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20:35

동승(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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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열후(列侯)[1]
최종관직 거기장군(車騎將軍)
성씨 (董)
(承)
생몰연도 ?년 ~ 200년
사망지 예주(豫州) 영천군(潁川郡) 허도(許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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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정사 삼국지
2.1. 조조의 협천자를 방해하였나?
2.1.1. 부정론2.1.2. 긍정론
2.2. 평가
3. 삼국지연의4.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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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기의 무장으로 기주 하간국 사람이다. 헌제의 측근이었으며, 그의 이 헌제의 후궁 동귀인[3]이다.

정사 삼국지》에 주석을 단 배송지 하진에 의하여 살해당한 동태후의 조카라고 하였다.[4] 하지만 동탁의 사위 우보 밑에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면, 원래 동탁군에 소속된 장수이며, 동태후와 촌수가 멀었던 친척이거나, 동태후와 같은 집안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의 신상에 관한 명확한 사료가 남아있지 않으며, 딸이 황제의 후궁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조차 전하지 않는다.

2. 정사 삼국지

그는 본래 동탁의 사위 우보의 부곡에 속했던 인물이었기에 동탁이 살해당한 뒤 여포, 이각 그리고 곽사 등의 권력다툼에도 관련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줄곧 세력다툼을 벌이던 이각과 곽사가 장제의 중재로 195년 화해하였다. 이에 헌제 낙양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동승은 안집장군에 임명되어 헌제의 수행을 맡았다. 낙양으로 돌아가는 도중 곽사가 변심하여 헌제를 억류하려 들었기에 양정 양봉이 합심하여 이를 무찔렀고, 곽사는 이각과 힘을 합쳐 다시 헌제를 겁박하고자 했다.

어가가 화음(華陰)에 이르자, 그 일대를 다스리던 단외가 헌제를 모시려 했지만, 수행원 중 양정과 충집은 단외와 사이가 나빴던 터라 이를 반대했다. 동승도 이들과 뜻을 같이하여 헌제에게 곽사의 병력이 이미 단외의 영내에 들어왔다고 거짓으로 고하여 결국 어가는 화음을 떠나게 되었다. 하지만, 단외는 애초에 헌제를 겁박할 뜻이 없었고, 양정은 단외와 한바탕 싸운 뒤 어가를 쫓아온 이각과 곽사의 병력에게 협공당하였기에 궁지에 몰려 형주로 달아났다.

이후 장제가 양봉, 동승과 대립한 끝에 다시 이각, 곽사와 힘을 합쳐 어가 호위군을 공격했다. 이에 동승은 양봉과 의논해 흑산적의 일파인 백파적( 호재, 이락, 한섬)과 남흉노 선우 어부라 및 우현왕 거비[5] 등을 포섭하여 사예군을 무찔렀지만, 이에 아랑곳없이 사예 군세는 끈질기게 어가를 추격해 많은 수행원들이 희생되었으며, 수로로 헌제를 안읍까지 피신시키는 과정에서 관리들이 뱃전에 매달려 함께 떠나려 하자 동승은 창으로 이들의 손가락을 닥치는 대로 찍어 떨어뜨렸다.[6] 이후 어가는 이락과 하내 태수 장양, 하동 태수 왕읍 등의 호응으로 간신히 안읍까지 도달할 수 있었지만, 따르는 인원은 수십여 명에 불과했다.

<무제기>에 따르면 196년 정월 조조가 헌제를 맞아들이려고 조홍에게 군사를 주어 낙양에 가게 하자, 처음에 동승은 원술을 끌어들여 조조의 세력의 침입을 막았다. 그러나, 헌제가 낙양에 돌아오면서 한섬, 장양, 양봉 등 함께 수행을 맡았던 이들 사이에 알력이 빚어졌다. 동승은 이들이 헌제의 신임에 기대어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였으므로, 몰래 조조와 결탁해서 그를 조정 중앙으로 끌어들인 뒤 한섬, 장양, 양봉을 내쳤다.

