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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리그 과거 참가 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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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방울 레이더스 | 현대 유니콘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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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방울 레이더스 관련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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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단 기본 정보 | 쌍방울| 쌍방울 레이더스| 쌍방울 레이더스 2군 | |||
구단 역사 정보 | 구단 역사| 역대 시즌 | 1996년 플레이오프| 1997년 준플레이오프 역대 감독| 역대 주장| 사건 사고 | ||||
구단 세부 정보 | 선수단| 등번호| 유니폼 | ||||
기타 | 쌍방울 홈 17연승의 비밀| 쌍방울 레이더스/1997년/8월/23일 | ||||
경기장 관련 정보 | 전주종합경기장 야구장(홈구장)| 월명종합경기장 야구장(제2 홈구장) |
<colbgcolor=#ffc81e><colcolor=#000000> 쌍방울 레이더스 | |||
SBW Raiders | |||
창단 | 1990년 3월 31일([age(1990-03-31)]주년) | ||
해체 | 2000년 1월 7일([age(2000-01-07)]주년)[1] | ||
법인명 | ㈜쌍방울레이더스 | ||
상장 유무 | 비상장 기업 | ||
기업 규모 | 중견 기업 | ||
모기업 | 쌍방울 | ||
연고지 | 전라북도 (1990~1999)[2] | ||
홈구장 | 전주종합경기장 야구장 (1990~1999) | ||
월명종합경기장 야구장 (1990~1999)[3] | |||
해체 당시의 구단 사무국 (1999년) | |||
구단주 | 이의철[4] | ||
대표이사 | 박효수 | ||
단장 | 유은수 | ||
감독 | 김준환[5] | ||
포스트 시즌 진출 (2회) | |||
플레이오프 | 1996년 | ||
준플레이오프 | 1997년 | ||
프랜차이즈 팀 기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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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81e><colcolor=#000> 최고 승률 |
0.573 1997년 126경기 71승 2무 53패 |
|
최저 승률 |
0.224 1999년 132경기 28승 7무 97패 |
||
최다 승 |
71승 1997년 126경기 71승 2무 53패 |
||
최다 패 |
97패 1999년 132경기 28승 7무 97패 |
||
최다 관중 |
265,918명 1996년[6] |
||
최소 관중 |
49,956명[7] 1999년[8] |
[clearfix]
1. 개요
1991년부터 1999년까지 한국프로야구에 참가한 대한민국의 프로 야구단. 프로야구 원년 6구단 이후에 창단한 두 번째 신생 구단으로 8구단 시대를 열었다. 홈구장은 전주종합운동장 야구장이었으며 제2 홈구장은 군산시 사정동에 있는 월명 야구장이었다. 구단의 상징색은 노란색.연고지는 전라북도. 이 구단이 존재할 당시만 하더라도 KBO 리그의 연고지 운영 방식은 거점 도시를 중심으로 도 단위를 연고지역으로 인정하는 광역 연고제였다. 특정 도시로 연고지를 국한하는 '도시 연고제'로 변경한 것은 쌍방울이 해체된 후인 2000년부터다. 따라서 홈구장은 전주시에 있었지만 엄밀히 따지면 전북의 팀이었지 전주만의 팀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북 연고 구단인데도 홈경기가 열렸던 전주시와 군산시, 이들 지역과 연담화된 익산시 등 3개 도시 이외 지역에서는 공기 취급받았다. 그나마 부안군, 김제시 등 전북 북부권은 군산 시리즈 때문에 나름 팬들이 몰리기라도 했지만[9], 전북 남부권인 고창군, 정읍시, 남원시 등 해태 타이거즈의 연고지인 광주광역시에 가까운 지역일수록 영향력이 약했다. 더구나 전주와 동떨어진 무주군, 장수군 등 전북 동부 지역은 더더욱 영향력이 약했다.
어쨌든 전주시민을 중심으로 적지 않은 전북도민들과 전북 출향민 팬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1997년 외환 위기의 여파로 빠르게 쇠락하면서 손 쓸 새 없이 해체되었다. 또한 역대 KBO 리그 참가 구단 중 유일하게 KBO 한국시리즈 진출 경험도 없이 해체된[10] 비운의 구단이다.
2. 역사
자세한 내용은 쌍방울 레이더스/역사 문서 참고하십시오.3. 쌍방울의 유산
3.1. 주요 기록
- 5년 연속 구단 피홈런 1위: 1991 ~ 1995년[11]
- 한 시즌 최다패 기록: 97패 (28승 7무)[12]
- 역대 최소관중 기록: 54명 (1999년 10월 7일 VS 현대, 전주구장)[13][14]
- 홈경기 최다 연승기록[15]: 17연승 (1996년 8월 14일 ~ 1997년 4월 13일)
- 한 시즌 최다 완봉승(영봉승 포함): 1996년 19회
- 한 시즌 최다 구원승: 1997년 44회[16]
3.2. 연고지
쌍방울 레이더스의 연고 지역이었던 전라북도(現 전북특별자치도) 지역은 쌍방울이 창단할 당시에는 거의 연고 공백 상태나 다름이 없었다. 물론 프로야구 원년부터 쌍방울이 참가하기 전인 1989년까지 호남지역 연고는 해태 타이거즈에 할당되어 있었고 전주에서도 해태 홈 경기가 분산 개최됐지만 엄연히 해태의 핵심 본거지는 광주광역시였고 전라북도는 사실상 비어있는 곳이나 다름없었다. 그 빈틈을 쌍방울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쌍방울이 있었다면 KIA 타이거즈와의 호남 시리즈가 확고하게 자리잡아 리그의 흥행 요소가 더 많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아쉬운 점이다.쌍방울 레이더스 말년 때는 전주종합운동장 야구장의 시설 노후화 문제로 군산시 월명 야구장에서 경기가 자주 열렸다. 그러던 것이 2000년부터는 월명 야구장에서 프로야구 경기가 한 경기도 열리지 않았다가 2001년부터 2013년까지 KIA 타이거즈의 군산 경기가 다시 열렸다. 하지만 이후 2014년부터 기아의 홈구장이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로 바뀌면서 군산 경기는 중지되며, 군산상고와 전주고 선수들을 대상으로 1차 지명권을 갖게 된 NC 다이노스가 군산 홈경기를 유치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1차 지명권 행사와 제2홈구장 경기는 엄연히 별개의 사안이기에 조용히 접었다.
