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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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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루스 대제와 황제 지기스문트(Karl der Große und Kaiser Sigismund) 알브레히트 뒤러
왼쪽 그림은 카롤루스 대제 이야기할 때 많이 쓰는 그 그림이다.[1][2]

1. 오토 1세가 초대 황제?2. 불안정과 분열?3. 독일인만의 나라?
3.1. 초기 구성국3.2. 이탈리아3.3. 당시의 ' 민족' 개념에 대해서
4. 로마 제국과 그 어떤 연관도 없다?
4.1. 서론4.2. 마지막 정통 로마인들의 나라4.3. 로마의 지배자가 로마 황제4.4. 거룩한 성지이자 가톨릭 이념의 중심지4.5. 정리
5. 볼테르의 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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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토 1세가 초대 황제?

'신성 로마 제국의 수립'이라는 사건은 어느 날,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나라가 지도 위에 불쑥 생긴 것이 아니다. 오토 1세의 대관은 독일 국왕이었던 오토 1세에게 '로마인들의 황제'라는 타이틀을 추가적으로 부여한 것일 뿐이며, 이 대관식이 없던 나라를 탄생시킨 것이 아니다. 이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개념 자체가 고대 서로마 제국 황제의 자리를 교황 권위를 통해 복구하는 의미이므로, 이 정치체제의 군주는 정식으로 말하자면 초기에는 프랑크 국왕, 후에는 로마왕이며, 이 직함을 얻은 사람이 로마에서 황제로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따라서 오토 1세를 제국의 초대 황제로 간주하는 시각은 800년 프랑크 왕국의 국왕 카롤루스가 로마에서 교황 레오 3세로부터 로마 황제의 관을 수여받고 축성된 뒤 서유럽 지역의 '황제'로 선포된 사건을 흑역사 취급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카롤루스 이후에도 '황제'의 지위는 계승되었으며, 924년 베렝가리오 1세의 암살 이후 제관 수여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가 962년 독일 왕국의 국왕 오토 1세가 교황 요한 12세로부터 제관을 수여받으며 제위가 복원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오토 1세는 신성 로마 제국이란 제국을 최초로 건립한 초대 황제가 아니라 단지 서유럽에 재건된 제국의 황제 지위를 작센 왕조로 복원시킨 군주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이 이후 실질적으로 독일 왕국의 또다른 이름처럼 되어버린 것이 사실이며, 프랑크 왕국의 분열 이후 이탈리아 왕국을 지배했어도 프랑스 왕국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사실이다. 이 점에서 신성 로마 제국을 '독일과의 연관성이 강화된 서유럽의 제국'이라 할 수는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오토 1세는 프랑크 왕국 분열 이후 사실상 실질적 역량을 상실한 제국을 독일 왕국 중심으로 재편시킨 군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며, 이 기준으로 신성 로마 제국을 독일적 성격과 연관지어 정의한다면 오토 1세를 창업 군주로 평가하는 데 무리가 없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신성 로마 제국의 기점을 962년이 아닌 800년으로 잡는 의견은 현재까지도 사학계 내외에서 존재하는 논쟁이다. 이는 신성 로마 제국의 성격을 독일적인 것으로 파악할 것인지, 아니면 로마적인 것으로 파악할 것인지의 문제와도 직결되는 논쟁으로, 단순히 연도의 문제를 벗어난 민감한 사안이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나라의 교육 과정에서는 962년을 공식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한국의 중등 교육과정 역시 마찬가지다. 이는 전술했듯이 924년 이후 중단되었던 서로마 제위가 오토 1세 이후 단절 없이 지속되었고, 이 오토 왕조를 계승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대에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표현이 확립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프리드리히 1세 이전에는 독일왕이 서로마 제위를 겸하는 형태였다.

또한 다른 관점에서는, 프랑크 왕국이 843년 이후 서프랑크 왕국 동프랑크 왕국으로 갈라졌고 처음에는 양쪽 왕이 형제였지만 세대를 거듭해 감에 따라 친연관계가 옅어지고[3] 그러다가 또 동프랑크에서는 911년에 부계후손이 절손되어 콘라트 1세를 왕으로 선출에 따라 카롤루스 왕조는 끝났다. 콘라트 1세는 카롤루스 가문의 외손이긴 했다. 독일계 국가에서 이후로도 나타나는 선거군주제의 선거 후보들은 다 이렇게 전 왕(가)의 외손, 사위, 먼 부계 친척 등으로 직간접적 혈연이 있었다. 하지만 프랑크 왕국이 살리카법의 본가인 만큼 부계가 바뀌면 왕조가 바뀌는 거다.

서프랑크에서는 987년까지 좀 더 오래 갔고, 동프랑크와 마찬가지로 새 왕으로 뽑은 위그 카페 또한 구 카롤루스 왕가의 외손이었다. 이에 따라 프랑크-로마의 정통성을 둘러싼 대결구도가 생겼고, 여기서 교황의 눈에 서프랑크보다 먼저 든 독일의 오토 왕이 정통성을 선점했다고도 볼 수 있다.

2. 불안정과 분열?

19세기 독일 역사가들은 신성 로마 제국을 근대 국가와 민족주의라는 당대의 가치를 바탕으로 평가했다. 이들은 당시 독일이 가지지 못했던 근대 국가에 대한 열망을 과거에 투사하였고, 이에 따라 제국의 황제들은 황권 강화와 중앙 집권의 관점에서 평가되었다. 오토 1세 하인리히 3세,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와 같은 '강력한' 황권을 행사하였던 중세 황제들은 독일 민족의 위대한 기원으로, 대공위시대 이후의 분열된 제국은 민족의 치욕으로 이해되었다. 푸펜도르프의 '괴물', 볼테르의 '신성하지도, 로마도, 제국도 아닌 나라', 제국의 멸망에 대한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나의 마부가 언쟁을 벌이는 것보다 관심이 없다'와 같은 당대인들의 말은 그 구체적인 맥락은 전혀 이해되지 않고, 당대인들 역시 제국을 경멸하고 있었다는 증거로만 여겨졌다.

