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02:40:45

2015년 11월 파리 테러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colbgcolor=#bc002d><colcolor=#fff> 2015년 11월 파리 테러
Attentats du 13 novembre 2015 en Île-de-France
November 2015 Paris attacks
파일:파리 테러 발생 현장.jpg
▲ 테러 발생 현장
파일:파리 테러 지도.jpg
▲ 테러 발생 지도
발생 일시 2015년 11월 13일 금요일 21시경
유형 테러
발생 위치 프랑스 파리 일대 6곳
(스타드 드 프랑스, 바타클랑 극장, 알리베르가, 퐁텐 오 루아가, 볼테르가, 샤론가)
피의자 ISIL 소속 이스마엘 오마르 모스테파이8명
(7명 자폭, 1명 사살)
피해 사망: 130명 (피의자 제외)
부상: 416명 (100여 명 중상)
1. 개요2. 상황 전개
2.1. 사건의 전개 과정
2.1.1. 스타드 드 프랑스(Stade de France)2.1.2. 알리베르 거리(Rue Alibert)2.1.3. 라퐁텐오루아 거리(Rue de la Fontaine au Roi)2.1.4. 샤론 거리(rue de Charonne)2.1.5. 볼테르 도로(Boulevard Voltaire)2.1.6. 바타클랑 콘서트홀(Bataclan Concert Hall)
2.2. 수사 현황2.3. 후속 조치
3. 피의자
3.1. 배후3.2. 테러리스트
4. 원인5. 영향6. 반응7. 기타8. 관련 문서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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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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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평등 우애 공포[1]]
프랑스 공화국
2015년 11월 13일 프랑스 파리 시내 7곳에서 발생한 총기난사· 인질극· 폭탄 테러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무고한 시민 130명이 사망했다.

2. 상황 전개

2.1. 사건의 전개 과정

파일:파리 테러 지도.jpg
테러가 발생했음이 확인된 장소

2.1.1. 스타드 드 프랑스(Stade de France)

  • 특이점
    • 당시 프랑스와 독일 축구 대표팀의 친선 경기 진행 중이었으며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이 관람 중이었음.
    • 발발한 테러들 셋 다 자살 폭탄 테러다.
  • 전개 과정
    • 1차 폭탄(21:20): 입구에서 자살폭탄테러 발발.
    • 2차 폭탄(21:30): 1차와는 다른 입구에서 자살폭탄테러 발발, 올랑드 대통령 피신.
    • 3차 폭탄(21:50): 인근의 패스트푸드 음식점에서 자살폭탄테러 발발.
파일:프랑스 국립경기장 테러.jpg
스타드 드 프랑스에 발생한 테러

2.1.2. 알리베르 거리(Rue Alibert)

  • 특이점
    • 발발한 테러들 둘 다 총격 테러다.
  • 전개 과정
    • 1차 총격(21:25): 르 카리용 바(Le Carillon bar)에서 총격 발생.
    • 2차 총격(1차 때와 비슷한 시간대): 르 프티 캉보주(Le Petit Cambodge, 캄보디아 레스토랑)에서 총격 발생.

2.1.3. 라퐁텐오루아 거리(Rue de la Fontaine au Roi)

  • 전개 과정
    • 1차 총격(21:32): 라 카사 노스트라 피자리아(La Casa Nostra pizzeria)와 라 본 비에르 카페(Cafe Bonne Biere) 앞에서 총격 테러 발생.

2.1.4. 샤론 거리(rue de Charonne)

  • 전개 과정
    • 1차 총격(21:36): 라 베레 에퀴페 바(La Belle Equipe bar)에서 총격이 발생했다.

2.1.5. 볼테르 도로(Boulevard Voltaire)

  • 특이점: 용의자-브라함 압데슬람
  • 전개 과정
    • 1차 폭탄(21:40): 볼테르 레스토랑(Restaurant Le Comptoir Voltaire)에서 자살폭탄테러 발발.

2.1.6. 바타클랑 콘서트홀(Bataclan Concert Hall)

파일:external/pbs.twimg.com/CTupHGFWsAA8Gce.jpg
바타클랑 콘서트장에 투입된 대테러부대
  • (01:00), 바타클랑 콘서트장의 상황 종료, 약 100여 명의 사망자가 나온 것으로 집계됨. 테러범 전원 사망, 그 중 세 명은 자폭벨트로 자폭한 것으로 알려짐.

2.2. 수사 현황

프랑스 경찰은 이 테러를 모의· 지원한 혐의로 벨기에 태생 프랑스 국적자인 살라 압데슬람을 추적 중이라고 발표하고 "매우 위험한 인물"이기 때문에 혹시 그와 마주치게 되는 시민들은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앞서 벨기에 검찰도 브뤼셀에 거주하던 살라 압데슬람과 벨기에 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활동 거점인 몰렌베크생장에 거주하는 비랄 하드피라는 남성이 파리 테러에 연루된 것으로 밝혀졌다고 말했다. #

양국 경찰에 따르면 압데슬람 형제 중 한 명은 파리 바타클랑 콘서트홀 테러에서 자폭해 사망했으며 살라 압데슬람은 범행에 사용된 검은색 폭스바겐 차량을 구하는 등 테러에 필요한 물품들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압데슬람 3형제 중 나머지 한 명은 벨기에에서 체포된 것으로 알려졌다.

프랑스 경찰의 발표에 의하면 살라 압데슬람이 1989년 9월 15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났으며 175cm 신장의 소유자라고 한다. 그는 지난 13일 파리에서 테러가 발생한 다음날인 14일 폭스바겐이 아닌 다른 차량을 타고 2명과 함께 프랑스 국경을 넘어 벨기에로 도주했다고 한다. 당시 국경 수비대원들은 운전자의 신분증을 확인한 다음 통과를 허가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문제의 검은색 폭스바겐 차량은 테러 현장에서 발견됐으며 등록지는 벨기에로 밝혀졌다. 압데슬람은 이 차를 지난주 벨기에에서 직접 임대했다. 프랑스의 한 경찰은 차 안에서 발견된 벨기에 주차 영수증을 단서로 차량 등록지와 임대자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AP통신에 말했다.

파리 테러에 사용된 것으로 드러난 2대의 자동차는 모두 벨기에에서 등록된 차량들로 지난주 브뤼셀에서 임대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 가운데 한 대에서는 3곳의 식당에 총격을 가하는 데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유고제 자스타바 AK 3정이 발견됐다고 한다.

프랑스 경찰은 테러의 총책임자 압델하미드 아바우드, 도주한 살라 압데슬람, 9번째 용의자 등이 생드니에 은신해 있었음을 추적해 7시간 동안 진압작전을 벌였다. 총격전 결과 2명이 사망했고 8명이 체포되었다. # 사망한 한 명은 압델하미드 아바우드로 확인되었다.

경찰은 테러범들에게 폭탄을 제공한 것으로 추정되는 '모하메드 K'에게도 수배령을 내렸다. #

또한 테러리스트들이 사용하던 총들( 세르비아 M70 돌격소총 등)이 NRA(National Rifle Association)을 후원하는 플로리다주의 총기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이 드러났다. #

2.3. 후속 조치

프랑스 전역에 3일간의 애도기간이 선언되었다.

노트르담 대성당이나 국회의사당 건물과 같은 주요 건물에 1,500명이 넘는 프랑스군이 배치되었다. 워낙 큰 규모로, 다양한 곳에서 산발적으로 발생한 테러에 급하게 많은 곳을 지켜야 해서 심각한 병력 부족으로 인해 임산부인 군인마저 급하게 배치시킬 정도였다.[4] 파리 전역에 부분계엄령이 선포됐다. 이는 1944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발령 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고 파리 언론은 밝혔다. 관련 기사

파리 전역의 모든 학교를 임시 폐쇄하기로 했다. 관련 기사 육상국경, 항구, 공항의 통제가 강화되었으며 모든 가방과 차량이 검문검색되었다.

사회당, 공화당, 국민전선 등 프랑스의 주요 정당들은 일제히 애도를 표하면서 12월 지방선거 유세를 중단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 주에 예정되었던 파리 지역의 모든 스포츠 경기는 취소되었다. 또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이 A매치 일정을 전면 무기한 연기함으로써 이후 벌어질 예정이었던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친선경기도 무기한 연기되었으나 결국 예정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

아메리칸 항공은 일시적으로 파리행 항공편을 모두 결항시키기로 결정했다.

