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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사회당(18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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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ito Socialista Italiano (PSI)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ff0000> 영문 명칭 Italian Socialist Party
한글 명칭 이탈리아 사회당
창당일 1892년 8월 14일
해산일 1994년 11월 13일
전신 역사적 극좌파[1]
후신 이탈리아의 사회주의자들
이탈리아 사회당(2007년)
대표 XX
이념 1892~1921[A]
마르크스주의
혁명적 사회주의
1921~1994[B]
사회민주주의
민주사회주의
정치적 스펙트럼 1892~1921[A]: 좌익 ~ 극좌
1921~1994[B]: 중도좌파 ~ 좌익
당 색
적색(#FF0000)
당원 수 674,057명 (1991년)
상원의원
9석 / 315석 (0.3%) (해산 직전)
하원의원
15석 / 630석 (2.2%) (해산 직전)
유럽 의회
2석 / 87석 (해산 직전)
기관지 아반티! (Avanti!)
1. 개요2. 역사
2.1. 창당과 짧은 전성기2.2. 사회당 - 공산당 분당과 불법화2.3. 레시스텐자 거국내각2.4. 거국내각 축출과 만년3당2.5. 제2의 전성기: 베티노 크락시 내각2.6. 마니 풀리테, 해산
3. 출신 인물
3.1. 창립자3.2. 사회당 소속 대통령3.3. 사회당 소속 총리3.4. 기타
4. 역대 선거 결과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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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92년부터 1994년까지 존재했던 이탈리아 좌파 정당으로 초기에는 마르크스주의 혁명적 사회주의를 추구했으나 점차 온건해져서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되었으며, 1990년대 마니 풀리테의 여파로 해산되었다.

2. 역사

2.1. 창당과 짧은 전성기

1892년에 필리포 투라티, 안드레아 코스타 등 이탈리아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창당되었으며, 당시에는 이탈리아 노동자당(Partito dei Lavoratori Italiani)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1893년이탈리아 노동자사회당(Partito Socialista dei Lavoratori Italiani)으로 당명을 변경했다가, 1895년에 다시 이탈리아 사회당으로 변경했으며 해산될 때까지 그 이름을 계속 사용했다.

이후 기존 이탈리아 왕국 정계에서 좌파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던 역사적 좌파의 지지 기반을 흡수하며 당세를 확장했고, 1차 대전 직후에 있었던 1919년 총선에서는 156석을 확보함으로써 창당 이후 최초로 원내1당을 차지하는 전성기를 누렸다.[6]

2.2. 사회당 - 공산당 분당과 불법화

그러나 사회당의 전성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921년 리보르노에서 사회당 제17차 전당대회를 하던 도중에 아마데오 보르디가, 안토니오 그람시, 팔미로 톨리아티, 안젤로 타스카 등 당내 좌파가 집단 탈당하여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당하는 분당 사태가 터졌고, 같은 해에 열린 총선에서 사회당은 원내1당은 유지했으나 공산당에게 지지층 일부를 빼앗기며 1919년보다 33석이 적은 123석을 확보했다.

그리고 1922년 로마 진군으로 무솔리니 내각[7]이 출범한 이후에는 더더욱 악화되어, 1924년 총선에서는 무려 101석을 잃으면서 22석으로 쪼그라들었고, 1926년에는 아예 불법화되어 지하에서 반파시즘 운동을 전개했다.

2.3. 레시스텐자 거국내각

1943년 무솔리니가 실각하고 이탈리아 왕국 연합국에게 항복하면서 사회당은 합법정당으로 부활했다.

그러나 독일 국방군이 무솔리니를 구출하여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을 수립하는 바람에 이탈리아 전선이 장기화되었고, 사회당은 이에 맞서기 위해 기독교민주당, 공산당 등과 함께 민족해방위원회를 결성하여 반파시즘 무장투쟁을 벌였으며, 이탈리아 왕국의 거국내각에도 참여했다.

1945년에 무솔리니가 처형되고 독일이 패망함으로써 2차 대전이 종식되자, 이탈리아 정계에서는 무솔리니를 총리로 임명하여 국민을 전쟁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왕실에 대한 비토 여론이 커졌다.

그리하여 사회당은 공산당을 비롯한 다른 좌익 정당들과 함께 왕정 폐지 운동을 주도했고, 1946년 개헌 국민투표에서 이를 관철시켰다.

또한 국민투표와 같이 치러진 총선에서는 115석을 확보하며 기민당에 이은 원내2당이 됨으로써 중흥기를 맞이했다.

2.4. 거국내각 축출과 만년3당

그러나 사회당의 중흥은 1차 대전 이후의 짧은 전성기보다도 더 빠르게 막을 내렸다.

