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30 15:40:46

김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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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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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1988 1989 1990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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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 /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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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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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기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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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길
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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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김일권
태평양
김윤환
태평양
김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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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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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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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숭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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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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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1대 2대 3대 4대 5대
김충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0)
김종윤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1~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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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박종훈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3)
김대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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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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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형철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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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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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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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20대부터 22대까지는 총괄코치 직함 사용. }}}}}}}}}

{{{#ff9933 [[태평양 돌핀스|태평양 돌핀스]] 등번호 37번}}}
홍문종
(1989)
김경기
(1990~1992)
이재주
(1993~2001)
{{{#fab93d [[태평양 돌핀스|태평양 돌핀스]] / [[현대 유니콘스|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00번}}}
결번 김경기
(1993~2000.7.6.)
결번
{{{#ffffff [[SK 와이번스|SK 와이번스]] 등번호 00번}}}
팀 창단 김경기
(2000.7.7.~2001)
결번
{{{#fff [[SK 와이번스|SK 와이번스]] 등번호 73번}}}
박승호
(2000~2002)
김경기
(2003~2005)
계형철
(2007~2011)
{{{#ffffff [[SK 와이번스|SK 와이번스]] 등번호 00번}}}
결번 김경기
(2007~2016)
임석진
(2018)
}}} ||
}}} ||
파일:external/www.sksports.net/20150721205348_1.jpg
<colbgcolor=#002b5c><colcolor=#fff> 우신고등학교 야구부 No.
김경기
金敬起 | Kim Kyungki
출생 1968년 4월 5일 ([age(1968-04-05)]세)
서울특별시 성동구[1]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한양초 - 상인천중 - 인천고 - 고려대[2]
신체 185cm, 91kg
포지션 1루수, 3루수[3]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90년 1차 지명 ( 태평양)
소속팀 태평양 돌핀스- 현대 유니콘스 (1990~2000)
SK 와이번스 (2000~2001)
지도자 SK 와이번스 2군 타격코치 (2003~2005)
SK 와이번스 1군 타격코치 (2007~2008)
SK 와이번스 2군 타격코치 (2009)[4]
SK 와이번스 1군 타격코치 (2009)[5]
SK 와이번스 2군 타격코치 (2010)
SK 와이번스 1군 주루코치 (2010)
SK 와이번스 2군 주루코치 (2011)[6]
SK 와이번스 1군 타격코치 (2011)[7]
SK 와이번스 2군 타격코치 (2011)[8]
SK 와이번스 1군 타격코치 (2011)[9]
SK 와이번스 2군 타격코치 (2012)[10]
SK 와이번스 1군 타격코치 (2012)[11]
SK 와이번스 2군 타격코치 (2013)
SK 와이번스 1군 타격코치 (2014)
SK 와이번스 1군 수석코치 (2015)[12]
SK 와이번스 루키군 타격코치 (2015)[13]
SK 와이번스 2군 감독 (2016)
인천 웨이브스 감독 (2019~2020)
우신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023~)
프런트 인천 웨이브스 이사장 겸 단장 (2021~2023)
해설위원 SPOTV 야구 해설위원 (2017~2021)
본관 강릉 김씨[14]
종교 천주교 ( 세례명 : 토마스)
가족 아버지 김진영, 사촌형 김풍기, 사촌매재 염경엽, 오촌조카 염아란
1. 개요2. 미스터 인천3. 선수 경력4. 은퇴 후
4.1. 지도자 경력4.2. 해설자 경력4.3. 야인 시절
5. 여담6. 연도별 주요 성적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파일:external/image.ohmynews.com/punctum_287885_15%5B520991%5D.jpg
2001년 8월 25일 숭의야구장에서 홈런을 친 뒤 팬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김경기.

태평양 돌핀스- 현대 유니콘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SK 와이번스 소속 야구 선수, 코치.

