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8 00:51:48

제4차 하리코프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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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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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하리코프 공방전/루먄체프 작전
러시아어: Белгородско-Харьковская стратегическая наступательная операция «Румянцев»[1]
독일어: Vierte Schlacht um Charkow[2]
영어: Belgorod–Kharkov strategic offensive operation
제2차 세계 대전 동부전선의 일부
쿠르스크 전투의 일부
파일:쿠르스크에서 소련군의 반격.svg
쿠르스크 남북으로 반격을 시작하는 소련군
시기
1943년 8월 3일 ~ 23일
장소
소련 벨고로드 하리코프 일대
교전국 [[틀:깃발|]][[틀:깃발|]][[소련|]]
지휘관 [[틀:깃발|]][[틀:깃발|]][[니콜라이 바투틴|]]
(보로네시 전선군 사령관)
[[틀:깃발|]][[틀:깃발|]][[이반 코네프|]]
(스텝 전선군 사령관)
[[틀:깃발|]][[틀:깃발|]][[에리히 폰 만슈타인|
에리히 폰 만슈타인
]]
(남부 집단군 사령관)
[[틀:깃발|]][[틀:깃발|]][[헤르만 호트|]]
(제4기갑군 사령관)
[[틀:깃발|]][[틀:깃발|]][[에르하르트 라우스|
에르하르트 라우스
]]
(제11군단 사령관)
결과
소련의 승리
소련이 벨고로드와 하리코프 탈환
영향
드네프르 전역의 시작
전력 병력 1,144,000명[3]
포 13,000문
전차/자주포 2,439대
항공기 1,500기
병력 350,000명
포 3,000문
전차/자주포 237대[4]
피해 규모 전사/실종 71,611명
부상 183,955명
전차/자주포 1,864대
야포 423문
항공기 153기[5]/942기[6]
전사 10,154명
실종/포로 9,244명
부상 32,326명
항공기 147기

1. 개요2. 1943년 여름의 남부 전선
2.1. 소련군2.2. 독일군
3. 전투 서열
3.1. 소련군3.2. 독일군
4. 전개
4.1. 전초전 : 롤란드 작전과 미우스 공세4.2. 양측의 전력4.3. 벨고로드 탈환4.4. 4기갑군과 켐프 분견군 사이의 돌파구4.5. 하리코프 탈환
5. 양측의 피해6. 결과

[clearfix]

1. 개요

제4차 하리코프 공방전[7] 혹은 벨고로드-하리코프 공세작전 "루먄체프"[8]는 쿠르스크 전투에서 소련군의 남쪽 측면에서의 반격 작전이며 공세 결과 소련군은 벨고로드 하리코프를 탈환했다. 이 전투는 하리코프를 차지하기 위해 발생한 네 차례에 걸친 공방전 중 마지막이었으며 독일군은 이후 다시는 하리코프로 돌아오지 못하고 드네프르 강으로, 강 너머 루마니아와 폴란드로 기나긴 퇴각 작전을 펼치게 된다.

2. 1943년 여름의 남부 전선

2.1. 소련군

소련군이 준비한 반격 작전, 쿠투조프 작전과 루먄체프 작전은 봄에 스타브카에서 쿠르스크에서 먼저 방어를 하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준비한 공세였다. 따라서 방어만큼이나 오래 준비된 작전이었으며 확실한 우위를 위해 방어에 참여하지 않은 부대들이 진행할 예정이었다. 북쪽에서는 서부 전선군과 브랸스크 전선군, 남쪽에서는 스텝 전선군이 그 역할을 맡았으며 좀 더 남쪽에서는 남서 전선군과 남부 전선군이 조공을 담당했다. 실제로 소련군은 독일의 공세가 끝나기 전에 이미 반격을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독일은 공세를 멈추게 된다.

하리코프는 소련에게 있어 지나가는 목표였을 뿐 전략적 목표가 아니었다. 소련군은 독일 제4기갑군을 우회하여 드네프르 강에 먼저 도달한 뒤 42-43년 겨울에 실패했던[9] 남부 집단군 섬멸을 원하고 있었다. 이 시점부터 소련군은 수적 우세, 특히 항공과 정찰의 우세를 바탕으로 적의 거점을 우회하여 후방으로 파고드는 전술을 펼치게 되는데 이는 독일이 즐겨썼던 방식이었다.

