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7 12:07:59

나이지리아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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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지리아 내전
(비아프라 전쟁)
Nigerian Civil War
파일:Biafran War.png
▲ 비아프라군과의 교전을 준비하는 나이지리아군
기간
1967년 7월 6일 ~ 1970년 1월 15일
장소
나이지리아 남부, 비아프라
원인
나이지리아 내부 민족간 갈등과 이보족의 분리 독립 선언
결과
나이지리아의 승리
영향
비아프라의 패망
국경없는 의사회의 수립
교전국

[[나이지리아|]][[틀:국기|]][[틀:국기|]]
[[틀:깃발|]][[틀:깃발|]][[아랍 연합 공화국|]] (공군 지원)

[[비아프라|]][[틀:국기|]][[틀:국기|]]
[[틀:깃발|]][[틀:깃발|]][[베닌 공화국|]][1]
지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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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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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전 이후
보병 85,000명~150,000명
1968년
보병 250,000명
1970년
보병 200,000명~250,0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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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전 이후
보병 10,000명~100,000명
1968년
보병 110,000명
1970년
보병 50,000명~100,000명

Biafra War

1. 개요2. 나이지리아의 독립, 그리고 혼란3. 비아프라의 독립, 그리고 내전4. 비아프라 전쟁
4.1. 전쟁 초기, 중기4.2. 항공전4.3. 전쟁 말기
4.3.1.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이합집산4.3.2. 비참한 전쟁
5. 종전6. 그 외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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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7년 나이지리아로부터 분리 독립을 선언한 나이지리아 동부의 비아프라와 이를 진압하려는 나이지리아 정부군 사이에서 1967년에서 1970년까지 진행된 내전. 통칭 비아프라 전쟁이라고도 하며 수단 내전, 서사하라 전쟁, 르완다 내전, 소말리아 내전과 더불어 아프리카를 지배했던 유럽 제국주의 식민제국 열강들의 잘못된 식민주의 유산에 의해 생겨난 아프리카 국가의 수많은 종족 분쟁 중 하나다.

2. 나이지리아의 독립, 그리고 혼란

1900년경 종교 문화, 배경이 저마다 다른 서부 아프리카의 지역들이 영국의 식민 정책 하에 나이지리아로 통합되었다. 이때 남부의 이보족 요루바족은 영국으로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식민지 통치에 협조한 덕에 지원을 받아 더욱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슬람을 믿었던 무슬림 하우사족은 빈곤에 시달리면서 민족, 지역간 갈등이 격화되었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탈식민지화의 바람이 불면서 나이지리아도 1960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그러나 나이지리아 역시 영국이 다양한 민족들과 지역들을 적당히 통합하면서 생겨났기 때문에 많은 아프리카 독립국처럼 지역, 종교, 민족 갈등에 빠지게 되었고 복잡하기 짝이 없는 갈등 구조에 초대 나이지리아 대통령 은남디 아지키웨(Nnamdi Azikiwe, 1904-1996)가 이끌던 민간 정부는 영 힘을 쓰질 못했다. 결국 1966년 1월 쿠마 카두나 느제오우(Chukwuma Kaduna Nzeogwu, 1937~1967) 소령이 지휘했던 군부 소장파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나이지리아 초대 총리 겸 당시 총리이던 아부바카르 타파와 발레와(Abubakar Tafawa Balewa)를 비롯한 정치가 각료들을 살해했는데 청년장교들의 군사반란 토벌한 남부 이보족 출신의 존슨 아그이 이론시(Johnson Aguiyi Ironsi) 장군 쿠데타를 일으켜 아지키웨 대통령을 축출하고[2] 군사독재 정권을 수립했다.

대통령이 된 이론시는 독립 초 연방제로 유지되고 있었던 나이지리아를 강압적인 중앙집권으로 제어, 통제하려는 정책을 도입했다. 이는 여러 민족 집단들, 특히 하우사족이 차지하고 있던 북부의 반발을 키웠고 같은 해 결국 역쿠데타를 일으켜 이론시는 반대파의 총에 맞아 암살당하고 말았다.
파일:uGhTmHG.jpg
이론시의 후임자인 야쿠부 고원

한편 이론시가 암살당하자 나이지리아 군사 정권 내부에서도 권력다툼이 벌어졌다. 그 결과 북부 하우사 부족 출신 야쿠부 고원이 역쿠데타를 진압하여 여러 경쟁자들을 억누르고 대통령이 되었다. 고원 대통령은 나이지리아의 불안정한 정국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부족 대표들과 지역 대표들을 모아 전국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려 했으나 같은 해 벌어진 이보족과 하우사족 간 유혈 충돌로 회의는 결국 취소되었다.

