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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두정갑.[1][2][3]
1. 개요
頭釘甲. 조선에서 전기 이후 구한말까지 널리 사용된 갑옷.두루마기 형태의 옷 안에 갑옷미늘을 부착하는 방식의 갑옷이다. 두정갑은 흔히 철갑과 피갑으로 나뉘는데[4], 철갑은 흔히 기병들이 주로 입었고, 피갑은 보병들이 주로 입었다.
2. 종류
안쪽에 촘촘하게 갑찰을 고정시킨 모습을 볼 수 있다. 갑찰의 재질은 소가죽으로 옻칠을 해서 방수와 내구성을 높인 물건이다. 몸의 굴곡에 따라 굽어지게끔 갑찰이 배열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철판으로 만든 갑찰들을 고정시킨 철두정갑의 모습이다. 어깨 부분에 장식인 견철이 달려있다.
전투용 두정갑이 아닌 의장용 두정갑도 존재한다.[5] 대표적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전시 중인 고종의 것으로 추정되는 두정갑이 있다. 이러한 갑옷들은 장식들을 매우 화려하게 장식한다. 위의 철두정갑의 비교해서, 견철부터가 황금빛 나는 용이다. 용모양의 견철이 꿈틀거리고 입도 벌려졌다 닫히게 세세한 관절디테일을 묘사했는데, 이는 이 당시 갑옷의 화려함을 보여 준다.
3. 역사
한반도에 전래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흔히 여말선초에 몽골 제국을 통해 고려 말 시기에 전래한게 아닐까 추정 하지만 정작 회화나 조각등에서 발견되는 양식은 찰갑이나 경번갑, 혹은 명광개와 유사한 양식들이며, 유일한 현존 유물인 정지 장군 갑옷은 경번갑이다. 무엇보다 당시 원나라 주력 갑주는 찰갑. 오히려 후대 왕조인 명나라 시기에 보편화 되었으며, 청대에 들어서야 완전한 주력 갑주로 자리잡게 된다.또한 조선초 기록물인 세종실록오례에 기재되지 않고 20년 이후 성종대 집필된 국조오례의에 최초 등장하였으며,[6] 임란기 유물들이 찰갑이 주로 출토되며 인조실록에도 유엽갑을 만든다는 말이 나오는등 조선 전기만 하더라도 그다지 보편적인 갑옷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 시대 중후기로 들어서면서 두정갑이 조선 갑옷의 거의 대부분이 되었고[7] 찰갑이나 쇄자갑 등은 점점 줄어들었다. 하지만 점점 화기가 발달하고 조선군도 화기 위주로 편제 를 짜면서 두정갑 또한 점점 쇠퇴했다. 결국 구한말 군제개혁 이후로 갑주 착용을 폐지하게 되고 개항과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두정갑 유물들이 해외로 여럿 반출되었다.
4. 구조
위 사진에서 어깨 맨 윗부분엔 리벳만 박혀 있고 갑찰은 없어서 이상하게 보일 수 있는데 사실 저 부분은 견철이다.[8]
어깨 부분은 특히 칼, 도끼 등의 날붙이에 의해 자주 베이는 부위인데, 두정갑 특유의 찰갑이 직물 안쪽에 달린 구조는 베는 공격에 쥐약이라 어깨부분만큼은 견철처럼 갑찰(?)이 직물 바깥에 달려 있어야 한다.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두정갑. 상하분리형이다. | 융원필비에 실린 일체형 두정갑. |
외형은 조선시대 배경의 사극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형형색색의[9] 천옷을 바탕으로 둥그런 못 머리와 비슷한 작은 철구가 여러 개 박혀있는 형태이다. 이 형태 때문에 두정(대갈못)갑이라고 불린다.
얼핏 보면 그저 천옷에 징만 적당히 붙인 것 같은 외형이라 두정갑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겉만 보고 천이나 가죽으로 만들어진 갑옷이라 착각하기 쉽지만 사실 옷 안에는 가죽이나 철로 된 갑찰들이 두정못으로 옷감에 고정되어있다.
