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이선 농민 운동으로 건국한 응우옌씨 왕조에 대한 내용은 떠이선 왕조 문서 참고하십시오.
응우옌 왕조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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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남국(1839~1945) 大南國 Đại Nam Quố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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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장 | |||||
국기[1] | 국새[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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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1년 민망 황제 시기의 최대 판도 | |||||
1802년 6월 1일 ~ 1945년 8월 25일[3][4]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떠이선 왕조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프랑스령 통킹| 프랑스령 통킹 ]][[프랑스령 안남| 프랑스령 안남 ]][[코친차이나| 코친차이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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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민주 공화국 | |||||
위치 |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중국 | ||||
수도 | 후에 | ||||
국가 원수 | 황제[5] | ||||
국가 | 등단궁(登壇宮) |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 ||||
국성 | 응우옌 가문(阮朝, Nguyễn triều) | ||||
정궁 | 후에왕궁 | ||||
인구 | 2,700만 명(1945년) | ||||
종교 | 유교, 불교 | ||||
면적 | 557,000km2[6] | ||||
주요 황제 |
자롱 황제[7] 민망 황제[8] 함응이 황제[9] 바오다이 황제[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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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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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응우옌 왕조( 阮 朝, Nguyễn triều)[11]는 베트남의 왕조이다. 1802년부터 1945년까지 약 143년간 베트남을 다스린 마지막 통일 왕조였다.초대 황제인 자롱 황제는 1802년에 응우옌 왕조를 건국했고, 이후 남부의 참파, 캄보디아, 라오스 지방을 정벌하면서 베트남 역사상 최대의 통일 왕조로 떠올랐다. 민망 황제의 재위기인 1830년대와 40년대에 최고 전성기를 누렸으며 이때에는 경제가 진흥하고 강대한 해군력을 갖추는 등 동남아의 지역 강국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1840년대 후반부터 점차 서구 세력에 의해 잠식되기 시작했으며, 결국 1884년에는 프랑스의 식민지 신세가 되어버렸다.
1884년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는 비록 왕조 간판은 걸려 있었지만 실권은 없이 프랑스의 괴뢰 정부였으며 1945년에 프랑스 군대를 내쫒고 들어온 일본 제국은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 황제를 내세워 베트남 제국을 세웠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일본이 처참히 몰락하면서 베트남 제국도 함께 무너졌고, 이후 1945년 8월에 베트민 민족주의자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바오다이 황제가 퇴위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 역사
2.1. 응우옌 가문
응우옌 가문은 16세기 이래 베트남 북부의 탄호아 지방을 다스리는 유력 가문이었다. 응우옌 가문은 옛날부터 베트남 일대에서 꽤나 힘을 쓴다고 널리 알려져 있던 대귀족 가문이었는데, 965년에는 딘 왕조 아래에서 재상직을 맡기도 했고 레 왕조 시기인 1442년과 1453년 사이 동안에는 섭정직을 맡아 어린 황제 대신 베트남을 대신 통치할 정도로 그 권세가 높았다.1527년 막 가문의 막당중이 레 왕조의 공황제에게서 제위를 찬탈하여 황제에 즉위하자, 레 왕조에 충성을 유지하던 응우옌 가문과 찐 가문은 이에 반감을 품고 막 왕조를 거꾸러뜨리기 위한 반란을 모의했다. 찐 가문과 응우옌 가문은 탄호아 지방에서 반란군을 일으켰으나 얼마 가지 않아 진압당해 인근의 란쌍 왕국으로 도망쳐 일시적으로 세를 추슬렀다. 당시 반란군들을 이끌던 응우옌 가문의 응우옌낌은 레 왕조를 추종하던 자들을 모아 반란군의 세를 불렸으며 1540년에 다시 돌아와 탄호아 지방을 수복하는 데에 성공했다. 응우옌 김은 1539년에 레 왕실의 장종을 복위시켜 중흥 레 왕조를 열었다. 그러나 레 왕실은 유명무실한 꼭두각시였고, 실질적인 권력은 모두 찐 가문과 응우옌 가문에게 나뉘어져 있었다.
레 왕조를 복원한 찐 가문과 응우옌 가문은 북쪽에 잔존하고 있던 막 왕조와 대립각을 세우며 베트남의 남북조 시대를 열었다. 이미 내분이 일어나면서 망해가던 막 왕조였기에 레 왕조의 복귀는 막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레 왕조 내부에서도 물밑다툼이 굉장히 치열하던 시기였다. 응우옌 가문과 찐 가문은 대대로 내려오는 라이벌 관계의 가문들이었고, 도저히 양립할 수 없었던 관계였던 것이다. 결국 응우옌낌의 양자이자 찐 가문의 일원이었던 찐끼엠이 응우옌 김의 장자인 응우옌우옹을 독살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차남 응우옌호앙은 찐끼엠에게 남부 변두리의 광남 지방으로 분봉받게 해 줄 것을 요청한다. 가장 강력한 경쟁자라고 여겼던 응우옌호앙이 알아서 남부 지방으로 처박혀 준다니 찐끼엠은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고, 응우옌호앙도 일단 목숨을 건져 남부에서 힘을 키울 생각이었기에 찐끼엠은 이름뿐인 황제에게 요청하여 응우옌호앙을 광남 지방의 책임자로 임명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하여 레 왕조의 세력구도는 크게 베트남 북중부를 중심으로 하는 찐씨 정권과 남부를 중심으로 하는 응우옌씨 정권으로 나뉘어지게 된다.
당연히 남쪽으로 내려가 찐 가문으로부터 상당히 자유로워진 응우옌호앙은 하노이에 있는 찐끼엠에게 충성을 다할 마음이 없었고, 레 왕조의 황제에게 형식적인 충성을 유지했을 뿐 조공을 바치거나 세금을 따로 걷어 중앙정부에 납부하지도 않으면서 사실상의 독자정권을 이루었다. 응우옌씨 정권은 끊임없이 남쪽으로 정복작업을 벌이면서 캄보디아를 보호령으로 삼고 라오스를 침공했고 참파의 잔존 세력들을 1693년에 완전히 복속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그런 와중에도 북쪽에 도사리고 있는 찐씨 정권에 대한 적대 관계는 유지하면서 17세기 전반에 걸쳐서 약 100여 년간 레 왕조에서는 한 나라 안에 두 개의 왕국이 있는 것 같은 세력 구도가 팽팽하게 유지된 상태였다.
이러한 대치 상황은 응우옌씨 정권에서 과도한 징세와 수탈에 반발하여 1774년 떠이선 농민 운동이 일어나면서 깨진다. 농민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서 엄청난 국력을 쏟아부어야 했던 응우옌씨 정권은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찐씨 정권에서 농민봉기군과 합세해서 북쪽에서부터 밀고 내려오자 응우옌씨 정권은 무너질 징조를 보였다. 1775년에는 수도인 후에가 함락당했고, 응우옌반냑이[12] 응우옌 가문의 응우옌푹투언과 응우옌푹즈엉 등을 모두 몰살시켜 버렸고, 1777년 경에 남쪽으로 도망가 요새를 지어 버티고 있던 잔존세력들마저 모두 처형하고 응우옌 가문의 씨를 말리는 데에 성공하면서 응우옌 가문은 완벽히 몰락한다.
2.2. 건국
자롱 황제의 초상화 |
한편 떠이선 농민봉기를 이끌던 3명의 지도자인 응우옌반냑, 응우옌반르, 응우옌반후에 삼형제는 점점 세를 넓혀갔다. 이들은 북쪽으로 진격해 찐씨 정권을 몰아내고 대신 레 왕실을 좌지우지했으며, 찐씨 정권이 차지해오던 자리를 빼앗아 대신 권력을 누렸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민제는 찐씨 가문의 잔존 세력들을 모아 떠이선 세력을 물리치려 하였으나 결국 실패했다. 떠이선 타도가 무위로 돌아가자 민제는 청나라에게 구원 요청을 했고, 청나라는 이에 응해 손사의(孫士毅)를 주도로 한 군대를 보냈다. 그러나 손사의는 사치와 향락에만 신경을 쓰고 정작 레 왕실의 구원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으며, 청나라 군대가 1788년에 떠이선 군대에게 대패하고 민제가 결국 도망가면서 레 왕조는 360여 년의 역사를 끝내고 완전히 멸망한다. 레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롭게 들어선 떠이선 왕조는 나라를 세 지방으로 나누어 삼형제가 하나씩 통치했고, 개중 맏이였던 응우옌반냑이 황제에 올라 광남 일대를, 응우옌반르가 가정성 일대를, 응우옌반후에가 북부 일대를 다스렸다. 하지만 떠이선 왕조의 좋은 날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1781년 경에 응우옌푹아인은 3만 명에 달하는 군사들과 80척의 전선, 3척의 대형 전선과 2척의 포르투갈식 범선들을 소유할 정도로 상당한 군대를 거느리게 된다. 이후 응우옌푹아인은 캄보디아와 중국 화교들, 태국의 차크리 왕조, 프랑스의 지원을 등에 업고 떠이선 군대에 우세를 점하고 하나하나 격파해나갔다. 남쪽에서 각국들의 지원을 받은 응우옌푹아인이 베트남 남부 지방을 정복하면서 위로 밀고 올라올 무렵 부춘조의 황제 응우옌반후에는 병사했다. 그의 아들 응우옌꽝또안이 뒤를 이어 부춘조의 황제가 되었지만 응우옌꽝또안은 무능하여 실책을 반복하는 주제에 문무관료들을 지나치게 많이 숙청하여 민심을 잃었다. 게다가 최고위 지도부 사이에서 끊임없이 내분이 일어나 귀인조의 황제 응우옌반냑이 부춘조의 조카에게 배신[14]당한 충격으로 분사하는 등 떠이선 왕조는 붕괴하기 시작했고, 결국 응우옌푹아인이 밀고 올라오자 그대로 멸망했다. 이렇게 베트남을 통일한 응우옌푹아인은 1802년 6월 1일 연호를 가륭(Gia Long, 嘉隆)이라고 짓고 황제에 즉위하니, 이를 자롱 황제라고 부르며 베트남 최후의 왕조인 응우옌 왕조를 개창하게 된다.
