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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라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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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라 제국
পাল সাম্রাজ্য
Pala Emp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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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0년 ~ 1162년
<colbgcolor=#088A68><colcolor=#000000> 수도 가우다, 파탈리푸트라, 그 외 임시수도[1]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주요 황제 다르마팔라
데바팔라
마히팔라 1세
라마팔라
언어 산스크리트어, 프라크리트어
종교 대승불교[2]
밀교, 힌두교, 자이나교
성립 이전 바르다나 왕조
가우다 왕조
후굽타 왕조
멸망 이후 세나 왕조

1. 개요2. 역대 황제3. 역사
3.1. 제국의 성립3.2. 제국의 발전3.3. 1차 쇠퇴3.4. 부흥기3.5. 2차 쇠퇴3.6. 마지막 불꽃3.7. 제국의 황혼3.8. 멸망 이후
4. 사회
4.1. 정치4.2. 군사4.3. 종교4.4. 예술

[clearfix]

1. 개요

벵골 비하르 지역을 중심으로 존속했던 인도의 둘뿐인 불교 왕조. 군주는 황제 칭호를 사용했다.[3] 인도 불교 최후의 불꽃으로, 팔라 왕조 시대에 마지막으로 인도에서 불교가 번성했고 왕조의 몰락 이후 인도에서 불교는 빠르게 몰락한다. 팔라 왕조 시대의 불교 유산은 티베트 불교로 계승되었다. 왕조의 이름인 '팔라'(빨라, Pala)는 모든 역대 국왕들의 이름이 '팔라'로 끝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는 산스크리트어로 '수호자'라는 뜻이다.

2. 역대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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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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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제5대 제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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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대 제8대 제9대
비그라하팔라 1세 나라야나팔라 라즈야팔라
제10대 제11대 제12대
고팔라 3세 비그라하팔라 2세 마히팔라 1세
제13대 제14대 제15대
나야팔라 비그라하팔라 3세 마히팔라 2세
제16대 제17대 제18대
슈라팔라 2세 라마팔라 쿠마라팔라
제19대 제20대 지위 불명확
고팔라 4세 마다나팔라 고빈다팔라, 팔라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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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역사

파일:벵골 불교.jpg
제 2대 황제 다르마팔라에 의해 건설된 비하라[4]인 소마푸라 마하비하라(파하르푸르).[5]

3.1. 제국의 성립

팔라 왕조 성립 이전, 북인도를 확고히 장기 지배한 국가는 굽타 왕조였다. 하지만 굽타 왕조는 6세기 후반에 지배력 약화로 공중분해되는 형태로 멸망하고 말았다. 굽타 왕조 몰락 이후 약 200여 년간, 북인도는 소왕국들이 난립하여 지역 곳곳의 패권을 두고 다투는 형국으로 전락했다. 이 시기에 등장했던 대표적인 왕조로 바르다나 왕조가 있다. 바르다나 왕조가 하르샤 왕의 치세 동안 북인도의 패권을 일시적으로 잡았으나 하르샤 왕 사망 이후 굽타 왕조가 그랬듯 공중분해되었다. 이런 식으로 카리스마 있는 군주가 죽고 평범한 군주가 즉위하면 득달같이 봉신들이 군주를 쳐서 왕국이 분열하고 다시 내전이 벌어졌던 것이다. 팔라 왕조가 등장한 벵골 지역도 팔라 왕조 직전에 가우다 왕조가 들어서 샤샨카라는 귀족이 왕으로 즉위했으나 그의 사망 이후 왕국이 공중분해되었다. 팔라 왕조 중후기에 쓰여진 역사 서사시 라마차리탐은 이 시기를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고, 더 큰 물고기가 그 큰 물고기를 다시 잡아먹는 상황으로 비유했다.

750년에서 760년 사이에, 벵골 지역의 소왕국들은 벵골의 지배자로 고팔라라는 이를 추대하였다. 고팔라의 출신은 불분명하다. 크샤트리아 카스트라는 설이 지배적이나 서기 계층이나 브라만 카스트라는 설도 있다. 팔라 왕조 스스로는 자신들의 기원을 전설적 크샤트리아 가문 수리야밤샤라 주장하였다.[6] 라마차리탐에 의하면 벵골의 귀족들은 여러 번 왕을 추대하여 혼란을 멈추려 했으나 왕이 즉위한 다음 날 밤에 매번 나가의 여왕이 쳐들어와 왕을 죽여서 혼란이 멈추지 않았는데, 고팔라 왕이 즉위한 후에 마침내 나가의 여왕과 싸워 이겨서 혼란을 멈췄다고 한다. 이는 고팔라가 최초로 귀족들의 야망을 누르고 왕권을 확립했음을 비유하는 것이다. 고팔라 황제는 770년 즈음에 사망했으며, 20여 년에 이르는 그의 통치는 기록이 없으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의 후계자 다르마팔라가 즉위했을 때 이미 팔라 왕조는 벵골 대부분을 평정했고 국력도 꽤 신장된 상태였다는 것이다.