21세기의 시점에서, 이러한 관점은 당대의 맥락을 완전히 무시한 시대 착오적이고 비역사적인 견해로 여겨진다. 현재의 역사가들은 중앙집권적 국민국가를 역사적 필연이나 역사적 과제로 파악하지 않으며, 전근대를 근대국민국가를 기준으로 파악하는 사후적 관점이 아니라 근대인의 시각에서는 낯설게 여겨지는 당대의 고유한 맥락과 질서를 이해하고자 한다.

현재의 역사가들은 제국의 정치 질서를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합리적인 관료제와 법치로 대표되는 비인격적 통치의 개념으로는 이해될 수 없고, 개인과 개인의 사적인 관계가 중요했던 인격적 통치의 요소를 강조한다. 중세 제국의 귀족들은 혈연과 혼인, 충성, 후원과 같은 형태로 복잡하게 뒤얽힌 인적 관계의 연결망을 형성하고 있었고, 일종의 동질적인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하인리히 1세를 비롯한 오토 왕조 군주들의 통치는 primus inter pares(동등한 자 가운데 첫 번째)라는 고대의 원칙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보면, 중세 제국의 정치를 황제와 제후들의 갈등으로 파악했던 고전적인 관점은 설득력을 잃는다. 중세 제국의 통치는 기본적으로 귀족들과의 협력, 합의, 협상 과정 속에서 이루어졌다. 대표적으로 중세의 가장 강력한 황제로 간주되었던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는 고전적인 관점에서는 직신(Ministerialen)이라는 관료층과 로마법의 통치 원리를 바탕으로 제후들을 제압하고 제국을 '중앙집권화'하고자 했다고 여겨졌고, 1180년 하인리히 사자공의 몰락은 그의 권력이 정점에 달한 순간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현재의 역사학자들은 바르바로사는 제국을 중앙집권화하고자 하는 마스터플랜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고, 그럴 의지도 없었을 것이라고 이해한다.[4] 바르바로사의 군사 원정은 귀족들의 협력이 필수적이었고, 이를 위해서 이들의 배타적인 특권을 인정할 필요가 있었다. 호엔슈타우펜- 벨프 대립 역시 의문시되고 있으며, 하인리히 사자공의 몰락은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의 주도가 아니라, 사자공의 정치적 행보가 다른 귀족들에게 협력과 합의 중심의 전통적인 정치 규칙을 위협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전근대 통치에서 협력과 합의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면서, 소국 분립(Kleinstaaterei)이라는 경멸적 용어로 표현되었던 중세 후기와 초기 근대 제국에 대한 이해 역시 달라졌다. 우선 대공위시대 이후 15세기까지 중세 후기의 제국은 황제와 제후들 사이의 협력, 의존 관계가 더욱 공고해지고, 이들의 이원적 구조를 중심으로 한 정치 질서가 1495년 보름스 제국의회 제국개혁을 기점으로 제도화되는 결실의 시기였다. 1495년 이후 초기 근대 제국은 제국의회, 제국관구, 제국대법원, 제국추밀원과 같은 제국의 질서를 유지하는 제도적 기반이 형성되고, 이를 바탕으로 황제를 중심으로 한 계서적인 위계 질서를 특징으로 하는 안정적인 체제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질서는 유럽의 권력 균형을 유지하고 평화를 수호하면서, 제국 구성원들을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고 제국 내부의 평화와 법을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에도 제국의 체계는 유명무실하지 않았다. 레오폴트 1세는 성직 제후들과 군소 영방과의 협력을 바탕으로 황제의 권력 기반을 안정시켰고, 30년 전쟁을 거치며 위기에 처했던 제국의 질서를 회복했다. 17세기와 18세기의 법학자들은 제국 헌법의 성격을 둘러싸고 벌였던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을 대표하는 푸펜도르프의 저작 De statu imperii Germanici(독일 제국의 상태)의 '괴물'이라는 묘사는 제국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 이론에 해당하지 않는 비정규적 체계라는 것을 의미하기 위한 단어로서, 이는 개정판에서 이 표현을 삭제한 데서 드러나듯 제국의 체계가 가지는 특수성을 묘사하기 위한 단어였지 제국을 비난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푸펜도르프의 동시대인인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는 제국을 일종의 가족과 같은 형태의 통합적인 질서로 파악했다. 18세기의 대표적인 법학자 요한 야코프 모저는 영방 군주의 권력 정책을 비판하면서 전통적인 제국 헌법의 가치를 옹호했고, '독일은 독일식으로 통치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제국의 마지막 마인츠 선제후였던 카를 테오도어 폰 달베르크는 제국의 질서를 "모든 규칙을 준수하여 건축된 것은 아니지만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견고한 고딕 양식의 건축물"로 묘사하였다.[5]

3. 독일인만의 나라?

신성 로마 제국은 독일인이 통치의 중심이었으며 아헨, 레겐스부르크 등 주요 도시도 현재 독일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독일사 국가로 보는 경향이 강한 것은 맞다. 서양사 학술서에서 아예 '독일 제국'(Deutches Reich)이라 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신성 로마 제국은 독일인 외에도 보헤미아인, 이탈리아인, 프랑스인, 벤트인, 유대인 등 여러 족속들이 존재한 다민족 국가였다. 1485년에 정해진 신성 로마 제국의 정식 국호는 '독일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Heiliges Rö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이지만, 이 국호가 지정된 때는 부르고뉴 이탈리아반도 등 비독일 지역에서 제국의 영향력이 줄어든 시기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6]

선성 로마 제국이 독일인들만의 나라가 됐다고 할 수 있는 시기는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어 네덜란드, 스위스를 완전히 상실하고 느슨한 형태의 연방체제가 되고 나서이다. 다만 이때마저도 보헤미아 왕국 같은 비독일 지역이 남아있었다.

신성 로마 제국이 자칭했던 오리지널 로마 제국만 하더라도 라틴족뿐만 아니라, 그리스인을 비롯한 온갖 민족들이 모여 살던 다민족국가였다. 로마시에서는 라틴어가 통하지만, 제국의 동부는 그리스어 문화권이었고 그 외에도 지방마다 고유한 언어가 통용되었다. 당장 팔레스타인 지역만 하더라도 아람어가 쓰였다. 그 동부 반쪽의 동로마 제국 그리스인을 비롯하여 불가리아인, 이탈리아인, 아르메니아인, 아랍인, 튀르크인, 페르시아인, 유대인 등 온갖 민족들이 모여 살던 동네였다.

