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드라마 야인시대의 나레이션의 대사를 수록해놓은 문서.2. 1~10화
이 이야기는 암울했던
민족의 수난기와 격동기의 역사를 살다가 갔던 영원한 야인
김두한의 삶을 극화한 것이다. 본 드라마에 소개되는 사건과 인물은 본인의 회고록과 취재록, 자료 수집 등 대부분 실화에 그 근거를 두었다. 그러나 드라마의 원만한 진행을 위하여, 시대와 역사적 상황을 운영하는 인물 일부분에서는 픽션을 가감했으며, 실존 인물의 개인적 인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상당 부분의 생존 인물에 대해서는 가명을 사용하였음도 아울러 밝혀 둔다.
야인시대 1화에서 나온 극중 최초 나레이션.
야인시대 1화에서 나온 극중 최초 나레이션.
1966년
9월 22일. 김두한이 생애 두 번째로 국회의원 활동을 하고 있던 이 때는
5.16 군사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 6년째 접어드는 시기로서
제3공화국의 국회 본회의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던 때였다. 이 무렵은 특히나 정부가 총력을 기울여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였고, 국가와 국민이 총동원되어 피폐해진 경제 회생과 개발의 계획을 밀고 가던 때였다. 그런데 그 국가적 대사업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터졌고 국회에서는 이 문제로 연일 엄청난 소요에 휘말려 있었다. 사건이란 다름 아닌
모 재벌 기업의
사카린 밀수 사건이었다.
미와 경부. 그는 종로 서에서 무척 오랫동안 활동한 베테랑 형사였다. 그는 고등계 경부로서 거의 해방 전까지 그곳에 근무하며 무수한 독립 지사들을 체포하는데 공을 세운 자였다. 그러니까
종로경찰서는 일개 경찰서의 업무 외에도 특별히 전 조선의 사상범을 다루는 총 본산이었고 미와 경부는 그 곳 고등계 형사들의 대명사였던 것이다. 그런 인연으로 인해 김두한은 해방이 될 때까지 미와와의 악연을 끊임없이 지속하게 된다.
청산리 대첩.
독립군과
일본군의 전투 사상 가장 큰 전투이고 가장 큰 승리를 이끌어낸 대첩이었다.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진격해온 일본군의 대병력을 맞아
김좌진과
이범석이 이끄는 독립군 부대가 맞싸운 이 전투는
1920년
10월 21일 시작되어 26일까지 계속됐는데, 독립군은 당시 2500명, 일본의 토벌군은 무려 5만 명이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전투였다고 한다. 2500 대 5만. 이 균형이 맞지 않는 전투에서 그러나 일본군은 무려 그 전사자가 연대장을 포함해 3300명을 넘은 반면 독립군의 희생은 100여명 정도였다고 한다. 이때의 총사령관이 바로 김좌진 장군이었던 것이다. 항간에선 이에 관한 소문이 날개를 달아 일본군이 수천, 수만 명이 전멸됐다고 전해졌고 많은 독립 지사들이 이를 큰 긍지로 삼고 있었다.
김좌진. 그에게는
오씨라는 본처가 있었다.
만주에 머물고 있을 당시 김좌진은 오씨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러니까 김좌진이 두한의 생모인
박계숙 여인과 만난 시기는
3.1 운동이 일어나기 두 해 전, 광복단 사건으로 쫓겨다니던 때였는데, 일경의 추격을 피해 도주하다가 우연히 두한의 외조모인 상궁 출신 신씨 집의 담을 넘었고, 그 집에서 석 달 동안 숨어지내는 동안 박계숙 여인과 사랑이 싹텄던 것이다.
이별. 그것은 부자간의 첫 만남이자 영원한 이별이었다. 이로부터 6년 후, 김좌진은 산시역전에서 고려공산당원 박상범[1]에게 피살당하고 마는 것이다.[2] 그러나 소년 두한의 가슴 속에 이 날의 이별은 영원히 강렬하게 각인되게 된다.
만해
한용운. 그는 최남선이 지은 독립 선언문을 다시 보완하여 그 표현을 완곡히 하였는가 하면 그 일로 체포되어 수감된 직후, 일제가 지금의 전향서와도 같은 참회서를 쓰라고 요구했을 때, 이를 거절하고 일체의 사식과 면회, 변호사 등을 거절하였다. 또한 함께 체포된 민족 대표들의 일부가 고문과 극형을 두려워하여 눈물을 흘리자 그들에게 인분을 끼얹으며 엄히 힐책하였다고 한다. 주변의 압력이나 핍박에도 전혀 굴복치 않았고 말을 함부로 하였으며 술을 즐겨 하였으나 나름대로 불교의 개혁에도 앞장을 섰다.
1926년은 어느 해보다도 다사 다난한 한 해였다. 이 해
4월 26일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 임금이 붕어 했고, 두 달 뒤 국정을 모시는 인산일을 기하여 학생들을 중심으로 거족적인 만세 운동이 터져 나왔다. 이른바
6.10 만세 운동 이다. 비운에 간 순종 임금에 대한 애도는 일제에 대한 항쟁정신으로 승화되었고 이윽고 항일 만세 시위로 불타 올랐던 것이다. 비록 일제의 강력한 탄압으로 3.1 운동과 같은 대규모 시위로 발전하지는 못했지만 6.10 만세 운동은 이후 침체된 민족 운동에 새로운 활기를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나석주.
황해도 재령 출신이다. 23살에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무관학교를 나왔고 기미년 3.1 운동에도 참가하였으며 비밀항일결사에 몸담고 있었다. 군자금 모금과 친일파 숙청 등 숱한 독립운동에 참가하였으며 한때
임시정부와 정부요인의 경호를 담당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김구 예하의 의열단원으로서 이 때에 우리의 경제를 송두리째 말살하려는 일본의 대표적 주구세력인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하고 순국하니, 그의 나이 서른 다섯이었다.
인촌
김성수. 암울한 일제통치기를 민족의 계몽 운동을 위해 평생을 살아온 사람으로 교육과 언론, 그리고 민족 자본가로서 그 시대 지성의 대표적 인물의 한 사람이다.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한 이후,
동아일보사를 창립하였으며 중앙학원과 지금의
고려대학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세웠고
경성방직과
호남에서의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민족의 의지를 일깨우는데 헌신해 온 선각자이다. 지금 그가 백야 김좌진의 가족을 위해 도움을 줄 것을 다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신간회. 일제 치하에서 3.1 운동과 6.10 만세 사건을 잇는 거국적인 민족운동이다.
1927년
2월 15일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좌우합작으로
YMCA에서 창립 총회를 연 이 모임은
조선일보 부사장
신석우를 발기인으로 하여 회장에는 당시 조선일보 사장이었던 월남
이상재, 부회장에는 홍명희와 천도교 쪽의
권동진이 맡았다. 이외에도 훗날 동아일보 사장이 되는
송진우, 건국 후에 대법원장이 되는
김병로, 그리고
조병옥 등과
허헌,
김준연,
백관수,
이갑성,
이승훈,
한위건, 최원순과 만해
한용운 등 35명의 간사로서 그 출발을 보았다. 회장인 월남 이상재가 창립 한 달만에 세상을 뜨는 불운을 겪으면서도 신간회는 많은 민족의 문제에 앞장을 서고 투쟁하였는데
1931년, 해산할 무렵에는 국내외에 143개의 지회와 무려 3만 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따라서 긴장한 총독부는 이들의 노골적인 민족화운동에 극심한 불안을 느끼며 감시와 핍박의 족쇄를 늦추지 않았다.
김좌진. 김두한의 친부이다.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명여, 호는 백야이다. 충남
홍성 출생으로 일찍 개화에 눈을 떠 나이 열다섯에 이미 집안의 종문서를 불살랐으며 집을 허물어 학교를 세운 사람이다. 만주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북로군정서의 총사령관이 되었고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는 2,500의 병력으로 무려 5만의 일본군을 맞아 그 중 3,300 여명을 섬멸하는 독립군 전투 사상 전무후무한 대 성과를 수립하였다.
1930년
1월 24일, 안타깝게도 같은 동포인 공산주의자의 손에 죽으니 그의 나이 마흔 하나였다.
그랬다. 평생을 야인으로 산 김두한에게 있어 아버지 김좌진의 존재는 이 때부터 신앙 그 자체가 된다. 그는 평생 아버지처럼 살고자 했고, 또 실제로 그렇게 살아왔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이 때까지만 해도 당시 어렸던 김두한은 김좌진이 일본인에게 죽은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복잡한 민족진영의 알력에 대해
원노인은 설명을 해주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튼, 그 때문에 김두한은 누구보다도 일본에 대해
크나큰 적개심을 갖고 살아가게 된다.
또 신문사의 현판이 바뀌어지고 있다.
조선중앙일보. 당시
최동열[3]이 몸담고 있었던 신문사는 거듭되는 경영난으로 인하여
시대일보에서 중외일보로, 다시
중앙일보로 제호를 바꾸면서 그 명맥을 이어 오다가
1933년 3월 이때에 다시 조선중앙일보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 그리고 초대 사장으로 해방 전후에 크게 활약하는 민족운동가
여운형을 맞아들였다. 그러나 이 신문 또한 3년 후인
1936년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강제 폐간되어버린다.
3. 11~20화
김좌진의 본처
오씨. 그녀는 지금 북만주 산시역전에서 암살 당한 남편 김좌진 장군의 유해를 수습해 조선으로 돌아오고 있는 중이다.
최린.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사람이다.
명치대 법대를 졸업했고, 한때는 항일운동을 했던 당대의 지식인이다. 그러나, 이때에
변절을 하니 사람들로부터 많은 지탄을 받는다. 그는 훗날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의 사장을 지내고 광복 때까지 적극적인 친일파 노릇을 하다가
6.25가 발발하면서
납북된다.
단재
신채호. 민족사관을 수립하여 한국 근대사학의 기초를 확립한 역사가이자 독립 운동가이다. '독립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라는 일념으로 그는 일제에 철저히 비타협적으로 대항했다.
의열단의 강령을 체계화했고 실질적인 고문직을 수행하기도 했었던 신채호는
고조선과
묘청의 난 등에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 것으로도 사학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항일 잡지인 '탈환'의 자금 조달차 타이완으로 가던 중 지룽항에서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1936년 이때에 이르러 안타깝게
옥사하고 말았다.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살사건.
1936년
8월 25일에 있었던 일로 김두한이 종로통의 건달 세계로 진입했던 바로 그 무렵에 있었던 큰 사건이다. 동아일보는 같은 해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기록 필름을 입수, 그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우고 신문에 게재함으로써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려 시도했다. 그 일로 당시 사회부장
현진건, 사진부장
신낙균 그리고 사진을 수정한
이상범 화가들이 체포됐고 곧이어 동아일보는 발간이래 네 번째로 무기정간을 당한다.
그랬다.
1930년대 들어 일제는 대륙의 대한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전역을 점령한 일본은 그곳에
만주국이라는
괴뢰정부를 세웠고, 이를 전진기지 삼아 호시탐탐 중국 본토를 침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우가키에 이어 신임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미나미는 황국신민화 정책을 더욱 강화하여 조선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는 한편, 강도높은 공업화 정책으로 조선을 군수기지화 하는데 앞장섰다. 일제는 겉으로는 조선을 발전시키기 위한 개발이며 공업화라고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대륙 침략을 위한 군수기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조선중앙일보.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더불어 당시 삼대 민족지로 일컬어지던 신문사였다. 조선일보는 광산업에서 큰돈을 번 갑부
방응모가 있어서 그 재정에 염려가 없었고, 동아일보 또한 호남 갑부이며
경성방직의 주인이기도 했던 인촌
김성수가 있어 그 운영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에 비해 조선중앙일보는 상대적으로 그 재정이 허약했다. 그리하여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살 사건에 연루되어 정간을 받으면서부터 급격히 휘청거리다가 이렇게 문을 닫게 된 것이다.
4. 21~30화
만해
한용운. 그는 이때 경성의 남쪽에 있던 일본의 총독부가 보기 싫다 하여 일부러 북쪽으로 향을 정해서 집을 짓고 거기에 있었다. 그 집 이름을
심우장이라고 스스로 지어 불렀는데, 마침
서로군정서 참모장을 역임했던 독립군
김동삼 장군의 옥사를 전해 듣고 그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러주러 온 것이었다. 옥사한 김동삼은 경북 안동 출신으로 일찍이 1918년 김좌진 등 38인과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고 서로군정서 참모장으로 있던 중 김좌진,
지청천 등과 함께 민족 유일당촉진회를 조직하여 그 위원장을 지낸 사람이다. 1931년
만주사변 당시
하얼빈역에서 일경에 붙잡혀 징역 10년을 언도 받은 후에 옥고를 치르다가 1937년 4월
서대문 형무소에서 한 많은 인생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수양동우회. 우리에게는 소설가로 잘 알려진 춘원
이광수와
김동원 등이 중심이 되어 도산
안창호의 무실 역행을 지도이념으로 설립된 일종의 인격 수양단체이자 민족계몽을 위한 문화 운동 단체였다. 일제는
중일전쟁을 앞두고 전시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하여 사회주의자에 이어 합법적인 테두리에 있던 민족주의자들에게까지 탄압의 손길을 뻗쳐왔던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내의 민족 운동은 암흑기로 접어들게 되는데, 이광수는 반년만에 병 보석으로 석방되어 본격적인 친일 행위로 기울어지게 된다.