어쨌거나 같은 해 8월 그는 제후에 봉해졌다가, 199년에는 거기장군에 임명되었다. 이후 그는 조조가 조정에서 점차 권세를 강화시켜가는 정세를 걱정하던 헌제의 밀서를 받아 왕자복, 충집, 오석, 오자란, 유비[7]을 끌어들여 힘을 모아 조조를 제거하려고 했다.
거기장군(車騎將軍) 동승(董承)이 이르길, 황제의 의대(衣帶)를 받으니 그 속에 조공을 주살하라는 밀조(密詔)가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200년 정월 계획이 발각되어 유비를 제외한 모든 관련자들이 처형당했으며, 당시 임신 중이던 동귀인도 예외없이 처형되었다.

2.1. 조조의 협천자를 방해하였나?

2.1.1. 부정론

순욱이 조조에게 협천자를 권유한 시점은 196년 정월이 아니다. 《 정사 삼국지》 <순욱전>과 《 후한서》 <순욱전>에는 순욱이 조조에게 협천자를 조언하는 구절이 실려있는데 둘 다 낙양으로의 천도 시점이었단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낙양 환도가 결정된 건 5월이고, 헌제가 낙양에 도착한 건 7월 내지 8월이다. 즉 무제기에서 말하는 시기와 부합하지 않기에 이 기록은 틀렸다는 의견이 있다.(《 후한서》 <헌제기>, 원굉의 《 후한기》 29권)

또, 사신 왕래야 훨씬 쉽지만 무제기는 그 이상을 넘어 장노와 동승이 같이 군대를 동원해 조홍군을 막았다고 한다는 점이다. 정작 196년 1월 시점의 동승은 안읍에서 한섬, 양봉, 호재, 이락 등과 낙양 환도 문제로 다투느라 한창 바빴다. 그런데 갑자기 군대를 데리고 조조와 싸우러 간다는 건 현실성이 많이 떨어진다.

정치라는 게 적이 됐다 친구가 됐다 금방금방 변할 수 있기는 한데, 동승이 조조를 끌어들인 때는 8월로 그때는 이미 여러 장군들이 이탈하고 낙양엔 동승과 한섬만이 남았을 때다. 그리고 양봉 역시 조조와 교류하던 상황이었다. 한편 동승과 원술 사이의 접점은 무제기 외에는 발견할 수가 없으며 원술의 이미지는 이미 영 좋지 않았고 거리도 멀어 매력있는 우군은 아니었다.

196년 1월에 이미 천자 봉대를 하기로 결정했다면서 낙양 천도 시점까지도 천자 봉대가 정해지지 않아 갑론을박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물론 그 이전부터 순욱과 정욱 천자를 데려오자고 진언했을 수는 있지만, 그 말인즉슨 196년 1월 시점엔 아직 천자 봉대가 확실하지 않았단 뜻이기도 하다. 사마광도 그 점에 의문을 가져 조조의 천자 봉대 모의 기사를 8월조에 싣고 《자치통감고이》에도 그에 대한 얘기를 남겼다.

후한서 원술전과 삼국지 원술전에서는 원술이 황제를 드러내버리고 칭제 욕심을 드러내는 시점을 헌제의 조양 패배 이후(195년)로 특정하고 있으며 후한서 육강전에서는 원술이 그 전 해부터(아마도 마일제 사건) 반역했다고 기술하였다. 삼국지 유요전에서는 그러한 원술을 상대로 유요가 선전하여 조정으로부터 포상을 받기도 하는데 즉 이때 동승이 원술과 손을 잡는다면 정적들에게 탄핵당하기 매우 좋은 구실이 되어버린다. 반면 조조는 이전까진 원소의 끄나풀처럼 보였을지라도 공손찬 휘하였던 유비나 원술 휘하였던 손책의 사례처럼 원소측에서 조정측으로 진영을 바꾼 듯한 이미지 메이킹이 가능했으며 당장 역적인 원술과 싸우고 있으니 매우 협력하기가 좋은 파트너였다. 그러니 양봉도 동승도 조조와 친하게 지내며 손 내민 것이다.

삼국지 순욱전과 후한서 순욱전의 기술, 그리고 사마광의 분석처럼 낙양 환도 즈음으로 특정짓는 것이 딱히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순욱의 그 조언은 조조의 협천자 프로젝트 발동에 결정적이었다. 설사 조조 진영이 황제 탈출이란 핫이슈를 놓고 안읍 체류 시절부터 협천자 논의를 시작했을지라도 결국 그 프로젝트를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 것이 196년 7, 8월이라 본다면 이상할 점이 없다. 부수적으로 조조의 협천자 프로젝트는 양봉도 몰랐을 정도로 대놓고가 아닌, 은밀히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원술까지 그것을 알기는 어렵다. 즉 원술과 조조가 예주를 놓고 싸운 것은 191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원소 대 원술 전쟁, 또 193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조조와 원술의 연주·예주 분쟁의 연장으로 봐야지 조조의 협천자를 방해할 목적이었다고 보기엔 어렵지 않나 한다.