2.2. 독일군

북쪽에서 이미 공세가 막히고 쿠투조프 작전으로 소련군의 반격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독일군은 이미 오룔 돌출부를 포기한 상태였지만 히틀러는 하리코프와 도네츠 강 일대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군의 손실은 소련군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었으며 특히 남쪽에서의 공세가 훨씬 성공적이었으므로 만슈타인 역시도 보유한 예비 기갑전력으로 아직까진 소련군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7월 17일부터 남서 전선군과 남부 전선군이 미우스 강의 6군을 향해 가한 공세도 비교적 잘 막고 있었다.

문제는 소련군이 예상과 달리 후방에 거대한 전략 예비대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기갑전력은 많이 차출됐지만 스텝 전선군에는 여전히 막강한 전력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남아있었다. 독일군은 소련군이 조공으로 펼친 미우스 공세를 막기 위해서 기갑군단 2개를 남쪽으로 보냈고 이로 인해 독일군의 공세는 끝나버렸지만 소련군도 예비 전력을 다 소모했다고 생각했기에 잠시 숨을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착각이라는 것이 밝혀지는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3. 전투 서열

3.1. 소련군[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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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독일군[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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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전개

4.1. 전초전 : 롤란드 작전과 미우스 공세

쿠르스크 전투가 한창이던 7월 10일,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했다. 육군참모총장 쿠르트 차이츨러 보병대장과 육군최고사령부 작전부장 아돌프 호이징거 중장은 작전을 계속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소련군이 12일부터 쿠투조프 작전을 시작하면서 브랸스크 전선군과 서부 전선군이 오룔 북동쪽에서 공세를 시작하자 중부 집단군은 공세를 지속할 힘을 잃었다. 육군최고사령부의 많은 참모장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6일, 히틀러는 공세를 중단하고 2SS기갑군단을 후방으로 빼내 이탈리아로 이동시킬 것을 명령했다. 클루게는 공세를 지속할 여력이 없었기에 찬성했으나[24] 만슈타인은 강력히 반대했다. 만슈타인은 남부집단군이 소련군의 1,2차 방어선을 돌파한 상태이고 이제 소련군 후방으로 진격하기만 하면 된다고 판단하고 있었다.[25]

더군다나 남부집단군은 24기갑군단을 예비로 보유중이었으며 적이 공격을 할 것으로 예상되는 하리코프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공세를 유지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중부집단군이 공세를 중단한 상황에서 그것은 불가능했고 대신 남부집단군만으로 작은 포위망을 만들어 적의 공세 가능성을 제거할 롤란드 작전(Operation Roland)을 히틀러의 허가를 받아 14일부터 시작했다. 하지만 17일에 남서 전선군과 남부 전선군이 미우스 강에서 공세를 각각 시작하자 이마저도 불가능해져버렸다. 만슈타인은 4기갑군과 켐프 분견군을 7월 5일의 작선 개시선으로 후퇴시켰고 24기갑군단[26]과 2SS기갑군단[27]을 남쪽으로 즉시 증원했다. 스탈린은 독일군의 공세가 중단되자 23일부터 루먄체프 작전을 시작할 것을 원했으나 주코프의 만류로 8월 3일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미우스 방면의 공세는 완벽한 실패였지만[28] 그나마 남아있는 독일군 예비를 모두 불러오는데 성공했다.

4.2. 양측의 전력

7월 31일 기준으로 남부집단군이 보유 한 전차는 1,348대였으며 이 중 가동 가동한 전차는 625대였다. 추가로 346대의 돌격포를 보유중이었으며 이 중 251대가 가동 가능한 상태였다. 4기갑군과 켐프 분견군은 15개 보병사단과 4개 기갑사단을 보유중이었으며 제503중전차대대[29]와 제10기갑여단[30], 3개 돌격포 대대를 포함해 가동 가능한 228대의 전차와 78대의 돌격포를 보유중이었다. 만슈타인은 8월 1일, 하리코프 방면에서 적의 공세가 임박했다고 보고했으나 이 정도로 거대한 규모일 줄은 모르고 있었다.

