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8-10-27 00:46:25

삼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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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5대 국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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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법정 공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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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기의 일러스트. 오늘날 독립문 앞에서 만세삼창

1. 개요2. 역사3. 노래4. 역대 경축식장5. 이야깃거리6. 신조어

1. 개요

三一節, 3·1절[1]

2019년 3월 1일, 100주년을 맞이하게 된다.

일제강점기였던 1919년 3월 1일 토요일 (음력은 1월 29일), 독립을 선언하고 대대적인 국기 행진을 시작한 독립선언기념일이다. 3.1 운동은 세계에서도 비슷한 예가 많지 않은 대규모의 집단적 저항 운동으로 광복에 대한 한국인의 염원과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만천하에 알린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광복절 건국절이 아닌 이유가 삼일절과도 관련이 있다. 3.1 운동을 계기로 하여 한반도를 비롯하여 해외 각지에서 존재하던 독립운동 구심체가 통일된 임시정부 수립운동으로 이어져, 서울의 한성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아 연해주 대한국민의회가 상하이 상해정부가 합쳐지는 형태로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것이다. 즉, 3.1 운동의 중요한 의의 중 하나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었기에 건국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 삼일절을 국가가 기뻐하는 국경일로서 기념하는 것이다.

이 사건이 있기 며칠 전에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이라는 음식점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선언서를 발표하고 잡혀갈 예정이었으므로, 실제 시위를 주도할 15인이 더 있었다고 한다. 다만 여기에는 14인설과 16인설도 있으며 정노식을 제외하느냐, 김세환을 추가하느냐에 따라서 나뉜다.

어쨌거나 실제 시위를 15인까지 모두 합쳐서 민족대표 48인이라고 불린다. 이 중 1인만 빼고 모두 변절했다는 암울한 헛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으나, 사실은 서너명 정도만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했고, 나머지는 끝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께 감사하자. 구체적으로 33인 중 3인인 박희도, 정춘수, 최린이 변절한 사람들이고, 48인 중에서는 최남선이 포함되어 4인이 된다. 이들이 작성한 독립선언서가 바로 기미독립선언서다.

400년 동안 삼일절은 화요일, 목요일, 일요일에 각각 58번씩 오고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57번, 월요일 수요일에는 56번이 온다. 삼일절이 주말인 경우는 400년 동안 115번, 연휴가 되는 경우는 400년 동안 113번이다.
  • 삼일절 연휴의 연도별은 다음과 같다.
    2013년, 2019년, 2024년, 2030년, 2041년, 2047년, 2052년, 2058년: 3월 1일 (금) ~ 3월 3일 (일)
    2010년, 2021년, 2027년, 2038년, 2049년, 2055년: 2월 27일 (토) ~ 3월 1일 (월) - 이럴 경우 공휴일 중 최소 5일이 날아간다.
    2004년, 2032년, 2060년: 2월 28일 (토) ~ 3월 1일 (월) - 이럴 경우 공휴일 중 최소 5일이 날아간다.

2. 역사

삼일절의 역사는 독립 선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성립과 함께 시작된다.

1920년 2월 임시정부는 내무부 포고령 1호를 통해 3.1독립선언 1주년 기념식 준비회를 발족하고 성대한 식전을 준비하였다. 1920년 3월 1일 당일 상하이에서는 오전부터 한인 가옥마다 국기가 나부끼기 시작했으며, 정부 차원의 경축식은 오전 10시에 이동휘 국무총리와 국무위원, 임시의정원 대의원, 인성학교 학생이 모인 가운데 상해 올림픽 대극장에서 봉행되었다.

파일:최초의 삼일절 경축식.jpg

당일 오후 2시에는 대한교민단이 주최하는 3.1절 축하회가 성대히 열려 여운형 교민단장의 연설과 이동휘, 안창호의 축사, 중국 남녀 학생들의 축하무를 아우르며 오후 4시 반 기념 행사가 끝이 났다. 이와 동시에 한인들은 상하이 시가지에서 일본총영사관 앞까지 태극기를 들고 가두 행진을 벌였다.

