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8 04:54:30

김정수(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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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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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삼성 라이온즈의 전후기 통합우승으로 인한 한국시리즈 미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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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유 기록
한국시리즈 통산 최다승 7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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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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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직 폐지[1]
김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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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찬 안치홍[5] 양현종 나지완 김선빈 나성범
[1]: 김일권 이후 장기간 주장직 폐지 출처
[2]: 이종범의 부진으로 인한 주장 교체
[3]: 마무리 캠프 직전 조범현 감독의 지시로 인한 주장 교체
[4]: 스프링 캠프 후 주장 교체
[5]: 2019년 5월 15일, 김주찬의 재활과 부진으로 인한 주장 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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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 [[해태 타이거즈|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47번}}}
결번 김정수
(1986~1999)
손혁
(2000~2001)
SK 와이번스 등번호 67번
팀 창단 김정수
(2000)
김장준
(2001~2004)
{{{#ffffff [[한화 이글스|한화 이글스]] 등번호 47번}}}
이성갑
(1999~2000)
김정수
(2001~2003.6.9.)
권준헌
(2004~2008)
SK 와이번스 등번호 46번
곽철병
(2002)
김정수
(2003.6.10.~2003)
박정권
(2004)
{{{#fff [[KIA 타이거즈|KIA 타이거즈]] 등번호 79번}}}
김성한
(1996~2000)
김정수
(2006~2007)
김태룡
(2008~2018)
KIA 타이거즈 등번호 80번
한희민
(2004~2007)
김정수
(2010~2011)
다카하시
(2012)
KIA 타이거즈 등번호 86번
신용균
(2010~2012)
김정수
(2013~2019)
박지훈
(2021)
}}} ||
}}} ||
파일:tigers_co_kr_20171016_133924.jpg
김정수
金正洙 | Kim Jeongsoo
출생 1962년 7월 24일 ([age(1962-07-24)]세)
전라남도 화순군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광주남초등학교 (졸업)
전남중학교 (졸업)
광주진흥고등학교 (졸업 / 8회)
연세대학교 교육과학대학 (체육교육학 / 학사)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우타
프로 입단 1986년 1차 지명 ( 해태)
소속팀 해태 타이거즈 (1986~1999)
SK 와이번스 (2000)
한화 이글스 (2001~2003)
SK 와이번스 (2003)
지도자 한화 이글스 2군 투수코치 (2004~2005)
KIA 타이거즈 1군 투수코치 (2006~2007)
KIA 타이거즈 2군 투수코치 (2010)[1]
KIA 타이거즈 1군 불펜코치 (2010)[2]
KIA 타이거즈 2군 투수코치 (2011, 2013)[3]
KIA 타이거즈 1군 투수코치 (2013~2014)[4]
KIA 타이거즈 3군 투수코치 (2014~2016)[5]
KIA 타이거즈 3군 재활코치 (2017~2018)
KIA 타이거즈 재활군 코치 (2019)
프런트 KIA 타이거즈 스카우트 (2008~2009)
KIA 타이거즈 전력분석원 (2012)
외부링크 #

1. 개요2. 선수 경력
2.1. 아마야구 시절2.2. 해태 타이거즈 시절2.3. 해태 타이거즈를 떠난 이후
3. 지도자 경력4. 근황5. 연도별 성적6. 여담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해태 타이거즈, SK 와이번스, 한화 이글스의 좌완투수이자 前 KIA 타이거즈의 투수코치.

한국시리즈 최다 우승 공동 1위(8회) 선수[6]이자 한국시리즈 7승 3패 1세이브의 기록으로 한국시리즈 역대 최다승 기록, 신인 최초 한국시리즈 MVP 기록(1986년) 등 대단한 기록을 보유한 야구인이다. '가을 까치'란 별명을 갖고 있다.

2. 선수 경력

2.1. 아마야구 시절

1962년 전남 화순군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시절 화순에서 광주로 이사간 후 광주남초로 전학, 4학년 때에 야구부에 입단하면서 오른손잡이인데도 왼손으로 공을 던지는 ' 좌투우타' 스타일이 되었다. 이후 전남중학교를 거쳐 목포상업고등학교로 진학했으나 팀의 해체로 광주진흥고등학교 유니폼을 입게 됐다. 무명이었던 그가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는 1981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였다. 1회전에서 박노준, 김건우, 나성국 등이 포진된 당대 최강 선린상업고등학교와 대결하여 2-0 승리를 거뒀다. 김정수가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동대문야구장에 가니 사람들이 진흥고가 어디요? 실업계 고등학교인가? 묻는 사람들도 있었고 선린상고에게 승리를 거둔 그 다음날 "내가 내가 아니었다"라고 술회하였다. 1981년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는 결승전까지 내달렸으나 선린상고와 함께 고교야구를 양분하던 경북고에 6-0으로 패하며 준우승을 차지했다.[7]

연세대학교 야구부[8]에 진학했으나 신입생 때 방황하며 팀을 무단이탈하여 광주로 돌아왔고 감독이 김정수의 부친을 어렵게 설득한 끝에 야구부로 돌아왔다. 선배들의 매질은 덤이었다.