쌍방울의 해체는 전북지역 아마야구에도 타격을 주었다. 군산상일고와 전주고 모두 타 지역으로 전학하는 선수들이 속출하며[17] 야구부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고 그 후유증은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다. 군산상일고는 그나마 사정이 좀 낫지만 전주고는 아예 중학교 선수들이 전주고 야구부로 입학을 기피한 나머지 한동안 선수 부족으로 선수권 대회나 고교 리그에 참가조차 못할 정도로 심각한 흑역사를 보내야만 했다. 2010년대 들어 새로운 아마야구 팀들이 속속 창단하고 있지만 전북 지역은 정읍시와 고창군, 그것도 읍면 지역에 속한 학교에서만 창단했을 뿐[18] 정작 전주시, 군산시, 익산시에는 단 한 팀도 창단 소식이 없다.[19]
3.3. 선수
전주시민들에게 남겨진 추억이나 좋은 기록이든 나쁜 기록이든 범접하기 어려운 기록들도 눈여겨 볼 만하지만, 쌍방울이 야구계에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역시 선수들일 것이다. 비록 팀은 해체되었지만 돌격대에서 발굴(혹은 부활)한 선수들은 이적한 팀에서도 준수한 활약을 펼쳤으며, 일부는 지도자로 변신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KBO 리그의 발전에 힘을 보태고 있다.[20]2011년 기준, 쌍방울 출신 선수는 김원형, 박경완, 오상민, 이진영 이렇게 4명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2011 시즌 초에 오상민은 도박 관련 사고로 방출되어 사실상 선수 생활이 끝났고, 2011년 시즌을 끝으로 김원형은 은퇴했다.
2013년 10월 22일 박경완이 은퇴를 선언하고 2014년 4월 5일 한화와의 경기를 끝으로 은퇴를 하면서 마지막 쌍방울 출신 선수는 이진영이 되었다. 군산상고를 졸업하고 1999년 1차 지명을 받아 입단한 이진영은 쌍방울 레이더스에 입단한 마지막 신인 선수다. 1999년 드래프트에서 이진영만 계약했고, 당시 모기업에서 계약금으로 줄 돈도 부족하여 김성근 당시 감독이 일부 보조했다고 한다. 2018년 정규시즌이 끝난 뒤 10월 19일 이진영의 은퇴가 공식 기사화 돼 쌍방울에서 1년이라도 뛰었던 선수는 전원 추억 속으로 떠났다.
굳이 쌍방울에 지명되거나 연습생 시절을 거치고 현역으로 있는 선수를 찾자면 이대수(SK 연습생)가 있었는데, 2018년 정규시즌 종료 시점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따라서 유일하게 박정권(2000 지명, SK) 한 명만이 남아있었다. 박정권은 쌍방울의 지명은 받았지만 바로 동국대학교로 진학하였고, 졸업 후에는 쌍방울의 지명권을 가져간 SK에 입단하게 되었다.[21]
결국 2019년을 끝으로 박정권도 은퇴하면서 이제 쌍방울 출신 현역 선수는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4. 선수단
4.1. 선수단 목록
자세한 내용은 쌍방울 레이더스/선수단 문서 참고하십시오.4.2. 등번호
자세한 내용은 쌍방울 레이더스/등번호 문서 참고하십시오.4.3. 프랜차이즈
이름 | 등번호 | 포지션 | 소속년도 |
김기태 | 10 | 내야수 | 1991~1998 |
조규제 | 18 | 투수 | 1991~1998 |
김원형 | 16 | 투수 | 1991~1999 |
박경완 | 28 | 포수 | 1991~1997 |
김기덕 | 30 | 투수 | 1991~1999 |
최태원 | 7 | 내야수 | 1993~1999 |
김현욱 | 46 | 투수 | 1995~1998 |
김광림 | 33 | 외야수 | 1994~1997, 1999 |
김호 | 5 | 내야수 | 1990~1999 |
성영재 | 17 | 투수 | 1993~1999 |
조원우 | 36 | 외야수 | 1994~1999 |
심성보 | 35 | 외야수 | 1995~1999 |
박성기 | 31 | 투수 | 1991~1998 |
박진석 | 11 | 투수 | 1991~1999 |
김성근 | 91 | 감독 | 1996~1999 |
4.4. 2군
자세한 내용은 쌍방울 레이더스/2군 문서 참고하십시오.4.5. 주요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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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암갑이 그린 리즈시절 쌍방울의 스타 선수들 |
- 강길룡 - 1991~1993 쌍방울의 또다른 우완 선발투수. OB 베어스 트레이드 이전까지 쌍방울에서 2-3선발급 활약을 하던 선수였다. 그러나 OB 베어스 항명파동에 연루되더니...[22]
- 김광림 - OB 베어스의 프랜차이즈 출신이었으나 1994년에 쌍방울로 트레이드되었고 1995년에 타격왕을 먹으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1996년 미스터 올스타가 되기도 했으나, 1997 시즌 중 현대로 트레이드되어 1998년에 우승반지를 끼고 시즌 후 방출되어 다시 돌아왔다. 1999 시즌 후 은퇴. 은퇴 후 해설자로 마이크를 잡았다가 친정팀 두산 타격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해 2017년에 kt wiz의 타격코치를 지냈고 이후 분당구B 리틀야구단 감독으로 있다. 지도자로서의 평은 괜찮은 편이다.
- 김기덕 - 김현욱, 성영재와 함께 또다른 잠수함 트로이카중 한 명. 사실 김현욱의 후덜덜한 포스에 가렸지, 쌍방울 노예의 시초는 김기덕이었다(...) 1994년부터 1999년까지 선발, 중간, 마무리 어디든 안 가리고 나와도 평균 이상은 뽑아내는 마당쇠. 2002 시즌 후 은퇴했다. 2023년 현재 한양대 감독을 맡고 있다.
- 김기태 - 돌격대의 형님이자 해결사. 왕방울. 쌍방울의 주장이자 팀을 대표했던 강타자. 이승엽 등장 전까지 좌타자 최다홈런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신인 최다홈런 기록도 그의 것이다. 또한 1997년에 .344의 타율로 타격왕까지 먹은 적이 있었다. 쌍방울 부도로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도 유일하게 버틴 선수였으나, 1999년에 김현욱과 함께 삼성에 팔려갔다가 2001년 말 김응용 감독과의 불화로 쌍방울 선수단을 계승한 SK 와이번스로 트레이드되어 전성기만큼은 아니지만 팀의 최고참으로 활약하며 2004년 지명타자 골든 글러브를 수상하기도 했다. 은퇴 이후에는 지도자로 변신, LG 트윈스 감독을 맡아 팀을 10년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시키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2015년에는 KIA 타이거즈 감독으로 부임하며 고향인 광주로 돌아왔고 2017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탄탄대로를 달리는가 했지만 각종 기행과 선수 기용에 대한 안팎의 불화 등이 겹치면서 2019년 불명예 퇴진했다. 이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코치와 2군 감독을 거쳐 kt wiz 2군 감독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선수로서 한 시대를 풍미한 레전드임은 확실하고 레이더스에 있어서 최고의 스타이자 레전드라고 할 수 있다.
