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 2008년 러시아 국영방송
로시야 1이 러시아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러시아인’을 선정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이용해 투표가 진행됐으며 러시아 인구 1억 4,300만 명 중 5천만 명 이상이 투표에 참가했다. 그러나 투표 과정에서 부정과 방송국 측에 의한 순위 조작 정황으로 인해 러시아 내에서 광범위하게 비판받았다. |
||||||
1위 | 2위 | 3위 | 4위 | ||||
알렉산드르 넵스키 | 표트르 스톨리핀 | 이오시프 스탈린 | 알렉산드르 푸시킨 | ||||
5위 | 6위 | 7위 | 8위 | ||||
표트르 대제 | 블라디미르 레닌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 ||||
9위 | 10위 | 11위 | 12위 | ||||
드미트리 멘델레예프 | 이반 4세 | 예카테리나 2세 | 알렉산드르 2세 | ||||
영문 위키 참고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 |
알렉산드르 푸시킨 Александр Пушкин|Aleksandr Pushkin |
||||
|
||||
본명 |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 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Пушкин[1] (러시아어) Alexander Sergeyevich Pushkin (영어) |
|||
국적 |
[[러시아 제국| ]][[틀:국기| ]][[틀:국기| ]] |
|||
출생 | 1799년 6월 6일 | |||
러시아 제국 모스크바 | ||||
사망 | 1837년 1월 19일 (향년 37세) | |||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 ||||
직업 | 작가 | |||
서명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묘소 | <colbgcolor=#fff,#1f2023>푸시킨 언덕 성 가정 수도원 | ||
학력 | 차르스코예 셀로 리체이 | |||
사조 |
낭만주의 리얼리즘 |
|||
활동 기간 | 1820년 – 1837년 | |||
신체 | 167cm | |||
종교 | 불명[2] | |||
부모 |
아버지 세르게이 리보비치 푸쉬킨 (1770~1848) 어머니 나데즈다 오시포브나 간니발 (1775~1838) |
|||
배우자 | 나탈리아 푸시키나 (1831년 결혼) | |||
자녀 | 슬하 4명 | }}}}}}}}} |
[clearfix]
1. 개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Если жизнь тебя обманет,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Не печалься, не сердись.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В день уныния смирись,
기쁜 날이 오리니
День веселья, верь, настанет.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Сердце в будущем живёт,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Настоящее уныло.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Всё мгновенно, всё пройдет,
지나간 것 그리움이 되리라
Что пройдёт, то будет мило.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Если жизнь тебя обманет,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Не печалься, не сердись.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В день уныния смирись,
기쁜 날이 오리니
День веселья, верь, настанет.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Сердце в будущем живёт,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Настоящее уныло.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Всё мгновенно, всё пройдет,
지나간 것 그리움이 되리라
