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7 08:03:08

고구려-당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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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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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분쟁 교전국
<colbgcolor=#000> 고구려-신 전쟁
,12 ~ 14,
<colbgcolor=#fff,#191919> 신나라
1차 좌원 전투
,172,
후한
고구려-위 전쟁
,244 ~ 259,
제1차 양맥 전투
,244,
조위
비류수 전투
,244,
조위
제2차 양맥 전투
,259,
조위
신라-왜 전쟁
,364 ~ 404,
백제 가야
고구려-백제 전쟁
,369 ~ 607,
치양 전투
,369,
백제
제1차 평양성 전투
,371,
백제
제2차 평양성 전투
,377,
백제
오곡원 전투
,529,
백제
백합야 전투
,553,
백제
독성산성 전투
,548,
신라 백제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
,551 ~ 553,
신라 백제
배산 전투
,577?,
북주
온달산성 전투
,590,
신라
제1차 고구려-수 전쟁
,598,
수나라
북한산성 전투
,603,
신라
제2차 고구려-수 전쟁
,612,
살수대첩
,612,
수나라
제3차 고구려-수 전쟁
,613,
수나라
제4차 고구려-수 전쟁
,614,
수나라
제1차 칠중성 전투
,638,
신라
제1차 고구려-당 전쟁
,645,
주필산 전투
,645,
당나라
안시성 전투
,645,
당나라
제2차 고구려-당 전쟁
,660 ~ 662,
제2차 칠중성 전투
,660,
신라
북한산성 전투
,661,
신라
평양성 전투
,661 ~ 662,
신라 당나라
제3차 고구려-당 전쟁
,667 ~ 668,
평양성 전투
,668,
신라 당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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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be673> 전개 <colbgcolor=#fff,#191919> 주필산 전투 · 안시성 전투 · 평양성 전투(661년) · 사수 전투 · 평양성 전투(668년)
관련 인물 <colbgcolor=#000> 고구려 보장왕 · 연개소문 · 연남생 · 연남건 · 연남산 · 안시성주
당나라 태종 · 고종 · 이세적 · 설인귀 }}}}}}}}}

고구려-당 전쟁
高句麗-唐 戰爭
고당전쟁 | 高唐戰爭
<colbgcolor=#C00D45,#032807><colcolor=white> 시기 1차 전쟁: 645년 (보장왕 3년)
2차 전쟁: 661년 (보장왕 19년)
3차 전쟁: 667년 (보장왕 24년) ~ 668년 (보장왕 25년)
장소 고구려 전역 및 한반도 북부
원인 당나라 태종 고종 고구려 침공
교전국 <rowcolor=black> 신라-당 연합
(공세)
고려
(수세)
주요 인물
당 지휘관

파일:tang_fel2.jpg 태종 (당 2대 황제)
파일:tang_fel2.jpg 고종 (당 3대 황제)
파일:tang_fel2.jpg 이세적
파일:tang_fel2.jpg 설인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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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tang_fel2.jpg 아사나사이
파일:tang_fel2.jpg 소정방
파일:tang_fel2.jpg 설계두
파일:tang_fel2.jpg 방효태
파일:tang_fel2.jpg 임아상
고구려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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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고구려 군기.svg 연남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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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고구려 군기.svg 고정의 (대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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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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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제1차 고구려-당 전쟁 (645)
300,000명~400,000명 (추정) 200,000명 ↑
제2차 고구려-당 전쟁 (661)
병력 규모 불명 병력 규모 불명
제3차 고구려-당 전쟁 (668)
연합군: 700,000명 병력 규모 불명
결과 신라-당 연합의 승리
- 1ㆍ2차 전쟁 고구려의 승리
- 3차 전쟁 신라-당 연합의 승리 및 고구려의 패배 및 고구려의 멸망
- 당의 안동도호부 설치
영향 고구려의 멸망
- 신라-당 간의 갈등으로 인한 나당전쟁 발발
1. 개요2. 배경
2.1. 당의 건국2.2. 영류왕의 유화책과 당의 첩보전2.3. 연개소문의 쿠데타와 고조되는 전운
3. 1차 전쟁
3.1. 전초전3.2. 당나라의 전쟁 준비
3.2.1. 당군의 규모
3.2.1.1. 다수론(30만 이상)3.2.1.2. 소수론(30만 이하)
3.3. 당나라의 동시다발적인 침공3.4. 요동성 함락3.5. 주필산 전투3.6. 신성, 건안성 전투3.7. 안시성 전투3.8. 패퇴하는 당군
4. 전쟁 사이의 전쟁, 640년대 소모전5. 전쟁 사이의 전쟁, 650년대 각축전6. 2차 전쟁
6.1. 당나라의 전쟁 준비6.2. 당 수군의 평양성 포위6.3. 사수 전투6.4. 신라군의 진격과 후퇴6.5. 결과
7. 3차 전쟁
7.1. 신성 함락과 그에 이은 방어선의 붕괴7.2. 평양성 포위전, 그리고 함락7.3. 결과
8. 고구려 패망의 원인
8.1. 정치, 경제적 이유8.2. 군사적 이유
9. 고구려의 대(對)중국 전쟁 목록10.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삼국통일전쟁의 한 부분. 고구려 당나라 간의 전쟁.[4]

수나라의 모든 원정이 고구려의 승리로 결말이 난 고구려-수 전쟁과 달리 이 전쟁의 경우는 2차까지는 고구려가 승전하였으나 3차에서 패배하고 멸망했다.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무너지긴 했지만 대막리지 연남생의 항복으로 심장부인 국내성 일대가 당나라군에 넘어간 상태로 시작된 전쟁에서 2년에 걸쳐 사투를 벌였으며, 당은 최대 50만 이상의 대군을 동원하고 하북의 세금을 대고구려 전선에 전용하는 등 국력의 상당수를 소모하였다.

결국 고구려는 최종적으로 멸망하게 된다. 그러나 전쟁에서 승리한 당나라 역시 3차에 걸친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입은 내상을 굉장히 오랜기간 회복하지 못하였다. 이후 당나라는 약속을 깨고 동맹인 신라까지 집어삼키려다가 나당전쟁에서 패하는 굴욕을 겪으며 약속대로 백제 영토와 평양 이남의 고구려 영토를 신라에 내줘야 했으며[5], 당나라가 한반도 전선에 힘을 쏟는 사이, 서역에서는 토번 제국이 발흥하여 당나라의 서역 지배가 흔들리게 되었다.

이에 더해 당나라는 외세에 대한 지배력을 완전히 잃어 수많은 이민족이 발호하는 통에 결국 기껏 차지했던 대동강 이북의 요동지역 역시 신생국 발해에게 내주는 등 대표적인 승자 없는 전쟁이라 할 수 있다.[6][7]

2. 배경

2.1. 당의 건국

수문제가 장강 너머 남조 진나라를 정복하여 기나긴 남북조시대를 끝내면서 동아시아의 정세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고구려-몽골초원과 연동되어 돌아가던 동아시아 세력 구도를 중원의 질서로 재정립하려 했던 그는 혼란을 수습하고 중흥해있던 동아시아의 강국 고구려와의 충돌에서 패배한다.

그의 아들 수양제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3차례에 걸쳐 고구려와 싸웠으나( 고구려-수 전쟁) 오히려 참패를 면치 못하였고, 그 여파로 멸망, 당국공 이연이 군벌들의 난립을 진압하고, 새롭게 당나라를 건국하였다. 당시 고구려-수 전쟁을 겪은 전쟁영웅 고건무는 이전의 확장적인 대외정책을 지양하고, 아직 일개 군웅이었던 당에 유화책을 취했다. 전쟁의 여파를 몸소 체험한 이연 역시 이에 맞춰 동아시아에서 고구려가 가진 독자적인 패권을 인정하려는 등 고구려에 유화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그의 둘째 아들이었던 이세민이 맏형 이건성, 동생 이원길 등의 정적을 제거하고 옥좌에 오른다. 그는 아버지와는 정반대의 인물이었다. 그는 돌궐을 무찌르고, 고창국 토욕혼을 격파하여 서쪽과 북쪽 방면의 위협이 될 만한 나라들을 모두 평정하였고, 슬슬 동쪽의 고구려 정벌에 대한 야심을 드러내었다. 고구려에 대해서 모욕적인 행위를 통해 기선제압과 굴욕을 강요하는가 하면 삼국의 대외정책에 간섭하거나 혹은 첩보 활동을 벌이는 등 동방 정벌을 위한 밑작업에 열중했다. 이때 고구려 주변의 종속국들도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2.2. 영류왕의 유화책과 당의 첩보전

고구려 역시 이러한 정세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고구려는 수나라 포로들 일부를 모아 당나라에 송환하기도 했으며, 동돌궐 힐리가한이 멸망한 직후인 629년에 당에 봉역도(封域圖)를 보내어 축하를 하는가 하면 641년에 고창국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알고 당에 대한 의전을 강화하기도 했다.

631년 7월, 당 조정은 말단 관리들을 파견하여 고구려와 수나라와의 전쟁 때 죽은 수군의 유골을 수습하고, 고구려가 만든 경관(京觀)[8]을 허물라고 강요했다. 현대 한국으로 치면 전쟁기념관 국립현충원에 해당하는 전승 시설의 철거를 외국의 말단 관리들로부터 강요받는 것은 명백하게 고구려에 대한 위협이자 도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나 고구려는 이에 굴복하여 경관을 허물게 된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위협을 느껴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640년에는 영류왕이 태자를 당에 보냈으나 641년 5월에 당에서는 직방랑중 진대덕(陳大德)을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직방랑중'은 태자의 답례사라 보기에는 얼굴에 침을 뱉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직급에서 격이 떨어질뿐더러, 국내외의 주요 군사 시설을 포함한 지도 제작을 관장하는, 군사 정보 수집의 실무를 담당하는 직책이었다. 진대덕은 자신이 경치 좋은 곳의 탐방을 좋아한다면서 평양으로 가는 도중에 고구려의 주요 산천과 성곽 및 교통 요지들을 두루 살피면서 정보를 모았다. 게다가 고구려의 관리들에게 비단을 뿌리고, 고구려의 백성이 되어 살고 있던 옛 수나라 출신의 포로들을 위로하여 인심을 사 의심까지 피했다.

당시 고구려에서는 최고위직인 대대로(大對盧)가 말단 관리인 진대덕의 숙소를 세 번이나 찾아가는 등 위압을 느끼면서도 농락당하고 있었다. 이 해 8월, 진대덕은 귀환하는데 그가 얻은 정보를 봉사고려기(奉使高麗記)라는 제목으로 엮어서 당 태종에 보고하였다. 당태종은 기뻐하며 노골적으로 고구려 공격에 대한 야욕을 보였고, 기회만 오면 공격하겠다는 의사 표시를 했다. 당시 국정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영류왕 연개소문을 여타 귀족들과 함께 견제하려 하였지만, 이는 역으로 막리지 연개소문 쿠데타를 일으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후 연개소문이 영류왕 등 100여 명[9]을 제거한 후 보장왕을 옹립하고 자신은 고구려의 최고 실권자로 떠오르면서 고-당 양국 간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2.3. 연개소문의 쿠데타와 고조되는 전운

파일:external/www.fmkorea.net/65b6429d4175b9df1e7df2fa33560f9d.jpg

연개소문이 집권하여 동방 정책에 제동이 걸린 당태종은 크게 분노했다. 당태종은 바로 고구려 정벌을 논의했지만 연개소문의 방비가 튼튼했기 때문에 장손무기가 반대하여 이루지 못했다.[10] 연개소문은 국정을 장악하는 한편 백제와 백제의 동맹에 가까운 왜를 통해 신라를 압박해 묶어둬 신라측의 북진을 막아 남방의 양면전선 문제를 해결하고, 당과의 대전에 집중할 여건 조성에 나섰다. 그리고 사신을 왕래시키며 당나라와 샅바싸움을 시작하였다. 당나라의 사신은 영류왕 때처럼 거들먹거릴 수 없어 태왕 앞에서 부복하고 기어가야 했다.

644년에는 당나라에서는 동맹국 신라로부터 고구려 침공을 당하고 있으니 구해달라는 사신이 오자 상리현장을 사신으로 보내 고구려의 신라 공격을 중단하라고 촉구하였으나 연개소문은 듣지 않았다. 이 해에 연개소문은 군사를 보내 당나라의 영주(유성)를 선제 공격하였고, 당에서도 장검, 이도종 등을 보내 고구려를 정탐하였다. 고구려에서 보낸 사신 50명이 감금되는가 하면 당나라에서 보낸 사신 장엄 역시 토굴에 감금된다. 이미 실질적인 전쟁에 돌입한 상황에서 사신의 교환은 그저 요식이었다.
"요동은 옛 중국 땅이고 막리지가 그 임금을 죽였으므로, 짐이 몸소 가서 이를 경략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어른들과 약속하니 아들이나 손자가 나를 따라가는 자는 내가 잘 위무할 터이니 염려할 것이 없다."고 하고, 포백과 곡식을 후하게 주었다. 군신들이 모두 황제에게 가지 말기를 권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나는 알고 있다. 근본을 버리고 말단으로 가며, 높은 것을 버리고 낮은 것을 취하며, 가까운 곳을 두고 먼 곳으로 감은 셋이 모두 좋지 못하다. 고구려를 정벌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개소문은 임금을 죽이고 또 대신들을 살육하고 즐거워하고 있으므로, 한 나라의 사람들이 목을 내밀고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 의논하는 사람들은 이를 살피지 못하고 있다.

{{{#!wiki style="text-align:right"
삼국사기》 권제이십일 고구려본기 제9 보장왕}}}

이 당시 당태종의 상황을 살펴보면, 후계자 책봉 문제로 상당히 곤혹스러운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후군집(侯君集) 등의 원로들이 죽었고, 장손무기 저수량 등이 셋째 이치를 지지하고 나서면서 뜻을 이루고, 반대했던 사람들을 처벌하는 등 위풍당당한 당 태종의 이름치고는 꽤나 골치아픈 상황에 시달렸었다. 심지어 현장 법사에게 환속을 권유하여 자신을 도와줄 것을 요청했을 정도.

이런 상황에서 고구려 정벌은 자신의 권위를 다시 한번 세울 수 있고, 또 유약해보이는 셋째 이치가 계승자가 된 상황에서, 자신이 안정적인 발판을 깔아줄 수 있는 수단도 될 수 있었으며 고구려 정벌에 나서서 성공하면 대박이고 실패하더라도 고구려의 이목을 끌어 한반도의 유일한 신라와의 동맹 약속도 지키고 신라에 당 영향력이 세지는 일석이조인 상황이었다. 이렇게 당나라에게 어느정도 이득이 되는 모든 상황이 전쟁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3. 1차 전쟁


파일:IMG_5564.jpg [11]

연개소문 vs 이세민[12]

출정에 앞서 당 태종이 총애하던 재상이었던 위징은 고구려의 기세가 만만치 않고, 수나라 역시 대병력을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를 꺾지 못하였다며 고구려 원정에 반대하였다. 당태종 역시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잠시 원정 계획을 보류하였으나 위징이 사망한 이후에 원정을 말리는 이가 없게 되자 마침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3.1. 전초전

『新唐書』, 卷111, 「列傳」, 第36, 〈張儉〉, p4133 "營州部與契丹,奚,습,靺鞨諸蕃切畛, 高麗引衆入寇, 儉率兵破之, ?斬略盡, 復拜營州都督. 太宗將征遼東, 遣儉率蕃兵先進, ?地至遼西, 川漲, 久未度, 帝以爲畏懦, 召還, 見落陽宮. 陣水草美惡, 山川險易, 幷久不進狀, 帝悅, 拜行軍總管, 使領諸蕃騎, 爲六軍前鋒, 時高麗候者言, 莫離支且至, 帝詔儉自新城路邀擊, 虜不敢出, 儉進度遼, 趨建安城, 破賊"

영주부에서 거란, 해, 습, 말갈 등 여러 종족들과의 경계를 엄중하게 하여 서로 교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고구려에서 군대를 이끌고 공격해오자, 장검이 병사를 이끌고 격파하여 포로로 잡거나, 죽이거나, 물건을 빼앗은 것이 많아서 그를 다시 영주도독으로 봉했다. 황제가 장차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장검으로 보내어 번(蕃)의 병사를 거느리고 먼저 진격하게 했다. 장검이 군대를 몰아 요서에 이르렀는데, 물이 불어나서 오랫동안 장검이 건너지를 못했다. 이세민이 장검이 나약하여 가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그를 불러 들였다. 그런데 장검이 낙양궁에 와서 황제에게 요하 일대의 수초가 무성한 곳과 덜 무성한 곳, 산천이 험하고 쉬운 곳을 조사한 것과 아울러 오랫동안 나아가지 못한 이유를 보고하자, 황제가 기뻐하였다.
장검을 행군총관에 임명하고, 그로 하여금 여러 번(蕃)의 기병들을 이끌고 6군(황제의 친정군)의 선봉대장으로 삼게 하였다. 이때에 고구려의 첩자가 잡혀서 말하기를 막리지 연개소문이 영주에 온다고 하였다. 황제가 장검을 시켜 신성로로 나가 고구려 군대를 공격하게 했다. 그러자, 고구려 군대가 감히 나오지 못하였고, 장검은 마침내 요하를 건너 건안성으로 달려가 고구려 군대를 격파했다.

{{{#!wiki style="text-align:right"
《신당서》 권111, 장검}}}
『舊唐書』, 卷78,「宗室列傳」, 第3,〈江夏王道宗〉, pp3515~3516 "帝將討高麗, 先遣營州都督張儉. 輕騎度遼規形勢, 儉畏, 不敢深入, 道宗請以百騎往, 帝許之. 約其還曰, 臣請二十日行, 留十日覽觀山川, 得還見天子. 因?馬束兵, 旁南山入賊地, 相易險, 度營陳便處. 將還, 會高麗兵斷其路, 更走間道. 謁帝如期"


황제가 장차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먼저 영주도독 장검으로 하여금 가벼운 무장을 한 기병으로 요하를 건너 고구려 군대의 형세를 살펴보게 했다. 그런데, 장검이 두려워하여 감히 깊숙이 들어가지 못했다. 이때 황제의 종친인 강하왕 도종이 황제에게 청하여 100명의 기병으로 다녀 오겠다고 했다. 황제가 허락하자, 돌아올 것을 약조하며 말하기를 20일간 갔다올 것이며 10일간 고구려의 산천을 살펴보고 황제를 뵙겠다고 했다.
이로써 말을 먹이고 병사들을 결속한 후, 남쪽 산을 끼고 적의 땅으로 들어가서 그 땅의 지세를 살펴보고 고구려 군대의 진지를 헤아린 후, 돌아오려고 할 때 였다. 도종의 군대는 고구려 군사들을 만나 돌아갈 길이 막혔다. 그리하여 사이길로 도망쳐서 기일에 맞추어 황제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wiki style="text-align:right"
《구당서》 권78, 강하왕 도종}}}

고구려 당나라 사이에는 이미 645년이 아닌 644년부터 교전 상황이 일어나고 있었다. 연개소문은 요서의 당나라 거점인 영주를 공격하였고,[13] 이후 연개소문 본인이 요서로 직접 친정을 나온다는 첩보가 당나라에 입수되기도 했다. 7월에는 당나라에서 영주도독 장검을 파견해 고구려군의 상황을 파악하도록 하였으나, 장검은 요하에 접근하지 못하였고 뒤이어 이도종이 기병을 이끌고 요하 인근에서 정탐을 하다가 고구려군과의 추격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3.2. 당나라의 전쟁 준비

644년 10월, 당태종은 수도 장안의 노인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면서 고구려 원정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아무래도 전대 왕조인 수나라의 폭정 중에 하나가 고구려 원정이었고, 그 때문에 고구려 원정이라면 치를 떠는 사람들이 많았을 테니[14] 이는 민심을 다스리기 위한 조치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11월, 형부 상서 장량평양도 행군 대총관으로 임명되었고, 남부 지역에서 징발한 병사 40,000명, 수도 장안과 부수도 낙양에서 모병한 3,000명, 전함 500여 척을 동원해 산동반도를 떠나 해로로 평양을 향해 진군하게 하였다. 그리고 병부상서 이세적(李世勣)을 요동도 행군 대총관으로 삼아 보·기병 60,000명과 난주·하주의 유목민 항호를 거느리고 요동으로 진군하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645년 2월 12일, 낙양을 출발하여 6군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향하였다.
○ 十九年(645), 命刑部尙書張亮爲平壤道行軍大總管, 領將軍常何等率江·淮·嶺·硤勁卒四萬, 戰船五百艘, 自萊州汎海趨平壤; 又以特進英國公李勣爲遼東道行軍大總管, 禮部尙書江夏王道宗爲副, 領將軍張士貴等率步騎六萬趨遼東; 兩軍合勢, 太宗親御六軍以會之.

19년에 형부상서(刑部尙書) 장량(張亮)을 평양도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總管)으로 삼아 장군(將軍) 상하(常何) 등과 강, 회, 영, 협(江·淮·嶺·硤)의 강한 군사 40,000명·전선(戰船=전투선) 500척을 이끌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平壤)으로 향하게 하였다. 또 특진(特進)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總管)으로 삼고, 예부상서 강하왕 도종(禮部尙書 江夏王 道宗)을 부총관(副總管)으로 삼아서 장군(將軍) 장사귀(張士貴) 등과 보병, 기병(步兵·騎兵) 60,000명을 이끌고 요동(遼東)으로 나아가게 했다. 양군(兩軍:나뉜 군대)이 합세(=세력이 모여짐)하도록 한 다음, 태종(太宗)은 친히 6軍을 거느리고 가서 전군을 합류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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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당서》 권199 동이 열전 제149}}}

또한 백제 신라, 거란 등 여러 나라에게 당을 도와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요구했다. 이 중 신라는 전초 30,000명의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의 수곡성을 공격하는데, 백제는 신라군이 수곡성을 공격하며 빈틈을 보인 사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의 7개 성을 빼앗는다. 이 사건은 당나라가 고구려를 상대하는 데 신라는 도움이, 백제는 방해가 된다는 걸 인식하고 백제와 신라 중 신라를 동맹으로 선택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15]

3.2.1. 당군의 규모

고구려-수 전쟁에서 동원된 수나라군의 총 규모가 여러 사서들에 상세하게 적혀 있는 것과는 달리, 이 당시 당나라 군의 자세한 총 병력은 명기되어 있지 않다.[16] 흔히 말하는 당나라 10만 대군은 당시 이세적이 이끌었던 요동도행군 6만과 장량이 이끌었던 평양도행군 4만3천 이 둘만을 더한 숫자이다.[17]

가장 무난한 견해로는 선발대인 요동도행군과 평양도행군을 합친 10만~십수만 대의 병력에 당 태종의 친정군과 영주도독 장검이 이끈 이민족 부대가 합쳐질 것을 고려해서 30만 내외라는 추정이다. 편제만 고려한다면 당이 동원한 총 군사의 수는 10만은 기본으로 넘고 일부에서는 50만 ~ 60만, 100만 설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는 다수론(30만 이상)과 소수론(30만 이하)을 다룬다.
3.2.1.1. 다수론(30만 이상)
구당서》에 따르면 이세적의 요동도행군 60,000명에[18] 장량의 평양도행군 43,000명[19]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 신당서》에는 고구려 원정군의 규모가 육군 10만에 수군 7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 기록은 당태종의 친정군과 건안성을 공격한 장검의 이민족 부대를 고려하지 않고 선봉대로 볼 수 있는 요동/평양도행군의 병력 수만 적혀있다. 당 태종의 친정군에는 요동도행군 대총관이자 당시 병부상서였던 이세적과 동급, 그 이상의 지위를 가진 장손무기와 유홍기가 소속되어 있었으며 선봉대인 요동도행군과 황제의 친정군은 규모 면에서 큰 차이가 났을 가능성이 크므로 태종의 친정군의 규모는 요동도행군의 그것보다 훨씬 큰 십수만~수십만 대의 병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20]

이 전쟁에 동원된 당군의 편제나 진용은 당나라의 대외 원정을 통틀어 봐도 최고의 호화진영이자 최대 편제였다. 황제 이세민이 직접 친정군인 6군을 이끌었으며, 당나라의 6부 상서 중 무려 4개 상서[21]가 참전하였고, 당시 생존중이던 능연각 공신 11명 중 5명이 전쟁에 참전하였음이 확인된다. 이들 외에도 종3품~정3품 이상의 고관대작들이 다수 참전한 것 역시 확인된다.[22]

고구려의 영토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보급로 유지를 위해서 경비 병력들이 대량으로 소요될 수밖에 없다는 것 역시 당나라 장수들이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거기다 행군 도중 합류한 잔여부대와 돌궐, 거란, 해 등 여러 이민족들이 합세한 것을 보면 고구려의 총 병력으로 볼 수 있는 30만 이상 규모의 지상군을 당이 동원했다는 것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23] 동원된 당군의 총 규모를 30만 이상이라고 잡아도 당군의 주요 점령지였던 요동성이나 개모성, 그리고 당군의 군량 수송로에도 다수의 군사들이 배치되었을 가능성을 감안하며 당시 주필산 전투 안시성 전투가 벌어질 즈음에도 신성과 건안성에 대규모의 당군이 투입되어 전투가 벌어졌음을 고려하면[24] 주필산 전투 당시 당 태종이 고구려 대군을 부담스럽게 여긴 것과 배치되지 않는다.