옛 제국들을 현대의 민족국가에 대입하여 보는 것은 분명히 오류이다. 비슷한 예로, 동로마 제국을 보고 ' 라틴어를 안 쓰다니!', '그리스인이 주축이라니!' 하면서 로마의 정통성을 이어받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당연히 오류다. 제정 초기까지 로마는 이탈리아적 성격이 강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적 민족국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런 식의 극단적 민족주의, 내지는 혈통주의(종족주의)적 사관은 오히려 고대 로마의 정체성과도 차이가 난다. 역사적 신빙성에는 의문이 있다고 한들,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연원을 트로이, 곧 아나톨리아 출신의 아이네이아스와, 이탈리아 라티움 지방의 토착민 로물루스라는 이중적 구조에서 파악하였으며, 자신들의 조국을 재건된 트로이라고 자처하였다. 외국 논문들 중에서는 로마가 나중에 트로이에서 상당히 가까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간 것에서 착안하여 이쪽을 깊게 연구한 논문이 있다.

3.1. 초기 구성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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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의 당시 체계를 보면 민족 세계를 알 수 있다. 초기에 신성 로마 제국을 구성하던 하위 국가는 독일 왕국, 이탈리아 왕국, 보헤미아 왕국, 부르군트 왕국이 있었다.

독일 왕국은 이탈리아 왕국이나 보헤미아 왕국과 동등한 관계가 아니었다. 독일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모체가 되었기 때문에 황제선거에서 독일 왕국의 국왕( 독일왕)으로 선출된 자가 교황의 대관을 받아 황제가 되었다. 교황은 대관을 거부할 수는 있어도 선거를 물리고 다른 사람을 황제로 앉힐 수는 없었다. 교황이 정치적인 이유로 대관을 거부한 경우에는 명목상 황제가 아니라 독일왕이었지만 실질적인 황제로 인정받았다. 역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 중 거의 절반이 교황 대관을 받지 못한 독일왕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문제 없이 역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리스트에 이름이 올라와 있다. 15세기 막시밀리안 1세는 이런 명목과 실질의 불일치를 해결하기 위해 독일왕 선출과 동시에 스스로 황제를 칭했고, 이후 황제들은 교황의 대관을 받지 않고 황제가 되었다. 독일 왕국은 인구 등 규모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정치적 지위에 있어서도 제국에서 특별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독일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과 사실상 동일시되었다. 후대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의 관계와 비견할 수 있다.

이탈리아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이 건국되던 962년부터 독일 왕국과 더불어 함께 제국을 구성하던 하위 왕국이었다. 중세 이탈리아 왕국의 전신은 랑고바르드 왕국이었다. 랑고바르드 왕국은 6세기경 게르만족의 일파인 랑고바르드족 이탈리아 반도에 침입하여 세운 나라였다. 이탈리아반도에서 수백 년간 세력을 유지했던 랑고바르드 왕국은 다른 게르만 국가인 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대제에게 정복되었고, 북이탈리아의 랑고바르드족은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남이탈리아에선 베네벤토 공국 등 랑고바르드 잔존세력이 한동안 존재했다. 그래서 밀라노를 포함한 북이탈리아 지역의 한 주이자, 넓게는 역사적 지리적 맥락에서 북이탈리아 전체를 의미하는 롬바르디아와 혼동의 여지가 있으나, 동로마의 남이탈리아 지역 중 한 테마의 이름이 Longobardo였다. 프랑크 왕국이 분열된 후 북이탈리아는 장남 로타르가 관할하는 중프랑크 왕국에 속하게 되었고, 또 메르센 조약을 통해 중프랑크는 북쪽의 영토를 동프랑크와 서프랑크에게 사이좋게 떼어주고 북이탈리아만 남게 되었다. 그래도 북이탈리아를 가지는 자가 황제가 되어서 북이탈리아의 대접은 나름 좋았다. 그러나 이 때문에 북이탈리아 지역은 서로 황제가 되려 하는 카롤루스 왕가 방계의 프랑크 귀족들 간의 혼란에 빠졌고, 결국 960년 교황의 요청으로 이탈리아에 원정온 독일 왕국의 국왕 오토 1세에 의해 합병되었다. 북이탈리아의 위협으로부터 교황령을 보호해준 대가로 오토 대제는 이탈리아 국왕과 더불어 황제가 되었다. 이로서 이탈리아 왕국은 독일 왕국과 더불어 신성 로마 제국의 구성국이 되었다. 이탈리아 왕위는 독일왕과 더불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 자동으로 주어지는 작위였다.

보헤미아 왕국 체코인이 다수인 제후국으로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이탈리아와 더불어 독일어를 사용하지 않는 지역이었다. 보헤미아는 처음에 보헤미아 공국으로 출발했지만 12세기 말 오타카르 1세가 스스로 왕국을 칭했다. 지리한 논쟁 끝에 정치적인 타협으로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보헤미아가 왕국을 칭하는 것을 승인했다. 그러나 애초에 공국이었던 보헤미아는 왕국으로 승격된 후에도 독일 왕국 내에 있는 하위 선제후국(공국)들과 같은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외왕내공?? 보헤미아 왕국 국왕이 독일 왕국 국왕을 뽑는 7명의 선제후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이 독일 왕국과 보헤미아 왕국의 관계가 동등한 왕국이 아닌 주종의 관계임을 보여준다.

부르군트 왕국은 고대에 존재했던 동명의 왕국과 구분하기 위해 왕국의 수도 이름을 따 아를 왕국이라고도 불렸는데, 11세기 초 잘리어 왕조 콘라트 2세에게 상속되어 공식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가 얼추 혈통에 따라 승계되던 호헨슈타우펜 왕조까지 부르군트 왕국도 승계되어 내려오며 전통이 되어버려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단절된 뒤 선출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도 부르군트의 왕을 겸임하게 되었다. 다만, 12세기 중반부터 사보이아 백국 등 해당 지역의 귀족들의 힘이 강해져 지역 권력이 파편화 되었고, 그 중 가장 영향력있던 체링겐 가문이 아예 부르군트 공작이자 지도자(rector)를 참칭하기도 했었다. 이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도 부르군트의 왕 대신 부르군트의 지도자(rector)란 표현도 쓰기 시작했으나 곧 다시 잊혀졌다. 이후 16세기에 프랑스 왕국에게 영토가 넘어가면서 신성 로마 제국은 영토를 상실하게 되었으나, 그럼에도 신성 로마 제국이 멸망하기 전까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아를의 왕'이란 명목적 칭호를 사용했다.

