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08:44:34

남존여비

파일:Document_Protect.svg   편집 보호된 문서입니다.
문서의
ACL 탭
을 확인하세요.
고사성어
사내 남 높을 존 계집 녀 낮을 비
1. 개요2. 발생하는 원인3. 각국의 역사적인 남존여비4. 현대의 남존여비
4.1. 동북아시아4.2. 동남아시아4.3. 남아시아4.4. 서아시아4.5. 동유럽4.6. 북유럽4.7. 서유럽4.8. 미국, 캐나다4.9. 남미
5. 대중매체
5.1. 묘사되는 작품들의 예시5.2. 게임
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파일:jCCd2oefVyCtdzmrijiYwQcUQrU14HMVI-xVQMV9CSQ.jpg
집안에 여자 하나 들이는 건 좋죠.
It's nice to have a girl around the house.
1960년대 미국 광고 中
남성과 여성의 관계도 자연적으로 우월한 자와 열등한 자의 관계, 즉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中
"성은 귀하고 성은 천하다"는 뜻의 단어.

남존여비는 동아시아 유교 문화권의 세계관을 설명하는 '음양()' 개념에서 기원한다. 음양이란 단어는 처음에는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의 두 가지 상반된 기본 요소 또는 동력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런데 점차 개념의 발달과 함께 건곤(乾坤)으로 추상화되고, 남성성과 여성성에 적용되어 사회 신분적인 가치로 쓰이게 되었다.

『주역』에는 "건도(乾道)는 남자를 만들고 곤도(坤道)는 여자를 만든다"고 하였고, "하늘은 높고 땅은 낮은데 그것을 본떠 건괘와 곤괘가 자리 잡는다"고 하였다. 이것은 하늘·땅·인간을 유기적으로 파악하려는 시도에서 나온 것인데, 양(陽)은 건괘(乾卦)가 되어 하늘과 남자에 배속되고, 음(陰)은 곤괘(坤卦)가 되어 땅과 여자에 배속되었다. 즉, "하늘은 높고 땅은 낮다"는 자연현상과 "건괘와 곤괘가 자리 잡는다"라는 괘의 배열 순서가 결합하여 천존지비(天尊地卑)나 양존음비(陽尊陰卑)로 도출되었다. 다시 말해 높고 낮은 천지의 공간적인 위치로부터 귀하고 천하다는 사회적인 개념을 도출한 것이다. 하늘은 높음과 남자에 유비(類比)되고, 땅은 낮음과 여자에 유비되면서 남존여비라는 개념이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자연의 이치로 합리화된 남존여비는 정치와 생활 속에서 다양한 불평등 양상을 드러내었다. 남자는 이끌고 여자는 따른다는 '남수여종(男帥女從)', 여자를 남자의 종속적인 위치로 설정한 ' 삼종지도(三從之道)', 아내는 반드시 남편을 따라야 한다는 '여필종부(女必從夫)' 등의 용어가 사회적으로 통용되었다. 유교 경전의 "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거나 "여자는 재능이 없는 것이 덕(德)"이라는 말은 남존여비 관념을 강화시키는 지식의 근거가 되었다.

유교 사회 조선에서는 이러한 관념에 근거하여 여자의 사회적 활동을 금지시켰는데 과거를 통한 관직 진출이 여자에게는 허용되지 않았고 여자란 본디 남자보다 낮다는 관념은 남자에게 혼인관계를 무효화시킬 권한을 주었다. 강제 이혼의 요건인 칠거지악(七去之惡)에는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은 경우, 아들을 낳지 못한 경우, 남편의 다른 여자를 질투한 경우[1], 병에 걸린 경우, 말이 많은 경우 등이 있다. 여자를 도구화하고 사물화시킨 이러한 규정들은 여자의 지위나 인격이 근본적으로 비천(卑賤)하다는 관념이 있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것들이다.

남자에게는 남자로 태어난 것 자체가 하나의 즐거움이었던 것 같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는 영계기삼락(榮啓期三樂)으로 사람으로 태어난 것, 남자로 태어난 것, 오래 산 것을 들고 있다. 즉 만물 중에 사람이 가장 귀한데 사람으로 태어난 것,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은데 남자로 태어난 것, 태어나 바로 죽기도 하는데 95세가 되도록 살고 있는 것을 들었다. 반면에 여자는 남존여비의 오랜 역사 속에서 스스로 남자를 존대하고 자신을 비하하는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공자가어와 비슷한 일이 고대 서양에서도 있었는데 그리스의 철학자인 플라톤은 (1)인간으로 (2)아테네에서 (3)남자로 태어난 것에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2. 발생하는 원인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남존여비 현상이 존재해 왔는데 인류학의 관점에서는, 1만년전 인류가 농경사회로 진입하게 되면서 농경과 목축 등 중요 생산활동에 남성이 완력(힘)을 기준으로 더 높은 평가를 받아 남아 선호사상이 생겨났었다. 소규모 사회일 땐 크게 부각되지 않았지만 공동체가 커질수록 사회시스템이 복잡해졌고, 기존에 있던 선호사상의 영향으로 대부분 남성이 사회적 지위를 잡게 되면서 사회적 활동이 증가하며 그 권리가 상승했을 것이다.

인류사의 9할 이상을 차지하는 수렵채집사회에서는 여성차별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본다. 즉, 여성차별은 인류학사에서는 비교적 생긴지 얼마되지 않은 것이다. 19~20세기까지 살아남은 수렵·채집 사회들을 인류학자들이 조사·연구한 결과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2] 이런 연구 결과들이 보여 주는 바는, 유목민들과 마찬가지로 (사냥감을 쫓는) 수렵·채집인들도 날마다 각자 등에 지고 다닐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재산을 모을 수 없었기 때문에 수렵·채집 사회에서 물질적 평등이 대체로 보장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폭넓은 양성 평등은 주로 여성의 채집 활동으로 공동체 식량의 절반 이상이 공급됐다는 사실과 관련 있다.

