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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왕국 튜더 왕조 초대 국왕
헨리 7세 Henry V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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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f091f><colcolor=black> 왕호 |
헨리 7세 (Henry V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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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457년 1월 28일 | ||
잉글랜드 왕국 펨브룩셔 펨브룩 성[1] | |||
사망 | 1509년 4월 21일 (향년 52세) | ||
잉글랜드 왕국 서리 리치먼드 궁전 | |||
재위기간 | 잉글랜드의 왕 | ||
1485년 8월 22일 ~ 1509년 4월 21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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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f091f><colcolor=#fff> 이름 |
헨리 튜더 (Henry Tud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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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요크의 엘리자베스 (1486년 결혼 / 1503년 사망) | ||
자녀 | 아서, 마거릿[2], 헨리 8세, 메리 | ||
아버지 | 제1대 리치먼드 백작 에드먼드 튜더 | ||
어머니 | 마거릿 보퍼트 | ||
장례식 | 1509년 5월 11일 | ||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 | |||
종교 | 가톨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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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그 유명한 헨리 8세의 아버지로 원래 신분과 본명은 제2대 리치먼드 백작 헨리 튜더이다. 에드워드 5세의 숙부이자 섭정이었던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가 어린 조카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리처드 3세로 즉위하게 되면서, 분열된 요크 지지자들과 떨어진 민심을 포착해 2년 만에 반정을 일으켜 성공하고 선왕 에드워드 4세의 장녀와 결혼하여 튜더 왕조를 개창했다.동족상잔으로 귀족들의 반이 사라진 상태여서, 잉글랜드 역대 어느 왕조보다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다. 잉글랜드는 그의 아들 헨리 8세와 손녀 엘리자베스 1세 대에 제1의 전성기를 열고 대영 제국의 토대를 놓게 된다.
당대에는 음험하고 인색한 성품이라는 평을 받았으나, 후대에는 왕권을 안정시키고 장미전쟁 이후 파탄난 국고를 다시 복구시킨 왕으로 재평가된다.
잉글랜드의 스튜어트 왕조를 연 군주이자 현 영국 왕실의 조상인 제임스 1세의 조상이기도 하며, 따라서 엘리자베스 1세와 엘리자베스 2세의 공동 조상에 해당한다. 헨리 7세는 부계가 웨일스계이니, 제임스 1세와 후손들은 잉글랜드 - 스코틀랜드 - 웨일스 혈통을 모두 물려받은 셈이다.
2. 등극 배경
튜더 가문은 원래 웨일스의 최고 귀족 출신[3][4]으로 에드워드 1세의 웨일스 정복 이후에도 영지와 특권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잉글랜드 전체로 치면 하급 귀족에 불과했는데 헨리 7세의 조부인 오언 튜더가 헨리 5세의 미망인 발루아의 카트린[5]과 결혼하면서 가문의 격이 올라갔다. 오언 튜더와 카트린 사이에서는 두 아들인 에드먼드 튜더와 재스퍼 튜더가 태어났다. 카트린의 전 남편 헨리 5세는 헨리 6세만 남기고 1421년 프랑스 원정에서 전사했기에, 따라서 에드먼드 튜더와 재스퍼 튜더는 헨리 6세의 이부 동생이 된다. 헨리 6세는 에드먼드와 재스퍼 튜더를 자신의 형제로 인정하고, 그들에게 각각 리치먼드 백작위와 펨브룩 백작위를 하사했다.오언과 카트린의 장남 리치먼드 백작 에드먼드 튜더는 랭커스터 가문의 방계인 보퍼트 가문의 마거릿과 결혼해[6] 헨리 튜더를 낳았다. 부계로는 전혀 왕실과 관계가 없지만 할머니의 혈통을 거슬러가면 까마득하게 헨리 3세와[7][계보], 모계로는 에드워드 3세[9][10]까지 거슬러가야 왕의 혈통과 닿는다. 그러니 혈통으로만 치면 왕이 될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그러나 장미전쟁 이후 왕족들의 골육상잔으로 인해 랭커스터 왕조와 요크 왕조가 차례대로 몰락하고 특히 랭커스터 왕조는 헨리 7세의 어머니 마거릿 보퍼트를 제외하고 적자와 사생아 상관없이 부계가 단절됐다.