3.2. 이탈리아

파일:Iron_Crown.jpg
롬바르디아 철관. 로마왕 이탈리아 국왕 대관식을 치를 때 쓰였다.
파일:787px-Mitteleuropa_zur_Zeit_der_Staufer.svg.png
호엔슈타우펜 왕조 치하 신성 로마 제국과 시칠리아 왕국. 단, 시칠리아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해 있지 않았고 어디까지나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따로 통치하는 독립된 영토일 뿐이었다.[9] 시칠리아 왕국 베네치아 공화국은 신성 로마 제국을 표시하는 붉은 선 바깥으로 표시된 걸 알 수 있듯이 단 한 번도 신성 로마 제국의 영역에 들어간 적이 없다.

이탈리아 왕국 독일 왕국과 함께 신성 로마 제국이 시작할 때부터 있었던 왕국이다. 신성 로마 제국 초기의 중세 황제들( 작센 왕조, 잘리어 왕조, 호엔슈타우펜 왕조)은 로마와 로마가 상징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의 가톨릭 신앙에서 정체성을 찾으려 했다. 거기다 위에서 밝힌 것처럼 이탈리아 지역은 경제적으로도 부유해서 제국의 재정에 큰 보탬이 되는 지역이기도 했다.

프리드리히 1세를 비롯한 초기의 많은 황제들이 이탈리아에 그렇게도 집착했던 이유는 교황과의 정치적, 종교적 갈등 때문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일부 중세 황제들은 로마에 집착하여 지나칠 정도로 이탈리아 경영에 골몰했지만 정작 이탈리아에서는 곤경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독일을 비롯한 중부 유럽을 평정하며 그 이름을 전유럽에 떨쳤던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황제도 이탈리아 원정에서는 무능할 정도로 연패를 거듭하며 망신을 당하기 일쑤였다. 이탈리아 경영의 실패는 독일 국내 정치에서 제후들의 여러 도전과 위협으로 이어졌다. 강력한 황권과 진정한 신성 로마 제국을 추구했던 호엔슈타우펜 왕조 황제들의 황권은 정작 신성 로마 제국 통치에 반쯤 손을 놓은 프리드리히 2세 사후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고 결국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단절과 대공위시대로 귀결되고 말았다.

대공위시대 이후 황권이 약해졌기 때문에 어느 한 가문에서 제위를 독점적으로 세습하지 못하고 합스부르크 가문, 비텔스바흐 가문, 룩셈부르크 가문 등이 한동안 번갈아가면서 황제를 배출했다. 이시기 황제들은 초기 황제들과 달리 독일 내에서조차 영향력이 미미했기 때문에[10] 독일 내에서 영향력을 확보하는데 주력했고 각각 오스트리아[11], 바이에른[12], 보헤미아[13] 등 자신들의 기반을 다지는데 주력했다. 그렇다보니 교황의 대관을 받으러 로마로 가는 것은 언감생심이었고, 하인리히 7세, 루트비히 4세 정도나 교황의 대관을 받을 수 있었다. 분명 권위는 있으나 실익은 크지 않았던 이탈리아는 제국과 점점 멀어졌고[14] 14~15세기 신성 로마 제국은 북이탈리아 지역의 영토와 영향력을 상당 부분 상실하게 되어 이탈리아는 명목상으로만 제국의 봉토로 존재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5세기 중반부터 신성 로마 제위를 독점적으로 세습하게 된 합스부르크 왕조는 아예 국호를 독일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이라고 바꾸었다.

3.3. 당시의 ' 민족' 개념에 대해서

중세 제국들의 특성상 나라는 민족들 위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영주 계급 및 왕족들의 지배로 생겨난다. 이 당시 우리가 국가라고 부를 수 있는 이것들은 단순히 영지를 소유한 봉건적 지배 계급들의 이해관계에 의한 복합적인 분할관계에 해당하는 일련의 '영지'들이며, 절대로 지리학적 문화적 연결성을 토대로 한 민족분류 개념에 기초한 나라 개념이 아니다. 이 시대는 영주 계급들의 봉건적인 질서에 의해서 영지들이 임의적으로 분할된 시대로서 지배권력 하에 있는 피지배 계급들 역시도 자신들을 하나의 영지에 속한 개체로 인식할 따름이었고, 그들을 대표하는 것도 사실상 민족개념이라기보단 단순히 상상된 권력에 지나지 않는 지배계급들의 표상일 뿐이었다. 민족의 개념은 중세의 폐쇄적인 생활방식이 허물어지는 과정에서 또 봉건적 질서가 옅어지기 시작하며 자연스럽게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에는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는 사라센인이나, 본격적으로 개종하고 카르파티안 분지에 정착하기 전인 9세기 즈음의 마자르인이 아니라면 서방인들끼리는 딱히 이질감은 없었다. 그리고 이들의 경우 결코 현대 민족적인 관점에서 배제된 것이 아니라, 종교라는 중세 유럽의 유일무이의 진리나 아니면 정주민이 아닌 기마 유목민이라는 딱 봐도 눈에 보이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화적 관점에서 배제된 것이다. 실제로도 마자르, 폴란드 등 저러한 생활 문화적 관점에서 이질감을 유발했던 이민족 또한 10세기를 넘어 점차 정주민화 되어 가고, 그리스도교와 봉건제를 받아들이며 중세 보편 그리스도교 세계(Christendom)의 일원으로 인정받아 융화되어 갔다. 심지어 국가간의 국경조차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엄밀하게 말하면 민족적 관점에서 '독일인'이란 개념이 정립된 것은 신성 로마 제국이 망한 19세기의 일이니. 조금 느슨하게 봐도 루터가 독일어로 된 성경을 쓰고 이어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16세기 정도다.

