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8 09:36:02

유상철

유상철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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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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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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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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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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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홍명보
(1999~2002)
유상철
(2003~2004)
이운재
(2004~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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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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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rowcolor=#ffffff> 초대 2대 3대 4대 5대
허정무
(1984~1986)
최강희
(1987~1990)
최인영
(1991~1992)
최영일
(1993~1995)
김현석
(1996~1997)
<rowcolor=#ffffff> 6대 7대 8대 9대 10대
송주석
(1998)
박정배
(1998~1999)
김종건
(1999)
김상훈
(2000~2001)
정정수
(2001)
<rowcolor=#ffffff> 11대 12대 13대 14대 15대
김도균
(2002)
유상철
(2003)
조세권
(2003)
박진섭
(2004)
현영민
(2005)
<rowcolor=#ffffff> 16대 17대 18대 19대 20대
유경렬
(2006~2007)
박동혁
(2008)
유경렬
(2009)
오장은
(2010)
곽태휘
(2011~2012)
<rowcolor=#ffffff> 21대 22대 23대 24대 25대
김영광
(2013)
김치곤
(2013~2015)
김태환
(2016)
김성환
(2017)
강민수
(2017~2018)
<rowcolor=#ffffff> 26대 27대 28대 29대 30대
이근호
(2019)
신진호
(2020)
이청용
(2021~2022)
정승현
(2023)
김기희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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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철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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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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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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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 · 1998 · 2002
파일: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심볼.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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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철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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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FA 센추리 클럽 가입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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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위 선수 및 현 소속 구단 출전 횟수 첫 경기 마지막 경기
1 홍명보 은퇴 <colbgcolor=#eeeeef,#191919> 136회 1990.02.04
(vs 노르웨이)
2002.11.20
(vs 브라질)
2 이운재 은퇴 132회 1994.06.11
(vs 온두라스)
2010.08.11
(vs 나이지리아)
3 차범근 은퇴 130회 1972.05.07
(vs 이라크)
1986.06.10
(vs 이탈리아)
4 이영표 은퇴 127회 1999.06.12
(vs 멕시코)
2011.01.28
(vs 우즈베키스탄)
5 손흥민 토트넘 홋스퍼 FC 125회 2010.12.30
(vs 시리아)
2024.03.26
(vs 태국)
6 유상철 은퇴 120회 1994.09.11
(vs 우크라이나)
2005.06.03
(vs 우즈베키스탄)
7 김호곤 은퇴 117회 1971.11.14
(vs 베트남)
1979.03.04
(vs 일본)
8 기성용 FC 서울 112회 2008.09.05
(vs 요르단)
2019.01.07
(vs 필리핀)
9 김영권 울산 HD FC 111회 2010.08.11
(vs 나이지리아)
2024.03.26
(vs 태국)
10 김태영 은퇴 104회 1992.10.21
(vs UAE)
2004.07.19
(vs 요르단)
이동국 은퇴 104회 1998.05.16
(vs 자메이카)
2017.09.05
(vs 우즈베키스탄)
12 조영증 은퇴 102회 1975.03.19
(vs 베트남)
1986.10.05
(vs 사우디아라비아)
황선홍 은퇴 102회 1988.12.06
(vs 일본)
2002.11.20
(vs 브라질)
14 박성화 은퇴 101회 1975.07.29
(vs 말레이시아)
1984.12.10
(vs 카타르)
15 박지성 은퇴 100회 2000.04.05
(vs 라오스)
2011.01.25
(vs 일본)
FIFA 센추리 클럽 명단 기준 (2024.03.14. 기준)
※ FIFA에서 공인한 기록과 대한축구협회에서 집계한 기록은 차이가 있다. 대한축구협회 선수별 A매치 기록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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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리그 30주년 레전드 베스트 XI
FW
황선홍
FW
최순호
MF
김주성
MF
신태용
MF
유상철
MF
서정원
DF
최강희
DF
김태영
DF
홍명보
DF
박경훈
GK
신의손

파일:K리그 40주년 엠블럼.svg
일간스포츠 선정 K리그 40주년 베스트 11
FW
이동국
FW
데얀
MF
염기훈
MF
신태용
MF
유상철
MF
김주성
DF
하석주
DF
홍명보
DF
최강희
DF
박경훈
GK
김병지
대한민국의 前 축구인
파일:인천감독유상철.png
<colbgcolor=#eeeeee><colcolor=#000000> 이름 유상철
柳想鐵|Yoo Sang-chul
출생 1971년 10월 18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응암동
(現 서울특별시 은평구 응암동)
사망 2021년 6월 7일 (향년 49세)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묘소 충청북도 충주시 앙성면 본평리 산43-13
진달래메모리얼파크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 문화 류씨 (文化 柳氏)
신체[1] 184cm, 78kg, A형
직업 축구 선수 ( 유틸리티 플레이어[2] / 은퇴)
축구 감독 은퇴
소속 <colbgcolor=#eeeeee><colcolor=#000000> 선수 울산 현대 호랑이 (1994~1998)
요코하마 F. 마리노스 (1999~2000)

