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7 12:03:18

힐리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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頡利可汗
Illig Qaghan
(? ~ 634년)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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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돌궐의 제11대이자 마지막 가한.

2. 생애

620년에 처라가한이 붕어한 후, 아들인 아사나오사가 추하고 약하다는 이유로 의성공주가 폐위시키면서 가한으로 옹립되었으며, 10월 26일에 사자를 파견해 당나라에 처라가한이 죽은 것을 알렸다. 힐리가한은 부형들의 자산을 계승해 강성해지자 중국을 공격할 생각을 가졌으며, 의성공주를 그의 처로 삼았다. 왕문소가 수양제의 손자이자 양간의 아들인 양정도를 받들어 신생 제국인 당을 공격해야 한다고 하자 이에 수긍했다.

힐리가한은 당나라에게 후한 대우를 받았지만, 요구하는 것에 만족함이 없으면서 말투도 교만하게 했다. 621년 4월 12일에 안문을 노략질했다가 이대은의 공격을 받자 도망갔다. 4월 21일에 당고조가 한양공 이괴를 파견해 황금과 비단을 뇌물을 주자 힐리가한은 이괴에게 절을 시켰지만 하지 않자 그를 붙잡아 머물게 했으며, 622년에 당고조가 다시 사신을 보내서 뇌물을 바치고 결혼을 허락하자 이괴, 정원숙, 장손순덕 등을 돌려보냈다.

3월 19일에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우호관계를 맺으면서 당나라에서 억류한 사신들을 돌려보냈으며, 병주총관 유세양이 안문에 주둔하자 고개도, 원군장과 함께 공격했다. 유흑달과 함께 대주총관 이대은을 공격하면서 신성을 포위하고 4월 21일에 격파한 후 죽였으며, 8월 6일에는 변경을 노략질하기 시작해 무려 150,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7일에 안문, 10일에 병주를 노략질하고, 별도로 원주를 노략질했다.

그러나 이자화의 공격을 받자 화의를 요청했다가 양읍왕 이신부, 분주자사 소의 등의 공격을 받아 격파되었으며, 당고조가 정원숙을 파견해 약속을 어긴 것을 책망하자 철수했다. 623년에 원군장이 마읍을 공격했다가 고만정에게 격파되자 군사를 파견해 마읍을 다시 공격했다가 사자를 파견해 혼인을 요청했고, 당나라가 포위를 풀면 혼인할 수 있다고 하자 풀려고 했는데, 의성공주의 만류로 공격을 계속해 마읍을 함락시켰다.

625년 여름 6월 25일에 영주를 노략질했고, 가을 7월 17일에는 상주를 노략질했으며, 당군이 돌궐군을 격파하자 7월 26일에 사자를 파견해 화친을 요청하고 퇴각했다. 626년에는 여름 4월 20일에 영주의 협석에서 이정과 아침부터 오후까지 싸우다가 물러갔고, 8월 1일에 사자를 파견해 화친을 청했다.

8월 24일에 돌궐이 고릉을 노략질했다가 8월 26일에 울지경덕이 경양에서 격파하면서 아사덕오물철을 붙잡고 1,000여 명이 죽는 불리한 상황이 되었다. 8월 28일에 힐리가한이 직접 나아가서 위수의 편교 북쪽에 도착했으며, 집실사력을 파견해 당나라 조정에 조현하게 했다가 당태종으로부터 위수에서 약속을 어긴 것을 책망받았다. 이에 힐리가한은 화의를 청했다가 8월 30일에 태종이 성의 서쪽에 행차해 백마의 목을 베는 것을 통해 편교 위에서 맹약을 맺자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백마지맹).

힐리가한은 자주 돌리가한의 군사를 징발했고, 이로 인해 돌리가한과 다투게 되어 628년에 돌리가한을 공격했는데, 이후 돌궐의 여러 성들 대부분이 힐리가한을 배반하고 쉬르-타르두쉬( 설연타)에게 귀부하면서 세력이 약해졌다. 쉬르-타르두쉬, 위구르(회흘), 바이르쿠( 발야고) 등의 공격을 받아 군사를 파견했지만 패배하자 돌궐 사람들은 더욱 흩어졌으며, 서돌궐의 통엽호가한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혼인을 요청하자 당의 공주를 맞아들이려면 우리나라(동돌궐) 한 가운데를 지나가야 한다고 협박해서 성사시키지 못하게 했다.

630년에 당나라에서 이정과 이세적 등을 보내 돌궐을 공격하여 정양 및 음산 등에서 돌궐군이 격파되자 귀부하기를 요청하면서 막북으로 도망가려고 했다. 그러나 당군이 돌궐을 공격했고 돌리가한을 소가한으로 삼았다. 이에 힐리가한은 토욕혼으로 달아나려고 했다.

하지만 이도종이 군사를 이끌고 아사나소니실을 압박하여 힐리가한을 잡게 했는데, 힐리가한은 몇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도망가서 계곡에 숨었다가 아사나소니실의 추격으로 붙잡혀 장안에 호송되었다. 힐리가한은 당군에 붙잡힌 후 울적하고 뜻을 얻지 못해서 집안 사람들과 자주 마주하면서 눈물을 흘려 수척해졌는데, 당태종이 이를 불쌍히여겨 괵주자사로 삼았지만 사양했고, 그후 우위대장군에 임명되었다.

633년에 당태종이 옛 미앙궁에서 거나한 술자리를 마련하자 태종의 명령으로 일어나서 춤을 췄다. 634년에 1월 10일에 사망했다.

훗날 고구려가 멸망하고(668) 당나라로 끌려온 보장왕이 사망한 뒤 힐리가한의 무덤 옆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