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Erhard Raus 에르하르트 라우스 |
출생 |
1889년
1월 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모라비아 변경백국 볼프라미츠 |
사망 |
1956년
3월 4일 (향년 67세) 오스트리아 빈 |
복무 |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 오스트리아군 • 독일 국방군 육군
{{{-1 6기갑사단 사단장
1기갑군 사령관3기갑군 사령관 SS 6기갑군 사령관}}} |
최종계급 | 상급대장 |
주요참전 |
•
1차 세계대전 • 제2차 세계 대전 |
서훈 | 곡엽 검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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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 출신의 독일 국방군 장군. 최종계급은 상급대장[1]2. 생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복무 시절 제1차 세계 대전을 보내면서 자전거 경보병 연대에 근무하였다. 종전 후 나치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병이 이루어질 때 적극적으로 가담한 인물로써 오스트리아 군경력을 인정받아 영관급 장교생활을 독일 국방군에서 이어가게 된다.18군에서 참모직을 맡던 1940년, 폴란드와의 전쟁을 치르는 동안 243보병연대장, 4기계화보병연대장, 6기갑사단 예하의 6기계화보병연대장 등을 역임하였다. 하지만 폴란드 침공에서 지휘하던 부대가 큰 전투를 치르지는 않았다.
폴란드 전역이 끝나고 바르바로사 작전 동안에는 동부전선에 배치된다. 북부집단군에 소속되어 있었던 6기갑사단에는 라우스의 전투단과 에리히 프라이어 폰 셴켄도르프의 전투단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6기갑사단은 발트 3국을 통과하여 레닌그라드까지 진격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셴켄도르프의 전투단이 장비의 열세로 인해 와해되었고 셴켄도르프도 전사하면서 6기갑사단은 중부집단군에 재배치된다.
재편성된 6기갑사단의 사단장으로 라우스가 지명되었고 태풍 작전의 주공을 담당하게 되었다. 라우스는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시외곽의 벙커라인을 돌파하여 240여개의 벙커를 점령하는 성과를 거두었고 이 때의 전공으로 철십자 기사십자 훈장을 수훈받았다.
이후 6기갑사단은 프랑스에서 다시 재보급 및 재편성하라는 명령으로 인해 동부전선에서 후방으로 재배치되게 되었다. 라우스는 사단 병력을 열차로 이동시키는 과정에서 철로에 파르티잔의 습격을 철저히 대비하여 병력의 손실을 최소화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재편성을 마친 6기갑사단은 다시 스탈린그라드 점령을 목표로하는 겨울폭풍 작전에 투입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로디온 말리놉스키의 2근위군의 공격을 막아내어 6군 전체가 포위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숫적으로 독일군이 역부족이었기 때문에 도시로의 진격이 불가능하였고 독일의 스탈린그라드 점령은 실패로 끝났다.
이후 라우스는 기갑대장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한스발렌틴 후베의 후임으로 1기갑군 사령관이 되었다. 몇달 뒤 1944년에는 헤르만 호트의 후임으로 3기갑군 사령관이 되면서 상급대장으로 진급하였다.
1945년에는 SS 6기갑군의 사령관으로 발령받으면서 포메른 지역을 사수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수행하게 되었다. 하지만 소련군이 포메른 지역으로 진공함과 동시에 히틀러는 라우스를 직위해제하였으며 이를 끝으로 사실상 전역하게 된다.
같은 오스트리아계인 로타르 렌둘릭이나 프란츠 뵈메, 알렉산더 뢰어와는 달리, 카를 에글제어[2]나 에밀 히크만, 알프레트 리터 폰 후비키와 마찬가지로 전쟁범죄와 관련하여 기소 소지가 없었던 라우스는 미군에 체포되었다가 금방 풀려났고 당시 연합군에 의해 통치되었던 오스트리아, 빈으로 돌아가 동부전선에서의 전황 및 평가와 관련된 서적을 집필하며 여생을 보냈다.
이후 1956년 67세를 일기로 빈에서 사망한다.
3. 대중매체
하츠 오브 아이언 4의 모드 카이저라이히에서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장군으로 등장한다.스틸 디비전 2의 도펠코프 작전 캠페인에서 독일측 플레이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