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야구선수에 대한 내용은 저스틴 토파 문서 참고하십시오.
1. 개요
러시아 이르쿠츠크 지역[3]에 거주하는 튀르크계 원주민으로 러시아 내 존재하는 소수민족 가운데 소멸할 위험성이 가장 높은 민족 중 하나이기도 하다.[4]토파인들은 크게 5개의 씨족인 카시(Каш), 사리그-카시(Сариг-Каш), 초그두(Чогду), 카라-초그두(Кара-Чогду), 쳅테이(Чептей)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각자의 이동지역과 생활방식을 지니고 있었다.
2021년 러시아 전체 인구조사 결과, 러시아 내 총 인구 719명으로 대부분이 이르쿠츠크에 거주한다.
보통 이들을 토팔라르인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민족명 토파(Тоъфа)의 토파어 복수형 표현인 토팔라르(Тофалар)에서 유래한 것이다.[5]
2. 기원 및 역사
러시아 제국이 동쪽으로 계속 영토 확장을 하던 중에 1648년 러시아인들은 우딘스크에 위치한 토파인의 요새화된 영토를 발견함과 동시에 러시아 영향권에 편입되었다. 이후 러시아는 이들에게 현물세로 모피 및 고기를 요구하였으며, 검은 담비의 양은 16~60세에 이르는 사람들 머릿수에 따라 정해졌다. 하지만 종종 공물의 양이 임의대로 증가하였다.[7]
투바 지역이 청나라의 구성원으로 들어간 1757년 이후에도 토파인은 러시아 제국의 구성원으로 남았으며 동시에 주요 행정과 문화, 특히 언어와 관습 면에서 러시아의 영향을 받았다. 행정적으로 우다 강 지역의 다섯 개의 울루스(улус)가 형성되었는데 이는 토파의 5개 씨족에 따라 구성되었다.
토파의 운명은 러시아 혁명과 함께 바뀌게 되었다. 소련은 1926년에 공물을 폐지하여 토파인의 현물세 납부의 부담을 없애버렸다. 그러나 그들의 영토가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됨에 따라 사냥할 때도 소련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또 다른 불편함에 처했다.
1939년에 이르쿠츠크의 구성원으로 들어갔고 알리그제르(Алыгджер, 토파어로 알흐그제르·Аълһыг-Ӌер) 마을을 중심으로 토파 민족 지역이 형성되었지만 1950년에 민족 지역은 해체되었고 그 대신 두 개의 토파 마을소비에트가 구성되었다. 이는 알리그제르를 중심으로 한 토파 마을소비에트(Тофаларский сельсовет)와 베르흐냐야구타라(Верхняя Гутара) 마을을 중심으로 한 베르흐냐야구타라 마을소비에트(Верхне-Гутарский сельсовет)이다. 후에 이 마을소비에트들은 이르쿠츠크주의 니즈네우딘스크군(Нижнеудинский район)에 편입되었다.
3. 언어
튀르크어족의 시베리아 튀르크어파에 속하는 토파어를 구사하였지만, 오늘날엔 노년층에서만 사용되고, 젋은이들은 주로 러시아어를 쓰거나 소수는 부랴트어도 쓴다.1980년대에 들어 자신들의 언어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기 시작하면서 1989년부터 정착지에 있는 모든 유치원과 학교에서 토파어를 가르치고 있다. 또한 토파인 아이들을 위한 토파어 기초교재 및 교과서도 발행하고있다.
4. 경제활동
옛 토파 경제의 근간은 사냥으로 수렵채집인이다. 생존을 위해 사냥한 대상은 다람쥐, 담비, 수달, 순록, 사슴, 노루 등이다. 사냥은 남성들뿐만 아니라 여성도 참가했으며 사냥할 때 석궁, 소총, 덫, 사냥개를 이용했다. 사냥은 소련 시절에도 유지되었으며 제한적이지만 지금도 하고 있다.또한 사냥과 더불어 순록 사육 또한 토파 경제활동에서 중요한 부문이었다. 순록은 이동수단 및 짐을 나르는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은 물론이고 고기와 가죽 등 의식주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만큼 토파인의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동물이다.
토파의 가내수공업은 철, 나무, 자작나무의 껍질, 동물 가죽과 뿔 가공으로 유명했다. 토파의 몇몇 제품은 사냥에서 얻은 동물과 순록의 털가죽으로 만든 것이며, 토파인이 판매하는 제품에는 수제 스키, 담뱃대, 안장, 몇 가지 자작나무 제품, 모피 장화가 포함된다. 이외에 유목생활을 하던 이들이 정주생활을 하게 되면서 경제활동도 변화를 겪었는데 농사를 짓게 되었고 순록 사육은 유목에서 목축으로 변해갔다.