수나라 때 동원된 약 114만 명 규모의 절반은 동원되었을 가능성은 분명하게 크다. 더욱이 당나라는 고구려 원정을 위해서 주변 이민족들이나 국가들을 통제 복속시킨 것은 그만큼의 국경 안정을 추구하여 병력을 최대한 집중하기 위한 목적이 강하다. 특히 토번이나 설연타에게 경고했을 때의 100만 대군의 이야기는 결코 허황된 규모의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면 최소 언급된 규모의 1/2은 되어야 규모를 뻥튀기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동원 규모이기 때문이다.[25] 수나라 역시 고구려 원정을 위해서 주변국을 복속하여 최대한 통제한 다음에야 그만한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던 점을 상기해 본다면 다르지 않다.

고구려는 고구려 영토 내에서만 야전에 한번에 동원 가능한 병력이 십수만 규모에 이르렀다. 실제로 주필산 전투 때만해도 15만 명이 야전에서 당군과 싸우다가 패해 대치 상태에 있었던 점이나 그외의 수차례의 수만명 규모의 병력 차출은 야전에서 고구려도 십만 이상의 병력 동원이 가능했음을 의미한다. 적보다 우세하거나 대등하면 공세를 취하고 적보다 열세일 경우에는 방어를 취하는 건 당시나 지금이나 기본적인 군사학이다.
3.2.1.2. 소수론(30만 이하)
김용만의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을 위시한 다수의 교양서에서 주장하기를,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1차 전쟁에 참전한 당군의 행군총관 수가 40명을 초과한다고 했는데, 주필산 전투 항목에서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지만 행군총관은 14명이었고, 나머지 26명은 단순히 총관(摠管)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당군의 육화진법상 편제에서 1개의 행군에는 1명의 행군총관만 있는 것이 아니며, 대총관과 부총관을 행군총관이라 부르고 나머지 편제상 중군과 전·후·좌·우군, 좌·우우후군까지 도합 7개 부대 각각을 이끄는 지휘관들을 단순히 총관이라고 기록한다. 즉, 완편상태라는 가정 하에 최대로 부풀려 잡으면 1개 행군에는 2명의 행군총관과 7명의 총관이 있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14명의 행군총관과 26명의 총관으로 부대를 완편시킨다면 7개 행군도 꾸리지 못한다.[26]

또한, 행군총관이 이끄는 1군의 병력이 당의 시대에 따라 대단히 유동적이라 10,000명이라고 한정하기 힘들다. 이 설을 주장한 김용만 선생은 고대 춘추전국시대와 제( 제나라)의 예에서 군의 수를 10,000명으로 추정하지만 바로 직전인 수나라의 군제만 봐도 1개 행군이 6,000여 명이었던 적도 있고, 20,000명에 달하던 때도 있다. 거기다 《이위공전서》에서 당의 군제는 1개 군이 20,000명인데 《당육전》에서는 5,000명 넘으면 총관 1명이 배치, 즉 5,000명 선부터 1개 군으로 셀 수 있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안시성 전투의 토산을 쌓은 연인원이 50만이라 하지만 고구려군이 마냥 수성적으로만 대처하지도 않았고, 위의 요동성 전초전이나 주필산 전투, 그리고 오골성의 글필하력 요격전 등 다수의 야전도 치렀다. 10만 정예병이라고 몇개 성에서 공격적으로 대처할 병력은 절대 아니고, 각 성에서 보급선을 끊고 적군을 소모시킨 후 주력 병력을 진출시키는 것이 고구려의 전략이라 그다지 기존 전략에 비해 수세적인 전략을 펼치지도 않았다.[27][28]

한 가지를 더 짚고 넘어가면서 생각하자면, 과연 고구려가 주필산 전투에서 동원한 15만이라는 숫자가 사실인지에 대해서도 거론할 필요성이 있다. 주필산 전투가 벌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인 현재의 중국 랴오닝성 하이칭 일대에는 많은 평야가 있지만 대부분이 명~청 대에 만들어진 간척지이고, 수당대에 이 지역은 늪지대가 많아[29] 대규모의 병력을 전개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니었다. 이보다 더 이전 대에 양측 도합 20만을 초과하는 대군이 야전에서 포열한 사례는 가우가멜라 전투밖에 없는데, 가우가멜라 평야의 엄청난 넓이를 고려한다면 주필산 지역은 이 정도의 대군이 전개하기에 부적합하다. 때문에 21세기 들어서 아시아에서도 대대적인 사서에 대한 비판적 연구가 시작된 이후[30] 주필산 전투의 병력은 양측 합쳐 10만이 안 되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므로, 더더욱이 당군이 30여만 대군일 가능성이 떨어진다.

100만대군이라는 경고성 발언이 허황된 규모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최소 절반인 50만은 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문제가 있다. 호왈백만이라는 사자성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10만명만 되어도 100만대군이라고 주장하는데는 별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10만대군만 되어도 어차피 시계로는 파악이 안된다.

50만설은 지나치게 많게 잡은 것으로 추측한다. 그냥 당 태종 직속 병력이 10만 명이거나 아니면 원수정 초, 중기의 로마 제국이 군단병과 보조병을 나눈 것처럼 로마로 한다면 레기온에 해당하는 병력만을 기술했다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듯.

또한 고구려 정벌에 100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들어가서도 패배한 수양제의 교훈은 '아 나도 100만 대군을 일으켜야겠다'가 아닌, 현실적으로 '한번의 정복전쟁으로 고구려를 복속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가 되는 것이 정상이다. 개전 초기에 보였던 파죽지세의 모습은 심리적 공포를 활용해 고구려가 스스로 굴복하도록 만들거나 최소한 협상에 나오게 만드는 수단에 불과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결과적으로 그 병력이 30여만에 미치지 못하였더라도 그 군의 규모가 당대 중원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던 것은 정황상 분명하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중원이 인구가 많다 하나 수십만 대군이 마구 뽑혀 나오는 것은 빠르게 잡아야 명나라 초기다. 당나라의 행정제도가 명보다 나았다 해도, 절대적인 인구 수부터 더 많았던 명조차 10만 이상의 병력을 내려면 수년의 준비기간을 감수해야 했다. 당이 동원한 병력이 20여만이었다 해도 한반도의 전략적 규모를 고려한다면 충분한 대군이며[31][32][33] 당대 중원왕조 스스로에게도 상당한 부담이 되는 대군이었던 것은 사실으로 보인다.[34]

3.3. 당나라의 동시다발적인 침공

645년, 당군의 선봉인 요동도행군이 요서의 영주에 다다랐다. 당시 영주에서 요동을 향해 나아가는 길은 세 갈래로, 하나는 연군성(燕郡城), 여라수착(汝羅守捉)을 거쳐 요하 하류를 건너 한(漢) 대의 요대현(遼隊縣)에 이르는 남도이고, 다른 하나는 연군성 ─ 회원진(懷遠鎭)을 거쳐 요동성으로 이르는 중도였다. 북도는 연군성에서 북으로 통정진(通定鎭)을 지나 신성, 현토성 방면으로 나아가는 길이었다. 당군은 이 세 길을 따라 진격하였다.

수나라군은 전군이 중도를 취해 요동성(遼東城)을 공략한 뒤 곧바로 천산 산맥을 넘어 오골성을 공격하고 압록강으로 나아가 평양으로 진격한다는 계획이었지만 요동성 공략부터 실패하자 모든 것이 꼬여 버렸다. 그에 비해 당군은 요동 평야에 확실한 교두보를 구축한 뒤 3군이 동시 침공한다는 방침으로, 요하를 건너는 작전부터 세 방향에서 전개, 요동성을 삼면에서 압박하였다.

이세적의 선봉군은 중도를 취하는 듯 하다가, 일순간 갑자기 방향을 틀어 우회하는 노정이었지만 가장 평탄한 북도로 움직여 요하를 건넜다.

4월 1일, 요동도행군은 고구려군의 요하 방어선을 기습적으로 돌파하여, 현도성(玄菟城)을 공격하였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란 고구려군은 성문을 틀어막고 결사적으로 수비를 하였지만 당나라군은 결국 현도성을 함락시켰다.

한편 부총관인 강하왕 이도종은 병력 수천명으로 고구려의 요동 거점 지역인 신성(新城)을 공격하였지만 열흘이 지나도 함락시키지 못했다.

신성 공략이 여의치 않자 일부 군사로 신성 방면의 고구려군을 묶어둔 뒤 주력을 남으로 돌려 개모성(盖牟城)을 공격하여 열흘 남짓의 공격 끝에 함락시켰다. 개모성 전투에서 당나라의 좌둔위 장군 강확이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이때 연개소문이 가시성(加尸城)에 있던 고구려군 700여 명을 보내 개모성을 지키게 하였는데 이들도 당군에게 포로로 사로잡혔다. 포로가 된 고구려군은 당나라 군대에 종군하길 청하자, 당 태종은 그 병사들의 집이 가시성에 있는데, 만일 지금 내 부대에 들어오게 된다면 그 처자들이 모두 살해당할테니 그럴 수는 없다고 하여 모두 풀어주었다. 당태종이 그랬던 이유로는 고구려에 대해 자신의 인덕을 과시함과 동시에, 아무래도 첩자가 있을지도 모르는 병력을 받아들이기는 어렵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35]

현도성에 이어 개모성까지 함락시킨 이세적은 이곳을 근거지로 삼고 일부 군사들을 보내 신성 방면의 고구려군과 맞서게 하여 그 동향을 견제하게 한 뒤, 5월 들어 요동도행군의 주력을 남쪽의 요동성으로 진군시켰다. 한편으로 영주도독 장검은 요하 하류에서 도하한 뒤, 거란족, 해족 등의 이민족 부대를 거느리고 건안성(建安城)을 공격하였다. 이세적의 요동도행군은 국내성에서 출발해 신성 방면을 거쳐 요동성으로 진격하는 고구려 지원군 40,000명을 기병 4,000명으로 저지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남쪽에서 요동성을 지원하는 것은 장검이 이끈 당군이 이미 건안성 등에 선제 공격을 취하는 바람에 이에 대비하는 차원에서라도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 무렵 당 태종의 6군은 중도를 취해 요택(遼澤)을 건너 요동성으로 몰려들었다. 요택은 진흙이 200리여서 사람과 말이 모두 건너갈 수가 없었으므로, 장작대장(將作大匠) 염입덕(閻立德)이 흙을 넓게 깔아 다리를 만들어 군대가 지체하지 않고 요택 동쪽으로 건넜다. 당태종은 늪지대 등을 통과하면서 사용한 다리를 모두 치워버려 배수진격으로 군대의 마음을 굳게 하였다.

3.4. 요동성 함락

요동성 앞에 주둔해 있는 이세적의 군대 안에서는 두 가지 의견이 나왔는데, 바로 싸우자는 측과 당 태종의 주력이 도착한 후 싸우자는 주장으로, 후자가 우세했으나 강하왕 이도종은 속전을 주장했다. 교전이 벌어지자 당나라의 행군 총관 장군예(張君乂)가 달아나는 바람에 당군이 패배하였는데, 이도종과 이세적이 역습을 하여 고구려군이 패배하고 1,000명이 전사했다.

이후 당태종의 본대가 도착함에 따라 요동성의 상황은 급속도로 암울해졌다. 당태종은 속전을 한 강하왕 이도종을 칭찬하고 도망친 장군예를 처형했으며, 용감하게 싸웠던 도위(都尉) 마문거(馬文擧)를 중랑장으로 임명했다. 또 태종은 직접 기병을 이끌고 성 가까이 와서, 흙을 지고 나름으로서 전투를 독려하였다. 당나라군이 수백겹으로 요동성을 포위하고 북을 치며 고함을 치자 그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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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경총요>(武经总要)의 운제 그림

이 당시 고구려군은 상황이 몹시 좋지 않자 개국 왕이자 호국신이었던 추모에게 미녀를 단장하고 바치며 무당이 굿까지 해 사기를 돋웠으나, 이세적이 지휘하는 당군는 포거(抛車)로 큰 돌을 3백 보까지 멀리 날리는 포격을 가해 성 안을 타격했다. 남풍이 불자 당군의 정예병력이 달려들어 성 내에 까지 번졌고, 난장판 속에 마침내 기회를 잡은 당군이 성내로 진입하였다. 고구려군은 죽을 힘을 다해 싸웠으나 마침내 요동성은 무너졌고, 이 전투에서 죽은 자가 10,000여 명이었다. 또한 포로가 된 병사가 10,000여 명, 남녀가 40,000명이고, 양곡이 50만 석이었다. 수양제가 백만 대군을 이끌고 왔음에도 그렇게 견고하게 버티던 요동성이, 10일 만에 무너져내린 것이다.[36]

이 직후 당군은 기세를 살려 백암성(白巖城)을 공격하였다. 이때 연개소문이 오골성의 군대를 내보내 백암성을 포위한 당군을 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전투에서 승리하여 당나라 장군 글필하력에게 부상을 입히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백암성 성주인 손대음(孫代音)이 당나라의 군세가 거대함을 알고는 두려워 하다가 결국 항복하면서 백암성은 함락당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당나라 수군을 이끄는 장량 역시, 요동 반도 남단에 있는 비사성(卑沙城)을 공격해서 한 달 만에 함락시켰다.

3.5. 주필산 전투

이렇듯 당군은 개모성, 비사성, 요동성, 백암성, 현도성 등 5개의 성을 격파하면서 각각 교두보를 마련하는 성과를 거두지만 백암성 함락 이후로는 공세가 한풀 꺾인 모습을 보인다. 하루이틀 만에 전광석화처럼 전장을 옮기며 들이치던 개전 때에 비해, 요동방어선을 돌파하거나 평양을 향해야 하는 수군의 활약도 사라진 채, 32일 동안 단지 요동성을 거쳐 안시성에 접근하는 데 그쳤다.[37][38]

이 시기에 연개소문은 대군을 보내 당나라 본대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을 시도하였다. 대대로 고정의, 북부욕살 위두대형 고연수, 남부욕살 대형 고혜진 등이 지휘하는 15만 대군은 안시성 외곽에 도착하여 사방 40리에 뻗친 진용을 갖추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 진왕(秦王)은 안으로 여러 영웅을 제거하고, 밖으로 오랑캐를 복속시켜 독립하여 황제가 되었으니, 이는 한 시대에 뛰어난 인재이다. 지금 나라 안의 무리를 거느리고 왔으니 대적할 수 없다. 나의 계책으로는 병력을 멈추고, 싸우지 않고 세월을 허송하며 오래 버티어 견디며 기습 병력을 나누어 보내어 그 식량을 보급하는 길을 끊는 것만 같지 못하다. 양식이 이윽고 떨어지면 싸우려고 해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길이 없으니 곧 이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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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권 제21 고구려 본기 제9 보장왕 中
대대로 고정의의 발언}}}
조정의 영수답게 노련한 인물인 대대로 고정의는 당나라군과의 정면대결을 피하고 지구전을 해야한다 하였다. 당태종이라는 거대한 목표를 눈앞에 둔 탓인지 고연수와 고혜진은 이 작전에 따르지 않았다.[39][40] 고연수는 군대를 거느리고 안시성 외곽 40리에 진군하였고 곧바로 다시 안시성 외곽 8리까지 진격, 당나라가 도발 삼아 보낸 돌궐 기병 1,000명을 격파한다. 고연수 및 고구려군은 ‘다루기 쉽다’ 하며 기세가 올랐다고 한다.

이에 강하왕 이도종은 고구려의 대군이 이곳에 집중한 틈을 타, 평양을 기습적으로 타격한다는 제안을 제시하였다. 이때 이도종이 요구한 병력은 5,000명. "그 근본을 뒤엎으면 수십만의 군대를 싸우지 않고도 항복시킬 수 있습니다."라는 것이 이도종의 주장이었는데, 이런 말이 나올 정도면 고구려 군대의 숫자나 위용이 당나라 지휘관들에게도 압박을 주는 규모였을 것이다. 하지만 당 태종은 이런 모험책을 듣지 않았다. 이미 요동을 돌아서 압록강 방면으로 평양부터 치자는 전략을 썼다가 무슨 꼴을 당할지 알려주는 사례들도 있고.[41][42][43]

이때 당태종은 고연수에게 연락을 취해, 자신은 연개소문을 문죄하러 왔을 뿐, 교전은 바라지 않고 다만 신하의 예만 취해준다면 철수하겠다는 의사 표시를 보였고 고연수는 이에 자만하였다고 한다.
태종이 밤에 문무백관을 불러, 몸소 지휘하여 이적의 욱기(勖騎) 15,000명을 적의 서쪽 고개에 진치게 하고[44] 장손무기는 장군 우진달 등을 이끌고 정예병 11,000명을 기병(奇兵)으로 하여, 산의 북쪽에서 협곡으로 나와 적의 등뒤를 치고, 태종은 스스로 기병(會騎) 4,000을 이끌며, 고각(鼓角)과 기치를 숨기고 적의 진영 북쪽 높은 봉우리 위에서 달리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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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부원귀》 권116}}}
기록마다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이세적, 장사귀 등은 서쪽에 진을 쳤고, 장손무기와 우진달 등은 정예군을 기습병으로 삼아 산의 동쪽, 혹은 북쪽에서 협곡으로 나와 후면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세민 본인은 직접 기병을 이끌고 북과 나팔을 옆에 끼고 깃발을 눕혀서 산으로 올랐다
고연수 등이 이세적의 군대가 홀로 포진한 것을 보고 군사를 정돈하여 싸우고자 했다.

{{{#!wiki style="text-align:right"
《자치통감》 권198, 정관 19년 6월 22일 무오}}}
주필산 전투에서 6군(친위대)은 고려에게 제압당하였고, 태종이 흑기(이세적의 대장기)를 살펴보라 명하였는데, 척후병이 흑기가 포위되었다 보고하니 황제가 크게 두려워하였다.
{{{#!wiki style="text-align:right"
'수당가화(隋唐嘉話)上, 中華書局 10~11쪽}}}
6월 22일, 날이 밝으면서 전투가 시작된다. 고연수가 이세적을 먼저 깨트리느냐, 이세민이 먼저 고연수의 후미를 쪼개느냐, 이것은 얼핏 허무해보이기까지 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당나라의 간담을 서늘케 하기에 충분했다. 장창으로 벽을 쌓은 이세적의 진은 고연수의 돌격에 밀리다가 마침내 사방에서 포위당한 형국이 되었다. 이세적의 군대가 포위되고 친위대까지 위태로우니 당태종이 크게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또한 말갈 기병의 칼날이 이미 당태종의 본진을 쑤시고 있었다.
태종은 장손무기의 군대가 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는 것을 보고 명하여 고각을 울리고 기치를 일제히 들게 하였다. 고연수 등이 크게 놀라 장차 대처하려 했지만 그 진이 어지러워졌다. 그때 번개가 쳐서 당군의 위세를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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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부원귀》 권116}}}
하지만 이세적의 군대가 와해되는 것보다 장손무기의 군대가 고연수의 후미에 쐐기를 박는 것이 먼저였다. 그리고 이세민이 이끈 친위기병 역시 고연수의 군대를 쪼갰다. 흰 옷에 화극과 화려한 화살통을 무장한 무사가 천둥 번개와 함께 무쌍을 찍으면서 일약 스타로 떠올랐는데 그가 바로 설인귀였다. 이 틈을 타 모루의 역할에 성공한 이세적의 부대가 역습에 나섰고, 고연수의 군대는 셋으로 쪼개져 당나라군과 대응하였다.

이때 당군은 출구 쪽을 어느 정도 띄어 두어 고연수군이 퇴로를 찾아 몰리도록 하였는데 고연수는 이를 따라 탈출하여 36,800 잔군을 거느리고 탈출한다. 10,000에서 20,000에 이르는 고구려군이 전사하였는데 비명과 통곡이 산골짜기를 메우고, 개울이 붉게 물들었으며 뼈와 창검이 쌓였다고 한다. 고연수는 산에 의지하여 진을 쳤는데 당나라군은 이들을 포위하고 퇴로를 차단하였다.

고연수 등을 비롯한 고구려군 37,000여 명은 자그마한 구릉에 올라가 방어책을 강구하려 하였지만, 당군이 이를 포위하자 결국 항복하였다. 항복한 고구려 장교만 3,500여 명이었고, 말갈 병사 3,300여 명은 모두 땅에 파묻어버렸다.[45] 또 이 전투에서 당군이 노획한 말만 5만여 필이나 되었으며, 항복한 고연수는 홍려경(鴻臚卿)으로, 고혜진은 사농경(司農卿)으로 봉해졌다.[46] 단 목을 벤 적이 전투 중 1~2만이고, 나머지 지휘하던 37000과 고연수 등의 행적은 기록되어 있으나 주필산으로 출동했던 나머지 고구려군 10만의 행방이 묘연하다. 구당서에서는 나머지 모두를 그리고 신당서에서는 약 3만을 돌려보냈다고 하는데,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전투가 가능한 적병 수만에서 십만에 이르는 인원들을 공성전을 앞둔 태종이 돌려보낼 리가 만무하다. 돌려보낸 것이 아니라 당군이 주필산에서 격퇴한 고려(고구려)군 자체의 규모가 크게 잡아도 5~6만이고 나머지 10만의 본대는 이기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10만의 본대가 어디로 갔느냐 하면 신당서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지금 안시에 10만의 적병이 있어 남하하지 못한다는 의견이 있는 것으로 보아 주필산에서 살아남은 고구려 지원군 10만의 위치는 안시성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당시 고구려 지원군 지휘부는 알려진 자가 고정의, 고연수, 고혜진인데 고정의를 제외한 나머지 이들은 욕살에 지나지 않아 본대를 지휘했었다고 보기 힘들어 실질적 총사령관이 대대로(대로) 고정의였을 것이다. 이 고정의가 10만의 본대를 이끌고 안시성으로 들어가 농성을 한 것이다. 실제로 안시성은 작은 토성에 지나지 않을 성인데 내부에 10만의 상비군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태종이 안시성을 그냥 우회하여 평양직공을 택하지 못하고 공성전을 치러야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3.6. 신성, 건안성 전투

신성(新城), 건안(建安), 주필(駐蹕)에서의 세 차례 큰 싸움에서 우리의 군대와 당나라의 병사 중에 전사자가 많았으며, 말들도 많이 죽었다. 황제가 성공하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하고 탄식하면서 말했다. “만일 위징(魏徵)이 있었다면 나에게 이번 원정을 못하게 하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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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상}}}
위정(韋挺)은 개모성에 주둔할 것을 명 받았는데, (개모성은) 신성과 인접한 곳에 있어 온종일 전투소리가 들렸고, 이에 (그는) 두려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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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당서》 위정전(韋挺傳)}}}
...(중략)... 장손무기가 홀로 나서서 “ 천자의 원정은 보통 장수들의 정벌과는 다릅니다. 따라서 모험을 하면서 요행을 바랄 수는 없습니다. 지금 건안성과 신성의 고구려군이 아직도 10만이나 되는데, 우리가 만약 오골성으로 간다면 고구려가 반드시 우리의 뒤를 추격할 것입니다" 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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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상}}}
세적이 처음에 요수(요하)를 건너올 때, 모든 장수들에게 말했다. "신성은 고구려 서쪽 경계를 지키는 성 가운데 최고의 요충지이다. 이 성을 먼저 도모하지 않고서는 나머지 성은 함락시킬 수 없다"[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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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하}}}

구당서》와 《 신당서》에는 자세히 기록되어있지는 않으나 《 삼국사기》 에 신성과 건안성 전투가 언급된다. 위 기록에 언급된 것을 참고하면 이 두 전투 역시 양측 모두 주필산 전투에 버금갈 정도로 대군을 동원한 중요 전투였음을 알 수 있다. 《 구당서》 위정 열전에는 신성 바로 밑에 있는 개모성에 주둔하던 위정이 신성에서 들려오는 양군의 북 소리와 함성 소리를 듣고 두려워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군이 안시성에서 고구려군에게 가로막혔을 때 안시성을 우회하여 오골성을 공격한 후 평양을 직공하자는 강하왕 이도종의 간언을 태종이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가 신성과 건안성에 주둔한 고구려의 10만 대군 때문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두 전투에서 고구려는 성을 잘 지켜냈음을 알 수 있다.