참고로 독일인들이 자신의 조상을 토이토부르크 전투 게르만족들에게 찾으려고 한 것은 신성 로마 제국이 망하면서 로마와의 연계가 끊어지자 새로운 표상을 찾고자 한 1848년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 빌헬름 1세 오토 폰 비스마르크 독일 통일 등 근현대에 들어서 시작된 것이다. 다만 이걸 단정적으로 보면 또 안되는게 게르만족들 조차도 로마의 통치 아래서 로마인으로써 살아갔었던 이들이 있었던가 하면 토이토부르크 전투로 자신들의 터전을 지켜낸 이들이 존재했다는걸 감안하면, 민족주의 대두 이전에도 복합적인 시선으로 바라봤을게 틀림없다. 로마와도 싸웠었던 민족이 한편으로는 로마의 후계를 자처했었다는 이 상황 자체가 이걸 설명해준다. 로마 하에 있었던 게르만족과 게르마니아에서 살던 게르만족은 서로 다른 민족이 된게 아니며, 분명 로마라는 국가는 로마 이후의 서유럽의 석권자가 보았을때 궁극적 목표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 허나 그렇다고 자기 민족이 자기 정체성을 지키게 된 전투는 분명 존재했기에, 그 정체성이 남아있는한 그 전투는 잊혀질리는 없다. 이 전투가 독일 민족의 새로운 표상을 차지하게 된건 이 민족이 더이상 로마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그렇기에 독일 제국으로써 재편되었고, 주도적인 지배층에만 안주하는걸 벗어나 독일인만의 나라를 지향하게 된것이다.

전근대 시대에도 종족으로서의 공동체 개념은 분명히 존재했다. 15세기에 생긴 독일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국호가 아니더라도, 외국인 출신의 출신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는 루터로부터 촉발된 종교개혁 문제를 다루며 '숭고한 독일 국가'의 국민들이 종교적으로 단합하기를 촉구했다.

4. 로마 제국과 그 어떤 연관도 없다?

저는 부인들과 기사들, 전쟁과 사랑,
궁정 예절, 대담한 위업을 노래하리니,
무어인들이 아프리카에서 바다를 건너와
프랑스를[15] 황폐하게 만들었을 때였는데,
그들은 로마의 황제인 카롤루스에게
트로야노의 죽음에 대해 복수하겠다고
장담하는 자신들의 왕 아그리만테의
분노와 젊은 혈기를 뒤따라왔습니다.
- 광란의 오를란도 제1곡, 루도비코 아리오스토( 이탈리아인)

동시대의 다른 지역[16]에서 어떻게 생각했건, 서유럽 가톨릭 사회에서 신성 로마 제국은 서로마 제국의 정통 계승국으로 취급받았다.

현대인들, 특히 현대 서양인들이 보기엔, 고대 로마와 별개의 정치체인, 그것도 로마의 주된 외부 세력이었던 게르만족[17]에게서 재건된 신성 로마 제국의 정체성은 매우 기이해보일 수 있다.[18] 그러나 이는 현대인들의 관점을 바탕으로 당대를 해석하는 행위(anachronism)이며, 당대인들의 세계관에서 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더군다나 서양중심적 관점에서 벗어나 중국과 페르시아 등지에 형성되었던 제국들과 왕조들의 예를 생각해볼 수 있다. 청나라 진나라에서부터 이어진 중화제국이었음을 부정하는 자는 없으며, 아케메네스 제국, 사산 제국 사파비 제국 모두 페르시아 제국이었음을 부정하는 자도 없다.

4.1. 서론

프랑크 왕국은 물론이고 많은 서방의 게르만계 세력들은 칭제를 간절히 바랐다. 언제나 서신이 오가는 일이 있거나 하면 아직도 건재한 동로마 제국보다 급수가 낮은 신분임을 별 수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으나, 9세기 카롤루스 1세가 교황 레오 3세를 반대파들로부터 구출하고 황제를 칭하기 시작했다. 서유럽 지역에서는 교황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해당 지역의 게르만 왕국에게 대관식을 통해 명목상 서로마 제국의 제위를 부여하는 일이 있었으며, 이러한 관습이 결국 중세 서로마 제국인 신성 로마 제국의 탄생을 낳았다. 옛 서양은 물론 옛날 서양 학계에서는 이 신성 로마 제국을 진정한 로마 제국이라고 중시했으며 동로마 제국을 소위 그리스 제국이라 부르며 멸시했다.

물론 이러한 시각은 당시 로마 제국, 중동, 동유럽권의 시각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한계점을 지니나, 이런 이데올로기적 주제들을 완전히 무시해버리고 신성 로마 제국을 파악할 수는 없다. 이는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중화권 제국의 역사를 파악할때, 당시 중국인들의 이데올로기와 그와 연관된 나라들의 이데올로기를 균형적으로 파악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여기에 대해서 외부인이 코멘트를 하는 것이야 자유지만, 그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실제 역사에서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무시하고는, "내가 보기에는 신성 로마 제국은 로마와 상관이 없다", "내가 보기에는 러시아는 로마와 상관이 없다"고만 이야기하는 건 곤란할 것이다. 그리고 이건 사실 비단 신성 로마 제국 뿐만 아니라 소위 제3의 로마를 포함한 서양권 역사상 국체 연속성 관련 논쟁 전반이 그렇다.[19]

소위 제3의 로마 논쟁을 대표적으로 특정 인터넷 커뮤니티 중심으로 한 한국의 온라인 역사 평론 및 담론은 오히려 나라에서 직접 정사 편찬을 주도할만큼 특이하고도 심오한 동아시아 유교문화권 문맥에서 통하는 '정통성'이란 잣대로 평가하려는 측면이 있다.

4.2. 마지막 정통 로마인들의 나라

라인 강 도나우 강이 고대 로마 제국의 북방 국경선으로 정하지고 나서부터 외적의 침입을 감지할 수 있는 강변에 수많은 군단주둔지가 설치되었고, 로마 시민인 군인들의 생활공간이나 다름없던 군단기지들은 제국 후기에 기동군과 경계군이 분리되는 와중에 자연스럽게 군사도시화 하였다. 비록 카라칼라 황제 시기의 안토니누스 칙령으로 인해 모든 제국민에게 로마 시민권이 주어졌다 하더라도, 속주만 놓고 보자면 사실상 농노에 해당했던 신규 시민 우밀리우스와 구별되는 호네스타스라는 전통적 시민 계급은 당연히 군사도시에 그 수가 많았다.

