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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펑 유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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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역사학계의 연구4. 중국 유대인의 사실상의 사멸 이유5. 관련 문서

1. 개요

파일:Jews_of_Kai-Fung-Foo,_China.jpg

오늘날의 중국 허난성 카이펑에 수백년간 존재했다고 알려진 유대인. 현재 남아있는 카이펑 유대인 후손들의 모습을 보면 한족과 전혀 구분이 안 된다. 이건 타국의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로, 유럽의 아슈케나지나 이스라엘의 토착 유대인, 에티오피아 유대인이나 인도 마하라슈트라 주의 유대인들도 각각 유럽인, 아랍인, 암하라인 마라티인들과 외양상 전혀 차이가 없다.

2. 역사

아랍측 사료 『중국과 인도 여행기』에 따르면 당나라 치세 878년 황소의 난 때는 황소의 반란군이 광저우에 체류하던 페르시아인과 아랍인, 유대인 포함 12만을 죽였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아마 이 수치는 광저우에 체류하며 아랍-페르시아 상인들의 통제를 받던 동남아인들까지 포함한 수치로 추산된다.

여러 기록이나 정황으로 보아 북송 때부터 카이펑에 살기 시작해 적어도 말기까지는 존재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카이펑에 살던 유대교도들의 선조는 중앙아시아에서 건너온 것으로 추측된다. 1163년 우스타드 레위가 시나고그(유대교회당)를 건설했다는 기록도 있다.[1]

중국에 유대인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서구 세계에 알린 것은 17세기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로 알려져 있다. 1605년 마테오 리치는 카이펑 출신의 애전(艾田)이라는 60살 노인을 만났는데[2] 애전은 자신이 유대교를 믿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들은 명나라 황제로부터 , , , , , , 의 7개의 성을 하사받았다고 하는데 이는 유대인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성인 에즈라, 시몬, 코헨, 길버트, 레비, 조슈아, 조나단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카이펑에는 이들의 존재를 증명하는 걸로 보이는 비석이 몇 개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스스로를 이츠러예(一賜樂業:이스라엘)족이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다만 해당 비석에는 후술하듯 신빙성이 없는 내용이 많아 삼국유사 비슷하게 신화적인 차원으로 생각해야지 실제 역사로 생각하면 곤란하다.[3] 카이펑의 유대인들은 명대까지 번성했으나 명말청초의 혼란기에 세력이 많이 약화되어 결국은 중국인[4]에 흡수되었다고 한다. 이후에도 극히 일부가 그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현대까지 내려왔다. 한국어 위키백과 카이펑 유대인 문서를 참조하길 바란다. 카이펑 유대교도들 중에서 석씨( 시몬)가 그나마 유대교 율법을 잘 준수하는 편으로, 돼지고기를 아예 안 먹는 것은 아니지만 돼지 뒷다리나 둔부의 힘줄은 먹지 않으며 유월절 양고기를 삶고 의 피를 바른다고 한다. 나머지는 유대인 후손이라는 자각만 간신히 있을 뿐이다. 참고로 원래 코셔 푸드에서는 돼지고기가 절대 금지되고 양고기나 소고기도 뒷다리나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않는다.[5]

중국에 유대인 인구 유입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오늘날 카이펑 유대인들은 대개 조상만 유대인이지 중세에 이미 혈통, 문화가 완전히 동화되어서 발견 당시 기준으로는 더 이상 유의미한 수준의 유대인의 정체성을 찾을 수 없다. 비교하자면 오늘날 스페인 인구의 20%가 유대계이며 # 유럽이나 중동에서는 기독교인이나 무슬림이지만 유대계 유전자가 우세한 경우도 흔하고 조상 중에 유대계가 한두명 이상 있는 경우는 너무 많아서 별로 특이한 일도 아니다. 다시 말해서 카이펑 유대인까지 다 유대인으로 치면 에티오피아인들은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다 시바 여왕의 후손이니까 다 이스라엘 유대인의 지파이고 스페인인들이나 라틴아메리카 각지의 히스패닉들도 잊혀진 유대 지파의 하나 같은 식으로 포장 가능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카이펑 유대인들의 후손들은 오늘날까지 유대교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들의 조상 중에 유대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족보를 통해 알고 있는 수준에 불과하다. 비교하자면 대한민국의 화산 이씨의 시조가 베트남 출신, 경주 설씨의 시조가 위구르 출신이라고 해서 경주 설씨나 화산 이씨가 특별히 여타 한국인과 구분되는 소수민족 정체성을 가지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비슷한 처지였던 중국의 무슬림 민족 후이족은 나름 커뮤니티 규모도 컸고 중앙아시아의 무슬림들과의 교류도 많아서 원복이 아니라 기존 이슬람 신앙을 상당 부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후이족들도 (서북 지방에 비해 이슬람 교세가 약한) 화남지방에 거주하는 경우 이슬람 율법이나 신앙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족보상으로 조상 중에 무슬림이 있었다는 정도만 알고 자신의 무슬림 조상에게 유교식으로 제사드리는 경우도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들이 실제로 지켰다는 유대교적인 풍습이라는 것도 돼지고기의 힘줄만 안 먹었다는 것인데 후이족은 일반적인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돼지고기 자체를 아예 먹지 않고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정기적으로 예배를 근행하기 때문에 카이펑 유대인이 돼지고기를 먹되 뒷다리를 안 먹는다는 터부가 특별히 유별난 문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를 반영하듯 오늘날 이스라엘 중앙정부와 관변단체( 이스라엘 유대인 관리청)는 카이펑 유대인들이 만약 그들이 진심으로 귀순이민(알리야) 절차를 밟고 싶다면 가장 먼저 유대교로 개종할 것을 전제조건으로 명시하고 있다. #[6] 즉, 이스라엘 본토에서 유대교 교단은 이들을 유대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완곡어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실제로 이스라엘에 귀순하여 출세한 중국 유대인들은 딱 3명( 에후드 올메르트 前 총리[7], 엘리 마롬 前 해군참모총장[8], 사라 이마스 前 이사)뿐인데 그들의 공통점은 유럽 문화권의 유대인들( 아슈케나짐/ 미즈라힘/ 세파르딤)과 학연/ 지연/ 혈연으로 이어진 연고자라는 점이다.