조조 역시 헌제의 정통성을 강력히 옹호하던 인물이었고, 원소와의 불화도 무제기에서 확인된다. 조조가 조정에 계속적으로 친화적 제스처를 보내는 것은 동소전에서 확인이 된다. 반면에 장안 정권 이후의 원술에게선 그러한 움직임이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조정과 척을 지는 기록들만이 발견된다.

연주와 예주에서의 조조-원술 전쟁 역시 원술이 져가고 있었음은 무제기와 원술전으로 확인됩니다. 이 시기의 본거지부터가 조조는 연주, 원술은 양주다. 낙양에 미칠 영향력 면에서도 조조가 원술보다 우위인 것.

결국 동탁 토벌전 시기의 원술의 위상과 안읍 및 낙양 천도 시기의 원술의 위상은 차이가 크다는 것을 여러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원술을 여전히 대화 가능한 상대로 보고, 조조를 원소의 부하 정도로 봤을 수도 있단 가정이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으나, 이 시기 여러모로 안 좋은 원술과 손을 잡고 뜬금없이 조조에게 견제구를 날림으로써 조정을 장악한다는 구상이나 원술이 조조의 협천자 프로젝트를 미리 알아 방해했을 가능성은 여러 기록들상 무리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덧붙여 유요전의 '詔書以為揚州刺史'란 기록으로 보아 유요는 원래부터 원술에 대항할 정식 자사였던 것 같다. 이것으로도 조정의 원술에 대한 인식을 간접적으로 읽어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조조가 원소의 끄나풀처럼 보였을 수도 있단 점은 사실이다만 그럼에도 뜬금없이 조조를 내치겠다고, 안 그래도 안읍에서 환도 문제로 골치아픈데, 조조보다도 급한 장군들이 더 많은데, 거기다 여러모로 안 좋은 원술과 손까지 잡아서 조정을 장악하겠단 구상은 좀... 무리가 많은 것 으로 보인다. 동승과 원술의 관계가 무제기 외의 기록들에서도 발견된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193년부터의 원술-조조 전쟁은 조조의 우위기다. 물론 194-195년의 연주 공방전으로 인해 조조가 헐떡인 적은 있었으나 원술은 아예 본거지를 옮겨야했을 정도로 힘들었으며 연주 공방전 시기엔 예주나 연주 방면이 아닌 양주에 주력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원술의 움직임은 이후의 행보와도 일치한다.

원술과 동승의 협력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가능성이 매우 낮았다고 보인다. 조조에게는 원소라는 꼬리표가 있었다 하더라도 조조는 그것을 떼어버리려고 노력했던 반면, 원술은 조정으로부터 이탈하는 모습들을 보여주는데 원술은 그것을 해명하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았단 점에서도 조조보다는 원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더 강했을 것 같다. 이는 서주에서도 원술이 아닌 유비가 추대되었다는 점, 양주에서도 원술이 아닌 유요를 지원했다는 점, 이후 양봉도, 동승도 조조와 친하게 지냈다는 점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파워 면에서도 원술은 계속 조조에게 지고 있었고, 그런 원술은 예주가 아닌 양주 서주에 공을 들였으며, 196년 1월엔 조조가 영천까지 확보할 정도였으므로 낙양에 미치는 영향력 면에서는 조조가 우위였다고 보아야하지 않을까. 예주의 지배 상황과는 별개로 말이다.

물론 협력 가능성이란 것은 시각의 차이이므로 긍정론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다만 동승과 원술의 관계 및 원술이 조조의 협천자를 방해했다는 기록이 오직 무제기의 그 구절뿐이란 점은 약점으로 보인다. 그 무제기의 기록조차 형태와 시기의 모순이 있기에 더욱 그렇다.