응우옌( Nguyễn) 왕조는 건국 직후 청나라에 사신을 파견하며 자국을 인정할 것과 함께 자국의 호칭을 앞서 한대에 존재했던(혹은 새 이름 남과 대월의 월을 합쳐서) '남월'(Nam Việt, 南粤)로 고쳐 불러줄 것을 청했다. 그러나 중국 남부 지역을 점령한 과거의 남월과 연결지어 생각될 것을 우려한 청나라의 가경제는 '남월'을 뒤집은 월남(越南)이라는 호칭을 제안했고, 응우옌 왕조 역시 이에 찬성하면서 1806년 대월은 비엣남(越南, 월남)이 되었다. 바로 21세기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는 비엣남( 베트남)이란 이름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조선, 류큐 왕국, 미얀마[15]와 더불어 청나라의 명목상의 제후국이 되었다. 그러다가 1839년 국호를 대남(Đại Nam, 大南)으로 바꾸고 1945년까지 유지했다.
2.3. 전성기
민망 황제의 모습 | 초상화 |
1819년에 자롱 황제가 승하하자 그의 4번째 아들이었던 민망 황제가 즉위했다.[16] 민망 황제는 즉위 직후부터 중앙집권적인 정책들을 펴나갔다. 제일 먼저 아버지가 만들었던 총독 제도를 폐지하고 황제가 친히 파견하는 지방관들을 통해서 나라 곳곳에 대한 황제의 영향력을 키워나갔으며, 인사 제도 역시 더욱 집중화하여 황제의 권력을 늘렸다. 또한 세금도 낮추고 군비도 축소하여 아버지의 실책을 어느 정도 수습했다.
민망 황제는 서양 문물의 도입에는 긍정적이었음에도 아버지처럼 쇄국 정책을 폈기 때문에 자롱 황제 시기 300여 명에 달하는 프랑스인들이 궁정에 머물렀던 것과는 달리 민망 황제 시기의 베트남에는 극소수의 서양인들만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서양 세계 역시 당시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라는 초대형 사건이 터져 한참 정신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베트남에 대해 큰 관심을 쏟지는 않았다. 종교적으로도 억압적인 정책들을 펼치며 참족 무슬림들에게 강제로 돼지고기를 먹이거나 힌두교도들에게 쇠고기를 먹이고 가톨릭 신자들을 박해하는 등 종교적으로는 대단히 폐쇄적인 정책을 연이어 발표했다. 때문에 참족 사이에서는 불만이 터져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1833년에는 베트남 남부 지방에서 옛 총독 레반주옛의 양자인 레반코이가 반란을 일으켜 민망 황제를 몰아내고 자롱 황제의 손자 응우옌푹미드엉을 새로운 황제로 세우려 하였다. 이들은 캄보디아인들과 태국, 참족, 가톨릭 선교사 등 다양한 세력들의 막후 지원을 받아 2년 여간 동안 민망 황제에 저항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진압당했다. 반란이 진압당한 직후인 1834년, 민망 황제는 반란의 책임을 물어 캄보디아를 완전히 베트남에 병합하였으며 꼭두각시 여왕 앙 메이(អង្គម៉ី)를 세워 캄보디아를 쩐떠이 성(Trấn Tây thành, 鎭西城), 프놈펜은 쩐떠이 부(鎭西府)로 삼아 베트남의 한 지역으로 완전 병합하고, 캄보디아의 모든 문물을 베트남식으로 고쳐서 완전히 동화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당연히 캄보디아인들은 이러한 강제동화 정책에 대대적으로 반발했고, 결국 베트남의 캄보디아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캄보디아인들은 반란을 일으켜 베트남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했고, 시시건건 베트남을 견제해왔던 서쪽의 태국이 이들을 지원하면서 1841년에는 시암-베트남 전쟁이 일어나 4년 동안 지속되었다. 어쨌든 민망 황제는 이와 같은 각종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군사력으로 베트남의 영토를 역사상 최대로 넓히는 데에 성공하였고, 란쌍( 라오스)의 반독립 세력인 씨앙쿠앙(ຊຽງຂວາງ) 정권에 쩐닝 부(phủ Trấn Ninh, 鎭寧府) 등 6부(府)를 설치하여 간접 통치를 하는 등 응우옌 왕조의 최고 전성기를 이끌었다.
2.4. 서구의 잠식
베트남을 침공하는 프랑스 군대 |
한편 티에우찌 황제 시기에 베트남은 본격적으로 서구 세력들과 대립하기 시작한다. 당시 베트남은 민망 황제 이래로 억압적인 종교 정책을 유지하면서 가톨릭 선교사와 신자들을 박해하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프랑스의 르페브르 주교가 사로잡히면서 서구 열강들에게 간섭의 꼬투리가 잡힌 것이다. 19세기 중반엔 전 국토에 천주교 신도가 45만명으로 늘자 유교적 가치관을 지닌 지배층에겐 독이 되었고, 이들은 가톨릭 교도들을 '역도'로 몰아 탄압하기 시작했다. 1847년 2월 26일, 프랑스는 베트남이 선교사를 박해하는 것을 구실로 다낭 항구에서 무력시위를 하면서 사형 선고를 받은 프랑스 선교사 5인과 주교의 석방을 요구한다. 티에우찌 황제는 프랑스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선교사들을 석방하라고 명령하였고, 프랑스 함대는 3월 16일 다낭을 떠났다.
그러나 4월 15일 프랑스 함대는 다시 선교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다낭에 정박 중이던 베트남 함대 5척을 격파시켰다. 그 결과 베트남은 사망자 40여 명, 부상자 90여 명, 실종 1,000여 명의 피해를 입었다. 티에우찌 황제는 이미 약속대로 선교사들을 석방한 상태였기 때문에 매우 격노하였으나, 군사적인 힘에서 밀려 대책이 없었다. 프랑스 뿐만 아니라 다른 서구 열강들도 베트남을 건드리기 시작했는데, 미국의 USS 컨스티튜션이 다낭으로 쳐들어와 지방관들을 포로로 잡고 르페브르 주교를 석방하라고 요구했으며 그해 가을에는 또다시 영국 함대가 들어와 마음대로 앞바다를 휘젓고 다니며 베트남과 통상 조약을 새롭게 맺을 것을 강요했다. 결국 그해 1월에 티에우찌 황제는 아들 뜨득 황제(Tự Đức, 嗣德)에게 "모든 외국인을 사형에 처하라."는 분노에 찬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티에우찌 황제 사후 제위에 오른 뜨득 황제 역시 아버지를 닮아 성품이 유약했다. 티에우찌 황제의 아들들 중 둘째였던 뜨득 황제는 집권 직후부터 제위 계승에 불만을 품은 형의 쿠데타로 인해서 왕권에 큰 타격을 입어 민심이 흔들렸고, 아버지의 쇄국 정책을 이어받아 문을 닫아걸고 외세와의 모든 접촉을 차단하려 노력하였다. 뜨득 황제는 미국, 프랑스, 영국 할 것없이 모든 서구 영사관을 폐쇄하고 서양인들을 추방한 다음, 가톨릭에 대한 포교 억압정책을 갱신하면서 대대적인 박해 정책을 펼쳤다. 이 뜨득 황제의 첫 12년 동안 베트남 가톨릭은 역사상 최악의 탄압을 받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1840년부터 20년간 순교당한 유럽인 선교사가 27명, 베트남인 사제가 300명이며 신도는 3만 명에 달했다. 이들이 살던 마을도 역도의 마을이라 하며 파괴됐다. 이때 선교사들을 잔혹하게 처형했는데 프랑스 선교사인 조제프 마르샹(Joseph Marchand, 1803 ~ 1835)은 살을 집게로 뜯겨져 죽는 능지형에 처해지고 피에르 뒤물랭보리(Pierre Dumoulin-Borie, 1808 ~ 1838)는 참수되었으며 장샤를 코르네(Jean-Charles Cornay, 1809 ~ 1837)는 참수되고 시신이 토막나는 잔혹한 형벌에 처해졌다.
서구 열강들의 지속적인 침략으로 민심이 흉흉해지고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시기에 베트남에는 연이어 흉작과 기근, 가뭄과 자연재해들이 겹쳐 일어났다. 1840년대 후반에는 콜레라 대유행으로 인해 인구의 8~10%인 80만 명이 사망하여 나라가 휘청거릴 정도였다. 1854년에는 메뚜기 떼가 밭을 휩쓸어 북부 지방에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굶어죽었고 통킹 만 인근에서는 반란이 연이어 일어나 지방 시설들과 농경 산업이 초토화되었다. 이를 해결해야 할 베트남 조정은 무력했으며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은 갈수록 약해졌다. 조정이 갈수록 약해지자 1850-70년대에 서양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고 돌아온 신진 유학파들의 개혁 요구가 거세졌다. 이들은 베트남의 문호를 개방하고 모든 체제를 서구식으로 바꾸어 대대적인 개혁을 펼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당시 베트남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것은 보수적인 유교를 신봉하던 세력이었고, 결정적으로 뜨득 황제 역시 골수까지 유교적 봉건제에 물들어 있었던 인물이었기에 큰 성과는 보지 못했다. 덕분에 당시 베트남 인구의 95%는 시골의 농촌에 흩어져 살았고,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했으며 동시대 서양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 폭발적인 경제 성장을 보였던 것과는 달리 여전히 상대적으로 후진적인 경제 구조 안에 갇혀 있었다.
