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빈야르 지도
▲ 2017년의 모습. 저 움푹 패인 부분이 자연지형이 아니라 시체들을 묻기 위해 판 구덩이다.
1. 개요
우크라이나어: Бабин Яр(바빈야르)러시아어: Бабий Яр(바비야르)
영어: Babyn Yar, Babi Yar
1941년 9월 독소전쟁 중 키예프 외곽의 골짜기 바빈야르(Babyn Yar)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으로, 소련 지역에서 자행된 독일 살인특무부대 아인자츠그루펜의 유대인 학살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사건으로 꼽힌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가 가스실에 의한 공장식 학살의 상징이라면 이 사건은 총기에 의한 재래식 학살의 대명사로 불린다.
이 학살은 1941년 9월 19일 키예프에 발터 폰 라이헤나우 원수가 이끄는 제6군 예하 제29군단과 함께 SS 대장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 휘하 아인자츠그루펜 파울 블로벨 SS 대령이 이끄는 아인자츠그루펜 c 소속의 제4 특공대 팀이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2. 전개
▲ 바빈야르 학살의 주모자, 학살자인 파울 블로벨
▲ 1941년 9월 28일 우크라이나 키예프에 붙은 유대인 소집 전단지
키예프 포위전이 성공적으로 끝났을 때 키예프에는 15만 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 아인자츠그루펜은 키예프에 입성한 직후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유대인들을 소련 내륙 깊숙한 곳으로 이동할 것이라는 현수막을 시내 곳곳에 내걸었다. 현수막의 내용은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 독일어로 적혔고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면 아침 일찍 나와야 한다는 말도 추가했다.
그러자 결과는 "대성공"이였다. 약 5000명에서 6000명이 나오면 성공일 것이라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어서 9월 29일 아침 3만명의 유대인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을 통제하고 명단을 작성하는 일은 우크라이나 민병대가 맡았으며 이 지방에 주둔하고 있던 독일 경찰 연대와 정규군도 일을 거들었다. 이들의 연극이 너무도 완벽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시 외곽의 골짜기로 걸어 들어갈 때까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집결 장소에 모인 유대인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손에 들고 있는 짐뿐만 아니라 입고 있던 옷까지 모두 벗어서 내려놓도록 강제되었고 알몸이 된 그들은 줄을 지어 미리 만들어진 계단을 따라 길이 150미터, 너비 30미터, 깊이 15미터 크기의 엄청난 구덩이 속으로 들어갔다. 구덩이의 가장자리에 도착하면 이미 총에 맞아 죽어 있는 이웃사람의 위에 엎드려야 했다. 그러고 나면 아인자츠그루펜 부대 대원들은 자동 권총으로 엎드려 있는 사람의 목덜미를 조준했다. 유대인들은 저항하기는커녕 공포에 사로잡혀서 무기력한 상태가 되었다. 참혹한 광경을 보고 놀라서 울부짖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지런히 누워서 총알이 날아오는 것을 기다릴 뿐이였다고 하며 그 모습은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 같았다고 한다.
이런 일은 하루종일 계속 해서 반복되었으며 구덩이 안에는 세 집단의 사격수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그 수는 12명이였다고 한다. 이들은 쉴 새 없이 유대인들을 조준하고 사격하는 것을 반복했으며 마침내 유대인들이 모두 사망하자 작업은 멈추었다. 모든 학살이 끝난 뒤 독일군 공병대가 그 거대한 구덩이의 벽을 부수자 구덩이는 이내 거대한 무덤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해서 1941년 9월 29-30일 이틀만에 바빈야르 골짜기에서 집단학살 당한 유대인들의 수는 합해서 3만 3,771명이었다.
▲ 바빈야르 학살 당시의 거대한 구덩이
이후에도 바빈야르 골짜기는 학살을 위해 사용되었다. 학살은 1941년 9월 29일부터 1943년 9월 29일까지 정확히 2년간 이어졌다. 나치는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마다 유대인 외에도 우크라이나인, 러시아인, 집시, 타타르족 등 절멸 대상자들을 몰아넣고 체계적으로 살해했다.
2년 간 우크라이나인, 러시아인, 집시 등 온갖 국적의 사람들이 바빈야르에서 학살됐다. 바빈야르를 유대인들만의 무덤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이것은 국제적인 무덤이다. 사체의 90%가 태워져 재가 골짜기와 들판에 뿌려졌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이 얼마나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나톨리 쿠즈네초프
아나톨리 쿠즈네초프
3. 은폐 시도
소련군의 공세가 강화되어 독일군이 밀려나기 시작한 1943년 여름부터는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1944년 키예프 탈환 직전에는 파울 블로벨 대령이 감독하는 "1005 특공대"가 창설되어 증거 인멸을 위해 대규모의 작전이 실시됐는데 이들은 근처의 시레츠 수용소의 수감자들을 동원하여 땅에서 사체와 유골을 파헤친 다음 현장에 마련되어 있는 화장터에서 그 해골들을 모두 태워 버리도록 지시했고 타다 남은 재 속의 뼈는 따로 추려서 가루가 될 정도로 분쇄시켰다. 증언 등을 통해 학살된 수치는 10~20만 사이로 추산되지만 이러한 증거 인멸 때문에 정확하게 추산할 수는 없다.▲ 희생자들의 옷가지
파울 블로벨은 1948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반인도적 범죄, 전쟁범죄, 범죄 조직 가담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1951년 란츠베르크 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블로벨을 포함해 기소된 학살 책임자 중 14명에게 사형, 7명에게는 10년~종신형이 선고되었다. 1명은 이미 복역 기간이 만료되어 석방되었고 2명은 기소 중지되거나 선고를 받지 않았다. 실제 사형에 처해진 사람은 4명에 불과했다.
4. 기타
-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13번 교향곡이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 우크라이나 출신 소련작가 아나톨리 쿠즈네초프는 해당 사건을 배경으로 한 《바비야르》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다.[1]
[1]
삼진사 세계전쟁문학대전집에 꾸즈네쪼프의 바아비 야아르로 실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