2.1.2. 긍정론

동승이 원술과 손잡고 조조의 봉영을 방해했다는 삼국지 무제기의 기사가 196년 1월. 한섬이 동승을 공격했다는 후한서 헌제기의 기사는 196년 2월의 일이고, 후한서 동탁전과 효헌제기, 후한기 등에서 보충되는 관련 기사들은 2월에 환도 논의로 안읍 조정 내에 극심한 다툼이 일어나고 최종적으로 이락, 호재는 하동 잔류. 장양은 하내로 귀환, 양봉도 장양과 맞춰 자기 근거지인 하동으로 돌아가면서 조조가 입조하는 196년 8월 시점의 조정에는 한섬과 동승만 남아있었던 상황이다.

동승이 조조를 부른 이유에 대해, 후한서 동탁전에서는 한섬이 정사에 마음대로 간섭하는 등 조정을 사당화(?)하려 한다는 혐의가 있어 이를 염려한 동승이 조조를 불렀다는 식으로 풀고 있고, 당시 헌제의 낙양 환도로 이락, 호재, 양봉 같은 백파적 계통 세력들이 줄줄이 중앙무대에서 이탈하고, 장양도 대사마를 받되 하내로 돌아가는 식으로 중앙무대서 밀려나는 와중에도 한섬은 기어이 중앙에 남아 대장군, 영 사례교위로 위세를 부리고 있었으니, 이 시점서 동승이 한섬을 견제 내지 축출하기 위해 조조에게 손을 내밀었다는 것이 딱히 말이 안되는 상황은 아닌 것 같다. 과거 원술과 손잡고 조조를 견제한 적이 있었다 해도.

직접적으로는 낙양 환도 시점에서의 순욱 발언을 조조의 협천자 승리로 이어지는 계기로 보는 게 맞겠지만, 황제가 이각과 결별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당대 정치판의 핫이슈인 와중에 순욱의 협천자 권유 발언 시점을 굳이 낙양 환도 이후 시점만으로 특정짓는 것은 오히려 이상하다.

안읍 체류 시절과 낙양 환도 이후 시점의 헌제를 둘러싼 정치상황이 크게 다르기 때문에 세세하게 따져볼 여지는 많은데 사료가 부족하다.

확실히 동승 본인이 직접 조홍을 막았다는 이야기는 믿기 어렵지만, 낙양으로의 환도 논의가 외부에서도 어느정도 예측 가능한 범주에 들어갔고, 조조와 원술에게도 이를 활용하는 것이 고려되었다면 사예지역과 인접하면서 지배권이 애매하던 예주를 두고 이들이 경합하는 것 역시 이상한 일이 아니며, 이 대립구도에서 동승이 원술 쪽에 기울었을 가능성까지 배제하긴 어렵다고 보인다. 원술의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고 하신 것은 마일제 사건을 염두에 둔 듯한데, 조조 역시 원소 끄나풀이라는 이미지가 있어 관점에 따라서는 원술보다 더 신뢰하기 어려워 보인다.

결과적으로 이 시기에 원술은 서주 쪽에 집중하는 움직임을 보이다가 스텝이 꼬이는데, 유비의 진동장군 임명은 원술의 발을 묶은 것에 대한 조조 나름의 논공행상으로 볼 수도 있을것이다.

관련 기사들을 종합해 보면 이각이 원술을 회유하기 위해 마일제를 파견했으나 원술이 마일제를 억류하자(원술전), 장안 조정에서는 대립 양주자사였던 유요를 정식으로 승인하고(유요전), 육강도 장안 조정과의 불화를 명분으로 원술과 대립(육강전)하는 와중에 헌제가 조양에서 패하자 원술이 칭제를 간보다가 그만두었다.(원술전) 는 흐름이다.

헌제가 장안의 이각과 결별하고 백파적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시점서 판은 이미 뒤집어졌고, 이런 상황에서 조정 내에 원술과의 연대론이 나오는 게 탄핵을 각오해야할 사유라거나 할 정도로 무리한 방향이라 보이지는 않다. 당대 정치판에서 근본없기로는 끝판왕 격이었던 백파적과도 연대하는 마당에 어쨌거나 원술은 헌제의 정통성을 강력히 옹호하던 세력이었고, 낙양으로 환도가 이루어질 경우 인접한 예주에서 여전히 적잖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마일제 건으로 물을 먹었을지언정 원술이 관동 정치판 거물들 중에서는 그나마 대화가 가능한 상대라는 인식이 여전히 남아 있었고, 조조가 원소의 끄나풀이라는 의심 역시 완전히 떨쳐지지 않은 것이 환도 이전 조정 내부의 상황이었다면 그 일환으로 원술 쪽에 기울어 조조에게 견제구를 던지는 것 정도는 가능한 액션이다.

