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20:33:30

관우/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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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초기 생애
2.1. 만인지적의 유래?
3. 서주에서
3.1. 만인지적 = 기병대장?
4. 관도대전5. 삼고초려부터 남군 공방전까지6. 청니 대치부터 유비 입촉까지7. 익양 대치부터 한중 공방전까지8. 번성 공방전
8.1. 번성 공방전 초기의 승리8.2. 위나라의 반격8.3. 최후
9. 사후

1. 개요

관우의 생애를 다루는 문서. 《 삼국지연의》가 아닌 《 정사 삼국지》의 내용을 기초로 한다.

2. 초기 생애

정사에 서술된 관우의 초창기 행적은 매우 부실한 편이다. 일설에는 출사를 하기 이전에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훈장을 했었다고 한다.

정사 <관우전>에 따르면 망명하여 탁군으로 달아났다고 한다.[1][2]

산시성의 민간 전승에 따르면 관우는 본래 고우[3]였으며 폭리를 탐한 소금 상인을 죽여 관리에 의해 쫓겨나 북쪽의 유주로 달아났다고 한다.
  • 관우가 어떤 마을에서 숨어있던 가운데 성문을 지키던 보초병들에게 들킬 위험에 처했다.
    • 그러자 어떤 노인이 홀연히 나타나서는 관우에게 옆에 있는 연못에서 세수를 하라고 권했다. 관우가 노인의 권고에 응했더니 그의 얼굴이 빨갛게 되었다.
    • 그러자 어떤 할머니가 갑자기 관우의 얼굴에 흰 천을 씌우더니 이를 냅다 두들겼다. 관우는 코피가 터져 그 피 때문에 얼굴이 빨갛게 되었다.
  • 이때 경비병들이 관우의 얼굴을 보더니 "이 사람은 우리가 찾는 인물이 아니네~"라고 그냥 지나갔다. 그리고 이름을 바꾸어 관우라는 이름을 자칭했다.
  • 관우가 어느 도성의 관문을 지나가야 할 때였다. 그때 관문의 경비병들은 위의 사건의 범인인 고우라는 사람을 찾기 위해 검문하는 사람마다 일일이 이름을 묻고 있었는데. 경비병들이 관우의 체격을 보고 의심하여 그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그때 관우는 급한 김에 자신이 지나려고 하는 관문을 보고 "성은 관(關)이오."라고 대답했다. 이후 시간을 끌던 가운데 관문 위를 날던 새에서 깃털이 떨어지기에 "이름은 우(羽)요."라고 둘러댔다. 그가 하늘을 보자 긴 구름이 둥둥 떠다니기에 "자는 운장(雲長)이오."라고 대답했다.

관우가 고향을 떠난 뒤 호씨( 영황후)는 두 아들을 데리고 중조산에 올라 약초를 캐며 생계를 이어갔다. 이후 호씨는 마을에서 이름난 명의가 되었고, 장성한 두 아들이 고향을 떠나 관우와 재회할 때도 호씨는 중조산에 남았다.

당시 소금의 가치는 상상 이상이었다. 소금은 주요 수입원이자 세금원이었기 때문에, 염호는 마을 제일의 재산이었다. 탐관오리의 횡포를 막고 소금을 지키기 위해서는 단결과 의리가 중요했고, 이러한 환경이 관우의 성격에 영향을 미쳤다. 산시성의 민간 전승에 따르면 19세의 관우가 악덕 지주를 죽이자 관리들은 본보기로 삼기 위해 관씨 성을 가진 이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관씨 성 사람들은 살기 위해 하나둘 마을을 떠났지만 힘든 피난길을 가기에 관우의 부모는 너무 연로했다. 결국 아들에게 짐이 될까 두려웠던 노부부는 집 앞마당에 있었던 우물에 몸을 던졌다. 이후 관우의 사당이 조성되어 사람들의 관우를 향한 마음은 그의 부모에게까지 닿았고, 그 우물이 있었던 자리에는 탑이 세워져서 현존하고 있다.

송락의 《균량우필》에는 관우의 조부인 유창왕 관심의 묘비에 대한 기문인 <관후조묘비기>가 실려 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력이 전하고 있다.
강희제 17년(1678년)에 관우의 고향인 해주 상평촌의 선비 우창(于昌)이란 사람이 탑묘(塔廟)에서 글을 읽었는데 그 묘는 관후(관우)가 살던 옛집이었다. 그가 낮잠을 자는데 꿈에 관후가 비석을 바꿔 세우라(易碑)라고 쓴 커다란 글자 2개를 주었다. 놀라서 깨어보니 우물을 파던 사람이 커다란 벽돌을 주워 깨뜨렸는데 벽돌 위에 글자가 있었다. 우창이 급히 주워 모아 판독하니 바로 후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양대의 이름 및 자, 생몰년의 간지(干支)가 대충 씌어 있었기에 산을 두루 헤매어 무덤을 찾아냈다. 그래서 급히 해주 태수 왕주단(王朱旦)에게 알리자 주단이 관후의 조부 묘비기를 지었는데, 기문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후(관우)의 조부는 석반공(石磐公)으로 이름은 심(審), 자는 문지(問之)이다. 화제(和帝) 영원(永元) 2년(90년) 경인생(庚寅生)이고 해주 상평촌 보지리(寶池里)에 살았다. 공은 충목(沖穆, 온화하고 씩씩함)하고 도(道)를 좋아했다. 《 주역》(周易)과 《 춘추》(春秋)로 아들을 가르쳤다. 환제(桓帝) 영수(永壽) 3년 정유(157년)에 죽으니 향년은 68세이다. 아들의 이름은 의(毅), 자는 도원(道遠)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아버지가 죽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 상복을 벗고 환제 연희(延熹) 3년 경자(160년) 6월 24일에 후(侯, 관우)를 낳았다.[4] 후는 커서 호씨(胡氏)에게 장가들었고 영제(靈帝) 광화(光和) 원년 무오(178년) 5월 13일에 아들 관평을 낳았다.[5]

유비가 향리에서 사람의 무리를 모으니 관우는 장비와 함께 그를 위해 적을 막아냈다. 유비는 거병 이전 탁군에서 무리를 형성해 협객으로 지냈는데, 동네에서 알고 지내며 형, 동생하는 사이였던 장비와 간옹이야 유비와 쉽게 어울리는 것이 가능했겠지만 어떤 연유로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관우는 본인의 자존심도 강하며, 타향 출신의 낯선 이에 대해 경계하는 일이 많은 고대에 유비 무리와 어울리기가 쉽지 않았을 터인데 자연스럽게 유비의 거병 동지가 된 점을 보아 금방 의기투합할 만큼 죽이 잘 맞았던 걸로 보인다.

황건적의 난 평정 이후 독우를 폭행한 혐의로 관직을 버린 후 달아나는 유비를 장비와 함께 따라간다. 이후 대장군 하진이 모병에 응하는 자는 모두 사면해주겠다는 공표를 하자 함께 모병에 자원한 후 공을 세워 유비가 평원상이 되었다. 이에 유비는 관우와 장비를 별부사마로 삼고 부곡(部曲)을 나누어 통솔하게 했다. 유비는 두 사람과 함께 잠자며 같은 침상을 썼고, 은혜가 형제와 같았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종일토록 시립했고, 유비를 따라 떠돌아다니며 고난과 위험을 피하지 않았다.

정사 <장비전>에 따르면 젊어서부터 관우와 장비는 함께 유비를 섬겼는데, 관우가 몇 년 연상이어서 장비가 그를 형으로 섬겼다고 한다.

2.1. 만인지적의 유래?

관우의 초창기 군사적인 기록 역시 부실하긴 마찬가지이다. 조조가 그를 얻기 위해 그토록 공을 들였고[6], 유비가 기반없이 방랑하던 시절과 동탁 토벌전 그리고 공손찬 휘하 마지막으로 서주에 있었을 때부터 주변 군벌들로부터 유비 휘하의 장수들에 대한 높은 평가를 들었던 만큼 관우에게는 무척이나 화려한 전적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촉한의 개국공신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그들의 초창기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으므로 확인이 불가하다.
주상의 좌우를 지키며, 전쟁터로 번개처럼 달려나가 격투하여 주상의 곤란함을 구하고 대업[7]을 도왔다.

이는 《계한보신찬》의 찬에서 어느 정도 이유를 짐작 할 수 있는데 관우는 언제나 열세에 놓여 있으면서도 우위에 선 적을 상대로 선전했고, 때로는 심지어 그 상황을 극복하고 승리하기도 했을 공산이 있다. 유비는 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오며 실로 무수한 패배를 겪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전장에서 목숨을 잃는 대신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었던 건 그 패배가 치명적인 것으로까지는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우의 능력이 여기서 빛을 발했을 확률이 높다. 소수의 패잔병을 이끌어 기세등등한 적을 막아내고 때로는 반격하며, 어떻게든 병사들을 다시 끌어모아 기적같이 부활하는 일련의 과정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관우의 명성이 쌓였다는 것이다.

또 사서상으로 몇 가지 짐작가는 사항들이 있다. 유비의 초창기 행적을 따라가면 관우는 다음과 같은 공에 일조했다고 할 수 있다.(<선주전>, 《화양국지》)
  • 추정의 군에 합류해 황건적의 난 진압.
  • 하진이 보낸 관구의와 함께 하비의 적을 물리치는 데 일조.
  • 유비가 공손찬에게 의탁한 후, 원소와 대적할 때 일조.

이런 사례를 몇 가지 살펴보면 동탁 토벌전에서 조조군이 서영군에게 궤멸당했을 때 소수의 병사들만이 조조 휘하에 남았는데, 서영이 하루종일 싸워서 있는 힘껏 싸운 잔존 조조군을 끝내 전멸시키지 못하고 산조를 공격하기 어려우리라 여겨 군사를 물린 행적이 있다. 이때 조조군 휘하에는 유비 일행이 들어가서 종군하고 있었는데, 유비 일파는 끝까지 살아남았고 이후 공손찬에게 달아나 유비 공손찬의 별부사마를 거쳐 평원상이 되었다. 또 공손찬군에서도 유비 일행이 수차례 공을 세운 것이 확인되며, 유비가 공손찬에게 의탁한지 1여 년 후 30만 명이나 되는 황건적이 쳐들어왔는데 공손찬이 2만 명의 병력으로 대승을 거둔 일이 있었으니 이때 활약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유비가 원술과 싸울 때 장비는 남았으니 관우도 유비를 따라 원술과 싸웠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때 이기고 짐을 되풀이 했다고 하니 관우도 종군했다면 승리도 했을 것이고 패배도 했을 것이다. 또, 유비가 조조에게 의탁했다가 다시 소패성으로 돌아가 흩어진 병사를 모으고 있을 때, 여포군의 명장인 고순과 장료가 유비군을 공격하여 유비군이 3월부터 9월까지 반년 동안 소수의 병력으로 버틴 행적이 있다.

당시 유비 휘하에 있었던 장수는 관우, 장비와 더불어 간옹이 있었고, 공손찬 유비에게 증원으로 보냈던 부장 조운, 그리고 전예와 예주에서부터 유비를 섬긴 진도가 있었다. 여기서 전예는 노모를 모시기 위해 나갔으며 조운이 본격적으로 유비 휘하가 된 시기에 대해 해석이 갈리지만 대체적으로는 유비가 예주, 허도, 서주에 있을 땐 유비 측 기록에서 조운의 기록이 전혀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없었다고 보는 쪽이 많다. 이로 말미암아 보면 유비, 관우, 장비 3인방이 이렇게 각지를 돌아다니는 상황에서도 인상깊은 활약을 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3. 서주에서

초기 기록이나 《계한보신찬》 등에서 나오듯 유비를 따라 기세가 호랑이같이 장렬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던 관우와 장비는 어느새 주변으로부터 만인지적의 칭호까지 얻게 되었다. 유비는 서주를 여포에게 빼앗기고 조조에 의탁해 예주이 되었는데 어떤 사람[8]이 유비는 영웅이므로 도모해야 한다고 했다. <곽가전> 주석 《위서》에 따르면 곽가는 유비를 도모하면 현명한 이를 해쳤다 할 것이므로 죽이면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 뒤 이은 <곽가전> 주석 《부자》에 따르면 곽가는 유비 일행에 대해서 다시 이렇게 말한다.
"유비는 웅재(雄才)가 있고, 뭇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얻고 있습니다. 관우, 장비는 모두 만인지적으로 그를 위하여 사력을 다합니다. 저 곽가가 보건대 유비는 끝내 남의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니며 그가 꾀하는 바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옛사람이 이르길 ‘하루에 적을 놓아주었다가 수세(數世)에 걸쳐 우환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의당 일찍이 조치하셔야 합니다."
라고 했다. 남조 유송때의 배송지는 《위서》와 《부자》가 다르다고 했는데 아마도 곽가가 유비를 몇 번 응대하여 생각이 바뀐 것일 수 있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일찍부터 관우와 장비는 만인지적으로 불리었다.

이후 유비는 관우, 장비와 함께 소패로 돌아가 여포의 장수 고순, 장료와의 전쟁을 열세인 상황에서 반년쯤 진행하다가 조조의 도움을 받아 서주에서 여포를 잡아 죽일 수 있었다. 관우도 이 전쟁에서 이들을 상대로 싸웠는데 이때 일화로 <명제기> 주석 <헌제전>, <관우전> 주석 《촉기》&《위씨춘추》에 두씨 일화가 있다. 여포의 휘하 장수 진의록이 여포의 사자로 원술에게 갔을 때, 한나라 종실의 여자를 배필로 얻었다. 당시 진의록의 전처였던 두씨는 하비에 남았다. 조조가 유비와 함께 하비에서 여포를 포위하면서 관우도 종군했다. 관우가 조조에게 여쭈길, 여포가 진의록을 시켜 구원을 청했다며 그의 처를 취하여 아내로 맞겠다고 하니 조조가 이를 허락했다. 여포가 포위되었을 때, 관우가 두씨를 아내로 삼고 싶다고 조조에게 여러 차례 청하자, 조조는 두씨가 얼마나 미인인지 관심이 생겼다. 여포가 막 격파되려 할 때 또 여러 번 청하자 조조는 그녀가 남다른 미색이리라 의심하여 먼저 사람을 보내 맞아들여 확인했다. 여포 토벌 후, 두씨가 미인임을 알게 된 조조는 약속을 어기고 그녀를 자신의 첩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그녀를 머물게 하니 관우는 마음이 편치 못했다는 이야기이다.

화양국지》의 기록에서는 관우가 두씨를 청하면서 자기 처가 자식이 없다고 덧붙인다. 즉 당시 관우는 아내가 있으면서도 자식을 얻으려고 두씨를 원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화양국지》의 기록은 여포가 포위된 곳이 복양이고, 여포가 진의록을 보내 구원을 요청한 사람도 장양이라고 잘못 적었으며, 다른 기록에서는 다 아내로 원한다고 적어 배송지가 아예 인용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삼국지집해》 <관우전>에서 청나라 학자 반미(潘眉)가
"《화양국지》에선 처가 자식이 없다고 관우가 말하는 것이 다르다."
라고 언급한 것이 나오나 이는 위에 나온 <관우조묘호기>와 모순되는데 거기에는 관평이 178년생이므로 이미 관우에겐 자식이 있었던 것이 된다. 애시당초 배송지도 주석을 추가하면서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집어넣지 않은 듯하다.[9][10]

《촉기》에 따르면 당초 유비가 허도에 있었을 때 조조와 함께 사냥한 적이 있는데, 사냥 중에 무리가 흩어지자 관우는 유비에게 조조를 죽이도록 권했으나 유비가 따르지 않았다. 이때 유비 동승과 함께 헌제의 밀조를 받아 조조를 암살하려 하고 있었는데 관우의 발언은 이 계획이 배경이 되었던 것 같다. 이후 원술을 토벌하러 동쪽으로 떠난 유비는 서주 자사 차주를 습격해 죽이고, 관우에게 하비성을 지키며 태수의 일을 행하도록 하고 자신은 소패로 돌아갔다. 200년, 조조가 동쪽을 치자 유비는 대패해 처자와 관우도 놔둔채 원소에게로 달아났다. 한편 유비의 주력이 격파되고 관우는 하비에 고립되어 있었는데 조조는 이전부터 관우를 매우 인상깊게 보았는지 곧 하비를 쳐서 그를 사로잡고 돌아와 편장군에 임명하고, 매우 두텁게 예우했다.

<관우전>에 따르면 조조는 당초부터 관우의 사람됨이 용감하며 기상이 굳세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관도대전 이전 관우를 사로잡자마자 바로 편장군으로 삼았으며, 실제로 언제나 원래 주군에게 돌아갈 작정을 하고 있는걸 눈치챘는데도 지극정성으로 예우했다.

3.1. 만인지적 = 기병대장?

