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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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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
미연합국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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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1] | 국장 | |
Deo Vindice 신은 우리의 대변자이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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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2월 4일 ~ 1865년 5월 5일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미합중국 | ||
역사 | ||
1860년 ~
1861년 11개 주 연방 탈퇴 및 독립 선언[2] 1861년 2월 4일 건국 1861년 2월 8일 남부연합 임시 헌법 제정 1861년 4월 12일 남북 전쟁 발발 1865년 4월 9일 남북전쟁 종결(사실상 멸망) 1865년 5월 5일 멸망 |
||
<colbgcolor=#00205B> 국가 | 주여, 남부를 지켜주소서 | |
위치 | 현재의 미국 남부 | |
수도 |
몽고메리(1861. 2. 4.-1861.5.29.) 리치먼드(1861. 5.29.-1865. 4. 3.) 댄빌(1865. 4. 3.-1865. 4.10.) |
|
최대도시 |
뉴올리언스(-1862. 5. 1. 함락) 찰스턴 |
|
정치체제 | 공화제, 연방제, 대통령제, 양원제 | |
국가원수 | 대통령 | |
언어 | 영어 | |
통화 | 남부연합 달러, 미국 달러 | |
면적 | 1,995,392 km2[3] | |
인구 | 9,103,332명[4] |
[clearfix]
1. 개요
1861년 미국의 34개 주 중에서 남부 11개 주가 이탈하여 세운 미승인국이다. 흔히 남부 연합으로 불린다. 수도는 버지니아주의 리치먼드에 두었다. 미국 연방정부로부터는 반국가단체로 규정되었으며, 유럽의 다른 국가들에게도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당시 미국의 절반에 가까운 규모와 정부 체계를 보면 실질적인 국가의 형태를 갖추었다. 한국에서는 미국 남부의 주들이 독립해 세웠다는 것을 명시하기 위해 '아메리카 남부 연합국'이라는 표기를 사용하기도 했다.노예제 문제를 놓고 미국 내 갈등이 고조되던 중 노예제를 지지하던 미국 남부의 11개 주가 북부와 갈등 끝에 연방 정부의 주의 자치권 침해를 명분으로 연방으로부터 탈퇴를 선포하고 아메리카 연합국(남부맹방)을 세웠다. 이후 연방 탈퇴를 무효라고 주장한 북부와 남북 전쟁을 벌였으나 패전했고 이후 아메리카 연합국(남부맹방)은 해체, 연합국을 구성하던 주들은 다시 아메리카 합중국(미국)의 일원이 되었다. 종전 뒤 남부맹방에 가담했던 각 주는 러더퍼드 B. 헤이스 대통령의 취임을 계기로 군정이 해제되고 1877년 완전한 자치권을 회복하게 되었다.
2. 국가 상징
2.1. 국호
합중국(United States)을 내세운 북부와는 달리 아메리카 연합국에서는 '연합'을 나타내는 말로 Confederate States을 사용하였다. 줄여서 부를 때에는 CSA 혹은 The Confederacy로 부른다. 이를 맹방[5]이라고도 한다.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당시 아메리카 연합국을 남부맹방, 남부연맹, 남부연합으로 일컫는다. 이는 Southern Confederacy를 번역한 표현이다.
미 연방정부에서는 남부연합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고,(= 미승인국) 연합을 결성해서 연방과 대적하는 행위를 반역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공식적인 칭호는 언제나 반군(Rebel)이었다. 이에 편승해서 북부인들은 남부인들을 반역자, 반군으로 호칭했다.
속어로 미 북부인은 양키(Yankee) 또는 연방( Union, Federal), 남부인은 딕시(Dixie) 또는 반군(Rebel) 등으로 불렸다. 북부 돈은 양키 달러, 남부 돈은 딕시 달러 이런 식이었다.
2.2. 국기
국기 | ||
The Stars and Bars[6] 1861년 11월 28일~1863년 5월 1일 |
The Stainless Banner 1863년 5월 1일~1865년 3월 4일 |
The Blood-Stained Banner 1865년 3월 4일~5월 5일 |
<rowcolor=#fff> 군기 | 비공식 기 | |
육군기(Battle Flag) |
해군 선수기(Navy Jack) 1863년~1865년 |
연합기(Confederate Flag)[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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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연합국이 사용한 공식 국기는 3가지인데 모두 인기가 없었다. 첫 국기인 The Stars and Bars는 기껏 탈퇴한 미합중국의 성조기와 비슷했을 뿐더러 실제로도 전투 중 피아 식별을 곤란하게 했다. 비판에 직면해 새로 채택한 The Stainless Banner는 투항을 의미하는 백기로 혼동될 수 있고 쉽게 더럽혀졌다. 재개정한 The Blood-Stained Banner는 항복하기 2달 전에 제정되어 거의 쓰이지 않았다.[8]
X 모양으로 유명한 남부연합기는 원래 아메리카 연합국 임시의회의 국기국장위원회 의장이었던 윌리엄 포처 마일스가 1861년 국기안으로 제시했던 것인데 바지 멜빵 같다는 이유로 채택되지 못했다. 하지만 육군에서 채택해 정사각형으로 바꾸어 사용했고 해군에서도 원래의 직사각형을 색상만 바꾸어 채택해 남부연합군에서 널리 쓰이면서 점차 공식 국기를 대신해 남부연합을 상징하는 깃발로 인식되었다.
공식 깃발이 아니지만 실제 국기보다 남부연합기를 남부연합의 국기로 여기는 사람이 많아 사실상 남부연합기가 더 일상적으로 쓰이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과 6.25 전쟁, 베트남 전쟁 때 일부 남부 주 출신 참전자들이 개인적으로 가지고 다니면서 성조기 대신 피아식별용으로 쓰기도 했다.[9] 현재도 앨라배마 주기는 남부연합기를 모티브로 한 깃발[10]이다. 과거에는 조지아 주기나 미시시피 주기에도 남부연합기가 들어가 있었으나, 각각 2003년과 2020년을 기해 폐기했다.
현재 남부연합기는 인종차별의 상징이라며 시선이 좋지 않다. 일부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애용하기도 하며, 특히 2015년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 교회 총기 난사 사건에서 대두되면서 미국 전역에서 퇴출 운동이 벌어졌다.[11] 결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에서는 공공장소에 남부연합기를 게양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부 시민들 중에서는 이 깃발을 남부 자치와 독립 정신의 상징으로 보는 경우가 적지 않아 여전히 뜨거운 감자와 같은 주제이다. 어떻게 보든 간에 남부연합기는 미국 역사의 일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부연합기가 들어간 주기를 철거한 곳에서도 이 깃발을 없앤 게 아니라 박물관으로 보냈다. 또한 정치적인 의도가 아니라도 앨라배마 주지사의 인장처럼 남부연합기 문장이 포함된 경우가 있다. 이는 역사적인 이유가 큰데, 해당 지역을 지배했던 국가나 정부의 상징을 모두 넣은 것이다.[12]
2015년도 전 미국인 상대 여론조사 결과에선 57%가 이 깃발이 인종주의보다는 남부의 자부심을 상징한다고 답변했다고 한다. 한편으로 미국 흑인들은 72% 이상이 이 깃발을 인종차별주의의 상징이라고 답변했는데, 미국 백인들은 25%만이 이 깃발을 인종차별의 상징으로 보고 있다.
2014년에 타일러 라쉬가 이 문제를 주제로 트윗을 한 적이 있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 문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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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outh Will Rise Again! 남부는 언젠가 다시금 일어설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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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조지 플로이드 사망 항의 시위에 반대하는 일부 사람들이 다시금 남부연합기를 내세우며 이전 그 어느 때보다도 반대 여론이 거세졌다. 그 일환으로 주한미군에서도 금지했다. # 이어 전 미군에서 금지하였다. #
우크라이나에서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노보러시아 연방의 전 국기와 상당히 유사하지만, 노보러시아 국기는 러시아 제국 해군기의 도안에 붉은색을 추가했을 뿐이니 유래적으로는 연관이 없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자면 사선 십자가 도안은 성 안드레아의 십자가라 하여 서양권에서 매우 흔하게 쓰이는 문양이라 딱히 러시아와 미국만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스코틀랜드, 부르고뉴, 스페인 등 더 유서 깊은 나라들에서도 많이 사용되었던 상징이라 특별하게 생각할 것은 없다.
더 다양한 깃발은 여기를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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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계 멕시코인, 미국계 브라질인 등 라틴아메리카 내 미국계 주민들 중에서도 남부연합기를 쓰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조상이 남북전쟁 종전 이후 라틴아메리카로 도망친 남부연합 유민이었던 경우다. 다만 미국계 브라질인들이 남부연합 멸망 직후 곧바로 브라질로 망명한 남부연합 유민들의 후손인 경우가 많은 반면, 미국계 멕시코인들은 남부연합 멸망 이후 세월이 흘러 남부연합 유민들의 후손 대에 비로소 멕시코로 이주한 경우가 많다. 이는 남부연합 멸망 직후 멕시코로 망명하려 했던 남부연합 유민들이 당시 멕시코( 멕시코 제2제국)의 황제였던 막시밀리아노 1세가 처형되는 바람에 그런 계획이 무산되면서 브라질 등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로 망명하거나 망명을 포기하고 통일 미국 정부의 지배에 순응하게 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2.3. 국가
북부와 마찬가지로 공식 국가는 없었으며 "주여 남부를 지켜주소서"가 쓰이기도 했다. 비공식적 국가이자 남군의 애창곡이었던 I Wish I Was in Dixie's Land는 항목 참조.3. 역사
미국 건국 이래 미국 남부는 북부와 분위기가 달랐다. 면화재배로 영국계가 남쪽으로 많이 이주해 영국식 귀족문화도 유행했고 노예제도 횡행했다.[13] 이민자들의 대다수가 북부의 뉴욕 등지로 들어와 다민족 구성에 공업화가 진행 중인 북부와는 딴판이었다. 남북은 노예제 외에도 대립요소가 많았는데 가장 주도적으로 나선 주는 사우스캐롤라이나였다. 노예제 반대의 대표주자였던 공화당 출신 에이브러햄 링컨이 미합중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사우스캐롤라이나, 미시시피, 플로리다, 앨라배마, 조지아, 루이지애나, 텍사스 일곱 개 주가 미 연방을 탈퇴했다.남부 측에서 내세운 명분은 각 주의 자치권이었고, 이들은 헌법이 각 주가 폐기할 수도 있는 협정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연방 측은 이들을 반역자로 간주하였고 북부 출신 정치가들은 연방의 영구 존속이라는 조상들의 가치를 짓밟는 행동이라며 이들을 비난하였다. 또 한편으로 북부 측의 연방주의자들은 노예제의 철폐를 주장하며 전쟁 초반 남부에게 연패하다가 기세를 전환함과 동시에 바로 노예해방선언을 발표하여 자신들의 명분을 '악습 철폐를 위한 성전'으로 내세워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이 나설 여지를 봉쇄하였고 이는 남부의 철저한 고립을 굳히게 된다.