물론 협천자라는 목표 하나에 집중하던 조조와 달리 원술은 조양 패배를 조정의 본격적인 몰락이라 여겨 칭제 각을 재본다거나, 조조에게 예주 내의 범 원술계 세력들이 격파당하는 동안 저지는 커녕 서주 병합이라는 전혀 별개의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등 다소 안일해 보이는 판단을 내리는데, 이게 우선순위 설정 과정에서의 판단 착오인지, 정말 칭제에 뜻이 있어서 조정 장악에 관심이 없었던 건지는 별도로 따져봐야 할 문제 이다.

193년에 조조에게 패한 원술이 수춘으로 거점을 옮기면서 예주에서 발을 빼긴 했지만, 딱히 조조가 예주를 관리하려던 시도도 없었고, 그럴 여유도 없었다. 장막, 여포와의 싸움에서 망할 고비를 넘기고 연주를 재정비한게 195년 말의 시점인데 무제기의 기사는 헌제가 장안을 벗어나고 협천자 논의가 나올 무렵에 조조가 예주에 발을 들여 원술이 임명한 관리와 원술계 로컬들을 때려잡는 흐름이니 낙양에 미칠 영향력을 의식한 조조가 예주 관리를 시도하기 이전 196년 초까지의 예주는 원술의 영역권에 가까웠다고 봐야한다. 동소가 조조를 위해 장양에게 했던 말부터가 원소 끄나풀 아니냐는 인식에 대해 변호하는 요지의 발언 아니던가.물론 무제기에 헌제의 정통성을 옹호하며 원소와 불화했다는 기록이 있긴 한데, 그럼에도 조조는 정치적으로 원소의 후원을 받았고, 조조를 원소의 사람으로 보는 여론이 많았으며, 조정의 인식 역시 크게 달랐을 것 같지 않다.

즉, 동승과 원술의 연대가 언급되는 무제기의 기사를 적어도 안읍 체류 시점의 조정 측에서는 조조보다는 원술 쪽을 선호하는 분위기가 있었고, 원술도 전혀 관심이 없지는 않았다고 이해할수 있다. 이각과 결별하면서 공경대신들이 떼죽음당하고, 헌제가 거지꼴로 노숙하며 황건적 잔당 도적떼들에게 대장군이니 거기장군이니 잔뜩 뿌려대던 시점서 원술의 마일제 억류 건 같은 문제는 차라리 사소한 문제라는 것이다.

환도 논의가 조정 내 중요 의제로 떠오르는 상황에 196년 초순까지는 예주가 원술의 영역권에 가까웠다는 점에서 거리가 뭐 문제인가 싶고, 원술이 조정과 척을 지는 부정적인 기사가 나오고 조조는 계속 친화적 제스처를 취하는 기사가 나옴에도 불구하고 196년 초순 시점까지의 조정에서는 원술이 그나마 말이 통하는 상대로, 조조는 원소의 끄나풀 정도의 인식으로 보고 있었다면 동승이 원술과 손잡고 조조를 방해했다는 기록이 어디어디가 모순된다 할 것도 없이 그냥 딱 떨어진다.

환도를 전제한다면 낙양과 인접해 있는 세력을 신경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조조에게는 아직 부정적 인식이 강해 그나마 말이 통하는 상대라고 인식되던 원술의 지원을 얻으려는 모양새가 딱히 무리인 같지는 않은데 원술이 거점을 옮겼지만 예주에는 여전히 원술계 세력들이 다수 남아있었고, 조조가 이들을 관리하려는 시도는 196년에서야 나타난다.

원술이 예주를 방치하다시피 하고 조정보다는 양주, 서주의 세력확장에 집중하며 소위 군웅화하는 모습과 대조적으로 조조가 조정에 지속적으로 호의적인 제스쳐를 취하며 원소계라는 꼬리표를 떼기 위해 부던히 노력함과 동시에 경쟁자 포지션인 원술의 영향력을 예주에서 신속히 제거하는 모습이 원술과 조조의 명운을 가른 판단이었다고 보며, 이 점은 동의한다.