3.2. 제국의 발전

파일:Indian_Kanauj_triangle_map_svg.png
2대 다르마팔라 황제부터 팔라 왕조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다르마팔라 황제는 고팔라 황제가 물려준 국력으로 본격적인 패권 쟁탈전에 나섰다. 당시 북인도 서쪽에서는 프라티하라 왕조가 출범했고, 중부의 데칸 고원에서는 옛 찰루키야 왕조를 무너뜨리고 라슈트라쿠타 왕조가 들어섰다. 이 세 나라의 가운데에 끼인 국가가 아유다 왕조가 다스리는 카나우지 왕국이었다. 784년, 카나우지 국왕 바즈라유다가 죽고 장남 인드라유다가 즉위했다. 그러자 프라티하라 왕조의 바차라자 황제가 진격해 인드라유다 왕을 격파하고 봉신으로 삼았다. 다르마팔라 황제는 이에 반발하여 카나우지로 진격했다. 그는 손쉽게 인드라유다 왕을 무찌르고 팔라 왕조로 망명했던 인드라유다 왕의 동생 차크라유다를 왕위에 앉혀 봉신으로 삼았다. 이때 팔라 왕조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카슈미르 일대에서 네팔 일대까지의 모든 소왕국이 팔라 왕국에 복종의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이를 묵과할 수 없었던 바차라자는 카나우지 인근의 프라야그로 진격해 다르마팔라와 맞붙었고, 이 전투에서 다르마팔라는 황실 양산을 두 개나 빼앗길 만큼 크게 패하여 회군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데칸의 라슈트라쿠타 왕조 황제 두루바가 북상해 돌아가던 프라티하라 군대를 말와 지역에서 기습해 승리하였다. 다르마팔라는 그 틈을 노려 다시 카나우지로 군대를 보냈으나 프라티하라 군대를 이기고 온 라슈트라쿠타 군대에 패하였고, 라슈트라쿠타 왕조는 순식간에 북인도 주요 지역 전역을 점령했다. 하지만 793년에 라슈트라쿠타 황제 두루바가 죽어 왕위 계승 내전이 터지면서, 라슈트라쿠타 왕조 군대는 본토로 회군했다. 다르마팔라는 텅 빈 카나우지로 진격하여 일대를 점령했다. 프라티하라 왕조 역시 왕위 계승 내전이 터져버리는 바람에 팔라 왕조는 북인도 최강국이 되었고, 다르마팔라는 스스로를 북인도의 황제라 선언하였다. 이 시기에 동판 기록을 통해 오디샤 일대와 네팔을 장악한 것이 확인된다. 하지만 795년, 프라티하라 왕조의 계승 분쟁을 끝낸 나가부타 2세 황제가 동진하였고, 다르마팔라 황제는 또 다시 패해 카나우지를 넘겨주고 말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몇 년 전과 정확히 똑같이, 라슈트라쿠타 왕조의 계승 분쟁을 끝낸 고빈다 3세 황제가 북상했고 프라티하라와 팔라를 모두 무찔렀다. 이 때 프라티하라 왕조와 팔라 왕조는 명목상으로나마 라슈트라쿠타 왕조에 복종 선언까지 해야 했다. 하지만 라슈트라쿠타 왕조 군대는 남인도에서의 반란으로 퇴각하였다. 이 라슈트라쿠타 왕조의 공격으로 인해 프라티하라 왕조는 피해를 크게 입었으나 팔라 왕조는 피해가 미미했으므로 802년에 다섯 번째로 카나우지를 점령하고 북인도의 패권을 잡았으며, 이를 다르마팔라 황제가 죽을 때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런 긴 전쟁 속에서도 다르마팔라 황제는 내치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불교에 많은 후원을 하여, 세계 최초의 대학교인 날란다 대학에 많은 봉토를 주어 부활시키고 소마푸라, 비크라마실라 등의 대수도원을 지었다. 그는 810년대 초중반까지 재위하였다.

다르마팔라 황제 사후 그의 장남 데바팔라가 3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데바팔라 황제가 팔라 왕조의 최전성기였다고 여러 동판 기록이 증언한다. 데바팔라 황제는 즉위 직후 아삼 오디샤 일대를 정벌하여 큰 싸움 한 번 없이 이 지역들을 장악했다. 다르마팔라 황제 시기에 더욱 강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프라티하라 왕조와 라슈트라쿠타 왕조와의 무력 분쟁에서 승리했으며, 프라티하라 왕조의 일시적 복종을 받아냈다. 그리고 라자스탄을 넘어 인더스 강 유역의 후나스 소왕국들[7]까지 정벌했다. 인더스 강을 넘은 이후에는 아프가니스탄 일대까지 공격해 복종시켰다.[8] 데바팔라 황제 시기의 팔라 왕조는 명목상으로나마 북인도를 통일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인도네시아 자바섬까지 불교를 전파하기도 했다. 데바팔라 황제는 850년대까지 재위하였다.