서로마 제국이 무너지고 혜성같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프랑크족들은 고대 로마 제국의 자치령 군사동맹으로서 로마 문명의 짬밥을 꽤 오래 먹었지만 로마인 자체였던 적은 없고, 갈리아 최후의 로마 잔존 세력인 수아송 왕국을 멸망시키고 서유럽의 패자로 등극한데다 로마화의 우등생이었다던 갈리아인들도 자위력이 없는 상태에서 당장 매달릴 대상이 프랑크족밖에 없었으므로 상대적으로 옅었던 로마인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프랑크인의 정체성이 헤게모니를 가졌던 후방 갈리아 지역과 달리, 전통적인 최전방 국경의 강변 도시들은 로마인들이 직접 세우고 로마인들이 지키며 살아왔던 도시라서 튜튼족에게 정복당하고도 로마인의 정체성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비록 카롤루스 대제라는 걸출한 인물에 프랑크 왕국에 복속되기는 했으나, 프랑크족의 정치적 영향력에서 벗어면서 이 지역들을 규합하기 위해 정복자 튜튼인의 무력과 정체성 뿐만 아니라 현지 로마인들의 문명과 정체성까지 필요해진 것이다.

정작 로마 시는 동로마의 수복전쟁으로 초토화되어 지도상에서 지워진 무인지경까지 이를 정도로 몰락했다가 종교도시로 겨우 부활하면서 원래 라틴어를 쓰는 정통 로마 시민들이 대부분이었던 나머지 이탈리아의 도시들이 로마를 그냥 옛 조상 개념으로 치부하면서 자체적으로 창출한 중세 도시국가시민의 정체성으로 각자도생했던 것과 달리, 신성로마제국은 엄연히 아직도 로마인의 정체성을 가진 정통 로마인들의 문명에 기반하여 세워진 나라였다. 머지않아 튜튼인과 상호동화되어 독일인이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즉 오늘날에도 남아있는 수많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강변 도시들에서 볼 수 있듯이, 역사적으로 독일인은 튜튼인의 후예이자 로마인의 후예이기도 하며, 오히려 혈통적으로 고지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로마인(켈트계)의 비중이 훨씬 더 크기에 '독일인의 제국이니까 로마 제국이 아니다'라는 말은 전혀 맞지 않다고 볼 수 있다.

4.3. 로마의 지배자가 로마 황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간과해서는 안되는 건, 서유럽에 잔존해있던 서로마인들의 보호자들의 구심점은 도시인 로마였으며, 서방인들의 주류 이데올로기에선 로마市와 로마 시민들을 보호하는 독일의 군주들이 '로마 황제'였다는 점이다. 이는 다니엘서에 기반한 당대의 제국 이데올로기에 따라 서방인들이 보편 제국이 역사에 끊임없이 존속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서유럽인들은 서로마의 세력이 쇠한 공백 지역에 카롤루스, 오토 및 후계자들이 보편 제국을 복원했다고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도시와 제위를 떠났을 뿐 아니라, 로마의 사람들과 언어를 잃어버리고 다른 도시와 제위, 민족, 언어로 옮겨갔던 것입니다.
루도비코 2세, 바실리오스 1세에게 보내는 답장에서

루도비코 2세의 답장의 실제 저자는 답장의 번역자 찰스 웨스트에 따르면 로마 출신의 사서 아나스타시우스이다. 즉 이 답장의 내용은 단순히 루도비코 2세가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꾸며낸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로마 시민들의 시선을 담고 있기도 하다. 즉 얼마나 보편적인 의견이었는진 불명이나, 분명 당대의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는 "우릴 버리고 떠난 그리스인 황제보단 우릴 보호해주는 프랑크인 황제야말로 진짜 로마 황제다"라는 시각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도 콘스탄티누스의 증여문서와 같은 로마 제국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내려오는 근거를 찾기보다는,[20] 자신들의 전통성의 주축인 가톨릭 교회와 그 총본산이자 성지인 로마市의 수호와 함께 로마 시민들로부터 보호자이자 황제로 인정받는 것에 더 신경 쓰는 모습을 보인다. 게다가 교황령은 그 성립에 대한 이데올로기에서 신성 로마 제국과 공생관계였다. 교황령은 독립국이기는 하지만, 관념적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과 거의 '부부'에 해당하는 위치였다. 때문에 교황을 비롯한 로마 시민, 그리고 서유럽인들은 독일의 군주들을 '로마 황제'로 인정하고 있었다. 이는 12세기의 로마 코무네 폭동 당시, (당연히 이탈리아인이었던) 폭도들이 1155년에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게 보낸 문서에서도 잘 나타난다.
오 인내심이 많으시며 은혜가 풍성하신 군주여, 폐하와 우리들의 권리에 대한 몇 마디 말을 들어주소서. 폐하께서는 한 사람의 방문객이었습니다만, 우리가 폐하를 시민이 되게 했습니다. 폐하는 알프스 너머에서 온 이방인이었습니다만, 우리가 폐하를 통치자로 받들었습니다. 우리에게 속했던 권리를 폐하에게 바쳤습니다.
Knut Schulz, <중세 유럽의 코뮌 운동과 시민의 형성>에서 인용

물론 이 글은 폭도들이 황제를 구슬리기 위해 쓴 글이니만큼 여러 가지 감언이설이 들어갔다는 점은 감안해야겠지만, 독일의 군주가 이탈리아 및 로마 시민들에게 '이방인 출신이지만 어쨌든 우리의 통치자'로 자연스럽게 인식되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사실 고대 로마 제국에서도 출신지가 황제 자격을 제한하진 않았다. 트라야누스는 이베리아 반도 출신이었고, 나중에 가면 북아프리카 출신 로마 황제도 출현한다.

4.4. 거룩한 성지이자 가톨릭 이념의 중심지

로마市는 로마 제국의 입장에선 로마 제국의 역사상 단 둘만 존재했던 도시 중 하나이자, 안타깝게도 로마 제국의 지배권에서 떨어져나간 도시였다. 로마市는 아직도 나름의 규모를 자랑했지만, 6세기경에 이미 콘스탄티노폴리스에게 최대도시의 자리를 빼앗긴 상황이었다. 6세기 중반의 동로마와 동고트 간의 고트 전쟁을 보면, 로마 시의 주인이 여러 번 왔다갔다했는데, 그러던 중 로마 시의 상주인구가 다 피난가거나 굶어죽어서 하나도 없었던(영어 위키백과 'Gothic war (535-554)에서 'Uninhabited'라고 나온다.) 시절도 있었으니 뭐 최대 도시의 위상은 진작에 사라졌다.