중일전쟁. 한 일본인 병사의 원인모를 실종으로 야기된 이른바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중국과의 전면전에 돌입했다. 일제가 선전포고를 하지 않는 것은 중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고도의 술책이였다. 국가 대 국가에 전쟁이 아니라 아시아 민족의 해방이라는 대의명분을 내걸기위한 건국주의자들의 정책적 관로였던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한 침략행위였다. 일제는 전쟁종기간에 걸쳐
남경대학살을 비롯해 중국인 1,200만명을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결국은
국공합작으로 맞선 중국 민중의 항전의지를 꺾지는 못하였으니 이를 만해하기 위해 일제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는 결정적 패착을 두게 된다.
만공 선사. 본명은 송도명[4]이고 법명은 월면이다. 이렇듯 만공은 엄혹한 일제치하에서 최고 권력자인
총독에게 따끔한 일침을 가할 만큼 기개가 대단한 고승이었다. 일찍이
불상을 쳐다보다 감동하여 출가를 했던 만공은 선불교 중흥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특히 1937년 조선총독부 주최로 열린 31본산 주지회의에서 일제의 불교정책에 정면으로 반대하여 우리나라 불교를 지키려 한 사건은 너무도 유명한 일화이기도 하다.
5. 31~40화
황국신민의 서사. 1937년 10월에 제정된 이 해괴망측한 구호는
민족의식을 말살하려는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이었다. 일제는
모든 조선인들에게 이것을 외우라고 강요하였으며, 각급 학교의 조례와 모든 집회에서 제창할 것을 또한 강요하였다. 그리고 모든 출판물의 제일 앞장에 이 황국신민의 서사를 게재하도록 하였는데, 놀라운 것은 문안을 만든 사람이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총독부 학무국 촉탁으로 있던
이각종이 문안을 만들었고, 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장이던 김대우가 관련 업무를 집행하였다고 한다.
창씨개명. 1940년대에 이르러 일제는 조선의 민족정신을 그 근본에서부터 말살하기 위하여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칠 것을 강요했다. 법령은 외면상으로는 자유의사에 따르도록 되어 있지만, 실제로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경우 식량배급을 받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기차표조차 살 수가 없었다. 이러한 일련의 불이익 때문에 대다수의 조선 민중들은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름은 그대로 놔두고 원래의 성에 한 글자만 덧붙여 일본식 이름을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일부 친일인사들은 일본의 상징인
후지산을 성으로 삼는 등 실로 한심한 작태를 연출하기도 했다.
신불출. 일제시대에 유명했던 만담가로서 훗날 김두한, 정진영과 함께 공산당 청년단체인
조선청년전위대를 결성하게 되는 인물이다. 그가 해방 공간에서 다른 좌익 예술인들과는 달리 예술단체가 아닌 청년 단체에 가담하게 되는 것은, 아마도 기질적으로 주먹세계와 가까웠거나 이들과의 친분이 대단했기 때문인것으로 보여진다. 아무튼, 신불출과의 만남으로 인해 김두한과 그의 동료들은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되는데…
6. 41~50화
1942년 가을, 본격적으로 전세를 확장한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인도네시아 바디비아 함락을 시작으로
버마의 랭군, 중국의 옥산을 점령하고
캐나다
벤쿠버까지 맹렬한 포격을 퍼부으며 승승장구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해 가을,
솔로몬 군도와
미드웨이 해전에서 대패하면서 일본은 수세에 몰리게 된다. 이에 더욱 광분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조선 청년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징용과 노력동원을 시작하였고, 그 대상은 조선의
주먹패들에게까지 확대되기에 이른다.
조선어학회 사건. 1930년대 후반부터 조선어 학습을 단계적으로 폐지시킨 일제는 마침내 조선어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순수한 학술단체였던
조선어학회에까지 탄압의 손길을 뻗쳤다. 당시 조선어학회가 전력을 기울이고 있던 '조선어사전'은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막아야 하는 일로 일제는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말을 지키고 가꾸어온 조선어학회 학자들은 그에 굴하지 않았고, 그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했던 조선어사전 원고는 결국 해방과 더불어 옥중에서 풀려난 조선어학회 회원들의 손에 의해
우리말 큰사전으로 완성되게 된다.
부민관 투탄의거. 일제 말기 극렬 친일파
박춘금 일당이 개최한 '아시아 민족분격대회' 라는 친일 관제 민중대회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든 사건이다. 의거의 주역은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으로 있는
조문기옹과 유만수 의사, 강윤국 의사로 당시에는 약관 20세의 열혈 애국 청년들이었다. 이들은 수색 작업장에서 입수한 다이너마이트로 대회 전날 밤 부민관 뒷담을 넘어 은밀히 무대 뒤에서 화장실로 통하는 길에 장치해 두고 거사 시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박춘금의 대의당원 하나가 이 선을 건드림으로써 3분만에 일제히 폭발하였던 것이다. '아시아민족 분격대회'는 이 의거로 인하여 완전히 폐쇄되고 말았으며 이 항쟁은 일제 말기 독립운동의 마지막 울분을 토한 장거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7. 51~60화
해방정국. 그랬다. 해방은 곧 사회의 혼란으로 이어졌다.
조선총독
아베와 정무총감 엔도오는
중도좌파 성향의
여운형에게 정권이양을 제의했고, 이를 수락한 여운형은 발빠르게 건준, 즉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해
해방정국의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나 총독부가 당초의 약속을 어기고 정권 이양을 미루고,
북쪽이
소련군 진주와 함께 친위공산세력을 기초로 하는 정부조직을 만들고 있을 때,
남쪽은
미국이라는 강력한 또 하나의 세력이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미국은
승전국으로서 건국준비위원회를 비롯한 모든 정부를 불인정하고, 새 정부 건설은 자신들이 적극 주도하겠다는 노골적인 의사를 표현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정객들은 정파와 이념에 따라 서로 갈등하고 분열되고 있었다.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즉
역사에 큰 상처로 기록되는 분단의 시작이
여기서부터 비롯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정재. 앞으로 해방 이후의 주먹계를 대표하는 인물 중에 하나이고 김두한의 강력한 라이벌 중에 하나이다. 이정재는 김두한을 근로보국대에서 만났다. 그 이후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적어도 주먹조직의 사람은 아니었다. 이정재는 이천 사람으로서 뛰어난 씨름선수였다. 나이 스물이 되기까지 그가 씨름판에서 상으로 받은 황소만 열 마리가 넘었다고 한다. 징용을 피하기 위해 잠시 보국대에 머물면서 김두한의 부하로 있었으나, 그는 곧 동대문 시장을 장악하면서 한국 최고의 정치주먹조직 보스로 성장하게 된다.
박헌영.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일제 말기 전라남도 광주에서 기와 공장의 인부로 숨어 지내다가 해방을 맞은 그에게는, 목숨을 걸고 혁명투쟁에 나설 수많은 공산혁명가들이 주위에 구름처럼 포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극좌노선은 해방 공간에서 좌우의 극심한 대립을 낳게 되었고, 결국에는 비극적인 민족분단으로 이어지게 된다.
해방 그 해
10월 16일, 미국에서
이승만이 귀국하고,
11월 23일,
임시정부를 이끌던 백범
김구가 귀국한 지 얼마 후인
12월 28일, 모스크바에서는
미국, 소련, 영국이 참석한 삼상회의가 열리고 한반도에 대한 5년 간의
신탁통치가 결정됐다. 신탁통치. 즉, 독립국의 능력이 없기 때문에 강대국들의 또 다른 간섭과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남북한을 막론하고 국민들은 벌떼처럼 일어나 신탁통치를 반대했다. 그러나 그 반대 데모 속에서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나게 된다. 소련의 사주 속에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관제데모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염동진,
백의사의 두령이다. 일제의 고문에 의하여 시력을 잃고 장님이 됐으나[5] 항일운동에서 반공주의자로 변신하여 '대동단'이라는 암살단을 조직, 운영했다. 그는 해방 후 45년 10월 1일, 조선 공산당의 국내파 거두
현준혁의 암살 사건을 계기로 북에서 월남하였다. 남하해서도 그는 박헌영 등 좌익 계열 인사를 민족 분열 분자로 규정, 이를 제거해야 한다는 행동주의를 내세워 다시 조직한 것이 바로 백의사였다. 한때 북으로 단원들을 보내
김일성을 저격, 실패하기도 했던 백의사는 두령인 염동진이 반공주의자라는 것만 알려졌을 뿐, 그 단체의 내막이나 깊이에 대해서는 단원으로 입단한 몇몇 사람들 이외에는 아는 이들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조직을 횡적으로 운영하여 단원들 사이에서도 서로를 알지 못하는 극비결사단체였던 것이다.
해방이 됐고 이승만과 김구가 각각 돌아왔지만 그들은 그들이 할 일을 찾지 못했다.
북쪽은 빠르게
소련에 의해 공산주의로 변해 가는 동안,
남한은 수십 개의 정당과 저마다 독립투사임을 자처하는 인사들로 인해 혼란의 연속이었다. 특히나 신탁통치가 강대국들에 의해 결정되자 그 혼란은 더욱 커졌다. 임시정부를 이끌고 온 김구는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전 국민의 궐기를 촉구하였고 이승만 또한 나름대로
돈암장에 거처하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끊임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이 때에 국민들은 이승만보다도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김구를 더 지지하였으나
미군정은 주로 미국에서 활동하였고 공부하며 투쟁해 오면서 미국 수뇌부와 인연이 깊은 이승만을 더 신뢰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훗날 이승만이
집권하는데
결정적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시라소니.
못난 호랑이 새끼라는 뜻[6]이다. 과거
낭만파 주먹 시대에 있어서
이 사람보다 더 싸움을 잘하는 이는 없다고 전해져 온다. 중국 전역을 떠돌며 수많은 강적들을 주먹으로 눕혔고,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리고 타기를 자유자재로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조직은 없었으나, 모두가 존경하고 두려워한 인물로서, 해방 이후 공산주의의 박해를 피해
월남하여 이때부터
명동파에 머물게 된다.
그랬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초 김두한은 잠시 몸담았던 공산주의 행동대인
조선청년전위대의 대장직을 내놓으면서 그 단체의 해체를 선언했다. 그것은 그가 앞으로 있을
우익의 선봉장이 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이 때부터 강력한 우익의 투사가 된다. 그리고 피로 얼룩진 근대사의 기록에 그의 이름을 확실하게 각인 시키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또 하나 공산주의자들이 노리는 가장 위험인물의 하나로서 제거되어야 할 이름 첫머리에 오른 것이었다.
김원봉과
심영, 그리고 신불출. 이들 중 김원봉은 일제시대 때 의열단을 이끌었던 독립군 출신이다.
황보군관학교를 나와 광복군 부사령관을 지냈으며, 임시정부의 국무의원과 군무부장을 지낸 군사 전문가이기도 하다. 후에 월북한 후 북한에서 최고요직을 두루 거치다 숙청된다. 그리고 심영은 남조선 연극 동맹의 유명한 배우였고 신불출은 잘 아는 바와 같이 그 당시를 풍미했던 일류 만담가였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공산주의자였다. 공통점이라면은 한결같이 훗날
김두한에 의해서[7] 북으로 쫓겨 가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8]
국군준비대. 정식이름은
조선국군준비대다.
조선공산당에서 장차
군대의 모체를 만들 의도로 결성한 군사단체 이름이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발기됐고, 그해 12월 서울중앙중학교에서 대표자 회의를 열었다. 정식군대라고는 할 수 없었으나 상당수의 무기와 인원을 가지고 있었던 단체였다, 46년 1월
국방경비대가 창설될 때 까지 우익 쪽에서 볼 때 매우 위협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이현상. 훗날
빨치산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이 바로 이 사람이다.
유진산과 고향이 같은 충청남도 금산 사람으로서 일제시대부터 공산주의 운동을 해오다가 몇 번씩 투옥되었고
지리산에서 은거했다가 해방이 되어 나타났다. 유진산은 절친한 친구인 이현상을 전향시키고자 수없이 노력했으나 결국은 실패하였고 이현상은 6.25 전쟁 중인
1953년 군경공비토벌작전에서 사살된다. 그의 지독했던
빨치산 투쟁기는 훗날 책과 영화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다시 한번 민족의 비극을 기억하게 만든 사람이다.
