는 대오를 갖추고 기병과 싸울 때는 갖추지 않았다. 적의 움직임에 반응해 끊임없이 움직이며, 때로는 멀리서 때로는 가까이에서, 많은 수가 몰려왔다가 적은 수도 몰려오고, 모였다 흩어지며,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벼락처럼 돌진했다. 높은 곳에서 관망하다가 기병대가 돌격하는데 공격으로 적이 흔들리지 않으면 연이어 재차 돌격했다. 적의 좌•우 배후에서 포위한 후 일시에 공격한다. 그래도 흔들리지 않으면 가축들을 돌진시킨다. 허장성세를 부리거나 심리전을 펼치기도 한다. 거짓패배 후 매복으로 적을 섬멸한다. 패배한 적의 수장은 반드시 추격하여 사로잡는다.
몽골군이 야전에서 남송군보다 월등히 강했기에 어느 정도 감탄스러운 어조가 묻어나지만 기본적으로 몽골군이 기동력을 이용한 전방위 타격전술을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첫 구절은 유목민족들의 군대가 흔히 보여주는 전장 선택 방식인데 기동력을 활용하여 자신들에게 가장 유리한 상황을 만들려는 전장 선택 방식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후퇴를 불명예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는 마르코 폴로의 말과도 일치한다.

대부분의 유목민족과 마찬가지로 몽골군도 늦여름이나 초가을에 군사활동을 개시했다. 이 시기는 정주민족의 수확철이었기 때문에 생산활동에 종사하는 인구가 많아져 병력이 감소하기 때문이었다. 비슷한 맥락으로 군세가 강한 적과 싸울 때 지연전술을 쓰기도 했는데, 이는 아예 적과의 교전을 하지 않는 방법이었다. 소규모의 병력만 남기고, 본대를 일정 거리에 철수시킨 후 적이 병력을 줄이면 빠르게 되돌아와 공격하는 방법이었다.

첩보활동은 가장 기본적인 전술인 동시에 철저하게 지켜졌다. 척후병은 본대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정보를 수집했는데 주로 현지인을 사로잡아 적의 허실을 파악했다. 적병의 수와 위치, 식량의 위치와 양, 목초지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 이들은 본영에서 이틀 거리까지 앞서 나가 정보를 수집했다.

사상자가 발생하는 정면 충돌을 최대한 피했고, 적이 스스로 무너질 때까지 기다렸다. 역시 스웜 전술의 기본적인 방식으로 출혈이 큰 백병전은 최후의 일격으로 남겨두고, 그 이전에는 원거리에서의 사격으로 적의 기세를 꺾었다. 마르코 폴로는 몽골군이 백병전을 벌이지 않고 적의 주위를 맴돌며 사격했다고 전했다. 티모시 메이는 몽골군이 탄막을 형성하는 집중사격으로 적을 제압했다고 보는데, 이 전술은 16세기 유럽의 카라콜과도 상당히 유사한 점이 있다.

하나의 자군을 5개로 나누어 2개 아르밧씩 짝지웠다. 이 중 4쌍(8 아르밧)이 활을 쏘고, 1쌍(2 아르밧)이 돌격을 준비했다. 먼저 궁기병들은 긴 타원을 그리며 적에게 접근했고, 시간차로 전위의 부대가 적에게 사격을 가한 후 물러났다. 그 자리를 뒤따르는 2 아르밧이 채우면서 적에게 접근했다가 떨어졌다를 반복하며 계속 화살 세례를 퍼부었다. 사격은 조준사격이 아닌 특정 지역을 목표로 한 탄막을 형성했으며, 일반적으로 1시간의 사격에서 화살통의 화살 60개를 소모했다고 한다. 적의 대오가 무너지면 대기하고 있었던 2개의 아르밧이 돌격하여 접근전으로 마무리했다.

이 전술은 기마사격에 대한 개인적인 기량 외에도 각 자군과 아르밧이 유기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쓸 수 없었는데 그만큼 훈련이 잘 된 군대였다는 것을 반증한다. 또한 통상적인 전술에서도 중장기병이 운용되었으며, 이때 궁기병과 돌격병의 비율은 약 4 : 1 정도였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기마사격뿐 아니라 보사(步射)를 하기도 했다. 조공에 의하면 방패를 찬 돌격병들이 적을 향해 돌격하다가 말에서 내려 화살을 쏘았다는 기록이 있다. 한 발을 쏘고 난 후 두 번째로 쏠 때는 반드시 적진이 무너졌다고 하는데, 근거리에서의 조준사격이었을 가능성이 크고, 그만큼 위력도 강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몽골군의 포위섬멸전을 살펴보려면 평시에 이루어졌던 사냥인 네르제(바투예)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전시에 이루어지는 포위전의 모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사냥으로 특히 칸이 참여하는 사냥은 매우 중요한 행사였다. 사냥에 참가한 몰이꾼들은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 사냥감을 몰아넣고 포위망이 형성되면 칸이 화살을 쏘는 것을 시작으로 사격을 가했다. 실수로 사냥감을 놓치면 벌을 받았는데, 이로 알 수 있듯이 네르제는 거의 군사훈련에 준하는 행사였다. 페르시아의 역사가인 주바이니는 몽골인들이 안장과 말 사이에서 나고 자라며 평생을 사냥감을 쫓으며 산다고 했다. 더불어 그는 몽골인들은 저절로 전투하는 법을 알게 된다고도 했다.

전장에서의 포위전은 소규모 부대로 갈라져 적이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졌다. 몽골군은 중군(바라군 가르)과 좌익(제운 가르), 우익(콜 가르)으로 포진했고, 중군이 적과 교전하는 사이 좌•우익이 소규모 부대로 갈라져 적을 포위했다. 포위망이 완성되면 사방에서 함성과 동시에 적을 공격해 혼란에 빠뜨렸다.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적을 상대할 때는 일부러 혈로를 터줘서 달아나도록 한 뒤 기습하기도 했다.

산개대형을 유지하며 소규모 부대 단위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전술적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전략적인 의미로도 활용되었다. 여기에 기동력과 조직력을 더해지면서 대단히 무서운 군대가 되었다. 중국인은 이를 두고 수백 수천 명이 일시에 움직였다가 흩어진다고 표현했다.

적의 군세가 강할 때는 임기응변이 필요했다. 위장퇴각은 유목민들이 즐겨 사용하던 전법이었다. 적과 접전을 벌인 후 패배한 척 달아나다가 매복한 군사들과 함께 적을 일시에 습격하는 방법이었다. 마르코 폴로는 몽골군은 후퇴할 때도 계속 화살을 날려 적을 향해 돌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싸울 수 있었다고 전했다. 위장퇴각은 자칫하면 진짜 패배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상당한 조직력을 필요로 했다.

4.4. 공성 전술

공성은 주로 4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공성무기로 성벽을 직접 공격하고, 갱도를 파며, 성벽 아래를 파내려가 붕괴를 유발하고, 사방에서 사다리를 걸어 병사들이 올라가는 방식이었다.

공성무기로는 노포와 투석기 등을 사용했으며 화약을 쓰기도 했다. 화전을 쏘거나 쇠로 만든 폭탄, 나프타 단지 등을 투석기로 발사했으며 훌레구의 바그다드 공성전에서는 투사체를 찾을 수 없게 되자 근처의 야자수를 잘라 불을 붙여 쐈다. 남송과의 전투에서는 아랍인들이 만들어낸 회회포로 한족의 견고한 요새를 때려부쉈다. 이미 소이탄 형식의 폭약이 사용되었고, 연막과 악취를 동반한 무기도 있었다. 이는 유럽인들로 하여금 몽골군이 '악마의 자식'이라는 생각을 더욱 더 굳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몽골군의 공성에서 가장 크게 두드러지는 특징은 피정복민을 최대한 활용했다는 것이다. 《몽달비록》에는 큰 성을 공격하기에 앞서 근처의 마을과 도시들을 먼저 공략하고 병사 1명당 10명의 포로를 확보하게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러시아의 《노브고로드 연대기》와도 일치하는 기록으로, 그렇게 잡혀온 포로들은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다. 이들은 각자에게 부과된 풀과 땔감, 흙, 돌을 모아와야 했으며 공성전의 가장 위험한 작업에 투입되었다. 성벽 아래의 해자를 메우고 참호를 파야 했는데, 몽골군은 아무리 많은 수가 죽어도 슬퍼하지 않았으며, 일하는데 굼뜬 자는 주저없이 죽였다고 한다.

여러 거점을 동시에 공격하는 전법은 적을 패닉에 빠뜨리고 지원군을 차단하는데 효과적이었다. 적의 움직임을 종잡을 수 없게 된 수비대의 지휘관들이 각자의 담당구역을 방어하는데 전념하는 사이, 몽골군은 재빠르게 작은 거점들을 각개격파한 후 남아있는 요새들을 고립시켰다. 이런 방식은 대량의 피난민을 발생시켜 적에게 공포감으로 인한 공황을 일으키는 효과도 있었다. 난민들은 공포를 확산시키는 한편 적의 식량사정을 더욱 어렵게 했다.

흑사병으로 죽은 시체들을 투석기로 적의 성내에 투하해 흑사병으로 성내를 초토화시키는 작전도 썼다. 그러나 이는 신빙성이 부족하다는 연구가 있다 #.

4.5. 군율

더 세련되어진 면은 있으나 몽골군의 전술은 기본적으로는 유목민족들이 기존에 써오던 방식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골군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티모시 메이는 엄격한 군율을 들었다.

유목민의 군대는 강하지만 병사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적군의 섬멸이 아닌 전리품의 획득에 있었다. 따라서 전술적인 승리를 거둔 후 노략질에 몰두하다가 적의 반격을 받아 패배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칭기즈 칸은 약탈로 인해 기강이 무너지는 것을 우려해 개인 차원에서의 약탈을 엄금했다. 적과의 교전에서 승리한 후 모든 병사는 제자리로 돌아와야 했으며, 자신의 자리에 없거나 전리품 앞에 멈춰있는 자는 사형에 처했다. 원칙적으로 약탈은 금지대상이었고, 전리품은 균등하게 분배되었으며, 일부는 몽골 고원의 수비대에게까지 전해졌다. 분배되는 전리품은 주로 옷감이었으며 비단과 모시를 받았다. 공을 세운 전사는 칸에게 청하여 훈장을 만들 수 있었는데, 이때 훈장을 만들 금과 은은 자비로 마련해야 했다.

약탈이 허락되는 경우에는 명령에 의해 규칙적이고 조직적으로 자행되었다. 병사들은 약탈할 집을 골라 화살을 꽂아둠으로써 그 가옥이 자신의 몫임을 알렸다. 다만 이렇게 약탈이 허용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개전 초기의 공포전술을 위해서, 혹은 저항이 심한 거점이거나 항복했다가 배신한 도시에 한정했다. 항복한 도시는 최대한 약탈을 금지했다.

아울러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10명으로 이루어진 소대 중에서 1~2명이 적진을 향해 돌격하면 나머지 병사들은 이유를 따지지 않고 무조건 뒤따라서 돌격을 해야 했다. 만약 돌격하지 않으면 나머지 병사들은 모두 죽임을 당할 만큼 몽골군은 군율이 엄격했다.

5. 원나라군(元軍)

몽골 제국이 4개 칸국으로 쪼개진 이후, 몽골 제국의 직계 후신인 원나라의 군대도 따로 원군이라 분류하지 않고 몽골 제국군으로 취급한다.

6. 몽골의 적대국

6.1. 타 유목민족

몽골인들이 가장 경계한 대상은 자신들과 비슷한 튀르크계 유목민들이었다. 튀르크계 유목민들은 복속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가장 무서운 적이었고, 복속된 후에는 가장 빠르게 몽골군에 동화되어 갔다.