요하 하류에 위치한 건안성 역시 영주도독 장검이 이끄는 이민족 부대의 공격과 비사성을 함락한 장량의 평양도행군의 공격을 막아내며 평양도행군이 당나라 본군과 보조를 맞춰 고구려 영내로 진입하는 것을 막아낸다. 645년 4월, 장검의 이민족 부대는 요하 하류에서 도하하여 건안성을 공격하여 고구려군에게 피해를 입혔지만 결국 건안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였고[48], 자치통감에는 645년 7월에는 장량의 평양도행군이 건안성을 공격하다가 건안성의 고구려군에게 오히려 반격당하여 군사를 많이 잃고 가까스로 막아낸 기록이 있다.

이 전투들의 의의는 상당히 큰데 요동 방어선 북단의 최고 요충지 신성이 건재함에 따라 고구려는 신성- 남소성- 국내성으로 이어지는 요하 상류에서 자유롭게 군사 활동을 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로 인해 상기된 것처럼 당군은 안시성- 오골성- 평양성으로 이루어지는 진군 계획에 큰 차질을 빚게 된 것이다. 건안성 역시 장량의 평양도행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요동 방어선이 구축된 천산산맥을 중심으로 전쟁을 끝내려는 고구려의 계획이 성공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실제로 당나라 본대가 안시성 공략에 애를 먹는 8월 중순, 오골성을 먼저 공격하자는 고연수의 제안을 이세민이 수용하지 못한 이유가 안시성에 위치하며 당군의 진격로를 끊임없이 위협한 10만의 고구려군 때문이었음이 신당서에 기록되어 있다.

사실 1차 고구려-당 전쟁의 성패는 여기서 결정이 났다고 봐도 무방하다., 신성이 식량 자원과 에너지원들의 보고여서 요동 방어선의 거점 지역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평양으로의 어택땅을 하게 된 2차 전쟁과 달리 1차 전쟁과 3차 전쟁 모두 방어선의 핵심 지역을 떨어트리면서 남진하는 전략을 취했는데, 1차 전쟁 때는 신성을 떨어트리지 못해서 안시성에서 결국 제지 당했지만, 3차 전쟁 때는 요동 지역의 다른 성을 냅두고 무려 7개월 동안이나 신성 공략에 매달린 점 등을 볼 때 당나라가 1, 2차 전쟁의 패배 주요 원인 중 하나를 신성 함락 실패에서 찾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며, 다른 말로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선 무엇보다 신성을 함락시켜야 한다고 그들 스스로가 생각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3.7. 안시성 전투

주필산 전투에서 50여 일 정도의 시간이 지난 이후 본격적으로 안시성 전투가 시작되었다.[49]
파일:안시성_전투_기록화.png
안시성 전투 기록화. 전쟁기념관
백암성을 깬 직후 당태종은 안시성과 건안성 가운데 어느 성을 먼저 공격할지를 의논했다. 연개소문도 못 넘은 성이니 치지 말고 건안성을 먼저 쳐서 자연스럽게 고립시키자는 당태종의 의견에 대하여 이적 안시성에서의 배후 기습이 우려되니 건안성을 치기 전에 안시성을 제압하는 밑작업이 필요하다 역설하고 관철시킨다.

안시성은 당군에 맞서 굳세게 방어하였으며, 당태종은 크게 진노하여 군사를 몰아 안시성을 공격하였으나 번번히 실패하였다. 안시성에서 예상치 못하게 고전을 하게 되자 당 태종을 따라 출전한 신하들은 "그냥 여기서 시간 낭비 말고 먼저 남쪽의 오골성을 친 다음에 바로 평양성으로 직공가죠."라고 청했다. 특히 안시성을 구원하러 왔다가 주필산에서 패전한 고구려 항장, 즉, 고연수와 고혜진이 가장 적극적이었다.[50] 그 논리는 오골성(烏骨城)의 성주는 늙었으니 쉽게 공략할 수 있을 테고, 오골성을 무너뜨리면 바로 평양을 타격할 수 있다는 것 이었다. 또한 장량의 병력이 있는 비사성에서 오골성까지 이틀이면 당도하므로, 힘을 합치면 오골성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 태종의 오른팔과 같았던 장손무기가 나서서 "천자께서 직접 하시는 정벌인데 함부로 움직여선 안 된다. 지금 안시성을 포기하고 오골성으로 돌리면 분명 10만 명의 적군이 우리 뒤를 칠 것이다.[51] 안시성과 건안성을 먼저 함락시켜야 한다 "라며 반발하자 태종은 결국 안시성 공략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당태종 본인의 경험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많다. 당태종이 '진왕 이세민'으로 불리던 시절, 그의 주요 공훈은 천책상장(天策上將)이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군공을 크게 세운 점이었다. 이때 쌓은 공적을 바탕으로 당나라 건국 이후에도 권력 암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헌데 당태종이 이 시절 가장 즐겨썼던 전법이 적의 공격이 들어오면 우선 수비를 굳게 하여 버티다가 이후 기동력을 바탕으로 적군의 보급로를 우회 타격하여 와해시키는 전법이었다. 본인이 가장 즐겨썼던 전략인 만큼 이를 가장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안시성은 낮에 철저히 방비를 하는 한편 밤에는 정예병들로 하여금 줄을 타고 성벽을 내려가게 하여 야습을 일삼았다. 당연히 격퇴되었지만 화가 난 당 태종은 "성을 함락시키면 성안의 모든 사내를 죽여버리겠다."라는 불필요한 말을 하여 오히려 안시성의 저항 의지만 돋워 버렸다.(...) 이러한 일이 당군의 전황에 더욱 불리하게 작용했음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52]

이때 당 태종과 함께 출전했던 이도종의 건의에 따라 안시성의 공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토산을 쌓을 것을 명령하여 수개월에 걸쳐 흙을 쌓아 토산을 만들었다. 한때 토산 위에서 나무와 돌을 날려 안시성의 성벽 일부를 허물었으나 폭우로 인하여 토산이 무너지는 사태가 일어나고 말았다. 이때 안시성의 성벽 위에 있던 고구려 병사들이 허물어진 토산으로 진격하여 이를 빼앗아 버렸다.

최후의 희망이었던 토산마저 잃어버리자 당태종은 더이상 싸울 의지를 잃었고 결국 철군하였다. 이때 토산의 책임자였던 이도종과 부복애가 토산을 허술히 관리하여 고구려군에게 빼앗겼다고 하여 그 책임을 묻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당 태종은 이도종이 요동에서 싸울 때 개모성 요동성을 함락시킨 공로가 있으므로 그럴 수 없다며 이도종을 용서해 주었다. 반면 부책임자인 부복애는 즉각 처형당했다.

당시 당군과 안시성 성주 간의 전투는 무척 치열하여 당태종이 이 전투에서 한쪽 눈을 잃어 애꾸눈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한편 안시성주의 이름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아 《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그의 이름이 남아있지 않음을 슬프게 여겼다고 전해진다. 다만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따르면 당시 안시성 성주의 이름은 양만춘이라 하고 몇몇 기록에 양만춘이라고 언급되긴 하나 1000여 년 후 야사에서 그렇다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확실하지 않다.

3.8. 패퇴하는 당군

태종이 도읍으로 돌아가서 이정(李靖)에게 말했다. “내가 천하의 군사를 가지고도 작은 오랑캐에게 곤욕을 당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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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상 }}}
지금 고연수에게 전략이 있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병사를 이끌고 직접 앞으로 나와서 안시성과 연결되는 보루를 쌓고, 높은 산의 험한 지세에 의지하여 성 안의 곡식을 먹으면서 말갈군을 풀어 우리의 마소를 약탈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공격한다고 해도 빨리 함락시킬 수 없고, 되돌아가려 해도 늪지에 가로막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군사들은 가만히 앉아서 곤란한 지경에 빠지게 되니, 이것이 상책이다.[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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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상 }}}
예상외로 요동에서의 싸움이 장기전이 된 채로 당군은 점차 싸울 힘을 잃어가게 되었다. 여기에 당나라의 후방 지역인 몽골 초원의 튀르크계 설연타 역시 반당적인 움직임을 보였고[54], 결국 당태종과 지휘부는 철군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이때 조금 멀지만 쉬운 길을 놔두고 굳이 요하 하류의 거대한 늪지대인 요택을 통하여 장안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3일이면 주파할 수 있는 길을 놔두고 굳이 그 몇 배의 시일과 공력이 소요되는 늪지대 요택을 택한 것은 그만큼 당군이 장악한 지역이 협소하고 또 유지가 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55] 당군은 요택의 갈대숲과 늪지대를 고생하며 건너야 했고, 보급마저 끊어져 굶주림과 추위에 당나라 병사들이 죽거나 병이 들어 살아서 돌아간 이는 소수였다고 한다. 설마 당 태종 본인도 이런 식으로 늪을 기어서 돌아올 거라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록에는 남아있지 않지만, 고구려군 역시 철수하는 당나라군을 그대로 편히 보내주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56]

이때 이세민이 몸소 풀을 베고 수레를 밀며 흙을 나르는 등 당군의 철수 과정이 얼마나 위급한 상황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심지어 본인도 도중 등창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겼다. 당 태종은 일찍이 이런 참혹한 패배를 경험한 적이 없었기에[57] 장안으로 돌아온 후에 " 위징이 살아있었다면 반드시 나를 말렸을 터인데 그가 내 곁에 없다는 것이 너무나 슬프고 애석한 일이다."라고 한탄했다.

당나라 측 기록인 자치통감에서는 이 전쟁으로 고구려 성 10개를 공취하고, 고구려군 40,000명가량을 전사시켰으며 민간인 포로 18만, 군량 62만 석 이상을 노획하고, 죽은 당나라 병사는 수륙군 도합 1,200~2,000명, 말은 열에 7~8마리가 죽었다라고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경미한 피해만을 입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58] 당측의 기록대로라면 당군의 피해가 2,000명 정도로 경미하고, 교환비가 20~40배가 넘으니 이것만 본다면 중원 통일 시절의 전공에 전혀 뒤떨어지지 일인지라 이후에 반전 논의가 나올 일이 아니었을 것이며, 당나라에 항복한 고구려 장수 고연수 역시 고구려를 배신하고 항복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고, 화병으로 죽지 않았을 것이다. 본래 중국에서는 황제라도 자신의 통치에 대해 쓰여진 실록을 볼 수 없었으나[59] 당태종은 자신의 치세에 쓰여진 실록을 보려고 고집했고 실제로 봤으며 내용을 고치기도 했다. 참고로 임진왜란 때 일본군은 서전에서 당군에 비해 훨씬 더 압도적이었으나 1년 동안 병력의 40%을 잃었다.

이곳 저곳의 파편적인 기록들을 통해 당나라 지휘부의 피해 역시 의외로 적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주필산 전투에서 좌무위 장군 왕군악은 참살, 개모성 전투에서 좌둔위 장군 강확은 사살, 백암성 전투에서 저격당한 우위 대장군 이사마는 당해년도에 사망, 우효위 대장군 계필하력 역시 창에 맞아서 생사의 문턱을 오갔으며 요동성 외곽 전투에서 장군예는 패전의 책임으로 처형당했다. 애매한 참언으로 엮어서 죽인 평양도행군 대총관 장량은[60] 차치하더라도 부대총관 좌난당은 사망하고, 수군총관 장문간 역시 최소한 위장군급 인사인데 패전의 책임으로 참수당하는 등 수군 역시 좋은 꼴을 보지 못했다.

이세민은 안시성에서 철수할 때 안시성 성주에게 비단 100필을, 연개소문에게는 의복과 활, 화살 등을 선물하였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이를 무시하고 사례하지 않았으며, 후에 그가 보낸 서신은 내용이 궤탄하고 당나라를 침입할 뜻이 있어 이세민으로 하여금 분노하여 단교하게 했다고 한다. 이후 이세민은 장안으로 돌아와 죽은 병사들을 위해 제를 올리며 눈물을 흘리며 한탄한다.

한편 주필산 전투 후에 당나라에 투항한 고연수와 고혜진은 곧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킬 것으로 믿었으나 오히려 당군이 패퇴하고 달아나자 고국을 버리고 투항했던 일을 크게 후회하였다. 결국 고연수는 이 일로 상심하다가 화병으로 죽었고, 고혜진은 결국 살아서 당 태종을 따라 장안에 도착하였다.

안시성 전투를 비롯한 고당전쟁은 또 후대에 끼친 상징적인 의미가 매우 컸다. 임진왜란에 비유하자면 일본군이 다이묘들과 전국시대 네임드들을 고쿠다카, 명성 랭킹 순서대로 모두 끌고온 상황에서 부산~김해 정도만 뚫고 한양은 커녕 대구도 못 가서 양산~밀양~경주~울산 선에서 잘린 셈, 아니 그 이상이라 할 수 있다. 중국 역사에서 이 정도로 화려한 진용으로 대외원정을 나간 사례도 찾아보기 힘들뿐더러 더군다나 대륙과 북방을 평정한 당태종 생애 이토록 처참하게 패배한 전투는 전무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패배와 함께 구사일생에 가까운 귀국길로 인해 당태종은 임종 직전 후계자인 당 고종에게 절대로 고구려와 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이야기가 있다.

즉, 고구려는 백만대군을 물리친 국가에 더해 당나라 최고의 명군이라 꼽히는 '당태종마저 물리친 국가'라는 타이틀까지 추가하게 되어 수백 년 뒤 쿠빌라이 칸조차 언급할 정도로 파급력이 컸다.

4. 전쟁 사이의 전쟁, 640년대 소모전

황제옷과 활을 개소문에게 선물하였는데, 사신을 보내 사례하지 않았다.
이에 조서를 내려 조공을 깎고 받지 않도록 하였다.
신당서 고려전
(646년 5월)보장과 개금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미녀 2명을 바쳤으나 돌려보냈다.
(646년 6월)개소문이 비록 사신을 보내 국서를 주었으나 그 내용은 모두 터무니없는 것들이었다.
그는 당나라 사신을 거만하게 대했으며, 항상 국경의 빈 틈을 노렸다.
여러 차례 신라를 치지 말라고 하였으나, 그는 침공하고 능욕함을 멈추지 않았다.
자치통감 당기
연개소문과 이세민은 서로 선물을 주고받았으나 비참함을 느낀 쪽은 언제나 이세민이었다. 연개소문은 당을 침공할 뜻을 내비치면서 고압적으로 대했고 계속해서 신라도 공격하였다. 당은 쉴 틈도 없이 다시 병사들을 징발하여 설연타의 20만 기병과의 전쟁에 돌입한다. 이세민은 이치에게 대리청정을 맡길 정도로 심신이 무너져 있었으나 그의 고구려 정벌에 대한 집착은 계속되었고 새로운 공략법을 입안하기에 이른다.
지금 만약 적은 부대를 자주 보내어 번갈아 그 강역을 어지럽혀, 저들이 명을 받아 출동하는데 피곤하게 하고, 쟁기를 놓고 보루로 들어가게 하면 수 년 사이에 천리가 매우 쓸쓸하게 되어 인심이 저절로 이반할 것이니, 압록강 북쪽은 싸우지 않고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좌무위대장군 우진달(牛進達)을 청구도행군 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장군 이해안(李海岸)을 부총관으로 삼아, 병력 만여 인을 동원하여 보내 누선(樓船)을 타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 들어가게 하였다. 또 태자첨사 이세적을 요동도행군 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장군 손이랑(孫貳郞) 등을 부총관으로 삼아, 병력 3천 인을 거느리고 영주도독부 병력을 따라 신성도에서 들어가게 했는데, 두 군대는 모두 물에 익숙하여 잘 싸우는 자들을 선발하여 배속시켰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그는 정면으로 고구려를 돌파하여 제압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렇기에 그는 우선 수만 단위의 군사들을 동원하여 지속적인 소모전을 통해 고구려의 피로 누적을 노렸다. 647년 3월, 당나라의 첫번째 선발은 가장 노련한 장수인 이세적이었다. 우진달, 이해안 등 역시 후방의 요동반도에 상륙하였다. 그들은 되도록 많은 교전을 통해 성 주변을 약탈하고 파괴하면서 고구려의 동원 체계를 피로하고 교란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우무위대장군 설만철(薛萬徹)을 청구도행군 대총관으로 삼고, 우위장군(右衛將軍) 배행방(裴行方)을 부총관으로 삼아, 병력 3만여 인과 누선 전함을 이끌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서 공격하게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647년 12월, 막리지 고임무가 사신으로 건너가 화친을 성사시키고 648년 1월에도 연이어 친선 사절을 파견하였다. 이세민은 사죄를 받아들인다고 대답하였으나 이는 기만일 뿐이었다. 오히려 그대로 사신이 오는 동시에 3만의 군사를 뽑아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지휘관도 물갈이되었다. 안정적으로 전술을 수행하는 노련한 선임 지휘관 이세적과 비교해서 후임 지휘관 설만철은 혼자서 수천의 기병을 당해내고 대승을 거두는 용장 스타일이었다. 뒤이어 서해안의 수군장수인 고신감 역시 쳐들어왔다. 이 싸움에서도 설만철은 기이한 무용을 뽐냈다고 기록되지만 실제 전과는 그렇게 시원치 않은듯 보인다. 당시 당나라 3대 명장으로 꼽히던 부마 설만철은 부장 배행방과 전공을 다투었다는 석연찮은 이유로 처형만 간신히 면하고 명부에서 이름과 기록이 불살라진 채 유배를 당하면서 무장 경력이 끝난 것이다.[61]
태종이 송주(宋州)자사 왕파리(王波利) 등에게 명령하여 강남 12주의 공인(工人)들을 징발하여 큰 배 수백 척을 만들어 우리를 정벌하고자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강위 등이 백성을 뽑아 이민족들로 하여금 선박을 만들었는데 아, 공, 미 3주의 이민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임신일에 무주도독 장사귀, 우위장군 양건방 등으로 하여금 농우, 협중의 병사 2만여명으로 그들을 쳤다.
자치통감
1~3만 규모의 비교적 소규모의 부대를 동원한 교전을 통해 감을 잡은 이세민은 선박 건조에 박차를 가했다. 647년 8월에 강남에서 선박 수백척을 건조한데 이어 648년 7월에는 지금의 사천 일대인 검남, 8월에는 무주, 월주, 홍주 등지에서 전함 1300척을 건조한다. 반란이 일어나고 이를 진압하면서까지 강행할 정도로 선박 건조는 혹독하였다고 한다.

12월에는 신라에서 찾아온 김춘추를 성대히 환영하고 나당동맹을 성사시켰으며 계속해서 용사들을 모집하고 수군 기지에도 군량과 자재들을 쌓아 만전을 기했다. 30만 대군을 일으켜 다시 전쟁을 일으키기로 한 예정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여름 4월에 당태종이 죽었다. 요동전쟁을 그만두라고 유언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이세민이 사망하였다. 고구려에 대한 몽니와 집착이 광기에 근접해가던 그는 끝에 가서는 무언가를 느꼈는지 고구려와의 대결을 접으라는 명을 내렸다. 당태종에게 무익한 전쟁을 그만두라며 열심히 상소하던 당나라의 고위관료들은 평안을 찾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당태종과 마찬가지로 고구려와의 재대결을 다시 노리며 계속해서 고구려와 분쟁을 지속했다.

고종이 토번 찬포를 부마도위로 삼고 서해군왕으로 봉했다. 장손무기에게 도달한 국서에서 말하였다.‘천자께서 새로이 즉위하셨으니 불충한 신하가 있다면 마땅히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하러 가겠소!’
자치통감 당기

토번에서는 이세민의 장례식에 사절을 보내 그 뜻을 전했다. 얼핏 봐도 아슬아슬하게 선을 타는 이 발언은 연개소문을 겨냥한 이세민의 선전포고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내용임을 생각하며 본다면 그 조롱의 수위가 사뭇 달라진다. 오늘날에 대입하자면 장례식장에 간 조문객이 유가족 앞에서 성대모사로 고인드립을 친 셈이다. 터무니 없는 핑계로 전쟁을 강행한 이세민은 그야말로 주변국의 비웃음거리가 된 것이다.

5. 전쟁 사이의 전쟁, 650년대 각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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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 유역도
연개소문과 고구려에 대한 공포는 각인되어 대륙 깊숙한 곳까지 전승을 남겼으나 이것으로 고구려가 시대적 과제를 완수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나당연합이 결성되었고 이세민이 죽기 직전까지 고안하고 준비한 소모전과 상륙작전의 효과는 입증되었다. 또한 당나라는 645년의 전쟁 이후 고구려 주변 종속국들에게도 손을 뻗쳤다. 이에 대해 연개소문이 낸 수는 요하 상류에 있었다.

요하는 일반적인 인식에 비해서 훨씬 더 서쪽으로, 그리고 북쪽으로 뻗친 강이다. 상류의 북쪽 지류인 시라무렌강은 몽골로 뻗는 드넓은 사막과 초원 경계에 근접해있으며 남쪽 지류인 노합하는 만리장성 코 앞을 흐르는 강이다.[62] 거란과 해가 자리잡은 요하 상류를 고구려가 장악한 수세기 동안 중국 입장에서는 오늘날 북경 동부까지의 2천리 구간은 주현 취급도 못 받는 깡촌으로 남았다. 반대로 고구려에게 이곳은 자신들의 본토를 감싸는 방패이자, 북방과 서역으로 뻗어나가는 창구였다.

하지만 이곳이 온전히 고구려의 수중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곳은 고구려와 중원, 몽골초원 이렇게 동아시아 3강의 각축장이었고 이곳의 세력들은 시세에 따라 강한 곳에 붙었다.
고구려가 장군 안고를 보내 고구려병과 말갈병을 거느리고 거란을 침공하였다. 송막도독 이굴가가 기병을 동원해 그들을 막았는데, 신성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책부원구 외신부
고구려는 내몽골 시라무렌강 인근에 위치한 송막 신성을 쳤다. 이 전투에서 거란의 친당파 수령 이굴가[63]는 화공으로 고구려의 기병 500명을 죽이고 그 시체를 모아 경관을 쌓았다. 당 고종은 승전보를 조정에 펼쳐 보여 이를 기념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이굴가는 인상적인 무공을 기록하였으나 전체적인 싸움과 거란 신성의 향방은 해석에 따라 엇갈린다. 이후 650년대 전쟁에서 등장하는 고구려군의 신성이 거란 신성으로 해석되는가 하면 거란이 이후 고구려를 압박하는데 별다른 역할을 못하고 오히려 고구려는 신라에도 동시에 힘을 쏟는 여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영휘 6년에[64] 신라가 고구려와 말갈이 성 36개를 빼앗음을 호소하여 구원을 청하였다. 조서를 내려 영주도독 정명진, 좌위중랑장 소정방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65] 치게 하였다. 신성에 이르러 고려 병사를 이기고 성 바깥과 촌락에 불을 놓고 돌아왔다.
신당서 고려전
겨울 10월에 이 조정에 앉아 있는데,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회보가 없었으므로 근심하는 빛이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 무열왕 6년 기사
영휘 6년에 소사업에게 위구르 기병을 거느리고 고려를 치게 하였다.
구당서 회흘전
연개소문은 당나라에 대한 공세를 유지하는 동시에 백제, 말갈과 연합하여 신라에게도 칼을 겨누었다. 신라는 나당연합을 결성시킨 주역인 김춘추가 막 즉위한 상황이었다.

