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이영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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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영표의 경력을 서술한 문서.2. 클럽 경력
2.1. 프로 이전
안양초 4학년에 축구를 시작한 이영표는 축구 명문 안양중 - 안양공고를 거쳤다. 안양중시절 각종 대회에서 득점왕을 휩쓸었고, 안양공고 시절에도 등번호 10번을 달며 95년 KBS배 고교 대회 우승을 이끄는 등 10대 시절까지는 최전방 스트라이커로 활약했다.건국대학교 96학번으로 입학한 뒤 정종덕 감독의 추천에 의해 좌측 윙백으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초반에는 선배들에게 주전 경쟁에서 밀리는 등 그저 그런 선수로 전락하다가, 점차 기량이 급성장했고, 3학년부터 주전으로 발돋움해 허정무호에 차출될 만큼 대학 최고 윙어로 성장했다.
2.2. 안양 LG 치타스
2000년 건국대학교 축구부를 졸업하고 2000 K리그 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안양 LG 치타스에 지명을 받았다. 등번호 12번을 달았다.
신인임에도 주전으로 나섰다. 비록 잦은 대표팀 차출로 인해 소속팀에서 기여도는 낮았음에도 양현정과 함께 신인왕 후보를 경쟁할 만큼 리그에서도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였고, 리그와 리그컵 18경기 2득점 1도움을 기록하며 안양의 10년 만에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2001 시즌에는 팀의 부주장으로 활약하며 K리그 수퍼컵을 이끌었고, 팀을 리그 준우승에 이끌며 리그와 리그컵에서 29경기 1도움을 기록했다. 이러한 활약으로 K-리그 베스트 XI에 선정됐다. 당시 부천의 이을용과 24표로 동률을 차지했지만 출장 횟수에서 앞서며 해당 규정으로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된 최초의 사례가 됐다.
또한 2001-02년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에서 안양의 준우승에 기여했다.
2002 한일 월드컵 종료 후 한 달 후 벌어진 2002년 K리그 올스타전에서 올스타전 최초로 자책골을 기록했다. 2002시즌 리그에서 23경기 1골 5도움을 기록하며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냈다. 이임생 선수에게 경기 중 폭행당한 것도 이 시즌 7월이다.
2.2.1. PSV 에인트호번 (임대)
2002년 8월부터 거스 히딩크 감독이 네덜란드 에레디비시의 명문팀 PSV 에인트호번으로 복귀하게 되는데, 히딩크 감독은 이미 2003년 1월 8일 입단이 확정된 박지성과 함께 이영표를 네덜란드로 데려가려 한다.그리고 2003년 1월 11일, 임대료 35만달러(약 4억2000만원), 6개월 급료 25만달러(약 3억원)의 조건으로 이영표의 에인트호번 임대 이적이 확정됐다. 3년 계약의 완전 이적으로 합류한 박지성과 달리, 이영표는 6개월 임대 후 완전 이적 조건이 있기 때문에 이영표는 당시를 회상하며 매우 절박한 심정이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임대 신분으로서 2002/2003 시즌 후반기 동안 리그 15경기 출전(선발 14경기, 교체 1경기)과 컵대회 2경기 출전(선발 2경기)을 기록하였다. 같은 시기에 입단한 박지성이 리그 8경기 출전(선발 2경기, 교체 6경기)에 그친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러한 활약을 토대로 2002/2003 시즌이 끝나자마자 에인트호번이 완전 이적 조항을 발동하며 이적료 170만달러(약 20억9000만원), 연봉 300만달러(약 36억9000만원)에 출전수당 75만달러(약 9억2000만원)에 완전 이적이 확정됐다.
2002-03 시즌: 17경기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에레디비시 | 15 | 14 | 1 | 0 | 0 |
암스텔컵 | 2 | 2 | 0 | 0 | 0 |
합계 | 17 | 16 | 1 | 0 | 0 |
2.3. PSV 에인트호번
2003-2005
113경기 1골 17도움
113경기 1골 17도움
2.3.1. 2003-04 시즌
완전 이적 직후 등번호를 29번에서 3번으로 옮긴다.03-04 시즌에도 팀의 주전 레프트백으로서 리그, 컵대회 포함 47경기 6도움을 기록했다.