2.2. 해태 타이거즈 시절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19991219000012364.jpg
(출처 : 포토로)

정통파가 아닌 쓰리쿼터에 가까운 스타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당시로선 보기 드문 좌완 강속구 투수였지만, 그에 반비례하여 나쁜 제구력을 가져 볼넷 몸에 맞는 공을 많이 내주었다. 그러나 '강철심장'을 가진 담력 센 투수로서의 특징이 KBO 한국시리즈에서는 큰 빛을 발하였다. 이혜천 + 유원상

1986년 한국시리즈 1차전 당시, 우승의 주역이 될 거라고 많은 이들이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선동열이 투런 및 밀어내기로 9이닝 동안 3실점씩이나 하며[9] 부진한 모습을 보이고 강판된 후 계투로 올라와 2이닝 4삼진 2볼넷 1안타로 틀어막고 승리 투수가 되었다. 그 다음 3차전에서도 기존의 해태 에이스 이상윤이 1이닝을 못 넘기고 난타당하는 등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등판하여 5이닝 2실점으로 틀어막고 구원승, 5차전에는 선발로 등판하여 당시 상대 팀 삼성 라이온즈의 에이스였던 김시진과의 맞대결에서 5이닝 2실점으로 판정승을 거두었다. 그 해 팀의 한국시리즈 4승 중 혼자 3승을 기록하면서 신인 최초로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하였다.86년 한국시리즈에 또 다른 최동원이 있었다 이후에도 한국시리즈에서 맹활약을 펼쳐 한국시리즈 최다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시리즈에서는 거의 저승사자급으로 펄펄 날아다녔지만 정규 시즌에서는 그렇게 두드러지게 잘하던 선수가 아니었다. 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나쁜 제구력 덕이었다고도 한다.[10] 하지만 김정수가 가을의 사나이가 된 가장 큰 원인은 부상 때문이다. 데뷔 초창기에는 매년 시즌 중에 부상을 당한 덕분에[11] 정규시즌 중에는 크게 활약을 하지 못하다가[12][13] 가을쯤 되면 부상이 완치가 되고 비로소 제 컨디션을 찾는 패턴을 반복하다보니 정규시즌의 성적에 비해서 한국시리즈의 성적이 특출나게 좋아보이는 효과를 가져왔고 이 때문에 여름까지는 안 보이다가 가을만 되면 돌아와서 맹활약하는 가을까치의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타격 기계"로 유명한 장효조 선수에게 꽤 강한 편이었다.

1991년에는 정규시즌 중 빈볼을 던져 퇴장당한 사건이 있었다. 사건은 7월 14일 대구 원정경기에서 삼성이 좌투수용 오더와 우투수용 오더를 준비해 놓고 배대웅 코치가 해태 선발투수로 선동열이 등판한다는 사실을 슬쩍 확인한 후 우투수용 오더를 제출하려다 해태 김봉연 코치에게 들켜 난리가 났는데 해태 측에서 경기를 못 하겠다고 항의하는 걸 삼성 측에서 좌투수용 오더를 대신 제출하는 것으로 겨우 무마해서 경기는 진행되었는데 이 경기에서 선동열이 난타당해 1:7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구원등판 후 류중일 이만수에게 연속 빈볼을 던져 퇴장, 이후 10경기 출장정지와 제재금 50만원의 징계를 받았다.

1996년에는 선동열이 일본에 진출하면서 공석이 된 마무리 자리를 어쩔 수 없이 맡았는데 쓰리쿼터에서 더욱 팔 각도를 내린 것이 주효하여 호성적을 기록했다.[14]