유비는 제외하고, 관우와 장비 만인지적이라고 불리게 된 이유는 이들이 유비의 마궁수(기병대장)였기 때문이었다는 설이 있다. 보병 중심의 청주병을 운용한 조조 입장에선 오환족 기병을 이끌고 조조와 맞서 싸운 유비는 껄끄러운 존재였고, 유비의 기병대장으로서 양익에서 빼어난 활약을 펼친 것이 바로 이 만인지적 칭호를 받게 만든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유비는 오랜 기간 강력한 기병을 보유한 공손찬 밑에서 싸워온 전적이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기병 전술을 습득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공손찬 밑에서 원소와 싸웠고 서주로 올 때도 1,000여 기의 기병을 가지고 남하해 왔다. 그렇다면 관우와 장비의 초기 커리어에서 이들이 기병대장으로서 빼어난 활약을 하여 조조군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이것이 초창기 그들이 만인지적이라고 불리게 된 이유라고 보는 설이 있다.[11]

물론 어디까지나 유비의 초창기 커리어에 제한적으로 적용해 볼 수 있는 가설이다. 우선 '관우와 장비의 활용에 있어서 기병을 중심으로 놓고 볼 때 양익에 국한하지 않고, 기병의 활용처를 폭넓게 해석해서 분견대로서의 활용, 양익을 둘 경우의 전기•함기•유기로서의 역할 부여 등 다양성을 넣어서 해석해도 무리가 없지 않는가 하는 부분도 있고, 더 넓게 보아 양익에 둘 수 있다면 기병에 한정할 이유가 있는가? 그리고 조조군 외에 다른 진영, 다른 지역의 사람들도 전부 관•장을 높게 평가한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사유의 범위를 제시할 수는 있다. 즉, 관우와 장비는 기병뿐만 아니라 보병 역시 잘 부렸을 거라는 것이다.

일단 보병 기병의 비율은 몇 가지 요소가 나뉘긴 하는데 말의 수급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나, 그 외의 요소들을 살펴보자면 첫 번째로 육성과 관리(유지비를 포함하여)가 쉽지 않은 기병을 활용할 전장인가? 하는 부분이 있다. 서고동저인 중국의 지형을 고려해볼 때 보병 대비 기병의 비율이 일률적으로 적용될 수 없는 것은 지역별로 기병을 활용할 수 있는 여건이 다름을 살필 수 있다. 따라서 이 설명은 ' 만인지적'이 최초 언급 유포되던 시점까지다. 그 이후부터는 평가는 평가대로 날았을 것이고 사람은 또 다른 사정이 있었을 터. 서주로 끌고 간 군마가 상하면 보충이 안 될 환경이니 사람보다 말이 픽픽 죽었을 것이고, 그렇기에 전 중국을 떠돌아 다니는 유비군에서 항상 기병 비율이 일정 이상이라고 보기 어렵다. 한마디로 커리어 내내 기병의 비율이 분명 적었으리라 추측되는 상황에서도 관우와 장비는 만인지적으로 불렸다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관•장을 만인지적이라고 칭한 곽가가 이 평가를 내린 시점은 조조의 제2차 서주 침공 후 한참 지나서 조조의 협천자 이후 허도에 도읍하고, 곽가가 순욱의 추천을 받아 조조의 휘하에 들어온 196년 9월 경 이후이다.

어쨌거나 만인지적이라는 평가는 《사기》< 항우 본기>에서 언급된
'書足以記名姓而已. 劍一人敵, 不足學, 學萬人敵.'
라고 하여, 병법에 대응되는 비유이다. 용맹스러움에 보다 방점이 찍혀 있는 관우와 장비 만인지적에 대한 칭호에는 분명 그들의 군사 운용에 대한 칭찬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정말 기병만으로 그런 칭호를 들었다면 기병을 잘 다루는 것으로 유명했고 실제로 굵직한 실적도 올렸던 여포 또한 만인지적이라 불렸겠지만 그런 기록은 없다.[12] 또 말년의 관우는 수군을 잘 다루기도 했는데 이는 관우가 기병만이 아니라 여러 방식의 전투에 능숙한 지휘관이었음을 뜻한다.

조조가 서주를 친 지 20여 년이 지나 유비 익주로 들어갔을 때 조정에 초빙된 선비 부간의 평가에서도
'劉備寬仁有度,能得人死力。諸葛亮達治知變,正而有謀,而為之相;張飛、關羽勇而有義,皆萬人之敵,而為之將:此三人者,皆人傑也'
라 하여 유비에게 관인유도[13], 제갈량에게 달치지변[14], 정이유모[15], 이위지상[16], 그리고 관우와 장비에게 여전히 '만인지적'이라고 한 부분은 이와 같은 맥락이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이는 곽가의 평가에 있어서 유비와 관우, 장비를 비유하는 부분과 일맥상통한다. 부간의 평가와 곽가의 평가를 살펴볼 때 유비에게 만인지적의 칭호가 가지 않은 것은 유비에게 기대하는 혹은 유비를 평가하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곽가 유비가 웅재가 있어 많은 이들의 마음을 얻는다고 했고, 부간은 유비가 관인유도하여 사람을 얻는 데 사력을 다한다고 했다. 관우와 장비를 칭해 만인지적이라고 말한 곽가와 부간 모두 유비를 평가하는 기준은 사람의 마음에 있었다. 이에 반하여 관우와 장비를 '호신'이라 평가한 진수의 평가까지 아울러서 볼 때, 관우와 장비는 장수이고, 장수로서 요구되는 용맹함이나 의리나 군사 지휘 등을 평가의 기준으로 삼았다고 여겨진다.

4. 관도대전

관우는 조조 휘하에 있을 때 장료, 서황 등과 친했는데 처음에 조조는 관우의 사람됨이 용감하고 기상이 굳세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오래 머무를 뜻이 없다고 생각해 장료에게 의중을 묻게 했다.
"경이 시험 삼아 그의 뜻을 물어보시오."
그 뒤 장료가 관우에게 묻자 관우가 탄식하며 말했다.
"나는 조공(조조)께서 후히 대우해주시는 것을 잘 알고 있으나, 유장군(유비)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고, 함께 죽기로 맹세했으니 이를 저버릴 수는 없소. 나는 여기 끝까지 머물 수는 없으나 반드시 공을 세워 조공께 보답한 뒤에 떠날 것이오."[17][18]
장료가 관우의 말을 조조에게 보고하니 조조가 이를 의롭게 여겼다.

《부자》에 따르면 장료는 주군인 조조에게 고하려니 조조가 관우를 죽일까 두려웠고, 고하지 않으려니 주군을 섬기는 도리가 아니었으므로 이에 탄식하며 말했다.
"공(조조)은 군부(君夫)이고, 관우는 형제로다!"
결국 조조에게 이를 고했다. 조조가 말했다.
"주인을 섬김에 그 근본을 잃지 않았으니 천하의 의사(義士)로다. 언제 떠날 것 같소?"
장료가 말했다.
"관우가 공의 은혜를 입었으니, 필시 공을 세워 공께 보답한 뒤에 떠날 것입니다."

관우는 관도대전에서 선봉장의 역할을 맡는다. <무제기>에 따르면 200년 2월, 곽도, 순우경, 안량 동군 태수 유연을 백마에서 공격했으며 원소 자신은 군을 이끌고 여양(黎陽)에 도착해 장차 황하를 건너려고 했다. 조조는 어떠한 군사적 조치도 취하지 못하다가 2개월 후에야 백마 포위망 공격에 나선다.[19] <순유전>에 따르면 순유의 견해를 받아들인 조조는 백마를 포기하고 회군을 하는 것처럼 위장했다가 연진에서 황하를 건너 원소의 후방을 노리는 척했다. 한편 순유는 치중대를 이끌고 황하를 돌아서 서쪽으로 이동했다. 원소가 군사를 나누어 연진으로 출격시키자 조조 경기병을 파견하여 백마를 습격하고 안량을 죽였다.

<무제기>에 따르면 순유는 지금 군사가 적어 대적할 수 없으므로 적의 병력을 분산시키고 백마를 기습해 적이 방비하지 못한 곳을 공격하면 안량을 사로잡을 수 있을거라고 했다. 조조가 이끄는 군사가 10리 떨어진 곳에 도착하자 안량은 크게 놀랐으며 군을 이끌고 맞서 싸웠다. 조조 장료와 관우를 선봉으로 삼아 이를 공격하게 했다.

<관우전>에 따르면 관우는 안량의 휘개(麾蓋)를 멀리서 보고 말을 채찍질해 달려가 수많은 병사들 사이에서 안량을 찌르고 그 수급을 베어 돌아왔다. 원소의 제장들 중 관우를 당해 낼 자가 없었고, 마침내 백마의 포위를 풀었다. 조조가 표를 올려 관우를 한수정후(漢壽亭侯)에 봉했다.[20]
...조공은 장료와 관우를 선봉으로 삼아 이를 공격하게 했다. 관우는 안량의 휘개를 멀리서 보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가 많은 병사들 사이에서 안량을 찌르고[21] 그 수급을 베어 돌아오니, 원소의 제장들 중 당해낼 자가 없었고 마침내 백마의 포위를 풀었다. 조공이 표를 올려 관우를 한수정후로 봉했다.
<촉서> -관우전-
정사에 몇 안 되는 1대1 대결, 그것도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들어가 상장의 목을 베어온 것으로는 유일무이한 기록인데, 관우가 적진 한복판에 있다가 귀환하니, 수많은 원소의 장수들 가운데 누구 하나도 당해낼 수 있는 이가 없어, 마침내 (2개월 동안 지속된) 백마의 포위를 풀었다. 관우는 무사히 돌아왔으며 이에 조조가 표를 헌제에게 올려 한수정후에 봉할 정도로 압도적인 무공을 보여준다.[22]

관우가 안량을 죽이게 되자 조조는 관우가 큰 공로를 세워 필시 떠날 것임을 알고, 포상을 더욱 무겁게 베풀었다. 관우는 하사받은 것을 모두 봉해 놓고 작별을 고하는 서신을 올린 후 원소군에 있었던 유비에게로 달아났다. 좌•우(左右)에서 이를 추격하려고 하자 조조가 말했다.
"그는 각기 자신의 주인을 위한 것이니 뒤쫓지 말라."

배송지가 이를 논평하길
"조공은 관우가 머물지 않을 것을 알고도 마음으로 그 뜻을 가상히 여겨, 떠나는 관우를 추격하지 않아 그의 의(義)가 이루어지게 했다. 스스로 왕패의 도량(王覇之度)을 품지 않고 어찌 이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이는 실로 조공의 훌륭한 행동이다."
라며 관우의 의리와 조조의 도량을 함께 칭찬했다.

5. 삼고초려부터 남군 공방전까지

<관우전>에 따르면 유비와 재회한 관우는 유비를 따라 남쪽의 유표에게로 나아갔다. 유표는 조조를 견제하기 위해 유비를 신야에 배치했고, 관우 역시 박망파 전투 등으로 꾸준히 조조를 견제하는 나날을 보낸다. 이후 서서의 추천에 따라 유비가 제갈량과의 삼고초려 이후 그를 영입하고, 좌장군부의 업무를 총괄하는 군사장군의 관직을 준 후 관우, 장비, 조운에게 그랬던 것처럼 제갈량과도 같이 잠이 들 만큼 정이 날로 깊어졌다. 관우와 장비 등이 이에 불쾌한 기색을 보이자 유비가 다독이며 말했다.이에 관우와 장비가 불평을 멈추었다.[23]

208년, 형주의 지배자인 유표가 죽고, 조조와 친분이 있는 채모를 비롯한 채씨 일족이 유종을 후계자로 추대한 후 조조에게 항복하면서 순식간에 형주를 삼킨다. 갑작스럽게 조조의 칼날을 가까이에서 접하게 될 상황에 놓인 유비는 강릉을 차지하여 조조에게 농성하려고 번성으로부터 장차 남쪽으로 가 장강을 건너려고 했으며, 관우에게는 수백 척의 배를 주어 강을 통해 이동하여 강릉에서 만나기로 했다. <선주전>에 따르면 형주의 남군 당양현에 도착했을 무렵 그 무리가 10여 만 명에 이르고 치중(輜重, 짐수레)이 수천 량(兩)으로 하루에 10여 리밖에 가지 못했으며, 관우에게 별도로 배 수백 척을 이끌도록 하여 남군의 강릉현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한다. 조조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병대를 직접 인솔해 추격하여 당양 장판에 이르자 유비는 큰 피해를 입고[24] 간신히 도주해 한진으로 비스듬히 나아가다가 때마침 관우의 배와 서로 만나게 되어 함께 하구에 도착했다.

이렇게 관우가 처음으로 수군을 운용한 시점을 사서는 장판 퇴각전으로 기록한다. 100,000명의 형주 피난민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퇴각 속도가 느려지자, 유비는 배 수백 척을 따로 편성해 정예 병력과 피난민 일부를 싣고 군사 거점이었던 강릉으로 향하게 했는데, 이 선단의 책임자가 바로 관우였다. 즉, 장판 퇴각전은 어느 시점부턴 육로의 유비 본대, 수로의 관우 분대가 하나의 도착지를 향해 도망하는 2개의 국면으로 진행된 것이다.

이후 상상을 초월한 조조군의 추격 속도 때문에 유비 본인부터가 처자를 버리고 빤스런했고, 핵심 장수진이었던 장비와 조운은 제각기 흩어져 후방을 맡거나 유비가 버린 처자를 구하러 역주행하는 등, 전황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강릉으로 향한다는 초기 목표는 철저히 분쇄되고, 유비는 간신히 요인들만 추슬러 강릉과도 제법 떨어져 있는 나루터인 '한진'으로 퇴각해야 했다. 주목할 것은 바로 이 지점인데, 이처럼 전황이 예측불허로 흘러갔음에도, 수로에서 강릉을 향하던 관우는 유비가 그를 필요로 하던 매우 정확한 시점에 한진에 도착했고, 생존한 유비와 무리들을 무사히 선박에 태워 피난 작전에 성공적인 마침표를 찍었다는 것이다. 만일 관우가 제 시각에 도착하지 않았다면 유비군이 고립무원의 나루터인 한진에서 어떤 최후를 맞았을지 상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장판 퇴각전을 성공으로 이끈 1등 공신은 장비도, 조운도 아닌 관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관우가 형남 평정 이후의 논공행상에서 으뜸가는 봉작을 수여받은 것에는 이 당시의 공로 또한 적잖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제아무리 서로 연락을 취했다한들, 전화는 물론 선박용 수신기조차 없었던 그 시절, 퇴각전이라는 불리한 조건과 더불어 초기 목표가 긴급 수정되는 돌발 상황에서 육로와 수로의 보조를 맞추며 아군의 무사 퇴각에 성공한 역량. 이것이 역사서에 기록된 관우의 첫 번째 수군 운용이었다. 그리고 이 시점 이후 관우는 커리어 후반기의 거의 모든 전투에서 수군을 대동하게 된다.

《촉기》에 따르면 이때 하구(夏口)에 있으면서 강가에 전함이 이르자 관우가 분개하며 말했다.
"지난날 사냥 중에 만약 저 관우의 말을 따랐다면 가히 오늘의 어려움은 없었을 것입니다."[25]
유비가 말했다.
"그때는 또한 국가를 위해 그를 아꼈을 뿐이다. 만약 천도(天道)가 보정된다면 이것이 복이 되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느냐!"

자치통감》에 따르면 적벽대전 당시 유비는 번구에 주둔하면서 주유를 혼자서 만나게 되었는데 주유는 자신의 일이 바쁘다며 유비가 오군 진영으로 알아서 오라고 통보해버렸다. 이에 유비는 관우와 장비에게 동맹으로서 가봐야 동맹의 뜻이 맞는다고 말한 후 주유의 진영으로 떠났다. 아마도 이 둘에게 이런 대접에 대한 납득이 필요했다는 간접 증거일 것이다. 주유에게 겨우 30,000명밖에 없다는 얘기를 듣고 실망한 유비는 이후 주유의 태도에 심히 부끄러움과 기쁨을 느꼈다. 《강표전》에선 여기에 관우, 장비와 함께 2,000명을 이끌며 주유에 매이려 하지 않았으니 이를 진퇴의 계책으로 삼았다는 말을 집어넣었으나 손성은 유비가 이미 도주했는데 훗날의 계책을 품을 마음이 없었을 것이라며 이는 오나라 사람들이 아름답게 꾸미는 말이라고 했다. 그리고 배송지는 손성의 이 말을 덧붙였다. 《 자치통감》 역시 유비가 주유를 이기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 부분과 관망했다는 내용은 제외했다. 《산양공재기》 등에는 이후 유비가 조조의 군세를 격파하면서 진군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관우 역시 유비 휘하에서 참전했을 것이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가 화용도에서 조조를 결국 놔준 걸로 나오지만 정사에서는 이런 기록이 없다. 만약 정사처럼 관우가 화용도에서 매복했다가 조조와 마주했다면 망설이지 않고 사살하거나 사로잡았을 가능성이 크다. 위에 적힌 것처럼 장판 전투에서 유비를 구해낸 직후 관우가 대놓고 예전에 기회가 있었을 때 조조를 죽였어야 한다고 불만을 드러낸 장본인이었는데 마음이 약해져서 조조를 그냥 보내줄 리는 없었다.