가시와 레이솔 (2001~2002)
울산 현대 호랑이 (2002~2003)
요코하마 F. 마리노스 (2003~2004)
울산 현대 호랑이 (2005~2006)
감독 춘천기계공업고등학교 (2009~2011)
대전 시티즌 (2011~2012)
울산대학교 (2014~2017)
전남 드래곤즈 (2018)
인천 유나이티드 FC (2019)[3]
인천 유나이티드 FC (2020~2021 / 명예 감독)
국가대표 124경기[4] 18골 ( 대한민국 / 1994~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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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정보 더 보기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eeeeee><colcolor=#000> 학력 서울응암초등학교 ( 졸업)
경신중학교 ( 졸업)
경신고등학교 ( 졸업 / 83회)
건국대학교 문과대학 ( 중어중문학 / 학사)
건국대학교 대학원 ( 체육학[5] / 석사[6])
종교 개신교 ( 기독교대한복음교회)[7]
가족 부 유청, 모 이명희[8], 1남 2녀 중 둘째[9]
배우자 최희선(1971년생, 1997년 결혼)
장녀 유다빈(1998년생)
장남 유선우(2000년 8월 8일생)
차남 유성훈(2007년생)
서명 파일:유상철서명.png
}}}}}}}}} ||

1. 개요2. 생애3. 기록
3.1. 대회 기록3.2. 개인 수상3.3. 수훈3.4. 통산 성적
3.4.1. 국가대표
4. 플레이 스타일5. FC 바르셀로나 이적설?6. 여담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축구인.

아시아 축구에서 홍명보와 함께 월드컵 올스타 팀에 선정된 유이한 선수다.[10] 대한민국 축구 선수 중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유틸리티 플레이어의 대표격이자 교과서적인 선수였다.

1990년 청소년 대표에 발탁됐으나 1991년 U20 세계 청소년 대회에서는 남북 단일팀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1994년 3월, 미국전에서 A매치에 데뷔한 후 2005년까지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8강 한일전에서 동점골을 넣으며 역전승의 발판을 마련했고 이후 '한일전의 사나이'란 별명이 따라다니기 시작했다.[11]

K리그에서는 선배 김현석과 후배 이천수와 함께 울산 현대의 레전드로 유명하다. 특히 1996년 K리그 첫 우승과 2005년 두번째 K리그 우승을 모두 함께한 유이한 기록을 남겼다.[12] K리그에서도 수비수, 미드필더, 공격수로 모두 베스트 11에 선정되었다.

선수 은퇴 후 춘천기계공업고등학교 축구부, 대전 시티즌, 울산대학교 축구부, 전남 드래곤즈,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을 맡으며 지도자로도 활동했다. 그러나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으로 재임 중이던 2019년 11월 19일,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고 투병 중임을 밝혔으며 1년 반 이상을 병마와 싸우다 끝내 2021년 6월 7일 19시 20분, 결국 향년 49세를 일기로 2002년 한일월드컵 국가대표 선수 중 가장 먼저 사망했다.[13] 네이버 스포츠

2. 생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유상철/생애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 기록

3.1. 대회 기록

3.2. 개인 수상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2002[14]
  •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 MVP: 2003
  • FIFA XI: 2000
  • AFC 아시안 올스타[15]: 1998
  • K리그 베스트 XI: 1994[16], 1998[17], 2002[18]
  • K리그 득점왕: 1998
  • K리그 30주년 레전드 베스트 XI: 2013
  • 자황컵 체육대상 남자 최우수상: 2002
  • 험멜코리아-스포츠투데이 선정 올해의 공격수 부문 선수상: 2002
  • 올해의 프로축구 대상 프로스펙스 특별상: 2004

3.3. 수훈

3.4. 통산 성적

3.4.1. 국가대표

소속 대표팀
연령
경기
득점
대한민국 U - 17 0 0
U - 20 0 0
U - 23 8 0
A 대표 124 18
통산 132 18

4. 플레이 스타일


A매치 124경기 출전이 말해주듯 홍명보, 황선홍과 함께 1990년대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선수다. A매치 출전이 많다는 것은 국가대표 감독이 누구든, 전술이 어떻든 항상 국가대표로 뽑혔다는 뜻이고 그렇게 뛰면서도 35세까지 롱런했으니 내구성도 엄청나게 좋은 선수였다.