655년, 고구려-백제-말갈 연합군은 대대적으로 신라를 침공하여 신라 북방의 30~36개의 성을 함락시켰고 659년에도 고구려-말갈 연합군이 하슬라(강릉) 방어선을 공격하면서 신라는 남쪽의 실직(삼척)을 2선 방어 기지로 삼아야 했다. 이는 신라에게 있어서 엄청난 국가적 위기였고 신라는 무열왕 즉위 이후 세 나라의 연합군을 처단하기 위해 당에 구원군을 요청하게 된다. 당에서는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고구려 방면으로 정명진, 소정방, 위구르 기병을 이끌던 소사업 등을 투입했다. 의례적인 태자 책봉 축하 사절 기록이 있는 656년에 잠깐 전쟁 기록이 잦아들 뿐 싸움은 계속되었다. 이 고구려ㆍ백제ㆍ말갈 연합군에는 연개소문과 그의 아들들은 물론이고, 백제의 의자왕 윤충 & 대야성 전투(642년) 때 의자왕한테 투항한 검일 모척도 있었을 것이다.
현경 2년(657년) 설인귀에게 명하여 정명진을 보좌하여 요동을 공략토록 하였는데 귀단수에서 고구려를 깨트려 3,000명을 베어 죽였다.
다음해 양건방, 계필하력과 더불어 고구려 대장 온사문에 맞서 횡산에서 싸웠다.
구당서 설인귀 열전
현경 3년(서기 658년) 6월에 영주도독 겸 동이도호 정명진, 우령군 중랑장 설인귀로 하여금 병사를 거느리고 고려의 적봉진을 함락시켜 400여명을 참하고 포로 100명을 잡았다. 고려는 대장 두방루로 하여금 3만명으로 대항하였으나 정명진이 거란을 이끌고 거꾸로 들이쳐 크게 깨트렸는데 참수한 것이 2,500명이었다.
현경 3년(혹은 4년) 11월에 우령군 중랑장 설인귀 등으로 하여금 고려 장군 온사문과 횡산에서 싸워서 깨트렸다.
자치통감 당기
현경 3년에 정명진을 보내 설인귀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66]
신당서 고려전
장군~중랑장 선에서 진행되던 싸움에는 대장군들이 등장하였다. 고구려에서는 두방루, 온사문 등이 등장하고 당나라에서도 계필하력, 양건방 등 당나라 1세대 대장군들이 투입되었고 귀단수, 적봉진, 횡산 등지가 주요 격전지가 되었다. 고구려가 깨졌다는 당 실록 기록이 자치통감에 인용되었는데 고구려가 이겼다는 기록도 같이 남아있거나 아예 결과가 누락된 경우도 존재한다. 기록마다 연대가 달라서 순서가 섞이는 감이 있지만 순서에 따라서 누락된 고구려의 전쟁 양상들이 조금씩 달라진다.
현경 연간(650년대 후반), 가도자(可度者)가 죽자, 해가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다.
굴가가 죽고나서 해와 연결해 반란을 일으켰다.
신당서 북적전 해, 거란
장군 신문릉과 함께 흑산에서 거란을 깨트려 거란왕 아복고와 수령들을 잡아 낙양으로 끌고갔다. 이 공으로 하동현남에 봉해졌다.
구당서 설인귀 열전
위대가는 처음에는 좌천우비신이 되었다가 영휘 년간에(650년대 초) 강하왕 도종이 처벌받자 연좌되어 노룡부 과의로 좌천되었다. 장군 신문릉이 병사를 이끌고 고려를 쳤는데 토호진수에 이르렀을 때 고려가 이를 습격하여 패배하였다.
구당서 위정전
노룡부는 북경과 산해관 사이에 위치한 지방 군사조직이며 토호진수는 오늘날의 노합하에 해당한다. 북경 코앞 노룡부 관할까지도 고구려의 거점이 밀고 들어왔다.[67]

거란과 해에서도 일진일퇴는 계속되었다.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이 계속되는 중, 묘하게도 해족의 친당파 수령 가도자, 거란족의 친당파 수령 이굴가가 같은 시기에 죽고 동시에 거란과 해 모두 당에게 등을 돌린다. 당은 이들을 공격하여 해왕 필제를 죽였고 거란왕 아복고도 포로로 잡아간다. 660년 5월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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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0년대 내내 계속되었던 각축전의 승부는 어찌 되었는지 견해가 엇갈린다. 혹자는 거란왕 아복고, 해왕 필제 등 고구려에 우호적으로 작용하던 세력들이 당에 패배한 것, 적봉진과 같은 거점의 함락 등을 근거로 내몽골이나 요서에서 고구려의 세력이 축소되거나 철수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혹자는 이어지는 2차 고구려-당전쟁 때 거란과 철륵 등이 당나라보다는 고구려에 훨씬 우호적으로 작용한 점, 2차 고구려-당전쟁까지의 대승, 연씨 가문 휘하의 거란 등의 정황으로 보아 오히려 고구려가 이 일대의 주도권이 강화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어찌되었던 고구려와 당, 양대 강국은 북방의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거란 돌궐 말갈 위구르에 이르기까지 북방 민족이 포함된 수많은 군사들이 동원되었다. 싸움은 이전의 1차 고구려-당전쟁과 부차적인 소모전의 연장선상이었고 그 다음 이어지는 2차적인 대전의 서막이었다. 당나라는 패배의 설움으로 15년 동안 절치부심하였고 그 대전략과 연계된 가공할 만한 일격이 아직 남아있었다.
고종이 즉위하고 병부상서 임아상, 우무위대장군 소정방, 좌효위대장군 계필하력 등에게 명하여 전후로 토벌하게 하였으나 모두 큰 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구당서 고려전
당은 이 전쟁을 2차 고구려-당전쟁과 묶어서 공이 없었다고 자평한다.

6. 2차 전쟁

고구려 당나라는 서로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싸움은 660년에도 한창이었고 고구려의 무게중심은 서북쪽에 쏠려있었다. 그런데 2달 뒤, 나당연합군 20만이 별안간 서해 건너 백제를 멸망, 고구려를 협공할 교두보를 마련한다. 13만 대군이 서해를 횡단하는 미증유의 상륙작전이었지만 이조차도 예고편이었다. 귀환한 당의 주력군은 그대로 배 이상 증편되어 다시 서해를 건넌다.

660~661년까지 고구려군은 주력군이 거의 백제 땅의 백제부흥군 전선에 투입되어 텅 비다시피 한 신라 북측을 공격하기도 했으나( 칠중성 전투, 북한산성 전투) 성주들의 결사항전에 날씨도 안 따라주고 곧 서쪽에서 당군이 본격적으로 밀고 들어오니 백제 쪽은 신경쓸 겨를이 없어졌다.

6.1. 당나라의 전쟁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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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부흥운동이 기세를 더하던 시기이긴 했지만, 660년 겨울 당고종은 고구려 원정을 발표하고 병모를 모집하기 시작한다. 최종적으로 동원한 규모는 대략 35개군. 각각 도행군의 진격로는 미상이나 대체적으로 소사업과 정명진이 이끄는 부대는 육로, 소정방 부대는 해로로 전진한 것이 확실해 보이며, 그 외에 임아상, 방효태가 지휘하는 부대도 해로 쪽으로 움직였을 가능성에 비중을 두고 있다. 글필하력이 지휘한 요동도행군의 진격로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들이 제시되었으나, 최근 연구에 의하면 해로를 통해 압록강으로 침공했다는 가설이 힘을 받고 있다.

아울러 당나라에 숙위하던 김인문을 귀국시켜 막 즉위한 문무왕에게 고구려 공격 사실을 알리고 출병을 요구하였다. 이에 신라측은 문무왕이 직접 남천주로 나아가 옹산성과 우술성[68] 일대의 백제 부흥군을 진압하고, 웅현성을 축성하면서 웅진성에 주둔하던 당측 장수인 유인원과 연결선을 다시 이은 후 주력군을 차출해 북벌군을 편성하면서 고구려 일대의 전황을 살피기 시작한다.

세 가지 기록을 정리해 보면 요동도행군 : 글필하력, 평양도행군 : 소정방, 패강도행군 : 임아상, 부여도행군 : 소사업, 누방도행군 : 정명진, 옥저도행군 : 방효태로 주요 지휘관이 결정된 듯 하다. 또한 여기에 더해 함자도, 압록도, 낙랑도, 장잠도 등에도 동급의 지휘관이 편성되었다. 전 병력은 35군으로 편제되는데 1개 군 = 최소 5,000명이라는 《당육전》의 기록을 생각하면 35개 군은 약 17만 5천, 특수 임무를 맡은 군의 경우 규모가 확대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20만 내외가 하한선이 되겠지만,[69] 백제 원정군의 14군의 규모와 편제로 볼 때 고구려 원정군의 진용과 35군의 숫자에 들어맞는 병력 수는 35만이 합당한 듯 보인다.[70]

정확한 수치를 명기하지 않아서 그렇지 편제 규모로 볼 때 당나라 역사상 고구려를 상대로 한 것 이상의 규모의 원정대는 없다시피하다. 더욱이 주 공격로가 해상로를 이용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무작정 많이 보냈다가는 전력이 제대로 전개되어보기도 전에 몰살될 수도 있다. 상륙 작전은 고금을 통틀어서 공격자 입장에선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71]

6.2. 당 수군의 평양성 포위

(661년 7월)이 달에 소장군(蘇將軍)과 돌궐(突厥)의 왕자(王子) 계필가력(契苾加力)들이 수륙양로로 (가서) 고구려의 성밑에 이르렀다

{{{#!wiki style="text-align:right"
일본서기 당의 소정방과 돌궐의 계필가력이 고구려를 침}}}
가장 먼저 고구려 영내에 진입한 것은 소정방이 이끄는 평양도행군이었다. 661년 8월, 소정방이 이끄는 평양도행군은 황해를 건너 패수에 상륙하였고, 격렬하게 항전하는 고구려군을 격파한 후 평양 근교 마읍산에 진을 치고 평양성을 포위하여 공성을 시작한다. 마치 1차 고구려-수 전쟁 때의 평양성 전투 및 1년 전 백제를 무너뜨릴 때와 똑같은 패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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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백제 때와는 달리 평양성은 함락이 쉽지 않았다. 평양성은 외곽, 외성, 내성 등 3중 구조로 되어 있었고, 오랜 공성전을 경험한 유서 깊은 성이었으며, 강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요새였기에 소정방군 단독으로 이를 공략하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고, 이로인해 장기전으로 이어진다.

거기다 서북 지역에서 튀르크계 철륵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남하하던 글필하력군, 소사업군이 귀환하자 당의 작전은 매우 꼬여버렸다. 거기다 고구려군이 후방을 차단시켜 보급로가 끊기게 된다. 완전히 고립되어 식량 부족을 호소하기 시작했고, 당 고종이 급히 보낸 사신으로부터 10월 말에 이 소식을 전해들은 신라군은 쌀 4,000석, 조 22,000석을 준비, 북벌군을 북상시키기 시작한다.쌀배달

한편 소정방군은 적진 깊숙히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보급이 거의 없었으므로 식량 부족을 호소하면서도 겨울이 다가오자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총 공세를 시도하나 고구려군의 반격에 의해 오히려 궤멸당할 위기에 몰리게 된다. 결국엔 퇴각로까지 차단될 위기까지 온다. 때마침 도착한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의 군량미로 밥을 지어먹고 황급히 퇴각한다.
12월에 고구려가 “이번 12월에 고려국[高麗國][72]은 몹시 추워 패강(浿江)이 얼었습니다. 당군(唐軍)은 운차(雲車), 충붕(衝輣)을 끌고 북과 징을 울리며 진격하였습니다. 고구려의 군사는 용감하고 웅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당(唐)의 두 보루를 빼앗았습니다. 다만 두 진터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은 밤에 빼앗을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의 군사가 무릎을 껴안고 울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날카로움이 둔하여지고 힘이 빠져 빼앗을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후회막급이라는 것이 이것이 아니고 무엇이랴【석도현(釋道顯)이 말하였다. 김춘추(金春秋)의 뜻은 본래 고구려를 치는 데 있었다. 그런데 먼저 백제를 쳤다. 근자에 백제가 침공당해서 몹시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렇게 한 것이다.】.

{{{#!wiki style="text-align:right"
일본서기》 권 27 고구려가 당을 물리쳤다고 알림}}}
주어가 자꾸 바뀌고 생략된 부분이 있어 뭔가 앞뒤가 안맞아 보이지만, 이를 해석하자면 '겨울에 패수(대동강)가 얼어붙자 당군이 공성 무기를 동원해 공격을 해왔지만, 이를 물리치고 오히려 당군의 진지를 2개 빼앗았다. 남은 요새 2개를 뺏기 위해 밤에 공격하였고, 이 공격에 당군의 사기가 매우 저하되었으나, 고구려군의 힘이 부족해 요새를 점령하는데는 결국 실패했다. 빼앗지 못한 것이 부끄럽고 안타깝다.' 정도가 될 것이다.

이후 소정방은 신라군이 오기만을 기다리면서 방어에 전념을 다했고, 2월 6일 신라군과 합류하면서 날라온 식량과 의료품을 받은 후 해안으로 급하게 철수, 당으로 귀국하였다.

6.3. 사수 전투

글필하력이 지휘하는 요동도행군이 압록강 하구로 침입해 왔다. 이에 연개소문은 아들 연남생에게 군대를 주어 이들을 상대로 맞서게 하였고, 글필하력과 압록강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나 겨울이 되어 압록강이 얼어붙자 이를 도하, 고구려군 30,000여명을 사살 또는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렸다.

그런데 중국 서북 지역에서 철륵이 반란을 일으키고, 설인귀의 지휘 아래 이를 진압하던 당군은 설인귀가 무리한 추격전을 벌이다 심각한 피해[73]를 입기도 하는 등 상황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자 결국 육상으로 전진하던 당군을 철수시키는 결정을 내리고 만다. 《 구당서》 글필하력전에 따르면 글필하력의 철수는 확실히 이 때문이었으며,[74] 소사업의 철수도 이것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요동도행군의 철수로 전쟁의 승기는 고구려에게 급격히 기울었다. 소정방과 합류하기 위해 대동강 인근에 상륙한 것으로 추정되는 옥저도행군(총관 방효태)은 사수(합정강 부근)까지 전진해 왔다가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직접 지휘하는 고구려군과 교전, 대패하고 전군이 몰살당하며 총관 방효태도 사수 전투에서 전사한다.

이때 사수 전투의 전개 과정에 대해 삼국사절요를 보면 방효태 부대는 초전에 패해 포위망에 갇혀 버리고[75] 이후 필사적으로 돌격한 당군을 섬멸하는 두 단계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때 방효태의 13명의 아들들도 모두 전사하였다.

이 전투의 결과 소정방군은 평양성 인근에서 고립무원의 처지에 처하게 되었으며, 이후 겨울에 이루어진 대공세로도 평양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고구려군의 대대적인 반격에 도행군 전체가 전멸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6.4. 신라군의 진격과 후퇴

신라는 당 고종의 요구에 따라 고구려 정벌을 위한 북벌군을 준비하였고, 당시 신라 최고의 권력자이자 최고의 지휘관인 김유신이 직접 지휘하기로 결정하는 등 나름 성의를 보였으나, 정작 당군이 고구려로 쳐들어갈 때는 군대를 이끌고 북진하다가 고구려 땅은 밟아보지도 않고, 대전 근처에서 백제 부흥군 점령하의 옹산성, 우술성 2개 성을 점령하고 웅현성을 쌓다가 문무왕은 그냥 서라벌로 돌아가는 정도로, 그다지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사실 신라 입장에선 한참 기세등등한 백제 부흥군과 치열한 혈투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76] 함부로 군대를 평양까지 움직일 수 없었고, 7세기 신라의 제1 목표는 줄곧 백제였기 때문에, 백제가 일단 반쯤 공략된 상황에서 고구려 공격은 신라보다는 당나라의 희망 사항이므로 적극적으로 나설 동기도 부족했다.

그러나 10월 말엽, 소정방군이 평양 인근에서 고립되자 당 고종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 소정방군의 구원을 다시금 독촉하였고, 특히 식량을 지원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소정방군은 중간 과정 건너뛰고 평양성으로 직공했는데, 요동 루트로 들어가던 다른 당군이 격퇴당해 홀로 남겨진 소정방군은 보급에 심각한 차질이 생긴 상황이었다. 이에 신라군은 결국 보급 부대를 재편성해 평양으로의 북진을 시작한다.

때는 한겨울인 662년 1월, 신라군은 임진강을 넘어 북진하기 시작한다. 출발할 때는 수레 2,000여 대를 동원하였지만 패수도 얼어붙는 혹독한 추위 속에 결국 수레를 버리고 소와 말에 모든 식량을 실어야 했다. 신라군의 북진을 막기 위한 고구려군의 저지가 있었지만 힘겹게 뚫고, 2월 초 평양 근처까지 도달한 신라군은 당군에 사람을 보내 도착을 알렸으며, 이후 당군과 신라군의 협공으로 마지막 저지선을 뚫는데 성공, 소정방군에 식량외 각종 의료 물품을 전달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소정방군은 병력을 어느 정도 보존한 채로 철수할 수 있었고, 이 소식을 들은 신라군도 귀환하기 시작한다. 고구려군은 신라군 섬멸을 위해 추격해 왔지만 오히려 신라군의 역습에 의해 10,000명에 달하는 전사자를 냈으며 이후 신라군은 본국으로 귀환한다. 다만 이는 과장일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포로가 고작 소형(小兄) 아달혜(阿達兮)였기 때문인데, 소형은 관등 10위에 인솔병력은 100명인 당주(幢主)에 해당되기 때문.[77] 따라서 만 명을 이끌었다면 오늘날로 치면 대위 한 명이 1개 사단을 이끈 꼴이기 때문이다.

6.5. 결과

645년의 대패 이후 당나라는 고구려에 대해 정면대결을 피하고, 소모전을 통한 국력 고갈, 인접국 공략을 통한 고구려의 고립을 시도하여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육상에서의 고구려의 강력한 군사력을 회피한 평양 직공으로 결정타를 노린다. 하지만 650년대 고구려는 전장을 초원지대로 옮김으로써 소모전의 효과를 경감하였고, 여전히 백제 부흥군과 왜는 고구려 남쪽의 신라군을, 거란과 해, 철륵은 고구려 북쪽의 당나라군의 전력을 반감시켰다. 성과가 없진 않았으나 고구려도 나름대로 와해책을 내놓아 결정타는 타개한 것이다.

당나라가 이 전쟁에서 잃은 장수들은 650년대에 제국의 국방을 책임지던 인사들이었다. 임아상[78][79]은 서돌궐 평정으로 이름을 쌓아 병부상서의 지위에 오른 군부의 수장이었으며, 방효태,[80] 정명진[81][82] 역시 당나라의 국방을 맡아서 책임지던 장수들이었다. 당군의 피해를 종합하자면 6개 도행군 중 1개 도행군이 지휘부와 함께 몰살당하고, 2개의 도행군은 지휘부가 전쟁 중 사망하였으며, 도행군은 와해된 것이나 다름없었다.[83]

또한 원정과 연관된 반란까지 진압하고, 이러한 여파로 당 건국 이후 오랫동안 정국을 지배하던 무천진 관롱집단은 정치적 지배권을 상당수 상실했으며, 중소 지주층과 손을 잡은 측천무후와의 정치 투쟁에서 패배하여 실권을 상실하게 된다.[84] 이러한 당 내의 정치 투쟁이 진행되면서 아직 방어할 힘이 넉넉히 남아있는 것으로 확인된 고구려를 재침공할 엄두가 안나게 된 당은 한동안 고구려에 대한 소모전까지도 자제하는 모습을 보이며 백제 방면의 웅진 도독부에도 역시 철수를 명한다.[85]

대승을 거두었지만 고구려로서도 마냥 기뻐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내몽골 초원지대의 지배는 흔들리고 있었으며, 남방에서는 신라의 뒤통수를 막아줄 백제가 멸망했다. 이때는 부흥군과 왜가 신라를 막아줬지만 이듬해에는 백제와 왜가 나당 연합군에 작살나버리니 이후 신라의 공격에도 크게 반응하지 않고, 전쟁 확대를 피하며 당나라의 봉선 의식에 태자를 보내는 등 기존에 상상하기 힘들었던 수위의 친선 의사를 표한다.

신라의 돌파를 막지 못한 점, 제대로 추격하지 못한 점 등은 고구려도 오랜 전쟁으로 지쳤다는 징후로 볼 수 있다. 다만 당나라 역시 전력을 다한 공격이 사수 전투의 참패로 무산되면서 상당히 후환을 겪고 있게 된 상황이었던지라 상술한대로 봉선 의례에 고구려 태자 고복남의 참여를 허용하는 등 과거의 적대적 태도를 다소 누그러뜨리면서 안정을 추구했고, 잘하면 당분간 고구려-당의 평화가 찾아올 수도 있었다.[86]

하지만 직후 한 인물의 죽음으로 시작된 내분이 이 고구려의 마지막 기회를 무너뜨리고 만다.

7. 3차 전쟁

2차 전쟁 이후에 대막리지로써 고구려의 실권을 쥐고 있던 연개소문이 사망하고, 뒤를 이어 장남인 연남생이 태대막리지의 지위에 올랐다.

연개소문은 유능했으며 당나라 군대를 상대로 수차례 승리하였으나, 연개소문의 뒤를 이은 연남생의 두 동생 연남건, 연남산이 형의 지위를 탐하여 서로 간에 권력 투쟁을 벌이다가 급기야 무력 행사로 사태가 확대되면서 고구려 안에서 내전이 벌어진다.

연개소문의 장남인 태대막리지 연남생은 자신의 지위를 탐내던 두 아우 연남건, 연남산에 쫓겨 평양성을 나와 국내성을 근거지로 삼아 대항하다가 힘이 부치자 급기야 당에게 국내성을 비롯한 성 6개와 10만호에 달하는 무리를 거느리고 투항하여 군사 지원을 요청하였다. 비슷한 시기(666년 12월)에 3형제의 삼촌이자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는 고구려 남부 12개 성과 함께 신라에 투항했다. 연개소문 사후 고구려는 이미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내부에서부터 사분 오열되고 있었던 것이다. 노태돈 속일본기 한 기록을 보아 이 당시 고구려가 일본에 군사지원을 요청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기도 했다. 고구려는 일본서기에 의하면 666년 정월, 10월, 그리고 말 그대로 멸망하기 일보직전인 668년 7월에도 일본에 사신을 보냈는데 당시 고구려에는 일본과 연줄이 있는 옛 백제의 왕자 부여풍이 망명해 있었고, 일본은 663년 백제부흥군의 백강 전투에 지원군을 실제로 보낸 전례도 있으므로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했다는 것이다. 다만 일본은 백제부흥군이 몰락한 이후 신라에 우호적인 태도로 전환해 한반도에 개입을 그만두고 혹시 모를 당나라의 공격에 대비해 성을 쌓고 방어태세를 갖추는 중이었으므로 고구려를 돕지는 않았다.

당고종은 고구려가 내부에서 혼란에 빠진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666년 12월 이세적 글필하력, 설인귀 등을 총관 등에 임명하고 군사를 내주어 고구려를 침공했다. 이들은 당 태종과 함께 오랫동안 전쟁을 수행한 명장들이었고, 고구려와 오랜 전쟁을 겪어 경험이 풍부한 장수들이었다. 또한 측천무후와의 권력 투쟁에서 살아남은 몇 안되는 공신들이기도 했다. 이 때 남생의 배신으로 고구려 내부의 정보와 기밀이 당으로 새어나가고 연남생이 바친 고구려 영토가 고스란히 당나라의 보급 기지가 되면서 전황은 당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여태껏 당군은 고구려를 칠 때 항상 보급 문제로 골치가 아팠는데 그게 연남생의 항복으로 저절로 해결된 것이다.