1861년 2월 4일 앨라배마의 몽고메리[14]에서 남부의 주요 정치인들이 모여 남부연합을 결성했다. 이들은 노예무역은 금지하지만 이미 들어온 노예들은 유지한다고 결정하였다. 헌법은 전체적으로 미국 헌법과 비슷했다. 대통령으로 제퍼슨 데이비스를 선출했고 부통령은 알렉산더 스티븐슨이 뽑혔다. 1861년에 남북 전쟁이 발발하자 추가로 버지니아, 아칸소, 노스캐롤라이나, 테네시가 연방을 탈퇴하여 남부에 가세했다.
다만 남북전쟁 문서에 나오듯이 노예제를 시행했던 모든 주가 남부에 가담한 것은 아니다. 노예제를 시행했던 주 중 버지니아 서부( 웨스트버지니아)[15] 지역, 델라웨어 주, 켄터키, 미주리, 메릴랜드는 연방에 잔류했다. 이를 경계 주(Border States)라고 부른다. 물론 이곳들도 조용하게만 넘어가진 않아서 연방으로부터 분리하자는 움직임이 있었고 이를 연방군이 진압하거나 주 측에서 자발적으로 해결하고 연방에 합류하였다. 마침 이들 주들은 지리, 행정상으로도 남부와 북부의 경계 지역이었다.
초기에는 웨스트버지니아 전선에서 북군에게 농락당하며 조기에 멸망하는 줄 알았지만 제1차 불런전투에서 승리하며 연방의 수도인 워싱턴 D.C.를 위협했으나 전쟁 개전과 동시에 노퍽에 있던 대부분의 해군 전력을 상실했던 북부해군이 다시 해상을 장악하고 남부의 주요 항구인 포트로열, 햄프턴 로드, 뉴올리언스 방면으로 치고 올라오고 워싱턴 D.C를 위협했던 남부군의 주핵 버지니아군이 앤티텀 전투에서 큰 타격을 입은 계기로[16] 북부가 일어서기 시작한다. 거기다 국력의 차이가 컸던 탓에[17] 시간이 지날수록 남부가 북부에게 밀리고, 여기에 북부가 외교전을 잘 펼쳐 해외에서는 남부를 독립국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일부가 이들을 교전권이 있는 교전집단으로 본 게 고작이었다. 결국 1865년에 남부가 패하면서 아메리카 연합국은 소멸된다. 연합국의 공직자들은 추방당했으나 곧 복귀하게 된다. 하지만 흑인에 대한 폭력이 나타나자 1867년에 연방정부는 군정을 남부에 설치하고 공직자들을 재추방한다. 허나 이후 공화당 내에서 급진파와 온건파가 대립하면서 흑인 문제는 순식간에 사그러들게 된다. 이 배경은 영화 링컨(영화)에 잘 나온다. 1877년에 연방정부는 미군정을 폐지한다.
4. 지리
4.1. 남부연합에 가담한 주
남북 전쟁 발발 이전 최초의 7주주기 | 이름 |
사우스캐롤라이나주 1860년 12월 20일 |
|
미시시피주 1861년 1월 9일 |
|
플로리다주 1861년 1월 10일 |
|
(앞) (뒤) |
앨라배마주 1861년 1월 11일 |
조지아주 1861년 1월 19일 |
|
루이지애나주 1861년 1월 26일 |
|
텍사스주 1861년 2월 1일 |
남북 전쟁 발발 이후 가담한 4주
주기 | 이름 |
버지니아주 1861년 4월 17일 |
|
(없음)[18] |
아칸소주 1861년 5월 6일 |
노스캐롤라이나주 1861년 5월 20일 |
|
테네시주 1861년 6월 8일 |
연방 탈퇴 선언은 다음과 같다.
사우스캐롤라이나 1860년 12월 20일, 미시시피 1861년 1월 9일, 플로리다 1861년 1월 10일, 앨라배마 1861년 1월 11일, 조지아 1861년 1월 19일, 루이지애나 1861년 1월 26일, 텍사스 1861년 2월 1일, 버지니아 1861년 4월 17일, 아칸소 1861년 5월 6일, 노스캐롤라이나 1861년 5월 20일, 테네시 1861년 6월 8일.
총 11개 주가 연방을 탈퇴해 남부연합을 구성하였다. 가장 세력이 컸던 주는 미연합국의 정치 중심지인 리치먼드가 있는 버지니아주로, 인구 또한 최대인 160만 명이었다. 반면 가장 인구가 적은 주는 플로리다주로 14만 명에 불과했다.
4.2. 인구
남부연합 성립 직전인 1860년의 인구를 보면 버지니아,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 테네시, 조지아, 앨라배마, 미시시피, 루이지애나, 아칸소, 텍사스, 플로리다 등 11개 주를 모두 통합해 910만 명이 거주하고 있었고, 이 중 39%에 해당하는 352만 명이 노예였다. 주별로 보았을 때 노예 비율이 가장 높은 주는 사우스캐롤라이나(57%)와 미시시피(55%)였다.전쟁 후 사상자는 질병 및 전사를 포함해서 25~30만 정도였다.
4.3. 도시
당시 남부 지방의 경우 인구 절대다수가 농촌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1860년 기준 인구 5만 명을 넘기는 도시는 미국에 16곳이 있었는데 그 중 남부에 있는 도시는 항구도시 뉴올리언스 하나였다(인구 16만 9천여 명, 미국 6위). 그러나 뉴올리언스는 1862년 5월 해상으로 공격한 북군에게 조기에 함락되어버렸다. 이후 미연합국의 최대도시는 남부가 항복할 때까지 인구 4만의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미국 22위)이 되었다. 수도 리치먼드는 인구 3만 8천 명으로 3위(미국 25위). 오늘날 미 남부 굴지의 대도시인 마이애미, 휴스턴, 댈러스 등은 당시에는 읍이라기에도 민망한 촌락이었다. 애틀랜타조차 전쟁 이전에는 인구 1만 명이 안 되었다. 단, 애틀랜타는 전쟁이 시작된 이후 철도 요충지이자 공업도시로서 급격히 발전하여 셔먼의 애틀랜타 전역 이전에 인구 2만 명을 넘겼다.5. 정치
노예제에 대한 보호 조항을 포함한[19] 것 외에는 미국(북부) 헌법을 거의 복제했으므로 정치 구조 또한 유사했다. 심지어 대통령 관저 역시 워싱턴 D.C.의 것과 이름이 같은 남부 연합 백악관이었는데, 지금은 버지니아 커먼웰스 대학교 캠퍼스의 박물관이 되었다. 의회는 버지니아주 의사당을 사용했다.대통령의 임기는 6년이었다. 제퍼슨 데이비스가 대통령, 알렉산더 스티븐스가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는데, 건국 4년 만에 멸망하면서 이들이 유일한 정·부통령이 되었다. 전쟁 전 연방 상원의원이자 1862~1865년 사이 국무장관이던 유다 P. 벤저민은 당시 미국 정계에서는 특이하게 유대인이었다.[20]
6. 남부연합과 노예제의 관계
6.1. 노예제와 주의 권리
남부의 독립과 전쟁 명분은 '연방정부가 헌법에 명시한 주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북부 위주의 연방정부가 남부 주의 정당한 권리를 침해한다고 주장하였다.후대 컬럼비아 대학교를 중심으로 한 친남부 역사학자들은 남북전쟁의 발발 원인을 노예제 문제보다는 북부와 남부의 문화적 차이나 당시의 관세 문제[21], 연방정부와의 정치적 갈등 등에서 찾았다. 일부는 더 나아가 "남북 전쟁은 노예제를 두고 남부가 일으킨 반란이 아니라 각 주의 권리를 짓밟기 위해 북부 연방 정부가 시작한 전쟁이다"라는 극단적 주장을 하기도 했다. 이들의 주장은 노예제 문제와 남부의 명분 및 남북전쟁을 분리해서 보았다. 이들을 더닝 학파라 하는데, 20세기 초반에서 흑인 민권 운동의 부상까지 미국 내 보수주의와 우익 역사학을 주도한 컬럼비아 대학교의 윌리엄 아치볼드 더닝 교수를 필두로 한 학파이다.
그러나 더닝 학파 등에서 주장하는, 노예제와 남북전쟁을 분리해서 보는 시각은 이미 20세기 중반에 논파되었다. 1950~70년대의 수정주의 논쟁을 겪으며 성장한 현대 남북전쟁 관련 학계는 이러한 시각을 전적으로 논파하고 더닝 학파의 주장을 완전히 폐기된 학설로 밀어넣으며 발전한 분야로, 에릭 포너, 케네스 스탬프, 유진 제노비즈 등 현대 남북전쟁 학계의 큰 골격을 만든 인물들은 대부분 이 더닝 학파의 주장을 논파하며 학자적 기반과 명성을 쌓았으며, 이들의 주장에 기본이 되는 건 다름아닌 19세기 중반 남부연합의 당사자들에게서 나온 1차 사료들이다. 단적인 예로 남부연합의 두 번째 국기인 결백기(The Stainless Banner)를 고안한 서배너 기반 데일리 모닝 뉴스(Daily Morning News) 사장이자 주 필진이었던 윌리엄 톰슨(William Tappan Thompson)이 밝힌 디자인 취지 원문을 읽어보자.
"As a national emblem, it is significant of our higher cause, the cause of a superior race, and a higher civilization contending against ignorance, infidelity, and barbarism. Another merit in the new flag is, that it bears no resemblance to the now infamous banner of the Yankee vandals."
국가의 상징으로서 이 깃발은 무지, 불충, 미개함에 맞서 싸우는 더 우월한 인종, 더 고등한 문명의 숭고한 대의의 표지다. 이 깃발의 또 다른 장점은 이제 악명높은 그 양키 반달들의 깃발과 닮은 부분이 없다는 것이다.
-데일리 모닝 뉴스, 1863년 5월 4일자 논평
국가의 상징으로서 이 깃발은 무지, 불충, 미개함에 맞서 싸우는 더 우월한 인종, 더 고등한 문명의 숭고한 대의의 표지다. 이 깃발의 또 다른 장점은 이제 악명높은 그 양키 반달들의 깃발과 닮은 부분이 없다는 것이다.
-데일리 모닝 뉴스, 1863년 5월 4일자 논평
As a people, we are fighting to maintain the Heaven-ordained supremacy of the white man over the inferior or colored race; a white flag would thus be emblematical of our cause… Such a flag…would soon take rank among the proudest ensigns of the nations, and be hailed by the civilized world as THE WHITE MAN'S FLAG
인민으로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열등하거나 유색인 인종에 대한 백인들의 우월성을 지키기 위해 싸우며, 따라서 흰색 깃발은 우리의 대의를 상징하기에 적합하다...[22] 이 깃발은 곧 세계 만국의 자랑스러운 깃발 중에서도 높은 지위를 차지할 것이며, 백인의 깃발로서 문명화된 세계에서 환영받을 것이다.
