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역사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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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몽골의 역사를 간략히 다루는 항목.[1]
2. 고대
몽골은 80만 년 전부터 호모 에렉투스가 살았고, 인도유럽에서 건너온 유목 민족 집단들이 거쳐가던 땅이라 꽤나 오래전부터 인류가 거주하던 땅이었다. 기원전 3000년 경에는 청동기 시대가 시작됐고 기원전 1000년 경에는 700여 개에 달하는 사슴돌[2] 유적들을 남기기도 했다. 기원전 8세기에 이르러서는, 몽골 서부는 스키타이를 비롯한 인도유럽어족 이민자들이 차지했고 몽골 중부와 동부에는 동아시아인에 가까운 민족들이 터를 잡고 살아가기 시작했다. 기원전 3세기 들어서 철제 무기라는 강력한 도구가 등장하며 몽골에도 드디어 씨족과 동맹이 생기고 수렵목축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몽골 지방은 아무나 드나드는 평평 뚫린 대초원이라는 인식이 강하고 실제로 그런 감도 없지 않으나 실제로는 상당히 폐쇄적인 지방이었다. 몽골의 대초원은 서쪽은 알타이 산맥, 남쪽은 고비 사막, 북쪽은 시베리아의 얼어붙은 황무지가 버티고 있기 때문에 다른 중앙아시아 일대만큼 밖으로 나가거나 들어오기가 힘들다. 몽골인들은 밖으로 쉽게 이주하지도 못했지만 반대로 침입자들도 안으로 들어오기 어려웠다. 덕분에 몽골인들은 여러 씨족으로 갈라져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와중에 같은 언어, 종교, 생활 양식, 몽골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몽골의 최대 적수는 바로 남쪽의 중국이었다. 이미 춘추전국시대부터 조나라, 연나라 등이 몽골 남쪽을 찝적거리고 있었는데, 진나라의 시황제가 기원전 3세기 중국을 통일하면서 본격적으로 세력을 외부로 투사할 야심을 드러낸 것. 그러자 이 무렵의 몽골에서는 흉노 연맹이 나타나 나름 통일된 세력을 구축하고 중국에 맞서기 시작한다.
2.1. 흉노
자세한 내용은 흉노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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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의 세력권[3] | 흉노족의 모습 |
흉노는 기원전 4세기 말 진나라를 포함한 춘추 시대의 국가들과 전쟁을 벌이면서 처음 역사에 등장했다. 흉노는 강성한 진나라를 막기 위해 다른 국가들과 연합해 중국을 공격했지만, 결국 모두 실패했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은 기원전 215년 몽염 장군을 보내 오르도스 지역의 흉노를 축출하고 흉노족들의 남하를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다.
그러던 중 기원전 209년, 두만 선우가 흉노를 통일해 흉노 제국을 세웠고 묵돌 선우가 그를 이어받아 제국을 더욱 넓혔다. 묵돌은 동몽골을 공격해 동호를 복속했고 서쪽으로 알타이-준가르 분지-서고비-하서주랑의 광활한 영역을 가지고 있었던 월지를 공격해 대부분의 강역을 점유했다.[4] 이때는 그 영토가 북쪽으로 바이칼 호, 서쪽으로는 톈산 산맥, 동쪽으로는 다싱안링산맥, 남쪽으로는 만리장성에 이르렀다.
이때가 흉노의 위세가 그 절정에 달할 때라, 기원전 200년에는 유방이 이끄는 한나라 군대를 백등산 전투에서 포위 섬멸하고 한나라에게 직접 조공을 받을 정도로 세가 융성했다. 흉노는 한나라로부터 기원전 198년 만리장성 이북의 모든 영토를 점유한다는 확약을 받아냈고 한나라의 공주와 공물을 얻어냈다. 흉노는 한 문제 시절까지 무려 70년 가까이 중국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며 사실상의 상국으로 행세했다.
그러나 흉노의 좋은 시절도 한 무제가 등장하며 끝장나고야 말았다. 무제는 기원전 129년 위청과 곽거병을 동원해 흉노에 크게 타격을 입혔고, 조공무역을 끊어 흉노를 경제적으로 쪼들리게 만들었다. 흉노 내부의 갈등도 한 몫 했다. 기원전 56년에는 형제 간의 싸움으로 나라가 동흉노와 서흉노로 갈라졌고, 동흉노는 중국에 신하의 예를 자처했으나 서흉노는 한나라에 맞서다가 기원전 36년 몰살당했다. 이후 흉노는 한나라와 평화를 유지했고, 잠시 왕망의 신나라와 충돌하는 일이 있었으나 전반적으로 이전만큼의 세는 되찾지 못했다. 신나라 멸망후 후한이 들어서자 흉노는 48년 남흉노와 북흉노로 또 분열됐다.