다만 당초 조정 입장서는 원소나 원소계 세력들을 당연히 긍정적으로 인식했을 리가 없으니, 이들에게 의심을 거두지 않으며 장양이나 원술 같은 비 원소계면서 수도권과 인접해있는 세력들을 우선적으로 포섭하고 이들을 통해 정국 안정을 생각하는 것 역시 상식적인 범주의 판단이라 보인다. 물론 조조의 호의적 제스쳐와 원술의 미온적 반응을 접하면서 기존 인식의 재고가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겠지만. 원술과 동승이 조조의 협천자를 견제했다는 무제기의 기사는 이런 맥락에서 읽혀지며, 이게 딱히 말이 안 되는 기사인지는 알 수 없다.

2.2. 평가

정사에 따르면 출신상으로는 그는 이각, 곽사처럼 동탁의 수하였다. 결국 그들과 등을 돌려 낙양으로 어가를 호위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와중에도 동료들과 마찰을 빚거나, 개인적인 감정이 앞서 헌제를 위기에 빠뜨리는 원인을 여러 번 제공하였다.[8] 그가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한 그의 마지막은 사실이지만, 배반의 동기가 결코 연의에서처럼 한왕조에 대한 충심에서 우러나온 것은 아닐 가능성이 있다. 애초에 조조를 헌제에게 끌어들인 것도 동승이었다.

그러나 사실 위의 평가는 동승 입장에서는 억울할수 있는데, 확실히 해야 할 것은 의대조 사건에서 조조를 주살하려고 맨 처음 계획한 사람은 헌제이지 동승이 아니며, 동승은 그저 헌제의 밀서에 적힌대로 행하려고 했을 뿐이라는 점이다. "황제의 의대(衣帶)를 받으니 그 속에 조공을 주살하라는 밀조(密詔)가 있었다."라는 정사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의대조 사건은 동승이 원해서 일으킨것이 아니라 헌제가 그래도 그중 가장 믿을 만한 인물이라고 여겨 동승을 지목하여 밀서를 내림으로써 일어난 사건인 것. 따라서 저런 밀서를 받은 동승이 할 수 있는 반응은 '밀서를 받았음을 조조에게 알린다', 또는 '밀서에 적힌 명령대로 행동한다' 둘 중 하나가 될 수 밖에 없으며[9] 그는 여기서 후자를 선택한 것이므로 마치 그에게 무슨 숨은 의도가 있어 조조를 몰아내려고 능동적으로 행동한 것처럼 해석하는 주장은 무리수가 될 수 밖에 없다.

또한 동승의 일대기를 보면 그의 행적에서 충심에서 한 행위인지 욕심에서 한 행위인지 애매한 행동이 몇가지 섞여있는 것 자체는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동승의 이러한 행적을 곁에서 모두 지켜본 헌제 자신이 그를 충분히 믿을 수 있는 인물이라고 판단하여 지극히 위험한 밀서를 바로 그에게 주었다는 것이고, 또 그 밀서를 받은 동승은 조조에게 일러바치는 대신 헌제가 명령한 대로 조조를 처치하기 위한 궁정쿠데타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즉 '헌제는 동승을 신뢰했고, 동승은 그 신뢰에 부응했다'는 것은 역사서의 기술을 통해 확인 가능한 사실이다. 반면 '그 과정에서 동승의 속마음에 숨겨진 동기가 무엇이었을까?'는 짐작과 상상의 영역이다. 물론 적당한 근거가 있다면 역사서에 직접적으로 기술되어 있지 않은 영역이라도 추론하여 짐작해보는 것도 나름 의미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짐작보다는 사서에 확실히 기록된 바와 그를 통해 확인 가능한 내용이 항상 우선시되어야 한다.[10]