- 김원형 - 영원한 어린왕자, 돌격대의 처음이자 마지막 에이스. 최연소 노히트 노런 기록 보유. 쌍방울 레이더스 선발투수관련 각종 통산기록 1위[23] 그 후 쌍방울 선수단을 이어받은 SK에서 활동하다가 2011년 은퇴, 통산 134승 144패라는 성적을 거두었다. 은퇴 후 SK, 롯데 코치를 거쳐 2020년 두산 베어스의 투수 코치로 활동하다 SK 와이번스의 사령탑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으며, SSG 랜더스의 초대 감독이 되었고 2022년 한국시리즈 우승감독이 되었다. 지도자로서의 평은 보통.[24] 김기태, 조규제와 더불어 레이더스의 상징성을 가진 대표적인 세 선수로 꼽힌다.
- 김현욱 - 삼성 출신 선수로 1995년 쌍방울로 이적한 뒤 1997년 구원으로만 20승...을 따냈으나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는 이대진(17승), MVP는 이승엽(홈런 - 최다안타 - 타점)에게 빼앗겼다.[25] 1999년 친정 팀인 삼성에 팔려서 돌아갔다. 그리고, 삼성에서도 혹사당하다가(...) 2005년에 무릎 부상으로 35세에 은퇴했다. 은퇴 후 삼성 라이온즈의 코치를 맡았다가 2018년부터 류중일 감독을 따라 LG 트레이너를 맡게 되었다가 류중일과 같이 물러났고 2023년부터는 롯데 자이언츠에 몸 담고 있다.
- 박성기 - 초창기 쌍방울 암흑기 시절 좌완 에이스. 1991년부터 1994년까지 4년간 41승으로 이 기간동안 쌍방울 팀 내에서 박성기보다 더 많은 승수를 거둔 투수는 없었다.[26]
- 김호 - 수비형 유격수로 1991년은 .233 11홈런 22도루를 했다. 구단 해체 이후에는 해태, 두산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2018시즌까지 삼성 라이온즈의 주루코치였고 2019시즌 부터는 류중일 사단에 함류하여 LG 트윈스의 1군 수비코치를 맡았다.
- 박경완 - 포도대장. 돌격대의 안방마님. KBO 리그 역사상 최고의 포수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레전드 포수다.
-
박노준 - 말이 필요 없는 선린상고의 독일병정. 1994년 .303에 43도루를 기록하며 커리어 하이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훗날...안양대학교 총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우석대 총장을 맡고 있다.
- 석수철 - 성균관대 시절 활약으로 국가대표에 뽑히고, 계약금 1억 5천에 1996년 1차지명으로 입단한 3루수. 첫 해의 나름 쏠쏠한 성적과 근성있는 모습으로 좋아하는 팬들이 많았다. 그러나 2년 차부터 고관절 부상으로 1군 경기에 아예 나오지 못하며, 결국 데뷔 첫 해 성적이 프로 마지막 성적이 되고 말았다. 현재는 성균관대 코치를 거쳐서 군산상일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고 있다.
- 성영재 - 김기덕, 김현욱과 같이 잠수함 투수로 활약했던 투수, 선발로 나오든, 구원으로 나오든 든든한 투수였다. 그 뒤 쌍방울이 해체되고, SK가 창단되고도 SK에 남았지만 이호준의 트레이드 상대가 되어 해태로 이적했으며, 중간에 병역비리로 구속된 일이 있고 KIA, 두산, LG를 떠돌아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 현역 팀인 LG에서 은퇴하고 코치를 거쳐 LG의 프런트로 있다가 2017년 광주일고 야구부 감독을 맡았다.
- 심성보 - '맘보'라는 별명으로 큰 인기를 얻었던 좌타 외야수이자, 타선에서는 유일하게 김기태를 받쳐 주던 또 다른 강타자. 김성근 재임 시절 포텐이 터졌지만, 당뇨병으로 선수 생활을 접어야 했던 비운의 스타. 1998년 외야수 최다보살(20개)...한국판 원조 가르시아이자 '강견의 3심' 중 한 명. 나머지는 심재학, 심정수. 2020년 현재 천안북중학교 야구부 감독.
- 조규제 - 전주 특급. 쌍방울의 핵심 마무리. 킬인식의 감독초기시절 은근히 혹사당했다. 그 여파로 1995시즌에는 부상으로 사실상 개점휴업했고 그해 쌍방울은 초반 선두를 달리다가 역전패가 속출하며 최하위로 처졌다. 그 후에도 전주의 수호신으로써 잘 하다가 팀이 부도로 어렵던 시절 박경완과 함께 현대에 팔려갔다. 이후 2001년 SK로 재트레이드되어 2년간 있다가 2003년 현대, 2004년 KIA로 이적했고[27] 거기서 은퇴했다. 김기태와 함께 레이더스의 두 축이라고 할 수 있다.
- 조용호 - 천안북일고 출신으로 빙그레에 있었다가 별 활약을 못하고 1991년 쌍방울로 트레이드 된 첫해에 .318의 좋은 타율로 활약을 했다.
- 조원우 - 돌격대장. 400경기 이상 무실책은 한국 최고 기록일 뿐더러 메이저리그 기록마저도 뛰어넘는다. 쌍방울 해체 이후 SK-한화에서도 뛰다가 은퇴 후 한화, 롯데, SK의 코치로 재직하다가 2016년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이 되었다. 2021 시즌에는 SK-SSG의 퓨쳐스 리그 감독으로 현장에 복귀.
- 최태원 - 철인. 1009경기[28] 연속출장으로 KBO에서는 이 부문 1위. 다만 1009경기 연속경기 출장 기록 중 369경기는 쌍방울의 후신 격 팀인 SK 와이번스에서 소화했다. 쌍방울 유니폼을 입은 기간으로 국한하면 1995년 4월 16일 광주 해태전부터 1999년 10월 8일 전주 LG전까지 635경기 연속 출장. 물론 635경기 연속 출장도 단일 구단 소속 연속경기 출장 기록으로는 1위다.[29] 삼성 라이온즈의 1군 수석코치를 맡았고 나름 제 몫을 했지만 감독이 바뀌면서 물러났다. 현재 지도자로써의 평가는 과거보다 굉장히 개선되어 호평을 받고 있는 중.
