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2 20:45:23

중세/과학 기술

1. 개요2. 민간 기술
2.1. 농업2.2. 건축 및 토목2.3. 예술2.4. 시계2.5. 기계 공학2.6. 제철2.7. 수차2.8. 항해2.9. 인쇄·용지 및 문서2.10. 과학 및 학술 지식2.11. 의복2.12. 기타
3. 군사 기술
3.1. 갑옷3.2. 방패3.3. 냉병기
3.3.1. 도검류3.3.2. 폴암3.3.3. 타격무기3.3.4. 기병3.3.5. 투석기3.3.6. 투사 무기
3.4. 화약 무기3.5. 방어 시설3.6. 군사 제도

1. 개요

중세에 들어서면서 유럽은 다른 문명권보다 빠르게 각종 기술들을 재발견하거나 발명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중세 유럽의 기술 발전은 대개 6세기를 기준으로 향상되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기계론적 세계관의 맹아가 싹틀기 시작했다. # 기술은 보통 민간 기술과 군사 기술로 나눠져 발전했다.

아래의 내용의 상당 부분은 영문 위키피디아의 《 medieval technology》에서 기반한다.

중세 과학 기술에 대한 내용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제도와 같은 무형의 것도 다루고 있다.

2. 민간 기술

2.1. 농업

  • 쟁기의 발전(6세기에서 9세기)
    6세기까지 사용된 유럽의 쟁기는 아드(Ard)라고 불리는 원시적인 쟁기로 목재로만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았기에 단순하면서도 가벼운 편으로 대체로 땅이 무른 남유럽 일대에서 많이 애용되었다. 하지만 땅이 척박한 북유럽에선 사용하기가 불편했다. 하지만 6세기 이후 카루카(Carruca)라 불리는 새로운 쟁기가 등장했다.
카루카는 기존의 아드보다 무거웠지만 대신 무거운 무게와 함께 땅을 갈게 만드는 철로 만든 수평 날이 추가되었으며, 덴마크의 카루카의 경우 바퀴가 달려 있었다. 그래서 북유럽의 척박한 땅을 갈기에 적합했고, 무엇보다 이랑과 고량을 낼 수 있어 배수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공기가 통할 수 있어 한시적으로 기름진 옥토로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무거운 무게로 인해 방향 전환이 힘들다는 단점이 있어 이때를 기점으로 유럽의 농토는 정사작형에서 직사각형의 농지로 바뀌게 된다.
  • 마구의 발달(6세기에서 9세기)
    항목에서 참고
  • 편자(9세기)
    편자 항목 참고
  • 와인 압축기(Winepress)(12세기)
    이미지
    와인 압축기는 고대에 지중해 연안과 포도 생산지에서 이미 만들어진 기계이나 12세기 당시 와인 주조권을 갖고 있던 프랑스와 독일 등지의 수도원 등에서 와인을 더 빨리 생산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와인 압축기는 급속이나 오크나무로 만든 통에 포도를 넣고 그 다음 수동으로 움직이는 수직으로 압축하는 기계로 포도즙을 짜냈다.
하지만 와인 압축기는 개인이 만들어 사용하기엔 너무 비쌌으며 무엇보다 당시엔 포도씨를 빼지 않고 그대로 넣는 경우가 많아 발로 으깬 것과 달리 포도씨까지 으껴버렸기에 압축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보다 맛이 써 웬만하면 그냥 발로 으껴서 짜낸 포도즙을 선호했다.

2.2. 건축 및 토목

  • 펜덴티브 구조(pendentive)(6세기)
    삼각형 모양의 구조체로 삼각궁륭으로도 불린다. 본래 3세기 전에 실험적으로 만들어졌으나 하기아 소피아의 돔을 지탱하기 위한 목적으로 도입되면서 비잔틴 건축과 이후 그 정수를 이어받은 오스만 건축 양식의 주요 특징이 된다.
  • 지하수 우물(Artesian well)(1126년)
    자분대수층을 시추한 일종의 우물로 대수층이 있을만한 자리에 속이 빈 철 막대를 박아 물을 시추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지며 수도자들에 의해 최초로 이방식으로 시추된 마을의 이름인 아르투아에서 이름을 따와 아르테시안 웰로 부르게 되었다.
  • 바닥 채널을 통한 중앙 난방(Central heating through underfloor channels)(9세기경)
    중세 초 알프스 고산지대에서 만들어진 난방 시스템으로 열이 용광로에서 바닥 아래 채널을 통해 이동하는 더 간단한 중앙 난방 시스템이 일부 지역에서 로마의 하이포코스트를 대체했다. 라이헤나우 수도원(Reichenau Abbey)에서는 상호 연결된 바닥 채널 네트워크가 겨울 동안 300 제곱미터 규모의 대형 홀을 가열해 수도자들을 추위에서 지켜줬고, 그 효율은 90%로 계산되었다. 16세기경부터 독일과 덴마크, 노르웨이에서 bilegger라 불리는 벽난로를 응용한 난방 방식이 등장했는데, 자세한 내용은 온돌 항목을 참고
  • 리브 볼트(ribe vualt)(12세기)
    궁륭에 늑골 역할의 구조물을 덧덴 것으로 교차형 등의 다양한 구조 등이 있다. 자세한 것은 고딕 건축 양식이나 볼트를 참고
  • 첨두 아치(pointed arch)(12세기)
    리브볼트와 함께 고딕 양식의 특징 중 하나인 건축 구조 중 하나로 자세한 것은 아치를 참고
  • 굴뚝(12세기)
    최초의 굴뚝은 820년 스위스의 수도원에서 나타났으나 제대로 된 굴뚝은 벽난로와 함께 등장했다.
  • 분절형 아치교(segmental arch bridge)(1345년)
    분절형 아치교는 훙수가 났을 때 교각이 침수되어 물살에 침식·훼손되는 것을 줄이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고대 로마시대때 현재의 터키 남부에 위치한 리미라에 분절형 아치교가 있으나 중세 유럽의 최초로 지어진 분절형 아치교는 피렌체의 폰테 베키오로 보고 있다.
  • 크레인(crane)(11세기 중엽)
    크레인은 고대 중동 지방에서 발명된 건축 기계로 이후 남유럽으로 전파되어 고대 그리스와 로마시대때 높은 위치에서 무거운 건축 자채들을 옮기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크레인은 단순한 목재로 만들어졌으면 사람의 힘으로 밧줄이 연결된 도르래로 가동되었다.
특히 로마 시대에는 크레인을 움직이기 위해선 라틴어로 마그나 로타(magna rota)라는 트레이드휠 크레인이 개발되었다. 로마의 신형 크레인은 옆으로 거대한 쳇바퀴를 외륜 내지는 한쌍 달아 놓고, 그 안에 사람이 들어가서 굴리는 형식으로 가동되었다.
크레인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서유럽에서 잠시 명맥이 끊기지만 12세기경 다시 서유럽에서 상·공업의 부흥과 함께 거대 건축물인 고딕 건축 양식이 등장하면서 대형 성당과 성 등을 건축하기 위해 다시 도입되었으며, 이밖에도 항구에서 화물의 적채와 하역을 위해 대형 크레인을 하나 정도 설치했다. 그단스크의 항구 크레인
이후 1420년 피렌체에서 그동안 미완이었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을 짓기 위해 필리포 브르넬레스키에 위해 기존의 크레인보다 더 높은 높이로 건축 자재를 운반하기 위해 카스텔로라는 황소 한마리로 움직이는 신형 크레인이 만들어졌다.
  • 수레(wheel barrow)(1170년대)
    수레는 고대부터 존재했으나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사용된 수레가 어떠한 형태의 수레였는지는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중세시대에 쓰인 수레는 대체로 외륜 수레가 많았다. 외륜 수레는 2륜 수레에 비해 안정적이지는 못하지만 평평하지 못한 지형에서 하중 균형이 벗어날때 기동성이 높으며, 하중의 중착을 더 잘 제어할 수 있었다.
  • 이중 돔(1420년대)
    1296년 착공 이후로 미완이었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을 완성하기 위해 돔 건설의 설계자로 당첨된 필리포 브르넬레스키에 의해 발명된 건축 구조로 자세한 내용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을 참고할 것.

2.3. 예술

  • 유성 물감(oil paint)(1125년)
    유성 물감은 식물성 기름으로 만든 물감으로 이 역시 고대부터 사용되었으나 만드는 기록만 있을 뿐 안정성과 가성비 문제로 인해 실용화되지 못했으며, 1125년 수도자들에 의해 성화나 목조 조각상에 칠할 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해 1410년 플랑도르의 화가였던 얀 반 아이크에 의해 안정성이 높은 오일 혼합물이 만들어졌다.