또한 행정적으로도 로마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천도 이후 점차 의미를 잃어갔으며 종국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며 제국과 관련된 모든 행정적 위상을 상실했다. 심지어 서로마가 있었을 당시에도 서로마의 행정은 밀라노와 라벤나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면서 로마 시는 제국의 도시, 황제의 도시에서 교황의 도시로 서서히, 하지만 확실하게 옮겨가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市에서 으뜸 사도인 성 베드로가 순교하였고, 초기 그리스도교 역사의 중심지인 로마의 사도적 전통은 후발 주자로 제국의 수도가 된 콘스탄티노폴리스보다 강력할 수밖에 없으며, 로마의 주교인 교황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로부터 으뜸 주교로 인정받았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어디까지나 동로마 제국의 수도라는 위상에 의해 성장할 수 있었던 후발 주자였다. 실제로 초기 그리스도교 박해기에 동방 주교들 중 가장 으뜸으로 취급받던 자리는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였다. 후일 비잔티움 천도 이후에야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의 위상이 급상승하였고,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3조에서야 "왜냐하면 새로운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는 명예상의 특권으로 로마 교황 다음을 누리기 때문이다."라고 언급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는 서유럽 가톨릭 문화권에서는 로마市는 단순한 로마 제국의 옛 수도가 아니라 로마 제국의 영적인 수도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으며, 동시에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서유럽권에서 거의 유일하게 로마 제국의 문화적 유산들을 보존하는 곳이었다. 이에 따라서 서유럽에선 로마市의 보호자·지배자가 곧 로마 제국의 황제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이는 동방 정교회와 합을 맞춰온 동로마 제국에서 여러 성지-주축 도시 중 하나일 뿐인, 심하게 말하면 발상지고 옛 수도지만 어쨌든 이제는 우리가 수도고 그 지배 아래의 점령지로 전락한, 로마市를 보는 시각과는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종교적 시각과, 나라를 운영하는 행정적 시각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으며, 로마라는 국가적 행정 체계가 무너지게 된 뒤의 서유럽에서는 당연히 종교적인 상징이 무게가 실리게 될 수밖에 없다.

4.5. 정리

기본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은, 로마시에서 시작한 그 로마와는 별개의 정치체이다. 로마시에서 시작된 로마는 콘스탄티누스 1세 시기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수도를 옮겼고, 동로마는 서로마처럼 고대 로마와 직접 연결된 정치체이다. 그러나 교황의 일관성있는 주장과 정치적 입김이 카롤루스 시대의 프랑크와 오토 시대의 독일과 맞아떨어저 이들 게르만 군주들을 '로마시'가 인정한 서방 세계의 황제로 인식한 것이다.[21] 곧, 당대 서방 사람들도 당연히 신성로마가 로마와 별개의 정치체임은 인식했으되, 이들 게르만 군주들을 옛 서로마 황제에 대응되는 황제로 인식한 것이다.
  • 1. 신성 로마 제국은 교황의 인정을 통해 으뜸 사도인 베드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사도 계승을 손실 없이 유지할 수 있었다. 사도 안드레아로부터 이어짐이 인정받기는 했지만 베드로보다는 권위가 떨어졌고 그마저도 그 근거가 로마에 비해 불안정했던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비해서 우위에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 2. 신성 로마 제국은 로마 시민 및 지배자들의 인정이 있었다. 영토의 통치에 있어서는 비록 교황령이 베네치아 조약으로 신성 로마 제국에서 독립하여 로마를 잃고, 서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라벤나도 교황령과 신성 로마 제국이 공유하다 루돌프 1세가 교황에게 통치권을 전부 돌려줬지만, 밀라노 프랑스 혁명 전쟁 중인 1801년까지 제국의 영토로 남았다. 반면 오스만 제국은 정복을 통해 적국인 동로마 제국의 영토와 백성을 강제로 흡수했고, 러시아 제국은 로마 제국의 신앙과 일부 유민만을 흡수했을 뿐이었다.

이러한 배경에 따라 서방 가톨릭 세계에서 로마 제국 서방 영토 상실 이후 로마가 물러간 서로마 지역의 문화와 종교를 수호한 신성 로마 제국은 서유럽인들에게 로마 제국의 신앙적 적통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이었다.

5. 볼테르의 발언

"Ce corps qui s’appelait et qui s’appelle encore le saint empire romain n’était en aucune manière ni saint, ni romain, ni empire."
"스스로 신성 로마 제국이라 칭하였고 아직도 칭하고 있는 이 나라는 딱히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며 제국도 아니었다."
볼테르, 나라들의 풍습과 정신에 관한 글(Essai sur l'histoire générale et sur les mœurs et l'esprit des nations) (1756) 중 챕터 70
볼테르의 이 말이 간단하면서도 워낙 강렬하기 때문인지 마치 신성 로마 제국의 표어인 것처럼 유명해졌다. 이 발언만으로 신성 로마 제국을 허울뿐인 국가로 치부하기도 하는데, 볼테르는 신성 로마 제국의 체제에 대해서 비난한 것이 아니다. 볼테르의 말은 카를 4세 시대의 제국에 한한 것인데, 1346년 금인 칙서를 반포한 이후 제국 내 황제의 권력이 제한되고, 카를 4세 본인이 신성과 로마의 근원인 교황과 이탈리아에 무관심하였기에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명칭은 적절하지 않다는 의미의 농담조로 사용하였을 뿐이었다. 오히려 볼테르를 비롯한 프랑스 계몽사상가들은 신성 로마 제국의 정치 체제를 일종의 공화정이자 제한 군주정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몽테스키외 1729년 제국을 방문한 이후 효과적으로 잘 작동하는 연방으로 결론내린 바 있다.
  • Joachim Whaley, The Holy Roman Empire: A Very Short Introduction, 10-11페이지