2.3. 해태 타이거즈를 떠난 이후

파일:rlawjdtndptmzldl.jpg 파일:20020703232455602.jpg 파일:kp1_2031021u1186.jpg
SK 와이번스 1기 시절 한화 이글스 시절 SK 와이번스 2기 시절
그러나 이러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팀에서는 다소 푸대접을 받았다. 패넌트레이스에서는 별로 활약하지 못한 탓도 있고, 또 해태가 그다지 선수들에게 돈을 후하게 쓰던 팀이 아니었기도 했고..[15][16] 홀대에 대해서는 김응용 감독이 좌완을 좋아했다고 하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정작 김응용 감독은 끝끝내 제구가 교정되지 않은 김정수를 인터뷰에서 많이 깠다. 심지어는 "발로 던져도 내가 더 잘 던지겠다"고까지.. 결정적으로, 김응용 감독이 좋아하는 타입은 그냥 좌완이 아니라 권혁, 강영식같은 덩치 좋고 볼 빠른 좌완이었다.[17][18] 프로 데뷔 후 첫 FA 기회였던 2000년 시즌 전 FA 선언 때 해태 구단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고 결국 옛 쌍방울 선수단을 이어받은 신생팀 SK 와이번스로 원치 않게 사인 앤드 트레이드로 이적해야 했다. 후술하겠지만 FA 선수임에도 연봉이 삭감되었다.

하지만, 당시 사령탑이었던 강병철 감독은 젊은 선수들을 선호하는 편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자신의 기량 하락과 겹쳐 예전의 기량을 보여 주지 못한 채 2000년 시즌 후 1년만에 방출되었다. 원포인트 릴리프로 뛰었음에도 평균자책점이 7점대로 상승했으니 부활이 어렵다고 판단되었기 때문.

SK에서 방출된 후 테스트를 통해 한화 이글스에 입단하여 옛 해태 시절 동료 송유석과 재회했다. 당시 사령탑인 이광환 감독은 김정수 등의 베테랑 선수들을 등용하는 편이라 기회를 꽤 받았다. 한화에서 뛰던 2001년~2002년에는 불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2년 연속 10홀드 이상을 기록하며 리그 최고령 선수로 뛰었고, 좌타자 전문 원 포인트 릴리프로 활약해줬다.[19]

그러나, 2003년 시즌을 앞두고 젊은 선수들을 선호하는 유승안 감독이 부임하면서 설 자리를 잃었다. 이대로 은퇴하나 싶다가 2003년 6월 9일 현금 트레이드 SK 와이번스로 돌아와 그해 리그 최고령 선수로 활동하며[20] 경기에 출장할 때마다 최고령 등판 기록을 세웠고,[21] 시즌 후반 8홀드를 올리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정규시즌 종료 후, 2003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만 41세 2개월 23일의 나이로 구원 등판하며 KBO 한국시리즈 최고령 출장기록을 세웠다.[22] 다만, 4차전 구원등판 상황에서 첫 타자인 전준호의 머리를 맞추고 칼같이 퇴장당한 것은 옥에 티로 남았다. 빈볼은 아니었지만 그 나이까지 여전했던 제구력 불안 때문에(…) 1996년 최해식에 이어 '통산 2번째 KBO 한국시리즈 퇴장 기록'을 남기고 말았다. 마지막 시즌에 출장한 한국시리즈에서 소속팀 SK가 준우승에 그치면서 최고령 우승선수 및 선수 시절 한국시리즈 진출 시 전부 우승이라는 대기록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당시 시점에서 포스트시즌 통산 최다경기 출장과(31경기, 한국시리즈만 계산했을 시 23경기) 최고령 출장선수(41세 2개월 27일) 기록에 이름을 남기고 은퇴할 수 있었다.[23]

2003년 10월 28일부로 SK 와이번스 보류선수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3. 지도자 경력

SK에서 방출된지 이틀만에, 한화 이글스에서 2군 투수코치를 제의받고 바로 한화 코치를 맡으면서 은퇴했고, 지도자 경력을 쌓았다. 이후 서정환 감독대행이 정식 감독으로 선임되는 과정에서 2006년부터 친정 팀 KIA 타이거즈의 코치로 영입되었다. 도중에 감독이 교체되면서 스카우트 및 프런트로도 활동하기도 했다. 2010 시즌 데스기모토가 성적부진으로 2군으로 내려가면서 1군으로 콜업, 기존에 이강철 코치가 맡았던 1군 불펜코치를 맡았다.

2011 시즌 이후 전력분석 팀장으로 보직을 옮겨 잠시 지도자 생활을 내려놓았으나, 2013 시즌에 앞서 다카하시 투수코치가 해임되고 이강철 투수코치가 넥센 히어로즈의 수석코치로 이동하여 투수코치 자리에 공석이 생기면서 다시 2군 투수코치로 복귀하였다. 그리고 2013년 8월 17일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1군으로 올라왔다.