남흉노는 사실상 조조의 위나라에 복속되며 한족으로 동화됐고,[5] 북흉노 일부는 서쪽으로 이주했다. 93년 흉노 휘하에 있던 또다른 유목민족 선비족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몽골의 패권은 흉노에게서 선비에게 넘어간다.
2.2. 선비
자세한 내용은 선비(민족)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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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년 단석괴 치하의 선비 제국 |
그러나 단석괴가 죽자 그보다 한참 능력이 덜떨어지는 후계자들이 등장하며 선비 제국은 크게 쇠락했다. 그나마 같은 동호의 일족이었던 남부의 오환족이 더 세력이 거대해졌는데, 이 오환족마저도 공손찬을 멸망시킨 원소에게 복속당했고 원소 사후 원상과 손을 잡고 조조에 맞섰으나 역시 패배하고 중국의 속국으로 들어갔다. 단석괴 사후 선비족들은 수많은 분파로 쪼개져 서로 다투기를 반복했다. 수많은 분파들이 있었지만 모용부, 탁발부, 실위, 유연 등의 일파가 가장 두각을 드러냈다.
이렇게 망해가나 싶던 선비족은 삼국시대를 통일한 서진이 팔왕의 난으로 흔들리면서 다시 독립을 되찾았다. 선비족은 서진이 정신없는 틈을 타 조용히 독립했는데, 특히 선비족 집단 중 하나였던 탁발부가 대나라를 세우고 이후 북위를 세우면서 북중국을 선비족의 앞마당으로 삼았다. 남북조시대를 이끌었던 북위는 우문씨의 북주, 고씨의 북제로 갈라졌고 이후 수나라에 통일되어 당나라로 이어졌다. 수나라와 당나라 황실이 선비족의 혈통을 이은 걸 생각하면 몽골에서 출발한 선비족들이 중국 통일 왕조의 황통에까지 진출했다는 것.
어쨌든 선비족 분파들 중 가장 강력하던 탁발부와 기타 분파들이 중국으로 남하해 북위를 세우자, 몽골 지방에 남아있던 유연 부족이 탁발부의 빈자리를 채우고 몽골에 유연 제국을 세웠다.
2.3. 유연 제국
자세한 내용은 유연 제국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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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 제국의 영토 |
원래 유연 역시 선비족의 일파들 중 하나였지만, 더 강한 또다른 선비족 일파 탁발부에게 짓눌려 제대로 힘을 못쓰고 살았다. 하지만 200년대 후반 탁발부가 비옥한 북중국으로 남하하자 그 틈을 노려 독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몽골 지방을 통일한 것도 아니고, 무려 100년간 분열된 상태를 유지하다가 402년 욱구려사륜이 통일하고서야 몽골 지방의 유일무이한 패권국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
유연은 탁발부와 같은 선비족 출신이었으나 탁발부가 세운 북위와 사이가 어마어마하게 좋지 않았다. 오죽하면 북위가 이들을 '벌레가 꿈틀거린다'라는 뜻의 연연(蠕蠕)이라 부르며 멸시했을 정도. 그러나 국력면으로 유연은 북위에 명백한 열세였고 싸울 때마다 패했다. 424년 유연이 북위를 침공했으나 패퇴당했고 특히 북위의 전성기이자 3대 황제 태무제 시절인 400년대 초중반에는 그야말로 가만히 있어도 뚜드려맞는 샌드백 수준이었다. 유목제국치고는 진짜 업적이 영 없어서 북위가 난장판이 되는 육진의 난 때마저도 북위의 요청을 받아 반란군 일부를 때려잡은 것이 전부인 수준이다.
551년에는 돌궐의 이리가한이 유연에 반란을 일으켜 북위의 후계인 서위와 손을 잡고 유연을 공격했다. 유연은 장자커우시에서 대패했고 이후 끊임없이 밀려나갔다. 이리가한은 스스로 칸을 칭하면서 몽골 전체를 장악할 야심을 드러냈다. 555년에 유연의 마지막 칸 육구려암라신이 3천 군사를 이끌고 서위로 도망쳤지만, 그마저도 돌궐의 압박을 이기지 못한 서위가 돌궐에 육구려암라신을 잡아 호송하면서 유연은 225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2.4. 돌궐
자세한 내용은 돌궐 문서 참고하십시오.2.4.1. 돌궐 제1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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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 제1제국 |
유연을 멸망시키고 몽골의 패권을 잡은 돌궐은 553년 즉위한 제3대 무칸 카간 시절에 최고 전성기를 맞았다. 서쪽으로는 이란의 사산 왕조와 연합해 에프탈을 멸망시키고, 아무다리야 강을 경계로 국경을 설정해 트란스옥시아나에 발을 들였고, 동쪽으로는 거란을 꺾고, 북쪽의 키르기스를 병합해 새외 모든 나라를 복속시켰다. 이 때 돌궐 제국의 영역은 서쪽으로는 카스피해, 동쪽으로는 고구려와의 인접 지역인 흥안령 산맥까지 이르렀다. 과거의 유목제국 흉노와 유연의 서쪽 영역이 파미르 고원을 넘지 못한 것과 비교하면 더욱 서쪽으로 확대된 것이다.