46년 이 해 초, 그러니까 김두한이 유진산을 만나 청년연맹을 결성할 이 무렵은 계속 혼란의 연속이었다. 김두한이 정진영과 계속 갈등을 빚고 있는 것처럼 좌우익의 정치적 대립 또한 여전히 극심했다. 이승만 박사와 김구 주석이 남한의 정치기구이며 동시에 군정청 자문기관인 남조선 민주의원을 구성했고 좌익들은 이에 맞서서 여운형,
박헌영,
허헌, 백남진,
김원봉이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했다. 평양에서는
김일성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이미 발족시켰고, 미군정청은 일본은행권을 동결시켰다. 최동열의 말처럼 여전히 해방정국은 암흑 속에 빠져있었다. 그리고 김두한과 정진영은 각각 좌우익의 행동대가 되어 묵숨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
8. 61~70화
국방경비대. 처음 설립목적은 이처럼 부족한 경찰력의 보충을 이유로
1946년에 창립됐다. 미군정은 좌익과 우익에서 난무하던
사설군사단체를 해산하고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단체를 구성하여 만든 것이 바로 이 국방경비대였다. 처음에는 주로
만주군과
일본군 출신 장교들을 주체로 하여 작은 규모로 설립됐다가, 곧 군사적 단체로 발전하여
우리 국군의 모태가 된다. 그리고 1년 후인 47년에는 그 수가 전국규모가 되어 3개 여단을 편성하게 되고 48년에는 다섯 개의 여단으로 그 수가 늘어난다. 그리고 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국군으로 정식 발족된다.
이른바
조선정판사위폐사건, 1945년 10월 20일부터 6회에 걸쳐 조선정판사 사장
박낙종 등
조선공산당원 7명이
위조지폐를 발행한 사건으로써 1946년 5월에 그 윤곽이 경찰에 드러난다. 광복 이후 조선공산당은 일제가
조선은행권을 인쇄하던 근택빌딩을 접수하여 조선정판사로 개칭하고 이를 위조지폐 발행 장소로 사용, 재정난에 처해있던 공산당에 재원을 마련하는 동시에 남한 시장 질서의 교란과 파괴를 목표로 삼는다. 이 사건은 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사 사장
권오직과 공산당 재정부장
이관술 등의 지령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인쇄에 참여했던 많은 공산당원들이 모두 법정에서 무기징역을 비롯한 중형을 선고받는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하던 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가 정간되면서 동시에 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일제 검거가 시작되고 이후 공산당은 지하로 숨어들게 된다.
9. 71~80화
그랬다. 김두한의 회고록에는 당시 서른 곳이 넘는 부호들을 상대로 이승만의 친필 휘호를 보여주며 자칭 애국성금을 모은 사건들이 자세히 적혀있다. 그 기록에는 훗날
반민특위 구속 1호였던
박흥식이나 일제시대 때 친일을 일삼던 많은 매판자본가들의 이름이 눈에 띄는 점이 이채롭다. 아무튼 그 사건의 당위성을 떠나 성금이라는 명목으로 헌납 받은 액수는 무려 7000만원이 넘는 금액이었다. 그 시절에 대지 200평 정도의 집 한 채의 값이 10만원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실로 엄청난 금액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여운형과
김규식의
좌우합작. 정부 수립문제를 목적으로 좌에 가까운 중도파 여운형과 우에 가까운 김규식이 각각 주석이 되어 만든 회의기구이다. 이들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민족의 분열을 막아볼 목적으로 회합을 갖고 기구를 구성하였으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의도와는 달리 좋은 결과를 맺지는 못했다. 이때 우익 쪽에서는 이 두 사람의 움직임이 자칫 우익 전체에 어떤 피해를 가져오지 않을까 걱정하였고, 그 생각들을 지금
장택상이 김두한에게 꺼내 놓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받아들이고 있는 김두한의 생각은 달랐다.
이른바
산정호수의
김일성 별장 습격 사건. 별동대의 이때 이 겁 없는 기습 사건은 그곳 경비병들만 죽인 채 무위로 돌아갔다고 한다. 하지만 김일성은 그 무렵 평양의 한 군중 대회에서 백의사 단원에 의해 저격과 폭탄 세례를 받는다. 그 또한 결국은 성공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른바
제주도 4.3 사태. 바로 좌, 우익의 대립이 첨예했던
1948년 이 무렵의 일이다. 이 사건은 일제 말기 지하로 잠적했던 좌익들이 미 군정청의 정책 혼란과 함께 공산당을 합법화 시키면서, 그 활동을 효과적으로 규제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사건이다. 제주도의 인구는 광복 전까지 15만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광복 후에는 30만명으로 급증했다. 이 중 8할이 좌익계였고, 행정직원들의 수장들이 또한 모두 좌익이었다. 이들은 지난 해인 1947년
삼일절 기념일에 경찰서를 습격했고, 경찰은 그들에게 발포를 함으로써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접어들었고, 대폭동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들은 남한만의 단독선거와 단독정부를 반대하였고, 또한 그 와중에서 무고한 양민들을
인민재판이라는 이름 아래에 학살하였다. 그리하여 충청도와 전라남도의 경찰대가 투입되자, 급작 4월 3일을 기해, 제주도 전체에 무장, 비무장 세력들의 봉기가 발생했던 것이다. 그러나 경찰과 군 또한 강경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양민들을 재판 절차 없이 처형했다. 특히나 북촌에서는, 400명이나 되는 마을 주민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집단 총살하기도 했다고 한다. 무려 2년을 넘게 끌었던 이 제주 4.3 사태에서 희생당한 양민의 숫자는 모두 3만에 이른다고 한다. 지금의
참여정부에서는, 55년만에 이 사건을 다시 조사. 과잉 진압 과정에서의 엄청난 희생에 대해 대통령 사과를 검토하고 있다. 결과야 어찌 됐든 간에 당시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이 과연 좌, 우익의 그 정치나 사상을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아마도 그 중 대부분이 자신이 왜 죽었는지도 모르고 눈을 감았을 것이다. 생각할수록 가슴 아픈 사건이다.
군정 장관의 성명. 당시 주한 주둔군 사령관
하지 중장은 좌, 우익의 극심한 대립 속에서 나름대로 중립을 유지하고자 애를 썼다. 그 과정에서
백색 테러로 대표되는 김두한과 그의 별동부대들을 좋지 않은 시각으로 예의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운형과 장독수가 피살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였기 때문에, 하지의 의지는 확고했다. 좌익이든 우익이든, 테러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한국의 재판을 거쳤던 김두한과 그 일행들이 법정에서 너무 가벼운 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미 군법회의가 적절한 재판을 다시 할 것이라는 것을 모 일간지 사회면에 성명을 내기에 이른 것이다.
김두한의 재판은 처음부터 끝까지 극심한 혼란 속에서 치러졌다. 김두한을 죽이라는 좌익계의 거친 항의와 김두한의 재판 자체를 잘못됐다고 대변하는 청년단원들 사이에서 제 1심 재판을 맡은 재판장은 사표를 냈을 정도였고, 미 군 법정 역시도 혼란의 연속이었다. 그리하여 김두한과 그 일행들은 그런 과정에서 드디어 마지막 재판을 받게 된다.
김두한이
오키나와로 갈 무렵, 드디어 미군의 군정 실시 3년만인 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 선거가 이루어진다. 김구와
김규식이 남북 협상을 실패하고 돌아온 지 닷새만의 일이었다. 이 선거는 UN 한국 위원회의 감시하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것을 신호로 하여 북한에서는 그 때까지 남한으로 보냈던 전기를 중단한다. 연이어 5월 31일
제헌 국회가 개헌됐고, 의장에는 이승만, 부의장에는
신익희와
김동원이 선출됐다. 북한도 1달 후인
7월 1일, 남한의 국회가 우리 국가의 이름을
대한민국으로 결정할 무렵, 그들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시정을 발표한다. 남북이 확연하게 서로 다른 체제로 갈라져 가는 순간인 것이다.
그랬다. 국회는 48년 이 해 5월 10일 선거를 거쳐 국회를 구성하고, 7월 1일 대한민국 국호를 정한 일에 다시 그 달 12일에
헌법을 제정,
17일 공포하였고, 동시에
정부조직법도 공포한다. 그리고 같은 달 20일, 국회는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시영을 선출하기에 이른다.
반민특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약칭이다. 본래 1947년 이 법을 제정한 바 있으나 당시 친일파를 고용하고 있던 미군정의 인준 거부로 48년 8월 정부 수립 이후의 제헌 국회로 넘어온 것이다. 그리고 1949년 1월 5일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이 법에 의하면
국권피탈에 적극 협력한 자는 사형,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제국 의회 의원이 된 자, 독립운동가 및 그 가족을 살상 박해한 자는 무기징역, 그리고
직간접으로 일제에 협력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이나 재산몰수형에 처하게 돼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이승만의 생각도 미군정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도 친일파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나라 운영이 어려웠던 것이다.
반민특위. 당시 이들 위원회가 파악한 반민족행위자는 모두 7000여명에 이르렀다. 그중 이광수와
최남선 그리고 앞서 보았던 최린이 포함되었고, 당시 많은 반민족주의자가 검거됐으나 그들 중 이들은 당연 세간의 이목을 받았다. 그만큼 그들은 당대의 손꼽히는 지식인들로써 한때 민족의 독립을 요하여 일신을 내던지며 옥고를 치렀던 사람들이였고, 그만큼 기대가 컸었기에 그들이 가져다 준 배신감 또한 컸던 것이다. 참으로 아까운 천재들의 비극이였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백범
김구. 본관은 안동이고 본명은 창수다. 극우민족주의자였던 그는 해방 이후 중도 노선을 걸었고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연합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하였다. 고지식할 정도로 남북합작만을 주장했던 김구 선생의 길이 옳았는가는 역사가들의 판단에 맡길 뿐이다. 그러나 민족통일을 위한 우국충정을 그 누가 부정하랴! 그렇듯 독립운동가이자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였던 김구는 한때 추종자이기도 했던 군인
안두희의
총탄에 비명해 갔고, 그 의문은
안두희마저 지난 96년 살해됨으로써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6.6 사태. 당시 내무차관이었던
장경근의 지시에 의해 반민특위본부를 습격한 사건을 일컫는다. 이로써 국민의 열화와 같은 성원과 기대를 모으며 발족했던 반민특위는 당초의 취지와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좌절되고 만다.
10. 81~90화
6.25.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시작된 남북전쟁.
북측의 도발로 이루어진 이 민족의 비극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미 오래 전부터
삼팔선에서는 크고 작은 남북 간의 분쟁이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나 남쪽에서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고 북쪽에서는 남한의 군사력을 시험하고 분석하면서 치밀하게 남침 계획을 수립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국군은 허약했다. 단단히 준비했던 북한과는 달리 남한의 군 관계자들은 위기의식이나 전술, 작전 면에 있어서도 저들에게 뒤떨어졌다. 더군다나 저들이 쳐내려온 6월 25일은 일요일이었고 그 전날은 토요일, 즉 절반은 휴일이라 하여 대부분의 장교와 하사관, 사병들까지도 외출과 외박 길에 나섰던 것이다.
그랬다. 불과 하루 사이에 전 전선은 그야말로 눈사태처럼 무더기로 무너져 내렸다. 그것은 허망하고도 비참한 패배였다. 저들의 소련제
T-34 전차는 견고한 무쇠덩어리로써 국군을 공포의 도가니로 밀어 넣었고 저들의
야크 전투기 또한 우리 군의 사기를 땅에 떨어뜨렸다.
그 달,
6월 27일, 이미 전세는 완전히 기울었다. 후방의 3개 사단과 육군사관학교 생도와 교도대 병력까지 있는 대로 다 투입한 전선이었지만 결과는 역부족이었다. 북한의 전선사령관
김책과 제 4사단장 이권무들은 이미 이 날 오후 한시쯤에
창동을 무너뜨리고 다시 오후 4시 무렵
미아리고개에 이르고 있었다.
한강 인도교 폭파.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북한군이 미아리 저지선을 제치고 서울로 입성한지 두 시간 만에
한강철교는 엄청난 섬광과 천지를 뒤엎는 듯한 폭음과 함께 그렇게 두동강이 났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성급하고도 무계획적인 결정이었다. 비록 적군이 가까이 온다 해도 한강다리 앞에서
서울역까지 수많은 피난민이 몰려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한강 인도교 폭파는 당시 수백만 서울시민을 아무 대책 없이 적 치하에 묶어놓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무려 10만이 넘는 시민들이 적에게 피살되거나 북으로 납치 당해 갔던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참담한 비극이었다.
