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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흉배(胸背)는 중-근세 한자문화권에서 사용된, 임금의 각종 의복이나 관리의 관복에 앞뒤로 붙인 장식이다. 보(補) 또는 보자(補子), 양당(裲襠)이라고도 한다.2. 조선
신숙주의 초상화, 조선 초기 흉배 | 채제공의 초상화, 조선 중~후기 흉배 |
임진왜란 이후 관리의 흉배는 바탕색을 옷 색깔에 맞추지 않게 되었고 재료도 금실에서 색실로 바뀌면서 임금의 흉배와 양식이 차별화된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별도로 만들어 옷에 붙이는 방식이 일반화되었고 사용된 동물도 기러기, 돼지, 사슴, 거위 등 명나라와 다른 자주성을 보이게 된다. 이후 당하관까지 사용이 확대되어 숙종 때는 6품, 영조 때는 9품까지 쓰게 됐고, 무신의 흉배에 비금을 달지 못하도록 했다가 영조 대에 이르러서는 간편하게 문관 당상관은 운학흉배를, 당하관은 백학흉배를 달도록 했다. 그러다 고종 대에 문관 당상관은 쌍학(학 두 마리), 당하관은 단학(학 한 마리)을 달고, 무관 당상관은 쌍호(호랑이 두 마리), 당하관은 단호(호랑이 한마리)를 달았다.
관리의 흉배는 관복 중에서도 예복 개념인 상복에만 달았고, 일상 집무시에 입는 시복은 흉배를 달지 않았다. 그래서 관리들이 항상 흉배 달린 관복을 입는 것으로 묘사되는 한국 사극의 묘사는 엄밀히 말하면 창작물의 반영 오류에 해당된다.
임금의 곤룡포에는 금실로 짠 용흉배를 달았다.[2] 관리가 네모난 흉배를 앞뒤로 하나씩 2개를 붙이는 것과 달리 모양이 둥글고 양 어깨에도 부착하여 총 4개를 붙이게 되는 것이 특징이다. 양란 이후 양식이 바뀐 관리의 흉배와 달리 바탕색을 옷과 같은 색으로 만들어 부착하는 방식이 유지되었다. 어진과 유물을 보면 명나라 멸망 전까지는 용이 정면에서 보면 왼쪽을 바라보는 측면상이었다가, 명나라 멸망 후에는 용이 정면을 바라보는 정면상으로 변화하였다.
왕실 여성의 흉배는 크게 네 시기로 나뉜다. 15세기 전반~17세기 중반까지는 적계흉배를, 17세기에는 적보자를 사용했고, 18세기인 1638년(인조와 장렬왕후가 가례를 올린 해)부터 1751년(영조 27년) 국조속오례의보서례 반포 이전까지는 직금 혹은 자수로 제작한 원형 봉보를 사용했다. 대왕대비부터 세자빈까지 같은 형태였고, 견화도 사용했다. 봉보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상방정례에 나타난다. 그러다 영조 27년에 국조속오례의보서례가 반포되면서 왕비, 세자빈, 세손빈에 한해 남편과 같은 금수용보를 사용하게 되었다. 왕, 왕비, 세자, 세자빈은 원보에 견화까지 달았지만, 세손과 세손빈은 삼조방룡보를 사용했고 견화는 달지 않았다.
참고자료1, 참고자료2
2.1. 흉배사진
2.1.1. 흥선대원군
기린흉배
거북흉배
3. 명나라
토목의 변 이전에는 조선과 차이가 없으나 토목의 변 이후 정면에 용보를 3개나 부착한 곤룡포가 등장했다. 자세히 보면 용보 속의 용이 머리를 향하는 위치가 전부 다르다. 맨 위의 용만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평상시 입는 곤룡포가 아닌 국가 제례 시 입을 수 있게 만든 곤복형 곤룡포로, 명나라 후기에 이르러서는 기존 곤복에서 곤복 형식의 곤룡포로 제례용 복장이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평시에는 조선의 것과 같이 용보가 4개인 것, 민무늬 곤복, 곤복 전체에 용무늬가 수놓인 것 등 다양한 곤룡포를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