<선주전>을 보면 적벽대전 이후 유비군과 주유군은 물에서부터 뭍으로 이어가면서 조조를 추격했고, 이에 조조는 근거지로 퇴각하면서 조인과 서황, 문빙, 악진, 만총, 이통 등에게 남군에서부터 추격해오는 연합군을 막게 했다. 이를 남군 공방전이라고 하는데, <이통전>에 따르면 유비 주유는 강릉에서 조인을 포위하여 공격하고, 따로 관우를 보내 북쪽길을 끊어놓았다. 조인이 도주하면 유비군과 주유군은 그냥 남군을 접수하면 그만이었으니 굳이 조인의 퇴각로를 끊어놓을 목적은 아니었을 테고, 오히려 북쪽에서 내려오는 조인의 구원군을 막기 위함이었다고 보인다. 관우가 거느린 병력이 얼마였는지 나오지는 않지만 <오서> -주유전-에서 주유가 유비의 요청을 받아 1,000명을 거느린 장비와 교환해 유비에게 2,000명을 빌려줬다는 언급을 보면 관우도 장비와 비슷하거나 많아도 몇 천 명 정도만 거느렸을 가능성이 높다. 관우를 상대한 서황, 만총, 악진과 문빙이 각각 거느렸던 병사가 구체적으로 안 나왔지만 관우보다 적은 군세였을 공산은 적고, 아마 서로 연계하여 관우를 상대했을 것이다.

이는 다른 위나라 장수들의 <열전>에도 보인다. <서황전>, <문빙전>, <악진전> 등 각각의 <열전>에 따르면 서황 만총과 함께 한진에서 관우를 치고, 조인과 함께 강릉에서 주유를 쳤다.[26] 문빙은 악진과 더불어 심구에서 관우를 격퇴하고 전공을 올려 연수정후에 올랐고, 봉역장군의 관위가 더해졌으며, 또한 관우의 치중을 한수에서 공격하여, 그 배를 형성에서 불태웠다. 악진은 관우와 소비(蘇非) 등을 모두 패주시켰고, 남군 일대의 산과 계곡에서 거주하던 만이(蠻夷)들이 악진에게로 와서 투항했다. 또한 유비를 쳐서 임저장 두보, 정양장 양대를 모두 대파했다. 기록을 보면 이들 장수들은 관우뿐만 아니라 유비와 주유의 포위망 자체를 공격하여 와해시키려는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보면 관우는 애초에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닌 버티기를 목적으로 이들에게 얻어맞아가면서 북쪽에서 이들의 본디 목적인 남군 포위망 와해를 막은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육지인 강릉과 해안인 형주성 방면의 양 전선을 동시에 관리하며 적을 상대한 경험은 관우에게 귀중한 자산이 되었다. 형주를 관우가 맡게 된 이유 역시 단순히 그가 유비군의 2인자라서라기보단 한수를 끼고 있는 형주 전역에서 중요한 수•륙양용의 역량을 어느 정도 증명했기에 이뤄진 인선이 아닌가 싶다.

한편으로 강릉 전투는 관우의 미래를 앞서 보여준 점도 있는데, 위나라의 내로라하는 장수진을 상대로 홀로 분전한 모습이 그렇다. 특히 관우가 맡은 퇴로 차단 임무는, 적의 후방 지원이 있을 경우 차단하는 아군이 도리어 샌드위치처럼 짓눌려 몰살을 당할 위험 부담도 큰 양날의 검이다. 이 위험한 임무에서도 관우는 설령 적장의 목을 베진 못했을지언정 벌떼처럼 밀려든 조위 지원군의 협공을 이겨내며 무사 귀환했다. 현장에서 이를 목격한 주유와 여몽이 모두 그 용맹에 대한 남다른 평가를 남길 만큼, 이날의 관우는 소위 졌지만 잘 싸웠던 것이다. 형주 뒷치기 때 여몽이 관우를 매우 경계하고 힘든 상대라고 인정한 점은 이때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다.

이러기를 1년, 결국 조인 이통의 구원을 받아 도주한다. <이통전>에는 이통이 관우를 공격해서 조인을 구출했다고 나오는데 이건 국내 인터넷상에 퍼진 사서 번역본의 오류이다. 원문에서는 이통이 공격한 것을 그것(之)라고 말할 뿐, 이게 관우라고 직접 적어놓지는 않았다. # 중국어 위키백과에서는 이통이 공격한 것을 관우가 아니라 포위(圍)라고 적혀 있다. # 어쨌거나 이통 역시 조인을 구출했을 뿐 포위망을 와해시키는 데는 실패했고, 마침내 남군 공방전은 유비-주유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으며 유비는 강남의 여러 군을 거두어들이고는 으뜸 되는 큰 공훈을 세운 사람들을 봉배하니 관우를 양양태수 탕구장군으로 삼아 강북에 주둔하도록 했다.

<선주전> 주석 《 헌제춘추》에 따르면 손권은 유비와 함께 촉을 취하고자 하여 사자를 보내 유비에게 고했다. 유비는 스스로 촉을 도모하고자 했으므로 이를 거절했다. 손권이 이를 듣지 않고 손유를 보내 수군을 이끌고 하구에 주둔하도록 했다. 유비는 손유군이 통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말했다.
"너희가 촉을 취하려 하면 나는 응당 머리를 풀어헤치고 입산(入山)할 것이니, 천하에 신의를 잃을 수는 없다."
관우를 강릉, 장비를 자귀에 주둔시키고, 제갈량은 남군에 의거하게 했으며 유비 자신은 잔릉에 주둔했다. 손권이 유비의 뜻을 깨닫고 손유를 불러 돌아오게 했다.

6. 청니 대치부터 유비 입촉까지

<선주전>에 따르면 212년, 유비가 사자를 보내 유장에게 고했다.
"조조가 오를 정벌하니 오에서는 위급함을 근심하고 있습니다. 또한 악진이 청니에서 관우와 서로 맞서고 있으니 지금 가서 관우를 구원하지 않으면 악진이 필시 대승할 것이고, 그들이 군을 돌려 주의 경계를 침범한다면 장로보다 더욱 심한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장로는 스스로를 지키는 적이니 족히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에 유장에게 군사 10,000명과 물자를 청하고 동쪽으로 가려고 했다. 유장은 다만 군사 4,000명을 허락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절반만을 주었다.

<선주전>에서만 언급되는 것이 청니 대치인데, 여기서는 단지 유비가 관우의 대치 상황 및 승패의 결과 예측만 말했을 뿐, 직접적으로 청니에서 전투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는다. <악진전>과 <문빙전>에서는 악진(+ 문빙)이 관우를 격파한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의 시기가 209년에 일어난 남군 공방전때의 기록인지, 아니면 212년의 청니 대치때 기록인지 정확하게 적혀 있지 않아서 혼란을 준다. 노필의 《삼국지집해》에서는 이를 청니 대치 시기로 봤고, 중국어 위키백과 등지에선 남군 공방전의 시기로 보는 듯 하며, 본 위키도 이쪽 기록에 따른다.

왜냐하면 청니 대치때 정말 싸워서 <악진전>에 기록될 만큼의 상황이 나왔다면 유비는 언플이 아니라 진짜로 관우를 도우러 귀환했어야 하며, 이무렵이면 조조도 군세를 회복했으니 재남진을 해 악진과 문빙을 지원했어야 하지만 그런 움직임도 없었으며, 유비의 태도도 어딘가 여유로웠다. 더불어 악진은 불과 3년 뒤 합비 공방전에 참전했다. 즉, 관우 vs 악진+문빙은 조조가 형남 지배권을 상실해 중원으로 물러난 남군 공방전때이고, 청니 대치는 그냥 단순히 서로 눈치싸움만 하다가 지금은 싸워봤자 소용없다고 여긴 악진이 철수해 합비로 갔다고 해야 정황상 들어맞는다.

한편 이때 관우는 의외의 인물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바로 양의였다. 그는 부군(傅群)을 저버리고 양양태수였던 관우에게 나아갔는데 관우가 명령하여 공조(功曹)로 삼고 그를 유비에게 가게 했다는 기록이 <양의전>에 있다.

유비가 서쪽으로 익주를 평정할 때 관우를 동독형주사로 임명했다. 이때 《계한보신찬》의 주석에 따르면 유비는 촉으로 들어올 때, 반준을 형주치중(荊州治中)으로 임명하여 지키면서 형주의 행정을 관리하도록 했는데, 역시 관우와 화목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게 중요한데 한자 단어상으로 반준의 경우에는 관우와 화목하지 못했다는 것이므로 단지 둘 사이가 친하지 않은 것으로 정리된다. 공무상으로 일을 같이 할 뿐이다. 때문에 훗날 반준의 경우 항복에 있어서도 능동적인 자세를 견지하지 않는다. 이후 <선주전>에 따르면 제갈량, 장비, 조운 등은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거슬러 올라와 백제, 강주, 강양을 평정하고, 오직 관우만이 남아 형주를 진수했다.

당시 유비의 권한으로 준 직위가 동독형주사라고 할 수 있다. 시대가 혼란스러웠고, 유비가 아직 새로이 정부를 조직하기 전이었으며, 동독형주사에 양양태수, 가절월을 붙여줬다는 것은 형주 방면의 통치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관우가 알아서 하라는 것이라 봐도 될 듯 싶다. 특기할만한 부분은 당시 유비는 황제나 왕이 아닌 이상 절월을 줄 수 없는 위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관우에게 가절월을 줬다는 것은 본인이 황제의 명령을 맘대로 이용해서 준 것이다. 이러다 보니 관우가 가진 동독형주사라는 의미는 다른 어떤 권한과 비교하기 어렵다. 단순하게 요약하면 유비가 좌장군으로부터 줄 수 있는 최고를 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형주의 업무를 모두 아울러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고, 여기에 관우를 양양태수로 해놓은 것도 동일한 이야기라고 보면 된다. 적국의 땅에 임명하는 행위는 전쟁 전에 하는 행위다. 제갈량의 북벌 위연의 양주자사 임명이나 장완의 북벌 계획 전 강유의 양주자사 임명과 같은 것이다. 즉 양양에 대한 공략도 모두 관우에게 알아서 하라고 일임한 것이다.

관우는 마초가 항복해 왔다는 말을 듣고는 예전부터 친분이 있었거나, 내왕이 있었던 이가 아니었기에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마초의 사람됨과 재주가 누구에 비교될 수 있는지를 물었다. 제갈량은 관우의 호승심이 강함을 알았으므로 이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맹기(마초)는 문•무를 겸비하고 웅렬이 남보다 뛰어난 일세의 호걸로 응당 익덕(장비)과 말머리를 나란히 해 달리며 선두를 다툴 수는 있으나 염(髥) 그대의 절륜 일군함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관우는 수염 아름다웠으니 이 때문에 제갈량이 관우를 일컬어 염(髥)이라 한 것이다. 관우는 이 서신을 읽어보고 크게 기뻐하며 빈객들에게 보여주었다. 사실 얼굴도 어느 정도 받쳐줘야 수염도 아름답게 보이는 법이기 때문에 이 일화는 관우의 얼굴이 괜찮은 축에 속했다는걸 암시하는 기록이기도 하다.

<마초전> 주석 《산양공재기》에 따르면 마초는 유비가 후대하는 것을 보고 유비와 더불어 말하며, 늘 유비의 자(字)를 부르니 관우가 노하여 그를 죽일 것을 청했다. 이에 유비가 말했다.
"다른 사람이 궁박해져 내게로 귀의했소. 그런데 경 등이 분노하며 내 자(字)를 불렀다하여 죽이자 하니, 천하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이겠소!"
장비가 말했다.
"그렇다면 응당 예(禮)를 보여야지요."
다음날, 크게 모이며 마초를 청했는데, 관우와 장비가 함께 칼을 쥐고 곧게 서 있었다. 마초는 좌석을 둘러보았을 때 관우와 장비를 보지 못했다가 그들이 서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니 마침내 다시는 유비의 자(字)를 부르지 않았다. 다음날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이제야 패망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주인의 자(字)를 부르다 하마터면 관우, 장비에게 죽임을 당할 뻔 했구나."
이후로 유비를 존중하며 섬겼다.

배송지는 당시 관우는 형주에 있었는데 왜 유비, 장비랑 같이 익주에 있냐고 이 기록의 신빙성을 부정했다. 다만 여기서 임저는 형주 남군 임저현을 말하는 것으로 관우의 관할 구역이었고, 마초가 잠시 형주로 왔을 공산은 있다. 거기에 유비는 익양 대치때 형주에 온 적이 있었다. 따라서 유비, 관우, 마초가 만났을 가능성, 잠시나마 함께 있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파서태수로서 조조가 공격한 한중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방어해야 하는 장비까지 함께 형주로 갔을 가능성은 그다지 높진 않다.

7. 익양 대치부터 한중 공방전까지

《강표전》에 따르면 관우는 《 좌씨전(춘추좌씨전)》을 좋아하여, 이를 암송하면 거의 모든 구절이 입에서 술술 흘러 나왔다. <여몽전>에 따르면 노숙이 맡은바 임지에 떠나니 여몽이 노숙에게 충고하면서 일렀다.
"지금 동•서(유비와 손권)가 비록 한 집안이 되었으나, 관우는 실로 곰과 범 같은 장수인데 어찌 계획을 미리 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라고 했다. 이로 인해서 노숙을 위해 5가지 계책을 짜 주었다. <강표전>에 따르면 해당 기록은 다음과 같다.
"대형께서 지금 공근(주유)을 대신해 힘든 임무를 맡으셨는데, 또한 관우와는 이웃입니다. 이 사람은 워낙 출중하기도 하거니와 학문을 좋아해 《좌전》을 읽으면 대략 모두 매끄럽고, 강직하며 공명정대하고 씩씩한 기상이 있으나 천성이 자부심이 상당하고 다른 사람들 위에 서는 것을 좋아합니다. 지금 더불어 마주하고 있으니, 응당 단복(單複)[27]을 가지고 그를 대접해야 합니다.”

여몽은 은밀하게 노숙을 위해서 3개의 책략을 말했고, 노숙은 공손하게 그것을 경청해 비밀로 삼아 발설하지 않았다.

214년, 유비가 촉을 평정했다. <선주전>과 <오주전>에 따르면 손권은 유비가 이미 익주를 손에 넣었으므로 제갈근을 시켜 형주의 여러 군을 돌려주도록 요구했다. 이에 유비는 허락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 양주를 취하려 생각하고 있으므로 양주를 취한 후에 곧바로 형주를 오나라에 상여하겠습니다."
이에 손권이 격분하여 말했다.
"이는 빌렸으면서 돌려주지 않는 것이며, 공연한 말로 시간을 끌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남쪽 세 군(장사, 영릉, 계양)의 태수를 두었다. 그러나 관우가 이들을 모두 내쫓았다. 손권이 매우 노여워하며 즉시 여몽을 파견해 선우단, 서충, 손규 등의 병사 20,000명을 지휘하여 장사, 영릉, 계양 세 군을 취하도록 하고, 노숙으로 하여금 10,000명을 인솔하여 파구에서 주둔하며 관우를 방어하도록 했다. 손권은 육구에 머물면서 여러 군대를 총지휘했다. 여몽이 도착하자 장사와 계양 두 군은 모두 복종했는데, 오직 영릉태수 학보만이 투항하지 않았다.

마침 유비가 공안에 도착하여 관우에게 병사 30,000명을 이끌고 익양까지 가도록 했다. 그래서 손권은 곧 여몽 등을 불러 돌아가서 노숙을 원조하도록 했다. 여몽이 사자를 보내 학보에게 항복할 것을 권유하자, 학보는 투항했다. 이렇게 하여 세 군의 장수와 태수를 모두 손에 넣었으므로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손교, 반장 및 노숙의 병사들과 함께 전진하여 익양에서 관우에게 저항했다. <여대전>에 따르면 안성현의 장(長) 오탕과 중랑장 원룡 등이 관우와 결탁하여 또 반란을 일으켰다. 오탕은 유현을 점거하고 있었고, 원룡은 예릉에 있었다. 손권은 횡강장군 노숙을 파견하여 유현을 공격하도록 했다. 오탕은 포위를 뚫고 달아났다. 여대는 예릉을 공격하여 마침내 원룡을 붙잡아 참수시켰다.

<감녕전>에 따르면 감녕은 노숙을 수행하여 익양을 진무시키고 관우와 대치했다. 관우는 휘하의 군을 30,000명이라 하며 그중 직접 정예 병사 5,000명을 선발해 상류 10여 리의 얕은 여울에 배치시키고, 밤을 틈타 냇물을 건너려고 했다. 노숙이 장수들과 상의할 때 감녕은 당시 300명의 병사만 지휘하고 있었으므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시 저에게 500명을 증원시켜 주신다면 제가 가서 그에게 맞서겠습니다. 관우는 제가 기침하며 가래침을 뱉는 것을 듣고 감히 물을 건너지 못할 것이라 확신합니다. 관우가 물을 건너면 저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노숙은 곧바로 병사 1,000명을 선발하여 감녕에게 더해 주었다. 감녕은 그날 밤에 군을 이끌고 나아갔다. 관우는 이 소식을 듣고 건너지 못한 채 머물러 있으면서 땔나무를 엮어 진영을 만들었는데, 오늘날 이것을 '관우뢰'(關羽瀨)라고 부른다. 《수경》 역주에서 이르길 현에 관우뢰(關羽濑)가 있으니, 소위 '관후탄'(關侯灘)으로, 남으로 감녕(甘甯)의 옛 보루와 마주했다. 관우가 밤에 감녕이 배치하는 소리를 듣고 이르길
"(이것은) 흥패(興霸)의 소리구나."
라고 한 이후 마침내 건너지 못했다.[28]

<노숙전>에 따르면 노숙은 관우에게 서로 만날 것을 요청하여 각각 병마를 100보 밖으로 주둔시키고, 단지 장군들만이 단도를 갖고 함께 만났는데 주석 《오서》에 따르면 노숙이 관우와 회담하려고 하던 때, 제장은 변이 일어날 것을 걱정하여 주의를 다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에 노숙이 답해 말했다.
"오늘과 같은 사태에 있어서는 서로 뱃속을 드러내 보이고 대화하지 않으면 아니 되오. 유비는 국사를 짊어지고 있으면서 아직도 시비를 바로 하지 못했는데, 어찌 또한 관우가 더불어 명령에 거스를 수 있겠소!"
그리고는 관우를 만나러 나갔다.