2.4. 시계

  • 모래시계(9세기에서 1338년)
    모래시계는 고대 중동과 이집트에 존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실증하는 유물이 전무하며 현존하는 유물은 전부 중세 유럽의 것들로 9세기 프랑스 샤르트르 대성당의 사제인 라우트프랑이 만들았다는 설이 있고, 1338년 시에나 출신의 화가 형제인 로젠체티 형제가 시에나 시청사에 그린 벽화 중 하나인 좋은 정부에서 모래시계를 든 여인에서 찾을 수 있다. 모래시계는 상하 전환에 따라 떨어지는 모래 알갱이로 통해 시간을 측정해 현재의 시계와 달리 정확한 시간을 측정할 수 없으나 기계식 시계와는 달리 오차가 없기 때문에 많이 해시계와 물시계와 함께 애용되었다.
  • 기계식 시계(13세기에서 14세기)
    기계식 시계는 멀리 잡으면 13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이후 유럽 각지로 전파되었다. 하지만 기계식 시계는 기존의 시계들에 비해 분이란 개념이 있었지만 당시의 기술력 부족으로 인해 현대의 시계와 비교해도 오차가 심한 편이었고, 다른 시계에 비해 개인이 갖고 다니기가 불편할 정도로 컸기에 주로 시계탑을 만들어 정상부에다가 설치해 공공용으로 사용했다.
기계식 시계는 개인이 사용하기에 크기가 크며 30분 가량 오차가 있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그 당시 유럽인들 사이에서 기계적 세계관이 싹트는 것과 함께 다른 시계에 없던 분의 개념을 갖고 있는 점 때문에 상인들 사이에서 선호되었다. 이밖에도 도시에 대한 자부심, 실용적 기계에 대한 관심이 결합되어 높은 비용에도 불구하고 전 유럽적으로 애용되기 시작했고,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1510년경 독일에서 개인용 시계가 발명된 이후 단점들을 개선해갔다.

2.5. 기계 공학

  • 크랭크
    크랭크 또한 고대 크리스 로마부터 수차를 가동시키기 위한 부품으로 사용되었으며,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한동안 잊혀지다가 9세기경 문헌상으로 각종 설계안에서 언급되기 시작하면서 다시 서유럽 일대에서 상용화하기 시작했다.크랭크의 사용 범위는 수차를 가동시키기 위한 부품뿐만 아니라 강철 활체로 바꿔진 석궁을 장전하기 위한 용도로도 활용되었다.
  • 스프링(15세기)
    스프링은 탄력성의 법픽을 이용한 구조체로 선사시대 때부터 탄력을 이용한 무기나 물품 등이 만들어졌으며, 15세기 자물쇠의 부품으로 사용될 목적으로 코일 스프링이 만들어진다. 자세한 것은 판타지를 여행하는 현대인에서 참고할 것.

2.6. 제철

중세 유럽의 제철 기술은 시대별로 초기와 중기, 후기로 구분된다. 전기는 줄로 풀무를 이용한 화로에서 철을 생산했으나 생산량은 1~15kg 밖에 생산되지 못했으며 탄소 함유량도 낮은 연철로 나왔기에 따로 목탄불에 달구면서 표면침탄시키고 따로 가열해야 했으며, 주로 접쇠법의 일종인 패턴웰딩 방식으로 강철 제품을 생산해야 했다.
중기에 들어서 수차와 연결된 풀무로 통해 공기를 불어 넣는 강제과급하는 방식과 최대 300kg급까지 키운 발전된 괴철로로 연철을 샌산하여 패턴웰딩 과정을 거친 후 다시 수차와 연결된 대형 망치로 두들겨 강철화 시켰고, 이때의 철 생산량은 전기에 비해 수백kg이나 증가하게 되었다.
중세 후기인 1350년대로 들어서자 용광로와 함께 철을 용해시키는 제강법이 등장하면서 강철의 생산이 증가하게 되었고, 15세기에 총생산량이 6만톤을 넘게 되었고, 이 때를 기점으로 물레방아에 연결된 풀무와 페턴 웨딩이 사라진다. 다만 자력으로 초강법을 얻는 것은 실패해 18세기 영국이 식민통치를 하던 인도에서 초강법을 획득한 후 유럽 전역으로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2.7. 수차

수차는 상기한 대로 고대부터 만들어졌다. 하지만 중세 시대로 들어서면서 일반에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그리스도교 전파와 장원제와 봉건제의 등장으로 인해 노예의 비율이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유럽인들은 기존의 노동력을 기계로 대체하려고 하기 시작했다.[1] 이에 대한 대안이 바로 수차와 풍차였다.

수차와 풍차는 6세기경 아일랜드에서 위에서 물을 붓는 방식으로 가동되는 상괘식이 등장한 것 외엔 초기에 단순히 곡식의 도성과 물을 빼내거나 붓는 용도로만 사용되었으나 9세기부터 프랑스에서 축용을 위한 용도의 수차가 개발됨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 선박형 수차(Ship Mill)
    이미지1 이미지2
    제1차 로마시 공성전에서 동로마군의 포위로 인해 고트족들이 로마시 주변의 수차들을 파괴하면 밀가루를 현지에서 조달하려는 동로마군 입장에서 난황을 겪게 되자 당시 동로마군의 지휘관이었던 벨리사리우스가 고안한 수차였다고 한다.
공성전이 끝난 후 선박형 수차는 서유럽으로 전파되었고, 동로마 제국의 주적이었던 이슬람 제국 또한 선박형 물레방아를 사용했다. 이미지를 보면 알지만 수차를 강가 위에 띄우는 형식도 있으나 그냥 두 척 이상의 나룻배에 물레방아를 설치하는 경우도 있다.
  • 조석 수차(Tidal Mill)(6세기)
    이미지 영문주의
    통상의 수차와 달리 조수 간만의 차를 이용한 수차로 해안가에 지어졌다고 생각되지만 석호에 뚝을 만들거나 내륙에 저수기를 축조한 후 저수지 옆에 만들어졌으며, 고대 로마 때부터 만들어진 수차지만 이 역시 보편화된 때가 중세였다.
  • 상괘식 수차(Overshot Watermill)(6세기)
    아일랜드에서 만들어진 수차로 유속이 느린 하천에서 제 성능을 내기 어려운 기존의 하괘식 방식의 수차의 단점을 해결하기 위해 위에서 물을 붓는 방식으로 가동되었다.
  • 맥아 수차(Malt Mill)(6세기)
    맥아를 삗기 위한 수차로 770년대 프랑스에서 만들어졌다.

이하 수차들은 곡식을 도정하기 위한 수차들이었으나 정작 농민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했다. 이는 당시 영주들이 물레방아의 경영자들과 계약을 맺으면서 이들을 세리로 삼아 사실상 장원 내의 농노들에게 강제적으로 물레방아를 이용하게 만들어 도정한 곡식의 일정부분을 물레방아 업자에게 주게끔 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농노들도 물레방아를 이용하는 것보다는 몰래 맷돌을 사용해 곡식을 도정했고, 영주는 영주들 대로 맷돌을 압수하려고 했다.
  • 축융 수차(Fulling Mill)(1080년대)
    이미지1 이미지2
    모직물의 축융[2] 작업을 위한 수차, 프랑스에서 만들어졌다.
  • 무두질용 물레방아(Tanning Mill)(1134년)

    가죽의 무두질 작업을 하기 위한 수차로 역시 프랑스에서 만들어졌다.
  • 대장간용 수차(Forge Mill)(1200년대)

    이미지1 이미지2
    말 그대로 대장간의 제철 작업을 위해 만들어진 수차로 철의 단조를 위한 망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 연삭용 수차(Tol-Sharppening Mill)(1203)

    영문 주의
    대장간용 수차의 일종으로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수력으로 가동되는 그라인더가 설치되어 있었다.물론 수력으로 가동된 방식 발고도 크랭크를 돌리는 형식으로 가동하는 방식이나 패달로 가동하는 방식이 있었다.
  • 대마용 수차(Hamp Mill)(1209년)
    삼의 박피 과정에 사용된 수차로 프랑스에서 만들어졌다.
  • 풀무용 수차(Bellows Mill)(13세기 중·후반)
    이미지1 이미지2
    풀무용 물레방아는 물레방아에 초대형 풀무를 연결해 수력으로 풀무를 가동시켜 괴철로에 공기를 주입시켰다. 1269년, 1283년 각각 슬로바키아와 프랑스에서 만들어졌다.
  • 제지용 수차(Paper Mill)(12세기)

    수력으로 종이를 제작하기 위한 수차로 12세기 전후 스페인을 대부분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무어계 이슬람 시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 종이는 원산지인 중국과 달리 면섬유지로 야마포, 넝마와 같은 헝겊으로 만들어졌기에 인력이 아닌 수차와 연결된 압축기를 이용해 제작되었다.
이후 1189년 프랑스로 전파된 것을 시작으로 1276년 이탈리아, 1336년 독일의 마인츠, 1498년 영국에 수력에 가동되는 제지공장이 들어서는 등 다른 그리스도교 국가들도 제지용 수차를 만들어 종이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제지용 수차 덕에 유럽은 타문명권과 달리 그나마 상대적으로 종이를 저렴하게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3]
  • 제재소용 수차(Sawmill)(14세기)

    수력으로 목재를 단순 가공하는 목적의 수차로 이미 고대 로마시대부터 수력으로 가동되는 재제소가 있었지만 서로마 제국의 멸망 후 잊혀진 기술이 되다가 다시 이슬람 세력과의 교류 등으로 다시 유럽에 소개되었다.
  • 광물 파쇄용 수차(Ore-Crushing Mill))(1317년)
    이미지
    수력으로 가동되는 물망치로 이용해 철광석 등의 금속 원석들을 파쇄하기 위한 수차로 독일에서 만들어졌다.
  • 용광로용 수차(Blast Furnance Mill)(1384년)
    기존의 괴찰로를 대체한 대형 용광로에 위에 언급한 수차와 연결된 대형 풀무를 설치해 보다 더 많은 철을 생산하는 방식으로 프랑스에서 만들어졌으며, 백년 전쟁이 종결된 이후인 15세기 중반부터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이밖에도 수차는 다리를 세울 때도 사용되었다. 교각을 착공하기 전 우선적으로 교각의 틀을 만들기 위해 하천의 높이 보다 더 긴 여러 개의 나무 말뚝을 교각의 형태에 맞게 박은 다음 그 옆으로 수차를 가설해 틀 안에 고여있던 물을 빼는 역할을 했다.
  • 풍차(11세기)
    7세기경 페르시아에서 만들어져 이후 10세기경 이슬람 세력에 의해 이베리아 반도로 통해 유럽 각지로 전파되었다.자세한 내용은 풍차 항목을 참고할 것.