7.1. 신성 함락과 그에 이은 방어선의 붕괴

그리고 이후, 667년 봄에 이세적을 총지휘관으로 한 당나라의 대병력이 고구려로 진격했다.[87] 667년 2월, 이세적이 이끄는 당나라 대군은 요하를 건너 신성을 포위했다.[88] 고구려 요동 방어선의 최고 요충지인 신성은 수십만 당나라 군대에 맞서 가을까지 치열하게 항전했지만(신성 전투), 9월 사부구라는 자가 신성 성주를 묶어서 당군에 항복함으로써 신성은 너무나도 허무하게 당나라에 함락당하게 되었으며 신성 주변의 16개 성 역시 당군에게 격파당했다.[89]

요하에 주둔했던 15~20만명의 고구려군이 동원된 것으로 추정되는 금산 대전[90]에선 초기에 고구려의 대군이 고간이 이끄는 당군을 대파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후 철수하는 당군을 추격하는 도중 설인귀의 당군에 의해 측면을 공격당해서 고구려군 50,000명이 전사하게 되었다. 그 이후 고구려군 15만명이 말갈족 수만명을 끌어들여 남소성에서 항거하자 글필하력이 고구려군을 쳐서 10,000명을 죽이고 남소성을 함락시킨 뒤(남소성 전투), 그 기세를 타서 목저성, 창암성까지 함락시켰다. 금산 전투와 남소성 전투 패배로 인해 고구려 요동 방어선이 사실상 붕괴되었다.

연남생이 국내성 일대를 당군에 넘기고 신성과 남소성, 목저성, 창암성이 당군에 함락되자, 사실상 고구려의 한반도 북부 방어선은 부여부 일대와 요하 일대의 건안성, 안시성, 요동성 인근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1차 전쟁처럼 요하 일대로 침공을 했다면 앞에 언급된 세 성에서 방어를 하면서 시간을 벌 수 있었지만, 문제는 부여부 일대가 넘어가면 저 세 성을 우회해서 바로 국내성으로 넘어갈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부여부가 사실상 최중요 요충지가 되어버렸다.

668년 2월에는 이세적 설인귀가 부여성을 기습공격해서 함락시켰고(부여성 전투), 이에 놀란 부여주의 40여 개 성이 모두 당나라에 항복했다. 이로써 압록강 방어선 이북의 마지막 요충지였던 부여주도 당나라에게 넘어갔다. 이때 연남건은 부여성 탈환을 위해 50,000명의 병력을 보내 이세적과 설하수에서 교전했으나 3,000명의 병력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했다.(설하수 전투), 그 이후 당나라 국내성에서 연남생의 군대와 만나 압록강 방어선을 향해 내려왔다.

마침내 당군은 압록강 근처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고, 연남건은 압록책(압록강 부근)에서 당군의 진격을 1차적으로 저지하는데 성공했으나, 그 이후 당군은 연남건의 저항을 뿌리치고 압록강을 건너, 대행성[91], 욕이성[92][93]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압록강 방어선도 뚫은 당군은 마침내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포위하게 된다.

같은 해 신라도 문무왕 김인문 등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서 고구려 영토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삼국사기》 <김인문 열전>에 의하면 신라군의 규모는 20만명의 대군이었다고 한다. 대곡성(大谷城)[94]과 한성(漢城)[95] 등 2군 12성으로부터 항복을 받으며[96], 지금의 황해도 일대 고구려 남부 전선을 돌파해 평양 근교에 도달했다.[97] 7월, 사천 전투 등에서 고구려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여 고구려군에 승리을 거두었다.

여기서 황해도의 한성 일대는 고구려가 집중적으로 육성한 제3의 수도권이자 평양성의 남부 방어선이었는데 후삼국시대의 고구려 유민들이 이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하고 일어나 고려를 건국했었음을 생각하면 경제, 문화적으로도 얼마나 중요한 지역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제2수도권인 국내성 일대는 당나라에 항복하고, 요충지인 요동 방위선이 돌파되었으며, 제3수도권인 한성 일대는 신라에 항복했으므로 그야말로 평양성은 양 팔을 잃어버린 신세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평양 근교까지 다가온 신라군에 대해 연남건은 상당한 숫자의 고구려군을 투입해 성문을 열고 평양성 동쪽 근교 사천 들판에서 신라군을 저지하려 했지만 김문영이 지휘하는 신라군이 크게 승리하고( 사천 전투), 남하한 당군과 합세하여 평양성을 포위했다.

이 내용만 보면 고구려의 전 지역이 신라와 당나라에 의해 초토화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대체로 수도로 가는 중요 거점을 점령하면서 수도로 직격했던 고대-중세 전쟁의 특성상 실제로는 기껏해야 부여주 전체[98]와 요동의 중요 거점인 창암성, 목저성, 남소성 부근과 국내성 부근만 당나라의 점령지였고, 한성(현재의 황해남도 재령군) 부근의 12개 성을 포함한 24개 성만 신라의 점령지였다. 즉 평양성 부근만 남은 게 아닌, 지도 중간에 구멍이 뻥뻥 뚫린 모습이였을 뿐이었다.[99] 하지만 이와 별개로 중요 거점지역이 모두 나당연합군에게 넘어갔기에 고구려로써는 평양성을 지키는 방법밖에 없었다.

7.2. 평양성 포위전, 그리고 함락

가을 9월에 이적이 평양을 무너뜨렸다. 글필하력이 먼저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 아래 이르고, 이적의 군대가 그 뒤를 이어서 평양을 포위한 것이 한 달 남짓이었다. 보장왕 연남산을 보내어 수령 98인을 거느리고 백기를 들며 이적에게 나아가 항복하니, 이적이 예로써 맞이하였다.
9월 21일에 대군과 더불어 합쳐서 평양을 에워쌌다. 본득은 사천 싸움에서 공이 제일이었고, 김상경은 사천 싸움에서 죽었는데 공이 제일이었다. 구율은 사천의 싸움에서 다리 아래로 내려가 물을 건너 나아가서 적과 더불어 싸워 크게 이겼지만, 군령을 받지 않고 스스로 위험한 곳에 들어갔기에 비록 공이 제일이었으나 포상되지 않았다.[100]
구기는 평양 남쪽 다리 싸움에서 공이 제일이었다. 선극은 평양성 대문 싸움에서 공이 제일이었고, 북거는 평양성 북문 싸움에서 공이 제일이었다. 박경한은 평양성 안에서 술탈을 죽여 공이 제일이었고, 김둔산은 평양 군영 싸움에서 공이 제일이었으며, 세활은 평양 소성 싸움에서 공이 제일이었다.
연남건은 여전히 문을 닫고 항거하여 지키면서 자주 군사를 보내어 나와 싸웠으나 모두 패배하였다. 남건은 군대의 일을 승려 신성에게 맡겼는데, 신성은 소장 오사·요묘 등과 함께 은밀히 이적에게 사람을 보내서 내응하기를 청하였다. 5일 뒤, 신성이 성문을 여니 이적이 군사를 풀어서 성에 올라 북치고 소리지르며 성내를 불태웠다. 천(연)남건은 자해하였으나 죽지 않았으니, 왕과 더불어 남건 등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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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신라 본기 부분 요약 정리}}}
이후 한 달동안 평양성을 포위한 나당연합군과 고구려 사이에 격렬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실제로 삼국사기 문무왕본기의 논공행상 기사에 의하면 평양소성(平壤小城), 평양성 대문, 북문, 평양 남쪽 다리(南橋) 등 여러 장소에서 격렬하게 전투가 벌어졌고 평양 군주 술탈(述脫)이 신라 한산주 소감 박경한(朴京漢)에게 죽었을 정도로 치열했다고 한다.

한달 남짓 포위가 이어지자 보장왕은 연남산을 보내 당군에 항복했지만, 실권자인 연남건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농성을 이어갔다. 결국 이적과 내통한 연남건의 심복 신성이 성문을 열었고, 당군 평양성을 완전히 함락시켰다. 연남건은 칼로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포로가 되었으며, 이적은 10월에 보장왕과 연남건·연남산 등 20여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7.3. 결과

이 전쟁에서 당나라는 신라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오랜 세월 동안 수•당제국의 숙적으로 지내던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 성공했다.[101] 그러나 당나라는 백제 영토와 평양 이남의 고구려 영토를 신라에게 주기로 했던 당초의 조약과는 달리, 백제와 고구려의 영토는 물론 신라까지 한반도 전체를 집어삼키려 했고, 결국 신라와의 나당전쟁이 일어났으나 7년 간의 전쟁 끝에 평양 이남의 한반도 전역에서 완전히 물러나고 요동으로 패퇴했다.

그러나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 고구려 유민 출신 장수인 대조영이 고구려의 고토에서 군사를 일으켜 다시 발해를 세우며 발해가 곧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밝혔다. 발해의 건국으로 실상 당나라는 고구려 원정으로 얻은 영토를 거의 모두 잃은 개고생만 한 셈이 되었다(...)[102][103] 애초에 천하 통일을 목적으로 한 명분론적인 성격으로 일어난 전쟁인 만큼 전쟁의 당위성도 상당히 약했고[104] 돌궐, 토벌 전쟁처럼 경제적 이권을 획득할 수 있는 전쟁도 아니라서 투입 대비 산출이 너무 안좋은 전쟁이었다. 결국 당나라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고구려에 국력을 쏟아부은 결과 토번, 돌궐이 다시 발호하는 결과만 낳는 등 당나라 입장에서도 명백히 실패한 전쟁이었다.

다만 당나라 입장에서 굳이 의의를 찾자면, 궁극적으로 이곳의 영토는 얻지 못했을지언정 만주의 심각한 안보적 위협은 사라졌다는 데에 당나라의 고구려 정벌은 의의가 있을 것이다. 고구려는 당나라 주변 적대국들 중에서 영토도 상당하며[105] 통치 체계가 상당히 문명화된, 문화적 역량을 갖춘 나라였으며 농업을 근간으로하는 정주민족이기에 인구도 많은 편이었고 북방의 유목민에 대한 직간접적 영향력도 강력한 나라였다. 고구려를 사전에 정복하지 않고서는 당나라 입장에서 봤을 때 굉장히 위험하고 화근의 불씨를 키우는 일이었다.[106]

고구려가 남쪽의 신라와 백제를 정복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돌궐 및 중화 제국들과 접경한 북서쪽 지역에 최정예 전력을 항상 주둔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고구려 유적들을 보면 전통적으로 고구려의 안보를 위협하던 대륙 세력들이 침공하는 길목에 대부분의 방어 전력을 쏟아부은 흔적이 발견된다. 신라가 진흥왕 시기 함경도까지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당시 신라의 국력이 급성장하기도 했고 고구려 내정이 엉망이기도 했지만, 그 시기 고구려가 돌궐과의 분쟁으로 인해 요동 지역에 모든 군사력을 집중시킨 것이 가장 컸다.[107] 그런데 당나라가 영류왕의 요청대로 화친하게 되고, 어느 정도 대당 조공-책봉 관계가 안정되게 되면, 이제 고구려는 온전히 한반도 지역에 정예 군사력을 투입시킬 수 있게 되며, 수도 평양과 가까운 후방의 위협을 제거하고, 후대에 다시 중국의 안보에 심각한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다.[108] 후대의 발해나 조선, 고려와는 달리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끊임없이 중원 왕조의 군현들을 침략하면서 성장한 나라다. 애초에 호전적인 나라이기 때문에 기회만 난다면 얼마든지 조공-책봉 체계를 깨고 중국 변경을 괴롭힐 것이 너무 자명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나라 이후 세워진 중국 한족의 통일 제국들(, )을 위협하고, 심지어 멸망시켰던 국가들(요[109], , )은 대부분 고구려가 있었던 만주에서 발흥했다.[110] 물론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 명분은 17세기 초반 명나라의 후금 원정처럼 단순한 안보적 위협 제거가 아닌 '점령 통치'가 목표[111]였지만, 고구려 멸망 이후 요나라가 발흥하기까지 당나라 입장에서 동방ㆍ북방 전선은 안정되었다. 당나라 후기의 환란은 서방 전선(티베트ㆍ위구르)쪽에서 왔거나 아예 내전이었다.

사실 중국인들이 유독 만주를 자신들의 안보에 중요하게 생각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이곳은 산지가 많아 방어가 쉬우며, 중국 입장에서 정복을 위해선 엄청나게 긴 보급선을 유지시켜야 하는데 그러려면 최소 수십만에서 100만 이상 단위의 보급 병력들과 엄청난 물자가 필요했다. 그렇다고 이곳의 정복을 포기하자니 그것도 문제다. 이곳에 터를 잡은 국가들은 얼마든지 10만 이상 단위의 정예병들을 충분히 원정에 동원할 국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그럼 당장 외교적으로 냉각기에 들어가거나 중국이 조금이라도 삐끗한 모습을 보이면, 이 병력들이 그대로 하북 지방으로 밀고 들어올 가능성이 있다.[112] 따라서 고구려가 후방에 신라를 두고 국력을 집중시킬수 없을 때 사전에 밟아놓을 필요가 있었다. 물론 당시에는 이것까지 계산에 놓지는 않았지만[113], 후대의 역사적 사실들로 미루어 보았을 때 당나라의 고구려 정벌은 최소한 당나라가 송나라나 명나라처럼 이민족(금[114], 원, 청)에 의해 멸망당하지는 않는 토대를 깔아놓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 멸망이 과연 만주의 안보에 기여했는지도 의문이다. 당시 고구려는 말갈이나 거란 같은 호전적인 유목민들을 확실하게 제어하고 있었다. 물론 고구려가 한반도를 통일하게 되면 만주-한반도의 통합으로 인해 심각한 안보적 위협이 생기는 것도 맞지만, 중원으로 들어가고자 했던 거란-여진과 달리 고구려는 건국이래 계속해서 한반도로 진입하고자 했던 국가이다.[115]

다만 고구려가 중원을 노릴 가능성이 어느정도 있었다. 물론 당나라가 전성기에서 벗어나 혼란해질때까지 고구려가 국력을 전성기급으로 유지한다는 가정하에만 성립한다. 있다는 측면에서는 건국 초기에 발해와 국력이 비슷했었던 금나라 청나라는 한반도의 나라와 화친을 맺거나 제압한 뒤에[116] 혼란스러웠던 중원을 삼켜버렸다. 당대 고구려와 국력이 비슷했었던 토번이 후에 발전해 당나라 혼란기 때 당나라를 침략해 수도 장안을 약탈해간 것을 감안하면 고구려 역시 당나라가 혼란스러울 때 침략했을 가능성도 있다.[117] 특히 고구려가 백제, 신라 등을 병합하고 한반도를 통일한 후에는, 여기서 만족하자 보다는 이 물량이면 중국을 밀겠지? 라는 심산을 가졌을 가능성이 더 크다 보는 편이다. 애초에 고구려가 삼한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것부터가 전성기에 백제로부터 마한땅을 빼앗은 이후 마한인을 자처하면서 시작되었다. 그전까지 고구려가 가진 정체성은 부여에서 파생된 부여의 별종이라는 인식 정도였고, 고구려가 건국됐을 때 삼한지역은 인접국조차 아니었다. 그런데 한국인이라는 정체성만 있고 중원인이라는 정체성은 없으니 침략하지 않는다? 한국인이 시조로 섬기는 단군조차 평양 산신령 정도에 불과했던 것을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고, 결국 한국인의 시조 지위까지 획득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역사인식은 유동적이다. 광개토대왕이 요하 동쪽까지 진출한건 고구려의 국력이 거기까지였던 것에 불과하며, 말년에 축성과 내치에 집중한 것도 알렉산더의 예에서 보듯이 자국의 소화력을 넘어서는 정복활동은 설령 전쟁에서 승리하더라도 영토를 유지하지 못한다는 문제에 직면하기 때문에 고구려는 역량을 넘어서는 영토에 욕심내지 않고 획득한 영토를 유지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한 것일 뿐이다. 고구려는 자신들의 역량을 냉정하게 파악했고, 요하라는 자연국경+천연장벽을 현실적으로 이용하기로 했을 뿐이지 그들이 가진 천하관이 허락하는 영토가 거기까지여서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 고구려의 폭발적인 정복활동은 중원에서 오호십육국시대가 열리며 변방 이민족에 대한 통제력은 물론 내부질서도 바로잡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루어졌고, 정복활동이 둔화되는 시기가 중원이 남북조시대에 들어서며 안정화되던 시기와 겹치는 게 과연 우연이라고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또한 장수왕 때 북연 황제인 풍홍을 북위에 보내라는 요청을 거절했던 것과 수나라와 고구려가 요서에서 보여준 알력다툼 등 고구려는 요서로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모습을 끊임없이 보여주었는데, 고구려인들이 제한적인 천하관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다. 전성기 때 왜(일본)를 침공하지 않은 이유가 고구려의 천하관 때문이라고 하는 것도 웃긴 것이 왜를 침공하려면 당연히 백제, 신라를 무너뜨리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들이 건재한 상황에서 바다를 통해 왜를 침공하는 건 자살행위에 가깝다. 그리고 고구려는 전성기가 끝날때까지 나제동맹을 맺은 신라와 백제를 무너뜨리지 못했는데 어찌 왜를 침공한단 말인가? 더군다나 왜를 침공하려면 바다라는 천연방벽을 뚫어야한다. 일본열도가 한반도지역보다 국력이 앞서는 시기는 고려 중후기 즈음이고, 5세기의 왜는 지금의 일본열도가 아닌 규슈와 칸사이 일대만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력이 그리 대단한 나라는 아니었지만, 백제와 고구려의 전쟁에서 왜가 보낸 지원군의 규모를 보면 당시에 왜는 수만명 정도의 군세는 보유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나라를 바다 건너 정복하고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투사하며 정복상태를 유지한다? 당나라가 중원을 통일하고 이민족들을 상당수 제압한 후 거의 마지막 선택지로 고구려 원정을 선택했던 것처럼, 고구려도 직접지배할 영토를 전부 점령하고 땅으로 이어진 위협국들을 전부 제압한 후 거의 마지막으로 할만한 선택이 바로 일본원정이다. 고구려는 왜를 정복할만한 상황에 놓였던 적이 한번도 없었고, 그럴 수 있는 상황에 놓였던 적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것을 가지고 정해진 영역 이상을 나가지 않으려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고구려가 왜를 치기 위한 선결작업을 무시한 주장이다.

더군다나 이미 고구려는 중화제국의 영토를 침범했다고 볼 수 있는데, 큰 의미의 요동[118]을 칭할 때는 중화 질서 밖에 있는 외부세계를 의미했지만 작은 의미의 요동[119]은 연나라에 포함된 중화세계의 영토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요동 반도는 연나라가 고조선을 요하 방면에서 대동강 방면으로 밀어낸 후 전국연->진나라->한나라->동연(공손씨 정권)->조위->서진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중화질서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고구려가 오호십육국시대의 혼란기를 틈타 요동 반도를 획득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중화제국이 회복했을 영토였고,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이 획득한 요동 반도를 자신들의 천하관 밖의 영토로 생각한 적이 없으니 두 천하관의 존재를 긍정한다고 쳐도 명확하게 겹치는 부분이 있기에 공존할 수 없는 관념이었다.

고구려가 중원을 노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고구려는 고구려 독자문명체제를 구축한 정체성이 분명했다는 점이다. 중원처럼 자신들을 중심으로 한다는 오만한 사상의 개념에서의 획일화 천하개념과 정체성에 의한 확장을 요하는 게 아니라 다원적 천하개념을 가진 고구려만의 정체성이 분명했다. 즉 고구려라는 중심에서의 천하세계의 확장한계선이 분명했다는 소리다. 이는 그러한 기본적인 정체성이 없던 금나라 청나라 요나라같은 형태의 그저 약탈 및 국력 한계 극복차원의 확장과 다름을 의미한다. 예시로 언급된 세 나라를 세운 종족들은 대부분 한족에게 동화되어서 스스로의 정체성마저도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는 상황이다.[120] 당시에도 한화정책을 적극적으로 그들이 시행한 이유도 여기서 출발한다. 게다가 그들이 화북으로 오지 않았을 때도 한족과 본인들간의 이질적 형태의 거리감이 분명했다. 반면 고구려는 오히려 역으로 한족을 고구려인으로 동화하여 이질적 형태를 최소화해갔거나 없애갔다. 이는 문화적 정체성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121][122] 이런 점을 감안하면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했어도 확장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본인들 스스로가 난하-대흥안령산맥 부근을 근방으로 이미 서부와 서북방에 대한 천하관 확장 한계선을 분명히 한 것이 대표적인 이유인 것이며 광개토태왕비에 나오듯이 왜(倭)라는 당시 일본을 자신들과 전혀 다른 천하관 혹은 세계관으로 인식했던 점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123]

또한 가장 팽창기를 구사했던 광개토태왕때 요서까지만이 한계였다면 결국 거기서 고구려의 독자적인 천하관도 한계인것이다. 한국인의 정체성의 개념인 삼한이 모두 우리민족이고 역사라는 개념을 완전하게 내세운 시기의 정점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세계제국을 이룩한 로마도 팽창기에서 실패한 지역은 결국엔 영역으로 편입하지 않았다. 실패후 사전작업까지 철저하게 했던 게르마니아 원정 즉 토이토부르크 전투 사례만 보더라도 이를 볼 수 있는 일이고 동로마 제국의 팽창기에서도 이것이 확인된다. 즉 모든 문명과 국가에는 팽창한계선이라는 개념이 존재하고 그 한계선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문화종주권을 구축한다는 점을 보더라도 고구려의 팽창한계선이자 고구려의 문명과 세계관 개념의 한계선은 요서까지라는 걸 분명하게 한 것이다. 로마보다 낮은 문화와 문명의 게르만족들을 상대로도 로마는 결국 팽창한계선을 확보했고 영국의 사례에서 보듯이 로마는 안토니우스 방벽과 하드리아누스 방벽으로 그 한계를 그어서 픽트족과 같은 스코틀랜드 지역으로 팽창하지 않은 사례만 봐도 그러하다. 당장 고구려와 접경이자 한족이라는 개념의 중화문명조차도 만리장성을 쌓아 스스로 문화권의 종주지역과 한계선이 어디인지를 명확하게 했다. 만리장성을 넘어서 실질 지배지역도 요동반도 한정이었던것도 중화문명의 팽창한계선이 어디까지였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다. 남중국과 베트남 북부 일대를 지배하고자 얼마나 많은 대군을 투입하고 그 일대의 이민족을 한족화하는데에만 1000년을 넘게 소모해야했다. 그러고도 베트남쪽은 결국 문화적으로 다른 문화권의 정체성으로 떨어져 나갔던게 현실이다. 즉 고구려가 스스로 다른문화권이라고 지칭한 서토라고 말하는 오늘날 중국으로의 진출 작업은 이미 광개토태왕때 정립되어서 만주-한반도 일대에 가장 큰 정치적+정서적 문화적 연대로 인하여 사실상 있지 않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걸 어슬프게 따라했던 신라가 나중에 후삼국시대를 다시 열어서 고려를 통하여 완전하게 이룩된 문화+정서적 연대를 보더라도 고려가 요동과 과거 고구려 지배지역 확보를 노린적은 있어도 그 사전작업후에 중원진출을 생각해본적이 없는 이유과 같다고 할 것이다.