공세 시작 시점에서 주력은 보로네시 전선군이었다.[31] 보로네시 전선군은 스텝 전선군으로부터 27군과 47군을 증원받아 524,000명의 전투병력과 2,171대의 전차 및 자주포, 753기의 항공기를 보유중이었으며 주공은 벨고로드 북쪽에 배치된 5,6근위군과 1전차군[32], 제5근위전차군이었으며 목표는 하리코프에서 북서쪽으로 약 50km 떨어진 부고두호프였다. 전선군 우익에는 3개 전차군단[33]을 증원받은[34] 27군과 40군이 하리코프에서 북서쪽으로 100km 떨어진 아크티르카를 향한 공세를 준비했다. 전선군 우익의 38군과 47군은 측면에 대한 조공을 담당했다. 벨고로드 동쪽에서 공세를 펼칠 스텝 전선군은 북쪽부터 53군, 69군, 7근위군을 배치했으며 전투병력 198,000명과 501대의 전차 및 자주포, 769기의 항공기를 보유중이었다. 하리코프 동쪽에서는 남서 전선군의 57군이 조공을 펼칠 예정이었으며 추가로 스타브카가 후방에 4근위군을 예비대로 보유하고 있었다. 소련군은 전체적으로 50개 사단과 8개 전차군단, 4개 기계화군단을 보유중이었다.

4.3. 벨고로드 탈환

3일부터 소련군의 공세가 시작됐다. 루미안체프 작전이라 이름 붙은 이 공세는 하리코프 북쪽과 서쪽에서 진행된 두 개의 공세로 구성되었으며 하리코프 북쪽과 북서쪽에서는 보로네시 전선군이 벨고로드-보고두호프 공세(Belgorod-Bogodukhov Ofeensive)를, 동쪽에서는 스텝 전선군이 벨고로드-하리코프 공세(Belgorod–Kharkov offensive)를 시작했다. 독일군은 이정도의 대규모의 공세가 있을거라고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공세는 첫 날부터 어느정도 성과가 있었다. 4기갑군과 켐프 분견군을 연결하고 있던 52군단은 곧바로 밀려났다. 그러나 소련군의 원대한 계획에 비해서는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이었다. 5근위전차군의 경우 목표가 40km 진격인데 비해 20km를 진격하는데 그쳤으나 1전차군에 비하면 나은 성과였다. 적의 규모가 심상치 않자 만슈타인은 남쪽에 있던 3기갑사단과 2,3SS기갑척탄병사단을 3기갑군단에 배속시켜 증원했고 추가로 5 SS기갑척탄병사단도 북쪽으로 이동시켰다.

4일이 되자 제1전차군과 제5근위전차군은 적과의 교전을 피하고 후방으로 침투했다. 그러나 독일 기갑사단들과 8항공군단의 지원으로 진격은 지지부진해졌다. 제1전차군 사령관 카투코프는 31전차군단을 예비로 보유하고 제6전차군단에게 교전에 휘말리지 말 것을 명령했으나 제6전차군단이 전투에 휘말리는 바람에 3기계화군단만으로 진격을 이어나가야 했다. 5근위전차군의 사정은 더 나빴다. 18전차군단은 6기갑사단의 반격에 막혔고 29전차군단의 진격도 느려지자 로트미스트로프는 5근위기계화군단을 투입했다. 그런데 바투틴은 로트미스트로프에게 북동쪽 벨고로드 공격을 지원할 것을 명령했다.

같은 날, 코네프의 스텝 전선군은 벨고로드를 공격하고 있었다. 제일 오른쪽의 제53군은 제1기계화군단을 배속받아 가장 강력한 전력을 보유했고 공세의 선봉에 섰다. 5일이 되자 제53군이 북쪽에서, 제69군이 서쪽에서, 제7근위군이 남쪽에서 공격해왔고 동쪽에서도 5근위전차군이 공격해왔다. 제503중전차대대가 막아섰으나 저녁이 되자 도시는 소련군에게 넘어갔다. 제5근위기계화군단이 동쪽으로 이동한 탓에 제5근위전차군의 진격은 매우 느려졌고 바투틴은 분노했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보로네시 전선군의 지원 없이도 벨고로드는 소련군이 탈환하는데 큰 지장이 없는 상황이었다. 서쪽에서는 제27군과 40군이 제4기갑군 좌익을 강타했다. 제11기갑사단은 곧바로 밀려났고 제6기갑사단이 간신히 막는데 성공했다.