에펠 탑 무기한 입장 금지되었다...가 재개방되었다. 링크 테러를 이기기 위해서는 슬픔을 이겨내야 한다며 에펠탑 재개방은 물론 시민들도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애썼다.

11월 15일, 프랑스 공군 전폭기들이 ISIL의 자칭 수도인 락카를 폭격하여 이 테러에 대한 보복 공격을 시작하였다. 기사

11월 16일, 샤를 드골급 항공모함이 IS 폭격 임무에 투입되었다.

3. 피의자

범인들의 신상은 흉악범임을 감안하여 적발 즉시 공개되었다.

3.1. 배후

  •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 - 1971년생. 만 44세. IS의 수괴. 서방에 대한 보복 지시. 2019년 사망
  • 압델 하미드 아바우드 - 1987년생. 만 28세. IS의 고위 간부. 파리 테러 기획 및 지시. 테러 하루 후 생드니 지역에 은신했다가 경찰의 검거 작전 과정에서 경찰 저격수에게 사살당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기사 사살 과정 중에 시신이 크게 훼손되어 시신의 유전자와 지문 검사로 신원이 확인되었다.
  • 파비앵 클랑 - 1978년생. 만 37세. 1990년대에 이슬람으로 개종한 프랑스인이다.[5] 파리 테러가 자신들의 소행임을 주장한 IS의 프랑스어 메시지를 녹음한 장본인으로, IS에서 850명에 달하는 프랑스·벨기에 출신 전투원을 관리하는 중책을 맡았다. 2019년에 국제동맹군에 의해 사살당했다. #

3.2. 테러리스트

  • 이스마엘 오마르 모스테파이 - 1985년생. 만 30세. 테러 실행. 자폭.
  • 살라 압데슬람 - 1989년생. 만 26세. 테러 실행. 체포.[6]
  • 이브라힘 압데슬람[7] - 1984년생. 만 31세. 테러 실행. 자폭.
  • 빌랄 하드피 - 1995년생. 만 20세. 테러 실행. 자폭.
  • 사미 아미무르 - 1987년생. 만 28세. 테러 실행. 자폭.
  • 아흐마드 알 무하마드 - 1990년생. 만 25세. 테러 실행. 자폭.[8]
  • 기타 신상이 밝혀지지 않은 2명 - 20대에서 30대로 추정. 테러 가담. 사살 혹은 자폭.
이들의 신상에 대해서는 초기에는 시리아 여권이 주변에서 발견됨에 따라 난민을 통해 이들 조직원이 침입하였다는 추정이 주를 이루었지만 이후의 수사를 통해서 대부분이 유럽 국적자였고 # 시리아 여권은 위조된 것으로 밝혀짐에 따라 이들 여권의 목적은 단순히 난민 위장이 아니라 반난민 정서를 확대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 아닌가 하는 분석도 나왔다. # 특히 이스마엘 오마르 모스테파이는 IS에 포섭된 뒤 테러를 목적으로 귀국한 것까지 확인되어 프랑스 사회를 경악시켰다.

이외 압데슬람 3형제의 둘째 무함마드 압데슬람[9] 등 테러 행위에 협조한 것으로 추정된 여러 명의 용의자가 잡혔다. 단 무죄추정의 원칙에 의거하여 이들의 신상은 공개되지 않았으며 테러 혐의자들이 형제 단위로 다 함께 가담한 것이 아니라 거부한 자들도 적지 않기에 일부는 무혐의로 풀려났을 가능성도 있다.

IS가 파리 테러에 가담했던 9명의 이름과 얼굴을 공개한 영문 선전 포스터를 만들었다. #

2021년에 이 테러에 연루된 사람 중 이탈리아에서 복역하던 알제리 출신 36세 남성의 신원이 확인되었다. #

4. 원인

범인들은 총 8명으로 추정되며 1명은 사살되었고 나머지는 스스로 폭탄조끼로 자폭하였다. 1명은 경찰이 극단주의 위험 인물로 분류한 프랑스 국적자이고 이집트와 시리아 여권 소지자도 있다고 보도되었다.

IS는 자신들의 소행임을 주장하였으나 이미 보도된 정보만 담았으므로 확실한 건 아니다. IS가 2015년 들어 프랑스에 대한 테러를 간접적으로 선동하기는 했지만 이 테러는 IS가 직접 계획했거나 사전에 인지한 것이 아닌 다른 자생적 집단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이렇게 이들이 프랑스를 노린 대규모 테러를 시도한 동기는 2015년 들어 프랑스 공군기가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IS를 폭격하는 등 프랑스와 IS가 전쟁 상태고 프랑스의 일방적 폭격에 대해 군사적으로 반격하기 어려운 IS가 테러로 프랑스에 보복하여 여론을 바꾸려는 시도로 추정되었으며 이러한 테러 행위를 통해 유럽 내 반이슬람 정서를 확산시켜서 유럽 내 무슬림들의 고립을 심화시킨다면 자연스럽게 이렇게 고립되거나 소외된 무슬림들을 자신들의 세력으로 포섭하기 용이해지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왔다.[10]
파일:external/latuffcartoons.files.wordpress.com/hollande-syria-islamic-state-daesh-france-terrorism-paris.gif
프랑스-시리아 관계를 표현한 풍자화
또 위 풍자화와 같은 인식을 프랑스인들과 전 세계인들에게 심어주는 것도 IS의 목표일 것이다. 시리아를 공격했으니 부메랑을 맞은 것, 즉 자업자득으로 이리 된 거니 프랑스인들에게 반전 여론을 확산시키고 전세계 국가들에게 '우리 건드리면 부메랑 맞게 된다'는 걸 인식시켜 전세계의 IS 공조를 와해시키려는 것이다.[11]

IS 공습을 지시한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참석한 경기장에서 테러가 벌어져 대통령도 이 테러의 목표였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바타클랑 콘서트 홀을 습격한 범인들도 총을 난사하며 '이게 다 올랑드가 세계 곳곳의 무슬림들에게 피해를 줬기 때문이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또 10월 31일에 시나이 반도에 추락한 러시아 코갈림아비아 항공 9268편 테러 사건도 러시아가 시리아에서 IS 기지를 폭격한 것에 대한 보복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리고 얼마 후 두 명이 난민으로 위장한 IS 조직원이라는 게 확인됨으로써 ISIL의 지시임이 공식적으로 확정되었다.[12] 관련 기사

시사IN 2015년 12월호에서는 IS의 테러리즘에 대해서 "값싼 전쟁"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네티즌들이 공감을 얻기도 했다. ‘값싼 전쟁’과 마주친 세계 기사는 전세계에서 몰려드는 자원자들이 얼마 안 되는 개인화기로 벌이는 이런 초저비용 전쟁은 매우 남는 장사라는 점을 명확하게 짚으면서 '국제 안보라는 일종의 ‘공공재’ 생산을 위해서, 누가 인적·물적 투자라는 비용을 감당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5. 영향

파일:external/media.cagle.com/171475_600.jpg
파리의 밤(Nuit à Paris)
“테러리스트들에게 용서와 자비는 절대 없을 것이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 파리 테러 주범이 IS 소행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이 사건으로 인해 유럽 난민 사태 과정에서 발생한 반 이슬람, 반 난민 정서가 심화되고 더불어 무슬림이나 서아시아 출신자들에 대한 기피 내지 탄압 분위기가 전세계적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생겼다. 한편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샤를리 엡도 총격 테러 등 반인륜적 테러 및 기타 범죄를 지속하는 이상[13] 이슬람권과 타 문화권 간의 화합을 더욱 어렵게 만들 것이다. 또 테러 피해 당사국인 프랑스를 비롯하여 미국, 러시아 등 국가들의 IS 점령지에 대한 폭격이 거세질 가능성이 커졌다. 이와 함께 파리 다음 테러 지역으로 로마( 바티칸), 런던, 워싱턴 D.C.가 꼽히고 있어 이탈리아 영국은 국경봉쇄를 고려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일부 IS 조직원들이 난민으로 위장하고 테러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유럽의 시리아 난민 수용에 엄청난 제동이 걸릴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G20 개최국인 튀르키예 또한 앙카라에서 폭탄 테러를 겪었던 만큼 보안 강화에 만반의 준비를 했다.