Что пройдёт, то будет мило.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러시아 소설가이자 시인. 러시아 근대문학의 창시자이자 러시아의 국민 시인.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황금기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그의 시를 꼽으면 '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Если жизнь тебя обманет)'일 것이다.[3]
2. 생애
2.1. 초반
1799년 모스크바에서 명문 귀족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초상화를 보면 외모가 독특한데 외증조부가 아프리카 출신 흑인으로 러시아 제국의 귀족이 된 아브람 간니발(1696~1781, Абрам Петрович Ганнибал)이다.[4] 간니발은 아프리카 카메룬 북동부 끄트머리에 있는 로고네-비르니 지방에서 오스만 제국으로 끌려갔다가 러시아 대사 때문에 러시아로 오게 된 인물인데 표트르 대제가 직접 대부(godfather)로 서 주었을 정도로[5] 러시아의 귀족 자제들과 함께 최고의 교육을 받았으며 이후 간니발 가문은 러시아의 명문가가 되었다. 즉, 흑백혼혈이라고 볼 수도 있으며 당시의 관점으로는 빼박 흑인이다. 이후 간니발은 표트르 대제의 총애로 노예 신분에서 면천된 후 프랑스 유학을 하기도 하였는데 이때 많은 학자/철학자들과 교류했고 볼테르로부터 '계몽주의의 검은 별'이라는 어마어마한 찬사를 들을 정도로 학문적 성과를 이룬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외증조부 혈통과 이국적인 외모를 자랑스러워했다. 그에게 자신의 뿌리는 그저 그런 노예 출신이 아닌 자랑스러운 학자 집안이었다.어머니는 미인이었지만 흑인의 유전자를 강하게 타고났는데 그는 피부색 말고 미모는 물려받지 못해서 상단 초상화는 초상화답게 150% 정도 미화한 것이고(...) 실제로는 미남과 거리가 멀고 남아 있는 스케치 등에서는 생김새도 흑인에 가까운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가족들에게도 다소 낯선 존재였고 다른 사람들은 곱슬머리에 키 작은 루저라고 놀려 댔지만 여자들에게는 인기 대폭발이라 평생 여자가 너무 많아서 셀 수 없었다고 한다(...). 말빨, 글빨 등 외모보다 매력으로 어필하는 스타일이었던 것 같지만 결혼 후엔 감시에 처자식을 거느리고 먹고 사느라 그럴 틈도 없었던 듯하다.
일반적으로 그의 외증조부인 간니발 장군은 에티오피아 혹은 현대 에리트리아 출신으로 알려졌고 한동안 정설이었지만 현대 근세사학계에서는 당시에 아프리카에 대한 지식이 제한적이었던 유럽, 그것도 러시아에선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그냥 습관적으로 '어비스니아인', 즉 에티오피아로 부르다 보니 생긴 오해로 본다. 무엇보다 소설가뿐만 아니라 문학사학자로서도 활동했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를 비롯한 현대 관련 학자들은 오히려 만년에 간니발 장군 본인이 스스로 고향은 "라곤"이라고 말했던 점을 빌어 중서부 아프리카 차드 호 현대 카메룬 북동부 끄트머리에 있는 로고네-비르니 지방이었다고 본다. 게다가 간니발 에리트리아 출신설을 처음 공식화했던 인류학자 드미트리 아누친의 주장은 열등한 '완전 흑인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인이 푸시킨 같은 천재를 배출했을 리는 없으니 그나마 지중해 '문명화된 세계'와 역사적으로 가까웠고 '완전한 흑인'은 아닌 햄계 민족 에티오피아인일 거란 19세기말 우생학적 유사과학에 기초했기 때문이다. 간니발 장군이 러시아 정부에게 귀족 작위를 받을 때 요청하여 하사받은 문장이 있는데 여기에 중간엔 코끼리가 있었고 아래엔 라틴 문자로 FVMMO라고 적혀있는데 이는 라틴어의 "Fortuna Vitam Meam Mutavit Oppido"(행운이 이 도시에서 나의 인생을 변하게 했다)의 머릿글자로 추측되기도 하지만 러시아 문화학자이자 간니발 전기 저자인 휴 반즈에 따르면 이는 차드 호수 근처 코토코 왕국의 코토코족들의 언어로 '고향'이란 뜻이라고 한다. 간니발은 동거하다가 첫 아이가 태어나면서 1736년에 결혼한 두번째 아내인 귀족 혈통의 크리스티나 레지나 세베르크(Christina Regina Siöberg)[6]와 매우 금슬이 좋았으며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총 10명 낳았고 그 중 하나인 오시프가 그의 외할아버지였다.
군대에서 퇴역한 후 문필활동을 하던 아버지의 개인 서재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고전 문학들을 접하며 책을 많이 읽었고 삼촌도 시인이었기 때문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동시에 유모로부터 러시아의 여러 민담과 민요들을 배웠다. 이런 성장 배경은 그가 시인으로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된 동시에 훗날 그가 러시아의 전제 정치를 비판하고 러시아 민중들을 동정하게 된 밑바탕이 되었다.
