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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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王忱(? ~ 392)
동진의 인물. 자는 원달(元達). 아명은 불대(佛大). 병주 태원군 진양현 사람. 왕탄지의 사남이지만 세 명의 형들보다 먼저 죽었다.
2. 생애
약관의 나이로 이름이 알려져, 같은 태원 왕씨 가문의 친척인 왕공, 왕순(王珣)과 함께 명성을 떨쳤고, 표기장군 사마도자의 장사로 임명되어 관직에 진출했다. 한번은 왕침이 외삼촌 범녕을 만나러 갔는데, 그때 범녕의 집에서 초면인 명사 장현지(張玄之)와 우연히 만주치게 되었다. 범녕은 왕침에게 인사하라 시켰고, 장현지도 정좌하여 옷깃을 여미면서 왕침이 말 걸기를 기다렸으나, 옷깃을 다 여밀 때까지 왕침은 말을 걸지 않았다. 이에 장현지는 실망하여 범녕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범녕이 왕침을 다그쳤다."장현지는 오 땅의 뛰어난 인물이거늘, 어찌하여 그와 대화를 나누지 않았느냐?"
그러자 왕침이 웃으며 대답했다."만약 장조희(祖希, 장현지의 자)가 저와 서로 알고 지내길 원했다면 스스로 먼저 제게 말을 걸었을 것입니다."
범녕이 말했다."네 풍류가 높고 뛰어나니, 너야말로 진정 나중에 나타난 수재로구나."
왕침이 말했다."외삼촌 같은 인물이 아니었다면 이런 조카가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이후 범녕이 장현지를 찾아가 왕침과 나눈 대화를 전하니, 장현지는 깨달은 바가 있어 관과 허리띠를 똑바로 메고 예를 갖추어서 몸소 왕침을 만났다. 왕침도 주인으로서 손님을 모시는 예를 다하며 장현지를 극진히 대접했다.태원 14년(389년) 9월, 형주자사, 도독형익녕3주제군사(都督荊益寧三州諸軍事), 건무장군, 가절에 임명되었다. 왕침은 자신의 재능을 믿고, 탄절(誕節)을 기념해 열린 연회에서 방자하게 술을 많이 퍼마셨다. 이를 본 주변 사람들은 젊은 나이에 방백(方伯)의 지위에 오른 것이 오만함을 불러일으켰다며 장차 형주의 앞날을 걱정하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왕침은 형주에 도착하자마자 진지하고 엄숙한 정치를 행하면서, 뭇 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고 지역도 잘 다스렸다.
당시 환현은 자신의 봉국 치소를 강릉(江陵)에 두고 있었는데, 오랜 기간 형주를 통치한 환씨 가문의 명망에 기대어 상당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왕침은 상명(上明)에 있던 형주자사 치소를 강릉으로 옮기고 매번 그를 억제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 한번은 환현이 왕침을 만난답시고, 수레를 몰아 그대로 문을 통과해 치소 안까지 들어온 적이 있었다. 그때 왕침이 나와 환현을 반기기는 커녕, 수레를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환현 앞에서 문을 지키던 관리들을 채찍질하니, 환현은 노해 바로 치소를 떠났다. 왕침 또한 떠나는 환현을 만류하지 않았다. 얼마 후, 환현이 왕침을 골탕먹일 심산으로 찾아와, 사냥 나갈 예정이라며 관군 수백 명 정도 빌려달라 청한 적도 있었다. 왕침이 그의 청을 순순히 승낙하자, 당연히 거절할 것이라 예상했던 환현은 예상 외의 반응에 두려워, 그 뒤로 함부로 설치지 않았다.
태원 17년(392년) 10월, 재직 중 사망하니, 조정에서 그를 우장군으로 추증했다. 시호는 '목(穆)'.