이 당시의 돌궐이 워낙 그 세가 강성했기에 따로 '돌궐 제1제국'이라고 구분해서 부른다. 당시 북중국은 북위가 멸망하고 고씨의 북제와 우문씨의 북주가 다투고 있었는데, 이 북제와 북주마저도 돌궐을 두려워해서 앞다투어 570년부터 조공을 바치고 눈치를 볼 정도였다. 돌궐의 4대 칸 타발가한이 직접 중국을 보고 남쪽의 어린아이라고 부를 정도였으니 그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강성했던 돌궐 제1제국도 수나라의 등장과 함께 그 기세가 꺾이고야 만다. 중화를 통일한 거대 제국의 출현으로 돌궐의 위세가 팍 움츠러들었고, 특히 수나라가 돌궐 왕실 사이의 균열을 교묘히 이용해 돌궐 제1제국을 동돌궐과 서돌궐로 쪼개버리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결국 583년 돌궐 제1제국은 동과 서로 분열된다.
2.4.2. 동돌궐과 서돌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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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돌궐 | 동돌궐 |
이렇게 돌궐이 반토막 난 것은 581년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의 영향도 컸다. 돌궐을 견제한 수나라가 일부러 돌궐의 집안싸움을 부추겼던 것. 특히 사발략가한의 동돌궐의 경우 수나라의 도움을 받아 달두가한의 공격을 막아냈으며 603년 즉위한 계민가한은 아예 수나라의 봉신을 자처했을 정도. 그러나 수나라가 고구려와의 공격으로 쇠락하자 바로 독립을 선포, 제9대 시필가한과 제10대 처라가한 시절에 전성기를 누리며 중국 내부의 군벌 전쟁에 개입하기까지 했다. 한때는 당나라를 세운 이연도 신하를 자칭할 정도로 세가 강성했다.
절치부심하던 당나라는 돌궐에 대한 이간책을 벌였다. 제11대 힐리가한에게 불만을 품고 있는 세력들을 규합해 내란을 일으켰고, 설연타를 비롯한 철륵계 부족들도 사주해 동돌궐로부터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결국 자연재해와 가축들이 폐사하는 악재가 겹치면서 동돌궐이 약화되자 당나라는 630년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고, 힐리가한을 생포해 일시적으로 동돌궐을 멸망시키고 당나라 아래의 보호령으로 삼으면서 630년부터 687년까지 지속된 기미지배기가 시작된다.
동돌궐이 북중국의 왕조들과 투닥투닥거리고 있을 동안, 서돌궐은 중앙아시아를 장악하고 동로마 제국, 사산 왕조와 교역하고 싸움을 벌이며 살았다. 서돌궐 역시 영토확장전쟁을 벌여 카스피해와 흑해까지 강역을 확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나라가 중국을 재통일한 후 동돌궐을 정복하고 토욕혼, 타림 분지의 도시국가들, 고창국 등을 정벌한 다음 서돌궐까지 마수를 뻗쳐오자 버텨내지 못하고 멸망했다. 657년 마지막 카간인 사발라가한이 죽으면서 서돌궐은 멸망하고야 말았고, 당나라가 이 곳에 안서도호부를 설치하면서 657년부터 742년까지 걸친 당나라의 지배를 받게 된다.
2.4.3. 당나라의 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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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지배 |
2.4.4. 돌궐 제2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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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 제2제국 |
2.5. 위구르 제국
자세한 내용은 위구르 제국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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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 제국 |
2.6. 요나라
자세한 내용은 요나라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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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라 |
3. 중세
3.1. 카마그 몽골과 금나라와의 전쟁
- 여진 = 금나라 = 주션
1146년에 카불 칸이 붕어하자 그의 사촌 동생인 암바가이 칸이 계승했지만 그는 타타르족에게 배신당하여[7] 금나라에 넘겨졌고, 남송 정복을 준비하던 폭군 해릉양왕은 배후를 안정시키고자 암바가이 칸을 잔혹하게[8] 처형했다.(1156년) 이때 그는 자신의 후손들이 복수할 것이라 외쳤다고 한다. 뒤를 이은 카불 칸의 아들 쿠툴라 칸 역시 금나라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1160년경) 이후 칭기즈칸(1189년 칸 선출)의 등장 이전까지 칸을 자처하는 이는 없었으며, 쿠툴라 칸의 조카였던 예수게이가 키야트 보르지긴 씨족의 추장을 맡았을 뿐이었다.[9]
점점 성장하는 몽골부를 경계하던 금나라는 이이제이 정책을 폈고, 타타르족과 동맹하여 몽골을 종종 침략했는데 많은 몽골인들이 금나라로 끌려가 강제 노동에 시달리거나 시종이 되었다. 그럴수록 몽골인들의 금나라에 대한 복수심과 통일에 대한 갈망은 더욱 깊어져갔다. 예수게이도 1171년 '주르첸의 사냥개'인 타타르족에게 독살당했다. 이후 그의 안다(의형제)였던 케레이트의 토그릴(옹 칸)과 그의 경쟁자였던 타우치우트 씨족[10]이 득세했다. 한편 금나라는 만리장성의 외벽이라고 할 수 있는 계호를 쌓아 몽골을 경계했다.