<노숙전>에 주석으로 달린 《오서》에 따르면 노숙은 주군인 유비가 오림에서 갑옷을 벗지 않으며 열심히 싸워 얻은 땅을 왜 강탈하느냐는 관우의 항의에 대해 그 자리에서 자기 주장을 늘어놓아 관우가 대답을 하지 못하게 했다. 즉
"우리 군주(손권)가 본래 성의껏 그대들에게 토지를 빌려준 것은 그대들이 전쟁에서 패배하여 멀리서 왔고, 의지할 곳이 없었기 때문인데 오늘날 벌써 익주를 얻었으면서 형주를 봉환하려는 뜻도 없고, 우리들은 단지 그대들이 3군만 반환해 줄 것을 요청하는데도 명에 따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라는 요지였다. 그러나 이는 관우의 질문인
"우리도 형주에서 같이 위군이랑 싸웠는데 형주에 지분이 있는거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가 피땀 흘려 얻은 땅(특히 유비가 먹은 형남 4군)은 왜 침범한 것인데?"
의 대답은 되지 못하며 오히려 '형주는 모두 오나라땅'이라는 억지 주장에 가까웠다. 이는 노숙 문서 익양 대치 부분에 잘 나와 있다.

노숙이 이렇게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자리에 앉아 있었던 어떤 한 사람이 말했다.
"영토란 덕있는 사람에게 속하는 것일 뿐. 어찌하여 영원히 소유하려 하시오."
이에 노숙이 벽력같은 소리를 질러 질타했는데 언사와 안색이 매우 절절했다. 그때 관우가 칼을 잡고 일어나서 말했다.
"이것은 국가의 일인데 이 사람이 무엇을 알겠소!"
관우는 이 사람을 눈빛으로 떠나가도록 했다.

<선주전>에 따르면 마침 이때 조조가 한중을 평정하자 장로는 파서(巴西)로 달아났다. 유비가 이를 듣고 손권과 화해하니, 형주를 분할해 강하, 장사, 계양 등 3개 군은 동쪽(손권)에 속하게 하고, 남군, 영릉, 무릉 등 3개 군은 서쪽(유비)에 속하게 하고는, 군을 이끌고 파군 강주현로 돌아왔다. <오주전>에 따르면 유비는 익주를 잃게 될까 두려워하여 사자를 보내 손권과 화해하고자 했다. 손권은 제갈근에게 유비에게 가서 응답하도록 하여 다시 동맹을 맺었다.

이후 217년, 노숙이 죽고 여몽이 이 지역의 사령관으로 부임했는데 <여몽전>에 따르면 당초 여몽이 노숙을 대신하게 되어 처음으로 육구에 이르러서 겉으로는 은혜와 후의를 더욱 닦아 관우와 우호를 맺었다. 관우는 병마를 조련시키면서 때를 엿보고 있었으며 그 동안 오나라는 익양대치 후에도 계속해서 형주를 노리고 있었다. 양국의 결속을 위해 부단히 애를 썼던 노숙이 죽자 손권은 여몽의 말을 듣고 서주를 공격하는 것은 도박에 가까운 일이라고 판단하여, 상대적으로 형주를 공략하기 쉬울거라 여기고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었고 관우는 이를 방비해서 공안과 남군에 수비 병력을 다수 배치해놓았으며 강릉성을 새로 수축하고 둔영과 관측소를 준비해 놓는 등 준비를 철저히 한다. 이렇게 관우가 대비를 철저히 하니 당초 예상과 달리 여몽은 관우의 방비를 뚫고 들어갈 방법이 없어 고심하게 된다.

이때 손권은 관우에게 관우의 딸[29]과 자신의 아들[30]의 혼담을 주선하지만 관우는 유비와 손부인과의 일과 익양대치로 감정이 상해있는 상태라 사신을 상대로 모욕적인 언사를 날리고 단박에 거절한다. 이에 손권은 분노한 일이 있었다. 이전부터 계속 형주를 노리던 오나라였기에 익양대치로 종결시킨 노숙도 없는 마당에 오나라 내부에서도 관우를 공격하자는 말이 계속 나오고 있었다.

218년, 경기, 위황, 김의 허도에서 난을 일으켜 전자와 조정을 장악하고 마침내 유비를 불러 조조를 역적으로 선포하고 그를 치려고 했다. 이때 관우가 강성했으므로 조조는 에 머물던 왕필에게 허도를 지키게 하였는데 이들이 왕필을 죽이고 관우를 부르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219년, 유비가 한중 공방전의 승리로 한중왕이 되자 관우를 전장군, 가절월로 삼았다.

<황충전>에 따르면 유비가 한중왕이 되어 황충을 후장군으로 임명하려 하니 제갈량이 유비를 설득하며 말했다.
황충의 명망은 본래 관우, 마초와 동등하지 않았는데 이제 곧바로 동렬에 두려 하십니다. 마초, 장비는 가까이에서 그의 공을 직접 보았으므로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으나 관우는 멀리서 이를 들으면 필시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니 이는 불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유비가 말했다.
내가 직접 이해시키겠소.
그리고는 마침내 관우 등과 더불어 나란한 지위에 두고 관내후의 작위를 내렸다.

<비시전>에 따르면 유비가 한중왕이 되자 비시를 보내 관우를 전장군으로 임명했는데, 관우는 황충이 후장군으로 임명되었다는 말을 듣고 격분해서 말했다.
“대장부는 평생 노병(老兵)과 같은 대열에 있지 않는다!”

그는 그에게 제수되었던 관직을 거부하였다.
비시가 말했다.

"왕업을 세우는 자가 임용하는 인물들에게 하나의 기준을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옛날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은 전한의 고조와 어릴 적부터 친한 교분이 있었고, 진평(陳平)과 한신(韓信)은 초나라에서 도망쳐 뒤에 한나라에 도착했지만, 관직의 순서를 정하는 논의에서는 한신을 가장 높은 지위에 있게 하였고, 이 때문에 소하와 조참이 원한의 마음을 가졌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지금 한왕(漢王)은 일시적인 공로에 근거하여 한승(漢升: 황충)을 높은 신분이 되게 했지만, 마음속의 평가가 어찌 군후(君候)와 동등하겠습니까!
게다가 한중왕과 당신을 비유컨대 주군과 한 몸처럼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고 화와 복도 같이 합니다. 제가 당신을 위해 생각해 보면, 관호(官號)의 높고 낮음이나 작위와 봉록의 많고 적음을 계산하여 그를 마음으로써 간주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일개의 관리로써 명령을 받아 이를 시행하는 사람이지만, 만일 당신이 임명을 받지 않아 곧 돌아가게 된다면 당신 때문에 이와 같은 거동을 애석해 할 것이며, 아마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관우는 크게 깨닫고 즉시 임명을 받았다.

8. 번성 공방전

8.1. 번성 공방전 초기의 승리

한편, 219년 촉한군의 연승으로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때 <무제기>에 따르면 당초 조인은 관우를 토벌할 목적으로 형주의 번성에 진수하고 있었으며, <조인전>에 따르면 조조가 마초를 공격할 때 일어난 소백(蘇伯)과 전은(田銀)의 모반을 조인이 행(行)효기장군(驍騎將軍)으로서 7군(七軍)을 지휘해 토벌하고 이를 격파한 후, 조조가 조인을 행(行)정남장군으로 임명해 번성에 주둔하게 했으니[31] 오래전부터 관우를 토벌하기 위해 준비했다고 봐야 한다. 이후 218년 10월 남양 사람들이 요역에 고통스러워하자 후음 남양 태수 동리곤을 붙잡고 관원 및 백성들과 더불어 모반한 후 관우와 연합했다. 이후 219년 봄 정월, 조인이 완을 함락하고 후음을 참수한 후 다시 정남장군으로서 번성에 주둔했다. 이는 <무제기>와 <조인전>의 기록인데 이에 관우는 후음의 반란 이후 북진을 하여 이 일은 놀라운 결과를 낳는다.[32]

오와의 동맹이 수복되고, 유비가 한중왕에 오르며 촉한의 기세가 치솟는 가운데, 조조 최후의 대규모 원정이었던 한중전에서의 패배로 위왕 조조는 그 권위가 추락했다. 각지에서 손랑, 허유[33] 등의 반란이 일어나 중원에 혼란이 일자 관우는 그 틈에 형주의 군세를 이끌고 양양과 번성을 차지하기 위해 북진했다. 이에 대해선 조인이 먼저 관우를 치기 위해 번성에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조위의 선제공격을 막기 위해 북진한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도 있다. 절월 역시 이를 위해 어느 정도의 자율권을 부여한 것이라는 것. 관우가 봉수대를 쌓고 언제든 돌아갈 준비를 했다는 기록도 있어서 이런 예방전쟁이 확대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34]

<만총전>에 따르면 우선 관우가 양양을 포위했기에, 만총은 조인과 함께 번성으로 가서 주둔하여 관우군을 막았다. 즉 관우의 본영이자 포위망의 시작은 면수 남쪽인 양양부터였다. 이후 서황, 우금 등의 기전을 보면 관우를 토벌하러 간다. 즉, 조인 만총은 관우를 (번성에서) 막고 있었으므로, 그 이후의 군세들은 관우를 토벌하러 오는 것이다. 7월, 조조는 5대장 중 한 명인 우금에게 최정예인 7군을 주어 조인을 도와 관우를 공격하게(遣于禁助曹仁擊關羽) 하고[35] 서황을 완에 주둔시켰다.

자치통감》과 <온회전>에는 아예 이전부터 온회가 관우를 경계하면서[36](《자치통감》에 따르면 큰 비, 장맛비에 따라) 지금 강물은 불어나는데 조자효(조인)가 현군[37]으로 장래의 위험에 대비하지 못하고 있으며, 관우는 용맹하며 예리하므로[38], 승기를 잡아 진군해 오면 위험하다며 이 기세를 타고 들어오면 근심이 될 것이라고 홍수에 대해 걱정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는 관우가 홍수를 이용해 위군을 격파하는 것을 계획하고 치고 올라갔을 가능성을 시사한다.[39]

자치통감》에 따르면 7월에 관우 스스로 무리를 인솔해 조인을 번성에서(於樊)[40] 공격했고, 이에 조인은 좌장군 우금과 입의장군 방덕 등에게 명령해 번성의 북쪽에 주둔하도록 했다.[41] 조인이 이렇게 우금과 방덕을 북쪽에 주둔하게 한 것은 조인 역시 자신의 군대가 외떨어진 현군임을 인식하고 번성을 둘러싸고 있는 면수를 통해 관우가 번성을 포위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 북쪽을 보완한 포진으로 보인다. 성에 남아 있었던 조인이나 만총이 방덕처럼 따로 성을 나서서 번성 인근 면수의 물가를 방어했다는 말은 없으므로 면수를 장악한 관우의 선봉이 도착해 육지에 내려 번성에서 공성전을 하게 된다. 즉, 자신은 번성에 의지해 공격하는 관우를 상대하고 북쪽은 방덕과 우금에게 맡겨 수비하게 한 것이며, 그래서 번성을 완전히 포위하려는 관우와 그를 막으려는 방덕의 치열한 교전이 있었던 것이다. 이때 방덕은 번성에 주둔하며 관우를 토벌했는데 번성 아래의 여러 장수는 방덕의 형이 한중에 있어 자못 그를 의심했다.
이에 방덕이 항상 말했다.
"나는 국은을 입은 몸이니, 죽음으로 의를 다하겠소. 내가 직접 나서서 관우를 치고자 생각하고 있소. 올해 안에 내가 관우를 죽이지 못하면, 관우의 손에 죽겠소."
후에 그 말대로 전투에서 방덕은 관우와 맞섰으며 직접 관우와 더불어 교전하며 관우를 쏴 이마를 적중시켰으나 관우는 죽지 않았다. 방덕은 항상 백마를 타고 지휘했는데 관우군은 그를 '백마장군'이라 이르며 모두 꺼렸다.

<무제기>에 따르면 관우를 공격하려고 7군을 보낸지 1개월이 지난 가을 8월, 번성에 홍수가 났다. 때마침 하늘에서 장마가 10여 일 계속돼 한수가 범람했고, 번성의 평지 5, 6장이 잠겨 방덕과 여러 장수는 물을 피해 둑에 올랐다. <우금전>에 따르면 한수(漢水)가 범람해 우금 등의 7군이 모두 물에 잠겼다. 우금이 제장들과 함께 고지에 올라 물을 바라보니 회피할 길이 없었다. 7군이 수몰되었던 수엄칠군고지 자체는 평지에 가까운데 여기서 북쪽으로 몇km 이동하면 물을 피할 수 있는 해발 100m가 넘는 구릉지 언덕이 나온다, 아마도 갑자기 올라온 물길때문에 그곳으로 피신하지 못했던 것 같다.[42] 이때 이미 배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관우가 큰 배를 타고 와서 우금 등을 공격하자 마침내 궁지에 몰린 우금은 투항했다. 수해를 피한[43] 관우는 배를 타고 공격해와 허우적대거나 제방으로 올라간 위군을 모조리 화살로 쏘아 죽였다. 이때 형주 자사 호수 남향 태수 부방도 관우에게 항복했다. 살아남은 군사 30,000명[44]도 모조리 포로가 되었다. 여기서 남향군은 본디 형주 남양군의 일부인데 208년에 조조가 형주를 접수하면서 남양의 서쪽을 갈라 새로 만든 군이었다. 서쪽으로는 무관 상용이 있고 동쪽으로는 얼마전 반조조 반란을 일으킨 후음이 진압된 이 있었다. 남향태수가 잡혔다는 것은 이 지역을 이끌던 행정관과 그 휘하 병력들이 관우에게 사로잡혀 해당 지역이 공백상태에 빠졌다는 얘기가 된다. 즉 조조 치하의 형주는 얼마전에 있었던 후음의 반란 이후 불안정한 상황에서 남쪽의 관우 말고도 서쪽의 상용에서의 공격을 대비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 셈이었다. 훗날 동오의 육손에게 격파된 남향태수로 곽목이 나타나는 걸 보면 관우는 따로 남향태수를 임명해 이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괜시리 관우가 유봉 맹달에게 번성으로 지원을 오라고 한 것이 아닌 것이다.[45]

<방덕전>의 기록에 따르면 관우는 물을 피해 제방에 올라간 방덕을 비롯한 여러 위군 병사들[46]을 상대로 사방을 큰배로 둘러싼채 화살을 쏘아 맹공격했다. 일출때부터 아침을 넘어 정오가 지날때까지 온종일 격렬하고 치열하게 방덕 휘하의 위군과 싸웠는데, 이때 방덕은 갑주를 몸에 두르고 활을 잡고 나섰으니, 쏘는 화살마다 빗나가는 것이 없었다 할 정도로 분전했지만 결국 가진 화살이 다 떨어졌으므로 도검을 쥐고 단병접전을 벌였으며, 촉한군에 항복하려는 동형 동초 등의 목을 베고 싸웠으나 결국 장수 한 명과 오장 두 명을 거느리고 조인에게 돌아갈 목적으로 탄 작은 배가 뒤집혀 관우에게 사로잡혔다고 한다.[47]

관우는 방덕의 형제 한중에 있다면서 자신의 장수가 될 것을 정중하게 권유했지만, 방덕은 끝까지 기개를 잃지 않았다.
관우: "경의 형은 한중에 있소. 나는 경을 장수로 세우려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찌 빨리 항복하지 않았소?"
방덕: "위왕(조조)께는 정병 100만 명이 있으며, 위의를 천하에 떨치고 계신다. 유비 따위는 범재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 대적이나 가능할 줄 아느냐! 나는 나라를 위해 귀신이 될 생각이니, 적의 장수 따위가 되지는 않을 셈이다!"
방덕은 이렇게 욕을 퍼부었고, 끝까지 투항을 거부하다가 처형되었다.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조위의 최정예 7군이 주둔한(훗날 '수엄칠군고지'라고 불린다) 번성 북쪽은 면수와 상당히 떨어져 있는 남양군 등현 북서쪽 인근이다. 《 자치통감》 등을 살펴 전투 과정을 상고해 보면 7월, 관우는 번성에서 공격했고, 방덕과 함께 지원군으로 온 우금은 번성 북쪽에 진을 쳤으며, 방덕은 친히 나서 관우와 더불어 격렬하게 교전했다. 8월, 관우는 홍수가 나자 배가 운용할 수 있을 정도로 북쪽 육지가 물에 잠긴 타이밍에 면수에 있었던 수군을 보내 홍수를 피하지 못한 조위군에게 재차 공격을 가했다. 당장 수로를 장악한 관우의 입장에서 본진에서의 진군 시간을 줄이고, 효율적으로 전투하고자 한다면 조위군은 수군이 없다고 추정되는 상황에서 관우가 평지에 적과 대치하며 진을 쳤다가 큰 비가 오자 적을 붙잡아 둔 상태에서 진을 슬그머니 물렸다고 볼 가능성도 충분하다. 간단히 말해서 양측에 똑같이 적용되는 자연재해인데 치열하게 싸운 한 쪽은 10일이란 시간 동안 대비를 못한 채 수몰되었고, 한 쪽은 은근슬쩍 안전한 곳으로 군세를 이동시킨 다음 기세등등하게 배를 타고 와서 화살을 쏘아대며 닥치는데로 죽이고 사로잡았다. 전술적인 운용에서 관우가 천시를 이용해 조인, 우금, 방덕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런저런 논란이 있지만, 관우 인생 최고의 전성기는 바로 번성 전투였다. 번성 공방전 관련 기록에는 이상하게 촉한의 수군에 대한 기록은 있는데 번성에 주둔했을 법한 조위의 수군에 대한 기록이 없다. 어떤 일로 없었거나 관우의 수군에 격파되었거나 중 하나일 것이다. 번성 방어에 있어 수군의 존재는 필수 불가결이었기에, 조인이 바보가 아닌 이상 수군의 존재가 중요하다는걸 알고 있었을터, 그럼에도 관우의 수군만이 번성에 존재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사실이다. 청니 대치의 사례를 보더라도 관우와 조인이 강릉과 양양 사이의 어디에서 쯤엔가 한판 붙었을 가능성은 분명히 있다. 그때 조인의 수군이 함께 박살났다고 가정한다면 이해가 가는 일이다. 병력이야 다른 곳으로 옮길 수도 있겠지만 배들은 그럴 수도 없으니까. 수군이 괴멸되었거나 혹은 처음부터 없었다면 번성과 양양은 관우의 수군이 장악한 면수에 둘러싸인 꼴이 되므로 조인이 대비하지 못하고, 적진으로 깊이 들어가 현군이 되었다는 온회의 말도 이해할 수 있다.