-데일리 모닝 뉴스, 1863년 4월 23일자 논평
인민으로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열등하거나 유색인 인종에 대한 백인들의 우월성을 지키기 위해 싸우며, 따라서 흰색 깃발은 우리의 대의를 상징하기에 적합하다...[22] 이 깃발은 곧 세계 만국의 자랑스러운 깃발 중에서도 높은 지위를 차지할 것이며, 백인의 깃발로서 문명화된 세계에서 환영받을 것이다.
-데일리 모닝 뉴스, 1863년 4월 23일자 논평
어구 하나하나에서 인종주의적인 내용이 드러나기도 한다.
이런 수정주의적 시각은 남부연합 초대이자 마지막 대통령이었던 제퍼슨 데이비스 본인부터 패전 이후 전범으로 수감 중 현대 남부연합 옹호 세력처럼 은근슬쩍 전쟁 전에 그리 부르짖었던 인종주의적 주장은 중화하고, 자신들의 대의가 마치 헌법주의적 측면에서 주의 자치권을 위했던 것으로 포장했을 만큼 오래된 주장이다. 더닝 학파의 주장은 당시 흑인민권운동에 대한 역풍, 부상하고 있는 반공 우익 매카시즘, 본격 제국주의 열강으로 등극한 미국의 자국 내 패권주의와 사회다윈주의적 시각을 혼합하여 전쟁 전 남부에 대한 일방적 미화를 기반으로 한 주장이다. 대중문화 같은 매체에 나오는 코드로 보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국가의 탄생이 대표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북부 자본가가 무시무시한 양키 군대를 끌고 와서 목가적 낙원에서 우리끼리 잘살던 남부 농민들을 유린하니 마니 하는 내용들이 더닝 사관에 입각한 역사적 인식의 전형이고, 이렇기 때문에 저런 소위 남북전쟁 전후 재건기(Reconstruction) 시기 남부 낭만물이 20세기 초중반, 즉 흑인민권운동의 부상과 이에 따른 극우성향 백인들의 반발과 시기적으로 딱 맞물렸던 것이다.
그러나 남북전쟁이 터지고 남부가 연방정부의 공업력과 군사력에 의해 참교육당하기 이전 남부 주들의 분리와 독립을 주장했던 정치인들과 문필가들이 봤으면 인종주의적 측면을 빼려는 인간들을 두들겨 팼을 법한 핵심적인 요소였다. 노예제 문제와 하등 관계 없었던 관세 문제로 터졌던 앤드루 잭슨 시절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연방법 무효화 사태(Nullification Crisis) 당시 사우스캐롤라이나 측이 주의 자치권을 주장했을 때는 본인들 빼고 남부건 북부건 아무도 사우스캐롤라이나 측의 주장을 진지하게 듣지 않았고, 비슷하게 관세 문제로 촉발된 1812년 영미전쟁 당시 뉴잉글랜드 주들의 관세권 갈등에 비슷한 주장이 터졌을 때도 아무도 주의 권리 운운하며 동참하지 않았다. 오직 노예제의 문제가 결부되었을 때만 주의 자치권이란 주장이 남부 전역을 통틀어 광범위한 지지를 받을 수 있었고, 남부연합의 설립자 본인들은 노골적인 인종차별주의자였으며 노예 소유주들이었다.
윌리엄 A. 잭슨은 남부연합 대통령이었던 제퍼슨 데이비스의 마부 노예였다.
당시 남부의 노예주 백인들은 흑인 노예를 마치 살아있는 가구처럼 여겨, 그들 앞에서도 마치 가구 앞에서처럼 백인 앞에서는 못 할 아무 이야기나 마구 늘어놓는 습관이 있었다. 제퍼슨 데이비스도 그랬는데, 그는 특히 정도가 심했던 모양이다. 그는 잭슨이 바로 곁에 있는데도 아무 생각 없이 남부연합군 사령부와 군 기밀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무식한 니그로가 그런 거 들어서 어쩌겠냐고 생각했는지도 몰라도, 잭슨에게는 남부연합의 작전계획과 보급로에 대해 들을 좋은 귀와 날카로운 집중력, 달달 외울 암기력이 있었다.
1862년 5월 3일, 천신만고 끝에 버지니아 프레데릭스버그 근처의 연방군 진영으로 탈출에 성공한 잭슨은 그동안 데이비스가 남부연합군 사령부와 나눈 대화 내용에 대해 낱낱이 보고했다.
남부연합군의 부대 배치와 보급로 등에 대한 내용이었다는 것 이상의 구체적인 내용은 기밀이라 알려지지 않았지만 북부연방군의 어빙 맥도웰 소장이 에드윈 스탠턴 국방장관에게 즉시 전보로 그 내용을 보고했으며 "제퍼슨 데이비스의 마부가 큰 공을 세웠다."고 언급한 것만 보아도 얼마나 중요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북군이 패하긴 했지만, 1862년 중반의 <반도 전역> 작전에 잭슨의 정보가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 추정된다.
1년 후, 남부연합군 총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조차도 "적군에게 우리의 정보를 빼돌린 주요 정보원들은 흑인들 중에 있었다." 고 한탄했다.
윌리엄 잭슨은 교수형을 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자유를 위해 북군에 협조했던 수백 명의 흑인 첩보원들 - "Black Dispatches" 중 한 사람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대단한 공적을 세우고도 "니그로"이기에 오랫동안 역사에서 잊혀져왔으며, 그 후의 삶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 마조리 간(Marjorie Gann) & 재닛 윌렌(Janet Willen) 저, 끝나지 않은 노예의 역사(Five Thousand Years of Slavery)
당시 남부의 노예주 백인들은 흑인 노예를 마치 살아있는 가구처럼 여겨, 그들 앞에서도 마치 가구 앞에서처럼 백인 앞에서는 못 할 아무 이야기나 마구 늘어놓는 습관이 있었다. 제퍼슨 데이비스도 그랬는데, 그는 특히 정도가 심했던 모양이다. 그는 잭슨이 바로 곁에 있는데도 아무 생각 없이 남부연합군 사령부와 군 기밀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무식한 니그로가 그런 거 들어서 어쩌겠냐고 생각했는지도 몰라도, 잭슨에게는 남부연합의 작전계획과 보급로에 대해 들을 좋은 귀와 날카로운 집중력, 달달 외울 암기력이 있었다.
1862년 5월 3일, 천신만고 끝에 버지니아 프레데릭스버그 근처의 연방군 진영으로 탈출에 성공한 잭슨은 그동안 데이비스가 남부연합군 사령부와 나눈 대화 내용에 대해 낱낱이 보고했다.
남부연합군의 부대 배치와 보급로 등에 대한 내용이었다는 것 이상의 구체적인 내용은 기밀이라 알려지지 않았지만 북부연방군의 어빙 맥도웰 소장이 에드윈 스탠턴 국방장관에게 즉시 전보로 그 내용을 보고했으며 "제퍼슨 데이비스의 마부가 큰 공을 세웠다."고 언급한 것만 보아도 얼마나 중요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북군이 패하긴 했지만, 1862년 중반의 <반도 전역> 작전에 잭슨의 정보가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 추정된다.
1년 후, 남부연합군 총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조차도 "적군에게 우리의 정보를 빼돌린 주요 정보원들은 흑인들 중에 있었다." 고 한탄했다.
윌리엄 잭슨은 교수형을 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자유를 위해 북군에 협조했던 수백 명의 흑인 첩보원들 - "Black Dispatches" 중 한 사람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대단한 공적을 세우고도 "니그로"이기에 오랫동안 역사에서 잊혀져왔으며, 그 후의 삶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 마조리 간(Marjorie Gann) & 재닛 윌렌(Janet Willen) 저, 끝나지 않은 노예의 역사(Five Thousand Years of Slavery)
그렇게 인종차별주의에 뼛속까지 물든 작자들이었기에, 현대적이고 정상적인 관점으로 보면 아주 심각하게 멍청한 짓들도 종종 저질렀다. 대표적으로 남부연합 고위층들은 흑인을 사람이 아니라 가축이나 가구로 생각했기에 "어차피 가축이나 가구 같은 것들인데 걔들이 사람 말을 알아듣겠어? ㅋ" 라는 생각으로 흑인들 눈앞에서 태연하게 민감한 기밀사항들을 주절대는 짓을 굉장히 자주 저질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기밀들을 들은 도망친 흑인 노예들은 이렇게 듣게 된 기밀들을 고스란히 연방정부 측에 넘겨주면서 남부의 패배에 일조했다. Slave in Jefferson Davis' home gave Union key secrets
물론 남부인들도 모두, 특히 지식인 계층에선 상당수가 노예 제도에 찬성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을 붙잡아두기 위해서는 "이것은 단순히 노예제도가 아니라 주가 가진 자치권의 문제다."라는 선전이 의미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 심각한 자기모순이었는데, "만일 각 주들이 연방정부에 속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면, 그들은 남부연합 정부에도 속하지 않을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주장이 정당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경계주들 가운데는 "노예제 유지에 찬성하지만 남부연합에 가입하지는 않겠다."는 중립주들이 생겨났는데, 이에 대한 남부연합의 응답은 외교적 회유나 경제적 고립같은 유화적인 방법이 아닌 군사력을 동원한 침공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침공은 빠르게 주 방위군과 북군의 역공에 저지되었고 불필요한 전략 물자의 소비로 귀결되었다.
2015년까지만 하더라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정부 건물에 위치한 남부연합 기념비 위에 당당하게 휘날리고 있었고, 조지아 주는 구형 남부연합기에 문장을, 미시시피 주는 아예 좌상단에 남부연합기가 대놓고 들어간 주기를 1894년에 채택된 이후로 2020년까지도 썼다. 미국, 특히 남부 주에서 남부연합에 대한 수정주의적 관점은 널리 퍼져 있었고 어물쩍 넘어갈 만큼 광범위했던 건 사실이다.
이러한 전후의 수정주의적 관점이 남부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었고, 북부로부터도 상당한 이해 및 동정을 얻기도 했다. 북부 및 연방정부의 입장에서도 남부 주들이 연방에 잔류하게 된 이상 그들을 괜히 자극하기보다는 적당히 자존심을 살려 주면서 다시 연방에 반기를 들지 않게 할 필요가 있었고, ‘Lost cause’는 전쟁을 선과 또 다른 선의 대결로 포장하여 남부의 민심을 달래는 데 제격이었다. 물론 이를 통한 남부와 북부의 갈등 완화는 백인들에게 한정된 것으로, 남부 흑인들의 인권이 전쟁 직후보다도 더 악화되는 것을 그 대가로 했다.