대한민국 2년(1920) 당시 발행된 임시정부의 관보인 독립신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삼월 일일 우리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선언한 삼월 일일,
이천만 대한인은 간 곳마다 있는 곳마다,
천년 후 만년 후까지 자자손손히 열성과 환희로써 지켜 축하할 삼월 일일
대한의 자녀들은 어떻게 이날을 지켰는가.
삼월일일 오전 육시경부터 상해시내의 한인의 주가에는 부활한 태극국기가 날기 시작하엿다. 바로 밤새기를 기다리기가 어려웠던 것 갓다 명덕리 보강리 급로비로 일대에는 여긔져긔 태극기가 날닌다. 혹 개인으로 한인의 이층을 빌어잇는 이들도 다 국기를 달아 이날을 경축하엿다. 아마 법계 일대만 하여도 사오십은 된 것이니 상해시내에 이러케 대한의 국기가 날닌 것은 금차가 처음이다 이날에 비로소 세계 각국인이 모혀 사는 상해 한복판에서 우리는 대한인이다 하는 표를 보엿다 매일요와 경절에 영법미의 국기가 호호에 날닐 때에 우리는 얼마나 그를 부러워하엿던고. 동포들은 아해들까지도 수일전부터 이 신성한 국경일의 준비를 하야 작일에 지하야 아조 명절기분이 되엿섯다. 날은 흐럿스나 중춘일기에 그러치아나도 심신이 자못 상쾌하거늘 문전로두에 빗나는 태극기가 경풍에 편편함을 볼 때에 대한인의 감격이야 얼마나 하엿스랴. 아직 촌척도 회복치못한 고강, 차금 옥중에 게신 형제와 자매 모다 생각하면 가슴이 터질듯 하지마는 천만대에 기념할 우리 민족의 부활일인 오늘 하로를 무한히 깃부게 축하하자, 놀자.

파일:1920년 3.1절 경축 다뉴바 시 시가행진.jpg

삼일절 경축 식전은 임시정부는 물론 미주와 국내 일부 지역, 노령, 쿠바, 심지어는 일본 일부 도시에서도 치러졌는데, 특히 미국에서는 캘리포니아 주 다뉴바 시에서 300인의 한인이 회집하여 태극기를 단 차량과 간호복을 입은 여성, 태극기와 성조기를 든 부대가 시가행진을 벌였으며, 국내에서는 임시정부 요인이었던 장병준이 잠입하여 <대한독립 1주년 기념 경고문>이란 이름의 전단지를 뿌리며 3월 1일이 건국의 기념일임을 동포들에게 포고하였다. #

삼일절 행사는 일제강점기 동안 중국, 미주, 연해주, 심지어는 일본에서도 개최되었는데, 개최 방식은 강당이나 운동장, 교회 등을 빌려 여는 경축대회와 태극기와 깃발, 전단을 휘날리는 기습 시위로 나뉘었다. 전자는 중국과 미주, 연해주에서, 후자는 주로 일본 유학생들이 자주 행하던 방식이었다.

상해에서 치러졌던 삼일절 경축식의 경우, 올림픽대극장이나 침례교당 등지를 빌려 만국기와 태극기로 장식을 하고 군악대를 초청하여 독립군가와 애국가가 연주되는 가운데서 치러졌다. 식전이 끝난 뒤에는 차량을 빌려 태극기와 독립기[3]를 달고 악대를 앞세워 일본 영사관까지 가두행진을 하거나 축하연회, 기념연극 등을 베풀기도 했다. 1920년대에는 중국을 비롯하여 대만, 필리핀, 인도, 베트남, 몽골 등 동아시아의 피압박민족 독립운동 대표단이 식전에 참석하여 축사를 하고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반 제국주의 연대를 확인하기도 했다. [4]

상해 이외의 지역의 경우, 쿠바에서는 대포를 빌려 삼일절 식전 전에 21발의 예포를 쏘기도 했고, 1942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한인들의 군사 조직인 한인경비대가 이날을 경축하는 의미에서 열병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파일:대한민국 24년 3월 1일 미국 가주 한인예비군 열병식.jpg

(한인경비대의 삼일절 경축 열병식 사진자료)

삼일절이라는 명칭은 1920년부터 사용되었으나, 당시 임시의정원에서 법률로 정한 국경일의 명칭은 독립선언기념일이었으며, 때때로 독립기념일, 국경일로 불리었다. 삼일절이라는 명칭은 중화민국의 쌍십절이나 미국 독립기념일의 별칭인 Fourth of July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5]

윤봉길 의사의 천장절 의거 이후 임시정부가 피난을 함에 따라 성대한 식전은 치르기 어려워졌으나 간소하게나마 경축식을 이어나갔고, 중국 측 언론에서도 3.1절을 한국 혁명기념일로 표현하는 등 명실상부한 한인의 국경일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6]

파일:해방 이후 최초의 3.1국경 기념시.jpg

1945년 해방 이후 대한민주의원에서 3월 1일을 국경일로 지정하는 법률안을 제정하였고, 이듬해인 1946년 3월 1일 서울 보신각 앞에서 삼일절 경축식이 거행되었다. 식전에는 이승만 박사와 김구 주석이 참석하였으며, 김규식 박사의 만세삼창 제창으로 식을 마쳤다.