[1] 카롤루스 대제 생전에 그려진 그림은 아니고 독일( 신성 로마 제국)의 국가수리 문장 프랑스의 백합 문장을 배경으로 하여 후대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관을 씌운 상상화다. 물론 뒤러의 생년을 보면 알다시피 지기스문트 역시 사후에 그려진 것이다. [2] 당대 사람들이 카롤루스 대제를 신성 로마 황제로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3] 고대 중국 주나라에서도 춘추전국시대의 도래는 희성(姬姓) 동성제후국들 간의 친척관계가 세대를 거듭해가면서 멀어졌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더이상 주나라를 같이 떠받칠 친척이라기보다는 잠재적인 적으로 본 것에서부터 시작한 것인데 그것과 마찬가지의 원리다. [4] Werner Hechberger(2017), "Princely lordship in the reign of Frederick Barbarossa: A historiographical analysis", Graham A. Loud, Jochen Schenk(ed.), The Origins of the German Principalities, 1100-1350 [5] 정작 카를 테오도어 폰 달베르크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붙어 마인츠 선제후가 되었고, 1803년 마인츠 선제후국이 해체되어 프랑스령이 되자 레겐스부르크로 옮겨갔다. [6] 다만, 이 명칭이 처음 공문서에 사용된 건 13세기이다. [7] 로마 시와 그 주변 + 볼로냐, 라벤나(표시 안 되어 있지만) 등 북동부 해안 + 둘을 연결하는, 페루자(Perugia) 중심의 길고 좁은 회랑 모양의 영역. [8] 중프랑크의 분할 과정에서 부르군트는 독립된 국가였다가 1032년 콘라트 2세 때 신성 로마 제국으로 편입되었다. 이 부르군트 왕국에서 떨어져 나온 사보이아 백국이 바로 통일 이탈리아의 전신이다. [9] 유튜브의 유럽 역사 지도 영상을 보면 교황령 이남의 남이탈리아는 신성 로마 제국 색깔의 연한 색으로 표시되는 경우가 많다. [10] 역으로 독일 내에서 한미한 세력이었기 때문에 황제로 선출될 수 있었다. [11] 합스부르크 가문 스위스의 자그마한 백작 가문이었다가 루돌프 1세 오타카르 2세를 패사시키고 오스트리아 공국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을 회수하여 맏아들 알브레히트에게 분봉하였기 때문에 초창기에는 이방인으로서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를 통제하기에도 벅찼다. [12] 비텔스바흐 가문의 영지는 라인 궁정백령과 오버바이에른 공국, 니더바이에른 공국으로 분열되었는데 루트비히 4세는 비텔스바흐 가문의 영지를 모두 통합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생전에 라인 궁정백령은 형 루돌프의 아들 루돌프 2세와 루프레히트 1세에게 물려주었고 그가 죽은 후 바이에른도 다시 분열되어 15세기 초 바이에른뮌헨 공작 알브레히트 4세에 의해 통합되기 전까지 갈라졌다. [13] 룩셈부르크 가문 룩셈부르크에 기반했으나 하인리히 7세가 아들 요한 보헤미아 왕국 프르셰미슬 왕조의 마지막 혈손 엘리슈카 공주와 결혼시키면서 요한을 보헤미아 국왕으로 선출시킬 수 있었고 본토 룩셈부르크는 방계 가문에게 넘겨주면서 보헤미아 왕국으로 이주했다. [14] 훗날 기반을 다지는데 성공한 카를 4세는 로마로 가서 교황이 주관하는 대관식을 치렀고, 팔츠 선제후였던 루프레히트도 꾸준히 로마로 대관식을 치르러 가려 했으나 북이탈리아 세력에 막혀 번번히 실패했다. 대공위 시대 이후 황제들이 결코 북이탈리아에 대한 관심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15] 한편 이 표현은 프랑크 왕국을 프랑스로 대우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국호가 프랑크 왕국에서 왔으며 프랑스의 유래가 서프랑크 왕국이기 때문. 여담으로 서프랑크의 이웃인 동프랑크 왕국이 신성 로마 제국의 유래이며 중프랑크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구성국인 이탈리아 왕국과 로타링기아 왕국, 부르군트 제2왕국이 된다. [16] 동로마 제국, 동유럽 슬라브권, 아랍-이슬람권 등. [17] 토이토부르크 전투를 기점으로 로마와 게르만 세력의 경계가 라인강으로 굳어졌으며 로마는 게르만족 활동 영역 전역을 장악한 적은 없었다. 다만 로마 후반기에는 로마에 포섭된 게르만족들도 매우 많았다. 또한 로마와 대치했던 것으로 치자면 그리스인들은 로마 제국 이전의 로마 공화국과 70년 가까이 패권을 다투어온 숙적이었고, 로마 이외의 이탈리아인들 상당수는 도시국가 로마에 정복당한 피정복민들이기도 했다. [18] 사실, 신성로마제국이 세워지기 이전에도 딱 한번, 게르만족이 로마제국 황제가 된 적이 있다. [19] 예시를 들자면 현실적으로야 당연히 현대 독일의 실제 창시자들이나 기반은 당연히 나치 독일과 깊은 연관이 있지만 어쨌든 공식적인 기관 입장에선 현대 독일은 아예 군대 전통까지 싹 갈아 엎을만큼 나치뿐만 아니라 전근대 독일 전반하고 단절을 중시하듯이 역사상 국체간 연속성은 구체적인 특정 문맥에서 파악해야 하는 문제이다. [20] 즉 기진장은 진짜면 더 좋지만 가짜라도 뭐 아무래도 큰 상관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1204년까지는 동로마 제국이 강대국으로 건재해 있었고, 수도 이름이 다름아닌 그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직접 세웠고 그의 이름이 후대에 붙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이기 때문에, (종교와 대응되는) 정치적인 의미에서 로마 제국 및 콘스탄티누스와의 연결성을 강하게 주장할수록 오히려 신성 로마 제국의 존립 정당성은 약해진다. [21] 정확히 말하면, 당대인에게 인지되지 않았던 어떤 권리를 로마 주교가 창조하였다기보다는, 서로마의 붕괴 이후 로마 주교에게 점진적으로 인정된 (동시에 역사적 기원이 불분명한) 관습상의 기존하던 권리가 위조라는 형식을 통해 문서화되고, 이것이 서방의 게르만 황제로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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