프랑스는 2015년 들어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으로부터 지속적인 공격을 받고 있었다. 2015년 초에 발생한 샤를리 엡도 총격 테러부터 이 사건까지 파리에서만 해도 벌써 3건이고 프랑스 전체로 범위를 넓히면 더 많아진다. 6월 26일 리옹에서 IS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테러가 발생했고 그 전에 4월 프랑스의 한 성당에서 테러를 시도한 알제리 출신 대학생이 적발되었다. 9월엔 파리행 고속열차에서 테러를 일으키려다가 같은 열차에 탑승한 미군들에게 잡히는 일이 있었다. 거기에 에펠 탑 테러 시도 적발 등 포함하면 최소 10여건의 사건이 적발 또는 발생했는데 그것에 정점을 찍은 게 이 사건이다.

이 정도 상황이라면 이슬람 전반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프랑스 전역에 퍼져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실제로 이슬람에 대한 관심과 융화를 촉구하는 행사가 자주 열렸던 샤를리 엡도 총격 테러 직후와는 달리 이 테러 이후 프랑스 현지 분위기는 매우 흉흉했다. #

또 프랑스 내부의 개인주의적, 자국 혐오 성향이 사그라들고 애국주의가 자리잡기도 했다. 청년들 사이에서는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들을 때려잡자며 군에 입대하려는 이들도 급증했다. 당장 샤를리 앱도 총격 테러 이후 일 130여 명에서 500여 명으로 증가한 것이 다시 일 1,500명으로 늘어났다. 지원자가 거의 10배 가까이 불어난 셈인데 입대자의 자질 저하로 골머리를 썩던 프랑스군 모병 센터들은 전례없는 호황을 맞이했다.

서구 사회에서 다문화주의에 대한 회의를 심화시키고 서유럽의 우경화를 더욱 가속화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이로 인해 IS가 일부러 이슬람에 대한 분노를 부추기기 위함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특히 IS 대원 중에는 유럽의 소외된 무슬림 이민자 출신이 많은 만큼 이슬람에 대한 증오를 부추겨 남아 있는 무슬림 이민자 2세를 자극하고 칼리프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설파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대 IS 전선이 곳곳에 생겨나니 IS에 화력을 집중하기 어렵게 된다.

프랑스 내부에서는 위험 요소가 있는 이슬람 근본주의 성향 모스크를 폐쇄하는 것도 검토한 것으로 전해졌다. #

프랑스의 상황은 IS가 바라는 대로 공포(Terror)의 전염 그 자체였다. 전구 깨지는 소리에도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숨기기 바쁜 모습을 보였다. # 그리고 이걸 재미있어하는 IS 일원의 모습도 포착되었다.

6. 반응

6.1. 프랑스

6.1.1. Pray For Paris

파일:external/thimg.todayhumor.co.kr/1447473741qsJDxU9ij.jpg

Pray for Paris

세계적으로 파리를 위해 기도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주로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SNS 해시태그로 #prayforparis를 달고 추모 사진이나 글을 올리는 형식이며 페이스북은 자신의 프로필 사진에 프랑스 국기를 칠할 수 있는 기능을 추가했다.

파일:파리희생자들의 명복을 빕니다.jpg

에펠 탑은 추모를 위해 불을 껐다. 대신 뉴욕의 원 월드 트레이드 센터, 샌프란시스코 시청, 토론토의 CN 타워, 달라스의 옴니 호텔, 멕시코 시티, 뉴질랜드 오클랜드,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 도쿄 스카이트리 등에서 프랑스에 대한 추모와 연대의 의미로 프랑스의 삼색기 색으로 건물의 불을 밝혔다.

파일:external/img.etoday.co.kr/20151117072518_753978_1000_803.jpg

남산서울타워도 동참했다. 동시에 3색 조명을 비출 설비가 되지 않아서 20초마다 청-백-적 순서로 색을 바꾸어 비추는 방식을 사용했다. 서울 ' 세빛둥둥섬'에도 프랑스 국기 가운데에 검은 리본이 달렸다.

각국의 시민들은 프랑스 대사관에 추모의 의미로 헌화했다.

아마존닷컴은 첫 페이지 상단에 프랑스의 삼색기 사진과 Solidarité(연대)라는 단어를 올렸다.

유튜브는 메인 페이지 상단의 유튜브 로고에 프랑스 국기를 넣었다.

일각에서는 파리뿐 아니라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 시리아, 이라크, 터키의 수도 앙카라를 같이 추모하자고 주장하는 의견도 제기되었다. 베이루트 관련 기사 베이루트의 경우 파리 테러가 일어나기 이틀 전 IS에 의한 폭탄 테러가 발생해 41명이 숨진 사건이 있었으며 10월 10일에는 터키 앙카라역에서 IS의 자살 폭탄 테러로 인해 102명이 숨진 사건도 있었다. 중동/이슬람 국가들이 비슷한 규모의 사건사고에 휘말려 무슬림들이 희생될 때[14]에는 관심도 가지지 않던 사람들이[15] 유럽에서 사건이 터지니 (진심 없이 겉으로만)행동하고 추모한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한 술 더 떠서 이 사건의 근본 원인을 찾아내 국제 문제를 우리 스스로 해결해 나가자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같은 날 일본 남서부 해상에 7.0 규모 지진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인터넷에 퍼지면서 누군가 트위터에 18,000여 명이[16] 쓰나미에 죽었다고 소문을 냈고 곧바로 Pray for Japan 달기 운동이 텀블러와 페이스북 등으로 퍼졌으나 사상자가 아무도 없음이 밝혀지자 하루만에 싹 사라졌다.

한편 프랑스 국내외의 몇몇 지식인들이 이 테러가 종교 때문에 발생했는데 왜 Pray(기도)란 단어를 쓰는가 공개적으로 의문을 표하였다.

여담이지만 발음이나 내용을 헷갈려서 'play for paris'라고 쓰면 엄한 쪽으로 해석되므로 주의 바람. 실제로 이를 잘못 아는 사람들이 꽤 많아서 play for paris 해쉬태그도 트위터에 있을 정도였다.

6.1.2. Pray For Humanity

파일:external/media.cagle.com/171517_600.jpg
인터넷에서는 테러가 선진국에서 일어났느냐와 후진국에서 일어났느냐에 따른 사람들의 관심도와 슬픔의 반응이 다른 것을 꼬집은 사진이 퍼지며 일각의 사람들에게 신선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인터넷에 떠도는 글에는 시리아, 이라크, 레바논, 터키[17] 등에서 테러로 많은 민간인들이 죽었을 땐 무심하던 사람들이 프랑스 파리에서 테러가 일어나자 훨씬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일침이 담겼다. 한 커뮤니티의 글

실제로 팔레스타인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죽을 때와 미국에서 테러로 사람들이 죽을 때, 동남아에서 자연재해가 일어날 때와 일본에서 일어날 때의 사람들의 반응이 많이 다른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프랑스는 유럽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강대국 중 하나다. 그러니 선진국, 강대국이 아닌 나라들보다 비극적인 사건이 터졌을 때 더 많이 퍼질 수밖에 없다. 또한 위에 서술되어 있는 것처럼 프랑스에 일어난 테러는 2차 대전 이후 최악의 참사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으니 더 빠르게 퍼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대로 시리아, 이라크 등 여러 나라들이 겪은 아픔을 무시하거나 집중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아니고 세계가 강대국들의 피해만 집중적으로 보도했다는 사실이 문제가 된다는 사실 또한 변하지 않는다. 물론 선진국, 강대국이라는 것 자체가 세계를 주도하는 나라라는 것이고 이는 경제적, 문화적, 군사적으로 상당히 많은 나라와 직간접적으로 얽혀 있는 관계라고 할 수 있으므로 이런 나라가 테러를 당했으니 더 뜨거운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어느 나라에서 일어났건 슬퍼하고 기억해야 할 문제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파리 테러와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레바논 테러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있는가를 떠올려 보면 생각해 볼 만한 문제이다.

