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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트어티엔후에 성의 성도 [ruby(城,ruby=Thành)] [ruby(鋪,ruby=phố)][ruby(化,ruby=Huế)] 후에 시 | Huế City | 化[1]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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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 <colbgcolor=#fff,#1f2023> 70.67 km² | |
인구 | 455,230 명 | |
인구밀도 | 6,325명/km² | |
시 정부 홈페이지 | 홈페이지 |
위치 |
[clearfix]
1. 개요
베트남 중부에 위치한 도시. 중부의 대도시 다낭에서 북서쪽 기준으로 80km 정도 떨어져 있다.인구는 약 34만 명으로 지금은 중소도시지만 대한민국의 경주시나 일본의 교토시처럼 과거 수도였던 곳으로, 많은 유적이 존재하는 베트남의 대표적인 역사도시로 베트남의 통일왕조 응우옌 왕조의 수도였다. 구시가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트어티엔후에 성(省)(Thừa Thiên-Huế, 承天順化)의 성도이다.
시내는 흐엉강(Sông Hương 또는 Hương Giang)[2][3]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펼쳐져 있으며, 여기도 중국에서 건너온 풍수지리 사상이 적용됐기 때문에 서울처럼 강 북쪽이 구시가, 남쪽이 신시가이다. 구시가를 이루는 후에 성(Kinh thành Huế, 京城化)은 바둑판처럼 구획되어 있으며, 후에 성 안의 후에 황궁(Hoàng thành Huế, 皇城化)과 더불어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다. 그 외에도 많은 역사적 기념물과 건축물들을 보유하고 있다. 남쪽 신시가는 기차역 후에역, 많은 숙소들과 여행자 거리가 있다.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지명의 발음을 '훼' 정도라고 해야 잘 알아듣는다. 실제 발음기호로 표기하면 [hwě]이며, 이는 '훼'라는 단음절의 발음과 가깝다.
2. 역사
일찍이 삼국지에도 등장하는 도시로 교주에 소속되어 후한 최남단인 일남(日南)군 일대에 속했다. 이후 참파인들이 거주하다가 14세기에 베트남 왕조의 세력권으로 들어왔다.응우옌 가문의 주 본거지로 옛 이름은 푸쑤언(Phú Xuân, 富春)이었고, 1802년부터 1945년까지 베트남( 완조)의 수도였다. 프랑스의 식민지배 시기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인 중부(안남)의 수도였고[4] 이전에 수도 기능을 하던 구시가지 외에 신시가지가 생겨나는 등 발전했다.
베트남 공화국 시대에는 직할시이자 베트남 군사분계선에서 고작 100km 떨어져 있는 최북단 접경도시이기도 했다.[5] 또한 응오딘지엠 정권 당시 반정부 시위가 아주 격렬하게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며, 그 때문인지 소신공양을 한 스님인 틱광둑의 심장이 보관된 곳이기도 하다. 틱광둑의 소신공양 이후 반지엠정권 불교도들이 시위가 남베트남에서 격렬히 일어났던 곳이다. 그리고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대규모 지상병력을 파병하던 시점에도 남베트남 군부와 불교도가 연합하여 일으킨 봉기가 발생한 곳이기도 하며, 1966년 당시 남베트남의 국가원수였던 응우옌반티에우 주석과 남베트남의 수상이었던 응우옌까오끼가 병력을 보내 봉기한 남베트남군을 진압한 곳이기도 하다. # 베트남 전쟁 당시에는 MACV( 주베트남 미군사령부)와 남베트남군의 1사단 본부가 위치한 곳이었고, 1968년 구정 공세 때는 베트콩과 베트민군이 1개월간이나 시를 장악하여 저항했다. 주로 전투는 북쪽의 왕궁이 있는 구시가지에서 진행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에 의해 후에 대학살이 일어난 도시다. 베트남 전쟁 최악의 학살로 불리는 후에 대학살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에 의해 학자, 지식인, 정치인, 공무원을 포함한 많은 민간인들이 학살 당한 사건이며 그 희생자는 최소 수백명에서 수천명에 달한다.[6]
구정 대공세 당시 전투에 투입된 미 해병대가 시내 대부분을 탈환했을 때에도 겹겹으로 방어선을 만들면서 결사항전했기에 미군은 B-52를 포함한 대규모 융단폭격과 해군의 함포사격까지 동원해야 했다. 이로 인해 민간인 사망자 급격히 증가했다. 그 때문에 노엄 촘스키의 경우 대다수의 민간인 사망자가 베트민군이 아닌 미군의 화력에 의해 발생했다고 여러 저서들에서 주장했을 정도[7]. 이때 미군의 무차별 함포사격으로 황제가 머물던 서양식 궁전 건중루를 비롯한 후에 황궁의 여러 건물들이 파괴되었고 90년대부터 베트남 정부에서 복원 공사를 진행 중에 있다. 결국 미 해병대의 치열한 혈전을 치른 끝에 베트민군이 물러나게 되고[8] 1973년 이후 미군이 철수하고 남베트남과의 휴전협정이 파기되면서 1975년 북베트남이 다시 점령하게 된다.