데바팔라 황제 사후에는 그의 차남 마헨드라팔라가 즉위했다.[9] 마헨드라팔라 황제는 큰 무리수 없이 데바팔라 황제의 치세를 그대로 이어갔다. 북인도의 통제권을 잃지 않았으며 후나스와 오디샤를 재차 정벌했다. 기존의 학설은 마헨드라팔라 황제 시대에 프라티하라 왕조에게 대패해 복속당했다고 생각했는데, 하필 비슷한 시기의 프라티하라 황제의 이름도 마헨드라팔라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동판 기록이 1990년대에 대거 발견되면서 팔라 왕조의 마헨드라팔라 황제의 존재가 밝혀지며 팔라 왕조는 여전히 독립 상태였음이 밝혀졌다. 마헨드라팔라 황제는 860년대까지 재위하였다. 마헨드라팔라 황제의 후계는 아들이 아닌 그의 동생, 슈라팔라 1세였다. 슈라팔라 황제는 마헨드라팔라 황제의 동복동생으로, 마헨드라팔라 황제 시절엔 황실 외교관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슈라팔라 1세는 길게 재위하지 못 하고 사망했고, 슈라팔라 1세의 아들 고팔라 2세가 즉위했다. 하지만 고팔라 2세가 후손을 남기지 못 하면서 다르마팔라 황제의 직계가 단절되었고, 고팔라 2세 사망 후 다르마팔라 황제의 동생 바카팔라의 손자인 비그라하팔라 1세가 870년대 초반에 제위에 올랐다.

3.3. 1차 쇠퇴

비그라하팔라 1세는 제위에 오를 재목이 아니었다. 성격이 순한 데다가 불교에 관심이 많았던 비그라하팔라 1세는 오래 제위에 있지 않고 곧 아들 나라야나팔라에게 양위한 후 출가하여 승려가 되어 버렸다. 뒤를 이은 나라야나팔라 황제는 역량이 부족하였다. 그는 870년대 후반부터 910년대 후반까지 긴 기간 동안 재위했다. 하지만 라이벌 프라티하라 왕조에서 명군 미히라 보자가 제위에 오르면서 팔라 왕조의 쇠퇴가 시작되었다. 미히라 보자는 팔라 왕조를 자주 공격했고, 나라야나팔라는 거듭 패해 영토가 축소되었다. 팔라 왕조가 연패하는 것을 본 팔라 왕조의 봉신, 아삼 국왕 하르자라는 스스로를 황제로 높이고 독립을 선언했다. 실의에 빠진 나라야나팔라 황제는 910년대 후반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 라즈야팔라가 즉위했다.

라즈야팔라 황제 역시 오랜 기간 재위했다. 그는 전쟁을 멈추고 내정에 전념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치세에 많은 수리 시설과 불교 사원이 확충되었다. 하지만 서서히 황권은 흩어지고 있었다. 그의 아들 고팔라 3세 때 팔라 왕조는 서쪽에서 분델칸드의 찬델라 왕조에, 남쪽에서 체디의 후 칼라추리 왕조에, 북쪽에서 인도 서북쪽에 살던 기마 민족 캄보자족에게 공격받았고 영토는 비하르 일대와 벵골 서부로 대폭 축소되었다. 그의 후계자 비그라하팔라 2세의 대에, 벵골 지역 귀족층이 모조리 독립했고 벵골 동쪽에는 찬드라 왕조가 다스리는 하리칼라 왕국이 들어섰다. 제국은 공중분해되었고, 비하르 일대와 벵골 북쪽 일부만 남긴 채 비그라하팔라 2세는 눈을 감았다.

3.4. 부흥기

978년, 비그라하팔라 2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마히팔라 1세가 위축된 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 마히팔라 1세는 유능하고 정력적인 인물로, 오랜 시간 동안 유약한 황제들에 의해 쇠퇴했던 팔라 왕조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마히팔라 1세는 즉위 직후에 곧바로 제국 동쪽의 벵골 일대로 원정을 떠났다. 목표는 다시 벵골 전역을 제국의 손에 넣는 것이었다. 마히팔라 1세의 지도 아래 팔라 왕조는 옛 수도 가우다를 수복한 후 3년만에 벵골 전역을 다시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간만에 국력이 돌아온 만큼 마히팔라 1세는 내정에도 많이 노력하여 수리 및 종교 시설을 확충했다.