2. 미스터 인천

인천야구의 적자 김경기
김경기, 그와 함께해 인천은 행복했네

김경기를 대표하는 별명 중 하나가 미스터 인천이다. 인천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중학교 때부터 줄곧 인천에서 자라나 야구도시 인천을 대표하는 야구선수로 성장한 덕에 이런 별명이 붙었다. 특히 고교생 시절부터 인천야구의 기둥이 되어달라는 팬들의 기대와 응원이 유달리 남달랐던 것은 그의 아버지 김진영 감독의 존재 덕분이다.

선배 야구인 박현식과 함께 "인천야구의 대부"로 알려진 김진영은 경기도 옹진군 자월면(現 인천광역시 옹진군 자월면) 승봉도에서 태어나 인천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대학야구에서 명감독으로 이름을 알렸다. 프로야구 출범 직전인 1980년 고향 인천으로 돌아와 인하대학교 감독을 역임했고 1983년부터 1985년 말까지 삼미 슈퍼스타즈 제2대 감독과 청보 핀토스 초대 감독을 맡았다.

부자의 이름이 동시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부터였다. 인천 출신 야구인 중 최고의 슈퍼스타였던 아버지 김진영은 소속팀 삼미 슈퍼스타즈의 전력이 너무도 허약했던 탓에 아마추어 감독 시절의 명성을 깎아먹은 반면 아들 김경기는 고등학교 때부터 인천고 4번타자로 두각을 드러내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당시 스포츠면에는 "희비 엇갈린 야구 부자…아버지는 18연패-아들은 승승장구" 등의 제목이 달린 기사가 여러 번 나오기도 했다. 특히 김경기가 1985년 가장 뛰어난 타격 실력을 뽐낸 고교 선수에게 주어지는 이영민 타격상을 받자 인천팬들의 시선이 김경기에게로 쏠렸다. 당시 인천팀에는 양승관 김동기 외에 이렇다 할 거물급 타자가 없었기에 인천 팬들은 하루빨리 김경기가 프로에 입단해서 나락으로 떨어진 인천야구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길 기대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대학진학이 당연한 문화였고 김경기 본인도 서울 올림픽 야구 국가대표팀으로 뛰고 싶은 마음이 강했기에 프로 직행보다는 대학 진학을 택하면서 인천팀 데뷔를 미뤘다. 1986년 고려대학교에 입학한 김경기는 대학 졸업 후인 1990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고향팀 태평양 돌핀스의 1차 지명을 받아 데뷔한 후 2001년 SK 와이번스에서 은퇴할 때까지 12년간 인천 연고팀에서만 뛰며 인천야구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선수가 됐다.

훗날 인천을 연고지로 갖게된 SK 와이번스의 연고팬은 물론이고, 특히 과거 현대 유니콘스 팬들 역시 굉장히 좋아하는 선수다. 과거의 현대 팬덤을 기반으로 하는 현재의 키움 팬과 현대에게 버림받은 후 응원팀을 옮긴 인천 지역 SK 팬들 사이에선 항상 삼청태현을 둘러싸고 대립이나 갈등을 빚고 있지만, 김경기란 선수 하나로 공통 분모를 삼는 이들이 꽤 된다. 그만큼 그가 가진 상징적인 의미가 단순한 선수를 넘어서는 무언가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태평양을 응원하던 도원전사들에게 김경기가 어떤 존재였냐면, 올스타전 팬 투표에서 그 선동열보다 4000표나 더 표를 많이 얻었을 정도였다.

21세기부터 야구를 접한 젊은 야구팬들은 프로 커리어 중 단 한 번도 3할 타율을 기록하지 못한 김경기의 통산 스탯을 보고 "예상보다는 그렇게 성적이 뛰어나진 않았는데?"라는 의문을 갖기도 한다. 하지만 태평양 돌핀스 시절이나 그 이전부터 인천야구를 지켜본 골수팬들은 김경기의 존재감이 엄청났다고 인정한다. 애초에 태평양 돌핀스의 타선이 지독한 물방망이여서 김경기의 활약은 천금과도 같았으며, 그럼에도 누적스탯이 좋지 못한 것은 상대팀 투수들도 김경기를 집중 견제하다 보니 피로와 부상이 누적되며 많은 경기에 출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반 태평양의 타선 구성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냐면 9명의 선수 중 안타나 홈런을 안정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선수라고는 김경기, 김동기, 윤덕규 뿐이었고 나머지는 그저 방망이를 들고 타석에 들어서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둬야 할 정도로 허약했다. 이 당시 태평양 타자 중에는 프로 통산 타율이 2할에도 채 못 미치는 염경엽과 2할을 겨우 넘긴 김성갑 등이 당당히 주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 정도. 결국 김경기를 집중 견제해서 출루하지 못하도록 막으면 태평양의 득점 루트가 차단되기 때문에 김경기에게만 견제가 이어진 것이다.

