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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1세

사생아 윌리엄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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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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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f091f><colcolor=black> 왕호 윌리엄 1세
(William I)
출생 1028년
프랑스 왕국 노르망디 팔레스
사망 1087년 9월 9일 (향년 58세)
프랑스 왕국 노르망디 루앙
재위기간 노르망디 공작
1035년 7월 3일 ~ 1087년 9월 9일
잉글랜드의 왕
1066년 12월 25일 ~ 1087년 9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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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f091f><colcolor=#fff> 별칭 정복자 (Le Conquérant / The Conqueror)
사생아 (Le Bâtard / The Bastard)
아버지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1세
어머니 에를레바
배우자 파일:800px-Blason_Comte-de-Flandre.svg.png 플랑드르의 마틸다 (1051년 결혼 / 1083년 사망)
자녀 슬하 4남 4녀
로베르 2세, 리처드, 아델리자, 세실리아, 윌리엄 2세, 콘스탄스, 아델라, 헨리 1세
종교 가톨릭 }}}}}}}}}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플랑드르의 마틸다와의 결혼2.3. 젊은 노르망디 공작, 잉글랜드 침공2.4. 잉글랜드 국왕 즉위2.5. 북부 원정 및 대학살2.6. 말년
3. 가족 관계
3.1. 자녀
4. 평가5. 여담

[clearfix]

1. 개요

파일:william.jpg
바이외 태피스트리에 나오는 한 장면.[1]
<colbgcolor=#810000><colcolor=#fadb43> 고대 노르만어 Williame I
고대 영어 Willelm I
영어 William I
프랑스어 Guillaume I
라틴어 Gulielmus I / Willelmus I

윌리엄 1세 잉글랜드 왕국이다. 유럽 대륙에서 바다를 건너 잉글랜드를 정복한 최후의[2] 노르만 정복이 마지막 잉글랜드 정복으로 알려졌으나, 엄밀하게 따지면 최후의 잉글랜드 정복은 명예혁명이라 볼 수 있다. 물론 본인이 직접 무력을 일으켜 잉글랜드를 정복한 이민족 군주로는 진짜로 윌리엄 1세가 마지막이다. 또한 아직도 영국 왕족의 뿌리는 이곳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으니 이 표현이 적절하기도 하다.] 정복자였다.

원래는 노르망디 공국 공작에서 노르만 정복을 통해 잉글랜드 왕국의 왕이 된 인물 노르만 왕조의 창시자.

프랑스식 이름은 기욤으로 노르망디 공작으로는 기욤 2세다. 하지만 기욤은 현대 프랑스어 형태이고, 당시 노르만인들이 쓰던 고대 노르만어 기록에는 Williame, 앵글로색슨족 고대 영어로는 Willelm이다. 전자의 경우 윌리아므, 후자의 경우 윌렐름 비슷한 발음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3] 보통 정복왕 윌리엄으로 알려졌으나 사생아이라는 별명도 있다.

2. 생애

2.1. 유년기

윌리엄은 1028년 노르망디 공작인 악마공 로베르 1세(Robert I) (1000년 ~ 1035년)와 평민 출신 내연녀 에를르바(Herleva of Falaise) (1003년 ~ 1050년) 사이에서 태어났다.[4][5] 하지만 정식 혼인관계에서 태어나지 않았기에 사생아였고, 따라서 사생아왕[6]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일부 전설에 따르면 태어날 때 산파가 막 태어난 갓난 아이를 짚을 깔아놓은 바닥에 누이자마자 아기가 손으로 짚을 한 움큼 쥐었다고 한다.

어머니 에를르바는 출신마저 미천했고[7] 기본적으로 사생아에게 매우 엄격했던 시대에 로베르 1세가 이런 사생아를 후계자로 삼은 이유는 그의 유일한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유년 시절 초기를 어머니 아를레트의 고향인 팔레즈에서 보냈고, 로베르 1세가 예루살렘 순례를 마치고 귀환하던 중 갑자기 병을 얻어 죽자 일곱 살에 노르망디 공작이 되었다. 예루살렘 순례를 떠나기 전에 사생아 아들인 윌리엄을 후계자로 지정했던 덕분에 공작위를 계승받긴 했지만, 사생아라는 출신 때문에 끊임없이 견제하는 친척들과 맞서야 했다. 로베르는 생전 봉신들에게 윌리엄에게도 충성을 서약하게 했지만, 사후 친척들의 단순한 조롱에서 암살 시도까지 괴롭힘과 저항은 그치지 않았다. 언젠가는 대항전 중 성을 포위했을 때 성벽에 무두질한 가죽이 내걸렸는데, 그의 외가 혈통을 비웃는 의미였다. 그의 외조부가 무두장이이기 때문. 윌리엄은 그 성의 시민들 전부(혹은 지도 계층의 시민 40명)의 손을 자르는 것으로 응답했다.