3. 비아프라의 독립, 그리고 내전

파일:external/www.robinsonlibrary.com/biafra-map.gif

상황이 이렇게 되자 고원은 계속 중앙집권을 일부 강행해 기존 연방제를 유지하되 나이지리아의 주를 4개에서 12개로 늘려 더욱 통제하기 쉽게 행정주를 개편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보족 출신인 오두메구 오주쿠 중령은 행정주 개편에 반발하며 고원 대통령을 격렬하게 비난하였고 자신을 지지하던 장교들과 남부의 이보족을 이끌고 이듬해인 1967년 5월 30일 나이지리아 동부의 3개 주들을 통합시켜 비아프라 공화국으로 독립을 선포했다. 그리고 오주쿠는 이보족의 지지를 받아 비아프라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비아프라의 독립 선언 후 고원은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내리고 7월 7일 비아프라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해 비아프라에 군대를 파견하면서 나이지리아는 사실상 내전 상태로 돌입했다.

사실 이러한 표면적인 '종족 갈등'의 이면에는 석유 이권을 위한 열강의 쟁탈전이 있었다. 친영적인 야쿠부 고원이 취임하자 프랑스의 석유회사인 엘프 아키텐(Elf Aquitaine)에 이양되었던 석유 사업권이 해지되었고 프랑스의 드골과 엘프 아키텐은 이보족 세력의 오주쿠를 배후 지원하여 쿠데타를 사주한 것이다. 프랑스의 군인 출신 용병 로제르 폴크도 프랑스 정부의 사주를 받아 전쟁에 개입한 바 있다.

4. 비아프라 전쟁

파일:biafranworld.png
참전국 및 지원국

4.1. 전쟁 초기, 중기

내전 발발 초기에만 해도 전세는 비아프라에게 매우 유리했다. 8월에는 비아프라군이 나이저 강을 건너 베닌시를 함락하고 나이지리아의 수도 라고스까지 진격할 정도였다. 그러나 아프리카와 서남아시아 지역에 영향력을 확대하려던 소련과 옛 아프리카 식민국가들에서 기득권을 유지하려던 영국이 나이지리아 정부에게 무기와 자금 등을 지원하면서 전세는 나이지리아 정부군에게 유리해졌다. 이에 나이지리아 정부군 오레에서 시간을 벌면서 비아프라의 수도인 에누구를 공격하는 전략을 펼쳤고 결국 비아프라군은 패퇴에 패퇴를 반복하였다. 그 결과 나이지리아군은 비아프라 영토 상당수를 탈환하여 비아프라 공화국은 에누구에서 바하, 움바히아, 오웨리로 수도 이전을 강요받는 상황에 처해 비아프라의 영토는 1/10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비아프라 측의 대대적인 징병의 결과 병력은 오히려 3만에서 10만으로 늘었다.

4.2. 항공전

비아프라는 일찍이 항공력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무기의 보급에 수송기를 이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항공부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몇몇 비아프라 조종사들은 1966년 여름부터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정기운항을 경험해 왔고 일부 항공기는 포르투갈 기니비사우 카메룬을 경유하여 무기를 실어날랐다. 1966년 10월 용병 헨리 워튼(Henry Wharton)과 하인리히 워츠키(Heinrich Wartski)가 탄 로얄 에어 브룬디 항공의 DC-4M 여객기가 로테르담에서 병력을 수송하던 중 카메룬의 갈루아(Garoua)에 불시착했다. 그 조종사는 1967년 9월에는 몰타에서 구한 무기를 실은 록히드 컨스텔레이션 시리즈도 조종했다. 이렇게 점차 더 많은 항공기가 투입되었는데 그 중에는 5N83H, 5N84H, 5N86H와 같은 나이지리아 소속으로 위장 전입한 DC-4(Douglas DC-4), DC-6와 에어트랜스 아프리카 소속의 DC-7 등이 있었다.