이를 보면 조위 수군의 질이나 양이 애초부터 관우의 수군에 상대가 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고려해 볼 수 있다. 관우는 장판파 전투 이전까지 수군을 많이 가지고 있었고 이후 유기의 수군과 합쳐 수가 불어났을 것이다, 이후 관우는 10여 년 동안 강릉에 주둔했는데 장강에 있는 강릉의 특성상 수군을 더 증원했을 것이므로 조조군의 수군보다 물량이 더 많았을 것이라는 것은 설득력이 있다. 다만 <무제기>에는 애당초 조인이 번성에 주둔한 이유가 조조가 조인을 시켜 관우를 먼저 선제공격해 토벌[48]하기 위함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런 대대적인 원정으로 강릉이나 이릉을 점령하기 위해선 훗날 조비의 남정[49]에서 보이듯이 수군을 증원하는 것이 필수였다. 게다가 조조군에도 10년의 시간이 있었는데 번성을 지원할 수군이 없었다는건 이해하기 어렵다. 당장 후대에 형주에 주둔한 왕창 왕기도 형주 북부 위군에 수군이 있었음을 증언해 보이고 있다.

<무제기>에 언급되듯이 조인은 당초 관우를 먼저 토벌하기 위해 번성에 주둔했으므로, 관우가 주둔한 강릉을 치기 위해선 수군이 필요하다는 걸 위나라 상층부에서 모를리가 없었다. <조인전>과 다른 기전을 살피면 조조가 마초를 처음 토벌할 때 조인이 행(行)효기장군으로서 소백(蘇伯)과 전은(田銀)을 토벌한 다음 행(行)정남장군으로 임명되어 후음의 반란을 진압하기 전까지 번성에 지속적으로 주둔했고, 후음의 반란이 진압된 뒤에도 정남장군으로서 번성에 주둔했으므로 조인이 효기장군이었던 213년(조조의 위공 즉위) 이후 어느 시점부터 219년까지 계속 번성에 주둔하면서 관우를 토벌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훗날의 조비의 남정처럼 강릉을 토벌하기 위해 수군을 준비하지 않았을 리는 없다.[50]

어쨌거나 관우 그가 무인으로서 이룩한 최대의 전공인 우금 7군 포획, 방덕 참수의 원동력 역시 다름 아닌 수군이었다. 성이 물에 잠기는 역대급 장마속에서, 우금을 비롯한 7군은 그대로 수몰된 반면, 10여 년 동안 형주 일원에서 복무한 경험을 살려 수백 척의 전선을 준비한 관우는 승리했다. 그는 이 선박만으로 양양을 포위했고, 불어난 물의 흐름도 자유자재로 이용하는 등, 그야말로 수전 스페셜리스트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물에 익숙지 않은' 북방의 조위군을 농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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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양양성과 번성은 천혜의 요새라 할 만했다. 이 주변은 한수가 빈번히 범람하는 곳이라 기병과 공성병기를 사용하기 힘들었으며 일단 어느 한 쪽이 포위되더라도 반대쪽이 도와줄 수 있다. 한수를 사이에 두고 있으니 배를 이용하여 서로에게 물자를 공급해 줄 수도 있었다. 강을 끼고 있었기에 수비에 유리했고, 설령 양쪽이 모두 포위되더라도 수군을 통해 강을 장악한다면 멀리서도 물자를 운송받을 수 있었다. 이 두 성을 효과적으로 공략하기 위해서는 육군을 동원하여 두 성을 한꺼번에 포위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수군을 운용하여 한수를 장악함으로써 상대의 수로 이용을 막아야 했다. 정말 까다로운 조건인 것이다.[51] 그리고 관우는 이걸 해내어 조인은 번성에 고립된다.

관우에게 있어선 드디어 공격전에서도 자신의 수전 능력을 입증한 최초의 순간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설령 상대가 수전의 강자들이 아니라한들, 조인, 우금, 방덕은 모두 천하의 내로라하는 장수들이었다. 그 중 방덕을 베고 우금을 생포하며 조인을 포위했다. 이미 이 시점에선 관우 아빠가 아니라 할배가 와도 그를 자제시키기란 힘들었을 것이다.

한편 이에 맞추어 허도 인근 예주 양국, 예주 영천군 겹현[52], 낙양 인근 사례 홍농군 육혼현의 군도, 반 조조세력들이 혹은 멀리서 관우의 관인과 봉호를 받아 그의 일당이 되었다.[53] 또 이 틈을 타 조조의 본거지인 업성에선 위풍이 많은 사람이 연루된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켰다가 조비에게 진압되었다. 위풍의 난은 사료가 없어서 어떤 성격의 반란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관우 진격 이후 혼란한 틈을 탄 공격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또 금석문인 위광해장군여군비(魏橫海將軍呂君碑)[54]에서 이르길
관우가 변방을 흔들며, 유씨의 백성을 공경했고, 홍수가 퍼지고 넘쳐 번성을 띄우고 가라앉게 해, 평원의 모든 병사는 겉으론 깔보나 몰래 내통했고, 맹장의 날랜 기병들은 물에 빠져 잠기거나 떴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재앙을 일으켜, 악한 이들이 들끓어, 어떤 이는 성을 유지하며 배반했고, 어떤 이는 무리를 거느리고 깃발을 등에 지며, 스스로 곧 문에 대적했다. 중인(中人) 이하는, 모두 다른 마음이 생겼다.
라고 했다.

관우는 면수 인근에서 여상이 지키는 양양과 조인과 만총이 지키는 번성을 수•륙양면으로 모두 포위했다. <조엄전>에 따르면 조엄 서황을 따라 번성에 도착한 후, 관우는 조인을 더욱 견고하게 포위했다. 수몰과 관우의 공격 이후 번성에는 인마 수천 정도만 남았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번성은 5, 6장 가량 수몰되었는데 이건 무려 15m에 가까운 높이이다. 위나라의 최고 사령관은 포위당해 위험에 빠졌고, 구원을 보낸 최정예 병력인 7군은 폭우로 인해 수몰되었으며, 구원군 총사령관은 사로잡혔다. 그래서 당시 관우의 이름은 온 천하를 진동시키고 있었다.[55] 또한 관우를 따라 반조조 반란을 일으킨 추종자의 무리는 허도 근방을 위협했다.

관우에게는 방덕이 쏜 화살에 이마를 적중당한 일화와 비슷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일찍이 관우는 화살에 맞아 왼팔을 관통당한 일이 있었다. 그 뒤 비록 상처는 치유되었으나 몹시 흐리며 비오는 날이면 늘 뼈가 아팠다. 의원이 말했다.
"화살촉에 독이 있어 이 독이 뼈에까지 들어갔습니다. 응당 팔을 갈라 상처를 내고, 뼈를 깎아내 독을 제거해야 하니 그 연후에야 이 통증이 없어질 것입니다."
관우는 이내 팔을 뻗어 의원에게 자신의 팔을 가르게 했다. 이때 관우는 때마침 제장들을 청하여 음식을 먹으며 함께 하고 있었는데, 팔에서 피가 흘러 대야에 가득 찼으나 관우는 구운 고기를 자르고 술잔을 끌어당겨 담소를 나누며 태연자약했다고 한다.[56][57]

8.2. 위나라의 반격

당시 조조가 받던 압박감이 얼마나 거대했는지 번성 등이 함락되면 허창과 너무 가까운 위치인걸 생각해 도읍을 옮기는 것을 고려할 정도였다. 물론 한창 북쪽 업에 있던 조조가 본인의 신병 걱정으로 압박받은 것은 당연히 아니다.[58] 여기 있던 헌제가 관우에 호응해 들고 일어난 반란군들에 의해 사로잡힐까 걱정해서였다.[59] 이때 사마의와 호군 장제는 조조의 의견에 반대하며 "관우가 뜻을 이루는 것을 손권이 필시 원하지 않을 것이니 가히 사람을 보내 손권이 그 배후를 치도록 권할 만합니다. 강남을 떼어내어 손권을 봉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번(樊)의 포위는 저절로 풀릴 것입니다"라며 손권을 이용하여 이 어려움을 해결하자고 한다. 유비와 손권의 사이를 정확하게 꿰뚫어 본 말에 조조는 용기를 얻고 손권에게 연락을 취하자 장제전에 의하면 손권은 '즉시' 움직였다고 한다. 동맹의 실상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조조는 서황을 보내 조인을 도와 관우를 치게 하여 완(宛)에 주둔했다. 8월, 조조는 서황을 2차 구원병으로 파견시켰으나 환계전에 따르면 서황은 조인을 구하는데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했다. 조엄전에 따르면 번성에 도착한 후, 관우는 조인을 더욱 견고하게 포위했고, 남아 있던 구원병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나 서황이 이끄는 병사로는 포위망을 뚫기에 역부족이었지만, 장수들은 서황이 급히 구조하지 않고 있다고 질책했다. <서황전>에 의하면 이 때 마침 한수가 크게 범람하여 관우가 번(樊)에서 조인을 포위하고 또한 양양에서 장군 여상을 포위했으나 서황이 이끌던 병사들은 다수가 신병이었기에 관우와 쟁봉(爭鋒)하기 어렵다고 여겨 양릉피로 나아가 주둔했다. <오주전> 기록으로는 이때 관우는 수군을 이용하여 우금 등의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전부 포로로 잡아 강릉으로 압송했다. 단지 양양성만은 함락시키지 못했다고 한다.

218년, 김의, 경기, 위황, 길비의 난이 일어났을 때 그들이 호응하고자 했던 인물이 바로 관우라는 점[60]을 미루어보면 조조 입장에선 도저히 편안히 잘 수가 없는 것이었다. 번성이 뚫리면 그 다음은 완까지 일사천리고 만약 한중에서 숨을 가다듬고 있던 유비까지 가세한다면? 그렇게 될 경우 어떤 꼴이 날지 모골이 섬뜩했을 것이다.

급박한 것은 번성의 조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인은 군기를 다독였으나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여전히 성내에 물이 가득차 빠지지 않고 있었다. 번성은 완전히 물에 잠겨서 도저히 성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61] 군량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 지원군 역시 수몰되었으므로 사기가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이에 번성을 버리고 달아나자는 자도 있었으나 어떻게든 이곳을 사수하여야 된다는 만총의 말에 조인은 제장들을 다시 모아 결사의 각오를 말하니 모두가 감격하여 다시 군사들의 사기가 올랐다. 그리고 실제로 조인의 이런 끈질긴 항전, 오군의 침공으로 뒤가 끊길까 하는 염려에 관우는 섣부른 북진을 하지 못하였다. 번성에 발이 묶여 당시 한중공방전과 7군의 패배, 그리고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인해 위기에 봉착한 상태였던 조조에게 대응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주게 되고 만다. 만총의 판단이 적절했던 셈.

이렇게 번성 전투의 국면은 자연히 육전의 기량과 세력의 우열로 접어들었다. 우금을 대신해 투입된 서황은 앞뒤로 12영에 달하는 지원 병력이 가세하면서 세력의 우위를 점했고, 이 병력의 지휘관인 은서, 주개 역시 모두 관중과 하북에서 잔뼈가 굵은 부장들이라는 점에서 기량 또한 앞서나갔다. 조조가 거병한 이래 30년간 단련되어 천하 최강으로 성장한 위군이 서황을 철벽처럼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관우는 상용에 있는 유봉 맹달에게 구원군을 요청했으나[62] 유봉과 맹달[63]은 아직 점령하지 얼마 안 되어 군사를 보낼 여지가 없다면서 유봉이 맹달의 군악대를 빼앗아[64] 싸우고 있는 형국이었고[65] 미방 사인이 병량보급에 전력을 다하지 않아 관우는 3만 포로의 식량까지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물러나지 않고 영릉군의 상관에 있던 병량고의 군량을 사용해 포위망을 유지시켜 점령의 의지를 분명히 나타내었다.[66]

한편 《촉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관우가 처음 출군해 번성을 포위했을 때 크기가 소만큼 한 검은 돼지가 그의 발을 깨무는 꿈을 꾸고는 아들 관평에게 말했다. "내가 올해 쇠약해졌으니 다시 돌아가지 못하겠구나!"[67][68] 이 돼지 꿈 내용은 연의에서도 나오지만 부하들이 길몽이라고 해석하는 것으로 각색되었다.

《전략》에서 이르길 관우가 번을 포위하여, 손권이 사신을 보내 그를 도움을 청하며, 사신이 급히 나아가지 말도록 권하고, 다시 주부를 파견해 먼저 이르러 관우에게 알리게 했다. 관우는 그가 느린 것에 성냈고, 또한 스스로 이미 우금 등을 잡았기에, 곧 욕하면서
담비새끼(옥편玉篇, 여우와 담비)가 감히 이와 같은데, 만약 번성이 함락되면, 내가 너를 멸할 수 없겠는가!

손권이 이를 듣고, 그가 자신을 가벼이 여김을 알아, 거짓으로 손수 편지를 써 관우에게 사과하며, 몸소 가는 것을 허락했다.

배송지는 '이미 형주와 양주는 서로 겉으로는 가깝지만 속으로는 사이가 나빠서 손권이 관우를 습격하며, 군대를 숨겨 몰래 출발했습니다. 여몽전(呂蒙傳)을 살피면 정예병을 배 안에 숨겨, 범인에게 노를 젓게 하고, 상인의 옷을 만들게 했다고 이르니, 이를 근거로 말하자면, 관우는 손권에게 구원을 청하지 않았고, 손권도 필시 관우에게 마땅히 간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서로 도와주는 것을 허락했다면, 무슨 까닭에 그들의 거동을 숨겼겠습니까?'라고 이 기록을 비판하였다. 자치통감의 경우 관우의 손권에 대한 외교적 모욕에 대해선 혼인사자 모욕만을 기록하였다.

10월, 손권은 조조에게 칭번(번국을 칭함)하고 관우를 치겠다고 편지를 보낸다. 이에 조조는 동남방면에 있던 장료를 형주로 소환한다. 장료가 미처 도착하기 전에 서황이 번성의 포위를 풀어내고 조조가 마피에 주둔하는데 장료가 마피에 있을때 양주 26군의 사령관 하후돈도 그대로 마피에 있었다. 이는 당시 회남전선의 군대가 형주로 이동한 것을 뜻한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당시 219년 당시 손권이 합비를 잠시 공격했다. 회남에는 여러 주의 군사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온회전>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 당시 양주 자사였던 온회 연주 자사 배잠에게 적(손권)은 걱정할 것이 아니라고 하며 오히려 장료마저 소집될 것을 확신하였다. 이후 조서가 내렸고 배잠과 예주 자사 여공을 불렀다. 온회는 지금 긴급하게 회합을 하지 않는건 먼 곳의 백성들을 동요하지 않게 하려는 것일뿐 곧 (소집) 밀서가 당도할 것이라고 했으며 느긋하게 있던 배잠에게 서두르라고 말했고 과연 그 말대로 과연 재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온회는 아예 서둘러 가지 않으면 죄를 받을것이라고 하기까지 했다. 이것은 물론 오와 밀약을 맺었기 때문에 가능한 조치. 오군이 합비로 올 일은 절대 없다는 확신이 없는 상태였다면 이 조치는 대들보 빼서 기둥으로 쓰는 모양밖에는 안된다. 심지어는 자신마저 서황의 뒤를 이어 남하하기 시작한다. 당시 조조의 이 당시 상황이 이렇게 급박하였다.