3. 관광
왕궁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보니 외국인 관광객이 상당히 많은 편이다. 다만 베트남 전쟁 때 여기가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의 최전방이었기 때문에 미군의 폭격에 의해 후에 황궁은 많은 피해를 입어 소실된 부분이 많다.흐엉강을 따라 보트를 타고 내려가면서, 강 주위에 있는 황릉들과 사원들을 내려서 관람할 수 있으나 오후 5시 정도에 문을 닫는 곳이 있으므로 오전부터 나서야 웬만큼 볼 수 있다. 뜨득 황제의 능의 경우 위에서 기술한 대로 단순한 능을 떠나 생전에 황제의 궁전으로도 기능했기 때문에 여러 시설들이 있는 편이라 관람에 시간이 살짝 걸린다.
음식문화는 후에만의 쌀국수인 분보훼가 유명하며, 과거 수도였던 곳이라 궁중 요리도 존재한다.
한국인들이 많이 가는 다낭에서도 그리 멀지 않으니 다낭 방문시 2~3일 정도 시간을 내어 후에도 가보는걸 추천한다.
3.1. 후에왕궁
자세한 내용은 후에왕궁 문서 참고하십시오.한국으로 치면 경복궁에 해당하는, 베트남 최후의 왕조 응우옌 왕조의 궁궐이다. 베트남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한자, 유교 문화권이었기 때문에 다른 동남아 국가들과 달리 중국이나 한국 왕궁과 비슷한 점이 많다. 강 북쪽의 구시가지 중앙에 있고 해자가 둘러쳐져 있다.
황궁의 경우 반나절 정도면 웬만큼 둘러볼 수 있으며, 2024년 기준으로 우리 돈 만원 정도의 입장료를 내야 한다. 아래 설명할 왕릉과 입장권을 세트로 해서 조금 할인해서 파는 것도 있다. 이런 세트 입장권은 사용 유효기한이 이틀이라 전날 왕궁 다음날 왕릉 식으로 쓸 수도 있다.
3.2. 왕릉
왕릉들은 시내가 아니라 후에 시가지 남쪽 외곽의 흐엉 강변 일대에 퍼져있다. 방문하려면 투어, 택시, 오토바이 등을 이용해야 한다.한국의 왕릉과 달리 화려한 부속건물이 많아 역덕이 아니라도 볼만하다. 몇몇 왕릉은 무덤이라기보단 별궁에 가까울 정도이며, 베트남 전쟁의 피해를 많이 입은 위 왕궁과 달리 보존상태가 좋아서 한국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베트남 왕실건축을 볼 수 있다.
7명의 황제릉만 있는데 나머지는 프랑스에 저항하다 폐위되거나 바오다이처럼 해외로 망명하는 등 무덤을 만들 여유가 없었던 경우다.
3.2.1. 제1대 자롱 황제릉
천수릉(天授陵 Thiên Thọ Lăng)이라고도 부른다.
자롱 황제는 응우옌 왕조를 개창한 인물로 역사적으로도 제일 중요하지만, 후에 시내에서 가장 멀리 있는 편이고 보존상태도 다른 왕릉보다 안 좋은 편인데다 자롱 황제란 사람 자체가 베트남인들에게 인기가 별로 없는 편이라서[9] 관람객이 많지 않은 편이다.
1814년에 건설을 시작하여 1820년에 완공되었다. 42개의 크고 작은 언덕과 가산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롱 황제가 생전에 자주 공사현장을 찾아갈 정도로 심혈을 기울인 능묘이다. 두리안 나무와 소나무 등이 주위에 빽빽이 심어져 있다.