사실 비슷한 사례가 2011년에도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례는 다르지만 재앙이라는 공통점이 있었음에도 선진국의 재앙은 슬퍼하거나 애도하는 데 비해 개발도상국에서 일어난 사태에 대해서는 외면한 문제가 몇 번 언급되기도 했다. #[18]

한편으로는 레바논과 터키는 IS의 본거지와 인접해 있는데[19] 프랑스는 상당히 먼 거리에 있고 IS가 자기네 본거지로부터 상당히 먼 장소까지 테러를 지시하고 지원했다는 사실이 경악스러워서 반응이 더 뜨거웠던 면도 있을 것이다. 제 아무리 프랑스라도 허구헌날 테러가 일어난다면 점차 사람들의 반응도 둔감해질 것이다. 평화로운 동네에서 길거리에 널부러진 시체 한구를 보면 기겁하고 난리가 나겠지만 전쟁통의 거리에서 여기저기 널부러진 시체들을 보면 상대적으로 둔감해지듯이 말이다. 실제로 IS의 인질 처형 영상이 처음 공개되었을 땐 전세계가 충격을 받고 희생당한 인질에 대해 추모했으나 하루가 멀다하고 비슷한 게 올라오다 보니 사람들의 반응도 점차 둔감해지면서 IS가 탱크로 깔아뭉개기 등 관심을 받기 위해 잔혹도를 높인 사례가 있다.

페이스북의 경우 파리 테러가 일어나자 발빠르게 프로필 사진에 프랑스 국기의 파랑, 하양, 빨강을 덧입힐 수 있는 기능을 추가했다. 또 많은 사람들이 프로필 사진을 변경했다. 페이스북뿐만 아니라 카카오톡 등에도 "Pray for Paris"란 글을 올리는 사람들이 늘었는데 일각에선 약소국의 민간인 희생에 관심 없던 사람들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 이러한 사진과 글을 올리는 행위가 단순 관심 끌기로 끝나지 않기를 우려하기도 했다. 그저 유행하는 옷을 사 입는 것처럼 이에 동조해 진정한 애도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지는 않은가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었다. 'Pray for Paris', 파리 테러에 대한 애도인가, SNS 관심끌기용인가?

6.2. 대한민국

11월 14일 박근혜 대통령은 프랑스 대통령에게 공식 애도 전문을 보냈으며 "이번 테러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국제사회 전체에 대한 공격 행위로, 테러 근절을 위한 프랑스 정부의 노력을 지지하고 국제사회의 테러 척결 노력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 이어 대한민국 외교부도 공식 성명을 통해 프랑스 측을 위로하고 테러를 비판했으며 여당 야당도 프랑스 테러에 대한 규탄 성명을 발표했다. 새누리당(1일차), 새누리당(2일차), 새정치민주연합, 정의당

포털 사이트( 네이버, 다음, 네이트)의 네티즌들은 이슬람 극단주의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IS)과 더불어 이슬람까지 비난했다. 심지어 네이버 뉴스에서는 극단적인 이슬라모포비아 성향의 댓글이 베스트 댓글로 올라가기도 했다. "국내 이슬람사람들 전부 추방해야 합니다!"라든지 " 좋은 무슬림은 죽은 무슬림뿐" 따위의 댓글이 보인다. 유랑 등 유럽 배낭여행 커뮤니티에서도 일대 혼란이 벌어져 예약 취소글과 계획 변경, 현지 실황중계 글로 뒤덮였다.

이보다 앞서 청와대는 공식 트위터 계정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 G20 정상회담 참가 및 순방을 홍보하는 트윗에서 웃는 이모티콘을 사용했는데( 해당 트윗) 이를 두고 일부 네티즌들로부터 "세계 정세 상황에 맞지 않은 언행"이라는 빈축을 샀다. G20 준비에 정신 없이 바쁘고 자신들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사태엔 느릴 수밖에 없다는 반론도 있지만 청와대 트위터를 박대통령이 직접 운영하지 않는 한 전혀 의미 없는 얘기다. 바쁜 이유가 G20이었다는 점에서도 명백한 청와대 홍보팀의 미스인 것이, '국제사회' 일원으로서 대통령이 순방을 하는데 '국제적'인 사건에 둔감하다는 건 시야가 좁다는 걸 역으로 보여줄 뿐이다.[20]

2015년 11월 14일 외교부는 이 사건에 따라 프랑스 전역에 여행경보를 발령했다. 파리와 프랑스 수도권(일드프랑스) 지역에는 2단계인 여행자제를, 그 외 프랑스 전 지역에는 1단계인 여행유의를 내렸다. 관련 기사 11월 18일 한국에서 불법체류 중이던 인도네시아 출신 테러 조직 추종자가 체포되었다. 가택에서 모형 M16, 보위 나이프, 그 외 다수의 이슬람 원리주의 서적이 발견되었으며 SNS에 '알 누스라'의 상징 로고가 그려진 모자와 깃발을 들고 찍은 사진을 다수 올리기도 하였다. 12월 8일 국정원이 이 인도네시아인 외 X명을 강제출국 조치했다고 발표했다.

6.3. 북한

북한은 프랑스에 리수용 외무상 명의로 위로전문을 보냈다. # 참고로 프랑스 영국과는 달리 북한과 수교국이 아니다.

6.4. 중국

중화인민공화국 시진핑 국가주석 명의로 이례적으로 빠르게 파리 테러에 대해 “나(시진핑)는 중국정부와 인민의 대표로서, 그리고 개인의 명의로 이 야만적인 짓거리를 가장 강력하게 비판한다”라고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 # 9.11 테러 때도 중화인민공화국의 반응은 하루이틀 정도 시차를 두고 나왔는데 시진핑 국가주석이 파리 테러 사건 발생 이후 수 시간만에 공식 입장을 내놓은 것 자체가 이례적이라는 평이 나왔다. 일부에선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위구르족을 의식한 게 아니냐는 관측도 존재했다.[21]

6.5. 일본

일본 아베 신조 총리 G20 정상회의 참석하기 전에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테러는 용납할 수 없다. 단호하게 비판한다" "우리와 가치를 공유하는 프랑스가 지금 곤란에 직면해 있다. 일본인은 프랑스인과 항상 함께 있다. 강한 연대를 표명한다"라고 테러에 대해 비판 성명을 발표하였다. #

6.6. 대만

대만 역시 마잉주 중화민국 총통 주리룬 중국국민당 대선 후보, 차이잉원 민주진보당 대선 후보 등이 신속하게 희생자에 대한 애도와 테러 행위에 대한 비판 성명을 발표하였다. #

6.7.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외국 정상 중 가장 먼저 기자회견을 열고 입장을 표명했다. " 프랑스에서 발생한 테러 사태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며, 부상자들에게는 신의 가호를 빈다"며 "아직 배후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만큼, 섣부른 추측을 자제하겠다"고 밝혔다.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이 사건과 관련된 뉴스를 생중계하는 유튜브 영상의 채팅창에서는 모든 이슬람 무슬림을 죽여야 한다는 해외 유저들의 의견도 상당히 자주 보인다. 또 제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날 거란 우려부터 제2의 9.11 테러라고 언급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채팅창에서 한국인이나 일본인도 종종 보이는데 마찬가지로 대부분 파리에 대한 애도와 동시에 이슬람과 무슬림에 대한 혐오를 나타냈다. 비슷한 사건을 겪었던 인도인들도 비슷한 의견을 피력했다.

하지만 반대로 다른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도 조금이나마 있었다. #, # 다만 사진이 전하는 뜻이 옳다고 해도 밑에 서술했듯이 테러리즘을 절대 정당화할 수는 없다. 물론 사진이 전하고자 하는 뜻은 '파리 말고도 많은 나라들이 숨죽이며 고통받고 있었다'는 것이지 절대 테러리즘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저 사진에 나와 있는 모든 나라가 직간접적으로 IS를 비롯한 테러리스트들한테 고통받고 있는 국가임을 잊으면 안 된다.

한편 IS가 다음 타겟으로 워싱턴을 지목했다는 영상이 돌면서 9.11의 참극으로 테러라면 진저리를 치는 뉴욕시에는 테러진압특수경찰이 처음으로 배치되고 수도 워싱턴의 경비도 강화되었다. 한편 하버드 대학교에 폭파 위협이 접수되어 학생들이 모두 대피하는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테러에 의한 최악의 참극을 맛본 나라다 보니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다.