이들은 몽골군과 거의 동일한 작전체계와 무기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부족민들은 경기병으로 징집되었고, 층상형 가죽갑옷과 활로 무장했으며, 기동력을 활용한 초원 전술과 기만전술을 능숙하게 사용했다. 칭기즈 칸이 몽골에 도입한 천호제는 원래 튀르크계인 케레이트 부족의 편제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1186년 테무진이 카마그 몽골의 칸으로 즉위했을 당시 몽골 고원에는 케레이트, 타타르, 나이만, 보르지긴 오복 타이치우드 씨족, 메르키트 등의 부족들이 난립해 있었다. 테무진은 세력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케레이트의 옹 칸(토그릴)의 군사를 빌려 그의 산하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케레이트의 군사를 빌려 타타르, 메르키트, 서나이만 등의 경쟁자들을 제거해나가는 한편,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력도 구축해 나갔다. 옹 칸과의 사이가 틀어져 고립되었던 적도 있었으나 기적적으로 위기를 넘겼고, 케레이트를 역습해 승리한 후 오랜 친구이자 숙적인 자다란 자무카를 사로잡아 처형함으로써 사실상의 몽골 통일을 완수했다. 1205년에는 동나이만의 타양 칸과의 마지막 전투인 차키르마우트 전투에서 승리했다.

《원조비사》는 몽골 통일의 지난한 과정을 부족들의 이합집산에 의한 연대 세력 형성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하고 있다. 《원조비사》는 주로 정치적인 측면에서 몽골 통일을 묘사하고 있지만 전술적인 측면에 대한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 동나이만부와의 전투에서는 끌 전법에 대한 서술이 나온다. 즉 천호제를 도입하여 편성된 군대로 초총행(草叢行), 해진립(海陣立), 착전법(鑿戰法)을 전개하여 동나이만을 쓰러뜨렸다는 기록이다.

더불어 《원조비사》는 세력이 약했던 칭기스 칸의 군대가 사용했던 기책들에 대해서도 몇 가지 일화를 전하고 있다. 숫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적을 기만하기 위해 화톳불 수를 늘린다던가, 비전투원을 말에 태워 병력인 것처럼 위장하는 방식으로 위기를 모면한 일화가 존재한다.

몽골 통일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칭기즈 칸 항목 참조.

6.2. 금나라

생여진의 완안부가 세운 금나라는 1211년에 개전한 이래 1234년에 멸망할 때까지 20여년 간 몽골과 싸웠다. 이 기간 동안 몽골은 호라즘 원정(1219년), 유럽 원정(1229년), 고려 원정(1231년) 등 많은 정복사업을 동시에 진행했다. 더불어 전쟁을 시작한 군주인 칭기즈 칸이 붕어(1227년)하는 일도 겪었다. 그야말로 몽골의 국운을 건 사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칭기즈 칸은 금나라에 선전포고를 할 때 몽골인들의 국민정서를 이용했다. 금나라는 북방의 유목민족들에 대해 이간책을 사용하는 한편, 세력이 강한 부족에게는 무력을 사용하는 것으로 이들을 통제했다. 카마그 몽골 암바가이 칸은 타타르족에게 사로잡혀 해릉왕 치세하의 금나라로 압송된 후 목마에 못박혀 처형당했고, 이때 후손들에게 복수를 명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역사적 악감정이 몽골이 금나라를 침공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경제적인 측면도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13세기 몽골 고원의 자원은 지속된 전쟁으로 인해 크게 감소했다. 특히 주요 수출품이었던 말의 숫자가 줄어들어 재정이 적자 상태가 되었고, 이를 충당하기 위해서는 뭔가 획기적인 경기부양책이 필요했다. 여기에 몽골 통일이라는 정치적으로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에 이 에너지를 대외적으로 쏟아부을 사업이 필요했다.

금나라의 주력은 여진족으로 이루어진 중장기병으로, 이들은 12세기에 동북아시아를 제패한 강군이었다. 그러나 수세대에 걸쳐 이루어진 정착 생활로 인해 금군의 주력은 여진족 기병에서 한족 보병으로 대체되어가고 있었다. 더불어 개전 초기의 연이은 대패로 많은 수의 기병을 상실했으며, 초반부터 몽골군한테 목장과 목초지를 뺏기면서 기병 전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때문에 금군은 20여년간 야전에서는 몽골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나라가 20년에 걸쳐 몽골에게 항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부강한 국력과 견고한 요새에 있었다. 당시 금나라의 인구는 4,000만 명에 육박했고, 이는 몽골인의 40배에 달했다. 연경( 베이징) 등 화북 지역을 상실한 이후에도 중원 지역[11] 바탕으로 전쟁을 수행해 갈 수 있었다. 초기의 몽골인들은 공성기술이 부족하다보니 성채를 효율적으로 공략하지 못했고, 반면 중국의 요새들은 축성술의 발달로 견고했다. 때문에 몽골군은 야전에서 승리를 거두고도 금군의 거점을 공략하지 못해 발길을 돌려야 하는 상황이 잦았다. 초원에서의 전투에만 익숙했기 때문에 요새거점에 대한 개념도 부족했고, 승리를 거두고도 전리품과 세폐만을 받고 철수하여 금나라가 국력을 회복할 시간을 주기도 했다.

1208년 금나라의 장종이 붕어하고, 어리석은 위소왕이 즉위했다. 칭기즈 칸은 1211년의 쿠릴타이에서 금나라와의 전쟁을 결정하고, 모든 병력(추정치 약 90,000~120,000명)을 총동원했다. 봄에 초원으로부터 이동을 시작한 몽골군은 가을이 시작될 무렵 금나라 영내로 쳐들어갔다. 금나라는 이미 수년간 몽골이 침입할 만한 지역을 따라 요새를 쭉 박아두었지만 진지하게 대비를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중 가장 강력하게 방어되고 있었던 오사보에서 벌어진 첫 접전에서 제베는 요새를 함락시키지는 못했지만, 우회하여 후방으로부터 기습하는 방법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오사보가 함락되며 방어선이 뚫리자 금나라의 최고 사령관이었던 완안승유는 흩어져있던 병력을 야호령에 집결시켰다. 야호령 전투에는 추정치 약 400,000~500,000명[12]의 금군이 집결하면서 전쟁의 승패가 걸린 결전이 벌어졌는데 금군이 수적, 지형적 이점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참패였다. 칭기즈 칸은 일부의 군대로 하여금 산을 넘게 하여 우회해서 수적으로 우세인 금군을 포위하는 공격을 단행했고, 기습을 당한 금군의 후방이 붕괴되는 사이 전방도 몽골군에 의해 밀리기 시작하면서[13] 금군은 포위된 채로 학살을 당했다. 국운이 걸린 전투에서조차 단순한 우회 기동으로 뒤를 보일 정도이니 금군의 한심한 지휘 능력 수준을 알 만하다. 금군의 경우, 전성기때 총동원 가능한 병력수가 약 900,000~1,000,000명 가량으로 짐작되는데, 이 한 번의 전투에서 전체 병력의 절반을 시원하게 말아먹은 것이다. 완안승유는 금군의 남은 정예병을 회화보에 모아 다시 3일간 싸웠지만 패배했고, 이후 몽골군은 금군에 대한 야전에서의 우위를 확보했다. 1212년과 1213년에도 재차 침입했는데, 3년에 걸친 원정의 결과로 만주와 요동을 비롯한 화북 지방을 밀어버렸다.[14] 가장 큰 이득은 금나라 북부에 있었던 목장을 점령함으로써 충분한 양의 말과 목초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는 것이며[15], 같은 몽골계인 거란족들의 협력을 얻어 부족한 병력을 대거 증강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16]

1213년 칭기즈 칸은 마침내 기습을 통해 거용관을 뚫고, 만리장성을 돌파했으며 금나라의 수도인 연경을 위협하게 되었다. 이 와중에 금 조정 내부에 분란이 생겨 위소왕이 암살당하고, 선종이 즉위했다. 연경 포위전은 다음해 초까지 계속되었는데 공성전에 자신이 없었던 칭기즈 칸은 선종의 화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대신 암바가이 칸의 유물과 막대한 배상금을 받은 후 철수했다. 급한 불은 껐다고 생각한 선종은 1214년 6월 수도를 연경에서 개봉으로 옮겨 몽골의 남침에 대비했고, 연경에는 황태자와 중신들을 남겨 지키도록 했다.(정우의 남천) 이에 자극받은 칭기즈 칸은 1214년 가을 국경지대에서의 군사적 충돌을 명분으로 다시 남하했다. 결국 1215년에 연경이 함락되었고 금나라는 화북, 만주, 요동에 대한 지배권을 사실상 상실했으며, 이에 따라 거란을 비롯하여 여진에 복속되었던 이민족들이 몽골에게로 돌아섰다.

1216년부터 칭기즈 칸이 몽골 초원과 서쪽 전역으로 이동하면서 잘라이르 무칼리가 중국 전역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았다. 무칼리가 이끄는 일군은 요동을 공략하는 동시에 개봉을 공략했다. 금 조정이 새로 천도한 개봉은 황하 남쪽에 있어서 몽골 기병이 강을 건너 공략하기는 쉽지 않았기에 1216년 말부터 몽골군은 서쪽의 낙양과 장안부터 제압하려고 했는데, 우회해서 견고한 성채였던 두 도시를 함락시켰다. 그러나 그 사이에 금나라가 병력을 모을 시간을 가지면서 몽골군은 개봉을 공략하는 데 실패했고 이번에는 금나라가 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런데 금나라는 몽골만 공격한 것이 아니라 남송도 공격했다. 나름 남송의 땅을 빼앗아 배후를 두둑히 해두겠다는 의도였지만 이 상황에서 양면전쟁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고,결국 1224년 견디다 못해 남송과 화평을 했다. 하지만 이 양면전쟁으로 인하여 남송과 몽골이 협력해서 공격하게 되었고, 이는 금나라의 멸망을 앞당기게 되었다.

1219년 몽골이 호라즘 왕조와의 전쟁을 시작하게 되면서 칭기즈 칸은 초원으로 돌아가 병력을 모은 후, 무칼리를 남겨두고 서정을 시작했다. 무칼리는 부족한 병사[17]를 가지고도 열심히 싸웠지만, 금나라는 군사를 모아 옛 영토를 탈환하기 시작했고, 연경 이남의 강역 대부분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무칼리는 1223년 장안을 공략하며 금군과 힘든 전투를 하던 도중 기진하여 병사했다.[18] 이 기간 동안 무칼리는 금나라를 정벌하는데 실패했지만 대충 금군을 중원에 가두는 데는 성공했다.

1223년 선종이 남송의 자객에게 피살당하고, 애종이 즉위하자 몽골과 남송이 다시 금나라를 협공했다. 선종이 수복한 영토는 이때 다시 몽골에게 넘어갔고, 남송이 장강을 넘어 공격해 왔다.[19] 몽골은 서하를 경유하여 금나라를 공격하려 했으나 1227년 서하 원정 도중 칭기즈 칸이 붕어하자 금나라에 대한 공격을 멈췄다. 금나라는 이를 기회라고 생각하여 공세를 감행하여, 다시 연운 16주와 서경을 수복했다. 그러나 몽골군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주려던 본래의 의도는 달성하지 못했다.

새로 대칸이 된 오고타이 칸은 처음에는 화평을 위해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금나라는 그 사신단을 죽였다. 처음에는 금군의 저항에 패퇴하기까지 했지만, 오고타이 칸은 1230년 무렵부터 본격적인 공략에 들어가 장안까지 밀고 들어갔다. 이후 몽골군은 부대를 대규모로 쪼개서 세 방면에서 개봉을 압박했다. 툴루이는 하남 및 사천 남부 방면으로 우회하여 남쪽으로부터 북진했고[20], 테무게는 산동과 하북으로 갔으며, 오고타이 칸의 본대는 산서성을 지나 황하로 내려왔다. 툴루이가 남부에서 깽판을 치자 금군이 이를 요격하기 위해 남쪽으로 우르르 몰려가는 동안, 오고타이는 황하를 쉽게 건너와 툴루이와 합류했다.[21] 오랜 거리를 이동하느라 지친 금군의 주력은 삼봉산에서 오고타이와 툴루이의 몽골군에 궤멸되고 말았다. 개봉은 고립되었고, 몽골군의 악명에 내몰린 피난민들은 수도의 식량 사정을 지옥으로 내몰았다. 금군은 진천뢰 등 화약무기를 동원하며 항전했고, 몽골군은 노포로 응전했다.

