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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25 전쟁 이전
일제강점기인 1920년 평안남도 강서군(현 남포시) 덕흥리[1]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7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는 3남매를 데리고 평양으로 이주하여 생계를 꾸렸다. 약송소학교를 거쳐 평양사범학교에 진학하여 1939년 3월 졸업한 뒤 교직에 종사했다. 군인이 되고 싶었던 백선엽은 1941년 12월 만주국 중앙육군훈련처[2] 9기 군관 후보생으로 입교하여 1942년 보병 제28단에서 견습 사관을 거쳐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자무쓰 부대에서 신병훈련소 소대장으로 근무하다가 1943년 2월 간도특설대로 배치되어 광복 이전까지 소속되었다. 만주군 간도특설대는 1938년부터 당시 만주 지역에서 활약하던 사회주의 계열의 김일성, 강건, 김광협, 최용건 등이 가담한 동북항일연군[3] 및 팔로군 소속 게릴라 부대를 주로 상대하며 많은 전투를 치른 부대였다.이러한 백선엽의 간도특설대 경력을 아는 사람들은 많이 있었으나 본인이 이에 대해 언급한 것은 1983년 일본에서 출간된 『対ゲリラ戦―アメリカはなぜ負けたか (대 게릴라전 ― 미국은 왜 졌는가?)』(하라쇼보(原書房) 출간)[4]에서였다. 이 책은 제목이 말해주듯이 게릴라 토벌 전술에 대한 책으로서 백선엽은 광복 이전의 간도특설대 복무 경험과 6.25 전쟁 당시의 지리산 빨치산 토벌을 수행한 백(白)야전사령부를 이끈 경험을 중심으로 설명하였다.[5] 이 책 초반부의 한 장(章)인 「間島特設隊の秘密(간도특설대의 비밀)」 본문에서 백선엽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들이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주의주장이 다르다고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주의주장이야 어찌되었건 간에 민중을 위해 한시라도 빨리 평화로운 생활을 하도록 해주는 것이 칼을 쥐고 있는 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간도특설대에서는 대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런 기분을 가지고 토벌에 임하였다
白善燁 (1993). 『対ゲリラ戦―アメリカはなぜ負けたか』. 原書房. ( 경향신문에서 재인용)
白善燁 (1993). 『対ゲリラ戦―アメリカはなぜ負けたか』. 原書房. ( 경향신문에서 재인용)
이후 출간된 한국어 자서전인 『군과 나』(1990년), 『실록 지리산』(1992년) 등에서도 간략하게나마 간도특설대 경력을 언급했다. 2005~2009년 활동한 대한민국 정부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백선엽 장군에게 친일반족행위에 대한 질의서를 보냈고 이에 대해 백선엽 장군은 그러한 사실이 없다는 답변서를 보냈으나, 진상규명위원회 측에서는 일방적으로 일본에서 2000년 출간된 백선엽의 회고록 『若き将軍の朝鮮戦争(젊은 장군의 한국전쟁)』(소시샤(草思社) 출간)[6]에 나온 간도특설대 활동 내역을 토대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하였다.
(전략) 봉천의 군관학교를 졸업한 것은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했을 때였다. 나는 견습사관으로서 동부 만주의 寶淸(파오칭)에 주둔하고 있던 만주국군 보병 제28단(=연대)에서 근무하였다. (중략) 이어서 佳木斯(자무스)의 신병훈련소의 소대장으로 전임되었는데 (중략) 1943년 2월, 나는 만주 동부의 한반도에 접하는 간도성에 있던 간도특설대에 전임되었다. (중략)
간도성 연길현 명월진(明月鎭)에 설치되어 있던 간도특설대는 조래의 국경감시대를 모체로 하여 1938년 12월에 창설되었다. 당초에는 보병 1개 중대와 기관총, 박격포를 장비한 기박 1개 중대로 구성되어 있었고, 나중에 보병 2개 중대로 증강되어 대대 규모가 되었다. 부대장과 간부의 일부가 日系 軍官이고 나머지 전부는 한국계 군관이었는데, (중략) 간도성 일대는 게릴라[7]의 활동이 왕성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계속하여 치안작전을 수행하느라 바빴는데 간도특설대의 본래의 임무는 잠입, 파괴공작이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특수부대, 스페셜 포스로서 폭파, 소부대 행동, 잠입 등의 훈련이 자주 행해졌다.[8] 만주국군 중에서 총검대회, 검도, 사격 대회가 열리면 간도특설대는 항상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중략)
내가 간도특설대에 착임하였던 1943년 초두에는 게릴라의 활동은 거의 봉쇄되어 있었지만 그때까지는 대단했다고 한다. 관동군 독립수비대와 만주국군은 1939년 10월부터 41년 봄까지 여기 동부만주에서 대규모의 게릴라 토벌작전을 수행하였다. 최전성기의 관동군의 위신을 걸고 철저하게 시행된 작전이었다. 그중에서도 항상 대서특필할만한 전과를 올렸던 것은 간도특설대였다. (후략)
간도성 연길현 명월진(明月鎭)에 설치되어 있던 간도특설대는 조래의 국경감시대를 모체로 하여 1938년 12월에 창설되었다. 당초에는 보병 1개 중대와 기관총, 박격포를 장비한 기박 1개 중대로 구성되어 있었고, 나중에 보병 2개 중대로 증강되어 대대 규모가 되었다. 부대장과 간부의 일부가 日系 軍官이고 나머지 전부는 한국계 군관이었는데, (중략) 간도성 일대는 게릴라[7]의 활동이 왕성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계속하여 치안작전을 수행하느라 바빴는데 간도특설대의 본래의 임무는 잠입, 파괴공작이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특수부대, 스페셜 포스로서 폭파, 소부대 행동, 잠입 등의 훈련이 자주 행해졌다.[8] 만주국군 중에서 총검대회, 검도, 사격 대회가 열리면 간도특설대는 항상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중략)
내가 간도특설대에 착임하였던 1943년 초두에는 게릴라의 활동은 거의 봉쇄되어 있었지만 그때까지는 대단했다고 한다. 관동군 독립수비대와 만주국군은 1939년 10월부터 41년 봄까지 여기 동부만주에서 대규모의 게릴라 토벌작전을 수행하였다. 최전성기의 관동군의 위신을 걸고 철저하게 시행된 작전이었다. 그중에서도 항상 대서특필할만한 전과를 올렸던 것은 간도특설대였다. (후략)
이들 문헌에서 백선엽 본인은 간도특설대 경력은 인정했으나 [9] 자신은 이미 동북항일연군 세력이 거의 소멸된 뒤에 간도특설대에 합류하였고 결과적으로 상대한 적들도 후방 치안을 어지럽히던 팔로군 유격대 등 중국 공산당계 빨치산들이었고 조선독립군은 아니었다는 입장이다.
이후 만주군 중위를 지내다가 광복 직후 평양으로 돌아왔고 동향 사람이기도 한 조만식 선생의 비서로 일하다가 김일성이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가 된 후 1945년 12월 월남했는데 당시 조만식에게 함께 내려가자고 제안하기도 했다.[10] 월남 직후 군사영어학교[11]를 거쳐 국방경비대에 입대해 1946년 2월 부산 제5연대 A중대장을 맡았다. 국방경비대가 정식 한국군이 된 이후에는 대한민국 육군본부 정보국장으로 복무하였으며 이 때 벌어진 여순사건 당시 공산 게릴라 소탕과 주동자 색출 및 처벌의 책임자였다.
이후 1949년 7월에 대령 계급으로 전라남도 광주에 주둔한 제5사단 사단장에 임명된다. 이어 1950년 4월 22일에는 제1사단 사단장에 임명되어 개성 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참고로, 백선엽은 1950년 6월 25일 개전 당시에는 육군본부의 교육파견명령을 받고 최경록 부사단장에게 사단장 대리근무토록 조치하고 자신은 교육생 신분으로 경기도 시흥에 있었던 육군보병학교에서 고급 간부 훈련을 받는 중이었다.