그리고 조조를 헌제에게 끌어들인 것이 동승이었음을 문제삼는 것 역시 과도한 면이 있다. 어가를 호위하는 인원이 수십명에 불과할 정도까지 조정의 자체적인 힘이 쇠약해진 상태에서 황제를 보호하고 조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세력을 가진 군벌을 끌어들이는 것이 어차피 불가피했다. 그렇다면 조조 외에 어떤 선택지가 있었겠느냐는 것. 원소는 멀리 하북에 있는데다 헌제를 '역적 동탁이 세운 괴뢰 황제' 취급하고 있었고, 원술은 (약간 고려대상이었을 가능성은 있어보이지만) 조조보다도 평판이 나쁜데다, 조조보다도 헌제의 조정에 더 거리를 두려는 모습을 보이는 인물이었다. 그러니까 거리상으로도 가깝고 헌제의 정통성을 인정하던 조조 이외의 다른 대안은 딱히 없었다. 이 시점에서 이후 조조가 황제를 완전히 손아귀에 넣고 흔드는 권신이 될 가능성까지 예상했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가혹한 요구인데다, 설령 야심가인 조조를 권신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위험함을 짐작했다 하더라도 딱히 다른 대안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조조도 끌어들이지 않을거면 헌제를 다시 이각, 곽사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하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적인 대안에서는 일단은 조조가 충신이 될 가능성에 기대를 걸어보고, 만약 과도한 권력욕을 드러낸다면 그에 대해서는 그 때가 되어서 대처법을 찾아보자는 것 이외의 다른 방법은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결국, 동승의 행적을 보면 오판이나 과오는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불충한 의도나 악의를 가지고 있었다고 단정할만한 부분은 찾기 어렵다. 반면 그의 행적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던 헌제가 그를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판단했다는 점이나, 그가 자신에 대한 헌제의 신뢰에 부응하는 충성심을 보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유력한 징후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런데 그에 대한 비판의 상당부분은 단순한(악의는 없는) 실수나 잘못의 결과일 수 있는 것을 굳이 사리사욕등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단정하여 몰아가는 면이 있는 것이다. 또한 당시 한 조정이 처한 심각한 위기상황에서 그의 능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문제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비판론은 이를 마치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것처럼 몰아가는 면 또한 가지고 있다. 결국 '동승은 알고보면 헌제의 충신이 아니었다'는 주장은 미리 결론을 정해놓고 일부러 결론을 그 쪽으로 몰아가려 시도하는 면이 분명 있다는 것.

이런 점들을 감안하여 객관적으로 평가하자면 자신이 가진 능력의 한계 내에서는 분명 헌제에게 충성했던 인물이지만 그 능력과 자기 그릇의 한계가 그리 크지는 못했던 인물, 즉 충신이라고 평가하기에는 족하지만 유능하다고 평가하기에는 모자람이나 아쉬움이 있는 인물 정도로 보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예를 들어 왕윤과 같은 인물과 비교한다면 그 행적이나 역량 전반에서 결함이나 문제점, 부족함이 많이 눈에 띄는 인물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또 다르게 보면, 이는 동승이 못난 것이 아니라 왕윤이 너무 대단한 것이니 이를 근거로 동승을 지나치게 폄훼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고 지적할수도 있겠다. 왕윤은 헌제가 아직 어려(10대 초반) 황제의 권위에 의지하기도 어렵고, 자신이 지휘할 수 있는 군사력조차 가지고 있지 못한 처지에서도 그저 자기 능력과 인망으로 계략을 짜고 사람을 끌어들여 군사력(중앙군)과 수도의 전권을 틀어쥔 권신 동탁을 날려버리고 정국을 장악하기까지 성공했고, 그러면서도 그 행보에 특별히 오점이 남지 않을 정도로 평소 청렴한 행보를 보여준 인물이기까지 하다. 다만 비록 동탁 처치 후 최종적인 정국 장악에 실패함으로써 그 업적이 크게 빛바래기는 하였으나 이정도면 세계사적으로도 비교할만한 대상을 몇 찾아보기 힘든 대단한 인물로 손꼽을만 한 것. 이정도 수준의 인물과 비교해서 그만 못하다는 것이 한 인물의 평가에서 그리 큰 흠이 될만한 것은 아니다.

3. 삼국지연의

13회 때 이각 곽사에게서 헌제를 구출한 뒤, 20회에서 헌제에게 의대조[11]를 받고 조조 암살 계획을 꾸미지만, 23회에서 길평이 실패한 뒤 칭병하고 집에 숨었다가 진경동 운영의 밀고로 잡혀와서 24회 때 일족과 함께 처형당한다.

