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11 20:26:07

송해(전연)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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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기타

1. 개요

宋該
생몰연도 미상

전연의 인물. 자는 홍선(弘宣). 기주(冀州) 평원군(平原郡) 평원현(平原縣) 출신.

2. 생애

영가의 난을 피해 동향 출신의 두군(杜群), 유상(劉翔) 등과 함께 처음에는 유주자사 왕준을 섬기다가 단부를 섬겼는데, 이들 모두 역량이 부족하다고 여겨 여러 유민 무리를 이끌고 모용외에게 귀부해 황보급, 황보진, 무개, 유빈, 봉유와 함께 기밀 사항을 관장했다.

대흥 원년(318년) 3월, 동진의 원제 사마예가 모용외를 용양장군, 대선우로 삼자, 모용외는 송해와 유상을 나란히 용양장군 주부로 임명하였다.

대흥 2년(319년) 12월, 모용외가 요동군을 다스리던 평주자사 최비(崔毖)[1]를 무찌르고, 그를 섬기던 고첨을 여러 번 등용하려 하였으나, 고첨은 매번 병을 핑계로 사양하였다. 모용외가 이를 기분 나쁘게 생각하니, 송해는 그를 죽이라고 했지만 모용외는 듣지 않았다. 모용외는 오히려 송해를 동진에 사자로 보내 요동군을 평정한 일을 보고하고 극성 전투에서 우문부로부터 노획한 옥새의 인끈 3개를 전달케 하였고, 송해는 배억과 함께 동진으로 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다.

함화 6년(331년) 겨울, 송해는 여러 신하들과 공동으로 모용외에게 대장군, 연왕(燕王)을 관작을 동진에 요구할 것을 주청하였다. 모용외는 신하들의 의견을 수렴하면서 승작 요구에 반대하던 참군사 한항을 좌천시키고, 봉추(封抽)를 동진에 사자로 보내 연왕으로 승작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태위 도간에 의해 작위는 조정의 전권이라는 말로 단칼에 거절당했다.

함강 3년(337년) 9월, 모용외의 뒤를 이어 요동공에 즉위한 모용황이 연왕을 자칭하자, 송해는 상백(常伯)에 임명되었다가 우장사로 옮겨졌다.

영화 원년(345년) 정월, 모용황이 가난한 백성들에게 소와 황실의 땅인 원중(苑中)을 빌려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하였다. 대신 소를 빌린 자는 수확량의 7할, 땅을 비린 자는 수확량의 8할을 세금을 내게 하니, 기실참군 봉유(封裕)가 무거운 세금에 대해 간언하는 동시에, 송해를 가리켜 군주에게 아부하기 좋아하여 간언하는 선비를 탄핵하면서 정작 그 자신은 뼈대가 없고, 이것을 가진 다른 사람을 시기해 귀, 눈을 덮어 가리므로 대단히 충성스럽지 못하다는 비판을 하였다.

함강 3년(347년) 10월, 송해는 성격이 탐욕스러워 모용황이 승건전(承乾殿)에서 연회를 열었을 때 비단 100필을 하사받았다. 송해는 집으로 가다가 그것들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넘어지는 바람에 모두 가지고 갈 수 없어 이를 수치로 여겼다고 한다.

이후 요동내사로 승진하여 지역을 다스리던 송해는 시랑 한편(韓偏)에게 뇌물을 받아 그를 효렴으로 천거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에 한편이 반란에 가담하자, 모용황은 반란을 토벌한 후에 명하였다.
"무릇 효렴이란 도덕적이고, 차분하며, 기민하여 왕정(王庭)에 천거받는 자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은 반란한 무리를 도와 미혹되게 한 죄가 있고, 그를 토벌하기 위해 왕의 위세가 이르렀을 때는 성에 기대어 추잡한 욕을 하였다. 이토록 심히 패역한 자를 천거한 사람을 조정이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송해는 가히 4년의 형이 적합하다 할 수 있으나, 한편에게 뇌물을 받아 그를 승진시켜 왕의 법률을 어지럽혔으니, 그를 면직시키고 종신금고에 처하도록 하겠다."
결국 이로 인해 송해는 투옥되면서 더이상 사서에 등장하지 않는다.

3. 기타

소설 고구려에서는 배억, 봉추, 황보급, 봉혁과 함께 목환진, 소희련을 격파한 일로 모용외에게 복속한 인물로 언급된다.


[1] 조조를 섬겼다가 비참한 최후를 당한 최염(崔琰)의 증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