5. 의식주
5.1. 전통의상
기본적으로 옷은 가죽으로 만들었다. 고급 여성용 의상은 중국에서 만들어진 비단옷으로 잔칫날이나 명절날 등과 같은 특별한 날에만 입었다. 물론 가정마다 이런 명절 예복이 갖춰져 있던 것은 아니다.가죽옷은 잠옷으로도 사용되었다. 순록, 노루의 가죽으로 만든 코잔톤(кожантон)은 계절에 따라 안에 털이 있거나 털 없이 입었던 가운이다.
5.2. 음식
사냥해 온 야생 사슴 및 순록, 노루, 곰, 토끼, 다람쥐, 새의 고기는 이들의 기본 식량이었으며, 삶은 고기를 즐겨 먹었다. 순록의 젖은 끓이거나 차에 넣어 마셨으며, 치즈를 만들기도 하였는데 살짝 발효시킨 우유를 신선한 우유와 섞고 두껍게 응고되는 덩어리가 생길 때까지 끓인다.그렇게 생긴 덩어리를 천으로 만든 자루에 넣어 며칠 동안 걸어둔다. 그렇게 하면 응고된 치즈가 된다. 추위가 오면 자작나무로 만든 그릇, 소독한 동물의 장과 위에 우유를 담아 얼려 겨우내 저장했다.
겨울에 채소로 된 음식은 기본적으로 아이(ай)라고 불리는 말린 나리 뿌리와 잣으로 만든다. 구매한 호밀가루를 뜨거운 물에 타서 아궁이의 재 속에 넣어 두거나 달군 돌 위에 놓아 두는 방법으로 탈란(талан)이라는 빵을 구웠다.
밀가루, 크바스, 우유로 만드는 수프의 일종인 탈한불하르(талхан-булхар, 러시아어로 볼투시카·болтушка)에 소금을 넣어 먹기도 했다. 물고기는 음식으로는 그다지 큰 역할을 하지는 못했으며, 말리거나 기름에 구워서 먹고 겨울에는 얼려 포를 떠서 먹었다.
5.3. 주거
과거에는 원추형 천막(чум)에서 살았으며, 천막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여름에는 삶은 자작나무 껍질, 겨울에는 순록이나 큰 사슴의 가죽을 덮었다. 천막의 입구는 동쪽을 향하게 했고 바닥에 가죽이나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수건을 깔고 지냈다.투바인이나 부랴트인이 가진 펠트 천 깔개를 사들여 깔고 지내기도 했다. 가옥 중앙에는 화덕을 두고 그 위에 사슬로 청동솥을 걸어두었다.
천막의 왼편은 남자가 거주하는 공간이고, 오른쪽은 여자가 거주하는 공간이었으며, 유목을 위한 이동 시에는 음식과 가재도구를 헛간(арангас) 또는 기둥 위에 만든 통나무창고에 보관했다. 1930년대 초에 정착생활로 옮기면서 마을에 통나무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으며 현재 이런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6. 관련 문서
[1]
그 밖에도 인두음화(◌ˤ)를 나타내는 Ъ 문자가 생략된 토파(Тофа), 토파(Топа), 토하(Тоха)로 표기된다.
[2]
과거에는 '검은 거위'를 뜻하는 카라가시(Карага́сы)로도 불렸다.
[3]
원래는 사얀 산맥를 근거지로 두었으나
17세기에 현재 지역으로 옮겨갔다.
[4]
네이버 지식백과에 따르면 토파인들은 역사상 강력한 집단을 이룬 적이 없었으며, 항상 약자의 위치에서
부랴트인과 같은 힘 있는 몽골계 타민족에게 공물을 바치며 존속해 왔다. 토파인은 부계 씨족사회를 유지하면서
족외혼을 해왔으며, 그 결과 여러 민족의 피가 뒤섞인 채 쭉 살아왔다고 한다. 이러한 전통 때문에 러시아에 복속된 뒤에도 다른 시베리아의 민족들과는 다르게 저항은커녕 이에 순응하고 복종하는 삶을 택했기 때문에 소멸할 위기에 처한것이라 말하고 있다.
[5]
-라르(-лар / -lar)는
튀르크어족의 개별언어에서 흔히 관찰되는 접미사이다.
[6]
그래서
언어 및
문화 등이 투바인에 가깝다고 한다.
[7]
한 예로
1889년에
사냥 가능한
성인은 약 103명 정도였지만, 어이없게도
사냥꾼 248명분의 공물이 요구되었다. 이런 요구는 자연의 조건과 사냥꾼의 수에 상관없이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