2.8. 항해

  • 나침반
    유럽의 나침반은 언제 어느 경로로 전해졌는지 불분명하다. 대체로 12세기 경으로 보고 있지만 11세기경에 바이킹들이 천연자석을 이용한 표자석 형태의 방향지시기를 사용한 기록도 있어 확실치 않다. 다만 12세기에 프랑스의 천문학자였던 피에르 드 마리쿠스에 의해 천체를 관측하여 방향을 판독하는 천측나침반이 발명되었고, 14세기에 지중해 일대에 건식 나침반이 발명되었다.
  • 선미 방향키(rudder)(12세기)
    고대부터 12세기 이전까지 동서 막론하고 방향키는 단순한 노에 지나지 않앗다. 하지만 12세기 발트해 일대에서 오늘날의 것과 유사한 외형의 핀틀(pintle)과 거드전(gudgeon)을 통해 배의 선미에 부착된 방향키가 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조타륜이 없었기에 여전히 맨손으로 방향을 제어해야 했다.

2.9. 인쇄·용지 및 문서

  • 종이(12세기)
    종이는 이슬람 세력의 지배하에 있던 이베리아 반도를 통해 유럽으로 유입이 되었다. 하지만 원산지였던 중국과는 달리 유럽의 종이는 주재료가 아마포, 넝마 등의 헝겊으로 만들어진 면섬유지이기에, 동양처럼 수제가 아닌 수차에서 나오는 수력을 이용한 압축기가 있던 제지소에서 만들어졌다, 다만 헝겊이 아닌 일반적인 식물성 재료로 만든 종이로 대마로 만든 대마지가 있었다.
  • 안경(1280년)
    고대에 안경을 대신해 시력보조 기구로 석영과 녹주석을 가공한 독서석(reading ston)을 이용했으나 1280년 현재의 중부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일대에서 최초로 안경을 발명되었다. 하지만 이 당시의 안경은 블록랜즈로 된 것으로 오목앤즈는 중세가 끝나는 15세기까지 발명되지 못했다. 자세한 것은 안경 항목을 참고.
  • 인장반지(sealring)(5세기)
    인장반지는 서로마 제국이 붕괴된 이후에도 동로마 제국에서 계속 사용되었으며, 이후 중세 중기부터 다시 유럽 전역에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동양의 도장과 달리 반지 형태이며, 인주로 찍는 방식이 아닌 밀랍을 녹인 후 그 위에 찍어 누르는 형식이었고, 주로 문서 밑단이 아닌 별도로 약간 굵은 실을 부착한 상태로 문서를 두루마리처럼 돌돌말거나 접는 등의 방식으로 밀봉한 후 인감을 찍는 방식으로 마무리 했다. 그밖에도 금인칙서라 하여 별도로 중요한 문서 등에 밀랍 대신 황금을 사용했다. 자세한 내용은 도장, 반지, 어부의 반지 항목을 참고.
  • 회전 책갈피(Rotating bookmark)(13세기)
    말그대 회전하는 책갈피로 책의 페이지의 열 등의 정확한 부분을 찾기 위한 회전식의 문자열로 된 것이 특징으로 가죽 및 종이로 만들어졌다.
  • 워터마크(1282년)
    이탈리아 중부에 위치한 페브리아노에서 방명된 기법인 필리그라나(Filigrana)에서 유래되었다. 필리그라나는 완성된 직후의 종이 뒷면에 양각 문양을 찍어서 만들어냈으며, 공문서의 위조를 막는데 활용되었다.
  • 깃털펜(6세기)
    6세기경 고대부터 사용했던 갈대펜의 대용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자세한 내용은 깃털펜 항목을 참고할 것.
  • 제본 방법의 진보
    고대까지만 하더라도 유럽을 비롯한 서양의 제본 방식은 동양과 별반 차이가 없는 두루마리 형태였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동양은 세로쓰기의 표기법이 주류였던 반면 서양의 경우 가로쓰기와 같은 표기법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다가 기원후 2세기 현대적인 네모난 책인 코덱스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때를 기점으로 현대 이전까지 동양과 유럽의 제본 방식이 상당한 차이점을 보이기 시작하는데, 동양의 경우 제본의 마무리 과정 중 하나로 표지를 종이로 하는 반면 유럽의 경우 가죽으로 하는 것이 특징이다. 동양식 전통 제본 유럽의 전통식 제본
7세기까지의 제본 과정 중 바인딩 방식은 고리 형태의 캅틱 바인딩으로 4세기부터 14세기까지 애용한 방법으로 이후 9세기부터 책 가장자리에 한줄의 고리 엮음 방식이 등장했고, 보드를 가공한 표지가 추가된다.

2.10. 과학 및 학술 지식

  • 임페투스 가설
    임페투스 가설은 고대 그리스부터 존재했던 철학에 가까웠던 자연물리학의 이론으로 서로마 제국이 붕괴된 후 잊혀졌지만 그나마 붕괴를 면한 동로마 제국과 그리고 동로마 제국과의 교류한 중동에임페투스 가설을 연구한 학자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11세기 이슬람 학자였던 이븐 시나 역시 임페투스 가설을 연구하면서 임페투스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임페투스 가설은 이후 서유럽으로 소개되어 14세기 프랑스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였던 장 뷔리당에 의해 한층 체계적으로 연구되었다.
  • 자성에 대한 최초의 논문(13세기)
    자성에 대한 최초의 논문을 쓴 사람은 프랑스의 자연물리학자였던 페트루스 페레그리누스 드 마리코트로 고대부터 연구되던 전자기 연구에 보더 더 확충시켰으며, 건식 나침반이 발명될 계기가 되었다.
  • 아라비아 숫자(10세기 말, 13세기)
    980년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이었던 실베스테르 2세가 먼저 소개했다고 하는데 문제는 그가 정치적으로 프랑스인이었지만 프랑스 국왕 위그 카페와의 알력으로 인해 프랑스를 떠나 신성 로마 황제이자 독일 왕이었던 오토 2세의 밑에서 오토 3세의 가정교사였던 이력으로 오토 3세에 의해 교황으로 선출된 배경과 함께 평소 이슬람을 통해 들여온 과학 지식 및 기술에 매료된 것을 못마땅한 반대파들에 의해 거의 잊혀졌다. 단 이때 실베스테르 2세는 0을 뺀 나머지 숫자들만 알려줬다고 한다. 관련 링크 이후 12세기 피사 출신의 수학자였던 레오나르도 피보나치에 의해 다시 0을 포함한 아라비아 숫자가 다시 유럽에 소개되었다.
  • 대학교 학위제도(11세기 중후반)
    대학교는 1080년 볼로냐 대학교가 개교된 이후 점진적으로 유럽 각지에서 개교되기 시작했고, 학위 제도 또한 박사 학위가 1150년 중세 파리 대학에서 수여된 것이 그 시작이었고 관련 링크, 석사의 경우 1233년 반포된 교황 칙서에서 툴루즈 대학의 석사 학위에 입학 한 사람은 다른 대학에서 자유롭게 가르 칠 수 있어야한다고 선언한 것을 볼 때 1230년대 전후로 보이며 학사의 경우 12세기 전반 아직 어리거나 가난해 봉신들이 없었던 최하위 훈작사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점차 파리와 볼로냐에서 대학에서 신입생들의 학업을 감독하는 직분맡은 이를 부르는 말로 의미가 바뀌는 것에서 시작되어 문서화되다가 1250년에서 1275년 사이에 길드와 대학의 하급자를 뜻하는 말로 고정된 제도적 용어가 되었다. 관련 링크
  • 졸업식(12세기)
    졸업식의 개념은 12세기 유럽 최초의 대학인 볼로냐 대학교에서 기원되었고, 졸업식의 전형적인 복장인 가운과 후드 등은 중세 대학 직원의 일상복을 어레인지한 복식이며, 이것은 중세 성직자의 복장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2.11. 의복