한편 워싱턴이 다음 타겟으로 지목까지 당한 판에 하단에 서술한 난민에 대한 공포심 역시 퍼졌고 오바마 대통령의 난민 1만명 수용 장기 플랜에도 제동이 걸렸다. 미시간주, 앨라배마주, 텍사스주등을 포함한 24개주의 주지사들이 우리 주는 난민을 수용하지 않겠다고 들고 일어선 것. 미시간주의 주지사는 난민에 대한 존중심을 밝히며 "우리 역시도 난민들이 일조하여 이룩한 주다. 주의 역사에 대해 자랑스러움을 느끼고 그들을 존중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주민들의 안전이 최우선이다." 라는 입장을 발표했다.[22] 오바마 대통령은 이에 대해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며 기존의 난민 수용 정책을 연기하거나 폐지하는 일 없이 그대로 진행하겠다고 했으며 이에대해 공화당 측 의원들은 크게 반발하고 있다. 미국 포털 사이트에서도 댓글창이 후끈 달아오르는 등 엄청난 이슈가 되었다.

물론 미국 법상 난민들을 수용하고 어느 주에 재배치할 것인가에 대한 권한은 전적으로 연방정부에 일임되고 있어 각 주 정부의 의견에 상관없이 이들은 연방정부의 지시에 따라야만 한다.[23] 따라서 이런 주지사들이 난민 수용을 거부할 방도는 법적으로 전혀 없다고 봐도 된다. 대신 절차를 매우 까다롭고 어렵게 만들 수는 있다. 거기다 오바마 대통령 입장에선 연방정부의 권한으로 주 정부의 의사를 무시한다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비판에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고 공화당이든 민주당이든 양측 모두 다 2016년 대선을 앞두고 있었기에 여론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태가 터진지 바로 1주일 뒤에 난민 입국심사를 더 까다롭게 하지 않는 이상 난비 수용을 보류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고 한다. 찬성 289명, 반대 137명이었는데 찬성표를 던진 사람 중 47명의 민주당 의원들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 사태가 터진 후 최소 31개주의 주지사들이 항의서한을 보냈다고 한다. 이러한 반발 여론 때문인지 2016년 10월까지 총 1만명의 난민을 수용하겠다는 게 오바마 대통령의 단초 계획이었으나 5월 중순을 넘긴 시점에 입국심사를 통과한 난민은 1736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한편 테네시 주 정부는 빌 하슬람 주지사의 권한으로 수정헌법 제 10조에 의거하여 연방정부를 고소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앨라배마 주와 텍사스 주 역시 연방정부를 고소하긴 했지만 구체적으로 연방정부의 권한에 대해 거론하며 고소를 한 것은 테네시 주가 처음이다. 연방정부가 이 정책에 대해서 주 정부와 한마디 상의도 하지 않았고 아무리 연방정부라지만 주 정부의 의사를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정책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게 테네시 주 측의 주장.

6.8. 영국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트위터 계정을 통해서 '파리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충격을 받았다. 영국이 도울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겠다'고 밝혔다. 또 영국인 희생자가 발생할 것을 염려하면서 영국도 프랑스와 같은 위협에 처해 있음을 주시했다. 특히 영국은 10년 전인 2005년 자국 수도 런던에서 런던 테러를 당했던 아픔이 있어서 파리 테러에 동병상련을 느꼈다. 당시 테러를 겪었던 영국인들 일부는 이 테러 때문에 10년 전의 악몽과 공포에 떤 것으로도 알려졌다. 런던 테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려면 2005년 런던 지하철 폭탄 테러를 참고하면 된다.

마침 테러 다음날(현지 시간) 영국의 맨체스터 올드 트래포드에서는 유니세프 자선 행사의 일환으로 데이비드 베컴이 주도한 영국 올스타팀과 세계 올스타팀의 축구 경기가 있었는데 본래는 세계 축구 선수들이 한자리에 모인 만큼 훈훈한 분위기가 되어야 했으나 바로 전날 파리에서 터진 테러로 인해 지네딘 지단, 패트릭 비에이라 등이 불참하고 경기 전 선수와 관중들이 희생자들을 위한 묵념을 하는 등 차분한 분위기 아래 이루어졌다. 2차 테러를 막기 위해 경기장에 영국 당국의 경비가 크게 강화되었다. 11월 21일~23일에 열린 프리미어리그 13라운드 모든 경기 전에 프랑스 국가가 울려퍼졌다.

6.9. 독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이 사건에 대해 "파리 소식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이번 공격은 명백한 테러로 모든 희생자와 유가족, 파리 시민들과 함께하겠다"며 위로의 말을 전했다. 한편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에 대한 테러 위협이 있었던 만큼 독일도 테러의 대상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이 와중에 이미 테러리스트가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숙소를 노렸다는 기사가 나왔는데 다행히 첩보를 받은 뒤 선수들은 모두 묵고 있던 호텔에서 빠져나왔고 폭발물은 없던 것으로 밝혀졌다.

6.10. 교황청

프란치스코 교황은 파리 테러는 정당화될 수 없는 비인간적 행위이며 단편적인 제3차 세계 대전의 한 부분이라고 지칭하였다. #

6.11.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사건 발생 직후 낸 성명에서 올랑드 대통령에게 깊은 애도를 표명하면서 비인도적인 테러에 대해 비판을 퍼부었다. 또 이 테러 조사에 대해 지원을 제공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은 이로서 ISIL과 알 누스라 같은 테러집단을 물리쳐야 하는 당위성이 강화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러시아의 시리아 내전 참여를 정당화하였다.

이후 G20 정상회담에서 오바마와 비공식적으로 만나 ISIL를 어떻게 공격할지 진지하게 논의한 것이 포착되었다.

11월 21일 러시아는 ISIL의 거점에 순항미사일과 전략폭격기로 공습을 가했다. 이 와중에 2015 러시아 공군기 Su-24 격추사건이 벌어지면서 터키와 러시아의 관계가 얼어붙었다.

6.12. 브라질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도 2015년 11월 13일 파리 테러에 대해 "야만스러운 테러 행위와 폭력을 혐오한다"면서 "프랑스 국민과 정부와 연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

6.13. 멕시코

멕시코 대통령 페냐 니에토도 트위터로 애도를 표했다(애도 성명은 외교부 명의). 관련 기사 이 사건으로 멕시코인 2명이 사망하고 1명이 부상을 입었다. #

6.14. 아랍권

#요르단, 사우디 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쿠웨이트, 카타르, 바레인, 이라크, 이집트, 이란 등 이슬람권 국가들은 각각 사건 발생 직후 애도를 표하고 테러범들을 비판했다.

시리아의 바샤르 알 아사드도 재빨리 시리아가 매일같이 이런 테러에 시달리고 있다면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 부여를 시도했다.

한편 현지 기준으로 18일에 펼쳐진 유럽 국가들의 친선전과 유로 2016 예선전에서 경기 전에 파리 테러에 대한 묵념이 있었는데 터키 그리스전에서는 야유와 함께 알라후 아크바르라는 단체 외침이 나왔다. 하필 상대가 앙숙인 그리스라는 점도 있지만 불과 한 달 전(10월 10일)에 앙카라에서 일어난 IS 주도로 추정되는 테러로 102명 이상이 숨진 것과 비교했을 때 세계인의 관심 차이가 심하다는 점에 불만을 품은 것이 주된 이유로 보인다. 그렇다고 추도 의식에 재를 뿌리는 행동이 일반적인 시선에서 곱게 보이지 않으며 이슬람 극단주의에 의한 피해가 나타난 상황에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치는 것을 보면서 비무슬림들이 가진 이슬람권에 대한 편견이 강화되는 결과만을 낳았다. 터키 국가대표 감독 파티흐 테림과 국대 선수들, 여러 언론들도 팬들의 이 행동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레바논의 정당이자 테러 단체인 헤즈볼라의 지도자 하산 나스랄라는 이 테러를 강하게 비난하며 IS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헤즈볼라 입장에서도 IS는 교전을 벌이는 적대 세력이므로 이상할 게 없다.