오고타이 칸의 침공 시기인 1228년 완안진화상이 이끄는 기병대가 몽골 기병을 패퇴시켰다. 야전에서 금나라가 몽골을 이긴 것은 1211년 개전 이래 거의 처음으로 있는 일이었다. 이후 완안진화상은 몽골군을 여러 차례 격퇴했다. 가히 금나라판 악비라고 말할 수 있는 인물로, 몽골측의 기록에도 유능하고 절개있는 장수로 묘사될 정도였다. 금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빠졌을 때 완안진화상은 20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등주에서 툴루이의 남쪽 방면군을 1차 저지하는 데 성공했지만, 툴루이는 소수의 병력만 남겨 완안진화상을 견제함과 동시에, 본대를 우회시켜서 수도인 개봉을 향해 돌진하면서 주변 마을을 약탈해 금군이 보급을 못받도록 했다. 개봉으로의 진격을 막기 위해 완안진화상이 100,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힘겹게 쫒아갔지만, 1231년 삼봉산에서 50,000명 가량의 몽골군에게 포위당하고 참패했다.( 삼봉산 전투) 이후 완안진화상은 몽골군에 패배하고 잡혀서 처형당했다. 용맹하였지만, 몽골군의 약탈 전술로 인해 지쳤고, 이로 인해 참패한 것이다.

1233년 5월 결국 개봉이 함락되었고, 애종은 탈출했다. 이때 남송군도 오래된 숙적을 제거하기 위해 몽골군에 합류했다. 애종은 1234년 채주로 피신하여 새로 정부를 꾸렸고, 이를 몽골군과 남송군이 추격했다. 1234년 2월 9일 새벽 전황이 기울어 채주성의 함락이 임박하자 애종은 황족인 완안승린에게 제위를 양도하고 자결했다. 완안승린은 채주에서 도망치다가 잡혀 죽었는데, 제위에 오른지 하루가 채 못 돼서였다. 마지막으로 곽하마가 대차게 저항하다가 끝내 패배하고 자결했다.

6.3. 호라즘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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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모시 메이는 호라즘과의 전쟁에서 몽골군이 보여준 작전수행능력을 그야말로 완벽했다고 평한다. 몽골군이 오트라르에 나타난 후 사마르칸트가 함락되기까지는 채 6개월도 걸리지 않았다.

1218년 오트라르의 영주 이날축이 몽골의 캐러반들을 간첩혐의로 처형하는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은 외교문제가 되었고 호라즘과 몽골은 전쟁에 돌입했다.

개전 당시 호라즘의 총 병력은 수십만에 달했다. 주력은 타지크족 보병과 투르크족 기병이었으며 특히 캉글리족 킵차크족으로 이루어진 기병대는 호라즘 최강의 군대였다. 맘루크와 굴람 연대도 보유하고 있는 등 외형적으로는 결코 몽골군에 뒤지지 않는 군세였다. 더불어 몽골과 호라즘 사이에는 키질쿰 사막이 놓여있었기 때문에 대규모 군단이 움직이기에는 위험요인이 많았다. 술탄 무함마드 2세는 중국으로부터 받은 서신을 통해 몽골인들이 야전에는 강하지만 공성에 서툴다는 정보도 가지고 있었다. 술탄은 당연하게도 성채에서 수비에 치중하는 전략을 들고 나왔다.[22] 실제로 금나라는 이런 방식으로 개봉에서 몽골군을 패퇴시킨 바 있었다.

문제는 몽골군이 과거의 몽골군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 전쟁에서부터 몽골인들의 악명높은 공성전술이 빛을 발하게 된다. 동시다발적인 공격으로 적의 거점을 고립시키고 공포전술을 사용하여 내부로부터 무너뜨렸다. 피정복민을 무자비하게 동원했고 투석기와 공성추, 누대 등 대규모 공성병기를 도입했다. 하나의 거점이 무너지면 끔찍한 학살이 벌어졌고[23], 이는 소문을 타고 부풀려져 공황을 일으켰다.[24] 또한 금나라와 달리 호라즘은 정복활동을 막 끝낸 후 아직 체제가 정비되지 않은 상태로, 중국의 정교한 관료제와 지방통치체제가 구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분산된 각각의 군대 및 요새들의 공조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호라즘이 승리할 때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수세에 몰리게 되자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했다. 이 때문에 몽골군은. 당시로서는 특별할 것이 없는 공성전술만으로 각각의 요새들 사이를 마음껏 활개치며 돌아다닐 수 있었다. 술탄도 곧 이 사실을 깨달았으나 전황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어 있었다.

키질쿰 사막을 건넌 몽골군은 1219년 오트라르에 도달한다. 칭기스 칸은 "지휘관은 반드시 사로잡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날축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5개월 만에 성이 함락되었고, 이에 내부의 성채로 옮겨 저항했다. 하지만 결국 성채도 뚫렸고 사로잡힌 이날축은 칭기스 칸 앞에서 끔살당했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금을 녹인 물을 눈에 들이붓는 방식으로 처형당했다고 한다. 오트라르는 철저히 파괴되었고 시민들은 모두 노예가 되었다.

사마르칸트에는 약 10만의 수비 병력이 있었다. 칭기스 칸은 사마르칸트를 공격하기에 앞서 주변의 거점들을 모두 함락시켰다. 1220년 3월 부하라가 함락되자 사마르칸트는 고립되었다. 부하라의 포로들은 공성전의 최전열에 내몰려 화살받이가 되었다. 수비군이 반격에 나섰지만 공성전에서 상식적으로 사용되는 위장퇴각 전술에 걸려 한 번의 전투에서 5만 명의 병력이 궤멸되었고, 무함마드는 기병을 보내 사마르칸트를 구원하려 했으나 모두 패했다. 도시는 포위된지 닷새만에 함락되었다. 수비군은 몽골군에 귀순하겠다는 의사를 보였으나 성문이 열린 후 모두 살해당했다.[25] 야사에 의하면 칭기스 칸으로부터 "두 발로 걷는 것은 모두 죽여라"라는 명이 있었고 이는 충실히 지켜졌다고 한다. 술탄 알라 웃 딘 무함마드는 달아났으나 제베 수부타이의 집요한 추격을 받아 1220년 12월 카스피해 연안에서 병사했다. 잘랄 웃 딘이 뒤를 잇는다.

다음 목표는 아랄해 남쪽에 자리잡은 수도 우르겐치였다. 우르겐치의 성벽은 견고했고 주민들이 완강히 저항했기 때문에 시가전에 익숙하지 않은 몽골군은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일설에 의하면 이 도시는 함락된 후 주치가 소유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 때문에 주치가 도시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였다고도 한다. 공성의 진척이 늦어지자 칭기스 칸은 주치와 차가타이를 잘라버리고 오고타이를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1221년 4월 우르겐치가 함락되자 주민들은 저항했다는 이유로 학살당했고, 살육을 피한 주민들도 몽골군이 제방을 터뜨리는 바람에 모두 익사했다.

툴루이는 1221년 2월 서쪽의 메르브를 공략하여 학살을 자행한 후 더욱 더 서쪽에 있는 니샤푸르로 향했다. 칭기스 칸의 사위가 이곳을 공격하던 중 사망했기 때문에 주민들은 한 명도 남김없이 살해당했다.

잘랄 웃 딘은 1221년 몽골군이 철수한 우르겐치로 돌아와 술탄으로 즉위하고 몽골과의 항쟁을 계속했다. 잘랄 웃 딘은 카불 근교에서 벌어진 몽골군과의 야전에서 승리했는데, 이는 호라즘이 몽골을 상대로 거둔 최초의 승전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마지막 승전이기도 했다. 사마르칸트에 있던 칭기스 칸이 본대를 이끌고 내려와 잘랄 웃 딘의 군대를 궤멸시켰고 근거지인 가즈니를 완전히 파괴했다. 잘랄 웃 딘은 포로로 잡힐 위기에 빠졌으나 기적적으로 탈출해 인도로 달아났다.

6.4. 러시아

호라즘의 무함마드 2세를 쫓던 몽골군은 카스피해까지 진출, 루스 지역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1221년 당시 몽골군의 병력은 2개 투멧(12,000 ~ 20,000명)으로 대규모 병력이 아닌 정찰대 정도였고, 실제로도 어느 정도 간만 보고 물러났다. 그러나 1229년 바투의 원정대는 십수만 내외로 추정될 정도의 대군이었고[26] 루스는 몽골에 완전히 복속당해 약 200년간 몽골인들의 지배를 받게 된다.

13세기의 러시아는 슬라브인들이 세운 여러 공국으로 분열되어 있었으며 통일은 힘들어보였다.[27][28] 이들의 주력은 민병대로 구성된 보병(스메르디)이었고, 방패와 도끼, 창, 활, 석궁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루스 보병은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한 경우가 많았고 무엇보다 갑주가 부실했기 때문에 화살 공세에 매우 취약했다. 대신 영주들은 드루지나라고 부르는 용맹스러운 중장기병 군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다만, 이때 러시아의 도시에는 성곽이 많지 않았다. 도시 주변을 둘러싼 방책은 대체로 목책 수준이었기 때문에 수성전에서 그리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여담으로 킵차크 지역에는 튀르크계 유목민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러시아 공국들을 약탈하거나 중앙아시아에서 용병으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220년에 이미 수부타이는 킵차크족을 공격하고 그들의 칸을 죽였다. 이때부터 킵차크인들은 몽골과 원수가 되었다. 살아남은 킵차크인 중 하나였던 코텐은 생존자들을 규합하여 루스 지역으로 달아났다.

1221년 수부타이와 제베는 카스피해 남부(현 아제르바이잔 영토)에서 조지아 왕국의 게오르그 4세의 군대와 격돌했다. 몽골군은 수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정면 충돌을 피해서 경기병을 보낸 다음 퇴각하는 척 상대군을 개활지로 끝어내어 포위섬멸했다. 같은 해 벌어진 두 번째 전투에서도 몽골군은 조지아군을 패퇴시켰고 그리하여 코카서스 산맥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모두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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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텐은 인맥이 있던 루스의 공국으로 넘어가 대공과 귀족들을 충동질했다. 대공들은 처음에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으나 결국 1223년 키예프를 중심으로 남부의 18개 공국이 연합군을 결성해 몽골을 치기로 했다.[29] 전투는 현 우크라이나 동부의 칼가강에서 벌어졌다. 몽골군은 처음에는 칭기스 칸의 명령에 따라 귀환할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루스군은 몽골군과 싸울 의도가 없다고 속인 후 기습해 후발대 약 천여 명을 살상하는 데 성공했으나, 이후 몽골의 본대와 맞붙어 루스 연합군은 몽골군의 위장 퇴각 전술에 휘말리고 만다. 몽골인들은 지속적으로 퇴각하여 루스군을 본토에서 최대한 격리시킨 뒤 강가에서 우회, 먼저 각개격파로 킵차크족을 물리첬고, 달아나는 킵차크인들이 후방의 루스군과 충돌하면서 아수라장이 되자 그대로 돌격, 루스군까지 전부 괴멸시켰다. 키예프 대공은 후방의 진지에서 패잔병들을 기다리다가 그대로 철수도 못하고 포위, 항복한 다음 처형당했다고 전해진다. 이 와중에도 드루지나들은 끝까지 저항했으나 결국 몰살당했다. 코텐은 살아남아 헝가리로 도망쳤다.

칼가강 전투에서 러시아군의 야전병력이 사실상 궤멸되었고 이때 수부타이는 분열된 루스의 공국들이 매우 취약하다는 사실을 간파해냈다. 다만 본인과 제베가 거느린 군사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정보만을 가지고 귀환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몽골에 대한 루스의 저항이 가장 강력했던 것이 바로 이 1223년으로 이후에는 단 한 번도 그들의 군사적 역량을 결집시키지 못했다. 물론 2차 침공 때의 루스 제후들이 1차 때보다 무능력하고 멍청하거나 혹은 이기적이라 그랬던 것은 아니다. 정보력에서 우세였던 몽골군이 루스의 연계가 느슨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거점을 두들겨댄 탓에 공황 상태에 빠진 대공들은 자신의 근거지를 지키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수밖에 없었다.