이것만 보면 어떻게 이런 막장타선으로 이길 생각을 했나 싶겠지만 다행히 인천 연고 팜의 투수력이 그야말로 쩔어줬다. 김경기가 홈런이라도 치는 날에는 김홍집, 정명원, 정민태, 최창호, 박정현, 조웅천, 안병원, 가내영, 박은진 같은 수준급 투수란 투수는 총동원됐고[15] '우오와앙 1점이다!!'를 외치며 미친듯이 틀어막았다. 그리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전술로 1994년 한국시리즈까지 갔다.[16] 비록 신바람 야구의 LG 트윈스에게 밀리긴 했지만 [17][18] 그래도 타자는 김경기 하나만 믿는 전술(...)이란 걸 생각해 보면 당시 태평양의 투수력이 얼마나 셌는지 알 수 있다. 진짜 태평양 바닷물처럼 상대팀에게 점수를 짜게 주는 팀이었다.

그의 현역 커리어는 모두 숭의야구장에서만 이뤄진 탓에 인천야구가 배출한 역대 슈퍼스타 중 숭의야구장 시대를 대표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3. 선수 경력

김경기의 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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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 선수 경력: 김경기/선수 경력
파일:KBO 리그 로고(1982~2012).svg
아마추어 시절 현대 시절 SK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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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은퇴 후

4.1. 지도자 경력

은퇴한 후 2003년부터 SK 와이번스의 2군 타격코치를 시작으로 SK 한 팀에서만 13년간 코치 생활을 했다. 주로 타격코치 보직을 맡았고, 1군과 2군을 오가는 등 보직이 바뀐 적은 있지만, 2006년 한 해만 중간에 미국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SK를 떠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야말로 뼛속까지 미스터 인천.

미국 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뒤 2007년 시즌을 앞두고 김성근 감독 아래에서 SK의 1군 타격코치로 부임하였고, 이후 SK 왕조 시절 메인 타격코치로 활약하였다. 2011년과 2012년은 시작은 2군 코치로 하였으나 시즌 중 팀 타선이 부진하자 중간에 콜업되어 잔여 시즌간 1군 타격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한 때 박경완과 함께 SK 팬들이 바라는 차기 감독 0순위이기도 했다.[19] 인천팀 사상 최고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만큼 많은 SK팬들이 김경기가 차기 SK 감독이 되길 바랄 정도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연고지인 인천광역시에서는 팬들에게 영원한 아이돌 같은 존재인데다 팀 내부에서도 따르는 선수들이 많다는 증언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고, 타격코치인 만큼 팀 주축 타자들이 그를 많이 믿고 의지한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2013년 시즌 종료 후 이만수 감독 경질 루머가 돌았을 당시 2014 시즌부터 이만수는 경질되고 차기 감독으로 김경기가 내정되어있다는 루머가 SK 팬들에게 정설로 받아들여지기도 했었다.

2014년 시즌 후 이만수가 물러남에 따라 김경기 타격코치도 후임 감독 후보 중 하나로 꼽혔으나, SK 구단의 선택은 전 2군 감독이자 육성총괄 담당이었던 김용희를 감독으로 승격시키며 감독의 꿈은 다음으로 미루게 됐다. 대신 1군 수석코치로 임명되어 김용희 감독을 옆에서 보좌하게 되었다.[20] 일각에서는 김경기를 수석코치로 승격시킨 이유가 김용희 이후의 감독감을 육성하기 위해 미리 감독 수업을 받게끔 하는 이유로 추측하고 있다.