두정갑은 크게 광목과 비단 등을 겹쳐 만든 외피와,[10] 방호를 위해 안쪽에 덧대는 갑찰로 구성되어 있다. 갑찰들은 보통 소가죽, 돼지가죽 등이나 철판 등으로 만들며, 찰갑에 쓰이는 것보다 훨씬 큰 크기의 갑찰들을 두정못을 이용해서 외피 뒤에 고정시킨다. 찰갑이 가죽끈을 이용해 갑찰들을 고정시켰다면 두정갑은 이 두정못으로 갑찰들을 고정시키는 것이다. 현대 개념으로 말하자면 리벳 접합 방식과 유사한 방식으로, 이는 전장에서의 숱한 피격 경험과 갑옷의 유지 보수 및 성능에 관한 노하우가 배어 나온 결과이다.
또한 의장용으로 애초부터 철편이나 가죽편 없이 정만 박혀있는 식양갑이라는 가짜 갑옷도 있었다.[11][12] 흔히 당시에 군인들이 편의상 갑찰을 떼고 다닌다는 묘사들이 심심치 않게 보이는데, 사실 두정 못의 특성상 갑찰을 함부로 달고 떼고 할 수 있는 구조는 아니었고, 아마 상기한 영조실록의 경우를 보고 의례 짐작한 내용이 와전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런 경우는 애당초에 갑찰을 달고 떼고 한 것이 아닌 처음부터 식양갑을 따로 만들어놓고 입었던 것이다.
또한 '갑찰이 달려있는 갑옷이라고 해서 무조건 전투용 갑옷이었다.'라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엄연히 잘못된 사실이며, 육군박물관에 소장 중인 '이봉상' 장군이 원수, 부원수 시절에 입었던 갑옷의 유물들은, 금속 갑찰이 달려있음에도 불구하고 무게가 3kg 남짓하는 가벼운 갑옷이다. 이는 갑찰 자체가 가볍고 연한 금속으로 만들어 방호력이 전혀 없는, 갑찰만 달려있는 의장품이다. 이러한 양식도 간간이 보인다.
또한 어깨 방어와 장식을 겸하는 견철이라는 장식이 존재하는데, 금실과 천으로 제작되는 견장과 달리 보통 놋쇠로 제작했으며 활동하기 편하게 2단에서 3단의 분절된 형태로 제작되어, 어깨를 따라 편하게 굽어지도록 만들었다. 상기한 의장용 갑옷들은 견철이 매우 화려한 형태로, 용이 춤을 추는 모습처럼 제작되는 매우 고급스러운 견철도 존재한다. 이러한 형태의 견철은 조선 양식 두정갑의 고유 특징이다.
4.1. 방어력
이러한 구조 덕분에 두정갑의 유지 보수 및 방호력이 종래의 찰갑류에 비해 극단적으로 향상되었다. 찰갑은 한 번 베이면 가죽끈이 끊어져서 철편들이 떨어져 나가기도 하며, 정기적으로 가죽끈을 풀고 다시 철편들을 이어 붙여야 하는 등 유지보수에 매우 시간이 들기 때문에 번거롭다. 반면 두정갑의 갑찰들은 질긴 외피에 두정못으로 단단히 고정되므로 외피가 도려내지는 수준으로 난도질당하지 않는 이상 아무리 찔리거나 베여도 갑찰의 결속이 끊어질 일이 없다.또한 철판이 찰갑의 찰편에 비하여 커져서 담금질이 가능했다. 연철로 주로 제작되는 찰갑과 비교하면, 강철로 제작된 철판을 열처리하며 두들겨 찰편으로 사용하는 두정갑은 생산속도도 빨라지고 방어력도 강해졌다.
또한 철판 위를 가죽 혹은 직물로 덮어 겉감으로 삼았기에 활 같은 투사무기를 맞았을 때에도 충격이 덜했다. 현대의 방탄복과 마찬가지로 직물이 투사체에 휘감기며 위력을 반감시키는 것과 동일하다.
고구려 찰갑 방호력 테스트를 보면 찰갑도 기본 화살방호능력은 제공하나, 두정갑의 화살 방호영상과 비교하면 그 충격량이 확연히 구별된다. 해당 영상과 같이 찰갑은 화살을 막긴 하나 갑찰을 연결하는 끈이 끊어진다. 또한 철편의 피해량도 보면 확연히 구분이 가능한데. 찰갑은 충격량을 철편이 그대로 받아 맞은 부위의 철편은 심하게 구부러지고 뚫리기 직전이나 두정갑은 살짝 구부러졌을 따름이다.