2. 6.25 전쟁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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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당시의 백선엽 준장 |
2.1. 개전 초기 지연전
백선엽은 1950년 4월 22일부터 개성을 포함한 38선의 경비를 담당하는 제1사단장을 맡았다.[12] 그러나 백선엽은 부대 현황 및 담당 방어구역에 대한 충분한 파악이 이뤄지기 전인 6월 14일부터 시흥에 있는 육군보병학교에서 열린 3개월짜리 고급간부 훈련 과정에 입과하였다. 이 때문에 부대를 떠나 서울 자택에 체재중이었고, 전쟁 발발 전날인 6월 24일 토요일에는 서울 용산 육군회관에서 열린 장교클럽 준공 파티에 참석했다. 본인의 증언에 따르면, 월요일(26일)에 시험을 치러야 했기 때문에 파티에서 일찍 나왔고, 술도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24일에는 밤늦게까지 공부하다가 잠들었다고 말했다.[13]그러던 1950년 6월 25일 07시경[14]에 부관으로부터 연락을 받자 전쟁을 인지하고, 역시 서울에 있던 제1사단 고문단장 로크웰 중령을 만나[15] 곧바로 부대로 향했다. 수색의 사단 사령부에 도착했을 땐 이미 개성이 함락된 상황이었다. 개성에 있는 12연대와의 연락도 두절된 상태였다. 임진강 철교를 폭파하려고 했으나 그마저도 실패했다.
13연대 장병들이 전차를 상대로 육박공격을 감행하며 파평산에서 버티는 사이 임진강교를 건너온 적에 문산까지 밀린 11연대가 교도대의 증원을 받아 역습, 임진강교의 방어선 확보에 성공했지만 대한민국 육군본부로부터 들려온 소식은 38선 전체에서 전면적인 공격이 가해져 1사단을 제외한 모든 부대가 일제히 후퇴중이며, 1사단도 퇴각하지 않으면 곧 포위될 것이니 퇴각하라는 명령이었다. 이 시점에서 북한군의 주공이 지향된 포천-동두천 접근로가 완전히 돌파당한 상황이었으므로 1사단이 진지를 고수하는 것은 더이상 의미가 없었다.
이때 1사단을 제외한 모든 부대가 무너져 버리자 포위를 우려하여 참모총장에게 후퇴를 건의했지만 패닉 상태에 있었던 지휘부는 아무런 지시를 내리지 못했다. 설상가상 인도교가 폭파되자 퇴로가 끊긴 1사단은 그제서야 시흥을 집결지로 선정하고 후퇴를 시작하지만 배도 구하기 어려운지라 몇명의 부관과 함께 행주에서 뗏목을 만들어 겨우 도하가 가능했다고 한다. 기적적으로 많은 장병이 도하에 성공하여 시흥에서 부대의 재편이 가능했으나 본인은 이 일로 상부의 후퇴명령을 어기고 부대를 위험에 빠트렸다는 오해를 받아 많이 억울했다고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다.
회고록에 따르면 한강 도하는 분산철수였지 부대를 온전히 유지하며 퇴각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1사단은 효과적인 봉일천 방어로 전투손실도 가장 적었고 분산하여 도하한 병력도 상대적으로 빠르게 재집결에 성공했기 때문에 시흥지구사에서 유일하게 전쟁 발발 전 사단 기존 건제(11, 12, 13연대)를 유지하고 다시 싸우게 된 부대다. 1사단을 제외한 시흥지구사의 다른 사단들을 보면 전부 건제고 뭐고 낙오병이 집결하는 대로 묶어서 편성한 뒤죽박죽 부대라 앞에 "혼성"자를 붙이고 있다.
그 당시 그나마 사단급 편제를 유지하고 멀쩡히 퇴각할 수 있던 부대는 1사단과 춘천의 6사단, 그리고 강릉의 8사단등 38선에 투입된 총 8개 사단[16] 중 3개 사단뿐이었다. 특히 서부전선에서는 1사단이 유일하다.
처음 이틀 동안 긴장과 긴박한 상황으로 인해 발에 못이 박히고도 다음 날에나 전투화를 벗었을 지경이었다고 전해지며, 1사단이 상태가 그나마 양호한 부대였으므로 학도병과 신병들을 계속 보충받아 한강 방어선 전투를 시작해서 수많은 방어작전에 주력으로 투입된다. 그러나 전황이 계속 악화되어 결국 낙동강까지 후퇴하며, 이 와중에 병사들 속에 섞여 퇴각하던 중 북한군의 추격으로 몇 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후퇴와 재편 과정에서 7월에는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2.2. 다부동 전투
전쟁 발발 1개월만에 북한군은 빠르게 남하하여 불과 5주만인 1950년 8월 1일 낙동강 유역까지 도달했다. 이에 미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은 마산~ 왜관~ 포항을 방어선으로 설정하고 죽는 한이 있어도 무조건 방어하라라고 미8군에 명했다. 이것이 ' 낙동강 방어선'이다. 낙동강 전선은 왜관/칠곡을 기준으로 북쪽 방어선은 국군 1사단, 6사단, 7사단, 8사단, 수도사단, 3사단이 방어를 맡았고, 칠곡 이남 서쪽 방어선은 미8군 1기병사단, 24사단, 2사단, 25사단, 해병대 1대대가 방어를 맡았다.피아(彼我)공방의 포화가 한달 내리 울부짖던 곳…/일찌기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 움직이던 생령들이 이제/싸늘한 가을바람에 오히려 간 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죽은 자도 산 자도 다 함께 안주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분다.’(조지훈 「다부원에서」)
낙동강 방어선 |
백선엽의 국군 1사단은 낙동강 전선 중에서 칠곡을 중심으로 한 전선의 방어를 담당했는데, 북쪽 방어선과 서쪽 방어선이 만나는 모서리에 있고 대구를 방어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낙동강 전선에서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 당시 대구에는 대한민국 정부, 대한민국 육군본부, 미8군 사령부가 위치해 있었다. 북한군은 대구를 점령을 1차 목표로 하여 국군 1사단이 방어하던 칠곡 일대를 주공(主攻)으로 삼았다. 이를 위해 북한군은 선봉부대인 인민군 제3사단을 비롯해 제13사단, 제15사단을 동원해 칠곡 전선을 방어하는 국군1사단을 집요하게 맹공격했다. 1사단은 북한군 최정예 3개 사단의 총공세를 방어하기 위해 죽기살기로 총력 방어전을 펼쳤다. 칠곡 인근 낙동강 전선에서 8월 한달에 걸쳐 벌어진 일련의 전투를 다부동 전투라고 하며, 낙동강 방어선 전투 중에서 가장 치열했고, 나아가 6.25전쟁 전체에서도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백선엽의 국군 1사단이 다부동 전투에서 북한군을 저지하는데 실패했더라면 낙동강 방어선이 뚫리고 대구를 내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백선엽이 이끄는 국군 1사단은 턱없이 부족한 병력과 무기에도 불구하고 미8군의 도움을 받아 큰 희생을 감수하면서 이곳을 지켜내는데 성공했다.
8월 3일 국군 1사단이 낙동강을 도하하자마자 해평리에서의 전투를 시작으로 북한군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어졌다. 북한군이 미 공군을 피하기 위해 주로 밤에 공격해 왔기 때문에 밤에 더 많은 전투가 벌어졌다.
8월 8일~9일 북한군의 T-34 전차 15기가 낙동강을 도하하여 인근의 고지를 잇달아 함락하여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미 공군의 도움과 대전차 특공조의 활약으로 북한군의 전차를 잇달아 파괴했다. 결국 북한군은 전차의 대부분을 상실했다.