다만 해방 정국에서 3.1절은 좌우익 대립의 장으로 대두되고는 했는데, 국가 건설의 정통성을 3.1 운동에 두려는 좌파와 우파가 서로 대결함에 따라 경축식이 개별적으로 열리는 것은 물론 상호 간의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7] 때문에 1940년대 당시 3월 1일이 다가오면 경찰들은 신경을 곤두섰다고. 다만 3.1절 경축 공연이 곳곳에서 열리는 등 축하 행사도 함께 이루어져 문화 생활에 목말라 하던 당시 민초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도 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성립된 이후 3.1절은 4대절에 포함되었으며, 대한민국 건립의 시원이 되는 최대의 국경일로 간주되었다.
오늘은 3월 1일! 우리 겨레 삼천만의 최대 국경일인 삼일절이다… 이날에는 명실상부하게 거족적인 국경일로 남북의 삼천만이 다 함께 한마음 한뜻으로 즐겁게 노래하고 맘껏 뛰놀며 이날을 경축하자. 이것이 최대 국경일인 오늘을 맞이하여 최대의 축원(祝願)이며 최고의 이상이다. 1949년 3월 1일 동아일보 사설 中

1950년대까지 삼일절에는 명절처럼 상점들이 일제 철시하고 국기를 내걸었으며, 음악회, 학예회, 시열식, 시가행진, 봉화제 등이 대대적으로 치러졌다. 그러나 5.16 쿠데타 이후 3.1절의 위상이 크게 낮아지며 정부 차원의 형식적인 식전과 탑골공원 추념식만 사실상 남게 되었으며, 최대 국경일의 위치도 광복절에 내주게 되었다. [8] 1980년대 대한민국 제5공화국 동안에는 국무총리가 축하연설을 대독할 정도로 천시당했으며, 이때부터 3.1절 경축사가 사실상 정부 정책 홍보의 장으로 추락하게 되었다. 1999년 3.1절 80주년 이후로는 전국 각지에서 학생과 시민들을 동원하여 만세행진 재현행사를 벌이고 있는데, 사학계에서 이를 두고 3.1절을 잘못 기리고 있는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SBS 뉴스 [9]

한편 다가오는 2019년이 3.1절 100주년임에 따라 민간에서는 종교 단체를 중심으로 설립된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가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있으며, 서울시에서도 자체 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중앙 정부 차원의 경축 위원회는 4월 중으로 인선이 완료될 예정이다.

3. 노래

기미년 삼월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10]이 하나로
이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하[11]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날을 길이 빛내자
정인보 작사, 박태현 작곡 '삼일절 노래'

4. 역대 경축식장

5. 이야깃거리

광복절과 삼일절은 대통령이 축사를 하기 때문에, 이때 연설이 대일외교의 기조를 강하게 드러낸다. 강경이냐 온건이냐...... 그래서 일본의 정계/외교가/언론이 주목한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에는 대통령 선거가 5월로 옮겨가면서, 신임 대통령과 새 정부의 대일외교 기조는 삼일절이 아니라 광복절에 드러나게 되었다. 또 해마다 생존/순국 독립운동가에 대한 건국훈장 수여식도 개최하며, 순국선열의 경우 유가족이 받는다.

광복절과 더불어 자신들의 애국심을 표출하겠다며 질주하는 폭주족들을 쉽게 볼 수 있는 날이다. 다행히도 2009년경부터는 이런 폭주족들을 보기 힘들어졌고, 2013년부터는 아예 자취를 감췄다. 경찰이 강력한 단속 의지를 표출한 이유도 있고, 세대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3.1 폭주를 선배로부터 대물림받아 전통처럼 뛰던 세대가 나이를 먹고 폭주를 관두면서 그 자리를 대신 채울 신세대 폭주족이 적어진 것도 있고 위험한 오토바이 폭주를 즐기기보다는 그냥 게임하는 걸 더 좋아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진 것. 불경기의 영향이라는 분석도 있다.