  • 단추(13세기)
    단추 또한 고대부터 있던 물건이었으나 이때까지의 단추는 옷을 여미기 의한 것이 아닌 일종의 장신구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옷을 여미기 의한 용도의 진정한 단추는 13세기 중엽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19세기까지 단추는 금·은·보석과 같은 값비싼 재료들이나 공정을 통해 만들어졌기에 상당히 비싼 사치품에 속해 있어 평민들에게 금지되어 있었으며, 그나마 16세기경 부터 군복에 뼈로 만든 단추가 달린 상의가 나오게 되지만 전체 계층에 가리지 않고, 사용하기까지는 18세기 중엽 독일의 웨스퍼가 개발한 금속 단추 제조 기술과 19세기 산업 혁명 이후의 대량 생산을 기다려야 했다.
  • 직조기(11세기)
    유럽의 베틀은 전통적으로 신석기 시대때 중부 유럽에서 만들어진 수직형 배틀(warp-weighted loom)이었다. 이후 중동을 거쳐 drawloom이 들어왔고, 이후 태피스트리가 성행함에 따라 기존의 베틀보다 더 개량된 배틀(haute-lisse loom)과 하네스를 조절하는 발판형 페달이 달려 있는 직조기(basse-lisse loomm)가 만들어졌다.
  • 비단(6세기)
    비단이 유럽에 알려진 것은 기워전 1세기 당시의 로마 공화정때였으나 이 당시 한나라에 의해 비단을 만들 주재료인 누에나방이 해외로 유출하는 것은 금지되었기에 중국이 비단 공급을 독점하고 있었다. 누에나방이 해외로 유출되어 유럽 최초로 비단이 생산된 곳은 동로마 제국이었다. 이후 11세기에서 12세기 경 이탈리아에 전파되어 제노바 공화국, 피렌체 공화국, 베네치아 공화국, 루카 공화국이 비단 생산지가 되었다.
이후 15세기경 스페인과 프랑스에도 누에나방과 제조법이 전파되어 스페인에선 발렌시아 그라나다 지방, 프랑스에서 리옹이 비단을 생산하는 곳으로 변모했다. 참고로 비단을 제조하는데 수차가 사용되었다.
  • 물레(13세기 이후)
    물레는 인도에서 중동을 거쳐 유럽으로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2.12. 기타

  • 체스(1450년에서 1475년 사이)
    체스가 언제 유럽으로 전래가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대체로 체스의 원형이 되는 샤트란지가 유럽으로 들어온 때가 12세기 경으로 동로마 제국을 거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다만 현대의 체스의 기초는 15세기 말의 스페인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 유리
    유리는 기원전 15세기의 고대 이집트부터 시작되어 로마시대때까지 생산되었다. 당시 유리는 고대 이집트는 불에 탄 식물의 재와 석영, 로마는 나트론과 모래를 통해 만들었다. 이후 서로마 제국이 붕괴된 후 유리를 생산하는데 원자재의 공급이 줄어든 것과 제조 기술의 쇠퇴로 이어져 수백년 동안 서유럽은 유리 제품을 재활용만 해야 했다.
그러다가 11세기 초 중부 유럽에서 자체적으로 포레스트 글라스(forest glass)라는 새로운 유리를 만들어냈다. 새로운 유리는 제조시설이 숲에 위치하고 있었고, 주 재료가 탄 나무재와 모래/석영으로 만들어졌다.
  • 스테인드 글라스(10세기 이전)
    스테인드 글라스는 고대부터 발명된 것으로 이집트와 로마에서도 생산이 되었고, 기원후 1세기를 기준으로 교회 건축의 장식으로 수용되었다. 이후 그리스도교가 가톨릭과 정교회로 분열이 된 후 가톨릭아 국교였던 이베리아, 이탈리아 반도 일대, 및 서·북·중부 유럽 일대의 교회에서 사용되었으며, 11세기가 되면서 고딕 양식의 건축이 등장하면서 고딕 양식의 성당에 많이 사용된다.
  • 원형 숫돌(Grinder ston)(834년)
    원형 숫돌은 9세기 초반 네덜란드 일대에서 발명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1203년 수차를 이용한 수동식이 등장하다가 1340년 두개의 크랭크로 움직이는 방식이 등장하게 되고, 다시 1480년 페달이 추가되는 형식으로 성능이 개선되었다.
  • 증류주(12세기)
    증류 방식은 고대부터 지중해와 중동에 걸쳐 있었으며, 서로마 제국이 붕괴된 이후 증류 방식에 대해 실전되었다가 십자군 전쟁 당시 유럽으로 귀환한 십자군들이 증류기(Retore)를 갖고 들어오면서 술의 증류 작업이 추가되면서 위스키 보드카와 같은 도수가 높은 술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 자석(12세기)
    자성을 띄는 돌을 발견한 고대부터 동서양의 학자들 모두가 자성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다. 중세 유럽에선 나침반이 들여온 이후 나침반의 바늘로 만들어서 사용했으나 한편으로 자석 가루가 처녀성을 감별하는 효능이 있다는 미신도 있었다.
  • 유리 거울
    유리 거울은 1세기 당시 고대 로마 시대 때 만들어졌으나 중세시대에는 1180년 영국의 신학자였던 알렉산더 넥컴에 의해 언급되었다. 다만 현대의 유리 거울에 근접한 제작 기법은 15세기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발명되어 2세기 가까이 제작 비법을 독점해 왔다.
  • 해부도(1345년)
    중세 최초의 해부도는 이탈리아의 의학자인 귀도 드 비게르노에 의해 만들어졌다. 실제 해부를 바탕으로 그린 것인지 사람의 내장 또한 어느 정도 상세하게 그러져 있다.
  • 검역(1377년)
    검역의 개념은 고대서부터 있어왔으나 중세 최초의 검역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식민지였던 라구사의 중심 도시였던 두브로브니크에서 페스트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처음 실시되었으며 이후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격리 일수가 40일로 지정되었다.
  • 쥐덫(1170년)
    쥐덫은 프랑스의 음유시인(트루바르트)인 크레티엔 드 트로이에의 연예시인 이베인 사자의 기사에서 언급되었다.

3. 군사 기술

중세 유럽의 군사 기술은 동시기에 평화기가 상대적으로 많았던 동양과 달리 군사 기술이 평이하게 달랐다. 우선 로마제국의 쇠퇴기와 서로마 제국의 붕괴기를 거치면서 퇴보하였고, 동양과 비교하면 군사 편제서부터 봉건제 등으로 인해 동원력이 약해지면서 단순한 편제를 하고 있었고, 군사학적으로도 무경칠서가 존재하던 동양과 달리 서로마 제국이 붕괴하기 전 서로마 제국의 귀족이었던 플라비우스 베게티우스 레나투스가 저술한 군사학 논고 하나 외에 없었다.

하지만 중세 중기를 거치면서 이슬람과과 교류 및 지역별로 독자적으로 군사 기술을 발달해가기 시작했고, 이러한 군사 기술의 발전은 후일 16세기를 기점으로 군사 기술이 동양을 초월하게되는 양분이 된다.

3.1. 갑옷

중세 유럽의 갑옷은 대체로 신분과 재력별로 구분된다. 동서 막론하고 병장기 중 갑옷 만큼은 대체로 가성비 싼 것을 제외하면 자비로 구입하는 것이 현실로 대다수 병졸의 경우 철갑으로 무장하지 못한 것이 허다했다. 그래서 병졸들의 갑옷은 갑옷은 대체로 지급품인데다가 금속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 보편적이었다.

반면 금속제 갑옷은 시대별로 세가지로 나눠진다. 중세 초기만하더라도 대체로 반팔 티셔츠 형태로 쇠사슬로 만들어지거나 가죽끈으로 엮은 여러개의 철편으로 만들어진 갑옷이 주류였다. 그러다가 중세 중기가 되면서 후자가 점차 도태되기 시작하고 전자가 주류가 되면서 전신을 감싸기 시작했다.

이후 13세기부터 중세 후기인 14세기부터 15세기 초반꺼지 제철 기술의 발달과 함께 점차 판금으로 갑옷을 만드는 이행기(Trasition Period)에 진입하면서 몸통을 제외한 전체 부위가 판금화를 거치게 된다. 다만 몸통에 입는 흉갑의 경우 판금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동양의 두정갑 동일한 구조의 갑옷들이 1410년 판금갑이 등장하기 전까지 대신하게 되었다.

1420년대가 되면서 판금 갑옷의 초기형의 등장하게 되며 이 때를 기준으로 점차 판금갑이 대세가 되기 시작되었고, 이후 이탈리아의 밀라노와 남부 독일에서 각각 밀라노 양식, 고딕 양식 등이 등장하게 되며, 또한 철의 대량 생산으로 인해 일반 병졸들도 돈만 넉넉하게 있다면 판금으로 만들어진 투구와 흉갑 정도는 마련할 수 있게 된다. 자세한 발전사는 서양 갑옷을 참고할 것.