6.15. 유엔

반기문 국제연합 사무총장도 '이번 일은 극악무도한 테러공격이다. 희생자 가족들에게 조의를 표하고 부상자들에게는 조속한 쾌유를 기원하며, 이번 사태에 대처하는데 있어 국제연합은 프랑스 정부 및 국민과 함께 하겠다.'고 밝혔다.

결국 IS 소탕 결의안이 15개국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

6.16. ISIL

트위터 등지에서 '파리가 불타고 있다' 또는 '공격받은 파리', '칼리프국가(IS)가 프랑스를 타격했다', '전사 프랑스 화염'이라는 뜻의 아랍어로 된 해시태그(#)를 단 글을 올리며 테러를 환영했다.( #) 이러한 비인간적 언사에 서구권은 물론 중동 이슬람 국가까지 한 목소리로 IS를 비판했다. # 자세한 사항은 링크된 기사에서 확인할 것.

결국 자기 소행이라는 걸 인정했다. 아니, 더 정확히는 자랑스러워했다. 게다가 스타드 드 프랑스에서 자폭한 테러범 시신 근처에서 시리아 여권이 발견되었고 그가 난민으로 위장한 것까지 확인되면서 기정사실화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파리 다음은 이탈리아의 로마, 영국의 런던, 미국의 워싱턴 DC이라고 위협하며 해당 국가들을 긴장시켰다. 이탈리아는 콜로세움, 피사탑 그리고 교황청 등에 군경을 배치하여 경계를 강화하였고 영국 역시 정부 주재로 안보회의를 소집하였다.

ISIL 생물무기의 개발을 시도한다고 전해졌다. # 이쯤 되면 진짜 엄청난 폭탄이 되는 셈.

7. 기타

"프랑스는 1995년에 핵실험으로 횡포를 부렸다. 위험할 줄 알았다."고 디스하는 의견이 소수 제기되었지만 이러한 견해는 그릇된 측면이 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아프리카계 프랑스인 시민이 폭탄 파편에 맞아 죽을 뻔했으나 갤럭시 S6 엣지 폭탄 파편을 막아 한 남성의 목숨을 구해 화제가 되었다. 해당 남성은 프랑스와 독일의 친선경기가 열리던 경기장 앞에 있었다가 폭탄이 터졌다고 한다. #

한편 테러 당일 축구 경기를 하던 앙투안 그리즈만과 바타클랑 극장에서 밴드 공연을 보던 그의 여동생인 모드 그리즈만 역시 테러에 휘말렸지만 다행스럽게도 두 명 모두 목숨을 구했다.

테러 이후 단 2일만에 프랑스의 인종차별 단체와 네오나치 이슬라모포비아 시위를 벌이다가 분노한 프랑스 시민들에게 구타당하고 쫓겨났으며 일부는 유리병이나 돌에 맞고 큰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이건 공인 매국노 집단인 네오나치이기 때문에 그렇지 일반 반이슬람 세력[24]들이 벌이는 이슬라모포비아 시위는 생각보다 지지율이 높다.

11월 17일, 파리 공화국 광장에서 신원미상의 한 무슬림 남성이 파리 레퓌블리크 광장에서 스카프로 눈을 가린 채 “저는 무슬림입니다. 사람들은 제게 테러리스트라고 말해요. 저는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도 저를 믿나요? 그렇다면 절 안아주세요”라고 적은 종이를 발 아래에 두며 시민들과 프리허그를 했다는 훈훈한 소식이 전해졌다. 그런데 12월 3일 그 무슬림(영국인 개종자 Craig Wallace)이 시리아에 폭격 찬성 투표를 한 영국 국회의원 페이스북에 "자는 사이 집에 폭탄을 던지겠다."는 협박을 하여 징역을 살 위기에 처했다. #

11월 18일 영국인 남성 Ashley Powys가 런던 지하철에서 인종차별주의자로부터 파리 테러가 언급된 폭언 및 위협을 당하던 10대 무슬림 여성 청소년을 구해냈다. #

11월 21일, 서아프리카 말리에 위치한 한 고급 호텔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투숙객과 직원을 대상으로 인질극 및 테러를 벌였다.

테러의 피해가 컸던 파리 바타클랑 공연장이 2016년 11월 12일 재개장하면서 추모 행사를 가졌다. #

이날 스타드 드 프랑스에서 테러의 표적이 된 독일과 프랑스 축구 대표팀은 유로 2016 4강에서 만나 프랑스가 다시 2-0으로 승리하였고 테러 2주기를 하루 앞둔 2017년 11월 14일 FIFA A매치 데이에 독일에서 다시 친선경기를 가졌다. 이날 경기는 2-2 무승부.

덧붙여 한국의 전 아프리카TV BJ이자 현 유튜브 스트리머로 활동 중인 노래하는코트가 자신의 방송에서 성전가를 틀고 GTA 온라인에서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치며 테러 행위를 벌인 것에 대해서 많은 시청자들에게 비난과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해외에서도 이 영상이 논란이 되기도 했고 아프리카TV 측은 이 일을 계기로 노래하는 코트를 영구 정지 처분하기에 이르렀다. 무엇이든간에 국제적 테러 사건을 연상시키는 행위를 게임에서 희화화한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자세한 내용은 이 문서를 참조하자.

당시 파리의 한 카페에 있었던 크리스탈 팰리스 FC 소속 마틴 켈리는 부상자를 돕는 대인배적인 모습을 보여줘 전세계 팬들의 찬사를 받았다.[25]

8. 관련 문서

9. 둘러보기

역대 프랑스의 대형 사고 및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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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display:inline-block; word-break: keep-all; min-width: 100px; min-height:2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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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5px 0"
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2021년 11월 25일
31 프랑스 난민선 침몰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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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2016년 7월 14일
86 2016년 니스 테러
2015년 11월 13일
130 2015년 11월 파리 테러
2015년 10월 23일
43 퓌스갱 버스 정면 충돌 사고
2015년 3월 24일
150 저먼윙스 9525편 추락 사고
2014년 7월 24일
116 49 에어 알제리 5017편 추락 사고
[ 200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2009년 6월 1일
228 에어 프랑스 447편 추락 사고
2007년 8월 9일
20 에어 무레아 1121편 추락 사고
2007년 7월 22일
26 2007년 라쁘리 램프 버스 추락 사고
2004년 1월 3일
148 132 플래시 항공 604편 추락 사고
2003년 5월 17일
28 2003년 리옹 독일 관광객 버스 사고
2001년 9월 21일
31 툴루즈 AZF 공장 폭발 사고
2001년 3월 24일
20 에어 카리브 1501편 추락 사고
2000년 7월 25일
113 에어 프랑스 4590편 추락 사고