무엇보다 그의 큰 특색은 한국 축구 역사상 허정무와 함께 최고의 전천후 만능형 유틸리티 플레이어[19]라는 점이다. 프로 데뷔는 윙백으로 했고, 대표팀 데뷔는 스위퍼로 했지만 최전방 공격수부터 공격형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 최후방 수비수까지 모두 가능한 만능형 유틸리티 플레이어다. 현역 시절 K리그에서는 수비수, 미드필더, 공격수로 모두 리그 베스트 일레븐에 뽑혔고 특히 공격형 미드필더(프리롤)로 뛰면서 득점왕까지 했을 정도. 이 정도 수준의 유틸리티 플레이어는 한국 축구 역사상 전무후무하며, 해외 선수로 범위를 확대한다 해도 네덜란드의 루드 굴리트[20],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21], 필립 코쿠, 제임스 밀너정도 말고는 그 사례를 찾기가 힘든 굉장히 특이한 케이스이다. 그야말로 '한국의 루드 굴리트' 라는 수식어가 딱 들어맞는 선수.

뛰어난 체력, 위치 선정, 많은 활동량으로 오프더볼 플레이가 굉장히 뛰어났고[22] 몸싸움, 패스, 슈팅, 킥, 헤더, 태클, 수비 등 모든 부분에서 우수하여 어떤 포지션에서도 제 역할을 했다. 이러한 이유로 국가대표 감독이 누구이든 유상철은 항상 주전으로 뛰었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오프더볼 플레이의 경우 카메라에 잘 잡히지 않기 때문에, 감독은 유상철을 중용하지만 팬들은 잘 이해를 못할 때가 많았다.

킥력이 우수해서[23] 중거리 슛으로 인상적인 골도 여러번 기록했다. 경합 능력이 우세하고 유럽 선수들과 대등하게 맞설 수 있는 피지컬을 가지고 있어 제공권 장악에 능하고 몸싸움과 태클 능력도 좋아 상대의 공격을 미드필드부터 압박하여 끊어내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본 포지션인 윙백에서 뛸 때 공수겸장의 센스와 막강한 피지컬이 환상적인 시너지를 연출했다. 1998 프랑스 월드컵 때는 윙백으로 뛰어 골을 넣기도 했는데,[24] 당시 대표팀 동료 김병지는 유상철은 윙백으로 할 때가 대단했다고 한다. 다른 포지션으로의 유상철도 훌륭했지만 윙백으로서의 유상철이 더 대단했고 적절한 포지션이었다고 한다.[25]

단점은 그 당시 한국 선수들이 그랬듯이 시대적 한계로 인해 발밑이 부드러운 선수는 아니었다. 강력한 킥력을 바탕으로 후방에서 길게 차주는 롱킥을 통한 공격 전개가 가능했음에도 홍명보를 대신할 빌드업 리더까지는 되지 못했고 공이 어이없이 뜨는 경우가 잦았는데 볼 터치가 둔탁했기 때문이다. 그런 면을 보면 요즘 태어나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면 정말 완벽한 미드필더로 극강의 활용폭을 보여줬을지도 모를 선수다.

실제 경기를 진행하는 감독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선수였다. 즉 카메라로 봤을 때는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기둥이 되는 플레이를 하는 선수였다. 참고로 박지성이 국가대표에 갓 데뷔했을 때도 유상철과 비슷한 이미지였는데 특별히 기술이 뛰어나고 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많이 뛰는 선수였다.[26]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활약 이후 축구 팬들의 축구를 보는 눈도 달라졌기 때문에 이후의 유상철의 평가 역시 올라갔다.[27]

유틸리티 플레이어로서의 활약은 특히 2002년 월드컵에서 거스 히딩크가 중용하며 두드러졌다.[28] 유상철 한 명으로 모든 유틸리티 플레이가 가능하니 교체 선수에 따라 그만큼 전술의 폭이 넓었는데, 그 백미는 바로 16강 이탈리아전이다. 히딩크는 0:1로 뒤지던 후반전에 수비수 3명을 빼고 황선홍, 이천수, 차두리 3명의 공격수를 투입했는데, 특히 한국 수비의 핵인 홍명보까지 빼면서 공격수 5명[29]을 필드에 두는 초강수를 뒀는데 이런 전술이 가능했던 이유는 바로 유상철과 박지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상철은 선발 때는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로 뛰다가 김태영이 황선홍으로 바뀌면서 김태영의 자리인 백3의 좌측 스토퍼로, 그 후 홍명보가 빠진 자리에 백4[30]의 중앙 수비수로 들어가서도 변함없는 수비의 안정이 가능했다.[31] 참고로 박지성은 윙에서 박스 투 박스, 수비형 미드필더로 포지션이 변경됐다. 자세한 포지션 변화는 히딩크호/이탈리아전 문서 참조.