전반적으로 코치 경력이 15년 가량 되었지만, 딱히 키워낸 선수도 없고 1군 코치로 있으면서 투수 교체라던가 여러가지로 실수가 많아서 코치로서의 능력이 높게 평가받는 편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서정환 선동열시기의 투수코치였는데 그 시기 성적은 하위권을 맴돌기도 했을 정도. 물론 중간에 프런트로 전보된 이력도 있다보니 이건열, 백인호와 더불어 계속 한 팀에서 근속하는 철밥통 코치 이미지가 강하게 씌워진 감도 없지 않다.

2014년 이후로는 쭉 재활군에 있었기 때문에 존재감이 많이 희석되었다.

4. 근황

2022년 4월 1일에 선운지구에 김정수 피칭아카데미를 개업했다. 사회인 야구 지도를 주로 하며, 재활코치 경력 덕분에 선수 재활도 담당한다고 한다.

5.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사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6 해태 41
(3위)
125⅔ 9 6 5
(5위)
- 2.65 93 5 93 92 53 37 1.45
1987 23 80⅓ 6 7 0 - 4.37 59 4 61 78 48 39 1.44
1988 11 54⅓ 3 2 0 - 2.48 45 2 24 23 19 15 1.25
1989 9 54 2 2 0 - 2.67 47 0 26 39 18 16 1.32
1990 26 104⅓ 6 5 0 - 2.93 84 5 69 50 46 34 1.38
1991 22 88⅔ 6 3 2 - 2.54 59 4 37 52 25 25 1.04
1992 33 165⅓ 14 8 1 - 3.16 144 11 98 126 68 58 1.34
1993 30 127⅔ 10 8 1 - 2.75 102 11 70 96 47 39 1.19
1994 28 141 9 10 0 - 3.38 120 9 58 126 63 53 1.18
1995 26 108⅔ 7 11 0 - 3.89 90 10 49 94 49 47 1.20
1996 40 76 6 3 18
(4위)
- 2.01 43 5 40 97 18 17 0.99
1997 41 80⅔ 5 3 4 - 4.02 71 11 41 79 39 36 1.28
1998 37 39⅓ 1 0 0 - 3.43 26 5 18 36 15 15 1.09
1999 48 35⅓ 4 1 1 - 4.58 30 5 18 43 19 18 1.22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사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0 SK 50 31 1 4 0 3 7.55 40 5 17 23 26 26 1.74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사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1 한화 52 43⅔ 2 2 1 10
(3위)
3.71 36 6 24 45 24 18 1.26
2002 47 25 1 2 1 12
(3위)
3.24 21 3 12 29 10 9 1.16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사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3 SK 36 13 0 0 0 8 4.15 18 0 9 3 6 6 1.85
KBO 통산
(18시즌)
600 1394 92 77 34 33 3.28 1128 101 764 1131 593 508 1.27