2차 대전 이후 제1세계의 수장으로 떠오른 미국 트루먼 행정부는 이탈리아의 공산화를 우려하여 당시 거국내각을 이끌던 알치데 데 가스페리 총리에게 공산당과 사회당[8]을 내각에서 배제할 것을 종용했고, 결국 1947년에 공산당과 함께 거국내각에서 축출되었다.[9]

그러자 사회당은 공산당과 함께 인민민주전선이라는 정당연합을 구성하여 기민당 내각 타도를 외쳤으나, 1948년 총선에서 참패를 면치 못했고, 공산당보다도 적은 의석을 확보하며 제3당으로 전락했다.

이로써 이탈리아 좌파 진영의 헤게모니는 사회당에서 공산당으로 넘어갔고, 사회당은 해산될 때까지 다시는 양대 정당의 지위를 되찾지 못하는 만년3당이 되었다.

이후 사회당은 공산당과의 연대를 끊으면서 기민당 내각에 참여하지도 않는 독자 노선을 추구하다가, 1963년에 기민당 좌파[10]가 주도하는 유기적 중도좌파 내각에 합류했고, 이로써 사회당은 다시 연립정부의 여당이 되었다.

그러나 연정 참여 이후에도 사회당은 만년3당을 면치 못했고, 1970년대에는 하원에서 10% 이하 의석을 확보하는 암흑기가 이어졌으며, 공산당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버리고 유럽공산주의를 채택하며 온건해지자, 기민당 좌파를 이끌던 알도 모로 전 총리가 사회당 대신 공산당을 연정 파트너로 선택하여 대연정을 구성하는 역사적 타협을 추진하는 바람에 사회당은 연립여당 지위마저 잃을 위기에 몰렸다.

하지만 1978년에 알도 모로가 붉은 여단이라는 극좌 무장단체에 납치된 후 피살당하는 사건이 터지고, 기민당 우파[11]를 이끌던 줄리오 안드레오티 총리가 역사적 타협을 중단시킴으로써, 사회당은 기사회생했고 80년대에 반등을 노릴 수 있게 되었다.

2.5. 제2의 전성기: 베티노 크락시 내각

1983년 총선에서 기민당이 이탈리아 공화국 수립 이래 최초로 40%에 미달하는 의석을 확보하며 부진하고, 공산당이 현상유지에 그친 반면, 사회당은 오랜만에 하원에서 10%가 넘는 의석을 확보하며 약진했다.

그리하여 사회당은 원내3당임에도 불구하고 연정 협상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었고, 기민당의 양보를 받아 최초의 사회당 총리 내각인 베티노 크락시 내각이 출범했다.

알치데 데 가스페리 퇴임 이후에 집권한 기민당 총리들이 1~2년의 짧은 내각을 이끌었던 것과는 달리 베티노 크락시는 제3당 소속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1987년 총선 때까지 4년간 내각을 유지하는데 성공했으며, 그 기간 동안 라테라노 조약을 수정하여 가톨릭을 이탈리아의 국교로 하는 조항을 삭제함으로써 정교분리를 실현하는 업적을 세웠다.

87년 총선 이후에는 의석 증가에도 불구하고 다시 기민당에 총리직을 넘겨줘야 했지만, 이후에도 사회당은 계속 기민당 주도 연립내각에 참여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2.6. 마니 풀리테, 해산

1992년 2월, 밀라노에서 사회당 간부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가 드러났는데, 해당 사건을 계기로 이탈리아 검찰이 전면적인 수사에 착수하여 수백명의 정치인을 기소하는 마니 풀리테가 시작되었다.

이때 기소된 정치인 중에는 최초의 사회당 총리였던 베티노 크락시[12]도 있었고, 기민당 소속 현직 총리 줄리오 안드레오티마저 마피아와의 유착 의혹으로 인해 사퇴했다.

그러자 이탈리아 정계에서는 사회당 소속이지만 정치인으로서의 이미지가 약한 줄리아노 아마토를 총리로 하고 각료 대부분을 테크노크라트로 구성한 거국내각을 수립하여 위기를 돌파하려 했지만, 1992년 총선에서 기민당과 사회당을 비롯한 연정 참여 정당들은 부진을 면치 못했다.

그리고 아마토 총리마저 부패 의혹으로 인해 사퇴했고, 관료 출신인 카를로 아첼리오 참피를 총리로 한 새로운 거국내각이 출범했다.

이후 사회당은 주요 정치인들이 줄줄이 기소되는 상황 속에서 1994년 총선에서 참패하여 군소정당으로 전락한 후 해산을 결정하여, 오랜 역사를 마무리하고 사라졌다.