특히 교체 선수가 투입될 때마다 유상철의 포지션은 계속해서 바뀌었는데 이게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플레이가 아니다. 결국 유상철의 이러한 유틸리티 플레이 능력으로 2:1 역전승을 이룰 수 있었다. 히딩크의 스타일이 유틸리티 플레이어를 중시했기 때문에 유상철의 활약이 크게 두드러졌으며 사실 그 어느 감독이든 유상철은 국가대표에서 항상 디폴트였다. 유상철 이후 대한민국 국가대표 미드필더 중 유상철과 완전히 비슷한 플레이를 했던 선수는 없다.[32]

승부욕이 매우 강해서 코뼈가 부러진 상태에서도 경기에 그대로 뛰면서 결승골을 터트린 적도 있지만,[33] 한편으로 상대 선수들과 마찰을 벌인 적도 있었다.[34] 2003년 K리그에 있을 때 당시 부산의 이장관의 백태클에 빡친 나머지 주먹다짐을 벌이다 5경기 출전 금지 징계와 벌금을 문 적도 있고, 2004년 J리그 요코하마 시절에는 ACL에서 만난 성남의 서혁수에게 비신사적인 보복행위를 했다 옐로카드를 받기도 했다.[35]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유상철은 시대적인 한계인 볼터치 등 기본기 부족만 제외하면[36] 축구지능, 포지션 소화도, 피지컬, 체력, 결정력, 수비력, 킥력, 공중볼 경합, 투쟁심, 자기관리 등 거의 축구의 모든 면에서 국가대표급 능력을 가지고 있던 걸출한 선수였다.

5. FC 바르셀로나 이적설?

파일:mPJdWkT1.jpg

유상철과 관련한 유명한 이야기 중 하나가 FC 바르셀로나 이적설이다. 주된 줄거리는 '1998~1999년에 바르셀로나로 이적할 수 있었는데 구단의 반대로 실패했다'는 것이다. 1990년대 축구계 사정을 모르는 일부 축구팬들은 이를 루머 또는 거짓으로 치부하거나 유상철의 에이전트가 몸값을 올리기 위해 했던 일종의 언론플레이로 보기도 한다.

결론적으로는 어느 정도 사실에 가깝다. 1998년 여름 FC 바르셀로나의 루이 판할 감독은 아약스 로날드 데 부어, 프랑크 데 부어를 영입하고 싶어했으나 성사되지 않아서 그 대안으로 유상철을 테스트하고 싶어했다. 당시 네덜란드 기사 2002년 유상철을 소개하는 스페인 언론 기사 하지만 유상철은 어떤 이유에선지 테스트를 받지 않았다. 2019년 5월 유상철이 직접 언론과 인터뷰한 바에 따르면 즉시 영입이 아니라 입단 테스트여서 스스로 거부했고, 에이전트와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은 점도 있다고 했다. 관련기사

특히 FC 바르셀로나의 수석 코치였던 로날드 쿠만은 유상철에게 관심이 많았다. 로날드 쿠만은 2000년 피테서 아른험의 감독이 되었을 때 이미 영입을 시도했으나 유상철의 갑작스러운 부상 때문에 불발되고 만다.[37]

당시 한국 축구계는 해외 축구 사정에 눈이 어두운 탓에 재능있는 선수들이 유럽에 진출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한국 선수들의 몸값이 지나치게 높았으며, 국가대표로서의 자존심을 앞세워 입단 테스트도 거부했다.[38] 국내팀들은 해외 리그 이적을 국부 유출이라고 생각해서 달갑게 보지 않았으며, 몇 안되는 국내 에이전트들은 J리그 구단과 주로 연결되어 있었다.[39]

물론 유상철이 FC 바르셀로나의 테스트에서 탈락했을 수도 있고, 입단을 했더라도 반드시 성공할 수 있었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유상철의 FC 바르셀로나 진출 실패 사례는 1990년대 한국에 세계적인 명문팀이 주목할 정도로 실력을 갖춘 중앙 미드필더가 있었다는 사실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6. 여담