2003-04 시즌: 47경기 6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에레디비시 | 32 | 32 | 0 | 0 | 4 |
암스텔컵 | 2 | 2 | 0 | 0 | 1 |
UEFA 챔피언스 리그 | 6 | 6 | 0 | 0 | 0 |
UEFA컵 | 6 | 5 | 1 | 0 | 1 |
요한 크루이프 스할 | 1 | 1 | 0 | 0 | 0 |
합계 | 47 | 46 | 1 | 0 | 6 |
2.3.2. 2004-05 시즌
04/05 시즌에는 공식전 4,425분을 출장하며 당시 팀내 출전시간 1위를 기록하는 등 팀에서 대체불가 수준의 입지를 보여줬다.[1]2004년 10월 24일 아약스와의 리그 경기에서 헛다리 짚기로 파고든후 중거리 슈팅으로 데뷔골을 신고했다. 이후 잉글랜드, 이탈리아, 스페인 등 여러 상위리그에서 이영표에게 러브콜을 보낸다. 시즌 동안 PSV의 리그 우승과 챔피언스 리그 4강을 견인하는 등 박지성과 함께 맹활약했다. 특히 AC 밀란과의 챔스 4강 2차전에서 측면에서 무려 카푸를 제치고 크로스를 올려 어시스트를 기록한 것이 압권.[2]
2004-05 시즌: 49경기 1골 11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에레디비시 | 31 | 31 | 0 | 1 | 9 |
암스텔컵 | 4 | 4 | 0 | 0 | 0 |
UEFA 챔피언스 리그 | 12 | 12 | 0 | 0 | 1 |
UEFA 챔피언스 리그 예선 | 2 | 2 | 0 | 0 | 1 |
합계 | 49 | 49 | 0 | 1 | 11 |
2.3.3. 2005-06 시즌 초
프리미어 리그 소속 토트넘 홋스퍼 FC와 볼턴 원더러스 FC가 이영표의 영입에 관심을 보이며 잉글랜드 이적설이 불거졌다.이미 박지성, 반 봄멜, 요한 포겔 등 지난 시즌 핵심 멤버들이 대거 이탈하고 있는 가운데 PSV 구단과 히딩크 감독은 다른 선수들과 달리 대체자가 없는 이영표의 잔류를 원했고 고액의 이적료를 고수하며 이적 불가 방침을 세웠다. 게다가 필립 코쿠 다음으로 많은 연봉을 약속하며 이영표와의 재계약을 제시했다.
결국 2005-06 시즌은 개막했고 8월 한 달 간 팀이 치른 전 경기 풀타임을 소화하며 변함없는 입지를 자랑했다.
그러나 더 높은 수준의 리그로 이적을 원한 이영표는 이적을 원하며 당시 “앞으로 구단 훈련이나 게임에도 출전하지 않겠다”고 최후통첩을 날리는 등 히딩크 감독과의 불화설이 나돌기도 했다.
결국 8월 27일, 토트넘으로의 이적을 허락하면서 2년 반 만에 에인트호번을 떠나게 됐다.
2005-06 시즌 (에인트호벤): 4경기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에레디비시 | 3 | 3 | 0 | 0 | 0 |
요한 크루이프 스할 | 1 | 1 | 0 | 0 | 0 |
합계 | 4 | 4 | 0 | 0 | 0 |
2.4. 토트넘 홋스퍼 FC
2005-2008
92경기
92경기
이적시장 종료 직전인 8월 30일, 토트넘 홋스퍼 FC와 4년 계약을 체결했다.
2.4.1. 2005-06 시즌
입단하자마자 마틴 욜 감독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으며 주전으로 활약했다.리버풀과의 데뷔전 팀내 최고 평점을 받는 등 최고의 데뷔전을 치렀다.
이후에도 뛰어난 드리블 능력과 과감한 오버래핑으로 토트넘의 주축으로 자리잡았으나 수비 능력에서 혼란을 겪은 적이 있었다.[3]
1월 겨울 이적 시장에서 임대 신분으로 좋은 활약을 보여주던 미도의 원 소속팀인 AS 로마가 트레이드 카드로 이영표를 원하기도 했으나 토트넘이 거절하며 무산되곤 했다.
부상으로 결장한 시기를 제외하면 꾸준히 기회를 받으며 성공적인 EPL 데뷔 시즌을 보냈고 토트넘의 UEFA컵 진출에 기여했다.
2005-06 시즌 (토트넘): 31경기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프리미어 리그 | 30 | 30 | 0 | 0 | 0 |
칼링컵 | 1 | 1 | 0 | 0 | 0 |
합계 | 31 | 31 | 0 | 0 | 0 |
2.4.2. 2006-07 시즌
시즌을 앞두고 등번호를 16번에서 PSV에서 달던 3번으로 옮겼다.새로 합류한 베누아 아수-에코토와의 공존을 위해 시즌 개막 후 한 달 간 우측 풀백으로 나섰다.