6일, 전선 중앙의 제6근위군과 제6전차군단은 제일 성공적으로 진군하고 있었으나제 5근위전차군의 진격이 지지부진해 카투코프는 제3기계화군단의 좌면 보호를 위해 배치해야했다. 새로 도착한 제3기갑사단은 제503중전차대대와 함께 하리코프 북서쪽으로 약 35km 떨어진 졸로체프(Zolochev)에서 반격을 가했다. 167보병사단이 증원되면서 9일까지 5근위전차군이 이 근방에 붙잡혀있자 바투틴은 더이상 5근위전차군의 진격이 가망이 없다고 보고 후방으로 빼냈다. 3일간 5근위전차군은 167대의 전차와 자주포를 손실했다.[35] 이후 5근위전차군은 스텝 전선군에 배속된다.

제5근위전차군이 졸로체프에 묶인 사이 보로네시 전선군은 주공을 제1전차군 방면 남서쪽으로 바꿨고 전선군 우익은 우회한 골로브치노(Golovchino)의 독일군을 먼저 섬멸하기로 한다. 이 근방의 독일군은 제11,19기갑사단과 제57,332,255보병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소련군은 제5근위군의 제32근위소총군단과 제6근위군, 제27군의 제23소총군단을 투입했다. 이와 함께 31전차군단이 후방으로 침투해 8월 6일, 5개 사단이 포위망에 갇혀버렸다. 독일군은 전선에 거대한 돌파구가 뚫린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다행히도 오룔에서 달려온 그로스도이칠란트 기갑척탄병사단이 7일에 27군의 선봉을 막아섰고 10기갑척탄병사단과 함께 포위망에서 사단들을 구해냈다. 아크티르카(Akhtyrka) 근처에 전선이 복구되기는 했지만 아크티르카와 하리코프 사이의 전선은 거의 비어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수리중인 전차를 대량으로 손실했으며 특히 10기갑여단은 51대대 소속 판터를 무려 75대나 손실했으며 39전차연대 정비부대 역시 수리중인 판터를 35대나 손실했다.[36] 같은날 제1전차군은 보고두호프(Bohodukhov)를 탈환했으며 이 근방은 아직 독일군 예비대가 도착하지 않은 유일한 지역이었다. 소련군은 이제 폴타바- 하리코프 철도를 차단하기 직전이었다.

8일에 전과 확대를 위한 3기계화군단이 투입됐으나 막 도착한 제2SS기갑척탄병사단 "다스라이히"가 막아섰다. 그러자 카투코프는 31전차군단을 투입했음에도 추가로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했다. 바투틴은 기동부대를 방어 전투에 휘말리게 하지 말라고 재촉했으나 카투코프는 최소한의 병력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공격에 투입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바투틴은 10일에 스탈린으로부터 하리코프를 빨리 점령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10일이 되자 제3SS기갑척탄병사단 "토텐코프"와 제5SS기갑척탄병사단 "비킹"이 도착했다. 11일 기준으로 각 사단이 보유한 전차는 다스 라이히가 81대[37], 토텐코프가 55대[38], 비킹이 48대[39]였으며 스텝전선군으로 재배치 된 5근위전차군이 106대[40]를 보유하고 있었다. 공세 시작 후 제5근위전차군은 이 시점까지 254대[41]의 전차 및 자주포를 손실한 상태였다.