대한민국과 달리 북한에서는 대한민국의 경축일과 같은 의미인 명절이 아니며 공휴일도 아니다. 북한에서도 3.1 운동을 기념하지만, 다른 국경일에 밀려 공휴일은 아니다. 마르크스의 역사발전단계론의 단순도식적 해석은 차치하더라도, 민족대표 33인이 중상계급 이상의 부르주아지이자 종교인이라는 점, 그리고 김일성이 지나치리 만큼 게릴라 항일무장투쟁에 경도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평가절하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날은 한국에서 새 학년이 시작되는 날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가 모두 해당한다. 물론 삼일절 당일은 공휴일이므로 실제 등교일은 바로 다음에 오는 평일(2~4일[12])이다.

다만 고등교육법에서는 예외를 인정해서 학교에 따라서는 2월에 개강 및 입학식을 하는 경우가 있다. 한편 고등교육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학교의 경우, 카이스트는 2월 초 개강, 5월 말에 종강으로 석달이 넘는 길고 아름다운 여름방학을 자랑한다.

한국의 스키장들은 삼일절에도 개장하기 때문에 삼일절에는 막바지 스키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스키장이 북적인다고 한다. 강원도는 3월 평균기온이 낮아서 3월이 사실상 겨울이라 가능한 현상. 최전방에서는 군인들이 삼일절에 제설작전을 펼치고도 한다. 남부 지방에서는 2월부터 봄이기 때문에 삼일절이면 이미 봄이다.

파일:external/i2.media.daumcdn.net/20140301141705953.jpg
2014년 3월 1일 맨체스터 시티 FC에서 구단 트위터에 95주년을 기념하는 트윗을 올렸다.(사용자 지정으로 한국 지역에 사는 사람만 볼 수 있는 글. 즉, 외국인은 못 보는 글이다.)

실제로는 저 시기에는 대한독립만세와 조선독립만세가 혼용되었다. 대한제국이라는 나라 이름보다 식민지 조선이라는 이름이 유명해서 그런지는 몰라도.[13] 현재 모든 역사교과서에서는 대한독립만세로 부른 것처럼 표시하고 있다. 뭐 실제로 대한독립군도 나중에 생겼고.

삼일절을 독립절로 바꾸자는 주장도 있다. 경향신문 논설을 스크랩한 블로그 그도 그럴 것이 미국만 봐도 최대의 명절 인디펜던스데이(독립기념일) 7월 4일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한 날이 아닌 영국에게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한 날이다. 여담으로 미국에서는 영국으로부터 정식으로 독립한 9월 3일은 기념하지 않는다. 미국뿐만아니라 세계 일부국가들이 독립선언일 혹은 독립전쟁개시일을 독립기념일로 기념하고 있다. 위키백과 링크 잠깐, 그럼 광복절에는 못 쉬는 거 아니야? 근데 광복하고 독립하고의 의미는 살짝 다르다. 광복은 빛을 되찾는 거이고, 독립은 선언할 때 바로 이루어지는 것. 결론은 독립절이 되어도, 광복절에 쉴 수 있을 것 같다.

위의 주장과 관련하여, 정치권에서도 2019년 3월 1일, 대한민국 독립선언 100주년을 성대히 기념하기 위한 국민준비위원회가 발촉되었다.

2015년 3월 1일, 미 국무부 정무차관인 웬디 셔먼이 한·중·일 과거사 문제는 세 나라 모두 책임이 있다는 발언을 하여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기사

2018년 3.1절 기념식은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개최되었다. 또한 같은 날에 광화문광장에서는 일제 강제 징용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3·1절 추모제도 열렸는데, 하필이면 광화문광장의 태극기집회 측과 서로 충돌했다. 그리고 태극기집회 참가자들은 손에 태극기를 들고 일제 강제 징용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삼일절 추모제 측을 향해 "친북세력, 빨갱이들은 물러가라" 라는 매국노 인증 개소리를 지껄이며 추모제를 방해하는 몰상식한 짓거리를 저질렀다(!!!). ( 3·1절 광화문에 성조기 물결, "文대통령 퇴진" 요구) 대한민국 극우 세력이라는 작자들이 왜 가짜 보수주의라고 욕을 처먹는지 자기들 스스로 그 이유를 확인해 준 어처구니 없는 만행.

5세대 포켓몬 게임에서는 3월이 가을이기 때문에 삼일절에 돌려 보면 뜬금없이 계절이 가을로 나온다(...).

가끔씩 삼일절과 정월대보름이 겹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는 전년도에 윤달이 있어서 설날이 밀린 경우다. 실제로도 삼일절이 있는 3월 1일을 음력으로 환산하면 1~2월이고 윤달인 경우는 윤1월이다.

이 날이 월요일 연휴일 경우, 공휴일 중 최소 5일이 날아간다. 현충일, 광복절, 개천절 일요일이고 한글날, 크리스마스는 토요일이기 때문이다.