6. 여담

  • 1962년생이지만 1년 유급해서 1963년생들과 같이 학교를 다녔다. 그래서 빠른 63년생인 선동열이 나이는 더 어리지만 형 소리를 듣는다고.
  • 역대 최저금액 FA 선수이다. 2000년 원소속팀 해태 타이거즈와 1년 총액 5천만원에 계약을 체결하였고, 사인과 함께 SK 와이번스로 트레이드 되었다. 김정수의 99시즌 연봉이 7,500만원이었는데 그것보다도 적은 금액이었다. 그러나 39살의 고령인데다가 좌완 원포인트로 나와서 거둔 성적이 평균자책점 4점대였기 때문에[26] FA 미아가 되었고, 결국 연봉 33% 삭감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27]
  • 대표적인 별명이 까치인데 국산 야구만화 중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인 공포의 외인구단의 주인공 설까치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프로 입단 당시 김정수의 헤어스타일이 억센 더벅머리였고 반항심이 깊은 설까치처럼 김정수도 성격이 굽힐줄 모르고 약간의 반항적인 그 모습이 만화 속 설까치의 모습과 비슷했던 것. 87년인가 당시 스포츠 서울 기자가 공포의 외인구단 주인공인 설까치와 이미지가 비슷하다 말하고 그 뒤 부터 기사에 무등산 까치로 올려지게 되었다.
  • 그의 강속구와 들쭉날쭉한 제구력은 좌완 스리쿼터라는 투구폼과 합쳐저서 좌타자들에겐 그야말로 저승사자나 다름 없었는데, 살짝만 벗어나도 몸에 맞을 것 같아서 적극적으로 나가기가 어렵다고.[28] 양준혁이 꼽은 현역시절 상대하기 어려웠던 투수로 구대성, 이혜천과 함께 자주 언급되곤 한다.
  • 김정수가 선수 생활을 하던 당시 보기 드문 강속구와 본인의 나쁜 제구력을 이용해 오히려 타자를 견제하던 모습과 그 당시 해태의 강한 이미지 때문에 선수들 사이에서 무서운 선배로 통했다고 한다. 당시의 일화 중 하나로, 장정석 해설위원이 선수 시절 타석에 있을 때 자꾸 등 뒤로 공이 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기습 번트를 대려고 시도하자 마운드에서 타석으로 내려와 "워메~ 확!" 하고 마운드로 돌아갔다고(...) 그걸 듣고 있던 포수[29]는 "넌 이제 X졌다잉~" 하는건 덤 결국 배트도 제대로 내지 못 했다고.[30]
  • 2017년 한국시리즈 1차전의 시구자였던 문재인 대통령에게 시구 지도를 했다. 평소 야구에 관심이 많았던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수 코치를 반갑게 맞으며 "한국시리즈 최다승 투수 아니시냐"고 하자 "존경합니다"라고 화답한 것은 덤.
  • 천하무적야구단에서 2010 올스타 경기때 삼진을 당해 퓨처스 레전드 코치들이 섹시댄스 벌칙을 받게되는 굴욕을 맛봤다.
  • 2021년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하였다. 연세대 2년 선배인 김성래에게 무지 약했으며 고의사구로 1루로 보내고 다음 타자와 승부하자고 포수 최해식에게 말했으나 특유의 약한 제구력탓에 데드볼을 내줘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났고 그 이후 김성래가 김정수에게 약해졌다고 한다.
  • 노래에도 일가견이 있으며 한국시리즈 우승 피로연 당시 부른 노래는 <꽃순이를 아시나요>라고 한다.[31]
  •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장채근이 술회하길 선동열, 이강철, 김정수는 모두 체조선수처럼 유연했다고 한다. 다만 몸이 유연한 것은 후천적. 김정수는 “춥고 배고픈 어린 시절 산나물과 채소가 주식이었지. 소고기나 닭고기는 생일에 한번 볼까 말까 였고. 하지만 결국 그런 건강식이 내 몸을 유연한 알칼리성으로 만들었나봐."라고 말했으며 프로데뷔 이후 육류 섭취를 하다 보니 몸무게도 90㎏까지 늘었다. 근육통으로 고생했고 결국 5년 만에 옛날 식습관으로 돌아왔다. 고깃국도 국물만 먹고 술을 마실 때는 밥을 먹지 않는다. 칼로리 높은 술과 안주를 생각해서이다. 육류보다 생선과 야채로 영양보충을 했다. 만 41세에도 한국시리즈에서 자신 있는 피칭을 보인 것은 철저한 자기관리에서 비롯됐다.