마히팔라 1세 치세에, 팔라 왕조에 호재가 찾아왔다. 1001년에, 아프가니스탄 일대를 거점으로 한 투르크족 왕국 가즈니 왕조의 술탄 가즈니의 마흐무드가 인도 원정을 시작한 것이다. 1001년에 시작된 술탄 마흐무드의 북인도 원정은 20~30년에 걸쳐 이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팔라 왕조 서쪽의 여러 힌두교 왕국들이 전멸했다. 대표적으로 팔라 왕조의 팽팽한 호적수 프라티하라 왕조가 이 시기에 술탄 마흐무드에게 짓밟혀 당시 수도 카나우지만 간신히 남긴 채 조금 더 존속하다 1036년에 멸망을 맞았다. 하지만 마흐무드의 군대는 팔라 왕조와 맞설 만큼 깊이 들어오지 않았기에, 마히팔라 1세 황제는 북인도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에 참으로 오랜만에 팔라 군대가 갠지스 강을 건넜고 바라나시까지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반대로 악재도 있었는데, 인도 최남단의 촐라 제국이 전성기에 들어선 것이다. 촐라 왕조 황제 라젠드라 1세는 종교적인 이유 갠지스 강 일대를 정복하고 싶었기에 1021년에 대군을 이끌고 팔라 왕조의 남부인 오디샤로 진입했다. 팔라 왕조의 봉신들이 나섰으나 모두 패했고 마히팔라 1세 본인이 이끄는 군대 역시 패배했다. 라젠드라 1세는 이 지역을 지배하려 하였으나 마히팔라 1세는 패배 후에도 완강한 저항을 이어갔고, 이 때문에 촐라 왕조의 영구적 점령 시도는 실패했다. 그래도 라젠드라 1세는 많은 물자를 노획했으며 갠지스 강의 물을 뜨고 팔라 왕국 내의 브라만들을 잔뜩 납치한 후 돌아갔다. 비록 촐라 왕조에게 패배하긴 했지만 그래도 마히팔라 1세의 치세에 팔라 왕조는 위세를 회복할 수 있었으며 1038년에 마히팔라 1세는 눈을 감았다.

3.5. 2차 쇠퇴

하지만 부흥기는 오래 가지 못 했다. 마히팔라 1세의 아들 나야팔라 황제 대에, 제국 서남부에 인접한 후 칼라추리 왕조가 팔라 왕조를 침공하기 시작했다. 우선 칼라추리의 강가야데바 왕이 바라나시 일대를 점령했고,[10] 그가 죽은 후 그의 아들 락슈미카르나가 비하르와 벵골의 팔라 왕조 본토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락슈미카르나는 군재가 뛰어난 왕이었기에 나야팔라 황제는 엄청나게 고전하며 긴 전쟁을 치러야 했다. 당연히 마히팔라 1세가 복구시켜 놓은 국력은 다시 소진되기 시작했다. 길고 지리한 전쟁은 팔라 왕조 출신의 유명한 고승 아티사가 나서서 두 나라를 중재하면서 멈추었다. 나야팔라 황제의 후계자 비그라하팔라 3세 대에 락슈미카르나는 휴전 조약을 깨고 재차 전쟁을 선포했다. 비그라하팔라 3세는 분투하여 락슈미카르나에게 승리를 거두었고 그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일단의 위기는 사라졌지만 주변 국가들은 전쟁 끝에 약화된 팔라 왕조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우선 남인도를 지배권을 다시 잡은 서찰루키야 왕조가 침공해 왔다. 비크라마디티야 왕자가 이끄는 찰루키야 군대는 손쉽게 팔라 군대를 격파하고 벵골 깊숙히까지 진격했다가 돌아갔다.[11] 뒤이어 팔라 왕조의 봉신이었던 오디샤의 영주 소마밤시 왕조의 마하시바굽티 왕이 반란을 일으켰다. 남쪽에서는 락슈미카르나의 장수였던 바즈라바르만이 벵골 깊숙히 들어가 벵골 남동쪽에 바르만 왕조를 세웠고 제국 동쪽에서는 촐라 왕조, 칼라추리 왕조, 서찰루키야 왕조의 공격으로 유입된 남인도 출신 힌두교도들이 모여 뱅골 북동쪽에 세나 왕조를 건립했다. 사방에서 외적들이 몰려오는 가운데 1070년대 초반에 비그라하팔라 3세는 사망하였다.

비그라하팔라 3세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는데, 나이 순으로 마히팔라, 슈라팔라, 라마팔라였다. 이 중 장남 마히팔라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마히팔라 2세로 즉위했다. 마히팔라 2세가 즉위했을 때 팔라 제국은 약화되어 왕권 역시 약해져 있었고, 황제의 두 동생은 야망이 가득한 인물들이었다. 동생들은 마히팔라 2세와 극심한 갈등을 겪었고, 위기감을 느낀 마히팔라 2세는 공포정치를 선언했다.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억압하여 통제하려 했고 두 동생을 긴급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충분한 권력 없이 공포정치를 벌인 부작용은 즉각 나타났다. 즉위 1년 만에 수도 가우다 동북쪽의 바렌드라 지방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반란의 지도자는 카이바르타 족장 디브야라는 귀족이었다. 이 반란을 반란의 거점을 따서 바렌드라 반란 또는 카이바르타 반란이라 부른다. 디브야는 인망이 있는 인물이었고, 마히팔라 2세의 인기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많은 귀족들이 디브야에게 합류했으며 평민들도 자발적으로 디브야의 군대에 들어갔다. 반란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디브야의 군대는 마히팔라 2세의 군대의 규모를 뛰어넘었다. 자신감이 생긴 디브야는 갠지스 강을 건너 수도로 진격했다. 마히팔라 2세의 군사는 적고 약했으나, 황제는 결연히 맞서 싸웠다. 그러나 기적은 없었고, 마히팔라 2세는 수도 동쪽의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디브야는 수도 가우다에 입성했다. 반란군이 수도로 들어오는 혼란 속에서 감옥에 갇혀있던 황제의 두 동생 슈라팔라와 라마팔라는 탈출하여 서쪽의 비하르로 도주했다. 반란군은 바렌드라로 돌아가 바렌드라 왕국을 세웠다. 디브야가 왕으로 즉위했다.