3.2. 몽골 제국
자세한 내용은 몽골 제국 문서 참고하십시오.하지만 칭기즈 칸이 등장하면서 몽골의 역사 뿐만 아니라 세계의 역사를 뒤바꿔 놓는다. 13세기 몽골은 온 아시아를 뒤엎고 일부 유럽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등 최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 시대 역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몽골 제국 문서 참조.
단순히 군사적인 업적뿐만 아니라 몽골이라는 민족과 국가의 정체성이 본격적으로 구체화된 것이 바로 몽골 제국 시기였으며 아래에 서술하겠지만 지금의 몽골인도 이 시기에 대한 각별한 존경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폭발적인 활력이 쿠빌라이 칸 시대 이후 무리하게 소진되면서 몽골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분할되어 나간 칸국은 점차 현지인의 반발로 그 입지가 축소되어 가거나 현지화되어 사실상 몽골사로 다루기 어려워졌으며 원나라는 1368년 만리장성 밖으로 쫓겨나 북원으로 잔존하였다. 이후 영락제가 북방을 토벌하면서 유목민족의 입김은 다시 한 번 약해졌으나 훗날 몽골은 과거 송나라가 당했던 최초의 한족 전체 정복에 이어 명나라에게 토목의 변이라는 중국사 최악의 3대 굴욕 중 하나를 선사해 주게 된다.
당시 고려를 침공하여 원 간섭기[11]가 시작됐다. 몽골은 고려의 저항이 강력해 점령은 포기하고 대신 부마국으로 전락시키며 내부정치에 간섭하였고 몽골인들은 고려보다는 대부분이 중국 송나라에 이주하거나 서쪽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 등으로 이주하였다. 그래서 고려로 귀화한 몽골계는 위구르계 장씨 등 매우 적다.
3.3. 원나라
자세한 내용은 원나라 문서 참고하십시오.3.4. 북원
자세한 내용은 북원 문서 참고하십시오.3.5. 오이라트
자세한 내용은 오이라트 문서 참고하십시오.4. 근대
4.1. 청나라
자세한 내용은 청나라 치하 몽골 문서 참고하십시오.그러나 15세기 후반부터 명나라의 입김이 약해지면서 몽골 지역은 다시 부흥하기 시작하였다. 오이라트 중심으로 서몽골이 통일되면서 에센 타이시에 의해 토목의 변을 일으키기도 했다. 에센은 칭기즈칸의 씨족이 아니라서 칸을 칭하지 못했고 대신 그 아래 지위인 타이시를 칭했다. 이후 오이라트는 분열되어 서쪽으로 후퇴하지만 이번엔 동몽골 쪽에서 정통 보르지긴 혈통의 다얀 칸이 다시 한 번 몽골 세력을 규합해 명나라를 압박하였고 16세기 중반 다얀의 손자 알탄 칸은 명나라의 수도인 베이징을 포위하기도 했는데 이것이 경술의 변으로 몽골은 다시금 일시적으로 허베이성을 재정복했으며 오이라트는 준가르로 이어진다.
하지만 내몽골은 1635년 후금의 홍타이지에게 정복당하고 대칸의 지위도 그에게 넘어간다. 이후 후금은 청나라로 변모하였고 나라가 망할 때까지 몽골의 대칸을 겸했다. 만주족과 혼인 동맹으로 종족이 일체화된 것이다. 이후 청나라는 숙적인 외몽골의 준가르도 멸망시켜 외몽골도 손에 넣는다. 청나라는 자신들의 선조였던 금나라가 몽골에게 망한 것을 상기하여 몽골이 흥할까 봐 두려워했다. 그래서 몽골의 힘을 약화시키려고 했으며 그리하여 먼저 자신들에게 충성을 맹세한 내몽골은 혼인 동맹 및 팔기군 합류로 일체화시키는 한편 외몽골은 반 독립지역으로 따로 놀게 놔 두되 행사에 돈이 많이 들고 비폭력적인 티베트 불교를 몽골인에 장려하였다. 이 시기 청나라는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와 같은 정치적 지도자로 젭춘담바 후툭투(Жавзандамба хутагт)를 선택했으며 달라이 라마와 마찬가지로 환생하는 존재로 믿어진 젭춘담바 쿠툭투는 8대에 걸쳐 몽골을 통치했다. 1대 젭춘담바는 칭기즈칸의 직계 후손인 자나바자르다. 14살에 2년간 티베트로 불교 유학을 가서(1649년) 달라이 라마로부터 ‘젭춘담바 쿠툭투(Jebtsundamba Khutuktu)’라는 최고 권위의 이름을 하사받고 돌아와서는 카라코룸의 에르덴조 사원에 머물면서 몽골의 법왕으로 통치했는데 그가 죽고 나서 환생자로 인정받은 역대 젭춘담바 쿠툭투들은 복드 칸을 포함해서 아이러니하게도 모두 티베트인들이다.[12] 몽골인의 첫째 아들은 라마승으로 출가해야 했다.