6.2. 노예제와 남부 경제
미국의 노예 제도는 개척 과정에서 등장하였는데 초기의 주력 산업은 담배 농사였다. 하지만 담배 재배에 의해 지력 고갈이 심각해지면서 약탈 농업에 가까운 형태가 되었고 이걸 노예 유지비용과 합쳐 따지면 손익분기점에 근접하고 있었다. 《 국부론》을 저술한 애덤 스미스는 이것이 이해득실의 문제라는 것을 간파하고 만일 이익으로 결판이 나면 논란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견했다.노예 제도는 산업 혁명 이래로 산업 혁명에 성공한 사회에서도 존재하였지만 그 사회의 경제적 기반이 되지는 못하였는데 이는 노예제의 근본적인 문제인 비효율성 때문이다. 산업혁명 이후 공업이 발전한 북부에서는 노예제를 유지하는 것보다 차라리 노예제를 폐지하고 그냥 임노동자한테 월급을 주는 것이 돈이 덜 든다는 계산이 나온 것이다.
노예제의 대표적인 비효율성은 당연히 본질적인 주종관계에서 나온다. 노예는 열심히 일해봤자 자신의 것이 아니고 재산 축적도 못 하기 때문에 주인이 시킨 일 외에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일들을 주도적으로 하지 않았고, 상벌을 주어도 이들이 올리는 성과는 당연히 자유 임노동자들에 비해 극히 낮았다. 또한, 노예를 유지하는 비용은 전부 주인이 부담해야 했기 때문이다. 남부의 경제는 이러한 비효율이 상당히 만성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산업혁명은 오히려 노예의 필요성을 높였다. 면방직 공업이 발전하면서 노예의 필요성이 크게 높아졌다. 산업혁명 당시 영국 등 유럽에서는 방직기, 방적기를 포함한 기계화가 이루어져 면방직 산업이 크게 발전하였고 이 때문에 목화의 수요가 급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목화를 재배하는 데에는 농기계도 없던 시절이라 엄청난 노동력을 필요로 하였다.
미국의 면방직 산업은 영국과는 달리 그리 발달하지 않았고 목화 자체를 수출하는 것이 주력이었다. 1791년 당시만 해도 미국의 목화 재배량은 90만kg 정도에 불과했으나 불과 10년 뒤인 1801년에는 2,200만kg에 달할 만큼 늘어났다. 남북전쟁이 발발하는 1861년에 이르면 미국 전체의 수출 비중에서 거의 60%에 달할 만큼 커졌다. 당시 면직산업에서 기계화의 핵심은 방적기와 방직기였는데, 방적기는 목화에서 섬유를 빼내는 기계이고 방직기는 이를 이용해서 천을 만드는 기계이다. 둘 다 목화를 재배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데 반해, 오히려 목화의 수요는 크게 늘어나게 만들어서 그 목화를 기를 일손이 더욱 필요해졌다. 이 때문에 비효율적이던 노예의 필요성이 기계화로 인해 미국 남부에서는 오히려 늘어나게 된다.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결과가 존재한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경제역사학자 ' 로버트 포겔(1926~2013)'은 1974년, 경제이론과 계량적 방법을 사용해서 미국의 노예제도가 오히려 생산 측면에서 더 긍정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면화 생산량, 진료 기록 등을 살펴본 결과 주인은 노예를 재산으로 여겨 최소한 가축 수준의 복지들을 제공했을 뿐더러, 오히려 그들의 처지가 북부의 하층 임금 노동자에 대한 평균적 대우보다 나은 수준이었음을 밝혔다. 노예 제도를 통해서 얻는 이윤과 생산성은 국가 전체적으로 볼 때에도, 개인적으로 볼 때에도 경제적 이유로 노예를 포기할만한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연구결과만 본다면 포겔이 인종차별을 옹호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사실 그의 연구는 노예제도의 효율성만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노예제도는 남부에 있어서는 효율적인 제도였으며, 남북전쟁, 인권, 정치 등 경제에서 외적인 요인이 아니면 노예 제도가 해체될 수 없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즉, '노예제는 쇠퇴 중이었고 흑인 노예들은 북부가 제시하는 자유에 부담스러워하였고 부정적이었다.'란 것을 반박하는 것이다. 또한, 포겔 본인도 1949년 흑인 여성 에니드 카산드라 모간과 결혼해서 두 아이를 둔 사람으로 당시 인종차별적 정서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이다.
포겔의 연구는 당시 노예제를 옹호하는게 아니라 "어차피 노예제는 경제적 비효율성과 낮은 수익률 때문에 알아서 폐지될 예정이었다"라는 경제발전 결정론자들을 반박하는 취지이다. 또한 경제구조적 결정론자들 중 일부는 여기서 한발짝 더 나가서 "남부와 북부의 경제적 구조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 한 에이브러햄 링컨이 군사력을 동원하여 유혈사태를 초래했다." "존 브라운같은 노예해방운동가들은 과도한 폭력성을 통해서 경제 문제에 침투하려고 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며 링컨과 당시 북부의 전쟁 명분을 쓸데없고 폭압적인 과잉대응이고 윌리엄 로이드 게리슨, 존 브라운 같은 당시 노예해방론자들은 위험한 반사회적 또라이들이었다며 은근슬쩍, 혹은 노골적으로 남부옹호론으로 번지는 경향이 있다. 이를 반박하는 포겔의 연구는 오히려 노예제 옹호와 거리가 멀고, 남북전쟁이란 엄청난 대시련과 링컨의 도덕적 용기가 없었다면 노예제가 결코 '자연스럽게'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에 가깝다.
7. 외교
남부연합이 탄생한 후 미국의 약화를 바라는 나라들이 남부를 환영했고 남부도 스스로를 주권국으로 인정받기 위해 전방위적인 외교를 펼쳤다. 이에 따라 노예제를 운영하던 브라질 제국이 남부연합을 크게 환영했고[23] 카리브 국가들도 남부연합을 환영했다. 당시 스페인령이었던 쿠바는 남부연합의 배들을 공식적으로 항만에 입항하도록 허락했다. 전쟁이 끝난 후 브라질은 노예제 존속을 원하던 미국인들의 망명과 이민 희망지가 됐다. 1866년 미연합국이 패망하자 브라질에서는 미연합국 유민(Confederados)들을 받아줘 상파울루주에 정착촌을 세워줬는데 이곳이 지금의 아메리카나 시가 된다. 더해서 멕시코와 텍사스 국경분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화를 하기도 했다.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이 1861년 7월 30일 에른스트 라벤(Ernst Raven)을 텍사스 오스틴 주재 영사로 임명, 미연합국 측에 신임장을 제정한 것이 받아들여졌다.
또한 전쟁 초창기 영국과 프랑스는 남부연합을 인정하거나 최소한 전쟁을 중재하려는 시도를 했다. 남부는 영국과의 외교에 특히 공을 들였는데 목화 수출 때문에 영국이 자신들을 인정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영국은 인도나 이집트에서 목화수입을 하는 루트를 이미 개발했기 때문에 굳이 남부의 목화에 연연하지 않았다.[24]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멕시코 괴뢰정부와의 상호인정을 고려하는 등 전쟁을 중재하는데 관심을 보였지만 공식적으로 남부와 외교를 수립하지는 않았다. 남부 외교관들은 프랑스 자본가들과 만나 자금을 대출해 군함을 건조하는데는 성공했다. 후에 나폴레옹 3세는 영국과 남부의 공동승인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하겠다고 남부 외교관들에게 말했지만 전황을 보면서 간을 봤고 실제로 행하지는 않았다. 나폴레옹 3세는 영국 없이 단독으로 행동하는 것을 꺼렸고, 영국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이에 동조했다.
유럽 국가들은 남부의 독립의지와 전황을 살펴보기 위해 공식-비공식적인 군사 참관단을 보냈다. 그러나 앤티텀 전투에서 남부가 패전하고 북부가 노예해방을 선언하자 노예제의 비도덕성에 여론이 경도된 유럽 국가들은 남부에 대해 어떠한 공식적인 외교관을 파견하지 않고, 공식적인 외교 또한 수립하지 않았다.
남부는 교황특사 앰브로스 더들리 맨을 보내서 비오 9세에게 '미국 남부의 대통령인 저명하고 명예로운 제퍼슨 데이비스에게' 라는 편지를 받았다. 남부는 이를 교황령이 자신을 국가로 인정했다고 크게 선전했지만, 법적인 근거가 있거나 공식적인 외교수립은 아니었다.[25] 어차피 남부연합은 압도적인 개신교 국가였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도 분위기가 미지근했고, 남부 국무장관 유다 P. 벤자민도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 빅스버그 포위전과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크게 패전한 후 북부의 승세는 확실해졌고, 그 소식은 유럽에 금방 알려졌다.
결국 전쟁 후반기 제퍼슨 데이비스 대통령은 유럽 국가들에게 남부연합을 인정받기 위해 노예제를 희생하는 방안도 고려했다. 그러나 이미 남부의 패전이 확정적이었기 때문에 유럽 국가들은 별 관심을 두지 않았고 남부는 외교적으로 고립된 채 패전을 맞이했다.
