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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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浚
(252 ~ 314)
1. 개요
서진의 인물이며 자는 팽조(彭祖)로 왕침의 아들, 아내는 문찬, 위수, 화방. 병주 태원군 진양현 사람.2. 생애
어머니는 조씨로 양갓집의 딸이었지만 몰락해 빈천하게 되었으며, 왕침으로부터 자식으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266년에 왕침이 죽고 그에게서는 자식이 없어서 왕준이 작위를 계승했고 부마도위가 되었다. 282년에 원외상시로 옮겨졌다가 291년에 월기교위에 임명되었고 이후 우군장군, 하내태수, 동중랑장 등을 역임했으며, 300년에 태자 사마휼이 허창에 유폐되자 가남풍의 밀명에 따라 손려와 함께 사마휼을 살해했다.영북장군, 지절, 유주제군사도독에 임명되었으며, 이어서 영삭장군에 임명되면서 팔왕의 난으로 천하가 혼란하자 딸을 각기 선비족에게 보내어 단무물진, 소서련 등에게 보냈으며, 사마경, 사마예, 사마영, 사마옹, 사마흠 등이 연합해 사마륜을 죽이려 했다. 이에 왕준은 자신이 거느린 병사, 백성들에게 행동을 금지해 그들이 불러모으는 곳에 갈 수 없게 했다.
사마영이 왕준을 토벌하고자 했고 왕준도 사마영을 토벌하려고 했으며, 304년에 사마영이 화연(和演)을 시켜 왕준을 암살하려고 했다. 화연, 심등(審登) 등이 왕준과 함께 계성 남쪽의 청천에 함께 놀러가는 틈에 죽이려 했지만 폭우로 인해 병기에 습기가 차 실패했다. 왕준이 하늘의 도움을 얻은 것이라 여긴 심등이 이 일을 이야기하자 왕준은 심등, 사마등과 함께 화연을 죽이고 유주를 장악해 독립했으며, 사마영이 조서가 내려졌다고 징소하자 단무물진, 갈주, 사마등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사마월의 편에 가담해 사마영을 공격했다.
영흥 3년(306년)에는 현현령(惤縣令) 유백근(劉柏根)이 수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요적이 되었고, 진조에 반란을 일으켜 자립하여 현공이라 자칭하였다. 직후에 치하를 따라 침공하자 고밀왕 사마략은 진군장군 유우에게 요격을 명했으나 유우는 반격을 당해 낙양으로 패주하였다. 이어 유백근이 사마략을 공격하자 사마략은 요성으로 도주했다. 이후 유백근은 안북장군 왕준이 토벌하였다.
왕준은 업성을 함락하고 계로 돌아와 선비족들이 부녀자들을 약탈하자 함부로 감추어둔 사람의 목을 벨 것이라면서 8천여 명을 역수에 빠뜨려 죽였다. 사마충[1]이 복위하자 표기대장군, 도독동이하북제군사, 영유주자사 등에 임명되었으며, 회제가 즉위하자 사공, 오환교위에 임명되었으며, 왕준은 단무물진을 요서군공에 봉할 것을 상소했다.
석륵이 기주를 공격하자 왕준은 단무물진과 연합해 석륵을 격파했으며, 왕준이 기주를 다시 공격해 한나라의 기주자사 유령을 죽이자 왕준이 기주를 소유하게 되었다. 왕준은 대사마, 시중, 대도독, 독유기제군사에 임명되었다. 석륵이 공격하자 선비족인 단부의 단질육권, 단말배 등에게 석륵을 물리치게 했다. 그러나 단부가 패하고 석륵과 강화하면서 왕준을 손절치는 바람에 세력이 약화되었으며, 311년 가을 7월에 사마치가 전조의 공격을 받아 포로로 잡히자 제단을 만들어 유제를 지내고 황태자를 세워 천하에 이를 포고하면서 자신을 영상서령으로 칭하고 부하들에게 각기 관직을 임명했다.
왕준은 존호를 칭하려 했고 이를 만류하는 부하들을 함부로 죽였으며, 조세를 마구 거두어들이고 요역을 함부로 동원해 선비족, 오환족들이 왕준을 배반했다. 이에 석륵이 거짓으로 귀부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석륵은 유통이 사사로이 사자를 보내서 귀부하려고 하자 그 사자의 목을 보냈는데, 왕준이 석륵을 충성스럽다고 여겨 의심하지 않았다. 왕준은 석륵에게 사자를 보냈지만 석륵이 일부러 약한 군세를 보여주자 왕준은 이 소식을 듣고 더욱 방비를 하지 않게 되었으며, 결국 석륵의 공격을 받아 붙잡혔고 양국(襄國)[2]에서 죽임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