수렵·채집 사회에서 농업 사회로 전환과 동시에 생산 형태도 여성의 노동 (주로 채집)이 남성의 노동과 동등하게 중요한 형태에서 남성이 사회의 부를 대부분 생산하는 형태(경작과 목축)로 전환됐다. 이것은 하루 종일 무거운 쟁기를 끌거나 소를 모는 일이 어린 아이들을 기르거나 돌보는 일과 양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사회적 잉여와 국가를 통제하는 일을 주로 남성이 맡게 됐다.

이와 함께 수렵·채집 사회의 특징이었던 자유로운 짝짓기와 집단적 육아 관행도 폐기됐다. 그리고 종교적·법률적으로 통제되고 남성이 우위를 점하는 배타적인 가족이 발전했다. 이런 가족 안에서 아내는 남편의 재산으로 취급됐고, 하는 일도 집안일과 자신의 자녀만을 돌보는 것으로 국한됐다.[3]

동시에 여성은 출산 육아처럼 대부분의 시간을 집 안에서 보내게 되면서 사회활동이 저하되었다. 이때부터 남녀간의 차등이 발생하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단순한 남아선호였던 사상은 여아혐오가 내포될 정도로 극단적인 양상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변질된 사상은 '남존여비'의 이름으로 여러가지 제약들을 이용해서 여성의 사회적 활동을 제한되게 함과 동시에, 남성만이 사회적 활동을 펼칠 수 있게 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정리하자면 고위층들 사이에선 집안의 대를 이으며 관직에 나가 중요한 일들을 수행하던 남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면서, 남성 중심의 사회적 시스템이 구축되어 존귀한 취급을 받았고. 출산과 양육, 여러가지 예법, 지위에 따른 체면 등으로 인해, 여성의 외부활동이 상당한 제한되면서 생기게된 현상이란 것이다.

처음엔 딱히 남존여비라고 표현할 만큼의 큰 차이는 없었을 수도 있겠지만 서서히 남자가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당연해진다면 가령 귀중한 교육의 기회가 생겨도 그 기회는 힘든 일을 다 하고 중요한 결정을 다 내린, 남자에 그 기회가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사회의 지도층은 남성이 되기 십상이다. 설령 지도층에 있는 남성이 딱히 남성우월론자가 아니더라도 남성이 계속해서 힘든 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 사회라고 생각되면 어드밴티지는 남성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오랫동안 인류는 전쟁이 많았고 전쟁이 나면 남자들은 전장에서 많이 죽고 진 쪽은 학살이 기본이었다. 그렇게 남자가 대량으로 죽어나갔기 때문에 희소자원인 남성이 우대를 받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전쟁 중이나 전후 시대에 남존여비가 강해졌다가 평화가 지속되면 지위의 격차가 줄어들었다 하는 일이 반복되었는데 전후 러시아나 베트남 등의 일화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전쟁이나 대량학살이 없는 현대 국가에서는 통하지 않는 이야기다.

그런 상황에서 수백 년에서 길게는 수천 년간 진행되면 남존여비 사상은 자연스럽게 정착하게 된다. 지역과 시기에 따라 남존여비가 덜하냐 더하냐의 차이는 생기게 되지만[4] 덜하든 더하든 은연중에 남존여비가 남아있는 곳이 대부분인 이유는 이런 현상에 기인한다.

당장 현대에서도 맞벌이를 하지 않는 집안을 보자. 남자만 돈 버는 일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은연중에 남자의 발언권이 세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문제는 결혼을 했다면 돈을 쌓아두고 사는 게 아닌 이상 가족 중 누군가는 돈을 벌어와야 한다. 반면 가사는 결국 반드시 해야 하는 일(돈을 버는 일) 다음으로 중요한 일이라고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 자체는 당연한 이야기이지만[5] 문제는 그 때문에 가정에서의 발언권에 차이가 생겨난다는 부분.

거기다 아직까지도 사라지지 않는, 그리고 아마 어지간해선 사라지기 힘든 남존여비의 마지막 결정적인 원인이 되는 부분은 바로 "남자가 여자를 지켜야지"라는 관점이다. 이 관점은 남성이 근력이 세고 여성은 상대적으로 약하므로 전투원으로서 남성이 효율적인만큼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지만, 동시에 "남성이 근력이 세므로 여차저차한 과정을 거쳐서 더 많은 책임을 짊어지게 된다."라는 개념 면에선 같으며 그 부분이 결국 권리로 이어진다. 남성만 징병된다거나, 넓게 보면 목숨이 위험할 때 가급적이면 노약자나 여성, 어린이 등을 보호하게 되는 불문율이나 약자를 배려하는 부분, 레이디 퍼스트 등의 개념들도 마찬가지다.

반대로 여성만이 아이를 낳을 수 있고[6][7], 추운 극지방이나 식량이 없는 극한 상황에서는 지방이 많은 사람이 생존할 가능성이 큰데 보통 여성이 남성보다 지방이 많기 때문에 소수의 몇몇 상황에서는 여성의 신체가 유리할 수 있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는 투쟁 행위가 그다지 이득이 없기 때문에 남성의 가치 자체도 딱히 높지 않다. 현실에서는 제한적으로 존재하는 여존남비 사회도 아마 이런 여성의 신체적 특성에 의해서 종합적으로 사회에서 “보다 많은 책임을 짊어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바람에 여존남비의 사회가 성립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결국 수렵채집 사회의 성평등한 요인을 떠올리면 사회의 부를 동등하게 창출해낼 수 있는 노동의 형평성[8]과 유연한 가족관과 육아 관행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에서는 남성 단일 징병, 여성의 커리어-육아 동반의 어려움, 성별에 따른 경력 단절, 장시간의 노동 문화, 보수적인 결혼/가족관, 개인주의와 도시화가 함께 진행되며 공동 육아 관행이 폐기되는 등 여전히 갈길이 멀다.

3. 각국의 역사적인 남존여비

3.1. 미국, 유럽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남존여비적 사고관이 있었으며, 비록 계몽주의와 여성 참정권 쟁취 등의 영향으로 사그러들긴 했으나 길게는 20세기에도 보수적 관점이 지속되었다. 맨 위에 인용된 어구와 잡지광고에서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종교적으로 보면 그리스 로마 신화 북유럽 신화에서도 주신은 모두 남신이었다. 기독교에서도 중심 인물들은 대부분 남성이다.