게다가 통일신라의 중앙군인 9서당의 3분의 1이 고구려계이고 말갈계까지 합치면 거의 절반에 가까운 병력이 고구려계임을 감안하면 군사적인 유산은 고구려가 많이 물려줬을 가능성이 크다. 지방군도 최대 3정은 고구려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삭주와 한주, 명주는 고구려의 영토이거나 고구려의 영향을 많이 받던 곳이기 때문이다.[124]

8. 고구려 패망의 원인

크게는 3차례와 소모전까지 합치면 수십 차례에 이르는 여당 전쟁과 전투의 최종결과는 결국 당나라의 승리로 끝났다. 고구려는 국가적, 민족적 특성과 우수한 대전략적 움직임에 힘입어 여러 차례 열세인 전쟁과 전투를 승리로 마무리하고 때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던 위기까지 극복했으나, 아무리 잘 싸워도 결국 총력을 다한 전쟁은 내분으로 인하여 국력이 분열되어서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 고당전쟁에서 고구려가 패한 원인을 요약하면 다음 두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8.1. 정치, 경제적 이유

관료 집단의 문제나 내란 등이 있었던 것은 당나라도 고구려와 똑같았으나 그 전에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의 기본적인 국력 차이가 있었다. 당나라의 경우 최소한 본토는 위협받지 않는 강대국이기 때문에 외세의 압력을 덜 받을 수 있었지만[125], 고구려는 당나라라는 중원통일왕조의 강대국과의 전쟁에서는 제한적인 선제공격을 제외하면 방어전으로 일관해야 했기 때문에 고구려 영내의 손실이 심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결국 고구려가 당나라보다 상대적으로 국력이 적은 입장에서는 더 힘이 들 수밖에 없었다.[126]

특히 당나라는 과거 고구려-수 전쟁에서의 국제 외교 실패의 교훈을 바탕으로 주변국과 이민족을 최대한 통제하려고 애를 썼다. 1차 고당전쟁 전에 당나라는 주변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노력을 했다. 대표적으로 분열된 동서 돌궐을 정복하고, 오늘날 티베트에 해당하는 토번 등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안정화를 추구하며 그 노력을 더욱 강화했다. 이렇게 노력한 결과 2차 고구려-당 전쟁 시점에서는 거란족의 상당수가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당으로 이탈하였고, 역으로 동아시아에서 고구려가 상대적으로 고립되는 형국이 되면서 당나라군은 처음으로 겨울에도 고구려 내지 땅에서 전선을 형성하여 장기 주둔을 할 수 있는 전쟁을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신라를 통하여 고구려의 가장 불안전한 남부 전선을 괴롭히는 성과를 올렸다. 이에 맞선 고구려는 영류왕 당시 제대로 국제적인 연계를 하는데 있어 유기성이 다소 떨어졌다.[127][128]

그러나 이것 역시 고구려의 상대적 국력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백제가 멸망할 당시 고구려는 육로에서 당나라와 교전 내지는 전쟁 준비 중이었다. 고구려가 강대국이기는 하지만 고구려의 국력을 보면 남쪽과 북쪽 모두에서 수십만 규모의 양면전선을 수행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129] 상대방을 두들기면서도 제3국에 강력한 유인과 압박을 제시하기에는 당나라가 더 유리할 수밖에 없다.[130]

다만 기록 자체가 당나라 입장에서 쓰인 것들이 대부분이라 고구려가 자체적으로 외교를 한 흔적에 대해서는 많이 부실하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그리고 당나라가 주변국 통제에 성공했다는 것은 동쪽 한정으로, 그것도 요동반도 한정이었다.[131] 당나라가 고구려와 치고받는 데 온 국력을 쏟는 바람에 서쪽에서 토번이 당나라를 위협할 정도로 성장하는 것을 막지 못했고, 결국 고구려가 멸망한 지 겨우 1년 만에 토번과의 외교 실패로 완전히 적대 관계로 돌아섰고 신라와도 관계가 틀어져 나당전쟁을 벌였으나 패하고 만다.[132] 그리고 이쪽은 고구려와 달리 끝내 성장을 막지 못해 약 100년 뒤에는 수도까지 털리는 굴욕을 맛보게 된다. 결국 길게 보자면 당나라 역시 나중에 가면 고구려와 같은 딜레마에 처하게 된 셈이다.[133]

더욱이 고구려 당나라에게 능동적인 외교 전략을 펼 여지도 없었다. 당나라는 아예 고구려를 멸망시킬려고 칼을 갈고 있었고[134] 물론 3차 전쟁까지 이겼다면 당나라내에서도 고구려는 중원질서와 다른 예우를 논하고 있던터라 능동적인 외교 가능성이 상존했었지만 고구려는 그것을 버텨내지 못했다.

당시 신라는 실권층인 김유신, 김춘추 등 일부 인사들이 신라가 삼한을 통일해야 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135][136] 그래서 백제를 택하고 신라를 압박한 것이 고구려로서는 딱히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남방에 우군이 없던 시절, 돌궐과 싸우는 도중에 한강 유역을 상실했고, 수나라와 싸우는 도중에 신라에게 500리의 땅을 빼앗겼으며 백제와도 교전이 있었다. 또한 연개소문이 동맹을 맺기 이전까지 백제 신라 할 것 없이 당나라에 고구려 견제를 요구할만큼 양면 전선의 위험은 존재했다.[137][138]

또한 슈퍼파워인 당나라를 상대함에 앞서 단합을 해도 막아낼까 말까 하는 상황에 고구려 연개소문의 사망 직후 그의 아들들이 서로 권력 다툼을 벌이며 내전에 빠졌고, 대막리지라는 고위직 중의 고위직 연남생이 스스로 당나라에 도움을 청하며 연정토는 신라에 투항하는 막장 상황이 연출되었다. 내부에서 이렇게 분열하면 고구려가 아니라 고구려 할애비라도 이길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139]

고구려 패망의 일차적인 책임은 연개소문의 세 아들들에 있겠지만, 권력을 독점하며 세 아들의 후계 구도마저 명확하게 정해놓지 않은 채 무책임하게 저승으로 가버린 연개소문 본인의 실책 역시 매우 크다.[140] 특히 고구려는 가뜩이나 신라와 당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전선이 점점 뒤로 밀리고 양면 전선 끝에 수도 지역에서 공방전을 벌이는 등 국력이 한계에 달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8.2. 군사적 이유

고구려의 전쟁 역량은 아무리 고구려가 다년간 전쟁으로 피폐했다 하더라도 말갈이나 돌궐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했고, 당나라도 고구려의 후방이 백제 신라로 나뉘어 있을 때는 문자 그대로 국운을 걸고 침공해야 했다. 기록들을 토대로 보면 모든 나라가 고구려의 무기나 병사, 지휘관 등을 우수하게 평가하면 평가했지 약하거나 부족하게 평가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수서, 북주서, 위략, 만염집 등 참조.)[141][142]

특히 고구려가 동원할 수 있는 군대의 규모도 중국 통일 왕조에 비해 작았을뿐 알고보면 상당히 많았다. 훗날 발해의 무왕이 당나라를 침공할 때, 무왕의 동생 대문예가 '고구려도 30만의 강병(强兵)으로 당에 맞서다가 패배하였는데 발해의 군사력은 고구려에 미치지 못하므로 승산이 없습니다' 라고 발언하며 당나라 공격을 만류한 바가 있다.[143] 즉 고구려는 적어도 평시 상비병력이 30만이라는 것이 확인될 수 있다는 점으로서도 작용하지만 그정도로 체계화된 정규군을 상시보유하고 있었다는 얘기는 당시 웬만한 몇 안되는 강대국들 아니면 그정도 중무장한 정규 상비군 규모를 운용하고 있는 나라가 없었고 동아시아 한정으로는 당나라 말고는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를 참고해서 고구려의 병력동원능력을 동 시대 및 후대의 한민족의 왕조국가들과 비교하자면 아예 선군도감을 두고 전국에 44개의 선군사를 두어 작정하고 20만~30만 병력 상비병력으로 모은 고려를 제외하고는 비교할 만한 국가가 없다. 신라의 경우는 현재 남아있는 기록을 연구해서 만든 논문을 보면 황산벌 전투에서 동원한 약 50,000의 병력이 고구려와의 접경지역에 위치한 서부전선의 병력까지 상당수 차출해서 끌어모은 병력이고[144] 백제는 한 번에 40,000명 정도 밖에 동원하지 못했다. 반대로 고국원왕과 광개토대왕 시기의 고구려군 5만은 고구려에게 있어서 큰 비중을 지녔으나, 당나라와의 전쟁에서는 신성과 국내성, 단 두개의 성에서만 40,000명을 동원하였고 중앙군은 15~20만[145]이 넘는 대병력을 동원하여 영내에서 야전을 치르는 저력을 선보였다. 당나라와의 마지막 전쟁에서는 전투 한 번에 최소 수만이상의 병력을 동원하고 패전 한 번에 30,000명, 50,000명을 상실해버릴 정도로 그 규모도 대륙급으로 커졌다.

게다가 당의 강력한 경기병도 전면전에서는 고구려에게 효과적이지 못했다. 1차 고구려-당 전쟁 당시 당군은 요동도행군 부도총관 이도종이 요동성 외각에서 경기병을 중심으로 한 4,000명의 기병으로 고구려군을 공격했지만 고구려군은 뒤로 물러나며 받아치다가 역습을 하는 방법으로 절충도위 마문거가 선봉으로 나선 이도종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그 뒤에서 오고 있던 행군총관 장군예의 부대까지 공격해서 무너뜨리는 승리를 거두었다. 당군이 요동성 외각의 고구려군과 싸워 이긴 것은 또 다른 행군총관 이세적이 합류한 뒤의 일이다.[출처:]

일부에서는 수와 당의 부병제의 위력이라고 하는데 이는 틀린 것이다. 일단 간단하게 수, 당의 부병제를 설명하자면 개병제와 모병제의 절충안으로 전국의 가호에게 국가에서 토지를 지급하거나 소유권을 확립시키는 대신 평등하게 병력을 차출하는 제도다. 괜히 방효태가 사수전투에서 전사하면서 지방 향리 자제들이 다 죽었는데 내가 어딜가냐고 한탄한 게 아니라는 것. 수나라는 나라를 이렇게 전국단위로 고구려 원정에 갈아넣다가 국가를 망가뜨렸고 뒤이은 당나라 역시 무리한 고구려 원정으로 국력을 대차게 갈아먹는 바람에 신라, 토번과의 전쟁에서 고전했으며, 고구려와는 전혀 상관없는 당의 서북지역에 고구려인들을 데리고 가야 했을 정도로 기미체제가 붕괴하고 말았다.[147]

당이 요동성 전투나 주필산 전투 등지에서 드러나듯이 자기 역사를 왜곡해서 넣은 덕분에 제대로 알긴 힘들지만 1차 전쟁에서 요동성 백암성에서의 야전이 있었고, 2차 전쟁 당시엔 김인문 열전에도 "고구려인들의 저항이 매서웠고 오히려 당군이 보급에 문제가 생겨 위기에 빠졌다."라고 나와있다. 더군다나 662년 시점에서는 누방도행군 총관인 정명진과 부장 양사선, 패강도행군의 총관인 임아상의 사망이 확인된다. 당나라 35군을 편제한 6개 도행군 가운데 2개가 사령관을 잃고 1개는 무력해지며 2개는 전선을 이탈한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연개소문은 사수로 직접 나아가 방효태의 당군과 대회전을 펼쳐 전멸시켰다. 일부 사람들이 고구려는 야전에서 수와 당의 군대를 제대로 상대하지 못했다고 말하지만 실제론 아니며 남아있는 기록만으로도 반박이 가능하다.

고구려-수 전쟁부터 침공군은 수륙 양면으로 정공법, 소모전, 기동전 등 여러가지를 기획해서 적용했었다. 정공법으로는 요동 방어선을 뚫지 못했고, 소모전을 시도하는 650년대에는 대체적으로 서북쪽의 거란 방면에서 큰 재미는 보지 못했다. 하지만 침공군의 주력이 요동 일대의 방어선을 우회해서 평양을 직공하는 방법을 쓴다면 1차적으로 고구려의 중심지가 전장이 되는 건 피할 수 없었다. 고구려-수 전쟁 때부터 10만 단위의 수군의 직공을 당해온 고구려가 이러한 문제점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고, 10,000 단위의 상륙을 저지하거나, 10만 단위의 대병력은 상륙 후 타격하는 식으로 대처하였지만[148] 요동방어선을 온존하면서 수십만 단위 대군의 상륙을 저지하는 수준의 방위력은 가능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주변 일대의 국제 정세와 전투도 660년에 이르러서는 고구려에 불리하게 흘러갔다. 적봉진, 토호진수 등에서의 전투 등으로 당나라는 요서에 자리잡은 고구려의 거점을 무력화시켰으며, 그런 와중에도 서돌궐, 위구르, 거란, 해족 등을 제압한다. 또한 나당 연합군을 거병하여 고구려의 남쪽 전선을 책임지던 백제를 멸망시키는데까지 성공한다.[149] 또 남부 전선의 방어체계는 한성을 기반으로 한 방어체계가 요동 방어선에 비할만큼 강력했는지 회의적이며, 그 결과 신라군이 2, 3차 전쟁 때 평양까지 올라오는 결과도 초래했다. 신라군과 교전한 고구려군의 규모는 당나라와의 교전에서 10만 단위를 넘었던 것과 달리 크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150] 따라서 당의 국력을 생각한다면 고구려는 능력 이상으로 잘 싸운 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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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안정적인 병력 및 물자 공급지역은 요동-송화강 유역-두만강 이북 지역(북간도라고 불리기도 하는 상경용천부와 중경현덕부, 동경용원부가 위치한 지역)- 국내성과 그 인근(압록강 유역)-평안도(대동강과 청천강 유역)-함흥 평야 일대-황해도(재령 평야)-경기 북부이다. 70년 전후로 대륙의 통일세력과 긴장과 전쟁을 반복하고 마지막에는 대규모의 인구가 항복하거나 이탈했는데도 불구하고 남은 가구 수가 69만 호로 기록되었다.[151] 송화강 동쪽과 연해주 지역[152]은 고구려 영토일지언정 구황작물인 감자도 고구마도 옥수수도 없던 시기에 인구가 많긴 힘들다.

당시 백제는 금강 유역이 중심이었고 노령 이남[153]은 완전히 복속한지 얼마 안되었던 땅이라 신뢰도가 그렇게까지 높진 않았다.

신라는 경상도 외에는 병력 차출이 그리 크지 않은 강원도 남부가 사실상 전부였고 그나마도 관산성 전투 이후 편입한 구 가야 지역인 경상도 서남부는 대야성이 뚫리기 전까지는 기능을 했었을련진 몰라도 이후에는 안정적인 병력-물자 파밍지역으로 기능하긴 힘들었다.

충북과 경기 중부, 경기 남부도 마찬가지. 기록상에서 평원왕이나 영양왕 때의 기록을 본다면 고구려는 신라 땅을 잘만 건너서 백제를 치기도 했으며 629년에는 충북 청원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이는 낭비성을 신라가 김유신이 가서 함락시키기도 하였고 온달도 충북 단양에서 전사했다는 설이 유력한 등, 진흥왕의 북진 이후 일반적으로 인지되던 임진강 - 원산·안변의 고구려-신라 국경보다 한참 남쪽에 있던 곳들에도 고구려 세력의 존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바다 건너 대륙과의 교통을 위한 당항성과 주요 거점들을 제외하면 안정된 병력-물자 파밍 지역이라고 보기에는 힘들었다.[154]

신라가 나중에 설치한 9주 5소경만 보더라도 백제나 신라 지역들은 행정구역도 오밀조밀하게 구성되어 있지만 구 고구려 지역들인 한주, 삭주, 명주는 그에 비하면 훨씬 광활하며 중심도시도 한주와 삭주의 남쪽 경계선에 각 하나밖엔 없다. 이는 인구도 별로 없고 개발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현대를 보더라도 개발이 제대로 되고 인구가 많은 지역은 행정구역이 오밀조밀하게 구성되어있고 행정구역의 등급도 높다. 그러나 인구가 적은 지역은 광활하고 행정구역의 등급도 준주 등으로 낮았었던 경우가 많다.[155]

신라의 주 이름에서도 그것이 드러나는데, 외국이나 이후 시대의 예를 보더라도 삭주, 명주 계통의 행정구역명은 보통 변방에 설치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중국만 하더라도 삭주는 그것이 처음 지도에 제대로 나오는 위진남북조시대에는 장안과 가까운 내몽골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게다가 한주의 경우 지금이야 수도권이 되어 인구가 가장 많지만 이 시대까지는 삼국의 치열한 전쟁터 변방이었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한강 하류 유역은 늪지대에 가까웠다.[156] 사실 한강뿐만 아니라 당시 삼국의 하천 자체가 이런 경우가 제법 있는 편이었다.

요하 하류도 요택이라는 거대한 늪지대라 수나라를 곤란하게 했다. 다만 요동을 비롯한 서한만 지역의 하천은 고조선-한사군으로 대표할만큼 과거부터 개발이 시작된 곳이라 상대적으로 더 나았을 수는 있다. 더군다나 현대에는 넓은 개활지인 부천, 고양 등은 홍수만 났다 하면 물이 빠지지 않는 곳이라 늦게는 1910년대에야 간척이 시작된 곳도 있다. 후기신라시대 집터가 풍납동, 천호동, 벽제동 같은 곳에 있는 이유도 한강이 범람 안 하는 곳이기 때문. 또한 신라가 이 지역을 점유하고도 백 년 이상에 걸친 기간 동안 점진적으로 계속 성을 쌓고 주민을 이주시키면서 개척에 노력했던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다.[157]

이런 안정적인 파밍 지역들을 가진 고구려이기에 1차 고구려-당 전쟁 당시 요동성을 지원하기 위해 국내성 단독 또는 국내성과 신성에서만 4만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는데, 백제나 신라에선 관산성 전투에서 보듯 3만만 하더라도 큰 병력이고 4만 병력은 정말로 온 나라를 쥐어짜야 낼 수 있었던 병력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고구려의 국력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알 수 있다.[158]

660년에 백제를 침공했던 나당연합군의 신라군의 경우 5만 명이 약간 안되는 병력을 동원했는데, 이 병력은 당항성을 비롯하여 고구려쪽 국경 병력을 제외한 신라가 투입할 수 있는 야전병력의 거의 전부나 다름이 없었다.
백제 대성팔족의 힘이 강해 삼국 중에서도 특히 왕권이 약했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관산성 전투에서 3만여 명을 동원한 것이 기록된 최대 병력이었다. 그나마도 이건 왜국, 반파국(대가야)과의 연합군이라 이들을 제외하면 더욱 줄어든다.[159]

하지만 수, 당은 고구려가 가진 것보다 훨씬 거대한 규모의 경제가 존재했으며, 그 덕에 잠시 동안 이민족과의 분쟁에 대한 대응을 포기하면서도 본토를 비교적 위협받지 않고 나머지 모든 전력을 단일전선에 쏟아부을 수 있었다. 반대로 고구려는 후방에 언제나 잠재적 위협인 국가들이 존재하면서 동시에 가장 중요한 대륙전선이 정리된 뒤에도 이들 후방 국가들에 강력한 보복을 가할 수 있는 절대 강자의 위치에는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거대한 통일중국과의 전쟁에서도 모든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백제와 왜국의 패전 이후 후방을 대신 견제할 세력이 없어진 것이 결정적인 전략적 패배로 이어졌다.