2.5. 프랑스의 침략
베트남은 1800년대 중후반에 걸쳐서 끊임없는 서구 열강들의 간섭에 시달렸다. 특히 프랑스의 간섭이 개중에서 가장 심했다. 해당 시기의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가 집권하면서 그 동안의 정국 혼란에서 어느정도 벗어났을 시점이었고 또한 나폴레옹 3세는 그동안 프랑스 확장의 걸림돌이던 영국과 아예 친하게 지내는 쪽으로 노선을 틀어 뒷탈의 여지를 없앤 뒤 안정적으로 해외 식민지 확보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 와중에 위와 같은 만행이 프랑스 정부와 가톨릭 교단에 생생히 전해져 전 프랑스 내에 베트남을 규탄하는 여론이 휩싸였고, 이는 본격적인 베트남 침략의 빌미가 되었다. 1858년 9월에는 스페인 함대가 베트남 관리들이 스페인 선교사들을 체포한 것을 빌미로 다낭에 쳐들어와 분탕질을 일삼았고, 2달 후에는 사이공과 메콩 강 일대를 휩쓸었다. 3년 후인 1861년에는 70척에 달하는 프랑스 함대가 스페인과 연합을 맺고 베트남 남부 지방으로 진군해 들어왔으며, 스페인과 프랑스라는 두 강대국을 상대할 여력이 없던 뜨득 황제는 어쩔 수 없이 강화를 맺을 수 밖에 없었다. 황제는 판타인잔(Phan Thanh Giản, 潘淸簡, 반청간) 등을 사이공에 파견해 프랑스, 스페인 연합군과 베트남 사이에 제1차 사이공 조약(1862년 6월 5일)을 맺으며 항복했다.1차 사이공 조약에 따라 다낭 등 세 항구가 개항되었고, 꼰선(Côn Sơn, 崑山) 섬이 포함된 꼰다오(Côn Đảo, 崑島, 곤도) 제도[17]와 코친차이나의 동부 3성(省)[18]이 프랑스에 할양되었으며, 프랑스인에게 전국에서 그리스도교 포교의 자유와 메콩 강의 항행권을 부여하기로 결정하였다. 조약이 비준된 뒤 응우옌 왕조의 황제는 3성의 반환을 요청하기 위한 특사를 파리에 파견하였고, 프랑스 외무당국도 한때 조약의 재검토를 시작하였으나(1864년 반환조약), 비준하지 않고 오히려 사이공 현지의 프랑스군이 코친차이나의 서부 3성[19]마저 점령함으로써(1867년) 남부의 6성은 사실상 프랑스령 코친차이나가 되었다. 이때 서부3성의 현령이자 제후였던 판타인잔은 프랑스군과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수세에 몰리자 결국 음독자살한다. 이로써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하기 시작한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약화시키기 위해 베트남에게서 란쌍 6부 땅을 뜯어서 라오스에 되돌려 주었고, 역시 프랑스의 보호령이 된 캄보디아에게 베트남이 뜯어간 시아누크빌, 캄포트, 케프, 스바이리엥을 돌려주었다.
1862년 이래로 프랑스가 장악한 베트남 남부 지역을 코친차이나라고 부른다. 코친차이나 지역을 장악한 프랑스는 당연히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더욱 북쪽으로 밀고 올라가고 싶어했고, 애초에 프랑스가 코친차이나를 정복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메콩 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중국의 윈난 성으로 통하는 무역로를 개척하려는 것에 있었다. 그러나 2년 동안 메콩 강을 탐험한 에르네스트 두다르 드 라그레(Ernest Doudart de Lagrée, 1823 ~ 1868)는 메콩 강 상류가 급류가 심하고 암초가 많아 무역로로 적당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와중에 1871년 프랑스의 모험가이자 상인인 장 뒤퓌(Jean Dupuis, 1828 ~ 1912)가 베트남 북부를 흐르는 홍강을 통해 윈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1872년 11월 베트남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채 윈난으로 화물을 운반했으나, 베트남 정부는 뒤퓌를 도운 베트남인들을 투옥하고 뒤퓌의 영업활동을 금지했다. 뒤퓌로부터 보호 요청을 받은 코친차이나 총독 마리쥘 뒤프레(Marie-Jules Dupré, 1813 ~ 1881)는 군대를 파병하여 홍강 유역의 하노이를 점령하였고, 베트남은 프랑스와 제2차 사이공 조약(뒤프레 조약)을 맺는다.
프랑스는 이 조약에서 베트남의 주권과 독립을 인정하는 대신, 코친차이나 6성의 완전한 식민지배와 함께 하이퐁, 하노이 등의 항구와 홍강(송코이강)을 통상 목적으로 개방하게 하였다. 또 하노이에 영사관을 개설하고 수도 후에에는 공사관을 주재시킬 권리를 얻었다. 또한 하노이에 있는 베트남 군대를 대폭 해산시켜 기본적인 치안만 유지하는 수준으로 전락시켜 버렸고, 하노이를 포함한 상당수의 항구들에 프랑스 군대를 합법적으로 주둔시킬 권리를 뜯어내면서 베트남의 식민지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2.6. 청나라의 개입
베트남의 종주국을 자처하던 청나라는 뒤프레 조약이 체결되자 자신들이 승인하지 않은 베트남과 외국 사이의 조약은 무효라고 선언했다. 청나라는 본래 조선이나 베트남이 주변국과 외교를 하는 것을 크게 건드리지 않았으나, 19세기 말 이때는 중국 본국조차 아편전쟁 등으로 서구열강에 크게 위협받는 절박한 상황이었기에 어떻게든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전통적 조공국 개념을 근대적인 속국 개념으로 확대 해석해 조선과 베트남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 했다.[20] 게다가 프랑스의 간섭을 필사적으로 끊어내려 했던 뜨득 황제 역시 중국의 힘을 빌려 프랑스 군대를 몰아내려 했기에 이해관계가 일치했고, 청나라 조정은 뜨득 황제의 지원 요청을 받고 3만 명의 청군을 베트남으로 파견했다.당시 청나라 조정은 군대 파견과 동시에 천지회 탄압을 피해 베트남으로 도망친 류융푸(劉永福)가 이끌던 흑기군(黑旗軍)을 지원하기로 하고 새로 3만 5천의 군대를 파견하면서 방위 체제를 강화하였다. 이에 프랑스 원정군 사령관인 아메데 쿠르베(Amédée Courbet)와 그 후임인 샤를테오도르 밀로(Charles-Théodore Millot, 1829 ~ 1889)는 청나라 국경과 인접한 랑 썬과 뚜엔 꽝을 점령하는 강경한 모습을 보였다. 프랑스의 강경한 대응에 당황한 청나라는 결국 이홍장을 파견하여 프랑스 대표 프랑수아 에르네스트 푸르니에(François Ernest Fournier, 1842 ~ 1934)와 제1차 톈진 조약(톈진 담판, 1882년)을 맺어서, 베트남 북부(통킹)에서의 양국 주둔군의 철수와 베트남과 외국 사이의 조약 존중을 약속하였다. 또 베트남 황제의 위신을 떨어뜨리지 않을 것이며, 베트남 내륙 북부의 바오탕(Bảo Thắng, 保勝, 보승)에서 중국과 프랑스가 공동 무역하며, 또한 베트남을 중국의 영토와 같은 비율로 세금을 징수하고, 중국과 프랑스는 경계를 설정하여 베트남 북부(통킹)의 자치를 보호한다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프랑스는 베트남을 사실상 중국으로부터 격리하는 데에 성공했고, 베트남의 식민지화 작업을 거침없이 진행해나가기 시작한다.
2.7. 프랑스의 보호령
청프전쟁의 기록화 | 후에 조약의 체결 모습 |
한편 당시 응우옌 왕조는 내부도 엄청나게 어지러운 상황이었는데, 응우옌 왕조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재위한 뜨득 황제가 승하하자 그의 뒤를 이어 양자 죽득 황제가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죽득 황제는 3일 만에 보정대신들에게 쫓겨나 감옥에서 아사했고, 히엡호아 황제가 새롭게 즉위했다. 히엡호아 황제 즉위 후에도 응우옌 왕조 내부의 갈등은 그치지 않아서, 섭정들 사이에서 내란이 일어나 서로 다투는가 하면 정부의 고관이었던 판딘풍(潘廷逢, 번정봉,1847 ~ 1895)이 섭정들의 패악을 문제삼아 대대적인 충돌을 일으키는 등 후에의 조정에서는 바람 잘날이 없었다.[21] 당시 조정의 권력은 보정대신이었던 응우옌반뜨엉과 똔텃투옛, 쩐띠엔타인이 장악하고 있었고, 히엡호아 황제는 허수아비에 불과하였다. 응우옌반뜨엉과 똔텃투옛은 전횡과 발호를 일삼아 히엡호아는 이에 매우 불만을 품었다. 히엡호아는 프랑스인이 제시한 보호 정책을 받아들여 강대한 보정대신들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응우옌반뜨엉은 이를 알고 자유태후(慈裕太后, 현유태후, 1810 ~ 1902)에게 주청을 올렸고, 11월 29일에 정변을 일으켜 쩐띠엔타인을 죽인 뒤 히엡호아를 폐위하고 끼엔푹 황제를 옹립하였다. 히엡호아는 육덕학당(育德學堂)에 감금되었다가 핍박을 받아 독주를 마시고 사망하니, 재위기간은 4개월이었다.
1884년 6월 6일에는 제2차 후에 조약( 갑신 조약, 파트노톨 조약)을 체결하여 프랑스의 대표인 총독이 베트남의 외교권을 총괄하고, 후에 황궁에 프랑스 수비대를 상주시키는 것 등을 추가하였다. 이때부터 베트남은 안남(Annam, 安南)국이라는 이름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 2차 후에 조약으로 인하여 응우옌 왕조는 약 83년 간의 독립국으로서의 역사를 끝내고 완벽한 프랑스의 보호국이자 식민지로 전락하였으며, 이후 즉위한 황제들은 모두 프랑스가 임명한 말 그대로의 얼굴마담이었다. 참고로 안남국이라는 새로운 이름은 안남이 과거 당나라가 베트남을 지배하기 위해 설치했던 안남도호부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이용한 프랑스의 노림수였다. 안남은 지방 이름으로 사용될 때는 수도 후에를 포함한 중부 지방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베트남 전체를 의미하는 의미로도 프랑스 서적에서 자주 사용되었다.
그러나 당시 청나라의 실권을 쥐고 있던 서태후가 ‘베트남을 프랑스에게 넘길 수는 없다’는 훈령을 발표하고, 통킹 주둔군의 철수를 거부하면서 1884년 8월 6일 청의 선전포고로 프랑스와 청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이것이 바로 청프전쟁이다. 이 전쟁은 청나라가 우세한 상황이었으나 장기전에 따른 피해를 우려한 이홍장이 화의를 제의했다. 최종적으로 화의를 통해 프랑스가 청나라에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전쟁을 끝냈다. 영국, 미국, 독일의 중재로 청나라는 1885년 6월 9일 프랑스와 제2차 톈진 조약을 맺고 안남(황제가 다스리는 중부)과 통킹에 대한 프랑스의 보호권을 승인하고, 베트남의 두 곳을 청나라와 프랑스의 무역지로 지정하고,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하였다. 그 외 중국 내부로 오는 프랑스 화물은 베트남과 광서 변경에서 관세율을 감하기로 하고, 이후 청나라에서 철도를 건설할 때 프랑스와 협상하기로 하였다.