2015년 시즌 초만 해도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면서 순항했으나, 시즌 중반부터 주축 선수들의 부상 및 부진으로 쳐지면서 팀 순위가 결국 7위까지 떨어지는 부진에 빠졌다. 결국 구단 내·외부에선 충격요법을 써야할 때라며 김용희 감독을 압박했고 이에 김경기는 자처해서 자신의 강등을 요청했다. 처음에는 김용희 감독이 이를 거절했지만 김경기가 이를 재차 요청한 끝에 결국 8월 15일부로 1군에서 말소되어 루키군 타격코치로 내려갔다. 반대급부로 조원우 주루코치가 수석코치로 보직을 바꿔 김경기의 빈자리를 메웠다. 스스로 목을 친 남자, 김경기

2016년부터는 SK 와이번스 2군 감독으로 선임됐다.

그러나 2016년 시즌이 끝난 뒤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고 SK 와이번스 2군 감독에서 해임되며 16년 만에 SK를 떠나게 되었다. 훗날 밝힌 바에 의하면 이 때 김용희 감독의 후임 감독 후보 중 하나로 꼽혔고 실제로 SK 감독 최종면접까지 봤는데 외국인 감독 영입을 강력하게 바랬던 구단 상층부의 의견으로 트레이 힐만 감독을 선임하면서 물거품이 됐다고 밝혔다. #

2019년 10월 31일 창단되는 독립구단 인천 웨이브스(가칭)의 감독을 맡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역시 미스터 인천다운 행보. 김경기 뿐만 아니라 같은 인천 출신 야구인인 지병호가 수석코치로, 최원호와 최성묵도 코치로 각각 합류한다고 한다.

2023년 우신고등학교 지휘봉을 잡게되며 지도자 커리어 처음으로 아마추어 감독을 맡게된다.

4.2. 해설자 경력

2017 시즌부터 SPOTV의 해설위원을 담당하고 있다.

해설을 한 지 1년이 넘어가도록 이 항목에 내용 추가가 안 되고 있을 정도로 존재감이 없는 무색무취의 해설을 하고 있다. 반대로 얘기하면 딱히 거슬리거나 호불호가 갈리지 않는 무난한 해설자로 어느 정도 자리 잡았다고도 볼 수 있다. SK 와이번스 와의 경기시에는 아무래도 오랫동안 근무했던 팀이라 선수들에 대한 이야기를 가끔 한다.

해설하다 자주 나오는 말투는 "~인데요, ~하네요" 이 말투를 듣고 있으면 긴박한 상황에도 지루한 느낌을 준다고 평하는 시청자들도 있다. 오랜 지도자 생활로 야구를 읽는 눈 자체는 뛰어나지만, 말로 풀어내는 솜씨는 다소 부족하다. 거기에 야구를 꽤 오래 본 팬 입장에서는 '굳이 저런 것까지 설명해야 하나' 싶은 것까지 설명하다 보니 오디오가 빌 틈이 없다.

2018년 8월 4일 KIA 타이거즈 두산 베어스간의 경기, 2회말 1사 만루 상황에서 최형우의 내야안타를 두산의 김재호가 잡아 2루 태그 후 1루로 송구하는 과정에서 1루 주자 이명기의 헬멧을 맞췄다. 공을 사이드로 던지는 과정에서 발생하였는데 이명기가 슬라이딩으로 들어가지 않아서 헬멧을 맞는 과정이 생겼다고 해설하여 야구 팬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2019년 6월 15일 kt wiz의 대구 삼성전 9회초 8대 7 상황에서 경기가 우천 중단된 가운데 응원을 펼치는 kt 팬들의 모습이 화면에 잡히자 'kt 팬들이 kt가 이긴 줄로 착각을 하고 신이 나서 응원을 하고 있다'라는 멘트를 해서 논란이 되었다. 서스펜디드 규정에 대해 설명하려는 의도였겠으나, 관중들을 야알못 취급하는 뉘앙스에, 설령 팬들이 서스펜디드 상황에 대해 몰랐더라도 빗속에서 열정적으로 응원하는 사람들을 비꼬듯 이야기한 것은 적절치 않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편파해설로 각팀 선수들한테 욕을 많이 먹는다.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투구를 강조하는데, 문제는 1회부터 9회까지 내내 이 말밖에 안한다. 지루함은 덤.