전차를 상실한 북한군은 전술을 바꾸어 1사단의 우측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에 육군본부는 1사단에게 다부동으로 이동하여 최후 방어선인 'Y'선을 사수하라고 명령했다. 왜관 동북쪽에 있는 다부동은 북한군 지역에서 대구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하지만 1사단이 다부동에 도착했을 때 인근 전략적 유충지인 수함산과 유학산이 이미 북한군에게 점령당한 상태였다. 백선엽은 낙동강 전선의 지세를 이용해 방어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전략적 요충지인 유학산과 수함산을 탈환해야만 한다고 판단했고, 고지 탈환을 위한 치열한 전투가 일어났다.
김일성이 광복절까지 대한민국 정부가 위치해 있는 대구를 점령하라고 했기 때문에 광복절이 다가올수록 북한군의 공세가 더욱 매서워졌고 전투는 더욱 치열해졌다. 광복절 직전에 북한 최고사령부에서 새로 보급한 전차 21대가 모두 다부동 전선에 배정되었다.
광복절 당일인 8월 15일 북한군은 칠곡(다부동)에 총공세를 가했다. 이에 칠곡을 중심으로 낙동강 전선에서 격전이 펼쳐졌다. 그러나 1사단 좌익의 미군 1기병사단이 방어하던 왜관 북쪽 2km의 303고지가 피탈되며 왜관이 적진에 떨어지고 말았다. 또 1사단 우익의 6사단도 4km 후퇴하며 1사단 홀로 북한군 3개 사단과 맞서 싸우며 전선을 사수하고 있는 절박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1사단마저 무너지면 그길로 대구는 북한군의 손에 떨어질 운명에 처했다.
북한군이 다부동에 총공세를 펼치자 백선엽으로부터 지원 요청을 받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8월 16일 오전 11시경 오키나와 미 공군기지에서 B-29를 98대나 출격시켜 왜관에 융단폭격을 가했다. 하지만 미군의 폭격이 끝나자 북한군의 총공세는 이어졌다.
1사단 홀로 북한군 3개 사단의 총공세를 저지하고 있는 중과부적의 위기 상황이 이어졌고 백선엽은 증원군을 요청했다. 하지만 당시 국군과 미군 모두 단 한 명의 예비 병력도 없이 전병력이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부족한 병력으로 고심하던 워커 미8군 사령관은 존 마이켈리스 중령이 이끄는 미 제25사단 제27연대를 8월 18일 다부동에 증원군으로 투입하였다. 미 27연대는 1개 전차중대와 2개 포대를 포함하고 있었다. 마이켈리스 중령과 미 27연대는 이미 낙동강 전선 서쪽 방어선에서 뛰어난 기동전을 펼친 바 있었다. 전차가 하나도 없이 말그대로 맨몸으로 싸우던 국군 1사단은 전차 등 중화기를 보유한 미 27연대의 합류로 이전보다 효과적인 전술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16일 미군의 폭격 직후 잠시 주춤하던 것 같던 북한군은 이후 오히려 총공세를 강화하여 8월 18일 오전경 대구 북쪽 20km지점인 가산까지 침투했다. 북한군은 대구시를 향해 직접 포격을 가했다. 북한군의 포탄이 대구역 등 대구 시내 한복판에 떨어졌다. 대구 시내에 수발의 포탄이 떨어지자 대피령이 내려지고 정부가 대구에서 부산으로 이동했다. 대구 시민들은 충격과 혼란에 빠졌으나 조병옥 내무부 장관이 직접 경찰과 함께 가두에 나서 대구 민심을 수습하여 질서가 회복되었다.
8월 18일 북한군이 가산까지 진출해 대구시에 포격을 가하자 국군 1사단은 최후의 결전을 각오하고 전날 도착한 미 27연대와 함께 적진돌파작전을 감행했다. 산악 지형 속에서도 4km를 반격했다. 이날 밤에도 전차, 자주포를 동원한 북한군의 야간 공격이 감행되었으나 미 27연대가 가지고 온 로켓포, 전차포, 야포 등으로 북한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며 이전보다 효과적인 방어전을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북한군은 이후에도 거의 매일 거듭 야간 공격을 되풀이했다. 주야간을 가리지 않고 격전이 펼쳐지며 엄청난 사상자가 속출했으며 칠곡 일대의 고지들을 뺏고 빼앗기는 일진일퇴의 혈전이 계속되었다. 특히 북한군은 매일 밤마다 전차, 자주포를 동원한 야습을 감행했다.
격전이 계속되며 다부동의 전황은 위급해졌다. 8월 19일 종심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미 23연대가 다부동 후방인 두모동에 합류했고 대한민국 육군본부에서도 같은날 국군 8사단 제10연대를 다부동에 증원군으로 투입시켰다.
8월 20일 미 27연대와 국군 11연대는 Y선을 확보하기 위해 반격에 나섰다. 그러나 국군 11연대 2대대[17]가 북한군의 반격으로 후퇴하게 되었고, 이에 미 27연대가 퇴로 확보를 위해 자신들도 철수하겠다고 통보하자 백선엽은 직접 현장으로 달려가 병력을 수습하고 2대대 선두에 서서 돌격, 488고지를 탈환했다.
상황이 너무도 절박했기 때문에 백선엽은 이 전투에서 권총을 들고 병사들과 선봉에 서서 적진으로 돌격했다. 이 장면은 전사상의 수많은 사례가 입증하듯 급박한 상황에서 지휘관의 진두지휘가 위기 타개에 얼마나 효과적일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지휘관이 시공간적으로 결정적인 위치에서 두 눈으로 직접 전황을 파악함으로써 빠르고 정확한 결심이 가능하며, 예하 병력 또한 지휘관의 솔선수범에 사기가 올라 극한 상황을 극복하는 정신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진두지휘의 중요한 강점이 바로 다부동 전투의 이 국면에서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돌격 직전 병사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모두들 앉아 내 말을 들어라. 그동안 잘 싸워주어 고맙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더 후퇴할 장소가 없다. 더 밀리면 곧 망국이다. 우리가 더 갈 곳은 바다밖에 없다. 저 미군을 보라. 미군은 우리를 믿고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후퇴하다니 무슨 꼴이냐. 대한 남아로서 다시 싸우자.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18]
8월 20일 밤 이후 북한군의 전력 소모가 커졌는지 북한군의 공세가 약화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이 시점에서 더는 피해를 견디지 못한 북한군은 1사단에 공격을 퍼붓던 북한군 15사단을 대구 북방에서 영천의 8사단 정면으로 전환투입한다. 다부동 정면에 드리웠던 암운이 드디어 걷히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8월 21일 밤 북한은 다시 한번 대공세를 감행했다. 이날 천평 계곡에서는 6.25 전쟁 사상 최초의 야간 전차전이 벌어졌다. 계곡 회랑을 화려하게 오가는 전차 예광탄 꼬리가 마치 볼링장 같다 해서 볼링 앨리 전투(Battle of the Bowling Alley)로 불리는 이 전투에서 국군 1사단과 미 27연대전투단은 모든 자원을 투입하여 5시간 동안 총력전을 펼친 끝에 결국 북한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이날의 승리를 기점으로 전세가 아군으로 기울게 되었다. 북한군은 이날 전차 9대를 잃고 1300여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퇴했다.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한 북한군은 이후 수세에 몰리게 된다.
8월 23일 귀순한 북한군 장교로부터 입수한 지도를 바탕으로 미군이 적진에 폭격을 가해 북한군에 큰 타격을 주었다. 23일 1사단은 다부동 전선 일대의 전세를 완전히 장악했다.
8월 24일 1사단은 다부동 인근의 대부분의 고지를 점령했다. 24일 이후 북한군은 더이상 다부동을 공격하지 않았고, 다부동 전선의 군대를 돌려 좌우로 나누어 이동시켰다.