바투의 원정은 1235년(혹은 1236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바투의 원정군은 출발시에는 5만 명 내외였으나, 볼가 강의 볼가-불가르 왕국을 무너뜨리고 킵차크족들을 흡수한 후에는 약 15만 명 정도로 규모가 확대되어 있었다.(20만 명 이상이었다는 설도 있음.) 1237년 북부 러시아에서 가장 큰 세력이었던 블라디미르 공국이 가장 먼저 갈려나갔고 로스토프, 유리에프, 야로슬라보가 차례로 함락되었다. 1238년 노브고로드를 치기 위해 몽골군이 움직였을 때 루스 북부에는 온전한 도시가 거의 없었다. 토르초크에서의 민병대의 선전으로 바투가 노브고로드를 눈앞에 두고 물러나야 했을 때에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몽골군은 후방에 위험을 놔둔 채로 퇴각해야 하는 위기에 빠졌으나, 루스는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눈 뜨고 흘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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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9년에는 키예프를 함락시켰다. 키예프는 단단한 성벽으로 지켜지고 있었으며 할리츠키 휘하의 수비 병력도 잘 싸웠다. 그러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전멸했고 도시는 초토화되었다. 키예프가 무너지자 남부 루스 전체가 무너졌다. 살아남은 공국들은 몽골에게 상납금을 바치는 역할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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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카프카스

아나톨리아 동부와 카프카스 남부지방들이 차례대로 점령을 당하거나 아직까지 전쟁을 치르거나 조공을 바치는 와중에 조지아 왕국은 1238년부터 1327년까지 약 백년간 몽골의 지배를 받는다.

1250년대 이후 조지아는 몽골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 항전에 돌입했고 다비트 나린을 선봉하여 3년동안 긴 전쟁을 치렀고 그 이후 다비트 데메테르 2세와 다비트 8세에서까지 전쟁은 계속되었고 마침내 게오르기 5세 대왕시대에 들어서서 결국에 몽골을 완전히 캅카스지방 밖으로 몰아냈고 1200년대 초반 전성기 시절의 조지아 왕국의 영토를 회복하게 되지만 14세기 말엔 티무르 제국의 침공을 받아서 큰 피해를 입게 되고, 16세기가 되어야 겨우겨우 회복되게 된다.

비슷한 시기의 인구시나 체첸 지방을 여러차례 공격했고 지금의 러시아도 힘들어하는 이들 전투민족들은 2~3차례의 전면전 공격에도 특유의 게릴라 공격으로 버텨내고 더 이상 침략의 의미는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몽골 제국은 고개를 돌리고 만다. 그리고 체첸은 두번의 침공을 이겨냈으나 긴 후유증을 앓아야만 했다.

6.6. 동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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킵차크족의 칸 코텐은 킵차크족 생존자들을 규합해 헝가리의 벨라 4세에게 몸을 의탁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하지만 몽골은 수만 명이나 되는 투르크족들을 그대로 둘 생각이 없었다. 더불어 헝가리 평원에 광대한 목초지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바투는 계속 서쪽으로 진군했다.

당시 유럽인들의 주력은 중장기병이었다. 흔히 유럽인들이 몽골군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아니다. 십자군 전쟁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 당시 유럽의 기사들은 중장갑에서 비롯된 강력한 충격력을 갖춘 막강한 돌파력을 자랑했다. 아랍인들의 기록에 의하면 기사단의 돌격은 마치 쏘아진 화살과 같아서, 이들이 돌격을 시작한 이상 막아내기 힘들어 단번에 전황을 뒤집을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게다가 이들의 충실한 철갑류는 화살에 대해서도 뛰어난 방호력을 가지고 있었기에[30], 몽골군과 비슷한 유목민적 전투법을 쓰는 이슬람군도 전투를 결정짓는 단계인 개싸움으로는 감히 함부로 대적하지 못했다. 이는 보두앵 4세의 활약상과 용맹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결국 강캐도 쓰는 사람이 관건이듯 결과적으로 몽골군에게 연전연패하고 말았는데, 몽골군이 이들을 상대한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노포, 투석기, 불화살(재료의 특성상 여러 부가적인 효과가 있었다.) 등 단순한 화살 이상으로 강력한 투사무기로 공격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비교 우위라고 할 수 있는 경무장으로 인한 기동력과 지구력을 이용해 추격하는 기사들이 지칠 때까지 후퇴•유인하다가 마침내 기사와 말이 탈진하면 역으로 반격을 가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매우 흔하고 단순한 전술인 위장 퇴각, 포위 섬멸 등의 초원전술을 적절히 활용하여 적의 약점을 찌른 것이다. 그리고 보통은 동유럽 장교단의 능력 부족으로 인해 두 번째 방법만으로도 쉽게 무너졌다. 이들이 이전에 경험했던 전쟁은 주로 고도로 훈련된 소수+@들이 싸우는 형식으로 흘러갔기에 조직력과 노하우가 필요한 대규모 회전을 많이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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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투는 군대를 넷으로 나누었다. 바투의 목표는 헝가리였다. 바이다르는 북쪽으로, 구유크는 남쪽을 경유하도록 했고, 카단 폴란드와 독일로부터 건너올 원군을 막는 역할을 맡았다. 더군다나 당시 폴란드는 분할공국 시대로, 나라 전체가 내전으로 사분오열되어 상태가 말이 아니었기에 국력이 매우 약화되어 있었다.

카단의 병력이 폴란드를 황폐화시키면서 크라쿠프로 향하자 볼레슬레프 4세는 가족들과 패물을 챙겨 모라비아로 달아났다. 시장인 블라디미르는 시민들이 피난할 시간을 벌기 위해 근위대와 함께 몽골군에 맞섰고, 이들이 타타르인들을 막으며 귀중한 시간을 벌어준 덕에 많은 시민들이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다. 끝까지 몽골군에 맞서던 블라디미르 시장과 근위대는 모두 몽골군에게 전사했다. 이후 몽골군은 진격 과정에서 도시 내외를 가리지 않고 사방에서 닥치는 대로 학살과 약탈을 행하며 피난민을 발생시키고 공황상태를 야기했다.

크라쿠프를 함락시킨 카단은 브로츠와프를 우회하여 실롱스크로 향했고, 1241년 그곳에서 동유럽 땅에 발을 들인 이래 처음으로 군대다운 군대를 만났다. 실롱스크의 헨리크 2세 포보즈니[31]은 몽골인들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 영지에 총동원령을 내리는 한편 각지에 원군을 요청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용병을 모집했고 보헤미아 왕으로부터 원군을 약속받았다. 하지만 보헤미아군보다 카단이 먼저 도착했고 헨리크는 보헤미아군의 도움 없이 싸워야 했다.[32] 4월 9일 양군은 레그니차 평원에서 격돌했고, 몽골군은 "또!" 위장퇴각에 이은 역포위전술로 폴란드군을 전멸시켰다. 이 때 헨리크 2세를 비롯한 기사들 모두가 전사했다.( 레그니차 전투) 몽골군은 전사한 폴란드 군의 시체에서 전리품으로 귀를 모두 잘랐으며, 특히 헨리크는 목이 잘려 창끝에 꿰였다. 그러나 레그니차 전투에 참여한 몽골군 또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일설에 의하면 성전기사단, 구호기사단, 튜튼기사단의 병력 또한 참여했다는 설이 있지만, 기사단들, 특히 튜튼기사단의 참전 여부는 교차검증을 통과하지 못해 크게 의심받는다.

다만, 당시 헨리크는 그야말로 모을 수 있는 병력이란 병력은 달달 긁어모으고 있었기 때문에 성전 기사단이 소수 참여했을 가능성은 존재한다. 심지어 광산의 광부들을 무장시켜 전장에 내보낼 정도였다. 이 광부들은 포로로 잡혀 바투의 사유지에서 부역에 시달리게 된다. 레그니차 전투는 끝났지만 보헤미아 원군은 건재했고, 몽골군은 보헤미아 군대의 참전을 막기 위해 폴란드 남부와 중부를 약탈하다가 헝가리의 본대와 합류한다. 폴란드 내에서는 몽골의 폴란드 침공을 대홍수와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 빗대어 표현할 정도다. 덕분에 북부에서 자라나고 있는 튜튼기사단에 대한 견제를 더더욱 할 수가 없었고 이미 나라가 분열되어 있던 폴란드는 몽골의 침공으로 치명타를 맞았고, 여기에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들의 견제까지 겹치면서 이후 폴란드는 1320년 브와디스와프 1세 워키에테크[33]가 집권하여 다시 폴란드를 통합할 때까지 완전히 박살나고 사분오열된 상태 그대로 세월을 보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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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발슈타트 전투로 명명된 이 전투는 군사학에서도 의의를 가지는데, 기동력과 조직력의 우위를 살려 화력과 개인 단위의 전투능력에서 우위에 있는 상대를 제압했기 때문이다.

몽골은 중장기병의 갑주를 둔하고 무능한 겁쟁이들의 산물로 치부하기까지 했지만 상술했다시피 프랑크인들의 기사단은 오히려 매우 강력한 전사들이었다. 몽골군 또한 중장기병을 운용하기는(통상 20~40%)했으나, 이 시기까지 몽골군의 중장기병은 말이 중장이지 유럽의 기사들과 비교하면 경기병에 가까운 무장이었고 운용면에서도 유럽인들의 운용방식인 충격기병과는 많이 달랐다. 결정적으로 몽골군이 승리한 주 원인은 '유럽 장교단들의 능력 부족'이다. 또한 카이두는 폴란드군을 포위한 후 화약무기를 쏟아부었는데, 이 무기는 연기와 악취를 일으켜 시야를 제한하여 일부 폴란드군이 적의 계략을 염려해 퇴각하게 만드는 효과도 보였다. 이 일은 기존의 몽골인들에 대한 소문과 겹쳐져 "몽골인들은 말뿐만 아니라 용까지 길들이고 있는 악마들이다"라는 소문이 퍼지는 계기가 된다. 참고로 헨리크가 전사한 장소에는 수도원이 세워졌는데, 19세기 폴란드를 분할한 프로이센 왕국은 이 수도원을 군사학교로 만들었고 600년 전 그곳에서 있었던 전투에 대해 숱하게 강의했다.

폴란드 침공과 동시에 몽골 제국군은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국 중 하나였던 보헤미아 왕국 또한 침공했다. 보헤미아의 왕이였던 바츨라프 1세는 이웃한 마이센 변경백국과 튀링겐 방백국을 통치하는 베틴 가문의 영토에서 용병을 모집해 대응했다. 몽골 제국군은 우선 오토무호프[34]를 공략했으나 실패하였고, 소규모의 분대가 글라츠를 침공하였으나 역시 실패했다. 그러자 올로모우츠를 공격했지만 결국 지휘관까지 포로로 잡히며 실패했다. 이는 유럽군이 몽골군을 상대로 이긴 최초의 전투였다. 다만 이후에도 소규모의 접전은 있었던것으로 보인다.

바투의 본대는 헝가리-크로아티아로 순조롭게 진군하여 1241년 벨러 4세의 군대와 교전했다. 몽골군은 페스트 근처를 약탈하며 헝가리군을 자극했고, 프리드리히 공작이 이를 격퇴했다. 이후 벨러 4세는 몽골군 전위대를 격파하며 사요 강까지 군을 전진시켰다. 4월을 전후로 헝가리군은 사요강까지 진출하였는데, 헝가리군은 그때까지 모르고 있었지만, 강 건너편에는 바투와 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군 본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35] 벨러 4세는 어찌되었든 근처에 몽골군이 있다고 가정하고 보급품 수레를 사슬로 연결하여 요새화된 진지를 구축하였고, 몽골군 척후병들이 도강을 유도하는 데에 끌려가지 않았다.