- 최한림 - 국내 최초의 좌완 사이드암.[30] 결국 김현욱을 상대로 트레이드 되어 삼성에서 은퇴한다. 은퇴 후 전라중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오래 있다가 2018년부터 인상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있다.
4.6. 최후의 선수단
- 투수: 가내영(18) 고승환(48), 고형욱(41), 김경진(39), 김기덕(30), 김원형(16), 김유진(20), 박정현(21), 박주언(28), 박진석(1), 박창현(38), 성영재(17), 오상민(34), 유현승(11), 이광섭, 이병수, 윤형배(31), 정명수, 최승민(66), 최정환(24)
- 외야수: 강민규(45), 김갑중(4), 김광림(33), 동봉철(32), 박재용(27), 심성보(35), 윤재국(8), 이계성(19), 이연수(37), 이진영(10), 장용대(50), 조원우(36)
얼핏 보기엔 괜찮은 멤버 같지만 송구홍, 김성래, 박정현 등 과거의 스타플레이어들은 이미 선수생활의 황혼기, 심성보는 당뇨병 투병, 조원우는 부상, 이진영은 고졸 신인이었으며 김원형은 장종훈의 타구를 얼굴에 맞은 후 이때까지 재기 못했다.
4.7. 외국인 선수
외국인 선수 도입 첫해인 1998년은 자금난으로 외국인 선수를 선발하지 못했다. 아래 2명은 모두 1999 시즌에 뛰었던 선수들이다.-
제이크 비아노(Jacob Viano, 미국)
당시 쌍방울이 1라운드서 지명했던 선수다. 2만 달러에 영입되어 시범경기서는 나름 잘 던졌지만, 컨트롤 문제와 팀의 사정이 겹쳐 퇴출당했다. 28경기 3승 3패 7.06(중도퇴출)
-
마이클 앤더슨(Michael James Anderson, 미국)
2라운드서 지명된 LG 출신의 선수, 선발로 보직이 바뀌어 자신감을 드러냈으나, 최악의 팀 사정으로 인해 좋지 못한 성적을 내고 돌아갔다. 19경기 2승 9패 6.75. 1998년에는 외국인 선수를 들여오지 않았으며, 1999년에는 투수용병으로 이들을 영입했다. 다만 성적이 신통치 않아서 문제. 김성근과의 갈등관계도 한 몫을 했다.
4.8. 기타 선수
-
정학원
내야수(유격수, 2루수). 정명원의 동생. 군산상업고등학교- 원광대를 졸업하고 1990년 쌍방울 2차 1순위로 지명될 정도의 유망주였지만, 군 입대 후 복귀해서 성적이 별로여서 1995년을 끝으로 은퇴했다. 현재 군산대학교 앞에서 식당을 운영중이다. 카운터 앞에 친형 정명원 코치와 선수시절 맞대결했던 신문기사와 군산상고 경남고 레전드매치때 기사가 붙어있기도. 가게 이름은 라이스 스토리.
-
강창남
재일교포 출신의 투수로 일본명은 코야마 마사오(小山昌男)다. 그 당시 강호였던 나라현의 덴리고교를 졸업하고 1981년에 긴테쓰 버펄로즈의 드래프트 2번으로 입단했다. 통산성적은 86경기 23승 21패 4.81의 방어율을 기록하고 1992년에 같은 재일교포인 긴테츠의 황태호와 같이 쌍방울에 입단했다. 그러나 찢어지게 가난한 구단 살림으로 인해 생겨난 식사와 숙소 문제를 도저히 인간적으로 적응하지 못하겠다며 시즌이 채 시작되기도 전에 계약을 어기고 돌연 일본으로 귀국하고 말았다. 쌍방울의 흑역사 선수 중에 하나.
-
류동효
태평양 돌핀스에서 이적, 쌍방울의 창단 멤버가 된 선수로 3루수가 주 포지션이었다. 선수생활 동안 특별한 성적은 남기지 못했으며 이후 롯데로 이적해 은퇴했다. 이말년이 딸아이 이름짓기 편에서 상품으로 내건 싸인볼이 이 분의 싸인볼이다. 이후 삼성 라이온즈 프런트에 합류했으며 2020년 기준 스카우터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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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호
위의 강창남과 같은 재일교포에 같은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출신의 투수이다. 일본명은 히야마 야스히로(檜山泰浩)다. 후쿠오카현 도스쿠고교(東筑高校) 출신으로 1985년에 긴테쓰 버펄로즈 드래프트 1번으로 입단했는데, 그 당시 PL학원고등학교의 듀오였던 키요하라 카즈히로, 구와타 마스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특급 유망주였다. 그 이후 미국으로 연수를 가서 루키리그에서 29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게 되지만 정작 일본에서는 1군에서 뛴 적이 한 번도 없어서 긴테츠에서는 흑역사 취급당하고 있다.