참고로 프랑스가 각종 조약들을 통하여 베트남의 실권을 완벽하게 장악한 직후였던 1885년 7월에 보정대신 똔텃투옛은 프랑스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22] 그러나 화력의 열세 때문에 프랑스 군대를 이기기에는 무리였고, 똔텃투옛은 허수아비 황제이자 반프랑스 정서를 공유하고 있던 함응이 황제를 데리고 고산지대로 도망쳤다. 똔텃투옛은 함응이 황제를 틀어쥔 채로 근왕파들의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민족주의자들과 반프랑스 세력들이 화답하면서 반란의 규모는 꽤나 커졌고, 이를 껀브엉 운동(勤王運動, 근왕운동)이라고 부른다.[23] 프랑스는 무려 11년이 지나서야 껀브엉 운동을 진압할 수 있었고, 똔텃투옛은 중국으로 도망쳤다.
2.7.1. 코친차이나
자세한 내용은 프랑스령 안남 문서 참고하십시오.자세한 내용은 프랑스령 통킹 문서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코친차이나 문서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문서 참고하십시오.
베트남을 본격적으로 다 먹어버린 프랑스는 베트남에 본격적인 식민기구 수립에 박차를 가했다. 당시 프랑스는 베트남을 3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었던 상태였다. 하노이를 포함한 북부 지방을 프랑스령 통킹으로, 후에를 중심으로 하는 중부 지방을 프랑스령 안남, 사이공을 중심으로 한 남부의 코친차이나로 나눈 것이다. 이 중 프랑스는 남부의 코친차이나만을 직접 통치하였고, 프랑스령 통킹과 프랑스령 안남은 형식상 응우옌 왕조의 황제들에게 맡기고 실질적, 간접적으로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87년에 안남과 통킹, 코친차이나 지방을 모두 묶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세웠고, 응우옌 왕실은 허수아비일 뿐 실질적인 권력은 전혀 없는 괴뢰 정권 수준으로 격이 낮아졌다.
프랑스는 베트남의 경제적, 사회적 발전에는 별 관심이 없었으며, 그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자원을 뽑아먹을 수 있을까가 본인들의 최대 관심사였다. 프랑스 총독부는 세금을 급격히 인상하고 술과 소금 등을 전매, 마약인 아편을 공공연히 판매함으로써 막대한 양의 이익을 벌어들였고,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7만 명에 달하는 인력들을 데려가 전선에 투입했다. 또한 엄청난 양의 군수물자들을 쥐어짜 유럽으로 운송해 갔고, 이때 워낙 많은 양의 쌀과 식량들을 방출해 간 탓에 베트남에서는 식량난과 기근이 돌기까지 했다. 이렇게 프랑스인들이 지나친 억압 정책을 펼치면서 베트남인들 사이에서는 프랑스에 대한 반감이 만연했고, 11대 황제인 주이떤 황제는 궁에서 도망쳐 베트남 저항군에 합류하려 시도하기까지 했다. 다만 프랑스 총독부가 미리 이를 파악하고 황제를 인도양의 레위니옹에 유폐해 버리면서 이는 실패로 돌아간다.
프랑스 총독부는 베트남에 라틴 문자를 도입하려 시도했다. 이 때 만들어진 것이 현재의 베트남어 표기법인 쯔꾸옥응으이다. 기초교육을 실시하기 시작한 프랑스는 효과적인 종교 전파를 위하여 기존에 쓰던 표기법인 쯔놈과 한자를 밀어내고 라틴어 알파벳을 도입했으며, 서양의 알파벳이 기존의 한자보다 훨씬 베트남어 표기가 쉬웠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상당수의 베트남인들이 쯔꾸옥응으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서양의 물건이라고 거리끼던 베트남인들도 점차 쯔꾸옥응으의 편리함을 인지하고, 어차피 한자도 몇 천년간 적으로 지냈던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었기에 피장파장으로 결국 더 편리한 쯔꾸옥응으를 많이 썼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쯔꾸옥응으 등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서 베트남 내에 빠른 속도로 가톨릭을 전파해 나갔으며, 덕분에 응우옌 왕조 치하에서 탄압받던 기독교도들은 프랑스 치하에서 세가 급격히 불어났다.
2.7.2. 베트남 제국
자세한 내용은 베트남 제국 문서 참고하십시오.퇴위를 발표하는 바오다이 황제 | 바오다이 황제 |
이러한 불안한 공존은 1944년 비시 프랑스가 연합국에 의해 멸망하고, 나치 독일조차 패망을 바라보던 시점인 1945년 3월에는 일본에게 거추장스럽게 느껴졌고, 프랑스 관료들이 있던 인도차이나 지역이 자유 프랑스에게 붙을 움직임이 보이자 일본은 그냥 대놓고 프랑스 총독부를 해체시키고 자신들이 괴뢰국인 베트남 제국을 베트남 지역에 수립한다. 일본의 괴뢰국이었던 라오스 왕국, 캄보디아 왕국도 같은 시기에 설립되었다. 일본은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바오다이를 내세워 베트남 제국을 수립했고, 대동아공영권을 이룬다는 명목으로 베트남인들을 착취했다. 일부 학계에서는 바오다이가 베트남 제국의 형식상이나마 군주로 군림했던 탓에 베트남 제국을 응우옌 왕조의 연장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 프랑스의 식민통치기 이래 탄압받아 왔던 베트남의 독립운동가들은 1941년 경 프랑스가 무너진 틈을 타 하노이 일대에서 공산주의 단체인 베트민을 결성했고, 이 베트민들은 처음에는 일본에 호의적이었으나 나중에는 일본군이 서양 군대보다도 더 악랄하다는 것을 깨닫고 반일 세력으로 성장했다. 베트민은 게릴라 전술 등 다양한 방법을 쓰며 일본 군대를 괴롭혔고, 베트남의 독립운동을 이끌면서 반외세, 자주 정책을 내세웠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면서, 베트남 제국의 황제였던 바오다이도 10일 후 퇴위했다. 이로써 143년에 걸친 응우옌 왕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3. 행정
왕조를 건국한 자롱 황제는 베트남을 크게 북부와 중부, 그리고 남부로 나눈 다음, 황제는 오직 수도인 후에가 있는 중부 지역만을 직접 통치하고 북부와 남부에는 총독을 한 명씩 임명하여 속해있는 여러 개의 보호령들을 대신 통치하도록 하는 일종의 지방분권형 정책을 펼쳤다. 당시 베트남 북부의 총독은 하노이에, 남부의 총독은 사이공에 총독부를 두고 업무를 보았다. 황제는 오직 수도 후에 주변에 있는 4개의 현만을 직접 다스렸고, 추가적으로 지방의 군사적 요충지나 중요한 거점이라고 여겨지는 7개의 중앙 보호령을 따로 다스리도록 만들었다. 총독들은 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16개의 보호령들을 다스렸고, 때문에 베트남의 황제들은 동시대의 조선의 왕들보다 훨씬 직접 관여할 수 있는 영토의 범위가 좁은 편이었다.
이같은 지방분권형 정책은 민망 황제 시기에 끝난다. 자롱 황제 사후 제위에 오른 민망 황제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제도를 추진했고, 총독제가 황권 강화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고 이를 폐지해버린 것이다. 민망 황제는 전 국토를 중국식으로 31개의 성(省)들로 나누었고, 각 성들을 또 군과 현들로 나누어 황제가 직접 지방관들을 파견하도록 만들었다. 가장 작은 행정단위는 하나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는 향이었다. 군이나 현까지는 조정에서 임명한 관리들을 파견한 것과 달리, 향의 경우에는 보통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있거나 신망있는 사람에게 향리직을 맡겼다. 1840년 경 한창 응우옌 왕조가 전성기를 달리고 있을 때에 베트남에는 72개의 현과 39개의 부현, 283개의 구가 있었으며, 각각의 구들에는 최소 3만 명 이상의 인구가 거주했다. 1834년부터 1845년 사이에는 캄보디아가 일시적으로 베트남에 병합되어 쩐떠이 성(Trấn Tây thành, 鎭西城)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기도 했다. 물론 민망 황제가 죽은 직후 반란이 일어나서 떨어져나간 바람에 얼마 가지는 못했지만.
4. 군대
베트남의 군사체계는 크게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나뉘어 있었다. 중앙군은 황제가 친히 지휘하던 수도의 정예군으로, 총 12,000여 명의 규모로 편성되었다.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건국한 응우옌 왕조였던 만큼, 응우옌 왕조는 이미 건국할 때부터 대대적인 서양식 화기를 도입해나가고 있었고 때문에 중앙군은 모두 서양식 라이플이나 머스켓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중앙군에 소속된 병사들은 검은색 군복을 입었으며, 군복에는 꽃 장식이 되어 있었으며 배 쪽 부분에는 자신의 부대를 가리키는 표식이 붙어 있었다. 머리에는 베트남 전통의 삼각뿔 모양의 고깔 모자를 썼고, 이 모자는 보통 깔끔하게 다듬은 삼나무로 만들어 가벼웠다. 또한 중앙군에게는 흰색 신발이 지급되었으나, 대부분의 병사들은 맨발로 다니거나 조잡한 슬리퍼를 신고 다녔다.