인간의 이성을 발견한다는 16세기에도 유럽에서는 남존여비적인 관념이 지배적이어서, 당시 서양 철학사에서도 이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당시 남성 국왕들은 거의 대부분 대놓고 을 거느렸다. 심지어 남성 국왕이 첩을 거느리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로 여겨졌다. 한 예로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는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를 사랑하는 애처가여서 이전의 프랑스 국왕들과는 달리 첩을 거느리지 않자 프랑스 백성들은 루이 16세가 성불구자인 모양이라며 부정적으로 여겼다. 왜냐하면 루이 16세 이전의 국왕들인 루이 14세 루이 15세는 여러 명의 첩들을 거느렸고 프랑스 백성들은 그런 국왕들의 성생활이 당연하다고 간주했기 때문이었다. 잉글랜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평생 동안 결혼을 하지 않았다. 당시 잉글랜드를 포함한 유럽에서는 설령 여왕이라고 해도 여자인 이상 결혼하면 남편한테 복종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었던 만큼 자칫 엘리자베스 1세가 결혼을 했다가는 남편한테 권력을 빼앗길까봐 우려했다. 실제로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은 두번 결혼했는데 하필 그 상대가 신하인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여서 국내외적으로 비웃음을 사고 위신이 떨어졌다.

19세기 대영제국 시대에도 정작 빅토리아 여왕은 "여성의 정치 참여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라면서 여성의 참정권 요구를 부정적으로 여겼다.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본산인 현 유타 주에는 아직도 일부다처제 남성들이 존재하고 그 수가 미국 전역으로 따지면 무려 만 명이 넘는다. |자세한 통계자료 심지어 일부다처제 tv show도 오늘날 미국에 존재한다. 일부다처제 tv show

3.2. 한국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 여학교이니
세상 천지에 차마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남자들과 평등하자 앞 다투어 소리내니
만물 가운데 이런 일이 또 어디있나

내칙지문과 열녀전
아름다운 옛 규범이 과연 어떠하기에
그 누가 변화를 이 지경까지 주장했나
백번 놀라고 천 번 경악하고 가히 곡할 일이네
유인석 의암집
▲당시 사대부들에게 있어 바깥활동은 남성의 전유물이었고, 교육을 받기 위해 전문시설(서당, 성균관)에 가는 것도 남성의 일이라는 인식이 있었다.[9]

조선 중기 이후 양반가의 여성들은 그 사회적 지위가 지극히 열등하였는데 “여성은 알게 할 것이 없고 다만 좇게 할 것”이라는 유교 성리학적 이데올로기가 그 근본이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성리학의 예법에 따라 외부와 격리된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에 하류층의 여성들과 달리 매우 억압적인 삶을 살아야만 했다.

이를 반증하듯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속담까지 있었는데 당시 다소곳하지 못하고 시끄러운 것은 양반들의 미덕이 아니었고, 여성이 집안에서 좌지우지하여 언권(言權)을 발휘하면, 남성이 집안의 기둥이고 여성은 그러한 남성을 보조한다는 양반들의 사상에 위배되기 때문이었다.[10][11]

고려 조선 초기만 해도 딸은 상속에서 차별대우를 전혀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부모의 제사를 지내기도 하는 등 조선 후기의 성리학적 예법에 따른 차별적 대우와 다른 양태를 보였다. 물론 여성의 지위가 높았다던, 고려와 조선초기도 여성의 관직진출은 불가능했지만 고려는 여성의 외출과 개인적인 업무에 대한 제약이 없었던 반면 조선에 들어서면서 여성이 친가에 방문하는 것조차 막을 정도로, 개인적인 외부 활동에 강력한 제재를 가하게 된다.[12]

사실 계급이 밑으로 내려갈수록 이러한 제약들은 없거나 약해졌으며 양반과 평민은 서로가 정 반대의 세상을 살아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친족 및 상속 분야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양반들 사이에서 부계친족제도가 강화되고 남존여비 사상이 깊게 뿌리를 내린 것은 임진왜란 이후인 17세기 중반 이후이며, 평민들 사이에선 이러한 사상은 19세기 말기쯤에 올라오다가, 20세기에 들어 급격한 근대화 • 기존의 경제체계 붕괴 • 남성에 대한 의존도 상승처럼 여러 사회적 혼란들이 겹겹이 일어나는 바람에 남존여비 사상이 퍼지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단순한 성리학 이념의 정치적 강화에 따른 종법제도의 확립의 여파로 설명하던 이전의 이론을 넘어서 양란 등의 전쟁으로 인한 가정의 파괴와 성 관념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조처, 혼인 이후 거처의 변화에 따른 여권의 하락, 양반 지주의 토지 확대 정체에 따른 장자상속제로의 이행의 여파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하는 견해가 등장하고 있다.

남존여비 풍조에 고통받았던 한 예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육영수인데 육영수의 아버지인 육종관은[13] 자신의 딸이 대학은 물론, 고등학교( 배화여자고등학교)의 수학여행(일본)도 못 가게 반대했다. #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비교적 급속하게 생긴 풍습이라(특히 일반 민중에게) 그 유지력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위의 문제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남존여비의 해소 과정은 발생 과정보다 더 급속해서 한 시대를 사는 모든 세대별로 성차별 수위의 스펙트럼이 다 다른 수준이다.

3.3. 중국

송나라 이후부터 여성들에게 천 년 동안 전족이 실시되었다. 송나라 때는 그저 꽁꽁 싸매던 것을 그 이후에는 어린 여자아이의 발을 두 방향으로 접고 천으로 꽁꽁 싸맨 뒤 꿰매어 작은 신발을 신겨 자라지 못하게 했다. 이 과정을 겪으면 발가락 뼈가 부러지고 굽고 자라지 못하면서 작은 발이 만들어진다. 이상적인 전족의 크기는 점점 작아졌고 명나라 청나라시기에는 삼촌금련, 즉 성인 여성의 발이 10cm(3촌) 이하인 것을 으뜸으로 쳤다.