[ 199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98년 10월 8일
21 로카호 침몰 사고
1998년 9월 2일
229 41 스위스에어 111편 추락 사고
1999년 7월 31일
20 생 테티엔 앙 드볼뤼 케이블카 추락사고
1999년 3월 24일
39 몽블랑 터널 화재
1998년 4월 20일
53 에어 프랑스 422편 추락 사고
1996년 7월 17일
230 40 트랜스 월드 항공 800편 추락 사고
1995년 7월 10일
23 호끄모흐 버스 전복 사고
1992년 1월 20일
92 에어 인터 148편 추락사고
1991년 6월 27일
21 바르보탄 온천 화재
[ 198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89년 9월 19일
170 UTA 772편 폭파 사건
1989년 4월 10일
22 EAS 602편 추락 사고
1988년 6월 27일
56 파리 리옹역 열차 충돌사고
1988년 3월 4일
23 TAT 230편 추락 사고
1985년 8월 31일
43 아르젠 통 쉬르 크뢰즈 열차 충돌 사고
1985년 8월 3일
35 플로작 열차 충돌 사고
1985년 2월 25일
22 사이먼 샤프트 붕괴 사고
1983년 10월 23일
307 58 베이루트 미군 숙소 테러
1982년 9월 11일
46 23 만하임 미 육군 CH-47c 추락 사고
1982년 7월 31일
53 본 버스 충돌사고
1981년 12월 1일
180 이넥스 아드리아 1308편 추락 사고
[ 197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79년 10월 19일
21 프랑스 세메악 스페인 관광객 버스 사고
1979년 1월 8일
51 위디 아일랜드 참사
1978년 7월 11일
217 80 로스 알파케스 참사
1977년 11월 25일
32 베지에 노르 2501 노라트라 추락 사고
1975년 8월 2일
145 1975년 프랑스 A10 도로 교통 체증
1975년 4월 2일
29 1975년 라쁘리 램프 버스 추락 사고
1974년 12월 27일
42 리에방 광산 폭발 사고
1974년 3월 3일
346 터키항공 981편 추락 사고
1973년 7월 22일
78 팬 아메리칸 항공 816편 추락 사고
1973년 7월 18일
43 1973년 라쁘리 램프 버스 추락 사고
1973년 7월 11일
123 바리그 820편 화재 사고
1973년 3월 5일
68 낭트 상공 공중충돌 사고
1973년 2월 6일
20 에두와르 파예롱 대학교 방화 사건
1972년 10월 27일
60 에어 인터 696편 추락 사고
1972년 6월 15일
108 비에르지 터널 붕괴 사고
1971년 7월 30일
37 포 노르 2501 노라트라 추락 사고
1971년 1월 21일
21 프랑스 공군 노르-262 추락 사고
1970년 12월 31일
30 루소 항공 노르 262E 추락 사고
1970년 11월 1일
146 클럽 5-7 화재
}}}
[ 196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69년 12월 3일
62 1969년 에어 프랑스 212편 추락 사고
1968년 9월 11일
95 에어 프랑스 1611편 추락 사고
1968년 3월 5일
63 1968년 에어 프랑스 212편 추락 사고
1968년 1월 17일
52 라 미네르브호 침몰 사고
1967년 6월 3일
88 에어 페리 DC-4 추락 사고
1966년 1월 24일
117 에어 인디아 101편 추락 사고
1965년 2월 1일
21 1965년 리에방 광산 폭발 사고
1964년 10월 2일
80 UTA DC-6 추락 사고
1963년 9월 11일
36 페르피냥 항공기 참사
1962년 12월 29일
25 에어 노틱 보잉 SA.307 추락 사고
1962년 6월 22일
113 에어 프랑스 117편 추락 사고
1962년 6월 3일
132 에어 프랑스 007편 추락사고
1961년 10월 7일
34 더비 에어웨이즈 C-47 추락 사고
1961년 6월 1일
21 클라마트 채석장 붕괴 사고
1961년 9월 12일
77 에어 프랑스 9005편 추락 사고
1961년 6월 18일
24 비트르르프랑수아 열차 탈선 사고
1961년 5월 10일
78 에어 프랑스 406편 추락 사고
1960년 8월 29일
63 에어 프랑스 343편 추락 사고
[ 195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59년 12월 2일
421 말파셋 댐 붕괴사고
1957년 11월 10일
27 생폴 버스 전복 사고
1957년 7월 19일
30 볼렝느 크로아지에르 역 열차 충돌 사고
1959년 9월 24일
54 TAI 항공 307편 추락 사고
1957년 4월 8일
32 에어 프랑스 DC-3 추락 사고
1956년 11월 24일
34 LAI 항공 451편 추락 사고
1956년 2월 20일
52 TAI 230편 추락 사고
1955년 6월 11일
84 1955년 르망 24시 참사
1954년 3월 4일
20 미 공군 C-47 추락 사고
1953년 9월 1일
42 에어 프랑스 L742-A 추락 사고
1953년 6월 16일
34 라오스 에글 아쥐르 DC-3 추락 사고
1953년 4월 16일
30 베트남 에글 아쥐르 DC-3 추락 사고
1952년 3월 3일
38 에어 프랑스 SNCASE 추락 사고
1951년 11월 13일
36 미 공군 페어차일드 C-82A 추락 사고
1951년 11월 3일
48 에어 인디아 245편 추락 사고
1951년 9월 12일
39 STAAP DC-3 추락 사고
1951년 8월 24일
23 산뤼시르니에드역 열차 충돌 사고
1950년 12월 8일
46 TAI DC-4 추락 사고
1950년 11월 13일
58 커티스 리드 플라잉 서비스 DC-4 추락 사고
1950년 7월 29일
26 CAT 브리스톨 170 추락 사고
1950년 7월 9일
22 모로코 에글 아쥐르 DC-3 추락 사고
1950년 6월 14일
40 에어 프랑스 DC-4 추락 사고(F-BBDM)
1950년 6월 12일
46 에어 프랑스 DC-4 추락 사고(F-BBDE)
1950년 2월 10일
20 릴흐 슈흐 탄 열차 충돌 사고
[ 194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49년 10월 28일
48 에어 프랑스 AF009편 추락 사고
1949년 8월 25일
82 랜디스 산불
1949년 2월 18일
43 Port-d'Atelier열차 충돌 사고
1948년 8월 1일
52 에어 프랑스 Latécoère 631 추락 사고
1974년 12월 27일
42 리에방 광산 폭발 사고
1947년 12월 3일
20 파리-투르코잉 열차 탈선 사고
1947년 7월 28일
33 오션 리버티호 폭발 사고
1947년 5월 27일
48 이오플렛 열차 충돌 사고
1947년 3월 14일
23 에어 프랑스 DC-3 추락 사고
1946년 11월 12일
32 레비니역 열차 충돌 사고
1946년 11월 1일
23 Ju-52 추락 사고
1945년 9월 21일
30 로망 쉬르 이제르 열차 충돌 사고
1946년 9월 4일
20 에어 프랑스 DC-3 추락 사고
1946년 9월 3일
22 에어 프랑스 DC-3A 추락 사고
1945년 1월 17일
100+ 생 발레히 열차 충돌 사고
1944년 11월 1일
24 캉브레 니에즈니 미 공군 DC-3 추락 사고
1944년 11월 1일
20 셍샤몽 미 공군 DC-3 추락 사고
1944년 9월 9일
871+ 사디 카르노 대피소 폭발 사고
1944년 6월 6일
22 영국 공군 DC-3 추락 사고
1943년 11월 23일
24 누벨칼레도니 미 공군 C-47 추락 사고
1943년 10월 6일
32 샬롱 쉬흐손 열차 탈선 사고
1943년 6월 8일
24 누벨칼레도니 미 해군 DC-3 추락 사고
1942년 9월 27일
25 에어 프랑스 D.342 추락 사고
1942년 1월 9일
301 라모히시에호 침몰 사고
1942년 1월 6일
20 주미에르호 침몰 사고
1941년 12월 28일
47 라 고흐그 열차 충돌 사고
1941년 11월 2일
20 파리-아우스터리츠역 열차 충돌 사고
1940년 9월 28일
34 하이리쿠르 광산 폭발 사고
1940년 5월 18일
53 모르그니 역 열차 충돌 사고
1940년 5월 4일
33 오리야크-파리 열차 탈선 사고
1940년 1월 20일
108 오라지오호 화재

[ 193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39년 9월 2일
35 오브레 역 열차 충돌 사고
1938년 10월 28일
73 누벨 갤러리 화재
1937년 7월 30일
29 빌뇌브 생 조르주 열차 충돌 사고
1936년 11월 16일
53 생 샤마스 분말 공장 폭발 사고
1933년 12월 23일
204 뽕뽄느 열차 추돌사고
1933년 10월 24일
37 생 테리에 열차 충돌 사고
1932년 5월 15일
54 조르지 필리파호 화재
1931년 7월 14일
400+ 생 필리에르호 침몰 사고
1930년 10월 5일
48 R101호 추락사고
[ 192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27년 8월 25일
22 몽탕베르 열차 충돌 사고
1923년 12월 21일
52 비행선 딕스무드 추락 사고
1922년 8월 1일
33 빌콤탈 열차 충돌 사고
1921년 10월 5일
28 바티뇰 터널 열차 충돌 사고
1921년 9월 10일
39 에셰츠 열차 충돌 사고
1921년 6월 25일
29 보쿠르 하멜 열차 탈선 사고
1920년 10월 9일
44 우이예 열차 충돌 사고
1920년 1월 12일
575 아프리카호 침몰 사고
[ 191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19년 9월 4일
20 조리역 열차 충돌 사고
1919년 11월 3일
20 퐁쉬르욘역 열차 충돌 사고
1919년 4월 17일
20 크리세역 열차 충돌 사고
1918년 12월 6일
74 로티에르역 열차 충돌 사고
1918년 12월 5일
20 무릉 쉬르 루아르역 열차 충돌 사고
1918년 9월 19일
28 파시 터널 열차 충돌 사고
1918년 8월 10일
24 솔레스 열차 충돌 사고
1918년 3월 11일
60 ~ 70 볼리바르역 압사 사고
1917년 12월 12일
675 생 미셸 드 모린 열차 참사
1917년 4월 16일
42 헤르신-쿠피니 광산 폭발 사고
1917년 2월 13일
26+ 영국군 보급 열차 충돌 사고
1916년 1월 12일
104 디슈 퐁 탄약고 폭발 사고
1914년 9월 15일
40 마른강 열차 탈선 사고
1914년 8월 23일
79 생로랄 열차 충돌 사고
1913년 11월 4일
41 멜룬 열차 충돌 사고
1912년 9월 3일
79 디비옹 광산 폭발 사고
1912년 4월 14일 ~ 4월 15일
1514 29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1911년 9월 25일
286 리베르테호 폭발 사고
1910년 8월 14일
38 소종 열차 사고
1910년 6월 18일
23 빌프뢰 열차 충돌 사고