어쨌든 1992년에 강창남과 같이 재일교포로서 입단하게 되지만 강창남은 시즌을 한 번도 못 뛰고 먹튀를 한 반면 황태호는 1경기 무승 무패 81.00의 기록만 달랑 남기고 6월에 퇴단하고 말았다. 일본으로 귀국한 후 운동선수 출신으로는 아주 드물게 법무사 시험에 패스, 현재는 와세다세미나 전임강사로 야구선수 때보다 더 유명세를 타고 있다. 관련 일본 기사
5. 유니폼
자세한 내용은 쌍방울 레이더스/유니폼 문서 참고하십시오.6. 마스코트
이름은 방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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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것 때문인지 몰라도 과거 마스코트가 총출동한 2022년 KBO 40주년 기념 올스타전에서도 대놓고 표절인 삼미 슈퍼스타즈와 더불어 얼굴을 비추지 못했다.[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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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역대 성적
| 우승 |
| 준우승 |
| 포스트시즌 진출 |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 |
연도 | 정규시즌 순위 | 최종 순위 | 구단명 | 경기수 | 승 | 무 | 패 | 승률 |
1991 | 6위/8팀 | 6위 | 쌍방울 레이더스 | 126 | 52 | 3 | 71 | 0.425 |
1992 | 8위/8팀 | 8위 | 126 | 41 | 1 | 84 | 0.329 | |
1993 | 7위/8팀 | 7위 | 126 | 43 | 5 | 78 | 0.361 | |
1994 | 8위/8팀 | 8위 | 126 | 47 | 5 | 74 | 0.393 | |
1995 | 8위/8팀 | 8위 | 126 | 45 | 3 | 78 | 0.369 | |
1996 | 2위/8팀 | 3위 | 126 | 70 | 2 | 54 | 0.563 | |
1997 | 3위/8팀 | 3위 | 126 | 71 | 2 | 53 | 0.571 | |
1998 | 6위/8팀 | 6위 | 126 | 58 | 2 | 66 | 0.468 | |
1999 | 매직 4위/4팀 | 매직 4위 | 132 | 28 | 7 | 97 | 0.224 | |
KBO 통산 | 9시즌 | 1140 | 455 | 30 | 655 | 0.410 |
7.1. 포스트시즌 상대 전적
상대 구단 | 개별 경기 전적 | 시리즈 전적 |
현대 유니콘스 |
1996 PO: 2승 3패 |
PO 1패 |
삼성 라이온즈 |
1997 준PO: 1승 2패 |
준PO 1패 |
<rowcolor=black> 총합 | 3승 5패 | 2패 |
8. 사건 사고
자세한 내용은 쌍방울 레이더스/사건사고 문서 참고하십시오.9. 여담
- 김기태 덕에 아직도 잊히지 않는 팀이 되었다. 기복은 있었지만 이종범, 양준혁과 비교해 크게 꿇리지 않는 활약을 하였다. 거기다 1997년 wrc+는 괴물 수준... 비교될 만한 인천팀들이 있다. 과거 완전히 정보가 없던 시절 장명부는 그시대 야구팬 아니면 기록지 이외에는 알길이 없고 청보 핀토스, 태평양 돌핀스에는 그만한 슈퍼스타가 없었다. 김경기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한 팀의 중심타자 수준이지 리그를 지배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 음원으로 남겨진 구단 정식 응원가가 없었던 팀이다. 동시대에 있던 다른 팀들은 구단 차원에서 제작한 응원가가 한 개 이상이라도 있었지만, 무슨 사연 때문인지 쌍방울은 응원가가 따로 없었다. 다만 팬들이 관중석에서 부르던 응원가는 따로 있었는데 "방울 방울 방울 방울~ 쌍방울~ 쌍방울~"[36]과 "힘내라 힘"이 있었고 호남 연고의 구단답게 남행열차를 지역 연고 응원가로 쓰던 시절도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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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더스를 대신하여 창단한
SK 와이번스는 당초 연고지로 서울을 원했으나,
현대 유니콘스 측이 중간에 끼어드는 바람에 연고권을 54억 원에 구매하고 인천으로 입성했다. 이후 쌍방울 선수로 구성된 팀이란 이미지를 지우는 것을 최대 과제로 삼으며 '인천 SK' 문구의 강조,
김경기 등 인천 연고지 시절 현대 출신 스타 선수 영입, 2002년
삼미 슈퍼스타즈 올드 유니폼 행사 등 메모리얼 이벤트를 하며 새 연고지인 인천에 정착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을 보여줬다[37]. SK 와이번스 창단 당시에는 쌍방울 팬덤에서 넘어온 사람들과 인천에서 새로이 팬이 된 사람들이 섞여 있었는데, 이러한 구단 분위기 속에서 옛 쌍방울 팬들은 인터넷 게시판 등에서 기존 인천 지역 팬들 외에 타 지역 팬들한테까지 집단적으로 배척을 당하면서[38] 팀에 이어 팬들까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39] 그래서 이 당시 소수의 쌍방울 골수 팬들이나 타 팀 팬들에게 배척당한 팬들은
KIA 타이거즈로 팬고이전하거나[40], 지역 내 다른 스포츠팀들인
전북 현대, 2001년부터 들어선
전주 KCC로 갈아탔다. 또한
이 때 왕따를 당했던 기억 때문에 아직도 자신들을 외면한
SK, 이웃인
KIA,
잠깐! 해태는 쌍방울 때문에 되레 피해를 봤는데?쌍방울의 주축 선수들을 대거 영입해 몰락을 앞당긴 현대(이후 히어로즈로 재창단)와 삼성 등의 타팀들을 원망하는 분위기가 전주 야구팬 정서도 남아있었다. 그래도 김원형, 박경완 등 과거 전북 출신 스타들이 남아있던 시절에는 SK 와이번스를 응원하는 경우가 많았다.[41] 그러나 그 선수들이 모두 은퇴한지 한참이 지난 현재는 전북의 야구팬들은 대부분 다시 타이거즈로 돌아가거나 그나마 가까운 한화 이글스를 응원한다. 2024년 갤럽 조사 결과에 따르면 호남권 전체에서 '응원팀 없음'이 45%, KIA 타이거즈가 44%이며 롯데 자이언츠와 한화 이글스가 각각 4%로 뒤를 이었다. SSG 랜더스는 1%에 불과해 쌍방울 시절의 선수들이 은퇴하자 전북 내 지지층이 사라진 것을 볼 수 있다.
- 요즘 야구팬들 사이에서 쌍방울은 SSG 랜더스의 정통성을 흠집내려는 핑계 내지는 옛 추억을 되살리기 위한 소재로 가끔 언급되는 것이 전부이지만, 아직도 이들을 그리워하는 이들은 많은 것 같다. 실제로 1,700명 가까운 회원이 모인 레이더스 팬클럽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2011년 7월 14일에 방송된 KBS 1TV 세상사는 이야기에서는 쌍방울 레이더스의 마지막 팬클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2012년 제10구단 관련 유치전이 벌어졌을 때도 옛 쌍방울을 기억하는 많은 시민들이 호응하여, 아직 전주에 남겨진 돌격대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KBO에서 10구단 창단 주체로 수원-KT의 손을 들어주면서 돌격대의 부활은 다시금 요원한 일이 되었다. 쌍방울 출신인 김기태 감독이 KIA에 부임한 이후 챔피언스 필드에 가끔씩 김기태 마킹을 한 쌍방울 유니폼을 입은 아재들이 보인다.
- 익산 출신의 만화가 이말년이나[42]과 전주 출신의 래퍼 데프콘이 쌍방울 레이더스의 팬이었다고 인증한 바 있다. 특히 이말년은 같은 안산시 출신 선수 김광현 덕에 랜더스로 갈아탔지만, 마구마구에서 쌍방울 올스타로 플레이를 하는 것과[43] 트위터 등지에 올리는 멘션을 보면 과거 쌍방울에 대한 향수 역시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44] 데프콘 또한 1박 2일 방송에서 이제는 쌍방울의 선수단을 기반으로 창단한 SK의 팬임을 인증하였다.[45] 그 밖에 아프리카TV KIA 타이거즈 편파중계 BJ 소대수도 쌍방울 팬이었고, 부안군 출신의 스트리머 셀옹이 온게임넷 방송 출연 당시에 쌍방울 유니폼을 입고 쌍방울 팬임었음을 인증한 바 있다. 쌍방울이 해체된 현재는 한화 이글스를 응원하고 있다고 한다.