이승만과 정부가 27일 대전으로 옮긴 이후 그 이틀째인 29일. 일본에 있던
맥아더 극동사령관이
수원비행장에 내려
한강 전선을 시찰한다. 다음날
6월 30일에는
채병덕 총참모장이 해임되고
정일권이 그 보직을 대신 맡았고, 다시
7월 1일, 서울을 점령하고 사흘 동안 전력을 재정비한 북한군은 한강을 도하하기 시작한다. 비록 아군이 한강철교를 폭파했다고는 하지만 북한군은 그것을 재빠르게 수리하여 대군을 몰아 내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중 북한군 제 15사단 48연대는 충북 음성군 동막리에서 국군 최강인
6사단을 만나
뼈아픈 상처를 입게 된다. 6사단 7연대가 북한군 48연대를 완전섬멸, 몰살 시켜버렸던 것이다. 전쟁 이후 국군 최초의 대승으로써 이승만은 전 부대원에게 1계급 특진시키는 영광을 부여한다. 당시 우리가 얼마나 승리에 목말랐는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대목일 것이다.
그랬다. 이정재는 구사일생으로 처형 직전
김기홍의 대담한 기지에 의해 그야말로 극적으로 구출됐다. 김기홍으로서는 우연한 기회에 북한군 군관 군복과 지프차를 옛날에 잘 알던 사람을 통해 구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는 잊지 않고 이정재의 안부를 궁금해왔던 것이었다. 이 인연으로 인해 김기홍과 이정재는 훗날 매제 지간이 된다. 이정재로서는 김기홍이 생명의 은인이었던 것이다.
그랬다. 6.25 전쟁이 일어난 그 해 한 달도 안 돼서 대전으로 갔던 정부는 불과 20일 만인 7월 16일 대구로 갔다가 바로 다음날 다시 부산으로 옮겨간다. 특히나
대전을 내주면서 후퇴하던 미 제 24사단장
딘 소장이 북한군의 포로가 된 것은 아군과 연합군의 사기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육군참모총장 겸 육해공군 총사령관을 지낸
채병덕 소장이 하동전투에서 전사한 것 또한 그러했다. 그들은 북한군 게릴라들이었다. 채병덕은 그렇게 죽었던 것이다.
임화수. 그는 전쟁통에 이렇게 피난지 노름판에서 그와 인생을 같이 하는 사람 하나를 만난다.
여기서 본 이름은 밝히지 않기로 하자. 다만 그는 당시 부산의 상당한 부호로서 우연한 기회에 임화수와 노름판에 함께 앉았다가, 임화수의 사내 다운 매너를 보고 조건 없이 큰 돈을 대주었고 또 돌려 받았다고 한다. 해서 임화수는 훗날 이 손씨 성을 가진 부호의 조카를 아내로 삼게 되고, 나아가 그가 다시 서울로 돌아와 극장을 불하받고 운영하는데도 엄청난 거금을 빌려 쓰고 또 갚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많은 사건에 있어서 임화수를 한번 알았던 사람들은 열렬한 임화수의 후원자 내지 동지로 변한다. 그러고 보면 임화수에게는 사람을 이끄는
어떤 인간적 매력이 상당했던 모양이다.
워커라인. 다시 말해서
낙동강 전선.
정일권이 설명했던 것처럼 미
8군 사령관인
워커 장군이 최후의 방어선으로써 정한 저지선이다. 50년
8월 4일 새벽 1시를 기에 형성된 이 낙동강 방어선은 남북이 160킬로미터, 동서 80킬로미터로써 타원형을 이루었는데, 강 일대는 주로 미군이, 그중 산악지대는 국군이 담당했다. 그리고 정일권이 보고하고 있는 9월 초 이때까지도 낙동강 전선은 그야말로 시산혈해. 시체로 산을 이루고 피로써 강을 이루는 수 없는 공방의 계속이었다.
시라소니와 이정재. 이 부산에서의 그럴듯한 인연으로 하여 두 사람은 급격히 가까워진다. 그리고 시라소니가 훗날 동대문 사단의 이정재 부하들로 하여금 집단 린치를 당했을 때까지도 두 사람의 관계는 오랫동안 친밀하게 지속이 된다. 아무튼 시라소니는 이렇게 해서 김두한을 비롯한 당대의 큰 주먹들을 모두 아우로 두게 된다.
그랬다. 그야말로
인천 상륙 작전 이후의 전선은
파죽지세였다. 불과 한달 만에
유엔군과 국군은 일제히 삼팔선을 넘어 평양을 점령하면서, 그 중 보병 제
6사단
7연대는
압록강변 초산까지 이르렀다. 이 때 7연대 병사가 수통으로 압록강의 물을 뜨는 사진[9]은 그 당시 전파를 타고 세계에 전해지면서 전쟁은 그것으로 끝나는 듯 했다. 맥아더는 김일성에게 거듭 무조건 항복을 종용했고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모두가 이 전쟁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무렵 조금 전에 정일권이 보고했던 것처럼
중공군은 이미 압록강 근처에 내려와 전선투입을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 국군 6사단이 초산에 도달한 것은
10월 26일이었는데 중공군은 그 전날인 25일 압록강 건너편에서 남하를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보고를 받는 이때까지도 이승만은 이를 알지 못했다.
중공군의 대규모 참전. 그것은 예고된 일이었다. 중국 당국은 계속해서 북한이 무너질 경우 자국의 영토가 침입 받을 것이라는 것을 이유로 내세우며 연합군의 삼팔선 돌파를 경고해 오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국군이 압록강변에 이르자 그들은 비밀리에 소련과 회담한 후 전격적으로 병력을 남하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사태는 급박하게 다시 반전된다. 그해
11월 28일 유엔군은 평양과 함흥, 원산에서 철수를 결정하였고, 나흘 후인
12월 2일엔 평양을 내어주면서 다음날인 12월 3일에는 국군과 유엔군 모두가 삼팔선 이남까지 철수하게 되면서, 정부는 서둘러 예비군 성격의
국민방위군 설치령을 공포하게 된다. 그 뿐만 아니라 다시 한 달 후인
1월 4일에는 서울까지도 중공군의 손에 넘겨주게 된다. 우리 뇌리에 아직도 생생히 남아있는
1.4 후퇴라는 말은 이때에 생겨난 일인 것이다.
이른바
거창 양민 학살사건.
1951년
2월 10일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에 주둔했던 공비토벌군이 공비와 지역주민이 내통했다는 정보에 따라 양민들을 무고하게 끌어 모아 대량 학살한 사건이다. 일찍이 몇 달 전인 50년
12월 5일 무장공비가 내습하여 이곳의 경찰관 30명을 전사시킨 일이 있었으나, 경찰의 대응이 여의치 못하였다. 이에 따라 토벌부대가 주둔하게 되었고 이와 같이 엄청나고도 어이없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를 뒤늦게 보고 받은 국방장관
신성모는 진상을 왜곡보고하면서 사건의 은폐를 지시했다.
이른바
부산정치파동. 6.25 전쟁에 대처능력부족과 연이은 군 관련사건들로 위기에 몰리고 있던 이승만은
직선제를 내놓았으나 부결됐고, 국회는 그 이어서
내각제를 관청시키려고 서둘렀다. 내각제가 이루어지면
이승만의 정치생명은 끝이였다. 그리하여 이렇게 계엄이 논의되었고 이 방법은 실제로 효과가 컸다. 박상원 등 내각제 중심인 국회의원들이 공산당으로 몰려 구속되거나 혹은 여기저기서 테러가 자행됐다. 그리고 조작된 관제 데모가 임시국회밖에서 계속됐다.
그랬다. 당시 정일권에 이어 취임한
이종찬 장군은 정부의 군 출동 명령을 거부한다. 정치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뜻에서였다. 직선제와 내각제를 혼합한 이른바 발췌 개헌안은 그렇게 정부의 강압적인 물리적 힘에 의해, 이승만이 원하는 쪽으로 결론이 난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이승만은
직선제에 의하여 대통령에 재선된다. 한창
휴전 회담이 개성에서 계속 되던 때였다. 그리고 그 다음 해 7월…
6.25. 같은 민족이 총부리를 겨누고 피를 흘리며 만 3년을 싸운 전쟁. 실로 그 피해는 엄청났다. 무엇보다도 남과 북의 분단이 고착화되었고 전국의 산하가 폐허가 됐으며, 인명피해 또한 엄청나서 한국군을 포함한 연합군의 전사자가 총 18만 명, 부상자가 55만 명. 그리고 북쪽은 북한군과 중공군을 합쳐 무려 142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남북한의 무고한 민간인 희생자들은 무려 400만명이나 되었다. 그리고도 남과 북 모두가 원점으로 돌아오는 허망한 결론을 낳았다. 이 얼마나 참담한 결과인가? 두고두고 한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화룡. 언젠가 언급했지만 그는 비교적 주먹세계에서는 신사로 통했다고 한다. 그에게는 먼 친척뻘의 누이가 둘이 있었는데 기업형의 큰 음식점과 요정을 운영하면서 이화룡이 쓰는 돈 만큼은 평생을 넉넉하게 대주었다고 한다.[10] 그래서였을까? 그는 씀씀이도 컸고 인심도 넉넉했으며, 더불어 주변에 좋은 인간관계를 많이 두었다고 전해진다.
11. 91~100화
이른바 건중친목회. 김두한이 미 8군으로부터 얻어낸 이 군수물자 불하단체는 이렇게 발족된다. 그러나 김두한이 모든 조직들을 참여시켜 어려운 시기에 그들로 하여금 자립과 생활의 보탬이 되게 하려는 의도는 처음부터 빗나가기 시작한다. 여기 참여한 대부분의 주역들이 주먹계의 대부들이었고 이들은 김두한의 생각과 달랐던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주먹계에 몸담고 있었고 나라를 생각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야말로 조직의 자금을 확보하는데 절호의 기회로 알고 덤벼들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폭력연합주식회사라고 할만했다. 말하자면 지역의 보스들은 이 모임의 주주였고 자본금은 주먹이었으며 그 이익금은 막대했던 것이다.
1953년의 자유당 당의장 선거. 이 때에 이르기까지 전쟁을 거치면서
자유당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개헌을 강행하여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자신을 위한 정당체제를 굳히려고 마음먹고 당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그 와중에서 그는 이른바 족청이라 하여
조선민족청년단이라는 거대한 청년단체를 가지고 있는
이범석이 당 내에서 그 비중이 커져가자 그 단체를 해산시켰다. 그리고 이범석이 있던 자리에
이기붕을 2인자로 내세우면서 공식적으로 자유당 의장 자리에 앉히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기붕은 과거 이범석이 가지고 있던 그 청년들의 힘이 절실했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것이었다.
김관철. 사실 그는 120㎏의 거구에다가 천하무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그가 종로의 새 주인이 되는
아오마스 일행에게 허점을 보이고 무너진다. 그것은 더 이상의 낭만파 주먹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대목이었다. 그리고 김두한이 사실적으로 주먹세계에서 그 영향력을 거두어들이는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
자유당의 2인자 이기붕과 주먹대부 이정재의 결탁. 당시 자유당의 거대한 혁신세력이었던 이범석의 족청계를 밀어내고 당권을 장악한 이기붕은 당의 2인자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험난한 정치투쟁이 불가피했다. 그는 이에 이정재의
검은 힘이 절실히 요구됐던 것이다. 또한 이정재로서도 집권당의 제 2인자를 등에 업음으로써 얻게 될 막대한 영향력을 계산하는 동시에, 그의 또 다른 정치적 야망을 불태우게 되는 계기가 됐던 것이다. 이들의 상호 계산된 커넥션은 앞으로 전개될 정치폭력사의 현장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그랬다.
1954년 5월은 몹시도 시끄럽고 분주한 달이었다. 여야 할 것 없이 민의원 선거에 승리하기 위해 불을 뿜는 투쟁이 매일처럼 치열하게 계속됐다. 그러나
야당은 힘이 없었고 경찰을 비롯한 모든 관권이 총동원되어 자유당을 위해 나서고 있던 때였다. 그리고 선거가 시작되기도 전에 자유당의 압승을 자신할 수 있었던 당시의 정치 풍토 이면에는 결속 되지 못한 야당, 힘없는 야당의 극심한 분열과 내분도 한 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무튼 이러한 혼돈 속에서 세간의 이목은 무소속으로 출마한 김두한의
종로 을구로 집중되고 있었다.