4.4. 4기갑군과 켐프 분견군 사이의 돌파구

파일:아크티르카 전선.jpg
만슈타인은 하리코프를 지킬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지만 더 급한 일이 있었다. 호트는 4기갑군과 분견군 사이의 틈을 메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8월 8일이 되자 두 야전군 사이의 간격은 55km까지 벌어졌고 자칫하면 남부집단군의 전선 전체가 붕괴될 위험한 상황이었다. 다행히도 아직 공세 작전에 익숙하지 않은 소련군은 이 돌파구를 이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11일이 되자 1전차군은 폴타바-하리코프 철도의 일부를 차단하는데 성공했고 같은 날, 하리코프에 있던 독일군이 서쪽으로 반격을 개시했다. 소련군의 측면에서 다스라이히와 토텐코프는 1전차군의 선봉을 포위하여 섬멸했고 철도를 다시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스텝전선군이 하리코프 북쪽과 서쪽으로 접근하고 1전차군을 선두로 보로네시 전선군이 4기갑군과 켐프 분견군 사이에 돌파구를 뚫은 상황에서 켐프는 하리코프에서 철수할 것을 주장했고 12일에 해임됐다. 히틀러는 반드시 도시를 지키라고 명령했고 14일에 오토 뵐러 보병대장이 분견군 사령관이 되면서 도시 수비를 담당하게 됐다.

12일 기준으로 1전차군은 여전히 268대의 전차 및 자주포를 보유중이었다. 거기에 5근위전차군단이 추가로 배속됐다. 그날 오후부터는 5근위전차군이 하리
코프 서쪽으로 공세를 가해왔다. 이번에도 다스라이히와 토텐코프가 막아섰다. 5근위전차군은 큰 피해를 입었고 독일군은 오히려 공세로 전환해 소련군을 보고두호프까지 밀어냈다. 소련군은 공세를 중단하고 방어로 전환했으며 6근위군의 대전차부대들을 지원했다. 보고두호프에서의 전투는 14일까지 이어졌다. 소련군의 방어가 강력해지자 독일군은 남서쪽의 비소코삘랴(Vysokopillya)로 목표를 바꿨다.

15일부터 독일군 SS사단들은 공세를 시작했고 6전차군단을 돌파해 6근위군의 후방으로 나아갔다. 소련군은 당황했지만 살짝 북쪽으로 물러나 재정비했고 17일이 되자 독일군은 공세를 중단해야했다. 4기갑군과 약간 가까워지기는 했지만 결국 하리코프 서쪽의 소련군을 몰아내는 것은 실패했다. 여전히 아크티르카와 비소코삘랴 사이의 전선은 거의 비어있었다. 따라서 상황은 여전히 심각했다. 27군은 4근위전차군단과 5근위전차군단을 앞세워 서쪽으로 진격중이었으며 17일 기준 각각 65대와 131대의 전차 및 자주포를 보유중이었다.

독일군은 이 돌파구를 차단하기 위해 아크티르카에 전력을 집중하여 반격을 준비했다. 그로스도이칠란트 기갑척탄병사단과 7, 11, 19기갑사단, 10기갑척탄병 사단이 모였고 전차 및 자주포 400대를 보유중이었다. 그리고 18일에 공세를 개시했다. 소련군의 대처도 신속했다. 3근위기계화군단을 앞세운 47군이 아크티르카를 북쪽에서 우회하여 독일군 후방을 위협했으며 이 지역을 지키고 있던 24기갑군단의 57,68 보병사단을 밀어냈다. 4기갑군은 19기갑사단을 북쪽으로 이동시켜야 했다. 그럼에도 24기갑군단은 계속해서 소련군을 돌파했고 4,5근위전차군단의 일부와 71,241소총사단이 포위되었다.

소련군은 스타브카에서 보로네시 전선군으로 배속된 4근위군을 이 근방에 배치에 방어선을 구축했고 19일에 140대의 전차 및 자주포를 보유하고 있던 1전차군과 5근위전차군의 29전차군단을 증원했다. 20일, 마침내 그로스도이칠란트와 토텐코프가 만나면서 빈약하게나마 일단 전선을 연결하는데는 성공했다. 이때까지 남부집단군은 9개 보병사단과 1개 기갑사단을 증원받았고 덕분에 전선에서 SS사단들을 후방으로 빼서 재편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소련군 4,5근위전차군단은 큰 피해를 입었고 22일이 되자 전차가 19,37대로 줄어들어 편제의 10% 수준이었다. 47군의 측면 공격은 24기갑군단의 공세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4.5. 하리코프 탈환

4기갑군이 어떻게든 전선을 연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분견군은 하리코프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12일 기준으로 증원군을 받은 11군단이 도시 방어와 북쪽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42군단이 동쪽을 담당하고 있었다. 독일군은 도시 북쪽과 동쪽에 7개 보병사단[42]과 2개 기갑사단[43]을 배치했다. 소련군은 북서쪽에서 5근위전차군, 북쪽에서 53,69,7근위군, 동쪽에서 57군이 도시를 공격할 예정이었다. 만슈타인은 전선 복구를 위해 후퇴하기를 원했지만 히틀러는 켐프를 해임시키는 것으로 대답했고 도시 방어를 위해 병력이 묶여있는 것이 집단군 전체의 붕괴를 불러올 수 있다는 말에는 대답을 회피했다.