지방군의 규모는 자롱 황제 시기에 약 15만 명에서 최대 20만 명에 달했다가, 평화가 정착된 이후 꾸준히 규모가 감소하여 민망 황제 시기에 36,000여 명에서 6만 명 수준까지 하락했다. 티에우찌 황제와 뜨득 황제의 시기 동안 꾸준하게 규모와 질 모두가 떨어진 지방군은 19세기 후반에는 규모가 3만 명 정도에 머물렀고, 대부분은 제대로 훈련도 받지 않은 어중이떠중이들이었다. 중앙군처럼 라이플이나 총으로 무장한 인원은 극히 드물었고, 압도적 다수가 창이나 칼 등 냉병기들만을 주로 썼다. 지방군은 전군, 중군, 좌군, 우군, 후군 이렇게 5개로 나누어졌다. 민망 황제 시기 일반적인 지방군에 속한 병사들은 한 달에 1전, 혹은 500푼 정도의 월급을 받았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베트남의 재정이 파탄나면서 이 정도의 월급을 실제로 받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검은색 군복을 입었던 중앙군과는 달리 붉은색 군복을 입고 다녔고, 지휘관들은 무복이 아닌 비단으로 만든 흑색 관복을 걸치고 다녔다. 특별한 행사나 예식이 있을 때에는 예식용 녹색 관복을 입기도 했다. 관복에는 동물이 그려진 흉배가 붙어 있었는데, 이를 통하여 그 사람의 계급을 판단할 수 있었다.[26]
응우옌 왕조는 해군도 운용했다. 당시 중국 남부와 동남아에 창궐하던 해적들로부터 동부 해안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해군이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1837년 J.H 무어가 사업상 베트남을 찾은 후 남긴 기록에 의하면, 당시 베트남에는 총 50여 척의 스쿠너로 이루어진 함대가 있었으며 80여 척의 슬루프, 100여 척의 전통형 전선들, 80~100여 개의 노가 달린 갤리선 300척, 40~80여 개의 노가 달린 갤리선 500척을 동시에 운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황제는 200여 척의 갤리선을 따로 만들어 황제 직속 해군으로 소유하고 있었으며, 이 갤리선들은 모두 유럽과 베트남 양식을 혼합하여 만들어 양쪽에 14문의 대포들을 설치했다고. 이정도로 베트남은 당시 동남아시아에서는 최강의 해양대국이었고, 1819년에 사이공을 방문한 미국 병사는 베트남 해군의 위상에 감탄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운이 기울어가면서 해군 역시 무너지기 시작했다. 육상에서 하도 많이 반란이 일어나면서 조정의 관심은 해군이 아닌 육군으로 옮겨갔고, 해군이 별다른 쓸모가 없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면서 해군에 대한 재정적 지원은 거의 사라지다시피 해버렸다. 대부분의 전선들이 무너지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상선으로 용도가 전환되었으며 한때 꽤나 쓸만했던 해양 기술과 항해술은 타 아시아 국가들과도 별다른 차이가 없는 수준으로 전락했다. 1880년 경의 베트남 해군은 7척의 초계함, 300척의 정크선, 2척의 오래된 영국제 증기선 정도만을 겨우 운용하는 수준으로 그 질과 규모가 모두 급추락했다고 한다. 나중에는 이마저도 모두 프랑스 해군에 흡수되고 만다.
4.1. 베트남 제국군
자세한 내용은 베트남 제국군 문서 참고하십시오.5. 문화
응우옌 왕조가 여타 베트남 왕조들과 가장 크게 구분되는 특징은 소중화 컨셉이다. 응우옌 왕조를 개창한 자롱 황제는 중국에서 전래된 유교의 권위로써 황권 강화에 힘썼기 때문이다. 베트남을 지배하던 상류층들은 중국식 문화에 심취했고, 반대로 하류층이나 서민층들은 베트남의 전통 문화를 고수했다.[27] 베트남의 관료들은 명나라의 관복을 그대로 도입해서 입었으며, 관직과 관제, 각종 예칙과 법률 역시 중국의 것을 본떠서 사용했다. 다만 베트남은 스스로 황제국을 칭하여 황제만이 입을 수 있었던 황룡포를 착용하고 각종 관직의 명칭 역시 제후국이 아닌 황제국의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28]베트남이 황제를 칭하고도 중국의 견제를 직접적으로 받지 않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지리적 요인 때문이었다. 한반도에 위치한 조선은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과 말그대로 몇 달 사이에 왔다갔다 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에 감히 황제국을 칭했다가는 분노한 중국에 의하여 쓸려나갈 가능성이 컸지만, 베트남은 중국의 최남단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기후도 열대 지방이라 대단히 무더워 중국 병사들이 맥을 추지 못해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29] 그렇다고 해서 베트남이 중국에 공식적인 외교 사절을 보낼 때에 일대일로 대등한 관계로 황제국을 자칭했다는 것은 아니었다. 베트남 역시 자신들과 청나라의 압도적인 격차를 잘 알고는 있었고, 청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국서에는 '월남국왕(越南國王)'의 칭호를 사용했다. 다만 중국을 제외한 타 서양 열강들이나 동남아시아의 국가들에게는 당당히 황제국으로 나서면서 남제(南帝)라는 칭호를 썼다. 남쪽의 황제라는 뜻으로, 북쪽에 있는 천자의 우월성을 인정하되 정통 중화인 명나라가 망해서 없으니까 자신들이야말로 중화문명의 진정한 황제국이라는 것이다.
응우옌 왕조가 성립될 당시 베트남은 몇 백년에 걸쳐서 북부인 정주(鄭主)와 남부인 완주(阮主)로 갈라져 있던 상황이었고, 그러다보니 남부와 북부의 지역에 따라서 입는 옷들도 굉장히 크게 차이가 났다. 국가를 하나로 통합할 필요가 있었던 응우옌 왕조는 남북의 의복 문화를 기본적으로 하나로 통일하려 들었다. 응우옌 왕조는 기본적으로 중국식 복식을 들여와 베트남화시켰으며, 베트남 고유의 의상이자 현대 아오자이의 조상 격인 의복인 아오누딴에 목깃을 더하고 일부 개량하는 등 베트남 전통의복의 틀을 잡았다. 특히 응우옌 왕조는 동남아시아 의복의 공통적인 특징인 헐렁한 스커트 형식의 옷들을 극도로 야만적으로 여겨 이를 금지하였으며, 대신 한족이 입었던 것과 같이 바지와 발목까지 내려오는 옷을 걸치도록 만들었다. 특히 캄보디아 지방의 크메르인들에 대한 차별이 가장 극심해서, 베트남인들은 동남아의 문화가 짙게 남아있었던 크메르인들을 오랑캐라고 깔보았으며 반대로 중화의 의복을 입는 자신들은 문명화된 민족이라고 여겼다. 특히 관복의 경우에서 이같은 경향이 두드러진다. 베트남의 관복은 기본적으로 명나라의 관복과 어느 정도 비슷하지만, 오히려 중국보다도 금제 장식이 많고 더욱 화려한 경향이 있었다. 또한 더운 베트남의 기후 때문에 옷의 밑단이 훨씬 더 짧았고 신고 다니는 신발이 발목 높이까지 꽤나 높이 올라왔다.
6. 현대 베트남에서의 평가
대체로는 매우 나쁘다. 남북베트남을 완전 통일한 최초의 왕조이면서 최후의 왕조이고 왕조 자체는 1945년[30]까지 이어졌으나 프랑스의 식민지배 때문에 실질적으로 왕조가 제 기능을 한 것은 그의 반도 안 되는 60여년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식민당국에서 통치의 정당성을 위해 식민지배 기간 동안 응우옌 왕조를 의도적으로 폄하했던 경향이 강하며, 베트남의 독립운동을 주도한 민족주의 진영이나 공산주의 진영에서도 애초에 프랑스에 식민지배당하기 이전에도 건국 자체부터 프랑스와 태국 등 외세의 힘을 빌려서 이룩했다는 점과 결과적으로는 근대화에 실패하고 식민지로 전락했다는 점들 때문에 박하게 평가하기는 매한가지였다.이로 인해 베트남의 남북분단 이후 어느 쪽에서도 응우옌 왕조에 대해 좋은 평가를 해줄 정치적인 이유가 없었다. 군주정 자체와 상극인 공산주의 북베트남은 물론이고, 남베트남 역시 베트남 공화국의 건국세력인 근로인위혁명당과 혁명위원회 양쪽 모두가 바오다이에게 매우 적대적이었기에 바오다이의 조상들인 광남 응우옌 왕조를 일부러 재평가해줄 이유가 없었다.
그나마 1990년대 중반 이후로는 응우옌 왕조가 생각보다 근대적인 모습을 지녔다는 점이나 쇄국이라고 해도 외국문물을 무조건 차단하지는 않았다는 점이 어느 정도 재조명되면서 상당부분 재평가받고 있으나 베트남이 독립한 이래로 프랑스, 미국, 중국과 싸워 이겼고, 그 이전에도 중국과 몽골의 대군을 상대로 여러차례 이겨본 전적이 있는데 응우옌 왕조가 전성기 시절에 참파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캄보디아를 분할하는 등 강력한 군사력을 과시했을 때도 있었기는 했어도 결과적으로 프랑스를 상대로 이겨보지는 못하고 통치권을 내주고야 말았으니 응우옌 왕조에 대한 이미지가 여전히 좋을 수가 없기는 하다.[31]
사실 19세기 근대화라는 측면만 본다면 타 한자문화권 국가인 중국, 한국, 일본보다 베트남은 훨씬 더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우선 조선과 청나라, 에도 막부는 18세기 말~19세기 초를 기점으로 모두 쇠퇴기에 접어들어 노쇠한 모습을 보였지만, 응우옌 왕조는 떠이선 왕조에 비하면 덜 개혁적이었을지라도 일단은 신생정권이었기 때문에[32] 세 나라들에 비해 사회가 덜 경직되었다. 또한 프랑스로부터 도움을 얻어 건국했으므로 일찍이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여 근대적 군사력을 보유할 수 있었고 그렇기에 단시간이나마 국력이 융성할 수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해당 기간 동안 경제와 행정의 근대화보다는 유교질서 강화 및 대외확장에 몰두하면서도 내부통제가 잘 안되는 모습도 같이 보여주었는데, 마침 프랑스도 혼란기였으므로 응우옌 왕조는 외세에 대한 걱정 없이 대외확장을 벌일 수 있었고, 침략의 명분이 되던 기독교 탄압도 따지고 보면 서양 열강들이 선교사들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생각하면 방어기제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지만 하필이면 유럽 열강들이 산업혁명 버프를 얻으면서 당대의 베트남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엄청나게 발전했던 시기라는 것이 응우옌 왕조 입장에서 큰 불행이었고 결과적으로 볼 때는 실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즉, 내부의 문제점도 엄연히 있기는 했지만 운빨이 안 좋았던 측면도 부분적으로 작용했다.