1967년 4월 23일 나이지리아 항공의 포커 F27 베냉에서 라고스로 향하던 중 납치되어 에누구(Enugu)에 착륙했다. 얼마 후 그 기체는 임시 폭격기로 개조되었다. 6월 15일에는 포트 하코트(Port Harcourt)에서 두 번째 수송기인 DC-3가 납치되어 비아프라 항공대에 추가되었다. 7월 초부터 프랑스 공군이 쓰던 더글러스 B-26 인베이더(41-39531)가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13대를 격추시킨 에이스 파일럿 얀 줌바흐(Jan Zumbach : 1915~1986)에 의해 비아프라로 인도되어 에누구 비행장에서 운용되었다. 두 번째 B-26(41-34531)이 8월에 뒤따를 예정이었다. 7월 중에도 스위스에서 구입한 헝가리제 소총 2,000자루를 실은 미국 등록기호를 붙인 드해빌랜드 도브(de Havilland DH.104 Dove)가 비아프라에 넘겨져서 1967년 7월 13일에 알제리를 통해 강제 퇴각하여 현지 공군에 투입되었다.

나이지리아군은 7월 6일에 동원령을 내렸고 며칠 후 오고자(Ogoja), 은스카(Nsukka), 보니(Bonny)에 있는 석유 터미널을 확보하여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7월 10일에 비아프라 공군(BiaAF)이 반격을 개시하여 마쿠르디(Makurdi) 비행장을 폭격했고 이곳에서 여러 대의 DC-3가 격파되었다. 이후 B-26R은 라고스와 카노(Kano)를 타격하는 데 사용되었지만, 변변한 폭장 없이 기총소사만으로는 큰 피해를 입힐 수 없었다. 7월 26일, B-26과 납치된 DC-3은 대담하게도 포트 하코트를 봉쇄하고 있던 구축함 나이지리아를 공격했다. 같은 해 8월 12일, 두 번째 B-26이 비아프라에 도착하자마자 2대의 인베이더 공격기는 니제르 국경을 가로지르는 차량들을 공격하여 격파했다.

이렇게 비아프라가 공중에서 준동하자 나이지리아군은 제대로 된 전투기를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여 소련, 영국과 협상했다. 이에 소련은 8월 13일부터 이집트를 통해서 MiG-17 전투기를 인도해 주기 시작했다. 또 수단 공화국 공군은 2대의 영국제 제트 프로보스트를 빌려주었지만 예비부품이 없어 곧 운용이 중단되었다. 이에 비아프라 공군은 8월 19일과 20일 카노에 대한 기습 공격으로 지상에 주기된 미그기들을 파괴했다. 폭탄이 부족했던 비아프라인들은 미그기가 운용되기 시작한 오니차(Onitsha) 비행장을 공격하기 위해 30소티나 출격을 반복하면서 거듭 공격을 가했다.

1967년 8월, 나이지리아 공군의 말람 아미누 전투항공연대(Malam Aminu IAP)에는 8대의 MiG-17과 2대의 MiG-15, 그리고 이집트에서 얻어온 복좌형 UTI와 여러 대의 안토노프 An-12 수송기를 타고 카노 기지로 날아갔다. 그들은 NAF의 제1전투폭격 비행대대와 협력하여 작전에 임하기 시작했고 그 기체들은 후방 동체에 그려진 흰색 식별띠와 조잡한 국가 마크로 쉽게 구별할 수 있었다. 나이지리아 공군은 1959년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직전에 채택된 라운델에 항상 녹색과 흰색을 칠하고 있었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에 들여온 MiG-17의 경우 이러한 도색 규정에서 예외가 자주 보였다. 특히 많은 미그 전투기들은 날개에 국적 마크를 그리지 않았다. 미그기들은 세 자리 숫자의 식별번호를 그려넣었는데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 MiG-15UTI (NAF601)
- MiG-15UTI (NAF602)
- MiG-15UTI (NAF627) - 1967년 카노에서 보고된 이후 확인되지 않음
- MiG-17F (NAF603~NAF 630)이 최대 33대 인도받았으나 그중에서 28대만 번호를 받았다.
- MiG-17A (NAF631~NAF638) - 8대 납품, 1대는 MiG-17PF일 가능성

미그기의 도착은 공중의 상황을 변화시켰으며 이는 지상군들도 금세 느낄 수 있었다. 9월 22일 대규모 공세로 비아프라군은 점령하고 있던 베냉에서 밀려났고 그 다음 날에는 더 많은 병력을 잃었다. 에누구마저 10월 4일에 함락되자, 비아프라 지도자 추쿠에메카 오두메구 오주쿠(Chukwuemeka Odumegwu Ojukwu : 1933~2011)는 수도를 국토 남단의 우무아히아(Umuahia)로 옮겨야만 했다. 10월 7일에 비아프라 소속 포커 F.27이 원인불명의 사고를 추락했는데, 그건 임시로 추가한 폭탄가에 매단 폭탄의 신관이 일찍 작동해서 생긴 사고일 가능성이 있다.