- 올스타전에는 동군 소속으로 참가했다. 사실 위치로만 따지면 서군으로 들어가는 게 타당하지만, 제7구단인 한화 이글스가 1군에 참가했을 때 팀간 전력 안배 차원에서 서군에 들어가는 바람에 쌍방울은 한 팀이 모자란 동군의 빈 자리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SK 와이번스가 인천을 연고로 하고 있음에도 서군이 아닌 동군에 들어간 것도 바로 이런 사정이 있어서였다. 쌍방울의 빈 자리를 채우는 팀이 SK인데 재창단 이후에도 바꾸지 않았기 때문. 그런데 자레코사의 슈퍼 3D 베이스볼을 현대전자에서 현지화한 한국프로야구 게임에는 이게 제대로 반영이 안 되어 있어서 쌍방울이 서군으로 나온다.[46]
- 같은 전라권 야구단인 해태 타이거즈 팬들에게는 아쉬움의 대상이다. 쌍방울이 창단되면서 신생팀 프리미엄으로 본래 연고지인 전남은 물론, 과거 해태 왕조의 주축을 담당한 선수들을 대거 배출한 전북 쪽 선수들이 대거 쌍방울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김기태, 박경완, 조규제, 성영재, 김원형, 이진영, 정대현 등 본래 해태 연고지 내에서 우수한 선수들이 꾸준히 배출됐고[47], 비슷한 시기 연고지의 박재홍도 해태의 지명을 거부한 사례가 있어 해태빠들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셔야했다. 더욱이 선동열도 없고 이종범도 없던 해태 말년에 왕조의 몰락과 전력의 약화를 고스란히 실감했던 시기였기에 더더욱 그랬다. 전통적으로 좌타거포와 포수의 부재를 안던 해태에 "쌍방울이 창단되지 않고 그 선수들이 그대로 왔다면?"은 여전히 야구팬들 사이에서 인기있는 논쟁 거리. 기존의 이종범, 홍현우, 장성호, 이호준과 김기태, 박경완 등이 타선에 합류하고, 투수진도 만약 김원형과 조규제가 가세했다면 2000년 현대가 차지했던 위용을 해태가 그대로 흡수해 1980년대 이상의 지배적인 강팀으로 군림했을 가능성이 크다.
- 소속 선수들은 쌍방울이 군기가 꽤 엄격한 팀이었다고 회고했다. 다음은 그 증언의 일부.
- 최해식은 박동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외야 플라이를 쳤는데 자신도 모르게 코치에게 인상을 썼다는 이유로 해당 코치에게 발로 얼굴을 맞았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쌍방울에게 마음이 떠났으며 이후 트레이드로 해태로 떠났다.
- 심성보의 말에 따르면, 당시 쌍방울은 해태 타이거즈 다음으로 선후배 관계가 엄격했다고 한다.[48] 그 이유로 "초창기 쌍방울엔 해태 출신 선배들이 많았으며, 해태 때 ‘매’로 후배들의 기강을 잡던 분들이 쌍방울이라고 조용히 있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그보단 은퇴를 앞둔 노장 선배들이 이 팀 저 팀에서 온 게 군기가 세진 가장 큰 배경이었다."라는 말을 했다. 오죽했으면 “고등학교 팀인 줄 알았다. 실제로 주변에서 ‘쌍방울 고등학교’라고 불렀을 정도.”고 덧붙였다.
- 박명환야구TV에 출연한 오상민도 '쌍방울은 선배님들이 워낙 많다 보니 어린 선수들은 숨조차 쉬기 어려운 분위기'였다고 술회했다. 선발투수 지명을 받고 트레이너실에서 마사지를 받다가[49] 지나가던 선배님한테 머리를 정말 많이 맞았고, 휴식시간에도 신참선수들은 헬스장 벤치프레스 의자에서 쉬었다고 했다.
- 역대 쌍방울 선수 출신 중 KBO 리그 1군 정식 감독을 맡았던 사람은 김기태, 조원우, 김원형 등 3명이다. LG 트윈스에서 10년짜리 비밀번호를 종결해주고 KIA 타이거즈에 V11을 안겨준 김기태는 호평과 혹평이 동시에 공존하며, 조원우는 계약 기간 중 2017년 한 해만 반짝 좋은 성적을 거뒀다. 김원형은 2021년 시즌이 첫 감독 시즌이며 2년 차에는 SSG 랜더스 V5를 이뤄주었다. 정식 감독 외에는 박경완이 2020년 SK 와이번스 감독 대행을 맡은 적이 있지만, 성적이 워낙 좋지 못해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아마추어 지도자로는 한양대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고 있는 김기덕이 있다.
- 최해식이 술회하길 해태는 스스로 알아서 개인적으로 연습하는 문화가 배어있지만, 쌍방울은 코치 앞에서만 연습한다고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밝힌 바 있다.
- 매우 어렵고 척박한 환경에 있었던 팀이었지만 선수들 간의 우애와 의리는 매우 돈독했다고 한다. 특히 어느 정도 구단의 기틀이 잡히고 성적을 내기 시작했던 1990년대 중반의 팀 컬러는 꽤 끈끈해졌는데 의리와 단결로 뭉쳐진 팀 분위기는 비극적이게도 1997년 외환 위기로 인해 와해되고 만다. 외환위기 이후 모기업 쌍방울그룹 계열사들이 부도를 맞고 구단의 살림살이도 극도로 어려워지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박경완, 조규제, 김현욱, 김기태 등 주력 선수들을 일제히 당대 최고의 부자 구단이었던 현대 유니콘스와 삼성 라이온즈에 팔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강제 이적을 당하는 선수 본인은 물론 선수단 전체가 매우 숙연하고 슬퍼했다고 한다. 박경완은 현대로 이적이 결정되자 평소 절친했던 타 구단 선배 조웅천에게 전화해서 "형, 나 현대 가기 싫어요" 라고 말하기도 했고 김기태는 쌍방울 구단 고위층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쌍방울 구단이 원망스러웠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들과 작별해야 했던 김원형, 심성보, 김호 등 기존의 쌍방울 선수들이 멘붕에 빠져야 했던 것은 덤. 당시 쌍방울 선수들의 회상 그나마 이 둘은 쌍방울이 해체된 뒤이긴 했지만 그 선수단을 기반으로 창단한 SK 와이번스로 입단하며 옛 선수단과 재회할 수 있었고 SK에서 은퇴하면서 어느정도 슬픔을 달랠 수 있었다.
- 쌍방울 레이더스의 부활을 염원하는 전주 야구 동호회원들이 2013년 ' 전주 SDS 레이더스'라는 사회인 야구단을 창단했다. 2023년 전북레이더스라는 이름으로 실업 야구 리그에 참여한다.