비하르의 중심지에서 파탈리푸트라에서 슈라팔라 왕자는 형의 뒤를 이어 슈라팔라 2세로 즉위했다. 하지만 그는 즉위 2년 만에 급사했는데, 이 시대를 상세히 기록한 역사 서사시 라마차리탐이 유독 슈라팔라 2세 황제의 사망만 대충 적고 넘어가는 모습 때문에, 동생 라마팔라에게 암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라마차리탐은 라마팔라가 후원하여 쓰여진 서사시이기 때문이다. 슈라팔라 2세의 사망 후 라마팔라가 마침내 황제로 즉위했다.

3.6. 마지막 불꽃

라마팔라 황제가 즉위했을 때, 제국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전성기 시절의 영토의 10분의 1 정도 남은 상황에서 외적들은 여전히 팔라 왕조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특히 바렌드라의 디브야는 끊임없이 무력 도발을 하면서 공격할 틈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라마팔라 황제는 제국 최후의 명군이라 할 만한 자질을 가진 인물이었다. 라마팔라 황제는 대대적으로 농업과 상업을 장려하고 수리 시설을 수리했다. 각종 공공 시설도 건립했으며 이런 사업을 벌이면서도 세금은 감면하여 백성들의 사기를 돋구었다.

그의 즉위 이후 십 수년간 이어진 경제 촉진으로 팔라 제국은 많은 군사력과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부흥하는 팔라 제국을 제일 괴롭힌 것은 바렌드라 왕국이었다. 디브야의 안정적인 통치 덕분에, 디브야는 왕조를 세습할 수 있었고 라마팔라 황제 재위 중반기에 바렌드라의 통치자로 있던 이는 디브야의 손자 비마였다. 비마 왕 역시 인망과 능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벵골 일대의 귀족들이 팔라 제국과 바렌드라 왕국 사이에 갈팡질팡하는 것을 본 라마팔라 황제는 마침내 바렌드라 공격을 결의했다.

우선 황제는 많은 돈을 풀어 귀족들을 매수하여 많은 군사를 모았다. 이렇게 모은 군사들로 바렌드라를 침공해 비마 왕을 사로잡는데 성공하였고, 바렌드라를 도우러 온 바르만 왕조의 하리바르만 왕은 뇌물로 돌려보냈다. 왕이 잡히자 바렌드라 군대는 모두 흩어졌고, 마침내 바렌드라 반란은 종료되었으며 바렌드라 왕국은 멸망했다. 50여 년만에 바렌드라 지역은 팔라 왕조에게 다시 복속되었다. 바렌드라를 점령한 라마팔라 황제는 아예 바렌드라 지역에 신도시 라마바티를 짓고 그곳으로 천도했다. 이는 제국의 동쪽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라마팔라 황제는 북동쪽의 세나 왕조를 공격해서 일시적으로 축소시켜 아삼 일대와 벵골 중부를 빼앗았고, 하리바르만 왕을 협박해 바르만 왕조를 복종시켰다. 또한 남쪽으로는 오디샤로 진격해 동 강가 왕조와 싸우며 오디샤의 지배권을 확보했다. 외교적으로는 끊임없이 분쟁을 일으키는 서찰루키야 왕조를 견제하기 위해 남인도의 촐라 제국과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카나우지 일대의 지배자 가하다발라 왕조의 왕 고빈다찬드라에게 사촌여동생을 시집보내 서쪽을 안정시켰다. 국력이 복구되자 종교와 문학에 대한 지원도 늘어나, 불경들이 편찬되었고 서사시들도 여럿 쓰였다. 참으로 오랜만에 팔라 왕조는 제국의 권위를 되찾을 수 있었다. 수많은 업적을 이룩한 라마팔라 황제는 1120년대 후반 또는 1130년대 초반에 눈을 감았다.

3.7. 제국의 황혼

라마팔라 황제에게는 아들이 넷 있었는데, 위에서부터 라즈야팔라, 비타팔라, 쿠마라팔라, 마다나팔라였다. 이 중 라즈야팔라와 비타팔라는 아버지보다 먼저 죽어 삼남 쿠마라팔라가 라마팔라 황제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쿠마라팔라 황제는 아버지의 영광을 거의 그대로 이었다. 그의 재위기에 아삼에서 지역 귀족의 반란이 있었으나 대장군 바이디아데바를 보내 진압하였다. 쿠마라팔라 황제는 오래 재위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그가 죽고 제위를 물려받은 아들 고팔라 4세는 아직 어렸기에, 쿠마라팔라 황제의 동생 마다나팔라가 섭정하였다. 고팔라 4세는 마다나팔라의 섭정 아래 훌륭히 자랐으나, 청소년기에 전장에 나갔다가 전사하고 말았다.[12] 고팔라 4세가 요절해 아들이 없었으므로 섭정인 삼촌 마다나팔라가 제위에 올랐다.