다부동 전투에서 백선엽이 이끄는 국군 제1사단은 절대적으로 열세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25일간에 걸친 북한군 주력 3개 사단[19]의 집요한 공세를 저지하고 낙동강 전선과 대구를 사수하는데 성공했다. 다부동 전투에서 장교 56명을 포함, 2300명의 전사자를 낸 것으로 집계되었다. 여기에 포함된 전사자 외에 군번도 없이 긴급하게 투입된 수많은 학도병들, 그리고 나이가 많아 입영대신 노무자로 편성되어 전선에서 탄약보급과 식량보급을 담당한 노무자들의 희생도 많았다.
미군은 이전까지 한국군을 북한군만 보면 도망가기에 바쁜 군대라 여기며 한국군을 극도로 불신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다부동 전투에서 1사단이 절대 열세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한달 동안 막대한 희생을 감내하면서 끝내 다부동 전선을 지켜내는 모습을 보고 한국군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게 되었다고 한다.
8월공세를 저지한 후, 8월 28일 1사단은 부산에 상륙한 미 1기병사단에 다부동을 이양하고 북한군이 이동한 곳으로 따라 팔공산으로 이동을 명받았다. 백선엽은 “저 위에 있는 시체들을 모두 파묻기 전엔 지역을 인수하지 않겠다”고 말하였으나 결국 명령에 따라 다부동을 미군에게 이양하고 팔공산으로 이동했다. 팔공산으로 이동한 1사단은 전력재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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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상륙 작전 직후, 대구에서의 백선엽 |
그러나 9월 미 1기병사단이 북한군의 공격에 주저항선이 붕괴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이어 인천 상륙 작전이 실시되어 북한군에 막대한 혼란이 벌어지자, 반격부대로서 다시 1사단을 지휘해 다부동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2.3. 평양 탈환작전
6.25 전쟁 당시 북한의 백선엽에 반대하는 내용을 담은 프로파간다 삐라다. "8.15전 왜놈의 헌병으로 동포들을 학살하던 백선엽이는 8.15후 지금은 미국놈의 개가 되여 당신들을 양키놈의 대포밥으로 모라세우고 있다."라고 적혀있다. |
그러나 다른 미군 장군이 '미군은 차량이 많고 기계화되어 이동속도가 빠른데, 보병뿐인 한국군이 어떻게 미군의 전진속도보다 빨리 갈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자 '잠을 자지 않고 야간에도 행군해가며 이동속도를 늘리겠다'라며 굳은 의지를 보인다. 그리하여 미군 전차대대를 배속받게 되며, 미 육군 부대가 다른 나라 지휘관의 지휘를 받은 것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의 영국지휘관에게 맡겨진 몇몇 사례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 게다가 약속대로, 실제 1사단 장병들은 야간에도 잠을 자지 않으며 맹행군을 계속해 차량으로 이동하는 미군들을 제치고 전군의 선두에 서게 된다.
나중에는 미군 전차대대 장교들이 '우리까지 밤에 잠도 안 자고 싸울 수는 없다. 전차는 야간에 사고를 일으킬 수 있고 적의 공격에도 취약하다'라고 하자 전차대대에는 숙면을 취하게 하며 '이들은 우리를 돕기 위해 고생을 하고 있으니, 충분히 휴식을 취하게 협조하라'고 하며 배려해줬으며, 실제로 이들은 그 보답으로 주간에 속도를 올려 1사단의 최선두를 따라잡았다. 이때 당시 장교들이 한 말은 정확하게 "전차는 낮에는 호랑이지만 밤에는 고양이에 불과하다"라고 말한 것으로 기막힌 대답이라서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고 밝힌 바가 있다.
10월 19일 평양 점령에 성공했다. 이는 전쟁 당시 최초의 평양 점령이었는데, 참고로 1사단의 평양 입성 때 이승만 대통령의 밀명으로 7사단 8연대와 3연대가 1사단의 전투지경선을 침범해 들어왔고, 이 중 8연대 9중대가 1사단보다 하루 먼저 김일성 종합대학에 태극기를 계양했는데 전투 지경선을 멋대로 침범한 것인데다 명령을 내린 이승만 대통령도 1사단만 치켜세웠기에 정식 인정되지 않고 있다.
본인이 평양 출신이었던 덕분에 평양 점령 시 여러 에피소드를 남기기도 했다. 사단 통신참모가 북한군의 통신선을 발견해 도청을 하다 통신이 연결되어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이 통신참모는 평양 사투리를 못해 사단장인 백선엽에게 직접 해주십사 하고 요청을 했다. 백선엽은 유창한 평양 사투리로 현재 적이 유엔군의 전력에 눌려 사기가 바닥을 치고 후퇴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 외에도 미군이 대동강을 도하하느라 진격을 못하고 있던 틈에 수심이 얕은 곳으로 병력을 도하시켜 가장 먼저 평양 중심을 점령하게 되었다. 이때 1사단의 고문관이 그런 것까지 어떻게 아느냐고 신기해 하자 "나는 어렸을 때 평양에서 수영을 배웠다. 물 위는 물론이고 물 아래까지 다 알고 있다."고 대답한 적이 있다.
계속해서 북진을 계속해 압록강변에 거의 다다랐지만, 10월 말부터는 중국군의 반격에 휘말리면서 12월 4일에는 통탄스럽게도 애써 점령했던 평양까지 철수하고, 38선 이남으로까지 밀려가게 된다.
2.4. 중공군 1951년 5월 공세 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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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한강 도하를 준비하는 대한민국 국군의 수뇌부[20] |
다부동 전투 및 평양 점령에 비해 덜 알려져있지만, 1951년 중공군의 5월 공세 중 동부전선의 붕괴를 막아내는 데 공헌한 것도 중요한 전공이었다. 백선엽은 1.4 후퇴 기간 중공군의 맹공세를 맞아서도 그럭저럭 제1사단의 건제를 유지한 채 성공리에 퇴각작전을 마무리했으며, 이어지는 반격작전에서도 미군 제1군단 예하로 서울 탈환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러던 중 3월 28일에 제1군단 군단장이던 김백일 소장이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백선엽이 후임으로 발령받아 4월부터 제1군단 군단장 직을 수행하게 된다.
당시 제1군단은 전선의 최동단(우익)인 설악산부터 동해안 대포리까지의 구간을 담당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 좌익을 유재흥 소장의 제3군단이 맡고 있었던 것. 야심찬 1951년 5월 공세에 나선 공산군은 서부전선을 노린 4월 공세에서 미군의 막강한 화력에 막혀 전혀 돌파구를 뚫지 못하게 되자, 5월에는 방향을 바꾸어 이곳 동부전선에 배치된 허약한 한국군 사단들을 노리게 된다. 이 공세에서 동부전선을 담당한 중공군 제9병단은 예하 중공군 3개 야전군(12·20·27군)을 주력으로 한국군 제3군단 및 미군 제10군단 우익에 위치한 한국군 4개 사단(3·5·7·9사단)을 통타할 계획이었다.
제1군단 전선은 주공축선은 아니었으나, 북한군 3개 군단(2·3·5군단)이 중요한 조공을 펴기로 했다. 이들 북한군 군단들이 수도사단 전선을 돌파하면, 속사리~하진부리로 진격하여 한국군 제3군단의 퇴로를 완전히 차단, 격멸하고 제1군단의 증원을 봉쇄할 예정이었다.
