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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력공사 역대 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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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반남 박씨[1] |
출생 | 1915년 11월 1일 |
중화민국
길림성 연길도 연길현 (現 중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룡정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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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2000년 3월 27일 (향년 84세) |
서훈 |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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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광복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군인. 초대 한국전력공사 사장.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2. 생애
1915년 11월 1일 중국 간도 용정에서 독립운동가 박찬익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부친의 얼굴을 거의 보지 못하다가 1930년 상하이에서 부친을 만나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38년 부친의 뜻에 따라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가담해 항일 연극, 강연, 합창, 전단 배포 등을 하면서 반일 사상 고취 및 초모공작활동을 전개하였다. 1939년 11월 중국중앙군관학교 특별훈련반 교육과에 입교하였고, 1941년 12월에 졸업하였다.중국중앙군관학교 재학 중 광복군이 창설되자 광복군에 입대해 김학규 지대장의 부관으로 광복군 제3지대에서 근무하였다. 1942년 중국군 장교로 임관 후에도 광복군 활동에 참여하였고, 동년 4월 광복군 상위 신분으로 총사령부 서무과에 근무하였으며, 1943년 1월에는 임시정부 한인청년회 문화부장, 동년 8월 총사령부 서무과장으로 근무하였다. 1944년 6월에는 임시정부 재무부장 이시영으로부터 위임장을 받아 임시정부 재무부 이재과장으로 근무하였고, 1945년 3월 광복군 제3지대 제1구대장 겸 훈련총대장으로 활약했다.
1945년 8월 개봉지역에서 활동 중 광복을 맞이했으며, 만주로 가서 대한민국 주화대표단 동북 총판사처 외무주임으로 근무하며 자위대를 조직해 만주 교포들의 귀국 및 치안을 담당했다. 1948년 귀국 후 권준, 승영호, 이준식 전재덕과 육군사관학교 8기 특별2기를 졸업해 육군 소령으로 임관하였다. 임관 후 정훈국 지도과장으로 근무하였고, 6.25 전쟁 중 국방부 정훈국 차장이 되었다.
1951년 1월 육군 정훈감실이 국방부 정훈국에 분리되면서 육군 정훈감을 지냈다. 육군 정훈감 근무하면서 정훈감실 조직을 체계화하고, 정훈 교범을 확립하는 등 군의 정신강화 및 사기진작, 정서함양에 기여하였다. 1953년 준장으로 진급하였고, 1954년 2월 반공청년 및 포로들을 설득해 대한민국에 귀순시키고, 북한의 기만선전을 좌절시킨 공으로 표창을 받았으며, 동년 7월 육군본부 조달감에 임명되었다.[2] 그 후 제29보병사단 사단장, 육군 보도실장, 제6군단 부군단장 등을 역임하다 1961년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한전 지점개설장에서 테이프를 끊고 있는 박영준 사장(가운데), 박영준 사장 우측에 박태준소장. |
1961년 5.16 군사정변 당시 제9보병사단장이었다. 박정희는 9사단의 진압을 우려해 윤태일을 급히 부임시키려 했으나 5월 18일 9사단을 방문한 윤태일은 박영준이 5.16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알고 9사단장 교체는 없던 일이 되었다. 이후 한국전력공사가 발족하자 초대 사장에 임명되었다. 한전 사장 당시 인천, 군산, 부산 등에 화력발전소를 건설하고, 소양강댐을 착공하는 등 전력 확충에 힘썼으며 그 결과 1966년 무제한 송전을 하게되었다. 1964년 1월 예편하였고, 1968년 한전 사장을 퇴임하였다. 한전 사장 재임 시 대한농구협회회장, 여자실업농구연맹 이사장을 지냈다. 한전 사장 퇴임 직후 한국전기협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1974년 서울증권 사장에 취임했다.
예편 후 기업인으로 활동하는 한편 광복군동지회장, 백범김구기념사업회장, 독립유공자협회장을 지내며 독립유공자들의 업적을 재조명하는데 힘썼다. 독립유공자이자 창군 원로, 기업인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중 2000년 3월 27일 분당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3. 가족관계
아버지 박찬익은 독립운동가로 임시정부 외무차장 등을 지냈고, 좌우합작운동에 힘썼다. 아내 신순호는 신규식의 조카이며 광복군 복무 중인 1943년 결혼하였다. 장인 신건식은 신규식의 친동생이다.4. 여담
1967년 한전 사장 재직 중 맹장염 수술 경과가 좋지 않아 입원하였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전화를 걸어 제6대 대통령 선거 당일인 5월 3일에는 정전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였다. 자유당 정권 당시 선거일마다 개표장에 정전이 일어나 올빼미 개표란 악명을 써 부정투표 의혹이 있었던 점을 고려해 선거 당일 개표소에 정전으로 개표중단 소동이 일어나는 일을 방지하고자 한 것이다. 이에 와병 중임에도 불구하고 한전 각 지점에 연락해 선거 당일 정전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지시하였고, 당일 정전으로 개표 중단 소동이 벌어진 곳이 없었다 한다.5. 참고자료
독립유공자 공훈록삶과 추억 애국지사 박영준 장군. 중앙일보. 2000년 4월 1일 자.
경기일보. 2021년 7월 28일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