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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fff,#191919> 프랑스 제국 | 대육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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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육군 La Grande Armée The Great Arm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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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황제의 휘장 | |
<colbgcolor=#002654><colcolor=#FFF> 존속 기간 | 1804년 ~ 1815년 |
편성 |
육군 해군 |
병력규모 |
육군 - 누적 2,100,000명 이상 해군 - 누적 불명 전체 - 누적 불명 |
주요 지휘관 |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26인의 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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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제국의 군대. 그랑다르메라고도 불린다. 오늘날 프랑스군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군대로 프랑스군의 역사상 최전성기였다. 명실상부한 19세기 최강의 군대로 전유럽의 군대가 연합해서야 겨우 이겼을 정도다.[1] 대육군의 해체 이후로도 이런 강력한 위상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 제2차 세계 대전 초반까지도 프랑스는 유럽 최대의 육군을 보유한 육군 대국으로 유명했다.13개 식민지의 대륙군(Continental Army)과 한자 표기가 같은데, 두음법칙에 따라 그랑다르메는 큰(大) 육군(陸軍)이므로(대-와 육군이 분리되므로) 대육군으로 쓰고 대륙군은 대륙(大陸)의 군대(軍)이므로(륙이 어두에 위치하지 않으므로) 대륙군으로 써서 구분한다. 대륙군을 대륙육군으로 번역해서 구분하는 경우도 많다. 한편 같은 한자문화권 언어인 중국어와 일본어의 경우, 각 언어판 위키피디아를 기준으로 중국어는 대륙군은 그대로 쓰고(大陆军) 대육군은 '대군단(大军团)', 일본어는 한자 표기는 같지만 단어 뒤 괄호 안에 미국(アメリカ)과 프랑스(フランス)를 써넣어 구분한다.
2. 역사
프랑스 혁명 시기에 프랑스군은 무너질대로 무너진 상태였다. 혁명 이후 왕립 프랑스 육군의 상당수를 차지하던 외국인 연대들은 일괄적으로 해산되고 귀족들로 구성된 프랑스군의 참모 및 장교 대부분이 숙청당하거나 국외로 피신했다. 이렇게 장교들이 대규모로 숙청된 이후 지휘 체계에 생긴 공백을 메우기 위해 혁명에 참가한 명망가들이 참모나 고위 지휘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이들은 대부분 의사, 변호사 출신의 군 경력이 일천한 자들이었다.[2] 혁명정신에 취해있던 병사들은 이런 장교들의 명을 쉽게 따르지 않았다. 이런 문제는 민병대의 일종인 국민위병이 가장 심각했지만, 정규군도 크게 나은 점은 없었다. 이 때문에 혁명정부는 국민개병제를 실시해서 병력수를 늘려 전력을 보강하려 했지만 이번에는 머릿수만 늘어나니 보급이 이를 따르지 못했다. 군인들에게 개인화기도 제대로 지급하지 못해 몽둥이로 무장하는 상태가 되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 전쟁 문서에 나폴레옹 이전 혁명군의 상황에 대한 관련 서술이 있다.하지만 그 물량이 워낙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으며, 프랑스의 군사적 황금기라는 것을 증명해주기라도 하는 듯 인재들이 연이어 나타났다. 나폴레옹 등장 전에는 1793년에 당시 국방장관 역할을 맡았던 라자르 카르노가 의용군과 기존 상비군 30만과 합쳐 75만의 혁명군을 징집했는데, 이러한 국민개병제 실시를 계기로 프랑스군은 전례 없는 규모로 팽창했다. 더구나 7년 전쟁 이후 프랑스군은 사단의 개념을 고안하고 장 바티스트 바케트 드 그리보발의 포병 개혁에 따라 포병을 혁신[3]하는 등 크게 발전했다.
프로이센의 상비군은 20만, 오스트리아는 상비군이 30만 명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 유럽에서 물량대군 취급받던 러시아 제국은 프랑스처럼 징병제를 안 해도 인구 수가 엄청 많았다.[4] 그렇지만, 왕당파와 가톨릭 교회에 우호적이고 혁명에 부정적인 방데 지역 주민들의 반발을 사 반란이 일어났고, 프랑스군은 이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 방데 학살'이라는 흑역사를 남겼다.
