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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 | ※ 진급시기 기준 세분, 2차 대전기는 전간기부터 1945년 8월까지 해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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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노비코프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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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소비에트 연방 제13대 노농적군 공군 사령관
알렉산드르 노비코프 Алекса́ндр Но́виков | Alexander Noviko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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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노비코프 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Но́виков Alexander Alexandrovich Noviko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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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0년 11월 19일 | ||
러시아 제국 코스트로마현 네레흐타구 크류코보 (現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코스트로마주 네레흐타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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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76년 12월 3일 (향년 76세) |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 |||
묘소 | 노보데비치 묘지 | ||
재임기간 | 제13대 노농적군 공군 사령관 | ||
1942년 ~ 1946년 | |||
제4대 장거리항공사령관 | |||
1953년 ~ 1955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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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c0000><colcolor=#ffe400,#ffe300> 자녀 | 딸 스베틀라나 | |
학력 |
모스크바 기술경제중등학교 말리놉스키 기갑기계화사관학교 레닌그라드 고등장교전차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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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무 | 노농적군 공군 | ||
1919년 ~ 1946년 | |||
소비에트 공군 | |||
1946년 ~ 1958년 | |||
최종 계급 | 항공상원수 (소비에트 공군) | ||
주요 참전 |
러시아 내전 겨울 전쟁 독소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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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서훈 |
소비에트 연방 영웅 (2회) 레닌훈장 (3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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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 공군의 장성으로 최종 계급은 항공 상원수[1]. 독소전쟁 초기에 수천대의 전투기를 잃은 소련 공군을 부활시켰으며, 소련군이 전쟁 후반기에 제공권을 장악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해 소련이 망한 뒤의 러시아에서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2. 생애
2.1. 초기 일생
1919년 붉은 군대에 보병으로 입대했고, 1920년에는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다. 적백내전에 참전했고, 장교로 임관해 소대장이 되었다.1922년에 비스트렐 훈련과정을 마치고, 1927년에 프룬제 군사대학에서 졸업했다. 그는 이곳에서 투하쳅스키와 트리안다필로프를 만나 작전술과 종심 작전을 공부하며 고급지휘관 훈련 과정을 밟았다. 그 후 벨로루시 군관구에 배치되었는데, 여기서 상관인 이예로님 우보례비치의 지도를 받다가 1933년 공군이 육군에서 독립하자 창설 멤버가 되었다. 1935년 공군 작전부장이 되었고, 이후 경폭격기부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1937년에 대숙청의 여파로 우보리에비치가 숙청당하면서 당과 군에서 쫓겨나 체포당하는 엄청난 위기를 겪었지만, 기적적으로 멀쩡히 풀려나 곧 재입대 허가를 받고 복귀했다. 이후 레닌그라드 군관구의 공군 참모장이 되어 1939-40년 겨울에 핀란드와 벌인 겨울전쟁에 참전했다.
이 전쟁에서 소련군은 전반적으로 삽질을 했으나, 노비코프는 공적을 인정받아 소장으로 승진해 장성이 되었다. 이후엔 군관구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계속 레닌그라드 군관구에서 근무했다.
2.2. 독소전쟁
파일:external/eurasian-oborona.ru/000051.jpg▲ 군 예복을 입은 노비코프
1941년 6월 22일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노비코프는 레닌그라드 군관구의 공군을 지휘하여 독일군에 대한 첫 반격작전을 수행한다. 1941년 6월25~30일에 있었던 작전에서 노비코프는 독일군 전투기 130대를 격추했다고 한다. 이 전공으로 주목받아 북방전선군, 발트함대의 전투기들도 그의 지휘 하에 배속되었다.
1941년 동안 보인 능력이 보로실로프의 후임인 주코프와 안토노프의 주목을 받은 덕분에, 붕괴해버린 서부전선군의 공군을 재건하는 임무를 맡는다. 곧 스탈린도 노비코프를 주목하게 되었고, 그를 스타프카의 멤버로 불러들인다. 노비코프는 스타프카에 들어간 유일한 공군이였다. 1942년 3월엔 레닌그라드와 데미얀스크에 작전을 감독하기 위해 스타프카 대리로 파견되었고, 1942년 4월에는 소련 공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노비코프는 눈부신 조직력을 발휘하여 개전 초기(1941년 6월부터 12월까지)에 2만5천대의 전투기를 잃고[2] 거의 빈사상태였던 공군을 부활시키기 위한 여러 개혁을 추진했고, 작전과 훈련 뿐만 아니라 정비나 보급에 이르기까지 대대적인 개혁을 실시하였다. 이 개혁으로 개전 이래 독일군에 꼼짝 못하던 소련군 공군의 실력은 점점 향상되기 시작했다. 1942년 가을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절정에 달하고 소련군이 코너에 몰리자 스탈린은 공군이 출격해 한몫 해주기를 바랐지만, 노비코프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스탈린을 설득했고 자신이 실시한 개혁이 자리잡을 때까지 섣불리 실전에 나서지 않으며 칼을 갈고 있었다.