7. 역대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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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DD1E1F>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세조 | 성조 | 헌조 | 익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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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종 | 협화제 | 간종 | 함의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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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 | 성태제 | 유신제 | 홍종 | |
<rowcolor=#DD1E1F> 제13대 | ||||
보대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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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 | 묘호 | 시호 | 휘(이름) | 연호 | 재위기간 | 능호 |
추존 |
흥조 (興祖) |
인명근후관유온화효강황제 (仁明謹厚寬裕溫和孝康皇帝) |
응우옌 푹 루언 (Nguyễn Phúc Luân 阮福㫻 /완복곤) |
- | - |
기성릉 (基聖陵) |
1대 |
세조 (世祖) |
개천홍도입기수통신무성무준덕융공지인대효고황제 (開天弘道立紀垂統神文聖武俊德隆功至仁大孝高皇帝) |
응우옌 푹 아인 (Nguyễn Phúc Ánh 阮福暎 /완복영) |
자롱 (Gia Long 嘉隆 /가륭) |
1802 ~ 1819 |
천수릉 (天授陵) |
2대 |
성조 (聖祖) |
체천창운지효순덕문무명단창술대성후택풍공인황제 (體天昌運至孝純德文武明斷創述大成厚宅豊功仁皇帝) |
응우옌 푹 끼에우 (Nguyễn Phúc Kiểu 阮福晈 /완복교) |
민망 (Minh Mạng 明命 /명명) |
1819 ~ 1840 |
효릉 (孝陵) |
3대 |
헌조 (憲祖) |
소천융운지선순효관명예단문치무공성철장황제 (紹天隆運至善淳孝寬明睿斷文治武功聖哲章皇帝) |
응우옌 푹 뚜옌 (Nguyễn Phúc Tuyền 阮福暶 /완복선) |
티에우찌 (Thiệu Trị 紹治 /소치) |
1840 ~ 1847 |
창릉 (昌陵) |
4대 |
익종 (翼宗) |
계천형운지성달효체건돈인겸공명약예문영황제 (繼天亨運至誠達孝體健敦仁謙恭明略睿文英皇帝) |
응우옌 푹 티 (Nguyễn Phúc Thì 阮福時 /완복시) |
뜨득 (Tự Ðức 嗣德 /사덕) |
1847 ~ 1883 |
겸릉 (謙陵) |
5대 |
공종 (恭宗) |
관인예철정명혜황제 (寬仁睿哲靜明惠皇帝) |
응우옌 푹 응쩐 (Nguyễn Phúc Ưng Chân 阮福膺禛 /완복응진) |
-[33] | 1883 |
안릉 (安陵) |
6대 | - |
장공왕 (莊恭王) ,<폐제(廢帝)>, ,<낭국공(朗國公)>, ,<문랑군왕(文朗郡王)>, |
응우옌 푹 탕 (Nguyễn Phúc Thăng 阮福昇 /완복승) |
히엡호아 (Hiệp Hoà 協和 /협화) |
1883 | - |
7대 |
간종 (簡宗) |
소덕지효연예의황제 (紹德志孝淵睿毅皇帝) |
응우옌 푹 하오 (Nguyễn Phúc Hạo 阮福昊 /완복호) |
끼엔푹 (Kiến Phúc 建福 /건복) |
1883 ~ 1884 |
배릉 (陪陵) |
8대 | - |
- ,< 출제(出帝)>, |
응우옌 푹 민 (Nguyễn Phúc Minh 阮福明 /완복명) |
함응이 (Hàm Nghi 咸宜 /함의) |
1884 ~ 1885 | - |
9대 |
경종 (景宗) |
배천명운효덕인무위공홍렬총철민혜순황제 (配天明運孝德仁武偉功弘烈總哲敏惠純皇帝) |
응우옌 푹 비엔 (Nguyễn Phúc Biện 阮福昪 /완복변) |
동카인 (Ðồng Khánh 同慶 /동경) |
1885 ~ 1888 |
사릉 (思陵) |
10대 | - |
- ,< 회택공(懷澤公)>, ,<폐제(廢帝)>, |
응우옌 푹 찌에우 (Nguyễn Phúc Chiêu 阮福昭 /완복소) |
타인타이 (Thành Thái 成泰 /성태) |
1888 ~ 1907 |
안릉 (安陵) |
11대 | - |
- ,< 폐제(廢帝)>, |
응우옌 푹 호앙 (Nguyễn Phúc Hoảng 阮福晃 /완복황) |
주이떤 (Duy Tân 維新 /유신) |
1907 ~ 1916 |
안릉 (安陵) |
12대 |
홍종 (弘宗) |
사천가운성명신지인효성경이모승열선황제 (嗣天嘉運聖明神智仁孝誠敬貽謨承烈宣皇帝) |
응우옌 푹 뚜언 (Nguyễn Phúc Tuấn 阮福晙 /완복창) |
카이딘 (Khải Ðịnh 啓定 /계정) |
1916 ~ 1925 |
응릉 (應陵) |
13대 | - |
- ,< 말제(末帝)>, |
응우옌 푹 티엔 (Nguyễn Phúc Thiển 阮福晪 /완복전) |
바오다이 (Bảo Đại 保大 /보대) |
1925 ~ 1945 | - |
8. 역대 황후
조조후(肇祖后)
ㆍ자신정황후(慈信靖皇后) 완씨해(阮氏梅)[34]
태조후(太祖后)
ㆍ자량가유황후(慈良嘉裕皇后) 완씨(阮氏)[35]
희종후(熙宗后)
ㆍ휘공효문황후(徽恭孝文皇后) 막씨규(莫氏佳)[36]
신종후(神宗后)
ㆍ정숙효소황후(貞淑孝昭皇后) 단씨안(段氏安)[37]
태종후(太宗后)
ㆍ자민효철황후(慈敏孝哲皇后) 주씨원(朱氏園)[38]
ㆍ자선효철황후(慈僊孝哲皇后) 송씨최(宋氏堆)[39]
영종후(英宗后)
ㆍ자절효의황후(慈節孝義皇后) 송씨령(宋氏領)[40]
현종후(顯宗后)
ㆍ자혜효명황후(慈惠孝明皇后) 송씨권(宋氏權)[41]
숙종후(肅宗后)
ㆍ자의효녕황후(慈懿孝寧皇后) 장씨서(張氏書)[42]
세종후(世宗后)
ㆍ온성효무황후(溫誠孝武皇后) 장씨용(張氏容)[43]
흥조후(興祖后)
ㆍ의정효강황후(懿靜孝康皇后) 완씨환(阮氏環)[44]
세조후(世祖后)
ㆍ승천고황후(承天高皇后) 송씨란(宋氏蘭)[45]
ㆍ순천고황후(順天高皇后) 진씨당(陳氏璫)[46]
성조후(聖祖后)
ㆍ좌천인황후(佐天仁皇后) 호씨화(胡氏華)[47]
헌조후(憲祖后)
ㆍ의천장황후(儀天章皇后) 범씨상(范氏嫦)[48]
익종후(翼宗后)
ㆍ여천영황후(儷天英皇后) 무씨해(武氏諧)[49]
공종후(恭宗后)
ㆍ자명혜황후(慈明惠皇后) 번씨주(潘氏調)[50]
경종후(景宗后)
ㆍ보천순황후(輔天純皇后) 완유씨한(阮有氏嫻)[51]
ㆍ우천순황후(佑天純皇后) 양씨열(楊氏熟)[52]
홍종후(弘宗后)
ㆍ단휘황태후(端徽皇太后) 황씨국(黃氏菊)
보대제후(保大帝后)
ㆍ 남방황후(南芳皇后) 완씨(阮氏)
9. 추존 황제
대수 | 묘호 | 시호 | 휘 | 연호 | 재위기간 | 능호 |
응우옌씨 정권(광남국, 완주)[53][54] 1558~1777 |
||||||
0 |
조조 (肇祖) |
이모수유흠공혜철현우굉휴제세계운인성정황제 (貽謀垂裕欽恭惠哲顯佑宏休濟世啓運仁聖靖皇帝) |
응우옌 낌 (Nguyễn Kim 阮淦 /완감) |
- | - |
장원릉 (長原陵) |
1 |
태조 (太祖) |
조기수통흠명공의근의달리현응소우요령가유황제 (肇基垂統欽明恭懿謹義達理顯應昭祐耀靈嘉裕皇帝) |
응우옌 호앙 (Nguyễn Hoàng 阮潢 /완황) |
- | 1558 ~ 1613 |
장기릉 (長基陵) |
2 |
희종 (熙宗) |
현모광렬온공명예익선수유효문황제 (顯謨光烈溫恭明睿翼善綏猷孝文皇帝) |
응우옌 푹 응우옌 (Nguyễn Phúc Nguyên 阮福源 /완복원) |
- | 1613 ~ 1635 |
장연릉 (長衍陵) |
3 |
신종 (神宗) |
승기찬통강명웅의위단영무효소황제 (承基纘統剛明雄毅威斷英武孝昭皇帝) |
응우옌 푹 란 (Nguyễn Phúc Lan 阮福瀾 /완복란) |
- | 1635 ~ 1648 |
장연릉 (長延陵) |
4 |
태종 (太宗) |
선위건무영명장정성덕신공효철황제 (宣威建武英明莊正聖德神功孝哲皇帝) |
응우옌 푹 떤 (Nguyễn Phúc Tần 阮福瀕 /완복빈) |
- | 1648 ~ 1687 |
장흥릉 (長興陵) |
5 |
영종 (英宗) |
소휴찬업관홍박후온혜자상효의황제 (紹休纂業寬洪博厚溫惠慈祥孝義皇帝) |
응우옌 푹 타이 (Nguyễn Phúc Thái 阮福溙 /완복태) |
- | 1687 ~ 1691 |
장무릉 (長茂陵) |
6 |
현종 (顯宗) |
영모웅략성문선달관자인서효명황제 (英謨雄略聖文宣達寬慈仁恕孝明皇帝) |
응우옌 푹 쭈 (Nguyễn Phúc Chu 阮福淍 /완복주) |
- | 1691 ~ 1725 |
장청릉 (長淸陵) |
7 |
숙종 (肅宗) |
선광소렬준철정연경문위무효녕황제 (宣光紹烈濬哲靜淵經文緯武孝寧皇帝) |
응우옌 푹 쭈 (Nguyễn Phúc Chú 阮福澍 /완복주) |
- | 1725 ~ 1738 |
장풍릉 (長豊陵) |
8 |
세종 (世宗) |
건강위단신의성유인자예지효무황제 (乾剛威斷神毅聖猷仁慈睿智孝武皇帝) |
응우옌 푹 코앗 (Nguyễn Phúc Khoát 阮福濶 /완복활) |
- | 1738 ~ 1765 |
장태릉 (長泰陵) |
9 |
예종 (睿宗) |
총명관후영민혜화효정황제 (聰明寬厚英敏惠和孝定皇帝) |
응우옌 푹 투언 (Nguyễn Phúc Thuần 阮福淳 /완복순) |
- | 1765 ~ 1776 |
장소릉 (長紹陵) |
10 | - |
공민영단현묵위문목왕 (恭敏英斷玄默偉文穆王) |
응우옌 푹 즈엉 (Nguyễn Phúc Dương 阮福暘 /완복양) |
- | 1776 ~ 1777 | - |
10. 태왕(太王)
선황(先皇)의 양자로 입적한 황제가 자신의 친부에게 봉한 작위이며 일반 황족들이 봉해진 왕작보다 높은 작위이다. 한국으로 치면 대원군에 해당한다.구분 | 묘호 | 시호 | 휘 | 연호 | 재위기간 | 능호 |
추존 | - |
돈정서태왕 (敦正瑞太王) |
응우옌 푹 홍이 (Nguyễn Phúc Hồng Y 阮福洪依 /완복홍의) |
- | - | - |
추존 | - |
순의견태왕 (淳毅堅太王) |
응우옌 푹 홍까이 (Nguyễn Phúc Hồng Cai 阮福洪侅 /완복홍해) |
- | - | 천황용산(天皇龍山) 천성국(天成局) |
11. 계보
- 완복양(10)까지는 응우옌씨 정권, 완복영(1) 이후부터는 응우옌 왕조.