여름 이적 시장 종료 직전인 8월 말, 지난 시즌부터 관심을 보이던 AS 로마 이적이 급물살을 타면서 구단, 에이전트 간 계약이 완료된 채 메디컬테스트만을 앞둔 이적 직전의 과정까지 가게 됐다. 그러나 계약 직전 선수 본인이 이적을 거부하며 계약은 무산됐다. 이 과정에서 토트넘은 트레이드로 생각했던 미도의 이적건을 이적료를 지불하며 마무리했고, 이미 이영표의 대체자로 파스칼 심봉다를 영입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영표의 입지가 상당히 애매해졌다.
실제로 9월부터 아수-에코토와 심봉다가 주전으로 나서면서 이영표는 순식간에 주전 경쟁에서 밀려나게 됐다. 11월에 심봉다의 부상으로 잠시 기회를 얻었으나 심봉다 복귀 이후 다시 벤치로 물러났다.
이영표가 주전 경쟁에서 밀린 요인 중 하나인 공격 능력 부족은 고질적인 문제점이었다. 원래 크로스 킥력이 부족하고 정확도가 낮아서 드리블 돌파 후 이어지는 낮고 빠른 크로스라면 몰라도 상대를 제치면서 올리는 높은 크로스는 위협적인 경우가 많지 않았다. 높은 크로스는 EPL은커녕 K리그에서도 좋지 못했다.(일명 아리랑 크로스. 또는 두둥실 크로스) 가장 큰 문제점은 왼쪽 윙백이면서도 왼발로 크로스를 못 올렸다는 점이다. 네덜란드 리그에서 뛸 때는 분명 왼발로도 크로스를 올린 적도 적지 않은데, EPL로 가면서 갑자기 그런 모습이 사라졌다. 오버래핑 후에 왼발로 바로 크로스를 올리지 못하고 뒤로 방향을 바꾼 다음에 오른발로 크로스를 올리니 공격템포가 죽고 성공할 리가 없었다. 상대방 수비수와 골키퍼 사이 공간으로 크로스를 못 올리니 이영표의 오버래핑 공격은 성공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12월 2일 15라운드 북런던 더비 원정에서 아수-에코토가 상대 공격수들에게 유린당하며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고, 결국 하프타임에 이영표는 재차 기회를 얻게 된다. 이영표는 달라진 수비력 보여주면서 스카이스포츠로부터 "IMPROVED" 라는 호평을 받았다. 이 경기 이후 이영표는 주전으로 도약하며 팀의 연승에 기여했다. 그렇게 유럽대항전 진출권인 리그 6위까지 반등시키는 데 기여했고 FA컵 8강 진출에도 기여했다.
그러나 2007년 4월 5일 세비야 FC와의 UEFA컵 8강 1차전 원정 경기 풀타임 직후 왼쪽 무릎 바깥쪽 인대가 찢어지는 부상을 당했고, 수술을 받게 되며 그대로 시즌 아웃되고 말았다.
초반 위태로웠던 입지를 시즌 중반 극복해내고 멋지게 반등하는가 했으나 부상으로 인해 아쉽게 시즌을 마무리했다. 또한 특유의 오버래핑 능력과 끈질긴 수비력에 비해 비효율적인 크로스, 작은 피지컬 등 이영표의 한계를 명확하게 보여준 시즌으로, 유럽 무대 데뷔 후 처음으로 주전 경쟁을 치른 시즌이 됐다.
2006-07 시즌 : 31경기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프리미어 리그 | 21 | 20 | 1 | 0 | 0 |
칼링컵 | 1 | 1 | 0 | 0 | 0 |
FA컵 | 5 | 5 | 0 | 0 | 0 |
UEFA컵 | 4 | 4 | 0 | 0 | 0 |
합계 | 31 | 30 | 1 | 0 | 0 |
2.4.3. 2007-08 시즌
시즌 초반에는 지난 시즌 수술 여파로 폴 스톨테리에게 밀려 출전하지 못하다가 스톨테리가 호러쇼를 보이며 개막 후 2연패에 빠지자 조기에 복귀했고, 리그 3라운드 더비전 복귀전을 치르며 풀타임을 소화, 4:0 대승과 함께 토트넘의 시즌 첫 승에 기여했다.그러나 이후 경기들에서 공수 양면에서 부진한데다 팀도 연패에 빠지며 아수-에코토나 가레스 베일에게 주전 자리를 잠시 내주었다.