  • 그러나 사생활이나 자기관리에 대해서는 논란이 좀 있는데, 그 김정수를 지도했던 해태 타이거즈의 감독 김응용이 대놓고 안타까운 선수라면서, 그놈은 술만 줄였어도 대성했다.라면서, 불펜에서는 선동열에 버금가는 공이었으나, 아침 훈련때 캐치볼을 하면 술이 덜깼는지 상대방 머리를 넘긴다며, 한탄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정말 재능이 있는 놈인데 술때문에 망친 재능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00년대 기사에서도 김정수의 별명은 두주불사로 그가 술을 끊은 것은 2001년 한화 이글스에 입단 테스트를 하면서, 애리조나 전지훈련에서 먹은 맥주 한캔이 끝이다. 라면서 뒤늦게 현역 연장을 위해 몸관리를 한 거지 이전에는 선동열, 김성한과 같은 주호 스타일에 장채근이 과거 일이니 좋게좋게 말해준거다.
  •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송유석이 밝히길 불펜포수가 모자라 송유석이 김정수의 연습투구를 받아준 적이 있는데 정말 눈 크게 뜨고 공을 받아야했다고 했다. 제구가 들쑥날쑥이어서 원바운드 공도 한 번씩 날라오고 성격과 구질이 똑같았다고 해서 웃음을 자아냈다. 최해식도 김정수가 제 맘대로 공을 던졌다고 밝히기도 했다. 김정수는 오히려 본인은 포수가 공을 못 받게끔 던지는 연습을 했고 그래야 타자들이 본인의 공을 칠 수 없는거 아니냐고 했다.
  • 중고등학교까지 몸이 무척 야위었다. 고등학교 시절 182㎝의 키에 몸무게가 고작 65㎏이었다. 그래서 별명이 ‘낙지’였다. 빼빼 마른 몸으로 흐느적거리면서 피칭을 한다고 붙은 별명. 가을바람이 조금 세게 불면 와인드업 모션에서 한 다리로 중심을 잡지 못해 좌우로 휘청거렸다. 그러나 그의 장점은 유연함과 폐활량. 81년 대표팀에 뽑혀 태릉선수촌에 입촌한 김정수는 체력측정 결과 마라톤 선수보다 폐활량이 더 좋은 것으로 나타나 심각하게 전직을 고려했다. 유연함은 골프에서도 그의 능력을 배가시켰다. 한번도 레슨을 받아본 적이 없지만 보기 플레이를 한다. TV로 선수들 스윙 모션을 몇 번 보고 따라한 것이 전부.
  • 양준혁 해태 타이거즈로 이적 후 팀에 잘 융합하지 못하고 낯을 가려서 투수 강태원 집들이에 일부러 늦게 참석하자 김정수가 '아따 준혁아 어째 인자 오냐?'라고 말했다고 한다. 양준혁이 올 때까지 해태 선수들 전원이 식사에 손을 대지 않고 있어서 양준혁이 엄청 죄송했다고 했고 서서히 팀에 녹아들기 시작하면서 본인의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냈다. 김정수는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말하길, 양준혁이 해태에 빨리 적응하는 것이 관건이었기 때문에 그런 차원에서 신경을 많이 썼다고 말했다.[32] 양준혁은 삼성에 복귀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이 해태시절 군기를 주입시킨거다. 즉 김응용 야구컬러 입히면서 김응용 수족 노릇을 했다. 이승엽이 김응용 뒷담하다가 양준혁에게 개털린게 대표적인 예시.
  • 1980년 한일고교야구대회에 출전했다가 동대문야구장에서 일본의 쿠도 키미야스가 던지는 커브를 보고 배워 본인의 주무기로 만들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공을 구도가 던졌다. 아래로 떨어지는 드롭이었다. 어떻게 하는지 유심히 지켜보고 물었다. 엄지와 중지의 독특한 스냅을 알려줬다. 이후 눈을 감고도 던질 수 있도록 연습했다. 난 한다고 마음먹으면 완벽하게 한다. 덕분에 야구를 18년이나 했다. 지금도 고맙게 여긴다."라고 말했다.
  • 당시 삼성의 최고 타자 장효조는 김정수가 선발 등판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식욕도 사라진다고 했다. 김정수는 일부러 삼성 벤치를 찾아가 '형님 나 왔소'라고 인사까지 했다. 특히 좌타자에게는 저승사자였는데 LG 김상훈과 OB 김형석은 김정수가 커브를 던지면 비명을 지르며 타석에서 벌러덩 뒤로 넘어졌다. 머리를 향해 오는 것처럼 보였던 공은 스트라이크였다. 삼성 이승엽은 김정수에게 "선배님 커브 던질 때 투심 그립으로 쥐시죠? 그렇게 던지는 사람 처음 봅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김정수는 좌타자와 경기하면 언제나 즐거웠다고 한다.
  • 삼성 전에서 1이닝 4사구를 4개나 주고도 실점하지 않았다. 4구와 사구를 준 뒤 3루수 땅볼로 원 아웃을 잡았다. 도루 실패로 투 아웃을 만들고 또 사구와 4구를 내줬다. 2사 만루를 삼진으로 끝냈다. 이런 모습을 본 김응용 감독의 머리는 정말 복잡했고 열불이 났을 터.