다음은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이다.
1남 | 흑태자 에드워드 | 플랜태저넷 왕조의 직계 혈통으로 유일한 후손 리처드 2세가 후사 없이 폐위되어 사망하면서 부계와 모계 후손 모두 단절 |
3남 | 클래런스 공작 앤트워프의 라이어널 | 부계 후손은 없고[11] 모계 혈통이자 유일한 후손은 모티머 가문으로 이어졌다가 이쪽도 부계 후손이 끊기고 모티머 가문의 여계 혈통을 통해 요크 왕조로 이어짐. |
4남 |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 | 적자 계열의 부계 후손은 웨일스 공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 때 끊겼고 마지막 남은 부계 후손은 존의 증손녀 마거릿 보퍼트가 있다.[12] |
5남 | 초대 요크 공작 랭글리의 에드먼드 | 클래런스 공작 앤트워프의 라이어널의 외손 자격으로 랭커스터 왕조보다 계승권이 앞선다고 주장함.[13] 부계 후손으로는 에드먼드의 고손녀 요크의 엘리자베스가 있다. |
8남 |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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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베 1세 모르타뉴 백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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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프루아 2세 페르슈 백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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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3세 플랜태저넷 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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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5세 요크 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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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 튜더 왕조 |
[1]
모르타뉴 백작위와 노장 백작위를 통합해 페르슈 백작위를 창설했다.
어머니의 가문인 보퍼트 가문[14]이 잉글랜드 왕위를 물려받을 자격이 있다며 전쟁을 일으켰다.[15]
요크 가문이 번성할 때는 부각되지 않은 채 브르타뉴나 프랑스 궁정을 떠돌면서 살았으나, 리처드 3세가 즉위해 조카 에드워드 5세를 살해하며 요크 가문이 분열되고 왕의 신망이 추락하면서 기회를 포착, 약 2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웨일스 서쪽 끝의 '밀포드 헤이븐(Milford Haven)'에 상륙한 뒤[16] 리처드가 신망을 잃은 것을 이용해 망설이던 주요 대귀족들의 방관과 자세력 규합을 이루어냈고 결국 보즈워스 전투에서 리처드를 전사시켰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자면 리처드 3세는 자신의 형 에드워드 4세의 장남 에드워드 5세를 폐위시키고 에드워드 4세와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우드빌과의 혼인을 무효화 시켜 두 사람의 자식들, 즉 리처드 3세 본인의 조카들마저 사생아로 선언한 상황이었다.[17] 이로 인해 요크 가문 내부에서도 욕을 엄청 먹게 되었다. 조카를 폐위시킨 것만으로도 여론이 좋지 않았는데 급기야 리처드 3세가 에드워드 5세와 그의 아우 리처드 왕자(에드워드 4세의 차남)를 런던탑에 감금해 무참히 살해해버리자 기존의 지지자들도 실망을 내비치고 권력기반이 분열되었다. 헨리는 리처드 3세에게 동생을 잃고 서출로 격하된 요크의 엘리자베스[18]와 결혼해 분열된 요크 가문의 지지세력을 얻어냈다. 에드워드 4세는 신분이 떨어지는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결혼하여 반발을 부르긴 했지만 명군으로 불릴만큼 통치는 잘 했기 때문.
정통성이 다소 떨어지긴 하지만 어쨌거나 랭커스터 가문의 핏줄을 이어받았고 혼인을 통해 에드워드 4세의 딸과 결혼하여 요크 가문과 결합했다. 헨리 7세의 후계자인 헨리 8세는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의 핏줄을 모두 이어받은 셈이라서 정통성을 갖추게 되었다.
