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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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lbgcolor=#800080><colcolor=#fff> 전진의 황족
苻朗 | 부랑 |
|
시호 | 없음 |
작위 |
|
성 | 부(苻) |
휘 | 랑(朗) |
자 | 원달(元達) |
생몰 | ? ~ 389년 9월 |
출신 | 악양군(略陽郡) 임위현(臨渭縣) |
아버지 | 부락(苻洛) |
국적 | 전진 → 동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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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진의 황족. 반란한 행당공 부락의 아들. 세조 선소제 부견의 5촌 조카(종질).2. 생애
활발한 성격에 광대한 도량을 지니고 있어, 행동거지가 시원시원하고 호쾌하였다. 이런 성격 때문에 부랑은 어려서부터 자유분방하게 지내면서 마음 속에 원대한 지조를 품고 세속의 영광을 하찮게 여겼다. 선소제 부견은 일찍이 이런 부랑을 보고"우리 집안의 천리마로다!"
라 평하였다. 건원 18년(382년) 8월, 그를 사지절, 도독청서연3주제군사(都督青徐兗三州諸軍事), 진동장군, 청주(青州)자사로 삼고, 낙안남(樂安男)에 봉하였다. 부랑은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겨 굳게 사양했지만 선소제 부견이 불허하여 어쩔 수 없이 청주로 부임하였다.
부랑은 방백의 지위에 올랐음에도 소박한 선비처럼 생활하면서 경전을 탐독하였고, 손에서 책을 놓는 일이 없었다. 그는 매번 현학의 담론을 즐기느라 해가 지고 저녁이 되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또, 산과 강을 돌아다니며 그 경치를 만끽하는 것 역시 그의 취미 중 하나라, 피로조차 잊고 등산하러 다니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정무를 소홀히 하지 않아 지역을 다스리면서 많은 치적을 쌓았다.
건원 20년(384년) 10월, 서연2주자사 사현이 비수대전에서의 승세를 몰아 북벌을 추진하여 음릉(陰陵)태수 고소(高素)를 보내 청주를 정벌하게 하였다. 고소의 군대가 낭야(琅邪)까지 이르니, 팽성(彭城)에 있던 부랑은 사현에게 사자를 보내 투항하였다. 이에 사현은 부랑의 항복을 받아주었고, 이내 동진 조정에서도 조서가 내려져 부랑을 원외산기시랑에 임명하였다. 이윽고 양주(揚州)로 옮겨 거주하게 된 부랑은 한족 국가인 동진 내에서도 풍류로는 일품이었고, 스스로도 이를 자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뜻 또한 만물을 능가하여 그와 더불어 말을 나눌 수 있는 이는 극히 소수였다.
표기장군 사마도자의 장사 왕침은 당시 강동에서 수재로 꼽히는 인물 중 하나였는데, 부랑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를 만나려 하자 부랑은 병을 칭하며 만남을 피하였다. 이에 출가 승려인 석법태(釋法汰)가 부랑에게 물었다.
"
왕 이부(吏部) 형제를 만나지 않으시렵니까?"
부랑이 답했다."이부 형제가 누구인가? 사람의 얼굴을 하고 개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와 개의 얼굴을 하고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 그 두 형제를 말하는 건가?"
형인 왕침은 얼굴이 못생겼지만 재주와 지혜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동생인 왕국보는 자태가 아름다고 잘생긴 외모를 가졌으나 용렬하였으니, 부랑은 그들을 가리켜 이렇게 말한 것이었다. 이를 들은 석법태는 부랑의 예상치 못한 독설에 얼이 빠졌다. 이처럼 부랑은 남의 기분을 전혀 헤아리지 않고 폄하하는 말을 하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태보 사안은 연회를 열 때면 부랑을 꼭 초대하였는데, 조정의 명사들 또한 항상 사안의 연회에 참석하여 부랑과 나란히 자리에 앉아 술을 나눠 마셨다. 자존감이 넘쳤던 부랑은 매번 그 자리에서 스스로를 과시하기 위해 어린 아이를 무릎 꿇린 상태로 입을 벌리게 한 뒤 안에 침을 뱉고, 그 아이에게 명하여 자신의 침을 입에 머금은 채로 밖에 나가서 그것을 뱉게 하였다. 이 모습을 본 좌중의 사람들은 부랑에 비하면 스스로 아직 많이 멀었다 느꼈다고 한다.
부랑은 미각도 뛰어나 미묘한 짠맛과 신맛, 고기맛을 잘 구분하였다. 한번은 회계왕 사마도자가 그 소문을 듣고 강동에서만 나오는 식재료를 이용한 진수성찬을 차려 부랑에게 대접하였다. 부랑이 식사를 마치자 사마도자가 물었다.
"관중(關中)의 음식은 이것과 비교하면 어떠한가?"
부랑이 답했다."다 좋으나 소금을 조금 덜 넣으셨습니다."
이에 사마도자가 재부(宰夫)를 불러 확인하니 과연 그러하였다. 또, 어떤 이가 닭을 죽여 요리하고, 그 음식을 부랑에게 권했는데, 부랑이 그것을 검사하고는 말하길"이 닭은 늘 낮만큼은 밖에서 노닐게 하였구나."
라 하였다. 이에 조사해보니 과연 그와 같았다. 부랑은 거위 고기를 먹으면 그것이 흰 색인가 검은 색인가를 맞췄으며, 부랑이 미리 기억하고 답변하는 것이라 의심했던 사람들도 있었으나, 그들도 결국 여러 번 시험하고 기록을 대조한 끝에 결국 믿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당대 사람들은 부랑을 가리켜 미식가라 칭하였다.태원 14년(389년) 9월, 왕국보가 부랑을 참소하여 처형당하게 하였다. 부랑의 처형날이 정해질 무렵에 왕침은 형주자사에 임명되어 부임해야 했음에도 부랑의 처형식을 두 눈으로 구경하기 위해 인사를 미루면서 수도에 남았다. 부랑은 처형 직전 그 태도나 얼굴빛이 평소와 다름이 없었고, 그 자리에서 시까지 지어 읊었다. 생전에 노자, 장자의 주장을 논한 《부자(苻子)》 10여 편을 저술하여 세상에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