마침내 1942년 겨울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이 소련군에 역포위되고 헤르만 괴링이 성공을 장담한 공중보급이 실시되자 노비코프가 몇 달동안 양성한 소련군 전투기부대들은 독일의 수송작전을 분쇄했고,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만 1,200대의 각종 비행기를 잃었다.
쿠르스크 전투 때는 성형작약탄, 야간전투기와 Il-2와 같은 지상공격기를 새로 도입했다. 신무기의 도입은 독일 공군의 지상지원활동을 무력화시켰고 소련의 지상공격기들은 독일군 기갑부대에게 큰 피해를 입혀 쿠르스크 전투 승리에 큰 기여를 했다. 이후에도 노비코프가 실시한 개혁이 자리잡혀 소련군 공군의 전력은 크게 향상되었고, 노비코프는 이 공적으로 계속 승진하여 공군 원수 계급을 달고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유럽 전선의 전쟁이 끝난 후에는 극동전선으로 배속되었고, 만주 작전에서 관동군 항공대를 분쇄하여 소련군 기갑부대가 무인지경으로 만주 벌판을 활보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 공적으로 다시 두 번째 소련영웅 칭호를 받고 공군 상원수에 올랐다.
2.3. 전쟁 이후
하지만 종전 후 1946년에 갑자기 해임되어 NKVD에 체포되었는데, 이는 스탈린의 아들 바실리 스탈린의 탓이 컸다. 공군에서 복무하던 바실리는 추태를 부리던 탓에 아버지의 신뢰를 잃었다. 마침 스탈린의 무한한 신뢰를 받던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는 미국에 비해 소련의 공군력이 떨어지는 데 우려를 품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본 바실리는 우선 Yak-9 때문에 조종사들이 쌈박질을 한다는 내용의 보고를 올리고, 야코블레프를 부추겨 당시 항공산업 인민위원회 인민위원[3]이던 샤후린을 비판하는 편지를 쓰게 했다. 이에 스탈린은 빅토르 아바쿠모프에게 수사를 맡겼고, 아바쿠모프는 노비코프를 고문해 게오르기 주코프와 함께 반역을 모의했다는 음모를 추가했다. 결과적으로 노비코프는 군사재판에서 굴라그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는 매우 가혹한 토사구팽이었으나, 노비코프는 목숨을 건진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정도였다.이렇게 죽을 고생을 하다가 6년 뒤인 1953년에 스탈린이 사망한뒤 풀려나 복직되었고, 공군 상원수 계급도 되찾았다. 다시 공군 총사령관이 된 노비코프는 미군 공군에 맞짱뜰 만한 대규모 공군을 건설하자는 제안서를 당시 최고 지도자였던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제출했지만, 흐루쇼프는 이 계획이 돈지랄이라며 거부하고 ICBM과 장거리 미사일과 핵무기 개발에 집중했다. 사실 당시 미국은 공군의 입김이 너무 세서 우주개발 사업을 좀처럼 발전시키지 못했는데,[4] 소련은 공군이 약했기 때문에 이렇게 로켓에 몰빵할 수 있었다. 물론 소련은 전후복구 등 여러 우선순위의 시급한 현안들이 널려있었기 때문에 많은 재원이 필요했고, 미국보다 열세인 재력으로 대규모의 공군을 양성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흐루쇼프의 판단도 틀린 게 아니다. 미국이야 전쟁 전에도 소련의 서너 배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고, 전후피해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미국과 맞장뜰 만한 대규모 공군을 갖춘다는 것은 당시 시점에서는 불가능했다. 노비코프가 현실을 제대로 인식 못했던 것이다.
1958년 노비코프는 모든 직함에서 퇴직하여, 레닌그라드 민간항공학교의 교장 겸 교수가 되었다. 교직에서 은퇴한 뒤에도 여러 공군 관련 저술을 펴냈고, 이는 소련 공군의 교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후 1976년 12월 3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으며 유해는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지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