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31 08:50:08

윤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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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FC 2024 시즌 스쿼드
<colcolor=#fff> 1 이광연
VC
· 2 김영빈
VC
· 3 이지솔 · 5 조현태 · 6 김이석 파일:부상 아이콘.svg · 9 코바체비치 · 10 가브리엘 · 13 이기혁 · 14 김대우 파일:부상 아이콘.svg · 15 진준서
16 김우석 · 17 유인수 · 18 김강국 · 19 김경민 · 20 윤석영
C
· 21 박청효 · 22 이상헌 · 24 헨리 · 26 박경배
27 홍성무 · 28 조진혁 · 30 신민하 · 31 조민규 · 32 박상현 · 34 송준석 · 37 정한민 · 41 김유성 · 42 김동현
43 김해승 · 47 양민혁 · 66 류광현 · 74 강투지 · 77 박태랑 · 88 황문기
VC
· 90 김형진 · 97 이유현 · 99 하지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윤정환 ·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정경호 ·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최효진 ·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송창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전상욱 ·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정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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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한민국 U-23 대회 주장
서정원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윤정환
1996 애틀란타 올림픽
김도균
2000 시드니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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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FC 감독
Gangwon FC Head coach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전력강화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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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d5828><colcolor=#ffffff> 이름 윤정환
尹晶煥 | Yoon Jong-hwan
출생 1973년 2월 16일 ([age(1973-02-16)]세)
광주광역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72cm, 63kg
직업 축구 선수 ( 공격형 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축구 해설가
소속 <colbgcolor=#dd5828><colcolor=#ffffff> 선수 유공 코끼리/부천 SK (1995~1999)
세레소 오사카 (2000~2002)
성남 일화 천마 (2003)
전북 현대 모터스 (2004~2005)
사간 도스 (2006~2007)
감독 사간 도스 유스 (2008 / 코치)
사간 도스 (2009~2011 / 코치)
사간 도스 (2011~2014)
울산 현대 (2015~2016)
세레소 오사카 (2017~2018)
무앙통 유나이티드 FC (2019)
제프 유나이티드 이치하라 지바 (2020~2022)
강원 FC (2023~ )[1]
행정 대한축구협회 (2024~ / 전력강화위원)[2]
국가대표 40경기 3골 ( 대한민국 / 1994~2002)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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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dd5828><colcolor=#ffffff> 학력 광주방림초등학교 (1979~1985 / 졸업)
광주북성중학교 (1985~1988 / 졸업)
금호고등학교 (1988~1991 / 졸업)
동아대학교 체육대학 ( 사회체육학 91 / 학사)[3]
서명 파일:윤정환서명.png
}}}}}}}}} ||

1. 개요2. 선수 경력
2.1. 플레이 스타일
3. 지도자 경력4. 감독 기록
4.1. 대회 기록4.2. 개인 수상
5. 논란 및 사건 사고
5.1. 2016년 악성 팬들의 패드립 사건5.2. 국민건강보험료 체납
6. 여담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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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축구 선수 출신 감독.

2. 선수 경력

1 이운재 · 2 현영민 · 3 최성용 · 4 최진철 · 5 김남일 · 6 유상철
VC
· 7 김태영 · 8 최태욱
9 설기현 · 10 이영표 · 11 최용수 · 12 김병지 · 13 이을용 · 14 이천수 · 15 이민성 · 16 차두리
17 윤정환 · 18 황선홍 · 19 안정환 · 20 홍명보
C
· 21 박지성 · 22 송종국 · 23 최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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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박항서
스태프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핌 베어벡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정해성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김현태 · 파일:미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압신 고트비

동아대학교를 졸업하고 유공 코끼리에 입단하였다. 그리고 아나톨리 비쇼베츠 감독의 1996 애틀랜타 올림픽 국가대표로 뽑혀 대표팀의 플레이 메이커로 큰 역할을 했다. 이후 조직력을 중시하던 당시 발레리 니폼니시 감독 밑에서 헝가리 출신의 쇼모지 요제프, 그리고 당시 무명이었던 김기동, 이을용, 윤정춘 등 미드필더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외에 1997년~1998년에 유공 코끼리/부천 SK에서 발레리 니폼니시 감독의 지도를 받았던 제자로는 남기일, 조성환 등이 있다.