4월 11일, 헝가리군은 별동대를 보내 야간에 7km를 전진해 몽골군 진지를 기습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바로 그날 새벽, 몽골군 또한 헝가리군 진지에 야간 기습을 하기 위해 강을 건넜고, 양군은 사요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바로 직전에서 맞부딪쳤다. 활을 겨냥할 수 없는 야간인 데다 먼저 강을 건너 배수진 상황에 처한 몽골군은 그 특유의 기동력을 살릴 수 없는 상황에서 중무장한 헝가리군과 맞서 싸우는 상황에 처해 결국 다리를 내주고 철수했으며, 헝가리군은 다리를 점거한다.[36] 그러나 이 소식을 접한 몽골군은 계획을 바꾸어 수부타이가 별동대를 이끌고 후방으로 돌아들어가 강을 건너 헝가리군 본영을 공격하고, 그 사이 바투는 남은 부대로 다리의 헝가리군을 공격하기로 했다. 하지만 포위망을 완성하지 못한 상황에서 바투가 성급하게 공격을 감행한 탓에[37] 헝가리군과 정면대결을 했다. 게다가 군을 둘로 나눈 탓에 수적으로도 열세였다. 헝가리군의 석궁에 대응해 바투는 7대의 투석기(혹은 노포)를 동원했으나, 전 병력을 동원한 벨러 4세의 맹공에 바토르 30명과 부관인 바카투가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이때 수부타이의 별동대가 도착해서 후방을 찔렀고 몽골군이 불화살로 응전하자 헝가리군은 포장마차[38]로 후퇴해 저항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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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가 엄청나게 컸기 때문에 바투는 몽골군의 장기인 추격섬멸까지 포기할 생각도 했으나 수부타이의 강력한 권유에 따라 헝가리군 포장마차 진지까지 공격했고 이것도 쉽지가 않아 마찬가지로 공성무기까지 동원해 겨우 파괴하고 포위망을 느슨하게 하여 헝가리군의 도주를 유도하자 기동력 격차를 감안하지 못하고 도주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헝가리군을 끝까지 밀어붙여 궤멸시켰다. 헝가리군은 우골린 대주교가 전사하고 칼만 왕자가 부상으로 사망했으며, 벨러 4세는 오스트리아로 달아났다.[39]

그 이후 몽골군은 헝가리와 동군연합 관계였던 크로아티아 왕국을 다음 상대로 삼았고, 주요도시였지만 무장은 빈약했던 자그레브 지역을 파괴하고 약탈했다. 고작 1년 뒤인 1242년, 카단 칸이 크로아티아로 피신한 벨러 4세를 잡기 위해 다시 처들어 와 클리스 요새를 포위했지만 1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라도 무장하고 튼튼하게 손을 보았기 때문에 쉽게 함락이 되지 않았다. 이후 귀족들이 벨러 4세의 탈출을 도우면서 몽골 군대는 결국 클리스 요새 함락을 포기하고 트로기르 방면과 스플리트 방면으로 찢어져 약탈과 학살을 벌였으나 결국 이에 분노한 시민들과 크로아티아군이 결사항전하자 결국 물러난다.

비슷한 시기에 불가리아도 공격했다. 이반 아센 2세의 사망 이후로 급속도로 불안정한 상태였던 불가리아를 황폐화 시키려고는 했으나 정복하지는 못하고 조공을 받아내는데 만족한다. 이후 35년이 지난 1277년, 무거운 조공에 시달리던 불가리아에서는 돼지치기 출신의 이바일로가 "신의 계시로 몽고 놈들을 격퇴시키겠다"라며 의용군을 조직하여 정말 몽골군을 도나우강 이북으로 쫓아내고 점차 안정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헝가리를 점령한 몽골군은 또 다른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국이였던 오스트리아 공국 이탈리아 반도 북부를 정찰하며 다음 목표를 향해 움직이려 했다. 그러나 1242년 돌연 헝가리에서 철수함으로써 고금의 많은 사람들을 의아하게 했다. 가장 유력한 설은 본국의 오고타이 칸의 사망 이후 벌어진 후계자 계승 문제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 현재는 반론도 적지않다.

이들 유럽인들에게 있어 몽골군은 어느 날 갑자기 동쪽에서 나타난 미지의 존재들이었다. 13세기 초엽에는 프레스터 존 떡밥과 엮여 '동방의 기독교 국가'에 대한 환상이 널리 처졌으나 바투의 원정으로 그들이 자신들을 적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유럽인들은 필사적으로 그들의 정체를 기독교 세계관 속에서 추론해내려 했다. 예를 들어 독일 지방에서는 그들이 동방박사들의 후예라는 설이 퍼진 일이 있었다. 1164년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던 기사들이 '동방박사의 유골'로 추정되는(신빙성은 그리 크지 않지만) 인골을 가져온 일이 있었는데, 지금 동방에서 온 무리들은 그들의 후손이며 탈취당한 선조들의 유골을 되찾으러 온 것이라는 얘기였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에게 마땅히 유골을 돌려줘야 하며 그렇게 하면 그들도 고향으로 돌아가리라는 것. 또한 몽골인들이 유대인의 후손이며 유대력 5천 년을 맞아 다윗의 재림을 앞두고 유럽인들을 학살하러 왔다는 풍문도 있었다.

가장 자주 접할 수 있던 이야기는 역시 "이들은 인간이 아닌 악마이며, 인육을 먹고 피를 마시는 사악한 존재"라는 식의 소문이었다. 편집증적인 (그리고 진위 여부가 심히 의심되는) 몇몇 기록에는 이 악마들이 벌이는 광란의 살육과 그들의 소상한 취미에 대한 서술[40]까지 곁들여져 있다. 좀 구체적으로 설정을 짜면, 코카서스 산맥에 있는 타르타로스 지옥의 문을 열고 무저갱에서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나타났으며 말세가 임박하였다는 종말론으로 까지 번지게 된다.

실은 이런 주장들의 상당수는 교묘한 정치적인 의도에 의해 재생산된 측면도 있다. 예를 들어 유대인에 대한 낭설은 몽골인들을 막아내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으나 민심을 선동하여 유대인 세력을 억제하는 데에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몽골군이 헝가리를 침입한지 44년 후인 1285년에 벌어진 제2차 헝가리 침공에서 헝가리는 군대에서 중무장한 기사들의 비율을 늘리는 군제 개혁을 한 상태였고, 이런 헝가리군을 상대로 이전처럼 경무장 기병 위주의 군대를 가지고 싸웠던 3만 명의 몽골군은 거의 전멸을 당하는 대패를 겪고 철수하였다. #

한편, 몽골군이 발칸반도 남부를 훑고 지나가며 된서리를 맞은 국가가 있었는데 다름아닌 라틴 제국이다. 당시 라틴 제국은 니케아 제국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불가리아 제국과의 분쟁으로 어려움에 빠진터라, 라틴 제국 황제 보두앵 2세는 프랑스와 로마를 돌며 지원군을 박박 긁어모으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하필 이때 몽골군에게 쫓긴 쿠만족들이 라틴제국 영내로 밀려들어왔고, 보두앵 2세는 이를 받아들이게 되지만, 몽골군은 쿠만족을 보호했다는 구실로 라틴제국의 트라키아를 침공했다.

서전에서는 라틴제국이 분전했지만, 몽골군 본대와 맞붙은 두번째 전투에서는 모아놓은 병력을 말아먹고, 결국 보두앵 2세는 포로로 잡혔다. 당시 기록에는 보두앵 2세가 전사했다는 소문이 돌았을 정도로 대패했던듯 하며, 보두앵 2세는 석방을 댓가로 조공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하고 풀려났다. 이후 라틴 제국은 발칸반도에서의 주도권을 완전히 잃고, 1259년 니케아를 향한 마지막 공격도 실패하며, 결국 1261년 니케아 제국에 멸망한다.

이후 1264년, 니케아 제국이 재건한 로마제국도 공격했지만, 어째선지 다른 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약탈하려거나 점령하지 않고, 동맹을 맺는데 성공하자 그대로 돌아갔다.

6.7. 남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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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송에 대한 공격이 시작된 것은 오고타이 칸의 시대부터였다. 1234년 몽골과 남송의 공동 작전으로 금나라가 멸망하자 두 제국은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1235년 시작된 전쟁은 1276년(혹은 1279년)까지 무려 40여 년에 걸쳐 계속되었고, 이 사이 몽골은 4명의 칸이 그 치세를 보냈고 남송도 5명이나 되는 황제가 제위에 올랐다. 몽골의 남송 원정은 크게 3차례 이루어지는데, 1차 원정(1235~48)은 오고타이 칸 구유크 칸 시절에, 2차 원정(1251~60)은 몽케 칸 시절, 마지막 3차 원정(1268~76)은 쿠빌라이 칸의 통치 아래서 이루어졌다. 총동원 병력은 추정치로 몽골 측이 45만 명 이상, 송나라 측 150만 명 이상으로 보인다.

남송의 군대는 대부분 보병으로 역시 야전에서는 몽골군을 당해내지 못했다. 남송군은 금나라나 호라즘, 러시아군이 그랬던 것처럼 요새화된 근거지에서 방어위주의 전략을 폈다. 송의 수비군은 요새 근처의 농경지를 지키는 데 주력했는데, 경작지와 식수원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급자족하며 긴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아예 행정부를 들어다 산성으로 옮기기도 했다. 밑의 서술을 보면 알겠지만 남송은 공방 중 성을 쌓아가며 이동하기도 했는데, 이런 짓까지 하고도 몽골 제국에게 멸망당하였다. 물론 당시 최강 군대인 몽골제국을 상대로 40여 년을 버틴 것도 매우 선전한 것이였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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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형도 문제였다. 회수 남쪽에는 수많은 하천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는데, 남송의 수군은 이 물길을 따라 보급선을 이어갔고, 수군이 빈약했던 몽골군은 속수무책이었다. 몽골군은 어느 지형에서건 질병에 대한 내성이 강한 편이었지만 고온다습한 강남의 기후에는 많은 피해를 입었다.

남송의 저력은 엄청난 인구[41]와 엄청난 경제력에 있었다. 끝도 없이 병사와 전쟁물자가 쏟아져 나오고 계속해서 요새가 건설되었다. 나중에는 몽골이 대리국(大理國, 현재 운남성 동부에 있던 나라)을 경유해 서쪽으로 군대를 보내자, 남송이 이들의 예측경로를 따라 계속 요새를 건설해 나갈 정도였다. 반면 몽골은 1235년 개전 초기부터 중국과 유럽 원정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었고 이후로도 세계 각지에서의 원정과 황족들 사이의 내전으로 국력이 한 곳에 모이지 못했다.

이에 몽골군은 금나라 출신의 한족 투항자들을 내세웠다. 중국 남부에서 자신들의 경기병이 힘을 쓰지 못하게 되자 보병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이다. 한족의 케리크는 1234년 거란족 장교 휘하 3투멧이 편성되면서 본격적인 주전력으로 발돋움했다. 이어 1235년에는 악명높은 흑군(黑軍)이 창설되었고 1236년과 1241년의 추가 징집으로 바탕으로 약 10만에 달하는 대군이 된다. 본래 케리크 출신의 군인은 진급에 제한이 있었으나 남송과의 작전에 투입된 한족 장교들에게는 이례적으로 높은 지위로 승진할 기회가 주어졌다. 더불어 수군을 육성하여 적의 수군을 견제하도록 했다.

제 1차 침공(1235~48)은 남송의 선공으로 시작됐다. 몽골 남송은 1233년 대 연합을 맺고 1234년 금제국을 멸망시켰다. 여기까진 좋았는데 남송은 옛 북송의 수도였다가 금나라에게 빼앗긴 개봉 낙양을 수복하기 위해 하남 지방을 무단으로 침공했다. 물론 개봉과 낙양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정작 거긴 이전과 다르게 황폐화되었고, 이후 보급의 부족과 분노한 몽골군의 역습으로 남송군은 먹은 땅을 다 토해내고 퇴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1235년부터 시작된 몽골군의 침공이었다. 몽골군은 서쪽으로는 사천을 경유해 장강을 상류부터 제압하는 동시에, 동쪽 방면에서 남송의 주요 지역을 위협하려 했다. 1235년엔 성도를 함락시키고, 1237년엔 양양을 점령하는 등 초반엔 몽골군이 기세등등하였으나 서쪽의 남송군은 주요 산악 지대에 성을 세워 버텼고 동쪽에서는 명장 맹공의 활약으로 몽골군을 성공적으로 저지하면서 기세가 꺾였다. 당시 몽골은 유럽 방면으로도 대규모 원정군을 보내 양면전쟁 중이어서[42] 수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충분하지 못한 터라 황하 지역의 동쪽 방면군은 지지부진하고 있었다. 1239년 남송의 맹공은 합비에서 승리를 거두고 양양을 수복한 뒤에 사천으로 이동하여 박터지게 싸워 사천을 거의 수복한다. 1241년 오고타이 칸이 죽고 구유크 칸이 대칸이 된 이후 1242년 몽골군이 남송의 수도 항저우를 빼앗고 사천에 맹공을 가하는 사건 등이 있다가 결국 1248년 정전 협정이 맺어지면서 몽골군은 북쪽으로 퇴각했다.

