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별 명칭 | |
한국어 | 모내기, 이앙법(移秧法) |
영어 | rice planting |
일본어 | 田植え(たうえ) |
중국어 | 插秧(chāyā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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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벼를 일단 다른 곳에서 키운 뒤 봄이 되면 벼를 논에 옮겨 심는 것. 한국사 책 등지에서는 이앙법( 移 秧 法)이라고도 한다. 이와 반대로 그냥 볍씨 자체부터 논에서 키우는 방법은 ‘ 직파법’이라고 한다. 모내기를 하려면 당연히 일손을 잔뜩 모아 지루한 노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모내기 철에는 아궁 앞의 부지깽이도 뛴다.” 등의 속담들이 있다.2. 역사
한반도에서 벼를 키우기 시작한 시기는 신석기 시대부터 시작했다는 것이 유력한 설이다. 경기도 김포시에서는 기원전 2100년경 자포니카[1] 볍씨가 발견되었고, 고양시에서는 기원전 2300년경 자포니카 볍씨가 발견되었으며, 충청북도 청주시에서는 탄소연대측정 결과 기원전 1만 3000년 ~ 1만 7000년의 고대 볍씨가 발견되었다. 벼의 원산지는 히말라야 부근이며, 아시아 벼 원산지는 중국 양쯔강 유역이므로 인간이 의도적으로 가져와 재배하지 않는다면 자생적으로 한반도에서 볍씨가 발견될 수 없다. 기록상으로는 백제 다루왕 6년으로 서기 1세기가 최초의 기록이다.이앙법은 고려 말기 중국에서부터 한국과 일본에 보급되었지만, 한반도는 조선 중기 이후 정착하였다. 전국으로 확산된 것은 조선 후기부터이다. 기록상으로는 고려사의 공민왕 시대에 모내기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모내기와 이앙법이 널리 퍼진 시기로는 조선 후기( 광해군 이후)로 보아 국사 교과서와 교재 등에 기술되어 있다.
이앙법은 모를 키우는 동안 논에 물을 대지 않고 다른 작물을 키울 수 있어(주로 겨울에 보리) 이모작이 가능하기 때문에 농가의 수익이 증대한다. 물로서 산소공급을 막아 잡초가 싹을 틔우지 못해 잡초 제거가 매우 쉬우며, 병충해가 적고, 벼를 고르게 심을 수 있어 생산량도 직파법보다 우수하다. 이러한 장점으로, 조선 후기 상업 발달의 원인 중 하나로 이앙법의 전국 보급이 주요 요인 중 하나라고 본다.
장점이 많은 이앙법이 고려말과 조선 중기까지 한반도에 보급되지 않았던 이유로는 기후 문제가 가장 크다. 한반도는 봄과 겨울에 강수량이 부족하며, 대부분의 강수량은 여름에 집중된다(50~60%). 그런데 모내기의 특성상 모내기를 하는 시점에 가뭄 등으로 물이 부족해서 실패할 경우 벼가 완전히 말라죽기 때문에 수확량이 말 그대로 0이 된다. 이렇게 되면 조선 같이 무역도 상업도 미진한 사회에서는 재난급의 기근이 발생한다. 물론 저수지 등의 치수 사업으로 일정부분 물 부족을 해결할 수 있지만 당대의 기술과 자본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반면에 직파법의 경우 비가 좀 덜 오더라도 뿌리가 땅에 착근만 되면 어느 정도 수확을 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조선 초기에 모내기는 국가에서 금지하는 농사법이었다.
그러나 17세기 중엽 이후가 되면 국가에서도 모내기를 적극적으로 금지할 수가 없었다. 이 시기에는 면화· 연초 등 노동력이 많이 드는 밭작물들이 집중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함으로써 논농사에서 노동력을 줄일 필요성이 커졌으며[2], 각 지방마다 수리시설이 증가하면서 농업 여건도 개선되어 갔기 때문이다. 기록상으로는 조선 영조/ 정조 대에 "모내기를 허가했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러한 이앙법도 위도가 낮은 삼남지방(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서 주로 행해졌고(조선 전체 경작지의 30%), 이보다 높은 지역에서는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참고로 중국은 강남(중국)에 한정해서 이루어졌으며, 일본은 위도가 높은 홋카이도 지방을 제외한 남부 전역에서 이앙법이 가능했다.