- 쌍방울 레이더스 최후의 선수는 2018년 시즌 후 마치고 은퇴한 이진영이 되었다.
[1]
법인 청산일은 2002년 12월 31일.
[2]
이 구단이 존재할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프로야구의 연고지 체계는 광역 연고제였기 때문에 전북 전체를 팀의 연고지로 삼았다. 도내 최대도시 전주와 더불어 군산에서 홈경기를 열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 팀이 해체된 이후 광역 연고제의 낮은 효용성이 문제점으로 지적됐고 결국 2000년부터 도시 연고제로 연고지 체계를 바꾼다.
[3]
제2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쌍방울 해체 이후에는
KIA 타이거즈의 제2 홈구장으로 사용하다가 2014년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 개장 후에는 KIA 경기가 열리고 있지 않다.
[4]
창단 당시 구단주였던 이봉녕 쌍방울 창업주의 아들이다. 다만 1990~1998년에는
한국야구위원회 사무총장을 역임한 인물이자 전북야구의 대부 역할을 했던
이용일
쌍방울그룹 부회장이 구단주 대행을 맡았다.
[5]
1999년 올스타전 이후
김성근 감독의 해임으로 감독 대행을 맡아 시즌을 마무리했다. 2000 시즌 감독으로 내정됐으나 구단의 해체 후
SK 와이번스 수석 코치가 되어 한 시즌을 보내고 해임 당했다.
[6]
경기당 평균 4,221명
[7]
코로나19로 제한적 입장할 수 있던 시즌을 제외하고 KBO 역사상 가장 적은 연간 관중 수
[8]
경기당 평균 757명
[9]
그래도 전북 지역의 시장 수요 대부분이 이 지역에 거주했다. 전북 인구가 200만 명선에 턱걸이하던 1990년대 중반 당시 도내 인구의 70%에 육박하는 약 140만 명이 전주-완주, 익산, 군산, 김제 등 전북 북서부에 거주했다. 물론 지금도 전북 인구의 대부분은 이 지역에 살고 있다.
[10]
역대 KBO 리그 참가 구단 중 해체라는 비운을 맞은 팀은 쌍방울 레이더스와
현대 유니콘스 둘뿐인데, 현대는 전신인
태평양 돌핀스 시절을 포함해 한국시리즈에 6번 진출해서 그 중 4번이나 우승을 차지했던 2000년대의 강팀이었다.
[11]
한술 더 떠서 1992년에는 140피홈런, 1999년에는 187피홈런으로 한 시즌 최다 피홈런 기록도 갈아치운 전력이 있다. 홈런공장 이 기록은 다음해에 이 팀을 대신하여 창단된 SK가 195개란 다시 나오기 힘들 기록으로 경신했다.
[12]
2002년에 롯데가
타이기록을 세웠다.
[13]
쌍방울이 치른 1999년 페넌트레이스 마지막 홈 4연전 중 (사실상) 세 번째 경기이자 공식적으로는 마지막 경기(상세한 내용은 다음 각주에 후술). 이날 쌍방울은 2-3으로 패했는데 이 패배로 1995년
이상훈 이후 4년 만에
정민태가 단일시즌 선발투수 20승 기록을 세웠다. 참고로
코로나19로 인한 무관중 경기를 제외하고 KBO 리그 역사상 한 경기 100명 이하의 관중이 들어온 적은 총 네 번이다.
[14]
쌍방울은 1999년 10월 8일 전주구장에서 LG와 경기를 치렀고 이날 7:5로 승리를 거뒀는데, 이 경기는 원래 10월 6일에 치렀어야 할 더블헤더 2차전이었다. 10월 6일 대낮에 열린 1차전 개최에는 무리가 없었지만, 저녁 시간대에 편성된 2차전이 시작되자마자 전주구장의 낡은 조명탑이 고장나고 말았다. 그래서 이 경기를 일단
서스펜디드 게임으로 처리하고, LG가 다음 날인 10월 7일 잠실 롯데전이 예정되어있어서 일단 그 경기를 먼저 끝내고 다음 날인 10월 8일 다시 전주로 돌아와 6일 경기를 재개한 것이다. 그래서 공식 기록으로는 17연패 이후 6일 DH 2차전에서 1승을 거두며 연패를 끊고, 7일 마지막 경기인 현대전을 패배하며 시즌을 마무리한 것으로 남았다.
[15]
재밌는 점은 이 기록이 원정팀들이 묵었던 전주 코아호텔의 귀신 목격담과도 관련있다는 것이다.
쌍방울 홈 17연승의 비밀 문서 참조. 당시 쌍방울을 맡았던 김성근 감독은 SK의 감독을 맡던 2009년 시즌 막판과 2010년 시즌 초에도 22연승 기록을 달성한 적이 있다.
[16]
이 해에 쌍방울 불펜의 핵심이던
김현욱이 구원승으로만 20승을 거두는 기염을 토했다.
[17]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에 태어난 KBO 리그 선수 중에서 전북에서 태어났지만 타 지역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나와 타 지역 연고팀의 지명 선수로 입단한 사례가 꽤 있는데 이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할 시점 내지는 높은 학년이던 시절 쌍방울이 해체되고 도시 연고제 전환으로 광주 연고팀으로 한정된 해태의 우선지명도 어려워지면서 서울 등 수도권 학교로 전학을 간 이들이 많다. 대표적 사례가 군산 태생의
오지환과 전주 태생의
강지광 등이 있으며 자세한 내용은
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 참조.
[18]
정읍이평중학교,
정읍인상고,
고창영선고 등 3개교가 야구부 창단을 했지만 전북특별자치도교육청과의 갈등으로 고창영선고는 2019년을 끝으로 해체되었다가 2023년부터 다시 운영을 재개할 예정이었으나 진전이 없다.
[19]
특히 익산시는 초중고팀이 아예 없다.
[20]
하지만 쌍방울 선수 출신 지도자들은 현대야구에 역행하는 행보와 쌍방울 시절 구시대적 사고로 그다지 좋은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케이스가
KIA 타이거즈 감독으로서 우승을 선물했지만 말년에 악평을 받은 김기태. 심지어 박경완도 SK 감독 대행 시절 구단에서 장기적으로 지도자감으로 믿고 키워줬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야구에 역행하는 투수관리 및 혹사로 비판을 받았으며,
윤재국도 김성근 사단에서 영 좋지 못한 평가를 받았다. 비단 지도자 뿐만 아니라 프런트에서도
고형욱과
송구홍이 부실한 선수 영입 등으로 비판받고 있다. 그나마
김원형이 투수코치 시절의 평가가 무난했고 감독으로서
2022년 한국시리즈를 우승시켰으나 여러 문제점이 도마 위에 오르다 2023년 포스트시즌 탈락의 책임을 물어 경질되는 등 끝이 좋지 못했다.