유지광. 이정재와 더불어 훗날 정치주먹사에 악명을 떨쳤던 이 사람은 어느 주먹계 인물보다도 다른 점이 많았다. 그는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고 해방 후 좌우익 세력다툼에서 단순간에 좌익을 눌러 우익을 승리로 이끈 후에, 학생 주먹의 대부 자리를 내놓고 바람처럼 사라졌었다. 군은 장교로 복무했었고 이정재와는 사돈 간으로써 이정재의 막내 고모가 유지광의 큰 형과 결혼한 처지였다고 한다. 아무튼 그 당시 동대문 사단에서
김동진을 대신할 인물을 찾고 있던 이정재는 이 때 쯤 유지광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른바
김상도 테러 사건. 이범석의 족청 계열 축출 후 당 내 2인자 자리를 지키기 위해 이기붕이 이정재를 영입하면서 벌린 첫 정치 테러 사건이다. 김상도는 경북 영천의 씨름 장사로 당시 이기붕과 라이벌 관계였던
이갑성의 호위를 맡고 있었는데, 이처럼 첫 정치 테러의 희생자가 됐던 것이다. 아무튼 이 일을 계기로 이정재의 동대문사단은 이기붕의 절대적 신임을 얻음과 동시에, 정치 주먹 집단으로서의 악명을 세상에 드러내게 된다.
임화수와 곽영주. 유지광의 자서전을 보면 이때 임화수는 서른 네 살이었고 곽영주는 서른 두 살이었다고 한다. 처세에 밝은 그가 처음부터 자신을 접고 숙임으로써 권력가의 신임과 울타리 속으로 보다 자유롭고 빠르게 파고 들어갔던 것이다. 아무튼 이 이후로 두 사람은 각별한 사이가 되고 자주 어울리며 죽을 때까지 형제 같은 사이로 지낸다. 그리고 생일이 같았던 것처럼 죽음 또한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맞게 된다.
아직도 주먹사회의 전설로 악명 높게 전해져 오는 시라소니 린치 사건. 우리나라 주먹사회엔 그동안 무수한 실력가들이 있었다. 상상할 수도 없는 힘의 천재나 신화를 남긴 인물들이 많았지만 이구동성으로 그들이 입을 모으는 제일의 실력가는 역시 시라소니였다. 실제로 시라소니는 앉은 자리에서 3미터를 풀쩍 날아가 상대를 들이받는 괴력을 가졌다고 전해지며 김두한 또한 그를 형님으로서 극진히 받들었다. 그러나 그런 시라소니가 무참하게 동대문 조직에게 기습을 당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연이은
이석재의
또 한번의 가해로 시라소니는 당시 무려 6개월을 넘게 자리에 누워있어야 했다고 전해진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명동과 동대문의 중간인
청계천은 양쪽 주먹들의 군사분계선이 된다. 그리고 이 분계선을 사이에 둔 지루한 주먹전쟁이 발발하게 되는 것이다.
1954년
6월 9일, 드디어 김두한은 이때 37세의 나이로 제 3대 국회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 당시 최고령 의원으로서는 경남 남해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윤병호씨로서 당시 예순 넷이었고, 최연소자는 경남 거제군의 자유당 소속으로 훗날 제 14대 문민정부 대통령을 지낸
김영삼 의원이었다. 김영삼 의원은 당시 스물 여섯이란 젊은 나이로 국회에 입성해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는데 그리고 초선 의원임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절대적 후광과 소속 의원들의 지지로 이기붕은 대망의 국회의장에 오르게 된다. 그리하여 자유당의 영구집권과 이승만의 중임제한 철폐를 위해 개헌을 모색하고 추진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것은 자유당과 이기붕 자신과 이승만과 그리고 결과적으로 국가 불행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12. 101~110화
그랬다. 김동진은 잘못 생각한 게 하나 있었다. 바로 곽영주. 경무대 대통령 경호책임자 곽영주를 계산에 넣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정말 큰 실수였다. 당시 경찰의 총수였던 내무부 장관조차도 곽영주를 곽박사라고 부르며 함부로 하지 못했던 것이다. 김동진은 그런 곽영주를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1954년
11월 27일. 국회에서는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의 중임제한철폐를 골자로한 자유당의 개헌안 의제가 야당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표결에 들어갔다. 이 표결은 의석수로 보더라도 처음부터 자유당의 승리가 예상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변이 생겼다. 단 한 표 차이로 이 이승만의 종신제 개헌은 부결되었던 것이다. 그 단 한 표 차이. 이것은 중대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여당인 자유당 안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상당한 반대표가 나왔다는 것과 더불어 이틀 후, 헌정사상 초유의 해괴한
사사오입 가결이라는 논리가 등장하는 것이다. 그랬다. 그것은 자유당 독재가 표면으로 등장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 당시 집권당인 자유당이 사사오입의 기묘한 논리를 적용시켜 정족수 미달의 헌법 개정안을 불법 통과 시킨 사건을 일컫는 말이다. 당시 개헌의 찬반을 묻는 국회표결에서 재적의원 203명 중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로 헌법 개정에 필요한 3분의 2인 136표에서 1표가 부족하였고 이에 따라 국회부의장
최순주는 부결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그 선포가 있은 이틀 후 재적의원 203명의 3분의 2선은 반올림을 하여 135명이면 된다고 하여 전날의 부결 선포를 번복, 개헌안을 통과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이 사건을 기획한
경기도지사 이익홍은 그 공로로 인하여 훗날
내무부 장관에 기용되기도 한다. 아무튼 국회는 헌정사상 초유의 사사오입 파동이라는 기막힌 돌풍에 휩싸이게 되었던 것이다.
김기홍. 일전에 언급했듯이 그는 배포와 함께 학식이 있었던 사람이다. 또한 전쟁중에 생사의 위기에 처해있던 이정재를 구해주면서 처남매부 사이가 되었던 사람이다. 동대문상인연합회를 발족할 때 이정재는 회장이 되고 그 이사장 자리에는 김기홍이 앉았다. 두사람이 얼마나 가까웠는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김기홍이 이쯤에서 이정재를 떠난다. 일선에는 김기홍과 이정재가 모종의 일로 불화설이 있었고, 그 때문에 헤어졌다고 말하는사람들도 있지만 그 내용을 확인할 길은 없다. 어쨌든, 이렇게 김기홍은 동대문을 떠났다.
이정재의 방청석 난동. 당시 자유당 중앙당 감찰부 차장이었던 이정재를, 이때 조병옥은 잘못 불러 감찰부 부장이라고 지목한다. 그리고 그 기록은 지금도 국회 속기록에 생생한 협박의 증거로 남아있다.
주먹들이
의원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하며
국회를 위협하는 이 있을 수 없는 현실. 그러나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유진산이 훗날 그의 회고록에서 썼던 것처럼,
초기 헌정의
어두운 종말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김두한과 신기범의 만남. 이때부터 신기범은 김두한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면서 개인 비서실장으로서 이찬호, 채원기들과 함께 김두한을 모시게 된다. 또한 훗날
오물 사건이 터졌을 때도 함께 투옥된다. 김두한은 평생 그의 말처럼 배우려고 하는 일에는 인색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는 신기범을 통해 학생들과의 교류도 폭넓게 만들어 간다.
이른바
단성사 앞 총격 사건. 이 시절에는 무기가 흔했다. 따라서 어지간한 주먹 조직들은 대부분 권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백주대로의 이 암살 사건은 당시 세간에 큰 충격을 주었다. 더군다나 동대문 주먹조직의 내분에 의한 총격 사건인 동시에 정치 암살을 폭로했던 장본인에 대한 저격 사건이었다. 당연히 세간의 관심이 클 수 밖에 없었다.
이정재와 이석재의 구속 사건. 그것은 실로 그 당시 부패한 권력 상황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일례에 속했다. 이정재가 총을 맞고 살아난 김동진의 결정적인 증언에 의해 조사되고 있음에도,
여당의 힘은 당시 정의의 편에서 고군분투했던 젊은 검사
김윤도의 의지를 아주 쉽고 허망하게 꺾어버렸다. 당시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은 수사를 맡았던 김윤도 검사가 말을 듣지 않자 지방으로 좌천 전보 발령했고, 다른 검사를 붙여 수사 종결을 강요하기에 이른 것이다. 한편, 직접적인 암살을 주도했던 이석재. 우린 그의 얘기를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이석재를 담당했던 김윤도가 좌천되고 난 뒤에, 그의 소청은 새로운 검사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즉, 진짜 살의가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는 사격 실험인 것이다. 이석재 말대로 그가 진짜 명사수이기 때문에, 단순히 겁을 주기 위한 저격이었는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시험인 것이다. 이때가
1955년
5월 15일, 장소는
왕십리 경찰 무기고 마당.
그러나 명사수 이석재는 사격 솜씨를 한껏 자랑한 것도 소용없이 살인미수가 적용됐고, 판결에서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어쩌면 이석재의 주장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석재와 김동진은 6.25 전쟁 당시 우연한 기회에 김동진은 국군 소위로서 낙오병이 됐고, 이석재는 헌병 군관으로서 1.4 후퇴를 맞아 만나서 함께 도망치다가, 인민군들에게 붙들려 죽기 직전 함께 그 곳을 탈출해 살아난 일이 있다고 한다. 어쩌면 그 때의 인연을 생각해서 였을까. 백발백중의 명사수 이석재는 김동진을 죽이지 못했던 것이다.
김동진. 그는 단성사 총격 사건 이후 이렇게 해서 주먹계에서 완전히 은퇴를 하게 된다.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훗날 정계에 투신하여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기도 한다. 그러나 한 때 주먹패였다는 꼬리표는 정치인으로의 변신을 꿈꾸는 그의 발목을 사사건건 잡았다. 그러나 그는 그때마다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고 그것을 증명하는 증표를 내보였다. 어느 날 정견발표 때 상대 후보가 그의 어두운 과거를 계속 들먹이자 자신은 깡패가 아니라며 그 자리에서 손가락을 잘라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알코올에 담아 늘 가지고 다니며 자신이 과거와 철저하게 단절했다는 것을 내보였다. 그는 비록 국회에는 진출하지는 못했지만 훗날 경제인으로서는 괄목한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전해진다.
독재와 반독재의 대결. 자유당이 사사오입 개헌으로 노골적인 장기집권에 나서자 민국당은 호헌동지회를 결성하며 반이승만 세력의 결집에 노력하게 된다. 이 호헌동지회는 훗날 범야보수세력을 결집한 신당을 추진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조병옥과
유진산,
신익희,
장면 등을 중심으로 자유당 탈당의원과 무소속의원들이 연합을 하여 한국 최초의 통합야당인
민주당이 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이 시점부터 독재와 반독재의 투쟁구도 속에서 한국에 정당정치가 자리를 잡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유지광과 서대문의
최창수, 그리고 종로의
아오마스. 그들 중에서도 최창수는 권투선수 출신으로 해방 직후 한국학생웰터급 선수권자였다. 그리고 우리나라 처음으로 필리핀에 있던 동양권투연맹에 가서 한국권투연맹의 창설을 인가 받은 장본인이다. 그 당시는 불우한 세월이었다. 체육인인 그가 자신도 모르게 주먹으로 분류되어 지금 이정재 사단과 손을 잡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오마스는 과거
중앙극장 쪽에 자리를 잡고 있다가
정팔 등에게 쫓겨나 종로로 온 사람이다. 당연히 명동보다는 동대문 쪽에 호감을 갖고 있었다. 유지광의 새로운 주먹사단결합은 예상외로 상당한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그랬다. 자유당의 억지 개헌안 이후 민심은 극도로 나빠졌다. 비록 힘으로 밀어부쳐 사사오입이란 개헌안을 통과시켰지만 그것은 오히려 자유당을 궁지에 모는 원인이 되었다. 이승만의 독재를 규탄하며 모인 호헌동지회는 곳곳에서 연일 규탄대회를 열었다. 그리고 그 장소마다 동대문 주먹들의 방해가 늘 뒤따랐다. 그리고 그럴 수록 부통령에 당선되려는 이기붕의 야망은 점점 더 현실에서 멀어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자유당 내에서
이갑성,
배은희 등이 자유당 창당동지회의 이름을 내걸고 이기붕을 규탄하려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러나 야당도 나름대로 고민이 있었다. 이승만과 대항을 하려면 대통령 단일 후보가 필요했는데 그렇지가 못했던 것이다. 신익희와 더불어 부산 피난 시절 이승만의 상대로 출마했던
조봉암이 얼마 후 창당되는
진보당 세력들과 함께 나섰기 때문이다.
자유당 창당동지회.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기붕의 독재에 대항했던 구 자유당 인사들의 규탄대회는 이정재와 경찰의 방해로 어이없이 깨졌다. 그런데 정치적인 의미를 떠나 우리는 여기서 최초로 맞붙었던 김두한과 이정재의 대결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날 두 사람은 결국 승부를 보지 못했다. 그들은 왜 싸우지 못했을까? 그 날 두 사람이 싸우지 못한 이유는 실로 간단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는데다가 김두한은 국회의원 신분이었고 이정재로서도 나름대로의 목적만 달성하면 되었지 굳이 승부를 걸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정재는 결과적으로 그의 뜻을 이루었다.
