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에트 연방군 병과상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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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ddd> 제2차 세계 대전기 니콜라이 보로노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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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 | ※ 진급시기 기준 세분, 2차 대전기는 전간기부터 1945년 8월까지 해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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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소비에트 연방 초대 제5근위전차군 사령관
파벨 로트미스트로프 Па́вел Ро́тмистров | Pavel Rotmistro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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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파벨 알렉세예비치 로트미스트로프 Па́вел Алексе́евич Ро́тмистров Pavel Alexeyevich Rotmistro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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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1년 7월 6일[1] | ||
러시아 제국 트베리현 오스타시코프구 소코보로보 마을 (現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트베리주 셀리자로보군 스코보로보 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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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82년 4월 6일 (향년 80세) |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 |||
묘소 | 노보데비치 묘지 | ||
재임기간 | 초대 제5근위전차군 사령관 | ||
1943년 2월 22일 ~ 1944년 8월 8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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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복무 | 노농적군 | |
1919년 ~ 1946년 | |||
소비에트 연방 지상군 | |||
1946년 ~ 1982년 | |||
최종 계급 | 기갑상원수 (소비에트 연방 지상군) | ||
병과 | 기갑 | ||
주요 참전 |
러시아 내전 겨울전쟁 독소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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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서훈 |
10월 혁명 훈장 노농적군 20주년 기념 메달 레닌훈장 (6회) 소비에트 연방 영웅 적기훈장 (4회) 적성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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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의 군인.2. 생애
2.1. 초기
시골 대장장이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시골 학교를 졸업한 뒤 철도 노동자, 화물 운송업자로 일하다 노농적군에 입대했다.2.2. 러시아 내전
멜레케스 봉기를 진압하다 말라리아에 걸려 입원했다. 한 달 후 서부전선의 제16군 제42대대에 파견됐으나 백군과의 교전은 없었다. 이후 알렉산드르 콜차크의 지휘 하에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 참전했다.2.3. 제2차 세계 대전
2.3.1. 겨울전쟁
1940년 초부터 북서전선 예비군 사령관으로 임명됐으나 본인의 요청에 따라 제7군 제 5경전차여단 전차대대장을 역임하게 됐다. 만네르헤임선 돌파 당시 비보르크 인근에서 전투를 치른 뒤 적성훈장을 수여받았다. 12월부터 발트 군관구 제3기계화군단 제5전차사단 부사단장으로 임명됐다.2.3.2. 독소전쟁
개전 5일차, 독일 국방군이 제3기계화군단 사령부, 제2전차사단 사령부를 포위했다. 로트미스트로프는 두 달 넘게 치열한 공방전을 치르다 탈출에 성공했다. 9월 14일, 제11군 제8전차여단장으로서 250km급 행군을 하루 만에 완수한 뒤 칼리닌그라드 근처 칼리키노 마을에 도착했다. 니콜라이 바투틴과 함께 며칠 간 교전하다 10월 16일, 도로시하 기차역에서 무리하게 저항하다 제934보병연대가 궤멸됐다. 결국 로트미스트로프는 로고베즈 강을 넘어 철수를 감행했다. 탄원서까지 제출했지만 최고사령부의 지시 없이 후퇴했다는 이유로 이반 코네프는 로트미스트로프가 바투틴과 함께 군사 재판에 회부될 것을 강요했다. 바투틴이 코네프의 성향에 맞게 부대를 배치하고 작전을 재구상한 덕분에 처벌을 피하게 됐다.로트미스트로프 동무, 찰나의 시간도 낭비하지 말고 제185보병사단과 함께 메드노예를 점령하자. 우리가 비겁한 겁쟁이가 아니란 걸 증명할 때다!
재편성을 끝낸 바투틴이 로트미스트로프에게 한 말
이후 로트미스트로프는 칼리닌 전투에서 두각을 드러낸 뒤 초고속으로
르제프까지 진격했다. 1942년 1월 11일, 제8전차여단은 제3근위전차여단으로 개칭됐고 로트미스트로프는
레닌훈장을 수여받았다.재편성을 끝낸 바투틴이 로트미스트로프에게 한 말
2.3.2.1. 천왕성 작전
스탈린그라드 근처에서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의 부대가 포위되자 12월 12일부터 제2근위군의 도움을 받은 로트미스트로프가 반격에 나섰다. 이틀 간 이어진 전투에서 승리한 뒤 제87전차여단, 제7차량화소총여단이 1km 정도 떨어진 독일 공군의 비행장을 점령했다. 이후 1943년 1월,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부대를 궤멸시킨 덕에 이오시프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기갑원수로 진급하게 됐다.2.3.2.2. 쿠르스크 전투
7월 10일, 쿠르스크 남쪽까지 접근한 독일 국방군이 주요 방어선을 뚫어내자 바투틴은 제5근위전차군, 제5근위군을 보로네시 전선에 배치했다. 7월 12일, 제5근위전차군은 프로호로프카 기차역에서 무장친위대 제2SS기갑군단을 향해 대규모 역습을 감행했으나 충분한 지형정찰 없이 비교적 좁고 높은 지형의 독일군 진지에 축차적으로 돌격한 결과 아군 대전차호에 빠진 채 삼면에서 집중포화를 받으며 참담한 피해를 입었다. 게다가 당시 소비에트 지상군은 6호 전차 티거는커녕 최신 개량형 4호 전차를 뚫을 만한 대전차포가 없었으며, 전차병들의 숙련도까지 독일 국방군이 우세였다. 로트미스로프는 예하 전차 640여 대, 자주포 절반을 잃은 것에 더해 제5근위군도 큰 피해를 입어 작전 실패 직전까지 다다랐다. 로트미스트로프 입장에서 그나마 다행인 부분이 있다면 프로호로프카 전투 이후 공세탄력이 크게 둔화된 독일군이 더는 소련군의 방어선을 뚫고 들어오지 못했다는 점 정도였다.쿠르스크 전투가 끝나고 제5근위전차군의 엄청난 손실에 잔뜩 화가 난 스탈린은 로트미스트로프를 군사재판에 회부해 해임하려고 했지만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가 변호해준 덕에 그것만은 가까스로 면할 수 있었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