9. 고구려의 대(對)중국 전쟁 목록

10. 관련 문서


[1] 신당서 설만철전에 의하면 설만철에게 참수되었다고 한다. [2] 자치통감 기준. 책부원귀에서는 입방루로 표기했으며 3만을 거느렸다고 언급된다. [3] 다만 김유신은 명목상으론 총 사령관이었으나 노환으로 인해 경주시에 머물고 있었다. [4] 명칭에 관한 문제는 고구려-수 전쟁 항목 참조. [5] 다만 무조건 굴욕적인 것은 아니며 신라도 고구려처럼 필사적으로 싸워야 했고 당의 침공이 워낙 거세어 멸망 위기에 몰리기까지 했다. 사실 한반도 국가의 생산력과 통일 중원 제국의 생산력을 비교해보면 신라의 악전고투가 당연한 것이긴 하다. [6] 물론 발해는 고구려에 비하면 국력도 약했고 당나라와 극한의 대립각을 세우지도 않으며 문왕 이후에는 당의 패권을 순순히 인정했기에 굳이 의의를 덧붙이자면 눈곱만 한 이득이 있긴 했으나, 이후의 한족 왕조들이 고구려가 억누르고 있던 유목민들에게 차례로 당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결국 손해로 보는 게 맞다. [7] 발해가 국력이 고구려에 비해 약했다고 하나 그것도 발해 중기까지일뿐 발해 역시 후반기에는 수십만의 대군을 지닌 동북아의 강국이었다. 전성기를 맞아 국력을 급성장시키던 거란의 요나라가 발해의 군사력을 두려워할 정도였다. 발해가 급속도로 멸망한 것이 마치 힘이 약해 순식간에 거란에게 당한 것이라는 오해가 현대 한국사회에 아직까지도 남아있으나 실상은 발해의 전략적 실책과 거란의 도박수에 가까운 과감한 군사작전이 맞물려 수도가 함락당한 발해가 구심점을 잃고 흩어진 것에 가깝다. [8] 수나라 군사의 시체를 묻고 쌓은 전승 기념 시설 [9] 일본서기》에는 180여 명 [10] 이 외에도 당나라가 멸망시켜 건국한 수나라가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국력을 전부 소모한 나머지 멸망한 것이 1세기도 안 지났으니 수나라 사례를 반면교사 삼아 고구려와의 전쟁에 망설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11] 이 지도에서 고구려의 남쪽경계가 잘못 나왔는데 이것보다는 남쪽이다. [12] 이 전쟁에서 부각되는 인물이 연개소문과 이세민이기에 사실상 두 사람의 맞대결이라 해도 무방하다. [13] 598년 10,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수나라의 요서 지역을 공격한 영양왕의 전례를 고려하여 공격이 이뤄졌을 가능성이 있다. [14] 고작 30년 전 일이었으니 잔치에 초대된 노인들은 당시 전쟁에 참전하였던 당사자들 혹은 당사자들의 부모들일 것이다. 노인들의 입장에선 본인들의 자식 혹은 손자들을 그 지옥같은 고구려에 보내야하니 당태종 입장에선 그들을 이해시킬 필요가 있었다. [15] 645년의 이 사건 이전까지는 당나라는 신라를 여자가 다스리는 나라라고 대놓고 무시하는 발언을 하는 등 나당동맹에 시큰둥한 모습을 보였으며 백제, 신라 모두와 비슷한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 나당동맹에 대항해 백제와 고구려가 여제동맹 관계라고도 알려져 있지만 두 나라는 고국원왕 개로왕부터 원수지간이었다가 6세기에 두 나라 가운데 한강 유역을 신라가 차지해 싸울 일이 별로 없어졌을 뿐, 아직 고구려와 백제가 그렇게 친밀하게 이어진 사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후 647년에는 당태종이 태도를 확 바꿔 신라 사신을 대환영하는 모습을 보이고 반면 백제와는 차츰 외교관계가 악화, 650년대에 완전히 끊긴다. [16] 이를 당 태종의 패배를 드러내는 것이라 꺼렸다는 말도 있는데, 반대로 당나라가 수나라의 실패를 두드러져 보이게 하기 위해 여수 전쟁 당시의 기록을 일부러 과장되게 했다는 식도 있고, 비슷한 예로 비수대전도 과장을 했다는 설이 있다. 당태종 시기에 오호십육국시대, 남북조시대의 역사서들이 작성되었는데, 신하들이 당 태종의 고구려 원정을 반대하기 위해 일부러 황제가 원정나갔다가 시망한 일을 부풀렸다는 식. 여하간 말하는 사람마다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었다 하는 부분이라 고구려-당 전쟁에서 당군의 자세한 편제가 밝혀지지 않은 데다가 고대 사서에서 군사 기록은 희박한 탓에 논란이 많다. [17] 구당서 기준이며 자세한 내용은 후술 [18] '이세적(李世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으로 삼아 보병과 기병 60,000명과 난주(蘭州)와 하주(河州)에서 항복한 오랑캐들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가서 두 부대가 합세하여 유주(幽州)에 대거 집결하게 하였다.' 라는 삼국사기의 서술을 고려하자면 60,000명의 군사에 이민족(돌궐 기병 등) 군사들이 추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6만 + a) [19] 이는 644년 11월 고구려 정벌을 처음 편성할 당시의 규모이다. 이후 평양도행군에 기존 편성 목록에 없었던 행군총관 고신감과 구효충 등이 추가됨을 고려한다면 수군이 70,000명으로 기록된 신당서와 맞아 떨어진다. [20] 멀리 갈 것도 없이 여요전쟁의 경우만 보아도 요성종이 친정을 한 2차 전쟁에서 요나라가 동원한 병력은 40만이었지만, 1, 3차 전쟁때의 동원 병력은 많아봐야 10만 정도로 확인되고 있다. [21] 병부상서 이세적, 예부상서 이도종, 이부상서 양사도, 형부상서 장량 [22] 이민수, 「645년 唐의 高句麗 원정군 규모 推算」, 한국상고사학보 100, 2018 [23] 훗날 발해의 무왕이 당나라를 침공하기 전, 무왕의 동생 대문예는 '고구려도 30만의 강병(强兵)으로 당에 맞서다가 패배하였는데 발해의 군사력은 고구려에 미치지 못하므로 승산이 없습니다' 라고 발언하며 당나라 공격을 만류한 바가 있다. 이 기록을 통해 고구려의 동원 가능 병력을 추정해 볼 수 있다. [24] 위정은 당 태종의 6군 소속으로 당 태종의 친정군이 요하를 도하한 5월 이후 개모성에 배치되었으며 이후 벌어진 신성 전투에서 고구려군 당군의 북 소리와 함성 소리를 듣고 두려워했다는 기록이 있다. [25] 책부원구에 따르면 645년 토번 사신이 당나라를 방문했을 때 1차 여당전쟁을 언급하면서 ' 황제가 100만 대군을 이끌고 요동을 정벌하였다' 라고 말하는 내용이 나온다. [26] 완편이라는 가정이므로, 1개 행군이 2만 명인 당군의 기본 편제상 7개 행군이면 14만 명 정도 된다. 하술할 "1개 행군이 완편되지 않는 상황"을 전제한다면 행군의 숫자는 늘어나고, 행군에 배당된 총관과 행군총관의 수는 줄어들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된다고 해도 병력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27] 안시성 전투 이전까지 당군은 야전에서 상당히 유리한 것을 넘어 무패에 가까운 위용을 보이지만 진로상으로만 보면 여수 전쟁에 비해 크게 진전된 면이 없는데도 극적인 장치를 이용하여 위용만을 강조하는 등 비판적으로 볼 여지가 많다. 실제로 고구려를 공격할 때 압록, 평양으로 직공 자체는 어렵지 않다. 문제는 그 다음이지만 수양제, 당고종 역시 평양을 직공하고, 압록강 일대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하기도 했다. 당나라의 당시 공격 양상은 단순히 평양으로 빠르게 직행 하는 것이 아니라 요동 방어선을 무력화시키고 고구려를 접수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요동성을 비롯한 성 10여개를 돌파한 것은 수나라에 비해 나은 전과이다. 하지만 당군의 후방에 신성과 건안성의 10만 대군이 뒤를 노리고 있기 때문에 평양 직공책이 반려된 점, 점령되었을 터인 요동성 일대가 당군에게, 특히 후퇴할 때 전략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점 등은 아직 요동 일대를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28] 고구려의 상대 보급선을 타격하는 전략은 역사상 수많은 국가들이 자국내에서 외적과 전쟁할 때 쓰는 전략이기도 하기에 꼭 약자의 전략이라고만 할 수 없다. 자기네 나라인만큼 지형지물을 속속들이 알고있으며 인적, 물적 자원에 대한 접근성이 더 용이하기 때문에 적을 지치게 만든 뒤 원하는 전장에서 적을 타격하고자 하는 건 오히려 최상의 전략이다. [29] 이후에 당군이 철수할 때에도 늪지대에 수레 바퀴가 빠져 당 태종이 직접 풀을 베어 깔았다는 기록도 있다. [30] 대표적으로, 고려군 30만, 거란군 40만으로 양측 합쳐 70만 대군이 전개되었다고 기록된 삼수채 전투에 대한 기록도 최근에는 고려군 8~10만, 거란군 3~5만으로 낮추어 잡는 추세다. 거란이 전성기에 보유한 병력 규모 역시 총동원해 봐야 12만 명 내외였던 것으로 재추정되고 있다. [31]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17만 명으로 한반도를 접수할 뻔했다. [32] 고, 중세 사료에서 특히 동아시아 사료에서 자국의 국력을 과장할 목적으로 너무나 쉽게 수십만 단위를 읊어대서 그렇지 인류 전쟁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20만 대군이면 어떤 시대, 어떤 국가, 어떤 전쟁에서든 어마어마한 수준이다. 단적으로 명나라 초기에 주원장은 말로만 조선은 언제든 정벌할 수 있다고 조선을 깔보듯 얘기했지만 말과는 달리 직간접적인 견제를 가했다. 알고보면 조선도 10만 단위의 병력을 동원할 역량이 충분한 국가였기 때문이다.(임진왜란 당시 일시적이긴 하지만 조선도 침략한 일본군과 대등한 규모의 병력을 동원했다.) 명나라가 조선보다 10배 이상 큰 국가임에도 이런 견제를 가했다는 건 10만 이상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국가는 인구와 경제력, 행정력이 절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방증이다. [33] 알고보면 중국대륙을 정복한 유목 민족/국가들도 10만 언저리의 군대로 중국대륙을 정복했다. 알고보면 20만 대군은 한 대륙의 패권 국가정도는 되어야 동원할 수 있는 규모인 것이다. [34] 20만이면 어느정도 규모 있는 도시 인구다. 20세기 이후에야 인구 20만 도시를 지방 소도시라고 대수롭지않게 얘기할 수 것이지 18~19세기까지만 해도 인구 20만이면 유명한 대도시 수준이었다. 특정한 목표를 가지고 20만 인구를 장거리 이동시킨다고 생각해보라. 그것도 그 많은 인원의 체력과 능력 등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지나가는 지역마다 그 몇배의 인원이 만들어낸 경제력을 빨아먹다시피 해야만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35] 당시의 고구려인과 현대의 한국인에게 당태종은 분명 적이지만 사실 당태종은 당시 동아시아 최고 명군(明君)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전쟁 중임에도 현대인의 관점에서도 지극히 상식적인 선에서 적과 포로들을 대하는 사람이었다. [36] 수양제는 4번이나 공격했고 심지어 몇 달을 싸웠는데도 함락시키지 못했다. [37] 수비하는 쪽이 공격하는 쪽에 비해 유리한 것은 사실이나 공격측이 수비측보다 유리한 것은 선제공격을 가할 수 있고 전장터를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전쟁 초기 기존의 침공루트와 다소 다른 작전으로 침공하여 순간적으로 고구려를 몰아세웠지만 이내 수비의 이로움이 발휘되어 전선이 고착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성을 깨뜨리며 요동 방어선으로 밀고 들어갔지만 초반 공격자의 이로움이 다했고 수비의 이로움이 시작되어 고구려의 반격을 받고 남은 성에서 고전하였던 것이다. 결정적으로 신성, 안시성, 건안성이 끝까지 버텨내며 시간을 벌어 당나라의 후방이 어지러워져서 철군 할 수밖에 없었다. [38] 일반적으로 군사학에서 공격측은 방어측에 비해 3배의 이점을 가지는 대신, 공격측이 방어측에 비해 더 많이 가진 전력에 3을 곱하고 그것을 더 많이 가진 물자로 나눈 값만큼 빨리 전투력이 소진된다. 다시 말해, 공격측의 병력이 10,000명, 방어측의 병력이 10,000명이면 방어측은 30,000명을 상대로 싸우는 것과 같은 부담을 받지만, 대신 10,000명인 쪽 역시 30,000명의 병력을 운용하는 것에 맞먹는 속도로 물자를 소진하며, 따라서 공격측이 방어측의 3배만큼 물자를 가지고 있어야 이 우세를 지속적으로 이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공격측에 비해 방어측의 물자가 훨씬 많고, 방어측 역시 이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요새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 요새의 구성에 따라서 공격측과 방어측은 시작할 때부터 대등해지거나 심지어 방어측이 압도할 수도 있다. [39] 서영교, 주필산(駐蹕山) 전투와 안시성(安市城) [40] 실제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터에서 일선 장수들이 공에 눈이 멀어서 총사령관의 말을 듣지 않거나, 혈기왕성한 장수들이 지휘부의 말을 듣지 않고 단독행동을 하는 경우는 빈번하게 찾아볼 수 있다. [41] 철수해 돌아온 뒤에 당태종은 자신이 왜 고구려 같은 소국에 패한 거냐고 분해하다가 이도종이 "그때 제가 요동을 돌아 평양부터 먼저 치자고 건의를 드렸었는데 폐하께서 거부하셔서..."라고 하자 "그랬었나? 기억이 안 나는데..."라고 대답했다. 정말 기억이 안 났을지는... [42] (주필산에서) 맞붙어 적에게 제압당하고 장차 떨치지 못하였는데 돌아와 위공(이정)에게 말하였다. ‘내가 천하의 군사를 모아갔는데 저런 하찮은 것들에게 곤란을 당하니 어찌된 것이오?’ 이정이 답하기를 ‘이는 도종이 알 것입니다. [43] 다만 1차 여당전쟁 당시에는 만약 이세민이 안시성을 우회했다면 고구려에게는 정말 큰일이 터졌을 것이다. 요동성이 떨어진 이상 이미 당나라의 손에는 요동성에서 취한 50만 석의 곡식이 있었고, 당나라군의 편제인 육화진에서 1만 4천의 전투병에 반드시 6,000여 명의 치중병(=보급운반병)과 마차가 딸려있으므로 이 곡식을 싣고 요동을 우회해버릴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 이미 살수대첩의 경험이 있는 이상, 고구려는 우회해서 돌아오는 당나라군을 더 큰 위협으로 보고 대군을 돌려 공격했을 것이며, 안시성, 건안성, 신성은 정말 큰 위험에 빠졌을 것이다. [44] 책부원귀에는 전원 기병, 기타 기록에는 보병 기병 혼합이라 기록되어있다. 이는 당시 말에서 내려 보병으로 일시 전환하는 전술이 동아시아에서 유행하고 당에 수입된 것에 주목하여 주필산 전투에서도 같은 전술을 구사하였으리라 추정되기도 한다. 실제로 이세적도 이를 구사하여 기병을 상대한 경험이 있다. [45] 고구려 포로들에 대한 후한 대우와는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이 이유에 대해 자치통감은 이 전투에서 말갈병이 당나라 황제의 진을 침범했기 때문이라 했다. [46] 주필산에서 당군 주요 전사자로는 좌무위 장군 왕군악이 있다. 《 신당서》 기록은 '六月丁酉,克白岩城。已未,大敗高麗于安市城東南山,左武衛將軍王君愕死之'. [47] 666년 발발한 3차 고당전쟁 초기에 이세적이 남긴 발언이다. 645년 벌어진 신성 전투 패배의 기억이 당나라 지휘부에게 크게 각인되어있던 것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48] 장검의 군대는 건안성에서 고구려군 수천명을 죽이지만 이후의 기록이 사라진다. 이는 장검의 군대가 건안성에서 치명적인 대패를 당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49] 주필산 전투 이후 당군이 안시성 공격에 착수하는데만 50일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주필산 전투에서 고연수가 당군에 항복한 시점은 645년 6월 23일이지만 당군은 7월 후순에나 안시성에 접근하고 본격적인 안시성 공격은 645년 8월 10일에 시작되었다. 주필산 전투가 벌어진 곳과 안시성의 거리는 10리 남짓으로 길어봤자 반나절 거리이다. 해당 기록의 공백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주필산 전투 항목 참조 [50] 이는 어서 빨리 당군이 승리해야 자신들의 가족이 무사하기 때문이었다. [51] 신당서》에선 해당 병력이 안시성의 병력이라고 적혀 있으며, 《 자치통감》과 《 삼국사기》에선 해당 병력이 신성 + 건안성의 병력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병도의 경우 '《신당서》 기록은 중국애들이 뻥튀기 한 게 아니냐?' 라고 주석을 달아 의문을 제기했다. [52] 당장 중국사에서도 저런 소리를 하거나 행보를 벌인 탓에 적군들이 더더욱 끈질기게 버틴 사례는 많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중일전쟁이나 독소전쟁에서 일본군 독일 국방군이 보여준 대규모 초토화 작전을 보고 국부군 소련군이 격렬하게 저항해 역관광시켜 승전할 수 있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53] 실제로 고구려군의 반격에 부딪혀 전쟁이 고착화되고 군량 수송로까지 차단당함에 따라 당군은 정말로 태종이 본인 입으로 언급한 '곤란한 지경' 에 빠지게 된다. 이에 더해 설연타까지 반당적인 움직임을 보이게 되고, 결국 당나라군은 태종이 언급한 그 늪지를 통해서 퇴각하게 된다. [54] 설연타의 통수는 고구려랑 연계하였다는 견해가 있는데 개연성이 충분하다. [55] 철수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당군이 확보한 지역은 백암성-요동성-안시성 인근에 불과했다. 요동 방어선 북단의 신성, 남단의 건안성은 굳건했으며, 두 성에(혹은 인근 지역에) 주둔했던 고구려의 10만 대군이 당의 퇴각로를 노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56] 안시성 전투 이후 연개소문이 당을 역으로 침공하였고, 급박한 상황에서 당 태종이 우물에 숨었는데, 그 사이 거미가 입구에 거미줄을 쳤고 우물에 쳐진 거미줄을 보고 고구려군이 우물을 살피지 않아 태종이 살았다는 과장된 스토리가 중국 경극에 있을 정도이며, 이는 한국보다 오히려 중국에서 더 유명하다. 이후 태종이 거미에게 보답하기 위해 우물 위에 탑을 만들었다고 하며, 실제로도 해당 탑이 아직까지 남아있으나 야사 이외의 기록이 없어서 야사의 진위여부는 알 수 없다. [57] 일생 동안 패배를 해본 적이 없는 하늘이 내린 장수였으니 유일한 패배라는 것은 정신적인 타격이 컸을 것이다. [58] 거기다가 저 수치 중에 수군은 전사자가 아닌 익사자다. 즉, 기록을 전적으로 신뢰하자면 당나라는 사실상 전사자가 거의 없다시피 한 것이다. 하지만 패전한 데다 도주에만 저런 피해를 입었는데, 그럴 리가 있겠는가? [59] 당연하지만 역사왜곡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60] 능연각 공신, 형부상서 [61] 신당서에 따르면 설만철은 군사들을 이끌고 압록강 하류에 상륙하여 박작성을 공격하였고 이에 반격하려는 박작성주 소부손의 목을 베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나, 사료 교차검증을 해보면 이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삼국사기에는 박작성 공략전에서 당군이 성과를 얻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고구려군 성주의 목을 베고 3만의 고구려군을 대파하는 큰 승리를 거두고 본국에 귀환한 장수가 부장과 갈등이 있었다는 이유로 유배를 당하고 무장 경력이 끝날리가 없기 때문이다. [62] 노합하가 흐르는 내몽고 적봉시, 하북성 승덕시에서 난하만 건너면 바로 북경이다. 하루만에 주파한 기록이 있을 정도로 근접한 곳이다. [63] 이진충의 조부이다. 이세민이 고구려에 패배한 직후 이세민을 지지, 그의 환심을 사서 송막도독에 책봉된다 [64] 서기 655년 1월 [65] 책부원구에 10,000명으로 기록 [66] 타국과의 전투에서 대패를 당했을 때 많이 쓰이는 표현이다. [67] 이 기록은 650년대 초로 해석되기도 한다. [68] 지금의 대전광역시 회덕 산성, 계덕 산성 [69] 《당육전》에는 최대 10,000명 이상의 부대로 증편될 때까지 고려하여 장교 배치를 달리하도록 명시되어 있다. [70] 이민수, 「660~661년 당의 고구려 공격군 편성과 水軍 운용 전략」 한국고대사탐구 38, 2021, 137~142쪽. [71] 전년도에 백제 정벌에 나선 소정방의 13만 신구도행군은 이름만 평양도행군으로 바뀐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평양성 공격에 나섰는데 고구려 원정군에는 소정방과 동급 이상의 사령관이 4명 이상 등장한다. 이게 얼마나 엄청난 규모인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면 현대의 인천 상륙 작전 때 동원된 UN군 병력이 75,000명이었다. 즉 인천 상륙 작전에 동원된 병력의 약 두 배~세 배에 해당하는 병력이 패수로 진입하여 수도인 평양성을 공격한 것이다. [72] 장수왕 이후로 고구려의 정식 국호는 고려다. 다만 한국에서는 왕건이 세운 국가와의 차별성을 두기 위해 고구려로 부르는 것. [73] 중국 통사에 따르면 14,000여명으로 추격 부대를 편성했다가 800여 명이 생환했다고 한다. [74] 글필하력은 귀환한 직후 바로 서쪽으로 파견된다. [75] 탈출을 권하는 부하에게 "내가 데리고 온 향리의 자제 5,000여 명이 이제 모두 죽었는데 어찌 내 한 몸만 살아남기를 구하겠는가?" 하며 물리치는 모습이 나온다. 이때 방효태는 영남도 백주 자사였으며, 영남도에는 6개 부가 있었는데 이 지역 부병들을 동원해 종군시켰다가 초전에 전멸한 듯 하다. [76] 백제가 허무하게 멸망했지만, 그만큼 지방 세력들은 멀쩡하게 남아있어 그걸 하나하나 진압해야 했으니 신라가 총력을 쏟아부어야 했다. [77] 출처: 김용만 저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바다출판사 판 (2003년) [78] 패강도행군 총관. 662년 초 고구려군과 전투 중 진중에서 사망 [79] 당의 이름난 재상인데도 별도의 열전이 없다. [80] 옥저도행군 총관이며 사수 전투에서 전사. [81] 누방도행군 총관이며 임아상처럼 662년 초 고구려와 전투 중 진중에서 사망이 확인된다. 방효태와 정명진 모두 1차 고구려-당 전쟁 때 참전한 이력이 있다. 정명진의 부장 양사선의 묘지명을 확인해보면[160] 정황상 누방도행군 역시 고구려군과의 전투에서 도행군이 와해될 정도의 패배를 입은 것을 유추해볼 수 있다. [82] 양사선의 묘지에 보면, 신성을 공략했으나 아무 기록이 없다. 정황상 신성 공략에 실패한 듯. 이후 글필하력의 요동도행군, 소사업의 부여도행군이철륵 반군 진압을 위해 철군할 때 정명진의 루방도행군은 고구려군의 집중 공격을 받고 정명진과 양사선 모두 난전 중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83] 알기 쉽게 비교하자면 수나라 30만 대군이 전몰할 때도 지휘부가 이 정도로 타격을 입지 않았다. [84] 장손무기, 저수량 등 태종 대의 중신들이 이때 제거된다. [85] 웅진 도독부 측에서는 이를 거부하고 신라 측에서 끈 떨어진 도독부를 거둬줌으로써 간판은 유지한다. 이 결정은 수년 뒤 고구려에 치명적인 내분이 일어난 시점에 신의 한 수로 작용한다. [86] 이 시기로부터는 훨씬 후일의 일이지만 실제로 고려가 세차례에 거친 거란과의 전쟁 끝에 귀주대첩에서 거란의 대군을 섬멸한 뒤 거란과 다시 화친하여 형식적 책봉관계와 동아시아 힘의 균형 속에 100년 가까이 평화를 누린바 있다. [87] 구당서》와 《 신당서》, 그리고 《책부원구》 를 참고하자면 이때 동원된 당군의 규모는 최소 50만 대군으로 추산된다.[161] 특히 이 전쟁에 당나라는 모든 국력을 쏟아부었으며, 667년에는 추가 병력을 파견함과 동시에 하북의 세금을 동원하기까지 했다. [88] 《책부원구》 <장수부>에 의하면 이세적은 “신성은 고구려 서쪽 경계를 지키는 성 가운데 최고의 요충지이다. 이 성을 먼저 도모하지 않고서는 나머지 성을 함락시킬 수 없다.” 는 발언을 남겼다. 1차 여당전쟁때 요동성, 개모성 등 주요 거점들을 함락하고 나서도 천리장성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한 이유가 신성, 건안성에 주둔하면서 끊임없이 당군의 진격로와 군량 수송로를 방해하던 고구려군 때문이였다란 사실을 이세적이 떠올렸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89] 참고로 2차 고구려-수나라 전쟁 당시, 요동성이 수나라의 대군에 맞서 버틴 기간이 3개월 남짓인데 신성은 당나라의 50만 대군에 맞서 무려 7개월 이상을 버텨냈다. 신성이 함락되고 요동 방어선이 우후죽순으로 와해된 점을 감안하면 사부구의 배신이 매우 뼈아픈 부분이다. [90] 신성과 남소성 쪽으로 밀고 들어오는 당군을 막고 천리장성의 북방 요충지였던 신성을 탈환하기 위해 요하 지류에 주둔하고 있었던 고구려군 대다수가 투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91] 평안북도 의주군, 신의주시 일대로 추정됨 [92] 평안남도 안주시 일대로 추정됨. [93] 참고로 원래 이름은 아직도 모르고, '욕이성'이라는 이름은 이 성을 함락시킨 당군이 동이족을 욕보였다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94] 지금의 황해도 평산군. [95] 고구려 3경 중 하나. 지금의 황해도 재령군. [96] 668년 6월. 이전의 연정토의 12개 성과는 다른 성들이다. [97] 이 때 별 저항 없이 나당연합군에 항복한 황해도 지역은 이후 검모잠, 안승이 주도하는 친신라 반당 고구려부흥군의 활동거점이 되었고, 나당전쟁에서 신라와 함께 당군에 맞서 싸운다. [98] 이후 고구려인들에 의한 반란이 일어난다. [99] 사실 요동 방어선이 무너지면, 지역적으로 평양까지 진격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곳이 압록강과 현재의 평안북도 의주군에 있는 대행성과 평안남도 의주시에 있는 욕이성 밖에 없게 되며, 실제 전쟁에서도 대행성과 욕이성이 넘어간 이후 바로 평양성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100] 분하게 생각하고 목 매어 죽고자 하였으나 주위 사람들이 구하여 그러지 못하였다. [101] 여담으로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은 618년 당이 건국된 지 딱 50년 만이었다. [102] 그래도 요동은 얻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질적인 지배력은 제로에 가까웠고 그나마도 발해가 탈환해 버린다. [103] 고구려를 상대로 군사력을 소진한 당나라는 티베트, 돌궐 등에 대해 제때 통제하지 못하게 되었고, 거기다가 고구려가 통제하던 내몽골, 요서 등지의 유목민족들이 고삐가 풀려 날뛰게 되면서 헬게이트를 맞게 되었다. 애초에 고구려는 이 북방 유목민족들을 통제하던 국가였다. 농경 민족임과 동시에 강대한 중앙집권체제를 이루고 있는 고구려는 이미 말갈, 거란, 돌궐과 교류하며 지냈고 발해 건국에서 알 수 있듯이 흑수말갈이나 속말말갈 정도를 제외하면 웬만한 말갈족은 고구려에 동화된 상태였다. 그런 국가가 내실까지 탄탄하니 수당제국은 그 많은 인구수와 인프라를 갈아넣어 국운을 건 총력전을 걸었고 왕조가 한 번 교체되는 과정을 거치며 겨우겨우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토번을 통제하지 못 해 이후 당의 골칫거리가 됐으며 그렇다고 중화 제국이 동북아를 제대로 통제한 것도 아닌데다 한반도 세력까지 북쪽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 거란, 몽골, 여진과 같은 유목민족들이 밀고 내려오는 계기가 되었다. 애시당초 당의 국력이 신라보다 훨씬 위임에도 토번을 신경 쓰느라 결국 신라에게 당초 약속한 대동강 이남 땅을 주어야 했던 것을 보면 고구려와의 전쟁이 당에 얼마나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쳤을지 손쉽게 생각해볼 수 있다. [104] 당 태종이 고구려 원정을 결행할 당시 당나라 조정의 다수 대신들은 '무용론(無用論)', 즉 아무 이득이 없는 전쟁이라는 것이 중론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의지가 너무 강해 원정이 결정되었다. 