이 시기 유공 코끼리는 니폼니시와 윤정환으로 대표되는 팀이었다. 비인기 구단이었으나, 니폼니시와 윤정환 때문에 팬클럽이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수원 삼성 블루윙즈 서포터 탄생의 큰 역할을 한 것이 고종수였듯이, 유공 코끼리(부천 SK)의 서포터 탄생에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윤정환이다.

당시 '유공-부천 경기는 표값이 아깝지 않다'는 찬사를 받을 정도였으니, 이쯤 되면 윤정환이 구단에서 갖는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당시 발레리 니폼니시 감독은 윤정환에게 별다른 전술적인 지시를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워낙에 잘하니까 알아서 잘한다는 이유였다.

이렇게 부천 SK에서 1999 시즌까지 활약한 후, 당시 불어닥쳤던 J리그 진출 열풍에 합세해 이적료 150만 달러에 2000년 J리그 세레소 오사카로 이적하였다. 세레소 오사카에서도 주전 미드필더로 활약하였으나 당시 세레소의 주축이었던 일본 국가대표 출신의 모리시마 히로아키[4] 노정윤이 중원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포지션이 수비 쪽으로 밀리면서 대한민국에서와 같이 인상적인 활약은 못했다. 게다가 대한민국에서는 윤정환이 보기 드문 유형의 선수이지만, 일본에서는 흔한 유형의 선수인 것도 한몫했다.

그러다 2003년 다시 성남 일화 천마[5]로 이적하였으나, 감독과의 불화에다가 세레소 시절과 마찬가지로 중앙에는 터줏대감 신태용이 버티고 있던 탓에 활약은 미미하였다. 그 후 2004년에 전북 현대 모터스로 이적하였고, 2006년에 당시 2부 리그 구단이었던 사간 도스로 이적한 뒤 2008년 3월에 은퇴했다.

국가대표는 40경기에 출장했다. 1994년 3월 미국과의 친선 경기에서 데뷔하였고, 1998년 12월 4일 베트남과의 아시안 게임에서 첫 A매치 득점을 올렸다. K리그의 스타 선수였지만 월드컵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1994년, 1998년 두번 다 월드컵 국가대표에서 탈락했다. 그를 뽑았던 것은 히딩크 감독. 2002년 3월 열린 핀란드와의 친선 경기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며 히딩크 감독의 눈도장을 받았고, 월드컵 개막 직전 스코틀랜드와의 평가전에서 1골 1도움으로 깜짝 활약을 펼쳐서 히딩크 감독의 눈도장을 확실히 찍고 이 활약으로 본선 멤버에 승선할 수 있었으나, 출전은 하지 못했다. 하술하듯 뛰어난 선수였으나 히딩크호와는 플레이 스타일이 맞지 않았던 것이 그 이유.

2.1. 플레이 스타일

장점도, 단점도 고전적 10번의 전형이라 할 만한 선수였다. 엄청난 시야와 패스 속도와 정확도를 자랑하면서 화려하고 창의적인 스루패스를 쫙쫙 뿌려 주었다. 볼 간수도 잘해서 빠른 드리블로 제끼기보다는 정확한 드리블로 지키는 드리블도 수준급이었다. 소위 말하는 테크니션이었으며 또한 세트피스에도 뛰어나서 프리킥으로도 골을 기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위의 하이라이트에서 볼 수 있듯 중거리 슛에도 능한 킥에 관해서는 만능, 마스터였다.