윌리엄은 프랑스 왕국 카페 왕조 제3대 국왕 앙리 1세와 로베르 대주교 등 아버지의 충신들 및 어머니와 그녀의 친척들, 에를르바의 외숙부형제인 왈테르(= 월터)의 보호와 헌신으로 초기의 위기를 극복했고, 이런 시련은 그에게 강한 의지력을 심어 주었다. 15세에 기사로 인정받은 뒤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다.

2.2. 플랑드르의 마틸다와의 결혼

1050년에 20대 초반이 된 윌리엄 1세에게는 자신의 숙부들을 포함해 노르망디 공작의 자리를 노리는 정적이 많았다. 윌리엄은 입지를 다지기 위해 대리인을 보내 옆동네인 플란데런 백국의 공녀이자, 프랑스 왕 로베르 2세의 외손녀인 당시 19세쯤 된 플랑드르의 마틸다에게 청혼서를 보냈다. 하지만 마틸다가 "종년의 사생아 따위가 어딜 감히?"하면서 청혼을 거절한다.[8] 이에 윌리엄은 복수하겠답시고 플란데런으로 달려갔다. #

플란데런에 도착한 후 마틸다를 만난 당시의 상황에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교회에 가던 마틸다를 만났다는 설과 그녀의 방으로 쳐들어갔다는 것이다. 진실이 어느 쪽인지는 크게 상관없다. 어쨌든 열받은 윌리엄이 마틸다를 보자마자 머리채를 잡아다 땅바닥에 패대기치고 두들겨팼다는 점만은 변하지 않으니까.

윌리엄 1세가 자신을 모욕하며 청혼을 거절한 마틸다에게 분노하여 그녀를 공개적으로 폭행했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당연히 마틸다의 아버지 플란데런 백작 보두앵 5세 (1012년 ~ 1067년)[9][10]는 윌리엄이 자기 딸을 패는 것을 보고, 눈이 뒤집혀 "이 호로 새끼가 감히 내 딸을 때려?!"라며 칼을 뽑아 윌리엄을 죽여버리려 했다. 그 순간, 마틸다가 아버지 앞을 막아서면서 외친 말은 "이 남자가 아니면 그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겠다!"였다. 그리고 윌리엄 1세와 마틸다는 4년 뒤 진짜로 결혼했다. 물론 그동안의 엄청난 반대와 방해 공작 등은 말할 것도 없었고.

두 사람은 마틸다의 아버지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5세와 교황 레오 9세의 결사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강행했다. 교황이 반대한 이유는, 윌리엄과 마틸다가 먼 친척이라 근친상간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마틸다의 어머니인 프랑스의 아델은 프랑스의 경건왕 또는 현명왕이라 불린 로베르 2세의 딸로서 프랑스의 왕녀였다. 윌리엄의 백부 노르망디 공작가의 리샤르 3세와 결혼했다가 결혼 6개월만에 남편이 죽자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5세와 재혼하여 딸 마틸다를 낳았다.

또한 윌리엄의 아버지인 악마공 로베르 1세의 어머니는 부르고뉴 공작 코난 1세의 딸 유디트, 유디트의 외할아버지는 앙주 백작 조프루아 1세였는데 이 조프루아는 선대 앙주 백작 풀크 2세의 아들이었다. 풀크 2세는 조프루아 1세 외에도 딸 아델하이드가 있었고, 이 아델하이드의 딸이 프로방스의 콘스탄스이고 콘스탄스는 경건왕 로베르 2세의 딸인 프랑스의 아델을 낳았다.

윌리엄의 할머니인 부르고뉴의 유디트와 마틸다의 어머니인 프랑스의 아델이 같은 외증조부를 둔 외가 쪽 외삼종자매(6촌)이고, 따라서 윌리엄과 마틸다의 촌수는 외가에 외가가 겹친 11촌 당고모와 조카라, 가톨릭 못지 않게 보수적 성리학 중심의 조선에서마저 그냥 남남으로 쳤을 관계였다.[11] 그런데 교황은 이를 두고 근친혼이라고 반대한 것이다.