처음에 이러한 전족문화는 왕실~귀족 여인들이 주로 행해지는 문화였다. 그런데 어느순간 민간에서도 이러한 풍습이 퍼져 유행하기 시작하더니 수많은 여성들이 전족을 가지게 되었다. 2010년대 기준으로 전족은 사라졌지만 지금도 과거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할머니들을 찾아볼 수 있다.

뼈를 꺾는 전족 과정은 매우 고통스러웠고, 제대로 걷기가 힘들어 노동력을 상실하였으며, 평생 관리해 줘야 하는 등 여성에게 평생동안 족쇄로 작용하였다. 이토록 여성을 억압하는 전족이 널리 퍼진 이유에 대한 설들은 다음과 같았다.
  • 첫 번째로 작은 전족을 가진 여성은 순종적인 성격을 가졌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단순히 뼈를 접어 전족 모양을 만들기만 하는 것도 몇 년이 걸리고 고통스러운데, 이 전족을 작게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인내심과 노력이 필요했다. 예쁜 전족의 기준은 연꽃잎 모양의 작고 가는 발이었다. 작은 발을 만들기 위해서는 천으로 더 꽁꽁 싸매고, 뼈를 더 많이 꺾어야 했다. 가는 발을 만들기 위해서는 발에 그릇조각을 넣은 뒤 천으로 동여매 살이 썩어서 떨어져나가게 하는 등의 방법이 사용되었다. 몇 년 동안 이런 과정을 견뎌내 작은 전족을 가지게 된 여성은 남들보다 순종적인 성격이라고 여겨져 인기가 있었다.
  • 두 번째로 전족은 여성의 괄약근을 강화시킨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전족을 한 여성은 발이 기형이 되어 제대로 서고 걷기가 어려워진다. 따라서 걷는 데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게 되고, 이것이 괄약근을 강화시킨다고 본 것이다. 즉, 전족을 한 여성은 남편을 성적으로 만족시키기 좋다고 생각되었다.[14]
  • 세 번째로 전족을 한 여성은 집안일을 잘한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전족을 한 여성은 걷기 힘들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실내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이는 남성들에게 집안일에 충실한 여성으로 비춰졌으며, 남성들은 전족을 한 여성이 집안일을 더 잘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반면 발이 큰 여성은 집밖으로 나돌아다니기만 한다고 생각해 좋아하지 않았다.
  • 네 번째로 전족이 여자의 질 조임을 향상시켰기 때문에(…) 주요 기득권인 남자들에게 인기가 좋았고, 유행처럼 번져나가 사회 풍습이 됐다는 설이 있다. 전족을 하면 발이 기형이 되어 뒤뚱거리며 걸을 수 밖에 없는데 이렇게 자란 여자는 허벅지 근육이 약해져 다리가 매우 부드러워지고 허벅지 근육보다 회음부 근육이 단련되어 성교 시 남자가 여자에게서 느끼는 성감이 더 좋아졌다고 하지만 이 설은 질 근육이 전족을 통해 뒤뚱거리며 걷는 것으로 단련될 수 있는지에 관한 정확성이 불분명하다.[15] 가장 좋은 확인법은 전족을 한 여자가 걸을 때 사용하는 근육과 정상인이 걸을 때 사용하는 근육을 비교하는 것이겠지만, '전족을 한 여자'라는 표본 자체가 이젠 거의 없기도 하고 민감한 주제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어려울 듯하다.

종합하면 "전족을 한 여성은 본인의 고통스러움을 감내하면서 남편에게 기쁨을 주고 순종적이다"라는 이유로 남성들에게 선호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전족 문화는 궁정에서 시작되어 상류층에게 퍼졌다. 그리고 나중에는 이들을 모방하고 싶어했던 평민 계급까지 전족이 확산되었다. 당시에는 얼굴이 예쁜 것보다 발이 작은 것이 미인으로 여겨졌으며, 남성들은 손바닥 위에 두짝이 다 올라갈 정도로 작은 전족 신발을 보며 즐거워했다고 한다. 남성의 기쁨을 위해 여성의 신체를 기형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뒤틀린 남존여비의 사례라고 볼 수 있겠다.

3.4. 일본

3.4.1. 황실에서

일본 황실은 남존여비가 무척 심한데, 메이지 덴노 시절에 만들어진 황실전범의 규정에 따라 남성만 황위를 계승할 수 있다. 황태자 부부의 무남독녀 아이코 공주를 염두에 둔 여성 천황 허용 논의도 한때 활발했으나 2006년 차남 후미히토 친왕이 늦둥이 아들 히사히토 친왕을 낳으면서 잠잠해져 버렸다가 아들을 낳은 아키시노노미야 일가가 각광받고 아들이 없는 황태자 일가는 홀대를 받았다.

일본 황실 공주들은 평민과 결혼하면 황족의 신분을 잃고 남편의 신분을 따라 평민이 되지만 왕자들은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아키히토 덴노의 딸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는 2005년 평민 구로다 요시키(黑田慶樹)와 결혼한 후 남편을 따라 평민이 되었으나 그녀의 큰오빠 나루히토 황태자와 작은오빠 후미히토 친왕은 평민과 결혼해서도 여전히 황족 신분을 유지하고 있다.[16]

공식 석상에서 아내는 남편과 나란히 걷지 못하고 3걸음 뒤에서 따라가야 하며[17] 마사코 황태자비는 약혼 발표 기자회견 당시 신랑 나루히토 황태자보다 고작 19초 길게 말했다고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자신의 의견을 말한 것조차 묘하게 비난거리가 되었으며, 불임의 원인은 나루히토 황태자 쪽에 있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었으나 마사코 황태자비 혼자서만 비난과 압박을 받기도 했다.

후미히토 친왕의 아내 키코 비가 1990년 결혼식 당시 신랑의 머리를 다듬어주는 사진이 찍혔는데 이를 두고 감히 남편의 머리에 손을 댔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형님 마사코 황태자비만큼은 아니지만 키코 비도 결혼 후 딸만 둘을 낳았다는 이유로 압박을 받았다고 하며, 결국 40세의 나이에 어렵게[18] 늦둥이 아들 히사히토 친왕을 임신하고 출산해야 했다.