완문여 | ||||||||
완감 | ||||||||
1. 완황 | ||||||||
2. 완복원 | ||||||||
3. 완복란 | ||||||||
4. 완복빈 | ||||||||
5. 완복태 | ||||||||
6. 완복주(淍) | ||||||||
7. 완복주(澍) | ||||||||
8. 완복활 | ||||||||
완복곤 | 9. 완복순 | 완복호 | ||||||
1. 완복영 | 10. 완복양 | |||||||
2. 완복교 | ||||||||
3. 완복선 | ||||||||
4. 완복시 | 완복홍의 | 완복홍해 | 6. 완복승 | |||||
5. 완복응전 | 7. 완복호 | 8. 완복명 | 9. 완복변 | |||||
10. 완복소 | 12. 완복창 | |||||||
11. 완복황 | 13(末). 완복전 |
12. 기타
- 바오다이 황제 사후 태자였던 응우옌푹바오롱(Nguyễn Phúc Bảo Long, 阮福保隆, 1936~2007)이 명목상의 베트남 황위를 이어받았으며 그가 2007년에 부르고뉴에서 후사 없이 죽은 뒤 동생인 응우옌푹바오탕(Nguyễn Phúc Bảo Thăng, 阮福保陞, 1943~2017)이 황제위 요구자가 되었다. 2017년에 바오통이 사망한 현재는 그의 동생인 응우옌푹바오안(Nguyễn Phúc Bảo Ân, 阮福保恩, 1951~)[55]이 명목상의 베트남 황제위를 요구하고 있다.
- 응우옌 왕조의 목판, 응우옌 왕조의 황실 기록물 등 2개의 유산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13. 대중 매체에서 등장
- 빅토리아 시리즈: 대남(Dai Nam)으로 등장.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동아시아 문화를 가지고 있다. 세력 지도자는 민망 황제. 빅토리아 3 기준 군주 포트레잇 고증을 엉망으로 했는데, 민망황제가 베트남 황제 의상이 아닌 버마 예복을 입혀놔서 베트남 유저들에게 논란이 되었다.
[1]
'롱띤(龍聖)'이라고 부른다. 노란색은 황제의 엄숙함을, 붉은색은 국민의 행복을 상징한다.
카이딘 황제가 디자인했으며 1922년 카이딘 황제가 프랑스 여행을 떠났을 때에도 사실상 국기로 사용됐다.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바오다이 황제가 응우옌 왕조의 정식 국기로 지정했다.
[2]
대남수천영명전국새(大南受天永命傳國璽). 응우옌 왕조 시기 베트남의 국새였다. 뜻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수명이 영원한 응우옌 왕조의
전국옥새라는 뜻이다.
[3]
1883년부터는 프랑스의 보호국화.
[4]
1945년 3월 11일부터는 마지막 황제인
바오다이가 일본 제국의 괴뢰국인
베트남 제국을 선포했다.
[5]
사실상
외왕내제 형식이었다. 내부에서는 황제를 칭했고 영미권에서도 'emperor'로 번역하지만
청나라의 황제에게 조공을 바쳤다.
[6]
현대
베트남 면적이 331,690km2인걸 감안하면 거의 1.7배에 달하는 크기다. 응우옌 왕조의 최전성기 때에는
캄보디아와
라오스,
중국 남부 일대까지 차지했기 때문.
[7]
왕조 건국
[8]
전성기 시작
[9]
실질적 멸망
[10]
완전한 멸망
[11]
한국에서는 문헌에 따라 한자를 그대로 읽은 완조(阮朝), 혹은 '응웬왕조' 등으로 표기된다.
[12]
원래는 세금을 걷던 세리로, 응우옌 성씨를 가지기는 했지만 남부를 다스리던 응우옌 가문의 일원은 아니다. 베트남에서 응우옌 성씨는 한국의 박석김에 비슷할 정도로 엄청나게 흔한 성씨다.
[13]
프랑스는 상당한 지원을 해줄 용의가 있었다. 프랑스의 국왕
루이 16세는 1,200명의 보병과 200문의 대포, 250명의 아프리카 출신 병사, 각종 군사 지원을 해주고 대신
다낭과
꼰선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받아가려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 혁명이 터지는 바람에 실행되지는 않았다.
[14]
응우옌꽝또안은 귀인조가 응우옌푹아인의 공격으로 밀리고 있을 때 지원하는 척 영토를 빼앗았다.
[15]
당시 미얀마는
꼰바웅 왕조 시대였다.
[16]
원래대로라면 요절한 장남 응우옌푹까인(Nguyễn Phúc Cảnh, 阮福景)의 아들 응우옌푹미드엉(Nguyễn Phúc Mỹ Đường, 阮福美堂)이 황위를 이어야 했지만 푹까인의 가톨릭 성향을 부담스러워했던 자롱 황제가 일부러 자신과 성향이 일치하는 4남을 즉위시켰다.
[17]
프랑스는 말레이어 발음을 따서 풀로콩도르(Poulo-Condore)라고 불렀다. 프랑스가 꼰선 섬에 지은 감옥에 베트남의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대거 수감되었다.
[18]
비엔호아, 자딘, 딘뜨엉.
[19]
빈롱, 안장, 하띠엔.
[20]
그러다 결국
청프전쟁,
청일전쟁 패배로 베트남과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완전히 포기하게 된다.
[21]
참고로 판딘풍은 보정대신들의 세력에 밀려 결국 고향으로 귀양을 갔고, 판딘풍은 이 곳에서 세력을 길러 이후 프랑스에 대항하는 혁명군을 이끌었다.
[22]
히엡호아 황제를 죽인 이유부터가 친프랑스 정책을 펼쳤다는 것이었으니 당연히 똔텃투옛은 프랑스와 사이가 좋을 리가 없었다. 어차피 가만히 있으면 프랑스 관리들에게 밀려날 상황이었고, 그래서 차라리 프랑스에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23]
존왕양이와 차이가 존재한다.
[24]
조선은 '~부'만 '~조'로 달랐을 뿐 사실상 같았다.
[25]
기존의 6부제하에서 교육은 예부 담당이다.
[26]
기린이 그려진 흉배가 제일 높은 계급이었고, 그 다음으로
사자,
호랑이,
흑표범,
곰,
표범,
해마,
코뿔소 순이었다.
[27]
비슷한 예로
영국과
프랑스의 예를 생각해볼 수 있다. 중세 시대까지만 해도 유럽의 중심은 프랑스였고, 그래서 영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유럽 지역에서는
프랑스어를 하지 못하는 자는 제대로 된 귀족 취급을 받지 못할 정도로 프랑스의 위상이 높았다. 중세 영국에서는
영어를 쓰는 자들을 오히려 천하다고 여겼으며, 프랑스어가 고급스럽다고 여겼다.
[28]
가장 대표적으로
육조가 있다. 황제국의 경우에는 6조가 아니라 6부라고 부르고, 6부의 책임자를 상서라고 불렀다. 그러나 제후국의 경우에는 6조라고 불렀으며 각 조의 책임자를 판서라고 불렀다.
조선의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의 명칭을 생각해보면 된다.
[29]
섬나라인 일본이 황제를 칭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별 신경을 쓰지 않았던 이유와 비슷하다. 워낙 거리가 멀어서.
[30]
길게 보면
베트남국이 멸망한 1955년까지.
[31]
다만 당시에는 서구국가들이 비서구권 국가들을 압도하던 시기라는 것을 감안해야 하며 오히려
원나라의 베트남 원정시기
원나라를 상대로 강한 모습을 보여준
쩐 왕조도 참파를 상대로 군주가 직접 원정을 나갔다가 살해당하거나 수도가 함락되는 굴욕을 겪은 것에 비해 응우옌 왕조는 참파를 아예 멸망시켰다.
[32]
물론 응우옌 왕가 자체는 이미 남북조 시대 시절부터 권력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떠이선 왕조 시기를 거치면서 응우옌 왕가와 권신들이 잇따라 죽거나 숙청을 당하여 몰락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구 지주들에게 특권을 주는 법안을 내놓기는 했지만 어쨌든 변화 자체는 불가피했던 것.