  • 설렁설렁한 이미지로 알려졌으나 완벽주의자에 디테일한 성격이며, 대충하는 것을 스스로 용납하지 못한다고 했다. 한화 2군 코치 시절 훈련을 시키자 어느 선수가 "코치님도 선수 때 열심히 훈련했느냐"고 대들자 "그래 나 운동 안했다. 너도 마흔살부터는 운동하지 마라"고 일갈했다.
  • 오봉옥의 술버릇을 고쳐준적이 있다. 교통사고로 징역형을 살기도 했을 정도로 술버릇이 안 좋았던 오봉옥이 회식때 심한 주정을 부리자,보다 못해 오봉옥의 바로 옆으로 술병을 던지면서 술병이 깨졌고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든 오봉옥은 결국 그 다음부터는 술주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 어째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가장 대하기 버거운 고참으로 자주 호출된다.위에 일화들만 보아도 성격 까칠하기로는 그 해태 타이거즈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으니 어찌보면 당연했는지도. 게다가 중간에 팀을 옮기는 일 없이 타이거즈에 무려 13년동안 있었던것도 원인.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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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7월 22일 [2] 7월 23일~ [3] ~8월 16일 [4] 2013년 8월 17일~2014년 6월 9일 [5] 6월 10일~ [6] 또 다른 한명은 한국시리즈 최다 경기 등판 1위(25경기)를 기록했던 배영수. 감독과 코치를 포함하면 최다 우승 1위는 감독으로서만 10개의 우승반지를 챙긴 김응용, 선수로서 그리고 지도자로서의 우승까지 포함하면 한대화 김성한도 해당된다.(9회) [7] 경북고는 1981년 대통령배 지역예선 탈락 후 선출 체육교사(!) 구수갑 선생이 임시 감독을 맡았는데, 그 해 청룡기, 황금사자기, 봉황대기, 전국체전 등 4관왕을 차지했다. [8] 82학번 한국 농구의 전설인 유재학 KBL 경기본부장, 1990년대 삼성 라이온즈 암흑기의 주전포수 김성현이 입학동기. [9] 사실 선동열이니까 9이닝 3실점이 부진하다 표현하지 한국시리즈에서 9이닝 3실점이면 그렇게 못 한건 아니며 정규리그에서도 퀄리티 스타트 플러스에 해당되기에 잘 던졌다고 평가받을 수 있는 투구내용이다. [10] 단기전 승부에서 어디로 공이 올지 모르는 상황이니 타자들이 쉽게 현혹되었다고 한다. 특히 삼성 라이온즈 장효조"김정수가 던지는 공은 내 머리로 날아올 것 같아서 쉽게 상대 못하겠다" 라며 진저리를 쳤다고 한다. 좌타 입장에선 좌투의 공은 우투의 공보다 보고 치기 힘들어서 배합을 계산해서 승부하는데 제구가 나쁘면 좌타가 계산이 불가능하다. 몸 쪽에 붙일려고 하면 좌타에게 데드볼도 나기 쉽고, 구속이 빨라서 무서울 뿐더러 특히 팔각도까지 좌완오버핸드보다 낮아서 아예 등 뒤에서부터 날아오기 때문에 더 보고 치기 힘들다. 삼성과 빙그레 LG 좌타들에겐 거의 저승사자나 다름 없었다. 차라리 정규시즌이면 한대 맞고 혹시나 부상당하더라도 운이 나쁘지 않으면 휴식해서 회복하고 수습해서 나오기라도 하겠지만 한국시리즈 같이 단기결전에서 부상을 입을 경우에는 이야기가 전혀 달라지게 된다. [11] 실제로 1987~89년의 정규시즌 성적은 아주 초라하다. [12] 그렇다고 통산 출장수가 적은 건 아니다. 2015년 현재 통산 9위. [13] 아이러니컬하게도 페넌트레이스에서 필승조로 정착한 1990년대부터는 가을야구 성적이 그리 좋지 못했다. 현대의 무명 대주자 이희성에게 기습번트 안타를 허용한 뒤 와르르 무너진 1996년 한국시리즈 2차전, 1-1 동점 상황에서 전임 이강철이 남겨놓은 주자들을 모두 분식회계해 1-10 대패의 빌미를 제공한 1997년 한국시리즈 2차전이 대표적인 예. [14] 여기에는 다른 이야기가 하나 있다. 원래 선동열의 뒤를 이를 차기 마무리 후보는 임창용이 유력했다. 그러나 선동열은 임창용을 거르고 김정수를 직접 지목했고, 그로 인해 김정수가 마무리 보직을 맡게 됐다. 꼭 이것 때문은 아니지만 임창용 선동열의 반목을 얘기할 때 꼭 나오는 에피소드이긴 한데.... 실상은 후대에 이르러 누군가가 선동열을 까기 위해 날조한 에피소드이다. 해당 에피소드애서 선동열이 임창용을 거르고 김정수를 지목한 근거로 제시하는 것이 당시 포수였던 최해식이 팀 내에서 가장 좋은 패스트볼을 던지는게 임창용이었다는 인터뷰 때문에 열폭해서였다고 하는데, 실상 이 인터뷰는 최해식이 은퇴한 후 한참 지나서 회고 형식으로 한 것이라서 당시의 선동열이 그걸 듣고 열폭할 일 자체가 없었다. 