모내기는 직파법에 비해 잡초를 관리하는 노동력이 적게 들지만, 모내기 시점에는 집중적인 노동력이 요구된다. 이러한 이유로 고려~조선 초기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한동안 소멸했던 향도나 두레 같은 마을 공동체가 조선 후기 다시 부활하였다.
이후 이앙법이 집중적으로 한반도에 보급된 시기는 1920년대부터이다. 당시 일본은 많은 농민들의 이촌향도로 식량난에 시달린 통에 조선(남부지방)을 식량공급지로 만들기 위해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한다. 이때 관개배수시설의 신설 및 보수와 관리를 위해 수리조합이 대거 들어섰으며, 대규모 토목공사로 간척지를 개간하면서 논이 급격히 늘어난다. 이 시기 일본의 벼 품종도 적극 도입되었다. 품종에 대해서는 항목 참조.
해방 이후에도 수확과 파종, 이앙 등을 전부 수작업으로 하여 노동력 소모가 많았으나, 1980년대와 90년대부터는 모를 심을 때는 이앙기, 수확을 할 때는 콤바인 등을 도입하여 많이 기계화하였다. 논과 수로를 정비하기 위해 굴삭기와 트랙터가 사용된 것은 덤.
3. 모내기(이앙법)의 장단점
직파법에서는 논에 볍씨를 직접 파종해 벼를 기르는 것에 비해, 이앙법에서는 모판이라는 별도의 장소에 볍씨를 촘촘히 심어 어느 정도 자라면 그것을 논으로 옮겨 기른다. 이 모판에서 어느 정도 키운 벼가 “모”, 모를 논으로 옮겨 심는 것을 이앙(모내기)이라 부르는 것이다.모판에서는 수많은 볍씨를 촘촘히 심어 키우므로 그 상태를 관찰하기 용이하며, 아직 연약한 어린 벼를 모판에서 보호하며 기를 수 있어 유리하다. 상태가 나쁜 모는 모판 단계에서 도태시켜(제거해) 버리고 건강한 모만 논에 옮겨 심을 수 있어 수확량도 증가한다.
또한 직접 파종한 벼와 달리 모내기한 벼는 일일이 수작업으로 모를 배치하므로 벼와 벼 사이에 임의의 공간을 둘 수 있다. 이는 잡초 발견과 제거(김매기)에 큰 도움이 된다. 사실 이것이 모내기의 최대 장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잡초 제거는 벼농사에서 가장 고된 작업이며, 잡초 제거를 제대로 하느냐 않느냐의 여부는 수확량과 직결된다.
벼가 모판에서 자라는 중에 논에 보리같은 다른 작물을 기를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이앙법의 단점은 물론 모내기에 소요되는 막대한 노동력, 그리고 이앙법에 필요한 수자원(농업용수)이 직파법에 비해 많다는 점이다. 비가 오지 않아 농업용수가 부족하거나 일손이 많이 부족할 경우 이앙법보다 직파법이 권장될 정도다. 한국에서도 최근 농촌 고령화로 인해 일손이 딸리자 농협에서 직파법을 보급 권장하고 있을 정도. 관련 기사.
덕분에 이앙법을 하는 지역은 저수지를 무지막지하게 많이 만들어서 해결했는데, 경상북도 경산시와 영천군 같은 곳은 1,000여개에 육박한다.
4. 모내기와 한중일 경제사
경제사에서 모내기는 한중일의 경제사(史)에 많은 의의를 준다.모내기는 중국에서 12세기 남송시절에 보편화 되었고, 일본에서는 14세기 무로마치 막부 시대부터 일반적으로 보급된다. 그리고 이앙법을 실시한 뒤로 중국과 일본은 생산력 향상으로 경제가 성장하고 인구가 급증하게 된다. 이앙법 실시 후 중국은 인구가 1억을 넘었고, 일본도 17세기가 되자 2천만명을 넘어선다.