입구로 들어가는 길에도 여러 왕족들의 부속 무덤이 있고 입구에서 정면으로 가면 자롱 황제와 황후가 묻힌 무덤이 있고 왼쪽에는 그의 업적을 당시에 기록한 공덕비가 한문으로 쓰여있고 오른쪽에는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다.
3.2.2. 제2대 민망 황제릉
효릉(孝陵 Hiếu lăng)
1840년에 건설을 시작하여 1843년에 완공되었다. 이 무덤을 짓는 데에 1만 명의 인부들이 동원되었으며, 거대한 호수와 숲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성벽에 둘러싸여있고 많은 부속건물에 정원에 연못에 돌다리 등으로 이루어져있어 무덤이라기보다는 교외에 있는 또다른 궁전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3.2.3. 제3대 티에우찌 황제릉
창릉(昌陵 Xương Lăng)
1848년 2월에 건설을 시작하여 10개월만에 완공되었다. 두 선황들의 묘소를 참고하였으나 자연과 더욱 동화된 모습을 보였고, 황제 본인도 검소한 성격이었기에 규모도 작다. 게다가 전쟁으로 인하여 파괴되어 현재는 일부만이 남아있어 찾는 관광객이 적고 한적한 편이다.
3.2.4. 제4대 뜨득 황제릉
겸릉(謙陵 Khiêm Lăng)
1848년 2월에 건설을 시작하여 1873년에 완공되었다. 베트남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왕릉들 중 하나로 꼽히며, 그 규모와 화려함도 상당하다.
후에에서 베트남 전통 황실건축을 보고 싶다면 황궁보다는 응우옌 왕조의 4대 황제인 뜨득 황제의 능을 구경하길 바란다. 보존이 잘되어 있으며, 특히 여기는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뜨득 황제가 직접 건설을 지휘하고 완성된 후 여기서 16년을 살면서 국정업무도 보고 여가를 즐겼기 때문에 또 하나의 궁전이나 마찬가지다. 12헥타르 면적에 50개가 넘는 부속 건물로 돼 있으며, 보존 상태도 나쁘지 않다. 지금도 웅장한 사원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워낙 가혹하게 공사 인력들을 부린 탓에 공사 도중 봉기가 일어나기도 했다.
3.2.5. 제5대 죽득 황제릉
안릉(安陵 An Lăng)
왕궁 바깥에 있는 죽득 황제의 무덤으로, 죽득 황제가 3일만에 폐위되어 유폐되어 죽었고, 이후 추존된 탓에 타 황제들의 무덤에 비하여 훨씬 규모가 작고 간소한 편이다.
3.2.6. 제9대 동카인 황제릉
사릉(思陵 Tư Lăng)
1888년에 건설을 시작하여 재정 부족으로 건설이 지지부진하다가 1917년에서야 완공되었다. 이전 왕릉들이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면, 사릉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민간의 영향을 많이 받아 황금빛이 덜하고 소박한 느낌을 준다. 그가 재위하던 시기쯤 되면 베트남이 프랑스의 본격적인 침략을 당하던 시점이라 그렇기도 하다. 그래서 건축양식에 유럽 건축의 양식이 가미되고 있다.
3.2.7. 제12대 카이딘 황제릉
응릉(應陵 Ứng Lăng)
1920년에 건설을 시작하여 1931년에 완공되었다. 카이딘 황제는 자신의 영묘를 짓기 위하여 전역의 세금을 30% 인상할 정도로 묘 건설에 열성을 올렸고, 이로 인하여 베트남의 재정은 갈수록 약화되었다. 카이딘 황제의 무덤은 이전 황제들의 묘에 비하면 규모는 훨씬 작은 축에 속하지만, 프랑스의 기술력이 대폭 반영돼 금과 색유리, 보석 등을 많이 사용하여 그 화려함과 정교함은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굉장히 뛰어난 편이다. 왕의 석관 바로 위에는 황금으로 장식한 황제의 상이 있다.
3.3. 기타 볼거리
- 티엔무 사원에는 후에의 상징 중 하나인 7층탑이 있으며, 틱꽝득 스님이 생전에 머물렀고, 사이공으로 소신공양[10]을 하러 갈 때 탑승했던 차[11]가 전시되어 있다.
- 바오꿕 사원(보국사, Chùa Báo Quốc)은 응우옌 왕조의 왕실 사원이던 곳으로 기차역 뒤편에 있다.
- 호꾸옌(호권, 虎圈, Ho Quyen)은 동양의 콜로세움으로, 원형 경기장에서 코끼리와 호랑이를 싸움붙이며 그것을 구경했던 곳이다.