사촌간 혼인도 흔한 유럽 귀족가에서 11촌의 혼인 반대는 말도 안 되는 트집이었다. 레오 9세 그레고리오 7세 개혁 이전에 교회를 쇄신하고자 노력한 독일계 교황이었으므로, 당연히 원론적 입장에서 근친상간을 반대한 점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노르만 본진의 수장인 윌리엄이 플란데런 백국의 힘을 얻는 상황을 피하려는 것이었을 공산이 크다. 정확히는 당시엔 교황청이고 동로마제국이고 하나같이 행패 심한 노르만을 경계하고 싫어했던 게 사실이다. 당시 레오 9세가 다스리는 교황청은 지브롤터를 넘어 이탈리아 남부를 위협하는 노르만족에게 계속 침략을 받고 있었다. 심지어 1053년에는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노르만족을 공격했지만 대패하여 인질로 붙잡혀 있었다가[12] 노르만족의 칼라브리아와 아풀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풀려나 간신히 로마로 돌아오기도 했다. 다만 오래 살지 못 하고 1054년 4월 19일에 선종했다.

그러나 이 결혼을 지지하던 루앙의 대주교이자 리샤르 3세와 로베르 1세의 남동생이기도 한 윌리엄의 숙부 모지는 교황의 반대마저 무시하고 윌리엄과 마틸다의 결혼식을 주관했다. 이 구설수를 무마하고자 이들 부부는 성당 두 채를 지어 헌납했다. 그럼에도 레오 9세는 죽을 때까지 반대했고, 이후 여러 교황도 반대했으나 결국 1059년 교황 니콜라오 2세가 인정했다.

윌리엄 1세와 마틸다는 아들 4명과 딸 최소 5명 이상을 낳았다. 윌리엄이 잉글랜드 원정을 떠날 때 마틸다가 남편을 위해 개인 재산까지 털어서 '모라'라는 이름을 붙인 배까지 선물했다고 할 정도니[13] 둘의 첫 인상은 말 그대로 최악이었지만, 부부 사이는 굉장히 좋았던 모양이다. 인터넷 등지에서 간혹 윌리엄의 외도, 그리고 그에 질투하는 마틸다를 윌리엄이 또다시 폭행했다는 썰들이 보이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윌리엄에게 정부나 혼외자식이 있다는 역사적 증거도 일절 없고, 딱히 추문 같은 게 전해져 내려오지 않는다는 점 역시 이들 부부의 관계가 좋았음을 의미한다.

2.3. 젊은 노르망디 공작, 잉글랜드 침공

주변에 적이 많았던 윌리엄은 프랑스 앙리 1세의 후원 덕분에 노르망디 공작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윌리엄이 노르망디 공작이 되고 나서 노르망디 공국의 힘이 점점 강해지자 위협을 느낀 앙리 1세는 이때부터 1054년과 1056년, 두 차례에 걸쳐 노르망디를 침공했지만 실패했다. 젊은 윌리엄은 다혈질에 잔혹했지만 앙리 1세가 침공할 무렵에는 이미 노르망디의 반란자들을 모두 처단하고 지배를 공고히 했다. 그래서 앙리 1세의 침공에도 무사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도리어 멘 지역을 병합했다. 앙리 1세는 노르망디의 윌리엄이 프랑스의 왕위까지 노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했는데[14] 윌리엄이 실제 노렸던 것은 잉글랜드의 왕위였다. 1066년 윌리엄은 후계자 문제로 혼란을 겪었던 잉글랜드 왕위 문제에 개입했다.

파일:external/jasminechubbhorriblehistories.weebly.com/9909947.jpg
당시 즉위한 해럴드 2세는 선대 왕 에드워드 처남이라 견제하는 말이 나오긴 했지만, 의회를 통해 적법한 절차로 선출된 왕이었다. 문제는 이 해럴드 2세가 예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배를 타고 나갔다가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의 포로가 되어 풀려나려고 한동안 봉신 비슷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를 빌미로 삼아 윌리엄 1세는 해럴드 2세가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죽은 에드워드 왕도 생전에 왕위를 약속[15]했다는 주장을 하면서 침공을 개시했다.[16]

당시 잉글랜드는 내부로는 데인 계열과 앵글로색슨 계열 간의 대결 구도가 확연했고, 외부로는 교황에게 견제받으면서 노르웨이의 침공을 받기까지 하던 상황이라 그야말로 최악의 카운터를 맞은 셈이었다. 여기에 윌리엄을 적대하던 앙리 1세가 1060년에 죽고 친분이 있었던 필리프 1세의 즉위, 교황 알렉산데르 2세도 잉글랜드의 캔터베리 대주교와 대립하면서 윌리엄을 적극 후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용병을 모으고 함대를 건조하여 막 침공하려 하자 심한 북풍이 불어 배가 뜰 수 없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 사이에 노르웨이의 하랄 3세가 먼저 잉글랜드를 침공했다가 해럴드 2세가 이를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물리쳐 유력한 경쟁자 하나는 저절로 줄고, 주적은 힘이 빠져 버리는 행운으로 다가왔다. 더 극적인 것은 해럴드 2세가 싸움을 마치자 바람은 기다렸다는 듯 바뀌었고, 이 덕분에 윌리엄은 사흘 만에 잉글랜드에 간단히 상륙할 수 있었다.