마다나팔라 황제는 카나우지의 가하다발라 왕조와 싸워 이기고 비하르 남부를 점령하였으며 동벵골의 소왕국을 복속시키는 등 여유로운 통치를 시작했다. 하지만 마치 팔라 왕조의 천명이 다 했다는 듯이, 마다나팔라 황제 재위 후반에 사방에서 동시의 외적의 침공이 시작되었다. 벵골 북쪽으로 세나 왕조가. 비하르 서쪽으로는 가하다발라 왕조가, 비하르 북쪽으로는 카르파타 왕조가, 오디샤로는 동 강가 왕조가 침공하였다. 이들은 하나하나가 팔라 왕조와 국력이 비슷하거나 더 강한 국가들이었는데, 이들이 동시에 침공해오자 팔라 왕조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결국 벵골 전역과 비하르 남부 및 북부를 상실했고, 마다나팔라 황제는 실의 속에 1162년에 눈을 감았다. 일반적으로 마다나팔라 황제의 사망을 팔라 제국의 종말로 본다.

비하르 중부만 간신히 지배하는 상황에서 마다나팔라 황제의 뒤를 이은 이는 고빈다팔라 황제였다. 고빈다팔라 황제는 마다나팔라 황제와의 관계가 알려져있지 않은 인물로, 본래 팔라 왕조의 황족이 아니라고 추정되었으나 현재는 황족으로 인정된다. 고빈다팔라 황제는 동진하여 일시적으로 벵골의 중심지 가우다를 수복하기도 하였으며, 팔라 왕조의 마지막 독립 군주로 재위하였으나 몇 년 재위하지 못 하고 사망했다. 그의 후계자 팔라팔라 왕의 대에 팔라 군주는 도저히 황제 칭호를 쓰지 못 할 만큼 약해졌으며, 결국 팔라팔라 왕의 재위기에 세나 왕조에게 봉신화되면서 팔라 제국은 완전히 종말을 맞았다.

3.8. 멸망 이후

세나 왕조 치하에서 팔라 가문은 부다가야 일대의 귀족으로 인정되었으며, 벵골 일대의 전설에 인드라두므냐팔라, 비마팔라 등의 팔라 가문 통치자의 이름이 전해져 내려온다. 이들은 힌두교도인 세나 왕조 치하에서 힌두교로 개종당했으며, 카스트는 벵골 고유의 크샤트리아 카스트의 일종인 카야스타 카스트로 배정되었다.[13] 팔라 왕조는 오랫동안 벵골을 통치하며 많은 후손을 남겼다. 벵골인들에 의하면 현재 팔라 왕조의 종손은 캘커타 인근에 거주하고 있으며, 성씨는 팔라에서 마줌데르로 변경되었는데, 이는 무굴 제국 대에 카야스타 카스트 가문들의 성씨를 일괄적으로 관리를 의미하는 마줌데르로 변경하였기 때문이다. 종손 이외에도 많은 방계 후손들이 있었으며 현재 이들은 팔라, 팔, 고팔 등의 성씨를 사용하고 있다.

4. 사회

4.1. 정치

팔라 왕조는 군주제였으며, 지역 귀족들이 국왕을 선거하는 선거군주제로 시작했으나 고팔라의 왕권 강화로 인해 그 뒤로는 기본적으로 장자 상속제를 따랐다. 팔라 왕조가 존속하던 시기의 인도 국가들은 오히려 고대 시대의 마우리아 제국 같은 국가보다 지역 장악력이 저하되어, 팔라 왕조는 유럽의 봉건제와 유사한 형식으로 지방을 통치했다. 팔라 황제는 비하르 벵골 서부를 직접 통치했으며, 그 외의 지역에는 행정 구역을 설정하고 지역 귀족을 그대로 두어 각 행정 구역의 수장으로 임명하는 형식을 취했다. 행정구역의 가장 큰 단위는 북티(주)였으며, 북티 밑에는 비샤야(군)와 만달라(구)가 있었고 그 밑으로 칸달라, 바가, 아브리티, 차투라카, 파투카 등의 마을 규모 행정구역이 있었다.

지방 행정구역을 지배하는 지역 귀족들은 완전히 봉신으로 활동하는 이들도 있었고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가진 이들도 있었으며 명목상으로만 팔라 왕조를 받들고 실제로는 독립을 유지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 지역 귀족들을 사만타라 부르며, 특히 벵골 지역의 귀족 사회를 사만타차크라라 불렀다. 사만타차크라 내의 귀족들은 서로 밀접하게 교류 혹은 적대했으며 황제는 사만타차크라의 지지를 받아야 국정을 수월히 풀어나갈 수 있었다. 제국이 약화될 수록 사만타차크라의 지지를 얻는 것은 중요해졌다. 대표적으로 바렌드라 반란에서, 사만타차크라가 디브야의 편을 들자 마히팔라 2세 황제는 순식간에 몰락했고 반대로 사만타차크라의 마음을 사는 데 성공한 라마팔라 황제는 바렌드라 왕국을 무너뜨렸다.