몽골의 새로운 대칸이 된 몽케 칸은 남송에 대한 2차 침공(1251~60)을 시작했다. 1253년 몽골군은 세 갈래로 나뉘어 운남 대리국을 정벌에 나서 우회로를 뚫어 남송으로 진입하는 전략을 시도한다. 몽케칸, 그리고 그의 두 동생 쿠빌라이 아리크부카가 이끄는 주력군은 세 갈래로 나뉘어 운남을 공격하여 1256년 대리국을 정복한다. 1257년 남쪽으로부터도 남송을 들이치기 위해 쿠빌라이가 이끄는 일부 군대가 베트남을 침공하여 수도까지 털지만, 스텝 지역 출신에게는 너무 지랄맞은 날씨, 말라리아, 그리고 베트남군의 반격으로 철수하였다. 1258년 무렵 사천의 대부분을 장악한 몽케칸은 주력군을 이끌고 남중국으로 진입하려 하였으나, 왕견이 지키는 조어성에서 5개월 가량 발이 묶이고 군중에 전염병이 창궐하고 만다. 그러다가 1259년 이질 또는 콜레라로 여겨지는 전염병에 의해 몽케칸이 죽는다. 조어성에서의 몽케칸의 죽음은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시리아까지 갔던 서방 원정군이 후계자 구도에 참여하기 위해 원정을 중지하고 중동에서 돌아오지 않았으면 몽골군이 중동을 뚫고 아프리카까지 정복했을지도 모른다는 견해도 있다. 한편 당시 무능한 남송 정부는 농민 민란을 진압하느라 대몽골 전선에 제대로 된 지원을 해주지 못했는데 왕견이 조어성에서 버텨준 것은 남송의 생명줄을 거의 10년 늘려준 것이나 다름없다. 쿠빌라이는 흩어진 군대를 모으느라 1260년이 돼서야 철수를 시작하는데, 남송의 장군 가사도는 쿠빌라이와 밀약을 맺고 후퇴하는 쿠빌라이를 추격하는 듯 마는 듯 한뒤에 전공을 부풀려 전쟁 영웅이 됐다.

1260년 대칸이 된 쿠빌라이 칸은 1264년 동생 아리크부카와의 내전에서 승리하고 1271년 원나라를 세운다. 몽골이 본격적인 3차 침공을 하기 한참 전부터 산발적인 교전이 있었는데, 이 와중에 사천 방면의 장군인 유정이 몽골군에 투항하면서 100여척에 달하는 선박을 득템한다. 1268년 남송 원정을 결심한 쿠빌라이 칸은 양양과 강 건너에 있는 번성 집중공략하기로 한다. 당시 양양성은 해자으로 둘러싸여 있을 뿐만 아니라 성벽 두께가 6미터가 넘는 요새였다. 남송의 구원병을 오는 족족 때려잡는 동시에 몽골군은 회회포를 조립해서 폭발성 탄약을 쏟아붓는 등 당시 최첨단의 공성무기를 총동원한다.[43] 뿐만 아니라 1270년부터 몽골군은 7천척이 넘는 전선을 건조하고 수군을 육성하니 안 그래도 가사도 등의 무능한 정치인들이 판치던 남송 입장에서는 처참했다. 1273년 번성이 먼저 함락되고 몽골 수군이 남송 수군을 격파하자 양양은 고립무원이 되고 그동안 꾸준히 양양을 지키며 저항했던 여문환이 항복하면서 남송은 더이상 버틸수 없게 된다. 양양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한 몽골군은 다음해부터 장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중요 거점 지역을 계속 점령하게 되고, 남송은 몽공군에게 계속 공격받게 된다.

결국 수도인 임안이 함락되면서 1276년 남송은 사실상 멸망하게 된다. 하지만 보통은 1279년 애산 전투의 패배 이후를 남송의 완전한 멸망으로 본다.

6.8. 셀주크와 시리아

아제르바이잔의 무간에 원정 본부를 설치한 몽골군은 바이주 노얀의 지휘 아래, 1242년에 셀주크조 영내에 진입해 에르주룸을 점령하고 약 70,000의 주민을 학살했다. 이로써 몽골군의 셀주크조 침략이 시작되었다. 당시 바바의 반란으로 인한 내분과 동부 전선의 군대가 내란 평정에 동원된 관계로 셀주크조의 저항은 미미했다. 술탄 케이후스라브 2세는 용병을 포함한 50,000에서 80,000에 달하는 군대로 시바스로 향했다. 이때, 몽골군도 약탈을 자행하며 진격해 왔기 때문에 1243년 시바스 동부의 쾨세다으 평원에서 양군이 맞부닥쳤다.

이 전투에서 술탄은 전통적인 척후-유인-매복-기습이라는 전략을 버리고 평원 대결을 시도함으로써, 막강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몽골군에 역습을 당해 참패하고 말았다. 술탄 주력 부대가 몽골군 몰래 쾨세다으를 철수하자 몽골군은 본격적인 셀주크 공략에 나서 시바스, 카이세리, 에르진잔 등 중부의 주요 도시를 완전 초토화시키고 무간의 본부로 돌아갔다. 이후 룸 술탄국은 몽골의 봉신국으로 사실상 공중분해되어 몽골이 임명한 꼭두각시 칸만이 명맥을 유지하다가 조용히 사라진다.

한편, 1253년(실질적으로는 1256년) 남정에 나선 훌라구는 1258년 바그다드를 함락시킴으로써 아바스 왕조를 멸망시키고 마지막 칼리파를 살해했다. 이후 아제르바이잔을 거쳐 시리아 방면으로 진출, 모술의 아타벡 바드르 앗 딘 울루와 파르스의 아타벡 아부 바크르의 항복을 받고 저항하는 마이야파라킨을 본보기로 약탈하였다. 그리고 에데사를 거쳐 알레포를 2주만에 함락시킨 후 이에 겁을 먹고 다마스쿠스에서 도망치던 아이유브 왕조의 마지막 술탄 안 나시르 유수프를 생포했다. 자신만만해진 훌라구는 카이로의 술탄에게 복속을 요구했으나 사천지방에서 전사한 몽케 칸의 사망소식을 듣고 귀향길에 오른다.(하지만 몽골로 돌아가진 못하고 다시 돌아왔다.) 훌라구는 투르크족 출신의 부하인 키트부카에게 1 ~ 2 투멧의 병력을 남겨주었다. 키트부카는 시리아의 반란세력을 진압하고 팔레스타인 방면으로 나아가 이집트군과 대치했다. 이집트는 맘루크의 바이바르스와 동맹을 맺었다.

6.9. 맘루크 왕조

맘루크는 이슬람 세계의 노예병으로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잡아온 노예들을 육성한 군대다. 주로 중장기병으로 활약했으며 무기로는 창과 칼, 철퇴를 사용했다. 궁술에도 뛰어나 충격기병 이외에 궁기병으로서의 능력도 탁월했다. 구성원의 대부분이 튀르크족 출신이었던 덕에 기마술에 능했고, 유목민족들이 구사하던 초원전술에도 익숙했다.

훌라구가 이끄는 몽골군은 페르시아와 시리아를 정복한 뒤 이집트까지 진출하려 했지만, 몽케 칸이 죽자 훌라구는 후계자 싸움에 참여하기 위해 주력을 이끌고 회군하였다. 훌라구는 회군하면서 부하 장수 키트부카에게 1~2개 투멧 (1만~2만명) 정도의 병력을 남겨 두었다. 몽케 칸의 사후 몽골 제국이 후계자 구도를 놓고 내전을 벌이는 틈을 타서 이집트의 술탄 쿠투즈는 병력을 모아 시리아에 남은 몽골군에게 선빵을 날리러 떠났다. 이 소식을 들은 키트부카도 맘루크군을 상대하러 나왔다. 1260년 6월 양군은 갈릴리 근방의 아인 잘루트에서 맞붙었다.[44] 술탄 쿠투즈는 바이바르스와 연합하였는데 바이바르스는 아인잘루트 근처 지리에 훤했다. 바이바르스는 언덕 위에 주력을 숨긴 후 거짓으로 패한 척 달아나 몽골군을 유인한 뒤 포위했다. 결정적 순간 쿠투즈의 맹렬한 돌격에 몽골군은 개발살났으며, 지휘관인 키트부카가 사로잡혀 처형당할 정도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이집트군이 폭발성 탄약을 사용하는 대포를 쏘자 몽골군 군마의 손발이 어지러워졌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실효성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45] 이 전투 후 회군하는 길에 바이바르스는 쿠투즈를 죽이고 자신이 술탄에 올랐다.

이 전투를 더 이상 몽골이 이집트를 넘보지 못하게 된 분수령으로 볼 수도 있으나, 사실 몽골이 이 이후로 이집트 침공에 실패한 이유는 동쪽에서 일어난 일 때문이다.[46] 그 일은 몽케 칸의 사후 몽골 제국의 분열이다. 이 후 몽골은 더 이상 서쪽으로 대규모 원정군을 보낼 여력을 상실했다. 아인잘루트의 패배에 대해 들은 훌라구는 복수를 다짐했지만 얼마 안가 병으로 죽었고, 일 칸국도 북쪽 킵차크 칸국과의 내전 때문에 충분한 병력을 모을 수 없었다. 몽케 칸의 뒤를 이어 대칸이 된 쿠빌라이 칸은 제국의 서쪽에 대한 영향력을 잃었고 동부에서만 정복 활동을 벌였다.

아인잘루트 전투는 일 칸국과 이집트 맘루크 왕조의 기나긴 싸움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훌라구의 후예들은 일 칸국의 지배자 자리를 놓고 치열한 내전을 벌였으며, 북쪽의 킵차크 칸국과도 종주권을 두고 갈등을 빚었다. 내전을 종식시키고 승리자가 된 칸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맘루크를 공격했으나 한차례를 성공을 제외하고는 모두 졌다.

맘루크들이 악명높은 몽골군을 상대로 승승장구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청야전술과 유능한 지휘관의 유무가 크다. 몽골군 역시 강한 군대였으나 기본적으로 일반 백성들을 무작위로 징발한 징집군이었기 때문에 오직 전투기술만을 갈고 닦아온 맘루크에 비해 전투력면에서 우세를 차지할 수 없었다. 몽골 고원에서 자란 유목민 출신이 아니라, 중동 땅에서 자란 현지민들이 병력의 다수를 차지하게 되면서 질적인 차이가 생기게 되었다. 이런 점에 있어서는 호라즘의 굴람이나 유럽의 기사들도 마찬가지였으나 맘루크에게는 그들과 달리 뛰어난 지휘관이 있었고 병사들도 명령에 따라 전략적으로 움직였다. 또한 그 때와는 다르게 제국이 분열되어 본토에서 지원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유일한 약점이라면 수적으로 열세였다는 것 정도지만 적어도 팔레스타인 방면을 지키는 데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시리아에는 대규모 군단이 상주할만한 목초지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몽골인들이 보병을 상대할때 전략은 기동하여 얇고 넓게 포위해서 사격전으로 해치운다였고 기병을 주력으로 하는 군대와 싸울때의 기본 전략은 기동전을 건다 였다. 몽골의 말은 페르시아말보다 작아 순발력이 부족하지만 지구력이 뛰어났고 게다가 몽골인들은 다른 군대에 비해 많은 수의 말을 거느렸다. 상대가 겨우 보이는 거리에서 깔짝대며 계속 기동전을 걸다가 상대의 말이 지치면 포위해서 보병을 해치우듯이 처리했다. 그래서 몽골군의 군마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넓은 초지가 필요했다. 맘루크는 국경지대의 초지들을 없애버리는 청야전술을 들고 나왔고 몽골군의 활동은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맘루크는 예루살렘 왕국의 프랑크인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십자군은 이집트의 이슬람 세력과 적대하고 있었으나 키트부카가 아크레의 도시들을 약탈하는 바람에[47] 이슬람인보다 몽골인들을 더 큰 위협으로 여기게 된다. 아인잘루트 전투를 앞두고 쿠투즈의 군대는 아크레 근방에서 야영하며 보급을 받았으나 십자군은 이를 사실상 묵인했다.