3.4.2. 일반에서

가정이나 언어생활에서 가부장적인 경향의 잔재가 남아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일본어에서 아내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남편을 지칭하는 단어가 主人, 즉 ‘주인’이다. 친족을 가리키는 표현에서 여자가 남편의 가족들(인척)들을 부르는 표현은 나이에 상관 없이 높임 표현이다. 요즘은 많이 희석되긴 했지만 남성어와 여성어의 구분도 그런데, 여성어는 남성어의 경어와 비슷하다.[19] 또한 과거에는 가정에서 목욕하는 순서를 (손님)→ 아버지 아들 어머니에 맞추기도 했다고 한다.[20]

3.5. 러시아

중세 러시아에서는 여성에 대한 대우가 열악해서 심각한 성차별을 당했는데 여자를 어리석고 열등하며 도덕 관념이 없는 존재로 보는 여성관의 영향이 컸다. 여성의 결혼은 전적으로 아버지, 시아버지, 남편에게 달린 일이었고, 결혼 전에 신부의 아버지가 신부를 채찍으로 때린 뒤 그 채찍을 남편이 될 남성에게 건네주는 관습이 있었다. 남편이 아내를 때리거나 재혼하기 위하여 강제로 이혼하게 한 뒤 아내를 수도원으로 보내 사회와 격리시키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런 관념은 20세기 초반까지도 이어져 내려오다가 소련 시절에 와서는 공산주의의 영향으로 일정 부분 타파되었다.

조선에서도 그랬지만 사회적 지위가 낮은 여성일수록 사회적으로 활발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16~ 17세기의 러시아 상류층 여성은 태어나고 성장할 때부터 외부와 격리된 생활을 해야 했지만 낮은 계급의 사람들은 여성을 경제 활동에서 격리시킬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하층민 여성은 비교적 자유롭게 남자와 부대끼곤 했다.

현재도 어느정도 남존여비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이건 거의 남녀간의 완력 차이에 더해 전혀 개선되지 않는 치안 문제가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참고 - 중세 러시아 여성인권 잔혹사

3.6. 중동

현대에 이르러 가장 강력한 남존여비 지역은 역시 중동이다. 히잡은 여성들만 착용하고 특히 일부 극렬 이슬람주의 국가에서는 여성들은 마치 닌자마냥 차도르, 니캅, 부르카로 얼굴 전체을 가리고 다녀야 한다. 다만 아무리 더워도 여자는 몸을 다 가리는 옷을 입어야 하기 때문에 이에 따르는 고역이 장난이 아니라는 시각은 사실이 아니다. 서아시아 국가들보다 좀 더 세속적이고 여성의 인권이 나름 보장된 북아프리카 등지에서도 여성들이 히잡을 쓰는 경우가 많다.

다만 대도시가 아닌 이상 태양빛이 강하게 내리쬐는 사막 지대에서는 아무리 더워도 히잡 같은 것으로 몸을 가리지 않으면 피부가 쉽게 상하기 때문이기도 하다.[21] 그래서 이 지역의 원주민들인 베르베르인들은 남자도 눈만 내놓고 몸을 꽁꽁 숨길 정도다. 여성의 히잡 착용은 어느 정도 현실적인 측면도 있는 법이다. 물론 그것들을 강요하는 건 빼도박도 못하는 남존여비인 악습이다. 그래서 세속주의 성향의 아랍 민족주의 테러조직 헤즈볼라는 기독교인이 과반수 이상을 차지했고 현재도 인구의 40% 가량이 기독교인인 국가의 정당이라서 아예 여성들에게 히잡을 입든지 말든지 일절 상관하지 않는다.

이게 얼마나 심하냐 하면 올림픽에서도 배구 농구선수들 중 여성들은 유니폼에 히잡을 덧대어 착용하고 나와서 시합을 할 정도이며[22] 수영 같은 종목은 아예 여자가 출전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이자벨 아자니를 비롯한 유럽 여성들의 상당수가 히잡 반대 운동을 하고 있다. 차도르는 경제적 여유가 없다면 입기 어려운 비싼 옷이라 중동 여인들 입장에서는 없어서 못 입는 경우가 더 많고 가능하면 비싼 챠도르를 입어서 과시하고 싶은 마음을 지닌 사람도 많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강요된다면 문제지만 말이다.

3.7. 인도

사티(풍습), 주방에서 타죽은 부인 항목 참조. 사티는 남편이 죽으면 부인을 불구덩이로 집어던져 버리는 악습인데 이미 19세기에 동인도 회사에서 금지한 악습이지만 사티를 금지하는 법률이 1987년에 제정되었다는 소리는 법으로 금지해야 할 만큼 계속 이어져 왔다는 소리와 다름 없다. # 더군다나 인도의 열악한 행정력과 치안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4. 현대의 남존여비

선진국/개발도상국/저개발국의 여부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선진국에선 남존여비 현상이 꽤 많이 바뀌었으며, 개발도상국이나 저개발국은 전통적으로 남존여비가 있었느냐가 중요하다. 비이슬람권 동남아시아, 일부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가난해도 몇몇 분야에서 한국보다 남존여비 성향이 약한 경우도 있다. 이런 곳에서는 중세에서의 기록에도 여성의 사회 참여가 활발하다며 외부인들이 놀라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선진국이라도 이슬람 극단주의 같은 종교 극단주의 기조가 강한 국가에선 꽤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다만 그 어떤 나라에서도 평균적인 국민들은 자신들이 다른 나라에 비해 각 성별의 권리를 잘 보장한다고 생각하며, 나름대로의 그 문화를 지킬 구실을 갖고 살아간다. 대개 외국 제도를 부러워하는 경우도 있으나 실제로 경험을 해보면 환상과 달라서 자국의 가치관을 고수하기도 한다. 가장 성평등에 민감한 스웨덴 등지의 나라의 제도를 경험한 한국인은 여성 쪽에서 오히려 여성도 일을 해내는 것이 권리라는 사회 분위기를 이해하지 못하기도 한다. 사우디아라비아 수준의 보수적 이슬람 국가 출신 여성이라도 사회적 안정, 가정의 지지가 이슬람에 있다고 생각하며 이를 고수하는 경우가 많다.