[33]
즉위 3일만에 폐위되어 연호를 정하지 못했으며 아호인 육덕당(Dục Đức/育德堂)을 따라
죽득 황제라 부른다.
[34]
자신소의덕비(慈信昭懿德妃)
→ 자신소의홍인덕비(慈信昭懿弘仁德妃)
→ 자신소의홍인숙덕정황후(慈信昭懿弘仁淑德靖皇后) [35] 자량광숙의비(慈良光淑懿妃)
→ 자량광숙명덕의비(慈良光淑明德懿妃)
→ 자량광숙명덕의공가유황후(慈良光淑明德懿恭嘉裕皇后) [36] 휘공자신순비(徽恭慈愼順妃)
→ 휘공자신온숙순비(徽恭慈愼溫淑順妃)
→ 휘공자신온숙순장효문황후(徽恭慈愼溫淑順莊孝文皇后) [37] 정숙자정혜비(貞淑慈靜惠妃)
→ 정숙자정민예혜비(貞淑慈靜敏睿惠妃)
→ 정숙자정민예혜경효소황후(貞淑慈靜敏睿惠敬孝昭皇后) [38] 찬국정부인(贊國正夫人)
→ 자민소성장비(慈敏昭聖莊妃)
→ 자민소성장렬장비(慈敏昭聖莊烈莊妃)
→ 자민소성공정장신효철황후(慈敏昭聖恭靜莊愼孝哲皇后) [39] 자선혜성정비(慈僊惠聖靜妃)
→ 자선혜성정순정비(慈僊惠聖貞順靜妃)
→ 자선혜성정순정인효철황후(慈仙惠聖貞順靜仁孝哲皇后) [40] 국태부인(國太夫人)
→ 자절정숙헌비(慈節靜淑憲妃)
→ 자절정숙효자헌비(慈節靜淑孝慈憲妃)
→ 자절정숙혜민헌순효의황후(慈節靜淑慧敏憲順孝義皇后) [41] 자혜명비열부인(慈慧明妃列夫人)
→ 자혜공숙경비(慈惠恭淑敬妃)
→ 자혜공숙의덕경비(慈惠恭淑懿德敬妃)
→ 자혜공숙의덕경목효명황후(慈惠恭淑懿德敬穆孝明皇后) [42] 자의수용아부인(慈懿修容亞夫人)
→ 자의광순숙비(慈懿光順淑妃)
→ 자의광순소헌숙비(慈懿光順昭憲淑妃)
→ 자의광순소헌숙혜효녕황후(慈懿光順昭憲淑惠孝寧皇后) [43] 수의부인(修儀夫人)
→ 온성태비(溫誠太妃)
→ 온성휘의장혜육성효무황후(溫誠徽懿莊慈毓聖孝武皇后) [44] 의정혜공안정자헌효강황후(懿靜惠恭安貞慈獻孝康皇后) [45] 간공제효익정순원황후(簡恭齊孝翼正順元皇后)
→ 승천좌성후덕자인공간제효익정순원 고황후(承天佐聖厚德慈仁簡恭齊孝翼正順元高皇后) [46] 인선자경황태후(仁宣慈慶皇太后)
→ 인선자경복수강녕태황태후(仁宣慈慶福壽康寧太皇太后)
→ 순천흥성광유화기인선자경덕택원공 고황후(順天興聖光裕化基仁宣慈慶德澤元功高皇后) [47] 소의(昭儀)
→ 순덕신비(順德宸妃)
→ 좌천여성단정공화독경자휘명현순덕인황후(佐天儷聖端正恭和篤慶慈徽明賢順德仁皇后) [48] 황태후(皇太后)
→ 자유태황태후(慈裕太皇太后)
→ 자유박혜태황태후(慈裕博惠太皇太后)
→ 자유박혜수강태태황태후(慈裕博惠康壽太太皇太后)
→ 의천찬성자유박혜제숙혜달수덕인공장황후(儀天贊聖慈裕博惠齋肅慧達壽德仁功章皇后) [49] 장의황태후(莊懿皇太后)
→ 장의순효태황태후(莊懿順孝太皇太后)
→ 여천보성장혜순효근여효자명현정수영황후(儷天輔聖莊懿順孝勤恕溫慈賢明靜壽英皇后) [50] 자명숙선유순혜황후(慈明淑善柔順惠皇后) [51] 곤원황태후(坤元皇太后)
→ 곤원창명태황태후(坤元昌明太皇太后)
→ 보천익성곤원창명목자광후장정인수순황후(輔天翊聖坤元昌明穆慈廣厚莊靜仁壽純皇后) [52] 곤의황태후(坤儀皇太后)
→ 곤의창덕태황태후(坤儀昌德太皇太后)
→ 우천상성곤의창덕관후자화수강장숙순황후(佑天相聖坤儀昌德寬厚慈和壽康莊肅純皇后) [53] 응우옌 왕조 수립 이전 베트남 남부를 지배하던 지방 정권. 명목상으로는 후 레 왕조의 신하였기 때문에 황제(皇帝)가 아닌 왕을 칭했지만 사실상의 독립 국가였고, 역대 왕도 후일 황제로 추존되었다. 다만 황제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많이 있다. [54] 자롱 황제 추존 [55]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는데, 둘째와 셋째 아들은 쌍둥이다.
→ 자신소의홍인덕비(慈信昭懿弘仁德妃)
→ 자신소의홍인숙덕정황후(慈信昭懿弘仁淑德靖皇后) [35] 자량광숙의비(慈良光淑懿妃)
→ 자량광숙명덕의비(慈良光淑明德懿妃)
→ 자량광숙명덕의공가유황후(慈良光淑明德懿恭嘉裕皇后) [36] 휘공자신순비(徽恭慈愼順妃)
→ 휘공자신온숙순비(徽恭慈愼溫淑順妃)
→ 휘공자신온숙순장효문황후(徽恭慈愼溫淑順莊孝文皇后) [37] 정숙자정혜비(貞淑慈靜惠妃)
→ 정숙자정민예혜비(貞淑慈靜敏睿惠妃)
→ 정숙자정민예혜경효소황후(貞淑慈靜敏睿惠敬孝昭皇后) [38] 찬국정부인(贊國正夫人)
→ 자민소성장비(慈敏昭聖莊妃)
→ 자민소성장렬장비(慈敏昭聖莊烈莊妃)
→ 자민소성공정장신효철황후(慈敏昭聖恭靜莊愼孝哲皇后) [39] 자선혜성정비(慈僊惠聖靜妃)
→ 자선혜성정순정비(慈僊惠聖貞順靜妃)
→ 자선혜성정순정인효철황후(慈仙惠聖貞順靜仁孝哲皇后) [40] 국태부인(國太夫人)
→ 자절정숙헌비(慈節靜淑憲妃)
→ 자절정숙효자헌비(慈節靜淑孝慈憲妃)
→ 자절정숙혜민헌순효의황후(慈節靜淑慧敏憲順孝義皇后) [41] 자혜명비열부인(慈慧明妃列夫人)
→ 자혜공숙경비(慈惠恭淑敬妃)
→ 자혜공숙의덕경비(慈惠恭淑懿德敬妃)
→ 자혜공숙의덕경목효명황후(慈惠恭淑懿德敬穆孝明皇后) [42] 자의수용아부인(慈懿修容亞夫人)
→ 자의광순숙비(慈懿光順淑妃)
→ 자의광순소헌숙비(慈懿光順昭憲淑妃)
→ 자의광순소헌숙혜효녕황후(慈懿光順昭憲淑惠孝寧皇后) [43] 수의부인(修儀夫人)
→ 온성태비(溫誠太妃)
→ 온성휘의장혜육성효무황후(溫誠徽懿莊慈毓聖孝武皇后) [44] 의정혜공안정자헌효강황후(懿靜惠恭安貞慈獻孝康皇后) [45] 간공제효익정순원황후(簡恭齊孝翼正順元皇后)
→ 승천좌성후덕자인공간제효익정순원 고황후(承天佐聖厚德慈仁簡恭齊孝翼正順元高皇后) [46] 인선자경황태후(仁宣慈慶皇太后)
→ 인선자경복수강녕태황태후(仁宣慈慶福壽康寧太皇太后)
→ 순천흥성광유화기인선자경덕택원공 고황후(順天興聖光裕化基仁宣慈慶德澤元功高皇后) [47] 소의(昭儀)
→ 순덕신비(順德宸妃)
→ 좌천여성단정공화독경자휘명현순덕인황후(佐天儷聖端正恭和篤慶慈徽明賢順德仁皇后) [48] 황태후(皇太后)
→ 자유태황태후(慈裕太皇太后)
→ 자유박혜태황태후(慈裕博惠太皇太后)
→ 자유박혜수강태태황태후(慈裕博惠康壽太太皇太后)
→ 의천찬성자유박혜제숙혜달수덕인공장황후(儀天贊聖慈裕博惠齋肅慧達壽德仁功章皇后) [49] 장의황태후(莊懿皇太后)
→ 장의순효태황태후(莊懿順孝太皇太后)
→ 여천보성장혜순효근여효자명현정수영황후(儷天輔聖莊懿順孝勤恕溫慈賢明靜壽英皇后) [50] 자명숙선유순혜황후(慈明淑善柔順惠皇后) [51] 곤원황태후(坤元皇太后)
→ 곤원창명태황태후(坤元昌明太皇太后)
→ 보천익성곤원창명목자광후장정인수순황후(輔天翊聖坤元昌明穆慈廣厚莊靜仁壽純皇后) [52] 곤의황태후(坤儀皇太后)
→ 곤의창덕태황태후(坤儀昌德太皇太后)
→ 우천상성곤의창덕관후자화수강장숙순황후(佑天相聖坤儀昌德寬厚慈和壽康莊肅純皇后) [53] 응우옌 왕조 수립 이전 베트남 남부를 지배하던 지방 정권. 명목상으로는 후 레 왕조의 신하였기 때문에 황제(皇帝)가 아닌 왕을 칭했지만 사실상의 독립 국가였고, 역대 왕도 후일 황제로 추존되었다. 다만 황제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많이 있다. [54] 자롱 황제 추존 [55]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는데, 둘째와 셋째 아들은 쌍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