8. 군사
남부의 군대는 육군과 해군, 해병대로 구성되었다.8.1. 남부 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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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군 육군기 (Confederate Battle Flag)[26] |
8.1.1. 장병 구성
남부의 육군 장교들은 귀족적인 명문가 출신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남부가 탈퇴하자 미 육군에서 전역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들 장교단의 지휘자질이 상당히 우수한 편이라 초반에 북군을 고전케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영관급 이상 고위층은 대부분 북군에 남았고, 버지니아 군사대학 출신 하급장교들만 일부 남군으로 넘어갔다. 초전에서 북부 연방군의 고전은 준비부족 및 의지부족, 보신주의 행보로 과감한 군사작전을 기피한 사령부 탓으로 봐야 한다. 남군도 준비가 부족했지만, 1850년대부터 꾸준히 연방 탈퇴 이야기가 나오면서 주마다 군사조직을 준비했고, 전쟁이 터지기 직전인 1860년에는 이미 준비가 되어 연방요새, 연방조폐국을 털고 있었다. 이런 불법적인 사건들에도 임기말이라 레임덕이던 뷰캐넌은 연방의 해체를 우려하여 노예주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전쟁준비를 하지 않았고, 전쟁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연방군을 링컨에게 물려주게 된다. 대표적으로, 1825년에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로버트 E. 리 장군이 있지만 이 사람도 초전에는 패전했다. 대다수의 웨스트포인트 미국 군사 아카데미 출신들은 연방군에 가담하였으며, 초기 남군의 영웅은 P. G. T. 보우리가드[27]와 토머스 '스톤월' 잭슨[28]이었지 리가 아니었다.총 동원인원은 불분명하나 약 120만에서 최대 200만까지 본다. 1861년엔 의용군 10만이었으나 이듬해인 1862년에 40만까지 늘었고 같은 해 4월 16일에 징병령을 내려 18세에서 35세의 백인 남성을 징병하였다. 같은 해 9월 27일엔 징병 상한선을 45세로 늘렸고 1864년 2월 17일엔 50세까지 늘렸다. 그리고 1865년 3월에 흑인 징병령을 내렸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노예 해방 조항은 주인이 허락해야 한다는 식이라 인기가 없었는데다가 며칠 뒤 수도인 리치먼드가 함락될 정도로 이미 이 즈음에 가면 남부의 정부 기능은 맛이 가서 얼마 징병하지 못하고 패했다. 그러니까 남군에도 흑인 전투병이 있었다는 것은 거의 전설에 가깝다.[29]
남군은 전쟁 막바지까지 노예의 군입대 자체가 법으로 금지되었다. 많은 수의 노예들이 그들의 주인을 따라다니며 짐을 나르고, 요리를 하거나 청소, 빨래 등 허드렛일을 했거나, 남부연합 정부에 의해 강제로 끌려와 노역을 했을 뿐이었다. 북군 병사들의 기록에 남군 측에 있던 남군 옷을 입은 흑인이 자신에게 총을 쐈다는 기록도 있긴 하지만 우발적인 것으로 보인다. 남군 병사들은 노예제의 정당성에 대하여 깊게 믿고 있었다. 남부 인구의 약 30%가 노예 소유주였던 것으로 추산되었고, 리 휘하의 북버지니아군의 경우 일반 남부 연방 시민보다 노예주일 가능성이 약 40% 더 높았다. 남군 이병 조셉 메이즈(Private Joseph Maids)의 경우 "난 자유민을 위한 자유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싸우는 것이지, 자유로운 흑인을 위한 자유로운 나라를 만들려고 싸우는 게 아니다. 그리고 흑인들과 같이 싸울만큼 내 조국을 사랑하지도 않는다."[30]라고 하여 흑인 병사들과 함께 전투하는 것을 반대하는 의사를 명확히 밝혔다. 제임스 롱스트리트 장군은 북군의 벤저민 버틀러 장군이 도주노예를 남부의 노예주에게 돌려주기를 거부하자 남군 병사들에게 사기를 진작시킨답시고 한 연설에서 "이미 저들의 위대한 지도자 중 하나의 증오가 흑인들에게 자유를 줌으로써 그를 너와 동격으로 만들고 있다. 그들은 그들이 부추긴 노예 반란이 그들에게 가져올 갓난아기들의 피와 결백한 여성들에 대한 학살이 그들에게 닥칠 것을 상관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남군 병사들부터가 이 전쟁이 노예제를 지키기 위함인 것을 명명백백히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군이 흑인 병사들을 편제하거나, 흑인을 병사로 쓸 수는 없었다. 남군 진영에 있던 흑인 노예들이 남군 옷을 입는 것부터가 그렇게 흔치 않은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일부 노예들은 정말 자신의 노예주를 따르는 경우도 있었으나, 전투 중에 자기 주인의 소총을 들고 북군에게 총을 몇 발 쐈다는 것 말고는 병사로 복무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없다.
1890년에 남부의 재향군인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당시에 3,273명의 남군 출신 흑인이 살아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건 전쟁이 끝나고 남군의 미화가 한창이던 시절이라 신뢰할 수 있는 조사가 아니며, 남군 출신 흑인병사란 곧 주인의 수발을 들기 위해서 같이 참여한 노예였거나 참호를 파는 등 공병이었지 정식 군인은 아니었다.
흑인을 군인으로 쓰자는 주장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패트릭 클레번(Patric Ronayne Claburne) 소장은 스파르타의 헤일로타이와 레판토 해전을 예시로 들면서 법전에 백인과 흑인 구분만 분명히 명시하면 된다는 식[31]으로 흑인 징병에 대해 의견을 제시했으나 군부에서의 견제와 남부연합에 대한 충성심에 대한 의심, 정계의 미지근한 호응으로 물 건너갔고, '서부의 돌벽'으로 불리며 로버트 리에게 인정받던 그의 군사적 재능은 군단장 급으로 펼치지 못했다. 그는 프랭클린 전투에서 무리한 요새전을 수행하다가 전사했는데[32] 프랭클린 전투로 인해 6명의 장군들이 전사하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남군의 인재풀도 말라가기 시작했다.
20세기 초에 촬영된 군복 등을 입고 재향군인 행사에 참여한 흑인 사진이나, 연금 지급 등 기록을 바탕으로 흑인 병사들이 있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지급된 연금 신청서류를 보면, "귀하의 주인이 복무한 연대를 기입해 달라[33]"고 되어 있는 등 흑인을 전투병으로써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을 위해 일한 노예로 취급했다. 또한 흑인들이 당시 재향군인 행사에 초대되었다고 해서 흑인 병사들을 기린 것은 아니다. 당시는 짐 크로법의 전성기였고, 이 때의 중심적인 이념은 흑인들은 흑인들 자신들을 위해 백인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는 사상이었다. 그런데 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흑인들이 유럽에서 (비교적) 평등한 대우를 받으면서, 이 사상이 틀렸고 자신들이 백인으로부터 분리되어 백인들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직접 경험하게 되자, 이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했고, 이에 백인들은 때로는 폭력적으로, 때로는 프로파간다를 통해 이에 맞섰다. 그러한 경험을 겪지 않고 자신의 처지에 비교적 만족하는 노예 출신의 나이든 흑인들은 백인의 지배를 미화하고 선전하기에 좋은 소재였다. 1921년 Confederate Veteran 잡지에는 당시의 연금지급에 대해 "주인들과 전쟁을 함께하고 끝까지 섬긴 신의있는 흑인들"을 위한 연금이라면서 "당시 상황 하의 충성심으로써 근래의 흑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훌륭한 명예를 보인 옛 흑인들을 위해 남부의 다른 주들도 비슷한 제도를 만들 것임은 의심할 바 없다"며 갈라치기를 시도했다.[34]
오클라호마에 살던 아메리카 원주민 일부도 남군에 가담했으며 북군에 가담한 아메리카 원주민과 교전을 치렀다. 남부에 있던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 일부는 흑인 노예를 뒀기 때문이었다. 이는 자신들도 백인들과 동등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함이다.
8.1.2. 군복
육군의 경우, 기본적으로 북부 연방군 육군의 남색 군복에 대비되는 차분한 톤의 회색 군복을 입었다지만 실은 제각각이었다. 남군은 전쟁 내내 물자보급이 원활하지 않았고, 자비로 군복을 맞추는 등 민병대적인 성격이 남아있었기에 색이 거의 통일되지 않았다. 당시 남부 문화는 전시대 유럽의 전근대적 귀족 문화를 숭상하는 성향이 강해서 장교들만 하더라도 개인이 각자 마련한 잘 빠진 맞춤형 제복을 입었다.군복 보고 남부연합군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경우도 꽤 많다지만 이건 후대 "미화"된 제복으로 사실 제복은 미 연방군의 디자인과 다를게 없었다. 반면 소수의 귀족적 상류층 플랜테이션 지주들이 노예제와 제도적 백인 우월주의, 인종차별의 이데올로기로 인구상 다수였던 노예 없는 소규모 영농민을 동원한 남부연합의 정치 사회적 기반을 상징하듯이 사병들은 제대로 된 군복도 지급받지 못해 대충 회색 색깔 톤만 맞춘 집이나 농사용 작업복 등을 그대로 걸치고 나온 경우가 많았다. 이미 북부에 비해 압도적으로 열세였던 남부의 몇 안되는 전시 공업은 당장 필수적인 무기 생산에도 한창 부족했기 때문에 전반적이고도 규격화된 군복 지급은 꿈도 꿀 수 없었고 이런 민병대스런 비주얼은 전쟁 끝까지 유지됐다.
영화나 드라마에선 대부분 규격화된 남색 군복을 입은 북군에 맞선 때깔 좋은 광택나는 연회색 제복의 장교들+중구난방 때묻은 회색스런 셔츠나 상의를 걸치고 나온 사병이란 기묘한 조합으로 구성된 남군이 시각적으로 미국 문화사상 유구한 전통의 이미지이다. 이로 인해 나름 리인액트먼트계에서는 전반적인 회색 테마로만 맞추면 대충 19세기 작업복스럽게 주워 입고와도 충분히 고증에 맞다고 나름 각광받는 분야기도 하다.
8.1.3. 계급체계
계급은 아래와 같다. 사병 계급장의 색깔은 병과를 나타냈다.계급 | 영문 | 계급장 |
장군 | General | |
대령 | Colonel | |
중령 | Lieutenant Colonel | |
소령 | Major | |
대위 | Captain | |
중위 | First Lieutenant | |
소위 | Second Lieutenant | |
상사( 보병) | Sergeant Major | |
일등중사(보병) | Quartermaster Sergeant | |
이등중사( 포병) | Ordnance Sergeant | |
하사(보병) | First Sergeant | |
병장(포병) | Sergeant | |
상등병( 기병) | Corporal | |
병 | Private | 계급장 없음 |
북군은 조지 워싱턴이 중장에 머무른 상징성 때문에 거의 모든 장군들을 소장까지로 제한하고 전쟁 후기에야 그랜트를 중장으로 진급시켰지만, 남군은 전쟁 초기부터 앨버트 존스턴, 조셉 존스턴, 보우리가드, 리 등 여러 장군들을 대장으로 임명하고 중장들도 여럿 두었다.
8.1.4. 로버트 E. 리 전설의 실상
전쟁 초반, 버지니아주가 연방을 탈퇴하고 남부연합에 가담했을 때 비교적 노예가 적고 남부에서 몇 안 되는 공업지역이던 버지니아주 서부 지역[35], 지금의 웨스트버지니아는 연방 탈퇴를 거부하고 연방에 남겠다고 선언하자 남군은 서부 버지니아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 군대를 보냈는데, 이 부대를 로버트 E. 리가 이끌었다. 그러나, 리는 치트 산 전투(Battle of Cheat Mountain)에서 자신의 부대와 비교해 절반 정도 되는 연방군에게[36] 더 많은 피해를 입고 털린다. 이 패배로 알짜 공업지역인 서부 버지니아를 남부가 전쟁 초반에 잃게 되며, 이 전투가 끝나고 리는 한직인 해안수비대로 좌천된다.매클레런의 반도 전역에서 리가 이겼다는데는 역사학자들도 동의하지만, 피해를 너무 많이 입었다는 것에도 동의한다. 비슷한 숫자가 붙은 반도 전역에서 아군 지역인 버지니아, 그것도 수도인 리치먼드 앞에서 지형적으로 유리함을 가지고 있었으나 닥돌을 계속하다가 너무 많은 피해를 봤다. 특히, 7일 전투(Seven Days Battle)의 마지막인 말번 고지 전투(Battle of Malvern Hill)에서 거의 같은 숫자[37]가 격돌하였으나 잘 구축된 적의 화망[38] 으로 돌격하다가 2배 이상의 피해를 입었다. 전략적으로 이 전투 이후 매클레런이 연방군이 남군보다 숫자가 적고, 수도인 리치먼드[39]를 함락시키기에는 물자가 부족하다고 판단하고[40] 후퇴하였기 때문에 리의 "승전"이지, "전술"적으로 일부 전투들은 확실히 패전이었으며 더 많은 피해를 입었다.