이후 일부 사회당 정치인들이 이탈리아 사회주의자라는 신당을 창당하여 사회당의 명맥을 이었고, 1998년 이탈리아 민주사회당과 합당하여 이탈리아 민주사회주의자를 창당했다가, 2007년 이탈리아 사회당을 재창당했다,

그러나 2007년에 재건된 사회당은 옛 지지층을 회복하는데 실패하여 군소정당에 머물렀고, 2022년 총선에서는 아예 원외정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편 무소속으로 정치 활동을 이어간 구 사회당 정치인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서 아마토 전 총리는 2000년 올리브 연합[13]의 지지를 받아 다시 총리가 되어 1년간 내각을 이끌었고, 올리브 연합이 단일정당인 민주당으로 통합된 이후에는 상당수가 민주당원으로 활동했다.

3. 출신 인물

3.1. 창립자

  • 필리포 투라티
  • 안드레아 코스타

3.2. 사회당 소속 대통령

3.3. 사회당 소속 총리

3.4. 기타

4. 역대 선거 결과

4.1. 이탈리아 왕국 하원

1895년 15/508 6.8%[19]
1897년 15/508 3.0%[20]
1900년 33/508 13.0%[21]
1904년 29/508 21.3%[22]
1909년 41/508 19.0%[23]
1913년 52/508 17.6%[24]
1919년 156/508 32.3%[25]
1921년 123/535 24.7%[26]
1924년 22/535 5.0%[27]

4.2. 이탈리아 제헌의회

1946년 115/556 20.7%[28]

4.3. 이탈리아 의회

1948년 상원 41/237 30.8% 하원 53/574 31.0%[29]
1953년 상원 26/237 11.9% 하원 75/590 12.7%
1958년 상원 36/246 14.1% 하원 84/596 14.2%
1963년 상원 44/315 14.0% 하원 83/630 13.8%
1968년 상원 36/315 15.2% 하원 62/630 14.5%
1972년 상원 33/315 10.7% 하원 61/630 10.0%
1976년 상원 30/315 10.2% 하원 57/630 9.6%
1979년 상원 32/315 10.4% 하원 62/630 9.9%
1983년 상원 38/315 11.4% 하원 73/630 11.4%[30]
1987년 상원 43/315 10.9% 하원 94/630 14.3%
1992년 상원 49/315 13.6% 하원 92/630 13.6%
1994년 상원 9/315 0.3% 하원 15/630 2.2%

4.4. 유럽의회 선거

1979년 9/81 11.0%
1984년 9/81 11.2%
1989년 12/81 14.8%
1994년 2/87 1.8%

5. 관련 문서


[1] Estrema Sinistra Storica [A] 이탈리아 공산당 창당 이전 [B] 이탈리아 공산당 창당 이후 [A] [B] [6] 다만 군소정당 난립으로 인해 총리를 배출하진 못했다. [7] 아이러니하게도 무솔리니 파시스트가 되기 전에는 사회당 기관지 '아반티(Avanti)'의 편집장까지 맡았던 거물급 사회당원이었다. [8] 공산당에 비하면 온건했지만 아직 당내에는 상당수의 극좌파들이 남아있었다. [9] 이때 사회당 온건파는 탈당하여 이탈리아 노동자사회당( 이탈리아 민주사회당의 전신)을 창당한 후 가스페리 내각에 계속 참여했다. [10] 기민당 내부의 친사회주의적 중도~중도좌파 파벌 [11] 기민당 내부의 반사회주의적 중도~중도우파 파벌 [12] 이후 1994년에 구속 수사를 피하기 위해 튀니지 함마메트 빤스런 망명했고, 다시는 이탈리아로 돌아가지 못한 채 2000년에 현지에서 객사했다. [13] 좌파 민주당( 공산당의 후신)과 이탈리아 인민당(기민당 좌파의 후신)을 비롯한 좌파 정당들이 결성한 정당연합이자 민주당의 전신 [14] 사회당 탈당 후 이탈리아 개혁주의 사회당 및 노동민주당 소속으로 두 차례에 걸쳐 총리직 수행 [15] 사회당 탈당 후 파시스트로 변절 [16] 사회당 탈당 후 이탈리아 공산당 창당 [17] 사회당 탈당 후 이탈리아 민주사회당 소속으로 대통령직 수행 [18] 평생 공산주의 사상가로 살았지만, 정작 공산당에 가입한 적은 없고 오히려 공산당보다 온건한 사회당 소속이었다. [19] 원내4당 [20] 원내5당 [21] 득표율 3위, 원내4당 [22] 득표율 2위, 원내4당 [23] 득표율 2위, 원내3당 [24] 득표율 2위, 원내3당 [25] 사상 첫 득표율 1위, 원내1당으로 약진 [26] 의석 및 득표율 감소에도 불구하고 원내1당 유지 [27] 원내4당으로 추락 [28] 득표율 2위, 원내2당으로 약진 [29] 공산당과 합동으로 선거를 치렀다가 공산당에 밀려 원내3당으로 전락했고, 92년 총선 때까지 만년3당에 머물렀다. [30] 기독교민주당과의 연정으로 베티노 크락시 내각 수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