2.4. 잉글랜드 국왕 즉위

파일:external/s3-eu-west-1.amazonaws.com/B001690.jpg
결국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 2세는 전사하고, 윌리엄이 승리하면서 윌리엄 1세는 잉글랜드의 국왕이 되었다. 이때부터 잉글랜드 왕은 노르망디 공작을 겸하면서 프랑스 왕의 신하가 되었다. 한국인의 눈으로 보기엔 이상할 수도 있지만, 이는 봉건제도의 특성 때문이었다. 잉글랜드의 왕으로서는 프랑스의 신하가 아니지만 노르망디 공작위는 잉글랜드 왕위와는 별개로 프랑스의 봉신이기 때문에 노르망디 공작으로서는 프랑스 왕의 신하가 된 것이다. 즉, 평소에는 독립왕국인 잉글랜드 왕국의 왕이지만 노르망디 공국에 한해서는 프랑스 카페 왕조의 봉신이었으므로 세금도 냈다.

또한 이때부터 런던이 본격적으로 잉글랜드의 수도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물론 앨프레드 대왕이 데인 족의 침략을 격퇴한 후로 런던을 중심도시로 키웠기에 이미 인구 수로는 이전의 수도인 윈체스터를 넘어섰고, 참회왕 에드워드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건설한 이래로 종교적 중심지로도 노릇했지만, 잉글랜드 임금의 공식적인 궁전은 아직 윈체스터에 있었다. 그러나 1066년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런던으로 개선할 적에 웨스트민스터로 정궁(正宮)을 공식적으로 옮기면서 웨스트민스터가 행정수도로도 기능하기 시작했고, 덩달아 옆의 시티 오브 런던은 상업 중심지로서 번영을 누렸다.

2.5. 북부 원정 및 대학살

하지만 윌리엄의 재위는 순탄치 않았는데 재위 중 반란이 끊이지 않아 큰 반란만 해도 5번이나 일어났을 정도였다. 윌리엄은 남잉글랜드를 정복한 후, 북부에서 반항하는 앵글로색슨족 데인족[17]에 대한 토벌 및 학살을 벌였다. 이 당시 잉글랜드는 6세기에 북독일로부터 이주해 원주민인 켈트족을 몰아내고 정착한 앵글로색슨족, 그리고 8세기부터 스칸디나비아에서 몰려온 데인족들의 소국들이 느슨하게 연합해 있는 왕국이었는데, 왕이 바뀌었다고 해서 순순히 따르진 않았고 당연히 반항하는 이들이 속출했다.

윌리엄은 군사를 이끌고 자신의 지배에 따르지 않는 북부를 초토화했는데, 이를 북부 약탈(Harrying of the North)이라고 부른다. 북부 약탈이 참혹했음은 여러 역사서에 기록되었다. 전근대 사회에서 정복자가 학살을 벌이는 것이 흔한 일이긴 했지만, 북부 약탈은 당시 기준에서도 너무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윌리엄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한 중세 역사가 및 수도자 오데릭 비탈리스는 비록 윌리엄을 두고 칭찬할 건 칭찬하면서도, 이 사건에 대해서는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평가했다. 어떤 학자는 굶주림까지 포함하여 10만 명 이상이 죽었다고 추산한다.

이외에도 1069년에 덴마크의 스벤 2세가 군대를 이끌고 침공하여 맞서 싸워야 했다. 다만 실제로는 싸우지 않고 거금을 주어 물러나게 했다.

2.6. 말년

잉글랜드를 평정한 윌리엄이 1086년 왕국의 토지를 조사한 결과로 작성한 문서가 《 둠즈데이 북》이다. 이 《둠즈데이 북》을 전후로 잉글랜드의 귀족 체계가 크게 뒤바뀌는데, 앵글로색슨계의 작위와 봉토를 인정한 이전과 달리 앵글로색슨계 귀족 중 단 2명만이 지위를 유지하였고, 나머지 귀족 4천여 명은 토지가 몰수되었다. 그리고 몰수된 영지는 200명이 채 안 되는 노르만계 (그리고 약간의 브르타뉴인과 플랑드르인) 남작들이 하사받았다. 종교적으로도 이러한 반잉글랜드적 정책이 더 심했다. 1070년 윌리엄은 잉글랜드인 주교들을 면직시켰고 그 후로 한 명도 다시 임명하지 않았다.