게다가 장미 전쟁 동안 귀족들이 수없이 죽고 다치면서 아예 단절된 가문도 많았다. 자연스레 세습직인 의원들도 숫자도 줄어 29명밖에 남지 않았다.[19] 이는 국정을 논의하기엔 너무 적은 수였고 왕권을 견제할 수 있는 힘도 약해지게 된다. 그렇게 150년 가까이 튜더 왕조는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강한 전제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3. 치세
3.1. 초기
초기에는 혈통으로 정통성이 떨어졌기 때문에 치세 내내 반란시도에 시달려야 했다. 구체적으로 요크가의 리처드 3세와 에드워드 4세의 조카인 링컨 백작 존 드라폴(de la Pole)[20], 워릭 백작 에드워드[21]가 살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링컨 백작은 10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직접적인 위협은 안되지만 힘으로 왕위를 차지한 헨리에게 잠재적인 골칫거리였다. 그래서 즉위 후에 정통성을 강화하고 반대파인 요크 지지자들을 누그려뜨리고자 에드워드 4세의 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했다. 또한 에드워드 5세를 죽여서 민심을 잃은 리처드 3세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워릭 백작 에드워드는 죽이지 않고 런던탑에 감금했다. 결혼하고 다음 해에 에드워드 4세의 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의 사이에서 적장자 아서가 태어나자 권력기반은 탄탄해졌다.요크 가문의 공주 사이에서 적장자가 태어나긴 했지만 헨리 7세는 이후에도 10여년간 리처드 3세의 잔당들에게 시달리게 된다. 이들은 런던탑에 갇힌 워릭 백작을 가짜라 주장하고 램버트 심넬이라는 10살 소년을 허수아비로 만들어서 왕으로 선언한다. 이후 리처드 3세의 누이인 부르고뉴 공작부인 마르그리트(요크의 마거릿)[22]에게 자금을 지원받아, 아일랜드에서 6천명의 병력을 구하고 2천명의 독일용병을 잉글랜드에 상륙시키기까지 했다. 헨리 7세는 이 반란을 막기 위해 직접 런던탑에서 워릭 백작을 꺼내서 시민들에게 보여주며 인증(?)까지 여러번 하는 해프닝까지 벌였다. 어쨌든 잉글랜드는 내전으로 지친 상태에 워릭 백작의 정체도 의심스러워서 반란에 대한 호응이 적었고, 요크셔 부근 스토크에서 가볍게 격파하며 수괴(?) 램버트 심넬까지 사로 잡았다. 심넬은 가짜 워릭 백작임을 인증하기 위해 죽이지 않고 궁전의 부엌데기로 삼았다고 한다.[23] 링컨 백작 존 드라폴은 전투 중에 사망했다.[24]
이후에도 계속 또 다른 반역 시도가 이어졌다. 이번에는 리처드 3세에게 형 에드워드 5세와 함께 살해당한 에드워드 4세의 차남 요크 공작 리처드가 살아있다며 플랑드르 출신 퍼킨 워백이라는 야심가를 내세웠다. 이 사람이 죽은 요크 공작이라고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반란의 규모는 이전보다 더 컸다. 이번에는 앞서 가짜 워릭 백작을 지원한 부르고뉴 공작부인뿐만 아니라 잉글랜드가 시끄러울수록 매우 즐거워하는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4세와 프랑스의 왕 샤를 8세의 지원까지 같이 받아냈기 때문.
가짜 요크 공작의 무리는 세 차례에 걸쳐 잉글랜드에 상륙하여 전투를 벌였는데 모두 격퇴당했다. 하지만 가짜 요크공은 도주하여 아일랜드를 거쳐서 스코틀랜드로까지 도망쳐서 제임스 4세의 보호를 받으면서 호시탐탐 헨리 7세의 왕위를 탐냈다.[25]
1497년에는 콘월 지방에서 가혹한 징세에 항의하는 농민 반란이 일어났는데 왕실에 불만을 가진 귀족들까지 합세하여 1만 5천의 반란군이 런던을 향해 진격했으나 오합지졸이라 진압당했다. 그 와중에 가짜 요크공 워백은 이를 기회로 여겨 3 ~ 4,000명의 병력을 콘월에 상륙시키고 스스로를 리처드 4세로 선포하지만, 소식이 늦게 갔는지 이미 오합지졸 병력들이 진압당한 지 세 달이 넘어서였다. 이번에 워백은 사로잡혀서 비참하게 처형당한다.