그러나 느린 발에 몸싸움이 안되는 약한 피지컬과 172cm의 단신으로 제공권에 문제가 있으며 특히 적은 활동량과 빈약한 수비력[6]이라는 양날의 검과 같은 선수였다. 김기동(1998년부터 을용타 이을용 선수가)이 어마어마한 활동량으로 뒷공간 다 커버해주지 않으면 부천은 공수 불균형으로 알아서 무너졌다. J리그에서는 잠시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긴 했지만 전형적인 공격 몰빵 공격형 미드필더다. 그래서 윤정환을 중심으로 팀을 짤 수 있는 클럽팀에서는 몰라도, 당시 강한 피지컬과 빠른 발을 중심으로 하던 한국 국대에서 윤정환이 한 자리를 차지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다만 현역 시절 "체력이 약하다"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 한국 축구계가 스테미너와 힘, 몸빵 등을 모두 '체력'이라고 지칭하면서 졸지에 스테미너가 약한 선수 취급을 받았는데 윤정환은 몸싸움이 약하고 활동량이 적은 선수지 스테미너가 약한 선수는 아니었다. 오히려 활동량이 적은 덕분에 체력 온존형이라 풀타임을 뛰는데는 문제가 없었다.

당시 한국 축구계는 닥치고 피지컬이었던 시절이라, 윤정환 같은 소위 테크니션이라는 선수들이 종종 체력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반쪽짜리 선수 취급을 받았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윤정환이고 이전에는 최문식, 이후에는 고종수, 심지어 안정환까지 비슷한 평가를 받았다. 한국 축구계는 체력에서 스테미너와 힘을 한일 월드컵 준비 과정에서야 비로소 구분하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장점과 단점이 확실한 선수다.

PC통신의 마지막 전성기였던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엔 윤정환 기용 문제가 중요한 논쟁거리였다. 애틀란타 올림픽 대표팀과 유공 코끼리에서 보여준 화려한 패스 플레이에 매료된 수많은 팬이 윤정환 위주로 대표팀을 운영할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비쇼베츠호(올림픽대표)에서 함께 핵심 멤버로 활약했던 영혼의 단짝 최용수와 상반되게 차범근호(국가대표)에서 중용되지 못했다. 이는 당시 전술 자체가 중원은 원톱일 땐 김도근 - 유상철, 투톱일 땐 김도근 없이 유상철 혼자 중앙 전체를 커버하다시피하고 양 사이드에 윙을 네 명(좌 고종수-하석주, 우 이상윤-서정원) 세워놓고 김도훈, 최용수 등 아시아 톱 클래스였던 타겟맨 머리에 무한 크로스 올리던 전술이라 유상철 자리에 윤정환을 넣는다는 것은 중원을 버린다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차범근 감독이 투박하지만 실리주의였던 독일식 축구를 배웠던 데다, 이미 딥라잉 플레이 메이커였던 홍명보의 존재 때문에[7] K리그에서 아무리 뛰어난 플레이 메이커라도 홍명보와의 공존은 불가능했고, 홍명보의 방패 역할을 할 피지컬 좋고 터프한 선수를 중용하면 중용했지 신태용, 윤정환 같은 선수는 설 자리가 애초에 없었다.

이후 허정무 감독이 이끌던 대표팀에서도 확실한 주력 멤버로는 도약하지 못하였다. 그나마 허정무는 3-5-2 포메이션에서 윤정환을 사용하기 위해 유상철-박지성의 더블 볼란치(수비형 미드필더)를 시도하기도 했으나, 결국 포기했다. 특히 최용수와 다시 만나 주전급으로 출전해서 금메달을 노렸던 방콕 아시안 게임[8] 8강전에서 태국에 불의의 일격을 당해 준결승 진출이 좌절되면서, 더욱 "윤정환은 국대와는 안 맞는다"는 인식이 굳어진 면도 있다.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 대표 선수로 선발되었으나, 소속팀에서 공격형 미드필더 포지션으로 뛰던 윤정환의 자리가 거스 히딩크 감독의 3-4-3 포메이션에는 없었기 때문에 그 실력에도 단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다. 그나마 윤정환의 존재감을 알렸던 건 한일 월드컵 직전에 열렸던 스코틀랜드와의 경기에서 안정환과의 콤비 플레이로 (일명 투정환 전술) 추가 골을 넣었던 그때 딱 한 번이었다.