하지만 조선의 경우 초기에 농지의 용수 공급이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이앙법을 금지했다. 가뭄이 든다거나 해서 모를 옮겨심어야 할 시점에 물을 댈 수 없으면 한 해 농사가 폭삭 망하기 때문.[3] 때문에 조선은 개국 초부터 상류층의 수탈을 막고 안정적으로 민생을 다스리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16세기경 인구 1천만 명 선에서 인구 증가 정체가 발생하게 된다. 비슷한 시기 일본의 농민들에 비해 조선의 농민들이 지는 부담이 훨씬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정체가 발생한 원인의 하나로 조선이 직파법에 의존했기 때문에 농업 생산성이 낮았다는 점을 지목할 수 있다.
전통시대에는 인구가 곧 국력이던 시절이라, 직파법의 낮은 생산력은 국력 약화를 초래했고 이는 외세 침입의 단초가 되었다는 경제사의 시각도 있다.
18세기가 되자 조선 농민은 물을 댈 수 있다면 누구나 이앙법을 하려 했고, 때문에 농촌사회에 점점 빈부격차가 심화되어 넓은 땅을 경작하는 광작과 그에 따른 부농이 출현하게 된다. 그러자 점차 농업은 소비(생존)를 위한 생산이 아닌 이윤추구를 위한 영농의 형태로 진화한다. 이 시기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여, 18세기 중반 조선 전체의 인구는 1,800만명으로 세계 7~8위의 인구 대국이 되었으며, 일본 인구의 70%까지 육박했다.[4] 남북국시대 이후부터 현재까지, 한반도 역사상 일본과 인구 격차가 이토록 적게 났던 시기는 18세기 말고는 없었다.[5]
한반도의 경지면적은 6.6만km2, 일본 열도의 경지면적은 6만km2으로 한반도의 경작면적은 일본 열도보다 적지 않아, 이전에는 고려-조선과 일본의 인구가 비슷하였으나 16~17세기가 넘어가며 일본에서 이앙법이 정착되어 2모작이 가능해진 반면 조선에서는 임진왜란으로 많은 사망자와 이재민은 물론 많은 농지가 황폐화되어 일본이 조선보다 2배 많은 인구를 가지게 된다. 물론 이때 조선이 모내기를 허용하더라도 조선은 일본보다 위도가 높아 삼남지방에 이앙법이 제한되기 때문에 일본의 인구를 따라잡을 수 없었을 거라고 추정된다.
물론 조선 초기부터 직파만 있던 것은 아니다. 이앙법의 힘을 알기에 대략 10~20%는 모내기 농사를 지었다. 후기로 갈수록 그 수는 늘어가 30% 이상의 성장세를 자랑했지만 지리적 한계로 곡창지대(전라, 충청, 경상)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여전히 국가는 공식적으로 이앙법을 불허하였다.[6] 농민들도 이앙법의 단점을 모르는 것은 아니라서, 스스로 저수지를 만들어 농업용수를 확보하는 노력을 보였고, 결국 국가에서도 농업용수에 필요한 보를 만들고 관리하는 방법을 설명한 책을 출간하기에 이른다.
전통 농경사회에서 1모작에서 2모작으로의 변경은 실제 경작 영토가 늘어나는 개념과 비슷하다. 생산량이 늘어나기 때문에(빠르게), 인구가 증가한다(천천히). 인구는 생산량에 비해 늘어나는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생산량 증가와 인구 증가의 갭에서 잉여생산물이 존재하게 되며, 잉여생산물의 존재는 상업 발달의 필수 조건이다. 한일 양국 모두 이앙법을 받아들인 뒤에야 상업이 진흥하게 된다.