잉글랜드 내의 상황이 안정되자 윌리엄 1세는 프랑스로 눈을 돌려 프랑스 내 영토를 확장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윌리엄 1세가 영토를 확장하자 프랑스 왕국의 국왕 필리프 1세와 프랑스 귀족들이 경계하여 충돌이 불가피해졌고, 나중에는 프랑스와도 전쟁에 나섰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큰아들 로베르와 불화가 심해졌고 급기야 노르망디를 탐낸 로베르가 필리프 1세와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키다가 진압당하기도 했다.

1087년 7월 프랑스의 망트를 공격하다 병을 얻어, 혹은 부상을 입어 사망하였다는 다양한 설이 있고, 캉에 있는 생 테티엔 성당에 묻혔다. 그를 성당에 안장시키려고 할 때 선약자가 나타나 권리를 주장하는 바람에 현장에서 60실링을 지불한 후에야 매장할 수 있었다. 거기다 윌리엄 1세는 말년에 말을 타지 못할 정도로 뚱뚱해져서 필리프 1세가 조롱할 정도였는데 매장이 늦어지자 부패한 시신이 부풀어 올랐다. 뚱뚱한 시신에 맞는 관이 없어서 사람들은 왕의 시신을 소가죽 안에 넣고, 꿰맨 뒤에 사이즈를 크게 맞춘 석관에 안장하기로 했는데 #, 그렇잖아도 뚱뚱한 그의 시신은 부풀어올라 도저히 석관 안에 들어가지가 않았는데도 신하들이 용을 써서 결국 석관에 밀어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시신이 터져 악취가 진동한 탓에 놀란 사람들이 성당에서 빠져나오는 사건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 악취가 얼마나 지독했던지 향을 피워도 없어지지 않아 나중에 성당을 환기시켜 악취가 다 빠지고 나서야 장례식을 치렀을 정도였다. 그의 무덤은 16세기 종교전쟁 때와 18세기 프랑스 혁명 때 약탈되어 지금은 관 속에 넓적다리뼈 하나만 남았다.

3. 가족 관계

3.1.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2세
(Robert II, Duke of Normandy)
1051년 1134년 2월 콩두사노의 시빌라
슬하 1남
2남 노르망디의 리처드
(Richard of Normandy)
1054년 1070년
1녀 노르망디의 아델리자
(Adeliza of Normandy)
미상 1113년
2녀 노르망디의 세실리아
(Cecillia of Normandy)
1056년 1126년 7월 30일
3남 윌리엄 2세
(William II)
1057년 1100년 8월 2일
3녀 브르타뉴의 공작부인 콩스탕스
(Constance, Duchess of Brittany)
1057년/ 1061년 1090년 8월 13일 브르타뉴 공작 알랭 4세
4녀 블루아 백작부인 아델
(Adela, Countess of Blois)
1067년 1137년 3월 8일 블루아 백작 에티엔 2세
슬하 6남 5녀[18]
4남 헨리 1세
(Henry I)
1068년 1135년 12월 1일 스코틀랜드의 마틸다
슬하 1남 1녀[19]
루뱅의 아델리자


윌리엄 1세에게는 4남 4녀가 있었는데 장남 로베르와는 사이가 나쁘다 못해 철천지 원수 같았다. 쿠데타를 시도했다가 실패한 로베르가 프랑스로 도주하자 윌리엄은 로베르의 상속권 일체를 박탈하고, 죽기 전에야 유언으로 노르망디 공국을 남겨주었다.

장남 로베르는 모든 것을 잃고 프랑스로 추방당했으나 윌리엄이 죽어가면서 그래도 아들이라고 내어준 노르망디 공작 자리에 올라 로베르 2세가 되었고 십자군 전쟁에도 참가했다. 차남 리처드는 윌리엄보다 일찍 죽었고, 삼남 윌리엄은 원래라면 로베르가 물려받았어야 할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막내아들인 헨리는 영지를 살 돈을 받았는데 윌리엄 2세 사후 왕위에 올라 헨리 1세가 된다. 또한 장녀 아델라의 아들인 외손자 스티븐은 헨리 1세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4. 평가