13일부터 도시 북쪽 외곽에 도착한 소련군과 독일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양측은 밤낮가리지 않고 싸웠다. 어느정도로 치열했는지 17일이 되자 7근위군은 일부 연대가 600명선으로 줄어들어 편제의 20% 수준이었으며[44] 1기계화군단은 보유 전차가 44대로 1개 여단이 안 되는 규모로 줄어든 상황이었다. 독일군이라고 다를 건 없어서 일부 중대는 30명대로 줄어든 상태였다.

18일, 57군이 도시를 남쪽에서 우회하기 시작했고 북쪽에서 도시를 우회한 53군도 도시 서쪽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소련군은 69군을 우익의 53군 방면으로 집중시켰고 20일에 5근위전차군을 다시 남쪽으로 이동시켜 공세에 탄력을 더했다. 로트미스트로프는 29전차군단만 보고두호프에 남겨두고 5근위기계화군단과 18전차군단을 하리코프 서쪽에 투입했다. 그 사이 19일부터는 27군이 다시 아크티르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판터대대를 증원받은 다스라이히가 또다시 5근위전차군을 막아냈지만 도시가 3면으로 포위되면서 11군단은 더 이상 스텝 전선군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22일에 분견군은 8군으로 재편됐고 만슈타인은 히틀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뵐러에게 하리코프를 포기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하리코프를 지키려고 도시에 병력을 계속 유지한다면 간신히 연결한 4기갑군과 8군 사이의 연결점이 아예 끊겨버릴 위험히 있었다. 만슈타인에게는 하리코프보다 남부 전선 전체를 유지하는 것이 훨씬 중요했다. 게다가 보로네시 전선군의 가장 우익에 있던 47군이 4기갑군 좌익의 52군단을 향해 수미 남쪽에서 공세를 시작하면서 이번에는 4기갑군과 중부 집단군의 2군 사이의 전선이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날 오후부터 8군은 하리코프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23일, 소련군은 시가전 끝에 하리코프를 탈환했고 8군이 하리코프에서 철수하면서 4기갑군은 더 이상 유지할 가치가 없어진 아크티르카를 포기하고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 후방으로 물러났다. 이어서 27군이 도시를 탈환했다. 만슈타인의 관심은 이제 남쪽의 6군과 1기갑군으로 바뀌었다. 남서 전선군과 남부 전선군이 8월 13일부터 돈바스 공세를 시작하며 6군은 더 이상 버틸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북쪽의 4기갑군은 전선을 물린 덕에 27일까지 8군과 일단 다시 전선을 연결하는데는 성공했다.

5. 양측의 피해

소련군은 공세과정에서 피해가 매우 심각했는데 인력 손실이 독일군 대비 6~7배에 달했다. 물론 소련군의 보충 능력은 독일군을 압도했으나 소련군이라고 인력이 무한한 것은 아니었으며 이 시기 이후로 소련군은 가장 상태가 좋은 부대라도 편제의 2/3를 채우는 경우가 드물었다. 압도적인 전력에도 엄청난 피해가 발생한 원인은 포병에서 찾을 수 있다. 포병 전력 자체는 소련군이 훨씬 강력했으나 그렇다고 그게 화력 지원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소련군은 엄청난 포병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건 직사화력에 한해서였다. 소련군은 바르바로사 작전기 중곡사포와 중박격포를 대량으로 손실했으며 전쟁 끝나기 직전에야 41년의 손실분을 복구할 수 있었다.[45] 여기에 더불어 소련군은 무전기가 매우 부족했으며 포병관측부대도 매우 부실했다. 이 탓에 소련군은 진격하는 아군을 따라 간접화력지원을 할 수가 없었다.