이 이후로는 소소한 음모들은 있었어도 직접적인 무력 반란은 잦아들게 된다. 이 과정에서 헨리는 귀족과 군대를 통솔하며 통치력을 인정받았고 반대파들에겐 가혹한 진압보다는 관대한 회유책을 쓰면서 귀족들에게 환심을 샀다. 덕분에 얼마 못 갈 것 같던 왕위는 점차 탄탄해졌다.
3.2. 노랭이 왕
사실 헨리 7세는 무력으로 왕관을 얻고, 즉위 후 10여 년간 반란에 시달렸지만 군인이라기 보단 장사꾼 기질이 농후했다.[26] 알려졌듯이 아들 헨리 8세와 대비되게 극도로 절약을 했으며 재정 문제를 최우선으로 생각할 정도. 물론 당시 잉글랜드가 장미전쟁으로 피폐해져 국가 재정이 좋지못한터라 헨리 7세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재정 문제에 집착할만 했다. 다만 이와 별개로 헨리 7세가 돈에 대해서는 병적으로 집착하며 좋아했고 거액의 돈을 국왕인 본인이 직접 셀 정도였다. 치적이라면 당시 잉글랜드에서 프랑스의 보르도산 포도주를 수입해 오는 선박을 잉글랜드 국적 선박으로만 강제하는 항해조례를 발표하여 장사꾼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재정도 확보하고 민심도 얻는 꿩먹고 알먹는 계책. 알다시피 항해조례는 잉글랜드의 기본적인 입장이 되었다.[27] 이 항해조례를 통해 헨리 7세는 상인들에게 환심을 제대로 샀기에, 신하들은 의회에서 통치의 기반이 되는 턴세와 파운드세를 치세 내내 국왕이 마음대로 걷을 수 있도록 보장해주기에 이른다. 이는 스튜어트 왕조 시대까지 국왕의 주 수입원이 된다.[28]왕 치고는 매우 얍삽한 짓도 했는데, 에드워드 4세의 장녀 엘리자베스 공주와 결혼하고는 돈이 아까워서 대관식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요크 지지자들의 엄청난 반발을 사서 결국엔 대관식을 치르거나, 장남 아서와 약혼한 아라곤의 카탈리나는 장남이 죽고서도 20만 크라운이나 되는 지참금을 반환하기 싫어서 잡아두었다. 나중엔 캐서린을 차남인 헨리와 결혼시키려고 사돈인 페르난도 2세에게 지참금을 새로 요구했지만, 그가 주지 않는 바람에 결혼을 계속 미루며 캐서린을 가난하게 살게 할 정도로 푸대접했다. 그래도 나중에는 페르난도 2세로부터 지참금을 받아 차남 헨리는 형수인 캐서린과 결혼하게 된다. 그런데 장남 아서가 죽은지 2년 후에 장남의 기사 서임세를 때리기도 하고, 과거 사문화된 선박세를 해군 재건 명목으로 부활시켰으며, 의회에서 가결한 전쟁을 위해 부과한 세금을 자기가 먹어버리기도 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법학자들을 동원하여 연구를 거듭(?)하며 이미 없어진지 오래된 여러 봉건 의무를 세금으로 발굴(?)하고, 징세관들을 임명하여 강제적으로 과세를 때리면서 많은 돈을 거두었다. 물론 귀족들과 백성들로부터는 미움을 크게 샀고 심해도 너무 심하다고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29] 돈 앞에서는 뭣도 없는 희대의 노랭이, 좀생이, 구두쇠로 찍혔지만, 어쨌든 이런 행위는 오랜 내전으로 재정여력이 없던 잉글랜드 왕실을 지탱하게 했고 후임자들이 잘 써먹었다.[30]
사실 헨리 7세는 장미전쟁 때 플랜태저넷 왕조 혈통의 대귀족들이 대부분 알아서 죽어줘서 랭커스터 가문의 영지를 차지할 수 있었고, 전쟁 중에 요크 가문의 영지도 꿀꺽한데다가 그 밑의 귀족들도 전쟁에서 죽거나 헨리 7세에게 추방 및 재산을 몰수당하면서 왕실 토지가 엄청나게 늘어났기에 재정은 풍족했다.