정복왕이라는 칭호에 걸맞게 영국이라는 나라를 온전하게 정복했다고 할 수 있는 군주이기도 하다. 헤이스팅스 전투가 있기 1,000년 전 로마 율리우스 카이사르 갈리아 전쟁 때 브리튼 섬을 침공하여 일시적으로 점령했지만 브리튼 섬은 그의 목적이 아니었던지라 이내 철수했고, 로마의 브리튼 섬 정복은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부터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8~9세기의 이교도 대군세 웨식스 알프레드 대왕이 막아내었으며, 11세기 초 크누트 대왕은 잉글랜드를 정복하여 북해 제국을 세웠으나 그가 사망하자 금세 붕괴하였다. 17세기 명예혁명 당시 이름이 같은 윌리엄 3세가 즉위하고 나서 네덜란드군을 이끌고 와서 왕당파와 자코바이트를 진압한 것을 정복이라고 하는 의견도 있지만 이는 영국 의회가 윌리엄 3세를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군연합 형식으로 영국의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하여 데려온 것이므로 이는 의회 왕당파 간의 내전으로 볼수 있기에 정복이라 하기에는 애매하다. 윌리엄의 잉글랜드 정복 800년 뒤에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황제가 대륙 봉쇄령을 통해 영국 정복을 시도했지만, 결국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며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1940년에서 1941년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는 영국을 정복하기 위해 대규모의 항공기 공습을 가했지만, 결국 소련 침공 과정에서 영국 정벌을 포기했다. 이러한 정복자들의 사례를 보았을 때, 영국을 한번에 정복하고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통치하는 데 성공한 인물은 정복왕 윌리엄뿐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윌리엄 1세 이후부터 잉글랜드에서 현대 영국에 이르기까지 몇 차례 왕조가 바뀌는 등 변화는 있었지만 역대 왕조마다 왕위 계승자가 없으면 모계나 방계 계승 등으로 대대로 이어왔기 때문에 현재까지 영국의 왕은 미약하게나마 이 사람의 피가 흐른다. 《영국 왕실 계보도》 이 계보도에서는 영국 왕실의 시조를 윌리엄 1세가 아닌 알프레드 대왕으로 보았다. 이 관점에 따르면 윌리엄 1세의 노르만 왕조 크누트 대왕의 덴마크 왕조처럼 이민족 왕조인 셈이다. 노르만 왕조의 바로 다음 왕조인 플랜태저넷 왕조의 창시자 헨리 2세의 외할머니가 알프레드 대왕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허나 이는 앵글로색슨 민족주의에 입각한 역사관에 의한 관점이고, 헨리 2세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윌리엄 1세의 아들인 헨리 1세 국왕의 외손자 자격으로 승계받은 것이기 때문에 노르만 왕조 이후로 잉글랜드와 영국의 군주들은 윌리엄 1세를 왕조의 시조로 여겼다.[20]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 에드워드란 왕호이다. 윌리엄 1세의 노르만 정복 이후의 모든 영국 국왕들은 20세기에 즉위한 에드워드 8세까지 에드워드라는 왕호에 X세라는 대수 숫자를 붙이는 데 있어서 노르만 왕조 이전의 앵글로색슨 군주 에드워드가 아닌 노르만 정복 이후 시대에 즉위한 에드워드 1세를 시작으로 해서 대수를 세었다. 그래서 노르만 왕조 이전에도 에드워드란 왕호를 쓴 임금이 셋이나 있었지만, 각각 에드워드 1세, 2세, 3세라고 불리지 않고 각각 대 에드워드, 참회왕 에드워드, 순교왕 에드워드라는 별명으로만 불리는 것이다. 즉, 과거의 잉글랜드 왕실은 물론 현대의 영국 왕실까지 왕호의 대수를 세는 데 있어서 윌리엄 1세의 노르만 정복 이전의 국왕들은 포함시키지 않는 것이다.

한편 영국에 맞서 미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던 미국 독립 혁명 시기에 활동했던 미국의 사상가 토마스 페인은 1776년 그가 작성한 팜플렛인 상식(Common Sense)에서 영국 왕실의 조상인 윌리엄 1세를 가리켜 "수천 명의 무장한 강도떼를 이끌고 섬으로 쳐들어가 불법적인 폭력으로 왕위를 빼앗았으니, 그와 그의 후손에게는 어떠한 신성함도 없다."라며 격렬하게 비난했다.

5. 여담

윌리엄 1세가 가졌단 노르망디 영토 중에서 지금까지 남은 유일한 곳이 바로 채널 제도이다. 하지만 채널 제도를 제외한 다른 영토는 1204년 존왕 때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에게 공격을 받아 모두 잃었다.[21] 백년전쟁 때 잠시 탈환했지만 백년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완전히 상실했다.

영국 방송 BBC에서는 그의 자산을 현재 가치로 2295억 달러로 추정했는데, 이는 인류 역사상 7위에 해당한다. 다만 그가 정복한 잉글랜드 땅 전체를 개인 자산으로 간주한 결과이다. 물론 당시에는 왕국 전체를 임금 개인의 소유물로 여기긴 했지만, 그렇게 따지면 훨씬 더 큰 영토를 다스린 군주들이 수두룩하므로 적절한 답은 아니다.