무엇보다 임창용의 데뷔시즌 성적을 보면 당시 마무리 후보가 임창용이었다는 사실 자체가 넌센스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14경기에 등판에 29와 1/3동안 37피안타를 얻어맞고 0승 2패 0세이브 평균자책점 5.83 WHIP는 1.43이었다. 어디까지나 구위가 눈에 띄는 유망주에 지나지 않았고 무엇보다 당시 해태는 임창용을 선발투수로 육성하려 했다. 그래서 데뷔시즌 가을야구 좌절 이후 시범으로 2경기를 선발로 등판했고 2년차였던 이듬해 1996년은 5월까지 선발투수로 뛰다가 프라이머리 셋업으로 보직 변경을 해 대박을 친 후 이듬해 자연스레 마무리를 물려받게 된 것이 실상이다. [15] 선동열도 연봉이 동결된 적이 있을 정도... 1987년 시즌 후에 그랬는데, 이 해 평균자책점 1위를 했지만 시즌 중 부상을 당해 한 달정도 등판을 하지 못했기 때문. (원래는 삭감당할뻔하지만 해태 특유의 햇빛효과로 동결된다.) [16] 그나마 선동열이 주니치로 임대된 이후 해태 선수들 연봉이 전반적으로는 올랐다만 김정수는 1억 이상을 받지 못했다. 1997년에 받은 9,160만원이 선수생활 동안에 받은 최고연봉이다. 같은 시기 팀 내 최고연봉은 1억 2천만원을 받던 조계현이며 그 뒤를 1억 1천만원을 받던 이강철이 뒤를 이었다. 팀 내 1, 2선발과 마무리투수의 연봉 치고는 상당히 해태가 돈을 안 썼기 때문에 별로 못 받은 수준이었다. [17] 그래서 삼성으로 옮기면서 강영식을 데려왔고 한화에 부임하면서 송창현을 데리고 온 것이다. [18] 타자로 범위를 넓히면 채태인, 양준혁. [19] 사실 해태 말기부터는 원포인트 릴리프로 등판하고 있었다. [20] 당시 SK 감독이었던 조범현과 겨우 2살 차였다. 물론 조범현이 조기입학을 하고 김정수가 1년을 유급했기 때문에 학번은 4학번 차이났다. [21] 현재는 송진우가 김정수의 기록을 경신해 만 43세 7개월 7일로 최고령 등판 기록을 갖고 있다. [22] 김정수의 첫 한국시리즈는 1986년이고, 이 때 김정수는 18년차의 베테랑이었다. 시작과 끝을 한국시리즈로 맺은 셈. [23] 포스트시즌만 계산하면 한화 송진우가 2007년 플레이오프 등판으로(만 41세 7개월 28일) 기록을 경신한 후 LG 류택현이 2013년 플레이오프에 등판하면서(만 41세 11개월 26일) 다시 경신, 현재는 임창용이 2018년 와일드카드 1차전에 등판하며(만 42세 4개월 12일) 경신했다. 한국시리즈 최다경기 출장 기록 또한 배영수가 2019년 한국시리즈 4차전에 등판해 통산 24경기에 등판하며 기록이 경신되었다. 그리고 한국시리즈 최고령 등판 기록도 임창용이 2017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 등판해 그 기록을 경신했다(41세 4개월 21일). [24] 다만 이상훈은 톰 글래빈을 존경해서 달았다고 밝혔다. [25] 프로 데뷔 전까지는 투수였다. 2015 플레이오프에서도 1이닝이지만 투수로 나왔을 정도. 게다가 나성범은 진흥고-연세대로 김정수의 직속 후배다. 그리고 나성범이 KIA로 오게된 2022년부터 직접 이 번호를 달고 뛰게 되었다. [26] 1999 시즌은 특히 타고투저로 유명하던 시즌이었다. [27] 이 때 해태 출신 투수 3명이 FA로 풀렸는데, 해태 소속이던 김정수, 이강철과 LG에서 뛰던 송유석이었다. 이 중에서 이강철은 해태 구단에서 적극적으로 잡으려고 시도했기 때문에 6억 4천에 계약을 시도했으나, 삼성에서 최대 8억 5천을 주면서 삼성으로 가버렸고 송유석은 LG에서 통수를 맞고, 연봉 동결 후(7,500만원) 한화로 원치 않는 이적을 해야했다. 이 중에서 연봉이 깎인 사람은 김정수가 유일했다. [28] 그의 제구력과 관련된 일화로 롯데와의 경기 중 좌타자 조성옥과 상대하던 중 공이 빠졌는데, 하필 그때 타자가 타임을 외치고 배터박스에서 나와서 안 맞을 공을 맞아 웃음을 주었다고 한다. [29] 장정석은 1996년부터 프로야구에서 활동했으며 그 당시 해태 포수는 최해식이다. 장채근은 1996년부터 해태 배터리 코치였다. [30] 장정석 해설위원이 직접 누구라고 밝힌 건 아니지만 좌완 투수가 드물던 해태에서 장정석에게 대선배 투수라는 점과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생각했을 때 거의 확실하다. [31] 조계현은 심신의 <오직 하나뿐인 그대>, 이종범은 조용필의 <모나리자>였다. [32] 당시 김정수가 해태의 최고참이었다. 나이는 38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