이는 충격을 받은 갑찰의 크기와 관련이 있다. 화살의 충격은 한 점에 집중되는데 찰갑의 갑찰은 두정갑의 갑찰에 비하면 매우 작다. 그 작은 갑찰에 충격이 집중되니 충격력의 분산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인근의 다른 갑찰들과 가죽끈으로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끈은 충격을 분산시켜주기에는 부족하다. 끈이 버티지 못하고 끊어지고 마는 것이 바로 그 증거. 같은 원리로 플레이트 아머가 왜 냉병기 시대에 최고의 방어력을 자랑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찰갑이나 두정갑처럼 작은 갑찰들을 여럿 엮는 방식이 쓰인 이유는 제철 기술 때문이다. 찰갑이 주로 쓰이던 시절에는 공격을 막아낼 만큼 충분히 단단한 강철 판갑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매우 어려웠고, 그 때문에 갑찰을 작게 만들어서 엮는 방식이 쓰인 것이다. 쇄자갑도 같은 이유로 등장했다. 유럽에서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충분한 방어력을 갖춘 판금 갑옷이 등장하자 브리건딘류 정도만이 가성비로 생존했으며, 다른 방식은 점차 도태되다 총기의 보편화로 일부 방탄흉갑을 제외하고 사라지게 된다. 반면 아시아에서는 찰갑과 같은 갑옷이 꽤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1711년 승정원일기 기사를 보면 문신들이 두정철갑이 생산비용이 비싸고 무거우니 생산을 중지하고 두정피갑을 우선 쓰자고 건의했으나, 이휘라는 무신이 '제가 50보 거리에서 조총을 쏴 봤는데 피갑은 뚫리지만 철갑은 안 뚫리더라.' 하고 말하여 철갑 역시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13]
다만 화살이 갑찰 사이의 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구조적 한계, 갑찰의 품질등으로 인해 화살촉과 활의 종류에 따라 충분히 관통이 가능하다는 현대의 실험 결과도 존재한다. 또한 실록상 조선의 시험 기록들에서도, 시기에 따라 활에도 관통당하다 총을 못 막다 막고 하는 등 개체차 역시 큰 편이다. #
5. 기타
조선시대의 황동두정갑. 민승기 씨의 저서 '조선의 무기와 갑옷'의 영향으로 방호용 찰이 없는 의례용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안에 연기를 쐬어 가공한 사슴가죽(연록피煙鹿皮) 찰을 붙인 것이다. 연록피는 찰갑 제조시 찰 연결용으로 쓸 정도로 질기고 튼튼한 가죽이다.구한말까지 만들어지고 유지보수되었던 갑옷이다보니 당시 해외 열강들이 선물받거나 노흭하는 식으로 가져가서 보존한 조선 두정갑 유물이 제법 되는 편이다.[14]
속에 조선초중기 이전엔 철릭을 후기엔 구군복을 받쳐 입고 그 위에 껴입는 게 이 갑옷을 입는 원칙이다. 이 갑옷을 입은 장수들의 옷을 아주 자세히 보면 속에 구군복을 껴입었음을 알 수 있다.
러시아 동양박물관에 있는 두정갑은 좋은 보존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며,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에도 두정갑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미국에도 있는데, 구한말 당시 어느 미국인이 들여와 본토에 꽁쳐두었던 것으로 보이는 두정갑 유물이 발견된 바 있다. 독일 라이프치히 그라시 민속박물관에서도 아주 상태가 좋은 두정갑과 투구 일습이 소장되어 있다. # 고종이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선물한 두정갑 일습도 잘 보존되어 있다. 이 두정갑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들어온 합스부르크 가문의 유물 전시 때 같이 들어와서 전시되었다. 고종의 두정갑과 마찬가지로 붉은 색이다.
국내에는 용산의 전쟁기념관과 육군박물관에 두석린갑과 함께 전시되어 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에도 조선실에 전시되어있다.
과거 KBS의 프로 스펀지에 소개되었던 갑의지로 된 찰을 단 두정갑 사진. *
두정갑은 다른 갑옷들보다 조선 시대 사극에 많이 나오는 경향이 있는데, 사극 촬영에 쓰이는 모조품은 내부에 철판을 덧대지 않았고, 상술한 식양갑처럼 그냥 플라스틱 구슬로 외부에 묶은 자국만 대충 따라 만든, 갑옷보다는 일종의 코트에 가까운 의류다.[15] 이런식으로 만들어진 모조품은 실제 갑옷보다 훨씬 가볍기 때문에 많이 사용 하는 것. 가볍게 만들기 위해 다른 재질을 사용하면 가짜란 티가 확 나는 찰갑 등의 여타 갑옷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장점.[16] 전투를 벌이는 게 아닌 배우 입장에서도 무거운 옷을 입고 있으면 체력적 문제가 크다 보니 다들 넘어가는 편.