제국 중앙 정부는 철저히 황제 중심으로 돌아갔으며, 황제 밑에 재상이 있었다. 전후의 인도 국가들이 으레 그렇듯이 재상은 재상 가문이 따로 있어 장기간 독점하는 구조였다. 대표적으로 가르가 가문이 100년 가까이 재상직을 맡았으며 그 외에 다르바파니, 소메슈와르, 케다미스라, 바타 구라비미스라 등의 가문들이 재상직을 맡은 기록이 있다. 여러 동판 기록에 많은 중앙 정부와 지방 귀족들의 관직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팔라 왕조의 중앙 정부는 상당히 복잡하고 고도화되어 있었다. 풍요로운 갠지스 강 하류를 지배한 국가답게 재무부가 강력하여, 농업 담당 관리와 상업 담당 관리가 분리되어 있었으며 황실 직속의 농장과 목장 역시 많아 이들을 관리하는 조직이 따로 있었다. 농업 담당 관리는 토지 측량, 부동산 매매, 경작 진흥 정책 실행, 수리시설 관리 등을 하였다. 상업 담당 관리는 갠지스 강을 중심으로 통행세 징수, 관세 징수, 시장 감찰 등을 하였다. 또한 사법 조직이 따로 있어 법원이 있었고 그 밑으로 경찰 조직과 형벌 담당 조직이 있었다. 콜라라는 이름의 황제 직속 첩보 조직도 활동했다. 외교적으로 재상과 별개로 외무장관이 있었고 팔라 주변 각국에 외교사절을 고정적으로 배치하였다.

4.2. 군사

황제가 군 통수권을 행사했고, 황제 휘하의 최고 군사령관은 마하세나파티라 불렀다. 군대의 대다수는 보병으로, 보병의 상당수는 인도의 더위 때문에 갑옷을 갖추지 않은 경보병이었다. 보병 중에서 숙련도가 높은 정예 보병들은 마울라라 불렀는데, 이들은 사슬 갑옷을 갖춘 중보병이었다. 보병들은 칼과 창 뿐만 아니라 다양한 무기를 사용했다. 궁병도 많았다. 기병은 철저히 용병을 사용했는데, 벵골은 말을 키우기에 적합하지도 않았고 말 품종도 군마로 별로라 기마 문화가 약했기 때문이다. 인더스 강 유역으로부터 히말라야 산맥을 타고 아삼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중앙아시아 유목민 출신 이주민들을 고용하였다. 대표적으로 캄보자족이 팔라 왕조에 복속되어 있을 때 제국군의 기병 대다수를 담당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팔라 왕조가 자랑하는 것은 바로 상병, 코끼리 부대였다. 당대의 여러 기록은 프라티하라 왕조는 기병이, 라슈트라쿠타 왕조는 보병이, 그리고 팔라 왕조는 상병이 특출났다고 전한다. 데바팔라 황제 시대의 아랍인 상인 술레이만은 당대 팔라 왕조가 군사 규모로 프라티하라 왕조와 라슈트라쿠타 왕조를 뛰어넘었으며 군대가 15,000명 가량에 코끼리가 무려 50,000마리였다고 기록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보다 코끼리가 많기는 어렵기 때문에 후대의 아랍 역사가 이븐 할둔은 코끼리가 5,000마리를 조금 넘었다고 추정했다. 물론 전투 코끼리는 한 국가에 1,000마리만 있어도 엄청나게 많은 것이었으며 유지비가 높았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팔라 왕조의 힘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해군은 뛰어난 수준이라고까지는 하기 힘들었으나 황제들의 꾸준한 투자로 인해 제국의 국력이 괜찮을 때는 인도 전역을 누볐고, 페르시아만 연안부터 인도네시아 해역까지 광범위한 무역로를 해적이나 적국으로부터 보호했다. 또한 제국이 전쟁을 하지 않을 때 해군은 황실 직속 무역선단으로도 활동했다.

4.3. 종교

팔라 왕조는 인도 최후의 불교 왕조로, 그 불꽃을 화려하게 불태웠다. 종파는 대승불교였다. 고팔라 황제가 오단타푸리 마하비하르를 세우면서 팔라 왕조의 기나긴 불교 후원이 시작되었다. 다르마팔라 황제는 티베트에 있더 고승 하리바드라를 모셔와 국사로 삼았으며 소마푸라와 비크람실라 마하비하르와 함께 절 50곳을 지었다. 또한 세계 최초의 대학이라 불리는 날란다 마하비하르와 여러 마하비하르들에 땅과 돈을 아낌없이 하사해 불교의 발전을 진흥했다. 데바팔라 역시 불교 문학 등에 돈을 아낌없이 지원하고 소마푸라 마하비하르를 증축하기도 했다. 팔라 왕조는 자체적으로 많은 고승들을 배출했고, 불교의 주요 성지들 상당수를 통치하였기 때문에 성지순례를 오는 승려들도 많이 받아들였다. 팔라 왕조에서 공부한 승려들은 인도 내 다른 지역, 티베트, 인도네시아 등지에 포교 활동을 하러 나서기도 했다. 전쟁을 멈출 정도로 덕 높던 고승 아티사는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에서 유의미한 포교 성과를 거두었다.