물론 당시 당나라의 상황을 보면 고구려는 이웃으로 지내기에 몹시 위험한 이웃이기는 했다. [105] 토번, 돌궐 등과 비교했을 때 작다고 서술되었었으나, 토번과 돌궐 등은 그냥 이름을 그렇게 통일해 부를 뿐 수많은 부족으로 갈라져있는 집단이다. 그리고 실제 영토도 고구려를 동•서 6,000리, 10,000리 등으로 묘사하는 것으로 보아 당대 주변국들은 고구려를 절대 영토가 작은 국가로 인식하지 않았다. 또한 과거에는 인구수로 국력을 판단했고, 고구려는 농경을 근간으로 하여 주위의 유목제국 및 토번 등보다 인구가 더 많았으므로 중원의 통일 제국에게는 상당히 위협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인구밀도를 비롯한 생산력 측면에서 유목 국가와 비교되지 않은 저력을 낼 수 있으면서도 말갈과 거란과 같은 유목민들을 통제하여 강력한 군사력을 낼 수 있던게 고구려의 위치였다. [106] 당장 고구려와 발해가 망하고 초원과 만주를 차지한 요와 금은 중원세력에게 굉장히 위협적인 국가였다. 만약 신라와 같은 후방 동맹이 없고 고구려가 중원 전선에만 신경쓰면서 힘을 키웠다면 당에게 어떤 위험으로 다가올지 모른다. [107] 실제로 원산만 이북 지역은 진흥왕 이후에 곧바로 고구려에게 뺏기고 만다. [108] 특히 고구려는 한반도 중부 지역을 6세기 중반까지 점령했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요동에 있는 병력을 이곳으로 투입하면 이곳의 토착 세력들이 자연스레 고구려로 돌아설 가능성이 높았다. 중화 제국이나 북방 이민족들과 달리 언어, 종족, 풍습 등도 서로 비슷하거니와 무엇보다 이 지역의 지리와 토착 세력들의 인적 정보 및 인적 커넥션 보유 등 여러모로 이민족들이 침략하는 것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당시 신라와 백제가 거의 서로 멸망을 목표로 피터지게 싸우던 중이고 화해의 여지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나제동맹이 굳건하던 5세기 말 ~ 6세기 초 무렵보다 훨씬 군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즉, 고구려가 이전 보다 많은 병력을 동원하기 시작하면 고구려와의 최전선에 투입된 신라군들 후방에서 토착 세력들이 동요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을 것이었다. 그리고 백제 한성 함락에는 200년 가까운 시대차가 있고 기습공격이긴 하지만 고작 3만 명밖에 동원되지 않았다. [109] 내몽고 - 요서 지역에서 발흥했지만, 이들이 가진 알짜배기 영토의 대부분은 요동과 만주였다. [110] 물론 몽골 제국은 세계 제국이니 논외 [111] 당 태종이 고구려 원정을 감행할 당시에도 당 태종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 '실지론(失地論)'을 내세우며 고토(한 4군) 회복을 명분으로 전쟁을 주장했다. 이를 토대로 '실지론'이 고구려 정벌의 동기라는 견해가 최근에 제시되고 있다. 다만 이는 사료의 액면 그대로만을 받아들인 견해이고, 당나라가 고구려 원정을 한 실질적 이유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제각각이라서 통일되지가 않는다. 어쨌든 동기가 무엇이었든간에 목표는 점령 통치였다는 것은 분명했다. [112] 하북 쪽이 점령당하면 중원 장악은 시간 문제다. [113] 어디까지나 당시 중원 사람들의 인식에 있어 최대 안보의 위협은 흉노가 발호했던 몽골 평원 일대다. [114] 문맥상 북송 멸망을 지칭하는 걸로 이해하길 바람 [115] 고구려는 유목민과는 다른 독자적인 세계관을 지니고 있던 국가다. 예맥계 민족으로서 한국어를 쓰는 민족이었고 이는 백제와 신라도 마찬가지였다. 고구려는 이들을 모두 아우르는 천하관을 지니고 있었으며 현대의 민족주의와는 다른 개념이긴 하지만 어쨌든 중화 민족과는 자신들을 구분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실제로 고구려는 요동과 만주를 정복한 광개토대왕 때부터 영토 확장보단 안정화를 꾀했으며 이러한 강대한 인프라를 바탕으로 장수왕 때부터 본격적으로 한반도를 노리기 시작한다. 또한 언어적으로도 유목민족은 중화 민족과 더 가까우나 고구려는 한국어를 쓰는 한반도 민족이었기 때문에 굳이 중국에 쳐들어갈 이유나 명분도 없었고 강대한 중화 문화에 자칫 잘못하면 그들이 중시하는 고구려 문화가 동화되어 사라져버릴 수도 있었다. 그리고 고구려는 실제로 선비족이 어떻게 한족에 흡수되어 사라졌는지를 옆에서 똑똑히 본 나라다. 물론 역사에선 고구려가 멸망했기에 만약 고구려가 한반도를 통일했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116] 금나라 고려와 화친을 맺었고 청나라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항복시킨다.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국력차를 감안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117] 다만 그럼에도 당 입장에선 토번이 고구려보다도 더욱 경계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수도 장안이 토번이랑 매우 가깝기 때문. 실제로 토번은 당나라가 고당전쟁 후 피로해져있던 틈을 타 장안 부근까지 초토화시킨다. [118] 말그대로 요하 동쪽을 의미하며 만주, 연해주, 한반도는 물론 일본 열도까지 포함하는 넓은 개념이다. [119] 지금의 요동 반도를 일컫는다. [120] 다만 요나라의 경우에는 여진-만주족의 두 나라와 달리 거란족의 전통적인 근거지였던 요서 일대가 중심지로써 화북에는 발을 많이 들여놓지 못해 유목적 성향이 훨씬 강하기도 했고, 한족뿐만 아니라 몽골 제국의 발흥에 따라 문화적 차이가 적었던 몽골족에도 많이 동화되었다. 같은 동호계 친척인 몽골인이 원수였던 금나라를 쳐부수기 시작하자 아주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121] 오늘날 미국에서도 다민족 국가 그것도 이민국가임에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으로 뭉쳐있는 것과 같은 형태라고 볼 수 있다. [122] 당장 이정기 제나라의 경우만 하더라도 장기간의 대학살을 통해서 정체성을 철저하게 짓밞아서 고구려 문화적 성향을 다시 중화적 문화로 돌려놨었다. 이는 고구려가 중국문화만큼의 강력한 독자적인 정체성 문화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며 나중에 이러한 문제는 금나라 발해인 탄압에서도 재확인이 가능하다. 이런 정체성은 문화적 의식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123] 전성기때 노려볼 수 있었던 일본 열도도 외부라는 이유로 시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했어도 다원세계를 인정하며 독자적인 문명의 정체성을 갖춘 국가로서 정해진 영역 이상을 나가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는 걸 증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124] 지방군이야 특별히 정예병력이 관리해야 할 요충지가 아닌 이상 그냥 그 일대의 지리를 잘 알고 방어에 매진할 유인이 큰 현지인들을 징발하는 게 동서고금의 기본이라 거의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의 경우도 거병할 때 나주 일대의 현지 병력이었던 미다부리정을 기반으로 삼았다고 보여지는데, 지방민으로 이루어진 부대였으니만큼 반신라란 기치에 쉽게 감화되었던 걸로 보인다. 이후 전주를 수도로 정하면서 정식으로 백제를 세우고 그 일대의 지방군 부대인 거사물정도 포섭한 걸로 보이는데, 역시 옛 백제의 잔향이 많이 남아있던 지역이니만큼 백제 부흥이라는 기치에 별다른 저항 없이 쉽게 감화되었던 걸로 보인다. [125] 이 당나라조차도 당태종 초중반까지는 토번과 말갈을 비롯한 외세를 견제해가며 고구려를 상대했기에 안시성 전투 등에서 탈탈 털린 것이었다. 이에 당태종은 고구려 이전 주변국들부터 정리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바꾸었고 그렇게 정리를 해 놓고도 토번의 성장을 막지 못해 고구려 멸망 후 이슬람 제국과의 탈라스 전투에서 대패하게 된다. [126] 광개토대왕, 장수왕으로 대표되는 고구려의 대외 영토 확장은 중원이 5호 16국의 분열 상태였음을 기회로 활용한 결과였다. 이후 중국에 , 의 통일 왕조가 들어서면서 고구려는 제한적인 선제공격을 제외하면 방어에 주력해야 했다. [127] 다만 고구려가 백제, 신라 중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고 적당히 견제만 함으로서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보단 서로 싸우는 것에 국력을 더 투자했으므로, 영류왕의 남방 정책이 반드시 실책이라고 할 순 없다. [128] 실제로 영류왕 사후 정권을 잡은 연개소문은 백제와 신라의 분쟁에서 백제의 편을 들면서 백제(+왜국)와 유기적인 연계를 하는데 성공하지만, 외교적으로 고립되어버린 신라가 극단적으로 당나라에 의존하는 나당동맹을 성립하게 만들었고, 이 동맹으로 인해 백제가 멸망함으로서 고구려 남쪽 국경이 신라에 의해 더욱 직접적으로 위협받게 된다. [129] 당시 동아시아에서 대규모의 양면전선을 형성할 수 있는 국가는 당나라뿐이었다. [130] 이는 양제 때 완성된 대운하 당나라 때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하여 강남 곡창지대의 막대한 생산량을 운하를 통해 쉽게 운송할 수 있게 되면서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물자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기 때문이다. 물론 고구려도 물자 생산력이 높긴 하지만 당은 동원할 수 있는 물자량이 상대적으로 고구려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훨씬 많았다. [131] 일시적으로 고구려 직접지배지역을 통제했다지만, 발해의 건국까지 안동도호부가 계속 당나라와 가까운 쪽으로 이전해간 걸 감안하면 점점 통제력을 상실해가고 있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132] 다만 국력에서 신라도 열세였던터라 신라는 필사적으로 싸워야 했다. 특히 나당전쟁에서 신라도 패전을 수없이 했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133] 무엇보다 이는 반복되는 전쟁으로 인해 농민들이 끊임없이 병사로 징집되면서 부병제를 구성하는 핵심인 자영농층의 규모가 감소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서 당의 물자생산력을 지원해줄 부병제가 흔들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안시성 전투, 나당전쟁에서의 패전 등으로 당이 장거리 원정에서 군사력의 한계를 보여주자, 그간 당에 강력하게 복속되어있던 기미주들이 반기를 들며 다시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사실 당은 귀족들의 대토지 소유를 막고 전쟁을 지속적으로 벌여 자영농들에게 지급할 농토를 확보하는 동시에 자영농들의 몰락을 막기 위해 장기전을 피하고 단기전을 목표로 해야 했으며, 동시에 군사력 과시를 위해 병사들의 훈련도를 최상으로 유지해놓아야 하는, 그야말로 단 한 가지의 실수도 해서는 안 되는 체제를 당 전기 내내 유지해야했다. 그러나 위징이랑 신하들의 반대에도 당태종이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안시성에 출전했다가 참패하고 나당전쟁에서도 신라를 이기지 못하는 등 전쟁이 장기화되고 패전을 통해 군사력 과시가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이미 당태종 말기부터 당의 군제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당의 군제를 구성하는 핵심인 부병제와 기미지배체제가 붕괴되었기 때문에 토번을 막지 못한 이유도 있으며, 단순히 토번과의 외교문제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134] 당시 당은 자국을 위협할 만한 위치에 있는 마지막 나라로 고구려를 점 찍어둔 상태였다. 이미 돌궐이나 흑수말갈 등은 대부분 당에 복속된 상태였고, 토번은 아직까지 당을 위협할 정도도로 성장하기 전이었다. 신라 역시 당과 적대하지 않았다. 당은 고구려만 지워버리면 그야말로 걱정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135] 삼한일통은 신라에게 있어 사상의 문제가 아니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체제가 고착화된 이후로 신라는 백제에게 예방전쟁을 포함한 이런저런 전쟁으로 인해 대야성을 비롯한 많은 땅을 뺏기면서 수도 서라벌이 위협을 받는 상황이었고, 당시 고구려는 당과 동맹 관계였던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백제의 신라 공격을 관망하거나 650년대에 들어서는 이에 동참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신라로서는 여제 양국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국가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즉, 신라에게 삼국통일은 단순히 땅따먹기나 한반도의 유일한 나라가 되겠다는 욕심이 아니라 그야말로 국가의 장기적인 생존이 걸린 엄청난 도박이었다. [136] 단, 고구려의 압박도 거셌지만 신라에게 주적은 단연 백제였고 실제 백제가 망하고 부흥운동이 진압된 이후에는 신라로서도 고구려 원정에까지 적극적으로 나설 동인이 사라졌다. 실제 백제 멸망과 고구려 멸망 사이 신라의 행보를 보면 당나라의 고구려 원정에 소극적으로 동참하며 사실상 관망으로 일관했다. [137] 백제를 선택한 이후에는 신라가 고구려 남방을 칠 때면 백제의 역공으로 견제가 가능하고, 공세로 나가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백제가 멸망하는 순간, 당나라 35군의 5할이 평양을 직공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또한 백제와 신라는 이미 6세기 중반부터 원한이 깊어 주변국의 중재에도 싸움을 그치지 않는 상황이었다. 큰 세력을 우리 편으로 하고 작은 세력도 적으로 안 두고 달랜다는 것이 말이야 듣기 좋고 가능성 여부는 판단하기 나름이지만 최소한 백제를 선택한 것을 전략의 부재라고 보는 것은 고구려가 멸망했다는 결과만 보고 내린 무지와 폄훼에 가깝다. 거기다 백제는 멸망하기 직전인 의자왕 때까지만 해도 지속적으로 신라를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단지 의자왕 후기에 귀족들과 왕족들간의 대립을 제대로 중재하지 못하여 지배층이 분열된 것이 문제였고, 당시만 해도 아무도 이런 내부사정을 알 리가 없었다. 고구려로서는 당의 도움 없이는 백제를 견제하는 것조차 힘에 부치는 신라보다는 독자적으로 신라를 견제하는 것이 가능한 백제를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게다가 신라와의 동맹에 있어 가장 큰 위험은 바로 백제 영토의 분할이었다. 신라가 백제를 반원형으로 감싸는 형국인 마당에 만약 신라를 도와 백제가 멸망한다면 백제의 영토는 고스란히 신라가 독점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 초강대국 당나라조차도 바다 건너의 백제 땅을 관리하기 어려워 나당전쟁 때 신라에게 빼앗겼는데 하물며 당나라와 총력전을 펼치느라 주력군이 거의 요동전선에 나가있던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백제 멸망 후 신라가 백제 영토를 독식할 것이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리고 신라가 자치한 한강 유역은 고구려가 굉장히 원하는 것이기도 하였기에 옛날부터 있어왔던 고구려와 백제 사이의 지독한 원한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백제가 신라보다 이해관계가 맞는 파트너였던 점이 당연하다. [138] 게다가 영토분할이 신라에게도 힘든 이유가 한강유역 및 적어도 당항성을 기점으로 한 이북을 고구려에게 준다고 해도 신라의 안전보장이 어려웠다. 장수왕- 문자명왕- 안장왕 때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의 도성 하루거리까지 쳐들어와서 군사활동을 매우 대규모로 해왔던 국가라는 걸 신라가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수전쟁 이전에도 영양왕이 물밀듯이 쳐들어와서 영역을 확보해갔던 전례까지 돌이켜보면 한강 남부 영역을 잘못 분할했다가는 순식간에 소백산맥라인까지 밀려버릴 수 있다는 공포감이 작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신라의 입장이었다. [139] 오히려 이렇게 지배층이 분열되었음에도 중반까지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해내고 있고 나당연합군이 고생하던 것이야말로 지리와 기술력 등을 통해 극대화한 고구려의 상대국력이 상상 이상이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3차 여당전쟁에서 당나라는 요동방면으로만 50만 대군이라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인 물량을 동원했고, 연남생의 항복으로 국내성 부근까지 당나라에게 넘어간 상태로 전쟁이 시작되었지만 신성 공략에만 무려 7개월 이상의 시간이 소모되었다. [140] 드라마 연개소문이나, 영화 평양성에서는 연개소문이 자식들의 후계구도를 확실히 잡아놓는 것으로 묘사되나, 이는 대단한 역사왜곡이다. 고구려 멸망의 시작은 군권과 정권을 모두 독점하고 있던 연개소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있다고 할 정도로 연개소문의 죽음은 고구려 멸망의 큰 원인이다. [141] 백제가 弓궁 箭전 矛모 刀도의 4가지 무기를 사용할 때 고구려는 활, 창, 폴암, 검 등의 종류에서만 최소 8가지(弩노 弓궁 箭전 戟극 削삭 矛모 鋋연 刀도 劍검 貊弓맥궁 貊劍맥검)를 운용했다. <수서>에는 고구려군의 무기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兵器與中國略同(병기가 중국의 그것과 거의 같았다.)' 또한 고구려는 야전과 공성전 양 쪽에서 노와 활을 애용했다. 아사나사이(阿史那社尒)도 고구려군의 流矢(유시)에 자주 당했다고 <구당서>에 나오며 염비(閻毗)도 요동성 전투에서 고구려 요동성 수비군이 弓弩(궁노)를 亂發(난발)하자 타고있던 말이 流矢에 맞았다고 <수서>에 나온다. 활도 고구려 초기에는 단궁류를 많이 쓰다가 6세기를 즈음에 이르러서는 장궁류를 많이 썼으며 이를 통해 기병중심에서 보병중심으로 전환했다고 보는 연구가 나오고 있다 [142] 다만 당태종, 이세적, 장손무기, 아사나사이, 이도종, 이세적, 설인귀, 소정방, 학처준, 정명진, 글필하력같은 당의 1급 장군들에 비하면 고연수, 고혜진, 뇌음신, 생해, 연남생, 연남건 같은 고구려의 장군진들은 모자라지는 않으나 이들을 이기기에는 부족한 감이 크며 실제로도 1차 전쟁의 요동성 전투에서 드러나듯이 고구려는 다른 당의 장군들과의 싸움에서 이기다가도 위에 언급한 당의 1급 장수들이 나타나면 패하는 루틴을 반복했다. 물론 지리멸렬하지는 않고 그 당태종까지 위기에 몰아넣을 정도로 저력을 발휘하긴 했으나 전투의 결말은 패배로 끝났다. 1차 전쟁 당시의 주필산 전투나 2차 전쟁 당시 안시성 근방의 전투처럼 고구려군은 이 1급 장군들이 이끄는 군대에게 야전을 걸어서 분명 승리를 목전에 두거나 유리한 고지를 점했으나 꼭 한 수 차이로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패하였다. [143] 참고로 대문예는 당시 국경지대의 수비군 사령관이었다. [144] 신라 주력군이 백제 전선에 몰려있던 660년에 고구려와의 접경지역인 술천성, 북한산성, 칠중성 등에는 고구려군의 빈집털이를 막을 최소한의 병력과 김춘추가 직접 뽑은 필부, 동타천 같은 인재를 배치해 두었지만 방어군이 소수다보니 상당히 고전한다. 이 중 북한산성은 2,800명이 지켰다고 하는데 남녀노소 다 끌어모아 싸웠다고 한다. [145] 1차 주필산 전투 및 3차 고당전쟁기 금산전투 [출처:] 새로쓰는 연개소문전 p128, 김용만 저 [147] 물론 완전히 붕괴된건 아니지만 이것을 시작으로 점차 무너지게 된다. 당장 고구려를 멸망시킨지 30년도 안되어 만주에서 다시 발해가 탄생하고 중원을 공격한다. [148] 고구려군 압록강 오골성, 평양성 일대에서 수나라군과 맞섰고, 1차 고구려-당 전쟁 당시에도 장량이 이끄는 당나라 수군은 고전하여 전후에 문책당했으며, 2차, 3차 여당전쟁 때 역시 압록강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하여 선전하기도 한다. 연남생은 깨졌지만 그래도 글필하력이 철수하며 어찌어찌 전략적인 목표는 달성되었고, 3차 전쟁 당시에 남건은 그래도 한반도에 돌입한 풍사본, 이세적을 압록강에서 막으며 해를 넘겨 버텼다. [149] 당나라는 수륙 양면으로 10만 단위의 대전을 벌일 능력이 되었지만 고구려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게다가 고구려가 7세기 초반, 수당의 전면전과 지속적인 위협으로 북방에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던 사이에도 당나라는 북방민족들을 하나둘씩 제압해나갔으니(...). [150] 기록상으로는 2차 고구려-당 전쟁에서 김유신이 남쪽 전선을 뚫고 평양성으로 진격한 후 후퇴할 때 고구려 측에서 병력들을 소집해 추격하여 과천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이때 김유신은 1만의 쇠뇌병을 활용해 기선제압을 했고 이후 총 공세를 퍼부어 그 결과 고구려군 1만 명의 목을 베었고 소형 아달혜(阿達兮)를 비롯한 5천여 명의 포로를 사로 잡았으며 1만이 넘는 병장기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과장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이때 신라가 전공으로 내세운 것을 보면 사로잡은 고구려군 지휘관이 겨우 소형(小兄)이라는 것이 그 증거인데 당시 소형은 고구려 관등 중 10위에 불과한 벼슬로 100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당주(幢主)에 해당되기 때문.(출처-김용만 저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바다출판사 版 (2003년) [151] 대략 300~400만 정도로 추정된다. [152] 송화강을 경계로 서쪽은 정주민족인 고구려인이 더 많았던 걸로 추정되고, 그 동쪽은 말갈 7부를 비롯한 말갈계가 더 많았다고 추정된다. 단, 최소한 속말과 백산말갈과 같이 송화강 바로 동쪽에 붙어 있었던 족속은 이미 고구려인에 동화되어 있었던 걸로 추정된다. [153] 오늘날과 같은 간척지가 생기기 전인 점과 모내기가 도입되기 전인 것도 감안해야 한다. [154]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에도 연개소문과 관련이 있는 전승이 있다. # 전승이란 게 그냥 생기는 건 아니니만큼 연개소문이 이 일대를 중심으로 친정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고중세의 국경선은 촘촘하게 막아야 할 요충지가 아니라면 거점을 중심으로 이어진 느슨한 형태로 형성된 경우가 많았는데, 삼국간의 접경지대도 이런 식으로 딱 떨어지지 않고 복잡하게 얽혀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55] 조선시대 경기도에 비해 함경도 크기를 대비해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러나 통상적으로는 후삼국시대의 동향으로 보았을 때 제대로 된 통제하에 있는 인구가 비교적 적어 주로 자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러했던 것으로 본다. 김헌창의 난 때도 북 3주는 다소 밍숭맹숭한 움직임을 보여줬는데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지방관들이 현지 호족들의 병사를 동원하는 데에 꽤 거북함이 있었던 걸로 추정된다. 반면 통제가 풀리자마자 기훤, 양길 등 유력한 도적세력이 들고일어났고, 특히 궁예가 이들을 제압하고 태봉을 건국하는 순간 압도적인 역량을 보여주는데, 전체적으로는 당연히 남부지방의 인구를 능가하진 못했겠지만 정말로 희박하기만 했다면 이런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주긴 어려웠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당장 옛 고구려부터가 그런 국력을 발휘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156] 다만 백제가 한성백제기였을 때는 백제가 전성기를 달리며 한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을 때의 중심지였고, 현 서울 강남 일대부터 경기 성남 일대까지는 현대까지도 파도 파도 유물이 계속 나올 정도의 대도시가 조성되어 있었다. 장수왕에게 한성백제가 멸망당한 뒤에는 폭삭 쇠락하긴 하지만 그럭저럭 여력은 유지했던 걸로 보이고, 신라가 접수한 뒤에도 여전히 그 일대를 한(산)주의 중심지로 삼는다. [157] 참고로 왕건의 세력이 규합된 송악군은 한강-임진강 범람원이 아닌 예성강을 거슬러올라간 곳에 있다. [158] 역으로 말하면 고구려가 전성기에도 남부세력들을 다 제압하지 못한 건 그만큼 대륙의 세력이 유목민족이든 중국이든 한반도 남부의 국가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했기에 이쪽에 대처하는 게 주력이 되어야 했고, 또 한반도의 산지가 부족한 병력을 보충해줄 수 있을 만큼 정말 더럽게 험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나마 함경도가 들어가는 관북지방을 포함한 동북쪽 방면은 산세가 험해도 인구밀도라도 희박해서 초창기에 금방 점령했지만, 남부 지방은 나라가 여럿 들어섰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기후 덕에 인구가 비교적 많았다. [159] 이건 백제의 시대 중에서도 후기백제에 해당되는 경우인데, 수도와 기반을 깡그리 잃고 지배층이 남부로 피신하면서 왕실의 권위가 추락하고 현지 호족들이 새로이 중앙귀족으로 대거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성팔족이 완성(?)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물론 초중기 고구려와 대등하게 투닥거릴 수 있었던 한성백제 때에도 전성기 고구려만큼의 병력은 뽑아낸 적이 없고, 그러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여러 재지세력들을 거의 완벽히 제압하고 인구 중 전투원의 비중이 높은 유목민족이나 수렵민족도 휘하에 부렸던 전성기의 고구려와 달리 한성백제는 한반도 남부 끝단의 침미다례까지도 정벌에는 성공하긴 했으나 남부지방은 자치도 허용하고 제후들을 파견해 통제하는 등 막 자유자재로 동원하기에는 완전히는 장악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줬다(사실 이게 됐다면 개로왕이 장수왕에게 그렇게 허무하게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160] 누방도행군이 전쟁을 치르는데, 큰 봉황새가 이지러지기 시작하여 하늘을 날던 날개가 떨어져 드리우고, 큰 고기가 길을 잃고 헤메어 큰 파도에 비늘이 떨어지는 등의 사건이 벌어져서 58세의 나이인 661년 10월 16일에 양사선이 군대에서 죽어서 묻혔다. [161] 勣頓軍於鴨綠柵, 何力引蕃漢兵五十萬, 先臨平壤.《구당서》 <계필하력전> / 勣勒兵未進, 何力率兵五十萬先趨平壤. 《신당서》 <계필하력전> / 何力引蕃漢兵五十萬人, 逼平壤.《책부원구》 <정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