이로인해 전간기에 독일 보병사단의 70% 수준이던 소련 소총사단의 화력은 42년이 되자 병력 자체는 1.3:1 수준임에도 화력 격차가 5:1로 벌어져버렸다. 이로 인해 소련군은 간접화력지원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포병전력을 집중시켰고 야전군 휘하에 포병사단, 전선군 휘하에 포병군단을 편성하여 포병을 철저히 집중적으로 운용했다. 따라서 전선 돌파 시에는 엄청난 화력의 집중으로 돌파가 용이해졌으나 이후 화력지원이 부실해 전과확대과정에서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으며[46] 이러한 중앙집권적인 운용은 기갑부대도 마찬가지라 급박한 전선에서 생긴 기회를 제대로 활용할 수가 없었다.[47]

전차의 손실도 역시 심각했다. 독일군의 전차 손실에 관한 정확한 자료는 없으나 7월 31일 기준 동부육군이 보유한 가동가능한 전차와 돌격포는 각각 734대와 651대였으며 8월 20일 기준으로는 621대와 487대로 247대가 감소했다. 동시기, 동부전선의 기갑전력은 쿠르스크 근방에 몰려있었으며 격전이 벌어지던 레닌그라드 근방[48]과 미우스 강 전선에는 기갑전력이 별로 없었으므로 큰 피해는 없었을 것이다. 결국 이 피해는 고스란히 쿠투조프 작전과 루미안체프 작전에서의 피해라는 이야기인데 여기에는 수리 혹은 이동중인 전차가 제외되어 있으므로 글랜츠의 경우, 루미안체프 작전에서의 독일 전차 손실을 240대로 추정한다. 소련군은 1,864대의 손실이 발생했으므로 8배에 가까운 교환비가 발생한 것이다. 이는 성채 작전기보다도 더 큰 피해를 입은 것이다. 항공기의 경우에는 소련 공군이 적극적인 작전을 펼치지 않아 큰 손실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6. 결과

소련군은 하리코프를 탈환했고 폴타바-하리코프 철도를 장악하면서 전술적 목표 자체는 달성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전선의 돌파구를 이용하여 남부집단군 후방으로 침투하는데는 실패하면서 전략적 목표 달성에는 실패했다. 독일군은 나중에 아크티르카 근방에 기갑부대를 제대로 지휘할 줄 아는 소련군 지휘관이 1명이라도 있었다면 4기갑군과 8군은 붕괴되었을 것이며 남부 집단군 전체가 위험에 처했을 거라고 평가했다. 소련군은 몇 주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이 이중 삼중으로 만들어 놓은 방어선에서 적을 막았지만 이번에는 역시 막강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던 독일군을 공격해야 했다. 항공전의 경우에는 소련 공군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데 비해 8항공군단은 주변의 모든 항공전력을 모아 적극적으로 작전을 펼쳐 소련군의 공세를 막는데 큰 공헌을 했다.