사족이지만 판타지 등의 매체의 영향으로 일반 병졸들도 가죽 갑옷을 입고 다녔다는 통념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통념과 달리 상당히 왜곡된 부분들이 많다.
  • 누비 갑옷(Gambeson)(10세기)
    실제 중세 유럽의 일반 병사들이 보편적으로 착용한 겁옷으로 조선시대 지갑과 같은 원리로 여러겹의 천을 겹쳐서 만든 갑옷으로 본래 고대 스키타인들의 발명품으로 고대 그리스 시대 리넨 갑옷이란 이름으로 전파된 바가 있었다.
중세시기 오래된 갬비슨은 10세기의 것이 유일하지만 그 이전 시대에 다영한 형태로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갬비슨은 금속제 갑옷을 입을 수 없던 일반 병사들에게 유일한 방어구였으나 동시에 기사들에게는 갑옷 안에 입는 내갑의로도 중요한 갑옷으로 화살촉이 갑옷을 관통할 때 치명상을 피하거나 아니면 둔기에 의한 충격을 분산시킬 목적으로 착용하였고, 플레이트 아머의 시대가 도래한 후에도 애용되었다.
  • 잭체인(Jack chain)(15세기)
    잭체인은 냉병기 전술이 절정인 시기에 발명된 방어구로 판금 갑옷이 유행한 시기에 등장했다. 당시 백병전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급소는 머리와 몸통 부위였으나 그 다음으로 조심해야 했던 부위가 바로 무기와 방패를 들고 있던 팔 부위였지만 팔 보호대였던 암 하네스가 비싼 물건이었기에 이에 저렴한 가성비의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 면갑(12세기)
    면갑은 두 계통으로 나눠저서 등장했다. 전자는 바이저로 불리며 12세기 이탈리아 남부에 정착한 노르만족들이 기존의 투구를 개량한 Enclosed helmet이 등장하면서 같이 부착된 형태로 등장했다. 이후 형태는 달라지기는 하지만 그레이트 헬름까지는 투구에 고정된 유형이었으나 14세기에 등장한 바시넷의 경우 부리처럼 생긴 돼지코, 혹은 개코형의 바이저와 곡선형의 바이저로 나눠졌는데, 이때 바이저가 탈착이 가능해졌다.
그러다가 15세기에 셀릿 아흐메가 등장한다. 셀릿의 경우 바이저가 인중 정도까지 내려와서 얼굴 전체를 덮지 않았고 가동식과 일체형 둘 다 존재했다.또한입을 보호하는 비버(bevor)와 조합하면 폐쇄형 투구와 같이 얼굴 전체를 보호할 수 있다는 융통성 때문에 15세기 후반에 널리 유행했다.
아흐메의 경우 15세기 당시 바이저를 옆을 열어서 벗어야 하는 데다 입을 완전히 드러낼 수 없는 형태였다가 16세기에는 앞뒤로 열어서 벗고 입도 완전히 드러낼 수 있게 개량되고 면갑 고정에 경첩을 쓰지 않았다.
후자의 경우 동유럽에서 러시아 공국들을 중심으로 애용되었는데, 본래 쿠만의 머리 방어구 중 하나였기에 쿠만 마스크로 불리며, 쿠만인들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들과 교류로 통해 받아들인 방어구로 쿠만 마스크를 그대로 도입했기에 콧수염이 세겨진 것이 특징이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4에서 시나리오 클리어 후에 나오는 다큐에서 통해 쿠만식 마스크를 설명하고 있다. #

3.2. 방패

로마 제국 후기에 들어서면서 게르만족들이 군대의 중추를 이루게 되면서 로마군의 방패는 직사각형의 방패인 스쿠툼에서 이민족들의 원형 내지는 타원형의 방패로 전환되었고, 이는 서로마 제국이 붕괴된 이후에도 유지가 되었다. 그러다가 갑옷의 발달과 함께 카이트 실드와 히터 실드 등의 다양한 방패가 나오기 시작하나 14세기 말 화약의 전래와 함께 갑옷 또한 극단적으로 방호력이 상승하게 되면서 방패의 입지가 줄어들어 소형화가 진행되어 이후 총기를 비롯한 화약무기가 완전히 보편화된 18세기가 되면서 유럽의 전장에서 퇴출된다.
  • 라운드 실드(5세기)
    상술한 대로 라운드 실드는 로마군 말기 스쿠툼을 대체한 방패로 서유럽 일대에서 서로마 제국이 붕괴된 이후에도 여러 게르만계 국가들도 카이트 실드가 등장하기 전까지 라운드 실드를 애용했다.
  • 카이트 실드(9세기경)
    가오리연을 연상시키는 형태의 방패로 자세한 내용은 카이트 실드 항목을 참고할 것.
  • 히터 실드(10세기경)
    카이트 실드의 개량형으로 자세한 내용은 히터 실드 항목을 참고할 것.
  • 파비스(13세기)
    현재 이탈리아의 중부 주인 토스카나 지방에서 만들어진 대형 방패로 자세한 것은 파비스 항목을 참고할 것.
  • 타지(13세기)
    17세기까지 사용된 소형 방패로 자세한 내용은 타지 항목을 참고할 것.
  • 버클러(13세기)
    17세기까지 사용된 소형 방패로 백병전 등의 접전에서 가볍게 움직이기 위해 방패들 중 가장 작았다. 자세한 것은 버클러 항목을 참고할 것.

3.3. 냉병기

중세 시기는 유럽의 냉병기가 갑옷의 발전과 함께 발전해가던 시기였다. 투사 무기를 제외한 냉병기들은 고대부터 도검류와 창류, 둔기류 등으로 세분화되었으며, 서로마 제국이 붕괴된 이후 로마식 무기와 북쪽의 게르만/노르만족 양식의 무기들로 혼재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중세 중기로 접어들면서 갑옷의 발달 등으로 인한 여러 요인들로 인해 점차 중세 고유의 양식들이 등장, 고대의 냉병기들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3.3.1. 도검류
도검류는 양손검 한손검, 단검으로 분류된다. 전근대까지 동서 막론하고 검은 검병을 제외한 모든 병과에 거쳐 부무장의 위치에 있었다. 일단 중세 중기까지는 양손검은 동로마군이 쓰던 팔크스를 빼면 전무하다시피했다. 이는 이당시 검술의 전술 자체가 검과 방패를 드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14세기 트랜지셔녈 아머의 유행과 함께 방패를 사용하는 것이 점차 사라지게 되면서 양손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겨 양손검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단검의 경우 주로 한손검 다음으로 중세시기 유럽 각지의 군대에서 부무장으로 애용한 무기로 기사라도 한손검 외에도 별도로 차고 다녔다. 단검의 용도는 주로 근접전 와중에 한손검을 분실할 시에 그 대용품으로 사용되어 갑옷으로 보호하기 힘든 부위의 급소를 노리는데 사용되거나 전투 후 살 가망이 없는 자들의 목숨을 끊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이밖에도 부무장으로 한손검을 마련하기 힘든 가난한 병사들이 둔기류 다음으로 차고 다닌 무기이기도 했다.
  • 단검
    • 색스(seax)(5세기)
      앵글로색슨족들의 단검으로 전체 길이가 미터법 기준으로 50~100센티미터 사이로 다양했고, 10세기까지 사용되었다.
    • 안테니 대거와 링 대거(antennae dagge&ring dagaer)(13세기)
      14세기 전반까지 서유럽 전역에서 사용된 단검으로 안테니 대거는 자루 끝에 초승달 형대의 품멜이 달팽이의 촉각과 같다고 붙여진 이름이며 링 대거는 안테니 대거의 발전형으로 보인다. 최대 전체 길이가 30 센티미터 최대 무게는 0.25 킬로그램으로 자루 밑에 안테니 대거는 초승달 모양, 링 대거는 작은 고리가 달려있는 것이 특징이다.
    • 발럭 나이프(ballock knife)(12~13세기 사이)
      관련 이미지
      이름의 유래는 칼날 밑이 남성의 고환과 같다는 의미로 붙여진 단검으로 전체 길이가 30~40센티미터, 최대 무게는 0.3 킬로그램으로 14세기 전반까지 기사들이 부무장으로 사용되어 키드니 대거라고 불렸는데, 이는 전투가 끝난 후 빈사 상태의 적이나 아군이 고통스럽게 죽어가지 않기 위해 안락사를 목적으로 사용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중세가 끝난 후인 17세기까지 사용되었다.
    • 배즐러드(13세기)
      현재의 스위스의 도시 바젤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되는 단검으로 최대 전체 길이가 50센티미터로 손잡이 부분이 H자 형태인 것이 특징이며, 전장에서 식사용 나이프로도 사용되었다.
    • 런들 대거(14세기)
      기사들과 맨앳암즈들이 즐겨 사용한 단검으로 상세 내용은 런들 대거를 참고할 것.
    • 이어드 대거(ear dagger)(14세기)
      관련 이미지
      15세기까지 사용된 단검으로 본래 동방에서 유래된 단검으로 칼자루 끝이 귀모양처럼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최대 전체 길이가 30 센티미터, 최대 무게는 0.4 킬로그램이다.
    • 친퀘디아(cinqudea)(15세기)
      관련 이미지
      15세기 이탈리아에서 사용된 단검으로 17세기까지 사용되었으며, 전체 크기가 25~70 센티미터, 최대 무게로는 0.9 킬로그램로 칼끝으로 갈 수록 칼날 폭이 좁혀지는 것이 특징이다.
    • 망고슈(15세기로 추정)
      프랑스어로 왼손이란 뜻의 단검으로 명칭의 유래답게 왼손으로 사용된 단검으로 영어로는 패링 대거(parring dagger)로 불렸으며, 전투용보다는 결투용으로 만들어진 무기로 쌍검이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한손검과 함께 사용되었다.
    • 스틸레토(15세기 말)
      이탈리아에서 사용된 무기로 망고슈와 마찬가지로 결투용 무기이다.
  • 한손검
    • 스파타(5세기)
      로마군 기병대에서 사용했던 도검류로 로마 제국 후기에 들면서 입대하는 군인의 수가 감소, 이를 대신한 게르만족을 대체함에 따라 로마군의 전술이 변하면서 글라디우스가 퇴출되면서 후기 로마군의 대표적인 도검류가 되었다. 서로마 제국 붕괴 후 한동안 쓰이다가 아밍소드가 등장하는 11세기에 퇴출된다.
    • 바이킹 소드(8세기)
      바이킹들이 만든 검으로 자세한 내용은 바이킹 소드 항목을 참고할 것.
    • 아밍 소드(11세기)
      중세 중기 대표적인 군용검, 자세한 내용은 아밍소드 항목을 참고할 것.
    • 사이드 소드(15세기 후반)
      중세 말 아밍 소드가 점차 변형되기 시작한 형태로 16세기 초 사이드 소드로 변하며, 이때 칼날 폭이 좁혀지면서 길어지는 변종이 레이피어이다.
    • 펄션(11세기)
      유렵식 외날 도검으로 자세한 내용은 펄션 항목을 참고할 것.
    • 메서(14세기)
      14세기 독일 지역에서 애용된 외날 도검으로 자세한 내용은 메셔 항목을 참고할 것.
    • 곡도(9세기)
      훈족의 침략 이후에도 발칸 지역 이북과 소아시아를 통해 침략 및 이동 등으로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이 지속적으로 유럽으로 유입되어 가고 있었다. 특히 헝가리의 경우 본디 9세기 말 중앙아시앙에서 와서 유럽에 정착한 민족이었던 만큼 세이버의 시조격인 곡도를 가지고 왔고, 이후 서구화를 했음에도 마상궁술과 함께 사라져 가는 전통으로 남아 있다가 14세기경 투르크족들이 발칸 반도로 진출하면서 다시 마상궁술을 하는 경기병 중심으로 바꿔지기 시작하면서 다시 곡도의 비중이 늘기 시작했다.