윌리엄 1세는 잉글랜드 왕이 된 후에도 프랑스어만 말하고 쓰며 읽을 줄 알았지, 영어는 한마디도 할 줄 몰랐고 읽거나 쓰지도 못했다. 특히 프랑스 내 영토인 노르망디에 애착이 강하여 말년에는 아예 노르망디에 거주하며 잉글랜드에는 대리인을 통해 문서로 지시하며 통치했다. 이 때문에 프랑스 노르망디 주민들과 잉글랜드인들이 서로 자신들의 위인이라며 다투기도 한다.

유럽 대륙에서 잉글랜드를 정복했다는 점으로 추측해볼 때 《 얼음과 불의 노래》의 정복왕 아에곤 1세의 유력한 모델이다.

2015년에는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하기 전의 이야기를 다룬 프랑스 영화 《 정복자 윌리엄》이 나왔다.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도 언급되는데 말포이 가문의 시조인 아르망 말포이는 그가 잉글랜드를 정복할 때 같이 건너왔고[22] 그에게 여러차레 도움을 주었으며 그 보답으로 윌트셔 지역에 영지를 하사받고 그곳에 저택을 세웠다고 한다. 국제 비밀 법령 이전까지 말포이 가문은 머글 세계에서도 큰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왕실과도 가까웠다고 하는데 이런 인연도 한몫 했을 듯하다.

왕과 정복자라는 드라마에서 니콜라이 코스테르발다우가 맡을 예정이다.


