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000000><colcolor=#fff,#dddddd> 백운택 白雲澤 | Beak woon-tea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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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32년 2월 29일 |
일제강점기 경성부 (현 서울특별시)[1] | |
사망 | 1982년 11월 3일 (향년 50세) |
대구직할시 (현 대구광역시)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1장군 133호 |
학력 | 육군사관학교 (11기) |
최종계급 | 중장 (대한민국 육군) |
본관 | 수원 백씨 |
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前 육군 중장). 군내 불법 사조직 하나회의 일원으로 1979년 12.12 군사반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2. 생애
1932년 12월 24일 일제강점기 경성부에서 태어나 육군사관학교 4년제 정규 교육과정 첫 기수인 11기로 입학해 1955년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생도 시절 전두환, 노태우, 손영길, 김복동, 정호용, 최성택, 권익현 등 경상도 출신 11기 생도들과 함께 하나회를 만들었다. 졸업 즈음 육군본부 방침 하에 6.25전쟁에서 고생한 육사 단기 교육과정 선배 기수들에게도 육사 기수가 인정되어 부여되었다. 본래 '육사 1기'여야할 기수가 '육사 11기'로 바뀌게 되자 동기 김성진과 함께 정일권 참모총장에게 항의하다 헌병대에 끌려가기도 했다.[2]11기 선두주자로 승승장구한 손영길[3], 전두환, 김복동, 최성택이나 2차 진급자로 경력을 쌓아가던 노태우, 정호용과 달리 같은 하나회 내에서도 백운택은 잘 나가지 못했다. 박정희의 신임 아래 하나회 동기들이 11기 내 진급 서열을 장악[4]했음에도 백운택은 선두 대열은 커녕 2차 진급 대열에도 끼지 못했다.
1979년 말 당시만 해도 이미 사단장을 마치고 소장 2차 보직을 수행중인 전두환/ 김복동/최성택, 그리고 사단장으로 재임중이었던 노태우, 정호용에 비해 백운택은 소장 진급도 못하고 제71방위사단[5]장이라는 한직에 있었고, 이변이 없으면 준장으로 옷 벗을 일만 남아있었다. 이에 백운택은 12.12 군사반란에 기획 단계부터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백운택은 12.12 군사반란 실행 이전 모의 단계부터 반란에 가담했고,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없었지만 반란군들의 최규하 대통령 면담 때도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 일설에는 면담 중 일부러 권총을 떨어뜨려 최 대통령을 겁박했다고 하나, 면담 자리에 최규하 대통령과 같이 배석해 있었던 신현확 총리는 신군부 인사들이 그런 행동은 하지는 않았다고 5.18 때 검찰에 진술했다. 군용 점퍼 안에 권총을 숨겼을 지는 몰라도 겉으론 안 드러났다고 진술했는데, 신현확 총리가 12.12 군사반란을 법질서를 무시한 행위라며 신군부를 비판했던 점을 볼 때 일부러 백운택을 두둔했을 가능성은 없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백운택의 권총 위협설은 일종의 낭설이라는 주장.
어찌되었든 반란에 적극 가담한 덕분에 노태우가 수도경비사령관이 되면서 공석이 된 제9보병사단장[6]을 차지하며 소장으로 진급했다.
사단장 이후에는 정보사령관을 역임하고 소장 진급 2년 6개월만인 82년 6월 중장으로 진급한 뒤 야전 군단장 중 제일 요직인 제1군단장에 임명되었다. 1군단장 재직 중이던 1982년 11월 3일 향년 49세에 사망했다.
전두환의 직계[7]에 나름 요직들을 역임해서 대장 진급 가능성도 있었겠지만 이미 백운택이 소장 진급부터 선두보다 3년이나 늦어 반란 이후 광속 진급한후에도, 이미 대장으로 진급한 정호용을 제외해도 1년 앞서간 이상훈, 이기백을 따라잡기에는 조금 늦은 감이 있긴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1980년대에 이미 죽었기 때문에 훗날 반란군을 단죄한 역사바로세우기 당시 공소권이 없는 것으로 처리되었다. 하지만 하나회 중심 멤버라면 못해도 중장은 찍고 퇴임 후에도 장관, 국회의원, 공공기관장으로 오른 경우가 많았으니 오래 살았다면 승승장구했을 가능성이 높다. 1980년대에 안 죽었다면 아마 다른 쿠데타를 일으킨 일원들과 같이 단죄를 받았다가 사면받고 전두환이나 노태우, 박희도 등 12.12의 주도자들과 같이 살다가 죽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3. 여담
- 1살 위였던 전두환을 생도 시절부터 친구가 아닌 형님이라고 불렀다. 반란 이전에는 대등한 친구 관계였던 다른 하나회 11기 동기들과 달리 일찍부터 전두환 줄을 탄 것으로 보인다.