[ 1900년대 이전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07년 8월 4일
27 퐁드쉐 교량 붕괴 사고
1907년 3월 4일
120 예나호 폭발 사고
1906년 3월 10일
1099+ 코리에르 탄광 참사
1905년 11월 17일
125 힐다호 침몰 사고
1903년 8월 10일
84 파리 지하철 화재
1902년 9월 27일
26 알뢰 열차 탈선 사고
1897년 5월 4일
126 파리 자선 바자회 화재
1895년 2월 3일
28 생 외제니 광산 화재
1887년 5월 25일
84 오페라 코미크 화재
1886년 6월 24일
23 생 찰스 광산 폭발 사고
1885년 1월 14일
28 리에벵 광산 폭발 사고
1881년 9월 5일
22 샤랑통역 열차 충돌 사고
1872년 11월 8일
41 생 외제니 광산 사고
1871년 3월 8일
20 뿌뛰역 열차 충돌 사고
1871년 2월 5일
80+ 방돌역 열차 폭발 사고
1867년 12월 12일
89 Cinq Sous 광산 화재
1866년 1월 11일
220 런던호 침몰 사고
1859년 8월 10일
29 생 조셉 광산 폭발 사고
1855년 12월 22일
29 Cinq Sous 광산 화재
1850년 4월 16일
226 앙제 다리 붕괴사고
1842년 5월 8일
55 뫼동 열차 참사
1830년 5월 31일
30 1830년 생 루이 광산 폭발 사고
1827년 2월 7일
46 1827년 아니체 참사
1824년 6월 26일
20 1824년 슈프르 광산 화재
1823년 4월 9일
22 1823년 슈프르 광산 화재
1810년 7월 1일
20+ 파리 오스트리아 대사관 화재
1794년 8월 31일
530 ~ 650 그루넬 공장 폭발 사고
||

[1] 프랑스어로 테러는 'L'attaque'이 [2] 다만 한국인이 입국하는 경우엔 유럽 국가들은 물론 한국도 프랑스와 무비자 협정이 별도로 체결되어 있기 때문에 상관 없고 프랑스 대사관에서 프랑스 비자를 따로 발급받을 경우에는 정상적으로 입국이 가능하다. [3] BRI-BAC, GIGN, GIPN, RAID [4] 임용한 교수가 토크멘터리 전쟁사에서 모병제에 대해 설명하던 도중 증언한 내용이다. [5] 서유럽에서 극단주의에 심취한 무슬림 개종자는 같은 근본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인정하는 시한폭탄 그 자체. [6] 테러 모의 및 준비, 참여까지는 확실한데 중간에 포기하고 벨기에로 도주했다고 한다. 자폭하지 않고 도망쳤다는 이유로 IS에서도 추적에 들어갔다고 한다. [7] 위의 살라 압데슬람의 형이자 압데슬람 형제의 장남이다. [8] 난민 출신으로 확인됐다. 유럽의 뒤통수를 친 것은 물론 같은 난민들까지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9] 단 본인은 테러 협조를 부인하였으며 테러 행위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기에 현행범이라고 하기도 어려우으로 무죄추정의 원칙을 적용함. 일단 벨기에 정부는 혐의가 입증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그를 석방했다. [10] 특히 21세기 들어 테러리즘의 방식은 점차 외부로부터 많은 자금과 시간을 들여서 직접 침입해 테러를 시도하기보다는 내부의 소외된 위치에 놓여서 불만을 가진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해서 이들을 테러 행위의 당사자나 지원책으로 적극 동원함으로써 그 부담을 줄이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데 이 또한 비슷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11] 이 만평을 그린 만평가 카를로스 라투프의 메세지는 아사드를 타도한답시고 반군들을 지지한 것(그들이 어떤 군상들인지는 고려를 안 하고)과 멋대로 타국인 시리아에 들어가서(UN의 승낙도, 아사드 정권의 승낙도 없이) 폭격을 남발한(ISIL 잡는답시고 오히려 시리아의 기반시설들을 폭격한다는 의혹이 있다) 올랑드의 삽질들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 파리를 쳤다는 걸 말하려는 것. 따라서 이 참변의 시발점은 다름아닌 올랑드라는 얘기. 라투프의 또 다른 파리 테러 만평 [12] 사실 난민심사를 하면 자신이 왜 난민인지를 상세히 밝혀야 하고 테러리스트처럼 국가 안보에 심각한 위해를 끼칠 수 있는 사람이 아닌지 조사를 받기 때문에 테러리스트가 난민으로 위장해서 들어가는 건 비상식적이지만 유럽에서는 감당이 안 되는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제대로 심사가 되지 않다 보니 일어난 일. [13] 무슬림들 중 상당수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반인륜적 테러에 대해 관대하거나 용인하는 태도를 표명하는 것도 다른 문화권 간 대립을 심화시키고 있다. 당장 샤를리 앱도 테러 당시에도 무슬림들의 상당수가(여론조사 결과 25%) 테러 행위에 동조하는 태도를 보였다. 달라진 게 없는 무슬림들의 인식 속에서 계속해서 무슬림에 의한 테러가 자행되는 현실이니 이슬람에 대한 반응은 말 그대로 이거다. [14] 실제로 IS에 의한 희생자 대부분이 수니파 무슬림들이다. [15] 실제로 나무위키만 해도 2015년 앙카라 폭탄 테러 문서보다 이 문서가 훨씬 길다. [16] 2011년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의 사망자 숫자다. [17] 그나마 터키는 G20과 중동 지역에서의 영향력 때문에 관심을 조금이나마 받긴 했지만 레바논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은... [18] 만들어진 연도는 2011년이며 번역된 내용을 보면 일본의 대지진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좋지만 리비아, 예멘, 바레인의 민주화 운동 및 유혈사태, 내전을 겪고 있는 주민들도 알자는 내용이었다. 굳이 이 글이 아니어도 2011년에도 비슷한 지적이 나온 바 있었다. [19] 레바논은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고 터키도 충분히 근접한 편이다. [20] 이전에도 박근혜 대통령의 홍보팀은 '본인이 직접 물을 챙기십니다'로 유명한 짤방을 생산한 바 있다. http://m.ppomppu.co.kr/new/bbs_view.php?id=humor&no=201960 [21] 당장 중국에서도 위구르족에 의한 쿤밍역 칼부림 테러로 몇십명이 죽거나 다쳤는데 파리 테러처럼 범인은 이슬람 극단주의자였다. [22] 실제로 미시간주는 이슬람 이민자의 비율이 가장 높은 주 중 하나이다. [23] 미국 헌법 제1조 제8항에 분명히 명시된 연방정부의 권한이며, 이는 제14회 헌법 개정을 통해 연방정부 권한임이 더 확고해졌다.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대법원 판결도 주정부의 이민정책 간섭 만큼은 매번 허용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주정부가 연방정부의 지시를 무시할 수 없다. [24] 위의 인종주의 세력과 다른 점은 아랍인이 아닌 이슬람으로 확실하게 표적을 고정했다는 점이다. [25] 특히 리버풀 FC 출신이라 콥들에게 엄청난 칭찬을 받았다. [26]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테러이고 야밤에 번화가에서 얼굴도 안 가리고 시내 중심가 곳곳에서 테러를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