  • 차구차구에서는 유상춘이라는 가명으로 뜬다. 그리고 감독 유상철 카드와 선수 유상춘 카드를 동시에 쓰는 게 가능하다.
  • 피파에서는 2006 기준 CB 능력치 80에 공격, 미드필드 어디에서도 준수하게 활약할 수 있는 능력치를 가지고 있다.
  • 2002 국가대표팀 선수들 중 인터넷에서 가장 많이 패러디되어 망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홈런왕 유상철이라는 별명부터 수직상승 로켓슛까지 나욌으며 결국 이를 소재로 한 '돌아온 홈런왕 유상철'이라는 제목의 플래시 게임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유상철 본인도 그 게임을 직접 해봤다고 한다. 그래서 이 게임 제작자가 사과하는 마음에서 후속작으로 아폴로 안톤 오노가 히딩크 감독을 납치해서 그를 구하기 위해 오노 떼거지를 날려버리고 마지막에 부시와 대결하는 내용의 홈런왕 유상철 히딩크를 구해줘!라는 플래시 게임을 만들었다.
  • 2002년 10월 국내 무대에 복귀했다. 복귀 후 인터뷰에서 남은 경기 전승과 경기당 1골을 공언, 8경기 9골 기록하였으며, 경기당 1골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인지 마지막 경기에서 스트라이커로 나와 헤딩으로만 해트트릭을 기록해 괴물같은 활약을 한 적이 있다.
  • 인맥 관리를 굉장히 잘한다. 워낙 유명한 짤이다 보니 여러 축구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알려지면서 유상철을 대표하는 짤이 되었고 심지어 궁민남편에 유상철이 출연했을 때 이 짤을 직접 본인에게 보여주었다! 유상철이 말하길 악마의 편집이라고 하며 실제로는 다른 후배들에게도 박지성과 같이 대했다고 한다.
  • 괜찮은 외모 덕인지, 은퇴 이후에 드라마에 2편이나 카메오로 출연하면서 연기에 눈을 돌린 적도 있다. 물론 본인은 내 인생에서 지우고 싶은 게 있다면 연기라고 할 정도로 흑역사 취급하는 중. 그중 2008년 당시 김치 치즈 스마일에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했다. 해당 영상
  • 2019년 5월 12일 인천 드림파크컨트리클럽 파크 코스(파72·7104야드)에서 열린 한국프로골프( KPGA)투어 제2회 휴온스 엘라비에 셀러브리티 프로암(총상금 6억 원·우승상금 1억 2,000만 원) 최종 라운드 17번 홀(파3)에서 홀인원을 기록했다. # 홀인원 이틀 뒤에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에 선임됐다.
  • 선수 시절과 이후 고교 감독 시절, 대전 시티즌 감독 시절만 해도 갈색 곱슬 장발머리를 자랑하는 풍성충이었건만, 40대 이후 특히 전남-인천 감독 부임 이후 정수리 탈모가 급격히 진행되어 심각한 수준이라는게 드러났다. 라디오스타에서 김병지가 "유상철, 김태영이 내 머리를 보고 너무 부러워한다."는 말로 확인사살했다.
  • 날아라 슛돌이 감독으로 있던 시절 당시 7살의 이강인을 지도한 이력이 있다. 이강인이 대활약할 때마다 스승인 유상철도 끊임없이 조명되고 있는데, 유상철은 이강인을 어렸을 때부터 기술적으로 완성된 선수라고 표현하며[40] 세계적 유망주가 될 것이라 예견했고, 그것은 사실 이 되었다. 정작 유상철 본인은 이 질문에 대해 자신이 가르쳐 준 건 별로 없고 이강인이 스스로 잘 성장한 것이라면서 말을 아꼈다. 인재 보는 안목이 매우 뛰어난 듯하다. 유소년에 관심이 많았던걸로 알려져있다. 이강인은 이후 유상철이 1998 프랑스 월드컵 벨기에전에서 데뷔 골을 넣었던 파르크 데 프랭스를 홈 구장으로 쓰는 파리 생제르맹 FC에 입단하게 된다.
  • 2020년 3월 31일에 모친상을 당했다. 그리고 15개월 후 본인 역시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와 아들 모두 췌장암으로 사망한 걸 보면 유전인 듯. 여담으로 대장암에 걸렸다가 회복된 개그맨 유상무가 자신의 유튜브에 암에 걸리는 이유라는 제목으로 동영상을 올렸는데, 어머니 포함 형제 7명 중 3명이 암이고 그 3명 중 2명이 대장암이었다며 의사와 상담 끝에 내린 결론이 암은 유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의견을 개진한 바 있다. 참고로 3명 중 나머지 한 명은 유방암이었으며, 아들도 대장암에 걸렸다고 한다.