시라소니 이성순과 신익희. 이렇게 해서 시라소니는 뜻하지 않게 곧 야당 대통령 후보로 등록하고
선거에 나서는 신익희의 경호책임자가 된다. 그동안 호헌동지회를 발족시켜 자유당에 대항해 오던 야당계 의원들은 자유당 창당동지 간담회가 있었던 55년 7월 이후 두 달 후인
9월 18일 드디어 정식으로 민주당을 창당하고 이미 내정해 놓았던 대통령 후보로서 신익희를, 그리고 부통령 후보로서는 장면을 내세우고 본격적인 선거준비에 돌입했다. 또한 같은 야당으로서 피난정부 시절인 부산에서 이승만을 상대하여 출마했었던 조봉암 역시도 나름대로 곧 진보당으로 등록하는 진보당추진위원회를 다음 해인 56년
1월 26일 발족하여 대통령에 입후보 한다. 그리하여 대통령 출마자는 모두 세 사람으로서 삼파전을 이루게 되면서 선거전은 뜨겁게 달아오른다.
13. 111~120화
이른바
황금마차 습격사건. 삼우회의 단합대회가 열리던 그 날 동대문과 서대문, 종로의 연합세력들은 명동을 기습 공격하며 대혈전을 벌이게 된다. 명동이 관리하는 황금마차라는 유흥업소가 종로 지역에서 개업을 했다는 명분이었지만 사실은 삼우회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전면전은 앞서 본 것처럼 명동이 배수의 진을 치고 대항하여 이김으로써 삼우회는 크게 망신을 당하고 끝이 난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하여 청계천을 중심으로 한 양대 주먹세력의 갈등은 더욱 깊어져만 간다.
자유당의 정부통령 지명대회. 지금까지 두 번 연임으로 다시는 대통령에 출마할 수 없었던 이승만이 사사오입이라는 국회개헌안 억지통과로 재 추대되는 이 전당대회는 1956년
3월 3일 시공관에서 있었다. 이때 이승만의 나이는 무려 82세. 예상했던 것처럼 자유당은 대의원들의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기붕을 각각 후보로 추대했다. 그런데 이 전당대회에서 참으로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다가올 선거의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를 뽑는 대회장에 당 총재인 이승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승만 삼선출마를 요구하는 관제데모. 부산에서부터 출발하여 서울로 이어진 이 조작된 민의는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그 규모가 커졌다. 대회를 주최하는 단체들은 애국단체 연합회를 비롯하여 이정재, 임화수의 반공예술단과 상인연합회, 전국노총부인회 그리고 우마차 조합의 소달구지꾼들 까지 단체란 단체는 총 동원되었고, 이들 중 우마차 꾼들의 1인 일당은 당시 돈으로 천환씩이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른바
김희갑 구타사건. 지금도 연예가의 화젯거리로 남아있는 이 사건은 임화수를 한 때 최악의 위기 속에 몰아넣게 되는데...
관제데모. 민의를 표방한 이 조작된 데모는 처음 부산에서부터 시작해서 전국적으로 과잉충성경쟁을 벌리며 무려 27일간이나 계속됐다. 민주당에서는 이 조작된 삼선지지 데모를 통렬하게 공박했고, 다수의 언론들도 이에 동조했으나, 막상 경무대에서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 와중에서 자유당 당직자들은 연일 회의를 계속하면서 한편으로 이승만을 면담하고 끈질기게 출마를 종용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여전히 그들의 요구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른바 김희갑 구타사건. 김희갑은
함경도
강진 출신으로 많은 연예인들 가운데 그 성격이 곧고 경우가 밝기로 이름난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 강한 성격이 결국은 임화수의 비위를 긁게 되었고 병원 신세를 지는 사태로 까지 발전하게 됐던 것이다. 김희갑은 임화수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장 박성환이 그와 초등학교 동기동창이었고 검찰의 강모 부장검사도 그의 절친한 친구였다. 그것은 결코 그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또한 오래 전부터 임화수의 폭력을 눈여겨보던 각 신문사의 기자들이 이때다 싶어 일제히 들고 일어나 임화수를 규탄하기 시작한 것도 임화수에게는 불행한 일이었다. 6대 주요 일간지에서는 김희갑 폭력 사건을 무려 일주일간 대서특필, 임화수의 모든 치부를 적나라하게 파헤치기 시작했다.
드디어 이승만의 삼선출마 발표와 동시에 여야는 본격적인 선거전에 돌입했다. 당시 정부통령에 입후보했던 사람은 대통령에 조봉암, 신익희, 이승만을 비롯해서 부통령엔 이기붕, 장면, 이범석,
윤치영 등 모두가 여덟 명이나 됐다. 그리고 이 선거전은 3선 출마한 이승만의 자유당과, 통합야당의 단일후보로 추대된 신익희의 민주당, 그리고 조봉암이 이끄는 진보당의 삼파전으로 크게 갈리게 됐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 민심은 서서히 자유당의 장기집권과 이승만의 독재를 외면하면서 야당 쪽으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정보기관을 통하여 끊임없이 전국의 민심을 보고 받아온 바로 이기붕 그 자신이었다.
신익희의
돌연한 죽음...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한참 인기를 얻고 이승만을 크게 위협하며 정권 교체를 가능하게 하리라 예상했던 대통령 후보 신익희가 죽었다. 선거가 있기 10일 전인 56년
5월 5일, 광주유세차 열차편으로 당원들과 함께 내려가다가
이리에 도착할 무렵 과로가 겹친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절치부심 정권교체를 노렸던 야당으로서는 참으로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신익희의 죽음은 이기붕의 생각대로 여당인 자유당에게도 적지 않은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자체분석으로도 간신히 절반 밖에는 예상할 수 없는 당선이었는데 거기다 겹쳐진 신익희의 돌연한 죽음은 자연히 야당의 부통령 쪽으로 한꺼번에 동정표를 몰아줄 것이 뻔한 이치였던 것이다.
대구 개표소의 개표 중지 사건. 이것은 극비리에 계획된 자유당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 해 5월 17일 현재 이기붕은 장면 후보보다 8만여 표가 뒤진 채로 대구를 제외한 전국의 개표가 끝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대구 한곳에서만 무더기로 이기붕의 표가 쏟아만 져도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하겠으나 대구는 전통적인 야당도시였다… 결국 자유당이 생각해낸 최상의 방법이 개표중지에 이어 어떻게 하든 재선거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개표 중지가 됐고 재선거를 조장하기 위한 극비 계획의 최일선으로 유지광이 선택되었던 것이다.
이기붕의 부통령 낙선. 그것은 그 자신은 물론 자유당 내에서도 심각한 파문을 초래했다.현직 국회의장의 신분도 그렇거니와, 명색이 자유당 2인자인 그가 선거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은 안팎으로 그의 역량이나 권위를 의심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결국 이기붕은 당정을 쇄신한다는 명분으로 이승만의 이름을 빌려 당시 내무장관을 경기도지사 이익홍으로 갈았고 치안국장도
김종원으로 경질했으며 당직도 대폭 개편하기에 이른다.
정부통령 선거가 끝나고 연이어 시작된 시도지방의원선거. 이 선거전은 시작 벽두부터 여야가 곳곳에서 치열하게 격돌했다. 이 선거의 결과가 곧바로 계속될 국회의원 선거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건
정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더구나 자파의 부통령이 낙선된 자유당으로서는 이번을 계기로 확고한 당세 만회를 위해 갖은 편법과 불법을 총동원했으니, 경찰에선 야당 계열의 입후보자를 온갖 법의 고리에 묶어 잡아넣기가 다반사였고, 동대문의 이정재 사단은 유지광과
삼우회의 힘을 더하여 이 일에 가세. 후보자의 수속서류 탈취, 협박, 테러를 전국적으로 담당했다.
1956년 그 해 7월. 내년도 예산을 심사하던 자리에서 빚어진 시도의원선거 입후보자 방해사건의 진상을 규명하자는 야당의 공세는 여느 때와는 달리 집요하고도 치열했다. 마이동풍식의 여야설전이 끝내 해결을 보지 못하자 야당 의원들은 투쟁의 한계를 절감하며, 같은 달 27일 조병옥의 제의로 무려 62명의 야당 의원들이 가두시위에 나서게 된다. 이는 세계 헌정 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랬다. 그 무렵의 유지광은 삼우회를 운영하면서 명동을 제외한 서울의 전 지역을 흡수해가고 있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그들 위에 군림하고 있는 이정재의 주먹사단이 전국을 통일해 가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이들은 이때부터 삼우회를 화랑동지회라고 명칭을 바꾸고 지역 간의 갈등과 폭력을 스스로 해결하고 자제하면서 통일된 주먹세계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또한 수많은 조직원들을 회원 자격으로 묶으면서 회원증을 이정재의 이름으로 발급, 그 세를 과시하기에 이른다. 이때 서울은 물론 지방까지 화랑동지회 회원증을 갖지 않고는 제대로 주먹 대접을 받지 못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훗날 이 회원증은 바로
혁명 정부에 의해
이정재의 목숨을 앗아가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기도 한다. 아무튼 김두한이 온 몸을 던져 독재와 싸우던 그 시기에 그러한 일들이 거듭되고 있었다.
이른바 이정재 사단의 국회난입사건. 현역 국회의원을 상대로 벌어졌던 이 해프닝은 국회는 물론 일반에 까지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야당에서는 이 사건을 조사안건으로 공식결의 했고 여야는 치열한 공방전에 접어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왜였을까? 막상 당사자인 김두한은 조사단 결성을 반대하며 사건이 조용히 무마되도록 했다. 아마도 이정재에게 건네는 마지막 충고가 아니었을까?
화랑동지회. 유지광이 서울의 최대 주먹을 연합하여 구축한 이 조직은, 전신 삼우회라는 단체명에서 화랑동지회라는 이름으로 개칭되면서 더욱 그 규모와 세력을 확대시켰다. 또한 유지광은 이때부터 조직의 이미지 쇄신을 위해 지역사회봉사를 전담하고 이들이 무너지는 1960년대까지 동대문과 종로 일대에서는, 아침마다 주먹들이 앞장서 거리를 청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소매치기 같은 잡범들도 그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아무튼 정부통령 선거 이후 끝없는 여야 간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1956년 한해도 저물어가고 정치 테러의 핏자국으로 얼룩지는 새해가 밝아오는데...
1957년
3월 26일 이승만의 82번째 생일에 이기붕은 결국 맏아들
강석을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시키게 된다. 이날 이승만은 양아들의 술잔을 받으며 감격어린 눈물을 지었고 훗날 문교부 장관
최재유는 이강석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가, 서울대생들의 동맹휴학을 불러일으키는 촌극을 빚기도 한다. 어쨌든 이 즈음의 야당은 여권과 정부측의 이런 부드러운 분위기와는 달리 새로운 선거법 개정문제로 매우 경색되고 팽팽하게 긴장돼 있었다.
1957년
5월 25일에 있었던
장충단집회 방해 사건. 일찍이 이처럼 대규모 집회에 정치주먹이 끼어든 사건은 지금까지도 그 예를 찾아볼 수가 없다. 민주주의와 자유가 주먹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히는 이 엄청난 역사의 현장은 언뜻 보기엔 자유당과 정치주먹들의 승리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오히려 이 사건으로 인해 큰 덕을 단단히 본 쪽은 야당이었던 것이다. 김두한의 생각처럼 핍박받는 야당의 모습을 언론에 통해 본 국민들은 벌떼처럼 일어나 야당을 동정하고, 여당을 규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권력의 힘... 당시 경무대 경찰서장 곽영주의 계급은 경무관. 엄밀히 말해 치안국장이나 내무장관은 서열상 그 보다는 새까맣게 높다고 볼 수가 있었으나 직책이 문제였다. 이승만은 곽영주를 총애했고 거듭 특진을 시켜 그로 하여금 경무대 경찰서장 겸 대통령 경호책임자라는 막강한 별칭을 부여했으니, 지금으로 말하자면은 대통령 경호실장과도 같은 것이었다. 어쨌든 유지광은 같은 고향이요, 초등학교 동창인 곽영주의 압력과 자유당의 비호 아래 이틀 간의 조사를 마치고 풀려났다. 그러나 이때부터 언론은 정치면, 사회면 할 것 없이 연일 유지광에 대해 두드리기 시작했고, 결정적 증거들이 계속해 여론을 자극했던 것이다.