3.3. 말년의 악재
1501년 장남 아서를 아라곤의 카탈리나와 결혼시켰지만 이듬해 아서가 죽고, 그 이듬해인 1503년에는 왕비 요크의 엘리자베스가 8번째 아이인 캐서린을 낳다가 아이와 함께 죽는 악재가 겹쳤다. 아내인 엘리자베스와 아들 아서의 죽음은 가족을 사랑하는 헨리에게는 큰 충격을 주었다.[31] 이후 신하들의 추천으로 새장가를 가고 싶어했으나 지참금만 밝히는 결혼이었기 때문에 나폴리 왕비에겐 퇴짜 맞았고, 죽은 맏아들의 아내 아라곤의 카탈리나의 언니인 카스티야의 후아나 1세에게 청혼해서 큰 웃음을 끌었다. 후아나는 심각한 정신병으로 유폐된 상태였고 근친혼이 잦은 당시에도 만약 이 결혼이 성사된다면, 아버지와 아들이 동서지간이라는 개족보가 되는데다 지참금만 밝히는 결혼이었기에 상대인 스페인측에서 거부했다.이때부터 우울증에 걸린 것인지 헨리는 말이 없어졌고 신하들과의 접촉도 최소화하고, 궁정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골방 안에 틀어박혀 유일한 취미 생활(= 돈 세기)에만 몰두하며 지냈다고 한다.
말년에 가면 건강이 갈수록 악화되었는데 결국 1509년 결핵이 악화되어 리치몬드 궁전에서 사망했다. 이때 그의 나이 52세였다. 말년까지 세금 징수를 잘해서 헨리 7세에게 총애받은 두 신하들인 에드먼드 더들리[32]와 리처드 엠프슨은 역으로 백성들에게 증오받았다. 이 두사람은 헨리 7세가 죽자마자 민심 안정과 정의 구현을 구실로 아들 헨리 8세에게 처형당한다.
4. 가족
4.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헨리 7세 (Henry VII) |
<colbgcolor=#fff3e4,#331c00> 제1대 리치몬드 백작 에드먼드 튜더[33] (Edmund Tudor, 1st Earl of Richmond) |
<colbgcolor=#ffffe4,#323300> 오웬 튜더[34] (Owen Tudor) |
|
마레드 압 튜더[35] (Maredudd ap Tudur) |
|||
마거릿 퍼치 다비드[36] (Margaret ferch Dafydd) |
|||
발루아의 카트린 (Catherine of Valois) |
|||
샤를 6세 (Charles VI) |
|||
바이에른의 이자보 (Isabeau of Bavaria) |
|||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37] (Lady Margaret Beaufort) |
|||
제1대 서머셋 공작 존 보퍼트 (John Beaufort, 1st Duke of Somerset) |
|||
제1대 서머셋 백작 존 보퍼트[38] (John Beaufort, 1st Earl of Somerset) |
|||
클래런스 공작부인 마거릿 홀란드 (Margaret Holland, Duchess of Clarence) |
|||
블렛소의 마거릿 뷰챔프 (Margaret Beauchamp of Bletso) |
|||
블렛소의 존 뷰챔프 (John Beauchamp of Bletso) |
|||
이디스 스투어튼 (Edith Stourton) |
- 아버지 에드먼드 튜더[39] : 1430년 6월 11일 ~ 1456년 11월 3일 - 헨리 7세는 유복자이다.