[21]
참고로 당시
동국대학교 야구부 감독은 말년을 쌍방울에서 보냈던
한대화.
[22]
은퇴 후
경기고등학교 야구부 투수코치로 부임했으며 곽연수 감독의 퇴임 후 감독으로 승진했다. 현재는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23]
통산 최다승(70승), 최다패(73패), 최다이닝, 최다완투, 최다완봉, 최다 탈삼진 등등 여러 기록보유.
[24]
2군 코치 시절 육성 쪽에서는 괜찮은 평을 들었으나 1군 투수 코치를 맡은 뒤에는 투수 교체 타이밍 쪽에서는 평가가 나쁜 편이다. 1군 투수코치 김원형의 경우 롯데, 두산 모두 1년차에는 괜찮으나 2년차에는 투수들이 망가져서 나쁜 평을 받았으며, 2021 시즌은 한 팀을 이끄는 감독의 포지션이 되었으니 책임이 막중하다.
[25]
만들어진 기록에는 상을 줄 수 없다는 기자들 사이의 불문율에 의한 것이었다.
비난은 순간이고 기록은 영원하다에 대해서 기자들은 기록은 영원해도 상은 영원히 없다라고 맞불을 놓았다.
[26]
이후 2년간 다소 폼이 떨어지긴 했지만 초창기 벌어들인 승수 덕택에 1996년까지는 팀 내 유일 통산 50승 이상 투수였다. 이후 김원형이 50승 돌파와 함께 꾸준한 활약으로 팀내 선발투수 관련 모든 기록 1위로 올라간다.
[27]
2001년
조웅천과 함께 당시 신생팀이었던 SK의 전력 보강 목적으로 현금 트레이드로 이적했으나 2003 시즌을 앞두고 FA 박경완의 보상 선수로 현대 유니콘스에 돌아와 그해 우승 반지를 하나 더 끼고 KIA로 이적했다.
[28]
기록 정정으로 1014경기에서 1009경기로 수정. 대주자로만 출장한 경기가 있었기 때문.
[29]
2위는
OB 베어스에서 뛰었던
김형석의 622경기, 현역 중 1위는 500+ 경기를 연속 출전한
황재균.
[30]
사이드암 투수 자체가 우완일 경우 우타자에 강하기 때문에 기용되는데, 좌완 사이드 암은 우타자에게 약하다라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31]
선수 은퇴 후 삼성 라이온즈의 불펜포수로 취직했다가 현재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불펜포수로 재직 중이다.
[32]
1992년부터는 '자빗' 이라는 토끼를 사용한다.
[33]
1980년대 교진군의 마스코트로 유명.
[34]
실제 삼미 슈퍼스타즈는 구단 로고에
슈퍼맨을 그대로 갖다 썼으며, 여성 마스코트도
원더우먼이라 오늘날이면
DC 코믹스에 고소먹어도 할 말이 없다... 이는 당시 한국이
베른 협약에 가입(1996년 가입)하기 전이라 가능했던 일.
[35]
해당 사진은 상단 링크에 올라온 최훈 카툰의 한컷으로 패러디 되었다.
[36]
축구 응원가로 잘 알려진 Ole Ole Ole 노래의 음정이다.
[37]
이는 동시에 현대의 인적 승계팀인 히어로즈와의 마찰을 일으켰다. 2008년
SK 와이번스가
태평양데이 행사를,
히어로즈와의 경기에서 벌이면서 이 논란은 더욱 커졌다.
[38]
인천시민들은
현대 유니콘스의 연고 이전과 새로 생긴
SK 와이번스의 정착 때문에 혼란스러워서 옛 쌍방울 팬들까지 받아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타 팀 팬들이야 자신들과 무관한 옛 구단의 팬들과 친할 이유가 더욱 없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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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현대 유니콘스 해체 이후 재창단한
히어로즈 역시 처음에는 현대 색을 지우고 선을 그으려고 했었다. 이에 맞춰 현대 출신 고액 연봉 베테랑들을 트레이드하려고 시도했고, 현대 시절 마지막 감독인
김시진이 아닌 이광환을 감독으로 선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트레이드는 실패했고, 또한 이광환 체제는 안정적이지 않았으며, 이러한 현대의 외면은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구 현대빠들을 흡수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으며 처참한 인기와 관중 동원에 그친다. 여기에 SK와의 정통성 경쟁 문제도 있었던 탓에 2009년부터는 전략을 바꿔 자신들의 전신격 팀인
현대 유니콘스와
과거
인천
연고 구단 시절의 팬들을 끌어안으려 애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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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도 오랜 기간 동안
광주
전남 팬들에게 경멸과 왕따를 당하며 살아야 했다. "니네 팀은 어디갔냐?", "걍 야구팬 관두지 그랬냐? 우린 니네들 필요 없어."라고 조롱을 듣는 건 흔한 일. 이마저도 쌍방울이 해태의 멀쩡한 연고지를 빼앗아 간 것이라 쌍방울 건에 대해선 타이거즈 팬들이 피해자였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특히 군산은 해태의 모체와 같은 곳인데 그곳을 가져가버렸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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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에서 유년 시절 쌍방울을 응원했던
이말년이 현재까지도 쌍방울 선수단을 인수한 SK 와이번스를 인수한 SSG 팬으로 남아있는 것이 대표 사례다. 다만 여기에는 이말년이
안산시에서 학창시절을 보냈으며, SK-SSG 최고의 프랜차이즈 스타
김광현이
안산공고 출신인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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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말년은 실제 성장기는
안산에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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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내 닉네임도 '복실이돌격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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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SSG 랜더스도 쌍방울의 선수단을 기반으로 창단한 팀이라 마냥 갈아탔다 볼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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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시점에선 SSG 랜더스로 바뀌었지만 데프콘이 응원팀을 바꿨다는 정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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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신 한화는 동군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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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중 조규제와 성영재는 잠시나마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고 선수로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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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구단이
KIA 타이거즈로 바뀌면서 구타, 똥군기 등 구시대적 문화들은 사라지고 있다. 해태 타이거즈에서부터 구타를 없앤 인물이 바로
이종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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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민이 받고 싶은게 아니라 트레이너가 해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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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엔 태평양 돌핀스를 470억에 인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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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쌍방울 역사상 최고의 시즌이던 1996 시즌에는 팀간 상대전적에서 해태를 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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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6위, 1993년 7위, 1996년 3위, 1997년 3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