이른바
충정로 도끼 사건. 명동의 이화룡 부대가 동대문과 유지광의 화랑동지회를 공격했던 이 사건은 유지광을 쫓던 여론의 집중 포화를 맞으며 사회의 큰 문제로 대두됐다. 당시 명동의 주먹들은 도끼를 들고 서대문과 광화문 등지를 습격, 한밤중의 서울 거리를 무법 천지로 만들었으나, 기다리고 있던 경찰들에게 모두 진압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언론보도와는 달리 다른 지역에서는 그다지 큰 충돌이 없었다. 하지만 이 사건의 파장은 몹시 컸다. 이승만은 대노하여 담화문까지 발표하였고 그리하여 이화룡과 정팔은 중형을 선고받으면서 그들의 파란만장한 주먹시대를 막 내리게 된다. 그러나 훗날을 돌이켜보면 그것은 전화위복이었다. 이정재가 혁명 정부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을 때 그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정재.
1958년 다시 돌아온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 대한 이정재의 야망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는 본래 1953년도부터 국회의원의 꿈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천에서 13대째 내려온 토박이였고, 김두한의 국회의원 당선을 보면서 더욱 그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당시
이천군에는 자연부락이 296개나 있었다. 이정재의 선거참모들은 이들 부락을 직접 파고들었고 부락마다 이정재 사람이라는 직책이 별도로 선정되어 마을의 대소사와 애로사항을 이정재에 보고하면서 어떤 일이든 즉각 해결해주곤 했다. 그밖에도 6.25때 희생된 사람들을 위해 위령비를 세워주고 해마다 제사를 주도하거나 이천군의 각 학교에 재정지원은 물론, 별도의 장학금도 인색하지 않게 내놓았다. 그래서 이천에서는 이정재의 인기가 대단했고 감히 이번 선거에 경쟁 후보로 나설 상대가 없었다. 그런데 바로 이 무렵 이정재에겐 참으로 통곡할만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1958년
4월 11일 11시 40분.
이천경찰서 서장실. 이정재는 국회의원 입후보 등록 마감시간 20분을 남겨두고 결국 입후보 포기각서에 도장을 찍었다. 이 사건은 이정재에게 있어서 단순한 국회의원의 꿈만을 앗아간 것이 아니라, 사나이로서의 모든 그의 이상과 미래의 대 야망을 산산조각 내는 결과를 초래했다. 어쨌든, 이기붕은 자유당 후보로 등록을 했다. 당시 민주당에서 경쟁자로 출마했던 연윤희 후보는 중앙당에 보고도 없이 갑자기 중도에 후보 등록을 취소하고 행방불명이 되어버렸고, 이기붕은 결국
무투표로 당선되게 된다. 그런데 그 무렵 종로의 김두한에게도 정치인으로서의 일대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랬다. 김두한은 3대 의원 시절에 이승만 대통령이 추진했던 불교계의 청화운동에 개입한 적이 있었는데, 비구승 편을 든 김두한을, 종로에 본부를 두고 있던 대처승 계열의 불교계 인사들이 배척했던 것도 선거 패인이었다. 아무튼 그는 제 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의 고배를 마신다. 그리고 야인이 되었다.
조봉암의 간첩 사건. 그가 체포된 이유는 당시로서는 너무도 앞서가는 혁신적 정치사상을 가졌다는 것과 이승만에 대한 대통령 경쟁자로서의 불경죄 두 가지였다. 결국 그는 일부 야당의 묵인과 자유당의 음모 속에서 어이없게도 사형을 선고 받아 다음 해인
1959년
7월 31일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기 불과 10개월 전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11]
당시 유지광의 이 결정. 그랬다. 유지광은 이정재에 의해서 동대문사단으로 왔다. 그리고 그의 별동대로서 적지 않은 일을 감당했었다. 유지광은 이정재의 별동대 역할을 하면서 이미 일찍부터 사실상 임화수의 영향력을 인정했다고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이정재. 임화수에게 동대문사단의 전권을 넘겨준 그는 주요 측근들과 함께
북악산 자락의 오래된 낡은 주택가로 옮겨와 은둔했다. 그는 이때부터 주변의 모든 것을 다 털어 버렸고, 주변의 주택 네 채를 더하여 헐어 2층집을 짓고, 스스로 집 손질과 화초 손질 그리고 책을 읽는 것으로 나날을 소일했다. 그런데 그가 사들인 집은 앞서 말한 것처럼 흉가로 소문난 집이라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다. 과연 그 때문이었을까? 모처럼 조용히 살겠다던 그의 소원은 불과 1년을 넘기지 못하고
격심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날을 맞게 된다.
이른바 2.4 보안법 파동. 이미 총선을 통하여 민심이 떠나고 있음을 감지한 자유당은 총선이 끝나고 그 해 8월, 다가오는 대선을 유리한 고지로 이끌기 위해 새로운 보안법을 국회에서 통과시키려고 시도했고, 야당의원들은 국회에서 날밤을 새워가며 이 법안의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해
12월 24일, 자유당 정부는 마침내 수백 명의 무술경관들을 동원하여 폭력으로써 야당 의원들을 끌어내고 이 법안을 강제로 통과시킨다. 그리고 이때부터 언론을 가혹하게 탄압하고 기자와 신문사 논설위원들을 구속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서 다시 해는 바뀌어 며칠 후 1959년 새해. 야당은 보안법 날치기 통과를 허용한 후 이번에는 다가오는 대선후보 선출문제로 단결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채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 자유당은 따라서 크게 고무되고 있었다.
1960년 1월. 유지광은 임화수의 지시대로 대한 반공청년단 동대문특별단부를 발족했다. 일시적이긴 했으나 그가 모처럼 이룩했던 주먹의 천하통일은 자유당의 계략에 의해 이미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그는 다시 이정재의 몰락과 함께 어느새 동대문 사단의 제 2인자 역으로 되돌아 와있었다. 그해 2월은 부서진 유지광의 자존심만큼이나 정치적 혼란 역시 극심한 소용돌이를 거듭하고 있었고, 그리고 드디어
대선이 다가오면서 자유당의 독재가 최후를 맞는 그 서막이 서서히 시작되고 있었다. 민주당은 우여곡절 끝에 대선후보를 확정
조병옥을 대통령 후보로 그리고 장면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게 된다.
최인규. 자유당 정권의 멸망과 함께 끝내는 정권의 최종 책임을 나누어 뒤집어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비극적인 이 인물. 그가 이기붕의 눈에 띈 것은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 때 경기도 광주에서 야당의 거물 신익희와 맞붙고 부터였다고 하는데, 백면서생이 야당당수와 맞붙었다는 사실도 그랬지만 당시 신익희는 최인규에게 여러 가지로 혼이 났다고 한다. 어쨌든 정계로 불려 온 최인규는 주어진 기회를 잃지 않으려고 최대한의 충성을 다했다. 공무원의 선거개입을 공공연히 천명한 것은 물론, 급기야는 훗날
3.15 부정선거의 주역으로서 심판대에 올라 그 목숨까지 내어놓게 된다.
14. 121~124화
1960년
2월 15일. 제 4대 정부통령 선거를 꼭 한달 앞두고 발생한 조병옥 박사의 서거. 청천벽력과도 같은 이 충격적인 사건은 민주당뿐만 아니라 온 국민을 경악과 실의 속에 몰아넣었다. 민주당이 정부통령 선거전 도중에 대통령 후보를 잃어버리기는 이번이 두 번째, 지난번에 신익희 후보의 서거와 이번의 사태가 그 양상이 너무나도 똑같았다. 조병옥이 미국으로 떠난 뒤 20여일 만에 수술경과가 좋아 2월 22일 경에는 귀국할 수 있으리라던 잠시의 기대가 있었으나, 그것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절망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결국 민주당은 다시 한번 대통령 후보 없이 선거전을 치러야 하는 현실에 부딪쳤다.
조병옥의 죽음과 더불어 치러지는 이 정부통령 선거. 그중 부통령 선거에 사활을 걸었던 자유당의 횡포는 심했다. 일요일에도 선거유세를 위해 야당에서 학교 교정을 빌리려고 하면은, 관할 교육청에선 학생들을 갖은 이유를 붙여 등교시켜 연설을 못하게 했고, 대도시의
공설운동장마다 장면이 유세하는 날은 운동경기를 하거나 그 문이 닫혔다. 최인규는
경무대와 자유당 기획위원회에까지 형식적으로 불려나가 부정선거 운운하는 문책을 받았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시치미를 떼었고, 한쪽으로는 계속해 일선 경찰서장과 고급 공무원들에게 부정선거지령을 엄하게 숙지시켰다. 그리하여 드디어 선거 전날인 60년 그 해
3월 14일.
부정선거항의에 대한 마산사태. 이 민주화의 요구는 의외로 갈수록 그 규모가 커지면서 점점 걷잡을 수 없도록 거세어졌다. 경찰은 닥치는대로 데모대에 총을 난사했고 시민들을 체포해 혹독한 고문을 가해 용공분자라는 허위자백을 받아내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시민들의 데모숫자는 더욱 눈처럼 불어났고 급기야 정부 여당은 내무장관 최인규를
홍진기로 경질, 정국수습에 나섰으나 마산에선 더욱 더 시민들의 분노에 기름을 붙는 사건이 일어났으니, 이른바
김주열군 시체 인양 사건이었다.
학생들의 전국적인 데모. 이기붕의 불안한 예측은 너무나도 적중했다. 이미 마산에서 시작되어 번져가고 있던 시민학생들의 데모가, 신학기가 되면서 불섶에 기름을 붓는 격으로 격하게 타오른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계산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누구보다도 먼저 간파한 사람이 바로 이기붕 그 자신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정부에서는 내무와 법무 양 장관의 공동명의로 마산사태에 적색마수의 혐의가 있다며 엄포를 놓고, 모든 데모를 강경책으로 무마시키겠다는 방침을 발표하지만 이는 한낱 허사로 돌아갔다. 그리고 1960년 동년
4월 8일. 개학과 더불어 서울의 각 대학들은 은밀히 학생회 간부들의 회의를 열어 치밀하게 데모를 모의,
4.19 학생의거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게 된다.
데모대 습격의 엄명. 유지광의 말마따나 당시의 주먹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소용돌이의 정국 속에서 싫든 좋든 자유당과 운명을 함께 할 수밖에 없도록 길들여졌던 것이다. 그랬다. 유지광은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 명령에 따르는 척하고 관망만 하고 있었으나, 일부 다른 주먹들은 데모대의 저지를 위해 명령대로 지역마다 배치, 학생들을 습격했으니,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그 유명한
고대생 습격 사건이었다. 당시 주먹들은 동대문과 광화문, 서대문들의 연합주먹으로 요처마다 섞여서 배치되어 있었고, 사고가 난 곳은 바로 그들 중 유지광의 화랑영화사 소속
고바우와 서대문의 돼지
신정식들이 있던 천일백화점 골목.
이승만 정권 12년의 종말. 그리고 그 2인자
이기붕 일가의 집단자살. 그것은
인생무상 바로 그것이었다. 한때는
자유당 2인자로서 권세와 영화를 한손에 쥐고 흔들었던 이 일족의 비참한 죽음을 과연 누가 생각인들 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 이 비참한 죽음에는 또 다른 일설도 없지는 않다. 이기붕 일가는 자살한 것이 아니라 사살됐다는 풍문이 그것이다. 즉 당시의
경무대 경호책임자
곽영주가 하야한 대통령을 위해 국민여론을 무마시키려는 의도에서 희생의 제물로 삼았다는 설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를 확인하는 일은
현대 사가들의 많은 노력이 필요하리라 여겨질 뿐 확인할 길은 없다. 어쨌든,
제1공화국 정부와
자유당은 이렇게 끝이 났다. 그리고 이어
허정 과도정부가 들어선다.
4.19 학생의거가 났던 이 무렵, 김두한은 훗날 그의 후계자가 되는
조일환을 만난다. 조일환은 어렵고 고단했던 김두한의 말년을 유일하게 지켜주었던 사람이다. 그리고 김두한이 살아온 인생처럼 조일환 또한 그의 주먹과 조직을 오직 나랏일과 결부시켜 살아가려고 애를 쓴다. 한편 자유당에 이어 학생들의 혁명에 의해서 정부를 인계 받은 허정 과도정부는, 국회의장을 새로 뽑고 3.15 부정선거를 무효화 시켰으며
내각책임제를 국회에 통과시키고
부통령제를 폐지한다. 그리고 부정부패와 부정선거에 개입했던 부패한 권력자들과 주먹들을 일제히 검거, 구속하기 시작한다.
4.19가 나던 1960년 그해 그 달인
4월 28일. 허정 과도정부에 의해 이정재를 비롯한 전국적인 주먹조직 검거령이 내려졌다. 허정 과도정부에 이어서 출범한
제2공화국은 제대로 국정수행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자고 나면 계속되는 갖가지 시위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리하여 해가 바뀌고 그해
5월 16일. 드디어 보다 못한 군인들이 다시 군사행동을 일으켰다. 이른바
5.16 쿠데타가 그것이다.