이렇게 여러모로 쓰기 간편한 덕에 두정갑이 보편적이지 않았던 여말선초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들에서도 종종 조선군의 제식 갑주마냥 등장하기도 한다. 정도전에서는 보병 제식군장으로 두정못을 매우 성의없이 둥근 스티커로 붙인(...) 갑옷을 사용한 것이 예시. 영상 참조. 하지만 수백 명이나 되는 엑스트라를 다 입혀야 하는 비용 문제상 문제제기는 금방 사라졌고, 똑같이 여말선초를 다룬 태종 이방원에서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영상 참조. 사실 비판이 사라진 건 두 작품 모두 잘 만들어서 그랬던 것이다. 결국 고증에 대한 비난은 작품성이 낮을 때 두각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도미네이션즈에서 유물로 등장한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두정갑이지만 좀 색다른 바리에이션의 갑옷이 등장하는데 대표적인것이 바로 연꽃 무늬가 들어간 연화문(蓮花紋)갑이다. 사진은 탤런트 유태웅. 여기
연화문갑이 확실히 두정갑으로 분류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제작 기법, 방어력, 재질 등을 본다면 두정갑과 다를 게 없어 보인다.[17]
6. 다른 나라의 유사 갑옷
중국에서는 같은 형태의 갑옷을 포면갑[18]이라 부른다.이는 명나라 시기부터 사실상 주력 갑옷이었다. 포면갑의 실용성에 대해서는 명나라 군인 모두가 알았지만 지휘관 계층이나 근위대는 뽀대가 안난다고 산문갑이나 찰갑류를 애용했다는 기록이 존재하며, 각종 의례 회화에도 화려한 장식의 찰갑이나 스케일아머를 입은 모습이 자주 보인다. 청나라 시기부터 거의 포면갑만 쓰게 된다.
중국에서 발간한 갑옷 관련 서적에서는 당나라에서 기원한 것이며 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오대십국시대와 송나라 시기에서는 이러한 형태의 갑옷이 일반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19] 사실 두정갑류에 쓰이는 리벳이 전근대 기준으로 상당히 고급/고가 기술에 속하는걸 생각하면, 판갑이 찰갑에 밀렸다가 열처리 기술 발달후 판금갑옷으로 부활한것과 유사 사례일 수도 있다.
롱코트 스타일의 중국 포면갑 명나라 시기에 가장 오래 사용된 스타일의 포면갑이다. (사진은 누르하치의 포면갑)
[20]
파일:20100215191529_1.jpg
청나라 시기 포면갑. 명나라 후기 갑주의 영향을 받아 일체형이 아닌 상하가 분리되어 있었다. 사진은 팔기군의 갑옷으로 각 기마다 소매와 넓은 면의 색을 달리 해서 서로를 구분했다.
다만 포면갑도 후대에 구별을 위해 붙인 이름에 가깝고, 명나라 시기에는 암갑(暗甲, 철이 천아래로 들어가 어둡다고 붙임)이라고 불렀다. 이후 청나라 시기에는 별도의 호칭 없이 그냥 갑 이라고 불렀다. 면갑, 정갑과 같은 호칭은 역사적 고증과는 맞지 않는 호칭이다. #
영화 <아이언클래드> 中, 서양의 브리간딘 |
서양에는 브리간딘(Brigandine)이라는 갑옷이 있다. 러시아의 아시아 사학자 미하일 고렐릭(Mikhail Gorelik)은 몽골의 hatangu degel이 13세기경 침략으로 전래돼 서유럽의 브리간딘과 동유럽의 쿠야크를 만들었다 주장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12세기경 유행한 Coat of Plates의 발전형으로 보는게 주류다. 출현 시기는 트랜지셔널 아머의 시대이지만, 판금 갑옷이 나온 시대이자 총기가 전장의 전면에 나오기 시작한 시대인 16세기까지도 활용되었다. 이 밖에도 코트 오브 플레이트라는 초기형의 양식도 있었다.