  • 월드컵에 출전한 대한민국 국대 선수 중에서 2경기 연속으로 득점한 선수가 총 2명이 있는데, 그 중 한 명이 바로 유상철이다. 1998년 조별리그 3차전에서 득점하고, 4년 뒤 2002년 조별리그 1차전에서 득점했다.(벨기에-폴란드전) 다른 한 명은 바로 손흥민.(멕시코-독일전) 차이점이라면 두 대회 조별리그의 마지막 경기와 시작 경기에서 득점한 유상철과 달리, 손흥민은 대한민국의 월드컵 출전 선수들 중 최초로 단일 대회에서 2경기 연속골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최초로 한국인 월드컵 단일 경기 멀티골은 2022년 조규성이 달성했다.
  • K리그 감독 시절 팀이 하위권이었던 탓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담배를 많이 폈다고 하며, 암 진단을 받은 뒤에는 끊었다고 한다.
  • 일본에서 오랜 시간 선수 생활해서 일본어가 상당히 유창했으며[41], 대전 시티즌 시절 제자였던 바바 유타에게 왜 본인을 영입했는지를 유창한 일본어로 자세히 설명해줬다고 한다. #
  • 2002년 1월 골드컵 미국과의 경기에서 페널티킥을 실축하였다. 인사이드 킥을 했으나 공은 골키퍼 가슴팍 정면에 안겼으며 히딩크 감독이 향후 페널티킥에서 키커로 쓰지 않을 것임을 밝혔던 적이 있다. #
  • 피파 온라인 4에서 박주영, 차두리와 함께 대한민국 팀을 플레이하는 유저들에게 인기가 상당히 많은 카드로, 멀티 포지션이 다 되는 코리안 굴리트 취급을 받고 있다. 이 덕인지 한일 월드컵을 모르거나 희미한 세대들도 기억을 잘 해주는게 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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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한축구협회 공식 프로필 [2] 선수 시절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에서 준수한 활약을 했다. 특히 K리그에서는 공격수- 미드필더- 수비수 포지션 모두 올스타에 뽑혔으며 미드필더로 득점왕을 한 경험도 있다. 프리 롤로 나선 적도 많지만 기본적으로 주 포지션은 라이트백중앙 (공격형) 미드필더였다. [3] 시즌 중 부임. [4] FIFA 공인 기록 (120경기) [5] 운동역학 전공 [6] 석사 학위 논문 : 대학 축구선수의 하지 등속성 근력과 무산소성 파워에 관한 분석(2006. 2). [7] 장례식 역시 개신교식으로 치렀으며 묘소에 시편 23편 1절의 성경구절이 적힌 액자가 있다. [8] 2020년 3월 31일 오전 사망. 공교롭게도 사인은 아들과 같은 췌장암이다. [9] 누나는 1992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10] 교체까지 포함하면 나카타 히데토시를 합쳐 3명이다. [11] 이후 황선홍이 역전골을 넣고 이하라 마사미가 동점골을 넣어 2:2가 되었고 경기 종료 5분을 남겨두고 황선홍 페널티 킥을 유도한 후 직접 성공시켜 3:2로 역전승했다. 역대 한일전 명경기 중 하나로 꼽히는 경기. 유비와 함께 유상철이라 하면 많이 떠올리는 별명이다. [12] 현재 울산 현대에서 2022년과 2023년 연속 K리그 우승을 제외한 기록을 보면 2005년과 2022년에 우승을 했던 후배 이호다. [13] 항암 치료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의사도 놀랄 정도로 병세가 호전되기도 했지만 남은 암세포가 하필이면 뇌 쪽으로 전이하면서 병세가 극히 악화됐다. [14] 미드필더 부문에 선정되었다. 즉, 2002년에 리그에서는 공격수로 뛰고 월드컵에서는 미드필더로 뛰면서 리그 베스트 11과 월드컵 올스타팀에 모두 올랐다는 뜻이다. (월드컵 올스타팀은 스쿼드 형식으로 뽑으며 베스트 11이 아니다. 