군사혁명재판. 지금까지의 모든 법적결과는 무시되고 다시 시작되는 군사재판. 헌법에는
일사부재리의 원칙이라는 것이 있다. 즉, 한 번 심판을 받으면 두 번은 받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혁명 정부는 이를 일소에 부쳤다. 그리고 과거에 관계가 되어 있는 모든 범법자들을 다시금 군사 법정에 세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허정 과도정부에서 한번, 다시 민주당의 장면 내각에서 또 한 번, 그리고 군사혁명재판에서 또 한 번, 무려 세 번이나 새로운 재판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이정재. 처음 일반 법정에서 8개월을 언도받고 일시 가출옥했던 그는, 다시 민주당 정부에서 조사를 받고 10년을 받았다가 다시 혁명 재판부에 인계됐다. 하지만 본인은 물론 사람들은 그의 죄가가 더 이상 확대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또 다시 한 번 화랑동지회 사건으로 최악의 국면을 맞게 된다.
이정재. 한 시절 김두한의 뒤를 이어 주먹세계를 호령했던 그는 이렇게 허망하게 간다. 그의 마지막 모습은 의외로 옛날 오야붕답게, 침착했고 담담했다고 한다. 그는 사형직전 마지막 남기는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정재: 내가 키우다시피 한 사람들 몇몇이, 배은망덕하게도 터무니없는 증언으로 날 무고했다고 들었습니다. 섭섭한 일이지만, 그들도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을 거예요. 엎질러진 물은 주워담을 수 없는 법. 모두들 자식들이 있는 몸들이니, 이 일로 인해 아들대에 가서 절대로 원수가 되어서 안 된다는 게 내 마지막 바램입니다.)
그때가 1961년 10월 19일의 일이었다. 그리고…
(이정재: 내가 키우다시피 한 사람들 몇몇이, 배은망덕하게도 터무니없는 증언으로 날 무고했다고 들었습니다. 섭섭한 일이지만, 그들도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을 거예요. 엎질러진 물은 주워담을 수 없는 법. 모두들 자식들이 있는 몸들이니, 이 일로 인해 아들대에 가서 절대로 원수가 되어서 안 된다는 게 내 마지막 바램입니다.)
그때가 1961년 10월 19일의 일이었다. 그리고…
임화수… 그는 비록 배운 것이 적었고 주먹을 잘 휘두르기는 했으나, 가정에서는 따뜻한 가장이었고, 이름난 효자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또한 유지광의 자서전에 표현된 것 처럼, 이정재가 과연 임화수의 증언 때문에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돼 죽게 되었는지도 한번 더 생각해 볼 일이다. 어쨌든 그는,
우리나라의 영화 산업을 결정적으로 발전시킨 장본인이었다. 그 어려운 때에 그는 무려 20편에 가까운 영화를 제작했고, 정부를 움직여 상당 부분의 불리한 관련 법들을 고친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날, 다섯 사형수[12]들은 마지막 가족 면회를 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한 사람 씩 형장으로 향했다.
유지광의 감형.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확정 판결을 받은 사형수 중 실제 집행 과정에서 그 일부를 감형해 주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왜 유지광이 포함됐는지는 알 수가 없다.[13][14] 어쨌든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 극적으로 살아났다.[15]
건국훈장. 군사혁명정부가 그동안 자유당 정부가 내홍에 시달리며 정립하지 못했던
국가유공자들에 대한 예우의 자리를 마련한데서 비롯된 훈장이다. 당시 박정희 의장은 무엇보다도 나라의 정신을 올바르게 세우는데 선조들의 항일구국운동이 보다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낸다. 그리고 집권 2년째인
1963년
삼일절 행사에서 무려 205명에게 세 등급으로 나누어 훈장을 수여하게 된다. 이 중 김두한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1등급에 해당하는 대한민국장 중장을 받게 되는 것이다.
김두한이 모처럼 시라소니를 애국단 조직에 참여시키려는 계획은 일단 물거품이 됐다. 그리고 두 번의 거듭된 낙선 끝에 재기하려던 그의 모처럼의 노력도 순탄하게 풀려나가지 않았다.
61년에 쿠데타를 일으켰던
군사정부는 63년
공화당 정부가 되었고
박정희 의장은 그 해 전역하여
선거에서 이겨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64년, 박정희가 강렬하게 밀어붙였던
한일회담은 그 반대 분위기가 극에 다다라,
서울의 전 대학이 격렬한 시위에 나섰고, 드디어는 비상계엄령이 선포되면서 군인들이 대학에 진주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런 군부독재에 저항하면서 필봉을 든 조선일보를 비롯한 비판지들이 탄압을 받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서 당시 야당인
민중당 의원들이 무더기로 의원직을 내던진 것은 바로 그 다음 해, 1965년의 일이었다. 그리고 김두한은 또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 서서히 야인으로서,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점차 멀어져가고 있었다.
이때가 6대 국회였다. 김두한은 3대 국회에서 당선되었다가 4대에서 낙선을 했다. 그리고 다시
홍성으로 선거구를 옮겨서 2번 낙선했고, 다시 종로로 와서 대통령이 되어 국회의원직을 내놓은
윤보선의 지역구 보궐에서도 다시 또 낙방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야심차게 추진하던 애국단 조직도 허망하게 물거품이 되고 나서 의욕을 잃고 있었다.
김두한. 그는
이찬오들의 도움을 입고 제 6대 국회
용산 보궐 선거에
한독당 후보로서 등록, 압도적으로 재선된다. 그 때 그의 나이가 마흔 여덟이였다. 이때 4.19 학생혁명의 주도 멤버 중 한 사람이었던 이찬오는 채원기와 더불어 보좌관과 비서로서 각각 임용되어 두한을 보좌한다. 하지만 김두한이 국회에 등원하고 바로 얼마 후, 뜻밖의 시련이 다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용산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직후,
한독당 내란 음모 사건에 연루돼
중앙정보부에 불려간 김두한이, 그들에게 굴복하지 않고 심한 고문을 받고 있을 때, 국회에서는
조윤형 의원 발의 아래 김두한 석방 결의안이 116표중 106표의 찬성으로 가결됐다. 그리고 김두한은 석방된다.
김두한은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고 나오면서 잠시 국회와 가까운
신문로 빈민가에 안착을 한다. 그리고 국회의원으로서 한동안 아주 바쁘게 살았다. 그는 국회에서 건설분과 위원회에 소속돼 있었다.
1966년 한강이 범람해서 용산에 많은 이재민이 발생했을 때, 누구보다도 현장에 먼저 나가 앞장서서 그 일을 해결했다.
서울시장을 만나
봉천동에 터를 마련해서 많은 세대를 이주 시키기도 했고, 또 다른 변두리
판자촌 철거 문제와 갈등이 발생할 때마다 김두한의 얼굴이 보였다. 또한 가난한 옛 부하들을 격의 없이 수시로 만나 부족한 그의 용돈을 다 털어 주기를 옛날처럼 했고, 그들이 먹고 살 터젼을 마련해 주기 위해 노력도 했다. 하지만 부하들에 관한 일 만큼은 그의 역량으로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 와중에서 드디어 그의 국회의원 생활을 마감하는
마지막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두한은 오물 사건에서 병보석으로 석방된 이후,
청와대에서
박정희를 만났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박정희는 김두한이
다시는 정치를 하지 않는다는 다짐을 받고, 당시
서울시장인
김현옥에게 도와줄 것을 지시했으며, 김현옥 시장은 김두한에게
정릉유원지 개발권을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업에 관한 한 문외한이었던 김두한은 사기꾼들에게 걸려 그 개발권을 빼앗겼고, 다시 광산업에도 손을 댔었지만 그마저도 실패하여 여관을 전전하는 신세가 된다. 그리고
그의 병은 점점 더 깊어져 갔다. 이때, 이 불우한 말년의 김두한을 끝까지 수렴해 준 사람이 바로
조일환이다.
1972년
11월 21일,
김두한은 오랜 지병[16]이었던
고혈압으로 쓰러졌다. 향년 55세였고,
박정희 정권의 독재가 또 한번의 정권 연장을 위해
유신헌법을 통과한 지 한 달만이었다. 많은 인파가 몰린 그의 장례 행렬에는 한 무리의 어린아이들도 그 뒤를 잇고 있었다. 백야
김좌진 장군의 국가유공자 연금 전액을 매달 삼애
고아원이라는 곳에 기탁한 이유였다. 김두한. 그는
일제 말 우리가 주권을 잃었던 식민지 시절부터
해방 이후 좌우익의 대립에 이어서
자유당 부패정치와
5.16 박정희 정권에 이르기까지 그의 전생에 온 몸을 다 던져 불의와 싸웠다.
( 최동열: 난 오랫동안 자네를 지켜봐 온 사람일세. 자네는 자네답게 살았어. 조선의 주먹 황제답게 말이야. 늘 야인이였지만 용감하고 멋있게 살았어. 나름대로 자네의 역사를 가지고 자네의 시대를 치열하고 열심히 살았다는 얘기야. 뭐랄까...? 야인시대라고나 할까?)
야인시대! 그렇다. 그것은 바로 그가 몸 바쳐 살아왔던 이 나라 격동기의 또 다른 역사의 한 장이었다.
나레이션의 마지막 대사
( 최동열: 난 오랫동안 자네를 지켜봐 온 사람일세. 자네는 자네답게 살았어. 조선의 주먹 황제답게 말이야. 늘 야인이였지만 용감하고 멋있게 살았어. 나름대로 자네의 역사를 가지고 자네의 시대를 치열하고 열심히 살았다는 얘기야. 뭐랄까...? 야인시대라고나 할까?)
야인시대! 그렇다. 그것은 바로 그가 몸 바쳐 살아왔던 이 나라 격동기의 또 다른 역사의 한 장이었다.
나레이션의 마지막 대사
[1]
본명은 박상실.
[2]
후에 이 사건은 52화에서 조선청년전위대 창단식에서 전위대장이 된 김두한에게 진실을 말하는
박용직에게 언급되고, 이 사건은 김두한이 공산당과 손절하는 계기가 된다.
[3]
최동열은 드라마의 가상 인물로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다. 때문에 인터넷과 정보화가 활발하게 발전하기 전인 야인시대 방영 당시에는 최동열이 실존인물이라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으며, 당시 최동열의 실제 사진이라며 박헌영의 생전 사진이 최동열로 떠돈적도 있었다.
[4]
정확히는 송도명이 아니라 송도암이다.
[5]
참고로 실제 염동진은 김두한의 증언으로는 중국 공산당에 의해 잃은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실제 염동진은 가족이 최소한 1945년까지는 있었다. 여기서도 말하는 현준혁 암살 사건으로 염동진이 잡혀가지만 그의 아내가 탄원해서 풀려났기 때문. 다만 야인시대에서처럼 이 사건을 계기로 월남한 건 맞다.
[6]
실제로 이북 지역에서 스라소니는 부정적인 의미로 자주 표현된다. 실제 인물인 이성순의 별칭인 시라소니 또한 이런 부정적인 의미로 지어졌다고 한다.
[7]
물론 실제 심영은 고환이 아닌 하복부를 피격 당했다.
[8]
심영과 신불출은 실제로 월북 전에 김두한에게 습격받은 바가 있지만 김원봉은 김두한과는 인연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심영이 가장 나이 지긋한 이미지로 나오는데 실제로는 김원봉이 1898년생, 신불출이 1905년생, 심영이 1910년생으로 심영이 가장 젊었고 해방 당시 심영은 35세에 불과했다. 김두한과 마찬가지로 배우가 너무 나이 많은 쪽으로 캐스팅된 셈.
[9]
[10]
실제로 이화룡의 누이 이성룡이 서울에서 유명한 요정인 신 명월관과 당시 명동에 있던 대규모 고급 중화식당인 청해루를 운영했으며 요정과 중화식당 운영으로 벌어들이는 돈 중 일부를 이화룡한테 원조해주었기 때문에 타 건달조직에 비해 경제적으로 여유로웠다고 한다.
[11]
그로부터 52년 후 2011년 1월
대한민국 대법원은 이 사건에 대해서 조봉암의 유족들의 재심 요청을 받았고 결국 대법원 재판관 13명의 만장일치로 무죄을 선고받았다. 그로부터 10개월 후 동년 12월 국가는 조봉암의 유족들에게 위자료을 지급하라고 판결을 내렸다.
[12]
임화수,
곽영주,
유지광,
신정식,
최인규.
[13]
실제로는 죄에 비해 형이 과하다는 여론 덕에 죄가 큰 일부만 집행하고 나머지는 감형 해줬기 때문이다.
[14]
실제로 당시 같은 사형수였던
홍진기 또한 사형에서 사면되었다.
[15]
같은 작가가 쓴 무풍지대에서는 유지광의 이후 행적이 나오지만 여기서는 생략되고 유지광은 그대로 극에서 퇴장한다.
[16]
몬더그린으로 인해
오렌지병이라고 들리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