그 다음 겨울 동안 악천후와 양측의 예비부품 부족으로 비행이 거의 불가능해졌지만 5월에 나이지리아군이 춘계 공세를 시작하면서 양측 모두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5월 18일에 포트 하코트가 함락되면서 비아프라 공군은 DC-3와 B-26을 잃었다. 그 무렵 비아프라 용병들은 제트기를 구입하려고 시도했고 오스트리아로부터 중고 푸가 매지스터 2대를 구입했다. 그러나 그 제트기들의 동체가 현지에 도착하는 동안 운반되고 있던 주익이 비사우(Bissau)에서 사보타지로 인해 파괴되어 쓸모없게 되었다.

나이지리아 군대의 공격이 1968년 6월 18일에 재개되자 아우구(Awgu)에는 오직 하나의 활주로만 남은 탓에 비아프라 조종사들은 울리 이할리아(Uli-Ihailia) 근처에 포장도로를 활주로로 이용하도록 이드쿠오(ldquo)라는 작은 마을로 날아갔다. 그동안 국제 적십자가 구호물자 운반을 위한 활주로를 건설하고 있었다. 아픽포(Afikpo) 근교의 야전 비행장은 적십자의 C-97 스트래토프레이터(Boeing C-97 Stratofreighter) 수송기뿐만 아니라 프랑스 스웨덴 적십자가 사용하는 DC-4와 C-130, 그리고 교회 단체들이 스위스 전세항공인 발레르(Balair)에서 빌린 DC-6A 전세기 2대들이 뜨고 내리며 사용되었고, 곧 소규모 구호 단체들을 포함한 많은 다른 단체들도 함께 쓸 예정이었다. 그들은 1968년 11월까지 식량과 보급품 20톤이 매일 밤 비아프라로 실어 날아왔다. 서독 정부는 1969년에 최신 기종인 트랜잘 C-160 수송기로 코토누(Cotonou)에서 198회의 구호 임무를 수행했다. 한편, 정부군의 MiG-17은 이집트와 체코에서 파견한 용병 조종사들에 의해 비행을 계속했고 6대의 일류신 Il-28 폭격기가 이집트에서 전달되어 칼라바르(Calabar)와 포트 하코트 비행장에 배치되었다. 그 군용기들은 정부군의 무차별 폭격 작전에 동원되었는데 그 폭격은 비아프라 군사 시설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민간 시설에도 큰 피해를 입히고 2,000명 이상의 무고한 민간인을 죽게 만들었다. 이처럼 미쳐날뛰던 NAF가 완전히 제공권을 차지함에 따라, 비아프라로 향하는 항로는 극도로 위험해졌고 모든 비행은 밤에만 이루어져야 했다.

하지만 비아프라인들의 전투의지는 이 정도로 꺾이지 않았다. 그들은 더 많은 병력과 용병을 동원하여 오웨리(Oweri)의 나이지리아 제3특공사단을 포위할 뿐만 아니라 오니차 공세의 선두 부대가 될 제4특공여단도 조직할 수 있었다. 나이지리아 공군은 포위된 아군을 위해 공중에서 재보급을 시도했지만 결국 비아프라 병력에게 투항했다. 이런 사태는 상당 부분이 나이지리아 군사정권 지도자의 군사적 무능에 의해 야기되었으며 나이지리아 정부군은 국제 사회에서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를 보인 탓에 상당한 압력을 받았다. 비아프라인들은 강자에게 억압받는 약자라는 프레임을 십분 활용해 적어도 PR 캠페인과 대외 선전에서는 정부군에게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NAF는 무기 공급을 걸러내는 한편 서방이 보내는 구호 항공기가 원조 작전을 계속할 수 있는 방법을 찾도록 궁리했지만 결국 적절한 해결책은 찾지 못했다. 그래서 비아프라로 가는 무기 흐름은 그들이 쓰라린 최후을 맞을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1968년 후반과 1969년 초 세계교회협의회는 여러 대의 DC-7B를 타고 비아프라로 보급품을 나르고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칼 구스타프 폰 로젠(Carl Gustaf Ericsson von Rosen : 1909~1977) 백작이 조종하고 있었다. 1939년 이탈리아에게 침략당한 에티오피아와 소련에게 침략당한 핀란드를 위해 비행하면서 모험에 넘치는 삶을 살았던 그는 비아프라가 빠진 곤경을 크게 우려했고 자비를 들여 무장을 갖춘 훈련기 말뫼 MFI-9F를 5대 구입하고 용병 조종사 몇 명과 계약하여 새로운 비아프라 공군을 결성하려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말뫼 훈련기는 프랑스에서 무유도 로켓 전처로 무장을 달아 경공격기로 변신한 다음 조립과 도색을 바꾸기 위해 가봉의 수도 리브르빌(Libreville)까지 옮겨졌다. 그 기체들은 1969년 5월 22일부터 올루(Orlu)에서 비아프라 공군의 전투기로 운용되었다.