이미 10살 때 프랑스어로 자작시를 지었고 12살 때 중고교 과정이 통합된 러시아 귀족 자제 교육기관인 리체이(лице́й)에 입학했다. 리이에서 교육받는 동안 130편의 시를 지었고 15세 때 처음으로 시집을 냈다.
일리야 레핀의 그림 <리체이 시험장에서의 푸시킨>(1911)[7]
17살 리체이에서 진급 시험을 칠 때 '차르스코예 셀로[8]의 추억'이라는 자신의 자작시를 낭독했는데 심사위원으로 왔던 문학가들(특히 데르자빈)에게 큰 인상을 남겼고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2.2. 중반
리쩨이를 졸업한 후에는 당시 귀족 자제들의 출세 코스에 맞게 외무성에 들어가 10등 문관 신분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는데 워낙 전형적인 생활이었기 때문에 곧 이 공무원 생활에 흥미를 잃고 이때부터 3년간 향락적인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런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어렸을 때부터 품어 온 자유주의적 사상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대의 혁명적 자유주의자들과 활발한 교류를 했으며 진보적인 낭만주의 문학 그룹에 동참했다. 유명한 서사시 '루슬란과 류드밀라(Руслан и Людмила)'를 발표한 것도 이 무렵이다. 그는 이 무렵 러시아의 농노제와 전제 정치를 공격하는 시를 지었는데 이 때문에 당국의 눈 밖에 나 1820년 러시아 남부로 전근 당했다.[9] 오데사에 머무르며 외국 문학을 공부하던 그는 오데사 총독과 불화를 일으켜 영지인 미하일롭스꼬예로 추방당했다. 1825년에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귀환이 허용될 때까지 남부 지방에서 짱박혀 있었고 1824년에는 외국 망명까지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거기다 그와 친분이 있었던 자유주의자들은 데카브리스트의 난으로 숙청당했다. 개인적으로는 매우 불행한 시기였으나 예술적으로는 매우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한 시기였는데 그의 대표적인 작품 예브게니 오네긴와 보리스 고두노프를 이때부터 쓰기 시작했다.1825년에 자유주의자들이 일망타진된 후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귀환해도 좋다는 황제의 허가가 있었으나 그는 이미 위험인물로 낙인찍혀 당국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황제의 검열 없이는 작품 발표를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다.[10] 사적인 여행도 일일이 허가받아야 했다. 때문에 귀환한 후 얼마간은 서정시나 연애시를 적으면서 기분전환을 하고 다녔다.[11] 1830년부터 다시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들어갔는데 1831년에 예브게니 오네긴을 완결 짓고 여러가지 시와 소설들을 발표했다. 스페이드의 여왕, 대위의 딸[12] 등 그의 대표적인 소설들도 이때 발표된 것들이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한 것으로 설정한 희곡인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도 썼고 그것을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가 1898년에 오페라화했다. 1979년에 쓴 피터 셰퍼의 희곡 아마데우스에도 영향을 미쳐 연극으로도 반향을 일으키고 1984년 영화화되어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설이 더욱더 알려지게 된 것이다. 단, 독살은 푸시킨의 희곡에서만 했고 나머지 작품들에서는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해서 간접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 나온다.