이후 러시아가 남하해 오면서 잦은 전투가 벌어졌으나 옹정제 시기 캬흐타 조약으로 외몽골과 부랴티아를 가르는 이 지역의 국경선이 정해졌으며 이는 현대 몽골과 러시아의 국경으로 이어졌다.
4.2. 외몽골 독립과 공산주의 치하
신해혁명 이후 복드 칸 등은 러시아 제국의 힘을 빌어 복드 칸국을 건국하며 독립을 선포했지만 러시아는 몽골을 청나라의 영향력에서 떼어낸 후 자신들이 차지하려는 야욕을 보였다.1915년 캬흐타 협정으로 자치권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에서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면서 더이상 몽골에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자 중국은 캬흐타 협정을 일방적으로 무효화하고 다시 몽골을 복속하려는 야욕을 보였다. 1919년 10월 중국 안휘군벌 쉬수정이 외몽골 출병을 단행했다. 결국 1919년 11월 복드 칸이 항복했고 몽골의 자치권은 철폐되었다. 1921년까지 몽골은 중국 북양정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쉬수정은 몽골에서 학정을 펼쳤다.
담딘 수흐바타르와 허를러깅 처이발상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이 무렵 소련의 영향으로 몽골에도 공산주의자들이 급증하고 있었다. 담딘 수흐바타르와 허를러깅 처이발상가 이끌던 몽골 공산주의자들은 몽골 인민혁명당을 세우고 소련의 지원을 받아 중국으로부터 독립하여 독립된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기 위한 투쟁을 벌였다.
그러던 1920년 러시아 백군의 일파를 지휘하던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이 몽골의 독립을 돕겠다는 제안을 했고, 복드 칸이 이를 받아들였다. 운게른은 중국에 유폐되어 있던 복드 칸을 구출하였다. 운게른은 몽골인의 반중 정서를 이용하여 많은 지지를 받았다. 복드 칸의 몽골군과 운게른의 백군의 연합부대는 1921년 2월 몽골의 수도 후레를 점령하여 중국군을 몰아내고 외몽골 지역의 지배권을 되찾았다. 이후 운게른과 복드 칸에 의한 연합 정권이 몽골을 다스렸다. 운게른과 복드 칸의 사이는 매우 좋았고 이 둘에 의한 연합 정권은 마침내 중국과 소련의 양 손아귀에서 벗어난 독립국이 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었다. 운게른 남작은 불교에 심취했고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는데 몽골에 숨어 있던 러시아인, 유대인 공산주의자들을 처형했다.
한편 반공주의자 운게른이 나타나자 수흐바타르와 처이발상이 이끌던 몽골 인민혁명당은 수흐바타르 타도를 내세우며 몽골인민유격대를 조직했으며 수흐바타르는 레닌에게 간절히 도움을 요청했다. 레닌은 진작부터 몽골을 노리고 있었지만 중국과의 직접적인 갈등을 피하기 위해 몽골에 간섭을 피하고 있었지만 1921년 몽골이 반공주의자 운게른의 손에 넘어가자 이전까지 몽골 인민혁명당의 지원을 거부하고 있던 레닌은 1921년 3월 마침내 몽골을 접수하기 위해 비밀리에 극동으로 소련군을 이동시켰다.
1921년 3월 운게른 정권을 전복하기 위해 소련군이 참전했고 소련군의 지원을 받은 수흐바타르의 인민혁명당군과 복드 칸과 운게른의 정부군 간에 내전이 벌어졌다. 결국 그해 7월 8일 운게른 정권이 전복되었고 7월 10일 수립된 공산당 인민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소련은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복드 칸을 명목상 몽골의 지도자로 계속 남겨 두었지만 복드 칸의 모든 권력을 강제로 빼앗아 공산당 인민임시정부에게 모든 권력을 넘겼다. 물론 실질적인 정권의 운영은 소련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그해 11월 5일 몽골과 소련간의 '몽골-소비에트 협정'이 체결되었는데 몽골의 현 수도인 울란바토르는 담딘 수흐바타르를 기념하여 이름 붙인 도시다.