한국의 두정갑 내부의 철판은 찰갑처럼 생겼는데, 브리건딘의 경우 이렇게 되어 있다.
트랜지셔널 아머 항목의 제일 위에 있는 예시의 흉갑 부분 역시 브리간딘에 해당된다. 서양의 갑옷이 흔히 체인메일이 중세에 널리 쓰이다가 트랜지셔널 아머의 과도기에서 판금 갑옷으로 넘어갔다고 하나, 사실 브리간딘은 판금 갑옷의 시대에도 함께 살아남아 널리 사용되었으며, 일반 병사에서부터 고위층까지 널리 사용하였다. 100년 전쟁의 기록화를 보면 궁수부터 기사까지 많은 인물이 브리간딘을 흉갑으로 입고 있다. 중세에서 근세의 전환기인 16세기에는 누비 갑옷에서 발전한 더블릿이라는 옷이 유행했는데, 이 더블릿 내부에 판금이 들어간 옷이 고위층에게는 일상복 겸 방호복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스코틀랜드에서는 왕실 규범으로써 일반적으로 입었다고 한다. 내피에 철판을 붙이고 바느질을 하고 외피는 누비천을 덮는 구조로 이전의 브리간딘과 달리 겉면으로 징이 드러나지 않았다. 특히 외부의 천 부분을 벨벳 등 고급 소재로 하는 것으로 그 부를 과시할 수 있었기 때문에 브리간딘은 고위층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반대로 망가진 플레이트 아머의 판을 잘라 천에 이어 붙여서 재활용하기에도 좋았기 때문에 평민 병사들에게서도 가성비가 좋은 갑옷으로 많이 쓰였다. 심지어 17세기에도 아메리카 원주민의 공격을 막기엔 충분했기 때문에 현지에서 사용된 케이스도 존재한다.
굉장히 오래 널리 사용된 갑옷이나, 서양 갑옷의 대명사는 플레이트 아머로 심상이 자리잡았기 때문에 유명하지 않은 편. 브리간딘은 갈수록 재봉기술의 발전으로 갑옷이 아니라 일상복처럼 보이는 방향으로 발전했고 결국 총기의 화력 강화로 17세기 무렵에는 거의 도태되었는데, 플레이트 아머는 17세기에도 두께를 늘이는 방식으로 백여년을 더 버텼고 결국 갑옷 자체가 쓸모 없어진 18세기에도 의장용으로 살아남았던 것의 영향으로 보인다. 브리간딘은 징이 드러나서 그나마 알아보기 쉬운 초기형의 외형조차도, 근래까지 내부에 철판이 있다는건 상상 못하고 그냥 징 자체로 방어력을 기대한 갑옷이라고 상상되는 바람에 스터디드 레더 아머라는 판타지 갑옷도 만들어지기도 했다.
참고로 드라큘라 백작의 모델로 생각되는 블라드 가시공이 입었던 갑옷이 이 브리간딘으로 보인다.
러시아 쿠야크(Куяк)의 모습. *, ** 두정갑의 안팎을 뒤집어 놓은 모습이다. 어원은 몽골어로 갑옷을 뜻하는 '호약(хуяг)'.
중동 갑옷인 챨타 하자르 마샤(Chihal'Ta Hazar Masha) # 18~19세기에 사용된 갑주로, 천 안쪽에 경화 가죽과 안감을 대고 바느질로 고정한 것으로, 여기에 추가로 겉에 철판을 붙이기도 한다. 사진의 것은 인도에서 사용된 것이다.
일본의 귀갑(亀甲,킷코) *. 옷의 겉이나 안에 쇠사슬과 육각형의 철판을 댄 것으로, 본래 갑옷 안쪽에 입는 보조 방호구였으나 나중에는 완전한 갑옷 형태의 킷코타타미동도 등장한다.
이외에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 한국의 두정갑과 유사한 구조의 일본 갑주 1점이 보관되어 있다. @ 사실 이 유물은 여러 정황상 두정갑의 갑상(하체보호구) 오른쪽 다리 부분일 가능성이 높다.