이후 2022년 재계약이 만료되면서 1군 경기 해설위원직을 내려놓게 되었다. 인천 웨이브스 단장직에 더욱 집중할 듯.

그러나 해설위원을 아예 내려놓지는 않았는지 2023년부터는 KBO 퓨처스리그 해설위원으로 종종 등장하고 있다.

4.3. 야인 시절

2021년부터 독립야구단 인천 웨이브스의 이사장 겸 단장직을 맡게 되었다.

2022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 초청되어 이만수 前 SK 감독, 김용희 前 SK 감독, 유정복 인천광역시장, 김시진[21] 前 롯데 감독과 함께 경기를 관람했고 본인의 고향팀 SSG 랜더스가 우승하는 순간을 목격했다.

2023년 10월 우신고 야구부의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5. 여담

  • 집안 전체가 야구집안이기도 한데, 아버지는 전 삼미 슈퍼스타즈 감독인 김진영이다. 2020년 8월 3일에 세상을 떠났다. 또한 한국야구위원회 심판으로 활동 중인 김풍기는 그의 사촌 형이다. 프로 데뷔 당시에는 배번으로 37번을 달았으나, 1993년부터 마음을 비운다는 뜻으로 등번호 00번을 달아 그 이후부터 00번을 고수중이다. 한국의 프로스포츠 사상 00번을 등번호로 달았던 선수는 김경기가 처음이다[22]. 또 태평양과 현대의 백업 내야수이자[23] 그와 고려대, 태평양- 현대 시절을 함께했고 LG 트윈스 감독인 염경엽과는 사촌매제사이라고.[24]
  • 아버지를 이어 인천을 대표하는 야구선수로 성장한 인천야구의 적자라는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야구를 시작할 때에는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다고 한다. 이유는 김진영 감독 본인이 김경기가 야구 때문에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을까 걱정해서라고. 결국 김경기에게 야구를 하도록 허락했지만 조건이 붙었다. 반에서 10등 밑으로 떨어지면 바로 야구를 접는 것으로. 김경기는 오로지 야구를 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연습으로 피곤한 몸을 이끌고 공부에도 매진했다. 그 결과 고등학교 3학년 때 본 학력고사에서 담임이 진지하게 체육특기자가 아닌 일반전형으로 고려대 체육교육과에 지원할 것을 권할 정도의 성적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법학과에 진학해 졸업하였다.
  • 현역 시절 굉장한 노력파 선수였다. 기자들도 인정하던 연습벌레였다고... 어느 기자에게는 자기는 스스로 생각해도 죽기 살기로 운동하는데 이 정도밖에 못 한다고 말한 적도 있디고 한다. 또한 부친이 인천을 대표하던 야구 스타였던 만큼 어릴 때 김경기를 위한 조그마한 야구장을 만들어줬는데, 어린 시절 밤을 새면서 야구를 연습했다고 한다. 떡잎부터 남달랐던 것.
  • 고등학교 2학년 때 당한 허리부상이 선수 생활 내내 영향을 미쳤다. 걷는 것 조차 어려울 정도로 큰 부상을 입었는데 악바리 연습으로 이겨내었다고 한다. 프로 선수 당시 연도별 성적을 보면 유난히 짝수해에만 잘 하고 홀수해에 헤매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 이유가 고질적인 허리 부상 때문이라 한다. 한 해 전경기 출장을 감행하면 그 다음해는 허리부상을 달고 살았다고. 이런 이유로 프로에서 활약한 기간이 생각 외로 짧다.
  • 그는 항상 안타를 칠 때나 홈런을 칠 때 십자 성호를 긋는 세레모니를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십자 성호 세레모니는 평소 그가 다니던 인천의 한 천주교 성당의 신부가 제안했다고 한다. 김경기를 비롯한 그의 가족들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며, 그의 전 부인이었던 김윤정 씨가 매 경기가 열리는 날마다 새벽기도를 하면서 김경기의 선전을 기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참고로 세례명은 토마스.
  • 흑역사로는, 선수협시절에 선수협 5적을 주도했던 적이 있었다는 거다. 앞서 잠깐 언급했던 전준호와의 갈등도 이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두산 베어스의 감독이자 과거 등번호 23번을 달던 포수와 마찬가지로 묻힌 감이 없지 않아 있다. 2000년 시즌 전,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가 창설되기 시작할 무렵 전준호가 선수협 참여를 독려하였는데, 당시 선수협에 대해 가장 부정적인 의견을 표하던 현대가 친구단파인 김경기를 통해 이를 저지하면서 둘의 갈등이 생겼다고 한다. 소문에 의하면 전지훈련지에서 둘은 주먹다짐까지 했다고.[25] 아무래도 김경기 쪽이 체구가 좋다 보니, 상처를 많이 입은 쪽은 전준호. 갈비뼈와 손가락이 부러졌다고 한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전준호의 성적을 보면 2000년도 출장경기수가 유독 적다.[26] 하지만 친구단파로 선수협 5적을 주도했던 것과는 별개로 구단 및 코칭스태프와의 마찰, 무엇보다 본인의 요청으로 인해 선수협 5적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신생팀 SK로 트레이드, 구단을 일찍 떠나고 말았다.