메릴랜드 전역같은 경우 사람들은 앤티텀 전투를 많이 이야기하면서, 리가 어찌저찌 했으면 남군이 승리할 수도 있었다고 많이 언급하지만, 실제로 리는 메릴랜드 전역에서 앤티텀 전투에 앞서 사우스 마운틴 전투(Battle of South Mountain)에서 북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던지라 사실상 메릴랜드 침공이 이미 실패한 상황이었다.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앤티텀에서 도박했다가 실패한 것은 명령서 분실 이딴거 없이도 이미 예정된 일이었다.
챈슬러스빌 전투는 로버트 E. 리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지만, 이것도 따지고 보면 사상자는 더 많이 냈으며 일부 초기에 빨리 포위당해 항복한 연방군을 제외하면 최종적으로 피해도 남군이 더 많이 봤다. 참고로 이때 남군은 슬슬 만성적인 장병부족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브리스토 전역에서는 크게 보면 무승부지만, 전술적으로 또 다시 미드에게 당한다. 특히, 라파하녹 역 전투(Battle of Rappahannock Station)에서 연방군의 공격이 따른 기동을 위한 기만적인 공세라고 생각하고 다른 지역에서 강을 건너려던 연방군에 집중하기 위해 라파하녹 역을 지키던 남군을 보강하지 않았지만 이는 착각이었고 연방군은 포격 뒤에 보병대를 보냈으며, 예상하지 못했던 공격 때문에 남군은 연방군에게 참호를 빼앗기고 엄청난 혼란과 패닉 끝에 약 2천여명의 남군 병사들이 기차역과 함께 그냥 항복하였다.
오버랜드 전역에서는 리 자신처럼 장병들을 희생해서라도 적의 군대를 밀어내고,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는 성향의 장군(U.S. 그랜트)을 만나서 전술적인 재미를 봤으나, 그랜트가 뛰어난 공병대와 훌륭한 전략기동으로 제임스 강을 건너 수도인 리치먼드의 목숨줄인 기차역이 있는 피터스버그를 위협하자 어쩔 수 없이 피터스버그로 돌아가 수성전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8.2. 남부 해군
선수기[41](1861년 ~ 1863년) | 선수기(1863년 ~ 1865년) | 해병대기 |
군함기[42](1861년 ~ 1863년)[43] | 군함기(1863년 ~ 1865년)[44] | 문장 |
주요 임무는 미국 북부의 무역선과 연방해군의 보급선 등을 막는 것이었다. 전쟁 초기에 남부의 함정은 10척이었고 북부의 함정은 90척이었는데, 북부해군의 상당수가 버지니아의 노퍽기지에 있었던 탓에 개전과 동시에 금쪽같은 주력함들을 자침 처리해야 했다. 이로인해 사실상 북부에서 제대로 돌아가는 배는 14척이 전부라 비등비등했다. 북부 해군의 생산력이 본궤도에 오르기 이전까지 전쟁 초기엔 남부 해군의 활약으로 남부연합이 우수했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북부의 미합중국 해군에 역전당해 헌리 같은 육군이 만든 잠수정이 등장하는 지경에 이를 정도로 거의 유명무실해졌다. 특히 북군은 우수한 공업생산력을 통해 해양담당 해군인 블루 워터 네이비와 강을 담당하는 브라운 워터 네이비로 나누어 각각의 용도에 맞는 함정을 공급하며 남부에게서 빠르게 재해권을 빼앗아갔다. 북군은 민간의 증기선을 징발하여 나무판을 붙이든 철판을 붙이든 다양히 활용했지만 남군은 이 여력도 없어서 목화를 징발선에 붙여 방탄 효과를 노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북군과 남군의 해군 대접도 달랐는데 북군의 복무 기간이 2년이었다면 남군은 고질적인 인력부족 문제로 사실상 종신 복무였다. 전쟁기간 동안 남부 해군은 6,000~7,000명 안팎의 병력이 복무했다면 북부는 1865년 종전에만 해도 5만 명이 복무 중이었으며, 전쟁 기간 동안 10만 명이 거쳐갔다.
남북전쟁 초기에 미 해군에서 사직한 인물들이 남부로 내려가 조직했다. 해병대는 미합중국 해병대에서 한 명도 넘어오지 않고 연방 정부에 충성을 맹세했기 때문에 전부 신규 인력으로 재조직해야 했다.
USS 메리맥을 철갑함 CSS 버지니아로 개조하여 비밀병기로 삼았지만 북군은 이미 이를 눈치채고 같은 철갑함 USS 모니터를 진수시켜 맞대응하고 있었다. 이들이 대결한 햄튼 로드 해전은 철갑함끼리 맞붙은 최초의 해전이었고, 버지니아는 북부 해군 목선들을 상대로 큰 전과를 올렸지만 모니터와는 서로 유효타를 내지 못하고 후퇴해야 했다. 이는 바다 건너 영국 해군에 큰 자극을 주기도 했다.
장갑함 버지니아 함 |
8.2.1. 군복
해군은 북부와 거의 같은 디지인이되, 네이비 블루 색상이 아닌 육군과 유사한 청회색 원단의 피복을 입었다. 육군에 비하면 통일성 있는 군복을 입은 편이다.8.2.2. 계급
각 병과별 계급 명칭이 다르며, 현대보다는 범선 시대의 계급 체계에 가깝다.계급 | 영문 |
모장 정모 테두리 |
수장 | 견장 |
항해 장교(Sea Officers) | ||||
제독 | Admiral | |||
[45] | ||||
준제독 | Flag Officer | |||
함장[46] | Captain | |||
[47] | ||||
준함장[48] | Commander | |||
위관[49] | Lieutenant | |||
항해사[50] | Master | |||
합격후보생[51] | Passed Midshipman | [52] | ||
사관후보생 | Midshipman | - | - | |
의무 장교(Medical Officers) | ||||
12년 근속 군의관 | Surgeon of 12 years service | |||
[53] | ||||
12년 이하 근속 군의관 | Surgeon of less than 12 years service | |||
합격보조군의관 | Passed Assistant Surgeon | |||
보조군의관 | Assistant Surgeon | |||
재정 장교(Pay Officers) | ||||
12년 근속 주계관 | Paymaster of 12 years service | |||
12년 이하 근속 주계관 | Paymaster of less than 12 years service | |||
보조주계관 | Assistant Paymaster | |||
기관 사관(Engineering Officers) | ||||
12년 근속 기관장 | Chief Engineer of 12 years service | - | ||
12년 이하 근속 기관장 | Chief Engineer of less than 12 years service | - | ||
일등기관사 | 1st Assistant Engineer | - | - | |
이등기관사 | 2nd Assistant Engineer | - | - | |
삼등기관사 | 3rd Assistant Engineer | - | - | |
해군 시설관(Naval Constructors)[54] | ||||
12년 근속 해군 시설관 | Naval Constructor of 12 years service | - | ||
12년 이하 근속 해군 시설관 | Naval Constructor of less than 12 years service | - | ||
부사관(Petty Officers)[55] | ||||
직별 | 영문 | 계급장 | ||
갑판, 장포, 목공, 무장, 급사, 조리 | Boatswain’s Mate, Gunner’s Mate, Carpenter’s Mate, Master at Arms, Ship’s Steward, Cook | |||
조타, 상갑판 포, 장루장, 상갑판조장, 견시장, 병기, 통장이, 수병장, 중앙갑판조장 | Quartermaster, Quarter-Gunner, Captain of the Forecastle, Captains of the Tops, Captain of the Afterguard, Armorer, Cooper, Ship’s Corporal, Captain of the Hold | |||
수병(Seaman) | ||||
계급장 없음 |
9. 경제와 산업
흔히 공업의 북부와 농업의 남부라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공업과 식량작물의 북부 그리고 환금작물의 남부라고 하는 것이 옳다. 물론 환금작물의 남부라고 식량작물을 키우지 않은 건 아니고 식량작물의 북부라고 농산물을 수출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남부의 식량작물 생산량은 유럽의 곡창지대를 능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부에서 생산했던 곡물의 상당수가 목화밭에 밀려서 자급자족이 겨우 가능했던 상황이었다. 목화가 물과 지력을 어마어마하게 소비하는 식물이라, 식량작물을 심으려면 몇 년 동안 휴경을 해야 하는데, 그 전에 남부가 망했다.남부, 정확히는 노예주들의 경제적인 가장 큰 약점은 공업 생산 능력이었다. 게다가 그나마 있는 공업지대도 버지니아(웨스트버지니아 포함), 테네시, 켄터키 등 경계주들이거나 북쪽의 남부주들에 쏠려 있었는데 전쟁 초반에 이들이 점령당하거나 전란에 노출되는 통에 남부는 이 공업 생산 기반을 최대한 활용하는데 실패한다. 게다가, 노예주라도 화약회사 듀폰[56] 등 북부와 공업인프라를 공유하고 있던 회사들은 북부 편에 붙는 통에 어려움이 더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남부 엘리트 지주들이 나름 계산이 선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노예가 키운 면화로 인해서 부자들이 많이 사는 지역들이 북부가 아니라 남부였으니, 부족한 공업능력은 영국에서 목화 판 돈을 주고 수입해서 해결하면 된다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실제로 미국이 해상봉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밀수꾼들이 영국 등에서 무기를 수입한다.
하지만 문제는 철도였다. 남부의 대지주들이 미시시피 강을 이용한 수로운송을 선호했기 때문에 주요 도시들을 연결하는, 딱 필요한 최저 수준의 철도만 건설되어 있었으며 이마저도 대부분 사설철도였던지라 철로 규격마저 전부 제각각이었다. 그래서 남부의 인구 대비 식량작물 생산 자체는 문제가 딱히 없었으나, 부족한 철도망에 더해 수로운송의 허브였던 테네시의 내슈빌, 루이지애나의 뉴올리언스, 그리고 버지니아 항구도시들의 이른 함락으로 인해 전략적인 군수물자 수송에 매우 애를 먹었으며 이후에는 사정이 너무 나빠져서 1/10법[57] 같이 민간인들의 식량을 징발하는 방법으로 버텼다.