3. 역사학계의 연구

비판적으로 고증해 보자면 카이펑 유대 회당 비문의 내용은 신뢰성이 낮은 편이다. 해당 비문에는 기원전 108년 전한 무제 때 국경을 넓히기 위해 간쑤성에서 파견된 페르가나 일대로 파견된 이광리 장군과 그의 군사들에게 발견되었다고 주장하지만 고고학적으로 밝혀진 바로는 이란 동부와 아프가니스탄 일대에 규모 있는 유대인 공동체가 정착한 시점은 서기 4세기 무렵이다.[9] 유대인들이 악비의 휘하에 들어가 군과 싸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들이 카이펑이 금에게 함락될 때 조구(남송의 송고종)를 수행해 임안(항저우)까지 내려가 임안에도 많은 유대인들이 살게 되었다고 한다. 비교하자면 청해 이씨가 자신들을 악비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유사하다.

중국 사학계의 최신 학설에 따르면 이들은 송나라가 아닌 원나라가 서역에서 색목인들을 데려오면서 같이 중국에 들어온 페르시아 유대인들의 후손이라고 한다. 이후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들어선 명나라가 색목인들을 원나라가 들여온 이방인 취급하면서 탄압하고 강제 동화정책을 펴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원나라가 데려온 이방인이 아니라고 주장하기 위해 중국에 들어온 연대를 송나라에서 한나라 시대까지 앞당기는 기록들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물론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당나라 이후 실크로드를 통해 중앙아시아 중동 지역과 활발한 교류를 해 왔기 때문에 원나라 이전에도 중국 땅에 유대계 이주민들이 지속적으로 유입된 바는 있었을 것이다.[10] 하지만 그 이전까지는 일시적인 방문이나 극소수 인원의 정착만 있었을 것이며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소수민족으로 분류될 만큼 대규모로 이주한 건 훨씬 이후의 일로 추정하고 있다. 실제로 원나라 시기는 동북아시아 중동계 이주민들이 대거 유입된 시대이기도 했다. 카이펑 유대인의 조상인 페르시아계 유대인 이외에 아랍계, 페르시아계, 튀르크 무슬림들이 대거 유입되었는데 이들은 원명 교체 시기를 거쳐 한족에 동화된 뒤에 오늘날의 후이족의 조상이 되었다.