1951년 5월 16일 개시된 중공군의 공세는 이 의도대로 착착 맞아떨어졌다. 중공군 제20군은 한국군 제7사단 전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했고, 특히 중공군 제60사단은 전선의 틈을 헤집고 후방 깊숙히 침투하여 만 하루 만에 제3군단의 후방 교통로 상의 요지인 오마치 고개에 도달한다. 이로 인해 한국군 제3군단은 완전히 패닉에 빠져 변변히 싸우지도 못한 채 군단 전체가 하루만에 붕괴되는데, 이것이 한국군 최악의 패배로 회자되는 현리 전투였다. 이 현리 전투에서 붕괴된 2개 사단 병력은 남쪽 오마치 고개 방향으로의 퇴각을 포기하고, 대부분의 장비를 유기한 채 동쪽 방태산 방향으로 무질서하게 퇴각했다. 여기서 공산군의 원래 계획대로 북한군 5군단과 2군단까지 전선을 돌파하여 동쪽 퇴로까지 차단했으면 한국군의 대병력이 꼼짝없이 전멸을 맞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백선엽의 제1군단은 원통 일대에서 시작된 북한군 제5군단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저지하였다. 초반에 다소 밀리기는 했으나, 수도사단이 한계령에서 북한군의 남진을 완강히 막아내었다. 이 사이에 한국군 제3군단은 조직이 와해되었음에도 병력 상당수가 어떻게든 방태산을 넘어 퇴각 행렬을 이어갔다. 중공군 병력 일부가 계속 제3군단을 추격해 창촌에서 오대산, 계방산을 거쳐 하진부리로 몰아 붙였지만, 북한군 조공이 적시에 따라붙지 못하는 바람에 병력이 부족해서 결정타를 날리지는 못했다. 5월 20일까지 제3군단 소속 제3사단이 3,621명(34%), 제9사단이 4,582명(40%)의 전력을 수습하면서 지연전을 펼 수 있었던 것은 제1군단의 방어전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이 사이 백선엽은 군단 예비인 제11사단 제20연대를 긴급히 대관령에 투입하여, 중공군이 이를 장악하기 전에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대관령이 함락될 경우, 제1군단 전체의 보급로가 끊기는 것은 물론 전술지원을 톡톡히 해주고 있던 강릉비행장의 미 공군 항공전력도 제 기능을 못하는 위기에 처할 수 있었다. 한계령에서 대관령까지는 직선거리로만 55㎞에 이르는데, 제1군단은 이렇게 광범위한 좌측면이 노출되고도 일단 영동 지방으로의 관문을 틀어막아 반격의 기회를 만드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후 좁은 영서 산악지역에서 충분한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한 중공군은 보급난과 증원병력 부족으로 공세의 한계를 맞게 된다.
그러자 미군 제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반격의 기회를 포착하고 제8군 예비대인 미군 제3보병사단을 긴급히 횡성군을 거쳐 장평, 속사로 투입한다. 그리고 5월 20일, 하진부리에서 백선엽 등 이 지구 야전 지휘관들을 소집해 미군 제3보병사단과 한국군 제1군단이 중심이 되어 반격할 것을 명령한다. 이 사이에도 중공군은 대관령 방향으로 계속 돌파를 시도하고 있어 제20연대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렵게 되자, 백선엽은 예하 수도사단에게 제1연대를 증파할 것을 명령한다. 그러나 당시 사단장이던 송요찬 준장이 이를 거부하자, 5월 21일에 사단 사령부로 달려가 권총을 빼들고 직접 사단장을 위협해 명령을 관철시키기도 했다. 그 사이 미군 제3보병사단이 5월 22일에 운두령을 탈환하며 남하한 중공군의 보급로를 끊고, 제1연대와 제20연대 병력이 횡계~대관령 일대에서 역공을 펼치자 중공군의 춘계 공세는 완전히 종말을 맞게 되었다.
여기서 보듯 유재흥의 제3군단이 거듭된 졸전으로 밴 플리트로부터 군단 해체라는 초유의 치욕을 당한데 반해, 백선엽의 제1군단이 그나마 선전함으로써 한국군의 군단급 사령부가 존속할 수 있었다. 또한 제1군단이 동해안 지역의 방어선을 견고하게 유지한 탓에 이어진 반격전에서 한국군은 동부전선을 38도선 북쪽으로 한참 밀어올려 오늘날과 같이 진부령 이북 화진포까지 확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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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 대표단과 나란히 서 있는 백선엽 장군[21] |
2.5. 빨치산 토벌전
1950년 9월에 낙동강 전선에서 고착되어 전투를 치르던 조선인민군 병력들은 기습적인 인천 상륙 작전으로 인해 핵심 교통로인 경부축선이 차단당하면서 퇴로를 잃게 된다. 다수 병력은 험준한 중부 산악지대를 따라 북으로 이동했지만, 퇴각 기회를 놓친 병력과 남로당 남부 6개(충남·북, 경남·북, 전남·북) 도당의 공산주의자들은 잔류하여 빨치산 활동을 벌이도록 조치된다. 특히 마오쩌둥은 국공내전의 경험을 살려 김일성에게 남한 후방에 4~5만 명의 조선인민군이 남아 후방 교란 임무를 계속 수행하면, 향후 중공군이 가세한 반격시 큰 역할을 해낼 것이라고 적극적으로 이를 권고한다. 이에 따라 김일성은 남한에 조직된 당 조직들이 중심이 되어 지역별로 유격대를 조직해 활동하라고 명령한다. 이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백운산, 덕유산, 회문산, 불갑산, 백아산, 화학산 등 남부지역 각지의 험준한 산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을 시작했다.이들이 후방 치안을 교란하며 큰 위협이 되자, 육군본부는 '작전명령 제216호'를 통해 빨치산 토벌을 전담할 제3군단을 창설하고, 기존의 유격사령부(6개 유격대대로 구성), 제2사단, 제5사단과, 새로 편성 중인 제9사단, 제11사단을 배속시켰다. 1950년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는 최덕신 준장의 제11사단이 호남지방에서 대대적인 토벌전을 벌였고, 최영희 준장의 제8사단은 1951년 2월 횡성지구 전투 이후 후방으로 이동해, 1951년 4월 제11사단을 교대해 5월까지 토벌작전을 수행하였다. 또한 제2사단은 1951년 2~4월에 걸쳐 태백산 일대에 고립된 조선인민군 패잔병 중심의 빨치산 토벌작전을 펼쳤다.
이러한 1951년 상반기의 작전을 통해 후방 빨치산 세력이 크게 위축되기는 하였으나, 문제점도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무자비한 토벌작전 과정에서 무고한 희생이 많았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1951년 2월 발생한 거창 양민 학살사건이다. 이는 제11사단장 최덕신 준장이 과거 국민혁명군 시절 중국 공산당 유격대를 상대한 경험으로 무자비한 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을 고집한 영향도 컸다. 여기서 살아남은 빨치산 세력들은 지리산 중심으로 재결집해 인근의 운봉, 곡성, 하동 및 전라선 철도를 교란했다.
결국 미8군 사령관 밴 플리트는 전방이 소강상태인 틈을 이용해 전방 야전사단 일부를 빼내 겨울 3개월 내에 후방을 완전히 정리할 계획을 세운다. 이는 산악지역에 은거한 빨치산 특성상 숲이 우거지는 봄~가을에는 색출이 어려운데 반해, 겨울에는 잎이 다 떨어지고 하얀 눈밭이 되므로 숨을 곳도 줄어들고 항공정찰로 수색도 용이했기 때문이다. 특히 밴 플리트 자신부터 그리스 내전에 미군 군사고문단장으로 투입되어 공산 게릴라에 대한 토벌 경험이 풍부했기 때문에 이러한 구상을 적극 밀어붙였다.
미8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는 백선엽이 제1군단 지휘에서 보여준 능력과 만주군에서 간도특설대원으로 복무하며 중국 공산당 팔로군 게릴라들을 토벌한 경험이 있다는 점을 높이 사서, 백선엽을 사령관으로 한 Task Force Paik, 즉 백(白)야전전투사령부를 창설해 이 대 토벌작전을 지휘할 것을 지시한다. 작전명은 '쥐잡기 작전(Operation Rat Killer)'이었다. 백야전사에는 2개 야전사단( 수도사단과 제8사단), 서남지구전투사령부[23] 및 예하부대, 전투경찰부대를 배속시켰다. 백야전사는 2개 주력 야전사단 소속 6개 연대를 기동타격대로 운용하고, 서남지구전투사 소속 경비부대와 전투경찰부대를 저지부대 및 거점 수비대로 활용해 12월 2일부터 토벌작전에 돌입했다.