같은 날 MiG-17 전투기 2대와 Il-28 폭격기 2대가 이미 많이 부서져 있던 포트 하코트 비행장을 공격했다. 24일에는 말뫼 공격기가 베냉 비행장을 공격하여 로켓탄을 퍼붓고 달아나 미그기 1대와 일류신 폭격기 1대가 가동 불능의 피해를 입었다. 5월 28일에는 에누구가 피격되었고 다음날 밤 포트 하코트의 석유 시설이 파괴되었다. 폰 로젠 백작은 자신이 결성한 아비장 비행 클럽(Abidjan Flying Club)을 위해 더 많은 말뫼 공격기를 구입하기 위해 스위넨(Sweenen)으로 돌아왔다. 1969년 11월에는 에른스트 쾨니히(Ernest Koenig)가 2대의 서독제 C-47을 사들였고, 노스 아메리칸 T-6 텍산도 4대 구입했다. 11월 9일에 중기관총과 로켓 포드로 무장된 텍산들은 포트 하코트 비행장을 공격하여 팬암 DC-4의 파괴를 주장했다. 이에 대해 나이지리아 공군은 그 지역 상공에 전투공중초계를 날리기 시작했고, MiG-17을 조종하던 영국 용병 한 명은 AT-6 중 1대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같은 달 DC-6가 울리(Uli)에 야간 착륙을 시도하다가 추락했다.

비아프라 공격기들의 거듭된 타격에도 불구하고 나이지리아 정부군은 비아프라를 포위하여 정권을 굴복시키려 했다. NAF 소속 미그기들은 이제 야간에도 초계비행을 하면서 물자 보급을 직접적으로 방해했다. 1969년 6월, 영국인 조종사가 몰던 적십자 소속 DC-7이 MiG-17의 공격을 받아 에켓(Eket) 인근 해안을 가로질러 바다에 추락했다. 비아프라인들은 즉각 템플우드 항공을 통해 영화사가 촬영기로 쓰던 글로스터 미티어 NF.14를 2대 인수하여 야간전투기를 구할 수 있었지만 이미 전세는 돌이킬 수 없었다.

1969년 12월 22일 미그 전투기와 일류신 폭격기의 지원을 받은 정부군은 마지막 공세를 개시하여 오주쿠가 장악하고 있던 영토를 반으로 갈라버렸다. 1970년 1월 13일 남아 있던 비아프라 부대는 울리에서 아비장으로 컨스텔레이션을 타고 탈출한 오주쿠를 항복시켰다.

4.3. 전쟁 말기

4.3.1.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이합집산

대부분의 영토와 보급로를 상실하고 내륙에 고립되다시피 한 비아프라는 완강하게 저항했다. 그리고 나이지리아 정부가 소련과 영국 등 외국의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오주쿠는 외국에 원조를 요청했다. 이때 영국과 정치적, 외교적으로 앙숙 관계에 있었던 프랑스가 비아프라에게 무기와 총탄 등을 공급하고 군사적 지원을 약속했다. 이어서 포르투갈 스페인, 서독도 비아프라를 지원하면서 비아프라 전쟁은 나이지리아를 지원하는 소련, 영국과 비아프라를 지원하는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 독일 등 서유럽의 과거 제국주의 식민종주국들의 대리전으로 비화되었다. 그리고 공산권이었지만 중소결렬로 인해 소련과 정치적으로 대립했고 역사적으로 아편전쟁으로 홍콩을 빼앗기는 등 영국에 대한 악감정이 강했던 중국, 영미 석유회사가 장악한 나이지리아의 석유 이권을 노린 프랑스 역시 비아프라를 지지했다.[3] 또 시대에 안 맞는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로 아프리카와 국제 사회에서 고립되고 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 로디지아(지금의 짐바브웨) 등 남부 아프리카의 백인 통치 국가들 또한 국제 제재를 지원하던 아프리카 국가들의 분열을 도모하는 공작 차원에서 비아프라를 지원했다.[4] 한편 같은 해 벌어진 제3차 중동전쟁 당시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요르단 등 당시 아랍권 적군으로부터 노획한 무기들과 이스라엘군의 노후 무기들을 재고처리하려던 이스라엘도 무기 판매, 지원을 타진하면서 나이지리아 정부군 대신 사실상 비아프라를 지원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비아프라를 지원하면서 이스라엘과 적대적 관계에 있었던 사우디아라비아, 알제리, 시리아, 이집트 같은 아랍 세계 국가들은 나이지리아를 지지했다.[5] 소련의 동맹국이자 바르샤바 조약 기구 회원국이었던 불가리아도 비아프라와 싸우던 나이지리아군에 전투식량과 무기를 제공하는 등 결국 비아프라 전쟁은 대리전 수준을 넘어 대형 국제전으로 그 규모가 커졌다. 냉전 시기였음에도 국제사회에서는 진영논리보다 자국의 이해관계가 우선함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4.3.2. 비참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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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9년 비아프라의 굶주린 아이. 돈 맥컬린(Don McCullin) 촬영. Life