4. 중국 유대인의 사실상의 사멸 이유

  • 중국 유대인들이 서구 선교사들에게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19세기는 아직 이스라엘이 건국되지 않았을 때였다. 당연히 유대교 커뮤니티들이 종교적인 구심점도 없이 점조직화된 상태여서 교세도 별 볼 일 없었고 이미 돼지고기를 먹는 수준으로 중국화된 상황에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의 당시 혼란한 중국 정세 속에서 원래의 유대교로 원복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 후이족, 보안족, 위구르족 등 중국의 무슬림 소수민족들은 근현대까지 오스만 술탄- 칼리파를 신앙의 구심점으로 삼았기 때문에 심지어 20세기 초반 칼리파가 무너지고 훗날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압까지 받는 와중에도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 위구르족 등 중국의 튀르크계 무슬림 소수민족들은 튀르키예 공화국이 세워지면서부터 튀르크 민족주의에 입각하는 차원에서 튀르키예를 정치적 구심점으로 삼을 수 있었기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강력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정체성을 계속 지켜내고 있다.
  • 만주족은 언어·문화적으로 한족에 거의 동화되었지만 20세기 초에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청나라 황실이라는 정치적 구심점과 달라이 라마 판첸 라마라는 양대 종교적 구심점이 있어서 만주족으로서의 정체성과 티베트 불교 신앙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심지어 청나라 멸망 후에도 청나라 소조정이라는 형식으로 청나라 황실이 명목상으로나마 황실 대접을 받았고 청나라 소조정 폐지 후에는 만주국이 건국되기도 했으며 만주국 멸망 후에도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부인 마오쩌둥 선통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의 만주족 대표로 선출한 것을 기점으로 청나라 황실의 후손들이 중화인민공화국의 보호를 받게 되었고 이후 중화권에서 청나라 황족 등 만주족을 주인공으로 하는 사극이 활발히 제작되어 인기를 끌면서 만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다. 무엇보다 한푸 운동을 통해 중국의 주류 민족인 한족이 치파오 대신 한푸를 입기 시작하자, 만주족 또한 그 영향으로 자신들이 한족이 아니라 만주족이라는 인식이 더더욱 강해지고 있다.
  • 일본계 중국인들(조상이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전에 중국으로 이주한 경우 한정)도 언어·문화적으로 한족에 거의 동화되었지만 일본 제국의 패망과 별개로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는 현재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일본을 구심점으로 삼아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현대에 이르러 카이펑 유대인의 후예들은 중국 정부 당국으로부터 후이족의 일부로 분류된 것에 불만이 있으며 자기들을 별도의 민족으로 분류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들은 이스라엘과의 문화 교류를 통해 유대인 정체성을 복원하려고 하지만 중국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있다. 이를 중국의 유대교 탄압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으나 # 다른 한편으로 보면 카이펑 유대인의 후손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알려진 바가 없기 때문에 한족들이 자신들을 카이펑 유대인 후손으로 날조하는 상황이 난립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상술한 설명에서 보듯 이스라엘 정부도 이들을 제대로 된 유대인으로 인정하지는 않고 있다. 중국과 이스라엘, 유대교가 특별히 사이가 엄청 나쁜 것도 아니고 베이징이나 상하이 등에서는 코셔 푸드 구하기 등이 어렵지 않은 편이다.

5. 관련 문서



[1] 참고로 우스타드는 페르시아어로 히브리어의 랍비와 같은 의미다. [2] 몇몇 기록에는 청년이라고 서술되어 있지만 실제 해당 인물의 과거 급제 기록 등을 보면 노인이었던 게 맞다. [3] 비교하자면 중국 무슬림 후이족들도 예언자 무함마드의 교우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가 중국에 정착해서 숨을 거두었다는 전승을 가지고 있다. 실제 역사 기록상 전혀 근거는 없는 날조지만 중세에 누가 멀리 지중해에서 달려와서 항의할 것도 아니고 뭐라 할 사람이 없었다. 전근대에는 이런 식으로 족보 관련한 신화를 만드는 일이 흔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자신들이 특별한 선민이라는 신화를 만듦으로써 결속력을 다지고 정체성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4] 주로 같은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이슬람을 신봉하는 회족. [5] 성경 창세기에서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다 자신이 질 것을 알게되자 야곱의 둔부를 쳐서 부상을 입혔다고 나온다. 이것이 유례가 되어 유대인들이 뒷다리나 둔부를 먹지 않게 되었다고 서술했다. 뒷다리는 제삿물 중 제사장의 몫으로 남겨놓는 성물이기도 했고. [6] but Kaifeng's Jews face extra challenges in the bid for citizenship because they don’t meet the official criteria required under the country's laws of return. ... The Israeli authorities usually require new immigrants to prove their Jewish heritage through at least one grandparent. Unable to provide evidence for this, Yue and her four fellow migrants will instead spend the next year in Israel studying for a formal conversion before becoming eligible for citizenship. # [7] 카이펑 유대인과는 상관 없는 인물로 러시아 내전 당시 하얼빈으로 피난한 러시아 유대인 후손이다. [8] 역시 카이펑 유대인과 상관 없는 인물로 아버지는 독일 유대인, 외할머니가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망명한 러시아 유대인, 외할아버지가 외할머니와 결혼을 위해 유대교로 개종한 한족이다. [9] 이광리가 서역에 파견나간 시점은 기원전 104~102년이다. [10] 유대인은 아니지만 당나라 시기에 서방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들이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 신자들과 무슬림들의 박해로 인해, 중앙아시아 중국, 몽골 초원으로 대거 유입이 되었던 적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