이때 마피에 주둔한 조조의 군대가 관우의 군대와 싸웠다는 설도 존재한다. 하후돈전에서 '건안 24년 태조(조조)의 군이 여포의 군을 마피에서 격파했다'고 쓰고 있는데 이때는 이미 여포가 죽은지 20년 후다. 《 삼국지집해》에 따르면 이를 관우의 오기라고 보는 쪽이 많은데 조익은 관우의 군대를 서황이 격파하고 마피에 주둔했기에 관우의 오기로 보았다. 또, 조조는 마피에 주둔했지 관우와 직접 마피에서 전투가 있었던 적은 없어서 잘못 삽입된 문구라고도 본다. 다만 학자들이 관우의 오기라고 보는 것도 이유가 있는데 이 기록을 관우 본인이 아니라 '관우의 군대'의 오기로 본다면 조조와 관우가 직접 싸운게 아니라 '관우가 파견한 군대'와 '조조의 군대'가 마피에서 싸웠다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사종영은 증거는 없지만 이것은 '관우가 파견한 별장(別將)이 겹(郏)현 아래에 있던 것'으로 관우가 파견한 별장 가운데 동명이인 여포가 있던게 아닌가 보기도 했다.

<동소전>에 따르면 관우가 조인을 번성에서 포위하자, 손권은 사자를 파견하여 이런 말을 하였다.
저는 군대를 보내어 몰래 관우를 습격하려고 합니다. 이 일은 비밀을 구하니 장군께서는 누설하여 관우가 방비를 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조조가 이 말을 듣고 모든 신하들에게 물어보니, 신하들은 한결같이 그것을 비밀에 부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그러나 동소는 말했다.
마땅히 손권에게는 비밀로써 호응하면서 속으로는 그것을 누설해야 합니다. 관우가 손권이 온다는 것을 듣고 군사를 돌려 스스로를 보호하게 된다면, 번성의 포위는 속히 제거 될 것이므로, 오나라와 촉나라 두 적이 서로 대치하게 하여 앉아서 피폐함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조조가 좋다고 말했다. 즉시 칙령을 내려 번성을 구할 장수 서황에게 손권의 서신을 포위된 번성과 관우가 주둔해 있는 가운데로 쏘게 하였다. 포위된 조조군은 이 소식을 듣고는 사기가 백배가 되었다. 관우는 과연 마음속으로 주저주저하면서 퇴각하지 않았다. 손권의 군대가 도착하여 그 두 성을 취해 버리자, 관우는 곧 산산이 무너졌다.

서황이 이끄는 지원군은 다시 조인의 구원을 꾀한다. 서황은 최악에 상황에 처한 조인의 처지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용의주도하게 관우를 살피며 전투를 피하고 지원을 기다렸다. 이에 대한 제장들의 불만이 없지 않았으나 그때 의랑 조엄이 그들을 잘 다독여 내분은 피할 수 있었다. 조엄은 당장 싸우자는 서황 휘하의 장수들을 설득하고 곧 땅속으로 길을 파고, 화살을 날려 조인에게 편지를 보내서 몇 차례 소식을 연락하였다. 북쪽의 지원군 또한 도착하여 힘을 합쳐 크게 싸웠다고 조엄전에 전한다.

《촉기》에 따르면 서황은 관우와 싸움 도중 사사로이 만나 평상시같이 이야기했다. 이때 서황이 외치길
관운장의 목을 얻는자는 천금을 내리리라!
관우가 놀라고 당황하여 물었다.
대형(大兄), 이 무슨 말이오!
서황이 말했다.
이는 나라의 일이오.

앞서 말했듯 서황이 지원을 기다린것은 겁이 나서가 아니라 서황의 병사들이 대부분 신병이라 관우의 강병을 베겨낼 수 없었기 때문으로, <서황전>에 따르면 이후 서황은 참호를 파며 언성의 배후를 끊으려는 듯한 행동을 취했고 촉군은 둔영을 불사르고 후퇴했으며 서황은 언성을 점령하면서 영을 연결시키면서 포위망으로부터 3장 떨어진곳까지 진출하였다. 한편 조조는 회남의 장료, 하후돈, 회남 등지에 주둔하면서 각주의 군사를 이끄는 서상, 여건, 배잠, 여공, 서주 장패 등의 병력을 집결시키고 직접 서황을 지원할 계획을 세웠다. 이때 환계의 조언에 따라 하북에서 잔뼈가 굵은 은서 주개를 서황에게 파견했다, 때 마침 12영(營)의 군사들이 서황에게 지원군으로 도착해 전투가 시작되자 서황은 그간의 소극적인 움직임이 무색하리만치 어마어마한 싸움을 보여주었다. 서황전에 따르면 이때 관우의 군대는 위두에 둔(屯)이 있고 또한 별도로 사총에 주둔하고 있었다. 서황은 위두의 둔영을 공격하는 것처럼 널리 소문을 퍼뜨리고는 은밀히 사총을 공격했다. 관우는 사총이 곧 무너지려 하는 것을 보고 급히 스스로 보기 5천을 이끌고 출전했으나 서황이 이를 들이쳐 패주시키고, 포위망 안까지 깊숙이 추격하여 격파하니 적군들은 스스로 면수(沔水)에 투신해 죽기도 했다. 여기에 항복했던 호수 부방도 죽었다.[69]

동시에 만총은 백마(白馬)를 물속 깊숙이 잠기게 하여 제품으로 삼고는 군사들과 함께 맹세했다. 마침 서황(徐晃) 등의 구원병이 도착했으므로[70] 만총은 (이들과 함께) 전력을 다해 싸워서 공을 세웠으며 만총은 승진하여 안창정후(安昌亭侯)로 봉해졌다. 이렇게 밖에서는 서황, 번성 안에서는 만총이 안팎으로 공격하여 관우는 결국 번성포위망을 걷어낼 수밖에 없었다. 관우는 어느정도 피해를 보곤 이대로는 양번 포위망 유지는 어렵고 양양에 집중하는게 맞다고 판단해서 병력을 후퇴시킨것으로 보인다. 사서에서의 묘사를 보면 분명 가볍게 여길 수 없는 피해를 입었지만 모든 병사들이 모랄빵에 걸려 자살했을 리 없고, 5천 보기 중 생존자들과 다른 둔영을 지키던 병사들과 공성에 집중하던 병사들이 상황을 파악하고 번성 포위를 푸는 희생을 하더라도 최대한 결집해 항전하는 한편 퇴로를 확보하는데 집중했을 거다. 당연히 관우의 본대를 소탕하여 형주 일대에서 관우, 더 나아가서는 촉의 세력을 완전히 뿌리뽑겠다는 생각을 하는 위군이 역으로 공세를 퍼부었을 텐데 완전히 면수를 장악한 수군이 연계해서 육군을 지원한 덕분에 위군도 퇴각하는 촉군을 소탕하는 것은 하지 못하면서 관우가 아직 싸울 수 있는 규모의 병력을 보존하여 퇴각했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위나라 원군과 번성에서 버티던 위군이 앞뒤에서 반격을 가하여 번성의 포위를 유지하기란 불가능해졌으니 관우가 이끄는 촉군은 번성에서 물러났지만 그것이 완전히 싸움이 끝났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관우의 수군은 위에서 언급했지만 번성의 포위가 풀렸음에도 여전히 면수를 독차지한 상태였고, 관우가 번성에서 퇴각시킨 육군은 양양을 포위한 아군과 합류해 아예 양양을 외부와 고립시켜 연락을 끊어버렸다. 비록 격전을 펼치며 지원도 오지 않고 지쳐가던 촉군이었지만 관우는 물론 그가 이끄는 촉군은 여전히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이 상황에서 위군이 정면에서 관우를 격파하려면 3가지의 단계를 겨쳐야만 했다. 우선 1차적으로 면수의 수군을 격파해야 하며 그 후에는 성공적인 도강 작전을 펼쳐 군사를 반대편에 주둔시켜야 하고 그 다음 양양을 포위하고 있는 관우군 주력을 격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군사작전이 상당히 어렵다면 점을 감안하면 장기적으로는 가만 놔두었을시 양양이 관우의 손아귀에 들어갈 공산이 커지는 것이다.[71] 그렇기 때문에 조조는 군대를 퇴각시키지 않고 군대를 양번에 규합하고 있었다.

만약 손권의 공격이 없었다고 가정한다면, 관우는 형주를 위나라의 블랙홀로 만들어버리며 위의 대다수의 전력을 형주지방에 묶어놨을 것이다. 1차 목표인 번성을 점령해 남양/ 허창 방면으로 진군하는 건 힘들어졌지만 최소한 전선을 고착화시킬 수는 있었을 것이고 그 상태로 시간이 조금만 흘렀더라면 한중 공방전 이후 다시 재정비를 마친 유비가 직접 장안으로 북진할 테고, 위군의 상당수가 형주에서 관우를 상대하느라 발목이 붙잡혀있을 때 유비까지 관중을 친다면 당연히 관중은 풍전등화가 될 것이며[72], 촉의 손에 넘어간 관중에 있는 장안도 자연스럽게 떨어진다. 그 다음은 당연히 낙양과 허창이 바로 촉의 코앞에 닿기에 위의 입장에서 관우에게 시달리던 때 이상으로 천도를 고려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유력한 도시는 조조의 본거지인 업성이 될테고.[73]

그러나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팀을 노리고 있던 손권이 곧장 관우의 치중(輜重)을 습격하여 빼앗고 남군을 친다는 소식이 들렸다. 관우는 이 소식을 듣고 즉시 퇴각하여 남쪽으로 돌아갔다.

8.3. 최후

이렇게 서황과 만총이 관우의 번성 포위망을 풀어내고 있을 무렵, 후방에선 오나라의 대도독 여몽과 휘하 장수 육손이 관우 일행을 잡을 거미줄을 준비하고 있었다.

<여몽전>에 이르길 이때 관우가 번성을 토벌하면서 공안 남군에 수비병을 많이 남겼는데 관우가 자신의 뒷치기를 두려워 한다고 알아챈 여몽은 계책으로 병 치료를 명목으로 건업으로 돌아갔다. 관우가 이를 믿고 점차 병사를 번성으로 보냈다. 당초 여몽을 대신하여 육구에 도착한 육손이 관우에게 관우를 치켜 세우는 편지를 보내자 오만해진 관우는 오에 대한 방비를 게을리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편지에서 육손이 관우에게 편지를 보내 적극적으로 협력을 약속하였는데 관우는 이 말을 듣고 오판한 것으로 보인다.[74]

이때 위에서 우금을 시켜 번성을 구하게 했지만, 관우는 우금 등과 인마(人馬) 수만을 다 잡아 들이고 양곡이 부족함에 기탁해 상관(湘關)의 미곡을 마음대로 취하였다. 삼국지집해 여몽전에 수록된 학자들의 견해를 따르면 여기서 상관은 익양대치 시 서쪽 촉한이 취한 영릉지역으로 영릉의 치소인 청릉현 옆이다. 이들의 기록에 따르면 상수를 경계로 삼고, 관을 물 위에 설치하야 상인과 여행객을 통하게 해 이를 상관이라고 일렀다라고 했으니 해당관은 양측의 경계에 있었으며 이곳을 지나가는 인원을 관리했다고 보인다. 상관과 번성은 수백리가 넘으니 관우가 직접 취하진 않았을 것이며 관우 휘하의 관리들이 이를 취했을 것이다.

애초에 관우를 칠 생각이던 손권은 이를 듣고 마침내 실행에 옮겼는데, 먼저 여몽을 파견해 선봉에 서도록 했다. 여몽이 심양에 이르러 그의 정병들을 모두 배 안에 숨겨두고, 백성들에게 상인의 복장을 입히고 노를 젓게 하여 관우가 강변에 세워둔 둔영의 관측소에 이르러 모두 잡아 포박해 버리니, 이 때문에 관우는 알지 못했다. 마침내 남군에 도착하자, 사인과 미방이 모두 항복했다. 호삼성은 이를 보고 미방과 사인의 투항이 없었다면 관우가 오의 기습을 일찍 알아차렸을 거라 평가했다.

당시 남군 태수 미방 강릉에 있고 장군 사인(부사인)이 공안에 주둔했는데 그들 모두는 관우가 자신들을 업신여기는 것에 평소 원한을 품었었다. 관우가 출군한 이래 미방, 사인은 군수물자를 공급했으나 그를 돕는데 전력을 다하지 않자 관우가 "돌아가면 응당 죄를 다스릴 것"이라 하니, 미방과 사인은 모두 두려움을 품고 불안해했다. 이에 손권이 은밀히 미방과 사인을 꾀자 미방과 사인은 사람을 시켜 손권을 영접했다.

<여몽전> 주석 《오록》에 따르면 사인은 본디 항복할 마음이 없었고 오군의 항복사자인 우번을 내치기까지 했으나 우번이 편지를 보내 내응이 있었으니 이렇게 대응하지 못할 지경으로 포위된 것이며 이대로 있어봐야 살길은 없고 죽도록 싸워봤자 당신의 일족만 멸살될 것이며 천하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라 협박하니 눈물을 흘리며 항복하였고 우번이 이는 속이는 병사이니 사인을 응당 끌고 가야 한다고 주장하여 남군으로 끌고갔다고 한다. 여몽전 주석 오록에 따르면 당초 남군성 내에 실수로 불이 나 자못 많은 군사기물을 태웠다. 관우가 미방을 질책하자 미방이 내심 두려움을 품었는데 손권이 이 일을 듣고 그를 꾀자 미방이 몰래 서로 화합했다고 하며 여몽이 남군을 공격하자 소고기와 술을 준비해서 저항없이 항복했다고 하였다.

하지만 말 그대로 미방만 항복한 것이고 다른 남군 사람들에게 항복은 너무나도 의외였기 때문에 여몽을 치려는 움직임이 존재했다. 이런 상황에서 우번은 한참 미방에게 받은 기물로 주변사람들과 성밖에서 연회를 즐기고 있는 여몽에게 '현재 충실한 마음으로 투항한 자는 미방 뿐인데 성안의 사람들을 어찌 다 믿을 수 있겠는가? 어찌하여 신속하게 성으로 들어가 그 성의 권력을 잡지 않는가?'라고 진언했고 여몽은 그제서야 남군으로 들어가 마침 반격을 준비하던 성안의 반란군을 진압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관우가 양양의 포위를 풀고 퇴각하자 조인을 비롯한 위군은 그런 관우를 추격하려고 했지만 조엄이 '손권은 관우의 배후를 치려고 우리에게 순종하고 있지만 실상은 우리 군사력을 관찰하고 있으며 지금 관우를 추격하면 손권의 태도가 바뀔 가능성이 있다'며 추격을 반대하였고 조조 역시 관우를 장수들이 추격할까 걱정하여 추격하지 말라는 명을 내리자 추격을 포기했다며 조엄전에 전한다. 한편 오나라의 장수 장흠은 함대를 이끌고 면수로 들어갔다. 단 장흠전에는 면수로 들어갔다가 나온 기록만 있어 실제 관우의 수군과 교전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한편 여몽은 강릉을 차지해 그 곳의 노약자를 위로하였으며, 우금 등 죄수를 풀어 주었다. 동시에 육손은 별도로 의도를 손에 넣고, 자귀, 지강, 이도를 손에 넣고 이릉으로 돌아와 주둔하고, 협구를 지켜 촉의 침공에 대비했다고 오주전에 전한다. 관우는 돌아오면서 길에서 여러 차례 사람을 시켜 여몽에게 보내 서로 묻게 했는데, 여몽은 번번이 그 사자를 후하게 대우하고, 성중을 두루 다니게 하며, 집집마다 묻게 하고, 혹은 손수 글월을 써서 신의를 보였다. 관우의 사람이 돌아오자, 사적으로 서로 참여하여 묻고는, 모두 자기 집에 무탈하다는 것을 알고, 평시보다 과하게 대우받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관우군의 관리와 병사들은 싸울 마음이 없어졌다. 거기에 관우군의 처자들이 일종의 인질이 되었는지 손권이 이미 강릉을 점거하고 관우 사졸들의 처자를 모두 사로잡자 관우군이 마침내 흩어졌다.[75]

《수경주》에 이르길 강릉의 옛 성은 관우가 쌓은 것인데, 관우가 북쪽으로 조인을 포위하자 여몽이 이를 습격하여 점거했다. 관우가 이르길, "이 성은 내가 쌓은 성이니 공격할 수 없다."고 하고는 군을 이끌고 퇴각했다. 이에 관우는 당양으로 돌아와 서쪽으로 맥성을 지켰다. 중국의 학자 전부생(田福生)은 자신의 저서 《관우전關羽傳》[76]에서 맥성은 수백 가지고는 수만의 오군에 한달간 대항할 수 없다며 맥성에 2만명이 주둔했을거라 여겼다. 어쨌거나 손권이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급기야 관우는 거짓항복까지 시도하면서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맥성과 임저의 위치를 보건대 관우는 이미 장악당한 영안 방면이 아니라 상용 방면으로 어떻게든 돌파할 작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77]

관우는 성 꼭대기에 깃발을 꽂아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는 이 틈을 타서 달아났다. 병사들은 모두 와해되어 흩어졌으며, 단지 10여 명의 기병만이 그를 따랐다. 손권은 우선 주연 반장을 시켜 그가 지나갈 지름길을 끊어 놓았다. 관우가 패하자 손권은 우번으로 하여금 관우의 종말에 대하여 점치도록 했다. 우번이 말했다.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반드시 머리가 끊어질 것입니다.'라고 하니 과연 우번의 말같이 되었다. 때는 12월, 손권은 장수를 보내 관우를 역격(逆擊)하고 반장의 사마 마충[78]이 장향에서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 도독 조루를 사로잡아 더 이상 도망 못가도록 붙잡았으며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을 형주 남군 임저현 회마파(回馬坡)에서 참했다.[79]

이때 손권은 장군을 보내 관우 부자를 공격하고 관우와 그 아들 관평을 붙잡아 손권이 관우 부자를 살려 유비와 함께 조조에게 대적하려 하자 좌우에서 반대했다.
이리 새끼는 기를 수 없는 법이니 훗날 반드시 해가 될 것입니다. 조조가 즉시 그를 제거하지 않아 스스로 큰 우환을 불러들여 도읍을 옮길 의논을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어찌 그를 살려준단 말입니까!