전쟁이 길어지자 나이지리아에선 희생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속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비아프라 전쟁의 참혹함은 전세계 여러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고 전쟁의 장기화로 굶주림에 허덕이던 비아프라 어린이들과 의약품이 없어 죽어가는 부상자들의 참상은 국제사회의 큰 동정심을 불러일으켜 수많은 국가들로부터 식량과 의약품을 지원받게 되었다. 숫자는 적었지만 탄자니아, 가봉, 잠비아, 코트디부아르 등 몇몇 아프리카 국가들도 비아프라를 정식주권 독립 국가로 승인하였고 비아프라의 자결권 지지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6] 이에 나이지리아는 비아프라를 승인한 아프리카 국가들을 격렬하게 비난하며 외교관을 자국에서 추방하고 단교하는 초강수를 두기까지 했다.[7] 더욱이 이런 비아프라 전쟁의 잔학성에 나이지리아를 지원하던 영국에서 나이지리아 정부군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중단하라는 비난 여론까지 일어났으며 서방권 각국에서도 비아프라 전쟁을 규탄하는 반전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전세는 뒤집을 수 없을 정도로 나이지리아군에게 기울어 있었고 비아프라는 외부의 지원으로도 이미 전세를 뒤집을 힘이 없었다.[8] 이러던 사이 국제연합(UN)이 나이지리아와 비아프라 양국이 전쟁과 무력 사용을 중단할것을 촉구했고 현 아프리카 연합의 전신인 아프리카 통일기구(OAU) 등이 전쟁을 평화적으로 종식시키기 위해 평화 협상을 중재했지만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났다. 그 이유는 나이지리아와 비아프라 두 나라의 입장을 결국 절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이지리아는 비아프라의 전면 투항과 분리 독립 완전 포기를 주장했고 비아프라는 독립 인정과 나이지리아군의 군사 행동 중단을 요구하는 등 양측의 입장이 평행선을 달렸다. 아프리카 통일기구 중재의 종전 협상이 결국 실패로 끝나자 탄자니아, 잠비아, 코트디부아르, 가봉을 제외한 대다수의 아프리카 통일기구 회원국들도 비아프라를 손절하고 비난하면서 평화 협상 중재를 중단하고 말았다.

한편 아프리카 통일기구 중재의 평화협상이 실패로 끝나고 충돌이 격화되자 1969년 오주쿠 비아프라 대통령은 분리 독립을 포기하는 대신 비아프라 지역에 국방과 외교를 제외한 높은 수준의 자치정부를 요구했다. 그러나 나이지리아 정부는 무조건 투항을 요구하며 오주쿠 대통령의 요구를 무시했고 오히려 비아프라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나이지리아 입장에서는 자치 정부를 수립해 줬다가는 다른 민족들도 서로 자치 정부를 세운다고 요구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쟁이 이미 나이지리아 측에게 유리해지고 있었는데 자치정부 수립이라는 비아프라 측의 요구를 받아들일 이유도 없었다. 결국 나이지리아군의 강력한 무력 공세에 비아프라군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5. 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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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 나이지리아군의 승전 소식에 환호하는 나이지리아 시민들.