에코토의 부상과 경험이 부족한 베일의 부진을 틈타 10월부터 다시 주전 자리를 되찾았고, 리그 UEFA컵, 칼링컵 등 모든 경기에서 풀타임을 소화하고 있다. 특히 10월 25일 성적 부진으로 사임한 마틴 욜 감독의 후임으로 부임한 후안 데 라모스 감독 아래에서도 변함없는 입지를 보이며 UEFA컵 토너먼트 진출에 기여했고 칼링컵에선 라이벌 아스날을 상대로 5:1 대승과 함께 결승에 진출시키는 등 올 시즌도 문제 없는 시즌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겨울 이적 시장 막판에 레인저스에서 앨런 허튼이 팀에 합류했고, 185cm의 키를 바탕으로 강력한 피지컬을 장점으로 삼던 허튼은 단숨에 우측 풀백 주전으로 도약했고, 심봉다가 왼쪽으로 자리를 옮기며 이영표를 벤치로 몰아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테무 타이니오, 지우베르투 다 시우바 멜루 등한테도 밀리고 말았다.
2월 이후 이영표의 유일한 출전 경기는 3월 12일 UEFA컵 16강 2차전으로 치러진 친정팀 PSV 에인트호번과의 원정 경기에서의 선발 출전이었고, 그마저도 전반 45분 뒤 교체 아웃되고 말았다.
2007-08시즌 후반기는 이영표의 모든 커리어를 통틀어도 최악의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시즌 30경기를 소화하며 유럽에서 매시즌 30경기 이상 소화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2007-08 시즌 : 30경기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프리미어 리그 | 18 | 17 | 1 | 0 | 0 |
칼링컵 | 4 | 4 | 0 | 0 | 0 |
FA컵 | 2 | 2 | 0 | 0 | 0 |
UEFA컵 | 6 | 6 | 0 | 0 | 0 |
합계 | 30 | 29 | 1 | 0 | 0 |
2.5.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통산 22경기 1도움
지난 시즌을 끝으로 토트넘에서 완전히 전력 외 자원이 됐고, 프리시즌 조차 동행하지 않고 이적을 모색했다. 초기에는 친정팀 PSV로 리턴한다는 설이 돌았으나 선수 본인이 유럽 정상급 리그에서 뛰고자 하는 열망이 강했기 때문에 이내 잦아들었다.
2008년 8월 27일, 이적 시장 막판에 주전 레프트백이자 부주장 데데가 장기 부상 당해 그의 대체자를 찾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토트넘과 계약이 1년 남은 이영표의 영입을 공식 발표한다.[4] 2021년 팬들과 진행한 인터뷰에서 밝힌 바로는 당시 FC 샬케 04에서도 이적 제의가 들어왔으나 당시 팀에 막 부임한 위르겐 클롭이 자신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그 플랜을 아주 상세하게 설명해주었기 때문에 도르트문트로 이적했다고 한다.
계약 기간은 1+1년. 데데가 다음 시즌을 끝마치고 브라질로 복귀하겠다고 밝혔던지라 구단측은 2년 재계약을 제안했으나 이영표 측에서 1년 재계약을 원했다고 한다.
PSV, 토트넘에서 달던 등번호 3번을 달았다.
2.5.1. 2008-09 시즌
합류 직후 경기인 리그 3라운드에선 결장했는데, 실전 감각이 부족한 이영표를 배려하고 더 중요한 경기인 리그 4라운드 샬케와의 레비어 더비 홈 경기를 위해 이영표를 아꼈다. #결국 4라운드 샬케 04전 풀타임을 출전하며 데뷔전을 치렀으나, 불안한 수비력으로 팀은 3실점이나 허용했으나 끝내 3:3으로 비겼다. 이어진 우디네세 칼초와의 UEFA컵 플레이오프 2연전에 모두 출전했으나 패배하며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당시 아직 유망주에 불과하던 마르셀 슈멜처 대신 주전 왼쪽 풀백으로 나섰고, 간헐적으로 우측 풀백으로도 나섰다. 특히 우측 풀백으로 나선 6라운드 슈튜트가르트와의 홈경기에서 크로스로 알렉산더 프라이의 헤더골을 어시스트하며 도르트문트에서 첫 번째
이후 꾸준히 주전으로 나서다가 리그 21라운드 후반 인저리 타임 때 FC 에네르기 코트부스와의 홈경기에서 사비 파비세비치에게 태클을 가해 퇴장 명령을 받았고 2경기 출장 징계를 받았다.
징계에서 복귀했으나 그 사이 데데가 부상에서 복귀했고, 이영표는 그대로 주전에서 밀리며 후반기 잔여 경기에 나서지 못한 채 시즌을 마무리했다.