백야전사의 토벌전 제1기(1951년 12월 2~14일)는 지리산 포위전으로 전개되었다. 수도사단은 지리산 남부에, 제8사단은 지리산 북부에 배치되어 포위망을 좁혀간 것이다. 12월 6일까지 양 사단은 지리산 능선을 향해 올라가며 포위망을 좁혀 조우하고, 다시 향후 1주일간 하산하면서 중간에 고립된 빨치산을 색출, 섬멸하였다.
제2기(1951년 12월 16일 ~ 1952년 1월 4일)에서는 지리산 외부의 거점까지 대상을 넓혀 알려진 거점들에 대한 정밀 타격을 개시했다. 이 기간에는 각 연대들이 목표를 나누어 전주~무주 사이의 운장산, 함양 북쪽의 장안산, 정읍~순창 사이의 내장산, 회문산, 장군산, 순천 부근의 백운산 등 곳곳의 빨치산을 격멸하였다. 서남지구전투사는 계속 지리산에 남아 미처 소탕하지 못한 빨치산을 계속 소탕하였다.
이후 1월 말까지는 제1, 2기 작전구역을 재점검하며 제3기 작전을 펼쳐 잔적들을 더 철저하게 색출해냈다. 이때 지리산 대성골에 있었던 전투가 작전의 분기점이 되었다. 제1, 2기 작전에서 예봉을 피한 지리산 빨치산들은 1월 혹한기에 접어들어 더 이상의 공격은 없을 것이라 방심했으나, 수도사단이 다시 사단 전력을 동원해 남부능선에서 벽소령 및 세석평전 쪽으로 포위망을 짜고 밀어붙이자 대성골 방향으로 포위망 돌파를 시도했다. 17일 밤 ~ 18일에 걸쳐 진행된 이 포위망 돌파전에서 빨치산 약 300명이 사살되고, 251명이 포로가 되는 등 지리산 빨치산 전력의 약 반수가 궤멸되었다. 이를 계기로 남부군 전력은 크게 손상되어 후방부대 및 전투경찰부대 만으로 상대가 가능한 수준으로 위축되었다.
백선엽은 이렇게 약 2개월 동안 예하 부대들을 효과적으로 운용하여 단기간에 빨치산 세력에게 치명타를 입혔다. 특히 그는 '투항자에게는 죄를 묻지 않고 절대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라'는 사면장에 자신의 사인을 넣어 비행기에서 살포한 덕에 수많은 유격대원들이 사면장을 들고 항복하게 만든다. 이는 제11사단장 최덕신과는 확연히 다른 접근 방식이었다. 최덕신은 견벽청야작전을 실행하며 "100명의 공비를 사살했다고 할 것 같으면, 그중에 상당한 부분이 양민일 것을 각오해야 한다"고 말하며 민간인의 희생을 불가피한 것으로 간주했다. 백선엽은 이로 인해 남한 곳곳에서 군경에 대한 민심이 악화되던 상황에서 토벌전에 돌입해야 했다. 오죽하면 김성수 부통령이 백선엽에게 "주민들 생활이 도탄에 빠져 있는데 군경의 민폐가 심한 현실을 직시하고 부디 국민을 애호하여 민간에 폐를 끼치지 말고 치안을 확보해 국민이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해"달라고 서한을 보냈을 정도였다. 백선엽은 이를 감안하여 토벌작전 중에 적성지역에서 발견되는 이들은 가급적 생포하여 일단 포로수용소로 보내고, 여기서 실제 빨치산과 양민을 구분해내도록 했다. 이 방식으로도 토벌대의 일부 잔혹 행위와 양민 학살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불필요한 희생을 많이 줄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백선엽이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의 희생을 최소화하려 했던 노력은 전쟁 고아의 처리 문제에서도 엿보인다. 당시 토벌 과정에서는 부모가 빨치산이거나 빨치산으로 몰려 희생된 많은 고아들이 발생했다. 백선엽은 참모장 김점곤 대령을 시켜 광주 송정리에 있던 적산가옥을 수배하고 이들 전쟁 고아 약 300여 명을 보육할 '백선[24] 육아원(설립 당시에는 고아원)'을 설립했다.[25] 그리고 국내외의 기부[26]를 주선하고 사비를 보태[27] 운영을 지원하였다. 이곳에서 무사히 자란 전쟁 고아들은 백선엽을 "대장 아버지"라고 부르며 은인으로 여긴다고 한다.
이처럼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에 국민혁명군 및 광복군 활동을 한 최덕신은 양민 학살의 오명을 남겼고, 오히려 간도특설대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꼽히는 백선엽이 그나마 피해를 줄이며 성공적인 토벌작전을 전개한 것도 아이러니이다.[28] 공과가 뒤섞인 한국 현대사 인물의 평가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다시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백선엽은 이 과정에서의 전과를 사살 5,009명, 생포 3,968명, 귀순 45명이라고 회고했다. 반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는 사살 6,606명, 포로 7,115명으로 집계했다. # 여러 기록간에 숫자상으로 큰 차이가 나는 것은 작전 기간 및 참가 부대 포함 범위와, 후에 양민으로 판정된 포로들의 포함 여부 등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전공으로 백선엽은 1952년 1월 12일자로 중장으로 진급한다. 이후 백야전전투사령부는 토벌작전을 수도사단에게 인계하고, 다시 전방으로 이동하여 제2군단 재창설 작업을 맡게 된다.
2.6. 전쟁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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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 육군 대장 |
6.25 전쟁 기간 동안 백선엽은 상기한 수많은 활약과 더불어 전쟁 중 부대 궤멸이나 대패, 총퇴각 같은 큰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고, 빨치산 토벌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는 등 큰 전공을 쌓으며 미군 장교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 덕분에 미군의 한국군에 대한 평가를 높이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이를 통해 미군은 한국군을 냉전 구도에서 공산 블럭의 남하를 저지하는 유용한 동맹군으로서 인정하게 된다.
이 사실이 상당히 중요한 것은 6.25 전쟁 초~중반까지만 해도 미군은 한국군을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기 때문이다. 미군은 한국군을 정규군이라기 보다는 조잡한 민병대 정도로 폄하했고, 장비를 주면 잃어버려서 적이 오히려 노획한 장비로 중무장을 할거라며 한국군에 대한 지원에 인색한 장군들도 많았다.[29] 전쟁 후반으로 가며 많은 희생 끝에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키게 되고, 한국군은 제한적이나마 자립의 기반을 닦게 된 것이다.
3. 전후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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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참모총장 재직 시절 |
이승만 대통령은 노회한 정치가답게 전쟁 경험을 통해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자 강력한 무력을 갖춘 세력으로 떠오른 육군 장교단을 내부 세력들이 상호 견제하게 만들어 쿠데타 가능성을 봉쇄했다. 그 핵심 세력이 ① 백선엽을 필두로 한 평안도계, ② 정일권을 필두로 한 함경도계[30], ③ 이형근을 필두로 한 일본육사계였다. 전후 1950년대 이승만 정권 내내 이들 3명의 대장들은 군 내 요직을 돌아가며 맡았다. 이 영향으로 백선엽은 1953년 12월 15일 한국군 최초로 탄생한 야전군급 부대인 제1야전군의 초대 사령관을 지냈으며 1952년(제7대)에 이어 1957년 육군참모총장(제10대)을 역임했고 1959년 합동참모의장(제4대)에 부임했다. 세 군맥 가운데 가장 큰 조직은 정일권의 함경도계로 전성기에는 김동하, 박창암 등을 비롯해 75명의 장성이 이 계파였다고 한다. 평안도계는 40명 정도의 장성이 속해 있었는데 백선엽은 파벌을 적극적으로 관리하지 않아 장도영이 평안도계의 리더 역할을 점차 맡게 된다. 그러나 이런 3대 파벌이 군 내 인사를 과점하고 요직을 꿰어차며 각종 비리를 저지르자 여기에 속하지 못한 장교들의 불만은 갈수록 커져갔다. 5.16 군사정변도 결국에는 이 파벌 구도에서 배제된 장교들(특히 김종필을 위시한 남한 출신 육군사관학교 8기생 그룹)이 박정희를 내세워 벌인 집단 반발이라고 할 수 있다. 백선엽이 정일권만큼 노골적인 군 내 정치를 벌이지 않았다 해도 육군 내 최고위급 장군으로 이러한 내부 모순을 적극적으로 해소하지 못해 군사 독재의 길을 열어준 책임은 일부 있다.