2.3. 결혼과 사망
1831년 그는 러시아 상류층에서 미인으로 소문났던 나탈리야 니콜라예브나 곤차로바(Наталия Николаевна Гончарова, 1812년 ~ 1863년)에게 청혼했다. 곤차로바는 당시 18살이었는데 이미 자신보다 13살 연상이었던 남성과 사별한 경험이 있었다는 얘기가 있다. 게다가 곤차로바는 미인이었지만 집안이 몰락해 친정에서는 그녀를 결혼시켜 사위에게 빨대 꽂을 생각으로 재산 많은 남자를 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자 쪽 집안이나 푸시킨의 어머니는 모두 그 결혼을 반대했지만 결국 푸시킨은 곤차로바와의 결혼에 성공한다. 이 무렵 푸시킨은 다시 관직에 등용되었고 둘 사이에서는 아들 알렉산드르, 그리고리, 딸 마리야, 나탈리야가 태어났다.[13]곤차로바는 결혼 후에도 사교계에서 인기가 많았고 자연히 많은 스캔들을 일으키고 다녔는데 그 중에는 니콜라이 1세와 불륜 관계라는 소문도 나돌았다. 1834년에 푸시킨은 차르의 시종보가 되었는데 이게 사실 곤차로바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던 니콜라이 1세의 음흉한 속셈 아니냐는 소문이 당대부터 돌았다.[14] 푸시킨은 이런 소문에 처음에는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지만, 나중에는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사실 푸시킨도 여성 편력으로 유명했다. 오데사에 짱박혀있을 때부터 유부녀, 귀족 여성, 발레리나, 창녀 등 신분을 가리지 않고 방탕한 행적을 벌였고, 총독 부인도 건드리다 들켜 그 남편에게 깨지고 쫓겨나기도 했다. 정신적으로 사랑한 여성과 육체적으로 사랑한 여성을 분리하여, 자기가 만난 여성들을 그 두 분류로 나누어 보관했다고 한다. 한편, 엄청난 노름꾼이자 결투광이기도 했다고.[15] 본인도 도박하는 와중에 아내까지 사치를 좋아하니 빚도 크게 늘어났다.
1836년 11월, 푸시킨과 그의 동료들은 아내 곤차로바가 염문을 일으키고 다니고 있다는 익명의 투서를 받는다. 푸시킨은 당시 곤차로바와 가까워진 프랑스인 귀족인 근위대 장교 조르주 샤를 드 헤케렌 당테스(Georges-Charles de Heeckeren d'Anthès) 남작이 범인이라고 확신했고 당테스에게 결투 신청을 한다. 하지만 당테스와 처제가 결혼을 하는 바람에 결투는 유야무야 되었다. 그러나 곤차로바와 당테스를 둘러싼 추문은 끊이지 않았고 푸시킨과 당테스는 결국 결투를 했다.[16]
그러나 결투에서 푸시킨은 치명적인 총상을 입고 쓰러졌다. 마지막 힘을 다해 당테스에게 반격해 부상을 입혔지만 그는 가벼운 부상에 그쳤고, 푸시킨은 이틀 후 병원에서 사망했다.
푸시킨은 자신의 서재에 꽂혀있던 수천 권의 책을 생각하며 "안녕, 친구들!"이라고 말했다. 책이 곧 친구라는 말. 이로써 곤차로바는 만 24살에 결혼과 사별을 두 번이나 했다. 푸시킨은 병원에서 곤차로바에 대해 처음에는 용서할 수 없다고 무시했으나 다음 날 죽음이 다가오는 걸 느꼈는지, 곤차로바를 마지막으로 만나 "나의 죽음 때문에 자책하지 마. 이것은 나 혼자 저지른 일의 대가라고 생각해... 그러니 자유롭게 살아... 그리고 다음에는 실수하지 말도록 해..."라는 말을 했다. 이후 쿨럭거리며 "끝장이야... 내 목숨..."이라고 중얼거린 뒤 숨을 거두었다.