일반적인 한국사회에서, 사농공상을 일컬으며 조선은 상업을 천시했고, 일본은 상업을 중시하여 양국의 국력이 역전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지나치게 사상만능주의로 결과만을 본 것이다. 인류사의 전통 중세-봉건사회에서 '중상주의'로서 상업을 발달시켰던 국가나 민족은 드물다. 상업은 중상주의 같은 사상이 아니라 잉여생산(식량)이 필수조건이며 식량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생존(식량확보)에 관련된 것 이외의 산업이 성장해 부르주아나 정인(町人)과 같은 상업세력이 등장하였다. 기존의 중세-봉건 정치권력[7]이 상업세력에 추월되었을 때 '중상주의' 사상이 실현되었던 것이다.
일본의 이러한 상업 발달은 일본의 기후 등으로 인해 보다 빠르게 도입된 이앙법 등의 경작법의 변화를 원인으로 보고 있으며, 이는 18세기 후반에 이앙법이 널리 퍼진 조선 사회에서도 상업의 발달이 있었음을 통해 검증된다.
5. 기타
보통 쌀농사는 동아시아권에서 많이 하기 때문에 모내기 풍경은 아시아에서만 볼 수 있다는 인식이 있다. 하지만 의외로 유럽인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와 스페인의 갈리시아에서도 쌀농사를 짓기 때문에 여름철만 되면 모내기 풍경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 이탈리아 쌀농사를 소재로 한 이탈리아 영화인 Riso Amaro(영어:Bitter Rice)에서 이 모내기 장면이 나온다.농기계가 도입되었음에도 일손이 많이 가는데다 이농 현상으로 농촌 지역 인구가 급감하였고, 쌀도 남는 판국에 그루갈이[8]로 수익을 창출하기 어려우므로 농촌에서는 직파법 회귀 현상이 보이기도 하며, 이를 위해 드론을 이용한 농작도 구상 중이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오픈 베타 첫날, 마을 앞 마당에서 사냥 후 아이템을 루팅하려고 할 때, 아이템 데이터를 불러와야 하는데 이때 랙이 발생해서, 아이템을 줍는 자세로 멈춘 상태가 펼쳐지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이 모습이 모내기하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서 모내기랙이라 불렸다.
몬스터 헌터 시리즈의 브라키디오스는 바닥을 마구 치며 돌진하여 바닥에 폭발하는 성분을 묻히는 기술을 쓰는데 모내기하는 것과 자세가 흡사하여 모내기 복서라는 별명이 붙었다.
일부 MMORPG에서 바닥에 떨어진 템을 루팅할때 허리를 굽히고 줍는 모션을 취하는데, 이를 두고 모내기라 표현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게임이 리니지.
리듬 게임에서는 빅장이나 뭉개기를 뜻하는 말로 모내기 또는 밭갈기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벼농사를 시뮬레이터 수준으로 구현한 천수의 사쿠나히메에서도 현실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장 일손이 많이 드는 작업이다.
[1]
현재 우리가 주로 먹고 있는
쌀 품종.
[2]
이앙법이 직파법보다 모내기 시기에는 노동력이 많이 들어가나 모내기를 한 이후에 잡초 관리 등으로 지속적으로 투입되는 노동력은 적다. 그리고 단위 면적당 쌀 수확량은 비교가 안 되니 증가한 인구와 함께 발생한 잉여 노동력이 고급 작물 재배에 투입되는 일이 발생한다.
[3]
조선 초기에는 후기보다 연 강수량이 부족했다고 한다.
[4]
1721~50년 일본의 인구는 약 3,100만 명이었단 자료도 있는데 이에 따르면 60% 정도가 된다.
[5]
다만 이 당시
일본은
에도 막부 성립 이후
마비키로 인구를 인위적으로 정체시켜서 일정하게 유지하는 상황이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6]
이 이앙법이 고작 10% 늘어난 것만으로도 인구가 천만 가까이 늘었음을 보았을 때 그 힘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되는 부분이다.
[7]
유럽에서는 주로
귀족으로 대변되는.
[8]
전근대엔 대부분 그루갈이로 대부분 보리쌀을 생산했지만 현대엔
마늘,
양파,
밀, 맥주보리,
홉 등 작물이 다양해지고 있는 추세이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