압박전술에 걸맞은 강인한 피지컬, 많은 활동량과는 거리가 먼 선수였고 특히 포지션 교체에 능한 올라운더를 원했던 히딩크 감독에겐 지극히 계륵 같은 존재였다. 결국 김병지, 최은성, 최성용, 현영민과 함께 2002 한일 월드컵에서 단 1분도 뛰지 못한 멤버가 되었다.[9] 결국 이름값이 있음에도 한 번도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했다.[10]

정리를 하자면 대한민국이 배출한 역사상 최상위권 패스 마스터 중 한 명이지만 시대를 잘못 탄 불운의 아이콘이었다. 10년 정도 일찍 태어나서, 예컨대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에서 활약할 수 있었다면 종종 롤모델로 거론되던 콜롬비아 카를로스 발데라마처럼 활용되어 선수 본인과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양쪽에 윈윈이 되었겠지만 말이다.[11]

윤정환으로 시작된 테크니션의 잔혹사는 이관우 등으로 이어졌고 이후 기성용이란 테크니션이 대표팀에 자리를 잡아서야 종결되었다.[12]

3. 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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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감독 기록

4.1. 대회 기록

4.2. 개인 수상

5. 논란 및 사건 사고

5.1. 2016년 악성 팬들의 패드립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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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터즈의 코치진 버스 막기 및 악성 팬들의 패드립 등 추태 부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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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국민건강보험료 체납

2019년 국민건강보험료를 체납해 소유 부동산 압류 당한 사실이 드러났다. 하지만 완납을 하고 며칠 후 압류도 풀렸다. 바로 낸 걸로 보아 단순 과실로 보인다.