유상철과 홍명보는 16인 안에 선정되었다.) [15] 2000년 폐지 [16] 수비수 [17] 미드필더 [18] 공격수 [19] 김주성이나 최순호(수비까지는 내려가지 않았다)가 부상과 운동 능력 저하로 후방 포지션으로 전환한 것을 고려하면 커리어 내내 팀 전술에 따라 여러 포지션을 훌륭하게 소화했던 유상철은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유상철은 부상이나 운동능력 저하 때문에 여러 포지션을 거친게 아니라 오히려 강력한 피지컬을 꾸준히 유지했고, 또 어느 포지션에 갖다놔도 기본 이상을 해줬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20] 유상철과 굴리트 둘 다 공격/중원/수비 모든 포지션을 소화해본 경험이 있고 어디에서나 준수한 활약을 했으며, 골키퍼는 해본 적이 없다. [21] 이 선수는 아예 골키퍼까지 가능했다는 소리도 있다. [22] 파울루 벤투 감독이 2019년 4월 24일 풋볼팬타지움을 방문해 2002년 한일 월드컵 경기 영상을 다시 보고는 유상철의 움직임이 굉장히 뛰어났다고 극찬했다. [23] 공식 최고 기록은 128km/h. [24] 그 유명한 벨기에전 동점골이다. 네덜란드전 대패로 인해 차범근 감독이 경질당한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악과 깡으로 만들어낸 이 골로 인해 벨기에를 예선 탈락 시켰으며 한국도 1무를 거둠으로써 월드컵 최하위를 면했다. [25] 로날트 쿠만도 유상철이 계속 오른쪽 윙백에서 뛰었더라면 세계적인 선수가 되었을 거라는 말을 했다고도 하니 유상철의 최적의 포지션은 윙백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다만 윙백 하나로 포지션을 고정하기에는 유상철의 다재다능함이 빛나기도 했고, 무엇보다 히딩크호 시절의 좌우 윙백은 이영표- 송종국이라는 대한민국 대표팀 역사상 역대를 논할 정도로 뛰어났던 조합이었다. 이영표와 송종국을 기용하고, 유상철을 다른 포지션에 배치하는 것이 더 매력적이었다는 이야기다. [26] 박지성은 체격이 작아서 유상철보다 더 저평가를 받았고, 허정무에 의해 처음 국가대표에 발탁되었을 때 욕도 많이 먹었다. 별로 잘하지도 못하고 그냥 열심히만 뛰는 선수인데 왜 자꾸 넣느냐는 비판이 많았다. 이후에 기술적인 부분이 업그레이드 되어 한국 축구의 레전드가 된 것이다. [27] 다만 여전히 유상철이 수행했던 박스 투 박스형 마당쇠 유형의 미드필더는 국내에서 저평가 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요인 중 하나가 대한민국의 축구는 축구장에서 보는게 아니라, TV중계에 의존하는 경향이 커서 그렇다. 실제 경기장에서 유상철이나 박지성의 플레이를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말 밖에 안 나온다고 한다. 박지성에 대한 평가가 영국인들쪽이 더 좋은 이유도 거기에 있을 수 있다. [28] 월드컵에서 유상철은 9개의 포지션을 소화했다. [29] 설기현-황선홍- 차두리를 3톱으로, 이천수- 안정환을 2선으로 [30] 이영표-유상철-최진철-송종국 [31] 어차피 홍명보는 대인수비가 아니라 커버 플레이와 빌드업을 보고 쓰는 선수라서 수비력은 다른 선수로도 대체가 가능했다. 빌드업은 경기 초반부터 크리스티안 비에리 프란체스코 토티의 거센 압박에 홍명보가 맥을 못 추고 있었고, 수세에 몰린 채 카운터 어택 위주로 전개했기 때문에 굳이 고집할 필요가 없었다. [32] 유틸리티 플레이어 계보는 유상철 이전에는 허정무를 필두로 조영증, 박성화까지 1950년대 중반 출생 세 명이 있었고 이 세 명보다 한세대 뒤로 조민국이 있었다. 그 뒤로 유상철과 같은 2002 멤버인 송종국이 있고 김정우 고요한이 있는데 허정무는 센터백을 소화한 적이 없다. 조영증, 박성화, 조민국은 주 포지션은 중앙 수비수이나 최전방까지 폭넓게 소화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데 히딩크 이전까진 유틸리티 플레이어에 대한 이해나 육성 노하우가 부족했던 한국 축구 현실 속에(송종국이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온갖 포지션을 누빌 때 축구인들은 언제까지 실험이냐, 선수 망친다고 욕하기 바빴다.) 관리도 못받고 마구 굴려지며 몸은 몸대로 축나고 공수 어느 한쪽도 완전히 개화하지 못해 어정쩡한 위치로 남았다. 