- 어머니 마거릿 보퍼트[40] : 1441년 / 1443년 ~ 1509년 6월 29일[41]
- 장인 에드워드 4세 : 1442년 4월 28일 ~ 1483년 4월 9일
- 장모 엘리자베스 우드빌 : 1437년 ~ 1492년 6월 8일
4.2. 아내와 자녀
아내 요크의 엘리자베스 |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남 |
웨일스 공 아서 (Arthur, Prince of Wales) |
1486년 9월 19일 | 1502년 4월 2일 | 아라곤의 카탈리나 |
1녀 |
스코틀랜드의 왕비 마거릿 (Margaret, Queen of Scots) |
1489년 11월 28일 | 1541년 10월 18일 |
제임스 4세 슬하 4남[42] |
슬하 1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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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대 메스번 영주 헨리 스튜어트 | ||||
2남 |
헨리 8세 (Henry VIII) |
1491년 6월 28일 | 1547년 1월 28일 |
슬하 1남 1녀[43] |
슬하 1녀[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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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시모어 슬하 1남[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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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서린 파 | ||||
2녀 |
프랑스의 왕비 마리 (Mary, Queen of France) |
1496년 3월 18일 | 1533년 6월 25일 | 루이 12세 |
제 1대 서퍽 공작 찰스 브랜던 슬하 2남 2녀 |
[1]
현 웨일스 펨브룩셔 펨브룩 성
[2]
마거릿 튜더의 후손이
튜더 왕조의 바로 다음 왕조인
스튜어트 왕조의 시조
제임스 1세다.
[3]
웨일스 공의 방계 후손이다.
에드워드 1세의
웨일스 정복 이후
웨일스 공이 잉글랜드 ~ 영국 왕세자의 직위가 되기 전에는
브리튼인이 웨일스 공으로서 웨일스를 다스렸다.
[4]
영국 왕조로서는 특이하게도
앵글로색슨이나 노르만, 유럽 대륙에서 연원한 가문이 아닌 브리튼 출신 가문이다.
[5]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딸로 잉글랜드 왕
헨리 5세와 결혼해서
헨리 6세를 낳았다.
[6]
랭커스터 가문의 시조였던
곤트의 존의 증손녀였다. 보퍼트 가문은 비록 곤트의 존과 그의 정부였던 캐서린 스윈포드 사이에서 태어난 이들이 시조가 되는 가문이었지만, 이들은 어릴 때만 사생아였을 뿐 존과 캐서린이 재혼한 후에는 적자로 인정받았다. 그렇기에 헨리 7세가 새로운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7]
어머니가 프랑스 공주였는데 당시에는 프랑스와 잉글랜드 왕가와 귀족 사이에 혼인이 잦았다.
[계보]
헨리 3세-잉글랜드의 베아트리스-브리타니의 블랑쉐-아르투아의 마거릿-나바레의 필리프 3세-나바레의 블랑쉐-
장 2세-
샤를 5세-샤를 6세-카트린-에드먼드 튜더-헨리 7세
[9]
에드워드 3세의 아들 곤트의 존의 증손녀가 헨리 7세의 어머니일 정도로 왕통에서 멀었다.
[10]
사실 랭커스터 가와 요크 가 모두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이다. 문제는 랭커스터 가문의 시조인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의 아들이 에드워드 3세의 장손
리처드 2세를 폐위시키고 왕위를 찬탈한
헨리 4세이며, 에드워드 3세의 5남인
요크 공작 랭글리의 에드먼드가 요크 가문의 시조로 그의 손자인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가
에드워드 4세,
클래런스 공작 조지,
리처드 3세의 아버지다. 일단 랭커스터 가문은 왕위를 찬탈한 전적으로
정통성이 취약했기 때문에 헨리 4세는 재위기간 내내 리처드 2세를 복위시키려는 그의 잔당에 시달리며 고달프게 왕위를 유지한 반면에, 3대 요크 공작 리처드는 어머니 앤 드 모티머(Anne de Mortimer)가 에드워드 3세의 2남
클래런스 공작 라이오넬의 외동딸 필리파의 친손녀로 부계와 모계 모두
플랜태저넷 왕조의 혈통을 물려받아 더 정당성이 있었다. 잉글랜드는 여계승계도 인정하기 때문에, 요크 가에선 자신들이 리처드 2세의 적법한 후계자란 명분이 있었다.
[11]
라이어널은 자식이라곤 외동딸 필리파 밖에 없었다. 필리파는
3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와 결혼해서 후손을 남겼다.