독일군은 어떻게든 일단 적의 공세 예봉을 꺾는데는 성공했다. 더군다나 소련군은 후방의 예비대를 동원한 공세였으나 독일군은 공세에 사용한 부대 그대로 방어를 펼쳐 거둔 성과였다. 그러나 이건 시작일 뿐이었다. 이미 8월 13일부터 2개 전선군이 돈바스 공세를 펼치고 있었으며 하리코프 탈환 3일뒤부터는 3개 전선군이 드네프르 강에 도달하기 위한 체르니코프-폴타바 공세를 시작했다. 제4차 하리코프 공방전은 드네프르 강 전투 드네프르-카르파티아 공세로 이어지는 남부 전선의 기나긴 공세의 시작일 뿐이었다. 독일군은 이후 8개월간 전선을 안정시키기 위한 처절한 방어전과 후퇴전을 이어나가야 했다.
[1] 벨고로드-하리코프 전략공세작전 "루먄체프" [2] 제4차 하리코프 전투 [3] 보로네시 전선군 739,000명, 스텝 전선군 464,600명 [4] 전투 시작 후 300대 정도가 곧바로 증원됐다. [5] 소련 측 기록 [6] 독일 측 기록, 실제로는 이것보다도 파해가 클 가능성이 높다. 자세한 건 쿠르스크 전투의 피해 규모 참고 [7] 독일측 명칭 [8] 러시아측 명칭 [9] 토성 작전 [10] 8월 1일 기준 [11] 8월 9일부터 스텝 전선군에 배속 [12] 8월 9일에 57군 증원 [13] 8월 26일에 대장으로 진급 [14] 8월 5일 기준 [15] 15일에 24기갑군단 증원 [16] 야전군 예비, 이후 8군에 배속 [17] 22일에 8군으로 개칭 [18] 17일부터 오토 뵐러 보병대장 [19] 7월 20일까지는 라우스 군단이었다. [20] 6월 12일부터 제2항공함대를 지휘하기 위해 지중해에 있었기 때문에 오토 데슬로 상급대장이 대신 지휘하고 있었다. [21] 쿠반 반도 담당 [22] 미우스 강과 도네츠 강 근방 담당 [23] 하리코프 일대 담당 [24] 그러나 2주 뒤, 무솔리니가 체포되면서 히틀러가 이탈리아 방면의 전략 예비를 확보하기 위해 돌출부 전면에서 철수할 것을 주장하자 이에는 반대했다. 2기갑군과 9군은 오랜 기간동안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한 상태였기에 이 방어선을 지연전도 없이 그냥 내주는 것은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25] 만슈타인은 스텝 전선군의 존재를 몰랐으므로 이 판단은 틀린 것이었다. 심지어 소련군은 예상보단 많은 예비대를 투입해야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그다지 많은 예비 전력을 투입한 것도 아니었다. [26] 17, 23, 비킹 [27] 군단본부와 LSSAH는 이탈리아로 이동했고 다스라이히와 토텐코프만 남쪽으로 이동 [28] 그냥 예비를 부르기 위한 조공이라기엔 너무 큰 규모였으며 스타브카의 기록을 볼 때 큰 기대는 안했지만 그래도 그 이상의 성공을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29] 가동 티거 8대 [30] 가동 판터 21대 [31] 공세에 참가할 대부분의 전력은 쿠르스크 전투 시작 이후 스타브카와 스텝 전선군에서 증원받았다. [32] 전차 및 자주포 450대 보유 [33] 전차 및 자주포 420대 보유 [34] 2개 전차군이 각각 2개 전차군단과 1개 기계화군단을 배속받아 전과 확대가 가능한 반면 전차군단만을 배속받은 27군은 적 전선 돌파와 측면 보호의 목적이 강했다. [35] 이 중 74대가 완전손실이었다. [36] 그동안 기갑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이 압도적인 교환비를 보여준 것은 훨씬 뛰어난 정비부대 덕에 완전손실의 비율이 낮은 덕분이었으나 이 시점부터 독일 기갑부대는 후퇴과정에서 수리가능한 전차들도 수거가 불가능한 경우가 많아 손실이 급증했다. [37] 3호 전차 17대, 4호 전차 26대, 6호 전차 8대, T-34 6대, 구난전차 4대, 돌격포 20대 [38] 3호 전차 9대, 4호 전차 22대, 6호 전차 7대, 구난전차 1대, 돌격포 16대 [39] 2호 2대, 3호 30대, 4호 10대, 구난 1대, 돌격포 5대 [40] T-34 88대, T-70 18대 [41] 111대는 완전손실 [42] 167,198,168,106,320,282,39 [43] 3,6 [44] 물론 공세 시작시점에서도 70% 수준이었으나 쿠르스크 근방의 소련군은 소련군 전체를 통틀어 가장 충원이 잘 된 편이었다. 소련군은 전쟁 내내 100%의 인원을 보유한 부대가 거의 없었으며 70~80%면 거의 최고의 지원을 받은 수준이었다. [45] 이 시기에 역시 대량으로 손실한 전차는 대부분이 경전차였으며 항공기 역시도 대부분이 구식이었다. 그 덕분에 42~43년이 되자 기갑전력과 항공전력은 복구가 가능했으나 포병과 같은 중장비는 그게 불가능했다. [46] 소련군 교리상 보병이 돌파구를 뚫는다는 것도 인명 피해 증가에 한 몫 했다. [47] 그래도 긍정적인 면이 있다면 독일군에 비해 수준이 매우 떨어지는 지휘관들의 능력을 중앙에서 통제하면서 커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48] 므가 공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