당시 북군 병사들이 '오늘은 커피 베이컨 빵, 내일은 베이컨 커피 빵, 모레는 빵 베이컨 커피'를 먹는다며 투덜거렸다는 기록이 있긴 하다. 철도와 수운이 용이하여 보급이 자유로웠던 동부전선의 북군 주력군대였던 포토맥군은 보급사정이 매우 양호했지만, 깊숙히 적진에 진격한 통에 잦은 남부 기병대의 철도파괴 및 병참기지의 약탈행위로 인해서 보급이 비교적 불안정했던 서부전선의 북군은 보급의 일정 이상을 현지조달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이 영향으로서부전선의 진격로는 주로 수로수송, 철도수송이 편리한 도시들을 위주로 이뤄졌다. 북군이 애틀란타 점령 이후 다음 점령지를 서배너로 고려한 이유도 해운을 통한 보급을 받기 위함이었다. 당시 너무 깊숙히 진격하여 남군 기병대에게 길게 늘어진 철도망을 동시 다발적으로 공격받고 있었기 때문에 보급에 용이한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이 필수였다.
남군이 필사적으로 빅스버그를 지키려고 했던 이유도 사실상 그 시점에서 미시시피 수운로에서 마지막으로 남군이 지키고 있던 거점이 빅스버그였기 때문이었다.[58] 조지아 주의 애틀랜타도 지키려고 노력한 이유도 애틀랜타가 남부의 중요 공업지역이라는 것도 있지만 또한 철도교통의 요충지였다는 이유도 있었다.
이렇게 경제적으로 대국적인 준비가 부족했던 이유는 결국 남부가 원자재(면화)를 수운으로 북부나 영국의 공장에 수출하는 구조에 집중되어 있었고 공업과 철도에 대한 투자가 매우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 당시 미국은 독립전쟁 때 제해권을 넘겨준 상태로 전술적으로 얻어터지면서도 전략적으로 '버티기'에 성공한 경험이 있었고, 남부 정치인들은 미국 독립전쟁 때처럼 제해권을 넘겨준다고해도 버틸 수만 있으면 북부가 알아서 제풀에 지쳐 쓰러질 것이라고 굉장히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프랑스가 미국 독립전쟁에서 미국을 도와준 것처럼 면화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가 어쩔 수 없이 남부를 도울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즉, 전혀 같은 상황이 아닌데도 비슷하게 어떻게든 잘 굴러갈 것이라고 객관적인 계산도 없이 낙관론만으로 도박을 한 것이다. 결국 북부의 역량을 굉장히 얕잡아 봤다고 할 수 있겠다.
지속된 전쟁은 북부에게도 피해를 줬지만, 남부에게는 재앙에 가까운 피해를 줬다. 특히 당시 20억 달러의 가치가 있던 노예들이 전쟁이 끝나고 수정헌법 13조로 인해 한 방에 해방됨으로써 막대한 자산이 날아가게 되고, 파괴된 철도망 및 공업기반들은 남부인들이 아니라 북부인들의 자본으로 재건됨으로써 경제적 주도권을 북부에 완전히 빼앗기게 된다. 북부는 경제적으로 피해를 보기는 했으나, 전쟁 수행을 위해서 연방정부가 적극적으로 지출을 해준 덕택에 산업혁명에 불이 붙게 되었다. 이 시기에 록펠러, J.P. 모건, 카네기, 밴더빌트 같은 미국 경제사의 거물들이 등장하여 미국의 산업기반을 다졌다.
또한 아메리카 연합국이 쓰던 화폐인 남부연합 통화는 전쟁 당시의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남북전쟁 이후 1900년대까지 사실상 화폐로서의 가치가 없는 휴지조각이 되었다. 사람들이 보물인줄 알고 이 화폐를 찾을 때나, 혹은 상속의 형태로 자손에게 전해질 때 짐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 화폐들을 대부분 파괴되었다. 그러나 21세기들어 역사적 가치가 재조명된 반면, 대부분의 화폐가 훼손된 상황에서 희소성이 높아졌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려는 수집가들의 수요까지 몰리면서 액면가 100~500$ 정도 지폐의 시세가 10배에서 100배까지 치솟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었다.
10. 대중문화
남부를 그린 대표적인 소설 및 영화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있다.비록 100년도 더 이전에 소멸한 미승인국이자 분단국가이긴 하나, 오늘날의 초강대국 미국에서 떨어져 나가서 미국과 싸웠다는 점 때문에, 당사자인 미국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인지도가 높아 대중문화에서는 다양한 소재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미국과 관련된 대체역사물에서도 빠지지 않는 편으로 예를 들어 남북전쟁에서 남부가 승리하여 미국 전 지역을 지배한다는 대체역사, 독립을 유지한 뒤 남미에 식민지를 개척하는 등 여러 대체역사가 제시되는 편이다. 이러한 부류에서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본격적인 대체역사소설의 시초인 '희년을 선포하라'를 비롯해, ' 타임라인-191 시리즈', ' Guns of the South' 등이 있다.
BBC에서 만든 모큐멘터리 C.S.A.: The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가 이러한 남북전쟁에서 남부가 승전한 대체역사를 다룬다. 남부의 승전 이후 대체역사 세계관에서 외국의 방송국 BBS에서 만든 다큐멘터리라는 설정이다.[59] 캐나다의 역사학자와 인종차별주의적인 미국의 인물, 학자들의 시각을 번갈아 가면서 보여준다. 남부인 아메리카 연합국이 확장하고, 경제 대공황을 노예무역으로 극복한 뒤,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고[60] 독자적으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일본을 점령하는 등 말 그대로 백인 우월주의를 우회적으로 비꼬아 보여준다. 미국은 현실보다 더한 가부장적, 기독교적, 백인우월주의적인 국가가 되었고 캐나다는 흑인들의 도피처가 되어 미국과 대립하게 된다.[61]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 차별이 2000년대까지 이어져온 오늘날을 문제의 다큐 중간중간에 나온 광고들을 통해 생생히 느끼게 하고 있다. 놀랍게도 이 영상의 몇몇 광고들은 진짜로 있던 상품들이었다. 모큐멘터리의 끝은 스스로가 100% 코카서스 백인이라고 여기는 정치인이 흑인 스캔들에 시달리다가 자살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62]
스타크래프트의 테란 연합은 이름도 Confederate으로 같고 연합국 해군기를 자기네들 깃발로 쓰는데, 그 이유가 상당히 우습다. 타소니스에 불시착해 살던 초창기의 1세대 죄수 중 하나가 자기들 우주선에 탑재되어 있었던 슈퍼 컴퓨터인 아틀라스를 뒤져보다가 아메리카 연합국에 관한 내용을 찾아내는데, 해군 깃발이 너무나 마음에 든 나머지 자기들 깃발로 쓰고 이름까지 똑같게 지어버렸다. 그래서인지 지명도 남북전쟁과 관련된 지명들을 일부 차용했는데, 연합 수도성 타소니스에는 뉴 게티스버그라는 장소도 있다. 참고로 테란 연합도 몇년 못가 망했다. 물론 이건 본편기준이고 그래도 스타크래프트에 등장하는 테란 세력들 중엔 가장 긴 역사를 가진 집단이었다.
미국에서는 남북전쟁 리인액트야 예전부터 있었지만 종종 너무나도 빠져든 나머지 아메리카 연합국빠가 된다든지 리인액터 행사에서 똥군기 잡으니 생쇼하다가 비웃음을 사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리인액트를 하며 흑인들에게 남군 정당성을 부르짖다가 이뭐병 소리 듣기까지 한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지에서도 이걸 언급하며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할 정도. 키 앤 필이 이를 풍자한 영상을 만들기도 했다.
욕심쟁이 오리아저씨에서는 런치패드 맥쾍의 조상이 남군 지휘관이었는데, 멍청한 지휘 때문에 패했다고 남군 후손들에게 조롱을 듣지만 휴이, 듀이, 루이의 도움으로 남북전쟁 라인액트에서 남군의 승리를 이끌게 된다.
사우스 파크에서는 에릭 카트먼이 알콜중독자가 된 남군을 이끌고 백악관까지 진군한 적도 있다.
하츠 오브 아이언 시리즈에서는 독립 가능한 국가로 등장한다. 일본으로 미국을 항복시키면 일본의 괴뢰국으로 독립하기도 한다. Hearts of Iron IV에서 Man the Guns DLC가 있다면 1936년 11월 대선에서 공화당의 알프 린든을 뽑고 나서 파시즘으로 갈아탄 뒤, 관련 중점을 모두 찍으면 결정 사항을 통해 국호를 미연합으로 바꾸고 리치먼드로 천도한다.
Victoria II에서는 역으로 미국 플레이시 노예제 유지 쪽으로 이벤트를 맞춰주면 이에 반발한 북부가 남부 대신 반란을 일으켜 The Free States of America (FSA)를 건국하고 역 남북전쟁이 일어난다. 북부가 승리할 경우 미국은 아메리카 연합국으로 바뀐다.
[1]
명칭은 The Blood-Stained Banner이며 항복 당시의 국기다. 국기 변천과 실질적 국기 역할을 한 남부연합기에 관해서는 2.2 국기 문단 참고.
[2]
사우스캐롤라이나 1860년 12월 20일,
미시시피 1861년 1월 9일,
플로리다 1861년 1월 10일,
앨라배마 1861년 1월 11일,
조지아 1861년 1월 19일,
루이지애나 1861년 1월 26일,
텍사스 1861년 2월 1일,
버지니아 1861년 4월 17일,
아칸소 1861년 5월 6일,
노스캐롤라이나 1861년 5월 20일,
테네시 1861년 6월 8일.
[3]
현재의
멕시코와 비슷한 크기이다.
[4]
1860년 미국 국세조사 결과. 이 가운데 39%인 3,521,110명이
노예였다.
[5]
동맹을 맺은 국가들이라는 뜻이다. 또한 방(邦)이란, 나라 혹은 국가라는 뜻으로 현대에는 한 고조 유방의 이름을 피휘하여, 국(國)을 쓰지만 이러한 연방(연합을 맺은 국가들), 맹방(동맹을 맺은 국가들), 방화(국산 영화) 등과 같은 단어에는 아직 남아 있는 경우가 있다.
[6]
별은 연합에 가입한 주를 나타내며 최초 버전은 1861년 3월 4일 ~ 1861년 5월 18일 별이 7개로
군함기로도 쓰였다. 성조기처럼 주가 늘어날 때마다 별도 늘어나 이후 1861년 5월 18일 ~ 1861년 7월 2일 9개,
1861년 7월 2일 ~ 1861년 11월 28일 11개를
거쳐 1861년 11월 28일 ~ 1863년 5월 1일 최종본은 13개다.
연방을 탈퇴한 11개 주에
미주리주,
켄터키주가 추가되었는데, 미주리주와 켄터키주는 연방을 탈퇴하진 않았지만 친연합임을 인정하여 의회 대표권을 부여하고 국기에 별 2개를 추가했다.
[7]
Rebel Flag, Dixie Flag, Southern Cross, 남부기, 맹방기라고도 한다.