6. 여담

  • 지금도 회자되는 해프닝 하나. 1997년 4월 26일 부천 SK 대 울산 현대의 경기에서 부상으로 쓰러진 선수를 위해 상대팀 울산 현대 선수들이 의도적으로 공을 밖으로 내보냈다. 이후 경기가 재개되자 윤정환은 상대 골키퍼 김병지에게 공을 보내려 했는데, 너무 세게 차서 골이 되어버렸다. 그는 세레모니 대신 죄송합니다 하는 제스처를 취했고 니폼니시 당시 감독은 골을 먹혀주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외국인 선수들이 열심히 막아 골을 넣는게 지연되었다. 이 건은 흔히 외국인 선수들이 지시를 이해하지 못해서 그랬다라고 알려져있으나 이찬행 감독(당시 부천 SK 수비수)의 증언에 따르면 상대가 골 넣는건 좋은데 키퍼 가랑이 사이로 넣으려고 해서 화가 나서 열심히 막았다고 한다.
  • 1998년 말 무렵 리그 1의 중위권 FC 메스로부터 영입 제의가 왔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때 프랑스로 전지훈련을 떠났을 때 FC 메스와 평가전이 있었는데 그때 윤정환을 구단 관계자들이 지켜봤다고 한다. 하지만 그 당시 대부분의 선수가 그랬듯이 공식적인 협상을 제대로 못하고, 2000년 J리그 세레소 오사카에 입단했다. 만약 FC 메스로 갔더라면 국가대표팀에서 윤정환에게 더 많은 기회가 있었을 수도 있다.
  • 일본에서 오래 생활해서 그런지 한국어에서 일본 억양과 발음이 많이 묻어나온다는 평가가 있다.
  • K리그 감독 재임 시절 몇몇 기자가 "구단에서 좋은 선수들을 사준다고 했는데 윤정환이 거절했다"는 소문을 비공개 방송에서 퍼뜨렸으나 이는 앞뒤 과정을 생략하고 단순히 당시 윤정환의 부정적인 여론을 이용해 재밋거리[14]로 퍼뜨린 썰에 가깝다. 자세한 사정을 들어보면 해당 선수들은 팀에서 요구하는 높은 이적료와 한 선수의 경우 높은 연봉[15] 때문에 결렬된 것이라는 얘기 또한 있다. 당시 일본에서만 지도자 생활을 하여 한국 문화를 잘 몰랐던 윤정환은 기자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뒷얘기도 있다. 인터넷 방송에서 몇 마디만 좀 떠들어주면 윤정환 감독에 대해 몇 배를 부풀려 MSG를 쳐서 퍼져 나가는데 이러한 여론을 이용한 것이라 보면 된다. # #
  • 지도자 경력 대부분을 언더독 팀에서 보낸 데다[16] 울산 감독 시절의 부진이 팬들의 뇌리에 박혀 있기 때문인지 한 골만 넣으면 걸어잠그는 수비적인 축구를 한다는 이미지가 있다. 강원 FC 감독 부임 첫해에도 강등권 싸움을 하느라 수비 축구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2024년에 본인의 공격 철학을 강원에 성공적으로 안착시키면서 여론을 어느 정도 반전시켰다.
  • 2015년 울산에서 부진하자 "사간 도스에서 재미 없는 축구를 해서 짤렸다."는 식의 소문이 떠돌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2014년 사간 도스의 축구 스타일은 팬들이 매우 만족했고 2015년 울산에서 보여준 축구와 전혀 달랐고 당시 후방 빌드업을 위주로 한 공격 작업을 펼쳤다.[17] 나중에 나온 현지 보도에 따르면 "보드진에서는 여름 시장에서 유럽 등에서 이름값이 높은 선수를 영입해 마케팅 등으로 수익을 내길 바랐고 조직력을 중시하던 윤정환 감독은 조직력이 깨질 것이 우려돼 여기서 마찰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소문우 일부 팟캐스트[히든풋볼]에서 퍼졌는데 윤정환 감독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이용해 악의적으로 퍼뜨린 것으로 보인다.
  • 안현범과의 불화설 역시 일부 악의적인 기자들과 팬들이 퍼뜨리고 일부 축구 사이트에선 정설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안현범 측에서 블로그를 통해 윤정환 감독은 고마운 감독이며 본인이 구단에 직접 이적 요청을 했다고 말하며 결국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19] 실제로 아직까지 둘은 사제관계로 연락도 자주 주고 받는다. 하지만 일부 팬들은 안현범의 이러한 얘기에도 아직까지 눈과 귀를 막고 "윤정환이 안현범을 내쫓았다!"라며 퍼뜨리고 있다. 타진요 사건와 매우 비슷하다.
  • 2023년 세레소 오사카 30주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모리시마 히로아키 구단 사장과 인터뷰를 했다. 6개월 간 일본어를 쓸 일이 없었는데도 유창한 일본어 실력을 유지했다. #
  • 울산 현대 감독 중 부임 맡은 첫해 기준 역대 최저 성적인 것처럼 알려져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윤정환 감독은 첫해 7위였으나 김호곤 감독은 첫해 8위였고 심지어 김정남 감독은 부임 첫해 꼴지를 기록했다.[20]
  • 2024년 새 대표팀 대표팀 감독 선임과 관련하여 "현직 감독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발언을 한 기사가 나가 팬들에게 많은 비판을 들었다. 하지만 이는 K리그 미디어데이를 앞두고 기자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전력강화위원회 위원인 윤정환에게 현 진행 상황에 대하여 물어 봤고 그에 대한 원론적인 답변을 한 것이 보도 과정에서 앞뒤가 자르고 나간 것으로 밝혀졌다. SBS 축덕쑥덕에 따르면 윤정환 감독은 오히려 해외파 감독 선임파였다고 한다. https://m.youtube.com/watch?v=iKLxZeuPDwI #