4.4. 예술

팔라 왕조는 문학의 후원자였다. 팔라 왕조 시대에 산스크리트어 문학 작품이 많이 나왔으며, 가우다리티 양식이라는 고유의 서사시 구조까지 개발했다. 순수문학도 일부 있었으나 이 시기 문학의 주류는 불교 문학과 역사 문학이었다. 고승들의 불교 해설서와 그림이 실린 불경 등이 나왔으며 팔라 왕조의 역사를 노래하는 서사시들도 등장했다. 또한 대승불교의 책뿐만 아니라 밀교 계열을 연구한 논문과 문학도 다수 등장했다. 현재의 벵골어의 모습이 팔라 왕조 때부터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팔라 왕조의 회화는 남아있지 않으나, 조각은 다수 남아있다. 굽타 왕조 시대의 예술감각이 그대로 전해졌으며, 세밀함이 더욱 발전했다. 팔라 왕조의 인물 조각상은 인물의 얼굴을 날카로운 느낌으로 묘사하는 특징이 있다. 조각품은 단독으로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불교나 힌두교 사원 벽의 부조로 많이 만들어졌다. 조각의 재료는 돌과 청동이 주류였다. 팔라 왕조 멸망 이후 힌두교 조각품은 그대로 세나 왕조에게 넘어갔으나 불교 조각품은 많이 사라졌다.

팔라 왕조 예술의 거대한 한 축은 건축이다. 팔라 왕조는 여러 비하르를 건설했으며, 그 중 특히 크고 중요한 비하르는 마하비하르로 불렸다. 마하비하르는 왕조 초기에 많이 지어졌다. 날란다, 오단타푸라, 소마푸라, 비크람실라의 네 마하비하르는 제국의 최중요 종교시설이었으며 그 외에도 크고 작은 사원이 많았다. 팔라 왕조는 절 뿐만 아니라 힌두교 사원도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비교적 잘 남아 있는 소마푸라 마하비하르의 흔적을 보면 그 규모가 8.5헥타르로 팔라 왕조의 힘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해준다. 안타깝게도 이 마하비하르들은 팔라 왕조 멸망 얼마 후 벵골을 침입한 고르 왕조의 장수 박티야르 할지가 마하비하르들을 군사 요새로 착각하고 총공격을 퍼부어 모조리 부수어 버렸다. 점령 후 불교 사원이었음을 알게 되었지만 괘씸죄로 승려들을 모조리 학살해버리면서 가뜩이나 하향세를 향해 가던 인도 불교에 치명타를 가했다.


[1] 다르마팔라 황제는 오디샤의 소마푸라에, 데바팔라 황제는 비하르 동쪽 뭉기르에, 마히팔라 1세 황제는 벵골 한가운데의 마히팔에, 라마팔라 황제는 바렌드라의 라마바티에 머물렀다. [2] 국교이자 다수 종교였다. [3] 각종 기록을 보면 황제를 뜻하는 통일된 단어보다는, 황제에 상응되는 각종 군주의 칭호를 만들어 사용했다. 대표적으로 우타라파타스바민(북인도의 왕중왕) 등. [4] 대학을 낀 초대형 불교 사원을 의미한다. [5] 이후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의 벵골인의 불가사의로 등장한다. [6] 수리야밤샤란 인도의 태양신 수리야의 후손들을 의미하며, 달의 신 찬드라의 후손 찬드라밤샤와 한 쌍을 이루는 전설적 크샤트리아 혈통이다. 이들은 단순한 신화 속 가상의 가문이 아니라, 옛 코살라 왕국의 초대 왕조 익슈바쿠 왕조이다. 힌두교에서는 태양신의 직계 후손이자 최초의 크샤트리아라서, 불교에서는 석가여래와 샤카 왕조가 수리야밤샤 혈통이라, 자이나교에서는 수리야밤샤 왕조 시대에 자이나교의 깨달은 자를 의미하는 티르탕카라가 26명이나 태어나서 이 혈통을 신성시했다. [7] 후나스는 중앙아시아 유목민을 일컫는 인도 말이다. 이 시기엔 에프탈족(백훈족}, 알혼 후나스 등이 소왕국 형태로 인더스 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8] 기록에 의하면 캄보자를 정벌했다고 하는데, 캄보자는 아프가니스탄의 고대 왕국 이름이기도 하지만 이때쯤에 벵골 북쪽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되어서 어디를 공격한 것인지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데바팔라 황제 시대의 날란다 대학 총장이 아프가니스탄 출신인 것으로 확인되어서 아프가니스탄에 팔라 군대가 간 적이 있다는 것이 정설이 되었다. [9] 장남 라즈야팔라는 요절한 것으로 추정된다. [10] 이 사건은 마히팔라 1세 시대라는 설도 있다. [11] 비크라마디티야 왕자는 훗날 반란을 일으켜 서찰루키야 왕조의 황제로 즉위한다. [12] 삼촌 마다나팔라에게 전사를 가장해 암살당했다는 설도 있다. [13] 카야스타 카스트는 벵골에만 있는 특유의 카스트로, 주로 서기관 등의 관리로 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