시즌 종료 후 2009년 5월, 도르트문트 구단과 1년 재계약을 채결했다. 그러나 후반기 팀내 입지가 상당히 애매했고, 데데가 팀에 잔류하기로 한 데다 슈멜처라는 구단이 키우는 유망주까지 있어 도르트문트의 왼쪽 풀백이 포화에 이르자, 이영표는 미련없이 이적을 모색한다. 선수가 이적을 원할 시 FA를 보장한다는 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이적을 추진할 수 있었다. 여담으로 도르트문트 시절 가장 친했던 동료는 마르셀 슈멜처와 마츠 후멜스였다고 한다.
2008-09 시즌 : 22경기(선발 21경기) 1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분데스리가 | 18 | 17 | 1 | 0 | 1 |
DFB-포칼 | 2 | 2 | 0 | 0 | 0 |
UEFA컵 | 2 | 2 | 0 | 0 | 0 |
합계 | 22 | 21 | 1 | 0 | 1 |
2.6. 알 힐랄 FC
이번 시즌 직후 월드컵이 있는 만큼 신중하게 팀을 골랐고, 유럽에 잔류하는 대신 경쟁하면서 경기감각을 잃는 것 대신 과감하게 꾸준히 경기 출장을 할 수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힐랄 FC로 이적했다. 클래스가 훨씬 낮은 사우디리그에선 축구를 가르치다시피 뛰었다.[5]2011년 2월 16일에 벌어진 FA컵인 크라운 프린스컵 8강전 알 아흘리 경기에서 승부차기 키커로 나와 득점에 실패했다.[6] 다행히 골키퍼의 활약으로 겨우 4:3으로 팀이 4강에는 진출했다. 그리고 팀의 크라운 프린스컵 결승 경기에서도 활약하며 팀은 대회 우승했다. 그 당시 결승이 이교도는 들어갈 수 없는 메카에서 치러지는 거여서 이영표를 포함하여 알 힐랄의 외국인 선수들이 참가를 못할 뻔 했으나 왕자의 중재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어쩌면 메카에 들어간 최초의 한국인 이교도일지도 모른다.[7]
2.7. 밴쿠버 화이트캡스 FC
2012-2013
69경기 1골 6도움
69경기 1골 6도움
2.7.1. 2012 시즌
|
2012 밴쿠버 화이트캡스 올해의 선수 |
2011년 6월, 알 힐랄과의 계약만료 이후 알 힐랄과 재계약하지 않고 친정팀 FC 서울에서 FA 신분으로 반 년간 몸을 만들며 거취를 고민하다가 12월 6일 미국프로축구(MLS) 밴쿠버 화이트캡스 FC와 1+1 계약을 확정짓고 새로운 거처를 마련하였다. 자녀들의 교육 문제와 장래 지도자로의 변신을 위한 선택이었다는 입장을 밝혔다. 물론 자신의 트위터에 티켓 필요한 밴쿠버 유학생들 연락달라며 새 팀에 대한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
2012년 4월 29일에는 7년 만에 리그 경기에서 골을 넣었다. 프리킥 골이다.
2012년 7월 20일에는 대한민국 기준 나이 36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북미 프로축구 리그( MLS) 전 경기 풀타임 연속 출전 기록을 달성했다.[8] 그야말로 이영표 선수의 몸관리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방증한다. 대한민국의 하비에르 사네티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다.
2012 시즌 : 36경기 1골 4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메이저 리그 사커 | 33 | 33 | 0 | 1 | 4 |
메이저 리그 사커 PO | 1 | 1 | 0 | 0 | 0 |
캐나다 챔피언십 | 2 | 2 | 0 | 0 | 0 |
합계 | 36 | 36 | 0 | 1 | 4 |
2.7.2. 2013 시즌
대한민국 기준 37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주전 풀백으로서 거의 모든 경기를 소화했다. 10월, 이영표가 현역 은퇴를 발표하며 프로 축구선수로서의 마지막 시즌이 되었다.2013 시즌 : 33경기 2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메이저 리그 사커 | 32 | 30 | 2 | 0 | 2 |
캐나다 챔피언십 | 1 | 1 | 0 | 0 | 0 |
합계 | 33 | 31 | 2 | 0 | 2 |
2.8. 현역 은퇴
2013년 10월 27일 은퇴 경기에서 주장 완장을 찼다.
2013년 10월, 현역에서 은퇴한다고 공식 발표됐다. 그리고 2013년 10월 28일, 공식 은퇴전을 치렀으며 이 경기에서 주장 밴드를 차고 나와 90분을 소화한 뒤에 추가시간에 교체되어 나왔다. 교체사인 뜨자마자 박수 쳐주는 피치 위의 동료들과 한번씩 포옹한 뒤 마지막에 교체선수와 포옹하면서 피치 위에서 완전히 내려왔다. 그리고 2013년 11월 15일, 스위스와의 A매치에서 현역 은퇴식을 치렀다.