축구 감독 김학범과 야구선수 양현종의 생일이 바로 이 삼일절이다.

롤러코스터 타이쿤 시리즈에서 처음으로 볼.수 있는 한국 공휴일이다. 이는 크리스마스, 신정, 설날이 모두 게임상에 존재하지 않는 날이기 때문.

6. 신조어


"3(삼) 1(일)세까지 취업 못하면 망적이다!" 의 준말.

이태백과 함께 청년실업 문제를 의미하는 말이다.

전문직에 속하는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 변호사 또는 검사 판사 이른바 의치한판검변등의 경우는 예외로, 일찍 자리잡는 케이스가 오히려 희귀하다.

예를 들어 의사의 경우 의대 6년(예과2년+본과4년), 인턴 1년, 레지던트 4년이며, 군의관을 포함하면 14년이 걸린다. 박사의 경우 학부 4년 석사 2년 박사 5년에 11년이 소요된다. 변호사의 경우 학부 4년 로스쿨 3년에 군법무관 3년을 포함해 10년이 소요된다.

자리잡는 게 다소 늦다는 것이 흠. 그래도 30대 중반 이후를 생각하면...

2000년대 이후로 경제난과 함께 취업하기가 힘들어짐에 따라 평균 취업 연령이 점점 올라가고 있다. 남자 같은 경우는 학벌 좋고 전문직 자격증이 있거나 본인의 능력이 된다면 나이가 좀 걸림돌이 되긴 하겠지만 31세 넘어서 취업하기도 한다. 나이 제한이 예전보다는 조금 완화된 듯.


[1] 혹시나 삼점일절이라고 읽는 일이 없도록 하자. [2]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전인 데다가 대한제국 명칭이 민중에게 널리 퍼지지 않아, 당시에는 "조선 독립 만세!"가 주된 구호였다. [3] 대한독립만세 따위의 글귀를 새긴 흰 깃발을 말한다. [4] 출처 : 대한민국임시정부의 3·1절 기념과 3·1운동 인식 (윤대원) [5] 근데 아이러니한 것은 정부 수립 이후 별칭으로 사용됐던 삼일절이란 명칭이 공식 명칭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해방 정국에서는 3.1절을 독립기념일로 부른 적이 있으며, 3.1절 40주년인 1959년에도 이날을 독립기념일이라 부른 기록이 남아 있다. [6]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모르지만 194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3.1운동은 3.1 혁명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3.1운동이 독립운동의 성격을 띈 것은 사실이나 단순 독립운동을 넘어 민주자유를 선언한 민주공화제의 기원절이라는 인식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이 명칭은 제헌 헌법 전문에도 반영될 예정이었으나 친일 정당(...) 한국민주당에서 딴지를 거는 바람에 3.1운동으로 명칭이 바뀌어 헌법에 실리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3.1운동 문서 참조. [7] 특히 1947년 제주도에 있었던 3.1절 기념행사 때 있었던 발포사건은 4.3 사건이라는 비극의 단초가 되었다. [8] 다만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경축 예술제나 불꽃놀이 등 일부 경축행사는 간간히 이어졌다. 3.1절이 사실상 천시된 것은 10월 유신 이후의 일이다. [9] 그도 그럴 만한 것이 3.1운동의 본질은 민족공동체의 본질적 주권(real sovereignty)를 바탕으로 자주독립을 선포한 것이고 우리가 흔히 아는 만세시위는 그러한 독립선언식을 축하하기 위한 요식 행위였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만세운동을 한 것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선열들의 뜻과는 반대로 환희와 열성으로 축하하기는 고사하고 역으로 "3.1절은 슬픈 날"로 인식하고 있으니... [10] 사실 이 구절은 고증오류.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당시의 한반도 인구는 2천만이 채 되지 않았다. [11] 오타가 아니다. '하'는 '~이시여'라는 뜻의 옛말이다. 용비어천가의 '님금(임금)하 아라쇼셔(임금이시여 알아주소서)'나 정읍사의 '달하 노피곰 도다샤(달님이시여, 높이 돋으시어)'를 생각해보면 될 듯. 다만 현대에는 안 쓰는 표현이라 선열아라고 가사를 표기한 경우도 많이 보이는데, 이렇게 부르면 안 된다. 선열분들과 친구 할 기세 [12] 4일일 경우는 삼일절이 금요일일 경우이다. 주5일제 이전에는 3월 2일이 개교기념일인 경우에만 3월 4일까지 밀렸다. [13] 독립선언문에서는 '조선의 독립'으로 표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