- 단남자오(남교단)은 1945년 베트남 왕국이 멸망할때 까지 황제들이 옥황상제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중국의 천단이나 한국의 환구단과 비슷하다.
- 동바 시장
- 꿕혹(국학) 베트남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이자 엘리트 학교였고 호치민, 보응우옌잡, 응오딘지엠 등 베트남 현대사의 거물들이 이곳을 졸업했다.
4. 교통
후에에 공항이 있기는 하지만 한국에서 출발하는 직항은 없으며, 인근 대도시인 다낭으로 갔다가 버스, 기차 등을 이용해 이동하는 경우가 많다. 하노이나 호치민 관광 후 베트남 국내선을 이용해 이동할 수도 있다.하노이나 나트랑, 호치민 등 거리가 있는 지역에서 침대열차를 이용해 이동할 수도 있다. 하루에도 열차는 여러 대 다니며, 저녁에 출발하는 열차를 타면 다음 날 일찍 도착하는 식으로 크게 피곤하지 않으면서도[12] 이동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일정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5. 여담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가장 인근 대도시라고 할수 있는 다낭시(100km 정도 거리)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다낭은 남부의 호찌민시와 비슷한 느낌이 나고 도시적인 느낌이 강하다면, 후에는 수도인 북부 하노이시의 아기자기하고 오밀조밀한 감성이 물씬 풍겨난다.후에 중심부의 안반정 신도시에 자유경제구역과 스마트미디어시티를 구축하기로 LH와 후애시 지방정부 간 양해각서가 체결되었다. #기사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은 한-베트남 스마트시티 건설기술 협력센터(VKC)를 통해 스마트시티 건설 마스터플랜 수립에 참여했다.
1975년 패망한 베트남 공화국의 초대 총통인 응오딘지엠이 이 지역 출신이다.
베트남에서 미인이 많은 도시로 알려져있다.
6. 관련 문서
[1]
중국인들은 順化라고 표기한다.
[2]
이를테면 한
가람과
한강의 차이다.
[3]
Hương Giang의
한자 香江(이걸로 검색하면
홍콩이 나온다.)을 의역한 Perfume River로 알려지기도 했다.
[4]
북부(통킹)의 수도는 하노이였고 남부(코친차이나)의 수도는 사이공(현 호치민 시)이었다
[5]
서울은 군사분계선에서 40km 정도 떨어져 있다.
[6]
한국전쟁 때 북한군의
인민재판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7]
오히려 이 경우가 후에에서의 민간인 사망자 대다수라는 얘기도 있다. 타운센드 후프스 소령은 이 현장을 돌아보며, 최소 2,000~3,000명 이상의 민간인 시신이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건물 및 잔해속에 나뒹굴고 있다 말했다. PBS 베트남 전쟁 다큐멘터리 또한 최소 6,000명 정도의 민간인이 이 막강한 화력에 의해 죽었다고 언급했다. 생각해보면, 도시 75% 이상이 미군의 폭격과 함포사격으로 파괴되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민간인 학살은 상당히 현실성 있는 얘기다. 인구 밀집 지역에 무차별 화력공세를 미국이 퍼부은 것은 사실이니.
[8]
이때 활약한 것이
M50 온토스인데,
M48 패튼 전차보다 차체가 작아 시가지에서 원활한 기동이 수월하였고 106mm 무반동포 6문의 화력으로 베트민군의 진지등을 파괴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해병대원들이 많이 선호했다고 한다.
[9]
요약하면 베트남 통일을 위해 프랑스의 힘을 빌렸다. 그리고 한국사의
신라는
나당전쟁에서 승리해
당나라를 쫓아내서 스스로 상황을 정리했고 이에 따라
문무왕이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반대로 베트남 응우옌 왕조는 결국 힘을 빌려쓴 감당을 못 하고 프랑스한테 잡아먹혔다. 이러다보니 자롱 황제는 프랑스에 결사항전한 후대 황제들보다도 인기가 없는 편이다.
[10]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의 탄압에 항거하기 위해서였다.
[11]
1957년형 오스틴 A95 웨스트민스터라는 영국제 승용차로 2010년대 초반까진 녹이 슬어 있는 등 방치상태였다가 2010년대 후반까지 2번 재도색 되어있다.
[12]
침대열차에서 숙면이 가능한지 여부는 개인차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