사진을 잘 보자, 이영표 선수가 뛰었던 안양 LG 치타스, PSV 에인트호번, 토트넘 홋스퍼 FC,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알 힐랄, 밴쿠버 화이트캡스 FC의 엠블럼과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엠블럼이 이영표 선수의 얼굴과 나란히 실려있다.
이어서 건국대 홍보모델이 됐다.은퇴 이후 후배 선수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앞장서고 있다. 해당기사
3. 국가대표 경력
- 1999년 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 국가대표
-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국가대표
- 2000년 AFC 레바논 아시안컵 국가대표
- 2001년 컨페더레이션스컵 국가대표
- 2002년 CONCACAF 골드컵 국가대표
- 2002년 FIFA 한일 월드컵 국가대표
-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
- 2004년 AFC 중국 아시안컵 국가대표
- 2006년 FIFA 독일 월드컵 국가대표
- 2010년 FIFA 남아공 월드컵 국가대표
- 2011년 AFC 카타르 아시안컵 국가대표
3.1.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3.1.1. 2000 시드니 올림픽
U-17, U-20 대표 경력이 전혀 없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 주목 받는 선수는 아니었으나,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올림픽 대표팀과 이영표가 재학중이던 건국대학교 간의 연습경기에서 허정무의 눈에 들어 올림픽 대표팀에 승선했다. 당시 포지션은 3-4-3 포메이션의 왼쪽 미드필더.올림픽 대표팀에서는 오른쪽에서 영리한 플레이로 주가를 높이던 박진섭과 쌍으로 묶여 ‘좌영표 우진섭’으로 명성을 날렸으며, 이때의 활약을 바탕으로 국가대표에도 발탁되는 영예를 누린다.[9] 당시에는 올림픽 대표팀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성인 국가대표팀에 전격 발탁되는 선수들이 대거 등장했는데, 이때 이영표와 같이 선수들 중 설기현, 이천수, 박지성 등은 훗날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떠받치는 기둥으로 자리잡는다.
3.1.2.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1
이운재 [[와일드카드(스포츠)| W ]] · 2
조병국 · 3
현영민 · 4
박요셉 · 5
김영철 [[와일드카드(스포츠)|W ]] · 6
박용호 · 7
변성환8 김두현 · 9 이천수 · 10 박지성 · 11 최태욱 · 12 이영표 [[와일드카드(스포츠)| W ]] VC · 13
김동진 · 14
박규선15 조성환 · 16 김용대 · C
|
박항서 최강희 · 최진한 · 김현태 |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 이운재, 김영철과 함께 와일드카드로 선발되었다.
대한민국은 준결승인 이란전에서 승부차기까지 갔을 때, 이영표가 찬 공은 아쉽게 골대를 맞았다.[10] 이 한번의 실축으로 대한민국은 이란에 패해 3-4위전으로 밀려났고, 울산에서 열린 3-4위전에서 태국을 이기고 동메달을 수상했다. 이 실축 때문에, 월드컵 탈락 한풀이를 하러 온 이동국은 시즌 후 빼도박도 못하고 군대 확정이 되었다.
3.2.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3.2.1. 2000 AFC 아시안컵 레바논
올림픽 대표팀을 맡고 있던 허정무 감독의 눈에 들어 1999년 6월 12일 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11]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른다. 예나 지금이나 대표팀 선수 대다수가 어려서부터 재능을 인정받고 U-17, U-20, 올림픽 팀(U-23)을 차례로 거쳐 대표팀에 뽑히는 엘리트 코스를 밟는 것에 비하자면 이영표는 대기만성형으로 또래들에 비해 다소 늦게 주목받은 경우다.[12]이 시절 이영표는 확실하게 윙백으로 자리 잡은건 아니었고, 수비형 미드필더나 윙어로도 종종 나섰다. 윙어로 나설 때는 간간히 좋은 공격력을 보여주며 득점도 종종 기록했다. 특히 중국에게 강했는데, 중국 대표팀과 평가전에서 결승골을 넣었고, 레바논 아시안컵에서도 중국을 상대로 선제골을 넣었다.