4.1. 동북아시아

일단 대한민국은 1990년대까진 남존여비가 매우 강했지만, 2000년대에 들어 여성의 지위가 서서히 상승하면서 예전에 비해선 꽤 많이 사라졌다. 다만 남존여비가 만들어낸 남아 선호 사상 여파가 꽤 커서 이 문제가 사회의 여러 문제를 만들어내기도 한다.[23] 아직 중소기업 위주로 꽤 남아있고[24] 대구경북 위주로 이런 분위기가 최근까지 남아 있었다 보니 아직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긴 어렵긴 하다. 여성이 일을 능동적으로 해낸다는 문화도 꽤 약한 편이며 여성이란 '원래 부족한 존재'라서 그 반대를 권장하는 문화도 보수적인 조직문화를 가진 곳에서 존재한다. 특히 인식이 빠르게 바뀌어가고는 있지만 가사 분담이나 정치 참여 같은 사항에 비해 어머니가 일을 하는 것, 여자가 힘을 쓰려는 일에 대해 비슷한 경제력의 국가에 비해 보수적인 편이다.

북한은 1980년대 이전까지는 공산주의의 기조에 의해 대한민국보다도 더욱 더 성평등이 빨리 정착하긴 했으나, 김일성이 이와 동시에 전통적인 여성의 업무를 강조하고, 고난의 행군 이후 북한이 붕괴함에 따라 2020년대에는 북한/인권 문서에서 보듯이 남성 인권도 개차반이지만, 여성 인권은 더욱 더 개차반인 매우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다.

다만 여기도 후술할 중국처럼 지역마다 차이가 큰 것으로 보이며, 한송이의 고향인 혜산시도 남자가 데이트 하며 양산을 받쳐준다든지 집안일 분담하는 것을 보기 좋다고 하는 등 바뀌는 모습이 있다. 가장 엄밀히 묘사하면 가부장적인 사회이므로 남자라서 이 정도는 참아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을 가지는 경우도 많다. 이혼을 하면 쪼잔하면 안 되므로 남자가 여자에게 돈을 다 주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 농촌은 몰라도 도시에서는 집안일, 밥해주는 일을 남자가 해주는 경우가 2010년대 중반 이후 급속도로 늘어 시장에서 남자가 아기를 업고 다니는 것이 관찰되기도 한다. 한류의 영향과 정권 차원에서 남자를 통제하느라 여자가 주로 실질적으로 돈을 벌게 된 사회 구조 때문에 몇 년 사이에 크게 바뀐 모습이다.

일본은 부분적으로 대한민국보다 가부장제 성향이 더욱 더 강하며, 대한민국 호주제가 폐지되어서 부성을 물려주는 것이 필수는 아니지만 일본은 한 술 더 떠서 부부동성 제도까지 있어서 결혼하면 성까지 통일된다. 물론 일본에서도 이런 문제가 사라져야 한다는 것은 알기 때문에 부부동성에서 부부별성으로 바꾸자는 의견도 있지만, 아직까지는 이게 대세는 아니다. 가족 문화에 있어서 덜 엄격한 부분도 존재하여 결혼하고 아이를 가져도 어떻게든 파트타임 등의 일을 하는 경우가 한국보다 다소 많다.

중국은 공산주의의 도입 이후 가부장제 문화가 꽤 많이 해소되긴 했지만 서부와 동부가 꽤 차이가 나는데 동부는 스윗중남 문서에서 보듯이 성평등 기조가 꽤 상당히 정착되었으나, 서부는 북한과 맞먹는 말 그대로 인외마경으로 실제로 인신매매가 꽤 많이 이뤄진다.

대만은 제도적으로 가부장제 성향이 매우 약하고, 페미니즘에 대해서 비교적 우호적이다. 그러나 가부장적인 유교 문화권이었던 것은 맞아서 한국과 유사한 세대별 성역할에 따른 갈등도 존재한다. 제도가 급진적인 만큼 보수적인 계층의 반발도 존재한다.

서구적인 시각에서는 여성이 노동이나 궂은 일의 적성을 가진 사람이 궂은 일을 하는 것을 권리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남존여비가 엄연히 존재한 과거 서양에서조차 상류층 여성이 사냥을 하며 돌아다니거나 잔 다르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같은 활동적인 여성이 존재했을 정도로 경제 활동을 심하게 제약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가부장적으로도 사회나 가정을 위해서라도 여성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잔재가 남은 것이다. 특히 일을 안 하는 것을 달콤하게 묘사하여 여성이 자발적으로 일을 덜 하게 만드는 문화도 여성의 잠재력을 교묘히 제약한다며 차별적으로 볼 수 있다. 스윗중남 같은 풍조도 여러가지 여성이 '못하는' 일을 해주면서 남성의 여성보다 우월한 권력을 과시하는 성차별로 볼 여지가 크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여성 스스로 무거운 물건을 들 수 있으면 자발적으로 드는 등의 문화가 있다. 그래서 서구인들은 이 부분을 보고 동아시아의 가부장제 성향이 심하다고 평가하는 경우가 있다. 한국인의 경우 힘 쓰며 열심히 일하는 여성을 드세고 독하다며 여성이 남성의 뜻을 따라야 하는 관념에 어긋난다고 싫어하는 보수적인 기성 세대라면 모를까 젊은 세대에서는 보수적이지 않은 이상 그것을 정말 여성을 억압하려고 인위적으로 조장한 것이 아니라서, 이런 힘을 쓰는 여성을 좀 기특하게 여기는 경우도 있다. 반대로 '남자가 그런 일도 못하냐'는 주장에 반발이 크거나, 일을 게을리하는 쪽을 더 부정적으로 여긴다.