동승이 이민족이나 도적떼를 포섭하거나 지원을 요청한 사실은 모두 삭제했고[12], 헌제가 탄 배에 매달려 따라오려는 관리들의 손가락을 찍은 사람은 이락으로 왜곡하였다. 동승이 조조를 끌어들여 그때까지 동료였던 한섬, 양봉 등을 내쳤다는 정사의 기록과는 달리 연의에서는 동승은 전혀 언급되지 않고, 한섬과 양봉이 조조에게 당할까봐 미리 피한 것으로 되어 있다.

더불어 태의 길평과 공모하였으나 거사가 가노인 진경동이 밀고해서 발각되는 이야기와 같은 극적인 연출을 덧붙여 마등과 더불어 한황실의 충신으로 묘사했다. 그래서 연의에 묘사된 인물 중에서도 수위권의 수혜자로 꼽힌다.

4.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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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복완과 열후에 봉해졌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2] 우보 휘하의 부곡장이었다고 한다 [3] 보통 '동귀비'로 알려져 있으나, 귀인이 맞다. 후한의 내명부는 매우 간소하여 귀인-미인-궁인-채녀의 4등급 밖에 없었으며, 귀비라는 품계는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다. 후대에 동귀인이 동귀비로 알려지게 된 것은 삼국지연의의 영향. 나관중 원말명초 시대에는 귀인이란 품계가 '황후 바로 아래인 최고위 후궁'이 아니라 한참 아래의 품계로 격하됐으며, 황후 다음가는 품계는 '귀비'였다. [4] 《촉서》<선주전>의 배송지의 주석이다. [5] 후한서》와 《위서》에는 좌현왕으로 나오지만, 실제 좌현왕은 어부라의 아들 유표였으므로 오기다. [6] 연의에서는 이 역할을 위에 나온 흑산적 일파인 이락이 하게 된다. 아마도 연의에서 나오는 동승의 충신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서 잔인한 일을 하는 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긴 듯. [7] 연의에서는 마등도 포함한다. [8] 사실 심배와 같은 경우도 주군인 원소 원상에 대해선 충성했지만 시종 다른 동료들과 내분을 일으켰으니 꼭 동승의 불충에서 비롯한 일이라고 단정하기엔 약간 애매하다. [9] 단순히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있는 가짓수만 따진다면 '밀서의 내용을 무시하고 그저 가만히 있는다'는 선택지도 가능하겠지만, 이는 헌제의 명령을 수행하는데 성공할 경우 총애를 얻어 새로운 실세로 자리잡는 것과 같은 이득은 전혀 주지 못하면서 만약 들통날 경우에는 그 밀서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조조의 적이 되어 숙청대상이 되는 것이 당연하므로 동승의 입장에서 보면 무익유해한 비합리적 선택이다. 더 단순화시켜 말한다면 헌제 vs 조조의 구도에서 양쪽 모두를 적으로 돌리는 것이므로 최소한 한 쪽은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는 두 가지 선택 모두에 대해 하위호환이 되는 비합리적 선택이라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논외로 한다. [10] 예를 들어 헌제의 계획이 아주 잘 풀려 조조를 제거하고 그의 세력까지 제거하거나 포섭하는데 성공했을 경우 이미 외척에 해당하는 지위를 가지고 있고, 또 의대조 사건 당시 동귀인이 임산부였다는 점에서 헌제의 총애를 받고 있었음을 짐작 가능하니 동승이 또 다른 권신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있지 않았겠느냐고 지적할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동승의 경우 가문이나 군벌등 다른 권력 기반을 가지고 있지 않아 오직 헌재의 총애에 기대야 하는 인물이기에 헌제의 입장에서 동승이 권신으로 자리잡더라도 동탁, 이각, 곽사, 조조 부류보다 훨씬 통제하기 쉽지 않았겠느냐고 말할수도 있고, 또 이런 식으로 따지면 외척(황후의 인척 포함)에게 군권등 권력을 맡기는 것은 한나라의 오랜 전통이었으니 동승이 그 역할을 맡는 것이 큰 문제가 될 이유도 없다 (단지 헌제에게 권력을 수습할 능력이 있는지가 문제일 뿐이다) 식으로 접근할 수도 있는 것이다. [11] 복완이 헌제에게 계책을 냈다. [12] 이 때 이각, 곽사의 횡포가 심하여 당장 헌제와 중신들이 죽게 생겼으니 백파적을 포섭한 일을 두고 뭐라하기는 힘든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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