      그리고 북쪽으로 헝가리 동쪽으로 투르크족들과 접하고 있던 동로마 제국에선 동방화와 함께 90cm나 되는 유목민들의 곡도를 파라메리온(Paramerion)이란 명칭으로 도입했다. 초기엔 서유럽에서 전래된 아밍소드가 대세였으나 동로마 제국의 쇠락과 함께 병장기 또한 중무장에서 경무장의 비율이 놓아지면서 자연스럽게 곡도의 비중이 높아지기 시작했고, 특히 12세기 국경을 접한 몽골 제국과 몽골의 영향을 받은 튀르크 등의 영향으로 곡도의 곡률이 더 커지게 되었다.

      러시아의 경우 동로마 제국보다 한 세기 늦었지만 마찬가지로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과 교류 등으로 통해 러시아의 나부 초원의 공국들에서부터 곡도를 받아들여 이후 점차 북쪽의 타 러시아 공국으로부터 퍼져 나갔고, 이후 13세기경의 시작된 타타르의 멍에 시기에 고착화 되었으나 여전히 바이킹 소드에서 비롯된 양날 검의 비율이 높은 편이었다.
  • 양손검
    • 롱소드(13세기)
      중세 중기가 끝나갈 무렵 등장한 양손검으로 자세한 내용은 롱소드 항목에서 참고할 것.
    • 바스타드 소드(15세기)
      롱소드의 일종으로 손잡이가 한손으로도 들 수 있게끔 되어있다. 자세한 내용은 바스타드 소드에서 참고할 것.
    • 클레이모어(15세기)
      중세 스코트랜드에서 사용된 양손검으로 자세한 내용은 클레이모어에서 참고할 것.
    • 에스터크(14세기)
      프랑스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이는 찌르기 전용의 양손검으로 자세한 내용은 에스터크 항목에서 참고할 것.
    • 츠바이헨더(15세기)
      독일 지역에서 사용되었던 양손검으로 자세한 내용은 쯔바이핸더 항목에서 참고할 것.
    • 플랑베르주(15세기)
      칼날이 물결 형태처럼 된 양손검으로 자세한 것은 플랑베르주 항목에서 참고할 것.

이밖에도 스페인과 아일랜드, 덴마크 등에서도 제각기 양손검을 만들어 사용했는데, 이중 덴마크의 양손검은 크로스 가드의 길이가 짧은 것이 특징이었다. 관련 링크
3.3.2. 폴암
중세 유럽의 보병들은 대체로 궁병을 제외하면 주무장이 창인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창이란 무기 자체가 다른 무기에 비해 가성비가 저렴한 양산형 무기인데다가 근접 병기 중 공격범위가 넓었고, 상대적으로 배우기가 쉬웠다. 중세 중기까지는 방패와 함께 1.8미터 정도의 단창으로 무장한 보병들이 중심이었으나 중세 후기가 됨에 따라 방어구가 점차 발달하면서 기존의 창으로 트랜지셔널 아머나 플레이트 아머를 제압하는데 불리하자 그 대안으로 폴암류가 대안으로 떠오르게 된다.

폴암은 대개 농기구 내지는 공구에서 기원하는 장병기들을 통칭하며, 익숙한 농기구 및 공구에서 기원한 장병기들이 많기 때문에 농민이나 시민 출신의 병사들이 손십게 익힐 수 있던 무기였다. 하지만 폴암은 창에 비해 무겁다보니 점차 보병들 사이에서 방패를 버리는 병사들이 보변화되기 시작하나 폴암만으로 플레이트 아머를 상대하는데 역부족이었다.
  • 창(5세기)
    자세한 내용은 창 항목에서 참고.
    • 파이크(13세기말)
      파이크는 13세기 말 스코트랜드 독립 전쟁 당시 영국 기병대에 대적할 목적으로 스코트랜드군이 처음으로 채택했고, 이후 합스부르크 가의 지배에서 독립하려는 스위스군들이 채택해 이후 스위스 용병들을 통해 그리스 정교와 이슬람 문화권을 제외한 유럽 전역으로 전파된다.
    • 알슈피스(Ahlspiess)(15세기)
      관련 이미지
      영어로는 올 파이크(Awl Pike)로 불리는 창으로 창날 길이가 80~100 센티미터, 전체 길이가 2.5~3 미터로 awl은 영어로 송곳을 뜻하는 만큼 창날이 송곳으로 되어 있다. 알슈피스는 플레이트 갑옷의 틈새를 노릴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 랜스(5세기)
      중세 시대 전반에 걸쳐 사용된 기병창으로 자세한 내용은 랜스 항목에 참고할 것.
    • 스피툼·란세어(13세기)
      스피툼은 13세기에 출현한 폴암의 일종으로 일반적인 창에 비해 넓으면서 세가닥으로 나눠진 창날이 특징으로 찌르기보다는 내려쳐 배는 용도로 많이 사용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스피툼과 란세어 항목을 참고할 것.
  • 폴암(11세기경)
    자세한 내용은 폴암 항목을 참고할 것.
    • 데인액스(9세기)
      바이킹들이 사용한 전투 도끼로 일반적인 도끼에도 속하지만 자루의 길이가 0.9미터에서 1.2미터가 보통이지만 의장용은 이보다 더 길었기에 사실상 폴암으로도 분류가 된다 자세한 내용은 데인 엑스 항목을 참고할 것.
    • 폴액스(14세기)
      데인엑스의 발전형으로 자세한 내용은 폴액스 항목을 참고할 것.
    • 글레이브(13세기)
      자세한 내용은 글레이브 항목을 참고할 것.
    • 포차드(11세기)
      글레이브와 동일한 폴암으로 동일한 외형 때문에 외관상 착각하기가 쉽다.
    • 부주(vouge)(13세기)
      관련 이미지
      부주는 13세기에 등장한 폴암의 일종으로 초창기의 할버드에 해당되는 무기로 프랑스식과 스위스식으로 나눠졌으며, 이중 스위스식이 할버드로 발전했다.
    • 할버드(14세기)
      자세한 내용은 할버드 항목을 참고할 것.
    • (13세기)
      중세 영국 보병들이 사용한 폴암으로 자세한 내용은 빌 항목을 참고할 것.
    • 웰시 혹(welsh hook)(13세기)
      관련 이미지
      웨일스 지방에서 만들어진 폴암으로 나무가지를 치던 공구에서 파생된 것과 영국 보병들이 쓰던 것으로 유럽 본토에서 귀차르므(guisarme)라고 불렸다. 전체 길이가 210~270 센티미터로 창날의 형태는 갈고리란 이름에 어울리게 갈고리 형태로 반대면에 ㄴ자 형태의 스파이크가 달려있는 형태다.
    • 루체른 헤머(lucerne hammer)(15세기)
      워해머의 폴암 버전으로 최대 길이가 240cm로 자루가 길고, 끝에 스파이크 형태의 창날이 달린 것만 빼면 워헤머와 유사한 외형으로 기사들이 하마 전투에서 중무장의 적과 싸우기 위한 무기 중 하나였더, 독일 지역에서 만들어졌으며, 이후 스위스 이탈리아, 프랑스 등지에서 사용되었다.
    • 밀리터리 포그(military fork)(15세기)
      관련 이미지들
      농기구인 쇠스랑에서 기원한 폴암으로 전체 길이가 2~2.5미터 정도로 창날이 두 개로 갈라진 것이 특징으로 19세기까지 사용되었으며, 쇠스랑에서 기원한 무기인 만큼 농민 출신의 병사들이 많이 애용한 무기였고, 농민 반란 등에서도 자주 쓰인 무기 중 하나였다.
    • (13세기 이후로 추정)
      추수 때 사용되는 낫을 말 그대로 무기로 사용한 것으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다른 폴암류처럼 13세기 이후에 무기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자세한 내용은 낫 항목을 참고할 것.
3.3.3. 타격무기
타격무기는 둔기 도끼로 나눠진다. 도끼의 경우 선사시대부터 사용된 무기로 야만족의 무기라는 인식도 있지만 둔기와 함께 플레이트 아머와 같은 갑옷으로 무장한 상대와 상대하는데 효과적인 무기로 창과 폴암에 등재된 데인 액스와 폴 액스 또한 원칙적으로 도끼에 속한 무기이기도 하다.