푸시킨의 장례식에는 2만 명의 인파가 몰렸는데 깜짝 놀란 니콜라이 1세는 일반인들의 장례식 참석을 금지하고, 신문에 과도한 추모 기사 작성을 금지한다 명했으며 장례식에 군대까지 보냈다.[17] 이런 정황을 볼 때 당시 많은 사람들이 푸시킨의 죽음은 국민 작가인 그의 인기나 영향력을 걱정한 귀족들이 판 함정이고 푸시킨이 거기 빠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국민적 시인을 죽인 당테스도 끝이 좋지 않았다. 금지된 결투에서 살인까지 했는데 처벌받지 않고 그대로 프랑스로 도망가 나폴레옹 3세가 집권한 후 프랑스에서 고위직을 역임해 당당하게 러시아 궁정에 사절로 나타나기도 했지만, 보불전쟁으로 나폴레옹 3세가 축출된 후엔 지방에 은둔하며 비참하게 살다가 1895년에 사망했다.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딸 나탈리야 푸시키나는 당대의 뛰어난 재녀로 이름을 날리고 룩셈베르크의 대공 아돌프의 동생인 나사우의 니콜라스 공과 결혼했다. 나탈리야가 왕공족과 결혼할 신분이 아니었기 때문에[18] 니콜라스 공과 나탈리야의 결혼은 귀천상혼으로 받아들여졌고 나탈리야는 메렌베르크 여백작의 지위를 받았다. 귀천상혼으로 태어난 니콜라스와 나탈리야의 자녀들은 계승권이 없었기 때문에, 기욤 4세가 딸만 6명을 낳았음에도 룩셈부르크 대공위를 계승하지 못했다.[19] 이후 메렌베르크 백작가는 1965년 남계가 단절되었지만 나탈리야의 딸 조피가 니콜라이 1세의 손자인 러시아의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대공[20]과 귀천상혼해 영국에 정착했다. 이를 통해 영국 등 유럽에도 간니발과 푸쉬킨의 혈통을 약간이나마 받은 높으신 분들도 몇몇 있다. 대표적으로 영국의 밀포드 헤이븐 후작[21], 제7대 웨스트민스터 공작, 애버콘 공작의 후계자, 댈하우지 백작의 후계자들이 있다.
푸시킨의 장남 알렉산드르는 두 여자와의 사이에서 여러 아이들(첫 아내 소피야 란스카야와의 사이에서 3남 6녀로 총 9명, 소피야와 사별한 후 재혼한 마리야 파블로바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로 3명)을 낳아 현재까지 그의 가계가 이어지고 있다.
3. 평가
러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이자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 한국에서 러시아 문학하면 떠올리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는 서유럽식도, 러시아식도 아니고 비슷한 작가가 다시 안 나오는 자기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다운 작가를 꼽으라면 푸시킨이 첫손에 꼽힌다. 실제로 러시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문인을 고르는 설문조사에서도 무조건 1위로 꼽힐 정도라고 한다.낭만주의 문학가였지만 동시에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당시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러시아 문학이 인지도를 얻게 된 것도 푸시킨의 공이라 할 수 있다. 서유럽에서 유행하던 자유주의와 러시아의 민족주의를 적절히 배합하여 러시아의 국민성과 혼을 문학으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듣는다. 이반 투르게네프는 러시아의 모든 작가들은 푸시킨이 개척한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등 후대 러시아 문학가들에게도 존경을 받았다.
과거를 불사르고 새롭고 진취적인 문화를 세우려는 전위예술가들이었던 미래주의자들과 마야콥스키는 선언문인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려라'에서 청산해야 할 과거의 유산들의 대표격 대상으로 푸시킨을 지목하기도 했지만 마야콥스키는 후에 자신의 입장을 바꿔 푸시킨을 옹호했다. 사실 푸시킨을 청산 대상으로 지목했다는 것 자체가 푸시킨이 러시아 문학계에 대단히 큰 의미를 지닌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애초에 청산하고 파괴해야하는 과거의 고전적 유산들로 등장한 사람들이 죄다 러시아 문학사에서 한가닥 하던 양반들이다.