마침내 1969년 연말과 1970년 1월에 벌어진 전투에서 비아프라군은 궤멸에 가까운 큰 타격을 입었다. 이 틈을 타 나이지리아군이 비아프라의 임시수도 오웨리로 진격하자 오주쿠 대통령은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달아났다. 1월 10일 오웨리가 함락당하자 필립 에피옹 비아프라군 참모총장 등 비아프라에 남아있던 장성과 정부 각료들은 전투를 중단하고 나이지리아의 수도 라고스로 이동하여 1월 13일 야쿠부 고원 대통령에게 항복하고 비아프라의 연방 복귀를 선언했다. 결국 비아프라 전쟁은 12만 명의 전사자와 50만~200만 명의 아사자 및 병사자들을 낸 채 비아프라의 패망으로 종료되었다. 야쿠부 고원 대통령은 전쟁이 끝나고 비아프라가 다시 나이지리아 연방 주로 복귀하자 연방에서 이탈하려고 참혹한 전쟁을 일으킨 비아프라 권력층을 전쟁범죄자 사형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외로 도주한 오주쿠 대통령에게는 궐석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내리고 오주쿠를 제외한 필립 에피옹 등 비아프라 공화국의 나머지 정부 인사들은 특별 사면을 단행하면서 이들을 처벌하지 않았다.[9]

한편 해외로 망명한 구 비아프라 공화국의 인사들은 비아프라 망명정부를 수립한 후 비아프라의 독립을 요구하면서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다. 다만 비아프라 대통령을 맡았던 오주쿠는 1982년 5월 18일에 나이지리아 정부로부터 사면받은 직후 1982년 6월 18일 코트디부아르에서 귀국했다. 이후 정치활동을 재개하려 했으나 1983년 12월 31일 모하마두 부하리 소장이 주도해서 발생한 쿠데타 1984년 초에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얼마 뒤에 풀려났다. 이후 죽을 때까지 나이지리아에서 정치활동을 하면서 비록 득표율은 미미하기는 했지만 2003년 2007년에 걸쳐서 두 차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정도로 잘 나갔고 장례식도 굿럭 조너선 당시 나이지리아 대통령이 참석해 꽤 화려하게 치르는 등 나름대로 대접을 받고 잘 살았다. 그리고 승리자 입장이었던 야쿠부 고원 1975년 쿠데타로 쫒겨나서 영국으로 망명을 가고 나이지리아 정부에 의해 수배를 받았으나 1980년대 초에 사면받고 1983년에 귀국하여 다양한 사회적인 활동을 하면서 현재까지 생존해 있으면서 나이지리아 정계의 원로로 대접받고 있으며 '마지막 좋은 사람(last good man standing)' 등의 호칭으로 불리며 고국에서 영웅 대접을 받고 있다.

6. 그 외

국제 구호 활동의 최전선에 나서던 적십자는 당시 교전 지역에 함부로 인력을 투입하기 어려운 데다 자칫 비아프라 측에 대한 구호 활동이 정치적 지지로 보일 수 있는 상황에 제대로 된 구호 활동을 펼치기 어려웠다. 이러한 적십자의 행동에 불만을 품은 몇몇 의사들이 뜻을 모아 극한의 상황에서도 의료 - 구호 활동을 펼치는 조직을 결성했는데 그게 바로 국경 없는 의사회다.

비아프라 전쟁으로 인해 서양에 처음으로 아프리카라는 곳이 빈민과 고난의 지역이라는 영 좋지 않은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비아프라 정부는 처음에는 ' 기독교 국가'나 '문명 국가' 등의 선전을 통해 아프리카의 이스라엘이라는 이미지로 서양에 이 전쟁을 알리려 했으나 효과가 없자 대신 인도주의적 고비로 서방에 알리려고 했다. 특히 홀로코스트의 이미지를 가져다 쓰면서 도덕적 자본(moral capital)을 사용해 지원을 받으려 했지만 결국 이 전쟁이 '일방적인 학살'이 아닌 '정치적 내전'이라고 결론을 내린 서방 국가들은 차갑게 비아프라 정부에게 등을 돌렸다. 홀로코스트 같은 '절대적인 악'이 아닌 정치적 내분이라고 판단되는 순간 비아프라 정부는 모든 정치적 대의명분과 신용을 잃었던 것이다.[10] 민족자결주의로 많은 제3세계 국가들에게 호의를 얻으려 했으나 민족자결주의는 반식민주의 사상까지만 허용되는 범위였다. 많은 제3세계 국가들은 이 내전 개입에 나이지리아라는 국가의 주권 존엄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에 나이지리아를 지원했거나 침묵했다.[11] 마지막으로 인간의 동정심에 호소하는 인도주의적 주장들은 국제사회의 엄격한 힘의 논리에는 낄 자리가 없었다.