이에 관우와 관평을 참수했다. 이는 《촉기》의 기록인데 배송지는 이 기록에 대해 손권이 있는 강릉과 관우가 죽임을 당한 임저는 200~300여리나 거리가 된다며 그르다 평가했다. 그렇다면 관우는 난전중 전사를 했거나, 현장에서 지휘하던 여몽이나 관우를 사로잡은 반장 등의 최종적인 판단으로 인해 죽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손권 앞에 관우가 붙잡혀 온 것은 오서 오범전에서도 교차검증이 되는 부분이므로, 애초에 손권이 임저 부근까지 직접 주둔해 있었을 수도 있다. 정사 속 배송지의 주석이 모두 타당한 것만은 아니기도 하다.

9. 사후

파일:관림 중국.jpg
관우의 머리가 묻힌 낙양 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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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의 몸체가 묻힌 당양 관릉

《오력》에 따르면 이후 손권은 관우의 수급을 조조에게 보냈다, 제후의 예로 그 시신을 장사지냈다.(權送羽首於曹公,以諸侯禮葬其屍骸。) 이 구절은 조조와 손권이 둘 다 관우의 시신을 제후의 예로 장사 지냈다는 뜻으로 중국에선 보고 있다, 촉한 정권은 성도에 관우를 위한 의관총(衣冠冢), 즉 청두 관우묘를 지어 혼을 불러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관우의 고향 해주에서도 관우묘가 세워지는데 ( 하이저우 관제묘) 이로서 '머리는 낙양, 몸은 당양, 혼은 고향(해주)에 있다' 란 말이 생겼다고 한다. 당양에 있는 관릉은 당양대왕총이라고 하기도 한다. 중국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유비가 동정동오 할 때 대왕총을 찾아 관우를 제사지내고 옥천산에 관우사를 세웠다고 한다.[80]

장남 관평 관우와 같이 죽었기 때문에 차남 관흥 관우의 후사를 이어 작위를 계승했고 약관의 나이에 시중, 군감군이 되었지만 일찍 죽었다. 관흥의 적자 관통이 후사를 이었지만 또 요절하고 관통이 후사가 없어서 관흥의 서자 관이가 후사를 이었다.

관우가 전사한 뒤 유비는 대노하여 손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이릉대전을 벌인다. 하지만 촉한의 형세가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무리하게 손오의 정벌을 노렸고, 결국은 참패하고 만다.

《촉기》에 따르면 방덕의 아들 방회 종회, 등애를 따라 촉을 정벌했고, 촉이 격파되자 관씨 일가를 모두 멸족시켰다.

청나라 시대의 지리지 강릉현지에 따르면, 관평의 아내는 조운의 딸 조씨로 관월을 낳았다. 조씨와 관월은 형주가 함락되자 익주로 피신하지 못했지만 여몽이 배려해준 덕분에 오나라에서 관(關)씨에서 문(門)씨로 성을 바꾸고 평민이 되어 공안에 숨어 살았다. 이후 서진의 사마염이 오를 멸하고 삼국을 통일하자 칙서로 관씨로 복권하여 이어져왔다. 다만 강릉현지는 위의 관후조묘호기와 같이 너무 후대의 기록이라는 문제가 있으며 그나마 금석문 기록인 관후조묘호기보다도 신뢰성이 높다고는 볼 수 없다.

당나라 시대의 익주명화록에 따르면 촉왕이 조충의에게 명하여 관장군이 옥천사를 세우는 그림을 그리게 했다.

2001년, 관우의 67대손 관중진이 나타났다. 그가 가지고 있는 족보에 따르면 관중진은 관우의 장남 관평의 후손이다. 익주에 있던 차남 관흥의 자손들은 방회에 의해서 몰살되었지만 형주에 남아있던 관평의 자손들은 계속 대를 이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호북성 공안현에 관우의 후손들이 사는 집성촌이 있다. 이 족보는 내용이 충실해서 중국 당국에서는 조작된 흔적이 없다고 결론내렸다.