4. 주요 작품
1999년 열린책들에서 고려대 석영중 교수와 손잡고 소설, 시, 희곡, 서사시 등등 푸시킨의 대표작들을 1권에 모은 전집이 발간했으나 지금은 절판되었고, 엄밀히 말해 전집도 아니다. 영어로 번역된 푸쉬킨 전집이 하드커버판으로 15권 분량인데 한역이 영역보다 분량이 늘어난다는걸 감안하면 이건 문학 선집이지 절대 전집일 수가 없다. 미완성 작품들이 모두 빠지고, 수백편의 서정시들도 거의 다 뺐다. 이 자칭 전집은 재간 계획도 없어 중고 시장에서 기본 10만원에 심하면 20만원에 육박하는 비싼 가격에 팔리고 있는데 전집도 아니고, 따로따로 출간된 그의 대표작들은 지금도 모두 손쉽게 구해볼 수 있으니 굳이 비싼 돈주고 살 필요가 없다.4.1. 소설
- 대위의 딸
- 벨킨 이야기
- 스페이드의 여왕
- 예브게니 오네긴
- 표트르 대제의 흑인(미완성)
- 고류히노 마을의 역사(미완성)
- 두브로프스키(1833)
- 푸가초프 반란사(1833)
- 이집트의 밤(1835)
4.2. 시
-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22]
- 시베리아에 보내는 시
- 자유의 찬가
- 청동기마상
- 루슬란과 류드밀라
- 카프카즈의 포로
- 집시들
- 악령 - 참고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악령에서 맨 처음을 장식한다. 일부가 나오는데 내용은 "악령이 마부와 마차를 탄 귀족을 저 먼 들판으로 끌고 간다"는 부분이다.
- 바흐치사라이의 분수
4.3. 희곡
- 보리스 고두노프(1825)
- 모차르트와 살리에리(1830)
- 인색한 기사(1830)
- 석상 손님(1830)
- 페스트속의 향연(1830)
4.4. 동화
5. 기타
|
1849년에 그려진 나탈리야 곤차로바의 초상화 |
나탈리야 곤차로바는 푸시킨이 죽은 후 군인 란스코이와 재혼해서 세명의 딸을 낳았다. 하지만 푸시킨이 워낙 인기가 많았기에 나탈리야는 더러운 년이라고 길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삿대질과 욕을 듣기 일쑤였다고 한다. 때문에 나탈리야는 평생을 괴로워하며 재혼 후 태어난 딸들까지 욕 먹을 것을 우려했고, 1861년 늘그막에 잘 가던 정교회 사제에게 자신은 죽어서 저 세상에서도 욕을 들을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실제로 나탈리야가 1863년 51세로 사망했을 때도 사람들이 그녀의 무덤에 돌을 던지며 욕했다고 한다. 한편 푸시킨의 딸들과 달리 란스코이의 딸들도 거리에 나서면 오만 욕을 들어서 셋 다 머나먼 시골이나 해외로 이주해 살았다고 한다.
곤차로바의 잘못을 굳이 찾자면 골 빈 백치미였다는 것 정도. 그녀에 대한 지인들의 평가는 한결같이 "천사같은 얼굴, 몸매 짱, 뇌 없음(...)"인데[23] 생각 없는 처신 등에다 다른 사정들이 겹치는 통에 남편을 죽게 만든 원흉으로 과한 욕을 뒤집어 썼다. 푸시킨의 안티팬(...)이었던 니콜라이 1세[24]도 엄한 여자를 방패로 써먹은 게 다소 찔리긴 했는지 연금이나 재혼 상대에 여러 모로 신경써줘서 손해본 것만은 아니겠지만, 재혼한 남편 란스코이도 결국 저런 미친 년에게 빠졌다는 비웃음을 들었으니 가장 불쌍한 사람들은 란스코이와 그 딸들일지도.
당테스는 프랑스로 추방되어 천수를 누리며 1895년 83세로 사망했다. 하지만,늘그막은 그리 좋지 못했는데 보나파르트 제정을 지지하여 나폴레옹 3세를 편들었기 때문. 그의 치세에서 국회의원을 역임했지만 그의 몰락 이후 상당수 보나파르트 지지자들이 반역자로 몰려 죽임을 당하거나 살인 공포에 시달려 정신이상을 일으켜 자살하거나 해외로 급히 달아나든지 온갖 비참하게 살던 것처럼 당테스도 많은 재산을 잃고 은거하여 가난 속에 25년이나 숨어 살아야 했다.