둔기의 경우 마찬가지로 선사시대부터 사용된 무기로 중세 중기로 들어서면서 갑옷이 중무장화됨에 따라 점차 도끼와 함께 갑옷에 효과적인 무기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특히 중세 후기에 발생한 농민반란에서 농민병들들이 기사들을 상대할 때 도끼와 함께 둔기로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과 중장병들에게 대항했으며, 형태에 따라 여러 분류로 나눠졌다.
  • 둔기류
    • 곤봉(9세기)
      가장 원시적인 무기로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때 노르망디 군에 소속된 바이외의 주교인 오도가 잉글랜드 군과의 난전에서 곤봉을 모습이 바이외 태피스트리에 그려져 있다.
    • 메이스(12세기)
      12세기에 사슬 갑옷이 보편화되면서 백병전에서사슬 갑옷에 대항할 목적으로 둔기의 사용 빈도가 증가하기 시작했고, 이때를 기점으로 사슬 갑옷의 사슬을 부슬 목적으로 만들어진, 플랜지드 메이스(Flanged Mace)라는 여러개의 철편을 부착한 둔기가 등장한다.
    • 모닝스타(12세기)
      메이스와 달리 머리 부분이 여러개의 철침이 부착된 둔기로 목적은 동일했지만 사용하는 주체는 일반 보병들이 었다.
    • 플레일(12세기)
      서양식 편곤으로 편곤과 마찬가지로 농기구인 도리깨에서 기원되었다. 14세기경부터 발생하기 시작한 농민반란 당시 많은 농민들이 중무장한 왕과 영주들의 기사와 병사들에게 대항하면서 들었던 무기 중 하나이며, 기사들을 비롯한 기병들도 마상에서 플레일을 사용했으나 15세기부터 보병들 사이에서 파이크가 보편화됨에 따라 더 이상 군용 무기로 사용되지 않게 된다.
    • 워해머(14세기)
      말그대로 군용망치로 자세한 것은 워해머 항목을 참고할 것.
  • 도끼류
    • 배틀액스(5세기)
      베틀액스는 오랫 동안 게르만· 노르만계 부족들이 즐겨 사용한 무기들 중 하나였고, 특히 바이킹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무기이기도 했다. 자세한 것은 배틀액스 항목을 참고할 것.
3.3.4. 기병
  • 박차(spur)(11세기)
    서부극 영화에서 카우보이들이 늘 신고 다니는 장화에 달고 있는 쇠붙이가 박차로 제대로 된 승마술과 그리고 말과의 교감이 성립이 된다면 발로 신호를 내려 말을 제어할 수 있었다. 박차는 본래 고대 켈트인들이 발명한 것이지만 11세기 노르만인들에 의해 기병대의 장비로서 채용되면서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박차는 목이 곧게 뻗어 있고, 원추형의 뿔이 고정된 형태였으나 12세기 목이 구부러졌고, 15세기경에 현재와 같은 회전식의 톱니바퀴형이 되었다. 중세 중기서부터 정식 기사의 경우 금박을 입힌 박차를, 스콰이어는 은색으로 도금된 박차를 착용해 자신의 계급을 나타냈다. 해당 링크
  • 마갑(시기 불명)
    마갑은 고대 중동에서 타고 있는 군마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갑옷의 일종으로 중세 유럽에서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불명이지만 초기엔 두꺼운 면직물로 마갑을 만들다가 15세기에 들어서면서 판금으로 된 마갑이 출현했다.
  • 군마
    관련 링크
    중세 유럽의 군마는 평균 크기가 당시의 말의 유해에서 측정된 수치에 따라 어께 높이가 평균 142cm로 이보다 더 큰 크기로는 영국 리즈에 위치한 군사 박물관인 로얄 아머리에 전시된 마갑을 통해 측정된 169cm 등이 있었으며[4], 말의 사육 환경 및 조련과 용도에 따라 네 분류로 나눠져 데스트리어(destrier), 코서(couser), 펠프리(palfray), 라운시(rouncy)로 나눠지며 모두 품종이 아닌 용도에 따른 명칭이다.
데스트리어는 네 종류의 군마 중에서 가장 등급이 높은 군마로 말 중에서 가장 대형 종의 수컷만을 선별해 망아지 시절부터 사육하면서 조련시켰고, 그렇기에 가격 또한 상당히 비싸 코서의 2배, 라운시의 10배 가격이었다. 그래서 전장에서 타고 다니는 것보다는 토너먼트에서 타고 다니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당대 회화 자료를 보면 목이 뱀이 고개를 쳐들고 있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코서는 데스트리어 다음으로 선호된 군마로 데스트리어에 비해 경량급 군마이며, 제대로 조련 과정을 거치지 않았지만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 덕분에 데스트리어보다 제대로 된 군마로서 기사와 같은 중장 기병들을 태우고 적의 대열을 향해 돌격하는 등의 활약을 했다. 그밖에도 사냥이나 토너먼트에도 동원되었다.
라운시는 웹상에서 짐말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엄연한 군마의 일종으로 승용마로도 이용되었으며, 코서보다 더 저렴해 대체로 가난한 기사들이 타고 다니기도 했으나 14세기 이후 지세가 험한 토지를 빠르게 이동하기 위한 승용마로 굳어지게 된다.
펠프리는 군마이지만 주로 승용마로 이용된 말로 통상의 군마들은 전투 전까지는 컨디션을 유지해야 했기에 보통 전장으로 이동할 때는 펠프리를 타고 다녔다. 매끄럽게 걷는 훈련을 받았기에 고급 승용마로 유명했다.
3.3.5. 투석기
투석기는 화약이 보편활될 때까지 사용한 공성무기로서 유럽에서도 고대서부터 사용되었다. 서로마 제국이 붕고된 이후 목책으로 지어진 성채가 보편적이었기에 강력한 투석기가 불필요했으나 이후 바이킹과 마자르 족 등의 약탈 등으로 인해 석축으로 된 성채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아울러 11세기 중반에 십자군 전쟁으로 중동의 건축 공법이 유럽에 소개되면서 석재 성이 보편화되면서 점차 강한 투석기가 필요해지게 되었다.
  • 노포(5세기)
    고대 로마시대와 동로마 제국과는 달리 그다지 보편적으로 사용되지 못했다. 이는 발리스타의 부품들이 복잡했는데, 서로마 제국이 쇠락해지고, 종국에 해체되기까지 경제가 크게 악화되면서 이를 만들고 유지하는 비용이 감당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12세기 경 투석기가 서유럽에 전래되면서 더 이상 전쟁에서 사용되지 못하게 된다.
  • 오나게르(4세기)
    동로마 제국에서 만들어진 투석기로 투석기라기보다는 발리스타에 가까운 것으로 6세기경까지 사용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오나게르 항목을 참고할 것.
  • 망고넬(6세기경)
    중국의 투석기를 개량한 것으로 자센한 내용은 망고넬 항목을 참고할 것.
  • 트레뷰셋(12세기경)
    망고넬을 개량한 것으로 최후의 투석기이다. 자세한 것은 트레뷰셋 항목을 참고할 것.
3.3.6. 투사 무기
  • (5세기)
    자세한 내용은 활 항목을 참고할 것.
  • 장궁(5세기)
    일반적인 활과 함께 장궁 또한 선사시대부터 사용된 투사 무기로서 이후 고대까지 게르만족들 사이에서 사용되었다.
  • 십자궁(12세기)
    자세한 내용은 십자궁 항목을 참고할 것.
  • 투창(5세기)
    투창은 전세계적으로 고대서부터 사용된 투사 무기로 유럽 역시 예외가 아니었고, 특히 남유럽에 속한 이베리아 반도는 지역 특성상 주요 투사 무기로 선호되었다.
  • 프랑시스카(6세기)
    9세기까지 사용된 프랑크족들의 투척 무기로 도끼로 분류되지만 주용도가 투척용이기에 투사 무기로 분류되며 자세한 것은 프랑시스카 항목을 참고할 것.
  • 투석구(5세기 중엽)
    서로마 제국이 붕괴된 이후 12세기까지 사용되었다.