1924년 5월 20일 복드 칸이 사망하자 소련은 형식상 남아있던 왕정을 공식 폐지하고 새로운 '몽골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헌법을 제정하여 소련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제정된 헌법에는 봉건 식건 잔재 일소, 재산 사유권 금지 등을 규정했다. 하지만 몽골은 국제적으로 소련의 속국이자 오랫동안 중국령이었던 분쟁 영토로 인식되었으며 몽골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인정된 것은 1946년 이후였다. 그럼에도 유엔 가입이 불허되는 등 몽골은 제2차 세계 대전 전후에도 오랫동안 제대로 된 독립국 대접을 받지 못했다.
소련의 위성국이 된 대가는 가혹했다. 담딘 수흐바타르가 일찍 사망하자 소련은 허를러깅 처이발상을 몽골의 지도자로 낙점했지만 소련의 지령에 따라 철저히 움직이던 허를러깅 처이발상은 몽골의 철저한 스탈린주의화를 실시하며 이른바 몽골의 스탈린이라고 불릴 만큼 악명 높은 학살을 벌여 댔는데 공산당이 집권하자 적색 테러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이유 등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소련은 외견상 몽골의 독립을 유지시켜 줬지만 이는 중국이 몽골에 대한 종주권을 행사하려는 명분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일 뿐이었고 위성국으로서 몽골이 소련의 간섭을 받지 않고 행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것 하나 없었다.
소련은 몽골의 민족적 정체성의 근간이 되는 칭기즈 칸에 대한 존경, 몽골 문자, 티베트 불교, 유목 생활 등을 금지하면서 사실상 몽골 민족성 자체를 말살하려고 했다.
일단 국부 칭기즈 칸이 격하되어 칭기즈 칸에 대한 어떠한 찬사도 금지되었고 칭기즈 칸에 대해 언급하는 것 조차도 금기시되었으며 심지어 역사 교과서에도 칭기즈 칸이 지워졌다.... 몽골 제국이 세계 지배를 지배했던 역사 전체가 몽골에서는 공식적으로 지워졌고 이에 대해서 어떠한 이야기도 할 수 없었다. 여담으로 칭기즈 칸에 의해 200여년간 몽골-타타르의 멍에라고 불리는 치욕의 시대를 엮었던 러시아에서는 칭기즈 칸에 대해 치를 떨었고 이 때문에 소련이 가혹하게 칭기즈 칸 금기 정책을 펼쳤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다. 공산주의 시절 몽골인들은 부모가 자식으로 몰래 칭기즈 칸과 몽골의 자랑스러웠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고 한다. 칭기즈 칸에 대한 금기 정책은 공산정권이 붕괴될 때까지 이어졌다. 지금 40대 이상 몽골인들은 어린 시절 누구나 칭기즈 칸에 대해 알고 있었고 모두 그를 자랑스러워했지만 누구도 그의 이름을 말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몽골 문자 사용이 전면 금지되고 소련과 동구권에서 쓰이는 키릴 문자로 강제로 변경되었다. 그나마 중국의 내몽골에서 몽골 문자는 살아남아 지금도 여전히 내몽골에서 쓰이고 있다. 한국으로 친다면 남북한에서 한글이 쓰이지 않고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한글이 쓰이는 것 같은 상황이다. 그러나 (외)몽골에서는 소련의 절저한 문자 말살 정책의 결과 공산정권이 붕괴되고 민주화된 후에도 몽골식 키릴 문자가 사용되고 있다. 물론 민주화 이후 몽골에서도 키릴 문자를 버리고 몽골 문자를 사용해야 한다는 민족주의적 움직임이 있어왔지만 소련의 철저한 키릴 문자 교육으로 인해 민주화된 후에도 몽골에서는 여전히 키릴 문자가 사용되고 있다. 다만 몽골에서도 간혹 몽골 문자로 쓰인 간판 등이 보이지만 이는 대한민국에서 일부 중국집이 한자 간판을 쓰는 것과 비슷한 용도로 옛스러운 느낌을 내기 위한 목적일 뿐 의사소통을 위한 목적으로 몽골 문자는 사실상 전혀 사용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티베트 불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이루어졌다. 티베트 불교는 몽골의 국교와 마찬가지로 1920년대까지만 해도 전체 남성 인구의 3분의 1이 승려일 정도로 몽골에서는 엄청난 영향력을 과시했지만 공산당은 간단 사원 등 극히 일부 사원만이 외국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전시용으로 살려 두고 나머지 700여개에 달하는 불교 사찰을 파괴했으며 불교 승려들은 대대적으로 숙청당했다.
몽골 전통과 문화의 근간이자 상당수 사람들의 경제적 토대인 유목마저 금지되었고 기존 유목민들을 대거 도시로 강제 이주시켰다.