3.2.2.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1
이운재 · 2
현영민 · 3
최성용 · 4
최진철 · 5
김남일 · 6
유상철 VC · 7
김태영 · 8
최태욱9 설기현 · 10 이영표 · 11 최용수 · 12 김병지 · 13 이을용 · 14 이천수 · 15 이민성 · 16 차두리 17 윤정환 · 18 황선홍 · 19 안정환 · 20 홍명보 C · 21
박지성 · 22
송종국 · 23
최은성
|
거스 히딩크 박항서 스태프
핌 베어벡 ·
정해성 ·
김현태 ·
압신 고트비
|
2002 한일 월드컵 32강 조별리그 3경기 포르투갈 전에서 루이스 피구를 막아내는 이영표
그리고 히딩크 감독의 지옥훈련도 무난히 통과하여 월드컵 대표팀에도 승선했다.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선 쓰리백을 사용한 대표팀의 왼쪽 측면 미드필더로 나서 대회 기간 내내 맹활약했다.[13] 특히 조별리그 3차전에서 루이스 피구가 이끌던 포르투갈 대표팀을 좌영표-우종국의 미칠 듯한 콤비네이션으로 도륙내 버렸다. 이영표의 크로스를 받은 박지성의 환상적인 결승골로 기억되는 그 날의 경기는 대한민국 축구 팬들에게 영원히 잊을수 없는 추억이다. 뿐만 아니라 16강전인 이탈리아전에서 안정환의 헤딩 골든 골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이 대회에서만 결승골 어시스트 2개를 기록했다.
8강 스페인전에서는 김남일의 부상으로 인한 빠른 교체 이후 이을용과 함께 수비에 집중했으나 호아킨 산체스에게 상당히 고전했다.[14] 비단 두 선수뿐 아니라 당일 한국 대표팀 모두가 체력적 부담, 실력의 차이, 부상으로 인한 악재 등이 겹쳐 스페인에게 거의 두들겨 맞다시피 했으나, 이운재의 선방과 수비를 강화하여 승부차기전까지 이끌었다.
4강 독일전에서는 공수양면으로 좋은 모습을 보이긴 했으나 장신의 독일 수비진에 큰 영향을 주진 못했고 발락에게 결승골을 내주고 탈락했다.
터키와의 3ㆍ4위전에도 선발출전해 2:3으로 패한 채 4위로 대회를 마감한다.
3.2.3. 2006 FIFA 월드컵 독일
1
이운재 C · 2
김영철 · 3
김동진 · 4
최진철 · 5
김남일 · 6
김진규 · 7
박지성 · 8
김두현9 안정환 · 10 박주영 · 11 설기현 · 12 이영표 · 13 이을용 · 14 이천수 · 15 백지훈 · 16 정경호 17 이호 · 18 김상식 · 19 조재진 · 20 김용대 · 21 김영광 · 22 송종국 · 23 조원희 |
딕 아드보카트 핌 베어벡 스태프
압신 고트비 ·
홍명보 ·
정기동
|
2006 독일 월드컵 명단에 당연히 포함되었으며, 팀은 원정 최다 승점 4점 기록과 원정 첫 1승 1무 1패, 조 3위 월드컵 17위를 기록했고 아쉽게 16강은 진출 실패했다.
당시 김동진의 존재와 우측 윙백자리에 마땅한 카드가 없던 관계로 오른쪽 윙백을 맡았다. 아드보카트 감독이 선임되며 조원희가 발탁되어 다시 왼쪽으로 돌아가나 싶었지만 조원희는 월드컵에서 기용되지 않았다. 당시 대표팀은 포백을 도입하는 과도기였고 따라서 국대에서도 풀백을 보게 되었는데 앞서 설명한 것처럼 왼쪽이 아닌 오른쪽이라 아무래도 덜 익숙한 곳이다보니 항상 대표팀의 아픈 손가락으로 기억됐다.
다만 첫경기 토고전에는 김동진이 예선에서 경고 누적을 당해 1차전에서 출전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동안 준비한 포백대신 스리백으로 나왔고 송종국이 선발로 나가며 본래 자리인 왼쪽 윙백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스리백 카드를 쓴 탓인지 수비가 크게 흔들리는 모습을 노출했고, 프랑스전부터 다시 포백을 사용하면서 남은 두경기 모두 오른쪽 풀백을 맡았다.
3.2.4.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1
이운재 · 2
오범석 · 3
김형일 · 4
조용형 · 5
김남일 · 6
김보경 · 7
박지성 C · 8
김정우9 안정환 · 10 박주영 · 11 이승렬 · 12 이영표 · 13 김재성 · 14 이정수 · 15 김동진 · 16 기성용 17 이청용 · 18 정성룡 · 19 염기훈 · 20 이동국 · 21 김영광 · 22 차두리 · 23 강민수 |
허정무 정해성 스태프
박태하 ·
김현태
|
2008년 11월 20일 사우디아라비아전에서 차범근, 홍명보, 황선홍, 유상철, 김태영, 이운재에 이어 FIFA 센추리 클럽에 가입했다.
