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53:56

사마식(팽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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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황제는 추존황제를 포함해서 자황색( )으로 굵게 쓰고 팔왕은 빨갛게 쓴다. 그리고 8왕의 난에 관련된 종실은 갈색으로 쓴다.
※ 출계(出系)는 취소선을 치고 계자(系子)는 밑줄을 친다.
각주 [ 펼치기 · 접기 ]

[추존] [2] 황제로서의 뚜렷한 존호를 헌상받지 못했으나 다른 추존 황제와 동격배향(同格配享). [3] 친부는 의양성왕 [4] 친부는 안평헌왕 [5] 숙부(실제로는 종숙) 창무정후에게 출계(出系) [추존] [추존] [8] 친부는 진문제 [9] 종숙(실제로는 숙부) 요동도혜왕에게 출계 [10] 종숙(실제로는 숙부) 광한상왕에게 출계 [추존] [12] 적장자나 두 살에 요절하여 혜제가 사실상 장남이 되었다. 항목이 존재하고 추봉(追封)되었기에 기재 [13] 친부는 회남충장왕 [14] 여기까지 서진 [15] 친부는 오효왕 [16] 백부 진헌왕에게 출계 [17] 숙부 성양애왕에게 출계 [18] 친부는 사마유(동래왕) [19] 백부 진헌왕에게 출계 [20] 적장자였던 비릉도왕처럼 한 살에 요절했으나 추봉(追封)되었기에 기재한다. [21] 직접 난을 일으킨 적은 없는 여남문성왕 대신 팔왕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22] 백부 진세종에게 출계. [23] 친부는 진무제 [24] 친부는 제헌왕 [25] 백부 성도왕에게 출계 [26] 친부는 제헌왕 [27] 숙부 연왕 경에게 출계 [28] 난을 일으킨 적은 없기에 팔왕에서 빼고 대신 효회황제를 넣는 시각도 있다. [29] 여기부터 동진 [30] 친부는 진문제 [31] 윤통(閏統) [32] 숙부 사마익에게 출계 [33] 숙부 사마형에게 출계 [34] 백부 사마랑에게 출계 [35] 숙부 하비헌왕에게 출계 [36] 숙부 안평왕에게 출계 [37] 친부는 남궁현왕 [38] 진안이 장사만 황제의 예로 올리고 시호는 왕으로 하였다. [39] 종조부 사마민에게 출계했다지만 이러면 소목에 어긋나 항렬이 꼬임 [40] 종실에서 팔왕의 난에 아니 가담하고 난이 끝나가는 직전까지 살았다. [41] 친부는 단수현후. 다만 종조부에게 출계하면 항렬이 꼬여서 친부가 법적으로 종형이 되는데 이 문제는 어찌 된 건지 몰?루 [추존] [43] 아니 추존되었으나 칠묘에 동격배향(同格配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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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馬植
?~300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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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진의 황족이며 자는 자여(子輿)로 사마의의 동생인 사마규(司馬旭)의 손자이자 팽성목왕 사마권의 아들이다. 사례 하내군 온현 사람.

2. 생애

275년 아버지 사마권이 죽은 후 팽성왕(彭城王)에 봉해져 후장군(後將軍)을 역임하고, 곧 국자제주(國子祭酒)·태복경(太尚卿)·시중(外中)·상서(尙書)를 지냈으며, 밖으로는 안동장군·도독양주제군사를 맡아 회남왕 사마윤을 대신하여 수춘을 지켰는데, 미처 출발하지 못했다.

어떤 이는 사마식이 사마윤을 도와 조왕 사마륜을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이 때문에 사마식은 근심을 얻어 300년 8월에 세상을 떠났다. 조정에서는 기마장군에게 시호를 원(元)이라 하였고, 식읍 1만 5천 호를 증봉하였다.

재임 시기가 명확히 기록으로 남아있는 사람 중 그는 팽성왕을 25년 동안 재임해 후손인 사마현과 함께 팽성왕을 가장 오래 재임한 사람 중 한 명이며, 그의 봉국인 팽성국은 그의 후손이 영가의 난에서도 살아남아 장강으로 건너간 다섯 명의 왕 중 하나였기에 유송 건국 전까지 유지한 서진에서 오래 유지한 봉국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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