소련은 몽골계 지역들을 분열시켜 몽골 민족의 단합을 막고자 했다.[13] 1930년부터는 몽골과 부라티야 간의 인적 이동을 금지시켰으며 당시 몽골에서는 중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내몽골까지 독립하여 통일을 이루려는 범몽골주의 움직임이 대세였지만 소련은 이마저도 좌절시켰다.
중국의 일부로 계속 남아 있던 내몽골은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본군이 침략해 내몽골 동부 흥안성을 포함하는 만주국, 내몽골의 나머지 지역에 몽강연합자치정부라는 괴뢰 국가들을 세웠다.
소련에서 대숙청의 광풍이 불던 1937년 스탈린은 몽골에서도 '사회주의 혁명‘을 목적으로 대대적인 정치적 피바람을 일으켰고 1937년에 시작한 이 피바람에 3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또다시 죽어 나갔다.
1939년 할힌골 전투가 벌어졌으나 그 밖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풍파를 비교적 조용히 지나갔다.
1945년 8월 9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뒤늦게 허겁지겁 극동 전쟁에 참전한 소련의 만주 작전으로 만주국, 몽강국은 축출되었다. 당시 관동군과 꼭두각시 만주군 그리고 몽골기병대로 조직된 몽강국 군대는 소련군의 기병 및 기갑, 기계화보병에 귓밥도 안 되고 발렸고 아이신기오로 푸이와 몽강국 주석이었던 데므치그돈로브 두 사람은 소련 공수부대에 포로로 잡혀 전범 재판을 받는 신세로 전락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전후 처리 때 스탈린은 (외)몽골이 소련의 사실상 보호국으로서 독립하는 것을 다른 연합국으로부터 승인받으려고 했지만 정상적인 독립도 아니고 소련이 사실상 속국으로 몽골을 지배하려는 것을 용인받으려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결코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그러나 소련이 독일과의 전쟁에서 흘린 처절한 희생에 대한 보상의 측면 등을 주장하며 결국 미국, 영국이 마지못해 이를 승인했으며 중화민국의 장제스도 처음에 몽골 전체에 대한 중국의 영유권을 주장했지만 애초에 장제스는 그동안 외몽골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던 소련에 강경대응하지 않아 왔기도 했고 이번에도 결국 내몽골에 대한 중국의 점유권을 계속 인정받는 선에서 외몽골이 사실상 소련의 위성국으로서 독립하는 것을 인정했다. 스탈린도 처음에는 표면적으로 내몽골까지 포함한 몽골 전체의 독립을 주장하였지만 몽골이 적당히 분열되어야 속국으로 다루기 편하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내몽골의 중국 지배를 빠르게 승인했다.
그리하여 1946년 (외)몽골은 국제적으로 독립을 공식 승인받았지만 몽골의 독립은 껍데기만 독립이었을 뿐 국제 사회에서는 몽골을 소련의 속국으로 여길 뿐 제대로 된 독립국 대우를 하지 않았다. 단적으로 몽골은 1946년 유엔 가입 신청을 했지만 거부되었는데 이는 외견상 서구 국가들의 반대로 거부된 것이지만 몽골이 철저한 속국으로 남길 바랬던 소련도 몽골의 UN 가입을 돕지 않았다. 심지어 제2세계 맹우국들도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한편 내몽골은 1947년 5월 1일 중국공산당의 행정개혁으로 내몽골 자치구가 설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욤자깅 체뎅발
1952년 처이발상이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의사에게 치료를 받다가 의문사했고 스탈린은 처이발상의 후계자로 욤자깅 체뎅발을 지명했는데 독재자가 된 체뎅발은 32년간 몽골을 철권 통치했다. 체뎅발 치하 몽골은 소련의 16번째 공화국으로 불릴 만큼 더욱 철저한 친소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다.
몽골의 이러한 철저한 소련 속국화는 일정 부분은 외부 요인, 특히 중국에 대한 반감 때문이기도 했다. 1949년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이 승리하여 중국이 공산화되자 새로 정권을 잡은 마오쩌둥은 이후 소련과 대립하면서 (외)몽골에 대한 중국의 영유권을 다시 주장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체뎅발은 더욱 맹목적인 친소 정책을 펼쳤다. 결국 중소결렬이 일어났고 이후 중국과 몽골의 관계도 더욱 악화되었다.
몽골은 독립 및 소련 종속 이후 사실상 전쟁을 겪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위성국으로 소련이 연관된 여러 전쟁에 참전해야 했는데 이는 인구가 부족했던 몽골에 적잖은 부담과 희생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소련의 16번째 공화국 소리를 들을 정도로 철저하게 인민들을 억압하면서 소련 똥구멍을 핥아줬던 체뎅발은 1984년 소련에 의해 강판당했고 모스크바에서 사실상 가택연금 상태로 지내다가 전임자와 마찬가지로 모스크바에서 주사를 맞던 중 갑자기 사망했다...