1295년 일 칸국의 내전을 끝낸 가잔 칸은 이러한 요소들을 개선하고자 했다. 그는 여러 제도를 개혁하면서 토지와 군제에도 손을 댔다. 부하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고 과거 다수의 말을 유지하며 기동력을 활용하던 경기병 체제에서 말 한 두 필에 의지하며 싸우는 전형적인 아랍세계의 기병처럼 바꾸려고 했다. 이런 조치들이 효과를 봤는지 1299년에는 일시적으로 다마스쿠스를 재점령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잔 역시 맘루크에게 패했고 다마스쿠스는 1년만에 다시 이집트군의 손에 떨어졌다. 1302년에는 다시 한 번 몽골-프랑크 동맹을 맺기 위해 교황에게 친서를 보냈으나 무시당하고, 결국 1303년에 단독으로 군사행동을 재개했지만 역시나 또 발렸고 이후로 몽골인들은 더 이상 팔레스타인을 넘보지 못했다.

6.10. 베트남

베트남은 몽골과의 전투에서 쩐흥다오의 활약으로 방어에 성공한다. 훗날 미군과 상대할때 사용했던 게릴라전술과 청야전술을 통하여 몽골군을 저지하였고, 또한 풍토병에 의해 몽골은 큰 피해를 입어 공격에 실패한다. 다만 베트남도 수도를 세번 털렸기에 조공을 바치는 등 원나라에 저자세로 나갔지만 쿠빌라이는 이를 무시하고 재정벌을 준비했으나 그가 사망하므로 무산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원나라의 베트남 원정 문서 참조.

6.11. 남아시아

몽골 제국은 중앙아시아에서 남아시아로 이동하는 길목인 아프가니스탄 일대의 여러 주요 도시들을 함락하고 저항하는 주민들을 학살하였지만 몽골 제국의 아프가니스탄 지역 지배는 이전 알렉산더 제국의 경우처럼 점과 선 형태로만 이루어졌고, 이마저도 해당 지역 내 상당수의 병사들을 반영구적으로 정착시키고 나서야 안정시킬 수 있었다. 불안한 보급선의 영향으로 몽골 제국의 인도 침공은 인도아대륙 정복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48]

차가타이 칸국은 몇십년에 걸쳐서 인도 서북부를 뚫기 위해서 공격을 퍼부었으나 델리 술탄 왕조, 노예 왕조, 할지 왕조, 투글루그 왕조가 몽골족의 공격을 번번이 막아내었다.

특히 할지 왕조의 경우는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일이지만, 몽골군을 맞아 가장 잘 싸우고 반격에도 성공한 사례다. 원래 인도 북부는 대략 12세기 말엽부터 서북쪽인 아프간에서 쳐들어온 이슬람교를 믿는 투르크족 계통의 군벌들이 세운 나라인 델리 술탄국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 델리 술탄국은 노예 왕조 할지 왕조, 투그락 왕조, 로디 왕조 순으로 권력을 넘겨 받았는데 이들 중에서 몽골군의 침략에 맞서 인도를 지켜낸 세력이 할지 왕조였다.

할지 왕조의 두 번째 국왕인 알라우딘은 델리 술탄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통치자로 그는 힌두교를 믿던 인도 남부의 왕국들을 계속 공격해 굴복시켜 영토를 크게 넓혔으며 47만 5천 명의 기병을 포함해 거대한 상비군을 유지할 만큼 국력을 크게 키웠다. 이렇게 막강한 군사력으로 인해 알라우딘은 그의 치세 기간 동안인 1292년부터 1306년까지 계속 쳐들어온 몽골군을 모조리 격파하였다. 특히 1299년 차가타이 칸국의 왕자인 쿠틀륵 크와자가 이끈 20만 명의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알라우딘은 30만 명의 기병과 2,700마리의 전투 코끼리 부대를 동원하여 수도인 델리의 교외에서 10킬로미터 떨어진 킬리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였고, 이 킬리 전투에서 몽골군의 총사령관인 쿠틀륵 크와자는 심한 부상을 입고 철수하다가 사망하는 등 몽골군이 크게 패배하였다. 이렇게 몽골군을 연이어 격퇴시킨 할지 왕조는 1306년 이후 차가타이 칸국의 지배 하에 있었던 아프간 지역의 도시인 카불과 가즈니와 칸다하르로 쳐들어가 약탈하는 식으로 반격에 성공하였다.[49]

결국 몽골은 강력한 인도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였다.

그리고 무굴 제국은 어디까지나 이름만 빌린 왕조이며 구성원들의 가계가 칭기스칸 가문과 연결된다고 해도 사실상 튀르크계와 이란계가 혼합되어 몽골적인 요소는 거의 사라진 전혀 다른 국가다.

6.12. 고려

정부가 강화도 즉 섬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30년이나 되는 긴 시간동안 항전하였으나 역으로 몽골 측에서 강화도를 내버려두고 전국을 초토화하는 상황이 터지는 바람에 역으로 고려 정부가 고립되는 사태가 초래되었다. 즉 정부는 직접적인 공격에서 벗어나 장기적인 항쟁이 가능했지만 기본적인 국가 시스템이 붕괴되면서 유지가 힘들었던 것.

나라가 멸망하진 않았지만 항복하였고, 장기간에 걸친 항쟁과 원종의 뛰어난 판단력으로 쿠빌라이를 지지함으로써 세조구제를 통한 최소한의 자율성을 인정받게 되었으나 이후 공민왕 때까지 고려는 몽골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여몽전쟁 참조.

6.13. 가마쿠라 막부

자세한 내용은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항목 참조.

6.14. 마자파힛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몽골은 쿠빌라이 칸의 원나라 시기에 마자파힛 제국(현 인도네시아)을 침공하였다. 그러나 동남아의 덥고 습한 기후와 풍토병으로 몽골의 전쟁이 불가해지고, 결정적으로 마자파힛의 군주 라덴 위자야의 함정으로 몽골군은 결국 패배한다.

6.15. 참파

몽골의 2차 베트남 침략 당시 전쟁 원인은 참파의 비협조와 참파를 공격하기 위해 몽골이 베트남에게 길을 요구한 것이다.

또한 이 당시에 참파의 왕자 하리짓이 몽골 사절단을 죽인 독단적인 행동도 원인이 되었다.

6.16. 미얀마

몽골은 원나라때 미얀마의 파간 왕조를 침공한 전적이 있다. 파간 왕조는 국왕 아노야타의 집권시기 성장했으며 그의 사후 나라티하파테 국왕때 몽골이 쳐들어 온다.

이 당시 나라티하파테는 코끼리 1000마리가 포함된 10만의 병력으로 몽골을 공격했는데 몽골의 지휘관 나스루딘과 쿠두는 매복한뒤 미얀마군을 총공격해 본진인 타가웅으로 몰아낸다.

그후 미얀마의 나라티하파테가 평소 박대하던 아들인 티하투 왕자에게 독살 되면서 파간 왕조는 몽골이 일시적으로 점령한다. 그러나 초스와 왕 즉위 이후 샨족의 반란으로 몽골군이 미얀마에게 빼앗은 영토를 반환하고 철수한다.

6.17. 대리국

몽골의 남송 정벌 당시 몽골에게 투항한 국가였으며 실권을 쥐고 있던 재상 고태상이 처형되고 군주 단흥지가 투항하였다.

7. 몽골군의 만행

몽골 제국은 자신들에게 적대한 부족과 국가들에게는 한치의 자비도 없었다. 그들의 지론인 "항복하면 살려주되 저항하면 모두 죽여버린다."를 어긴 적들은 철저한 파괴와 약탈, 살육으로 응징하였다. 몽골에 조금이라도 반항을 한 나라들은 그곳의 모든 시설물을 불태우고 파괴하며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죽이고 그곳의 살아있는 모든 가축과 동물들까지 몰살했고 그들의 재산과 삶의 터전을 강제로 빼앗아갔다. 여자들은 몽골군에 의해 강간을 당했다.[50] 그들의 처형 방식도 무시무시했는데 호라즘 지도자의 눈에다가 녹인 수은을 퍼붓질 않나,[51] 참수한 사람의 해골로 탑을 쌓질 않나, 유럽 연합군 포로들의 귀를 잘라서 자루에다 수북히 쌓아두는 등 잔인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게다가 항복한 도시에 대한 학살 기록도 다수 남아 있으므로, 칭기즈칸이 항복=관용이라는 원칙을 지켰다고 알려져 있는 것은 당대 몽골군의 프로파간다를 마치 진실이었던 양 그대로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예컨대 대도시였던 발흐는 저항 없이 항복하였는데, 모든 주민이 살해되었다. 위에 언급된 메르프의 경우에도,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수십만 이상이 들어와 있었고, 그에 비해 군사력은 1만여 명에 불과했으므로 메르프의 총독은 모든 시민을 살려주겠다는 몽골의 약속을 믿고 항복했는데, 몽골군은 항복 직후 약속을 어기고 400여 명의 장인과 예술가를 제외하고 나머지 수십만을 전부 학살했다. 또한 두 도시 모두 혹시 적이 들어와도 제대로 사용할 수 없도록 초토화시켜 파괴해 버렸다.

즉 별 위협이 될 정도가 아닌 규모라면 관대함을 가장하여 항복하면 살려준다고 선전했지만, 몽골군의 자유로운 이동에 조금이라도 위협이 될 것 같으면 그냥 절멸시켜 버린 것. 게다가 항복 후 약속을 지켜 살려준 경우에도, 저항하였음을 이유로 죽이지 않겠다는 것일 뿐, 예전처럼 살아갈 수 있다거나 향후의 생존을 완벽하게 보장해 주겠다는 뜻은 아니었으므로, 청년들을 징발해서 다음 도시 공격에 화살받이로 써먹은 경우가 많았다. 감독관만 몽골군으로 임명하고, 해자를 메우거나 참호를 파는 등 공성에 필요한 가장 위험한 역할은 모두 이들에게 시켰다. 주전력인 몽골군이 가장 위험한 역할을 회피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피정복민을 공격 맨 앞에 세워 동족 손에 죽게 함으로써, 혹시라도 전투에 패배할 경우 상대편으로 돌아설 수 있는 잠재적 적군까지 제거해 버리는 일석이조의 효과도 있었다.

몽골 제국의 침략 전쟁은 세계사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영향을 끼쳤다. 당장 러시아는 거의 수백 년 동안이나 몽골의 치하에 놓였으며 폴란드는 3백 년 가까이 통합이 지연되었다. 헝가리는 인구의 1/3이 죽거나 포로가 됐으며 국토가 그야말로 초토화되었다. 서하는 아예 멸족이 됐으며 금나라 남송도 모두 멸망하면서 중국 대륙 몽골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고려의 경우 전 국토가 무참히 짓밟혀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큰 타격을 면치 못했다.