  • 선수 시절부터 투수 정명원과 함께 '큰형님'같은 역할을 해왔었고 카리스마가 강했다. 한 가지 일화로, 2007년 SK vs. 현대 수원구장 경기를 치렀던 때였다. 당시 양 팀 팬덤은 말 그대로 서로를 원수 보듯 했으며, 수원구장에서는 서로 언성을 높이면서 욕까지 하던 수준이었다. 그러나 김경기가 1루 코치로 나올 때면 1루 관중석에 있던 현대 팬들은 김경기가 SK 코치임에도 다들 '김경기! 김경기!!' 연호를 하였고 김경기는 1루수 이숭용하고 같이 기분좋게 웃어주고 농담도 건네받고, 쇼맨쉽 보여주고 파울볼이 김경기 쪽으로 날라오면 1루 팬들에게 기분 좋게 공을 던져주고 이랬을 정도. 이 정도면 그가 태평양 돌핀스 때부터 인천 팬뿐만이 아닌 비 인천지역 연고 팬들에게도 얼마나 사랑받았던 선수였는지를 알 수 있다.
  • 2007년 4월 10일 문학 홈 개막전으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 시작 전 스포테인먼트의 일환으로 개막전 시타를 했다. 이날 시구는 투수 출신 김성근 감독, 시포는 포수 출신인 이만수 수석코치가 했다.
  • 인천 출신 힙합그룹 리듬파워의 노래 중 <만루홈런 인천 remix>[27]에서는 'I'm feelin' like 김경기'로 언급된다.
  • 특히 LG 팬들이 김경기의 해설을 매우 싫어한다. LG를 매우 싫어하는 듯한 편파 해설을 하는데 두산 팬들도 김경기의 해설을 싫어하지만 잠실 시리즈에 해설을 들어오면 LG가 이기면 대놓고 한숨을 쉬거나 침묵 모드가 된다는 이유로 인해 LG 팬들의 비토가 거세다.
  • 현역 시절 선수단 내에서 불리던 별명은 몸집이 크다는 이유로 고릴라였다고 한다.
  • 생각보다 짧은 활동기간 (12시즌 중 레귤러 9시즌) 과 짝수 징크스, 말년의 저조한 성적에도 통산 OPS가 .791로 나쁘지 않다. 참고로 19년간 뛴 박한이가 0.795이다.
  • 2007 시즌에는 강도를 잡다 중상을 당한 적이 있다. 5월 17일 잠실 경기를 마치고 귀가하던 도중 여성의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가 강도와 격투를 벌인 끝에 주변을 지나던 택시기사와 경찰의 도움으로 강도를 붙잡는데엔 성공했으나 자신도 왼손이 찢어지는 부상을 입고 말았다. 결국 강도에게는 구속영장이 발부됐고 이러한 사실을 감추고 경기장에 나왔던 김경기는 상태가 심해져 결국 병원에 입원한 뒤 퇴원 후에는 붕대를 감고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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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태평양데이 당시 조웅천과 함께[28]
  • 2008년 SK 구단이 태평양데이 행사를 했을 때 팬들에게 똑같은 유니폼을 판매했는데 이 당시 과거 태평양 시절에 뛰었던 주요 선수들의 배번과 이름을 마킹할 수 있도록 했다. 그 당시 가장 많은 마킹 유니폼이 00번 김경기였다.[29] 인천야구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을 다시 한 번 보여준 사례. 태평양데이 당시 김경기는 이 유니폼을 입고 경기 전 시타를 했다.
  • 2009년 9월 6일 문학 롯데전 때 CJ 인터넷 마구마구가 선정한 제4대 프로야구 레전드 스타로 선정되어, 경기 전 레전드 동영상 상영 후 시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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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10월 7일 문학 NC 다이노스와의 경기 시작 전 레전드 데이의 일환으로 동영상 상영 후 시구를 실시했다. 그리고 그만 시타자로 나선 자신의 골수팬을 맞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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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공깽스럽게도 코치시절부터 진행되어온 탓인지 탈모가 매우 심하다.
  • 이재국 기자가 이광용의 옐로우카드 시즌 3에서 들려준 이야기인데 SK 와이번스에서 은퇴식을 할 당시 구단에서 입장한 팬들에게 돌렸던 선물이 빵 2개였다고 한다. # 다만 이는 이재국 기자의 기억과 실제가 맞지 않는 사실이다. SK 프런트에서 입장 관중에게 빵 2개를 선물했던 경기는 2002년 은퇴식이 아니라 2000년 7월 SK 이적 후 첫 홈경기 때였다.