그의 경기력과 신상에 전혀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남아공 월드컵에 출전했고, 4경기 모두 풀타임으로 뛰며 풀백으로서의 능력을 아낌없이 보여줬다. 단적인 예로 4-1로 대패한 아르헨티나 전은 이영표-박지성의 좌측 라인은 정상적으로 가동되어서 공격을 잘 막아냈지만 반대쪽 라인이 숭숭 뚫리면서 실점이 전부 우측에서 터졌다.
3.2.5. 2011 AFC 아시안컵 카타르
1
정성룡 · 2
최효진 · 3
황재원 · 4
조용형 · 5
곽태휘 · 6
이용래 · 7
박지성 C · 8
윤빛가람9 유병수 · 10 지동원 · 11 손흥민 · 12 이영표 · 13 구자철 · 14 이정수 · 15 홍정호 · 16 기성용 17 이청용 · 18 김보경 · 19 염기훈 · 20 김신욱 · 21 김용대 · 22 차두리 · 23 김진현 |
조광래 박태하 스태프
서정원 ·
김현태 ·
알렉산드레 가마
|
2011년 AFC 아시안컵에 국가대표로 출전했고, 3ㆍ4위전까지 6경기를 모두 뛰었다. 마지막까지 대한민국 최고 풀백으로서의 능력을 보여주었고, A매치 127경기 출장[15]라는 기록을 남긴 채 박지성과 함께 태극마크를 반납했다.
[1]
보통 체력안배가 많이 필요하지는 않은 골키퍼들이 출전시간 1위를 차지하고 3,000분대 중후반 정도를 뛴다. 그걸 훌쩍 뛰어넘는 수준으로 경기에 나왔다.
[2]
슛포러브에서 밝히길 이 때 챔피언스리그 우승시 보너스가 13억이었다고 한다.
[3]
EPL은 에레디비지보다 수준이 훨씬 높다. 특히 킥이 발달한 EPL에서 크로스를 허용한다는 것은 상당히 위협적인 일이기에 수비수는 상대방이 크로스를 올리지 못하도록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 반면 네덜란드 리그는 크로스를 올려도 별로 위협적인 크로스가 드물기에 수비수들이 적극적으로 막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이영표는 네덜란드 리그에서 하던 것처럼 상대방이 크로스 올리는 것을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하였다.
[4]
클롭이 마인츠 감독 시절에
차두리가 마인츠에서 선수로 뛴 적이 있는데 이 때 인연이 되어 차두리에게 이영표에 대해 물어보았다고 한다. 이후, 클롭은 시간이 흘러
지동원을 영입할 때도 차두리에게 먼저 물어보았다고 한다.
[5]
사우디아라비아 선수들에게 지적했던 많은 문제점들이 2018년 러시아 월드컵까지도 고쳐지지 않고 있었을 정도. 이 문제는 결국 알 힐랄이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차지한 2019년에서야 조금씩 개선되기 시작하더니 결국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 본선 진출로 겨우 이 문제들에서 벗어나는 데에 성공했다.
[6]
승부차기를 잘 못 찬다.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도 4강
이란전 마지막 키커로 나갔다가 실축해
금메달을 날리고
이동국을
군대로 보내버린 바 있다. 일명 이동국 군대가라슛!
[7]
사실 종교를 판단할 방법이 마땅치 않아 옷만 비슷하게 차려입고 무슬림 행세를 하면 이교도라도 들어갈 수는 있다고 한다.
[8]
7월 20일 기준 21경기 연속 풀타임 출장.
[9]
박진섭 역시 이영표와 함께 국가대표에 승선하였으나, 피지컬의 부족으로 인해
히딩크감독 부임 후 국가대표에 승선되지 못한다.
[10]
일명
이동국 군대가라 슛이었다.
[11]
여담으로 이 대회가
1970년대에 박스컵에서부터 이어졌던 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의 마지막 대회였다. 당시 참가팀은 대한민국을 제외하면 멕시코, 이집트, 크로아티아. 우승은 1년 전의 돌풍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크로아티아가 차지했다.
[12]
기대주
박진섭은
박주영이 나타나기 전까지 천재소리를 듣던 유망주였지만, 체력이 모자라고 체격이 왜소하다는 이유로 강판되었으며, 이후 그의 자리를 꿰찬 선수가 바로
송종국이었다.
[13]
다만, 1~2차전에는 결장했었다. 개막 전 훈련 도중 웬
기계인간과 부딪히면서 부상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14]
히딩크 감독은 이을용과 이영표를 같이 기용할 경우 왼쪽 측면 미드필더에는 이을용, 수비형 미드필더에는 이영표를 기용하였다.
[15]
통산 최다 출장 3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