여기에 테르미도르 반동이 일어나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되는 등 이상에 모든 것을 걸고 내부에서도 격렬하게 끓어오르던 진짜 혁명정부의 시대가 끝나고, 현실적인 문제를 바로 보기 시작한 부르주아 세력이 중심이 되는 혁명정부의 시대가 안정적으로 이어졌다. 이후 혁명에 찬동하거나 반항하지 않는 성향의 귀족 출신 장교들 중 유능한 이들이 복직[5]되고 유능한 병사들이 장교로 승격되면서 서서히 프랑스를 노리는 유럽 각국의 군대를 완전히 격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그의 유능한 원수들이 군을 지휘하면서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을 지상전에서 격파, 사실상 무적의 군대로 등극한 대육군(La Grande Armee, 그랑다르메)[6]의 시대가 열렸다. 일반적으로 프랑스 육군의 최강 시대는 앞선 루이 14세 시기와 나폴레옹 시기에 해당한다. 또한 이 시기 나폴레옹이 거대한 규모의 육군을 바탕으로 현대적 개념의 군단급 작전제대를 사상 최초로 활용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빛나는 성공에는 심각한 약점이 있었다. 프랑스의 산업과 경제도 발전하기는 했지만, 그와 비례하여 군대가 팽창한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와 관련된 문제들 중 대표적인 게 바로 보급 문제였는데, 프랑스의 대육군은 보급의 상당부분을 현지에서 조달했다. 이것은 프랑스군의 규모가 그렇게 빠른 속도로 불어날 수 있던 이유이기도 했는데, 절대왕정 국가의 상비군은 사실상 월급을 비롯한 물질적 대가를 구심점으로 모인 용병인지라 약탈을 허용하면 군대를 통제할 수 없게 되거나 심하면 와해되기 쉬웠지만, 혁명기의 프랑스군은 애국심을 구심점으로 조직된 국민군이었기 때문에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약탈이 가능했고, 그러면서도 군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때문에 혁명 정부와 혁명군 수뇌부는 이를 역이용해서 보급이 따라오는 속도에 구속되지 않는 기동력을 과시할 수 있었다.
게다가 혁명 초기에 다른 나라는 상비군 전력이 많아야 20만~30만이 한계였고 국경 밖으로 싸우러 가는 병력은 그보다 한참 적었지만,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뜩이나 인구도 많은데다 전술한대로 애국심에 기초한 징병제로 국민군을 모집하여 70만이라는 대병력을 보유했다. 군의 규모가 리즈 시절이 지나고도 1812년 러시아, 1813년 독일 전역에서 수십만씩 말아먹고 나폴레옹 전쟁 끝물이던 1814년에도 징집가능 연령 인구가 100만에 실제로 40만 이상을 동원해서, 유럽의 중국이라는 별명을 절대 노름으로 딴 게 아니라는 걸 증명했다. 물론, 병력의 질이 떨어지는 건 별개였지만 애국심에 기초한 덕분에 사기는 매우 높았고, 이들을 지휘한 나폴레옹에 대한 충성심도 매우 강했으며, 그 나폴레옹도 1814년에 누가 봐도 막장테크 탄 상황에서 뭘 믿고 버텼냐를 보면 이런 국민군 덕분이었다. 이런 대육군(Grande Armée)을 바탕으로 전 유럽을 상대로 전쟁이 가능했지만, 다른 국가들도 프랑스에 패배한 뒤 가만있지 않아 병력을 최대한 동원하기 위해 프랑스와 유사한 동원 체제를 확립하자 일반 병력 간에서의 양적 비교우위도 사라지게 된다.[7]
그리고 육군이 엄청나게 팽창한 것과는 달리 해군은 기술병력과 장비 위주의 군종이라는 특성상 빠르게 불어날 수 없었다. 군함 건조용 주요 자재였던 발트산 목재[8]는 돈을 지불하지 않으면 입수할 수 없었고, 배를 건조하는 기술이나 해전에서의 기술과 같은 것은 혁명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사실 프랑스 해군은 조선술보다 나머지 부분, 특히 인적자원 면에서 숙련된 선원의 부족과 함께 군함과 함대를 지휘할 함장과 제독 등의 역량도 해군장교단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구호기사단 출신 귀족사관들이 혁명 때문에 외국으로 망명하면서 잔류한 일부 사관들과 고참선원들이 제대로 된 훈련과 검증과정을 밟지 않고 승진하는 바람에 영국 해군에 비해 전반적으로 모든 능력이 부족했다.
그러나 프랑스 해군의 사관들은 혁명 이전에도 영국의 해군사관들에 비해 저돌적으로 적함에 접근하여 싸우는 경향이 부족해 완승할 싸움을 고전 끝에 신승하거나 무승부로 낼 싸움을 참패로 바꾸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미국 독립 전쟁 중 인도양에서 자신의 함대보다 압도적인 영국 인도양 함대를 상대로 초근거리 접근전을 영국보다 먼저 강요해 대등하게 싸워냄으로써 결과적으로 쇠퇴일로이던 인도 내 프랑스의 영향력을 회복시킨 쉬프랑 생 트로페와 같은 장교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나폴레옹 시기 육군은 전투력이 최강이었지만, 해군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나폴레옹 때에도 유럽 해양의 패권은 대영제국이다. 그렇기에 해군이 동원된 적은 이집트 정복과 트라팔가르 해전 외에는 없다시피하며 그 외에 해군를 도크에서 대규모로 빼낸 적은 거의 없다.