4.2. 동남아시아

이슬람교를 믿는 지역이 아니면 동북아시아에 비해 모계 사회의 특성이 강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므로 특히 경제적 영역을 중심으로 남존여비의 모습이 약하다. 동북아 문화권의 사람들은 여성이 일을 많이하는 모습을 두고 종종 남자가 왜 저렇게 책임감이 없냐고 여기지만 현지인들은 여성의 '가정을 이끌' 책임을 제대로 실현시킨다고 하여 여성 스스로 좋게 여긴다. 베트남은 사회주의와 전통 모계 사회의 잔재로 경제, 정치 분야에서 한국은 물론 일부 서구 국가보다 여성의 활동이 활달하다. 태국, 캄보디아 등도 가정에서 여성의 발언권이 강하다는 식의 모습이 있다. 이런 국가 출신 여성과 결혼한 한국인 중 보수적인 집안에서는 여성이 왜 '밖일'을 하냐는 말에 외국인 신부 쪽에서 반발을 하던 사례도 있다. 그렇지만 남존여비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라서 혈연 등의 권위가 남성이 강한 경우가 많고, 심지어 남존여비가 약한 이런 모습을 야만적으로 보던 외래 사상의 영향을 받아 정치적 분야에서는 남성의 권위가 강해졌다.

이슬람을 믿는 인도네시아 같은 나라에서도 지역에 따라 어머니 성을 따르는 등의 경우가 있다고 한다. # 균분 상속 같은 풍습을 따르는 성향도 있으며 미낭카바우족 같은 모계 사회로 유명한 민족도 있다. #

4.3. 남아시아

지역마다 케바케인데, 동부 벵골 지역과 남부 드라비다 지역은 어느정도 덜하지만 북인도 지역의 여성인권은 말 그대로 중동 뺨친다. 소위 말하는 명예살인이 비일비재한 곳이 바로 서아시아의 이슬람 극단주의 국가들과 북인도 지역이다. 물론 성범죄에 대해선 최근에 엄벌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후술할 서아시아와 마찬가지로 걸릴 확률이 매우 낮다는 점이다.

4.4. 서아시아

엄청 심하다. 특히 개요 문단에 전술했듯이 이슬람 극단주의 기조가 강한 이란이나 사우디아라비아,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선 말 그대로 남존여비 끝판왕을 경험할 수 있다. 그나마 이란은 테헤란 등 수도 부근 위주지만 여학생 비율이 60%를 넘기도 하고, 사우디아라비아도 개혁적인 빈 살만 왕자의 집권 이후 여성의 운전이 허용되는 등 진전이 있긴 하지만 아직은 이런 부분이 남아 있다. 물론 아프가니스탄은 그나마 있던 여성 인권마져 탈레반의 집권으로...

대표적으로 히잡이 있는데 이란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외하면 여성의 히잡 착용이 법적으로 강제되지 않지만, 주변의 강요나 시선, '외간 남자로부터의 보호'와 '남편에 대한 순종의 근거'라는 구실로 인해 반강제적으로 히잡 착용을 하는 경우이다.

성범죄도 걸리면 최소 사형의 엄벌에 쳐하지만, 문제는 성범죄가 걸릴 가능성이 극히 낮다는 점이다., 심지어 지역 사회 내부에서 여성 피해자의 입을 닫게 해서 쉬쉬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이스라엘은 여성의 경제 활동은 심지어 근본주의적인 하레디에게도 적용되지만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집단일수록 정치 참여 등의 제약이 심하다. 무려 여군도 징병하는 성평등 국가로 유명하지만 여성이 양육 등을 위해 강인해야 한다는 독특한 성 역할이 존재한다.

4.5. 동유럽

러시아 소련 시절에는 성평등 기조가 꽤 있긴 했으나[25] 소련 붕괴 이후 정교회의 영향에 더해 원래부터 있었던 짙은 가부장제 풍조로 인해 남존여비 성향이 강하다.

4.6. 북유럽

세계에서 가장 남존여비에 민감한 문화권에 속한다. 평등주의가 심하여 여성이 특히 많은 직업이 있는 모습도 존재는 하지만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여성의 물건을 남자가 들어주려는 것조차 정말로 여성이 인간으로써 물건을 못 드는 상황이 아닌 이상 여성이 약하다는 성차별로 여겨질 수 있다.

4.7. 서유럽

동북아시아보다 갈등이 낮고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하지만 이민자 집단을 두고 성 역할에 대해 갈등이 존재한다. STEM 분야에서 간혹 중동 일부 지역보다 남성에 비교한 여성의 진출이 덜 활발한 경우가 있다.

4.8. 미국, 캐나다

바비와 같은 영화가 유행했듯 페미니즘과 결부되는 갈등이 심할 정도로 주관적으로는 남존여비에 따른 갈등이 최근에도 있다. 여성들은 경제적으로 독립적이어야 하지만 돈을 요구하거나 경제적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무례하게 여겨진다는 식의 불만이 있다. 여성은 남성들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대답해야 하며, 이를 지적하면 불평하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느냐는 식의 불만도 있다.

4.9. 남미

캣콜링 같은 문화가 동북아시아보다 극심한 경우가 존재한다. 가정폭력과 여성에 대한 폭력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기도 한다.

5. 대중매체

남성이 우월한 지위를 갖는다는 배경을 지니더라도 어떻게 활용하는지는 작품의 성향에 따라 달라진다. 해당 배경에서 여러 인물상을 통해 진지하게 사회상을 조명하는 작품도 존재하지만 아래와 같이 독자층을 만족시키기 위해 극적 장치로 가볍게 활용되는 경우도 존재한다.
  • 남성향 작품에서 여성 캐릭터는 작품에 따라 남성 캐릭터의 활약상에 비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지 않거나 남성 캐릭터를 보조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가 잦다. 역사에 기반하여 반영한 작품이나 전쟁 같은 특정 장르에서는 여성 캐릭터가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 여성향 작품의 경우 우월한 지위를 지닌 한 명 혹은 다수의 남성 캐릭터가 비교적 평범한 여성 캐릭터에게 이끌리거나 헌신적으로 베푸는 묘사가 많다.

5.1. 묘사되는 작품들의 예시

5.2. 게임

게임 매체에서 사회상과 무관하게 여성 캐릭터의 캐릭터 조형, 서사가 남성 캐릭터보다 대우가 박한 경우나 단순히 등장인물의 성별 비율과 출연 빈도에서 남성 캐릭터에 비해 여성 캐릭터가 낮을 때 커뮤니티에서 언급된다.