6.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0 태평양 120 414 .285 118 29 1 10 68
(5위)
50 7 56 .432 .366
1991 109 392 .291 114 25
(3위)
4 8 59 42 5 33 .436 .341
1992 126 465 .254 118 21 2 21 65 57 1 41 .443 .312
1993 86 318 .280 89 14 0 8 49 28 2 31 .399 .343
1994 124 433 .277 120 19 3 23
(2위)
70 68 3 63 .494
(5위)
.367
1995 96 356 .295 105 19 1 12 46 52 4 42 .455 .369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6 현대 115 412 .274 113 16 1 20
(4위)
64 54 6 57 .464 .360
1997 91 311 .254 79 21 0 6 51 36 6 49 .379 .352
1998 126 431 .274 118 25 0 18 59 62 5 55 .457 .354
1999 92 264 .277 73 11 1 6 37 37 1 40 .394 .368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0 SK 49 142 .282 40 5 0 4 21 19 2 33 .401 .417
2001 48 82 .232 19 1 0 2 9 10 0 14 .317 .340
KBO 통산
(12시즌)
1182 4020 .275 1106 206 13 138 598 515 42 514 .436 .355

7. 관련 문서



[1] 미스터 인천이라는 별명 때문에 인천 출생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사실은 서울 출생으로 성동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진영 감독이 해병대 야구단과 중앙대학교 야구부에서 감독을 역임했기에 그의 가족도 모두 서울에 살았다. 김진영 감독이 고향으로 돌아와 인하대학교 야구부 감독에 취임할 때 김경기도 중학교에 입학했고, 이때부터 줄곧 인천에서 자랐다. [2] 법학과(1986학번) [3] 현대 유니콘스 시절 외국인 선수로 1루 요원인 스캇 쿨바가 영입된 후 3루수로 포지션을 바꾼 적이 있다. [4] ~7월 15일 [5] 7월 16일~ [6] ~7월 3일 [7] 7월 4일~7월 16일 [8] 7월 17일~8월 17일 [9] 8월 18일~ [10] ~5월 29일 [11] 5월 30일~ [12] ~8월 14일 [13] 8월 15일~ [14] 38세손 '○起' 항렬. 다만 사촌형 김풍기는 '氣'자를 쓴다. [15] 흔히 투수왕국을 말하면 대부분 해태 타이거즈를 말하지만 1990년대부터 야구를 본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태평양 돌핀스를 먼저 말한다. 