[12]
보퍼트 가문은 존이 정부이자 3번째 아내인 캐서린 스윈포드와 결혼하기 전에 태어났으나 나중에
리처드 2세가 적법화했다.
[13]
잉글랜드의 중세 왕위 계승은 남성 우선으로 부계 > 모계이다. 그러나 윗대의 모계가 윗윗대 부계보다 앞선다. 쉽게 말하면 고모의 후손이 작은 할아버지보다 계승권이 앞선다.
[14]
장미전쟁 이후 적자로 인정받았으나 사생아에게서 출발한 서머셋 가문을 제외하면 보퍼트 가문도 단절돼서 헨리 7세의 어머니인 마거릿 보퍼트만이 유일한 보퍼트 가문의 후손이었다.
[15]
마거릿 보퍼트는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동맹을 맺기는 했지만 스스로 여왕이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아들 헨리 7세의 즉위 후 서명할 때 Regina(라틴어로 왕비 혹은 여왕이라는 뜻)의 R을 붙여 서명했으며 엘리자베스의 복색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16]
튜더 가문이
웨일스 출신이라 웨일스는 헨리 튜더를 지지했다.
[17]
에드워드 4세와 결혼한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신분이 왕족이 아니었음에도 그녀의 미모와 재산에 눈독을 들인 에드워드 4세가 덜컥 결혼해버렸다. 당시에는 왕이 결정한 일이니 그냥 넘어갔지만 추밀원에서도 비판 받았고, 아무래도 신분이 처지는 배우자를 두면 그 배우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손들의 지위가 약해지는 게 그 당시 풍속이었다.
[18]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딸.
[19]
튜더 왕조가 종결된
제임스 1세 때에도 잉글랜드 전역의 귀족 가문이 30개의
오등작의 가장 아래인 남작 가문을 포함해 50개 정도밖에 되지 않을 정도였다.
[20]
리처드 3세의 외조카. 리처드 3세의 누이인 서포크 공작부인 엘리자베스의 아들이다.
[21]
리처드 3세의 친조카. 리처드 3세의 둘째 형
클러렌스 공작 조지의 아들이다.
[22]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의 세번째 아내. 남편의 전사 이후 의붓딸
마리 드 부르고뉴를 도와 부르고뉴 공국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인물이다. 때문에 의붓딸인 마리와는 사이가 정말 좋았다고. 참고로 마리 드 부르고뉴는
막시밀리안 1세의 첫번째 아내.
[23]
이후 심넬은 거의 환갑이 될 때까지 살아남아 자식도 남겼다.
[24]
존의 동생
서포크 공작 에드먼드는 헨리 8세 시절까지 살아남지만, 헨리 8세 시절 반란으로 몰려 처형당한다. 존과 에드먼드의 동생 리처드는 대륙으로 도망.
[25]
가짜 요크 공은 무슨 신통력이 있었는지 아일랜드 족장들에게 환심을 샀고, 제임스 4세와도 친해져서 정체가 가짜인줄 알았어도 친구처럼 지냈다고 한다. 심지어 제임스 4세는 헨리 7세와의 합의에 따라 가짜 요크공에게 잠시 지원을 끊게 되자 자신의 배를 내주어 그를 유럽으로 무사히 보내주었다고 한다.
[26]
보스워스 전투 때도 본인이 지휘하지 않고 삼촌에게 지휘를 맡기며 후방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27]
올리버 크롬웰이 한 걸로 알지만 크롬웰도 한 것이고, 잉글랜드의
국력이 부족할 경우 무시당하다가, 다시 항해조례를 반포했다가 포기하는 상황의 연속이었지 계속해서 잉글랜드의 기본적인 입장이었다.
[28]
턴세는 술통 단위로 부과하는 관세이고, 파운드세는 물류 무게당 부과하는 세금으로, 보통 왕이 등극하면 의회에서 "왕께서 치세 내내 걷으십쇼"하며 승인해주는 게 관례였다. 그런데
찰스 1세 시기에는 즉위 후 의회에서 고작 1년 6개월치만 허가해주자 왕과 의회의 갈등이 깊어지게 된다.