그 영향인지 명나라~청나라까지 몽골은 중국 왕조에게 틈만 나면 두들겨 맞았으며, 주변 나라는 몽골에 대해 협력이나 도움을 전혀 주지 않았다. 소련은 몽골을 아예 병합하여 찍 소리도 못하게 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은 아예 몽골을 두 쪽으로 찢어버렸다. 과거에 대한 만행이 현재의 몽골 정계나 역사에도 상당히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1] 처음 몽골군의 기병을 마주친 헝가리 등의 유럽 중장갑 기사들은 몽골말의 왜소한 체구를 보고 비웃었으나 몽골말은 유럽의 말들보다 크기도 작고 전력 질주 속력은 더 느려도, 유럽 말들보다 훨씬 뛰어난 극한 환경에 대한 적응력과 엄청난 지구력을 지녔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예 유년시절부터 말과 함께 자라온 몽골 기병들의 숙련도는 유럽 기사들의 추종을 불허했다. [2] 여기까지의 서술은 영국인 역사가 데이비드 모건(D.O.Morgan) 교수의 저작이며, 국내에 번역된 《몽골족의 역사》(모노그래프, 2012)를 참고했다. [3] 이 부분 전체의 서술은 데이비드 모건 교수의 《몽골족의 역사》 137~138쪽에서 발췌하거나 부분적으로 고쳐서 썼음을 밝힌다. [4] 아마도 십자군의 일원이었다가 안티오키아 쯤에서 합류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 기사는 오스트리아군에게 생포되어 끔살당했다. [5] 13세기에 교황의 사절로 몽골을 방문했던 이탈리아인. 돌아와서 《몽골여행기》(History of Mongols)라는 책을 썼다. [6] 당연한 얘기지만 일반적으로는 먹지 않았다. [7] 영국 수도자이자 역사가. [8] 때문에 "활을 제외하고는 전부 빼앗은 무기들이다" 라는 식의 극단적인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활은 안 뺏었을까? [9] 식물의 일종. [10] 《딴지일보》 내 원글에서는 일부 이미지가 짤려 있어 백업본으로 대체 [11] 금나라의 멸망 이전부터 장강 이남의 강남 지역이 이미 경제적으로는 중원과 화북 지역을 앞지르긴 했지만, 1234년 금나라의 멸망으로 초토화가 되면서 강남 지역에 확실히 뒤쳐지게 되었다. 이후 명나라 때도 이민족에게 가끔씩 공격당해 고생하다가, 이후 청나라- 중화민국- 현대 중국에 들어서야 경제가 회복되었다. 물론 21세기가 된 현재도 강남 지방은 다른 지역을 압도한다. [12] 국경주둔군 100,000명, 중앙군 250,000명, 다른 지역에서 온 지원군 150,000명 등. 이중 보병이 350,000명, 기병이 150,000명 정도로 짐작된다. [13] 참고로 당시 몽골의 바토르들은 화공을 당해 갑옷이 불타는 상황에서도 불을 끌 생각조차 하지 않은채, 금군에게 돌격했다고 한다. 피부가 탈 때 느끼는 작열통이 가장 심한 고통임을 고려하면 칭기즈 칸이 자신의 군대에게 정신교육을 제대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4] 단, 이때 요새나 성을 제대로 공략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는 한족을 고용함으로써 해결했다. [15] 반대로 이후 금군은 기병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고, 결국 금나라는 위구르, 서요, 거란족 기병에 의지했다. [16] 전쟁이 수세로 몰리자 금나라는 거란족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는데, 이런 감시가 오히려 거란족의 반란을 촉진시켰다. [17] 몽골군 추정치 약 20,000명 이상에 거란계 등 보조병 다수 [18] 이때 몽골군을 지원하던 서하의 병력들이 집으로 가버려서 칭기즈 칸의 분노를 사게 되었고 결국 서하를 재침공했다. [19] 다음해 남송은 금나라의 요청에 의해 휴전했다. [20] 즉 우회해서 남쪽으로부터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21] 툴루이는 서전 이후에 큰 전투를 피하면서 개봉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22] 일설에 의하면 무함마드 2세는 과거 몽골군과 접촉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저 오랑캐놈들과는 절대 싸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몽골에서 살아남는 일이 보통일이 아니기에 이런 말이 나온 것. [23] 사실 방금 기술한 이러한 공성전술들은 이 시대에는 흔하게 벌어졌던 일이다. [24] 이 소문은 계속 부풀려지며 서쪽으로 이동해 결국 프랑크인들에게까지 닿게 된다. 그리고 그때쯤이면 몽골인들은 이미 인간이 아니게 되어 있었다. [25] 몽골군은 전투가 벌어진 후 항복해 오는 자는 신용하지 않았는데, 이는 자신의 편에서 싸울 때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면 똑같이 적에게 항복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항복하거나 초반에 항복한 자들만 받아들였다. [26] 몽골인 3만에 현지에서 징발된 병력을 합쳐 7~8만 정도가 현재의 추정치이다. [27] 물론 러시아의 공국들은 류리크 가문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한 가족이었다. 또한 당시 키예프 루스가 분열된 이유는 러시아 땅이 너무 넓어 그나마 분할 통치가 가장 효율적인 체제였기 때문이다. [28] 정확히 따지자면 당시 러시아의 여러 공국들은 중앙집권적 통일국가가 아닌 일종의 분권적 연합체에 가까운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공국들은 서로 범 루스지역의 주도권을 두고 대립과 경쟁관계에 있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남남이었던 것은 아니고, 대부분의 러시아 공국들이 같은 가문에 의해 통치되었기에 외부의 적이 공격하면 연합해서 맞서는 경우도 있었다. 통일 역시, 류릭 왕조가 지속되는 수백 러시아 공국들이 비교적 통합에 가까운 상태에 도달한 사례 자체는 여러번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교통, 통신, 행정기술 한계상 광대한 러시아 전체를 통합하는 정치적 구조를 만들기는 어려웠고 통일 시도 역시 이런 공국 중 하나가(대표적으로 러시아 제공국의 수장격이던 키예프 공국) 다른 공국들에게 종주권을 인정받는 형태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몇 차례의 통일 시도 모두 비교적 단기간에 통제력이 상실되었기에 통일 상태가 고착되지 못하고 분열 상태로 되돌아갔다. 다만, 13세기 몽골 침략 직전의 기록들을 보면 그 경쟁과 대립이 매우 심해지고 내전으로 이어진데다 동시에 덮친 기근으로 귀족들도 토지마저 버리고 도망칠 만큼 초토화 된것으로 보인다. [29] 몽골군과 달리 루스 연합군의 규모는 파악이 어렵다. 20세기 초 무렵에는 8만 이상까지도 추정했으나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3만 정도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키예프 연대기에 의하면 전사자만 1만 명에 달했다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후대 기록으로 갈수록 점점 숫자가 늘어난다. [30] 다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몽골군이 동유럽을 공격했을 13세기 무렵에는 흔히 서양 갑옷이라고 하면 생각나는 판금 갑옷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보다 방호력이 훨씬 낮은 사슬 갑옷이 유럽인들이 입는 방어구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판금 갑옷이 아무런 쓸모도 없는 무용지물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31] Henryk II Pobożny, Pobożny는 폴란드어로 '경건한'이라는 뜻이다. [32] 몽골의 병력은 1개, 혹은 2개의 투멧으로 8천~2만 정도였고, 폴란드 측의 병력 추정치는 과거 제임스 채임버스를 비롯한 사가들에서는 대략 2만 5천 내외로 추정했지만 2000년대 이후에는 2천~8천 정도였다는 주장도 제시되고 있다.(http://en.wikipedia.org/wiki/Battle_of_Legnica) 현재는 서로 8천 내외로 폴란드군이 적거나 비슷하다고 여겨진다. [33] Władysław I Łokietek, Łokietek은 폴란드 어로 '팔꿈치'를 뜻하는 워키에치(łokieć)에서 온 말로, 워키에테크의 키가 다른 이의 팔꿈치만하였다는 뜻이다. [34] 현재는 폴란드령이다. [35] 과거에는 양쪽 모두 7, 8만 이상으로 추정했으나 20세기 후반부터는 2만 5천 ~ 3만 정도로 잡고 있다. http://en.wikipedia.org/wiki/Battle_of_Mohi [36] 이때까지도 헝가리군은 몽골의 본대가 온 걸 모르고 있었다. 전투에 참가했던 칼만 왕자는 그 사실을 깨닫고 벨러 4세에게 군을 움직여야 한다고 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바투는 그 사이에 별 방해도 받지 않고 무사히 도강을 마칠 수 있었다. [37] 이것 때문에 나중에 바투가 수부타이에게 "그대가 미적거린 탓에 내 부하들이 너무 많이 죽었다"라고 불평했다. 그러자 수부타이는 "그게 아니라 당신이 너무 빨리 움직인 거겠지요."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바투는 자신의 실책이었음을 인정했다고 한다. [38] 헝가리군은 보급에 쓰인 수레를 쇠사슬로 연결해 진지를 구축했는데, 상당한 방어력이 있었다. 포장마차를 공격하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다는 것을 깨달은 몽골군은 이를 하나의 요새로 간주하여 공성무기를 동원해 공략했다. 포장마차는 헝가리군에게 효과적인 방호를 제공했으나 동시에 행군속도를 떨어뜨린 양날의 검이었다. 다만 몽골군의 주 편제가 기병이고 딱히 강력한 투사무기(화약이나 타르, 송진 등을 이용한)를 많이 가지고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순간의 포장 마차진은 기병에 대적할 가장 효과적인 대응책이었다. 몽골군은 공성무기가 없었다면 엄청나게 고전하고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강력한 투사무기 혹은 충격력을 가진 부대가 없다면 기병으로 마차 같은 장애물을 돌파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중국 삼국지의 대군전투와 후스 전쟁 등 전투에서 마차 방진은 대기병 상대로 효율적인 효과를 보였다. 자세한 내용은 얀 지슈카 참조. [39] 코텐은 몽골군이 도착하기 한참 전에 죽었다. 벨라 4세가 그를 중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위협을 느낀 기득권층에게 살해당한 것. 이에 분노한 킵차크인들은 헝가리 땅에서 한바탕 분탕질을 친 뒤 동로마 제국으로 쳐들어 갔다. [40] 예를 들자면 노파의 고기를 특히 좋아한다든가, 기독교인 처녀를 사로잡으면 진미인 가슴살은 대장한테 바치고 나머지 몸통은 졸병들끼리 나누어 먹는다든가 [41] 원나라의 신분 제도에서 전체 구성원의 84%가 최하위 등급인 옛 남송인들이었고 이들의 수는 무려 6천만 명이었다. 반면에 금나라의 통치를 받았던 3등급의 화북, 중원의 한족은 인구가 1천만 명도 채 되지 않았다. 흑사병의 영향이 컸고 몽골군의 학살에 영향을 받았다. [42] 오고타이 칸이 유럽원정군으로 보낸 장수만 해도 바투, 이후 대칸이 되는 자신의 아들 구유크, 역시 훗날 대칸이 되는 몽케, 사준사구의 일원이자 백전 노장 수부타이 등에 병력이 7만~15만 명 수준이었다. [43] 남송쪽에서도 따라 만들어서 같이 쐈다. [44] 이 때 양측의 병력은 각각 2만 내외였다. [45] 효과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물며 훨씬 복잡하고 목숨이 왔다리갔다리 하는 전장에서야 말할 나위 없음은 물론이다. [46] 데이비드 모건 - The Mongols [47] 여기에는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다. 몽골군은 프랑크인들에게 동맹을 제의했으나 거절당했고, 오히려 키트부카의 혈육이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래서 키부카가 시돈을 공격하게 된 것. 근데 몽골이 제의한 동맹이라는 게 사실상 복속을 요구한 조건이라 그랬을 수도 있다. [48] 다만 여기에는 보급선이 불안정하기보다는 인도 북부를 지배하고 있던 투르크족 계통의 노예 왕조 할지 왕조가 상당히 강력한 군사력을 갖고 있어서 몽골군의 공격을 모두 물리쳤다는 점이 더 중요하게 작용했다. [49] 출처: 신의 전쟁/ 도현신 지음/ 이다북스/ 319~345쪽 [50] 여몽 연합군이 일본 원정 당시 일본 여성들을 겁탈한 것도 모자라 배를 갈라 태아를 끄집어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저항하는 여자들의 손에 구멍을 뚫어 배에다 묶었다는 등 침략지마다 엽기적인 만행이 자행됐다는 기록이 있다 [51] 물론 이쪽은 욕심에 눈이 멀어 자국 캐러반을 학살한 것에 대해 '니가 그리 좋아하는 귀금속으로 죽어봐라' 라는 보복성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