[8]
한국어 위키백과에서는 The Stars and Bars/The Stainless Banner/The Blood-Stained Banner를 각각 성건기/결백기/혈조기라고 번역했으나 번역어의 출처가 불명하다. 이 용어는 한국어 위키백과 외에는 검색되지 않는데, 해당 문서에도 출처나 근거는 표시하지 않았다. 해당 문서의 최초 기여자가 임의로 번역한 듯 싶다. 중화권에서는 각각 성강기(星杠旗)/무하기(無瑕旗)/혈기(血旗)로 번역했고 일본에서는 스타즈 앤드 바즈(スターズ・アンド・バーズ)/스테인레스 배너(ステインレス・バナー)/블러드 스테인드 배너(ブラッド・ステインド・バナー)와 같은 식으로 원어 표기한다. 특히 결백기나 혈조기는 의미상 潔白旗, 血條旗로 볼 수 있지만 성건기는 '건'의 한자 표기도 불명하다.
[9]
1952년 서울에서도
성조기,
태극기, 유엔기, 터키의
월성기, 프랑스
삼색기,
태국 국기,
이스라엘 국기와 함께 이 깃발이 내걸린 것이 목격되기도 했다.
[10]
북아일랜드의 성 파트리치오(St. Patrick)의 X십자가기와 도안이 같다.
[11]
참고로 이 사건의 범인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국기와
짐바브웨의 전신인
로디지아 시절의 국기가 새겨진 옷을 입은 찍은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리기도 했다. 이 두 상징 역시 남부기와 마찬가지로 인종차별을 연상시키는 공통점이 있으며, 자세한 사항은
아파르트헤이트 및
로디지아 항목 참고.
[12]
프랑스 왕국,
카스티야 왕국,
대브리튼 연합왕국, 간소화된
미합중국
성조기 문양이 다 들어가 있는데 아메리카 연합국 국기만 뺄 명분이 없다.
[13]
정작 영국은 유럽에서 가장 먼저 노예무역을 폐지한 국가 중 하나였다.
[14]
1861년 5월에 버지니아의 리치먼드로 옮길 때까지 임시수도였다.
[15]
웨스트버지니아가 기존의 버지니아 주와 분리되어서 독립된 주로 설정된 것은 남북전쟁이 발발한 이후인 1862년이다.
[16]
전투자체는 양군의 승리가 정해지지 않은 무승부였으나 메릴랜드를 거쳐 연방의 수도를 공략하려던 남군의 의도를 분쇄했기 때문에 연방의 전략적 승리였다.
[17]
미국 남북전쟁에 대한 저명한 PBS의 다큐멘터리 The Civil War에서는 북부가 처음에는 한손으로 뒷짐을 지고 나머지 한 손으로 싸우다가 나중에 두 손으로 싸우기 시작하자 남부에게는 희망이 없었다고 단언한다.
[18]
당시 주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19]
다만 국제 노예무역은 금지
[20]
패망 직전에 영국으로 망명해 변호사가 되고
빅토리아 여왕의 자문관이 되는 등 퍽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았다.
[21]
산업혁명이 일어난 북부에선 보호무역을, 영국에 목화를 수출해야 할 남부에선 자유무역을 선호한 데에서 갈등이 발생했다는 주장. 미국 남장로회 소속 선교사의 후예인
인요한도 자신의 책에 이런 주장을 실은 바 있다.
[22]
톰슨 본인이 고안하고 채택 된 남부연합 두 번째 국기는 흰 바탕에 왼쪽 상단에 익히 유명한 안드레아 십자기가 들어간 형태였다.
[23]
브라질은 유럽-미주 문명 국가 가운데 노예제 폐지가 가장 늦은 나라로, 미국보다도 늦은
1888년에 폐지되었다. 그러나 노예제 폐지를 계기로 쿠데타가 일어나 브라질 황제
페드루 2세가 망명을 떠나는 등 갈등이 컸다.
[24]
이 시절엔 하필 남부가 전쟁 직전에 목화를 대량으로 팔았기 때문에 창고에 목화가 남아돌고
영불관계가 양호하던 시절이라 영국은 프랑스에 남는 목화를 재수출하는 패기까지 보였다.
[25]
또한 교황은 비도덕적인 노예제 폐지를 촉구했다.
[26]
해군기와 달리 정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기념품 등으로 파는
손수건은 대부분 정사각형이라, 해군기가 아닌 육군기를 모티브로 해서 제작된다.
[27]
프랑스계 장군으로, 이후 그랜트에게
샤일로 전투에서 패한 뒤 몇몇 전공도 세웠지만 데이비스 대통령과의 갈등으로 상대적으로 한직을 전전했으나, 이후에도 남군의 위기마다 소방수로써 활약했으며, 전후 흑인 인권운동에 뛰어들기도 했다.
[28]
유능한 장교였던 건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너무 공세지향적이라는 단점이 있었다. 리의 과중한 임무부담으로 장기간 하루에 수십 킬로미터를 이동하는 고강도의 기동전을 자주 벌였다.
챈슬러스빌 전투에서 아군 오인 사격으로 입은 부상에 폐렴이 겹쳐 전사했다.
[29]
약 200명 정도의 흑인 군인들이 있었지만 실제 전투가 아닌 후방 지원 임무에 종사했다. 한편 북군은 United States Colored Troops, 즉 아메리카 합중국 유색군을 창설하였고, 이들은 주로 후방 주둔군으로 많이 사용되었지만 전방의 전투에도 종종 참여했다. 대표적으로
피터스버그 포위전의 구덩이 전투에도 참여했고, 남군의 중요 항구 중 하나인
찰스턴을 점령하기 위한 일환으로 벌어진 포트 와그너 전투에서도 흑인으로 구성된 제54 매사추세츠 의용보병연대는 최전선에서 돌격하다가 거의 반(600명 중 270명)이 죽거나 부상당했다.
내슈빌 전투에서도 유색군이 대거 참여하였다. 내슈빌 전투 중 스티드먼의 임시 분견대 군단 중 2개 여단이 유색군이었다.
[30]
"I did not volunteer my services to fight for a free negro's free country, but to fight for a free man's free country, and I do not think I love my country well enough to fight with black soldiers."
[31]
대놓고 노예징병을 언급하지는 않았고 최대한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32]
클레번 본인은 이 전투에 반대했다.
[33]
What was the number of the regiment or name of the vessel in which your owner served?
[34]
"A new feature in the pension appropriation of Tennessee makes an allowance for pensions to the faithful negroes who were in the war with their masters and served them to the end(...) Doubtless other states of the South will make similar provision for their old negroes, whose loyalty under the circumstances showed a fine sense of honor not apparent in later generations of the race."
[35]
남부에서 버지니아주 서부와 비슷한 여론이던 지역으로는 역시 남부에서 몇 안되는 공업지역이던 테네시주 동부 지역이 있는데 여기는 삼면이 남부연합에 둘러쌓있다는 지리적 요건 때문에 연방군이 지원하기가 어려워서 바로 남군에게 진압당했다.
[36]
단, 병력의 질에서는 연방군에 큰 열세였다.
[37]
연방군 54,000 vs. 남군 55,000
[38]
무려 연방군은 33개 포대 170문을 전방 배치해둔 상태였다.
[39]
고작 몇 십 km 앞이었다.
[40]
물론 해당판단은 틀렸다. 남군은 7일 전투 초반 스톤월 잭슨 여단이 도착하지 못해 8만 정도였지만 북군은 13만으로 수적으로 우월했고 대포도 훨씬 많았다.
[41]
뱃머리에 게양하며 함수기라고도 한다.
[42]
뱃고물(선미)에 게양하며 함미기라고도 한다.
[43]
첫 번째 국기인 The Stars and Bars의 최초 버전과 같다. 이후 별이 추가된다.
[44]
두 번째 국기인 The Stainless Banner와 비율만 다르다.
[45]
두께 1.75인치
[46]
현
미 해군의 대령에 해당함.
[47]
두께 1.5인치
[48]
현 미 해군의 중령에 해당함.
[49]
현 미 해군의 소~대위에 해당함.
[50]
현 미 해군
준사관에 해당하며, 일부 합격후보생들이 정식 임관을 기다리며 이 직책에 배치되기도 했다.
[51]
정식 임관 시험을 통과한 사관후보생.
[52]
그냥 통짜
금색으로 되어 있다.
[53]
두께 1.25인치
[54]
장교라기보다는 장교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 일종의 제복 착용
군무원이었다.
[55]
당시엔 단일 계급이었다.
[56]
현재도 있는 그 화학회사 듀폰이 맞다.
[57]
이름 그대로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민간인이 가진 1/10에 한에서 강제로 징발하는 것을 합법화한 법안.
[58]
다만 이 시점에서 빅스버그의 전략적 중요성이 과장되었다는게 요즘 역사학자들의 견해다. 그랜트 휘하 북군의 연이은 승전으로 남군은 사실상 미시시피 강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했으며, 뉴올리언스를 되찾는데도 실패하여 수로수송의 요충지로써 빅스버그의 중요성은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학자들도 빅스버그를 함락함으로써 3만명에 가까운 남군 병사들에게 항복을 받아내고, 완전히 미시시피 강의 통제권을 획득한 덕분에 북군의 사기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는 점에 있어서 전쟁을 반전시키는 중요한 전투였다는데는 여전히 다들 동의한다.
[59]
그래서 영상 시작부분에 "해당 영상은 본 방송사의 의도와 상관이 없으며 노예와 아이들에게 적절치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나온다.
[60]
이신론이었던 나치당 성향과 히틀러의 최종 해결책(유대인 등의 강제수용과 절멸)에는 동의하지 않고 유색인종을 노예들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61]
단순하게 흑인들의 도피처가 아니라 망명간 가수와 문화인들이 세계 문화를 선도할 정도가 된다. 작중 미국은 이를 막고자 미국과 캐나다를 차단하는 장벽을 세우면서까지 노예들의 탈출을 막았다. 그러나 캐나다로 도망간 흑인들이 올림픽에서 압도적으로 금메달을 휩쓸자 부랴부랴 흑인들로 팀을 만들고, 여성 참정권 운동이 일어나면서 케네디가 당선되어 약간의 희망이 생기는가 했다. 하지만 원래의 역사처럼 케네디가 암살되면서 다시 암흑기로 빠지게 된다.
[62]
해당 정치인은 대체역사의 미국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집안 출신이었고 히틀러를 흠모하고 있었다. 조상부터 히틀러와 만날 정도였으며 아버지는 아예 미국과 냉전 중인 캐나다를 선제 폭격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암살당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미국을 개신교적 가치관으로 되돌리는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남편이 아내를 때리고 동성애자들에 대한 관용을 무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이 소유한 노예가 주장한 혼혈주장 때문에 자살한 것과 다르게 DNA 결과는 음성이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