아프리카와 전세계를 충격으로 몰아갔고 나이지리아 현대사에서 가장 참혹했던 전쟁이지만 국내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물론 나이지리아의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참혹했던 비극이라서 백과사전이나 일부 서적에서 서술되기도 하지만 이 전쟁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주로 미국 언론을 통해 소식이 전파되고 이를 받아서 보도하던 60년대 한국 언론[12] 덕에 나이 든 사람들은 간혹 '비아프라'라는 이름 정도는 기억하지만 정확하게는 거의 잘 모른다.

먼나라 이웃나라 구판에 아프리카 내부 문제와 엮여서 등장한다.

나이지리아군은 이 전쟁 당시 MiG-17 Il-28을 사용했다. 남아공, 호주, 프랑스, 소련 등지에서 온 용병 파일럿들이 조종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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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이지리아 베닌시티를 중심으로 세워진 비아프라의 괴뢰정권이다. [2] 그래도 쿠데타 반란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진 않았다. 여담으로 은남디 아지키웨는 쿠데타로 실권한 이후에도 군부 정권 치하에서도 계속 생존해있었다가 1996년 병사했다. [3] 티베트 타이완, 위구르 등 자국의 분리 독립 문제가 있고 타국의 분리 독립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중국이 비아프라를 지지한 사실이 의아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도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 인도차이나 전쟁이나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처럼 반식민주의 성향을 띄는 다른 나라의 분쟁에 개입하여 독립을 요구하는 국가를 지원해 주기도 했다. [4] 심지어 남아프리카공화국은 1970, 80년대에 모잠비크 앙골라 같은 주변 아프리카 국가에서 벌어진 내전에서 반군 세력들을 지원하면서 비아프라 전쟁 때 썼던 분열, 지원 정책을 다시 사용하였다. [5] 이집트는 공군 비행사들까지 보냈다. [6] 한편 이 4개국이 비아프라를 승인하자 아프리카 국가들에서도 이들 정부의 입장에 대해 논란이 일어났다. 비아프라를 승인할 경우 식민지 시절부터 설정된 국경을 지니고 있던 아프리카 국가들의 민족, 종교에 의한 분리주의를 확대시켜 독립한 지 몇 년도 안 돼 사분오열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7] 탄자니아와 잠비아, 코트디부아르는 비아프라 전쟁이 나이지리아 군이 승리로 끝나고 비아프라가 패망한 뒤에도 비아프라의 주권국 승인을 취소하지 않고 오히려 야쿠부 고원 정권을 비난했다. 특히 코트디부아르는 아예 비아프라의 오주쿠 대통령의 망명을 허용해 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외교라는 게 어디까지나 국익에 따라 움직이는 거라 고원이 쿠데타로 축출되자 나이지리아와 다시 국교를 수립하는 등 관계를 회복하면서 나이지리아와 탄자니아, 잠비아, 코트디부아르의 사이는 나쁘지 않다. [8] 당시 서방의 군사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이 전쟁에서 나이지리아군의 승전은 시간 문제라는 견해를 내놓았을 정도였다. [9] 고원으로서는 구 비아프라 반란 세력들을 나이지리아의 일원으로 재편입시켜 내전으로 분열된 나이지리아의 국론을 통합을 이루려는 의도도 있었으며 사실 나이지리아 정부측도 비아프라 전쟁에서 워낙 잔혹한 만행을 저질러서 공개적으로 재판을 펼쳤다간 최악의 경우 서방 국가들과 국제사회로부터 나이지리아 정부군이 당시 저질렀던 만행에 대한 비판 여론과 그로 인한 국내 민족 갈등의 재발을 감당할 수 없었던 관계로 국론통합을 명분삼아 모두 흑역사로 봉인하고 넘어가기로 한 것이다. [10] 프랑스와 포르투갈 등 비아프라를 지원했던 나라들도 패망 직전에는 지원을 끊어 버리거나 지원 물자 규모를 축소해 버렸다. [11] 사실 이는 대다수의 제3세계 국가들이 나이지리아와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시대 서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화 과정에서 민족, 언어, 종교, 문화 등 다양한 요소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들의 편리에 맞게 식민지 지역에 경계선을 긋고 행정구역을 나눠 대립과 분열을 부추기며 식민 지배를 하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그대로 독립시켰다.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아프리카와 중동,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내전 전쟁, 영토, 종교, 민족 분쟁 등의 원인은 대부분 이 때문이다. [12] 아이러니하게도 국내 정치 사회 보도를 독재정권이 통제했기 때문에 60년대부터 80년대 중후반까지 한국 언론은 국제면 비중이 지금보다 더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