[1] 헤이스팅스 전투 중 자신이 죽었다는 소문이 돌자 건재하다는 걸 알리기 위해 우뚝 일어서 투구를 쓰는 모습이다. [2] 보통 [3] 노르만어는 프랑스어와 가까워서 프랑스어의 방언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4] 기록에는 에를르바가 길에서 춤을 추던 모습을 우연히 목도한 로베르 1세가 한눈에 반했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서는 에를르바가 빨래를 하느라 맨다리를 드러낸 모습에 로베르 1세가 한눈에 반했다고도 한다. [5] 국내에 번역된 『정복왕 윌리엄』이라는 책에 따르면 그가 태어났을 시기는 1027년 말 혹은 1028년 초일 것이라 한다. [6] 영어로는 William the bastard라고 하는데, bastard는 현대 영어권에서 호로새끼 정도 어감이다. 현대에 사생아가 나올 일이 거의 없어서 욕설로 굳어졌을 뿐 그 전까지는 사생아, 혼종이라는 의미로 널리 쓰였다. 물론 그리스도교는 사생아를 나쁘게 보았으므로 좋은 뜻이 아님은 분명하다. 현대 영어에서 혼외자녀를 지칭한다면 보통 love child 라고 하며, bastard는 역사적인 언급이 아니면 거의 쓰지 않는다. [7] 에를르바의 아버지는 무두장이 팔레즈의 풀베르트(Fulbert of Falaise) (976년 ~ ?)였다고 알려졌다. 무두장이는 유럽에서는 백정과 비슷한 불가촉천민에 가까운 최하급 계층이었다. 하지만 재단사 또는 장의사였다는 설도 있고 로베르 1세의 시종을 지냈다고도 한다. 다만 시종은 윌리엄이 태어남으로서 받은 직위였다는 추정도 있다. 이후 콩트빌의 에를루앵(Herluin de Conteville) (1001년 ~ 1066년)과 혼인했고, 윌리엄의 이부형제이자 가신(家臣)으로서 잉글랜드 원정에 참여하는 바이외 주교 오도(Odo of Bayeux) (1036년 ~ 1097년)와 모르탕 백작 로베르 등을 낳았다. [8] 사실 마틸다가 이런 말을 할 법도 했다. 일단 외가 쪽으로는 프랑스 국왕 로베르 2세의 외손녀였으며 친가인 플란데런 가문쪽으로는 무려 카롤루스 대제 알프레드 대왕의 후손이었다. 이렇게 친가와 외가를 통틀어 엄청난 혈통의 고귀한 신분이었으니, 평민 소생의 사생아 출신인 윌리엄이 당연히 눈에 안 찰 수도 있었다. [9] 프랑스 국왕 앙리 1세의 매부이자 이후 필리프 1세의 섭정까지 되는, 당대의 손꼽히는 권력자였다. 그가 다스리는 플란데런 백국은 나중엔 항구 도시 칼레 한 군데에서 걷는 관세만으로도 잉글랜드 왕국 전체 세입의 1/3이 충당될 정도로 부유한 곳이었다. [10] 고대 중국과 달리 유럽에서는 적어도 독립 백작 이상부터는 등작 자체보다 인구나 자금력이 위세에 영향을 매우 많이 미쳤다. 예를 들면 카페 왕조의 초대 국왕인 위그 카페도 원래 파리 백작이었다. [11] 현대 사회에서도 6촌 이상 넘어가면 사실상 남이고, 당연히 11촌 정도면 결혼도 문제가 전혀 없다. 연산군의 왕비인 폐비 신씨는 7촌 고모인데 문제 없다고 이야기했다. 다만 외가 쪽에는 살짝 널널하긴 했다. [12] 당연하지만 이 당시 노르만족도 가톨릭을 믿었으므로, 영적 지도자인 교황을 함부로 대하진 않았고 융숭히 대접했다고 한다. 교황의 입장에서는 인질이 되었음은 사실이니 매우 고까웠겠지만. [13] 이 배는 잉글랜드 침공 때 윌리엄의 기함이 되었다. [14] 이러한 걱정이 괜한 걱정은 아닌 게, 훗날 윌리엄 1세의 여계 후손인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의 왕위를 노리고 백년전쟁을 일으켰다. [15] 에드워드의 어머니 노르망디의 엠마는 윌리엄 1세의 할아버지인 리샤르 2세의 누이였다. 다시말해 고모할머니. 즉 윌리엄 1세는 에드워드의 사촌(로베르1세)의 아들인 셈. [16] 이 장면을 두고 《 먼나라 이웃나라》 <영국> 편에서는 윌리엄 1세가 "영국 왕이 죽기 전에 나한테 왕 자리 물려준다고 약속했어! 의심 가면 왕한테 물어봐!"라고 우기는 것으로 패러디했다. 물론 이미 왕은 죽고 없는데 죽은 왕이 대답할 수 있을 리는 당연히 없다. 그러자 영국 어느 관료가 "야! 죽은 왕이 어떻게 대답하니?"라고 되물었는데 윌리엄 1세는 뻔뻔하게도 "그럼 내 말을 믿으라.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로 받아쳤다(...) 이에 관료가 욕심도 많다며 니 영지나 잘 다스리셔라는 식으로 나오자 윌리엄 1세가 오냐 그럼 한번 힘으로 승부를 보자! 하고 응수한다. 표현은 개그스럽지만 중세시대의 분쟁이 다 이런 식으로 적당한 명분을 내세우고 실력으로 승부를 보아서 이기면 명분대로 목적을 달성하고 지면 못하는 식으로 흘러갔다. [17] 윌리엄의 지배에 심하게 반항한 자들이 바로 데인족이었는데, 아이러니한 것은 윌리엄 휘하의 노르만인과 데인인들은 모두 바이킹의 후예로, 100년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동족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프랑스의 노르망디에 정착하여 라틴 문화에 동화된 노르만족과 같은 게르만 문화권인 잉글랜드에 잔류하여 자신들의 게르만 문화를 지켜낸 데인족은 조상 세대에 비해 문화적으로 많은 차이가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북부 잉글랜드의 데인계 귀족들은 고대 영어의 노섬브리아 방언과 고대 노르드어를 사용했지만 윌리엄 1세는 로망스어군에 속하는 노르만어와 프랑스어만 구사할 줄 아는 등 사용하는 언어도 달랐다. [18] 스티븐 왕 [19] 신성로마 제국의 황후 마틸데 [20] 윌리엄 1세 이후의 모든 영국 국왕들은 모계나 방계가 승계하는 경우는 있어도 어쨌든 전 국왕과 혈통으로 이어진 사람이 왕위를 승계했지만 윌리엄 1세는 아예 정복을 통해 이전 앵글로색슨 왕들과 혈통상 관계없는 사람이 새로 왕위를 차지하여 왕가를 뿌리까지 교체한 것이기 때문에 윌리엄 1세 이전의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와 윌리엄 1세가 정복한 이후의 잉글랜드는 잉글랜드라는 국호만 같을 뿐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것처럼 사실상 새로운 나라를 건국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 윌리엄 1세의 노르만 정복 이전의 잉글랜드는 순수한 앵글로색슨 계통의 고대 영어를 썼지만 노르만 정복 이후에는 노르만어가 섞여들어간 영어를 쓰게 되었고 이는 오늘날의 영어 어휘들에까지 이어졌다. [21] 칼레는 그나마 메리 1세 때까지는 가지고 있었는데, 칼레마저 메리 1세가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에서 스페인 편에 서면서 잃었다. 그런데 당시 칼레는 잉글랜드 총 세입의 35%을 차지하는지라 이를 두고 메리 1세가 국익과 무관한 전쟁에 끼어들어 괜히 칼레만 잃었다며 욕을 많이 먹어야 했다. [22] 말포이라는 성씨 자체가 프랑스어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