7. 관련 문서



[1] 시즌 도중 부임. [2] 2024년 2월 20일 조직 개편을 통해 선임. 비상근직이기에 프로 구단 감독직과 겸임이 가능하다. [3] # [4] 한일 월드컵에도 출전했다. [5] 당시 성남은 2001년부터 2003년까지 K리그 세 시즌 연속 우승으로 리그에서 강호로 손꼽히는 팀이었고, 2003년이면 당시 모기업인 통일교 산하 주식회사 일화의 탄탄한 자금력을 이용하여 김도훈 등 스타 플레이어를 수집하던 시기다. [6] 수비력도 수비력이지만 애초에 수비가담 자체를 잘 하지 않았다. 당대 플레이메이커 성향의 선수들은 대다수가 이러했고, 윤정환 역시 여기서 벗어나지 않았다. [7] 포지션은 다르지만 2010년대의 기성용과 1990년대의 홍명보의 공통점은 이 둘을 빼면 후방에서 볼이 전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차피 월드컵 본선에서는 선수비 후역습 전술 밖에 달리 도리가 없고, 필드 전체의 압박이 보편화되지 않은 1990년대에는 다소 기술적이지 않을지언정 속공 상황에서 열린 공간으로 패스하는 것쯤은 다른 선수들에게도 (패스 성공률을 떠나) 큰 무리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 이전의 후방에서 중원으로, 혹은 후방에서 다이렉트하게 전방으로 볼이 넘어가는 단계로, 적재적소의 날카로운 전진 패스와 전방으로 단번에 넘기는 정확한 롱패스는 기용에서 다소 제약이 따르더라도 홍명보가 네 차례나 월드컵 본선에서 모두 주전으로 출전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도 홍명보를 중용하기 위해 주전으로 좌우와 윗선에 피지컬 좋고 투지있게 대인 방어에 임하는 최진철, 김태영, 김남일, 유상철을 배치했는데, 이 상황에서 윤정환까지 쓴다면 전술적 제약이 너무나 커진다. [8] 당시는 아시안 게임에 나이 제한이 없어서 국대 A급 선수들 몇 명을 포함해서 선수단을 꾸렸다. [9] 하지만 윤정환 본인은 히딩크에 대해 전혀 섭섭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 듯하다. 아니, 월드컵 때 한 경기도 뛰지 못했을 땐 섭섭한 감정이 있었지만, 이후 감독이 되어 보니 피지컬을 중시하던 히딩크를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선수 지도 등에 관한 부분을 모두 히딩크가 지휘하던 모습을 보고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하면서 지도자로서 현재는 매우 존경한다고 밝힌 바가 있다. 현역 시절에는 볼 예쁘게 차는 테크니션이었으나 지도자로서 윤정환은 체력 훈련을 입에서 단내 나게 시키는 걸로 일본에서 유명했다. [10] 1994, 1998 월드컵엔 명단에도 들지 못했다. [11] 다만 발데라마도 한 시대 뒤떨어졌다는 평을 받았던데다 1990 월드컵 당시 우리나라 대표팀의 공격형 미드필더가 유럽, 남미 선수들과 맞먹는 피지컬을 자랑하던 최순호이고 바로 이전인 1986 월드컵 때는 몸싸움을 잘하고 체력과 기동력이 좋던 박창선이었음을 감안하면 그 때도 힘들었을 수 있다. [12] 그러나 상술한 바와 같이 기성용은 후방에서의 조율과 롱패스가 장점이라는 면에서 홍명보의 후계자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물론 공격형 미드필더 역시 소화할 수 있지만 대표팀에서나 소속팀에서나 3선의 중앙 미드필더 내지 수비형 미드필더로 뛴 시간이 훨씬 더 많고 선수 본인의 롤 모델도 중앙 미드필더 스티븐 제라드다. 진짜 테크니션이 대표팀에 중용되기 시작한 때는 오프더볼과 활동량까지 겸비한 황인범까지 가야 한다. [13] 국외는 둥가. [14] 거기에 에이전트들의 언플과 이간질까지 [15] 결렬이 된 것이 납득이 가는 금액이다. [16] 본인 스스로 좋은 환경보다는 밑바닥에서부터 도전하는 것을 더 선호한다고 밝힌 적이 있다. # [17] 윤정환 감독이 해임 전 J1리그에서 득점 수도 상위권이었다. [히든풋볼] 등에서 수많은 검증되지 않은 소문을 뿌려댔다. 정확히는 윤정환 감독만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다. [19] 울산은 당시 국가대표급 선수가 많았기 때문에 주전으로 뛰기 위해서라고 한다. [20] 결국 이러한 비판은 파훼되기 때문에 구단 최초 하위 스플릿이라는 말장난이 가끔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