또한 육군의 보급을 현지에서 조달하는 방식은 비교적 부유한 지역에서만 효과적이었다.[9] 농업기술의 낙후[10]와 산지가 많은 환경 탓에 가난한 스페인 농촌은 반도 전쟁 때문에 대규모로 들어온 프랑스군을 부양하는 데 무리가 있었고, 이 때문에 소수 정예의 영국군이 우위에 설 수 있었다. 러시아 원정에서는 설상가상으로 청야작전에 동장군까지 겹쳐서 같은 결과가 훨씬 대규모로 나타나게 되었다. 게다가 장기적으로 프랑스군을 부양해야 하는 '해방된'[11] 피지배 국가들과 민중의 분노는 계속 쌓여만 가고 있었다. 결국 스페인에서의 끝이 안 나는 게릴라 전쟁,[12] 그리고 러시아 원정의 실패를 계기로 전 유럽이 대프랑스 동맹을 체결, 다시 프랑스의 적이 되어 총공세를 가했고 워털루 전투에서 결정타를 날림으로써 나폴레옹과 그의 군대는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3. 관련 문서
[1]
유럽사 전체를 통틀어서 이와 동급의 위상을 가진 군대는
팍스 로마나 시기의
로마군이나
2차 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 외에는 없다.
[2]
군 경력이 있는 민간인을 고위 지휘관으로 임명하기도 했으나,
준장급 이상의 계급으로 전역한 인원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때문에 작은 야전부대(소대~중대, 대대) 수준에서는 전직 군인들이 조금이나마 능력을 발휘했지만, 더 많은 대규모 병력을 통솔할 수 있는 지휘관들은 이미 숙청당했거나 해외로 망명한 뒤였다. 이 시기 프랑스군의 최고급 지휘관 중 한명이 전직
대령 인 경우도 있었으니, 상태가 말할 것도 없이 처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프랑스군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대숙청을 겪은 군대들은 거의 필연적으로 이런 현상을 겪었다.
[3]
때문에 프랑스 포병대는 유럽 최고의 실력을 자랑했고, 이들을 초빙한
마라타 동맹의 포병대는 당시 그들과 싸우던 영국군으로 하여금 '이것들이 프랑스 포병대를 고용했나?'라고 생각하게 만들 정도였다.
[4]
러시아 제국은 표트르 대제 시절 서구화의 일환으로 농노와 귀족 자제를 징집하는 스웨덴식 징병제 체제를 도입해 나폴레옹 전쟁에 이르기까지 돌리고는 있었다.
[5]
그 중 한 명이 나폴레옹의 26원수 중 강철원수라고 불렸던
루이니콜라 다부였다.
[6]
'위대한 군대'라는 뜻이지만 단순히 대규모라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7]
다만 실제로 전투에 참여하는 대육군의 수는 최대 20만 안팎에 그쳤는데, 전신기가 발명되기 이전 오직 전서구와 말을 탄 전령에 의존하는 전근대식 통신체계의 한계로 인해, 그 이상의 병력은 총사령관의 의도대로 지휘하고 통제하는게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8]
침엽수의 특성상 매우 단단하고 튼튼하고 건조 과정도 짧으며 그 과정에서의 뒤틀림과 균열, 부피와 질량의 감소 정도도 활엽수 목재보다 훨씬 덜하기 때문.
[9]
화려한
프랑스 요리들이 보여주듯이,
프랑스의
농업 생산력은 굉장히 우수하다. 프랑스는 지금도
유럽에서 가장 비옥하고 넓은 데다 다양한 기후대의 국토를 바탕으로 서유럽 제일의 농업생산력을 자랑하는데, 농산품 가격 유지를 위해서 전체 경작지의 일정 부분을 놀리고 있다. 그런데도
식량자급률이 150%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이보다 더해서 식량자급률이 300%를 뛰어넘고, 수확량이 예상보다 더 많으면 아예 밭을 갈아엎거나 태워버리는 건 예사로 취급된다.
[10]
레콩키스타 완성 뒤에 발표한 알람브라 칙령이 직격탄이었다. 이를 계기로 그 척박한 환경에서도 수준급의 생산력을 유지하게 했던 관개기술을 도입한
무어인들이 쫓겨났기 때문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국내 금융의 중심축이었던 유대인들이
포르투갈을 거쳐
네덜란드로 망명하면서 네덜란드나 영국에 금융시장을 잠식당했다.
[11]
"프랑스군은 압제자에게 억압받는 민족을 '해방'한 군대"라는 것이 공식적인 입장이었다. 물론 프랑스군의 지배를 받으며 그들을 먹여살려야 하는 민족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나폴레옹 이후 각국에서 일어난 혁명에 영향이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12]
영국이 지원해주는데다가 러시아 원정에 대규모의 병력을 투입하는 바람에 제대로 진압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