2007년에 <푸시킨: 마지막 결투> 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푸시킨의 죽음을 둘러싼 음모를 파헤치는 추리물인데 영화에서 곤차로바는 당테스와 바람을 핀 게 아니라 사실 푸시킨을 진심으로 사랑했으며, 계속되는 염문 때문에 고통받는 아내를 위해 푸시킨이 결투장에 나오는 것으로 나온다. 푸시킨과 당테스의 결투 내막에는 푸시킨을 싫어했던 황실과 당테스의 아버지로 대표되는 귀족들의 음모가 있다는 식으로 묘사된다.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거리에는 푸시킨과 곤차로바의 동상이 있는데 푸시킨이 살던 집도 여기에 있다.
1829년에 조지아에 머물렀는데 조지아의 풍광과 음식에 매료되어 극찬했다. 특히 조지아 요리에 대해서는 요리 하나하나가 시와 같다고 묘사했고 와인[25]도 칭찬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푸시킨은 조지아에서도 인기가 높은 시인이다. '그루지야( 조지아의 러시아식 명칭)의 언덕에서'라는 시를 남겼다.
푸시킨은 결투 직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단골 카페에서 레모네이드를 마시고 나갔는데 그 카페가 지금까지 남아있다. 그를 기려서인지 아니면 카페 주인이 푸시킨이 죽은 걸 안타까워해서인지 그가 죽은 이후에는 레모네이드는 팔지 않는다고 한다.
여담으로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질투해 죽였다는 음모론을 기정사실화시킨 인물이다. 그가 쓴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에서 살리에리를 모차르트 재능에 열폭한 노력가로 표현해 수백년 넘게 살리에리는 모차르트 죽인 인물일지 모른다는 혐의를 받게 만들었다. 그러나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관련항목을 보면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죽였다는 것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지만, 지금껏 살리에리는 그 이미지에 갇혀 있으니 그의 입장에서 푸시킨은 얻어 터져도 할말 없을지 모를 일.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한창인 2023년 1월, 자포리자주의 76번 직업 학교에 있던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흉상이 러시아 흔적 지우기의 일환으로 철거되었다.
[1]
한국어의 외국어 표기법에 의하면 푸시킨이 맞지만 노문 전공자, 특히 고연령 교수들은 푸쉬킨을 더 선호한다. 다만 2005년 이후 러시아어 표기법이 자리잡으면서 푸시킨의 사용 빈도가 늘어났다.
[2]
종교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3]
일제강점기에 처음 번역된 후 한국의 근현대사와 맞물려 크게 유명해진 시. 정작 러시아에서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다고 한다. 저 부분은 오히려 대단한
초월번역이다. 2011년 러시아어 I 교과서(광주교육청검정)에도 실려 있다.
[4]
'한니발'에서 유래된 이름 맞다. 러시아어에는 /x/는 있어도 /h/는 없고 전통적으로 /h/ 발음을 /g/에 해당하는 Г로 인식해 왔기 때문에 '한니발'이 '간니발'이 되었다. 비슷한 이유로 히틀러는 '기틀러', 헤르만은 '게르만'이 되며 하인리히는 겐리흐가 된다. 다만 현대에는 Х와 Г가 혼동되어 사용되는데 똑같은 /h/도 하노이는 Х고 헤라트(아프가니스탄의 도시)는 Г를 쓴다. 그래도 해리포터는 가리 뽀떼르다.
[5]
부칭이 페트로비치인데 러시아 이름에서 '-비치(vich)'는 '~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이름을 해석하면 '표트르의 아들인 간니발 가의 아브람'이라는 뜻이다. 정교도가 아닌 외국인이 개종하며 러시아에 귀화해 러시아식 이름을 지을 때 부칭은 보통 러시아 정교 세례식에서 대부를 선 사람의 이름을 따른다. 그러므로 부칭이 페트로비치가 된 이유는 표트르가 대부를 섰기 때문이다. 물론 대부를 서 줄 정도로 총애하였음은 마찬가지.