히딩크호에서 스위퍼부터 세컨드 스트라이커까지 전부 소화해본 송종국은 전성기에 유상철 못지 않은 유틸리티 플레이어였으나 문제는 그 전성기가 겨우 3년 남짓이었다. 김정우는 측면을 소화 못했고 센터백도 수비수들의 줄부상으로 인한 임시방편이었다. 송종국 정도는 아니지만 역시 커리어가 확 꺾이며 전성기가 짧았다. 고요한은 측면과 중앙을 넘나들었고 때때로 K리그에선 정상급 활약을 펼친 시즌도 있으나 여러모로 유상철에 비하면 비교할 수준이 안 되기 때문에 대표팀에는 필요할 때마다 그때그때 잠깐잠깐 얼굴을 비추는 수준이었다. [33] 장지현의 말에 의하면 완전히 머리만을 갖다댄 게 아니라 아예 얼굴로 공을 들이박았다고 한다. [34] 선수 시절 별명이 유비였는데, 처음엔 성이 유씨라서 붙은 별명이었지만 온화하고 세심한 성격과 강한 리더십이 닮았다고 하여 많이 언급되었던 별명이었기에 후술할 사례들도 자주 있었던 일이기보단 당시 유상철의 성격과 다른 모습이라서 기억을 하는 경우가 많다. [35] 당시 마크 중에 중심을 잃은 서혁수가 유상철의 배를 잡아 넘어 트리자, 넘어진 유상철이 다리로 서혁수의 어깨를 찬 것. 상황에 따라 레드카드를 받을 수 있었지만, 당시 심판이 혐한으로 유명한 인간이라 적당히 넘어갔다. [36] 물론 최순호, 최문식, 윤정환, 서정원 등 기술 좋은 선수들이 아에 없진 않았지만 당시는 '축구=무작정 뛰어다니다가 골을 넣는 것' 정도로 받아들여지던 시절이라 기본기는 무시되다시피 했다. 괜히 2002년 월드컵을 대비하면서 거스 히딩크가 죽어라고 기본기 훈련만 시킨게 아니다. [37] 설에 의하면 로날드 쿠만은 유상철이 오른쪽 윙백에서 계속 뛰었더라면 세계적인 선수가 되었을 것이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38] 이에 관해서 우여곡절 끝에 르 샹피오나 RC 스트라스부르에 입단했던 서정원의 이야기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때는 우리나라 선수가 유럽에 나간다는 건 가능성이 좀 희박했어요. 많이 힘들었고 차범근 감독님이야 유일하게 특출난 분이셨고 그런 와중에... 예를 들어 이렇게 생각하면 되죠. 동남아 필리핀, 태국 선수를 우리나라 프로팀에서 스카우트 한다는... 이런 거랑 똑같아요. 유럽에서는 우리나라 선수를 거창하게 스카우트 제의하고 그럴 정도는 아니었어요. 그런데 뭐가 걸림돌이냐면 스카우트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선수들인데 이적료가 많은 거예요. 이적료가 한국에서 오는 선수들이 왜 이렇게 이적료를 많이 달라고 하느냐. 일반적으로 남미나 구라파(유럽)쪽에 그런 선수 무지 많거든요. 그런 선수들도 다 유럽에 처음 올 때는 이적료가 100만 불이니 150만 불이니.. 그때 당시에는 그렇게 주고 오는 선수가 없었어요. 호나우두 같은 선수가 바르셀로나 올 때는 15만 불 받고 온 선수예요. 중국 선수들이 영국에 많이 나가는 이유가 이적료도 없이 나가서 연봉도 조금 받아요. 1억. 우리나라 돈으로 한 10만 불 뭐 그렇게 받고 나가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유럽의 팀들은 싼 선수들 일단 데려다 쓰지 뭐. 그런 식이었는데 우리나라는 유독 이적료 150만 불 100만 불 달라고 하니까 와서 보여달라 이거지 한 번 보자." [39] 2001년 무렵 이천수는 유럽 진출을 위해 프랑스 출신 에이전트와 계약했고, LOSC 릴, 브레시아 칼초 같은 몇몇 팀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을 수 있었다. [40] 7살 때 자신과 골대 맞추기 대결을 해서 이긴 바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41] 어떻게 보면 당연한 얘기겠지만 해외 리그에서 성공하는 선수들은 대체적으로 그 나라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경우가 많다. 종목은 다르지만 동 시기에 일본에서 활약했고 성공한 선동열 역시 일본어를 잘 구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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