현대 중국에서 관씨는 전체인구의 0.09%인 140만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1] 관우의 고향은 중국 최대의 염호인 해지(解池) 근처이기 때문에 소금 밀매에 관련되어 있었다는 추측도 있다. 실제 관우의 고향에서 전승되는 관우 관련 일화엔 소금에 관련된 일화가 많다. [2] 야사에는 본래 성이 '고'씨였다. 고우는 소금을 담당하는 관리였으나 자신의 약혼녀를 추행하려던 고을의 악덕 지주를 살해하고 자신의 약혼녀가 자결하자, 지명수배자가 되어 관헌의 추격을 받고 유곡관에서 자신의 성씨를 '관'이라고 말한 뒤 관문을 통과했고, 이후에는 관우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3] 관(管)씨였다는 전승도 있다. [4] 유비가 161년생이니 이 기록대로면 관우는 유비보다 1살 더 많았던 것이다. [5] 그러나 <관후조묘비기>는 너무 후대의 책이라서 신빙성이 낮다. [6] 조조가 관우를 처음 본 것은 《 영웅기》의 기록에 따르면 영제 말년이었을 공산이(대략 180년대 중후반) 크다. 유비가 그때 조조와 함께 패국으로 갔었기 때문이다. 즉 조조 역시 관우를 꽤 오랜 기간 본 사람이란 뜻이다. [7] 大業, 여기에서는 큰 사업 또는 큰 일을 말한다. [8] <정욱전>에 보면 정욱으로 나온다. [9] 《삼국지집해》의 저자인 노필은 조운이 번씨를 취하지 않은 예를 두고 남의 여자를 탐내는 관우보다 도리가 맞았다며 관우를 디스했는데 후한 말에는 아내가 있으면서도 새 아내를 들이는 경우가 많았고, 전란 중 멸망한 세력의 아내를 전리품으로 취하는 경우가 흔했기에 관우 역시 그 시대의 한계로 봐야 할 듯 싶다. 그만큼 조운이 당대에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는 얘기도 되고. 그렇지만 두씨는 진의록에게 일방적으로 버림받아 사실상 이혼한거나 마찬가지였으니 이걸 가지고 지나치게 비난하는 건 관우로서는 억울한 면도 있을 것이다. [10] 진의록은 두씨를 버린 것을 후회했는지, 처를 빼앗아간 자를 섬기느냐는 장비의 말에 유비를 따라갔다가 중간에 마음을 돌려 도망치다가 장비에게 살해되었다. 진의록의 기록을 보면 조조와 두씨와의 관계를 애매하게 끊으려다가 갈팡질팡하게 되어 살해당한 케이스로 보인다. [11] 사실 양익은 전쟁의 핵심으로, 양익 기병의 지휘관으로서 훌륭하다는 것은 대단한 찬사이다. 이 시기 특정 방면을 이끌 수 있었고, 실제로 성과를 낸 지휘관은 삼국을 모두 합쳐도 대단히 희귀하다. [12] 여포는 조조에게 사로잡혔을 때 '명공이 보병을 이끌며, 내게 기병을 이끌게 한다면 어찌 천하를 평정하지 못하겠소이까?'라는 소리를 했고 조조는 이에 솔깃한 기색을 보일 정도로 이름난 기병 지휘관이었다. [13] 관대하고 어질면서도 법도가 있다. [14] 다스림에 통달하고, 변화를 안다. [15] 바르면서도 모략이 있다. [16] 재상으로 삼을 만하다. [17] 복숭아 꽃잎이 흩날리는 장면은 후대의 창작이지만 장비가 관우를 형님처럼 모셨다는 기록과 더불어 세 사람이 적어도 같이 죽기로 맹세했음을 직접적으로 증명하는 기록이다. 만약 유비를 꾸준히 보좌하지 못하고 관우 혼자 일찍 죽어버린다면 이는 오히려 유비에게 불충하는 것이다. 그래서 관우는 잠시 조조에게 의탁하지만 그 조조에게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피력한다. '자신은 조조가 아닌 유비의 사람이며, 당신이 내게 준 은혜를 갚는 대로 떠날 것'이라고. 그럼에도 조조가 그런 관우를 참수하지 않고 대접해준 것이지, 관우가 진정 조조를 섬겼던 것은 아니다. [18] 사실 조조가 관우를 죽이지 않고 대접해준 건 조조도 대가없는 대우가 아니라 관우의 마음을 어떻게든 움직이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다. 후한 말기는 아무리 평소에 두터운 사이여도 이익에 따라 서로 갈라지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조조 역시 그런 일들을 겪어왔던 만큼 '유비는 이유야 어쨌든 널 놔두고 도망가서 다시 찾으러 올 기약이 없지만 난 이렇게 널 대우해주니까 결국 생각이 바뀔거야.' 이런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조조는 협천자를 통해 조정의 실권을 거머쥔 권신인데 이런 사람이 파격 대우를 지속적으로 해주며 출세를 보장한다면 사람의 마음이 흔들리거나 바뀌지 않기 힘들다. 하지만 관우의 충의가 조조의 예상 이상이어서 헛물켜고 말았지만. [19] <무제기>는 2월에 백마가 포위된 사실을 서술한 이후 4월로 갑자기 널뛰기한다. 다른 어떤 기전에도 2월과 4월 사이의 백마 포위망을 다룬 서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황상 일부러 이 2개월 동안의 기록을 생략했을 가능성이 있다. [20] 보통 형주 무릉군의 속현 중에 한수(漢壽)현이 있으므로 이 한수(漢壽)현의 한 정(亭)을 식읍으로 받은 것으로 보는 설이 많은데, 정후(亭侯)의 명칭에 현 이름을 붙이는 것은 통례에 어긋나므로 한수정(漢壽亭)이라는 별개의 정(亭)이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21]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 청룡언월도를 쓰는 관우'의 이미지가 역사적인 사실이 아님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22] 자치통감》은 한술 더 떠서 '羽望見良麾蓋,策馬刺良於萬眾之中,斬其首而還,紹軍莫能當者。遂解白馬之圍,徒其民,循河而西。'라고 적고 있다. 즉, 당시 '멀리서 안량의 휘개를 보다가 말을 채찍질해 수많은 병사들 사이에서 안량의 목을 벤 관우가 돌아오는데, (장수들 뿐만 아니라 백마의) 원소군 병사들 누구도 능히 당해낼 자가 없었다. 마침내 백마의 포위를 풀고, (조조는) 그 백성들을 황하 서쪽으로 옮겼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23] 삼국지연의》에서는 잘 알려진 것처럼 이를 소재로 하여 아예 제갈량이 박망파 전투를 주도하는 모습으로 실력을 보여줘 둘의 불만을 직접 가라앉히는 걸로 각색하고 있다. 실제로는 유비가 몇 마디로 타이른다고 금방 불평을 거둘 만큼 이 셋이 쌓아온 관계가 결코 가볍지 않았을 테니 제갈량은 관우와 장비를 조심스럽게 대했다. 이후 같이 활동하면서 유비가 왜 제갈량에게 극진히 대우를 해주는지 납득하게 되지만. [24] 대표적으로 서서는 모친이 사로잡히자 모친을 구한다며 작별인사를 남기고 조조에게 투항했고, 유비의 딸 둘은 조순에게 사로잡혔다. 그를 따르던 병사 및 민간인 피해도 당연히 존재했고. [25] 소설 《 삼국지연의》에서는 이각, 곽사의 난( 삼보의 난) 때 헌제가 조조에게 구출되고 나서 벌인 사냥 연회에서 황제가 쓰는 금화살을 조조가 대신 받아 사슴을 쏘아 죽였었는데 이때 황제가 사슴을 쏜 걸로 착각하고 환호하는 군사들을 향해 조조가 손을 들어 군사들에게 답례하는 대놓고 황제를 개무시하는 만행을 저질렀었다. 당시 조조 휘하에 있었던 유•관•장 삼형제도 이걸 봤는데 관우가 조조를 베어버리려하자 유비가 몰래 뜯어말렸던 일화가 나온다. 조조가 사냥 도중 헌제 대신 만세를 받았다는 이 무례한 일화는 정사에는 나오지 않은 소설 《삼국지연의》의 창작이다. 정사에서도 관우가 사냥 도중 조조를 죽이려했었던 일이 있긴 하지만 그 이유가 나오지 않는다. 다만 조조가 무언가 건방진 행동을 해 관우가 자극을 받아서 죽이려 들었을 수도 있다는 추정 정도만 할 수 있다. [26] <서황전>에서는 관우를 쳤다(討)라고 했는데 '칠 토' 자의 의미는 '정벌하다' 외에 '치다', '공격하다'의 뜻이 있는 만큼 여기서는 단순히 공격했다는 의미로 보인다. 토벌의 뜻으로 봐도 <서황전>에서는 관우를 치고(討) 주유를 공격(擊)했다고 하는데 결국 주유를 치고 관우를 토벌했다가 기록의 끝이고, 오히려 <이통전>에 보면 관우가 주둔하며 끊은 북쪽길은 이통의 도움을 받아 조인이 도주할 때까지 계속 유지된 것으로 보이므로 서황의 관우 토벌은 단순한 공격일 가능성이 높다. [27] 엄연[81]이 이르길: 단복은, 표리(表裏)를 말하는 것과 같다. 이는 옷을 입음을 비유한 것으로, 국가가 비록 서촉(西蜀)과 연합해 화목하나, 사람의 마음은 헤아리기 어려워, 밖을 믿어 안을 소홀히 할 수는 없으니, 그가 타인을 방비하며 자신을 위해 대비해, 모름지기 두 마음을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니, 옷을 입었을 때, 겉감이 있으면 반드시 안감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28] 이미 형남 3군이 넘어간 상황에서 수전에 능한 맹장 감녕과 오나라 군대가 대놓고 도하를 대비하는데, 정직하게 도하 작전을 밀어붙이는 건 자살행위다. 《 손자병법》에서는 도하 상황은 기습이 벌어지기 딱 좋은 상황임을 확실하게 언급하고 있으며, 현대에도 강이나 바다를 건너는 군사작전은 적의 공격에 신경을 잔뜩 기울이게 된다. [29] 이름은 전해지지 않으나, 민간 전승에선 관은병이라고 한다. [30] 이때 손권의 아들중 최연장자인 손등의 나이는 10~11세에 가까웠다. [31] 조조가 위공이 된 213년에 조인의 관직이 효기장군으로 되어 있으니 행(行)정남장군이 된 것은 이후일 것이다. [32] 다만 조인은 이미 봄 정월에 후음을 참수하고 번성에 돌아와있었으며, 관우는 여름/가을에 북진을 했으므로 후음과 연계되었다기 보다는 그런 반조조 반란을 기회로 독자적으로 북진했을 가능성이 높다. [33] 원소 휘하의 허유와는 동명이인. [34] 다른 한편으로는 한중에 집중된 조조의 압력을 풀어 내기 위해 유비가 명령을 내린 것으로 보기도 한다. [35] 7군을 지원보낼 때 본래는 조식이 지휘관이 될뻔했던걸 보면 우금이 이끌던 군세라기보다는 새로 편성해서 지휘권을 내준 것으로 보인다. [36] 《자치통감》과 <온회전>에서는 219년 당시 손권이 합비를 공격했다고 한다. [37] 적지 깊숙이 들어가 고립되어 있는 군사 [38] 《자치통감》에 따르면 용맹하고 교활하므로 [39] 물론 이 홍수 이용은 양•번 함락까지만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고, 위나라의 최정예 7군이 30,000명이나 살아나 촉한군에 항복하는 사태는 관우도 상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항복하겠다는데 익사하게 놔둬서도 안 되고, 항복을 받아주면 보급이 문제이니 관우도 골치가 아팠을 것이다. [40] 관우가 처음 공격을 시작했을때 '羽率衆攻曹仁於樊'라고 했는데 이는 《 자치통감》의 기록이다. <관우전> 본전에서도 '羽率衆攻曹仁於樊'이라고 동일하게 적고 있다. [41] 조인은 방덕에게 장수와 군사를 이끌고 번성 북쪽 10리에 주둔하도록 했다. [42] 자세한 지도1, 자세한 지도2, 더 자세한 지도1, 더 자세한 지도2 [43] 양양 남쪽에 보면 현산이라고 고지대가 있는데 관우는 미리 이곳을 선점하고 군사들을 뺐을 가능성이 있다. 아예 처음부터 양양-번성의 고지 감제가 가능한 현산에 진을 쳤을 가능성도 있다. 즉, 지형 문제라기 보단 우금군은 대부분의 전력을 일단 보존했다는 점에서 그냥 '관우보다 준비와 대응이 부족했다'로 끝날 문제이다. [44] 물에 빠져 죽거나 관우의 공격에 죽은 조위군은 제외한 수치이다. 원래 7군의 숫자는 더 많았을 것이다. 《자치통감》을 번역한 권중달 교수는 중국의 고대 병제를 적용해 101,500명 정도의 대병력으로 추측했으나 이는 좀 높게 잡은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한편 《 화양국지》에 따르면 7군의 규모가 30,000명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대로라면 거의 전군이 사로잡힌 것이 된다. 한편 중국어 위키백과 번성지전(樊城之戰) 문서에선 1군의 규모를 12,500명으로 보는데 이는 조조가 직접 펴낸 《 손자병법》의 주석인 《손자략해》(孫子略解) 4권에서 조조 스스로 말하길 《사마법》(司馬法)에 이르길 12,500명을 군이라 할 수 있다(曹操曰:《司馬法》曰:「萬二千五百人為軍。」)라고 적었기 때문에 나온 주장이다. 이 주장대로면 7군은 87,500명이다. 즉 아주 보수적으로 봐도 7군은 30,000명이고, 많이 보면 100,000명이 넘는 대군이다. [45] 당시 관우의 지원 요청 시점은 한창 관우가 승승장구하던 시기였으니 천도 운운하던 조위의 입장에서 양•번 수복이 1차적인 목표였을 것이고, 조위가 뜬금없이 상용 점령이라던지 하는 부가적인 요소에 힘을 양분할 만한 합리적인 연유가 없었을 것이다. 사서상으로 어느 정도 드러나는 상용군의 병력을 생각하면 절대 무시못하는 숫자이고, 조기에 지원을 갔다면 형주 공방전의 판도를 바꿀 수 있을 정도였다. [46] <조인전> 기록의 경우 성 안을 수천 명으로 수비했다고 나오는데, 방덕이 얼마만큼의 병력을 이끌고 나갔는지 확언할 수 없는 부분이다. 까놓고 방덕에겐 수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나가게 하고, 조인이 본진의 수천 명으로 번성을 수비할 수도 있는 것이다. 확실한 것은 《 자치통감》에 따르면 방덕이 하루종일 싸우다가 그가 이끄는 관리 및 무사들 역시 항복했다는 것이다. 덧붙여 방덕이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조인이 상당한 병력을 지녔을 것으로 보인다. 애시당초 조인이 방덕을 의심했다면 선봉으로 삼아 번성 밖으로 내보내지도 않았을 터이다. [47] 《삼국지연의》에선 자맥질 싸움 끝에 주창에게 사로잡힌다. [48] 218년 1월 경기, 위황의 난에서 관우가 강성해 이들이 관우와 손을 잡으려 한 것처럼 허도의 반조조 세력과 관우가 연대할 수 있다는 점이 조조가 관우를 위협으로 본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49] 게다가 위문제 조비의 남정 당시 오나라의 수군은 관우의 수군에 못지 않게 많았다. [50] 조인이 강릉의 관우를 토벌하기 위해 수군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걸 위나라 수뇌부도 알았을 것이다. 훗날 정남장군(征南將軍), 가절도독형예제군사(假節都督荊豫諸軍事)로 부임한 왕창이 승리와 수비를 위해서 주둔하던 완에서 신야로 관서를 옮기고 배가 선지(宣池)에 있어 급한 일이 있어도 달려가기에 충분하지 못하니 형주와 예주에서 수군을 훈련시켜야 한다고 했듯이 말이다. 오나라와의 마찰이 없었을 당시에 부임한 왕창이 북형주에 수비를 위해 달려가기 위해 쓰이는 배가 있다고 증언한 것도 그렇거니와 왕기 역시 수군이 있다는 증언을 하며, 육군과 나란히 농사를 지어 군대의 자제와 식량 조달을 해야한다고 했다.조인이 번성에 있을 당시엔 관우를 토벌하기 위한 공격을 위해서든 수비를 위해서든 위나라 소속 북형주에 수군이 왕창 때보다도 더욱 더 필요했을 텐데 당시 위나라 수군 관련 기록이 없는 건 미스터리다. [51] 이 특성은 남송대에도 여전해 양양은 남송의 대몽골 방어선 최중요의 전략 거점이었다. 이 양양 공방전에서 쿠빌라이 칸의 몽골군은 양양을 함락시키기 위해 100,000명이 넘는 병사와 수백 척의 전선을 동원해 방대한 포위망을 구축했으나 양양성 안에 비축된 물자는 넉넉했고, 남송 수비군의 사기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쿠빌라이 칸은 번성을 함락시키고 나서야 양양성의 항복을 받을 수 있었다. 공성전을 시작한 지 무려 6년이나 지나서 말이다. [52] <만총전>에서 만총의 언급에 따르면 관우가 파견한 별장(別將)이 이미 겹현 아래에 있어, 허도로부터 이남의 백성이 어수선했다고 한다. 관우의 장수와 군사들이 허도 근처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말인 즉슨 완과 그 일대 고을들이 관우가 예주로 진출하던 말건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로 번성 이북은 관우의 무리에게 무주공산이나 다를게 없었다는 말이다. [53] 육혼현의 경우, 위에서 언급한 손랑이 관우에게 귀속되어 관우의 관인을 받았으며, 관우는 그에게 병사들까지 주어 조위와 대적하게 했다. [54] 여씨 성을 쓰는 어느 장군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석인데 주인공은 시기상 여상으로 추측된다. [55] 참고로 현대에 와서는 번성( 샹양시 판청구)에서 허창( 쉬창시)까지 중간에 완( 난양시)를 거쳐서 차타고 3시간 반이면 가는 거리이다. 그러니까 서울-대구 거리 정도이다. [56] 삼국지연의》에서는 그때 관우를 치료한 의원이 화타로 나온다. 실제 화타는 208년에 이미 조조에 의해 죽었으므로 219년에 화타가 관우를 치료한 것은 완전 불가능한 일이다. [57] 이문열은 《평역 삼국지》에서 관우가 화타에게 치료받은 일이 허구라고 썼지만, 의원이 화타가 아닐 뿐 정사에 엄연히 치료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논파되었다. [58] 아직 한나라의 명맥은 남아 있었고 여기서 말하는 도읍은 어디까지나 '한나라의 수도 허창'을 뜻한다. [59] 관우가 양양 지대를 점령하게 되면 교통의 요충지인 완을 지척에 두게 된다. 완까지 떨어지게 되면 허창, 낙양, 장안을 바로 노릴 수 있으며, 한중에서 군세를 정비한 유비가 양쪽에서 공세를 펼친다면 아무리 위나라가 압도적인 군사력을 지녀도 매우 부담스러운 위치가 된다. 심지어 위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란세력과 호응한다면 충분히 위협을 느낄 만하다. 만약 반란군 덕분에 유비가 헌제의 신병을 확보하고, 당시 (비록 황제가문과 사실상 남남이긴 해도) 한 황실의 후예라고 널리 인정받던 유비 측에서 헌제까지 옹립하게 된다면 명분까지 확보하게 된다. 유봉과 맹달의 갈등, 손권의 개입 등 여러 악조건이 없었다면 삼국시대의 역사는 상당히 달라졌을 가능성이 높다. [60] 삼보결록주에선 경기, 위황의 난 당시 아예 관우가 강성하여 조조는 업에 가 있고 왕필에게 허도의 사무를 맡겼다는 기록까지 있다. [61] 관우는 배를 타고 공격하였다고 한다. [62] 상용을 점령한지 얼마 안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면 상용 내부를 정리할 최소한의 병력만 남기고 유봉이든 맹달이든 둘 중 하나가 지원을 오고 나머지 한명이 내부 단속을 해도 상관이 없다. 애당초 유비가 유봉과 맹달을 동시에 파견한 것, 관우를 지원하지 않아 죽게 한 죄를 물은 건 애당초 여차하면 상용에서 이런 형태로 관우를 지원하라는 전제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실제 정사상의 유비의 군재와 통찰력을 생각하면 유비는 충분히 상용에서 지원이 가능했다고 봤기에 이런 인선을 한 것이겠고. [63] 다만 맹달의 경우 건안 24년(219년) 11월 방릉태수 등보, 남향태수 곽목을 육손이 공격해 대파했다는 육손전 기록이 있다. 방릉은 임저와 가까운 곳이고 남향군은 관우가 태수를 잡아 복속시킨 지역으로 상용의 동쪽이다. 게다가 방릉은 유봉과 맹달 소유의 상용군 일대이니 상용에서 군사를 내 관우를 구원하려고 했다는 정황증거가 될 수도 있다. 특히 맹달이 유비를 저버리고 위나라에 항복하면서 했던 '형주가 패배하여 괴멸되자, 대신은 통제하지 못해 백의 하나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신만이 일을 찾아 스스로 방릉(房陵), 상용(上庸)에 이르러 몸을 구걸해 밖에서 자방(自放)했습니다.'라는 말은 맹달은 유봉과 불화하면서 여의치 않은 상황에도 뒤늦게나마 따로 최대한 여력을 내어 등보와 곽목을 보내 관우를 지원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고 변명하는 말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맹달의 잘못은 경감될 여지가 생긴다. [64] 단순히 군 부대를 빼앗은게 아니라 군악대는 당시엔 명령이나 지시사항을 전달하는 지휘를 위한 군대라 이걸 빼앗는 것은 사실상 유봉이 맹달의 지휘권을 강제로 빼앗는 것으로 볼 수 있다. [65] 계획대로 지원군이 이뤄졌으면 한창 기세가 강한 시점에 원군이 합류해서 결과가 어찌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유봉의 원군은 관우군을 구원하기 위한 군대가 아니라, 공격을 지원하기 위한 지원군 개념으로 서황에게 맞설때 관우가 겨우 5천의 군사로 맞섰는데, 그만큼 관우에게는 군사력 보충이 절실한 순간이었다. 오히려 상용에서 지원을 오지 않았기 때문에 관우가 보급문제와 더불어서 속전으로 끝내지 못하고 장기전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보는 게 합당하다. 당시 상용은 후에 맹달이 부곡 4천여 가(家)를 이끌고 이탈했어도 수비할 병력이 있을 정도였다. [66] 당연하지만 번성에 있던 관우가 직접 털었을 가능성은 낮다. 관우 휘하의 부하들이 했던지 후방의 미방이 했던지 였을것인데 최훈의 삼국전투기에서는 당시 보급담당자인 미방이 한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이 약탈의 시점에 이미 오나라군이 움직이기 시작하지만 그건 아래에서 얘기하자. [67] 삼국지집해》에서는 이 꿈의 의미를 여몽의 이름자 몽(蒙)이 돼지(豕)를 포함하기 때문에, 여몽이 뒤를 습격한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68] 결과적으로 흉몽이라는 것은 알지만, 이 꿈의 해석에 대해서는 확실한 정답이 없으며, 연의가 아닌 정사인 이상, 관우가 죽었다는 결과로 이 꿈이 어떠한 메시지를 담았다고 역추정 하는 것은 신비주의에 빠질 수도 있다. [69] 10중으로 된 녹각을 모두 부쉈다는 <서황전> 기록을 보면 관우는 포위망을 뚫으려는 원군을 진영에 설치한 녹각과 연계하여 섬멸시키기 위한 준비를 해놓았음을 알 수 있다. 서황이 자기가 거느린 병사만으로 성급히 돌파를 시도했거나 12영 군세를 지원받은 후라도 진작부터 요청하던 상용의 원군만 제때 와줬다면 병력적 불리함이 없거나 최소화한 상황이었다면 의도대로 됐겠지만 트롤이 문제였다. [70] 서황측이 몇번 화살로 편지를 보내 지원군이 온 사실을 알렸다. [71] 양양과 번성이 천혜의 요새인 이유는 면수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서 지원이 가능하기 때문도 있다. 실제로 쿠빌라이의 몽골군이 양양과 번성을 쳤을때 면수를 장악하고 번성이 먼저 함락되자 양양도 뒤이어 항복한 사례가 있다, 관우의 사례와는 좀 다를지 몰라도 면수를 장악하고 양양을 고립시켰다는건 생각보다 크다.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구원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니까. [72] 강이야말로 최적의 방어요소로 방어군에게 엄청난 방어적 이점을 주는데, 관우는 비록 번성에서 서황 만총의 협공으로 격퇴되어 물러났으나 이 시점에서 이미 수군을 동원한 면수 완전장악과 양양 완전 포위 함락직전이라는 성과를 달성한 상태였다. 즉 면수를 끼고 관우 본인이 양양에 도착해 완전 포위된 양양을 기어이 함락시키고 추가적인 북진을 시도하지 않더라도 버티기에 돌입할 경우 촉군이 완전히 수군으로 장악한 강을 끼고 결사적으로 버티면 위군은 대체 어떻게 공세를 해야 할 지부터가 난감한 상황이 오고야 만다. 흔히 아무리 밀약을 맺었다 한들 하후돈 장료를 회남에서 완전히 뺀게 조조의 노망이라고는 하지만 다른 면으로 보면 관우는 조조로서도 최대한 물량을 모으게 하고 믿을 수 없는 인물인 손권이 자신의 의도대로 따라야 한다는 도박수를 내걸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손권은 그토록 원한 회남의 공백이라는 결정적 기회에도 불구하고, 그 도박수에 조조의 의도대로 충실히 따랐다. [73] 특별한 변수가 없다면 결국 손권이 꿈에도 그리던 합비성을 포함하여 수춘을, 선전한다면 서주 일대까지 점령했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국력 차이가 크게 줄어든다는 말. [74] 본디 육손이 소속된 육씨 가문의 가문의 가장이었던 육강이 손책에게 죽었으므로 관우는 육손이 손씨가에 별 달리 협력하는 입장이 아니라고 판단했을 가능성도 있다. [75] 만약 유봉이 원군을 보냈다면 설령 유봉의 원군이 늦었다해도, 관우의 혈로가 형주 남부쪽이 아니라, 상용쪽으로 열렸을 수도 있었다. 타이밍이 늦었다고 해도 관우의 번성 포위가 풀리고 면수까지 내주고 양양도 포위를 빼앗겼다면 모르겠는데 면수와 양양지역을 아직 장악하고 있었고 이때 지원군이 상용에서 왔다면 그 틈을 이용해 관우가 상용쪽으로 내빼는게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형주자사와 남향군 태수가 지원을 왔다가 관우에게 잡혔다 죽었기 때문에 상용 동쪽은 공백지 상태였고 상용군은 관우의 형주군과는 달리 형주 남군에 처자가 없었기 때문에 관우가 강릉을 빼앗겼다고 군세가 와해 될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76] 田福生 著 《關羽傳》 中国文史出版社 2007年出版 ISBN 978-7-5034-2022-1 第十二章 孤立無援,飲恨千古 第三節 兵敗麥城,章鄉之難 之 困守麥城. [77] 이렇게 될 경우 상용에서 관우를 구원하지 않은 유봉의 죄가 더해진다. 관우를 단순 돕지 않은것 외에도 그의 죽음을 방조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78] 촉의 장수였던 마충과는 동명이인이다. 관우를 사로잡은 공으로 역사서에 쓰여졌는데 그 이전과 이후의 행적은 보이지 않아 하급 장수로 추측된다. [79] 이런 기록을 보면 나관중 가정본 삼국지연의 신삼국을 비롯한 몇몇 매체에서처럼 관우가 저항을 포기하고 신선같이 태연하게 죽었다기 보단 창천항로나 삼국지 13 같은 매체에서 묘사되는 바와 같이 끝까지 탈출하기 위해 애를 썼고 주군에게로 돌아가기 위해 수많은 군세를 몇기의 기병만으로 돌파하려다가 오군에 둘러싸여 처절하게 난투전으로 끝까지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잡혀서 죽었을 가능성이 높았다고 볼 수 있다. [80] 다만 유비는 서쪽 자귀에서 남쪽으로 이동해 의도군 이도로 이동했으므로 당양에 가진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후세에 와전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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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嚴衍, 명말청초때 강남 가정(嘉定, 上海市) 출신 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