6. 관련 문서



[1] 다만 이 경우는 너무 무관심한 경우에도 칠거지악에 들어갔다. 남자들 피곤하지 않을 정도만 질투해달란 얘기. [2]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루이스 모건의 선구적 연구가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고전적 저작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을 썼다. 캐나다의 몽타녜-나스카피 족을 연구한 엘리너 리콕의 《남성 우위의 신화》, 콩고의 피그미족을 연구한 윌리엄 턴불의 《숲 사람들》, 특히 칼라하리 사막의 이른바 부시맨들을 연구한 리처드 리의 《쿵산족: 채집 사회의 남성, 여성, 노동》등. [3] 존 몰리뉴의 실천가들을 위한 마르크스주의 입문 34: 여성 차별에 대한 가부장제 이론과 마르크스주의 이론(https://ws.or.kr/m/5639) [4] 가령 조선 후기의 경우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으로 인해, 조선 전기에 비해 남존여비가 심화된 부분이 그러하다. [5] 돈벌이가 수입이라면 가사는 그 수입을 이용해서 관리하는 일이므로 [6] 남성이 있어야 여성의 임신이 가능하긴 하지만 한 번의 성행위로 끝나는 남성과는 달리 실질적으로 아이를 낳고 10개월간 아이를 배 속에 품고 있는 것은 여성이다. 임산부의 경우엔 “여성은 (남성이 못하는) 새 생명을 잉태하는 일을 하고 있으므로 다른 권리들이 뒤따라온다.”는 남녀만 뒤집혔지 거의 똑같은 논리가 적용되는 임산부는, 마찬가지로 추가적인 권리를 얻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임산부를 위한 각종 사회적인 배려와 남편과 주변인들의 헌신 등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여기에 뱃속에 있는 아기의 생명문제와 여성과 뱃속의 아기를 둘다 포함한 ‘약자보호’를 미덕으로 여기는 사회적 영향도 그 배려안에 들어가있다. [7] 그러나 남존여비가 심한 지역에서는 그러한 임부보호의 개념도 약하다. 임신한 며느리를 홀대하는 과거 시댁의 일화나 임산부가 뱃지를 보여주어도 자리를 비켜주지 않았다는 대중교통의 일화도 드물지 않다. 80-90년대의 여아 낙태 문제가 있었으며 여성은 늘 원하지 않는 임신 위험이 있다. [8] 채집과 사냥이 공동체에 먹거리를 제공하는 데에 형평성을 이루었다. 언제나 사냥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채집이 주요 공급원이 되기도 하였다. 이런 사회에서는 여성과 남성의 발언권에 큰 우위가 나뉘지 않게 된다. [9] 대다수의 평민들은 남녀노소 초등교육(소학) 정도만 받았지 학교에 가서 전문교육(성리학,경전)까지 배우진 않았다. [10] 얼마나 여성에 대한 탄압이 심했었는지 선교사들의 기록엔 차라리 가난한 서민들이 훨씬 인간답게 살아간다는 말까지 있었다. [11] 사농공상의 신분제처럼 자신들의 권력화에 학문을 이용한것 뿐이다. 큰 전쟁 이후 1960년대에 잘못 퍼트려진 제사 문화와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12] 사실 유교와 성리학 자체는 고려 말부터 있어 왔지만 조선은 특히 강했었다. 오히려 고대에서부터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이것만으로 남존여비가 전혀 없다는 일반화는 어렵지만) 데릴사위, 즉, 사위의 처가살이가 흔한 관습이었다. [13] 그런데 육종관 본인은 을 5명이나 두었고 그녀들 사이에서 자녀를 무려 20명이나 얻었다고 한다(...). [14] 실제로 중국 문화에서 전족은 성문화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전족을 한 여성이 남자한테 자신의 발을 보여주는 것은 곧 그 남자와 성관계를 하고 싶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외간남자가 전족을 한 여성의 발을 만지는 것은 큰 실례로 여겨졌다. [15] 근육을 단련하는 것과 관련한 스트레칭과 요가 자세 등이 실제로 인터넷에 자주 소개되고 있으나, 과학적으로 어떤 원리를 통해 단련되는 것인지 출처를 찾기 어렵다. [16] 일본 제국 시절엔 천황의 특별한 배려를 얻으면 공주가 결혼하고도 계속 황족일 수 있었으나 1949년 현행 황실전범이 시행되며 그러한 제도가 폐지되었다. [17] 심지어 공주가 평민 신랑과 결혼식을 올릴 때도 그렇다. 구로다 사야코 항목 참조. [18] 일본 황실 최고령 출산 및 최초의 제왕절개. [19] 대명사와 동사의 명령형에서 확연히 나타난다. 1인칭 대명사를 예로 들면 남성어는 평어에서는 俺(おれ)이나 僕(ぼく)를 쓰고 경어에서는 私(わたし)를 쓰나, 여성어는 무조건 私다. [20] 물을 버리지 않고 계속 써야다... 먼나라 이웃나라 7권 일본편에 나와 있다. [21] 습한 한국에서는 긴팔만 입어도 괴롭지만 저 지역은 건조하기 때문에 얇은 옷으로 전신을 덮어 직사광선을 막는 편이 더 시원하다. 물론 기온 자체가 높기 때문에 두꺼운 옷을 입으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22] 이런 현상은 구한말 조선에서도 있었다. 서양 선교사들이 조선에 와서 서양식 신학교를 세우고 여학생들한테 운동 경기에 나갈 유니폼을 만들어 입혔더니 여학생들의 학부모들이 몰려와서 “양갓집 규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외간남자한테 속살을 보이는 옷을 입으면 안 된다! 그러면 순결을 잃게 된다!”고 펄쩍 뛰며 강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두 눈만 내놓고 몸의 대부분을 꽁꽁 가리는 식의 유니폼을 만들어서 입혔다고 전해진다. 여성이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관념이 지나치게 강해서 구한말 조선이나 현대 이슬람 국가들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23] 초식남의 증가, 결혼 대란 등 [24] 실제로 중소기업인 경우는 육아휴직 = 해고란 공식이 통용되기도 한다. [25] 다만 스탈린 시기부터 어느 정도 보수화되는 경향이 나타나긴 했지만 이때도 현 러시아 정도는 아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