결국 백선엽은 4.19 혁명 이후인 1960년 5월 31일 예편하고 7월 중화민국 주재 대사로 부임하였다.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31] 박정희를 위시한 쿠데타 주도 세력들은 여전히 군 내 강한 영향력을 가진 백선엽의 개입을 막기 위해 계속 대사 직책을 주어 외국을 떠돌도록 한다. 1961년 7월 주 프랑스 대사( 유럽 및 아프리카 13개국까지 관할)로 발령받아 멀리 유럽으로 보내버렸고 1965년 7월 다시 주 캐나다 대사로 발령내어 다시 미주에 머무르게 했다. 그렇게 거의 10년이 지나 군 내 인맥이 싹 박정희 충성파들로 교체되고 백선엽이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 뒤에야 박정희는 백선엽을 불러들였다. 그래도 과거 남로당 활동 전력을 비호해준 은혜를 배려했는지 1969년 10월 교통부장관(제19대)에 임명되었다. 이후에는 당시 대한민국의 몇 안 되는 핵심 화학 기업이던 충주비료(1비) 사장을 맡았고 19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에 따라 호남비료(2비) 사장을 겸직하며 1973년에 한국종합화학공업으로 합병하는 작업을 지휘했다. 이후 박정희 정권이 종식된 1980년까지 장기간 한국종합화학 사장을 지내다가 퇴임하였다.
4. 노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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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모습 |
한국에서도 이명박 대통령 재임 기간에 6.25 전쟁 60주년을 맞아 백선엽에게 한국군 최초 원수 계급을 부여하려 했으나 간도특설대 경력 때문에 반대가 심해 무산되었다.[34]
백선엽의 전투 활약상을 담은 ‘6.25 전쟁영웅의 투혼,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가 2016년 5월부터 9월까지 육사 누리집에 30회가 연재되었다가 2017년 일반에도 공개되었는데, 당시 백선엽의 친일 행적은 언급하지 않고 전쟁 영웅으로 미화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다 2018년 육사 누리집에서 삭제되었다고 보도되었다. 이는 문재인 정부 들어 국군의 뿌리를 광복군에서 찾으려는 노력 차원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육군 관계자는 "백 장군 웹툰 삭제와 국군 역사 재조명은 무관하고, (새로운 웹툰 게재로 인해) 기존의 백 장군 웹툰이 빠진 것"이라고 말했다. #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정부의 대북정책에 반대해왔으며 9.19선언에 반발해 기존의 성우회, 대한민국재향군인회와는 다른 대한민국수호예비역장성단이라는 단체를 조직, 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폐기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망 1년 전인 2019년의 공개 활동을 살펴보자면 2019년 6월 10일에는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와 회담하기도 했으며,( #) 동년 11월 22일에는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미군 사령관, 마이클 빌스 미 8군사령관과 만나 사진을 찍기도 했다.( #) 그리고 12월 9일에는 백선기 칠곡군수로부터 종이학 100마리를 선물로 받았으며,( #) 11월 1일/12월 24일 김형석[35] 연세대학교 명예교수와 2차례 만나기도 했다. #1 #2. 이것이 외부에 공개된 백선엽의 최후의 사진이다.[36]
5. 사망
2020년 7월 10일 23시 35분 서울대병원에서 숙환[37]으로 사망했다. 향년 99세. 100세 생일을 4개월 앞두고 별세했다. # 3.1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년 후에 태어나 코로나 19 발발 후까지도 살아 있었던 셈이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병원을 굳이 옮긴 것은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하루 전 사망한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빈소가 있는 영향으로 보인다. 두 거물급 유명 인사의 장례식을 동시에 같이 치르면 병원이 지나치게 혼잡해질 우려도 있고,[38] 정치적으로 두 사람의 지지 세력 성향이 완전히 정 반대인 만큼 조문객들 사이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하루 먼저 현직 시장의 자살이라는 충격적인 방식으로 사망한 박원순 시장과는 달리, 백선엽은 공직을 떠난지 한참 되었고, 99세 고령으로 자연사했기 때문에 비교적 덜 부각되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정반대인 두 거물이 24시간 차로 세상을 떠나면서 이를 두고 정치권부터 일반 국민들까지 양 진영 간 대립이 벌어졌다.
장례식은 육군장으로 치러졌으며 유족의 신청으로 7월 15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수의로 6.25 전쟁기 한국 육군 전투복 재현품을 착용했다 하며, 정황상 당시 원조 물자로 국군에 대거 지급된 미 육군의 국방색 작업복을 쓴 것으로 추정된다. 대전현충원에 안장될 당시, 현충원 안장에 반대하는 진보 단체와 이에 맞불 시위를 하는 보수 단체의 충돌이 있었으며 일부 유튜버들이 안장 생중계에 경찰의 통제를 따르지 않아 소란이 있었다고 한다. 안장식은 코로나 19 여파로 인해 최소화되어 진행되었고 백선엽 장군이 생전 "의미있다" 라고 얘기한 다부동 등 6.25 격전지 8곳에서 흙을 퍼와 허토용 흙으로 사용했다. #
더불어민주당 측은 친일 행적을 고려해 어떠한 논평도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다만 개인 차원에서는 논평이 있었는데, 민홍철 국회 국방위원장은 "국방위원장 입장에서 군의 원로 셨고 6.25 전쟁에 공헌하셨던 점에 대해서 우리가 애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발언했다. # # 또한 공식적인 논평을 내지는 않았지만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이낙연 전 총리가 빈소를 찾아 조문을 했다. #
미래통합당에선 '대한민국 역사 그 자체'라며 애도했다. #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미군 사령관은 영웅이자 국가의 보물이었다며 애도했다. # 미국 NSC에서 공식 트위터 계정을 통해 "한국은 1950년대 공산주의 침략자들을 격퇴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백선엽과 다른 영웅들 덕분에 오늘날 번영한 민주공화국이 됐다" 라고 추모했다. # 이외에도 전현직 군인들이 조문을 했다고한다.
정의당은 일제의 주구라는 강한 비난조의 표현까지 써가며 현충원 안장은 부적절하다는 논평을 냈다. #
백선엽의 아들은 '아버지는 평생을 대한민국을 위해 살았다'며 일부 서울현충원 안장에 대한 의견에 대해 대전현충원도 대한민국이니 만족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
노영희 변호사는 백선엽이 간도특설대로 독립군을 소탕했다는 것도 아니고 한국전쟁 당시 남침한 북한군을 격퇴했다는 이유만으로 민족 상대로 한 총질 운운하며 안치하지 말라는 발언을 했다. # 남침 책임은 일방적으로 김일성을 필두로 한 북한 수뇌부와 직접 남침한 조선인민군에게 있으니 틀린 주장이다. 게다가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인원 중 독립 유공자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북한군을 격퇴했다는 이유만'으로 그곳에 안장되었다.
국립현충원 안장자참배 이곳에서 백선엽 이름을 검색하고 사이버 참배 버튼을 누르면 참배할 수 있다.
[1]
북한 치하에서 발견된 고구려 고분군으로 유명한 곳이다.
[2]
장춘의 4년제 만주군관학교의 전신으로 2년제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만주군관학교 2기 출신이다.