해태의 경우 1980년대에는 최강급 선발과 핵타선, 그리고 중간급의 불펜이 있었고 1990년대에 들어 이강철과 조계현이 등장했으나 리그 최강급의 선발투수와 달리 불펜 투수진은 필승조 1~2명과 마무리 빼면 빈약한 편이였고 타자들도 이종범과 홍현우만 믿고 가는 야구를 했다. 그에 비해 태평양은 선발투수부터 중간, 마무리까지 당대 최고의 투수들 혹은 훗날 당대 최고가 되는 투수들로 도배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후술하듯 이 미친 전략으로 한국시리즈까지 갔다. [16] 1994년 당시 태평양 돌핀스의 감독이었던 정동진은 막강한 타력으로 무장했던 대구상고 야구부 삼성 라이온즈를 지도한 경험이 있고 공격적인 스타일을 선호하는 미국에서 코치 연수를 받고 돌아왔기에 미국식의 화끈한 빅볼 스타일을 구사하고자 했다. 하지만 당시 태평양 야수들의 절망적인 공격력으로는 당최 점수를 낼 도리가 없었기에 너무나도 귀하게 짜낸 1~2점을 투수력으로 지키는 야구를 할 수밖에 없었다. [17] 그마저 94년 한국시리즈의 경우 3경기가 1-2점차 경기였고 1,3차전은 승리할 수 있는 경기였따 [18] 삼청태현 계열의 팀들이 유독 LG 트윈스에게는 약했다. 삼청태야 약했던 시절이 워낙 많아서(...) 그러려니 하지만 현대 시절에도 유독 LG 상대로는 고전했다(상대전적이 유일하게 5할 밑으로, 딱 1승 밀린다). [19] 실제로 이만수 감독이 물러난 직후 후임 감독을 물색한다고 했을 때 유력한 감독 후보로 꼽혔고 김용희 감독이 물러난 후에도 역시나 후임 감독감이라고 꼽혔지만 이번에도 감독으로는 선임되지 않았다. 다만 구단에서는 감독감으로 보고 있지만 본인이 만약 감독이 되어 성적이 좋지 못할 경우 인천팀을 떠나야 한다는 것 때문에 부담을 느껴서 감독을 맡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20] 둘 다 고려대학교 야구부 선후배 사이기도 하다. [21] 김경기가 태평양과 현대에서 선수로 뛰던 시절 1군 투수코치로서 한솥밥을 먹은 바 있다. [22] 0번은 많았으나, 0이 두번 들어간 00번은 김경기가 최초다. 그리고 00번을 다는 선수들이 늘어나고 있다. [23] 백업으로 활동한 건 현대 유니콘스 시절. 태평양 돌핀스 시절에는 주전급이었다. [24] 염경엽 감독의 아내는 김경기의 사촌동생이자 김풍기 심판위원의 친동생이다. [25] 다짜고짜 먼저 주먹을 날린 쪽이 김경기다. [26] 전후 4~5년간은 꾸준히 100경기 이상을 출전했지만, 2000년대에는 87경기만 출전. [27] 원곡은 다이나믹 듀오의 <만루홈런>. 원곡에선 'I'm feelin' like 이대호'로 언급된다. [28] 1994~1995년 당시 두 사람은 나란히 선수였고 태평양데이가 진행되던 시점에는 조웅천만 현역 선수였다. [29] 실제로 이 유니폼을 입고 뛰던 시절이 김경기에게는 최고의 전성기였고 이 시절 초등학교에 다녔던 20대 후반~30대 중반의 팬들은 자연스럽게 김경기에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