[6]
정확히는 1731년에 결혼한 첫 아내인 그리스 출신 에브도키아 디오페르(Evdokia Dioper)와 1753년까지 법적으로 이혼하지 않은 상태였던지라 엄밀히 말하면
중혼이었다.(이로 인해 참회와 고행을 해야 했다.) 이 첫 아내는 강제로 결혼한 남편을 혐오해 둘은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간니발은 에브도키아가 결혼 초부터 외도를 하고 있단 자신의 의심이 그녀가 백인 딸을 낳으면서 사실로 확인되었다고 생각해 그녀를 결국 고발했다. 에브도키아는 11년 동안 감옥에서 지내다가 나중에는 수도원에서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
[7]
이것은 일종의 상징으로서 '시인 서품식'이라고 표현된다. 당대 거장인 노(老)시인이 어린 시인에게로, 고전주의가 낭만주의에게로 넘어간다는 표상이다.
[8]
오늘날의 푸시킨시.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에 있으며 푸시킨을 기념하여 이름을 푸시킨으로 바꿨으며 푸시킨이 있었던 리체이가 이곳에 아직까지 남아 있어 관광객들로 북적거린다. 러시아 황실의 궁전인
예카테리나 궁전도 이곳에 있다.
[9]
말이 전근이지 사실상 유배. 그래도
오데사의 사교계를 계속 들락날락거리며 오데사의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10]
니콜라이 1세가 푸시킨의 작품들을 직접 검열했다.
[11]
이렇게 만든 시들을 시집으로 묶어 발표했는데 두 달 만에 모두 품절되었다.
[12]
푸가초프의 난을 배경으로 한 소설.
[13]
나중에 막내딸 나탈리야의 손주들이 왕가의 후손과 결혼하게 된다.
[14]
레프 톨스토이의 하지무라드에서도 가면 무도회에서 만난 미녀와 불륜 관계를 맺으러 으슥한 궁전의 방으로 둘이서 같이 들어가는 니콜라이 1세의 모습이 나온다. 그런데 거기에 이미 남녀가 밀애를 나누고 있었고 먼저 들어와 재미보고 있던 장교는 황제를 보고 혼비백산한다.
[15]
평생 결투 신청을 한 것이 20번이 넘고 최초로 결투 신청을 했던건 17살 때였다. 무엇보다 전형적인 문과 기질로 말빨은 화려했지만 총 다루는 실력은 영 별로였다고.
[16]
당테스가 자신에게 오지 않는다면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곤차로바에게 말해서 푸시킨이 더욱 분노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17]
그래도 유족들에게 연금을 주며 잘 보살펴 주긴 했다.
[18]
나탈리야의 친정인 푸시킨 가문은 수백년 된 명문가였지만 러시아에서 남작보다 아래로 취급되는 dvoryanin 출신이다.
[19]
결국 룩셈부르크 대공위는 기욤 4세의 딸들인
마리아델라이드와
샤를로트에게 갔다.
[20]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과
바덴의 체칠리에의 아들이다.
[21]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와
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 공자의 장남인
2대 밀포든 헤이븐 후작 조지 마운트배튼의 아내 나데이나 미하일로브나 데 토르비가 미하일 대공과 조피의 차녀다.
[22]
2024년 기준,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수록되었다.
[23]
결혼할 때부터 남편보다 키까지 월등히 커서 미화 없는 스케치 판화 같은 그림에서 나란히 서있는 모습은 진정한 미녀와 야수.
[24]
실제로 뼛속까지
군바리 체질이라 문학 같은 건 취급도 안 했지만 푸시킨 작품만은 신간이 나오기만 하면 꼬투리 잡겠다고 눈에 쌍심지를 켜서 꼼꼼히 읽었다고.
[25]
한국에서는 별 인지도가 없지만 조지아산 포도주는 동유럽에서 매우 유명하다. 다만 가짜도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