- 본인 주장에 의하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던 당시 전두환에게 시민군이 전라남도청을 점거중이던 광주에 보내달라고 자청했으나 전두환이 말렸다고 한다. 시민군과 만나 가슴을 열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해 잘될 경우 설득하고, 안될경우 자신이 죽어 진압군에 명분을 주겠다며 자신의 목숨을 걸려고 했다고 한다.
- 12.12 군사반란 다음날, 반란군이 보안사령부 앞에서 모여서 찍은 기념 사진에 백운택은 맨 뒷줄 구석에 유독 주변과 어색하게 찍혀 있는데 본인 부재중에 사진을 찍어서 본인 부분은 나중에 합성해달라고 해서 그렇다.[8]
4. 대중매체에서
5. 둘러보기
12.12 군사반란 반란군 가담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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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월 14일 12·12 군사반란 성공 기념사진 국군보안사령부 청사 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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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장 남웅종 · 중령 김호영 · 중령 신윤희 · 중령 최석립 · 대령 심재국 · 대령 허삼수 · 대령 김진영 · 대령 허화평 · 대령 이상연 · 대령 이차군 · 준장 백운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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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인물 배치 순서상 표기 ※ 단 우국일 준장은 군사반란 가담자로서 사진을 찍은 것이 아니라 국군보안사령부 참모장 자격으로 사진을 찍은 것이다.[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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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비 하나회였던 우국일 준장이 12.12 군사반란 당시 한 일은 연희동 요정에서 접대업무를 맡았을 뿐 접대를 제외한 모든 상황에서 그는 결백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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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망 장소와 같이 고향도 대구라는 설이 있다.
[2]
사실 어처구니 없는 일인게, 육사 단기 교육과정 선배들은 11기가 후방에서 편하게 교육받을 때 6.25 전쟁에서 피땀흘려가며 싸우고 죽어갔다. 거기다 원래는 육사 10기를 본래 정규과정 첫 기수로 모집했으나 여러 사정상 1년제로 바뀌었고, 그 다음 기수를 진짜 4년제 첫 기수로 뽑았으나 6.25 전쟁이 일어나서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전장으로 총알받이 신세로 끌려갔다. 다음 기수로 뽑힌 11기는 선배들이 죽어나갈 때 전쟁 중에 교육이나 받는 꿀빠는 신세였다. 싹수가 얼마나 노란지 알 수 있는 일. 그럼에도 육사 11기 이하는 선배들을 무시하고, 본인들에 대한 프라이드가 어마어마하게 높았고 이는
12.12 군사반란으로 이어진다. 여담으로 정규과정 첫 기수가 확실했으나 전쟁 발발로 교육도 받지 못하고 끌려나간 이른바 '생도 2기'는 육사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육사 기수로도 인정받지 못했다. 현재는 육군사관학교에서도 졸업 기수로 인정하고 있다.
[3]
전두환보다도
박정희 전속 부관 출신인 손영길이 본래 11기 최고 실세로 차기 육군참모총장 1순위였다. 그러나
윤필용 사건에 연루되어 날아가버린다. 손영길 낙마 배후에는
전두환이 기여했다는 것이 정설.
[4]
육사 11기 준장 1차 진급자 4명이 전원 하나회고 2차 진급자 4명 중 2명이 하나회였다. 1/2차 진급자 8명 중에 6명이 하나회란 소리.
[5]
2016년 말 해체된
제71보병사단의 모체.
[6]
9사단장은 전통적으로 요직이다. 군사 정권에서도
전방
메이커 사단이면서도 유사시 서울로 동원이 가능~노태우가 반란 때 전방 병력 빼돌리면서 본보기를 보여줌~하기 때문에 요직으로 분류되어 하나회가 거의 독점했다.
[7]
집권 이전에는 전두환과 대등한 친구 관계였던 다른 11기 하나회들과는 달리 백운택은 생도 시절부터 전두환을 '형님'이라 불렀다. 전두환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은 다른 하나회 동기들(대표적으로 라이벌 관계였던
김복동)은 전두환이 집권하자 의도적으로 참모총장으로 키운
정호용을 제외하고 실권을 누리는 일 없이 옷을 벗어야했다.
[8]
여담으로 사진에 같이 찍혀있는
박준병 20사단장도 합성으로 들어갔다. ~사진을 잘 보면 앞에 있는 이상규 2기갑여단장이 앉아있는 의자 뒷편에 박준병의 다리가 없다.~ 1996년 12.12 재판 당시 검찰 측은 기념 사진을 증거로 들어 박준병의 반란 가담을 주장했으나 이후 촬영 당시 현장에 없었으며 사진에는 합성으로 들어간 점, 그 외에 하나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의 병력 동원 요청은 거부했다는 점이 인정되어 반란죄에 한해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와는 별개로 박준병은 20사단장으로서 5.18 민주화운동을 짓밟은 전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