[29]
여담으로
앙시앵 레짐 당시 봉건 귀족들도 이런 짓을 일삼다가
프랑스 대혁명 당시 분노한 농민들에게 대거
학살당했다.
[30]
다만 문제는 후임자들인데... 후임자들이 사치스러웠던 것은 아니었지만
함대 건조 등 여러 이유로 돈을 너무 쓴 바람에 스튜어트 왕조 시기에는 저 튼튼한 재정도 바닥이 난다. 그래서
제임스 1세는 헨리 7세처럼 어떻게든 아껴쓸 수 밖에 없었다.
[31]
실제로도 헨리 7세는 가족을 아끼고 사랑하는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라서 그들과 관계가 좋았다. 아서의 장례식에서는 흐느끼고 울부짖을 정도로 크게 슬퍼해서,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이 놀라면서 안타까워했다. 특히 노랭이라서 절약을 병적으로 했지만 아내와 자식들에게는 돈을 아끼지 않고 후하게 지원해줬다. 딸
마거릿이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에게 시집갈 때도 슬퍼했고, 그녀가 고향에 대한 향수병과 가족이 너무 보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오자 안타까워할 정도였다.
[32]
이 에드먼드의 아들이
에드워드 6세 시절 에드워드 시모어(에드워드 6세의 외삼촌)를 몰아내고 사실상 영국을 통치하다가, 에드워드 6세 사후
메리 1세의 즉위를 막고
제인 그레이를 옹립하려다가 반역으로 참수당한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다. 에드먼드의 손자는
엘리자베스 1세의 총애를 받은 연인으로 유명한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다.
[33]
랭커스터 왕조 마지막 왕
헨리 6세의 이부(異父)동생이다. 이부동생이기에 헨리 튜더의 부계는 랭커스터 가문과는 관계가 없다. 헨리 튜더의 즉위 명분도 부계가 아닌 모계가 랭커스터 가문이라는 점에서 나왔다. 헨리 6세가 자신의 이부동생인 에드먼드 튜더와 자신의 6촌인 마거릿 보퍼트의 결혼을 주선했기 때문이다.
[34]
웨일스인이다.
1400년
웨일스
앵글시 섬 출생.
[35]
웨일스인이다. 'ap'은
웨일스어로 '~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즉 'Maredudd ap Tudur'는 'Tudur의 아들 Maredudd'라는 뜻이다.
[36]
웨일스인이다. 'ferch'는
웨일스어로 '~의 딸'이라는 뜻이다. 즉 'Margaret ferch Dafydd'는 'Dafydd의 딸 Margaret'이라는 뜻이다.
[37]
랭커스터 가문의 시조
곤트의 존의 증손녀다. 따라서 헨리 튜더의 즉위 명분은 모계가 랭커스터 가문이라는 점에서 나왔다.
[38]
곤트의 존과 그의 정부이자 세번째 아내인 캐서린 스윈포드의 아들이다.
[39]
헨리 5세의 왕비
카트린 드 발루아가 오웬 튜더와 재혼하여 낳은 아들로
헨리 6세의 이부남동생이다.
[40]
랭커스터 왕조의 시조
곤트의 존의 증손녀다.
[41]
만약
1443년생이 확실하다면 헨리 7세를 우리 나이로 겨우 중2때 낳았다는 것이 된다. 당시 조혼이 흔했다고는 하지만 조혼을 해도 신부가 어느 정도 자란 다음에 합방하고, 아이를 갖는 편인 점을 감안하면 너무나 이른 나이에 초산을 겪은 셈. 더구나 그렇게 빨리 초산을 겪고도 장수하는 건 드문 경우다. 다만 헨리 7세를 낳을 때 어린 몸으로 출산하느라 말 그대로 죽다 살아날 지경으로 고생했고 이 난산으로 불임이 됐다는 견해가 있다. 실제로 재혼한 남편과의 사이에서는 자녀를 낳지 못했다.
[42]
제임스 5세 등
[43]
메리 1세 등
[44]
엘리자베스 1세
[45]
에드워드 6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