[3]
중국공산당이 만주 지역의
공산주의 계열 항일 유격 부대를 통합하여 조직한 단체.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3800
[4]
이 책은 우에다 신(上田 信)의 『컴뱃 바이블 2(コンバット・バイブル 2)』에서 한국군의 대 게릴라전 전술 부분에 백선엽의 캐리캐처와 함께 부분 발췌 수준으로 소개되었고 서해문집에서 나온 일제하
소련 억류자들을 다룬 서적에서 부분 발췌되었을 뿐 정식 번역은 되지 않았다.
[5]
간도특설대보다는 비중있는 역할을 맡은 지리산 빨치산 토벌전에 대해 더 자세히 서술하였다.
[6]
1998년에 Japan Military Review 출판사에서 출간한 韓国戦争一千日: 白善燁回想錄 (한국전쟁 1천일: 백선엽 회상록)』 개정판이다.
[7]
동북항일연군 등 항일무장세력을 게릴라라고 지칭하고 있음
[8]
만주 작전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이미 일본은 패망 직전이었고 일본 항복 직전에 참전한 소련의 침공이 너무 전격적이어서 이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부대는 말 그대로 와해되거나 자진해산하는 경우가 많았다.
731 부대도 마찬가지였다.
[9]
일본군 경력을 부끄럽다고 고백하면서 일본군 장교직을 버리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초주검이 된 동기
이종혁을 보고 진심으로 슬퍼하며 장한 일을 했다고 칭찬했던
김석원이나
창씨개명과 습작을 거부하며 일본군에 있었고 이후에 참회한
이종찬과는 다른 태도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몇몇
독립운동가들은 일본군 소속으로 자진하여
간첩 활동을 벌이거나 탈영하여 독립운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10]
결국 조만식은 월남하지 않았고
북한의 4년간 불법 감금과 전쟁으로 사망했다.
시신 수습도 하지 못해 소련으로 끌려갔단 얘기도 있다. 현재 남아있는 조만식 선생의
무덤은 유족들을 월남시킬 때 남긴 머리카락과 손톱을 안장한 것이다.
[11]
미국식 군제와
영어 교육을 하는게 목표였지만 군 경력자들은 바로 국방경비대 간부로 임관해야 했기 때문에 초기 졸업생들은 단순히 이름이나 올린 정도였으며 백선엽도 불과 1달여 만에 졸업했다.
[12]
당시 1사단 예하 3개 연대 중 개성에 주둔한 병력은 12연대였다. 사단사령부는 수색에 있었고, 그날 역시 서울에 있었던 선임연대장 최경록 대령이 지휘하는 11연대도 수색에 있었다.
[13]
사사키 하루타카(佐佐木春隆), 『한국전비사』 中권 〈기나긴 4일간〉, 병학사.
[14]
전쟁발발은 04시
[15]
백선엽에게는 사단본부까지 타고 갈 차가 없어서 미 고문관에게 태워달라고 부탁해야 했다.
[16]
38선에 "배치"되어 있던 사단은 1, 6, 7, 8사단의 4개뿐이다. 개전 이후에 2, 3, 5, 수경사(이후 수도사단으로 개칭) 4개가 추가로 투입되었으나 축차투입에 전력부족으로 모조리 붕괴했다.
[17]
보급이 안되어 이틀간 음식은 커녕 물 한모금 먹지 못한 상태였다.
[18]
중앙일보사 발간 회고록 305페이지 원문
[19]
당시 6.25에 참여한 북한군 중에서 후방 및 보급을 제외하고 낙동강 전성에 투입된 전방 병력은 9만여명이었다. 이중 다부동 전투에 투입된 북한군 최정예 3개 사단의 병력은 북한군 전군의 30%~40%에 달하는 막대한 병력이었다.
[20]
오른쪽이 백선엽 준장.
[21]
여러 미군 장교들 사이에서
고글을 올린 사람으로, 사진 속 오른쪽에서 3번째 자리에 수류탄을 가슴에 매단 사람은
매튜 리지웨이 당시 유엔군사령관이다. 가운데는 협상단 대표였던
터너 조이
제독이다.
[22]
한국정부는 정전회담에 격렬히 반대하였다. 미군도 굳이 야전군 사령관인 백선엽을 회담에 참가시켰지만 발언기회는 전혀 주지 않았다.
[23]
3개 예비연대와 3개 경비대대로 구성
[24]
백선엽의 앞 두 글자를 따서 이름 붙임
[25]
현재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관구에서 법인을 기증받아,
백선 바오로의 집이라는 이름의 지적장애인 거주시설로 운영되고 있다.
[26]
월드비전 총재였던 로버트 '밥' 피어스가 당시 종군기자로 한국에 와 있었는데, 그의 도움으로 육아원생 1인당 당시로선 상당한 거금인 10~15달러의 후원금이 지원되었다고 한다.
[27]
보육원 주변 땅을 백선엽이 사비로 구입해 밭으로 가꾸어 식자재를 조달했다고 한다.
[28]
마찬가지로 부자가 모두 일본군 출신인
유재흥이
제주 4.3 사건에서 관대한 선무공작을 펴서 양민 희생을 크게 줄였고, 독립운동가 출신인
조병옥은 강경진압을 밀어붙여 민간인 피해를 늘린 주범이다.
[29]
장진호 전투를 치른
미합중국 해병대 제1사단장도 한국군의 무기고가 되는 것에 우려를 가지고 장비지원을 하라는 상부명령을 거절한 사례가 있다.
[30]
가장 큰 세력을 자랑했다. 또 정일권이 자기 파벌을 키우는데 열심이었다.
[31]
미국에서는 워낙 백선엽이 알려져 있다 보니 처음 5.16 군사정변을 박 장군(General Park)이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백(Paik)선엽이
쿠데타를 일으킨 줄 알았다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32]
6.25 전쟁 당시에 한국군 고위장교들 가운데는 실력은 있으나 미군과 사이가 나빠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장군들, 그 반대로 실력은 부족하나 미군과 사이가 좋아 과대 평가된 장군들이 고루 있었다. 전자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김홍일,
김석원 등 원로 장군들로, 이들은 실전 경험도 풍부하고 군내 신망도 높았으나 미군과 사이가 몹시 안 좋아 전쟁 초반 이후 명예직으로 물러났다. 반면 영어를 열심히 익혀 미군 지휘관 및 군사 고문단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 이들이 후자에 속한다.
[33]
백선엽 사후 진보 성향 신문사인
경향신문에서는 대장(4성)인 백선엽을 중장(3성) 보직인 명예 미8군 사령관에 임명한 것을 미국의
이중성이라고 꼬집으며 의미를 축소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지적이다. 평시인 현재는 미 육군의 야전군 사령관이 중장 보직이지만, 전시 야전군은 대장(4성)이 맡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6.25 전쟁 당시 미8군 사령관 중
제임스 밴 플리트는 1951년 4월 임명 당시에는 중장 계급이었으나, 이어 7월에 대장으로 진급하여 1953년까지 사령관직을 수행했다. 후임
맥스웰 테일러도 대장 계급으로 미8군 사령관직을 수행했다. 특히 백선엽이 활약하던
6.25 전쟁 중 상당 기간은 한국군이 미8군 소속으로 싸운 과거를 생각하면, 명예 미8군 사령관직에 임명한 것은 동격의 동맹군 지휘관임을 인정한 상당한 예우라 할 수 있다.
[34]
상세한 내용은
논란 항목을 참조
[35]
백선엽과 동갑이며, 2024년 현재에도 생존 중이다.
[36]
링크에 1953년 대장 진급 후
이승만 대통령과 악수하는 백선엽의 사진이 있다.
[37]
한국에서는 고령에 따른 자연사는 숙환 등으로 표현하고, 자세한 사망 원인을 적시하지 않는 것이 관례다. 반면 서양권은 자연사라도 구체적인 사망 원인을 공개한다.
[38]
2020년 7월 기준 아직
코로나바이러스-19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를 강조하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