1984년 8월 소련은 체뎅발을 퇴임시킨 후 후임으로 잠빈 바트뭉흐를 서기장으로 임명했는데 바트뭉흐는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 깊은 친분이 있던 사이였다.
4.3. 민주화 이후
1990년 몽골 민주화 시위 당시 사진 |
아시아의 수많은 공산국가들의 체제 전환 중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손꼽힌다. 페레스트로이카를 본받아 80년대 후반부터 개혁, 개방 정책을 실시했고 소련의 붕괴와 발맞춰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하면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체제 전환에 성공했다. 다른 많은 공산권 나라들이 민주화 과정에서 크고 작은 혼란을 겪은 것에 비해 몽골은 몽골인민혁명당(현 몽골 인민당)이 추한 꼴 보이지 않고 순순히 세계사의 흐름에 따라 민주주의로 이행해 민주화 이후에도 많은 국민들이 지지하고 있다.
민주화와 함께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자원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체제 전환 과정에서 여러가지 애로사항이 꽃피었고 어려움을 겪었지만 2000년대에 원자재값 상승 덕분에 급속한 성장세를 기록하게 되었다. 다만 경제 전반이 원자재에 너무 과하게 의존하다 보니 원자재값 동향에 따라 경제가 흔들리는 문제점이 있다.
한국 언론에 비친 몽골의 모습은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데, 텔레비전에서 몽골 이야기가 나오면 열에 아홉은 그저 초원에서 양이나 치고 염소젖이나 짜먹고 게르에서 거주하는 장면밖에 안 나온다. 마치 외국에서 대한민국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를 내보내면서 시골에서 밭 갈고 소 몰고 돼지 키우는 장면만 줄창 틀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때문에 잘 모르는 사람은 대한민국이 아직도 농사만으로 밥 먹고 사는 나라인 줄 잘못 알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몽골도 엄연히 도시가 있는 나라다. 단지 개발이 덜 된 나라인 탓에 '촌'이 좀 더 많을 뿐이다. 한국의 남매 가수 AKMU의 사례에서 이러한 편견을 단적으로 엿볼 수 있다. AKMU는 부모님이 개신교 선교사라 어렸을 때부터 몽골에서 살았는데, 처음에 몽골에 간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소위 몽골의 스테레오 타입, 즉 게르와 초원, 양과 함께하는 생활을 상상했으나 현실은 아파트에서 생활하게 되었다고 했다.
[1]
영상에 오류가 하나 있는데
요나라는 몽골 초원이 아니라 이름대로 요하 유역에서 흥기한 나라다. 몽골과 거란은 같은 민족은 아니지만 둘 다
선비족 계열의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이며 같은 뿌리의 다른 민족으로 볼 수 있다.
[2]
사슴이 새겨진 거석 유적. 무덤 앞에 세워진 일종의 비석으로 사슴이 새겨져 있어 사슴돌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3]
■ 기원전 2세기경 흉노 제국의 세력권 ■ 남흉노 ■ 선비족
[4]
당시 월지는 이미 한 차례 흉노에게 패배해
간쑤성 일대에 재정착해 살고 있었는데, 묵돌과의 전쟁에서 또 패하면서
아무다리야 강 계곡 일대를 따라 아래로 남서부로 쫒겨났다. 이렇게 쫒겨난 월지인들은
박트리아,
이란, 최종적으로는 저아래
인도까지 흩어져 재정착한다.
[5]
이렇게 동화된 흉노는 또다른 분열기를 불러온다.
서진 말 혼란기를 틈타 남흉노 선우의 후손인
유연이 반란을 일으켜 서진을 무너뜨리고
전조를 세움으로써
5호16국시대를 개막했기 때문. 흉노는
전조와
후조로 중국 대륙에서 명맥을 이어갔지만 오래 못가고 모두
북위에게 멸망하며 완전히 소멸됐다.
[6]
잔존 세력이 서역으로 도주하여
서요(카라 키타이)를 세웠다.
[7]
그들과 화친하기 위해 그들의 족장과 결혼시킬 자신의 딸을 데려가다가 붙잡혔다.
[8]
목마에 못을 박아 죽였다고 한다.
[9]
근데 미국 학교에선 칭기즈 칸을 중국 역사라고 가르친다. 참으로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10]
카마그 몽골의 제2대 군주였던 암바가이 칸의 후예들이었다.
[11]
한국에선
내정간섭으로 배우지만 속국 내지는 속령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12]
훗날
담딘 수흐바타르 시대에 몽골을 지배하고 있던
복드 칸이 바로 8대 젭춘담바다.
[13]
부랴티아는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 러시아 영토였다. 네르친친스크 조약 때도
부랴티아는 러시아 영토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