7. 관련 문서
[1]
1892년 조선과 오스트리아의
수교 과정에서 당시
조선 국왕
고종이 선물한 것이다. 보다 정확히는 1893년 오스트리아 사절단의 방한 당시 수교 기념 연회에서 양국이 서로 선물을 교환할 때 건네준 것으로 보인다. 오스트리아 사절단은 이때 소총 20자루와 그 탄약들을 선물했다. 정황상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군 제식 소총이던
만리허 소총으로 보이나, 정확하게 확인되지는 않았다.
[2]
해당 갑주는 가장 잘 보존된 조선 두정갑 중 하나이자 공식적인 경로로 해외에 나가 있는 거의 유일한 조선 갑옷 유물이다. 현재 빈미술사박물관(Kunsthistorisches Museum Wien)에 소장 중이며, 2022년 10월부터 2023년 3월까지 잠시 국내로 돌아와
국립중앙박물관과 빈미술사박물관의 콜라보 전시인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에 전시된다.(사진 출처:
한국문화원)
[3]
해당 두정갑은 내부에 갑찰편이 있는 실전용 갑옷이 아니라, 갑찰편이 없는 의장용 갑옷으로 추정됨.
[4]
철갑옷과 가죽갑옷을 말한다
[5]
이런 경우엔 내부의 갑찰을 생략하거나 매우 가볍고 연한 재질의 금속판을 띄엄띄엄 덧댄다.
[6]
'문헌기록상으로는 두정갑옷은 조선 성종때 간행된 『국조오례의서례』 ‘병기도설’(兵器圖說)에 처음 등장한다. ' - "두정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7]
의장용으로
두석린갑 등도 존재하긴 했지만 전투용으로는 두정갑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8]
즉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에 있어서 안 보이는 것.
[9]
실제론 오방색을 기준으로 제작했다.
[10]
흔히 알려진 것처럼 가죽으로 외피를 만드는 경우는 없다. 그리고 비단은 의외로 질기고 탄성이 좋아서 운동 에너지가 많이 떨어진 눈먼 화살 정도는 자체적으로 막아낼 수 있는 좋은 방어구 소재였다.
[11]
1742년(영조 18년)에 식양갑을 입은 장수를 보고 영조가 크게 격노하였다. 그 뒤로 식양갑을 금하였으나 결국 보편화되었다.
[12]
조선 후기로 가면 화약병기가 발달하면서 갑주의 효용성에 한계가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무거운 갑주보다는 보다 가볍고 장식적인 갑주를 선호하기에 이르렀고, 그 결과 식양갑과 같은 갑옷이 나타났을 개연성이 크다. 물론 지금도 행군할때 군장에 페트병 집어넣는 것처럼 가라치기용으로많이 쓰였다.
[13]
명나라 포면갑 재현품과 화살촉으로 실험해본 영상. 명나라 포면갑과 두정갑의 제조 방식은 같다.
[14]
이는
청나라의 두정갑과 일본의
에도 시대 갑옷도 마찬가지였다.
[15]
그래서 갑찰이 든 두정갑과는 달리 각진 형상이 전혀 없다. 갑찰이 든 두정갑, 특히 철두정갑은 갑찰로 인해 어깨 부근 등 특정 부위에서 각진 형상이 나타나게 된다.
[16]
대표적인 것이
이글루 투구,
노스페이스 갑옷이라며 놀림받았던
태조 왕건의 사례가 있다.
[17]
드라마에서는
원균(종성부사),
권준(순천부사),
우치적(순천부사),
황세득(장흥부사),
어영담(광양현감),
이영남(가리포첨사). ( )는 연화문갑 착용 당시 직책.
[18]
布面甲, 병음:Bù miàn jiǎ, 드러난 면이 천으로 된 갑옷
[19]
오스프리 고증화에서 중국 송나라 갑주를 고증하면서 일반 찰갑 겉에 천을 씌운 형태로 고증한 바는 있다.
[20]
사진은 후쿠오카 몽골침략 박물관에 원나라 갑옷 이랍시고 전시된 유물인데 선명한 팔기 문양이나 양식을 보면 알겠지만 그냥 청나라 포면갑이다. 저런식으로 일본 남부 지방의 몽골침략 박물관들은 조선시대 각궁이 몽골활로 둔갑한다거나 조선 총통이 고려 화승총(...)으로 기재돼 있는등 유물 수량 맞추기 위해 아무말 대잔치 펼치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이게 특히 서양쪽 인터넷에 원나라 갑옷이라 퍼져 버린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