3.4. 화약 무기

  • 대포(1320년대)
    최초의 출현시기를 두고 여러 이설이 있지만 가장 오래된 가설로 1324년 메츠 공방전에 처음 등장했다는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의 언급이 있다.
  • 아퀴버스(15세기 중반)
    오스만 투르크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이 정설로 헝가리 왕국 또한 오스만 투르크를 막으려고 했던 마차시 1세가 자신의 정예 군대인 흑군의 제식 병기로 도입한 것 외엔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신성 로마 제국-에스파냐 군대가 실전으로 사용하기 전까지 무기로서의 효용성을 의심했다.
  • 리볼데퀸(1339년)
    17세기 이전까지 사용된 다연장 총으로 1339년 영국의 국왕이었던 에드워드 3세 때 영국군이 최초로 사용했다.
  • 세이커(15세기)
    팔코넷과 컬버린 사이의 크기의 대포로 자세한 내용은 항목을 참고할 것.
  • 팔코넷(15세기)
    자세한 내용은 항목을 참고할 것.
  • 컬버린(15세기)
    자세한 내용은 항목을 참고할 것.
  • 핸드 캐논(1320년대)
    핸드 캐논은 서양식 총통의 일종으로 화포와 함께 중동을 거쳐서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 포차(gun carriage)(15세기 초~중반)
    바퀴 달린 포가로 1419년~1434년 동안 벌어진 후스 전쟁 당시 발명된 것으로 당시 황소 두마리로 끌고 다녔다. 한세기 가까이 보편적이지 않다가 16세기 초 점차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포차는 한쌍의 바퀴가 달린 포가와 역시 한쌍의 바퀴가 달린 소나 말이 끌고 가는 카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포가쪽에서 카트와 연결하는 한쌍의 경사가 완한 굵은 연결대가 이쓴데, 카트와 분리 시 전시때 화포의 반동을 저지하는 지지대 역활을 했다.

3.5. 방어 시설

  • 성채의 진보(11세기)
    중세 초기의 성은 로마의 석재나 벽돌로 벽을 쌓는 방식이 실전되거나 아니면 로마 제국 밖에서 국가를 형성했기에 보통 흙을 단난히 다진 토대 위로 목조로 만든 벽으로 된 요새, 모트 & 베일리가 전부였다. 하지만 11세기가 되면서 투석기의 등장과 공성 전략 또한 다양해지면서 수비측 또한 성채를 석재로 쌓기 시작하고, 수성 전략에 맞는 다양한 시설물들을 추가하기 시작했다.
  • 바겐부르크(14세기경)
    중부 유럽 지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바겐부르크는 후스 전쟁당시 후스파들이 이용한 간이 방어 시설로 주로 야전에서 많이 애용되었다.

3.6. 군사 제도

중세는 고대과 근·현대 사이의 과도기적 시기로 군사 제도 또한 과도기적 제도로 운영되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동로마가 통치하던 지역들을 제외한 구 서로마령에서는 제국이 해체되면서 레기온 체계 또한 완전히 붕괴되면서 그 서로마령에 각자도생식으로 세워진 게르만족 왕국에 이어져 있지 않는다는 점이다. 더욱이 사회 구조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봉건제와 함께 기사들 위주인 기병대가 위주였고, 전시에 자신의 장원에서 징발한 징집병들을 이끌고 전장에 합류했다. 또한 상술한 병기들조차 고대에는 거의 없던 것들이었으며, 이에 따라 전술과 병종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 군사 계급과 편제
    중세 유럽의 군계급
    중세 유럽의 군편제
    현재의 군사 계급과 군대 편제의 기원은 서양으로 그 시발점은 중세이다. 중세 초에 먼저 생긴 군사 계급명은 원수로 알려진 마샬이었다. 그리고 그 위로 현재는 순경으로 불리는 콘스테이블 즉 무관장으로 본래는 왕의 마굿간을 관리하던 관직들에 지나지 않았으나 중세 중기가 되면서 점차 늘어나는 전쟁으로 왕이 친정하지 않을 때 대신 왕의 군대를 지휘, 혹은 왕의 친정시 근왕군의 기병대의 지휘관을 겸하면서 군사 계급화되었다.특히 콘스테이블의 경우 무관장 외에도 기병대장으로도 불렸다.
이후 중장과 대위가 중세 중기를 전후로 생겼다. 우선 장군의 어원은 13세기에서 14세기 사이의 프랑스어 capitaine général에서 유래되었으며, 중장(Lieutenant General) 또한 이시기쯤에 생겼으며, 부장군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상술한 대무관장과 원수의 부관격인 계급이었으나 이마저도 나라마다 차이가 있었다.
대위(Captain)의 경우 14세기 초 필리프 4세때 전쟁시 지방의 영주들을 동원할 때 이들에게 부여된 칭호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칭호를 부여받은 영주들 중 영지의 생산력만으로 생계 등을 유지하지 못한 이들이 사설 용병대를 만들었고, 이때를 기점으로 용병대장=캡틴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이후 용병을 중심으로 한 유사 상비군 제도가 만들어지면서 자연스럽게 군사 계급으로 편입되었다.
중위(Lieutenant)는 중세 후기에 등장한 군사 계급으로 용병대의 규모가 커지고, 캡틴이 해야 할 일들이 늘어나면서 보좌직으로 신설된 직책에서 시작되었으나, 명칭은 중세 초인 10세기 말에 신설된 Lieutenant du roi에도 있을 정도로 유래가 깊었다.
소위의 경우 중세가 지난 후에야 생겼으나 이와 유사한 개념으로 12세기부터 기수(Ensign)가 소위 역할을 대신 수행했다. 하사관 계급에 속하는 상사를 뜻하는 서전트 하사 또한 중세에 생긴 계급이었다. 다만 이러한 군사 칭호들이 정식으로 유럽 국가들의 군대 계급으로 정식으로 편입되기까지는 1550년대까지를 기다려야 했다.
군사 편제의 경우 배틀(battle) - 베너(banner) - 랜스(lance)로 구성되었다. 배틀의 경우 현대의 사단과 같은 편제이지만 배속되는 배너의 규모에 따라 수백에서 수천으로 일관되지 않았으며, 내부적으로 병종에 따라 보병, 궁병, 기병 등으로 그룹이 세분화되었으며 선봉대(Van Guard), 본대(Main Body), 후위대(Rear Guard)로 나눠졌는데 정황상 사단이라기 보다는 대대에 가까우며, 프랑스어 위키백과에서도 대대의 기원을 배틀로 보고 있다. 관련 링크
베너는 콘로이(Conroi)라고 불리며 현대의 소대와 같았으며 마찬가지로 배속된 랜스의 수에 따라 차이가 났으며, 이러한 베너를 지휘한 기사를 나이트 배너렛(Knight banneret)으로 불렸다. 랜스는 밴드(band)라고 불리며 현재의 분대에 가까웠는데 한 랜스당 기사나 서전트의 지휘하에 2명에서 다섯 이상으로 편성되었다. 이후 중세 중·후기쯤 되면서 대위 칭호를 갖고 있단 영주들이 용병 사업에 뛰어들면서 새롭게 중대(company)라는 개념이 새롭게 생겼다.
1480년 루이 13세 스위스 용병들로 구성된 보병 위주의 편제를 구상하면서 연대의 개념이 생겼다. 이개념은 16세기 테르시오를 통해 구체화 되었다.


[1] 다만 노예제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19세기 들어서이며 대항해시대 이전부터 중세 유럽에선 여전히 노예제가 잔존했는데, 주로 겔리선의 노잡이들이 노예들로 구성되었으며, 속설과 달리 같은 종파의 그리스도인이라도 노예로 삼은 기록이 남아 있다. 자세한 것은 노예제 항목을 참고. [2] 비누 용액과 알칼리 용액을 섞은 것에 서로 겹쳐진 양모를 적셔 압력을 가하는 작업. 양모는 섬유의 수축이 심하기 때문에 축융 작업으로 미리 최대한 수축시켜놓아서 섬유를 치밀하고 단단하게 만들어놓아야한다. [3]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다. 산업혁명을 통한 대량 생산 이전까지 종이는 여전히 비싼 편이었다. [4] 참고로 동시기 동북아에서 최고로 치던 서역산 말 다음으로 치던 몽골 초원의 말들은 어께 높이가 120cm 내외였고, 한반도산 말의 경우 제일 커봤자 이보더 더 작은 117cm 정도이며, 가장 작은 크기가 90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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